법정스님

무심(無心) - 길상사 회주 법정스님

수선님 2021. 5. 23. 11:00

무심(無心) - 길상사 회주 법정스님


비오는 날 절에 오시느라고 힘들었겠습니다. 차 세울 곳도 마땅치 않고 장소도 협착한데 또 이렇게 만났습니다. 올해는 장마가 일찍 오는가 봐요. 그래서 저도 장마철에 땔나무를 몇일 전에 나무칸에 들여놓았습니다. 해마다 철마다 되풀이되는 장마이기에 때문에 미리 대비해야 될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이와같은 형식적인 대중법회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의례적인 모임에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떠버리고 있지만 제 성에도 차지 않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 마주 바라보면서 묻고 대답하는 그런 과정에서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모임이 그립습니다. 길상사는 형편상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비오는 날 이렇게 텐트 속에 앉혀 놓고 여기 저기 설법전에도 앉혀 놓고 저 혼자 떠벌이고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성에 차지 않아요. 진짜 좋은 법회라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 마주 앉아 주고받아야 돼요. 삶에 대한 얘기를 하고 거기서 인생의 길을 찾아야 되는데, 저 혼자 떠벌입니다.

참으로 뜻 있는 만남과 모임은 결코 좋은 말을 많이 늘어놓는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침묵 속에서 마주 바라보고 서로 귀 기울이고 같이 느끼면서 존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자리에 진정한 만남과 모임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천5백여년전 부처님과 제자들이 모여서 주고받은 이야기가 경전으로 결집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경전을 보아도 부처님 혼자 말한 집회는 없었습니다. 거기 모인 대중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지요. 법회에 나오면서 법회의 형식에 대해서 생각해본 바가 있어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언젠가 시절인연이 오면 그런 모임을 갖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정보화사회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안방에 앉아서 그때그때 세상을 환히 꾀뚫고 있어요. 예전 같으면 한 생애를 통해서 겨우 도달할까말까 하는 그런 지식과 정보를 짧은 시간 안에 얻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 있는 장면이 미국이라든가 어디서든지 동시에 들을 수 있데요. 그런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넘치는 정보 속에서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되요.
그 많은 지식과 정보를 지니고 누리면서 과연 행복한가? 물론 정보와 지식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정보와 지식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는 불필요해요. 정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음식과 같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을 하게 되면 소화를 시킬 수 없습니다.

정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정보는 유해합니다. 사람을 병들게 만들어요.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는 것이 도리어 근심을 가져온다는 말이지요. 모르면 모르는데로 편했을 텐데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가 아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의식은 갈래갈래 분산이 됩니다. 우리의 의식, 두뇌가 쓰레기통 같이 되는 것입니다. 되는 것 안되는 것 여기저기 집어 넣다보니 감당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넘치는 정보 속에서 안정된 마음, 편안한 마음, 맑은 마음 갖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불행해요. 언젠가 중앙정보부 최고 책임자가 한 이야기입니다. 시시콜콜한 남의 사생활까지 최고 책임자가 알 것 아닙니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들의 의식이 너무 많은 정보를 가지면 안정이 안됩니다. 불안정합니다. 걸핏하면 카드빚 갚기 위해서 한탕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그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마음의 본 바탕인 무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지난 결제날 황벽선사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황벽선사가 배휴거사와 주고받는 문답이 이야기되었고 전신법요라는 어록으로써 전해집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도 못하다. 왜냐하면 무심자에게는 온갖 분별과 망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비싼 법문이 42장경에 나옵니다. 황벽선사가 이 법문을 했을 때 42장경을 참고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유심히 음미하십시오. 은 듯 들으면 무심도인이 부처님보다 뛰어난 존재처럼 들려도 무심도인이나 부처님이나 그 경계가 다르지 않습니다. 무심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비유를 씁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이런 표현에 붙잡히거나 속아서 안됩니다.
황벽선사는 같은 법문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갠지스강의 모래에 대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강가의 모래는 부처와 보살과 제석천이 밟고 지나가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소나 양 벌레들이 밟고 지나가도 모래는 조금도 화내지 않는다. 진기한 보배와 향료가 쌓여 있을지라도 모래는 탐내지 않으며 똥·오줌 악취에도 모래는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은 무심을 통달한 마음이다.>

이는 분별을 다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황벽선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도를 구하는 사람들이 지금 당장(이 자리) 무심하지 않는다면 무량겁을 지나더라도 끝내 도를 이룰 수 없다.> 도를 이루려면 무심해야 합니다. 어떻게 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니 달마스님이 밖으로 모든 반열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거리는 것이 없이 마음이 곧 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요. 마음이 무심해야 합니다. 따로 들어갈 것 없이 무심한 그 마음이 도 입니다. 그것이 곧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원래 청정한 우리 마음입니다. 중생의 마음이나 부처의 마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분별이 있으면 중생의 마음이고 분별을 거두고 본래 청정한 마음이 부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무심이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아무 것도 담아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텅빈 항아리와 같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에 담아둔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항아리 처럼 비어 있는가 뭘로 가득 채워져 있는가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경전이나 법문을 들을 때 남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 현실로 받아드리십시오. 그래야 나에게 이로움이 있습니다.
내 자신도 내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가 인간관계에 소원한 일에 꽁하고 지니고 있지 않는가 혹은 누구를 원망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것이 다 분별 망상인 것입니다. 그런 불별 망상 때문에 우리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입니다. 늘 한 생각 돌이키는 습관이 들여야 합니다.
저는 그래요. 마음에 갈등이 생기면 본래무일물, 본래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면 마음이 그냥 편해져요. 물건만이 아닙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홀로 나오지요. 빈 손으로 나오지요. 살만큼 살다가 하직할 때도 혼자 가고 빈손으로 가지요. 시작과 끝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어지간한 일은 다 극복할 수 있어요.
좀 서운했던 일, 좀 화났던 일. 문제가 아닙니다. 스치고 지나가는 일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을 통해서 한고비 한고비 넘기고 인간적으로 성숙해 가는 거지요.
완성이 어디 있습니까.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가는 건데, 그래서 망삭하라. 짐을 내려 놓으라. 방하착. 그래야 내 마음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걸 황벽 스님의 말로 하면 본원 청정심이라고, 청정불이라고도 하고 모든 분별이 떠난 청정한 때묻지 않은 아주 맑고 투명한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분명히 보려면 어디든지 얽매임이 없는 텅 비어 있어야 해요. 가령 그림을 볼 때, 가구를 볼 때, 아무런 선입관념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구라든지 그 그림의 실체, 아름다움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선입관 누가 만들었고 어떤 재료로 만들었고 값은 얼마 가겠고 이렇게 따지게 되면 그 물건이 지니고 있는 본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직관력이란 것은 선 듯 보는 첫눈에 보는 그것입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첫 인상 그것 중요해요.
그런데 평소에 마음 비운 첫 인상이 되어야지 무언가 게재되면 첫 인상은 잘못된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첫 인상 때문에 한 세상 신세 망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눈 바짝 떠야 돼요. 자기 본래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분별, 망상, 밖에 것들에게서 해방되라는 것이지요. 자기 안을 늘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자기 발뿌리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보려면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텅 비운 마음으로 보아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아야 합니다. 텅 비워야 그 안에 울림이 있어요. 무심하라니까 바보 등신처럼 있으란 말 아닙니다. 무언가 담아둔 것을 비우란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불교 용어로 진공무유(眞空妙有)라고 합니다. 또는 진공무용(眞空妙用)이라고 합니다.
옛날 어떤 스님이 천수경 주력을 해서 신통력이 생겼어요.
그런데 경전을 잘 아는 어떤 강사가 들으니까 천수경을 외워도 앞뒤가 맞지 않게 외우니까 지적을 해주었지요. 그 뒤로 신통력이 없어졌지요. 그전에는 열심히 믿고 삼매경에 빠져서 사물을 알아차렸는데 이 후로는 분별이 생긴 것이지요. 이렇게 되니 순수하게 몰입할 수 없었지요.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무심히 할 때는 잘 되요. 그런데 전시회에 낸다, 누구에게 준다 이런 부담 때문에 그림과 글씨가 제대로 안되죠. 벌써 무심이 아니니까 그래요.
무심의 경지에서 하는 것은 바른 것이지요. 분별이 들어가면 제대로 안되죠. 세상에서 하는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중노릇이죠. 바느질 열심히 하는 사람들. 이걸 하면 돈을 얼마 받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면 바느질이 제대로 안됩니다. 아무 분별이 없으면 그 자체가 기쁜 것입니다. 삶의 몫이지요. 삶의 내용입니다. 아무런 욕심없이 바느질을 하면 잘 되지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가 한 일에 보람을 느끼죠. 무슨 일이든 그렇습니다.
그 일에 전력을 다 하면 그 일도 잘되고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요. 무슨 일이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재미를 느끼지요. 재미를 갖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결과도 좋아요.

많이 안다는 것은 더 구할 것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달마대사 24행록에 무소구행. 더 구할 것이 없는 행 뭔가 더 구할 것이 있으면 채워야하니깐 더 보태고 덜어낼 것이 없어야 합니다. 더 보태고 들어낼 것이 있다는 것은 불안한 것입니다. 도인이란 일 없는 사람 무사인(無事人)이라고 합니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걸림이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일이 나를 구속하지 않아요. 아무 분별이 없기에 그 일 자체에 삶의 내용으로 알고 기쁨으로 알기 때문에 무심히 할 뿐입니다.

배휴 장관이 황벽선사에게 이렇게 물어요. <자재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황벽선사께서 <하루종일 밥을 먹더라도 한 톨의 밥알을 씹지 않으며 하루종일 걷더라도 한걸음도 옮기지 않는다. 이왕 같은 때 너니 내니 상이 없으며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그 경계에 팔리지 않아야 자재인이라 할 수 있다>
육조스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금강경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어디에도 머문 바 없이(어디에도 집착이 없이) 그 마음을 내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하는 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입니다.

황벽스님의 제자가 임제스님 이지요. 임제스님에 이르면 과격한 표현으로 자유인을 이야기 합니다.
무의진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참사람. 스승 황벽은 마음을 문제 삼고 있지만 제자인 임제 스님은 사람, 자유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으려면 사람으로부터 미혹 받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쪽쪽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래야만 해탈로써 자유자재하리라>
죽이라는 말은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부처나 보살은 귀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그기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부모나 친척은 유교윤리의 기본이니 그런 틀에 갇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부처를 개발하고 내 안에서 조사를 일깨우고 내 안에서 아라한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뛰어넘으라는 것입니다. 이미 굳어진 존재는 부처나 조사라 하더라도 생명력이 없습니다.

부처나 조사라도 현재 살아있는 자기 자신 안에서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부처나 조사라도 졸개, 복사 품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임제 스님의 어록에는 <이와 같이 하는 내 말에도 얽매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교의 묘미가 있습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교주를 죽이라고 하면 당장 화형감 이지요. 불교의 톡특한 모습이지요. 이런 것을 잘못 받아드리면 무례한 언동으로 되지만 진짜 알고 무심히 상요한다면 조금도 문제되지 않고 부처님의 뜻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말에 팔리지 말고 말의 숨은 뜻을 안다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 각자 생각해보세요. 저도 가끔 질문을 받아요. 스님, 무슨 재미로 산골에 혼자 지내십니까 하고요. 답은 시냇물 길어다 차 다려 마시는 재미로 삽니다. 이게 엉뚱한 소리가 아닙니다. 내 혼자 산골에 살면서 차도 못마시면 얼마나 빡빡 하겠어요. 한 잔의 차를 통해서 삶에 대한 고마움, 출가 수행승이 된 고마움, 이런 것을 느끼게 되요. 요즘은(최근에) 한밤중에 깨어나서(1시쯤 되서) 조용히 벽에 기대어 밤 시냇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낮에 듣는 소리와 달라서 시냇물 소리에 귀를 맡겨두면 재미로 누리고 있습니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세요. 우리가 한평생 60년을 산다면 20년은 잠으로 지내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요. 시간의 잔고는 많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든지 24시간이 주어진 시간의 알맹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남보다 인생의 몇 곱을 살 수 있고 형편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입니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잠자는 시간은 휴식이라 하지만 한도를 넘으면 죽은 시간입니다.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그의 인생을 그 만큼 많은 삶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미를 찾으세요. 그러면 세상은 살아갈 만 세상이 됩니다.

끝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하겠습니다.
숫타니파타의 <성인의 장>

홀로 행하며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으며 무심의 실체가 있습니다.

 

 

 

 

 

 

 

 

길상사 - http://www.kilsangsa.or.kr/

[출처] 무심(無心) / 법정스님|작성자 둘이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