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법정스님
이 법문은 2009.4.19 길상사 봄 법회에서 하신 법문을 변택주님이 정리한 것입니다.
눈부신 봄날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애에서 이런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때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늘 고맙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언젠가는 제가 이 자리를 비우게 되리란 걸 예상하게 됩니다. 오늘 만남을 고맙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길상사, 여기는 연등이 너무 많이 걸려서 꽃과 잎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데, 꽃을 머금은 나무와 풀들은 이 봄을 맞아 저마다 자기 꽃을 활짝 펼치고 있습니다.
나무들은 처음 잎을 내보일 때는 저마다 특성에 따라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자기 빛깔을 내뿜습니다. 한참 지나면 초록은 동색이 되지만, 처음 잎을 펼칠 때는 그 나무가 지닌 독특한 빛깔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가지마다 새로 돋는 잎들이 제 나름 특성을 마음껏 내뿜으면서 찬란한 봄을 이루고 있습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입니다. 흔히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입니다. 꽃이 없는 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봄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지구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침묵의 봄’을 두려워합니다. 요즘처럼 세계가 과소비로 치닫는다면 언젠가는 ‘침묵의 봄’이 올 것입니다. 해마다 계절을 맞지만 자꾸 달라집니다. 올해만 하더라도 벌써 여름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 늦은 봄까지도 눈이 내립니다. 예상할 수 없이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꽃은 우연히 피지 않습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서 그저 꽃이 피고 지는 것 같지만,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는 그 바탕에 인고 세월, 참고 견디는 그런 세월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모진 추위와 더위, 혹심한 가뭄과 장마, 이런 악조건에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온 나무와 풀들만이 시절인연을 만나서, 참고 견뎌온 그 세월을, 꽃으로 또는 잎으로 펼쳐내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꽃과 잎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무슨 꽃을 피우고 있는지 저마다 한 번 살펴보십시오. 꽃이나 잎만 바라볼 게 아니라 내 자신은 어떤 꽃과 잎을 펼치고 있는지 이런 기회에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꽃으로 피어날 그 씨앗을 일찍이 뿌린 적이 있었던가?’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들을 열어 보입니다. 준비가 없으면 계절을 만나도 변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준비된 자만이 계절, 시절인연을 만나서 변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저 혼자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가 보기 좋고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가 볼만합니다. 또 복사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환상이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그 꽃 자태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남은 여백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습니다. 복사꽃을 가까이서 보면 비본질 요소 때문에 본질이 가려집니다. 봄날 분홍빛이 지닌 환상미가 반감되고 맙니다. 복사꽃은 멀리서 봐야 분홍빛이 품어내는 분위기를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배꽃은 가까이서 봐야 배꽃이 지닌 그 맑음과 뚜렷한 윤곽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꽃이나 사물만 아니라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두고 그리워하는 그런 사이가 좋을 때가 있고, 때로는 마주앉아 회포를 풀어야 정다워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사이라 할지라도 늘 한데 엉켜있으면 이내 범속해지고 시들해지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주어야 그 우정이 시들지 않습니다. 휴대폰과 인터넷이 넘치는 세상이라서 뭐든지 단박에 이루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참고 기다릴 줄 모릅니다. 뜸들일 줄 몰라요. 뭐든지 즉석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물을 볼 때 사람은 제 스스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높은 산 낮은 산 할 것 없이 산마다 산 벚꽃이 아주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이르는 이 계절, 온 국토에 산 벚꽃이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산 벚꽃을 보면서 나무 지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자연 조화와 신비 앞에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식물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 붙박이로 살아가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한 치도 옮겨갈 수 없기 때문에 꽃과 씨앗으로 자기 공간을 넓혀갑니다. 산 벚꽃은 사람 손으로 심어 가꾼 나무들이 아닙니다. 사람 손으로 심어 가꾼 나무들이라면 자연스러울 수 없습니다. 줄을 맞춰 심었거나 무언가 역겨울 텐데, 자연이 뿌려놓은 나무들이기 때문에 조화롭습니다. 산 벚꽃 자신이 꽃과 씨앗으로 펼쳐놓은 것입니다. 향기로운 꽃은 벌들을 불러들여 열매를 맺게 하고, 버찌가 지닌 달짝지근한 맛은 벚나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새를 불러들이기 위해 그런 조화를 부리고 있습니다. 새들은 그 버찌를 따먹고 소화되지 않는 씨앗을 여기저기 배설해놓습니다. 배설된 씨앗에서 움이 터서 온 산에 벚꽃을 피운 것입니다. 여기 자연 조화와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식물들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 또한 봄날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절이 봄이 되니까 변성기에 접어드는지 목이 자꾸 쉬려고 해요. 목이 컬컬해서 오면서 차 속에서 몇 번 고함을 질렀는데, 제 목소리 같지가 않아요. 양해해 주십시오. 사람이 철이 들려면 그렇게 목소리도 변하고 그런 가 봅니다.
불자들이 버릇처럼 가장 많이 외우는 천수경 있지요? 천수경. 절에 의식이 있을 때마다 천수경, 반야심경을 빼놓지 않고 외우지 않습니까? 뜻을 생각하며 외우면 좋은 법문인데 건성으로 따라 외우는 폐단이 있습니다. 천수경 도량찬. 도량을 찬탄하는 대목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도량청정무하애 삼보천룡강차지’, ‘도량이 맑고 깨끗해서 더러움이 없으면, 불법승 삼보와 천룡팔부 신장이 이 도량에 오신다.’ 이런 뜻입니다. 줄여서 말하면 청정도량에는 도량신이 상주한다는 뜻입니다. 절에는 어느 절이나 그 도량을 보살피고 지키는 도량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에요.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도량신이 그 도량에 사는 사람이나 그 도량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낱낱이 보살피고 지킵니다. 신앙심이 지극한 사람들은 일주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도량이 지닌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어요. 식이 맑은 사람들, 정신이 맑고 투명한 사람들은 어떤 절이든지 그 도량에 들어서자마자 그 절 나름 분위기나 신성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차를 타고 들어오지 않고 걸어 들어와야 느낄 수 있어요. 도량신은 그 도량에 필요한 존재는 사람이건 나무건 그 도량에 머물도록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도량에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는 거부해요.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도량신은 그 도량에 필요한 존재는 사람이건 나무건 뭐든지 다 받아들이는데, 그 도량에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는 거부합니다. 이런 현상은 굳이 문헌을 들출 것도 없이 반세기 남짓 크고 작은 도량 은혜를 입고 살아온 제 자신 체험에서 나온 진실입니다. 개인 의지만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도량신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도량을 주관해요. 그 도량신의지가 개인의지에 작용해서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듭니다.
승가 생명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청정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불을 올릴 때 ‘지심귀명례 청정승가야중’ 하지 않습니까? 승가 생명력은 청정성에 있어요. 청정성은 진실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승가 생명력은 청정과 진실에 있습니다. 길상사를 가리켜 ‘맑고 향기로운 근본도량’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이 절이 맑고 향기로운 도량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 절에 사는 스님들과 신도들, 절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불자들은 삶이 저마다 ‘맑고 향기로운가? 맑고 향기롭게 바뀌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맑음은 개인이 지닌 청정과 진실을 말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과 진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 메아리입니다. 이 도량에서 익히고 닦은 기도와 정진 힘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이나 이웃에게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때때로 점검해야 합니다. 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절이 생기기 이전에 수행이 있었어요. 그러니 절이나 교회를 습관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절에 다닌 지 10년, 20년 됐다는 신도들을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버릇처럼 절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분들은 절 재정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신앙 알맹이는 소홀해요. 절이나 교회를 습관으로 다니면 안 됩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종교는 마약이다.’이런 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깨어있어야 해요. 내가 왜 오늘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에게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바뀝니다. 삶은 바뀌지 않고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그 절이나, 교회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무엇 때문에 절에 나가는지,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지 그때그때 냉엄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성에 젖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길상사가 생긴 지 십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여러 불자들 신심과 정성으로 현재와 같은 절이 됐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건물은 다 한때 있다 없어지는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습니다만, 절이 있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건물이 있기 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도량에 사는 사람과 도량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여러분 삶이 맑고 향기롭게 바뀌어야만 비로소 도량다운 도량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스님들은 한때 머물다가 떠나가는 나그네들이에요. 출가한 스님들은 원래 자기 집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 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은 개인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가불자들은 자신뿐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면서 그 도량을 가꾸면서 보살핍니다. 표현을 달리하면 신앙심이 지극한 여러 불자들이 곧 그 도량 수호신입니다. 이런 도리를 분명하게 알아두십시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길상사도 이젠 안팎으로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이 도량에 인연 맺은 여러분 삶이 저마다 맑고 향기롭게 바뀌어야만 이름 그대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재가불자들이 승가에 귀의한 것은 그 청정성 때문입니다. 청정성이 승가 생명력입니다. 스님들과 친분이 있다고 해서 세속인정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흔히 ‘나만 믿고 살라’며 신도들에게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나만 믿고 살라는 거예요. 중, 믿을 거 못돼요. 부모나 형제, 저희 집도 버리고 떠나온 놈들을 어떻게 믿어요?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믿을 게 따로 있지 그런 소리에 속지 말라니까요. 그건 불교가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 살아야 합니까?”하는 물음에 부처님께서는 ‘나만 믿고 살 거라.’ 이런 소리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자귀의법귀의”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법을 등불 삼으라.” 법이라는 것은 진리에요.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 “자귀의법귀의, 자등명법등명” 이게 근본입니다. 그 밖은 다 허상이에요. 여기에 불교 참 면목이 있습니다. 냉혹한 것 같지만 사실이에요. 다른 것은 다 허상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기댈 곳은 자기 자신. 본질인 자아, 자기 자신과 진리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 그 밖에는 다 허상입니다.
이 눈부신 봄날! 새로 피어난 꽃과 잎을 보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저마다 이 험난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참고 견디면서 가꿔온 그 씨앗을 이 봄날에 활짝 펼쳐 보기 바랍니다. ‘봄날이 간다’는 노래도 있죠?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지나갑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는 새로이 돋아나는 꽃과 잎들이 전하는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듣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출처 : 길상사 홈페이지
[출처]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 법정스님|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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