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6. 성암석구 -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수선님 2021. 7. 4. 11:00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⑥ 성암석구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동안거 해제이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고 있다.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는 무상(無常)의 도리를 확인하는 시기이다. 분초를 쪼개 치열하게 수행하며 후학을 인되杉� 한 스님이 있었다. 높은 학식에 자만하지 않고 참선과 자비행을 실천한 성암석구(性庵錫九, 1889~1950) 스님의 삶을 원로의원 성수(性壽)스님의 증언을 통해 복원했다.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일일부작 일일불식’ 백장청규 지켜
   참선 정진 자비실천으로 후학 인도

 

<사진> 성수스님이 주석하는 함양 황대선원에 모셔진 성암스님 진영. 성암스님의 유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거지야 따라 오너라”


○… 풍요로운 농사를 위해 만든 저수지가 3년 만에 터지는 참담한 일을 겪은 뒤 집을 나왔다. “내가 그릇이 작아 주민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더 이상 살수 없다. 다음에는 큰 그릇이 되어 태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금강산을 찾았다.

 

비로봉에서 식음을 끊은 지 20일째 되는 날. 가사 장삼을 수하고 부처님께 합장하는 모습이 꿈인지 생시인지 스쳐갔다. 그길로 마음을 돌리고 금강산 장안사로 향했다.


거지나 다름없는 몰골로 절 마당에 들어섰다. “당신 같은 사람 받을 수 없소.” 쫓겨 날 처지였다. 보다 못한 의룡스님이 “거지야. 가지 말고 따라 오너라”며 거두었다.

 

성암스님은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각각 3일간 부목과 공양주 소임을 본 후 <능엄경>을 익혔다. 총기가 있어 금세 외우자 대중들이 “저 놈 때문에 우리가 구실을 못한다”며 시기하고 질투했다. 산문을 나선 스님은 바위 아래서 열흘간 울다가 깨달음의 경지를 맛 보았다.


“내가 설 땅이 없구나”


○… 무심도인으로 유명한 수월(水月)스님이 북방에 머문다는 소문이 들렸다. 독립군이 보낸 공양주와 부목이 수월스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금강산을 출발해 한번 절하고 한 걸음씩 내 딛으며 북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두달 17일이 지난 뒤 수월스님을 친견했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어리석고 멍청하고 모자라 보이는 수월스님 모습에 “속았구나”라며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남몰래 세 시간을 울고 난 스님은 “내가 눈이 어두워 도인을 못 알아보았구나”라며 생각을 고쳤다. 그 뒤로 화장실이든 밭이든 수월스님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 다니며 절을 했다. “도를 가르쳐 줄 것”을 간청했지만 수월스님의 말은 단 한마디. “저 미친 놈이 왜 따라 다니며 절을 하나.”


한 달 반이 흘렀다. 부목이 “밥이 질다”고 공양주를 탓하는 소리를 듣고는 “밥이 질은 것은 부목이 불을 잘못 지펴서”라며 참견했다. 이를 본 수월스님이 “신이나 닳게 하려고 다니는 놈이구나. 지 공부하러 온 놈이 부목하고 공양주 걱정은 왜 하느냐”고 경책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성암스님은 “삼천대체 세계에 내가 설 땅이 없구나”라며 마음 찾는 공부에 집중했다. 3년간 묵언 정진했다.


안하무인 유생들에 ‘한방’


○… 유생들의 등살에 스님들이 제대로 살기 어려워 3년째 비어있는 부석사 주지를 맡게 되었다. 절에 온지 이틀째 되는 날 안동에 사는 유생 20여명이 법당 앞 누각서 술판을 벌였다. 돼지도 한 마리 잡고 기생도 다섯 명이나 데려왔다. 스님이 부목을 통해 “법당 앞에서 놀지 말고 아래 누각으로 옮겨서 노시오”라 권했지만 무시당했다. 보다 못한 스님이 누각 앞에 섰다.

 

한 유생이 “사내무화하소견(寺內無花何所見)고?”라며 놀렸다. “꽃(여자)도 없는 절에서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희롱이다. 스님은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사내미화불견자(寺內美花不見者)로고.”

“절 안의 아름다운 꽃(부처님의 세계)을 못 본 놈이로구나”라는 뜻이다.

 

스님에게 일격을 당한 유생들의 말투가 누그러졌다.

“대사는 어디서 오셨소.”

“나는 금강산에서 왔는데, 댁들은 뉘시오.”

“우리는 유자(儒者)요.”

 

“공자 그 사람 나쁜 사람이구먼.” “어른을 욕하면 되겠소.”

“여보게, 손자가 잘못하면 할애비가 욕 먹는 것이오.”

 

한방 더 먹은 유생들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뒤로 “부석사에 있는 성암스님에게 ‘여보게’라는 말이나 안 듣는 양반 좀 되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게으르면 소화가 되겠느냐”


○…스님은 허송세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시은(施恩)과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스님은 누구보다 솔선하여 일했다. 비 오면 헛간에서 새끼 꼬는 일을 할 정도로 시간을 아꼈다. 간혹 “소화가 안 된다”는 말이 들리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얼마나 게으르면 소화가 안 되겠느냐”는 경책이다. 주지로 있던 천성산 내원사의 대중들은 각자 지게 한개, 낫 한개, 호미 한 개씩 지정돼 있었다. 그날 정해진 일을 마치지 못하면 공양은 굶어야 했다. 자정(子正)이면 일어나 오후 9시 잠자리에 뜰 때까지 참선과 울력으로 하루를 보내며 치열하게 정진했다.


“온 일 없는데 어디 가느냐”


○…몸이 불편해 통도사 감로당서 쉴 무렵이다. 소식을 들은 한 스님이 문병을 왔다. “이러시다 가지 마시오.” 성암스님은 큰소리로 답했다. “이 늙은 중아, 온 일이 없는데 가기는 어디로 간단 말이오.” 마음 상한 스님이 “그럼 갈 때 잘 가시오”라며 방을 나섰다. 성암스님이 한마디 더했다. “일평생 수도한 중이 가고 오는 도리를 모르고 사니 절집 꼴이 말이 아니다.” 생로병사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가르침이었다.


“상좌 여럿두면 그만큼 지옥”


○…“상좌를 여럿 두면 그 만큼 지옥이 여럿 생기는 것”이라 했던 성암스님은 자리에 누운 지 3일째 되는 날 유일한 상좌 성수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을 불렀다. “저 산 바윗돌 위에 이 몸 벗어두어 까막까치들에게 내 몸을 공양시키려 했는데 마음대로 못하고 자네 신세만 지는구먼. 내가 먹기도 귀찮고 자네도 가져오기 힘드니, 피차 귀찮은 일 오늘부터 그만두세.” 스님은 상좌 손을 잡고 마지막 가르침을 전했다. “심산(深山) 계곡에 흐르는 물처럼 살아라, 물은 천년만년 가도 변치 않는다.” 12시간 뒤 스님은 평온하게 원적에 들었다.


함양=이성수 기자

 

 

<사진> 스님이 출가한 금강산 장안사. 일제강점기 모습.

■ 행 장 ■


장안사 의룡스님에게 출가
수월 혜월스님 찾아 ‘정진’


스님은 눈물이 많았다. 부처님 법을 만났을 때는 물론, 가르침을 받았을 때와 깨달음을 성취했을 때도 눈물을 보였다.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지닌 어른으로 자비롭고 정이 많았다. 하지만 화두를 참구하고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는 모자람이 없었다. 생명걸고 정진했으며, 생사의 오고 감에 장애가 없었다. 스님은 1889년 2월3일(음력) 강원도 삼척군 소달면 신리(지금은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위오. 모친은 남양 홍씨. 속명은 석구(錫九)이다. 11세에 <사서삼경>에 능통했을 만큼 총명했다.


17세에 저수지를 축조하여 고향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홍수로 가옥과 전답이 유실되는 참상을 겪고 고향을 떠났다. 금강산에서 목숨을 버리려 했다가 불문에 들 것을 결심했다. 이때가 21세로 은사는 장안사 주지 의룡스님. 장안사 명심강원의 동오강백(東旿講伯) 문하에서 경학을 연찬했다. 수월스님을 친견하기 위해 북방으로 떠났다. 수월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후 남방으로 내려와 경허스님 둘째 상좌인 혜월(慧月)스님에게서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45세에는 오대산 월정사 주지로 대중을 외호했다. 유생들의 횡포로 폐사 직전에 놓인 영주 부석사 주지를 49세에 맡아 학식과 덕망으로 유생들을 감복시켰다. 58세에 천성산 내원사 선원에 주석하며 전답을 경작하고 산림을 조성하는 등 백장청규를 실천했다. 1950년 1월27일(음력) 원적에 들었다. 세수 61세, 법납 40세. 부도와 비는 양산 통도사에 모셨다. 경봉(鏡峰)스님과 운봉(雲峰)스님이 가까운 도반이다.


한편 은사 현의룡(玄懿龍) 스님은 자세한 행장이 전하지 않는다. 1922년 5월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 30본산 주지총회에서 감사로 선임된 기록과, 1928년.1929년 조선불교승려대회 명단에 나와 있다.

 

■ 망월사 결사 결제 법문 ■ 

 

성암스님은 40세 되던 해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좌 30명과 3년 결사를 했다. 열흘에 한 번씩 묻고 한 달에 한 번씩 탁마하며 정진했다. 3년 결사 당시 성암스님의 결제 법문이다.


古佛古祖 無師僧 (고불고조 무사승)
是會大衆 自悟自得 (시회대중 자오자득)
修行衲子 不信佛祖 (수행납자 불신불조)
今日今時 受大苦勞 (금일금시 수대고로)
自性未見 受苦重大 (자성미견 수고중대)
自悟自得 萬苦免罪 (자오자득 만고면죄)


“경허노사도 무사승이고
수월 혜월 스님도
스승 만나기 이전에 자오자득에서 점점 많은 선지식을 찾았다.
싯달태자도 자오자득했고,
원효나 지공 나옹 무학 모두가 자오후 발심 수행하셨다.
고인(古人)들 모두가 한결같이
자오후가 더 어려움을 알고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출처 : 불교신문 2402호/ 2008년 2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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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6. 성암석구 -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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