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1. 봉하장조 - 드높은 학덕과 수행을 미소 속에 감추었다

수선님 2021. 8. 29. 11:24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1. 봉하장조

드높은 학덕과 수행을 미소 속에 감추었다

 

 

조선말에 태어나 내외전과 신구학문을 두루 겸비한 봉하장조(峰霞長照, 1887~1978)스님은 ‘엘리트’였음에도 수행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신학문을 배운 많은 출가자들이 사문의 길에서 멀어졌지만, 장조스님은 출가 본사인 백양사 주지를 28년간 지내며 도량을 외호했다. 말과 글이 아닌 미소를 남긴 채 원적에 든 스님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드높은 학덕과 수행을 미소 속에 감추었다”
  내  외전 신구 학문 두루 ‘겸비’
  종이 한장도 불전 올린 뒤 사용

 

 

<사진> 장성 백양사 진영각에 봉안된 장조스님 진영.

○…장조스님은 학문에 관심이 깊었다. 고향에서 통사(通史)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치고 출가한 후에도 함양.동래.합천.양산 등 스승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공부했다. 1902년 6월 백양사 환응(幻應)스님 문하에서 사미와 사집 공부를 시작해 1919년 불교중앙학림을 졸업할 때까지 17년간 당대 선지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수행 이력으로 확인한 내용은 이렇다. 괄호안은 지도했던 스님과 장소. 기신론(금파스님.함양 영원사), 능엄경(초월스님.부산 범어사), 반야경.원각경(만암스님.합천 해인사), 현담(玄談, 고경스님.양산 통도사), 화엄(환응스님.장성 백양사), 선문염송.경덕전등록(석전스님.순창 구암사). 또한 석전스님과 만암스님 등 백양사 어른들이 인재양성을 위해 청류암에 세운 광성의숙 세부측량과(1910년)와 보통과(1913년)를 졸업하고,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1916~1919)을 마쳤다.

 

내외전(內外典)을 겸비한 스님은 백양사 불교전문강원 강사(1921년)에 이어 지방학림 강사(1925년)로 취임했다. 1930년 1월 고창 상원사 주지를 맡은 기록으로 보아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까지 10년간 강사(지금의 강주)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보인다. 박학다식한 스님의 별명은 사중(寺中)에서 ‘선생님’이었다.


○…옛날 스님들은 시주 은혜를 고맙게 여겼다. ‘부처님 재산’이고 ‘대중의 공동 재물’이기에 함부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장조스님도 그랬다. 하찮은 물건도 부처님 모시듯 소중하게 대했다. ‘작은 종이 한 장’도 낭비하지 않았으며, 시주물이 들어오면 법당에 가서 부처님께 올린 뒤 사용했을 정도로 아꼈다.


만일 제자 가운데 경전에 ‘메모’하는 것이 눈에 띄면 혼쭐이 났다. 공부 때문이라고 하지만 “다음에 네가 언제 또 그것을 읽겠느냐. 머리로 기억하고 메모해라”는 경책을 들었다. 종이는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지만, 집중하여 보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만큼 정성 들여 경전을 보라는 뜻이며, 부처님 말씀이 기록된 종이를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경전을 깨끗하게 읽어 다른 이도 볼 수 있게 배려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스님의 ‘말솜씨’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처음 듣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연방시리” “고로처럼” “고론담맛다” 등 알듯모를듯한 남도 특유의 말투에 귀가 열리려면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백양사 주지 성오스님은 “법문을 하실 때 경전에 나오는 구절도 인용하셨지만, 당신이 직접 체험한 공부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머리나 입으로 하는 법문’이 아닌 ‘몸(생활)과 마음에서 우러난’ 심지법문(心地法門)을 한 것이다.


○…노년에도 화엄경 등 여러 경전을 암송했다. 얼마나 자주 경전을 외웠던지, 스님을 모셨던 제자들은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남아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나중에는 귀에 익어 자연스럽게 경전 내용을 익혔다. 스님은 저술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다만 묵담(默潭)스님의 요청으로 <치문>과 <선요>를 한글로 번역한 원고를 썼을 뿐이다.


글자 하나하나 신심과 정성을 다해 옮겼다. 이때가 1970년대 초반으로 세수 80세 중후반이었다. 육식과 오신채를 먹지 않았던 스님에게 번역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묵담스님은 “큰스님이나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라며 요청했다고 한다. 장조스님은 “하였음에다”라는 ‘옛날식 문투’로 원고를 썼는데, 당시 조선대 이영무 교수(전 태고종 총무원장 운제스님)가 교정했으며, 이를 다시 정서하여 묵담스님에게 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책으로 발간되지는 못했다.

 

○…교육 불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정부수립 이듬해인 1949년 정광학원 이사를 지냈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5년에는 정광학원 대표이사로 취임해 인재양성을 실천했다.

 

<사진>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 졸업장. 1919년 발행된 것이다. 자료제공=성오스님

평소 제자들에게 무척 엄했던 스님은 상좌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너 누(구) 새끼가?”라며 천진한 표정으로 장난을 걸었을 만큼 좋아했다. 잘못해서 야단맞을 일이 생긴 어떤 상좌는 꾀를 내었다고 한다. 은사스님에게 혼쭐나기 전에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흉내’를 내면 무사통과였기 때문이다. 야단맞을 일이 했어도 공부를 하고 있으면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백양사에는 국군과 빨치산(인민군)의 전투가 자주 일어났다. 만암스님과 장조스님 등 노스님 몇몇은 큰절은 물론 산내 암자를 한곳씩 맡아 도량을 지키려고 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스님들은 후일을 기약하라며 몸을 피하게 했다. 부처님을 외면한 채 도량을 비울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백양사 설선당(說禪堂). 전기가 없던 시절,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장조스님은 홀로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절에 들이닥친 인민군들이 도량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군화를 신은 채 설선당 마루에 올라선 인민군이 스님이 있는 불 켜진 방의 문을 열어 젖혔다. 당장 끌어내야 하는 상황인데, 인민군은 “아무도 없구먼”이라며 문을 닫고 돌아갔다.


훗날 동네 사람이 백양사 스님들에게 들려준 당시 상황은 이렇다. “그날 인민군이 주민을 모아놓고 연설 했는데, ‘절에 갔더니 중은 하나도 없고 부처만 하나 있더라’고 했다.”


○…한국전쟁 무렵. 스님은 광성의숙이 있던 청류암이 무탈한지 살피기 위해 마을에서 암자로 향했다. 아래쪽에서 청류암을 바라보면 가까운 거리 같지만, 아홉 굽이에 이르는 산길을 오르는 것은 간단하지는 않다. 얼마나 걸었을까. 갑자기 허리에 통증을 느낀 장조스님이 멈추어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반복했다. 바로 그때 총성 세발이 울렸다. “탕. 탕. 탕” 그러나 스님이 허리를 굽혔을 때 그 위로 총알이 지나가 목숨을 구했다.


○…장조스님 비문은 운허(耘虛)스님이 찬(讚)했다. 이글에서 운허스님은 “드높은 학덕과 수행을 미소 속에 감추었다”며 스님을 기렸다. 경전 독송 외에 특별한 일이 아니면 말문을 멀리하고 상(相)도 내지 않았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대중을 맞이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가을 서리’ 처럼 엄했다. 20년간 장조스님을 시봉한 상좌인 성오스님(백양사 주지)은 “굉장히 무서웠고, 서운한 생각도 들었다”면서 “그러나 돌이켜보니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회고했다. “지금도 은사스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는 성오스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 행장 ■

 

호은.석전스님 가르침 받아
미소만 보인채 조용히 열반

 

<사진> 백양사 부도전의 장조스님 부도

1887년 4월6일 전북 고창군 상하면 하장리 565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박노일(朴魯一) 선생, 모친은 김씨(金氏)였다. 본관은 순천. 속명은 박장조(朴長照). 1902년(15세)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호명(浩溟)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같은 해 7월15일 호운(皓雲)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고, 여섯 해가 흐른 1908년(21세) 4월15일 합천 해인사에서 호은(虎隱)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대선(大禪,1918년).중덕(中德,1923년).대덕(大德,1929년).종사(宗師,1932년).대종사(大宗師,1939년) 법계를 수지했다. 1954년까지 52안거를 성만했다.


1897년 고창군 상하면 강숙에서 이낙현 선생에게 통사를, 박치권 선생에게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출가후 백양사.해인사.범어사.구암사 등에서 내전을 익히고, 광성의숙과 불교중앙학림에서 외전을 배웠다. 순창 구암사에서는 석전스님에게 염송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을 지도 받았다.

 

1921년 2월부터 1930년 초까지 백양사 강사로 후학을 지도했으며 고창 상원사 주지, 장성 백양사 법무(法務).감무(監務) 등의 소임을 보았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백양사 주지로 취임한 후 고창 선운사 주지, 정광학원 대표이사, 불교전남종무원장, 영광 불갑사 주지 등을 지냈다. 백양사 주지 소임은 28년이나 보았다.


노년에 몸이 쇠약해진 스님은 1974년 3월 나주 심향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1978년 8월28일(음력) 오전. 추석이 지난 지 보름 가까이 지났다. 노스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과 신도들이 찾아왔다. 스님은 방문을 활짝 열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쇠진해질 대로 쇠진해져 상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작은 미소’를 비추었다. 그날 오전 11시 스님은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았다. 세수 92세. 법납 77세였다.


영결식과 다비는 5일장으로 백양사에서 거행됐으며, “사리, 그거 뭐하는 것이 다냐”라는 유훈에 따라 사리는 수습하지 않았다. 현재 스님의 비와 부도는 백양사 부도전에 모셔져 있다. 상좌로 보륜성오(普輪性悟).동환금명(東煥錦明).범일성관(梵日性寬)스님과 최웅호(崔雄鎬) 예비역 군승을 두었다.


백양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414호/ 2008년 4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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