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3. 혜월혜명 - 무심도인으로 깨달음 향기 전한 ‘지혜의 달’

수선님 2021. 9. 21. 13:54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3. 혜월혜명

무심도인으로 깨달음 향기 전한 ‘지혜의 달’

 

 

근세 한국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린 경허스님 법제자인 혜월혜명(慧月慧明,1862~1937)스님은 무심도인(無心道人)이다. 덕숭산에서 남방으로 내려와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서 대중들에게 깨달음의 향기를 전했던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무심도인으로 깨달음 향기 전한 ‘지혜의 달’
 경허스님 상수제자 한국불교 선맥 중흥
 어려운 이웃에 아낌없이 베푼 수행자


 

<사진설명>부산 원효정사에 모셔진 혜월스님 사진. 진영은 부산 해운정사에도 모셔져 있다. 출처=부산 원효정사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따르는 이유도 있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는 대중 외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암사에서는 소를 키워 농사일을 거들도록 했다. 지금처럼 농사를 기계로 짓지 않던 시절에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다. 소에게 ‘우순(于順)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혜월스님은 “너무 일만 시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사람 몸 받아라. 농사철만 지내면 편히 쉬도록 해줄게”라며 아꼈다고 한다.

 

○…어느 날 고봉(古峰)스님을 비롯한 수좌(首座)들이 양산시장에 가서 소를 팔아 버렸다.

 

절로 돌아온 수좌들은 원주에게 “대중공양 때 맛있는 반찬을 해 달라”며 소판 돈을 건넸다고 한다. 시장에 다녀온 혜월스님이 소를 찾았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리 천진불이라지만 소를 팔아버렸으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꾸중대신 “살던 소 갖고 오너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때 소를 판 ‘주모자’인 고봉스님이 앞으로 나와 네발로 기어 다니며 “음매 음매”라고 소 울음을 냈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내 소는 애비소요, 애미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혜월스님 전법제자 운봉(雲峰)스님의 손법제자 진제스님(조계종 원로의원.부산 해운정사 조실)은 “깨달음을 찾는 납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를 판 ‘엄청난 일’도 공부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스님, 옷 좀 우리에게 보시하십쇼.” 혜월스님이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거지들이 뒤를 따라 다녔다. 마음 좋기로 소문난 스님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옷을 달라면 옷을 주고, 먹을 것을 달라면 먹을 것을 주니, 거지들에게 스님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승복을 벗어준 스님은 더럽고 낡은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선암사로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도들이 스님 옷 대주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일제가 수탈을 일삼던 시기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많은 사람이 유랑하던 시절,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준 스님은 ‘보살’이었다.


○…절에 재(齋)가 들어오면 상좌나 신도와 함께 장을 보러갔다. 하지만 장을 온전하게 보고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콩나물 한독(광주리)을 샀다. 대중들이 많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옆에서 장사하는 또 다른 상인들이 “시님. 우리 콩나물도 사 주세요”라고 하면, 스님은 주저 없이 “그래요. 그럼 주시오”라며 모두 샀다. 한동안 선암사 대중들은 콩나물을 재료로 한 반찬과 국을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스님은 차별을 두지 않고 대중을 맞이했다. 출.재가를 분별하지 않았고, 재산.명예.지위도 스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깨달음을 이뤄야 할 수행자이며 중생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든 절에 왔다 돌아가면 문밖 까지 나와 공손하게 합장하며 배웅했다고 한다. 부산 원효정사 회주 법산스님은 “보살행을 하셨지만 도인이라는 상(相)을 내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혜월스님은 법을 전해준 경허(鏡虛)스님이 북방에서 입적해 마을 뒷산에 법구를 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월(水月)스님이 만공(滿空)스님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경허스님 입적은 1912년 4월이었으며,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듬해 여름으로 추정된다. 혜월스님은 철우(鐵牛).운봉(雲峰).운암(雲庵)스님 등 선암사 대중 5~6명과 함께 갑산으로 향했다.

 

만공스님 일행과 합류한 혜월스님은 경허스님 법구가 모셔진 산에 도착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법구 수습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이때 혜월스님은 “내가 하지”라며 법구를 모셨다. 철우스님 법어집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혜월선사는 철우스님을 앞세우고 다른 스님 몇 분과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모시고 가서 경허선사의 무덤을 파 화장을 하게 되었다. 경허선사의 뼈는 장대한 황골이었고 장례 중에 혜월선사는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는데, 철우스님은 그날 혜월선사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혜월스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솔방울을 주워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년 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양치하는데 치사리(齒舍利)가 나와 방광(放光)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바닥에 떨어진 치사리를 발로 깔아뭉개면서 말했다. “에이, 고약한 놈.” 스님의 유훈에 따라 법구는 화장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고 백양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비를 세우지 않은 것도 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진제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혜월선사는 백양산에 올라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불 때는 일로 소일 하셨다”면서 “일생을 무심도인의 경지에서 수행정진하신 선지식”이라고 했다.


 

■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

 

<사진설명>혜월스님이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또한 철우스님에게도 게송을 지어주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혜월스님의 필체는 평생 무심도인으로 자유 자재했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1902년 쓰인 운봉스님의 전법게 한글풀이는 진제스님 법어집 <고담녹월(古潭月)>을 인용했다.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 행장 ■

 

 

<사진설명>부산 선암사 전경.

천장암 근처 바위굴서
짚신 만들다 깨달음 성취

 

1862년 6월19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3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입산해, 15세에 혜안(慧眼)스님을 은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관음정진을 하던 혜월스님은 24세 되던 해에 경허스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발심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지 경허스님이 “혜명(혜월스님의 법명)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 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 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 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하며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정진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라며 짚을 굴에 넣어주었다.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후 ‘탁’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같은 일을 전해들은 경허스님은 인가(印可)를 하고 혜월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한 게송이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깨달음을 이룬 후 혜월스님은 27년간 덕숭산에 머물다 51세(1913년 무렵)에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양산 미타암과 내원암 등 선방을 유력하던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1937년 어느 날 가고 옴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며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운봉(雲峰).호봉(虎峰).운암(雲庵).철우(鐵牛) 스님 등이 있다. 부산 안양암 성공(性空)스님도 10년간 혜월스님을 시봉했다.


 부산=이성수 기자

 

■ 열반송 ■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본래 진실한 상이 없도다
상에서 상 없음을 안다면
성품을 보았다고 하느니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義無相(어상의무상) 卽鳴爲見性(즉명위견성)

 

[출처 : 불교신문 2418호/ 2008년 4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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