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란 무엇인가?(이중표 교수) 2-2 -퍼옴-
29. 식識과 명색名色
세존이 이야기하는 촉觸은 식과 명색의 접촉을 의미하므로
촉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식과 명색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전술한바와 같이 식識은 중생들이 인식(인식)의 주체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고,
명색名色(nama-rupa)은 인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명색이라는 개념이 외부의 사물을 의미하기 시작한 것은
<우파니샤드>에서라고 생각된다.
<브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때 이(우주)는 구별되지 않았다.
이 우주가 이름(nama: 名)과 형태(rupa: 色)에 의해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이 우주는 이름과 형태(nama- rupa)로
구별되고 있으며,
그는 이러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이야기한다.)
그(구별된 개체의 자아: 아트만)는 여기 마치 칼집속에 숨겨져 있는
칼처럼, 장작속에 숨겨져 있는 불처럼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다.
그가 전모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그를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숨쉴때 그는 숨이라 불리고, 말할때 목소리라 불리고,
볼때 눈이라 불리고, 들을때 귀라 불리고, 생각할때 마음이라 불린다. 이들은 단지 그의 행위의 이름일 뿐이다.
<챤도가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신(브라만)은 '이제 이 세가지 신들속에 살아있는 아트만으로
들어가 여러가지 이름과 형태(nama-rupa)로 나뉘리라'고 생각했다.
본래 이 우주는 개개의 사물로 구별되지 않았으나
이름과 형태에 의해 구별되었으며,
이렇게 이름과 형태에 의해 구별된 개체속에는 보이지 않는
'아트만'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에
그 행위의 주체로서 '아트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이름과 형태로 인식한다.
이름이 없는것은 인식할수 없고,
형태가 없는것은 비록 이름이 있어 인식한다 해도
무의미한 인식이 된다.
예를들어 책상이나 의자라는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를
책상이나 의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무라고 인식할 것이다.
나무라는 이름이 없다면 나무가 속하는 다른 이름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와같이 이름이 없으면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을 인식할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름만 있고 형태가 없어도 인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예를들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은 이름은 있지만
형태가 없으므로 우리는 인식할수 없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이 이름과 형태를 통해 인식된다는것을 알고,
이러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사물속에 그 사물의 본질로서
'아트만'이 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의 생각은 사물이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 상통한다. 세존은 이러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에 기초한
사물의 이름과 형태를 명색(名色)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사물은 본래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외부에 실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름, 즉 언어나 개념이 객관적인 사물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모든 사물이 본래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은 본래부터 산이고, 강은 본래부터 강이기 때문에 우리는 산을 산이라고 부르고 강을 강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객관적인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 욕구의 반영이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에게는 책상이 없다. 그들에게는 책상이라는 개념, 즉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책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부시맨에게 나무로 된 책상을 보여주며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나무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사물이 본래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면 부시맨이든 미국인이든 책상을 보면 책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시맨은 나무라고 인식하고 미국인은 책상이라고 인식한다면 책상은 객관적인 사물의 고유한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사람이 본다고 해서 동일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놓고 보려는 의도로 보면 책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밥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로 보면 식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은 인식의 대상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람의 의도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말은 "이것은 내가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가 있을 때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이름은 이렇게 욕구를 지닌 의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에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아와 세계가 공간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명이다. 이 어리석은 생각에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행行이다. 이러한 삶의 결과 형성된 욕구를 지닌 마음이 식識이며, 이 식이 형성되었을 때 명색名色이 식의 대상으로 분별된다.
즉 우리들처럼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책상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형성되어 있을 때, 책상은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되지만, 부시맨처럼 책상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책상이라는 이름과 형태를 가진 사물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는 식이 본래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물은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식은 십이입처라는 중생의 망념에서 연기한 것이고 명색은 이러한 식에서 연기한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은 식이 명색을 공간 속에서 접촉한다고 생각하지만, 식과 명색의 접촉은 공간 속에서의 접촉이 아니라 중생의 망념인 십팔계, 즉 외육계와 내육계와 육식계의 화합이다. 그래서 세존은 <잡아함 306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두 가지 법(二法)이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안眼과 색色이 둘이다...... 중략....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발생한다. 삼사화합三事和合(안, 색, 안식의 화합)이 촉觸이다.
보는 나(주관)와 보이는 세계(객관)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발생하고, 이 의식이 보는 나와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생각과 화합할 때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촉은 중생들이 볼 때는 공간 속에서 자아와 세계가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실상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의 접촉이며 화합이다. 이런 착각은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무명이 사라지면 사라진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가 공간 속에서 접촉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중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촉은 엄연한 현실이다. 세계와 자아가 상존하는가 유한한가 하는 등의 사견은 식(자아)과 명색(세계)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촉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현실로 인식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세존이 앞에서 인용한 <장아함 청정경>에서 외도들의 모든 사견은 촉을 인연으로 하여 생긴 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30. 십팔계와 육계六界
우리가 사물을 볼 때 만약 십팔계 안에 없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에 무지개를 오색 무지개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라고 이야기한다. 같은 무지개를 보고서 옛날 사람들은 다섯 가지 색이 있다고 느끼고, 요즘 사람들은 일곱 가지 색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옛날의 무지개와 요즘 무지개의 색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무지개는 빛의 스펙트럼이기 때문에 빨간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긴 파장에서 보라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짧은 파장까지 무한히 많은 색으로 인식될 수 있는 파장이 연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비치는 무지개의 색은 그 수가 무한하다. 그런데 옛날 사람의 안식계에는 다섯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색으로 보았고, 요즘 사람들의 안식계에는 일곱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일곱 가지 색으로 보는 것이다.
원시생활을 하는 원주민 가운데는 색을 '밝다' '어둡다'로만 구별하는 원주민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안식계에는 어둠과 밝음만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어둡거나 밝은 것이 있다'는 느낌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의식계 속에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책상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은 책상을 보아도 '책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형태의 나무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이렇게 '무엇이 있다'는 느낌, 즉 촉은 우리의 십팔계 안에 그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을 때 생긴다.
'무엇이 있다'는 느낌은 이렇게 우리의 십팔계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있을 때 나타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런 느낌이 생기는 것은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자아계'와 색성향미촉법계라고 하는 '대상계'와 안식 내지 의식계라고 하는 '의식계'가 함께 모일 때, 즉 삼사三事가 화합할 때이다. 안식계에 붉은 색을 알아보는 의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아계'의 보는 자아와 '대상계'의 보이는 대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즉 안眼과 색色이 나타나지 않으면 '붉은 색이 있다'는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보는 자아와 보이는 대상은 온 곳이 없이 나타나서 간 곳이 없이 사라지는 허망한 것이다. 이러한 허망한 의식이 욕탐에 의해 십팔계 속에 모여 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면, 즉 본다는 행위를 할 때 '보는 자아'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즉 보지 않을 때는 보는 자아와 보이는 대상은 십팔계라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계 속에 붉은 색을 분별하는 의식이 있다고 해도 본다는 행위를 통해 이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붉은 색이 있다'는 느낌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색을 알아보는 의식, 즉 안식이 없으면, 보아도 있다는 느낌이 생기지 않고, 보는 眼과 보이는 色이 없으면 안식계 속에 붉은 색을 알아보는 안식이 있어도 있다는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무엇이 있다'는 느낌은 반드시 이 세 가지가 한 자리에 있을 때, 즉 삼사가 화합할 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촉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촉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삼사가 화합할 때 생기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촉은 이렇게 접촉의 의미와 함께 느낌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촉의 작용으로 인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세계나 영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외도들은 이것을 모르고 죽지 않는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영원히 존재하는 세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를 놓고 서로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존은 유무중도를 이야기하면서 유무 이견은 모두 촉을 취하는 것이므로 촉을 취하지 않으면 허망한 생각을 꾸미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촉을 세존은 '입처(ayatana)'라 부른다. 왜 세존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인 촉을 '입처'라 불렀을까?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입처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중생들의 허망한 세계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이다. 십이입처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십팔계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허망한 의식이므로 입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촉을 어떤 계가 성립하는 바탕이 되기에 입처라고 부르는 것일까?
촉은 '무엇이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느낌의 주체로서 자아가 사물을 접촉하는 곳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촉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물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산, 물, 불, 바람, 돌, 흙, 이 모든 것이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이런 물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지수화풍 사대四大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물질은 사대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런 물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물질과 공간을 인식하는 의식이 있다. 당시의 외도들이 갖가지 요소설을 주장했지만 정리해 보면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 여섯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외도들은 이들 여섯 가지 요소가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있는 것'은 모두 촉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촉은 이들 여섯 가지가 성립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세존은 이들 여섯 가지를 육계라고 불렀고 육계가 촉을 근거로 한다는 의미에서 촉을 입처라고 부른 것이다.
육계는 우리의 인식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지수화풍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아니다. '있는 것'은 모두 '있다는 느낌'인 촉을 인연으로 해서 나타난 것이지 요소가 모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도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외부에 실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지수화풍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을 사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수화풍도 '있다는 느낌'에 의해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중아함 상적유경>과 이에 상응하는 <중부 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여러분 어떤 것이 사대四大인가? 지계, 수화풍계를 말하나. 여러분, 어떤 것이 지계인가? 지계에는 내지계內地界와 외지계外地界가 있다. 여러분, 어떤 것이 내지계인가? 몸 안에 있는 개개의 단단한 것과 단단한 상태라고 취해진 것을 말한다........ 여러분 지계라고 불리는 것은 늙은 여자처럼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소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쇠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변역법變易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계가 단단하다고 느껴진 것이듯이 수계는 촉촉하다고 느껴진 것이고, 화계는 따뜻하다고 느껴진 것이며, 풍계느느 움직인다고 느껴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경은 당시 유물론자들이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로 생각한 사대에 대하여 그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사대도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무상하고 변역하는 법에 지나지 않는다. 세존은 외도들이 실체로 생각한 사대를 마음에서 연기한 무상한 법을 같은 종류끼리 모아 놓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계라고 불렀다.
우리는 물질이 없으면 공간이 있다고 말한다. 공간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식은 물질이나 공간을 인식하는 존재라고 느껴진 것이다. 이러한 공간과 식을 사계와 함께 육계라고 부른다. 따라서 십팔계는 의식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분별심이고, 육계는 이 분별심(십팔계)을 인연으로 발생한 촉, 즉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통해 당시의 인도인들이 존재의 근본 요소로 생각한 것을 불교의 입장에서 해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1. 오온설1
근본불교의 존재론적 입장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는 존재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一元論이라고 하고, 근본 되는 존재가 여럿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을 多元論이라고 한다. 브라만 신이 변해서 이 세상의 삼라만상이 이루어졌다는 바라문교의 전변설은 일원론이고, 四大와 같은 여러 요소들이 묘여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사문들의 적취설은 다원론이다.
한편 그 근본이 되는 존재가 물질이냐 정신이냐에 따라서 유물론과 유심론으로 나누기도 한다. 四大와 같은 물질이 근본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문들의 요소설은 유물론이고, 브라만이라는 정신적이 실체가 세계의 근본이라고 주장하는 바라문교의 전별설은 유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어떤 입장일까? 흔히 '우리의 몸은 四大가 모여 있다가 흩어지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 불교를 유물론과 다원론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四大는 물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일체유심조' 라는 말을 일원론적 유심론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그러나 불교에서 이야기 하는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삶, 즉 업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 아뢰야식은 능히 모든 중생의 세계와 중생을 이끌어 내는 선악업이 성숙하여 나타난 결과이다. 이래서 異熟이라고 부른다.
중생의 세계와 중생을 이루어 내는 마음인 아뢰야식은 업이 성숙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80권 화엄경>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일체의 중생세계는 三世 가운데 있고, 三世의 모든 중생은 오온 가운데 머물고 있다. 모든 온은 업의 근본이 되며, 모든 업은 마음의 근본이 된다.
업을 통해 형성된 마음으로 업을 지어 오온이라는 중생의 세계와 중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어떤 실체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일원론도 아니고, 다원론도 아니며, 유물론도 아니고, 유심론도 아니다.
세존은 유물론이건, 유심론이건, 일원론이건, 다원론이건, 모두가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세존이 이들 모든 이론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촉觸에 있다. 우리가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십팔계를 인연으로 해서 생긴 촉에서 발생한 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물질이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책상, 나무, 돌, 우리의 몸 이런 것들을 우리는 물질이라고 하며 오온의 色에 해당한다.
다음에는 정신이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정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느끼는 정신이 있다. 우리는 괴로움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낀다. 우리는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느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렇게 느끼는 존재를 감정이라고 하며 오온의 受에 해당한다.
둘째는 생각하는 정신이 있다. 우리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고, 논리적으로 사유하고, 추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생각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존재를 이성이라고 하며 오온의 想에 해당한다.
셋째는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이 있다. '산에 가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자동차를 갖고 싶다. 이 일을 해야겠다'는 등의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의지라고 부르며 오온의 行에 해당한다.
넷째는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정신이 있다. '이것은 꽃이다. 이것은 책상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것은 밖에 있는 사물이다'. 이렇게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인식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의식이라고 부르며 오온의 識에 해당한다.
우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물질,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의 다섯 가지이다. 이 밖에 다른 것은 없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물질은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은 우리의 정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작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물질적 존재와 정신적 존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존재를 오온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오온으로 되어 있다고 하므로 불교는 오요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요소설이 아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오온은 외도들의 사대와 같은 요소가 아니다.세존은 오온이 우리의 외부에 실재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가 아니라 십팔계에서 연기한 촉을 통해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오온은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온이 연기하는데 바탕이 되는 것이 십이입처와 촉입처이다.
불교의 존재론은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가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므로 연기설이라고 할 수 있고,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 삶, 즉 업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므로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연기설과 업설은 어떤 근본 실체를 전제하여 존재를 설명하는 유물론이나 유심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타의 존재론과 구별된다.
32. 오온설 2
오온의 근원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六識이 발생하면 우리의 마음은 십팔계의 상태가 된다.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한다는 것은 십이입처의 의식상태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이란 행위, 즉 업을 의미한다. 우리가 인연을 짓는다는 것은 업을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보는 것도 업이고, 듣는 것도 업이고, 생각하는 것도 업이다. 그러므로 '眼과 色을 인연으로 眼識이 생긴다'는 것을 볼 때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육식이 생긴다는 것은 인지활동을 통해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기면 이 분별심에 의해 주관계, 대상계, 의식계가 분별되며, 이렇게 분별되어 있는 의식상태가 십팔계이다. 십이입처에서 육식이 발생하여 십팔계가 성립하는 것은 욕탐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무지개를 보았다고 하자. 그 사람은 무지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이 자신의 십팔계 안에 없기 때문에 무지개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무지개가 구름처럼 별 색깔이 없어서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라면 보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보았다고 하더라도 좀 이상하게 생긴 구름이 있다고 느끼고 말 것이다. 그러나 관심이 있으면 보는 자기 자신과 보이는 무지개가 의식 속에 뚜렷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주관, 대상 의식이 함께 나타날 때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심이나 욕구에 의해 성립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은 먹을 것을 보고, 옷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옷을 보듯이 우리의 인식의 바탕에는 욕탐이 있다. 이와 같이 십이입처와 십팔계 등은 관심, 즉 욕탐이 있어야 나타난다. <잡아함 224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 일체 욕법은 마땅히 끊어야 한다. 어떤 것이 마땅히 끊어야 할 욕법인가? 眼이 마땅이 끊어야 할 일체의 욕법이다. 그리고 色, 眼識, 안촉, 안촉을 인연으로 하여 생기는 受, 즉 안으로 느끼는 괴롭고, 즐겁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저 일체의 욕법은 마땅이 끊어야 한다. 耳鼻舌身意도 마찬가지이다.
십이입처와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識, 觸, 受를 모두 욕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이 욕탐이 있을 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잡아함 334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것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겠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善義, 善味의 순일하고 청정함이 충만하며 범행청백한 것이니 잘 듣고 잘 생각하라.
因이 있고 緣이 있고, 결박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경이니라. 그것은 어떤 것인가?
보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眼)은 인이 있고 연이 있고 결박이 있다. 어떤 것이 안의 인이고, 안의 연이고, 안의 결박인가? 안은 業이 인이고, 업이 연이며, 업이 결박이다.
업은 인이 있고, 연이 있고, 결박이 있다. 어떤 것이 업의 인이고, 업의 연이고, 업의 결박인가? 업은 愛가 인이고, 애가 연이며, 애가 결박이다.
애는 인이 있고, 연이 있고, 결박이 있다. 어떤 것이 애의 인이고, 애의 연이고, 애의 결박인가? 애는 무명이 인이고, 무명이 연이며, 무명이 결박이다.
무명은 인이 있고, 연이 있고, 결박이 있다. 어떤 것이 무명의 인이고, 무명의 연이고, 무명의 결박인가? 무명은 不正思惟가 인이고, 부정사유가 연이고, 부정사유가 결박이다.
부정사유은 인이 있고, 연이 있고, 결박이 있다. 어떤 것이 부정사유의 인이고, 부정사유의 연이고, 부정사유의 결박인가? 보는 자아가 있다는 생각(眼)과 보이는 대상이 실재한다는 생각(色)을 연하여 생기는 부정사유는(주관과 대상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어리석음에서 생긴 것이다.
안과 색을 연하여 생기는 부정사유는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저 (주관과 대상이 개별적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하는)어리석음이 무명이다. 어리석음에서 욕탐을 추구하는 것을 愛라고 하며, 愛가 지은 것을 業이라고 한다."
이 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주관(자아)과 대상(세계)이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는 어리석은 무명에서 사물을 보고 욕탐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십이입처가 연기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욕탐을 가지고 사물을 봄으로써 십이입처가 나타나고,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보이는 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난다. 만약 이 분별하는 의식이 이미 십팔계 안에 있다면 그 식이 나타나서 '무지개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즉 촉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개를 분별하는 식이 없을 때에는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새롭게 형성된다.
무지개를 분별하는 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르는 것은 무지개가 아니라 무지개의 이름이다. 여러 가지 색이 층을 이루고서 커다란 반원으로 하늘 높이 결려 있는 무지개의 모습은 눈을 통해 알고 있다. 단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은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은 알아 볼 것이다. 무지개의 여러 가지 색은 알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은 그 사람의 안식계 속에는 여러 가지 색을 분별할 수 있는 안식은 있지만, 의식계 속에 무지개라는 이름의 사물(法)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지개를 분별하지 못하다가 누군가가 그 이름을 알려주거나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 이 때 비로소 무지개를 분별하여 알아볼 수 있는 의식이 생겨서 의식계 속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십팔계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 즉 업에 의해 형성되어 같은 종류끼리 계역을 형성하고 있는 의식의 집단이다. 이 십팔계는 구체적인 인연이 주어지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씩은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셋이 모여서 나타난다.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는 놈이 나타나지 않고, 보는 놈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나타나지 않으며,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이 없으면 보이는 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이 나타나는 계기는 행위, 즉 업이다.
어떤 욕탐을 가지고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보는 나(주관), 보이는 사물(대상), 이것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 함께 화합한다. 이것이 촉이다. 우리가 '있다, 즉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촉을 인연으로 해서, 즉 업에 의해 형성된 '십팔계'가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책을 놓고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상을 보면 상은 책을 놓고 보기에 좋은 것으로 보이고, 이때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나타나서 '여기에 책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욕구가 다르면 다른 인식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음식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보면 동일한 상이 밥상으로 인식되고, 불을 피우려는 의도로 보면 그 상은 땔감이 되는 것이다.
촉은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상태이다. 십팔계라는 의식세계 속에 있는 의식내용을 '존재' 즉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촉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은 촉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오온으로 분류하므로 촉은 오온의 근원이 된다.
33. 오온설 3
오온의 발생과 성립
촉은 '무엇인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십팔계에 있는 것들이다. 십팔계에는 십이입처와 육식이 있다. 십팔계라는 계역속에 나누어져 있는 이들은 우리의 인식행위를 통해 화합하게 된다. 이것을 촉이라고 한다. 촉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마음 속에 같은 종류끼리 모여 있는 십이입처와 육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책상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책을 놓고 보기에 적합한 모양의 사물을 보면 십이입처의 내입처와 외입처가 육식의 책상을 분별하는 의식과 화합함으로써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먼저 눈으로 색깔과 모양을 보면 책상의 모습이 있다고 느껴진다. 손으로 만져보면 책상의 강도와 매끄러운 정도가 있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책상의 모습과 감촉 등을 종합하여 마음으로 판단해 보면 책상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렇게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아서 우리에게 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물질이라고 한다. 물질은 이렇게 우리에게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이 나고, 만져지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촉을 통해서 있다고 느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물질이 인식되면 물질을 인식하는 것도 있다고 느낀다. 책상만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책상을 보고 만지는 의식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는 의식은 눈을 통해 보고, 듣는 의식은 귀를 통해 듣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주체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識이다. 그리고 눈, 귀, 코 등은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눈, 코, 귀, 혀, 몸을 우리의 육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의 육체는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은 십이입처 가운데 意와 법을 제외한 안,이,비,설,신과 생,성,향,미,촉 열 가지가 촉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촉을 통해서 존재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 물질과 의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십팔계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존재'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질과 의식 이외에도 감정, 이성, 의지가 있다.
우리가 십팔계에 없는 감정, 이성, 의지 같은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촉을 통해서 새로운 의식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의식은 촉을 통해서 십팔계라고 하는 의식 내부에 있는 것들이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들인데, 이렇게 물질과 의식이 존재하는 것으로 느껴지면 이 느낌을 통해서, 즉 촉을 인연으로 해서 새로운 의식들이 나타난다. <잡아함 306경>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
두 법(二法)이 있나니 眼과 色이 두 법이다.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이 생기고, 三事의 화합이 촉이다. 촉에서 수, 상, 사가 함께 생긴다. 이것이 四無色陰(識, 受, 想, 思)이다. 안과 색 그리고 이들 법(사무색음)을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들 법에서 사람이란 생각, 중생이라는 생각, 인간계라는 생각, 어린이라는 생각 등을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내가 귀로 소리를 듣고, 내가 마음으로 법을 인식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이 존자는 이름이 이러하고, 성은 이러한데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었다."
우리가 감정, 이성, 의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受,想,思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는 '촉에서 수상사가 생긴다'고 하고 잇다. 수상사란 오온의 수, 상, 행에 해당한다.촉을 통해서 십팔계 속에 있던 십이입처와 육식은 오온의 색과 식이 되고, 촉을 통해서 새롭게 생긴 수,상,사는 오온의 수,상,행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촉을 통해서 오온이 발생한다.
그러나 촉을 통해서 발생한 '있다는 느낌들'이 곧 오온은 아니다. 다음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촉을 통해서 발생한 것은 오온의 질료가 되는 것들이다. 오온은 이들 의식이 발생하여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오온의 성립과정은 뒤에 살펴보기로 하고 촉에서 수상사가 생긴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아름답게 피어있는 장미를 본다고 하자. 아름다운 장미를 보면 즐거움을 느낀다. 이렇게 '무엇이 아름답다' 또는 '무엇이 보기 싫다'고 느끼는 것을 受라고 한다. 이러한 수는 촉에서 생긴 것이다. 만약 장미가 있다는 느낌이 없으면 그 장미가 아름답다는 느낌이 생길 수 없기 대문이다. 장미를 보고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장미는 보통 장미보다 '더 붉고, 더 크다'라고도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다른 것과 비교하고 사유하는 것을 想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도 장미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따라서 상도 촉에서 생긴 것이다.
한편 장미를 보고 이것을 꺾어 꽃병에 꽂아놓고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思라고 한다. 따라서 思도 촉에서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수,상, 사 즉 우리의 감정, 이성, 의지는 촉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느낌과 생각과 의지를 일으키는 정신적 실체가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미추와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본래부터 있다가 즐거운 것을 보면 즐겁게 느끼고 괴로움 것을 보면 괴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부를 때 먹으면 괴롭다. 만약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면 맛있는 것은 언제 먹어도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는 맛없는 것을 먹어도 즐겁고, 배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괴롭다는 것은 감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정은 촉에서 생기는 것이지 본래부터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도 마찬가지이다. 10편의 작은 집에서 살 때는 20평의 집만 보아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30편의 집에 살다가 20평의 집을 보개 되면 작다고 생각한다. 의지도 마찬가지다. 어제는 하고 싶던 일이 오늘은 하기가 싫고, 어제는 하기 싫은 일이 오늘은 하고 싶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촉에서 생긴 것을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인간은 육체와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을 본래부터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인간이라고 부르고, 그 사람은 몸이 어떻고, 감정이 어떻고, 이성이나, 의지나 의식이 어떻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는 이러이러한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내가 나의 눈으로 보니 어떤 것이 있다. 내가 나의 감정으로 느껴보니 그것은 즐겁다. 내가 나의 이성으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옳다는 등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아로 주장하고 있는 것은 촉에서 생긴 오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오온은 촉에서 생겨 무상하게 생멸하는 허망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온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오온을 '나'라고 하면서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다. '나는 지금까지 몇 년을 살았다'라고 주장하지만 오온 가운데 그 동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연 따라서 촉에서 생겼다가 간 곳이 없이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 오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상안 것을 '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생각 속에서 온갖 괴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세존은 <잡아함 9경>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色은 무상하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을 주는 것은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닌 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실된 바른 관찰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도 무상하다.
또 <잡아함 1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마땅히 색을 무상하다고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사람이 바르게 관찰한 것이다. 바르게 관찰한 사람은 색을 싫어하게 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려는 욕탐이 없어진다. 그것을 즐기려는 욕탐이 없어진 사람을 마음이 해탈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도 무상하다.
우리가 '나와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이렇게 촉에서 생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다. 따라서 촉을 없애고 오온을 없애야 해탈이 있고, 열반의 성취가 있다. 그리고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촉이 어떻게 생기고, 촉에서 어떤 것이 생기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세존이 촉을 멸하고 오온을 멸하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장아함 41경>에서는 오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것이 色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존재하는 모든 색은 일체의 四大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색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색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色의 集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색에 대하여 희탐과 갈애가 있으면 이것을 색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색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중략...
어떤 것이 受를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受身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受,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受, 이것을 受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수를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受의 集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集이 수의 集이다. 이와 같이 수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중략...
어떤 것이 想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想身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想,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想, 이것을 想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상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想의 集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集이 상의 集이다. 이와 같이 상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중략....
어떤 것이 行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思身을 말한다. 안촉에서 생긴 思,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思, 이것을 行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행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行의 集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촉의 集이 행의 集이다. 이와 같이 행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중략....
어떤 것이 識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六識身을 말한다. 안식신, 이비설신의식신, 이것을 識身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신을 여실하게 안다.
어떤 것이 識의 集을 여실하게 아는 것인가? 名色의 集을 말한다. 이것을 識集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식의 집을 여실하게 안다.
이 경에서 오온의 색은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오온의 색이 지수화풍 사대라는 요소와 그 요소가 모여서 이루어진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중아함 상적유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불교에서 보는 사대는 물질을 이루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지각을 통해 단단하다고 느껴지고(地), 촉촉하다고 느껴지고(水), 따뜻하다고 느껴지고(火), 움직인다고 느껴진(風) 것, 즉 四界이다.
따라서 오온의 색이 사대와 사대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물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각을 통해 느껴진 느낌과 그런 느낌들을 취한 것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런 의미에서 색, 즉 물질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물질적 실체들의 집합체로 알고 있는 색은 우리의 지각을 취하여 존재로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색을 사실 그대로(여실하게) 아는 것이 된다는 것이 이 경의 의미이다.
색이 사대라는 실체의 집합이 아니라 지각을 통해 느껴진 느낌을 취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은 色의 集이 색에 대한 희탐과 갈애라는 설명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집은 'samudaya'의 한역이다. 이는 '함께'를 의미하는 'sam'과 '증가, 생기, 수집'을 의미하는 'udaya'의 합성어로서 '함께 모여 나타남'의 의미이다. 이것은 '集起'로 한역되기도 하며, 사성제의 집성제는 'samudaya'를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 집기한 것이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색도 지각된 내용이 함께 모여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각된 내용은 왜 함께 모여, 즉 집기하여 색이 되는가? 세존은 지각된 것에 대하여 그것을 갈망하고 기쁨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내용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지각하는 자신도 변화하고 지각되는 내용도 변화한다.
어제 본 장미와 오늘 보는 장미는 같은 장미가 아니고, 어제 장미를 본 눈과 오늘 장미를 보는 눈도 같은 눈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 본 장미를 오늘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미는 피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장미를 보는 나의 눈도 변화하고 있지만, 어제 장미를 본 때 생긴 지각 내용과 오늘 생긴 지각 내용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에 동일한 장미라고 생각하며 동시에 그 장미를 보는 눈도 동일한 눈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장미가 시들어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우리는 장미가 사라졌다고 말하고, 눈이 장미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면 눈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시간적인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미와 눈이라는 물질(색)은 욕구나 갈애를 통해 어제의 지각과 오늘의 지각이 함께 모여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受, 즉 우리가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음은 촉에서 발생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촉, 즉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반복되어 함께 모여 나타나면, 그 느낌도 함께 모여 마치 감정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성(想)이나 의지(行)도 마찬가지다.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발생하고 있는 분별하는 마음이다. 사물의 인식은 이름과 형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의식 속에 책상이라는 이름과 책상의 형태가 있을 때 그 형태와 같은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식은 명색이 함께 모여 나타난 현상이다.
集은 이렇게 중생들이 존재로 생각하는 오온의 원인이다. 사성제에서 오취온이 괴로움이고, 오취온의 원인이 집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으며, 집은 욕탐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서 욕탐을 멸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34. 오온설 4
오온의 질료
오온은 色 受 想 行 識의 순서로 설해지고 있다. 이러한 오온의 순서는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오온의 순서를 보면 식이 맨 뒤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식은 촉을 통해 새롭게 발생한 수, 상, 사를 의미하는 오온의 수, 상, 행보다 먼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온의 순서는 식, 색 수, 상, 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온설에서 識은 맨 뒤에 위치하고 있다. 식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발생한 분별심이다. 촉을 통해서 십팔계라고 하는 의식의 세계를 육계라고 하는 존재의 세계로 인식하는 것도 식이다. 그리고 촉을 통해서 새롭게 발생한 수, 상, 사라는 의식을 오온의 수, 상, 행이라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도 식이다.
이렇게 식은 우리의 의식현상을 존재로 인식하면서 인식하는 자신까지도 인식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인식하는 자신도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는것이다. 따라서 식이 자신을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다른 것들을 존재로 인식한 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잡아함 374경>은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네 가지 음식(四食)이 있어서 중생이 되도록 돕고, 세간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음식인가? 첫째는 단식(摶食)이고, 둘째는 촉식(觸食)이며, 셋째는 의사식(意思食)이고, 넷째는 식식(識食)이다. 만약 비구가 이 음식을 좋아하고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면 識이 머물면서 커간다. 식이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에 名色이 나타난다. 명색이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행이 커가고, 행이 커가기 때문에 다음 세상의 자아가 커간다. 다음 세상의 자아가 커가기 때문에 생로병사와 같은 괴로움이 集起한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명색이란 존재로 인식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책상이라는 존재는 책상이라는 이름과 책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의 마음에 책상의 이름과 형태가 없다면 우리는 책상을 존재로 인식하지 못한다. 책상을 모르는 부시맨과 같은 사람이 책상을 본다고 해도 그것을 책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생긴 나무 덩어리로밖에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마음 속에 책상이라는 이름과 형태, 즉 명색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존재로 인식된 것의 이름과 모습, 즉 명색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에서는 우리의 마음에 이러한 명색이 나타나는 까닭은 우리가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이것을 좋아하고 탐내는 마음, 즉 희탐을 가질 때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태어나게 될 자아가 커가며, 자아가 자라 다음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괴로운 생각들이 모여 함께 나타난다(集起)는 것이다.
이 경은 이렇게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경전이다. 우리가 생사의 세계에 윤회하는 것은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감으로써 '나'라고 하는 존재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식은 이렇게 생사윤회의 근본이다.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식이라는 존재가 죽지 않고 생사윤회를 거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를 오해하는 것은 이렇게 식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라고 하는 존재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중생이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 이런 생각을 갖도록 하는 것은 네 가지 음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이라고 하는 네 가지 음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단식은 팔리어로는 'kabalinkara-ahara' 인데 'kabalinkara'는 '덩어리로 된' 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ahara'는 영양분 또는 자양분의 의미이다. 따라서 단식은 '덩어리로 된 자양분'이라는 의미이며 우리가 먹는 음식물을 의미한다. 우리의 몸은 이들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유지되고 자라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한다. 이 몸이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중생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에서는 단식이 중생이 되게 하고, 세간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단식은 단순히 음식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눈, 코, 귀, 혀, 몸과 같은 감관을 통해 지각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인식한다. 우리는 몸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다. 따라서 몸은 지각하는 자아이다. 단식은 이러한 지각하는 자아를 헝성하고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각하는 자아를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지각활동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접촉함으로써 우리는 몸이 있음을 느끼고, 이 활동이 지속되는 동안 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단식이란 지각활동을 하면서 몸을 지각활동을 하는 자아로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몸을 물질적 요소, 즉 지수화풍의 사대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연기설의 입장에서 보면 사대는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가 아니라 지각활동을 통해 존재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단식은 중생들이 자신의 몸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존재, 즉 육계 가운데 지수화풍 四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촉식은 팔리어로는 'phassa-ahara'인데, 'phassa'는 십팔계를 인연으로 생긴 촉이다. 따라서 촉식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느낌' 즉 촉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의사식은 팔리어로는 'manosancetana-ahara'인데 'manasancetana'는 마음, 즉 육입처의 意를 의미하는 'mano'와 생각, 사유, 지각, 의도를 의미하는 'sancetana'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의사식은 중생의 마음, 즉 지각과 사유, 의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세존은 지각, 사유, 의도를 촉에서 발생한 수, 상, 사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의사식은 수, 상, 사를 의미한다.
식식은 팔리어로는 'vinnana-ahara'인데 'vinnana'는 육계 가운데 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식은 육계의 식이라고 할 수 잇다.
이렇게 살펴볼 때 네 가지 음식은 육계의 지수화풍, 그리고 觸과 촉에서 생긴 受, 想, 思와 육계의 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세존은 이들을 음식, 즉 자양분이라고 했을까?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 즉 오온이다. 우리는 육체,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다섯 가지를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자아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온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계와 촉에서 생긴 수, 상, 사를 취하여 자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각활동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존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의지도 마찬가지다. 촉에서 생긴 수, 상, 사를 계속하여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아라고 인식학데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존재로 인식하는 가운데 생기는 식을 끊임없이 취하여 그것을 존재하는 나의 의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중생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은 촉을 통해 형성된 질료를 취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다. 나무가 수분이나 자양분을 취하여 존재하고 자라나듯이, 오온은 육계와 수, 상, 사를 자양분으로 취하여 존재하면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유계와 수, 상, 사는 오온을 존재하게 하고 자라나게 하는 자양분과 같다고 해서 이들을 음식이라고 부른다.
35. 오온설 5
오온의 성립
우리가 중생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이라는 네 가지 자양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자양분을 탐내어 좋아하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가고, 이렇게 식이 커갈 때 名色이 나타나며, 명색이 나타날 때 行이 자라나고, 행이 자라날 때 미래의 자아가 자라나서 미래의 자아가 다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망상이 계속된다는 것이 위에서 살펴본 <잡아함 374경>의 내용이다.
네 가지 자양분을 탐내어 좋아하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간다고 하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식은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인데 이것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것이다. 즉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허망한 의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식이 우리의 몸 속에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고 있는 것을 세존은 식이 머물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식은 머물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생기는 식은 삶을 통해 성장한다. 어릴 때는 좁은 세계를 인식하지만 어른이 되면 폭넓은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은 식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을 통해 의식세계가 성장하는 것을 세존은 識이 커간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세계는 왜 성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삶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인식을 함으로써 삶을 통해 형성된 의식이 모이기(集) 때문이다. 우리는 지각활동을 하면서, 지각되는 것을 밖에 존재하는 대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그 대상에 대하여 의도를 가지고, 인식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일회적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된다. 날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몸과 감정과 이성과 의지와 의식으로 이루어진 나라고 하는 존재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지각하고, 외부에 존재하는 즐겁거나 괴로운 대상을 감정으로 느끼고, 길거나 짧은 대상을 이성으로 판단하고, 좋거나 나쁜 일을 의지로 선택하면서, 외부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아나 외부의 존재는 촉을 통해 느끼고 있는 허망한 느낌이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참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중생들의 식이다. 따라서 중생들의 식은 지각활동을 하면서, 촉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 존재에 대하여 고락을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함으로써 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지각활동이나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일은 우리에게 그것에 대한 욕구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욕구가 다르면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것도 달라진다. 그래서 세존은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좋아하고 탐내면 식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간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식이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명색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이름과 형태이다. 따라서 식이 자랄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것은 새로운 식이 형성될 때 새로운 이름과 형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식을 자라나게 하는 네 가지 자양분이 식의 성장과 함께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사물은 이렇게 식의 성장을 통해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예를 들어 무지개를 처음 보았을 때는 무지개를 분별하는 식이 없지만 누군가가 그것의 이름이 무지개라는 것을 알려주면 무지개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의식이 해롭게 생긴다. 즉 식이 자라난다. 이렇게 식이 자라나면 여러 가지 색이 층을 이런 반원의 형태로 하늘에 걸려 있는 것(色)을 무지개(名)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존재는 명색이다.
명색이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오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생들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오온이기 때문이다.<잡아함 298경>에서는 명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識을 인연으로 名色이 있다. 어떤 것이 名인가, 수음, 상음, 행음, 식음 이들 사무색음을 말한다. 어떤 것이 色인가? 四大와 사대로 만들어진 色을 色이라고 부른다. 이 色과 앞에 이야기한 名, 이것을 명색이라고 한다.
식이 자라남으로써 명색이 나타난다는 것을 이 경에서는 명색은 식을 인연으로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오온의 수, 상, 행, 식이 명이고 육계의 지수화풍 사대와 사대로 만들어진 것이 색이라는 것이다. 식의 성장을 통해 네 가지 자양분이 오온이라는 존재로 인식되며, 이것이 명색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식이 머물면서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은 식이 머물면서 자라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름과 형태로 된 허망한 존재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아나 세계의 존재와 같은 존재의 세계를 허구적으로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識이라는 사실이다. 즉 오온은 식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이다. 촉을 통해 '있다'고 느껴질 뿐 아직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육계와 수, 상, 사는 식을 통해 이름과 형태를 지닌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즉 식이 네 가지 자양분에 의해 성장하면서 이들을 질료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어 인식하는 것이다.
오온은 이렇게 식에 의해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아'와 '세계의 존재'이다. 식은 촉을 통해 형성된 의식을 존재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인식하는 자신까지 대상화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식이 대상을 인식하고 나서 대상을 인식하는 識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은 다른 무엇보다 더 확실한 존재로 생각한다. 만약 '안식하는 존재인 의식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인식할 수 있을까'라고 행각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나서 의심하고 있는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가 그 예이다.
식이 자신을 인식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대상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인식하는 의식은 생길 수가 없다. 식이 존재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이 인식하는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식이 다른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자신을 대상으로 인식한 것이 오온의 식온이다. 따라서 오온이 성립한 순서로 본다면 식은 맨 나지막이 된다. 오온의 순서는 이렇게 오온이 성립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36. 오온설 6
색온의 의미
오온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나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다. 우선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육신이며 눈, 귀, 코, 혀, 몸을 우리는 육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아가 살고 있는 외부의 세계에는 빛, 소리, 냄새, 맛, 촉감이 있다. 우리는 외부의 세계가 빛, 소리, 냄새, 맛, 촉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과 육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물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질은 사대와 같은 요소가 모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온 가운데 색온은 우리가 사대와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의 육신과 세계를 이루고 있는 물질을 의미한다.
우리는 물질로 된 나의 육신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육신이 죽지 않고 오래 살기를 바라고, 이 육신의 삶을 위해서 힘든 노동을 하고, 남과 투쟁하고, 약자를 착취하고, 다른 생명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육신은 결국 죽게 된다. 우리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이렇게 자아와 세계가 물질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 결과이다. 만약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세존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하기 위해 <잡아함 61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을 색수음(색취온)이라고 하는가? 모든 色은 四大와 사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을 색수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색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이다. 만약 저 색수음을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나 멸진하며, 그것에 대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면 다른 색수음이 다시 상속하지 않고, 생기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묘하다고 하고, 고요해졌다고 하고, 버리고 떠났다고 하고, 일체의 남은 탐애가 다하여 욕탐이 없이 멸진한 열반이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 끊어 없애라고 하는 색수음(색취온)이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로 된 육신이라고 한다면 이 경의 말씀은 육신을 없애라는 말이 되고 만다. 열반을 곧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존은 색취온은 사대와 사대로 만들어진 물질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끊어 없애라고 하시니, 정말 세존께서는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은 죽음이라고 생각하신 것일까?
우리는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색온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중생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색온이고, 다른 하나는 세존께서 깨달은 색온의 실상을 의미하는 색온이다. 그러니까 사대와 사대로 만들어진 색은 중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색온을 의미하고, 그것은 무상하고 변역하는 법이라고 하신 색온은 색온의 실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육신(색수음)이란 사대와 사대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생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깨닫고 보니 물질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십이입처라고 하는 허망한 마음에서 생긴 무상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육신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육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육신은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육신이 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에 욕탐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알아보기 쉽게 풀어서 보면 이 경에서 세존은 육신의 소멸을 곧 열반이라고 한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열반은 잘못된 생각이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참된 생각으로 살아가는 진실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색온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미 살펴보았듯이 세존이 말하는 사대는 외도들이 주장하는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사대가 아니라 六界의 사계이다. 외도들이 생각하고 있는 요소로서의 사대와 육계의 사계는 큰 차이가 있다. 외도들의 사대는 상주불면하는 실체이지만 육계의 사계는 십팔계라고 하는 의식이 촉에 의해 존재로 인식된 것이다. 따라서 외도의 사대는 상주불멸하는 것이고, 육계의 사계는 마음에서 연기한 무상한 것이다.
외도들이 주장하는 四大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외도들이 물질의 실상을 모르고 그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외도의 사대는 중생의 잘못된 생각으로 본 물질의 요소이고, 육계의 사계는 사대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존은 <잡아함 46경>과 이에 상응하는 <상응부 니까야 22.79>에서 우리가 물질, 즉 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글들은 무엇을 色이라고 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거리낀다. 그러면 거기에서 色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무엇이 거리끼는가? 차가움이 거리끼고, 뜨거움이 거리끼고,...... 촉감이 거리낀다. 이와 같이 거리끼면 거기에서 色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물질은 모두가 거리낌이 있을 때 사용되고 있는 언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에서 거리낀다고 하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을 의미한다.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색이 거리끼는 것이고, 듣는다는 것은 소리가 거리끼는 것이고, 만지나는 것은 촉감이 거리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리낄 때 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고 하는 것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질 때 물질이라는 말이 사용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눈과 빛은 볼 때 사용되는 말이고, 귀와 소리는 들을 때 사용되는 말이며, 코와 냄새는 냄새맡을 때 사용되는 언어인 것이지 실재하는 물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삶에서 경험된 내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오온이라는 존재로 인식되게 되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 경에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만지는 삶 속에는 본래 나와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탐욕에 의해 집기한 십이입처라는 허망한 생각으로 보고, 듣고, 만지기 때문에 나와 세계를 분별하는 식이 생겨서 '나라고 하는 말'과 '세계라고 하는 말', 즉 이름을 만들어 놓고 나와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식에 의해 분별되는 것을 名色이라고 한다. 십이연기에서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식이 보고, 듣는 삶을 나와 세계로 분별하기 때문에 색도 나를 이루는 색과, 세계를 이루는 색으로 나누어진다. 눈,귀,코, 혀, 몸은 나를 이루는 색이고, 빛, 소리, 향기, 맛, 촉감은 세계를 이루는 색이다.
다른 오온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거나 들으면 느끼게 되고, 느끼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의도하게 되고, 의도한 것을 인연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 가운데서 보고, 느끼고 , 인식하는 것과, 보이고, 느껴지고, 인식되는 것을 식이 분별한다. 보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은 '나'이고 보이고, 느껴지고, 인식되는 것은 '세계'라고 분별하여 이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온에는 나를 이루고 있는 오온과 세계를 이루고 있는 오온이 있다. 세존은 이러한 두 가지 오온을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가 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온을 오취온이라고 부른다. 오취온은 중생들이 자기의 존재로 '취하고 있는 오온'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나와 세계는 이렇게 동일한 오온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오온이라는 존재가 나와 세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연기법의 진리에 무지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식이라고 하는 분별심이 생겨서, 본래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와 세계를 분별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을 보는 존재와 보이는 존재, 느끼는 존재와 느껴지는 존재, 의도하는 존재와 의도되는 존재, 인식하는 존재와 인식되는 존재로 분별하여, 전자를 나라고 생각하고, 후자를 세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 세계는 항상 동일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만약 우리의 삶의 형태 가운데, 느끼는 삶이나 생각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나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를 오온이 아닌 삼온이나 사온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온은 우리의 삶이 실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앞으로 다른 온의 의미를 살펴보는 가운데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37. 오온설 7
수온, 상온의 의미
<잡아함 61 경>
어떤 것을 受受陰이라고 하는가? 六受身을 말한다. 어떤 것을 六受라고 하는가? 안촉에서 생긴 受와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受를 말한다. 이것을 수수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受는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이다. 만약 저 수수음을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나 멸진하며, 그것에 대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면 다른 수수음이 다시 상속하지 않고, 생기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묘하다고 하고, 고요해졌다고 하고, 버리고 떠났다고 하고, 일체의 남은 탐애가 다하여 욕탐이 없이 멸진한 열반이라고 부른다. ------->
중생들이 몸 안에 있는 자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감정이란 육촉에서 생긴 六受이다. 감정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탐에 의해 모여 있는 십이입처라고 하는 허망한 마음에서 생긴 허망하고 무상한 느낌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느낌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감정은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 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나의 몸 속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에 욕탐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잡아함 46 경>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受라고 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느낀다. 그러면 거기에서 受라는 말이 사용된다. 무엇을 느끼는가. 괴롭다고 느끼고, 즐겁다고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느낀다. 이와 같이 느끼면 거기에서 受라는 말이 사용된다.
<잡아함 61 경>
어떤 것을 想受陰이라고 하는가? 六想身을 말한다. 어떤 것을 六想이라고 하는가? 안촉에서 생긴 想과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想을 말한다. 이것을 상수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想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이다. 만약 저 상수음을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나 멸진하며, 그것에 대한 욕탐을 버려서 마음을 고요히 하면 다른 상수음이 다시 상속하지 않고, 생기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묘하다고 하고, 고요해졌다고 하고, 버리고 떠났다고 하고, 일체의 남은 탐애가 다하여 욕탐이 없이 멸진한 열반이라고 부른다. ---------->
중생들이 몸 안에 있는 자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성이란 육촉에서 생긴 육상이다. 이성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탐에 의해 모여서 나타난 십이입처라고 하는 허망한 마음에서 생긴 허망하고 무상한 사유작용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사유작용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이성이라고 믿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이성은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 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나의 몸 속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에 욕탐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잡아함 46 경>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想이라고 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사유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想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어떻게 사유하는가? 적다고 생각하고, 많다고 생각하며, 한량없이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거기에서 想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유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사유하는 삶 속에는 본래 나와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탐욕에 의해 집기한 십이입처와 허망한 분별심인 육식으로 보고, 듣고, 만지기 때문에 촉이 발생하여, 사유하는 나와 사유되는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갖가지 사견을 일으켜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세존은 이렇게 나와 세계를 구별하는 사유를 무명이라고 하였다.
반야, 즉 지혜는 이러한 잘못된 사유가 사라져,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에 空이며 無我라는 것을 깨닫는 사유이다. 진정한 사유를 통해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반야이다. 반야도 비교하고 추상하여 총괄하는 사유작용이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에 물들지 않고 사유한다면 모든 사물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나타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연기하고 있을 뿐 실체가 없다는 확실한 인식이 있게 될 것이다. 반야는 이와 같이 탐욕이 사라진 청정한 마음으로 연기, 공, 무아를 깨닫는 사유이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나타나는 실체가 없는 현상에 사유를 통해 만든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다. 세존은 인연 따라 나타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을 法(Dharma)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현상을 空이라고 부르며, 여기 붙여진 이름을 가명이라고 부른다. 사물의 이름은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를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라고 하며, 중도에서 본 것이 모든 존재의 실상이다.
용수보살은 <中論>에서 이와 같은 중도실상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연기하는 법을 우리는 공이라고 말한다네.
그리고 또 가명이라고 하나니 이것이 중도의 의미라네.
연기, 공, 가명은 모두 중도실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중도실상에서 보면 실체론에 근거하는 모든 사상적 대립은 무명에서 비롯된 분별이며 착각이며 망상이다.
38. 오온설 8
행온, 식온
<잡아함 61 경>
어떤 것을 行受陰이라고 하는가? 六思身을 말한다. 어떤 것을 六思라고 하는가?
안촉에서 생긴 思와 이비설신의촉에서 생긴 思를 말한다. 이것을 행수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이다. 만약 저 行受陰을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나 멸진하여, 그것에 대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면 다른 행수음이 다시 상속하지 않고, 생기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묘하다고 하고, 고요해졌다고 하고, 버리고 떠났다로 하고, 일체의 남은 탐애가 다하여 욕탐이 없이 멸진한 열반이라고 부른다. --------------->
중생들이 몸 안에 있는 자기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지란 육촉에서 생긴 六思이다. 의지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탐에 의해 모여서 나타난 십이입처라고 하는 허망한 마음에서 생긴 허망하고 무상한 의지작용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의지작용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의지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의지는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 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의지를 나의 몸 속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에 욕탐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며 그런 잘못된 생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은 목석처럼 아무 것도 의도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촉에서 생긴 잘못된 의도가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참된 생각으로 의도하며 살아가는 진실된 삶이라는 것을 이 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잡아함 46 경>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行이라고 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有爲를 조작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行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어떤 유위를 조작하는가?
지각하는 성질을 가지고 色이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느끼는 성질을 가지고 受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사유하는 성질을 가지고 想이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유위를 조작하는 성질을 가지고 行이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분별하여 인식하는 성질을 가지고 識이라는 유위를 조작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유위를 조작하면 거기에서 行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 경에서는 행의 실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의지라는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의지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아라고 알고 있는 의지는 유위를 조작할 때 사용되는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위를 조작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유위를 조작하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유위를 조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유위는 'sankhata'의 한역으로서 '조작된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행은 'sankhara'의 한역으로서 '무엇인가를 모아서 만드는 작용' '조작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유위'는 '행'에 의해 조작된 것을 의미하고 '행'은 '유위'를 조작하는 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과 유위는 이렇게 조작하는 것과 조작된 것의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작용을 의미하는 행이 유위를 조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가 존재로 인식하는 모든 것은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책상을 책상이라는 이름과 책상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름과 형태를 가진 책상을 名色이라고 하며 이것이 곧 유위이다. 그러므로 행이 유위를 조작한다는 것은 행이 명색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이다.
(중략)
行은 자기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즉 유위를 만드는 의지작용을 의미한다. 우리가 존재라고 알고 있는 것은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를 조작해내는 행은 우리의 마음 속에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촉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유위를 조작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의지작용을 하는 생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중생들에 의해 의지작용을 하는 존재로 인식된 것이 오온의 행이다.
<잡아함 61 경>
어떤 것을 識受陰이라고 하는가? 六識身을 말한다. 어떤 것을 六識이라고 말하는가?
眼識 내지 意識을 말한다. 이것을 식수음이라고 부른다. 저 식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변역하는 법이다.
만약 저 식수음을 영원히 끊어서 남음이 없게 하고, 마지막까지 버리고 떠나 멸진하여, 그것에 대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면 다른 식수음이 다시 상속하지 않고, 생기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미묘하다고 하고, 고요해졌다고 하고, 버리고 떠났다고 하고, 일체의 남은 탐애가 다하여 욕탐이 없이 멸진한 열반이라고 부른다. -------------->
중생들이 몸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란 십이입처에서 생긴 육식이다. 의식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탐에 의해 모여서 나타난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긴 허망하고 무상한 인식작용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인식작용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의식이 활동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의식은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 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나의 몸 속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에 욕탐이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욕탐을 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우리는 의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문제는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허망한 인식작용을 불멸하는 영혼이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 속에서 존재하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열반은 목석처럼 아무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참된 진리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진실된 삶이라는 것을 이 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잡아함 46 경>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識이라고 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인식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식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어떻게 인식하는가? 모습을 인식하고, 소리를 인식하고, 향기를 인식하고, 맛을 인식하고, 촉감을 인식하고 법을 인식한다. 이와 같이 인식하면 거기에서 식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삶 속에는 본래 나와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탐욕에 의해 집기한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 허망한 분별심으로 나와 세계를 개별적인 존재로 분별하여 인식한다. 우리의 생로병사는 이러한 분별심에서 일어난다. 십이입처와 육촉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긴 허망한 생각을 행이 유위로 조작해 놓으면, 식은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를 대상으로 인식하여 자신의 존재와 외부의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다. 세존은 이러한 식의 분별작용을 <잡아함 376 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여, 제 가지 자양분(四食)을 좋아하고 탐내면 識이 머물면서 증장하여 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모이게 된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비구여, 누각이나 궁전이 북쪽과 서쪽으로 길고 넓은 벽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창문이 있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면 어떤 곳을 비추겠느냐?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서쪽의 벽을 비추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이와 같이 네 가지 자양분을 좋아하는 마음과 탐내는 마음을 갖게 되면 식이 머물면서 증장하여 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모이게 된다.
이 경에는 識을 사물을 비추는 해에 비유하고 있다. 해에 비유된 식은 유위에 붙여진 이름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인식작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식은 이렇게 행이 조작한 유위에 이름을 붙여서 이것을 다른 이름을 붙인 것과 분별하여 인식하는 작용을 한다. 우리에게 존재로 인식된 것은 모두 이러한 식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아와 세계가 인식된다. 세계는 나의 밖에 존재하고 나는 그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은 식에 의해 나와 세계가 분별되어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무아와 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나와 세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나와 세계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有見이고, 常見이다. 나와 세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無見이고 斷見이다. 세존은 이러한 모순된 두 견해를 모두 사견이라고 배척했다. 그래서 단상중도斷常中道와 유무중도有無中道를 이야기한 것이다.
나와 세계는 삶을 통해 무상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삶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와 나의 세계는 나의 삶의 자취인 것이다. 이렇게 삶의 자취가 실체화 된 것을 유위라고 하고, 실체화되기 이전의 본래적인 삶을 무위라고 한다. 생사는 識에 의해 분별된 유위의 세계에서 나타난 착각이다. 세존은 유위와 무위에 대하여 <잡아함 293 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유위는 생기고, 머물고, 변하여, 없어진다.
무위는 생기지 않고, 머물지 않고,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유위는 생멸하고, 무위는 생멸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멸하는 유위와 불생불멸하는 무위가 별개의 사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유위는 허망한 분별심인 식에 의해 존재로 인식된 것을 의미하고 무위는 연기하고 있는 나와 세계의 참모습을 의미한다.
(중략)
우리의 생사도 마찬가지다.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안식하는 삶을 식이 오온이라는 이름으로 분별하여, 오온을 자아라고 생각함으로써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유위는 본래 생멸이 없는 연기하는 세계를 분별심이 분별을 함으로써 나타난 착각이다. 유위가 본래 없는 것이라면 무위도 본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유위와 무위의 모습을 용수는 <中論 觀三相品>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것이 생기고, 머물고, 없어진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유위법은 없다네. 유위법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무위법이 존재할 수 있으리.
환상 같고, 꿈 같고, 신기루 같아라. 생겨서 머물다 사라진다고 말하는 유위법의 모습은 이와 같아라.
우리는 이렇게 꿈 같고, 신기루 같은 환상 속에서 생사의 괴로움을 느끼며 살고 잇다. 이 허망한 꿈은 식이 분별해 놓은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열반은 분별심, 즉 식을 멸하여 이러한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39. 오온의 종합적 이해
색,수,상,생,식을 왜 '온蘊'이라고 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온'은 팔리어 'khandha'의 한역으로서 '덩어리, 모임, 구성 요소'의 의미가 있다. 한자로 蘊이라고 번역한 것은 덩어리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이것을 '음陰'으로 한역하여 오온을 오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khandha'를 '온'으로 번역한 것은 오온의 의미를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온은 십이입처에서 생긴 허망한 의식들이 욕탐에 의해 모여서 덩어리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은 '망상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음'이라는 번역에도 매우 깊은 뜻이 있다. '陰'은 그림자라는 의미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오온은 실체가 아니라 실상의 그림자라는 의미에서 '음'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오온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오온은 삶의 자취이며, 삶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았다.
오온은 이렇게 삶을 통해 나타난 무상한 의식들이 모여서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망상 덩어리'이며 '삶의 그림자'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진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색온을 이루고, 즐거움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낀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수온을 이루고, 비교하고, 총괄하여 사유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상온을 이루고, 욕구를 가지고 의도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행온을 이루고, 사물을 분별하여 인식한 삶의 그림자가 모여서 식온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온은 우리가 과거에 경험된 내용을 토대로 미래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생긴 의식이 존재화/실체화된 것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진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지각하는 감관을 지닌 육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믿게 되며, 과거로부터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한 경험을 통해 외부에 사물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하여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이 몸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우리가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는 사물과 자아라고 믿는 것은 '경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외부의 사물은 삶을 통해 체험된 내용이 의식에 의해 통일적으로 구성되어 존재로 객관화된 것으로, 이렇게 객관화된 대상은 단순히 체험된 지각 내용의 합계가 아니라 동일한 존재라는 새로운 내용이 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사물을 본 눈과 현재 사물을 보고 있는 눈과 미래에 사물을 보게 될 눈에 대해서 동일한 눈으로 과거에 보았고, 현재 보고 있으며 미래에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본 것도 나이고, 현재 보고 있는 것도 나이며, 미래에 보게 될 것도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의 보는 나와 현재의 보는 나와 미래의 보는 나는 결코 동일한 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동일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체험하는 의식도 통일적으로 구성되어 존재로 객관화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객관화를 통해 통일적으로 구성된 존재로서의 자아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가 단순히 합해진 것이 아니라 '불변하고 동일하게 존재하는 자아'가 된다.
그 결과 우리는 불변하고 동일한 존재인 내가 나의 동일한 감관, 감정, 이성, 의지, 의식을 가지고, 동일하게 존재하는 외부의 대상에 대하여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한다고 믿게 된다. 이런 신념을 고집하는 것이 중생이다. 그리고 오온은 이러한 신념으로 살아가는 중생들의 의해 체험된 내용이 통일적으로 구성되어 실체화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은 과거, 현재, 미래에 체험되고, 체험하고, 체험될 내용이 하나로 뭉쳐진 허망한 의식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오온의 모습을 <잡아함 8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과거의 色은 무상하다. 그런데 하물며 현재의 색이 무상하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관찰한 聖第子는 과거의 색을 돌아보지 않고, 미래의 색을 바라지 않으며, 현재의 색을 싫어하고 떠나서 바르게 없애고자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 미래의 수, 상, 행, 식도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의 수, 상, 행,식이 무상하지 않겠느냐. 오온이 괴로움이고, 공이고, 무아임도 마찬가지이니라.
세존은 이와 같이 중생들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불변하는 동일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오온에 대하여 그것이 무상한 체험 내용임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체험된 내용을 모아서 통일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겠는가'하는 의심이 남을 것이다.
세존 당시에도 그런 의문을 가진 제자가 있었다. 전에 이야기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어서 중생이 되도록 돕고, 중생을 세상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는 법문을 들은 파구나라는 비구는 세존에게 이 네 가지 자양분은 누가 먹느냐고 물었다. 이러한 물음에 세존은 <잡아함 372경>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食을 먹는 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만약 식을 먹는 자가 있다고 말했다면 너는 당연히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식이 음식, 즉 자양분이라고 말했으므로 너는 마땅히 '어떤 인연으로 식이라는 자양분이 있게 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면 나는 '미래를 초래하여 미래의 생을 상속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육입처가 있고, 육입처를 인연으로 촉이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파구나가 다시 물었다. "누가 접촉합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접촉하는 자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촉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너는 '어떤 인연에서 촉이 생깁니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면 나는 '육입처를 인연으로 촉이 생긴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경에서 파구나는 동일하게 존재하는 자아를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세존께서 네 가지 음식을 이야기했을 때 이 음식을 먹는 존재로서의 자아가 어떤 것인가를 묻는다. 또 촉이 있다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 외부의 사물을 접촉하여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자아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우리는 누구나 파구나와 마찬가지로 내가 음식을 먹고 살고 있고, 내가 외부의 사물을 접촉하여 그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가 동일한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촉을 통해 생긴 허망한 의식이 실체화한 것이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네 가지 음식은 은유이다. 나무가 먼저 존재하면서 자양분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양분이 있을 때 나무가 존재하면서 성장하듯이, 삶을 통해 발생한 네 가지 의식이 있을 때 '자아라는 생각'이 존재하면서 커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존은 누가 먹는가를 묻지 말고 음식을 먹는 존재, 즉 '동일한 자아'라는 생각을 만들고 있는 네 가지 음식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를 묻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육입처를 인연으로 촉이 생기며, 촉을 인연으로 네 가지 음식이 있게 된다고 대답한 것이다.
세존은 과거 현재 미래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자아'가 있다는 파구나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 주기 위해서, 그러한 잘못된 생각이 있을 때 육입처가 사라지지 않고 육입처를 인연으로 촉이 발생하며, 촉에서 나온 네 가지 음식을 끊임없이 '자아'로 취하기 때문에 생사의 허망한 생각이 이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했지만, 파구나는 여전히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누가 외부의 사물을 접촉하느냐고 다시 묻고 있다. 파구나와 같이 '자아'가 삶을 통해 체험한 의식 내용이 통일적으로 구성된 것인 줄을 깨닫지 못하면 세존의 설법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자아'가 체험된 내용이 통일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체험된 내용을 모아서 통일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그 무엇은 존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의심은 음식이 있으면 그것을 먹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를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
존재를 구성하는 의식은 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어떤 내용이 지각되면 지각된 내용을 인연으로 생긴다. 과거에 존재를 통일적으로 구성한 의식과 현재 존재를 통일적으로 구성하는 의식과 미래에 존재를 통일적으로 구성할 의식은 동일한 의식이 아니라 매순간 연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통일적으로 구성하여 존재로 객관화함으로써 동일한 의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체험된 내용을 가지고 내외의 존재를 통일적으로 구성하는 것을 유위를 조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유위를 조작하는 작용이 실체화된 것이 오온의 행이다. 이러한 행의 작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행의 의미를 살펴볼 때 소개했던 <잡아함 46 경> 이다. 이 경을 다시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그들은 무엇을 행이라고 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유위를 조작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어떤 유위를 조작하는가? 물질적인 성질을 가지고 색이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느끼는 성질을 가지고 수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사유하는 성질을 가지고 상이라는 유위를 조작하고, 유위를 조작하는 성질을 가지고 행을 조작하고, 분별하여 인식하는 성질을 가지고 식이라는 유위를 조작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유위를 조작하면 거기에서 행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행은 같은 성질, 즉 같은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체험을 모아서 통일적으로 구성하여 오온을 조작하는 작용이다. 행은 다른 것만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가지도 유위로 조작한다. 체험의 내용은 이렇게 행에 의해 통일적인 존재로 구성되어 객관화되고 대상화된다. 식은 이것을 대상으로 인식한다. 오온은 이렇게 행에 의해 조작되고, 식에 의해 객관적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40. 유전문과 오온 1
세존은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기법은 어떤 것인가? <잡아함 299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法界는 常住하며, 여래는 이 법을 자각하고 등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서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현시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無明을 연하여 行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여 나타나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한다.
연기법은 세존이 깨달은 진리이다. 세존은 이 세계가 어떤 실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십이연기는 이러한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을 중생들을 위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즉 중생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계와 자아는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기 때문에, 이러한 망념을 소멸하여 연기하고 있는 법계의 모습을 깨닫게 하기 위해 십이연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십이연기는 오온이 형성되는 과정과 형성된 오온이 식의 증장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오온이 식의 증장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구성되는 것을 <잡아함 39경> 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다섯 가지 종자가 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종자인가? 뿌리 종자, 줄기 종자, 가지 종자, 열매 종자, 씨 종자를 말한다. 이 다섯 종자가 끊어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고, 썩지 않고, 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견실하게 익었다 할지라도, 흙은 있으나 물이 없으면 그 종자는 살아서 크게 자라지 못하며, 물은 있으나 흙이 없어도 살아서 크게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그 종자가 흙이 있고 물이 있으면 그 종자는 살아서 크게 자란다.
비구여, 저 다섯 가지 종자는 자양분이 있는 식(取陰俱識)을 비유한 것이고, 흙은 사식주四識住를 비유한 것이고, 물은 희탐을 비유한 것이다. 識은 네 가지에 머물면서 그것에 반연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識은 색 가운데 머물면서 색을 반연하여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간다. 식은 수,상,행 가운데 머물면서 수,상,행에 반연하여 그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며 커간다.
이 경에서 다섯 가지 종자는 오온으로 구성될 요인을 의미한다. 뿌리, 줄기, 가지, 열매, 씨앗은 각각 오온의 색,수,상,행,식에 비유한 것이다. 뿌리 종자는 뿌리가 될 종자, 즉 오온의 색이 될 요인에 비유하고, 줄기 종자, 가지 종자, 열매 종자, 씨앗 종자는 각각 오온의 수,상,행,식이 될 요인에 비유한 것이다. 뿌리나 줄기가 될 요인이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 속에 들어 있듯이, 오온의 識 속에는 미래에 오온으로 성립될 요인이 종자처럼 들어 있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다섯 종자는 이렇게 다섯 가지로 만들어질 요인을 속에 담고 있는 하나의 볍씨와 같은 식識을 의미한다. 세존은 이러한 볍씨와 같은 씨앗을 자양분이 있는 식을 의미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전에 식을 증장하게 하는 단식, 촉식, 의사식, 식식이라는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다. 여기서 네 가지 자양분은 오온으로 구성될 오온의 질료이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자양분을 갖고 있는 식'은 오온의 질료가 될 네 가지 자양분을 취하여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는 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취음구식, 즉 '오온을 취하여 함께 있는 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에 상응하는 <상응부 니까야>에는 '자양분이 있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識은 그 속에 오온으로 구성될 요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요인은 중생의 삶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중생들의 삶을 통해 형성된 경험의 내용들은 오온으로 구성될 요인이 되어 식 속에 종자로 간직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연을 만나면 식 속의 종자가 새로운 오온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의 핵심이론인 종자설과 다름이 없다. 아뢰야식 속에는 종자가 있는데 그 종자는 현실적인 삶을 통해서 형성되고, 이렇게 삶에 의해 형성되어 아뢰야식 속에 간직된 종자는 인연을 만나면 현실적인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유식사상의 종자설이다. 이것을 '현행은 종자를 훈습하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現行熏種子 種子生現行)' 라고 하는데, 바꾸어 말하면 중생이 지은 업은 종자가 되어 아뢰야식 속에 보관되었다가 인연을 만나면 새로운 업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의 識增長說은 유식사상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나의 씨앗 속에 간직된 다섯 종자는 흙과 물이라고 하는 두 가지 인연을 만나야 뿌리, 줄기, 가지가 나오고 열매를 맺어 새로운 종자가 된다. 만약 두 가지 인연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종자는 자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 속에 간직된 오온의 종자, 즉 네 가지 자양분은 사식주와 희탐이라는 두 가지 인연을 만나야만 식이라고 하는 씨앗이 자라나 그 속의 다섯 종자가 오온으로 새롭게 구성된다고 하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四識住란 오온 가운데 색, 수, 상, 행온을 의미한다.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識은 무상한 분별심이다. 따라서 스스로는 사라지지 않고 머물고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중생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자라나는 것은 그것이 머물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의 빛은 스스로 머물 수는 없으나 벽이 있으면 벽에 의지하여 머물듯이 오온의 색, 수, 상, 행이 식이 머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색, 수, 상, 행을 식이 머무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사식주라고 한다.
중생들은 삶을 통해 체험된 내용을 통일적으로 구성하여 오온이라는 존재로 객관화시켜 놓고, 이렇게 오온으로 존재화된 세계 속에서 식을 인식의 주체, 즉 자아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중생들이 인식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식 속에는 삶을 통해 형성된 체험의 내용이 오온의 종자가 되어 들어 있다. 중생의 세계는 이러한 식 속의 종자들이 존재로 객관화된 것이다. 중생들은 이렇게 객관화된 존재의 세계에 머물면서 인식되는 존재를 반연하여 희탐, 즉 욕구를 일으킨다. 그러면 그 욕구에 의한 삶을 통해 체험된 내용은 욕구에 상응하는 새로운 존재로 구성된다. 이렇게 새롭게 구성된 존재를 새로운 이름으로 인식함으로써 식은 새로운 모습으로 증장한다.
식이 새롭게 증장하면 중생의 삶은 새로운 식을 토대로 새롭게 전재된다. 이것이 중생의 윤회이다. 식은 오온에 머물면서 희탐이 있으면 증장하고, 식이 증장하면 기존의 오온을 토대로 미래의 오온을 구성하고, 미래의 오온이 구성되면 증장된 식은 다시 이 오온에 머물면서 증장하고, 이렇게 식의 증장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오온이 상속하고 있는 것이다.
식이 색, 수, 상, 행온에 머물면서 증장한다는 것은 식이 색, 수, 상, 행온에 의존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즉 오온에 의존하여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이입처에 의존하여 識이 연기하고, 식이 생겨서 십팔계의 상태가 된 마음에 의존하여 觸이 연기하고, 촉에 의존하여 외부에 사물이 있다는 생각, 즉 色이 연기하고, 그 색에 의존하여 受가 연기하고, 수에 의존하여 想이 연기하고, 상에 의존하여 思가 연기하고, 색, 수, 상, 행에 의존하여 새로운 識이 형성된다. 십이입처라는 허망한 생각이 있으면 그 생각에 근거를 두고 오온이 끊임 없이 함께 나타나는 것을 식의 증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온에는 발생의 측면과 증장의 측면이 있다. 식은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증장의 측면에서 보면 식을 제외한 다른 오온에 의존하여 연기한다. 수, 상, 행은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촉을 인연으로 해서 생긴다. 그러나 증장의 측면에서 보면 수는 촉에서 존재를 느껴진 색에서 연기하고, 상은 수에서 연기하며, 행은 상에서 연기한다. 이와 같이 오온은 인연에 의해 발생하고, 인연에 의해 발생한 오온은 무명과 욕탐이라는 인연이 있으면 사라지지 않고 그 오온에 의지하여 새로운 오온이 연기한다.
이러한 오온의 연기 구조를 정리하면 색에서 수가 연기하고, 수에서 상이 연기하며, 상에서 행이 연기하여 이들을 유위로 조작한다. 이렇게 유위를 조작하면 식은 이것을 名色으로 분별한다. 그러면 식은 이 명색에 의존하여 머물면서 증장한다. 식이 증장하면 새로운 색이 연기하고, 수, 상, 행이 차례로 연기하여 새롭게 유위를 조작하면 식은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이것을 인식하고, 이것에 머물면서 증장한다. 이러한 오온의 연기 구조를 보다 간단히 정리하면 식에서 명색이 연기하고, 명색에서 새로운 식이 연기하며, 새롭게 증장한 식에 의존하여 새로운 명색이 연기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식과 명색의 순환적이 연기를 통해서 중생의 생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십이연기설이다. <잡아함 288경>은 식과 명색의 순환적 연기가 어떻게 생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경은 사리불과 구치라의 문답을 기록한 것인데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老死는 生에 의존하여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生, 有, 取, 愛, 受, 촉, 육입처, 명색은 식에 의존하여 나타납니다. 식은 다시 명색에 의존하여 나타납니다."
존자 사리불이 존바 마하 구치라에게 물었다. "앞에서는 명색이 식에 의존하여 나타난다고 하고서, 이번에는 다시 명색이 식의 연이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존자 마하 구치라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비유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세 개의 갈대를 땅 위에 세우면 서로 위지하여 설 수 있으나 하나를 제거하면 나머지 둘이 설 수 없고, 둘을 제거하면 하나가 설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서로 의지함으로써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식이 명색을 의존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서로 의지하여 살면서 자라납니다."
이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식과 명색의 순환적 연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자라난다는 것은 名色에 의존하는 識의 증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식과 명색의 순환적 연기에 의해 십이연기 가운데 육입처에서 노사에 이르는 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오온에는 발생의 측면과 증장의 측면이 있는데 이 경의 연기설은 이 두가지 측면을 결합한 것이다. 이 경에서 식와 명색의 순환적 연기는 오온의 증장의 구조를 보여 주고, 육입처에서 촉, 수, 애, 취, 유 까지는 오온의 발생의 측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식이 명색에 의존하면서 증장하는 가운데 육입처에서 새롭게 발생한 촉에 의해 수, 상, 사가 발생하면 애탐하는 것을 취하여 유, 즉 새로운 오온을 구성하므로써 생 노사의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이 경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오온을 자기 존재로 취하여 살아가는 중생의 삶의 모습이다. 세존은 보리수 아래서 자신의 삶이 이렇게 식과 명색의 순환적 연기구조 속에 있음을 자각했다. 그래서 식과 명색의 순환적 연기는 무엇 때문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가를 생각했다. 그 결과 識과 名色이 行에 의해 조작된 유위임을 깨달았고, 이러한 유위를 조작하는 행은 일체의 법이 연기한다는 사실의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41. 유전문과 오온 2
십이연기설의 다양한 해석 가운데 삼세양중인과설은 전통적으로 십이연기설에 대한 가장 완전한 해석으로 인식되어 있다. 三世兩重因果說이란 十二支 가운데 무명과 행을 과거의 두 가지 因으로 보고, 識에서 受까지를 현재의 다섯 가지 果로 보며, 애, 취, 유를 미래의 세가지 因으로 보고, 생, 노사를 미래의 두 가지 과로 보는 십이연기설의 해석이다. 십이연기설은 미혹한 상태에서 업을 지어 괴로운 과보를 받는 중생의 삶이 과거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 삼세양중인과설이다.
이에 의하면 무명은 과거의 미혹이고 행은 과거의 업이다. 무명과 행은 과거 미혹한 상태와 그 상태에서 지은 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과거의 원인에 의해 현재의 식이 형성되며, 그 식에 의해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의 세계, 즉 명색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의 세계를 상대로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생각된 것을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로 생각하는 가운데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식, 명색, 육입처, 촉, 수이다. 식, 명색, 육입처, 촉, 수는 과거의 두 가지 원인에 의해 그 결과로 나타난 현재의 중생의 다섯 가지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렇게 과거의 업에 의해 형성된 식을 토대로 살아가면서 삶을 통해 형성된 체험의 내용에 애탐을 일으키고, 애탐에 상응하는 것을 취하여 자기의 존재를 구성한다. 여기에서 애탐을 일으켜 취하는 것, 즉 애와 취는 미혹이고, 자기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 즉 유는 업이다. 이러한 애, 취, 유는 미래의 새로운 생, 노사를 일으킨다. 따라서 애, 취, 유는 미래의 생을 일으키는 세 가지 원인이 되고, 그 결과 나타난 생, 노사는 미래의 과보가 된다.
이와 같이 과거의 인에 의해 현재의 삶이 나타나고, 현재의 삶에서 미혹을 벗어나지 못하고 애탐을 일으키고 취착하여 미래의 자기의 존재를 구성하며 이것이 미래의 삶의 원인이 되어 다시 태어나 늙어 죽는 생사윤회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것이 삼세양중인과설이다. 이러한 삼세양중인과설을 현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불교는 무아설인데 삼세양중인과는 윤회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저변에는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아설을 주장한 세존은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착하게 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업보윤회설을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은 세존이 가장 우려한 단견이다. 물론 죽지 않고 생사윤회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견도 잘못된 것이지만 죽으면 그만이라는 단견은 더욱 잘못된 생각이다.
무아설과 업설은 별개의 이론이 아니다.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는 것이 불교의 업설이며 무아설이다. 십이연기설은 이러한 무아설와 업설이 잘 조화된 연기설이다. 그리고 삼세양중인과설은 근본경전에 충실한 십이연기설의 해석이다. 십이지를 삼세에 나누어서 중첩되는 인과관계로 십이연기를 해석한 삼세양중인과설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식의 증장설과 일치하고 있다.
십이연기설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자아가 세상에 태어나 죽는다는 중생들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무명에서 비롯된 착각임을 설명하는 교리이다. 이러한 착각의 세계에서는 증장하는 식이 윤회의 주체가 되는 '자아'로 인식되고, 그 '자아'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에 걸쳐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죽어가는 존재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끊임없이 생사의 세계에 유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생이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십이연기설이므로 삼세양중인과설은 십이연기의 지극히 당연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생의 생사의 세계는 실상의 세계가 아니라 망념의 세계이다. 삼세에 걸쳐 생사를 거듭한다는 중생들의 생각은 연기법의 진리를 모르는 무명의 상태에서 탐욕과 애착을 일으켜 유위를 허구적으로 조작함으로써 나타난 착각이다.
이러한 중생들의 허망한 생사유전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 십이연기설의 유전문이다. 무명이 있으면 생, 노사가 있다고 설해지는 연기설은 십이연기설의 유전문이다. 따라서 삼세양중인과설은 엄밀히 말하여 십이연기설 전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유전문에 대한 해석이다.
십이연기설에는 유전문과 환멸문이 있다.
중생의 생사유전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유전문이고,
허망한 생사의 세계를 멸하여 본래적인 삶으로 환원하는 길을 보여 주는 것이 환멸문이다.
세존께서 십이연기를 설하신 목적은 환멸문에 있다.
중생들의 생사윤회가 착각이라는 것을 밝혀 그러한 허망한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하려는 것이 세존의 근본 취지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이해는 유전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십이연기의 이해는 유전문과 환멸문의 이해가 병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십이연기에 대한 이해는 유전문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오해가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환멸문에서는 시간성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무명이 멸하면 십이지가 모두 멸하기 때문이다. 무명에서 비롯된 삼세, 즉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분별도 무명이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없는가? 시간은 중생들의 생각 속에서는 존재한다. 그러나 시간의 실상은 존재의 실상과 마찬가지로 空이다. 시간은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의 이해도 유무 이견을 떠나 중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느끼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시간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다.
시간은 항상 사물과 함께 존재한다. 만약 사물이 없다면 시간도 없다. 시간은 존재가 아니라 흐름이다. 흐르는 시간을 묶어 두는 것이 사물이다. 시간은 어떤 사물이 '지속하는 동안'을 의미한다. 이 촛불은 한 시간 동안 탔다는 말은 촛불이 한 시간 동안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촛불이 한 시간 동안 존재했다고 말할 때 시간도 한 시간이 존재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을 잘 살펴보면 존재하고 있지 않고 무상하게 흘러간다. 과거는 이미 흘러간 시간이므로 존재하는 시간은 아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므로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시간이다. 그런데 과거와 미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사이, 즉 현재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도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시간의 실상이다. 그렇다고 시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시간의 실상은 공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태어나서 죽어 가는 중생들의 생사윤회는, 무상한 체험의 내용을 자아와 세계로 실체화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분별하여 나타난 착각이다. 유전문은 이러한 착각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십이지라는 시간적 연기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환멸문에서는 이러한 착각이 사라지므로 시간의 분별도 사라진다.
42. 환멸문과 팔정도
세존이 깨달은 진리는 십이연기의 유전문만이 아니라 환멸문을 포함하고 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苦성제와 集성제를 이루고 환멸문은 滅성제와 道성제를 이루어 불교의 진리체계인 사성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전문은 이미 살펴보았듯이 중생들이 삼세에 걸쳐 윤회하는 모습을 밝힌 것이고, 삼세양중인과설은 이것을 설명한 것이다. 따라서 삼세양중인과설이 삼세와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여 불교의 무아설에 위배된다고 할 수는 없다. 무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자아와 세계가 허구적으로 조작되고 있는 것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이 보여 주기 때문에 삼세양중인과설은 유전문의 해석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다.
삼세양중인과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세존이 말씀하신 '무아'를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한 사람이다. 그러나 '무아'는 '참된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시설된 것이지 단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나'는 환멸문에서 나타난다.
환멸문의 이해를 위해서는 십이연기의 逆觀과 順觀을 살펴보아야 한다. 십이연기를 사유하는 방법에는 老死에서 無明까지 거꾸로 사유하는 법과, 무명에서 노사까지 순서대로 사유하는 방법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사유를 역관과 순관이라고 한다. 세존은 역관을 통해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깨달았고, 순관을 통해 유전문과 환멸문을 증득했다. 역관을 통해서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진리임을 알게 되었고, 순관을 통해 그 진리를 몸소 체험하여 증득한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십이연기의 역관과 순관이며, 유전문과 환멸문이다. 따라서 십이연기는 단순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하여 체득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가 십이연기의 역관과 순관을 알고, 유전문과 환멸문을 알아도 생사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이 관념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 체험을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존과 같은 사유와 실천을 하지 않으면 십이연기라는 진리도 한낱 관념적 이론에 머물게 될 뿐이다.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것은 역관, 순관과 함께 사성제를 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유전문의 역관은 고성제를 의미하고, 순관은 집성제를 의미하며, 환멸문의 역관은 멸성제를 의미하고, 순관은 도성제를 의미한다.
세존은 늙고 죽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원인을 사유해 갔다. 그 결과 무명이라는 괴로움의 뿌리에 도달한다. 세존은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는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유전문의 역관이며 고성제이다.
세존은 이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무명의 상태에서 어떻게 늙고 죽는 괴로움이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무명의 상태에서 삶을 통해 형성된 허망한 생각들이 욕탐에 의해 모여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조작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유전문의 순관이며 집성제이다.
세존은 늙고 죽는다는 것이 허망한 생각이라면 이 허망한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것을 없애야 하는지를 차례로 사유하여 무명을 없애면 더 이상 없앨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환멸문의 역관이며 멸성제이다.
이러한 깨달음에 의지하여, 즉 무명을 멸하여(正見) 사유하니(正思惟) 차례로 십이지가 멸하여 늙어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이것이 환멸문의 순관이며 도성제, 즉 팔정도이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연기의 도리를 깨닫는 실천적 교리이다. 연기설이라는 이론적 교리는 사성제라는 실천적 교리의 실천을 통해 공허한 이론이 아닌 체험되는 진리가 되는 것이다. 세존은 <초전법륜경>으로 불리는 <잡아함 379경> 에서 다섯 비구에게 맨 처음 자신의 깨달음을 술회하면서 과거에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성제에 대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이해하여 실천한 결과 안목이 생기고, 알게 되고, 지혜가 생기고, 마음이 밝아져 깨달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존은 십이연기라는 진리를 사성제의 실천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십이연기의 환멸문은 사성제의 도성제인 팔정도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을 비교해 보면 팔정도는 십이연기의 환멸문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무명은 正見에 의해서 없어진다. 따라서 무명이 멸한다는 것은 정견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견이 생기면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할 것이다. 이것이 팔정도의 正思惟, 正語, 正業이다. 따라서 무명에서 연기한 身口意 삼행은 정견에서 비룻된 바른 삶, 즉 정사유, 정어, 정업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십이연기의 識와 名色은 분별심에 의해 새로운 명색이 나타나 식이 증장하는 중생들의 삶의 구조를 의미한다. 이러한 잘못된 삶의 구조는 바른 삶을 열심히 실천하는 가운데 사라진다. 이것이 팔정도의 正命과 正精進이다. 따라서 식과 명색의 멸은 정명과 정정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정도의 正念은 사념처의 실천을 의미한다. 사념처는 육입처에서 有, 生, 老死에 이르는 소위 육촉연기의 환멸문이다. 身, 受, 心법을 여실하게 관찰함으로써 육입처, 촉, 수, 애, 취, 유를 멸하는 수행법이 사념처인 것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육입처에서 유까지는 정념을 통해서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정도의 正定은 태어나서 늙어 죽는다는 허망한 생각이 사라진 멸진정, 즉 열반을 의미한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생, 노사는 정정의 성취를 통해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십이연기의 환멸문은 팔정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무명이 멸하면 생, 노사가 멸한다고 알고 있어도, 정견으로 부지런히 살아가는 팔정도의 실천이 없으면 무명이 멸하지도 않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정견에 의해서 본다면 존재와 시간은 연기한 것이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존은 이렇게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것을 空이라고 한다. 진리, 즉 연기법을 아는 정견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연기한 것이므로 공이고, 존재가 공이기 때문에 존재로 인해 생긴 시간도 공이다. 팔정도는 공의 세계에서 무아로 살아가는 진실된 삶의 모습이며 이것이 환멸문이다. 용수는 <中論 觀時品>에서 이러한 공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과거의 시간 속에 미래와 현재가 들어 있지 않다면
미래와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과거를 원인으로 한다고 할 수 있으리.
과거의 시간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시간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시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와 현재라는 두 시간은 있을 수 없다.
시간은 머물 수 없고, 시간은 갈 수도 없다.
시간을 있다고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시간의 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으리.
사물로 인해서 시간은 존재하나니, 사물을 떠나서 어떻게 시간이 존재할 수 있으리.
사물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어떻게 시간을 존재한다고 할 수 있으리.
존재도 시간도 마음에서 연기한 것임을 알고 공의 세계에서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무분별의 진실된 삶이 실현되는 무아의 삶, 이것이 팔정도이여 십이연기설의 환멸문이다.
43. 연기의 의미
'연기'는 팔리어 'paticcasamupada'를 번역한 말인데, 의지하여 함께 나타남의 의미이다. 그리고 연기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기고피기此起故彼起'는 연기의 원어 'paticcasamupada'의 의미를 충실하게 보여준다. 'paitcca'는 의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전에 살펴본 식과 명색이 세 개의 갈대처럼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식과 명색은 공간속의 두 존재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식은 명색을 인식함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이고, 명색은 식에 의해 인식됨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의존 관계는 공간 속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점하고서 서로 의존하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인식의 주체와 대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다만 중생들은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몸 속에는 識이 존재하고, 몸 밖의 공간에는 명색이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paticca'는 '식이 있는 마음 속에 명색이 있다'는 의미이므로 '차유고피유'는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식과 명색의 의존 관계는 단순한 상호 의존 관계가 아니라 식이 명색에 머물면서 증장하는 관계이다. 욕탐이 있으면 식은 명색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증장하면서 새로운 망념을 일으킨다. 이렇게 새롭게 생긴 망념은 이것을 생기게 한 식의 증장과 함께 나타난다.
'samuppada'는 함께 나타남을 의미한다.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식이 증장하면서 생긴 망념이 증장하는 식과 함께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함께 나타난다는 것은 인연이 되는 것과 그것에 의지하여 생긴 것이 시간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과거의 마음도 파악할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파악할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파악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새로운 망념의 발생은 이와 같이 시간으로 분리될 수 없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과거, 현재, 미래로 분리된 시간 속에서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이루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samuppada'를 설명하는 '차기고피기'는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시간은 무상하게 쉬지 않고 흘러간다.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시간 자체가 한 시간, 두 시간 동안을 존재해서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인식될 때, 그 존재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동안 시간도 존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과거, 현재, 미래는 이와 같이 존재를 통해서 분리된 시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분리는 존재가 동일성을 지니고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존재는 무상한 체험의 내용이 마치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통일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예를 들어 촛불은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촛불을 동일한 존재로 느끼는 것은 우리의 눈에 촛불이 동일한 모습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하게 지각된 모양을 모아서 이것을 통일적으로 구성하여 동일한 촛불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식의 대상이 동일한 존재로 구성되면, 인식하는 주관도 동일한 존재로 구성된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는 타는 촛불을 보았고, 현재는 꺼진 촛불을 보고 있으며, 미래에는 다시 타는 촛불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자아도 촛불과 함께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로, 즉 시간 속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은 존재를 통해 나타나고, 시간이 나타나면, 존재는 이 시간 속의 존재로 인식된다. 그런데 존재는 이렇게 우리가 허망하게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하는 존재와 시간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을 통해 연기하는 모든 법은 본래는 공간의 구분도 없고, 시간의 구분도 없는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나고 있다. 연기는 이렇게 마음이라는 한 곳에서 동시에 모든 법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연기하는 법계에 살면서도 중생들은 그 법계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망념을 일으켜 존재와 시간을 조작해 놓고, 모든 존재가 공간적으로는 각기 다른 위치에 존재하고, 시간적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생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생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마음 속에서 연기한 법이 무명에서 비롯된 욕탐에 의해 모여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集이라고 한다. 중생들이 느끼는 생사의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성제의 집성제는 이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집성제는 종생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마음에 연기한 법을 욕탐으로 모아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교리이며 이것을 관찰하는 것이 유전문의 순관이다. 유전문의 순관을 통해 연기한 법이 욕탐에 의해 모이기 때문에 생사의 세계가 나타난 것이라는 집성제를 깨닫고, 환멸문의 순관인 도성제, 즉 팔정도를 수행하여 욕탐을 멸하면 집이 일어나지 않아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 된다.
연기의 실상을 알아서 무명을 멸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과정에는 시간의 분별이 없다. 즉 일정한 시간 동안 수행하면 생사가 사라지고 열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생사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즉 등불을 켜면 수천 년의 어둠이 일시에 사라지듯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무명이 멸하면 마음 속에서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하는 법계에는 존재와 시간의 분별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허무의 세계는 아니다. 법계는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연기하는 진실된 삶의 세계다. 이러한 법계의 모습을 의상 조사는 <법성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연기하는 법계는 둘이 없는 한마음, 모든 법은 생멸 없어 본래부터 열반이라.
이름 없고, 모습 없어 일체 분별 끊겼나니, 깨닫지 않고서 어찌 알리오.
하나의 티끌은 시방세계 품고 있고, 일체의 티끌 속도 이와 같아라.
멀고 먼 무량겁이 한 생각이요, 한 생각이 그대로 무량겁이다.
처음 발심하는 때에 정각을 이루나니, 생사와 열반은 항상 함께 한다.
44. 法과 法界의 의미
우리가 사는 세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법의 세계, 즉 법계다. 그리고 '법은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기 때문에 법계는 마음의 세계다. 세존은 이러한 법계를 깨닫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다. 생사는 존재가 있을 때 나타난다. 존재가 있어야 그 존재의 생사도 있다. 그런데 존재는 중생들이 허망하게 조작해 놓은 유위다. 따라서 생사는 허위이며 착각이다.
존재의 실상은 연기하는 법이다. 그리고 법은 연기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공이다. 空은 생사나 생멸이 없다. <반야심경>에서 '모든 법은 공이기 때문에 불생불멸의 모습이다'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중생들은 이러한 불생불멸의 법을 존재로 착각하여 생사의 세계에 빠져 있다. 세존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서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다.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하는 법계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면 그것이 생사의 세계이고, 법계를 깨달아 여법하게 살아가면 생사의 세계가 그대로 열반이다.
세존은 <잡아함 299 경> 에서 자신이 깨달은 법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는 상주하며,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서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현시하나니라.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니, 말하자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여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한다.
세존이 깨달은 것은 항상 머물고 있는 법계와 이 법계를 이루는 법칙, 즉 연기법이다. 세존은 우리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가 마음에서 연기하고 있는 법계라는 것을 깨닫고,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생사의 세계도 그 실상은 어리석은 마음인 무명에서 연기한 법계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하여 십이연기를 설하였다.
그렇다면 세존이 깨달은 상주하는 법계는 어떤 것일까? <상응부 니까야 12. 20> 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연기란 어떤 것인가? 여래가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生을 연하여 老死가 나타난다. 그 界 뿐만 아니라 법칙의 상주성과 법칙의 확정성과 이것의 조건성도 상주한다.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증득했다.
세존은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기한 법계는 상주한다는 사실, 그리고 연기법이라고 하는 법계의 법칙은 불변의 확정된 법칙이며, 그것은 조건 아래서 작용하는 조건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법계가 상주한다는 말은 '연기하는 법의 세계는 연기법이라고 하는 벌변의 확정된 법칙에 의해 조건에 의존하는 상태로 항상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연기는 어떤 것일까? 앞에 소개한 <상응부 니까야>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行, 실로 그곳에 있는 것은 眞如이며, 진실성이며, 불변이성이며, 조건성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 세존은 '무명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행' '그곳에 있는 것'을 진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명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행이 있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그곳은 법계, 즉 마음이다. 행은 어리석은 마음인 무명에서 연기한 법이다. 따라서 행이 있는 곳은 마음이다. 법계, 즉 마음의 세계는 연기하는 세계이다. 무명이 있으면 그 무명을 조건으로 행이 있고, 무명이 사라지면, 조건이 사라지므로 행도 사라진다. 이렇게 조건에 의해 연기하는 세계가 법계이므로 법계에는 연기라고 하는 진리가 있다. 세존이 말하는 진여는 법계의 진리인 연기를 의미한다.
연기의 법칙은 이렇게 모든 법이 연기하고 있는 법계의 진실되고, 변함이 없는, 같은 조건 아래서는 항상 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는 진리이다. 그리고 법은 이러한 연기의 법칙에 의해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을 의미한다. 세존은 연기의 법칙에 의해 나타난 현상을 법이라고 불었다. 법이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법계의 법칙, 즉 연기법을 의미하고, 다음으로는 연기한 현상을 의미한다.
세존은 법에 유위법과 무위법이 있다고 말한다. 십이입처에서 意의 대상이 되는 법은 유위법을 의미한다. 십이입처는 마음이 욕탐에 묶여 있는 상태다. 욕탐에 묶여 있는 마음이 욕탐에 상응하는 궤법, 즉 범주를 만들어 그 범주로 인식한 법이 십이입처의 법이다. 그러나 연기하는 현상을 의미하는 법은 연기하는 현상 그대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을 무위법이라고 부른다.
연기라는 법칙은 연기하는 법과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연기하는 법, 그곳에 진여인 연기가 있다고 하고 있듯이 연기하는 현상인 법과 그 현상이 있게 한 법칙인 연기의 법칙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는 세존의 말씀과 같이 연기라는 법칙을 보게 되면 모든 현상이 그 법칙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연기하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되면, 그 현상에 연기라는 법칙이 있음을 알게 된다.
법의 이러한 두 측면, 즉 법칙으로서의 법과 현상으로서의 법을 대승불교의 화엄사상에서는 理와 事라고 한다. 연기의 법칙은 理이고 연기하는 현상은 事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와 사는 본래는 분별할 수 없다. 이것이 법계의 모습이다. 의상조사는 <법성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理와 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는 법계
시방세계 부처님과 보현보살 경계라네.
이렇게 이사의 분별이 없이 연기하는 법계에서 모든 법, 즉 현상은 함께 연기하고 있다. 하나의 법 속에 일체의 법이 들어 있고, 일체의 법 속에 하나의 법이 들어 있으므로, 그야말로 일체의 분별이 용납되지 않는다. 법 속에 법계가 들어 있고, 법계 속에 법이 들어 있는 이러한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법계의 모습이다.
45. 중생의 오취온과 여래의 五分法身
연기하는 법계는 자타의 분별이 없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한생명, 한마음의 세계이다. 이 한마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분별심을 일으며 오온을 자기 존재로 취하고 있는 '허망한 자아'를 오취온, 즉 오온환신이라 하고, 분별심을 멸하여 만생명과 한생명으로 살아가는 '참된 나'를 오분법신이라고 한다. 오분법신은 계신戒身, 정신定身, 혜신慧身, 해탈신解脫身,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찰에서 예불할 때 염송하는 오분향례에 잘 나타나있다.
계,정,혜,해탈, 해탈지견의 법신향으로 지혜의 광명과 공덕의 구름을 일으켜 온 법계를 두루 장엄하여 시방세계 무량한 불,법,승 삼보님께 공양합니다.
戒香 定香 慧香 解脫香 解脫知見香 光明雲대周遍法界 共養十方無量佛法僧
오분향례의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은 오분법신으로 살아가는 맑고 향기로운 삶을 의미한다.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한생명의 법계에서 한마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나'는 계정혜 삼학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법계의 실상을 깨닫고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주변의 세계를 맑고 향기롭게 하기 때문에 오분법신을 오분향이라고 한다.
진리는 우리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변치 않고 존재한다. 다만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에 따라서 살아가고, 진리를 모르면 진리에 어긋나게 살아갈 뿐이다. 열반의 즐거움은 진리를 따르는 삶 속에 나타나고, 생사의 괴로움은 진리에 어긋난 삶 속에 나타난다. 오취온의 존재방식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것이 사성제의 고성제이며, 이러한 존재방식의 원인이 허망한 망념의 集임을 밝인 것이 사성제의 집성제다. 본래 무아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존재라는 허망한 생각을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생사인 것이다.
세존은 <잡아함 270 경>에서 다음과 같이 오온이 무상한 것임을 생각하여 무아라는 생각에서 살아가면 그대로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이르시되, 無常하다는 생각을 닦아 익히고, 많이 닦아 익히면 능히 일체의 욕애와 색애와 무색애와 들뜬 교만과 무명을 끊을 수 있다. 비유하면 농부가 초가을에 밭을 깊이 갈아 풀뿌리를 뽑아내어 잡초를 없애는 것과 같다....
만약 비구가 들판에서든 숲 속에서든 바르게 잘 사유하되, 색이 무상함을 관하고, 수,상,행,식이 무상함을 관하면, 이와 같은 사유가 일체의 욕애와 색애와 무색애와 들뜬 교만과 무명을 끊어 없애게 된다. 왜냐하면 무상하다는 생각이 無我라는 생각을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거룩한 제자가 무아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면, 마음이 我慢에서 멀어져 순조롭게 열반을 얻는다.
오온을 무상하다고 관하는 것은 오온이 연기하고 있는 법이라는 것을 반야로 통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일체의 존재에 대한 욕탐과 애착을 끊고 무명을 멸하여 살아갈 때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반야에 의한 이러한 통찰은 육촉입처에서 행해진다.
오온을 실체화하여 인식하는 출발점은 촉이다.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외부에는 인식되는 사물, 즉 명색이 존재하고 있고, 내부에는 인식하는 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삶을 통해 체험된 의식을 실체화한 것이 오온이다. 따라서 오온의 근본을 통찰하는 지혜, 즉 반야는 촉입처에서 작용하게 된다. 세존께서는 이것을 <잡아함 63 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무명촉에서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느끼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구여, 다문성제자는 육촉입처에 머물지만 무명을 염리厭離함으로써 능히 明이 생기게 하나니, 그는 무명의 상태에서 욕탐을 떠남으로써 명이 생기게 한다. 그는 '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하거나,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통찰하면 전에 일어난 무명촉이 멸한 후에 명촉이 나타난다.
육촉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다. 이러한 삶은 중생의 삶이나 부처님의 삶이나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은 무명의 상태에서 살아가느냐, 반야로 법을 통찰하면서 살아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중생들은 무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미래의 자기 존재에 대하여 문제 삼는다. 그래서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을 오온으로 실체화하여 자기 존재로 취하게 된다.
중생들은 이렇게 실체화한 자기의 존재가 내세에도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내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를 문제 삼으며, 이것이 생사윤회이다. 반야로 살아간다고 해서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반야로 살아가는 사람은 실체화한 존재 자체가 허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삶을 실체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래의 자기 존재를 문제 삼지 않는다. 이 경에서는 이러한 삶이 나타나는 것을 명촉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렇게 명촉이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 오분법신이다.
오분법신은 오취온과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다. 무명의 상태에서 삶을 통해 지각되는 자긱의 내용을 실체화하여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고서, 자신의 몸을 유지하려는 욕탐을 일어켜 살생, 투도, 사음, 망어 등의 악생을 하는 것이 오취온의 색이라면, 색이 무상하게 연기하는 법이라는 것을 반야로 통찰하여 욕탐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이 이웃의 행복과 함께 연기한다는 연기의 도리에 따라 이웃의 행보을 위해 악행을 멀리하는 것이 오분법신의 계신이다.
오취온의 존재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고락의 감정에 흔들리고 있는 산란한 마음이 오취온의 수受이고, 욕탐을 버리고 계율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항상 고요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이 오분법신의 정신이다.
무명의 상태에서 체험의 내용을 비교하고 추상하고 총괄하는 사유작용이 오취온의 상想이라면 모든 법이 연기한다는 것을 알아서 자아와 세계는 무아이며 공이라는 것을 지혜롭게 통찰하는 것이 오분법신의 혜신이다.
욕탐으로 유위를 조작하여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오취온의 행行이라면 지혜로 행위와 행위의 결과를 통찰하여 가장 가치있는 행위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이 오분법신의 해탈신이다.
행에 의해 조작된 유위를 대상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존재의 생멸과 자신의 생사를 인식하는 것이 오취온의 식識이고, 연기하는 일체의 법은 무아이고 공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업보만 있을 뿐 작자는 없기 때문에 자신을 본래 생사에서 해탈해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이 오분법신의 해탈지견신이다.
요약하면,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을 통해서 체험한 내용을 실체화하여 자기 존재로 삼고, 이의 유지를 위하여 끊임없이 자아를 취하는 삶의 방식이 오취온을 자아로 생각하는 중생의 삶이고,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켜, 지혜롭게 사유하고, 바른 행위를 선택하여 실천함으로써 본래 생사가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실현하는 삶의 방식이 열반을 성취한 오분법신의 삶이다.
46. 삼독심과 보리심
우리의 인생은 어떤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신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면서 지닌 숙명에 의해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연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지은 업에 의해서 전개된다. 열반도 업에 의해 성취된다.
五分法身의 삶은 계행에서 시작된다. 戒의 원어 'sila'는 '습관'을 의미한다. 중생들은 연기법을 알지 못하는 무명의 상태에서 진리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습관에 길들어 있다. 연기법의 진리에 의하면 주관과 객관은 함께 연기하면서 공존하고 있다. 십이입처의 관계를 보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눈이 없으면 色이 있을 수 없고, 색이 없으면 눈이 있을 수 없다. 실재로 우리는 빛이 없는 곳에서 사는 두더지나 박쥐 등의 눈이 퇴화해서 없어져 버린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눈과 색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다는 행위, 즉 업을 통해 연기하고 있는 현상이다.
이와 같이 업보의 세계, 즉 무아에 세계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될 수 없다. 무명의 상태에서 분리된 존재로 인식되는 주관과 객관은 반야로 통찰할 때 업을 통해 통일된 것으로 인식된다. 계는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지 않고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습관을 익히도록 시설된 것이다. 다른 생명은 나의 생명과 더불어 하나의 ?을 이루고 있으므로 다른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불살생은 다른 생명과 나의 생명이 한 생명이라는 진리에 순응하는 삶의 태도다. 도둑질이나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곧 자아이므로 훔칠 것도 없고, 속일 것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계율을 익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계율을 익혀서 계율이 자신의 삶으로 된 것을 戒身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고락의 감정을 느끼고, 그로 인해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잘못된 습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여 자기 존재에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며, 괴로운 것을 만나면 번민하고, 즐거운 것을 만나면 흥분한다. 이러한 산란한 마음은 계율을 익혀서 진리에 순응하는 습관이 길러지면 고요하게 안정된다. 이렇게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定身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마음이 욕탐에서 해탈하면 마음이 명경지수와 같이 고요해져서 삶을 통해 연기하는 법을 여실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즉 연기법에 의한 업보의 인과관계를 지혜롭게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욕탐에 묶여 있을 때 삶을 통해 체험된 내용은 욕탐에 물든 사유작용, 즉 想에 의해 비교되고, 추상되고, 총괄되어 실체화한다. 그러나 욕탐에서 해탈하면 법을 여실하게 관찰하여 업보를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반야라 하고, 반야에 의해 사유하는 삶을 慧身이라고 부른다.
유위를 조작하는 行은 무명의 상태에서 사유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想이 반야로 전환되면 行도 변화한다. 무명의 상태에서는 욕탐에 상응하는 존재를 구성하여 소유하려는 의지작용, 즉 行은 이제 반야에 의해 파악된 업보의 인과율에 따라 願을 추구하게 된다. 해탈신은 이렇게 욕탐에서 벗어난 의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욕탐을 축으로 소유하려는 의지를 행이라고 부르고, 욕탐에서 벗어나 원을 축으로 바르게 살려는 의지를 解脫身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행에 의해 허구적으로 조작된 존재를 분별하여 인식하던 인식작용은 해탈신을 성취하면 無我를 체험하게 된다. 우리의 삶에는 업보만 있고, 작자는 없다는 사실을 명증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모든 것은 업을 통해 연기하고 있는 하나의 법계라는 사실의 인식이다.
이와 같은 체험적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법계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가게 한다. 자신의 존재가 곧 법계와 둘이 아니라는 인식, 따라서 본래 생사가 없는 한생명이라는 사실의 인식, 이것을 解脫知見身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오분법신의 삶은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지 않고, 법계를 자신의 몸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을 법신이라고 부른다. 법신은 법계신을 줄인 말이다.
이러한 오분법신은 모두가 오온으로부터 해탈한 몸이다. 戒身은 色에서 벗어난 몸이고, 定身은 受에서 벗어난 몸이며, 慧身은 想에서 벗어난 몸이고, 解脫身은 行에서 벗어난 몸이며, 解脫知見身은 識에서 벗어난 몸이다. 무명과 욕탐에 결박된 마음이 오온이고, 무명과 욕탐에서 벗어난 마음이 오분법신이다. 마음이 결박에서 벗어나면 오온이 멸하여 마음이 해탈한다는 것은 이렇게 오분법신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취온으로서의 삶과 오분법신으로서의 삶은 마음이 욕탐과 무명에 결박되어 잇느냐, 욕탐과 무명에서 벗어나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따라서 해탈에는 욕탐에서 마음이 벗어나는 心해탈과 무명에서 벗어나는 慧해탈이 있고, 이러한 해탈을 얻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이 계정혜 삼학이다. 오취온의 존재 방식은 계정혜 삼학이라는 수행을 통해서 오분법신의 존재방식으로 전환된다. 즉 오온을 떠나 따로 오분법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반야를 성취하면 오온의 실상이 오분법신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것을 <잡아함 901 경> 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비유컨대 세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모두 땅에 의지하여 건립되듯이 일체의 善法은 내육입처, 외육입처, 육촉입처, 오온에 의지하여 건립된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선법은 오분법신을 의미한다. 땅이 모든 것이 건립되는 바탕이 되듯이 육입처와 오온과 같은 중생신이 오분법신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는 결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무명의 상태에서 욕탐을 일으켜 살아가면 생사의 세계가 벌어지고, 반야의 지혜로 원을 일으켜 살아가면 우리의 모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이 그대로 열반이 된다. <중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여래의 자성이 그대로 세간의 자성이다.
여래의 자성이 없으니 세간의 자성도 없다. (관여래품)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관열반품)
오온을 떠나 따로 오분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나 보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중생이라고 불리고, 부처라고 불릴 뿐이다. 탐진치 삼독심이 중생의 마음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부처의 마음을 구할 수 없다. 어리석은 마음이 지혜가 되고, 탐내는 마음이 원력이 되며, 성내고 사나운 마음이 자비심이 된다.
어리석은 마음이 진리를 깨달으면 그대로 지혜가 된다. 허망한 자아를 위해 일으킨 의욕이 탐욕이고, 모든 생명이 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일체중생을 위해 일으킨 의욕이 願이다. 탐욕에 묶이면 마음에 화가 끓고, 원력을 가지면 마음은 자비로워진다. 사나운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은 본래가 한마음이다. 수행은 삼독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고, 삼독심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바르게 쓰면 원력과 자비와 지혜가 충만한 보리심이 되고, 잘못 쓰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불타는 중생의 삼독심이 된다. 수행을 통해 새롭게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뿐이다.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오온을 그려내나니
일체 세계 가운데 마음이 만들지 않은 것은 없다네.
마음처럼 부처도 역시 그렇고 부처처럼 중생도 그러하다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는 것이네
부처님은 모두가 알고 계시지 일체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걸
이와 같이 이해만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부처를 본 것이라네.
47. 무아와 열반
열반이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바른 삶으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열반에 대한 오해는 세존 당시에도 있었다. 세존 당시에 염마카라는 비구는 열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었다.
<잡아함 104 경> 에는 이러한 염마카와 사리불의 대화가 있다.
그 때 염마카라는 비구가 못된 사견을 일으켜 "내가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한 바에 의하면,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몸이 무너져 수명을 마치면 다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사리불이 다시 물었다. "오온을 떠나 따로 여래가 있는가?" "아닙니다." " 오온 가운데 여래가 있는가?" " 아닙니다." "이와 같이 염마카여, 여래는 법을 여실하게 보고서 무소득에 여법하게 머물라고 하신 것일 뿐 따로 시설하신 바가 없다."
열반은 오온, 즉 중생의 몸을 떠나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바로 보고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나와 세계는 시공을 초월하여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진 하나의 법계다. 우리는 이러한 법계에 살고 있다. 열반은 법계를 바로 보고, 나와 세계를 분별하지 않고 한 몸으로 살아가는 여법한 삶을 의미한다.
법계는 실체의 세계가 아니라 공, 무아의 세계이며, 업보의 세계이다. 우리의 행위의 결과는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법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돌이 호수의 수면에 떨어지면 호수의 모든 수면으로 물결이 퍼져 나가듯이, 우리가 짓는 업은 온 법계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법계는 우리의 업을 인연으로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우리의 삶은 법계를 인연으로 연기한다. 내가 남을 속이면 남도 나를 속이게 되고 그 결과 법계는 불신의 세계가 된다. 이렇게 불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남을 믿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인과이며, 이러한 인과관계 속에서 법계와 우리는 함게 연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계와 중생은 둘이 아니다. <법성게>에서 '법성원융무이상'이라고 한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법의 본성은 업보로 원융하게 인과를 이루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과는 불변의 법칙이지만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고, 미움이 미움을 낳는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지만 사람을 미움으로 변화시키고,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법칙도 있다. 어떤 법칙을 따르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 우리 속담에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미운 사람은 나의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운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더욱 사랑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미운 사람도 업의 결과이고, 사랑스러운 사람도 업의 결과이다. 미운 사람이 가득찬 세계로 만들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찬 세계로 만들 것인가는 어떤 업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스러운 세계가 되고, 나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가 된다. 내가 미워하면 미운 세계가 되고, 나 자신이 미움받는 존재가 된다. 나와 세계는 이렇게 나의 업에 의해 그 과보로써 나타난다. 이것이 작자는 없고 업보만 있는 무아와 공의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진실된 모습은 이러한 공의 세계다. 그런데 연기법의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은 공의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세계의 실상은 보지 못하고 욕탐으로 허망한 존재를 조작하여 존재의 세계로 인식한다. 허위의 세계인 존재의 세계에서 '행위하는 자아'는 '존재하는 자아'로 전락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행위는 자유를 상실한다. 미운 존재에 대해서는 미워할 수 밖에 없고, 사랑스러운 존재에 대해서는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미움은 더욱 큰 미움으로 커가고, 사랑은 더욱 큰 사랑으로 자라난다.
이렇게 되면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은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 된다. 이렇게 존재의 세계에서는 자유가 상실될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가 괴로움으로 귀착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이 있게 되고, 어떤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이별하게 되는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가치의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에 대하여 '이것은 가치 있는 것이고, 저것은 가치 없는 것이다' 라고 분별하여 가치 있는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가치가 없는 것은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가치는 행위에 있는 것이지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 있는 존재를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많을수록 걱정과 근심도 많아진다. 그러나 가치있는 행위는 많이 할수록 큰 행복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행복은 존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서 온다.
무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자아'를 부정하는 말임과 동시에 '행위하는 자아'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무아의 자각은 실체로서의 자아가 상실한 자유를 회복하게 한다. 어떤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미운 존재여서가 아니라 내가 미움받을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나의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길이 열린다.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을 수 있는 행위를 지혜로 통찰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의 세계, 무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기존의 가치 있는 존재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가치 있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나를 미워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함으로써 함께 사랑과 존경을 나눌 수 있다면 이것이 새롭게 창조된 가치다. 가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가치를 창조할 수 있으며, 많은 가치를 창조할수록 나와 남이 모두 행복해진다. 공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자리와 이타가 대립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이 곧 남의 이익이 된다. 이것이 보살행이며, 육바라밀은 바로 이러한 보살행을 의미한다.
공의 세계에서 무아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평등하다.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나의 행위에 따라 미운 사람도 되고 고운 사람도 될 뿐이다. 실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이렇게 법계는 공하여 자유로운 선택의 장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자유롭게 원을 세워 바른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해탈의 경지이다.
이러한 해탈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은 '허망한 자아'를 집착하기 때문에 느끼는 허위일 뿐, '참된 나'는 법계와 함께 시공을 초월하여 연기하므로 본래 생사가 없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오분법신의 해탈지견이다. 해탈지견을 성취한 사람에게 이 세상은 상주하는 법계요, 항상 고요한 열반이다. 자타의 분별이 없으므로 투쟁이 없고, 투쟁이 없으므로 언제나 평화롭다.
이것이 무아의 세계이다. 생사윤회는 그림자도 없고, 무한한 자유와 행복이 있으며, 절대 평등한 법계에서 원대로 가치를 창조하고, 누구와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계가 열반의 세계다.
이중표, 근본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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