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란 무엇인가?(이중표 교수) 2-1 -퍼옴-
근본불교란 무엇인가?
차례
1.근본불교란 무엇인가?
2.불교의 목적
3.인간의 근원적 괴로움
4.불교의 진리 – 사성제
- 正見
- 붓다의 침묵(無記)과 중도
- 당시의 인도사회
- 육사외도의 사상
- 자이나교의 사상
- 사견의 근원과 멸진
- 자작타작중도自作他作中道
- 단상중도斷常中道
- 일이중도一異中道
- 유무중도有無中道
- 고락중도苦樂中道
- 수정주의修定主義와 팔정도八正道
- 업보와 연기
-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 무아와 업보
- 중생의 세계
- 업설과 연기설
- 삼종외도 비판
- 업보와 마음
- '참된 나'
- '거짓된 나'
- 육입처와 육근
- 육입처와 육근의 관계
- 십팔계十八界와 촉觸의 발생
- 식識과 명색名色
- 십팔계와 육계六界
- 오온설1
- 오온설 2
- 오온설 3
- 오온설 4 [5]
- 오온설 5
- 오온설 6
- 오온설 7
- 오온설 8
- 오온의 종합적 이해
- 유전문과 오온 1
- 유전문과 오온 2
- 환멸문과 팔정도
- 연기의 의미
- 法과 法界의 의미
- 중생의 오취온과 여래의 五分法身
- 삼독심과 보리심
- 무아와 열반
1. 근본불교란 무엇인가?
근본불교는 시대에 따른 분류의 기준에 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분류는 단순히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것이 아니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사상의 변화에 의한 것이다. 석가세존이 처음 깨달음을 이루어 세상에 가르침을 폄으로써 불교는 시작된다. 세존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에 의심이나 논란이 있어도 세존을 통해 의심과 논란을 해소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교단은 통일과 화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존이 열반한 후 불교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고 승려와 신자들의 수가 양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이해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교단이 분열하게 되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분열을 막기 위해 수차의 결집회의를 하였지만 교단의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공식적으로 교단이 처음 분열된 것은 세존의 계율을 충실히 지키고자 했던 보수적인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와 신축성을 허용하고자 했던 진보적인 대중부의 분열이었다. 이 시기는 세일론의 남방불교 전통에 의하여 불멸 후 약 100년에 소위 십사(十事)에 대한 계율해석을 위하여 모인 바이샬리에서의 제2차 결집 때였다고 한다. 십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각염정角鹽淨- 전날 받은 소금을 저축했다가 써도 된다.
2. 이지정二指淨- 정오 이전에 해야하는 식사를 해시계 그림자가 손가락 두 개가 될때까지는 할 수 있다.
3. 수희정隨喜淨- 식사 후에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4. 도행정道行淨- 도량을 떠나서는 식사 후에 다시 식사할 수 있다.
5. 낙장정酪漿淨- 꿀 등을 우유에 타서 밥을 먹지 않을 때 마실 수 있다.
6. 치병정治病淨- 병의 치료를 위해 술을 마실 수 있다.
7. 좌구정坐具淨- 몸의 크게에 따라 좌구의 크기를 정할 수 있다.
8. 구사정舊事淨- 전 사람이 하든 일을 따르면 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9. 고성정高聲淨- 따로 갈마법을 짓고 나중에 억지로 다른 이의 용서를 구해도 된다
10. 금은정金銀淨- 금, 은, 돈 등의 보시를 받아도 된다.
이상과 같은 十事는 본래 세존 당시에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므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승단의 일부에서 허용되었던 것 같다. 이것을 옳지 않다고 시정하려 함으로써 교단이 분열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교단의 분열은 더욱 세분되어 18개 내지 20개의 부파로 나뉘게 되었다.
교단의 분열은 계율 해석상 차이에서 시작되었지만 교단이 분열되자 경의 해석도 부파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각 부파는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에 따라 아비달마라 불리는 독자적인 교리해설서, 즉 論을 편찬하였다. 아비달마란 세존이 설한 '법(달마, dharma)에 대한 (아비, abhi) 해석' 이라는 의미이다. 이들 논서를 통해 각 부파는 자신들의 해석이 진정한 세존의 뜻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불교는 사상적으로도 분열 대립하게 되었다. 이렇게 부파에 의해 분열 대립하게 된 불교를 부파불교 또는 아비달마불교라고 부른다.
불교가 이렇게 분열된 것은 불교의 본질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 세존은 모든 대립과 모순을 떠난 中道에서 연기법을 설했다. 모든 존재현상은 연기하고 있으므로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이며,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모든 대립은 존재현상의 실체가 없음(空)을 알지 못하고 실체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달마불교는 中道와 空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대립하게 된 것이다. 대승불교는 이들 부파불교의 대립을 소승이라고 비판하고 불교의 본질이 중도와 공이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인 반야부 경전의 空사상은 바로 이러한 입장을 보여 준 것이다.
근본불교는 불교가 분열하기 전의 불교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의해 소승불교로 비판받았던 부파불교와 근본불교는 엄연히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근본불교를 소승불교로 오해하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대승불교가 전해진 중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북방불교권에 보편화되어 있는데 그 원인은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을 아비달마불교와 동일시하는 데 있다.
불경에는 세존의 가르침을 전하는 근본경전과 대승불교의 발흥과 함께 나타난 대승경전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불경을 근본 경전과 대승경전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근본경전은 북방불교권에 전해져서 한역된 '아함경'과 남방불교권에 전해진 상좌부 전승의 '팔리 니까야'를 가르킨다. '아함阿含'이란 범어 '아가마'의 음역으로서 본 뜻은 '전승'인데,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전승되어 오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리고 '팔리' 는 성전을 의히마고 '니가야'는 수집을 의미하므로 '팔리 니까야'는 '성전을 모아 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팔리어' 란 '니까야'에 사용된 고대 인도어로서 성전을 기록하고 있는 언어라는 의미이다.
'아함경'은 4부로 되어 있고, '팔리 니까야'는 5부로 되어 있는데 그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한역 4 아함경
장아함경長阿含經 - 22 권 분량에 30 개의 경이 수록됨. 장편의 경이 수록되어 '장아함'이라고 부름. AD 412- 413 후진後秦에서 불타야사와 축불념 공역. 외도와의 대화와 그에 대한 비판이 많아서 당시의 인도 사상을 살펴볼 수 있음. 법장부法藏部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중아함경中阿含經 - 60 권 분량에 222 개의 경의 수록됨. 중편의 경이 수록되어 있어 '중아함'이라고 부름. AD 397- 398 년에 동진東晉의 구담승가제바 역. 세존과 제자 또는 제자 상호간의 문답과 대화가 자세히 수록되어 교리의 체계를 살펴볼 수 있음.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잡아함경雜阿含經 - 50 권 분량에 1,362 개의 경이 수록됨. 소편이 경이 수록됨. AD 435- 443 년 송宋에서 구나발타라 역.
오온송五蘊誦. 육입송六入誦. 잡인송雜因誦, 제자소설第子所說, 도송道誦 게송偈誦의 순서로 각각의 교설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음. 설이체유부說一切有部 계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 별역잡아함경 - 16 권의 분량세 364 개의 경이 수록됨. 잡아함경의 異譯으로서 역자는 알 수 없음.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 51 권 분량에 471 개의 경이 수록됨. AD 397 동진東晉의 구담승가제바 역. 1법에서 10 법까지 法數의 순차에 따라 분류하여 수록하고 있음. 대중부의 전승으로 알려져 있음.
팔리 5 니까야
長部 Digha- Nikaya - 장아함경에 상응
中部 Majjhim- Nikaya - 중아함경에 상응
相應部 Samyutta- Nikaya - 잡아함경에 상응
增支部 Anguttara- Nikaya - 증일아함경에 상응
小部 Khuddaka- Nikaya - 한역 아함경에 섞여 있음.
이들 근본경전은 부파불교의 소의경전이기 때문에 대승불교권에서는 소승경전으로 생각하고 무시하거나 가볍게 취급해 왔다. 혹자는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은 부파불교에 의해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세존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물론 부파불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을 논서를 통해 드러내려 했지 불경을 변조하면서까지 대립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이런 부파가 있었다면 다른 부파들로부터 불경을 변조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전하고 있는 '아함경'과 '니까야'는 서로 다른 부파에서 전승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근본경전을 부파불교에 의해 변질된 것으로 보거나 소승경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근본불교 사상은 이러한 근본경전의 사상이다. 근본불교는 문자 그대로 대, 소승을 포함한 모든 불교의 뿌리이다. 후대의 불교는 모두 근본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흔히들 '아함경'과 같은 근본경전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을 위해 설한 소승경전이기 때문에 세존의 깨달음을 완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존은 근본경전을 통해 아껴두거나 감추어 두지 않고 남김없이 다 이야기했다. 다만 중생들의 근기가 낮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주지하듯이 대승경전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한 경전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경전이 불경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대승 경전은 결코 근본경전을 부정하지 않고 있으며, 근본경전에 나타난 세존의 가르침을 바르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불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이해를 위해서도 근본불교의 바른 이해는 필수적이다.
2. 불교의 목적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교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석가세존이 왜 출가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존은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 즉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출가 동기는 세속의 생활이 싫어서 출가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출가 동기가 생사문제의 해결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세존의 깨달음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인류의 근원적 고뇌를 해결하는 보편적 진리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 세존이 당시의 사회 현실에 관심이 없었거나 무책임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존 당시의 인도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강대국이 주변의 약소국들을 병합하기 위해 전쟁을 그치지 않았고, 사상적으로는 정통바라문 사상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상들이 대거 출현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고, 사상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 출현한 사상들은 대부분 유물론적 쾌락주의로서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쾌락을 진정한 행복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세존은 출가하기 이전에 이와 같은 현실에 큰 우려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존이 탄생했을 때 아시타 선인의 예언, 즉 자라서 출가하면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고, 왕위를 물려받으면 천하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은 어쩌면 어린 싯달타가 가슴에 품었던 생각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싯달타는 당시의 혼란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여러 국가를 통일하여 전쟁을 종식시켜야 할 것인지, 아니면 참된 진리를 깨달아 사람들에게 안정되고 행복한 삶의 길을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숙고했던 것이다. 싯달타가 무예를 열심히 익힌 출중한 무사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사실을 엿보게 한다.
싯달타가 출가에 뜻을 두게 된 동기는 춘경제에서 삶의 고통을 보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혹자는 싯달타의 나라가 코살라국의 속국이고, 석가족이 쇠퇴하고 있어서 자신의 나라를 융성하게 할 자신이 없어 출가의 길을 택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억측이다. 고대 사회에서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 크고 강한 나라를 일으키는 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무예가 출중했던 싯달타가 전륜성왕을 꿈꾼 것은 결코 허황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 의하면 어린 싯달타는 춘경제에 참석하여 짐승처럼 일하는 농부와 보습에 갈려 허리가 동강난 벌레들, 그리고 벌레를 쪼아먹는 새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삶의 모순과 고통을 발견한 것이다. 살기 위하여 갖은 고생을 하고 다른 생명을 해쳐야 하며, 결국은 죽지 않을 수 없는 중생들의 삶, 싯달타에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그대로 고통으로 생각되었다. "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이렇게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가?" "모든 생명들이 살기를 원하면서 살기 위해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니 불쌍하여 아픈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불본행집경>에서 전하는 싯달타의 마음이다. 세존이 태어나면서 외쳤다는 "삼계의 중생들의 모두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이들을 행복하게 하리라"는 말도 같은 의미이다. 세존의 출가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 즉 자비가 싯달타의 출가 동기이며 출가 정신이다. 세존의 출가는 모든 중생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세존의 여러 전기에서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을 싯달타의 출가 동기로 이야기한다. 동서남북 성문 밖으로 나가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총명한 싯달타가 인간의 생로병사를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 '사문유관'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누구나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아의 높은 담 속에서 자신도 늙고 죽어간다는 사실을 통절하게 느끼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문은 담장 너머의 밖으로 연결된 통로이다. 싯달타는 청년이 되어가면서 남의 일로만 여겼던 생로병사를 자신의 급박한 현실로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싯달타가 자아의 담을 넘어 생로병사라는 보편적 사실의 세계로 나아갔다는 것을 '사문유관'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문유관은 싯달타가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의 현실, 즉 인간실존의 자각하고 자신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 담을 넘어 보편적 진리의 길을 찾기로 결심했음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싯달타는 정치적인 해결이 인간고人間苦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음을 확신하고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을 해결할 진리를 찾아 출가를 결심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출가의 동기를 살펴보면 세존은 당시의 혼란한 사회에서 인간을 구제하려는 자비의 원력으로 출가했으며, 모든 생명이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그 길을 찾았다. 불교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해결하여 그 시대의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3.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
카필라성의 태자로 태어난 싯달타는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부귀영화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싯달타는 이 세상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온통 괴로움뿐이라는 싯달타의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즐거움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세존은 우리의 인생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한다. 몸에 병이 없다고 해도, 부자라고 해도,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괴로움의 바다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불설비유경>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는 세존께서 코살라국의 파사익 왕에게 들려준 것이다.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사나운 코끼리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한 우물을 발견했다. 우물 옆에는 큰 나무가 있고, 우물 속으로 뿌리가 나 있었다. 그는 곧 나무 뿌리를 타고 내려가 우물 속에 몸을 숨겼다.
우물 사방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어서 그를 물려고 하였고, 나무 뿌리는 흰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갉아대고 있었다. 그리고 우물 밑에는 무서운 용이 있었다. 그는 그 용이 몹시 두려웠고, 나무 뿌리가 끊어질까 걱정이었다.
나무에는 벌통이 달려 있어서 벌꿀이 다섯 방울씩 입에 떨어졌다. 그는 꿀의 단맛에 취하여 자신이 처한 위험을 망각했다. 나무가 흔들리면 벌들이 흩어져 내려와 그 사람을 쏘았지만 그는 벌에 쏘이면서도 꿀을 받아먹는 데에만 열중했다. 한편 들에서는 불이 일어나 그 나무를 태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마치고 세존은 왕에게 물었다.
"대왕이여, 이 사람이 벌꿀의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면서 어떻게 그 조그마한 맛을 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세존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했다.
광야는 무명의 어두운 인생이요,
사람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이라.
사나운 코깨리는 無常함의 비유이고,
몸을 숨긴 우물은 生死의 비유라네.
나무의 뿌리는 수명의 비유이고,
흰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이라.
네 마리의 독사는 地, 水, 火, 風 四大이니,
수명이 다하면 독사에게 먹히리라.
떨어지는 꿀 방울은 오욕락이요,
아프게 쏘는 벌은 그릇된 생각(邪見)이라.
들판에 이는 불은 늙어가고 병드는 일,
우물 밑의 독한 용은 죽음이라네.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생각하여 생사의 우물 속을 싫어하나니
오욕락을 탐하여 즐기지 않아야 비로소 우물에서 벗어난다네.
죽음의 왕에게 쫓기면서도 무명의 바다에서 편한 듯이 지내는가
범부의 자리를 벗어나려면 소리와 빛깔을 쫓지 말지니.
우리는 무상의 코끼리에 쫓기어 생사의 우물 속에 빠져 있다. 나무 뿌리와 같은 수명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으나 세월이라는 쥐가 하루하루 갉아먹고 있어서 수명이 다하면 네 마리의 독사에게 먹히지 않을 수 없다.
세존이 이야기하는 괴로움은 바로 이러한 괴로움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것을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물 속의 사람이 입에 떨어지는 꿀 방울을 즐기듯이 오욕락, 즉 감각적 쾌락을 즐기면서 행복하다고 믿고 있다. 우물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꿀 방울을 많이 얻을 생각만 한다. 중생들에게 행복은 꿀과 같은 오욕락을 많이 얻는 것이고, 불행은 오욕락이 적은 것이다.
이러한 중생의 생각은 바른 생각일까? 세존은 이러한 중생의 생각을 그릇된 생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릇된 생각에 빠져 있는 한 우리는 고통스러운 우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들판에 일어난 불처럼 두려운 늙음과 병고에 휩싸여 있고, 무서운 용이 벌린 입 위에서 끊어져 가는 수명 줄에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해야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남이 얻은 꿀이 많다고 부러워하고, 내가 얻은 꿀이 적다고 괴로워해야 할까?
세존은 우물 속에 온통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일체는 괴로움이다(一切皆苦)'라고 했다. 불교의 출발점은 이러한 괴로움의 깨달음이다. 괴로움을 깨닫고, 괴로움의 원인을 발견하여 이것을 없앰으로써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싯달타는 카필라성의 태자로 태어나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죽음을 피하여 잠시 숨어 있는 생사의 우물 속에서는 어떤 것도 행복일 수 없음을 깨닫고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고자 출가하여 행복일 수 없음을 깨닫고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고자 출가하여 생사를 벗어나 열반을 성취했던 것이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생사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그 세계에 가는 길이 있으며, 그 길을 가서 열반을 성취한 부처님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며,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생을 열반을 향하도록 전환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포기한 채로 하루하루 순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불교는 삶을 포기하는 염세적인 종교라고 말한다. 죽어가면서 죽음에서 벗어나기를 포기하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인생을 포기한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벗어나고자 헛된 욕망을 버리고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이 인생을 포기한 것인가? 괴로움의 실상을 자각하여 불교를 믿고 실천하는 것은 염세적 삶이 아니라 소중한 우리의 인생을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로 전환하는 가치 있는 삶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교의 목적을 알아야 불교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이 어떠한가를 밝히고,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밝히며, 그 원인을 없애는 방법을 실천하여,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을 얻게 하려는 의도에서 설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목적을 바르게 알고 열반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을 때 불교는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4. 불교의 진리 - 사성제
세존께서 깨달아 가르친 진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세존은 이것을 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四聖諦)라고 불렀다. <중아함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과 이에 상응하는 <중부 니까야> 에서 사리불은 다음과 같이 사성제를 설명하고 있다.
이에 존자 사리자가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세존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세상에 나오신 것은 사성제를 널리 가르치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사성제를 분별하여 드러내고 보여 주어 사성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성제란 고성제苦聖諦, 고집苦集, 고멸苦滅,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를 말합니다.
여러분, 고성제란 태어나는 괴로움, 늙는 괴로움, 병들어 앓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 원망하고 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괴로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인데, 요컨대(자기 자신의 존재라고 집착하고 있는) 오취온五取蘊이 곧 괴로움인 것입니다.
여러분, 태어나는 괴로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태어남이란 어떤 중생이 어떤 종류의 중생으로 태어나는 것, 탄생하는 것, 출현하는 것, 생기는 것, 즉 오온의 현현과 육입처의 획득을 말합니다.
...중략...
여러분, 요컨대 오취온이 곧 괴로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을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고성제라고 합니다.
여러분, 고집성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즐거움을 바라는 탐욕에 수반하여 이것 저것을 애락愛樂함으로써 다시 태어나게 하는 갈애, 즉 욕애欲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를 말합니다. 중생들은 육내입처六內入處, 즉 眼내입처, 耳, 鼻, 舌, 身, 意내입처를 애락합니다. 이 육내입처에 갈애가 있고, 때가 있고, 물듦이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것을 고집성제라고 합니다... 중략... 이와 같이 육외입처六外入處, 촉觸, 수受, 상想, 사思, 애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여러분 고멸성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중생들은 육내입처, 즉 안내입처, 이, 비, 설, 신, 의내입처를 애락합니다. 이 육내입처에서 해탈하여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끊고, 버리고, 토하고, 없애고, 욕망이 없어 소멸하고, 그치고 사라지면 이것을 고멸성제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육외입처, 촉, 수, 상, 사, 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은 육계六界, 즉 지계地界, 수水, 화火, 풍風, 공空, 식계識界를 애락합니다. 이 육계에서 해탈하여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끊고, 버리고, 토하고, 없애고, 욕말이 없어 소멸하고, 그치고 사라지면 이것을 고멸성제라고 합니다.
여러분, 고멸도성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말합니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불교의 모든 교리는 사성제에 포함된다. 따라서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성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세존이 해결했다고 하는 괴로움은 어떤 것일까? 세존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법을 깨달아 생사의 괴로움을 해결한 것일까? 아니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있는 참된 자아를 발견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불교는 불로장생법을 가르치는 종교이거나 죽지 않는 자아를 찾는 종교일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인 생각은 고성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위에 인용한 경에서 '모든 괴로움을 요약하면 오취온이 곧 괴로움' 이라는 말과 '태어남이란 오온의 현현顯現과 육입처의 획득을 의미한다' 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오취온이란 오온을 자신의 존재로 취하여 집착하고 있는 중생을 의미한다. 즉 코끼리에 쫓기어 우물 속에 들어가 나무 뿌리에 의지해서 꿀물을 탐착하고 있는 존재가 오취온이다.
그렇다면 왜 중생들은 오취온을 자기 존재라고 집착하고 있는가? 그 까닭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여 그 자기를 사랑하고, 그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세존은 이러한 모습을 꿀의 단맛에 정신을 빼앗긴 사람에 비유한 것이며, 이렇게 중생들의 사랑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는, 즉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아가 육입처이다. 세존이 말하는 태어남이란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고, 육입처를 자아라고 애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 즉 사견을 버리고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바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한다. 생사의 괴로움이란 사견에서 자기 존재를 집착함으로써 생긴 허망한 꿈과 같은 것이고,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다는 것은 정견을 얻어 허망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는 이렇게 사견을 버리고 정견을 얻어 욕탐이나 집착 없이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는 종교이며, 이것을 표현한 것이 사성제이다.
5. 正見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고멸도성제인 팔정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팔정도는 바른 생각, 즉 정견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정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견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잘못된 생각, 즉 邪見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아야 바른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破邪顯正이란 이것을 의미한다.
일반 사람들은 이 세계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우주가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끝없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육신이 죽으면 우리의 수명도 끝난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육신이 죽으면 죽지 않는 영혼이 있어서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열반을 성취하신 세존은 이 생에서 몸을 버리고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세존은 열반을 얻었으므로 이 생에서 몸을 버린 다음에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 가운데 어느 하나가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존은 이런 양자택일적으로 모순 대립하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항상 대답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런 논의 자체를 금하였으며 이러한 태도를 무기無記라고 하다.
이 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죽음을 초월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다. 죽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 있다고 한다면 그 영혼이 살아갈 세상도 영원히 존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며, 육신과는 다른 영혼이 존재하고, 이러한 영혼을 깨달은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며, 육신과 다른 영혼이 죽어서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현대와 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는 우주도 한계가 있고, 우주도 생성 소멸한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다.
어찌 보면 세계의 유한과 무한, 영혼의 존재 유무와 같은 모순 대립은 현대에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종교와 과학을 구별짓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세존은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나아가 거론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세존도 윤회와 해탈을 이야기한다. 만약 윤회를 인정한다면 육신과는 다른 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윤회하는 영혼을 인정한다면 세상은 영원하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왜 세존은 이런 문제에 침묵하고 논의하는 것을 막았을까? 이것은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딜레마 중의 하나이다.
근본경전을 보면 세존 당시에도 이 문제로 고심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이 <중아함 전유경> 이다. 세존의 제자 가운데 만동자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세존께서 세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는 없어지는 것인지, 세계는 끝이 있는지 없는지, 육신과는 다른 영혼이 존재하고 있는지, 여래는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지 아니면 태어나지 않게 되는지, 이런 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 이런 문제에 침묵하는 세존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면 세존의 곁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세존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그 때 세존은 만동자를 꾸짖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세존께서 나에게 세상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나는 세존을 따라 梵行을 배우지 않으리라.' 고 생각한다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결국 (세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그러한 헛된 생각을 하는) 가운데 수명을 마칠 것이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았는데 독화살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것을 본 친족들이 가엾게 생각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 화살을 뽑는 의사를 구해왔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직 화살을 뽑을 수 없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아직 화살을 뽑을 수 없다. 나는 먼저 그 활과 화살이 어떤 활과 화살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결국 알지 못하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수명을 마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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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태어남이 있고, 늙음이 있고, 병듦이 있고, 죽음이 있고, 걱정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가 있으며 이와 같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생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 등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등의 말을 나는 결코 하지 않는다. 왜 나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은 義에 상응하지 않고, 法에 상응하지 않고 범행의 근본이 아니어서 완전한 이해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결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떤 법을 나는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나는 苦와 苦集과 苦滅과 苦滅道跡을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나는 왜 일관되게 이들 법을 이야기를 하는가? 이들은 의에 상응하고 법에 상응하고 범행의 근본이어서 완전한 이해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들을 이야기한다."
이 경에서 세존은 자신이 대답하지 않는 까닭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존이 침묵한 이유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세존은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거나, 이런 문제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 문제이지 말로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침묵했다는 등의 갖가지 해석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세존 스스로 밝힌 침묵의 이유를 깊이 성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세존은 먼저 이들 문제가 義에 상응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의란 'attha'를 번역한 말로서 '목적, 의미, 사물, 대상'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의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말이다', ' 그 말에 상응하는 사물이나 대상이 없다' 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용은 청색인가 황색인가' 라는 말은 용이 실재해야 의미있는 말이 된다. 그러나 용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므로, 의에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 말은 무의미한 말이다. 세존은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마치 '용은 청색인가 황색인가' 라는 문제처럼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본 것이다.
대부분 이러한 세존의 생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세상'은 현실 속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존은 우리의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고집하는 한 우리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교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러한 생각이 사견임을 깨닫는 것이다.
6. 붓다의 침묵(無記)과 중도
용수의 <중론>은 세존의 침묵, 즉 무기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한 중도임을 논증한 책이다. <중론>은 <관사견품>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이품은 중론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용수는 세존께서 침묵한 문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모든 존재 현상은 실체가 없는 空性인데
세상이 영원하다는 등의 견해들이
어디에,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어떻게 발생할 수 있겠는가?
고타마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연민하사
정법을 설하시어 모든 사견을 제거하시었으니
나는 이제 그분께 머리 숙여 절합니다.
용수는 세존의 설법은 그 목적이 중생들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본 것이며, 잘못된 생각이란 모든 존재형상의 공성을 알지 못하고 모든 사물이 시간과 공간 속에 실재한다는 생각임을 밝히고 있다. 시간도 空이고 공간도 空이며 사람도 空이고 모든 사물도 空이기 때문에 어떤 존재의 시간적 영속성이나 공간적 무한성, 또는 영혼이나 여래의 생사를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존이 침묵한 까닭은 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공성이란 무엇인가? <중론>의 첫머리에 나오는 <귀경게>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모든 존재현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는 것도 아니다.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은 도리의 연기를 설하시어
무의미한 말장난을 모두 없애 주었으니
나는 머리 숙여 부처님께 절합니다.
모든 설법자 가운데 제일 훌륭하십니다.
용수는 不生不滅, 不常不斷, 不一不異, 不來不出의 八不로 중도를 표현하고 이러한 중도의 도리인 연기를 세존이 가르쳤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八不이란 세존의 침묵을 의미한다. 용수는 세존의 침묵을 中道로 이해한 것이다.
모든 존재현상은 실체가 없는 空性이다. 따라서 생기고 없어지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는 존재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한 것이다. 모든 존재현상은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있으면 나타나고 있는, 즉 緣起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성이란 연기를 의미한다.
세존께서는 이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연기의 도리에 의하면 무엇이 생겼다거나 없어졌다거나, 영원하다거나 영원하지 않다는 등의 논란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사견이다. 세존께서는 모든 사견을 떠난 중도에서 연기를 설하여 이러한 모든 말장난을 종식시킨 것이다.
세존 당시의 많은 제자들이 세존의 침묵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증지부 나까야> 에서 세존은 여러 제자들이 세존의 침묵에 아무런 의심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어떤 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비구가 세존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세존이시여, 왜 훌륭한 제자들은 無記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습니까?
"사문이여, 그것은 見을 없앴기 때문이다. '사후에 여래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묻는 것은 見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견을 알지 못하고 견의 集을 알지 못하고 견의 滅을 알지 못하고 견의 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 見이 늘어난다. 그리하여 그는 생로병사에서 해탈하지 못하며,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훌륭한 제자들은 見을 알고.... 見의 멸에 이르는 길을 안다. 그에게 見이 멸하며, 그는 생로병사에서 해탈한다. 그를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나는 이야기한다. 이렇게 알고 이랗게 보기 때문에 훌륭한 제자들은 무기의 문제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사문이여, 이러한 문제를 거룬하는 것은 愛에 빠져 있는 것이며, 想에 빠져 있는 것이며, 착각이며 환상이며 取에 빠져 있는 것이며, 후회막급이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제자들은 이것을 안다.
이 경에서는 이들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생사의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이며, 이들 견해를 없애는 것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세존인 이들 문제가 사견에서 비롯된 의미없는 말장난이기 때문에 답변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고, 나아가 이런 생각에서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므로 논의 자체를 금하신 것이다. 이런 문제를 철학이나 종교의 핵심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이라면,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이 바로 세존이 없애 주려고 한 사견이며, 연기법이 모든 사견을 떠나 중도에서 실상을 이야기한 정견이다.
7. 당시의 인도사회
모든 사상은 그 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불교사상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진리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시대적, 지역적 상황이 무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당시의 여러 사상을 사견邪見이라고 비판하고, 정견正見을 제시한 사상이다. 따라서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존 당시 인도의 사회와 사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의 인도문화를 이룩한 민족은 아리안 족이다. 이들은 본래 코카사스의 북방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인데, 그 중의 일부가 BC 1500년 경에 인도의 서북부에 있는 인더스 강 유역을 거쳐 판잡 지방으로 침입하여, 토착민인 드라비다족, 문다족 등을 정복하고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아리안 족에 의해 정복당한 토착민은 노예가 되어 수드라라는 가장 천한 계급으로 전락한다. 인도의 최고의 문헌인 베다의 본집은 이 무렵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BC 1000년까지를 인도 역사에서 베다기라고 한다.
<리그 베다>, <사마 베다>, <야주르 베다> 와 같은 베다의 본집이 형성된 후에 BC 1000- 800 년이 되면 아리안의 사회는 동방으로 옮겨져 유목을 위주로 하던 생활방식이 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토지에서 논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경사회로 변화하면서 안정된 사회를 이룬다. 그리고 제사가 세상의 모든 일을 결정하는 큰 힘을 가졌다고 믿게 되면서 바라문의 지위가 높아지고,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사들이 정치를 관장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라는 사성 계급이 확립된다.
그리고 제사의 의식이 만능화되면서 제사의 의식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베다의 본집을 설명하는 <브라흐마나>라는 문헌이 이 시기에 형성된다. 이 시기를 브라흐마나기라고 한다.
BC 8세기에서 6세기 경이 되면 은퇴한 바라문들이 숲 속에 들어가 베다의 내용을 명상하면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인 탐구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 인도사상의 특징을 이루는 범아일여사상, 윤회사상, 업설, 해탈론 등을 담고 있는 <우파니샤드>라는 문헌이 형성된다. 이 시기를 우파니샤드기라고 한다.
갠지스강의 상류에 정착했던 아리안족은 동쪽으로 진출을 계속하여 BC 5-6 세기 경에는 문화의 중심지가 갠지스강의 중류지역으로 옮겨지면서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다. 비옥한 갠지스강 유역의 풍부한 농산물을 토대로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그 결과 소도시를 중심으로 군소 국가가 생겨났으며, 점차 큰 군사력을 가진 국가에 의해 대국가로 병합되는 추세를 보였다. 당시의 강대한 국가의 체계를 갖춘 나라 가운데 코살라, 마가다, 아반티, 밤사 네 나라가 가장 강성한 나라였다고 한다.
이 시대에 바라문 계급은 점차 권위를 잃어가고, 그 대신 크샤트리야와 바이샤 계급이 권력과 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바라문 계급의 몰락과 함께 바라문교의 권위도 이전과 같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서양에서 르네상스와 시민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에 의해 부를 축적한 부르조아의 사회적 지위가 급상하면서 기독교 교회의 권위가 힘을 상실한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문교의 권위가 상실되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질서와 윤리가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세속적인 행복이 브라만의 은혜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여 바라문교에서 선이라고 가르친 것을 따르는 것이 윤리가 되었는데, 이제는 재물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게 됨으로써, 돈벌이와 향락적인 생활이 인생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가 혼란해지자 혼란한 사회를 떠나 출가하는 수행자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에 의해 바라문교의 교리에 반대하는 다양한 사상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 인도사회는 극심한 사상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세존이 살았던 BC 5-6 세기경의 인도사회는 이렇게 정치 , 경제, 문화, 사상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그 당시 이러한 혼란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많은 사상들이 나타났는데, 이들 사상은 정통 바라문교의 교리는 신뢰할 수 없는 독단론이라는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파니샤드 사상에 의하면 이 세계는 최초의 유일한 존재인 브라만이 세상의 많은 것으로 되려는 욕망을 일으켜, 불과 물과 영양분을 차례로 방출한 다음 그 속에 아트만의 형태로 들어가 세상의 모든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브라만 전변설이라고 한다. 전변설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브라만이 변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인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고 한다. 이것을 범아일여사상이라고 한다.
사문이라고 불리는 바라문교에 반대하는 자유사상가들은 브라만의 존재를 부정했다. 경험 불가능하고 인식할 수 없는 브라만의 존재를 믿을 것이 아니라 경험할 수 있고 현실적인 물질을 믿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과 같은 현실적인 사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 열중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 세상에 인간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윤리나 도덕은 존재하지 않고, 물질적인 요소들의 이합집산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장아함 사문과경沙門果經>과 이에 상응하는 <장부 니까야>에서는 이러한 자유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여섯 가람의 사상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른다.
육사외도 가운데 푸라나 카삿파는 도덕부정론자이다. 그는 아무리 몹쓸 행동을 해도 그것이 악이 아니며, 그 행동의 결과 죄의 과보를 받는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지타 케사캄발라는 유물론자로 유명하다. 그는 사람도 지, 수, 화, 풍 사대가 일시적으로 모여 있을 뿐이므로 죽으면 지수화풍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선악업에 따르는 과보도 없고, 현세와 내세도 없으며, 심지어는 부모도 없고, 태어나서 죽는 존재도 없다. 오직 사대라는 물질적 요소의 이합집산만 있을 뿐이다.
파쿠다 캇차야나는 기계적 불멸론을 주장했다. 아지타의 사대설에 의하면 고락의 감정이나 인간의 생명현상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렇다면 고락의 감정이나 인간의 생명현상을 이루는 요소는 없다는 것이 된다. 그는 없는 것은 생길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고, 락, 생명도 사대와 마찬가지로 요소라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7요소설을 세웠다. 이 세상은 불멸하는 7요소가 기계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막칼리 고살라는 결정론적 숙명론자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은 요소가 우연히 이합집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합집산하므로 인간의 삶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7요소에 물질이 이합집산할 수 있는 공간과, 이들이 모이는 법칙인 득得과 이들이 흩어지는 법칙인 실失,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는 법칙인 생生과 죽는 법칙인 사死의 다섯 가지를 추가하여 12요소설을 세웠다.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생멸은 자연법칙에 의해 이들 요소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지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자연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막칼리 고살라가 바로 그와 같은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산자야 벨라티풋타는 회의론자이다. 그는 철저하게 감각적인 경험만으로 판단했다. 당시의 사문들은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업보와 내세를 부정하고 있었는데, 산자야는 그런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다. 내세를 경험할 수 없는데 어떻게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철저하게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경험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진리 그 자체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회의론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니간타 나타풋타는 고행주의자이다. 그는 자이나교의 창시자로서 세존과 같이 왕족 출신이다. 그는 세존처럼 혼란한 사회를 구원할 생각으로 출가하여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에 받을 괴로움이 결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생에서 받을 괴로움을 미리 받아버리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면 생사의 윤회에서 저절로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는 고행을 통해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세존 당시에는 이렇게 다양한 사상이 나타나 대립하고 있었다. 불교는 이러한 외도들의 사상을 비판하고 나온 것이다.
8. 육사외도의 사상
이 세상에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많다. 기독교의 진리는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고, 현대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리는 여러 가지 물질적 요소들이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존 당시의 인도에도 이런 사상들이 있었다. 브라만이 변해서 이 세상의 만물을 이루고, 그 속에 들어가 아트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정통 바라문교의 범아일여사상과 바라문교의 사상을 반대하여 나타난 사문들의 요소설이 그것이다.
바라문교의 범아일여사상은 하나가 변해서 다양한 것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라는 의미에서 전변설이라고 부르고, 사문들의 요소설은 다양한 요소가 모여서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이라는 의미에서 적취설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이들 외도들의 사상을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은 불교는 파사현정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세존은 사견을 논파하고 정견을 드러냈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존이 논파한 사견을 먼저 알아야 한다.
종교와 철학은 모두가 삼라만상의 근원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이들 이론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단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론이 옳다는 것을 성경으로 증명한다. 성경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에 진리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원자가 모여서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현미경을 통해 증명한다. 모든 물질을 쪼개 보면 원자와 같은 원소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바라문교에서는 브라만이 변해서 삼라만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를 베다라고 하는 자신들의 성전에 두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렇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상을 정통 바라문사상이라고 부른다. 바라문의 사상이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이들을 하나로 보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통 바라문교의 사상은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문화의 발달로 바라문교가 약화되자 새롭게 출현한 육사외도와 같은 사문이라 불리는 자유사상가들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들은 먼저 바라문교의 주장에 대하여 '브라만이 변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인식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바라문교에서는 베다를 그 근거로 내세우지만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베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사상가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감각적으로 경험한 것만을 인정하는 경험론적입장을 취했다. 인도철학에서는 이것을 현량現量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진위의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한편 바라문교와 같이 권위 있는 책의 내용이나 사람의 말을 가지고 진위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을 성언량聖言量이라고 한다. 거룩한 말씀에 의지하여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현량, 성언량과 함께 논리적인 추론도 인도철학에서 폭넓게 인정받고 있었는데 이것을 비량比量이라고 한다.
육사외도를 위시한 사문들은 대부분 현량, 즉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 성립된 지식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 그들은 베다에 의지하고 있는 '브라만이 변해서 삼라만상이 생겼다'는 전변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세상의 존재 근거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찾았다. 그 결과 그들은 생멸변화하는 것 가운데 변치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벽돌은 생겨서 부서져 사라진다. 그러나 벽돌을 이루고 있는 흙은 생기지도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벽돌로 있을 때도 흙이고 부서져서도 흙이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넣으면 네모지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양이 된다. 형태는 달라져도 근본 성질은 변함없이 물이다. 불은 장작불이든 춧불이든 밝고 뜨거운 근본 성질은 변함이 없이 불이다. 강바람이든 산바람이든 이름은 달라도 근본은 변함없는 바람이다. 이렇게 생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형태와 이름은 달라도 근본 성질은 변하지 않는 요소들을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대大라고 불렀다. 그리고 흙地, 물水, 불火, 바람風 네 가지는 변함없고, 생명이 없는 근본요소라는 의미에서 사대라고 불렀다.
아무튼 새로운 사상가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한계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근본을 찾았다. 그 결과 아지타 케사캄발라는 지수화풍 사대를 근본 요소로 생각했고, 파쿠다 캇차야나는 여기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괴로움과 즐거움도 요소가 지닌 불변하는 고유한 성질로 보고, 또 영혼도 이들 요소의 성질을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불변의 요소라고 보아 ,지, 수, 화, 풍, 고, 락, 영혼이라는 7요소설을 내세웠다.
이렇게 인간과 세계를 요소의 집합으로 본다면, 이 세상과 인간은 이들 요소의 기계적인 결합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내세도 부정하고, 선악과 윤리도 부정했다. 요소들의 우연한 결합체인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요소가 흩어지는 것이므로 선악이 있을 수 없으며, 죽어서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을 칼로 베어 죽인다 해도 칼이 요소 사이를 지나가 요소의 결합이 파괴되었을 뿐 없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삶에는 죄가 되는 것도 없고, 착한 일도 없으며, 오직 살아 있는 동안 감각적 쾌락을 누리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인생관을 갖게 되었다. 자연과학을 진리로 믿고 있는 현대인들이 내세를 부정하고, 윤리관을 상실한 채 감각적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세계를 요소들의 우연한 결합으로 생각하는 우연론 - 무인무연론- 을 극복하려고 한 사람이 막칼리 고살라라고 생각된다. 인간과 세계가 아무 질서가 없이 아무렇게나 이합집산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자연의 질서를 보면 이 세상을 요소들의 우연한 이합집산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것이나, 어떤 사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이들 요소가 활동하는 공간으로서의 허공과, 생명체의 생과 사, 그리고 사물의 득과 실도 요소라고 생각하고 7요소에 이들 다섯을 더하여 12 요소설를 주장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 죽는 것은 生이라는 요소와 死라는 요소가 결합해 있기 때문이고,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得과 失이라는 요소가 결합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내세나 윤회와 해탈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세나 윤회와 해탈은 이미 결정되어 잇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면 내세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과 같은 곳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요소와 결합해 있는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이 천상에 태어날 것인가 지옥에 태어날 것인가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고 해서 빨리 해탈하거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해탈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의 시기도 이미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와 인간은 이와 같이 요소들이 자연법칙에 의해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운명은 태어날 때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산자야 벨라티풋타는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 했다. 그는 철저하게 감각적인 지각, 즉 현량만을 인정했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요소가 진정 변치 않는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 흙이나 물이 변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뿐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변함이 없지만 죽은 후에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회의론을 자신의 입장으로 삼았다.
그는 그런 문제는 알 수 없으므로 어떤 주장을 하든지 관심이 없었다. 누가 이런 문제를 물으면, 그는 상대가 알아 들을 수 없는 궤변으로 문제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이런 문제로 고민하기 보다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쾌락을 얻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만약 감각적인 지각만을 진리의 인식 수단으로 인정한다면 이러한 산자야 벨라티풋타의 견해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불경에 의하면 사리불과 목건련도 처음에는 산자야 벨라티풋타의 큰 제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리불은 앗사지라고 하는 세존의 제자가 매우 평화로운 모습으로 위의를 갖추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고 ' 이사람은 무엇가 우리가 얻지 못한 행복을 얻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 생각하고 그에게 누구를 스승으로 수행하는가는 물었다고 한다. 사리불은 감각적 쾌락보다 더 크고 수승한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앗사지의 거동 속에서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존을 만났고, 세존을 통해서 산자야의 회의론이 지극히 천박한 것임을 깨닫고 목건련과 함께 세존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세존 당시에는 이렇게 정통 바라문교의 범아일여론, 유물로, 도덕부정론, 기계적 불멸론, 숙명론, 회의론과 같은 다양한 사상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서양에서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의 몰락과 과학사상의 대두로 나타난 현대의 사상적 혼란과 너무나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혼란에서 이를 극복하려고 했던 사람이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 나타풋타와 세존이었다고 생각된다.
9. 자이나교의 사상
자이나교의 교주인 니간타 나타풋타는 세존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도 세존과 마찬가지로 왕족으로서 젊어서 출가하여 스스로 도를 성취했다고 주장하고 인도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인도에는 많은 자이나교도가 있다.
니간타 나타풋타는 사상의 대립과 혼미로 인해서 인도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것을 크게 염려했던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는 당시의 모든 사상을 조화롭게 종합 통일함으로써 사상적 대립과 모순을 극복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은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이 정신적 실체(지바, Jiva) 와 물질적 실체(아지바, ajiva)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적 실체를 '명아(지바)'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우리가 '영혼' 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물질적 실체에는 물질, 허공, 法, 非法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
명아는 동물이나 식물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 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으로서 모든 정신작용의 주체이며 행동의 주체이다. 명아는 사물을 지각하거나 인식하는 성질을 그 본성으로 하고 있다. 명아는 현실세계에서는 항상 물질과 결합하여 그 속에 내재하는데, 이 때 명아는 자신이 취하고 있는 물질과 같은 크기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어릴 때의 명아의 크기는 어릴 때의 몸의 크기만 하고, 어른이 되면 어른 크기가 된다.
명아는 본래 전지전능할 뿐 아니라 괴로움이 전혀 없는 안락한 존재이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며,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항상 안락한 존재가 명아인데, 이것은 모든 사물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 인간도 각기 업에 따라 다른 몸을 받고 있으나, 몸 안에는 똑같은 명아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업 때문에 몸을 받아 명아의 본성이 가려진 채로 각기 다른 능력과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는 우리의 눈이나 귀와 같은 감각기관이 우리의 인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눈이 있어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눈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밤이나 잠잘 때는 보지 못하고, 또 멀리 있거나 옆이나 뒤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하며, 앞에 가까이 있는 것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신적 실체이며 우리의 참된 자아인 명아를 물질적 실체로 된 몸과 분리시켜 명아의 본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렇게 명아가 물질과 분리하여 독립함으로써 얻게 되는 완전하고 포괄적인 인식능력을 '독존지獨存知' 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지一切知'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니간타 나타풋타의 사상은 바라문 사상과 사문들의 사상을 종합 통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모든 존재 속에 명아가 내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모든 존재 속에 불변의 실체로서 '아트만' 이 내재하고 있다고 하는 바라문교의 사상을 수용했다. 한편 물질적 실체와 정신적 실체를 독립적인 실체로 봄으로써 사문들의 요소설을 수용하고 있다. 또 운동의 조건인 '법'과 정지의 조건인 '비법'을 실체로 인정함으로써 막칼리 고살라의 결정론을 수용하여 우연론을 극복하려고 했다. 생성과 운동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과 '비법'이라는 실체의 고유한 성질에 의해 일어나는 필연적인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결정론을 수용하면서도 그는 명아가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다고 함으로써 결정론적 숙명론을 극복하려고 했다. 명아는 무한한 능력이 있으므로 자발적으로 해탈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함으로써 숙명론에서처럼 해탈까지도 결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이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명아의 이러한 특성은 바라문교의 '아트만'과 비슷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니간타 나타풋타는 바라문교의 독단적인 전변설은 요소설로 극복하고, 유물론적 요소설의 우연론은 막칼리 고살라의 결정론을 수용하여 극복하려 했으며, 결정적 숙명론은 바라문교의 '아트만'을 수용하여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또 산자야 벨라티풋타의 회의론은 상대주의적인 인식론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인간과 세계의 근본이 되는 실체는 어떤 고정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므로 '이것은 무엇이다' 라는 식으로 단정해서는 안되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언급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통해서만 진리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 보았을 때, 한 사람의 이야기 만으로는 코끼리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없지만, 모든 장님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코끼리의 참모습을 알 수 있듯이, 서로 모순되는 주장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진리의 일부분을 이야기한 것이므로 이들을 종합하면 그것이 진리의 참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간타 나타풋타는 철저하게 그 당시의 모든 사상을 종합하여 혼란한 사상을 통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견의 종합이 정견일 수는 없다. 세존도 코끼리를 보는 장님의 비유를 이야기했지만 근본 취지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고혈압이고 어머니는 저혈압이라고 하자. 자이나교의 견해는 이 두 사람의 아들은 저혈압과 고혈압이 합해졌으므로 혈압이 정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존은 이들의 아들은 고혈압과 저혈압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더욱 심각한 병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세존은 사견을 종합하지 않고 버리도록 했다. 사견은 아무리 모여도 결코 정견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견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 허망한 사견이 될 뿐이다.
나간타 나타풋타는 당시의 사문들이 윤리를 부정하고 쾌락에 빠져 있는 것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사문들이 진리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본 결과 윤리를 부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들을 종합 통일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업설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인도인들은 선악의 과보로서 죄와 복을 주는 것은 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사문들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가 죄나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이나교는 후대에 가서 자신들의 교리의 결함 때문에 신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니간타 나타풋타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않았다. 그는 업이 스스로 작용하여 죄와 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우리가 행동을 하면 업이라는 미세한 물질이 생긴다고 보았다. 명아가 행동을 하면 업이라는 미세한 물질이 생겨서 업을 지은 명아 속으로 침투하여 정신적 실체인 명아와 물질적 실체가 결합하게 된다. 사람으로 말하면 몸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업이 침투하면 명아는 그 본성을 상실하게 되어 태어나서 죽는 윤회를 시작한다. 따라서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의 목표는 명아와 몸을 분리시켜 해탈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업은 명아와 몸을 결합하는 접착제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명아가 몸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업을 내보내야 한다. 그런데 업은 업의 크기에 상응하는 괴로움을 겪어야만 명아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업으로 인해 괴로움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업을 지어 끝없이 괴로운 윤회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새로운 업의 침투를 막고, 이미 몸 속에 들어온 업을 고행을 통해 내보냄으로 써 해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니간타 나타풋타의 주장이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살생, 투도, 사음, 망어, 무소유라는 다섯 가지 계율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새로운 업의 침투를 막고, 몸을 괴롭히는 고행을 통해 침투한 업을 몰아내는 수행을 하게 되었다. 니간타 나타풋타는 쾌락주의를 배제한 대신 고행주의를 택한 것이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업설과 불교의 업설의 차이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업설을 자이나교의 업설과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차이는 업설을 다룰 때 논하기로 한다.
10. 사견의 근원과 멸진
세존은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그릇된 인생관과 세계관, 즉 邪見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십이연기설에서 보여 주듯이 老死 등의 모든 괴로움은 無明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세존은 당시의 여러 사상을 모두 사견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사견에서 생로병사와 같은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
앞에서?펴본 <전유경>에서 사견을 가진 사람을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 비유하고 세존을 화살을 뽑는 의사에 비유한 것은 불교의 목적이 사견을 없애는 데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먼저 사견의 근원을 알아햐 하고, 다음으로 사견을 없애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장아함 청정경>은 바로 이것을 밝힌 경이다. 이 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낱낱이 소개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사견들은 36종인데 간략히 정리하면 <전유경>에서 언급된 '세계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육신과 영혼은 동일한 존재인가 상이한 존재인가',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포함하여 '무엇이 진정한 자아인가', '자아의 한계는 있는가 없는가', '자아의 본성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세간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인가 다른 것에 의해 창조된 것인가' 등에 대한 모순 대립하는 주장들이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하여 세존은 <장아함 청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에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이와 같은 이론과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이 세간은 상존常存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내지 무량상無量想이 자아自我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들에게 "그대는 실로 '이 세간은 상존한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라는 이론을 주장하는가? 이와 같은 말은 부처님께서 허용하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견해들 가운데는 각기 결사結使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대응하라. 내가 이치로 미루어 보건대 모든 사문과 바라문 가운데 나와 비교할 자가 없거늘 하물며 나를 뛰어 넘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사견들은 단시 말만 있을 뿐이어서 함께 논의할 것이 없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 세간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은 " 이 세간은 다른 것이 만든 것이다" 라고 주장하며, 또는 "이 세간은 스스로 만든 것도 있고, 다른 것이 만든 것도 있다" 라고 주장하고, 또는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이 만든 것도 아니고 홀연히 존재하게 되었다" 라고 주장한다. '세간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촉觸을 인연으로 그렇게 주장한 것이다. 만약 촉인을 여의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육입처六入處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촉이 생기고, 촉으로 말미암아 수受가 생기고, 수로 말미암아 애愛가 생기고, 애로 말미암아 취取가 생기며, 취로 말미암아 유有가 생기고, 유로 말미암아 생生이 생기며, 생을 말미암아 노老, 사老 ,우憂 ,비悲, 고뇌와 큰 우환이 되는 오온이 집기集起하기 때문이다. 만약 육입처가 없으면 촉이 없고, ... 큰 우환이 되는 오온이 집기하지 않는다. '세간은 다른 것이 만든 것이다' 라는 주장 등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만약 이 모든 사악한 견해를 없애고자 하거든 사념처四念處에서 세 가지로 수행을 해야 한다. ... 사념처에서 세 가지로 수행하면 여덟 가지 해탈이 있게 된다.
이 경에서 세존이 당시의 사상가들의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를 이들의 주장에 결사結使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결사란 우리의 마음을 결박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탐욕, 무명, 사견, 애착, 교만, 취착 등을 말한다. 우리의 마음이 탐욕이나 무명에 휩싸여 있으면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판단을 그르치게 된다. 따라서 이들 견해에 결사가 있다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사물을 바르게 보고 내린 판단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세존은 이들 주장은 말만 있을 뿐이므로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이다.
<전유경>에서 사견은 의義에 상응하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 사견이 말만 있고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말장난인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에서 자세히 논하지 않겠으나, 이 경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촉을 인연으로 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촉이 모든 사견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 의하면 촉은 육입처를 연하여 생긴다. 그리고 육입처는 무명에서 비롯되어 행, 식, 명색을 연하여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촉이 사견의 원인이라는 것은 사견의 근원이 무명이 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견에는 결사가 있다는 말은 바로 사견의 근원이 무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견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경에서는 사념처를 수행하면 모든 사견을 없애고 결사가 들어 있는 사견으로부터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는 바로 이렇게 사견을 없애고 무명과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해탈의 삶을 사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교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1. 자작타작중도自作他作中道
세존은 당시의 사상가들이 주장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단지 침묵만을 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침묵한 이유를 제시했고, 사견에서 벗어나 정견을 갖는 길을 제시했다. 세존은 그 길을 중도中道라고 불렀고, 중도의 입장에서 연기설을 정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수행의 목적이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해서 세존이 철학적인 문제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팔정도八正道에서 볼 수 있듯이 세존은 오히려 철학적인 올바른 지견, 즉 正見이 괴로움을 없애는 근본이라고 가르쳤다. <잡아함 302 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지라 가섭이 부처님께 말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했다.
"'괴로움은 자신이 짓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답변하지 않는다."
가섭이 다시 물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남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했다.
"'괴로움은 남이 짓는가' 라는 질문에도 나는 답변하지 않는다."
가섭이 다시 물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신과 남이 지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했다.
"'괴로움은 자신과 남이 짓는가' 라는 질문에도 나는 답변하지 않는다."
가섭이 다시 물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짓지도 않고 남이 짓지도 않고 원인이 없이 생긴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했다.
"'괴로움은 자신이 짓지도 않고 남이 짓지도 않고 원인이 없이 생기는가' 라는 질문에도 나는 답변하지 않는다."
가섭이 다시 물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은 자신이 짓는가' 라는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남이 짓는가, 자신과 남이 짓는가, 자신도 짓지 않고 남도 짓지 않고 원인이 없이 생긴 것인가' 라는 질문에도 답변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시니, 그렇다면 괴로움이 없다는 것입니까?"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했다.
"괴로움이 없지는 않다. 괴로움은 있다."
가섭이 부처님께 말했다.
"좋습니다, 구담이시여, 괴로움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저에게 이야기하여 제가 괴로움을 알고 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했다.
"만약에 괴로움을 받을 때 자신이 받는다면 나는 '괴로움은 자신이 지은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만약 괴로움을 받는 자가 지은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면 이것은 남이 지은 것이고, 괴로움을 지은 사람 자신도 느끼고 남도 느낀다면 이것은 자신과 남이 지은 것이지만 나는 또한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는다. 나는 자기와 남으로 인하지 않고 원인이 없이 괴로움이 생긴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모순대립(邊)을 떠나 중도中道를 이야기한다. 여래의 설법은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는 것이니, 무명無明이 있는 곳에 행行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집기集起한다는 것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한다는 것이다.
이 경은 당시의 업설業說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세 나오는 네 가지 주장은 각각 정통 바라문교, 막칼리 고살라의 기계적 숙명론, 자이나교, 유물론적 요소론의 업보에 대한 견해로 보여진다.
정통 바라문교에 의하면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상주불멸하는 자아인 '아트만'은 행위의 주체임과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 존재이다. 따라서 괴로움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는 주장은 업보에 대한 바라문교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막칼리 고살라의 결정론적 숙명론에 의하여 괴로움은 요소의 하나로서 그것과 결합해 있으면 자신의 행위에 상관이 없이 괴로움을 받게 된다. 따라서 남이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주장은 막칼리 고살라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정신적 실체이며, 우리의 참 자아인 '명아'는 행위의 주체이지만 그 자신은 무한한 안락을 본성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업이라는 물질이 행위의 결과로 침투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된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교리에 의하면 업이 침투하는 측면에서는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괴로움은 업에서 생기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측면에서 보면 괴로움은 '명아' 가 아닌 '업'이 짓는 것이므로 남이 지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와 인간을 물질적 요소의 우연한 결합으로 보고 있는 유물론적 요소론에 의하면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우연한 일이지 어떤 행위의 결과는 아니다. 따라서 자기가 짓는 것도, 남이 짓는 것도 아니라는 무인론無因論은 업보의 인과관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유뮬론적 요소론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괴로움을 느끼는 주체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바라문교에서는 상주불멸하는 '아트만'을 괴로움을 느끼는 주체라고 생각했고, 막칼리 고살라와 자이나교에서는 다양한 요소 가운데 정신적인 요소인 '명아'를 주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물론자들은 괴로움을 느끼는 정신을 물질의 우연한 결합에서 파생되어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비록 업을 짓고 그 결과 괴로움을 느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각기 달랐지만 업을 짓고 받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에는 차이가 없었다. 단지 바라문교와 자이나교에서는 그 주체, 즉 자아를 육신과는 독립적인 영속적인 존재로 보았고, 유물로자들은 육신이 존속하는 동안 존재하는 일시적인 존재로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세존은 일시적으로든 영속적으로든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존이 이들의 업설을 부정한 까닭은 이들이 실재하지 않는 자아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존은 모든 괴로움이 이러한 허망한 자아를 실재한다고 믿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무명에서 괴로움이 연기한다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세존이 말하는 괴로움은 오취온, 즉 중생들이 집착하여 자신으로 취하고 있는 허망한 자아이다. 허망한 오온을 자아로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아로 인하여 생로병사를 느낀다는 것이다. 당시의 업설을 모두 부정하는 세존에게 괴로움에 대하여 말해줄 것을 요청하는 가섭에게 십이연기를 설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십이연기는 생로병사 우비고뇌 등의 괴로움은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므로 무명이 사라지면 모든 괴로움도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십이연기의 유有는 자기 존재, 즉 자아를 의미한다. 외도들은 자기 존재를 실재하는 사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악업을 지어 괴로운 과보를 받는 자아가 무엇인가를 문제삼았다.
그러나 세존은 자기 존재(自我)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으로서 실체성이 없는 것(無我)인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허망한 자기 존재에 집착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악업을 짓고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자아를 문제삼지 않고, 괴로움이 생기고 사라지는 인과의 과정을 십이연기를 통해 밝힌 것이다. 이러한 연기법을 세존은 중도라고 불렀다.
12. 단상중도斷常中道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죽으면 그만일까? 이러한 의문은 '자아'가 일시적으로든 영속적으로든 실재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자아'가 실체성이 없는 허망한 것임을 깨달은 세존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부르고, 육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단견斷見이라고 불러 배척했다. <잡아함 300 경>에서는 이러한 모순대립을 떠난 단상중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고 하면 상견常見에 따지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고 하면 단견斷見에 빠진다. 의미있고 진리를 이야기하는 주장은 이들 두 모순 대립(二邊)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 법이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남이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니라.
자기가 지은 것을 자기가 받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어떤 업을 지은 사람이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자기가 지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뜻이고, 남이 지은 것을 남이 받는다는 것은 이 생에서 업을 지은 사람은 죽으면 사라지고 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는 다음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받는다는 의미이다.
세존은 이러한 두 가지 서로 모순된 생각은 사견邪見이므로 버려야 하며, 의미 있는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연기법이라고 주장한다. 세존은 왜 '우리는 죽으면 그만인가, 그렇지 않으면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 가서 태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십이연기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문제에 대한 논의는 하지 말고 괴로움을 벗어나는 수행에나 전념하자는 의도에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세존은 이 문제를 도외시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해답으로 십이연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심은 사견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각이다. 그리고 연기법은 세존께서 깨달은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보여 주는 진리이다.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보여 주는 연기법을 이해하게 되면 그러한 허망한 의심은 사라진다.
단견과 상견은 모두 이전에 살펴보았던 당시의 외도들의 견해이다. 외도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아의 존재를 인정한다. 바라문교에서는 상주불멸하는 '아트만'을 자아라고 주장하고, 자이나교에서는 전지전능한 '명아' 가 자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물론적 요소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 있는 몸이 우리의 자아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외도들은 영원하게 존재하든 일시적으로 존재하든 '자아는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가 상견이고, 현생 동안은 존재하지만 죽으면 사라진다는 견해가 단견이다.
그러나 세존은 '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는 무지한 중생들의 생각 속에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 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아는 영원한 것인가, 일시적인 것인가?' 라는 물음은 마치 '토끼의 뿔은 한 개 인가 두 개인가?' 라는 물음과 같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십이연기는 상견과 단견이라는 무명에 휩싸인 중생들이 어떻게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서 생사윤회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가를 밝혀주는 교리이다. 중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외부에 있고, 그 세계 속에 자신과는 별개의 중생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가운데서 중생들은 '육신'을 '자아'라고 생각하거나, '육신과는 다른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믿고 이것을 '자아'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허망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십이연기의 무명無明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상태에서 자기들이 제멋대로 꾸며놓은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행行이다.
거짓되고 허망한 '자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중생들의 의식이 형성된다. 우리의 의식은 태어나면서부터 일정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인간의 행동은 인간의 의식을 형성시킨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동양 사람의 의식구조와 서양 사람의 의식구조는 같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환경과 다른 삶을 살았기 대문에 달라진 것이다. 이렇게 삶에 의해 의식이 형성된다는 의미에서 행行을 연하여 식識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의식이 다르면 보이는 세상이 달라지고, 이렇게 저마다 다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운데 '자아'와 '세계' 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세상에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중생이며, 이러한 중생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십이연기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 즉 십이연기를 깨달은 사람은 결코 상견과 단견에 빠지지 않는다. 단상중도는 이와 같이 십이연기를 깨달아서 단견과 상견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13. 일이중도一異中道
일이중도는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는 모순된 견해를 물리치기 위해 이야기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단상중도는 일이중도와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다.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단견은 육체와는 별개의 영혼은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고, 육체가 죽은 후에도 '자아'는 죽지 않고 내세에 가서 태어난다는 상견은 육체와는 별개의 죽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상중도와 일이중도는 내용상의 차이는 없으나 올바른 수행을 위하여 영혼과 육체에 대한 모순된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잡아함 297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一異중도를 이야기한다.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이들 주장은 결론은 한 가지인데 서로 다르게 주장 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이 육신과 다르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모순 대립하는 두 견해를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중도로 향할지니, 그것은 현성이 세간에 나와 전도되지 않고 여실하게 바로 보아 알아낸 것이다. 소위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이 경에서 세존은 영혼과 육신이 같다고 해도 해탈을 위한 수행이 있을 수 없고, 다르다고 해도 수행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는 마음을 중도로 향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영혼과 육체가 같다는 것은 육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견해이다.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없을 것이다. 수행은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한다면 수행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단견은 근본적으로 수행을 부정한다. 과학적 지식에 전적으로 위존하는 현대인은 대부분 이러한 단견에 빠져 있다. 그래서 출가 수행하는 것을 염세적인 현실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영혼은 불멸한다는 상견에도 수행이 있을 수 없다. 영혼이 본래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생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단견과 상견은 수행을 부정한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수행은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 즉 중도에서만 수행이 가능하다. 대승불교에서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을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을 본래부터 성불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미 성불했는데 성불을 위한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본래성불'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본래성불'이라는 말은 수행의 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야기된 것이다.
마조 도일 선사가 남악 회양 선사에게 가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도일 선사는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부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수행을 했다. 그것을 본 회양 선사가 도일 선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좌선을 하는가?" 도일 선사가 대답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 좌선을 하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회양 선사는 기왓장을 가지고 와서 숫돌에 갈았다. 이것을 보고 도일 선사가 물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기왓장을 숫돌에 갈고 계십니까?' 회양 선사가 대답했다.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셈이네." 그러자 도일 선사가 다시 물었다.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그것이 거울이 되겠습니까?' "좌선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되겠는가?" 이 말에 도일 선사는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 대화를 잘 음미해보자. 회양 선사가 도일 선사에게 좌선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많은 수행자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이 사람에게는 부처와 중생이라는 분별심이 있다. '나는 중생이다. 좌선을 하여 깨달으면 중생에서 부처로 변할 것이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수행하는 사람은 바로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해서 기왓장이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중생과 부처가 따로 있다면, 중생이 수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가 될 수는 없다.
수행은 허망한 생사의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무명과 분별심을 멸하여 자신이 본래 생사가 없는 부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일 스님은 오히려 중생과 부처를 분별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양 선사는 이것을 깨우쳐 바른 수행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았던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은 이러한 의미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불교수행의 핵심을 보여 주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본래성불'은 '자아'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도 아니고, '자아'는 죽는다는 단견도 아니다. 생사라는 생각 자체가 무명에서 일어난 허망한 망상이므로 무명이 있으면 망상에 의해 생사의 세계가 벌어지고, 망상이 사라지면 생멸이 없이 본래 청정한 법계의 실상이 드러난다. 이것이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이다. '본래성불'은 이와 같이 연기하는 세계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다.
다시 일이중도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자아'가 죽는다는 단견을 가져도 수행이 있을 수 없고, '자아'는 죽지 않는다는 상견을 가져도 수행이 있을 수 없다면, 세존이 주장하는 중도에서는 어떻게 수행이 가능할까? 십이연기에 이러한 의문의 해답이 있다. 십이연기의 마지막 부분은 생로병사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십이연기는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무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무명이 있으면 생사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십이연기는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이 있다. 무명이 있으면 행이 있고, 이렇게 계속 연기하여 마지막에 생과 노사가 있다는 것은 유전문이다. 그리고 무명을 없애면 행이 없어지고 이렇게 계속 없어져서 마지막에 생과 노사가 없어진다는 것이 환멸문이다. 이와 같이 생사는 유전문에서는 있지만 환멸문에서는 없다.
그렇다면 유전문은 어떤 것이고 환멸문은 어떤 것인가? 유전문은 무명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명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허망하고 거짓된 나를 집착하고 살아가면서 생사의 고해를 떠돌아다니는 중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법문이다. 그리고 환멸문은 우리의 생사윤회가 무명과 욕탐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무명과 욕탐을 없애기 위해 팔정도와 같은 중도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법문이다.
따라서 십이연기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상견이나 단견에 떨어지지 않고,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본래 생사가 없음을 깨닫고 열반을 성취하는 중도수행, 즉 팔정도를 실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연기법이라는 중도에 서게 되면 생사를 벗어나기 위한 진정한 수행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상견과 단견은 연기법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연기법을 바르게 안다면 생사가 있다는 주장도 없다는 주장도 모두가 옳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중도이다.
14. 유무중도有無中道
유무중도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중도를 총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작타작, 단상, 일이의 모순대립은 근본적으로는 유무의 모순대립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다는 주장은 죽지 않고 존재하는 영혼이 있으므로 자아는 상주한다는 상견常見이며, 동시에 영혼과 육신은 다른 존재라고 보는 견해이다.
한편 남이 짓고 남이 받는다는 주장은 영혼과 육신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상주하는 영혼은 없고 육신이 죽으면 '자아'는 단멸한다는 단견斷見이다. 결국 상주불멸하는 '자아'의 유무에 의해 상견과 단견이 모순 대립하고, 영혼과 육신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대립이 있다. 따라서 유무중도는 자작타작중도, 단상중도, 일이중도를 총괄하는 중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존은 외도의 모든 사상을 <증일아함 유무품有無品>에서 다음과 같이 유무有無 2견二見을 분류하고 있다.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두 견해를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두 견해인가?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을 두 견해라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문과 바라문이 이 두 견해를 익히고 외워도 마지막에 가서는 그 법을 따를 수 없을 때, 그 이유를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곧 사문도 아니고 바라문도 아니다. 사문에서 사문의 법을 어기고, 바라문에서 바라문의 법을 어기게 되므로, 이 사문과 바라문은 결국 자신들이 주장하는 열반을 스스로 증득하여 그 경계에서 노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문과 바라문이 이 두 견해를 배우고 외운다 할지라도 이것은 버려야 한다고 알아서 버리고, 버려야 하는 이유를 여실하게 안다면, 이 사람은 곧 사문의 행을 지니고 있는 사문이며, 바라문의 행을 알고 있는 바라문으로서 자신이 열반을 증득하여 그 경계에서 스스로 노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 두 견해를 배우고 익혀서는 안 된다. 마땅히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
유견有見과 무견無見은 '자아'가 현세에만 존재하는가, 과거세와 미래세에도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립된 견해이다. 만약 '자아'가 과거세에도 있었고, 현세에도 있고, 미래세에도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유견이고, 현세에는 있으나 과거세에는 없었고, 미래세에도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무견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세 과거세와 미래세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유견이고, 현세만 있을 뿐 과거세나 미래세는 없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무견이다.
현세에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생이나 내세가 있는가 없는가, 즉 '자아'는 전생부터 존재해서 현생을 거쳐서 내세로 가는 것인지, 그렇지 않고 현생에서만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아마 전생이나 내세에 대하여 갖가지 주장을 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상주불멸하는 자아'가 있느냐 없느냐의 두 가지 견해, 즉 유무有無 이견二見에 속할 것이다. 세존이 이야기하는 유무 이견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며 유무중도는 이러한 모순된 두 견해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윤회를 이야기하는 불교에서는 '상주불멸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존은 이것은 상견이며 유견이라고 배척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없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고, 이것은 단견이며 무견이라고 해서 역시 배척하고 있다. 세존은 왜 이렇게 모든 견해를 물리치고 있는 것일까?
<잡아함 301경> 에서 세존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세간世間은 유有와 무無 두 가지에 의존하나니 유와 무는 보이거나 들리거나 생각한 것(所觸)을 취한 것이다. 보이거나 들리거나 생각한 것을 취하기 때문에 유有에 의지하기도 하고 무無에 의지하기도 한다.
만약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이 경계에 묶여 경계를 취하지도 않고, 경계에 머물지도 않고, '자아'를 제멋대로 꾸며내지도 않고, 괴로움이 생기면 생기는 것에 대하여, 멸하면 멸하는 것에 대하여 의혹이 없이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도 능히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가 시설한 정견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세간이 생기는 것(집기하는 것, 모여 일어나는 것)을 여실하고 바르게 보아 안다면 세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세간이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바르게 보아 안다면 세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는 모순 대립하는 두 변을 떠나 중도에서 이야기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생기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여..... 내지 큰 괴로움의 덩어리가 멸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모두 '상주불멸하는 영혼으로서의 자아' 가 있다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거나, 그런 것은 없고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채 그 생각을 고집하고 있다. 세존은 그러한 생각이 우리가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나는 가운데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생각된 것- 이들을 세존은 경계라고 부른다- 가운데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을 취하여 저마다 달리 '자아'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세상 사람들은 연기법에 무지하여 '거짓된 나'를 꾸며놓고, 그 '거짓된 나' 가 상주불멸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죽으면 그만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런 경계에 끌리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 된 나를 꾸미지도 않기 때문에, 거짓 된 나로 인해서 생기는 생사의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과 없어지는 과정을 아무 의혹없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세존은 이것을 정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으며, 이것이 십이연기이다.
세존은 세간이 생기는 것과 멸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세존의 이야기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존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세존이 이야기하는 세간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나 지구나 우주가 아니다. 이 우주가 생기고 없어지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을 보라고 할 리는 만무하다.
세간이란 "이 세계와 나는 별개의 존재이다. 나는 나와는 별개의 존재인 세계에 태어나서 죽는 존재이다. 이렇게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나는 상주불멸하는 존재이거나 죽으면 그만인 존재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간이 생기는 것과 멸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보라는 세존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러한 생각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잘 살펴보라는 말인 것이다.
세존의 충고대로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살펴보자. 만약 우리의 생각이 진실이라면 나와는 별개의 존재인 세계가 나의 외부에 있을 것이고, 그 세계 속에서 태어나 죽는 나는 상주불멸하는 존재이거나, 죽으면 그만인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아니라면 '세계와 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의 외부에 나와는 별개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눈을 통해 보이고, 귀를 통해 들리고, 코를 통해 냄새가 맡아지고, 혀를 통해 맛이 느껴지고, 몸을 통해 무엇인가가 만져지고, 마음을 통해 무엇인가가 인식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보이고 들리고 인식되는 것은 밖에 있는 '세계' 이고,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안에 있는 '자아' 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안이비설신의는 六內入處이고,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는 색성향미촉법은 六外入處이다. 이것이 十二入處인데, 이 책의 6장 십이입처설에서 살펴보겠지만, 십이입처는 모두가 우리의 마음이다. 따라서 세계와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와 세계가 별개의 존재라는 생각이나, 그 생각에서 비롯된 유견과 무견은 모두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우리가 우리의 참모습을 알지 못할 때는 반드시 일어나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생각이 있으면 우리에게 '나와 '세계' 가 별개의 존재로 나타난다. 이렇게 '나와 세계' 가 별개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세존은 '세간'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세존은 이 세간이 나타나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면 '세간'은 비록 그것이 진실된 모습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없다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이 세간이 생기는 것을 여실하게 보아 안다면 '세간'은 허망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허망한 세간을 멸하기 위해 수행할 것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 무명을 없애고 우리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잘못된 생각에 의해 생긴 세간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세존은 세간이 사라지는 것을 여실하게 보게 되면 세간의 진실된 모습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세존은 이런 의미에서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세존은 이와 같이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고, 유무 이견이 허망한 세간에 집착할 때 생긴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집착을 버림으로써 유무 이견을 떠나 중도에 설 수 있었다. 중도란 허망한 생각을 집착하지 않고,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간이 생기고 멸하는 것을 여실하게 보는 중도에서 이야기한 것이 세간의 실상을 밝힌 십이연기이다.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이렇게 모든 허망한 생각이 차례로 일어나서 괴로움 덩어리인 '나라는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 생로병사의 온갖 괴로움이 있게 되고, 무명을 없애면 허망한 생각들이 차례로 사라져서 '나라는 허망한 생각' 이 사라져 생로병사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것이 세존이 우리에게 가르친 중도이고 정견이다. 세존의 가르침은 모두 이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존의 가르침이 명료하게 이해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도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세존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한다. 말만 들어도 깨닫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세존은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수행의 방법을 가르쳤다. 중도 수행, 다시 말해서 팔정도가 바로 세존이 가르쳐 준 세간을 멸하여 생사에서 벗어나는 출세간의 길이다.
이와 같이 중도는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 세존은 이론적으로 중도로 십이연기를 이야기하고, 다시 실천적 중도로 팔정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행법을 이야기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15. 고락중도苦樂中道
지금까지 우리는 세존의 침묵이 사견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고, 그러한 사견의 구체적인 모습을 당시의 인도사상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사견을 떠난 정견으로서의 연기법이 중도라는 이름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는 정견에 기초한 구체적인 실천을 고락중도苦樂中道라는 이름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세존 당시의 인도 사회는 사상의 혼란으로 쾌락주의가 만연하고 있었고, 이에 대응하여 자이나교에서는 고행주의를 택해서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고락중도란 이러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에 대한 세존의 입장을 의미한다. 고락중도라는 말만으로 보면 고행과 쾌락의 중간을 취하는 것을 고락중도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주변에서 중도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중아함 사문이십억경>에 나오는 거문고의 비유를 고락중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문이십억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소나' 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세존의 제자 가운데 내가 제일 열심히 정법과 계율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힌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도 모든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부모님은 큰 부자이니 차라리 수행을 포기하고 나가서 마음대로 보시나 하면서 여러 복업이나 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렇게 수행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을 안 부처님은 '소나'를 불렀다. 부처님은 그가 출가하기 전에 거문고를 잘 탔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물었다. "거문고의 줄이 급하게 조여있으면 좋은 화음이 나오는가?" "느슨하게 풀려 있으면 듣기 좋은 화음이 나오는가?" 이에 대하여 '소나'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느슨하지도 급하지도 않고 그 중간으로 적절하게 조이면 듣기 좋은 화음이 나오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소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렇다 사문이여, 지나친 정진은 마음을 어지럽히고, 정진을 게을리하면 마음이 해태해진다. 그러므로 그대는 정진해야 할 때인지 아닌지 시기를 분별하고,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여 방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라고 '소나'를 깨우쳐주었다. 이 가르침을 받고 '소나'는 수행 전진한 결과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이 비유가 중도를 의미한다면 중도는 유교의 중용이나 중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은 이 경에서 수행자의 지나친 정진에 대해 충고한 것이지 중도를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중도는 중용이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존은 당시의 사상가들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거나 맹목적인 고행을 추구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이들의 태도를 버리고 바른 길로서 중도를 제시하였다. 중도는 쾌락과 고행을 모두 버린 입장이지 결코 쾌락과 고행의 중간이 아닌 것이다. <중아함 구루수무쟁경>에서는 고락중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리니,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으며, 의미가 있는 말이며, 청정한 공덕을 구족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을 드러낸 것으로서 이름을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이라고 하는 것이다. 잘 듣고 바르게 생각하여 잊지 말라.
범부들이 행하는 극히 하천한 업인 욕락을 추구하지도 말고, 성자의 행이 아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괴로움에 이를 뿐인 스스로를 괴롭히는 고행을 추구하지도 말라.
이 두 변을 떠나면, 안목과 지혜를 이루고 자재하게 선정에 들어 지智로 나아가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중도가 있나니, 확실하게 알아서 그 속에 있는 즐거움을 추구해야 한다. 거룩한 성자의 길에 팔지八支가 있나니, 정견正見 내지 정정正定이 팔지이다. 이것을 중도라고 한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듯이 고락중도는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두 가지 대립된 입장을 버리고 선택한, 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수행의 길로서 팔정도를 의미한다.
수행의 목적은 열반이라는 최고의 가치, 즉 궁극의 행복을 성취하는 데 있다. 당시의 외도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감각적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했다. 내세를 부정하고 윤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어떤 방법으로든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욕구를 충족히키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한편 자이나교에서는 내세를 인정하면서 현실에서의 삶을 전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현생은 전생에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괴로운 세계일 뿐이다. 현생은 이렇게 괴로운 것이므로 현생에서 미리 괴로움을 받아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여 고행주의를 택했다.
이와 같이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는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인생관에 의해 선택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현생뿐인가, 아니면 내세로 이어지는가 하는 견해의 차이에 따라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상반된 가치관이 나오고 있다. 세존은 이러한 상반된 가치관을 모두 배척했다. 세존이 이들의 가치관을 사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중도에서 제시한 가치추구의 길이 고락중도인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세존의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16. 수정주의修定主義와 팔정도八正道
고락중도인 팔정도의 내용을 보면 정견正見에서 시작되어 정정正定에서 끝난다. 이것은 팔정도의 다른 지支는 바른 선정禪定에 들기 위한 예비적 수행임을 시사하고 있다. 즉 세존이 추구한 열반이라는 최고의 가치는 바른 선정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락중도는 일종의 수정주의, 즉 선정禪定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락중도가 수정주의를 의미한다면, 불교는 당시의 바라문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당시의 바라문, 즉 우파니샤드 사상가들도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고, 해탈을 위해서는 진정한 자아 즉 '아트만' 과 '브라만'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야 하며, 진정한 자아인 '아트만'의 자각은 명상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함으로써 수정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팔정도는 우파니샤드의 수정주의와는 그 내용이 크게 다르다. 팔정도의 첫 지인 정견이 이것을 말해 주고 있다. 선정은 사견을 가지고도 할 수 있고, 정견을 가지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락중도가 수정주의라고 해서 우파니샤드의 수정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고락중도인 팔정도와 우파니샤드의 수정주의의 차이는 무엇을 정견으로 보느냐의 차이다. 바꾸어 말하면 실천적 중도는 이론적 중도라는 토대를 요청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존을 단순한 실천가로 보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정견으로 주장하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브라만이라는 신이 변화해서 이 세상을 이루었다는 전변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전변설에 의지하여 명상을 함으로써 브라만과 아트만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따이따리야 우파니샤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브리구'는 그의 아버지 '바루나'에게 가서 "아버지, 저에게 브라만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아버지 '바루나'는 "브라만은 땅의 양식이고, 생명의 호흡이며, 보고, 듣고, 마음으로 알고, 말하는 일자一者다. 모든 존재를 만들어낸 그들 알려고 노력하라. 모든 존재가 그에 의해서 살아가며, 모두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가 곧 브라만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브리구'는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명상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에게는 땅의 식량이 브라만이라고 생각되었다. 식량에서 모든 존재가 태어났으며, 식량에 의해 그들이 지탱되며, 태어나서 죽은 후에는 땅의 식량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지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아버지 '바루나'에게 브라만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바루나'는 "명상으로 브라만을 알도록 노력하라. 왜냐하면 브라만은 명상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다시 명상을 했다. 그는 명상을 통해 브라만은 생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에 만족하지 못하여 다시 명상을 하여, 브라만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명상을 하여 지성이 브라만이라고 생각하고,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명상하여 마침내 브라만은 환희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희로부터 모든 존재가 생겼으며, 환희에 의해 그들 모두가 살아가며, 그들 모두가 다시 기쁨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루나'의 가르침을 받고 '브리구'가 얻은 브라만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브라만의 모습을 보는 자는 지고의 존재, 즉 브라만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우파니샤드의 선정은 자신들의 전변설이라는 교리에 근거를 두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존이 깨달은 진리는 연기법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연기법에 의하면 우리의 몸 안에 '아트만'과 같은 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실체는 무명이 있을 때 나타나는 허망한 생각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견에 바탕을 둔 불교의 선정은 우파니샤드의 명상과는 크게 다르다. 우파니샤드의 선정은 '아트만'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불교의 선정은 지혜를 성취하여 무명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17. 업보와 연기
지금까지 살펴본 중도는 그 내용이 당시의 업설에 대한 비판이며, 불교의 업설을 천명한 것이다. 자작타작중도와 단상중도는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것이 동일한 존재인가 다른 존재인가에 대한 것이었고, 일이중도와 유무중도는 업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상주불멸하는 육신과는 별개의 영혼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세존은 이러한 당시의 모든 업설을 사견으로 규정하고 정견으로 연기설을 주장했다. 따라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무명으로 살아가면 괴로움이 나타난다는 업보를 설명한 것이고, 팔정도는 정견으로 살아가면 열반을 성취한다는 업보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설에 대하여 혹자는 불교가 연기설에 근거하여 무아를 주장하기 때문에 업설은 세존이 민중교화를 위해 편의상 당시의 통속적인 종교관념을 채택한 것으로서 불교의 근본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업설과 무아설을 양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다고 본다. 업설은 윤회사상의 기초가 되는 사상이며, 윤회설은 윤회하는 주체로서 상주불멸하는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연기설에 기초한 무아설은 그러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업설과 무아설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중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연기설은 유무중도의 입장에서 이야기된 것이므로 연기설에 근거한 무아설은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약 무아설을 업보에 의한 윤회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세존이 사견으로 단정한 단견斷見이므로 결코 정견이 아닌 것이다.
<별역잡아함 202경>은 연기설이 곧 불교의 업설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때 외도가 수달다에게 말했다. "나의 견해로는 중생들은 상주불멸한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견해는 모두 거짓이다."
다른 외도가 수달다에게 말하였다. "나의 견해로는 일체는 무상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견해는 모두 거짓이다."
...중략...
그때 외도들이 각각 자신들의 소견을 이야기하고 수달다에게 말했다. "이제 그대가 이야기해 보시오."
수달다가 대답했다.
"나의 견해로는 일체 중생은 모두가 유위有爲로서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요. 인연이란 곧 업業을 말하는 것이오. 만약 인연이 화합하여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무상無常한 것이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것은 곧 무아無我이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모든 견해에 마음이 집착함이 없소.
그대들이 주장하는 '일체의 모든 것은 상존하며, 이것이 진실이고 다른 견해는 거짓이다'는 말은 (자아의 존재를) 상상으로 꾸며 놓았기(計)때문에 하는 말로서 (꾸며 놓은 자아는)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오. 이 모든 사견을 탐착하면 이는 괴로움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큰 괴로움을 받나니, 생사 가운데서 무궁한 괴로움을 받는 것은 모두가 자기 존재를 꾸며 놓기(計有) 때문이오....
이와 같은 모든 견해(에서 주장하는 모든 존재)는 사실은 유위이며, 업이 모인 것이며, 인연이 화합한 것이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그 모든 존재는) 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무상하므로 괴로움이고, 괴로움이므로 무아임을 알아야 하오."
이 경은 당시의 외도들과 수달다라고 하는 재가불자 사이의 대화이다. 수달다는 급고독원(기원정사)을 지어 세존에세 시주한 사위국의 거부로서 급고독장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세존에게 공양하러 가던 도중에 때가 일러서 세존이 선정 중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먼저 외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외도들은 세존께서 사견으로 규정하고 묵살했던 문제들에 대한 수달다의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한 수달다의 대답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세존은 십이연기를 이야기하여 외도들이 문제삼고 있는 세간, 영혼, 육신 등의 존재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므로 이들 논의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무의미한 것임을 밝혔다. 그런데 이 경에서 수달다는 이들 존재가 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하는 유위라고 이야기하면서 인연은 업을 의미한다고 하고 있다.
연기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의미이므로 '인연이 화합하여 존재한다'는 말은 '연기한 존재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유위란 '무명에서 연기한 망상으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생이나 세간, 영혼 등이 '인연의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유위'라는 말은 이들이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인연이 업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다시 '모든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지은 업의 결과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연기는 업보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18.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무아는 업보에 업業을 짓고 보報를 받는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업은 실체가 아니라 잠시도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의 삶이다. 업이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그 결과인 과보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소 변화하는 것을 무상無常(anicca) 하다고 한다. 이 무상한 현상을 중생들은 시간적으로 일정기간, 혹은 영원히 머물고 있는 자아와 세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는 중생들의 신념과 관계없이 업의 결과로 무상하게 변해간다. 이러한 변화가 중생들에게 생로병사와 생사윤회로 느껴진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을 통해 괴로움의 근거를 찾아보면 괴로움은 실체가 없이 연기하는 무상한 것을 '자아'로 집착함으로써 나타난 것임을 알게 된다. 즉 괴로운 것은 무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며, 괴로운 것은 무아라는 말은 이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관계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실천적 인과관계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무상의 의미이다. 세존은 모든 것이 연기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는 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세존이 사견이라고 배척한 외도들의 주장 가운데도 '일체는 무상하다'는 주장이 있다. 외도가 주장하는 '無常'과 세존이 주장하는 '無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세존이 '일체는 무상하다'고 했을 때의 '무상'은 anicca를 한역한 것이고, 외도들이 '일체는 무상하다'고 했을 때의 '무상'은 'asassata'를 한역한 것이다. 한문으로는 다같이 무상無常으로 번역되었지만 원어는 다르다. 'asassata'는 '영원한, 상주하는'의 의미인 'sassata'에 부정접두사 'a'가 붙어 'sassata'를 부정하는 말로서 '영원하지 않는, 언제인가는 없어지는'의 의미이다.
한편 'anicca'는 '계속적인, 불변의'의 의미인 'nicca'에 부정접두사 'a'가 붙어 'nicca'를 부정하기 때문에 '지속성이 없는, 변화하는'의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외도가 이야기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은 존재하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이고, 세존이 이야기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으므로 잠시라도 지속하고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외도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은 없지만 육신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일체는 무상?'라고 주장했다면 세존은 '영혼이건 육신이건 시시각각 변해 가는 것으로서 한 순간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에서 '일체는 무상하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따라서 외도들은 육신이 죽으면 우리의 삶은 끝이라는 단견을 갖게 되었지만 세존은 '죽고 사는 실체는 없지만 업에 따라 변화하는 삶은 단절이 없다'는 의미에서 단견을 배척했다.
이러한 세존의 견해는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다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외도의 상견과도 다르다. 상견에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를 인정했지만 세존은 그러한 자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무아와 업보
세존은 업보를 인정하였지만 불멸의 자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의 업설은 무아설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잡아함 335 경>에서 세존은 무아와 업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겠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으며, 좋은 의미가 있고, 순일하게 청정함이 가득하며 범행梵行이 청백淸白한 법으로서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제일 근본이 되는 空을 이야기한 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잘 듣고 바르게 사유하라. 그대들을 위하여 이야기하겠다.
어떤 것이 '제일의공경'인가? 비구들이여, 안眼(보는 자아)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眼(보는 자아)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없어진다.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업을 짓고 보를 받는 자아)는 없는 것이다. 이 음陰(오온)이 사라지면 다른 음陰이 상속한다. 그러나 속수법俗數法은 제외된다. 이, 비, 설, 신, 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속수법은 제외된다.
속수법이란 '이것이 있는 곳에는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집기集起한다. 그리고 '이것이 없는 곳에는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으로서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내지 큰 괴로움 덩어리가 사라진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부른다.
<제일의공경>이라는 경의 이름이 시사하듯이 이 경은 공空의 의미를 밝힌 경이다. 세존은 이 경에서 업보는 있으나 업을 짓고 보를 받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보는 자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자아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보는 나'를 의식하며, 이러한 의식을 토대로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보는 나'를 볼 수 없고, '듣는 나'를 들을 수 없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나'를 우리는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부리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보기 때문에 '눈', 듣기 때문에 '귀',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 모든 것은 그(아트만: 自我)의 활동에 대한 이름들일 뿐이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견해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눈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눈을 통해 사물을 본다고 생각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자들은 눈, 귀 등을 통해 사물을 지각하는 자아를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볼 때 보는 자를 볼 수 없고, 들을 때 듣는 자를 들을 수 없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자를 생각할 수 없고, 알 때 아는 자를 알 수 없으나 그 모든 것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트만'이다"라고 주장했다. '아트만'은 불멸의 존재로서 "보이지 않으나 보는 자요, 들리지 않으나 듣는 자요, 마음에 생각할 수 없으나 생각하는 자요, 알 수 없으나 아는 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세존은 <제일의공경>에서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아트만'과 같은 '자아'를 비판한 것이다. 과연 우파니샤드에서 이야기하는 '자아'는 실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보고, 듣고, 생각할 때 이러한 행위의 주체로서 '자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아를 찾아보면 우리에게 관찰되는 것은 행위하는 자아가 아니라 지각, 즉 보고 들음으로써 생성된 느낌 뿐이다. 이런 느낌이 보고, 듣는 '자아'의 실체이다. 즉 '볼 때' 우리에게 '보는 자'가 있다는 생각이 나타나며, 이 생각을 '자아'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자'는 보지 않을 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만약 볼 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는 사라지는 '보는 자'가 '자아'로서 실재한다면, 그 '자아'는 보기 전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볼 때는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는 다시 그곳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자아'가 나타날 때 오는 곳과 사라질 때 가는 곳이 과연 존재하는가?
'보는 자(眼)'가 볼 때 온 곳이 없이 나타나고, 보지 않을 때 간 곳이 없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보는 자'는 실체성이 없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세존은 단언한다. 보는 행위(業)와 그 결과 나타나는 지각(報)은 분명히 있지만 '보는 자'로서의 자아(作者)는 없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無我이며 공空이다. 연기설에 기초한 무아설과 공사상은 바로 불교의 업설業說인 것이다.
20. 중생의 세계
전변설과 적취설이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외도들의 사상이듯이 연기설은 세계와 인간을 설명하는 불교사상이다. 연기설은 현실세계와 자아를 어떤 실체의 자기 전개나 이합집산으로 보지 않고 무명에서 연기한 것으로 보며, 이러한 연기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십이입처, 십팔계, 오온 등의 교리이다. 이 가운데서 십이입처는 세계와 자아의 근원이다.
<잡아함 319경>에서 세존은 바라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생문이라는 바라문에 부처님을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부처님께 말했다. "구담이시여, 소위 일체란 어떤 것을 일체라 부릅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했다. "일체란 십이입처를 말한다. 보는 자(眼)와 보이는 모습(色), 듣는 자(耳)와 들리는 소리(聲), 냄새맡는 자(鼻)와 냄새(香), 만지는 자(身)와 만져지는 촉감(觸), 생각하는 자(意)와 생각되는 사물(法), 이것을 일체라고 부른다. 만약 '이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구담이 주장하는 일체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일체를 따로 세우겠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만 언설만 있을 뿐이어서 물어도 알지 못하고, 의혹만 늘어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계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에서 바라문이 묻고 있는 일체는 세계와 자아의 근원을 의미한다. <찬도갸 우파니샤드>에서는 "실로 일체는 브라만이다. 일체는 브라만에서 생겨나서 브라만으로 돌아가며, 브라만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평안한 마음으로 그를 경배하라. 실로 인간은 욕망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갖는 욕망에 따라 내세에 존재한다." 라고 이야기 한다.
세존에게 질문하는 바라문은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브라만과 같은 모든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세존의 견해를 묻고 있다. 이러한 모든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바라문교에서는 브라만이라고 주장했고 사문들은 사대四大와 같은 다양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어떤 불멸의 실체를 생성 변화하는 현실 존재의 근원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모든 존재의 근원을 불멸의 실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우리의 지각 구조, 즉 십이입처라고 이야기한다.
영국의 철학가 데이비드 흄은 "내 개인적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자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깝게 갈 때 나는 항상 뜨거움, 또는 차가움, 빛 또는 어두움, 사랑 또는 미움, 고통 또는 기쁨 이러한 지각을 더듬어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러한 지각없이 나 자신을 포착한 적이 없으며, 이러한 지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관찰한 것이 없디" 고 이야기한다.
비단 '자아' 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의 근원을 찾아갈 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는 지각일 뿐 어떤 실체도 발견되지 않는다. 세존이 일체는 십이입처라고 하면서 다른 것을 일체라고 하는 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말만 있을 뿐 의혹만 늘어간다고 한 말은 외도들이 주장하는 존재의 근원은 관찰에 의해 드러난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하고 확실성을 추구할 때 어떤 해답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1. 업설과 연기설
십이입처는 일반적으로 육근六根, 육경六境과 동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이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차후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일체를 십이입처라고 한 세존의 입장과 당시 외도들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십이입처를 일체의 근원이라고 보는 세존의 세계관, 즉 연기설과 어떤 실체를 내세워 그것을 세계의 근원으로 주장하는 외도들의 전변설이나 적취설은 근본에서 큰 차이가 있다. 전변설이나 적취설은 현실세계(世間)를 어떤 불멸의 실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하나의 실체가 자기 전재를 통해 다양한 존재현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전변설이고, 다수의 실체가 이합집산하면서 다양한 존재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적취설이다. 외도들은 이와 같이 서로 모순되고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지만 존재의 근원을 불멸의 실체라고 생각한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존재는 '인식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보이면 있다고 말하고, 들리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존재의 근원은 인식이다. 혹자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인식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외부에는 인식의 대상으로서 세계가 실재하고, 내부에는 인식하는 자아가 실재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세존이 말하는 미혹한 중생이다. <잡아함 294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범부는 무명에 가리우고 애욕에 묶여서 식識이 생기면, '몸 안에는 식識이 있고, 몸 밖에는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 두 인연으로 촉觸이 생긴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식은 '인식하는 자아'를 의미하고, 명색은 '인식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실재하는 자아가 실재하는 대상을 접촉할 때 인식이 성립된다고 생각한다. 세존은 우리의 이런 생각이 무명과 애욕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십이입처는 바로 중생들이 무명과 애욕에 묶여서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인식하는 자아'와 '인식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일체는 십이입처'라는 말은 중생들의 세계(세간)가 중생들의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상응부 니까야 35, 116>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게 하는 것, 그것을 성법률聖法律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무엇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을 있게 하는가? 법우들이여, 안眼(보는 자아)에 의해서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에 의해서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다. 이것을 성법률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중생들은 인식하는 자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육입처六入處는 바로 중생들이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식하는 자아'이다. 인식하는 자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식되는 대상도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중생들이 말하는 세계는 육입처의 인식대상인 것이다.
육입처는 우리의 삶의 구조를 '자아'로 착각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구조는 모두 인간에 동일하지만 삶의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인식되는 내용도 달라진다.
중생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 저마다 달리 보고 생각한 것들이다. 그래서 각기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게 된다. 이 때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마음이다. 따라서 세계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세계 속에 살고 ?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규정된 삶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이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세계는 마음에서 연기한 것이고, 십이입처는 중생의 세계가 연기하는 중생의 마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의 근원이 되는 마음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삶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며, 삶을 업業이라고 할 때 마음은 업의 결과, 즉 보報이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라는 세존의 이야기는 인식의 주체로서 불멸하는 '자아'는 없으나 삶에 의해 형성되어 삶을 이끌어 가는 과정으로서의 마음은 있다는 의미로 재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기설은 업에 의해 마음이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마음으로 업을 지어 모든 존재가 연기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불교의 업설이다.
22. 삼종외도 비판
바라문의 독단적인 우주창조론과 범아일여론이 사문들에 의해 부정되면서 야기된 인도의 사상적 혼란과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이는 전통적인 윤리관이 파괴되면서 쾌락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우리의 혼란한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타풋타는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의 여러 사상을 골고루 인정하고 종합했지만 결국은 맹목적인 고행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세존은 이러한 현실을 매우 우려했다. <중아함 도경度經>과 이에 상응하는 <증지부 니까야 III, 61>에는 이러한 세존의 우려가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서 세존은 이 세상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잘못된 인생관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비판한다.
그 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지혜 있는 사람이 잘 받아들여 지극하게 실천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가르쳐도 이익을 얻을 수 없는 피안으로 인도하는 세 가지 나루터(度處)가 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이와 같은 견해로 이와 같이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세에 지은 업(宿命造)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다.'
또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이와 같은 견해로 이와 같이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재천의 창조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다.'
또 어떤 사문과 바라문은 이와 같은 견해로 이와 같이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원인도 조건도 없이 나타난다.'
...중략...
나는 그들에게 말하겠다. '만약 그렇다면 전세에 지은 살생의 業因으로 여러분은 모두 금생에 살생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세에 지은 업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오. 이와 같이 여러분은 모두 도둑질이나 사음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내지 사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세에 지은 업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오.
여러분, 만약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전세의 업이 원인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진실이라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하여 의욕도 있을 수 없고, 노력도 있을 수 없을 것이오. 여러분,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곧 바른 생각(正念:sati)을 상실하여 바른 지혜(正智)가 없으므로 남을 가르칠 수가 없소.'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저 사문과 바라문을 절복折伏시킨다."
<자재천 창조론과 무인무연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씀하심>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그대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하늘이든 마魔이든 범천이든 다른 어떤 세간이든 아무도 절복시킬 수 없으며, 더럽힐 수 없으며, 제압할 수 없다. 어떤 것이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달아 그대들에게 이야기한 것으로서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하늘이든 마이든 범천이든 다른 어떤 세간이든 아무도 절복시킬 수 없으며, 더럽힐 수 없으며, 제압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육입처법六入處法이다.....
세존은 당시의 외도사상이 인간을 해탈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주장하지만 결코 올바른 해탈을 제시할 수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바라문교에서는 모든 것은 브라만에서 나와서 브라만으로 돌아간다고 주장했고, 인간의 '자아'인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라는 범아일여사상을 주장했다. 그들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아트만'의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아트만'이 '브라만'이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아트만'의 활동이라면 우리는 살생과 같은 악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가운데는 악행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악행은 모든 사람과 동일한 '아트만'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의 행위의 주체는 '브라만'과 동일한 '아트만'인데 그 '아트만'이 악행을 한다면 모든 사람의 '아트만'은 악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아'가 본래적으로 악행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어떻게 악행을 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아트만'을 행위의 주체로 생각하는 바라문교의 업설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윤리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세존의 비판이다.
숙세의 업인業因이 현세의 삶을 결정한다는 숙명론은 자이나교의 업설을 의미한다. 자이나교에 의하면 업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일으킨다. 만약 그렇다면 전행에 악행을 할 업을 지었다면 현생에서 그 악행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업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선택을 불가능하게 되므로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바라문교와 다를 바가 없다.
무인무연론은 유물론자들의 견해로서 업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도덕부정론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세에서의 순간적 쾌락을 인생의 목표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무인무연론은 자신들이 목표로 설정한 쾌락마저도 보장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모든 것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면 쾌락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판단하고 선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외도들의 사상은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에 의한 행복의 추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세존은 이 점을 비판한 것이다. 세존은 이들을 비판하고 육입처를 이야기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육입처는 보고, 듣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의 구조를 '자아'로 착각한 것이다. 이러한 착각에서 우리는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아간다. 살생이나 거짓말 같은 모든 악행은 이러한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결과가 괴로움이다. 따라서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어떤 행위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바르게 판단하여 선택할 때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나타난다는 것이 세존의 주장이다. 즉 '작자는 없으나 업보는 있다'는 것이 육입처를 이야기하는 세존의 생각인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의 삶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형성되고, 그 마음에 의해 세계는 연기한다. 따라서 마음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미혹하면 바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없고, 마음이 밝아지면 바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아'가 실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 할 일을 바르게 선택하여 실천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렇게 바르게 판단하고 선택하는 마음이 지혜, 즉 반야이며, 이러한 반야에 의해 형성된 견해가 정견正見이다. 세존은 이러한 정견에 기초한 삶을 팔정도라고 불렀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중아함 도경>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육계六界를 인연으로 육입처가 있고, 육입처를 인연으로 촉觸이 있으며 촉을 인연으로 수受가 있다. 비구들이여, 만약 수가 있으면 곧 괴로움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고, 괴로움의 집集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고, 괴로움의 멸滅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고, 괴로움이 멸하는 길(道)을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
... 중략...
어떤 것이 괴로움이 멸하는 길을 사실대로 아는 것인가? 정견 내지 정정正定의 팔지성도八之聖道를 아는 것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마땅히 괴로움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고, 마땅히 괴로움의 집集을 끊어야 하며, 마땅히 괴로움의 멸滅을 작증作證해야 하고, 마땅히 괴로움이 멸하는 길을 실천해야 한다.
만약 비구가 괴로움을 사실대로 알고, 괴로움의 집을 끊고, 괴로움의 멸을 작증하여 괴로움이 멸하는 길을 실천하면 이것을 비구가 일체의 누漏(번뇌)가 다하여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탈하여 능히 바른 지혜로 괴로움의 끝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있다. 외도들의 업설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바른 윤리가 될 수 없음을 비판한 세존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연기설에 입각하여 사성제와 팔정도로써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3. 업보와 마음
세존은 업業이 반드시 보報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자이나교에서는 그러한 업을 괴로운 결과를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물질적 실체로 보았다. 그러나 세존은 업을 마음에서 일어나 마음을 형성하는 우리의 삶으로 보았다. <중아함 사경思經>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業이 있으면, 현세에 받든 혹은 내세에 받든, 그는 반드시 그 보報를 받는다고 나는 말한다. 만약 고의로 지은 업이 아니면 그는 보報를 받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업은 인간의 행위, 즉 삶이다. 우리는 의도 없이 다른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 만약 업이 실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부지불식간에 행한 악업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업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業의 결과 즉, 報는 마음의 상태로 나타난다. 우리의 삶은 마음에서 비롯되며, 삶을 통해 마음은 항상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이렇게 마음에서 비롯된 삶이 업이고, 삶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마음이 報이다. 세존이 이야기하는 업보는 삶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이 업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연기한다고 말하고,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말한다. 이러한 마음은 결코 바라문교의 '아트만'도 아니고 자이나교의 '명아(Jiva)'도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도 아니다. 지금 여기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삶이 곧 마음이다. 이 마음에서 갖가지 중생의 세계도 일어나고, 부처의 세계도 나타난다.
우리가 착하게 살아야 하는 까닭은 착한 삶을 통해 즐거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며, 악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까닭은 악한 삶을 통해 괴로운 마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세존이 '고의로 업을 지은면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 이야기한 것은 업을 지어서 그 보를 받는 불변하는 실체가 있어서 업을 짓고 보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롯된 업을 지으면 그 결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세존이 이야기하는 자업자득이다.
<중아함 염유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보여 준다.
그 때 세존꼐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했다. "사람은 지은 業에 따라 그 報를 받는다. 그래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없앨 수 없고, 범행을 수행하면 곧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 ... 중략...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적은 양의 물 속에 한 냥의 소금을 넣어서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하려 한다고 하자. 이 한 냥의 소금이 적은 양의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대답하여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소금은 많고, 물은 적기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있나이다."
"이와 같이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果를 받되 지옥의 보報를 받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을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果를 받되 지옥의 보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몸을 닦지 않고, 계戒를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은 사람이 (악업을 지어) 수명이 극히 짧으면, 이 사람은 착하지 않은 업을 지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지옥의 보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한 냥의 소금을 갠지스 강물 속에 넣어서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하려 한다고 하자. 이 한 냥의 소금이 많은 양의 물을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요. 왜냐하면 갠지스 강물은 많고, 한 냥의 소금은 적기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할 수 없나이다. "
"이와 같이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현법現法(현세)의 보를 받는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을 착하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현법의 보를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인가? 몸은 닦고, 계를 닦고, 마음 닦고, 지혜를 닦은 사람이 (악업을 지어도) 수명이 극히 길면, 이 사람은 착하지 않은 업을 지어 반드시 괴로운 과를 받되 현법의 보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
이 경에서 물은 마음에 비유한 것이고 소금은 업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평소에 닦은 선행으로 충만해 있으면 조그만 악행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악행으로 가득 차 있으면 조그만 악행도 큰 괴로움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업은 그 자체가 어떤 결정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이 이 경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업은 마음에서 비롯되어 새로운 마음을 형성시킨다. 業은 마음에서 일어나고 그 報로서 새로운 마음이 형성되므로 업보는 곧 마음이다. 대승불교의 유식사상은 이러한 업설을 계승한 것이다.
24. '참된 나'
불교는 '참된 나'를 찾는 길을 가르친다. 우리는 왜 '참된 나'를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행복을 얻은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었을 때 느끼는 충족감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작용한다. 이렇게 행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을 때를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한다. 따라서 자유란 행복을 얻기 위한 마음의 작용이 아무런 방해를 받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속이란 자기의 행복을 위해 작용하는 마음의 작용이 방해를 받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참된 나'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육신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살면서도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참된 나'를 발견하고, 그것이 나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그 '참된 나'의 행복을 위해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참된 나'를 위하여 작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의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참된 나'는 무엇인가? <반야심경>은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여 행복을 얻는 길을 가르치는 경전이다. 이 경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관자재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에 이르러 오온五蘊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
반야의 지혜로 오온五蘊이 비어 있음을 보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반야심경>의 주제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은 오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오온五蘊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다. 대부분의 불교교리 소개서에서는 오온은 물질과 정신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색色은 물질을 의미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오온이 이와 같은 것이라면 <반야심경>은 물질과 정신이 모두 비어 있음을 보게 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 된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허공처럼 텅 비어 보이고, 모든 정신작용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없을 것이고, 즐거움도 없을 것이다. 온 세상이 이렇게 텅 비어 버리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가 될 것이다. 이렇게 허무한 세계가 반야바라밀다의 세계일까?
<잡아함 306경>에서는 오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눈으로 색을 보면 무엇인가를 보는 마음(眼識)이 생긴다. 이렇게 보는 마음이 있을 때 무엇인가가 보이며, 보이면 그것에 대하여 느낌(受)이 일어나고, 생각(想)이 있어나고,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는 생각(思)이 일어난다. 이것이 수受(느낌), 상想(생각), 행行(어떻게 하려는 생각), 식識(무엇인가를 보는 마음)이다. 보는 눈(眼, 즉 色)과 이들 네 가지를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들 오온에서 사람이란 생각을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내가 귀로 소리를 듣고, ....'
이 경에 의하면 오온이란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어떤 사물을 보면 '내가 본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나는 '보는 나(色)'이다. 한편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 '내가 느낀다'고 생각한다. 이 때의 나는 '느끼는 나(受)'이다. 이 밖에도 나는 '생각하는 나(想)' '행동하는 나(行)' '의식하는 나(識)' 가 있다. 우리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식하는 '나'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감정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생각하고, 의지로 행동하고, 의식으로 인식한다'고 말한다.
오온이란 이렇게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우리의 생각'이지 물질과 정신이라는 어떤 객관적인 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가 모여서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허망한 생각으로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다섯 가지 망상을 세존은 오온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의 '나'는 지혜롭게 깊이 생각해 보면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즉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의식하지 않을 때는 '나'라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이다. 매 순간 우리는 다른 것을 보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것을 의식한다. 따라서 다섯 가지 생각은 무상하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불경에서는 '오온은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그 속에 어떤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불경에서는 '오온은 무아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오온이 무상하고 무아라면 <반야심경>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관자재보살은 지혜롭게 깊이 관찰하여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해 왔던 몸,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등이 모두 인연에 따라서 순간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일 뿐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허망한 생각인 나'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반야심경>은 이렇게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허망한 망상임을 깨우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참된 나'의 구체적인 모습은 시원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경 속에 우리의 참모습이 보인다.
장엄염불 가운데 '천강유수천강월千江流水千江月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라는 게송이 있다. 본래의 달은 하나이지만 물이 흘러가는 강이 있으면 그 모든 강에 달이 비치고, 수만 리의 하늘에 구름이 없어지면 수만 리의 하늘이 그대로 하늘일 뿐이라는 것이다.
수천 개의 강에 달이 있지만 본래의 달은 하나이며, 구름에 가려서 하늘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구름만 걷히면 수만 리의 하늘이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의 참모습이 이와 같다. 수많은 중생들이 있으면 수많은 '나'가 있지만 '본래의 나'는 하나이며, 두꺼운 무명에 가려서 '본래의 나'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지만 무명만 사라지면 '본래의 나'는 그대로 나타난다.
오온이란 중생들이 생각하는 '각각의 나' 이다. 이러한 '나'는 강에 있는 달이 실재하지 않듯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오온은 공이며 무아'라고 이야기한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은 이것을 의미한다.
하늘을 떠나 따로 구름이 없고, 구름을 떠나 따로 하늘이 없다. 하늘의 수분이 응고한 모습을 구름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와 같이 오온이라는 '허망한 나'를 떠나 따로 '참된 나' 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수분이 응고한 것을 구름이라고 부르듯이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을 오온이라고 부를 뿐이다. 만약 오온이 '참된 나'가 아니라고 해서 몸을 없애고, 느낌, 생각, 의지, 의식을 없애버리면 남는 것은 허무일 뿐이다. 문제는 몸이나 느낌, 등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이들을 잘못 보고 있는 데 있다. 공이며 무아인 오온의 실상을 알고 보면 오온이 곧 그대로 '참된 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우선 色, 즉 우리의 몸을 잘 살펴보자. 우리는 부모에게 몸을 받고 태어나 그 몸으로 평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몸이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태어나서 죽는 이 몸에 대하여 '나'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생각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죽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을 잘 관찰해 보면, 태어날 때의 몸과 죽을 때의 몸은 동일한 몸이 아니다. 태어날 때의 몸은 태어난 순간부터 변화한다. 어릴 때의 사진과 커서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결코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렸을 때의 나와 커서의 나를 동일한 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동일하지 않은 몸을 '동일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온의 색이다. 즉 오온의 색은 실상이 아니라 우리가 꾸며놓고 집착하고 있는 허망한 생각일 뿐이다.
그렇다면 색, 즉 몸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몸의 실상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허망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잘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신념처身念處라고 한다. 우리의 생각을 몸을 관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신념처인 것이다. 우리의 몸을 잘 관찰하면 몸은 먹는 것의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잘 먹으면 살이 찌고 못 먹으면 몸이 마른다. 또 먹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하고 사라져간다. 따라서 몸은 음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음식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음식과 몸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음식을 먹어 그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음식은 내 몸이 되고, 소화가 되어 배설하고 나면 배설물은 내 몸이 아니다. 그러나 배설물이 논밭에 뿌려져 쌀이 되고 과일이 되어 내 몸에 들어오면 다시 내 몸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 몸과 음식물과 배설물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음식에 대하여 살펴보자. 음식은 땅이 있어야 생길 수있고, 나무, 공기, 태양, 물 등이 있어야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음식은 나무, 공기, 태양, 물 등과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몸은 곧 나무이며, 공기이며, 태양이며,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의 몸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보면 내 몸은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없이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몸은 무상하여 상주불변하는 실체는 없지만 인연, 즉 업에 따라 항상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상하여 실체가 없는 모습을 空이라고 부르고, 인연 따라 나타난 모습을 色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나의 몸의 참 모습은 '색즉시공' 이고 '공즉시색'인 것이다. 수, 상, 행, 식도 마찬가지 이다.
이와 같이 오온의 실상은 업을 짓고 보를 받는 실체가 아니라 삶에 의해 무상하게 변화하고 있는 업보이다. 오온은 '작자'가 아니라 '업보'인 것이다. 따라서 '오온'에 대하여 '나'라는 허망한 생각만 지워버리면 '무아인 오온'이 그대로 우리의 참모습이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참된 나'를 이렇게 알았다면 '참된 나'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까? 흙이나 공기가 내 몸이 아니라고 오염시키고, 흐르는 강물이 내 몸이 아니라고 강물을 더럽힐 수 있을까? 흙이나 공기나 물이 오염되면 우리의 몸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의 몸을 위해서 내 몸을 보살피듯이 환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고 보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과 나가 둘이 아니라 모두가 '참된 나'라고 생각하면 나를 위해 남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친구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남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마음대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불교에서는 이러한 자유를 '해탈'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이런 자유는 얼마든지 보장되어 있다. 아니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는 그렇게 살 때 행복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본래 해탈을 구족한 우리의 참모습이다. 이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리석고 허망한 생각, 즉 무명과 번뇌일 뿐이다.
3조 승찬 스님에게 4조 도신 스님이 "스님 자비로써 저를 해탈 법문으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때, 승찬 스님은 "누가 너를 묶고 있느냐?"고 반문했고, 승찬 스님의 이 말씀에 도신 스님은 "묶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승찬 스님이 다시 "그렇다면 왜 해탈을 구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도신 스님은 본래 해탈해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강에 비친 달이 본래 하나의 달이듯이 우리가 '각각의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이 본래는 '하나'이며, 이러한 '나의 참모습'이 어리석은 생각에 가려서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어리석은 생각에서 벗어나면 본래 해탈을 구족한 '참된 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을 가르친다.
25. '거짓된 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거짓된 나'는 오온이다. 이러한 '거짓된 나'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를 알아서 그 근거를 없애야만 '참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 '거짓된 나'의 근거로 이야기한 것은 '육입처'이다. 앞에서 인용한 <잡아함 306 경>을 다시 살펴보자.
눈으로 색을 보면 무엇인가를 보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보는 마음이 있을 때 무엇인가가 보이며, 보이면 그것에 대하여 느낌(受)이 일어나고, 생각(想)이 일어나고,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는 생각(思)이 일어난다. 이것인 수受(느낌), 상想(생각), 행行(어떻게 하려는 생각), 식識(무엇인가를 보는 마음)이다. 보는 눈(色)과 이들 네 가지 (受想行識)를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들 오온에서 사람이란 생각을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눈으로 색을 보고, 내가 귀로 소리를 듣고, ...'
이 경은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는 나', 즉 오온이 나라는 생각의 근거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신념을 '六入處'라고 한다.
세존은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신념을 'ayatana(入處)'라고 불렀다.
육입처의 입처入處는 'ayatana'를 한역한 것이며, 혹자는 입入 또는 처處로 번역했다. 세존이 우리의 그릇된 신념을 'ayatana'라고 부른 것은 당시의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의 생각을 지적한 것으로 생각된다. <찬도갸 우파니샤드>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내가 브라흐만의 네 번째 부분들을 알려 주겠다."
"말씀해 주십시오."
물새가 사뜨야까마에게 말하기를, "총명한 소년아, 숨, 눈, 귀 그리고 마음이 그 네 번째 부분이다. 이들은 브라만이 머무는 자리(ayatana)의 이름이다."
우리는 숨쉬고,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우리의 삶에 '자아'로서 브라만이 있으며, 숨쉴 때는 숨에 머물고, 볼 때는 눈에 머물고, 들을 때는 귀에 머물며, 생각할 때는 마음에 머문다는 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의 주장이다. 우리가 눈, 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브라만이 머물고 있는 자리에 대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보는 자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보는 자아가 눈에 머물면서 사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이 눈, 귀에 대하여 'ayatana'라고 한 것은 이러한 우리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수능엄경>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이렇게 애락함은 저의 마음과 눈으로 하였나이다. 눈으로는 여래의 거룩한 상을 보옵고, 마음으로는 애락하였으므로 제가 발심하여 생사를 버리려 하였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한 바와 같이, 참으로 애락함은 마음과 눈으로 말미암느니라. 만일 마음과 눈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하면, 진로塵勞(번뇌)를 항복받을 수 없느니라. 마치 국왕이 대적의 침략을 받고 군대로 보내어 토벌할 적에 그 군대가 적병이 있는 데를 알아야 하는 것과 같느니라. 너로 하여금 (생사)유전케 함은 마음과 눈이 허물이니, 내 이제 너에게 묻노라. 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일체 세간에 열 가지 이생異生이 마음은 모두 몸 속에 있사오며, 여래의 청련화 같은 눈은 부처님의 얼굴에 있사옵고, 저의 부근사진浮根四塵(지수화풍 사대로 된 허망한 눈)은 제 얼굴에 있사오니, 이와 같이 인식하는 마음은 실로 몸 속에 있나이다."
...중략...
"아난아, 너도 그러하니라. 너의 신령한 마음이 온갖 것을 분명하게 알거니와 만일 현재에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몸 속에 있다면 몸 속에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터인데, 먼저 몸 속을 보고 나중에 밖에 있는 것을 보는 중생이 있겠느냐? 그러므로 알아라. 네 말과 같이 깨닫고 알고 하는 마음이 몸 속에 있다는 말은 옳지 아니하니라."
... 중략...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속을 보지 못하는 탓으로 몸 속에 있는 것이 아니옵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며, 서로 여의지 아니한 탓으로 몸 밖에도 있지 아니하오니, 지금 다시 생각하온즉 한 곳에 있는 줄을 알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있는 데가 어디냐?"
아난이 말하였아. "이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속을 알지 못하면서도 밖엣 것을 잘 보는 터이온 즉, 제 생각에는 근根(눈) 속에 들어 있겠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었다. "네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 같다면, 산과 강을 볼 적에 어째서 눈을 보지 못하느냐?...."
이 경은 아난은 인식의 주체로서의 마음이 실재하고, 이 마음이 눈을 통해 사물을 인식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난은 우리의 몸 속에 인식의 주체인 마음이 있어서 눈을 통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눈 속에 마음이 머물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세존이 안, 이, 비, 설, 신, 의를 'ayatana'라고 부른 것은 우파니샤드 철학자들과 <수능엄경>에서 아난이 보여 준 중생들의 생각을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ayatana'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식할 때 인식의 주체로서 '자아'가 있다는 신념에서 형성된 '자아'가 오온이다. 세존은 우리에게 이러한 잘못된 신념, 즉 'ayatana'에서 어떻게 중생들의 '자아'와 '세계'가 연기하는가를 보여 주었으며, 이것이 연기설이다.
일반적으로 육입처와 육근六根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십이입처는 육근과 육경六境을 의미하고 십팔계는 육근, 육경, 육식六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이처는 결코 육근을 의미하지 않으며, 십팔계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도 육근과 육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본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존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근본불교의 기초 개념인 육근, 육경, 십이입처, 십팔계 등의 개념이 크게 오해되고 있기 때문에 근본불교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에서 육입처와 육근의 차이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으며, 최근 <육입처와 육근은 동일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 차이를 밝힌 바 있다. 근본불교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먼저 그 기초가 되는 개념의 이해를 위해 육입처와 육근의 의미를 살펴보자. 아래 내용은 이 논문에 실린 것이다. (다음 포스팅에 계속)
26. 육입처와 육근
만약 육입처六入處가 육근六根을 의미한다고 하면 근본불교의 교리는 매우 큰 딜레마에 빠진다. 먼저 십이연기설의 이해에 문제가 생긴다. 십이연기설에 의하면 육입처六入處는 무명無明에서 연기하여 무명이 사라지면 행行, 식識, 명색名色과 함께 차례로 사라진다고 한다. 만약 육입처가 육근六根을 의미한다면 육근六根이 무명에서 생긴다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명이 사라진 세존은 육근六根이 없어야 할 것이다.
육입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단순히 한 개념의 오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육입처는 오온 성립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여러 교리는 이와 같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근본불교의 교리는 십이입처설十二入處說은 십팔계설十八界說로 발전하고, 십팔계설은 오온설五蘊說로 발전하며, 오온설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로 발전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연기설은 십이입처설에서 시작되어 십이연기설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기설의 토대가 되는 육입처가 육근과 동일시 됨으로써 근본불교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이고 바른 이해가 어렵게 되었다.
육근의 안근과 육입처의 안입처가 다르듯이 육입처의 안입처와 십팔계의 안계도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입처入處에서 계界가 형성되고, 계가 형성되었을 때 촉觸이 생하여 오온五蘊이 집기한다는 것이 불교의 연기설이다. 입처入處, 계界, 촉觸, 집集, 온蘊 등의 술어는 이러한 연기설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며, 입처는 그 기초가 된다. 따라서 입처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계, 촉, 집, 온 등의 의미도 알 수 없으며, 연기설을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육근의 의미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기존의 이해로는 육근은 감각기관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전의 내용을 통해 육근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것은 신체의 기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활동 내지는 인지활동을 의미한다. 육입처는 이러한 인지활동에서 발생하는 의식이다. 육근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육입처에 대한 바른 이해로 이어지고, 나아가 모든 근본불교의 바른 이해로 이어질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입처(ayatana)'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육입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세존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것을 발견했을까? <잡아함 57경>은 육입처가 오온의 근거를 찾은 결과 드러난 것임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어떤 비구가 이 좌중에서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빨리 누漏를 다하게 될까?' 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미 그것에 대하여 설한 바가 있다. 마땅히 여러 가지 음陰(五蘊)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사념처四念處, 사정단四正斷,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분七覺分, 팔성도분八聖道分이 오음五陰을 잘 관찰하는 길이다.
... 중략...
어리석은 범부는 몸(색온)을 자기라고 보나니 만약 자기라고 본다면 이것을 행行이라고 부른다. 저 행行은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무명촉無明觸이 애愛를 낳고, 애愛를 연緣으로 하여 저 행行이 일어나는 것이다.
저 애愛는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저 애愛는 수受가 인因이고, 수受가 집기集起한 것이고, 수受가 낳은 것이고, 수受가 발전한 것이다.
저 수受는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저 수受는 촉觸이 인因이고, 촉觸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촉觸이 낳은 것이고, 촉觸이 발전한 것이다.
저 촉觸은 무엇이 인因이고, 무엇이 집기集起한 것이고, 무엇이 낳은 것이고, 무엇이 발전한 것인가? 저 촉觸은 육입처六入處가 인因이고, 육입처가 집기集起한 것이고, 육입처가 낳은 것이고, 육입처가 발전한 것이다.
저 육입처는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며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다.
저 촉觸이나 수受나 애愛나 행行도 무상하고 유위이며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다.
이 경에서 보여 주듯이 육입처는 사념처 등을 수행하여 오온의 근원을 찾아간 결과 오온의 근거로 드러난 것이다. 오온은 중생들이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념처는 이들 오온이 과연 참된 자아인가를 성찰하는 관법觀法인데 사념처관四念處觀을 통해 보면 오온을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무명촉에서 비롯된 갈애(愛)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갈애의 근원이 육입처이며 육입처는 마음에서 연기한 법이라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 경에는 무명촉 - 애 - 행 이라는 연기구조와 육입처 - 촉 - 수 - 애 라는 연기구조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즉 愛의 원인으로 무명촉과 육입처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촉의 의미를 밝히면 육입처의 의미도 드러날 것이다.
무명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전에 인용한 <잡아함 294경>에 나타난다.
범부는 무명에 가리우고 애욕에 묶여서 식識이 생기면, 자신의 내부에 식이 있고, 외부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 두 인연으로 촉觸이 생긴다.
이 경에 의하면 무명촉은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처 - 촉 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무아의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에서 애욕에 묶이어 자기와 타자를 구별하는 작용이 일어난다(行). 그 결과 이전의 삶을 통해 형성된 마음(識)을 자기의 내적 자아로 삼고, 그 마음에 인색되는 명색名色을 외적 객관세계로 파악한다. 육입처는 이렇게 객관세계로 파악된 명색을 보고, 듣고 생각할 때 인식의 주체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생의 신념이다.
이때 명색은 인식의 대상, 즉 육외입처六外入處(色聲香味觸法)가 된다. 무명촉은 이와 같이 무명에서 분별된 내적 자아(주관)와 외적 세계(객관)의 관계 맺음이다. 중생들은 그 관계 맺음을 통하여 자기 존재(오온)을 구성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육입처 - 촉 - 수 - 애 이고,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작용이 行이다.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삶은 무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계속되므로 무명을 연으로 하여 行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삶에서의 연기의 출발점은 육입처이다. 십이연기에서 육입처 앞의 무명, 행, 식, 명색은 과거의 삶을 통해 형성된 중생의 의식세계이며 이 세계에서 중생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세존은 이러한 삶에 삶의 주체로서 불변의 자아는 없다(有業報而無作者)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인지의 주체, 즉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지활동의 결과(業報)일 뿐 자아라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명의 상태에 있는 중생들은 애욕에 묶여서 업보를 자아로 집착한다. 육입처는 이렇게 중생들에 의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에 인지활동의 주체인 자아가 들어있다는 그릇된 신념인 것이다.
근根의 원어 'indriya'는 원래 '인드라에 속하는'의 의미를 지닌 형용사로서 중성명사로 사용되면 '인드라가 지닌 힘이나 속성'을 의미한다. 팔리성전협회에서 간행한 사전에 의하면 'indriya'는 불교 심리철학과 윤리학의 가장 포괄적이고 중요한 카테고리의 하나로서 '지배적인 원리, 지배적인 힘'을 의미하며 감각적 지각능력과 관련해서는 '능력, 기능'을 의미하는데 왕왕 '감각기관(organ)'으로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전에서 육근을 감각기관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 것은 적절한 것이지만 육근의 근(indriya)을 '능력, 기능'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육근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다. <아함경>에서 육근은 지각을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수행체계 속에서 이야기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육근의 의미는 육근이라는 개념이 불교의 수행체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육근은 근본경전에서 수호守護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중아함 산수목건련경>에서 육근의 수호는 처음 수행을 시작한 비구가 거쳐야 할 수행의 단계 가운데 다음과 같이 이야기된다.
1)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한 생활을 할 것(身口意護命凊淨)
2) 자신의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여실하게 관할 것(觀內身如身至觀覺心法如法)
3) 자신의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여실하게 관하고 욕망(欲相應念)을 일으키지 말 것(觀內身如身莫念欲相應念)
4)육근六根을 수호守護하여 항상 막을 것(守護諸根常念閉塞)
5) 출입出入할 때 자신의 몸가짐을 잘 살피고, 일상생활을 잘 살필 것(正知出入善觀分別)
6) 홀로 외딴 곳에 머물면서 선정을 닦아 사선四禪을 성취할 것(獨住遠離無事處)
<중아함 상적유경>에서도 육근의 수호가 수행의 단계 속에서 이야기되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십선계十善戒를 잘 지켜 계취戒聚를 성취한다(成就此聖戒聚).
2) 육근六根을 수호守護하여 항상 막는다(守護諸根常念閉塞).
3) 출입할 때 자신의 몸가짐을 잘 살피고, 일상생활을 잘 살핀다(正知出入善觀分別).
4) 홀로 외딴 곳에 머물면서 선정을 닦아 사선을 성취한다(獨住遠離無事處).
십선계十善戒는 살생, 투도, 사음, 거짓말, 이간질, 욕설, 아첨, 탐심, 진심, 치심을 행하지 않는 것이므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한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산수목건련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관하는 사념처의 수행이 <상적유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육근의 수호는 사념처와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육근의 수호란 지각활동을 할 때 대상에 의해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육근의 수호는 사념처 수행이라는 것을 <잡아함 255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대를 위하여 문門을 수호守護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리라. 다문성제자多聞聖弟子는 눈(眼)으로 색色을 보고서 마음에 드는 색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색에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항상 그 마음을 모아서 신념처身念處에 머물면서 무량한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여실하게 알아 그에게 일어난 악불선법惡不善法을 남김이 없이 적멸한다.
이 경에서 문門이라고 한 것은 육근을 의미한다. 육근의 수호는 사념처에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正念의 상태를 떠나지 않고 지각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산수목건련경>에서는 사념처의 수행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고, <상적유경>에서는 이러한 사념처의 수행을 육근의 수호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육근의 수호가 사념처 수행을 의미한다면 육근을 감각기관이나 감각기능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산수목건련경>에 상응하는 <중부 니까야>에서는 육근의 수호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근根들에서(indriyesu) 문門(dvara)을 지키라. 눈으로 색色을 보고 나서 겉모습(相:nimitta) 에 사로잡히지 말고 부수적인 모습(別相: anubyanjna)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이 안근眼根(cakkhundriya)을 억제하지 않고 살아가면 탐애나 근심과 같은 사악하고 불선한 법法들이 흘러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하여 마땅히 안근을 지켜야 하고, 안근의 억제를 실천해야 한다.
<중부 니까야>에서 '근根들에서(indriyesu:indriya의 복수처격) 문門을 지키라'는 것이 <중아함경>에서는 '제근諸根을 수호하라'로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함경>에 의하면 육근은 수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니까야>에 의하면 육근은 처격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육근은 장소나 시기 또는 어떤 행위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수호의 대상은 문門이다. 따라서 <니까야>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육근은 '인지활동' 또는 '지각활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근들에서 문을 지키라'는 말은 '지각활동을 할 때 마음에 나쁜 생각이 흘러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의미가 된다.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오근五根, 즉 신근信根(saddhindriya), 정진근精進根(viriyindriya), 염근念根(satindriya), 정근定根(samadhindriya), 혜근慧根(pannindriya)의 'indriya' 도 '활동'의 의미로 해석하면 잘 어울린다. 신근信根은 여래에 대한 굳은 믿음의 실천을 의미하고, 정진근精進根은 사정단四正斷을 부지런히 닦는 것을 의미하며, 염근念根은 사념처四念處를 관하는 것을 의미하고, 정근定根은 사선四禪을 구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혜근慧根은 사성제四聖諦를 여실하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오근은 다섯 가지 수행의 실천인 것이다.
27. 육입처와 육근의 관계
전술한 바와 같이 육입처와 육근은 각기 다른 의미의 개념이다. 다음에 인용하는 <중부 니까야 Mahavedallasuttam>은 육근과 육입처가 결코 동일한 의미일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존자여, 이들 오근, 즉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은 서로 다른 다양한 경계境界와 행처行處(활동영역)가 있어서 다른 것의 활동영역을 인지하지 못하오. 이와 같이 다른 것의 활동영역을 인지하지 못하는, 서로 다른 활동 영역을 갖는 오근의 의지처는 무엇이며, 그들의 (모든) 활동영역을 인지하는 자는 누구인가? ..... 존자여, 이들 오근의 의지처는 의意이며, 의가 그들의 활동영역을 인지하오.
존자여, 이들 오근, 즉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존자여, 이들은 오근의 수명壽命에 의지하여 머무오.
존자여, 수명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존자여 수명은 열熱에 의지하여 머무오.
존자여, 열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존자여, 열은 수명에 의지하여 머무오.
이 경은 안이비설신의 지각활동이 의근에 의지하여 지속되며, 이들 지각 활동은 수명이 계속되는 한 지속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육입처는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지만 육근은 수명에 의지하여 지속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명에서 연기한 육입처는 무명을 멸하고 멸진정을 성취하면 사라진다. 그러나 육근은 멸진정에 들어도 사라지지 않고 생명활동이 끝나야 사라진다.
육입처와 육근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지만 이들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그러나 중생들은 업의 작자인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중생들이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인지활동(지각활동)에 기초하여 살아가는 가운데 무아의 진리를 모르고 애욕에 묶이어 인지활동에서 생긴 의식내용(업보)를 취착한 것이다. 육근은 삶의 기초가 되는 인지활동을 의미하고 육입처는 인지활동에 인지의 주체인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우리의 인지활동, 즉 육근에는 인지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명에 뒤덮인 중생들은 인지활동의 주체인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헥 중생들에 의해 허구적으로 계탁된 인지의 주체로서의 자아가 육입처인 것이다. 이것을 <잡아함 334경>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안眼은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고, 속박束縛이 있다. 어떤 것이 안의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되는가? 안은 업業이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된다.
업業은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고, 속박束縛이 있다. 어떤 것이 업의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되는가? 업은 애愛가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된다.
애愛는 인이 있고, 연이 있고, 속박이 있다. 어떤 것이 애의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되는가? 애는 무명無明이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된다.
무명無明은 인이 있고, 연이 있고, 속박이 있다. 어떤 것이 무명의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되는가? 무명은 부정사유不正思惟가 인이 되고 , 연이 되고, 속박이 된다.
부정사유는 인이 있고, 연이 있고, 속박이 있다. 어떤 것이 부정사유의 인이 되고, 연이 되고, 속박이 되는가?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생긴 부정사유가 어리석음을 낳는다.
안과 색을 연하여 부정사유가 생기고 어리석음을 낳는다. 그 어리석음이 무명이다. 어리석음으로 추구하는 욕欲을 애愛라고 한다. 애가 짓는 행위를 업이라고 한다.
육입처를 무상한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 정사유이다. 육입처를 바르게 사유하여 무상함을 관찰함으로써 육입처에 대한 욕탐을 끊으면 마음이 바르게 해탈할 수 있다. 그런데 바르게 사유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욕탐을 일으켜 업을 짓기 때문에 육입처가 나타난다는 것이 이 경의 내용이다.
육근의 수호는 육입처의 무상함을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인지활동(육근)을 할 때 인지의 주체(육입처)가 무상하고 무아라고 생각하여(정사유) 욕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육근의 수호이다. 바르지 못한 사유(부정사유)는 인지활동(육근)을 할 때 인지의 주체(육입처)가 무상하고 무아라고 사유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리석음(무명)에서 욕탐을 일으켜(애) 그 욕탐을 만족시키기 위한 업을 짓고, 그 결과 업을 짓는 업의 주체, 즉 자아로 취착된 것이 육입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육근은 인지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의미하고 육입처는 이러한 삶의 실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욕탐을 일으켜 인지활동의 주체로 취착하고 계탁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 즉 육입처는 망념이기 때문에 멸진해야 하지만 육근은 우리의 삶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른 삶이 되도록 수호해야 한다. 즉 육근의 수호를 통해 망념인 육입처를 멸진하고 무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이다. 무명에서 육입처가 연기하여 생사유전 한다는 것이 유전문이고, 육근을 수호하여 무명과 무명에서 연기한 육입처를 멸하는 것이 환멸문인 것이다. 육입처와 육근은 이렇게 연기설의 유전문와 환멸문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의 교리와 수행은 육입처와 육근을 토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개념이 지금까지 잘못 이해됨으로써 밀접한 연관을 갖는 불교의 이론과 실천은 별개의 분야처럼 다루어져 왔고, 서로 모슨된 것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업설'과 '무아설'은 '연기설'의 기초 위에 세워진 실천과 이론을 대표하는 사상인데, 이 두 사상이 서로 모순된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육입처와 육근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다. 육근이 우리의 인지활동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업을 의미한다. 육입처는 이 업을 실체화하여 자아로 취착한 것이다. 그리고 무아설은 이러한 육입처에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아설과 업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설 속에서 이론과 실천이라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28. 십팔계十八界와 촉觸의 발생
전술한 바와 같이 입처(ayatana)는 중생들이 '자아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십이입처 가운데 안이비설신의 내입처內入處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색성향미촉법 외입처外入處는 자아가 아니라 인식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바라문교에서는 모든 사물의 내부에 '아트만'이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모든 사물의 '자아'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상식과도 일치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면, 보이는 사물이 외부에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꽃이 실재하면서 피고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꽃은 피기 전에 어디에 있다가 필 때 나타나고, 지고 나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꽃 속에 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꽃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나타나고,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이렇게 실체가 없이 무상하게 생겨서 생기면 반드시 사라지는 현상을 우리가 꽃이라고 부를 뿐이다.
이러한 허망한 꽃에 대하여 실체로서의 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근거는 보이고(色), 냄새나고(香), 만져지기(觸) 때문이다. 보이고 냄새나기 때문에 색과 향 속에 그 색과 향을 가지고 있는 실체로서의 꽃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외입처는 외부의 대상이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우리의 신념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그것을 외입처라고 한 것이다.
십이입처는 이렇게 자아가 존재한다는 신념의 근거가 되는 내입처內入處와 외부의 사물이 존재한다는 신념의 근거가 되는 외입처外入處를 의미한다. 자아와 세계는 이러한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존은 중생들이 생각하는 자아와 세계는 이와 같이 그릇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일체는 십이입처"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보고, 듣고, 생각하면 대상에 대하여 분별하는 인식이 생긴다. 우리가 꽃을 보고, '이 꽃은 붉고, 향기로운 장미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하여 생긴 식識이다. 즉 봄으로써 붉은 빛이라는 의식이 생기고, 냄새맡음으로써 향기롭다는 의식이 생기고, 생각함으로써 '모양이나 향기로 보아 이것은 장미다'라는 의식이 생긴 것이다.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은 이렇게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생긴다. 이것이 육식六識이다. 봄으로써 생긴 의식이 안식眼識이고, 들음으로써 생긴 의식이 이식耳識이며, 냄새맡음으로써 생긴 의식이 비식鼻識이고, 맛봄으로써 생긴 의식이 설식舌識이다. 그리고 만져봄으로써 생긴 의식이 신식身識이고 생각함으로써 생긴 의식이 의식意識이다.
이와 같이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은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인식의 주체로서 우리의 몸 안에 있고, 이름과 형태를 가진 사물(名色)은 몸 밖에 있으며, 몸 안에 있는 의식이 감관을 통해 외부의 사물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중아함 차제경>과 이에 상응하는 <중부 니까야>에서 이런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비구에게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세존께서 물었다. "그대는 실로 '내가 알기로는 세존께서 이 식識이 변함없이 유전하고 윤회한다고 말씀하시었다'고 이야기했는가?"
차제(Sati)비구가 세존께 대답했다. "저는 실로 '내가 알기로는 세존께서 이 식識이 변함없이 유전하고 윤회한다고 말씀하시었다'고 이야기했나이다."
세존께서 물었다. "식識은 어떤 것이냐?"
차제 비구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이 식識은 말하는 자이며, 느끼는 자이며, 선악업善惡業을 지어 그 과보를 받는 자이옵니다."
세존께서 꾸짖어 말했다. "차제여, 너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알고 있느냐? 너는 누구의 입에서 내가 이와 같이 이야기했다고 들었느냐? 너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한결같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한결같이 이야기했다고 하는구나."
....중략....
"나는 식識은 인연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식識은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사라진다. 식은 연이 되는 것을 따라서 생긴다. 그 연을 이야기하자면,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식識이 생기며 생긴 식을 안식眼識이라고 말한다."
사물을 분별하는 식識은 자아와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그릇된 신념으로 보고, 듣고, 생각할 때 생긴 것이다. 이것을 세존은 식은 십이입처에서 연기한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렇게 십이입처를 연하여 육식六識이 발생하면 우리는 외부의 대상은 색성향미촉법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안이비설신의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내부에는 안이비설신의를 통해 색성향미촉법을 인식하는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외부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외육계外六計인 색, 성, 향, 미, 촉, 법계이고, 자기의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내육계內六計인 안, 이, 비, 설, 신, 의계이며, 인식의 주체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 육식계, 즉 안식계 내지 의식계이다. 이것을 십팔계十八界라고 부른다. 십팔계는 이렇게 십이입처를 인연으로 식이 발생함으로써 형성되는 우리의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즉 외적 세계는 색성향미촉법 등의 외육계로 되어 있고, 내적 자아는 안이비설신의로 되어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 외부의 세계를 인식하는 안식 내지 의식의 육식이 있다고 분별하는 마음이 십팔계인 것이다.
촉觸은 이러한 십팔계의 의식상태에서 발생한다. 전에 인용한 <잡아함 294경>에서 세존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무명에 가리우고 애욕에 묶여 이 식識이 생기면 '몸 안에 이 식識이 있고, 몸 밖에 명색名色이 있다'고 분별한다. 이 두 인연으로 촉이 생긴다.
무명에 가리우고 애욕에 묶여 있는 상태가 십이입처이다. 범부들이 십이입처의 상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갈 때, 분별하는 의식인 식識이 발생한다. 이 식이 발생하면, 안이비설신의로 된 몸 안에 사물을 분별하는 육식六識이 있고, 몸 밖에는 색성향미촉법으로 된 이름과 형태를 가진 사물(명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중생의 의식상태를 세존은 십팔계라고 불렀다. 근본불경의 여러 곳에서 촉은 십팔계를 인연으로 하여 생긴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위에 인용한 것과 결코 다른 의미가 아니다.
촉觸은 몸 안의 식識이 감각기관을 통해 몸 밖의 명색을 접촉하고 있다는 중생들의 착각이다. 예를 들어 '화단에 붉고 향기로운 장미가 있다'는 말은 '몸 안에 있는 식이 눈을 통해 밖에 있는 붉고 향기로운 모습을 한 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사물을 접촉하고 있다'는 말이다.즉 '외부에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식이 명색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촉의 원어 'phassa'는 '접촉'을 의미하므로 세존은 식과 명색의 접촉을 'phassa'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외부에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식과 명색의 접촉', 즉 '촉'을 의미하므로 촉觸은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중생들의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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