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나옹혜근 스님(나옹선사 토굴가)

수선님 2021. 10. 17. 11:47

나옹혜근 스님


해진 옷 한벌 지팡이 하나로
‘無念의 곳’에 이르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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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존자
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은
살아서는 ‘생불’로 추앙받고
입적해서는 ‘전설’이 된 고승이다.

그 분이 남긴 시들은
여전히 대중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일체작법의 증명법사’로
스님이 직접 쓴 발원문과 많은 게송들은
조석으로 스님들에 의해 암송되며 계승되고 있다.

이러한 스님의 ‘신화’는
고려말 격동과 수난의 회오리에 맞서
살활자재(殺活自在)한 깨달음과
중생에 대한 지극한 자비심으로
일관되게 살았다는 데서 비롯된다.

1320년
지금의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머니가 참외를 먹고 임신했다는 얘기도 있고,
또 세금의 수탈에 못 이겨
아버지가 집을 떠난 가운데
어머니가 관리한테 끌려가던 중
그를 낳자
까치들이 보호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미 7세에
서역의 고승 지공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스님은
20세가 되어 출가를 했다.

가까운 친구의 죽음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문경 묘적암에서 요연 선사를 은사로
“삼계고해에서 해탈해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
는 각오로 입산한 스님은
몇 해 뒤 양주 회암사로 옮겨
4년간의 처절한 정진 끝에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스님은 이후
원나라로 건너가
지공 선사와 평산처림 선사 등을 만나
법거량을 한 후 인가를 받았다.

지공 스님은
“눈 밝은 법왕에게 천검을 준다”며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임제의 법맥을 잇는 평산처림 선사도
“계법이 청정하여 보리를 얻었고
선정과 혜광을 다 구족하도다”
라며 불자와 법의를 전하기도 했다.

중국 황제까지도
찬탄을 마지않았던 나옹 스님이
10년간의 중국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것은
39세 때인 1358년.

“스님께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도 불법에서 물러나리라”
는 공민왕의 간곡한 요청에 신광사에 머물었고,
홍건적의 침입 때
의연한 태도로 절에 남아
적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기도 했다.

2년간 신광사에 머물던 스님은
결국 왕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산천을 주유하며
인연 따라 법을 설했으며
1370년 공부선(工夫禪)을 베풀어
꺼져가는 법등을 살리려고 애쓰기도 했다.

특히 만년에는
회암사 중창에 온 전력을 기울였고,
1376년 5월 15일
성리학으로 무장한 중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밀양 영원사로 추방되던 중
신륵사에서
“노승은 오늘 그대들을 위해
열반불사를 지으리라” 며 시적(示寂)했다.

이때 오색 구름이 산을 덮었고
수많은 사리가 나와 이를 씻을 때
구름도 없이 그곳에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스님에 관해서는
입적 때의 상서로운 일들에 대한 기록뿐 아니라,
묘적암에 계실 때
멀리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알고
냇가의 물을 손으로 떠
허공으로 날려 보내 불을 껐다거나,
칡넝쿨에 걸려 넘어지자
산신을 꾸짖어 칡넝쿨이
세 자 이상 크지 못하게 했다는 등
신통력에 대한 얘기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일체작법의 증명법사로 등장했던 이유나
스님의 사리와 진영이
일본·중국에 전해진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로 신통력이 대단하셨나요?

“물 위를 걷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게 기적이 아니라네.
부처님 말씀처럼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는 게 참다운 기적이지.
나는 신통력이 없다네.
그저 진리와 정직을 신통력으로 삼을 뿐이지.”

▷스님께서는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셨습니다.
그런데 회암사에서 주관하신 법회에
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하여
관리를 보내 막게 하고
추방까지 시켰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기울어져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했네만
시대의 거대한 물줄기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지.

유교이념으로 국가를 운영하려는 이들에게
나는 그들의 계획과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던 게지.

특히 회암사는
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불교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으니까. 안타까운 일이지.”

▷스님의 입적은
고려불교의 패배이자
불교의 몰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불교는 급속히 힘을 잃어갔고,
결국 500년의 불교탄압으로 이어졌으니까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스님이 백성을 미혹시켜,
천승(임금)조차
필부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게 하고
급기야 유교를 약화시켰고,
이에 주살했다는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혹시 스님께서는 살해되신 것은 아닌지요?

“오랜 세월 불교가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부귀영화에 탐착해온 공동의 업이지.
이제와 시비를 가리고,
누굴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힘쓰면 될 일이지.”

▷신광사에 주석하실 때
홍건적들로 인해 모두 피난을 갔지만
끝까지 절을 지키셨습니다.
살인과 약탈, 방화를 일삼는 그들 사이에
홀로 남은 건
지나치게 생명을 경시한 태도는 아니셨는지요?

“삶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살 만한 명이 있으면 살 것인데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저승사자는 꼭 그들만이 아니네.
어디에 숨든
세월이라는 저승사자를
피할 도리는 없으니까 말일세.
부처님께서는
99명을 살해한 앙굴리말라를
일부러 찾아가 교화하지 않으셨는가.
아무리 홍건적이라도 불성이 없겠나.
내게 그들은
진리를 몰라 헤매고 있는 교화의 대상이었네.”

▷일설에는
스님의 누이동생이 절에 와서
게으름을 피우고 정진도 하지 않자
불러 게으른 이유를 묻자
“오라버니가 훌륭한 스님이니까
저도 극락에 가겠지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님께서
다음날 누이를 불러 놓고
혼자서만 맛있는 떡을 드시자
누이가
“아니 맛있는 떡을 왜 혼자 드십니까?”
하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거, 이상하다. 내가 떡을 먹었는데
왜 너의 배가 안 부르지”
하고 경책했다고 전합니다. 사실인가요?

“허, 그런 얘기가 있나.
누이동생은 내가 출가한 후
나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 했지.
그러나 출가자에게
속가란 뜬구름 같은 것 아니겠나.
착하디착한 누이가
나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부디 아미타불을 늘 염송해
참다운 행복을 찾고
극락왕생하길 간곡하게 당부했을 뿐이라네.”

▷스님께서는
겹겹이 기운 누더기 옷을 일컫는
‘백납가(百衲歌)’를 비롯해
소박함을 무척 강조하고 계십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춥고 배고픔을 멀리하면
도(道) 또한 멀어지네.
투철한 수행정신과 공의 체현이
소박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지.

고려말의 불교가 타락하고
대중들로부터 멀어진 것도
가난과 고독을 싫어해서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당당한 수행자의 누더기 옷이야말로
진리 가풍을 잇는 참다운 신표일세.”

▷스님께서 쓰신 많은 글들이 남아있는데
선시야 그렇다 하더라도
가사문학의 효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말로도 여러 편의 글을 쓰셨습니다.

평소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의 단박 깨침을 강조하면서도
염불 또한 성불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나만 고집하면 그 순간 불법이 아니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많네.
다만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네.
심성을 울리고 변화토록 하는 것이 ‘이해’이니,
보다 많은 이들에게
불법을 전하려면 당연한 일 아니겠나.”

▷국가승려고시인
‘공부십절목(工夫十節目)’을
제시하기도 하셨는데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람들은
흔히 다름에 관심을 갖는다네.
뛰어난 사람은
‘천재’나 ‘성인’이라 부르며
남의 일로 취급하고
나와 다르게 보는 거지.

하지만 공부는
당당함과 다르지 않음에서 시작된다네.

달마도 임제도
눈은 가로 찢어지고 코는 솟았으며,
그대들도
눈은 가로 찢어지고 코는 솟았네.

삼라만상의 주인이 바로 그대란 말일세.”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내가 ‘경세(警世)’라는 시에서 말했듯
백년도 잠깐 동안인데
세월을 소홀히 보내지 말게나.

노력하고 수행하면 부처되기 쉽지만
금생을 잘못 보내면 벗어나기 어렵네.

죽음이 홀연히 오면
누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

부처나 영웅을 좇지 말고
그대들 스스로 부처나 영웅이 되려하게나.”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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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종범 스님 「나옹선풍과 조선불교」,
효탄 스님 『고려말 나옹의 선사상 연구』
·「나옹혜근의 불교사적 위치」,
윤태현 「나옹 이야기의 전승양상과 의미」,
이병욱 「나옹화상 귀양과 죽음에 대한 의문」,
김윤곤 「나옹 혜근의
회암사 중창과 반불론의 제압기도」,
이봉춘 「암울기의 눈 밝은 생애」,
한기두 「나옹의 중심사상과 선풍」,
이종찬 「가송의 대가 나옹」,
인권환 「나옹왕사 혜근의 사상과 문학」,
고혜령 「나옹선사와 목은 이색의 사상적 만남」,
조동일 「전설의 형성과 의미, 나옹전설의 경우」 등



나옹 어록

“만일 그대가
이 일을 궁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승속에도 있지 않고
남녀에도 관계 없으며
초참 후학에도 관계없고
또 여러 생의 구습에도 있지 않는 것이오.

오직 당자의
한 생각의 진실한 결정적인 믿음에 있는 것이오.

그대가 이미 그렇게 믿었거든
다만 24시간 동안 언제나 화두를 드시오.

(그러다보면 반드시)
잠자코 스스로 머리를 끄덕거릴 것이오.”

(나옹집 중)


‘산하대지가 눈앞의 헛그림자요
만상삼라도 또한 그러하다.
자성이 원래 청정함을 알면
하나하나 모든 것이 법왕신이로다.

못 깨달으면 산하는 내가 아니요
깨달으면 모든 것이 한 몸이로다.
깨닫고 못 깨달음 모두 부수면
새벽마다 닭은 오경에 운다.’

(나옹집 중)


‘한 생각 잊을 때 밝음 나타나
아미타불 다른 곳에 있지 않나니
온 몸이 앉거나 눕거나 바로 연화국이니
어느 곳 극락당 아닌 데 어디 있으리.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이를 얻어 부디 잊지 말아라
생각이 다하여 무념(無念)의 곳 이르면
네 몸에서 부처의 빛 절로 일리라.’

(나옹집 중)


‘해진 옷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
천하를 횡행해도 걸릴 데 없네

강호를 돌아다니며 무엇을 얻었던가
원래로 다만 배운 것 빈궁뿐이네.’

(나옹집 백납가 중)


찬탄과 공경

“보제(나옹) 스님은
우리 선왕이 스승으로 삼았던 분이다.
도가 높고 덕이 높으매
온 나라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그 바람이 불어가는 아래
나아가 법문을 들음으로써
일생의 다행으로 여기지 아니함이 있으리요.”

(고려 목은 이색)


“지공의 천검과 평산의 할이여
공부를 선택함은 어전에서 있었도다.

최후의 신광으로 사리를 남기니
삼한의 조실로서 만년을 전하도다.”

(제자 무학자초 스님)


“한국불교에 주어진
현재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불교문화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나옹의 종풍에
그 기준을 두고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나옹종풍은 그야말로
‘체용겸전(體用兼全·大機大用)’의
종풍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나옹은 선사이면서
발원문을 지어 발원했고,
염불행을 선으로 회통되도록
게송을 지어 설시하는 등
오증법력·자비방편·신기서광을
함께 갖춘 선풍이 나옹선풍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

ㅡ법보신문

 

 

 

 

나옹선사 토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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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慾)이 있을소냐
욕정(欲情)이 담박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그는 1340년(충혜왕 1)
허망하게 요절한 친구의 죽음에 무상함을 느끼고
그길로 공덕산 묘적암에서
요연(了然)선사에게 출가한다.

또 1344년에는 수도하며
회암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원나라에 가서 연경의 법원사에 머물며,
4년여를 지공에게 수학하였다

구월산ㆍ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을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도 송광사에 머물다가
회암사주지가 되어 절을 중창하고
왕명에 따라 밀양의 영원사로 가던 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수도는
나옹선사의 토굴가에서 찾을 수 있다.

토굴가에서는.....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이 건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그가 전라도 땅을 밟은 흔적은
무등산 규봉암과 지장암 사이
즉 지공(指空) 너덜 아래 있는 석굴로서
보조국사께서 수도하였다하여
무등산 석실(無等山石室)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제목으로 읊은 시가 전하고 있다.

단단한 이 집을 모두 뉘가 만들었을고
아마도 천지 이전의 조화였으리

사방에 텅빈 벽은 천년을 말하고
해묵은 서까래 만년을 이어왔네

높고 높이 솟았으나 무너지지 아니하고
떨어질 듯 걸렸으나 떨어지지 않더라

베풀고 용서하는 법계 크고도 넓으니
시공(時空) 의 진리는 현묘할 뿐이네.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임진왜란 호남의병장으로
제봉 고경명(1533~ 1592)의
나이 41세 되던 해인
1574년(선조7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당시 74세인 광주목사
갈천 임훈(1500~1584)의 일행과 함께
5일간에 걸쳐 무등산에 오른 감상을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으로,
4월 21일(맑음) 지공너덜을 지나며 이렇게 적었다.

"지공(指空)너덜만은
벌레나 뱀 따위의 기어 다니는 짐승이 없고
가을이 되어 떨어진 나뭇잎 하나
떨어진 것이 보이지 않으니
스님들 사이에 전해지기를
이 너덜은 고승 지공이
그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곳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지공너덜의 이 많은 수억의 돌은
본시 상봉근처에 있는 돌무더기였는데
김덕령장군이 하루 아침에 깨뜨려다가 내던져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천년.만년의 시어를 쓴 것으로 보아
인간이 감히 거론하기 힘든 상황의 장소인 듯 보인다.

나옹선사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시가 있다.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見我無語居 蒼空視吾無埃生
-貪慾離脫怒抛棄 水如風居歸天命


그는 특히 암굴에서 수도를 닦아
토굴가(土窟歌)가 유명하다.
이곳에서도 그런 관점에서 시을 지었다
.
영주가(靈珠歌)에서는

이른 아침 죽을 뜨고 점심에는 밥 먹으며
목마르면 아이 불러 차 한 잔을 달이게 하네
문 밖으로 해지면 산은 마냥 적요롭고
달 밝은 창가로는 흰구름이 흩어지네

晨朝喫粥齋時飯 渴則呼兒茶一椀
門外日沈山寂寥 月明窓畔白雲散


토굴가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품이 건 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진 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꽃아 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하니
종전에 모르든 일 금일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에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 제불회상(靈축山諸佛會上)
처처에 모였거든
소림굴 조사가풍(小林窟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은 묵묵하고 녹수는 잔잔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디.

청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慾)이 있을 소냐.

욕정이 담박(欲情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업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 듯 올라

무공저(無孔저)를 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가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무착영(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

나옹선사 토굴가는
참선하는 수행자들이 애송하는 시로
10년 동안 몸 눕힐 만한 토굴을 지어놓고
일대사 인연을 궁구,
종전에 몰랐던 일을
금일에야 확연히 깨달았다고 노래한 것이다.


그에게 가을은 우리들과는 달랐다.

ㅡ반은 붉고 반은 푸르네(半靑紅)ㅡ

가을 바람 한 떼가 뜰안을 쓸어가고
만리에 구름없이 푸른 하늘 드러났네

상쾌한 기운 무르녹아 사람들 기뻐하고
눈빛은 맑아져 기러기 연달아 지나가네

金風一陣掃庭中 萬里無雲露碧空
爽氣微濃人自快 眸光漸淡上連通

밝은 저 보배의 달 가늠하기 어렵고
굽이치는 산맥은 끝없이 뻗어갔네

모든 것은 본래부터 제자리에 있는데
처마 가득 가을빛, 반은 붉고 반 푸르네

明明寶月分雜盡 歷歷珍山數莫窮
法法本來安本位 滿軒秋色半靑紅


나옹선사 토굴가(懶翁禪師土窟歌)는
또 다른 선의 셰계로 이끈다.


●토굴가 풀이

청산림(靑山林) 깊은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나무가 우거진 깊은 산골에
한 칸의 토굴을 지어 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하고
석경(石耕)을 배회(徘徊)하니

소나무 문을 반쯤 열어 놓고
돌 밭길을 천천히 산책을 하니

녹양(綠楊)춘삼월하(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듯 불어

시절은 버들가지 푸른 춘삼월 봄날에
훈훈한 봄바람이 건듯 불어오고

정전(庭前)의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뜰 앞에는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꽃이 여기저기 만발하였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봄날의 싱그러운 자연의 빛깔들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서 최귀(最貴)한고

이런 것 중에서도 무슨 일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중요한 것인가?

사람이 살면서 자식 낳고
부귀영화 누리면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무엇인지?
본래 나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생사(生死)가 무엇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하면
생사 번뇌에 끄달 리지 않는지?
이 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일편무위(一片無爲) 진묘향(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두고

잠시의 인연화합에 의해 조작된 것이 아니며,
생멸하지 않고, 인과가 없고 번뇌가 없는
불생불멸하는 진짜 묘한 법(法)향을
옥 향로에 꽂아 두고

무위(無爲)
좀 어려운 개념인데,
원인이나 조건에 의한 인연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조작된 것이 아닌 것
즉, 생멸(生滅)을 초월한 절대적인 것
(무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한 것)
- 이 것이 진짜 진묘한 향(香)이 아니겠는가?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히 홀로 앉아

아주 고요한 밝은 창가에 묵묵히 홀로 앉아서

십년을 기한정(期限定)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究)하니

한 십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이 도리(生死없는 도리)를
기필코 깨치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정진하니

일대사
대장부의 일 중에서 중요한 것이 많지만
그 중에 생사를 깨닫고,
나 자신을 요달 하는 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공부 아닌가,
이 공부(도를 깨치는데)를 하는데 있어서
옛날 어른들은
세상사 잡념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의 근기(根器)도 강하여
빠르면 3일, 7일 늦어도 3년이면 깨친다고 했는데,
아무리 둔한 사람도
10년만 죽자고 붙잡고 메달이면 해결된다고 한다.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도다!

위와 같이 하면 일찍이 모르던 일을
어느 날 갑자기 깨우쳐
생사뿐 아니라, 세상 이치, 자연의 이치가
한 눈에 들어나,
죽고 사는데 메이지 않고
세상사 그대로가 극락이요 불국토이겠지.

일단고명(一段孤明) 심지월(心地月)은
만고(萬古)에 밝았는데

세상 사람 다 모르는 일을 나 혼자 훤하게 깨달아
마음의 달이 밝게 떠올랐는데,
알고 보니 그 것은 깨닫기 이전인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밝게 떠 있었지만
모르고 지냈을 뿐 이였네.

무명장야(無明長夜) 업파랑(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근본 무지에 쌓여 있다보니
어둡고 긴 밤 같은
전생의 업과 현생의 업 속에 끌려
번뇌와 불안 속에서
참 행복 이 무엇인지 모른 체
세속을 헤매고 다닌 것이지

영축산(靈蹴山) 제불회상(諸佛會上)
처처(處處)에 모였거던

깨닫고 보니
부처님 생존 당시
부처님이 영축 산에서 설법하실 때와 같이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가
다 무상 설법을 하고 있는데

영축산은 인도에 있는 산으로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던 곳으로 유명한데
당시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면
수많은 사람들과 뭇 짐승들과
천상의 사람 마저, 모여들었다고 하는데,
깨닫고 보니
세상사, 풀 한 포기, 돌 하나 물소리 하나가
그대로 부처님 법문이 아닌 것이 없더라
-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는 성철 스님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깨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사 그대로가 법이라는 것으로 이해해도
별로 틀린 말은 아닐 것이지만
더 큰 뜻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소림굴(少林窟) 조사가풍(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 소냐!

달마조사가 소림굴에서 면벽수도하면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불법을
어찌하여 멀리서 찾겠는가?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자신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불성을
깊이 참구하여 밝혀야 할 것인데.


부처님의 법맥을 이어 받은 사람을
조사(祖師)라 하는데
부처님의 28대 제사인 인도의 달마(Dharma)가
중국 당나라로 건너 와 보니
당시 당나라는 불교의
참 이치와는 거리가 먼
불교 경전의 글귀에만 매달리고
사찰을 짓고 탑만 쌓고 있었는데,
당 무제가
큰스님이 인도에서 왔다는 소문을 듣고
달마를 불러
절을 짓고 탑을 쌓은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이냐고 묻자,
달마는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말하고
불교의 참 이치.
(直指人心 見性成佛
-사람<자신>의 마음을 바로 직시하여
그 성품을 바로 알면 곧 부처이다)인
불교의 선(禪)을 펼치기엔
여건이 맞지 않음을 알고
굴속에 들어가 수년 동안 나오지 않고
수행에만 몰두하였는데,
그 달마의 가풍이라는 것이
불교의 골수로서
말이나 글로 표현 할 수 없는
이심전심의 도리인 것이다.
- 이것은 본인이 직접 깨닫기 전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도리이다

청산(靑山)은 묵묵(默默)하고
녹수(綠水)는 잔잔한데

청산은 아무 말이 없고
맑은 물만 잔잔히 흐르는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이
어떠한 소식(消息)인가

시원한 맑은 바람 슬슬 불어오니
이것이 어떠한 깨침의 도리인가?

깨달음의 경지에서 보면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 부처님 법, 아님이 없고,
희열이 아님이 없는 것인데
무지한 중생들은
좋다, 슬프다, 사랑 한다 미워한다, 귀하니 천하니
분별 심을 내는 것이겠지


일리제평(一理齊平) 나툰 중에
활계(活計)조차 풍족하다

하나의 밝은 이치가 확연히 들어 나니
살림살이(닦아 놓은 마음, 어디에도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않아 대자유인이 된 마음)가 풍족할 수밖에

천봉만학(千峰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이렇게 깨친 다음에야
먹고 마시는데 메이겠는가?

천 개의 봉우리와
만개의 골짜기가 어우러진
깊은 산골의 맑은 물과 솔잎을
나무 그릇 하나에 담아 양식으로 일용하지만
기름진 진수성찬 보다 더 맛이 있을 것

백공천창(百孔千瘡)
기운 누비 두 어깨에 걸쳤으니

먹는 것에 관심이 없는데
입는 것에 무슨 관심이 있겠나?

백 구멍이 나면 어떻고 천 구멍이 나면 어떠랴,
임금의 용포 보다 더 값진 것을.

의식(衣食)이 무심(無心)커든
세욕(世慾)이 있을 손가?

의식주에 관심이 없는데
세상사 욕락(慾樂)에 무슨 관심이 있겠는가?

탐·진·치 삼독(三毒)이 다 욕심 때문인데,
욕심이 없으면 근심이 없는 법,
그대로가 바로 극락이겠지

욕정(欲情)이 담박(淡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데없고

부질없는 세속적인 욕심이 없이 깨끗해지니
잘못된 집착들이 붙을 곳이 없고

인아사상:
이것도 좀 난해한 불교의 전문 용어인데,
불교의 핵심 경전 중의 하나인
금강경에 나오는 말로
부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깨달음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4가지의 잘못된 집착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즉, 아상(我相:
나라는 것이 생멸 변화를 벗어난 영원한 존재인
실체적인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집착하는 관념
-잘못된 것,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

인상(人相:
인간에게 각자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고 .
개인은 저마다 영혼의 주체라는 관념으로
나와 구별하여 그 대상을 남이라고 생각하는 관념),

중생상(衆生相: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보고, 피부로 촉감을 느끼는 그 육체가
중생<인간>이라고 오해하는 관념),

수자상(壽者相:
위와 같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는
5온이 임시로 화합한 상태로 잠시 존재하는 것을
마치 자아가 일정 기간 수명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수명의 길고 짧음 등에 대해 오해하여
수명에 집착하는 관념)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 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위와 같은 4상이 없으면
자연이 진짜 나의 참 모습(眞我)이
훤하게 들어 날 것인데
그 것이 진짜
나의 법성(法性: 참모습, 참 부처)일 것이다.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법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이쯤 되면
만물이 부처 아님이 없고
법문 아님이 없는 가운데
나(진짜 참 나)의 법성만이 뚜렷이 밝을 것이다.

교교(皎皎)한 야월하(夜月下)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뜻 올라

달빛이 교교한 달밤에
완전히 깨달은 열반의 언덕에 선뜻 올라서서

원각산정: 깨달음의 경지
- 완전히 깨달아 아무런 걸림이 없는 부처의 경지


무공저(無孔笛)를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이렇게 되고 나면
형상에 집착함이 없을 진데
구멍 없는 피리를 불지 못할 이유가 없고,
줄 없는 가야금을 타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무위자성(無爲自性) 진실락(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생멸을 하지 않는
진짜 자신의 참모습, 근본 마음,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불성
(이것을 아무 것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이 뜻도 모르면서 자신이 곧 부처다,
라고 하는 말)을 자성(自性)이라 하는데,

깨달아 자성이 확연히 들어 나면
그 것 보다 더 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석호(石虎)는 무영(舞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 제

얼마나 즐거우면 돌사자가 춤추며 노래하고
솔바람이 화답하겠는가?

깨달음의 희열은 깨달은 이만이 아는 법

무착령(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무착령은
위에 나오는 무위(無爲)와 비슷한 뜻으로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얽메이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
부처의 경지에서 아래를 내려 보면
모든 세상사 그대로가 부처 아닌 것이 없고,
그 자체가 그대로 부처일 것인데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滿開)더라

온 천지가 부처님 세계고 극락이라
그대로 다 깨달음의 나무에
우담바라가 만발하게 피었더라.

나무 영산회상 불보살
(南無 靈山會上 佛菩薩)



*나옹선사(1320-1376).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께 찾아가 출가했다.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
석옹화상(石翁和尙) 회상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24세 때(1344년)이다.
선사는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지도를 받고
자선사 처림(處林)의 법을 잇는다.
광활한 중국을 주유하고는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한다.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청이 하도 곡진하여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 지도에 나선 곳이
황해도 신광사이다.

이 무렵 중국의 홍건적은
쇠퇴해가던 고려를 향해 개경까지 침입해와
노략질을 일삼았고,
공민왕은 한때 노략질을 견디다 못해
남쪽으로 천도한 일이 있을 지경이었다.

나옹선사는
홍건적이 쳐들어와도
오직 설법과 참선 지도에만 전념하니
선사의 위엄에 눌린 도적떼는
저도 모르게
부처님께 향까지 사르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중들은 술렁였다.
홍건적은
내일 또다시 침입해올 것이니
어서 피하자는 것이었다.

나옹선사는
혼자라도 절을 지키겠다 다짐하고 있는데
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선사에게 절을 지켜달라 이른다.

과연 선사가 있는 신광사엔
홍건적이 나타나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홍건적의 난이 진압되자
왕은 선사에게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
勸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
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내렸고,
왕은 또다시 불교계의 중흥을 부탁한다.

이때 선사가 불교중흥의 터전으로 삼은 곳은
순천 송광사였고,
마지막 원력을 펼치는 장으로 회암사를 찾았다.

나옹선사의 지도력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으로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앉아서 참구하는 수행법을 멀리하고
편력의 도정에서 중생을 만나고 제도했다.

염불은 곧 참선이라 하였으니
『가사문학총람』에 수록되어 있는
선사가 지은 참선곡은
오늘까지 널리 수행의 지침으로 여겨진다.

선사의 행법은
곧 혼침되어가던 고려 말 불교를
새롭게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회암사는 지공·나옹에 의해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을 이루었을 만큼
위풍이 당당하고 면모가 수려한 대찰이 된다.

이곳에 머문 승려 수만도 3천 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이땅의 중세불교사에서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대중교화에 힘썼던 분이 나옹이었던지 모르겠다.

선사의 마지막 법회가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혹여 정권과의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4년에 걸친
회암사 중창불사를 회향하는 낙성법회.
귀천을 따질 수 없는 부녀자들이
회암사로 오는데 감당키 어려웠다.
마침내 나라의 관리가 나와
산문을 닫고 왕래를 금하기에 이른다.

임금은
나옹에게 떠날 것을 날벼락처럼 명령했다.
선사의 나이 57세.
그 나이에 벌써 병이 들었던가.
명령이 떨어진 그날을 못 넘기고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겨우 신륵사에 당도해
열반을 맞을 만큼 중병이 들었던가.

여기서 우리는
역사 이래, 이런 경우에 흔히 사용되었던
타살(他殺)설을 가정해보게 된다.
신륵사 법상(法床) 위에 앉은 나옹선사가 일렀다.

"너희들을 위하여 열반불사를 마치겠노라."

봉미산 봉우리엔 오색구름이 덮였고,
선사를 태우고 가던 말은
먹기를 그치고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우왕 2년(1376년) 5월 15일,
스님이 된 지 37년 만이었다.

나옹화상의 법맥은 무학대사가 이었고,
목은 이색은
위와 같은 일들을 비문에 적었다.

나옹선사 비와 부도는
회암사터와 신륵사에 있다.

<청산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以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如水如風終我 여수여풍종아)





무문(無聞)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누가 그 가운데서 원만히 깨칠 것인가.

텅 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굴리면,
개 짖음과 나귀 울음이 모두 도(道)를 깨침이네.

원문 無聞(무문)

眼耳元來自沒 (안이원래자몰종)
箇中誰得悟圓通(개중수득오원통)
空非相處飜身轉(공비상처번신전)
犬吠驢鳴盡豁通(견폐노명진활통)

종류:게송

작가명:나옹 혜근(懶翁惠勤)
제작 연대:한국-고려

 

 

 

 

 

 

 

 

 

 

 

 

나옹혜근 스님

나옹혜근 스님해진 옷 한벌 지팡이 하나로‘無念의 곳’에 이르렀네++++++++++++++++++++++++++++보제존자나옹 혜근(懶翁慧勤, 1320~1376) 스님은 살아서는 ‘생불’로 추앙받고 입적해서는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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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나옹혜근 스님(나옹선사 토굴가)

나옹선사 토굴가+++++++++++++++++++++++++++++천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의식(衣食)에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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