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무념] 자기 확인을 통한 자기 운명에 대한 도전 / 한자경 교수

수선님 2021. 11. 14. 13:54

마음의 本性과 見性의 문제

 

― 불교의 공적영지空寂靈知와 견성見性, 독일관념론의 사행事行과 지적가치知的直觀의 비교

/ 한자경  이화여자대학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이 세계는 내가 바라보든 보지 않든,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계를 인간 의식 또는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실재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세계가 인간의 인식기관 및 인식능력에 의거하여 이렇게 보여지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렁이나 박쥐가 보고 아는 세계, 천인이나 신이 보는 세계는 우리가 보고 아는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계를 인간 마음이 그려내는 세계, 인간 마음에 의존적인 세계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 마음은 이중적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는 객관으로서의 세계에 대면하여 그로부터 수동적으로 인상을 받아들이는 주관적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과 객관, 나와 세계 둘 다를 자발적 능동적으로 산출해내는 주객포괄의 마음이다.

전자를 마음a, 후자를 마음A라고 하자.

 

 

 

 

주객 분별의 현상세계는 마음A의 활동성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마음A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假象)이다. 이점에서 마음A와 현상세계는 세계를 비치는 거울과 그 거울에 비쳐진 상, 세계를 보는 눈과 그 눈에 의해 보여진 세계에 비유될 수 있다. 거울이 없이는, 눈이 없이는 세계도 없다. 우리 마음의 본성(本性)은 바로 마음A의 활동성인 것이다.

 

불교나 서양 형이상학(독일관념론)은 인간의 본성을 마음a가 아닌 마음A로 밝히고자 한다. 현상세계 안에서 우리가 집착하는 주객, 능소, 자타의 대립이 극복되고 지양되어야 할 망분별이며, 궁극적으로 주객미분의 무분별지(無分別智) 또는 주객포괄의 절대적 동일성에 도달해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마음을 주객대립 속에서 대상에 따라 응하는 수연(隨緣)의 마음a가 아니라 주객대립의 현상 너머 절대와 무한의 불변(不變)의 마음A로 간주하는 것이다.1]

 

이런 마음A의 활동성을 불교는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고, 독일관념론은 ‘사행(事行)’이라고 한다. 그것은 주객으로 이원화된 현상세계를 산출해내되 그 자체는 현상적인 주객대립과 능소분별을 넘어선 능동적 활동성이며 자아의 자기정립이다.2] 그것은 일체 중생 안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는 마음의 근원적 활동성, 본성(本性)이며 본각(本覺)이다.

 

1]이하 불교를 논할 때 불변의 마음, 진여, 일심 등이 주장된다는 점에서 대승사상에 국한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성과 여래장, 진여심과 일심을 강조하는 대승사상은 원시근본불교사상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전개이고 완성이다. 불교가 처음부터 오온 윤회를 벗어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인 한, 윤회의 현상세계와는 다른 차원인 적정 열반의 경지가 인정되어야 하며, 그 적정은 단지 추상적 허공, 단순한 무가 아니라 그 상태를 자각하는 유정의 마음의 경지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여나 일심이 무아나 공의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도달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대승사상은 석가 무아설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완성인 것이다. 만일 이점을 부정한다면 대승불교에 속하는 한국전통불교를 非佛說로 간주해야 하는 억지가 발생하게 된다. 우리나라 불교는 처음부터 마음a와 마음A를 구분하면서, 마음a를 넘어 그 마음 바탕으로서의 마음A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선에서는 一物이라고 부르는 이 마음A를 원효는 一心이라고 하고, 지눌은 眞心이라고 하였으며, 기화는 종밀의 개념을 따라 마음a와 마음A 각각을 肉團心과 堅實心이라고 하였다. 작자 미상의 ?유석질의론?에서는 이 둘이 肉團生滅心과 眞如淸淨心으로 불린다.

 

2]물론 불교의 ‘공적영지’라는 개념과 독일관념론의 ‘사행’이라는 개념은 그 함축적 의미가 서로 다르다.

공적영지는 그 자신의 활동성에 의해 생성된 세계로부터의 차별성에 주목한 것이라면, 사행은 그런 세계에로의 연관성에 더욱 주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근원적 활동성(마음A/心)과 그것의 결과(현상세계/跡)와의 관계에서 공적영지는 그 둘간의 不雜에, 사행은 그 둘간의 不離에 치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나 독일관념론 둘 다 일체의 차별적 현상세계를 그러한 절대적 무차별성의 마음활동 위에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둘 다 차별적 현상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 근거를 외적 神이나 객관적 물질에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마음이나 정신의 활동성에서 구한다는 점에서, 즉 절대적 마음 내지 정신을 현상세계인 假의 구성주체로 삼는다는 점에서 唯心論이며 觀念論이다.

 

 

그러나 본성이 이미 영지이고 각이라면, 본성은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달리 견성이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본성이 이미 본각이라면, 다시 깨닫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는 우리에게 영지와 본각이 있어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거울은 우선 상을 비칠 뿐이며, 눈은 세계를 볼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비쳐진 것, 보여진 것만을 보고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만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마치 꿈을 꾸는 의식이 있어야 꿈꾸는 세계가 있지만 꿈속에서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르듯이, 우리는 마음A로서 현상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마음A와 세계를 의식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그 세계가 자신의 마음A가 만든 가(假)의 현상임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이다.

 

세계를 보는 눈(마음A)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주객분별의 현상세계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유로 착각한다. 꿈속의 나(견분)와 꿈속의 세계(상분)를 실아와 실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집과 법집이며, 현상세계를 마음 독립적 객관 실재로 정립하는 독단(dogma)이다.3]

 

3]우리가 마음A로 세계를 보되 그렇게 세계를 보는 마음 자체(마음A)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의해 보여진 현상세계만을 보기에, 그렇게 보여진 현상세계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는 마음을 사상함으로써 물리적 현상세계를 그 자체 존재로 간주하는 외부세계 실재론이 성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피히테 용어로는 독단론이며, 현대 용어로는 자연주의 내지 물리주의이다. 이런 독단을 후설은 세계 존재의 일반정립(Generalthesis)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마음A 바깥에 대상세계가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보는 法執이다.

 

이러한 일반정립 또는 법집에 따라 물리적 현상세계가 실유로 간주되고 나면, 그 세계를 보는 마음A의 작용까지도 보여진 현상세계 속의 나인 현상적 자아(假我/色身)의 마음a의 작용(수상행식)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주객포괄적 마음A가 아니라 세계의 일부분으로서의 주관적, 심리적 개체인 오온으로 간주하여 그 오온에 집착하는 我執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무명이란 마음A에 대한 완전 무지가 아니라, 마음A의 작용을 마음A의 작용으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개체 오온의 작용인 마음a로 잘못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과 영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색신과 망념으로 혼동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눌은 “다만 공적을 자신의 본체로 삼아 색신을 인정하지 말고, 영지를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망념을 인정하지 말 것이다(但以空寂爲自體 勿認色身 以靈知爲自心 勿認妄念)”라고 말한다. (지눌, ?眞心直說?, ?한국불교전서?, 제4권, 723중상).

 

다시 말해 자신의 본체는 空寂의 法身이지 色身이 아니라는 것, 자신의 마음은 영지이지 망념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불교와 독일관념론은 인간 본성을 능동적 활동성의 마음A로 보지만,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 망집과 독단에 빠져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본성을 가리는 무명을 벗어 망집과 독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무명에서 명으로의 전환, 본성의 확인, 견성(見性), 자기 직관, 지적(知的) 직관(直觀)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현상세계를 형성하는 마음A의 능동적 활동성으로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견성 내지 지적 직관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를 보는 눈이 과연 눈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꿈을 꾸는 의식이 꿈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인가?

 

 

 

 

이하에서는 불교와 독일관념론에 따라 인간 본성은 현상초월적 마음A라는 것(제2장),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 마음A의 활동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직관하여 알지는 못한다는 것(제3장)을 살펴본다. 이 점에서 두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本性)을 확인하는 견성(見性)의 방식에 있어 독일관념론과 불교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절대(絶對)와 무한(無限)의 마음A를 확인하는 방식에 있어 외적인 실천적 행위와 내적인 종교적 수행, 자아 경계의 무한한 확대와 자아경계의 단적인 소멸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제4장). 이는 곧 절대자아로 나아가기 위한 경계의 수평적 확장과 자아경계를 넘어서는 수직적 초월의 차이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러한 차이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며 글을 맺기로 한다(제5장).

 

 

Ⅱ. 마음의 본성: 성(性)

 

1) 불교: 공적영지

 

인식 주관인 자아가 인식 객관인 세계에 대해 갖는 앎은 주객 구도 속에서 성립하는 분별적 앎이다. 그것은 명자(종자/개념)와 언설(말)에 따라 시설된 차별상이며, 심연상(상분/표상)이고 경계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망유(妄有)이고 가유(假有)이며, 실유(實有)가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이처럼 우리의 헛된 경계지음에 따른 망분별임을 자각하는 것은 그런 망념을 떠난 진실에의 추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소의 분별, 개념에 따른 차별상을 여의고 나서 남겨지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망념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본래부터 언설상을 여의고 명자상을 여의고 심연상을 여의어서, 궁극적으로 평등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될 수도 없는 것이다."4]

 

4]원효,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권(?한국불교전서?, 제1권, 743중); 은정희 역,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일지사, 2000), p.103),

“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心念 則無一切境界之相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子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破壞”

 

 

망념에 의한 일체의 차별상을 여의고 남겨지는 무망념, 무차별의 진실, 평등하여 변하거나 멸하지 않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 있어 능소의 대립이 없어지고 능연식과 소연상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체가 멸한 고요함, 적멸(寂滅)이며 공(空)이다. 이를 공적(空寂)이라고 한다.

 

마치 거울에서 거울의 상이 사라지면 그 상의 비침도 함께 사라지고 결국 텅빈 무상(無相)의 거울만 남게 되듯이, 일상의식에서 의식대상인 객관세계 사물을 제거하면 그것의 의식인 주관적 의식작용도 함께 제거되면서 텅빈 허공만 남는다. 그 빈 허공, 빈 거울이 공적이다. 그런데 불교에 있어 공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적정열반이 아무 것도 없이 일체가 소멸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공의 깨달음, 공관(空觀)이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깨닫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끊어지고 상이 사라진 그곳, 주객의 대립이 사라진 그곳에 비로소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거울에서 거기 비친 상들이 사라지고 상의 비침이 사라진다고 해도 거울 자체는 거기 남아 스스로를 비치고 있다. 비쳐진 상(소연/상분)과 상의 비침(능연/견분)의 근저에 거울의 자기비침(자증분)이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에서 일체의 대상이 사라지고 대상의식도 사라진다고 해도, 마음 자체는 거울의 자기 비침처럼 각성(覺性), 각조(覺照)로서 스스로에게 자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능연식과 소연경이 사라져 허공처럼 드러나는 공적을 단지 무정(無情)의 추상적 공간으로가 아니라 그 자신의 공성(空性)을 스스로 신묘하게 자각하는 성자신해(性自神解)의 자기자각성으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모든 차별상이 사라진 공으로서의 마음을 원효는 차별적 다양성을 떠났기에 ‘일(一)’이라고 하고, 성자신해를 지녔기에 ‘심(心)’이라고 하여 ‘일심(一心)’이라고 칭한다.

 

 

"염정(染淨)의 모든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아니고 진망(眞妄)의 이문(二門)에 다름이 있을 수 없기에[일체의 차별상을 떠났기에] 일(一)이라 이름하며,

이 둘이 없는 것이 모든 법 중의 실로서 허공과 달리 본성이 스스로 신묘하게 알기에(성자신해) 심(心)이라고 이름한다."5]

 

5]원효, 같은 책, 제1권(?한국불교전서?, 제1권, 741 상); 은정희 역, 같은 책, p.88

“染淨諸法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일

此無二處 諸法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여기에서의 분별인 염정과 진망은 주객 또는 능소의 분별과 마찬가지로 현상적 차별상일 뿐이다. 거울에 비친 상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거울 자체로서의 인간 마음은 본성상 이런 차별상을 여읜 것으로 이해된다. 차별상을 떠났기에 一이며, 거울 자체의 비침처럼 자기자각성을 가지기에 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 있어 공은 추상적 허공,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비어있되 그 자체가 신령한 앎을 지녀 어둡지 않은 허령불매(虛靈不昧)이며, 이 허령불매의 성자신해가 바로 일체 중생의 진면목이고 마음의 본성이다. 마음은 현상적 차별상이 사라질 때 더불어 사라지는 그런 현상적 존재가 아니다. 거울에서 온갖 색상과 모양의 상(소연상)들이 다 멸하고 따라서 그 상들의 비침(능연식)도 함께 사라져도 그 상의 바탕에 거울 자체의 무색 무형의 비침이 남겨지듯이, 우리의 대상의식의 근저에는 그런 대상적 현상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되 그 자체는 현상들로 환원될 수는 없는 마음의 자기 활동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눌도 원효가 강조한 일심의 성자신해, 마음 자체의 자기활동성에 주목한다. 그는 대상적 의식작용의 근저에서 일체의 망념과 차별상을 떠나 그 자체 고요히 비어 있되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신령한 앎이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마음의 체는 고요한 비어있음인 공적이며, 그 본래적 용은 신령한 앎인 영지이다.6] 이와 같이 일체의 개념과 말, 망념을 떠나 존재하는 마음의 본래적 자기활동성을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부른다.

 

6]마음은 그대로 거울로 비유된다. 거울의 자기비침은 거울의 상과 그 상의 비침이 사라져도 남겨질 거울 자체의 비침이다. 거울의 자기비침은 거울 자체의 本用으로서 마음의 본성 내지 본래적 작용(자기의식)이고, 거울의 상의 비침은 대상에 따라 작용하는 隨緣의 應用으로서 마음의 우연적 속성 내지 작용(대상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상에 감하고 응하여 일어나는 수연응용 이외에 바로 거울 본연의 용인 자성본용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성본용으로서 마음의 아는 작용(知, 明, 覺, 照)은 혜능의 제자 하택 신회에서 종밀로 이어졌지만, 이는 혜능의 또 다른 제자인 남악 회악으로부터 마조 도일을 거쳐 임제 의현으로 이어진 임제종 계통에서 보면 반계이다. 지눌은 종밀의 ?법집별행록?이 다음 구절을 강조한다.

 

“진심의 본체에는 두 종류의 용이 있다. 하나는 자성본용이고 다른 하나는 수연응용이다.

마치 구리 거울에 있어 거울의 질은 자성체이고, 거울의 밝음은 자성용이며, 밝음에 의해 보여지는 영상은 수연용인 것과 같다.

영상은 대상에 임해 비로소 나타나며 천차만별이 있지만, 밝음은 항상 밝은 것으로, 오직 한 맛이다.

이를 마음에 비유하면 마음의 항상된 寂은 자성체이고, 마음의 항상된 知는 자성용이며, 그 지가 능히 말하고 분별할 줄 아는 것은 수연용이다.

(眞心本體 有二種用 一者自性本用 二者隨緣應用

猶如銅鏡 銅之質是自性體 銅之明是自性用 明所現影是隨緣用

影卽對象方現 現有千差 明卽常明 明唯一味

以喩心常寂 是自性體 心常知 是自性用 此知能語言 能分別等 是隨緣用)”(지눌,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 ?한국불교전서?, 제4권, 745하).

마음의 체: 공적/거울 자체

마음의 용: 자성본용: 영지/거울 자체의 비침공적영지, 지적직관: 주객미분

수연응용: 상의 비침(주)과 비쳐진 상(객) 일상적 의식: 주객분리

 

 

"모든 것이 사라져 일체의 근과 경, 일체의 망념 나아가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명언이 모두 구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본래 공적과 본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 신령스런 앎이 어둡지 않아 무정과는 달리 성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러이 아는(空寂靈知공적영지) 청정한 마음의 본체다."7]

7]지눌, ?목우자수심결?(?한국불교전서?, 제4권, 710하, 이하 ?수심결?로 약함),

“旣總無如是 一切根境 一切妄念 乃至種種相貌 種種名言 俱不可得 此豈非本來空寂本來無物也.

然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不同無情 性自神解 此是汝空寂靈知淸淨心體”

 

 

이 공적영지의 마음A가 바로 인간 마음의 본성(本性)이고 인간의 본래면목이며 부처와 조사(祖師)가 비밀히 전한 법인(法印)이라고 말한다.8] 공적영지는 경험적 차원의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존재, 정신과 물질,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분법을 넘어선 절대 평등의 무분별지이다. 능소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이고, 이분적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이며, 상대적 차별성을 벗어난 평등인 것이다.

 

8]지눌, ?수심결?(?한국불교전서?, 제4권, 711상),

“제법이 공한 곳에 영지가 있어 어둡지 않으니, 이 공적영지의 마음이 바로 그대의 본래 면목이며 삼세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과 천하 선지식의 비밀히 전한 법인이다

(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亦是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 密密相轉底法印也)”

 

 

 

 

일상적으로 우리가 이원화하는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의 분별은 공적영지의 마음 안에 그려진 상들의 차별상, 거울 안에 비쳐진 상들의 차별상일 뿐이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차별적 상에 접해서만 깨어있으며 그 상이 사라질 때 덩달아 잠들어 버리므로 오로지 현상적 상들만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대상의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의식의 순간에도 의식 자체는 나와 너, 주와 객의 차별상 일체를 포괄하는 거울 자체처럼 공적영지로서 작용하고 있다. 차별적 색상들을 지우고 나면 비로소 드러나는 무색의 바탕도 실은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듯이, 차별적 상들을 여의고 발견되는 거울 자체의 비침도 처음부터 상을 비치던 바로 그 비침이었듯이, 공적영지의 마음은 주객분별의 대상의식에서도 언제나 함께 있는 마음이다. 다만 마음은 자기 자신을 비어있는 것으로 의식할 뿐이며, 따라서 우리가 주목하여 확인하지 못할 뿐이다.

 

공적영지로서의 마음 활동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고자 하면, 의식에서 의식대상을 없애 능소의 분별을 넘어서면서도 잠들지 않고 의식의 깨어있음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 능연상과 소연상이 멸한 후 남겨지는 마음의 허령지가 의식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공적영지를 주장하면서 각자가 수행을 통해 자신 안의 그 공적영지를 확인하는 견성에 이를 것을 요구한다.

 

 

2) 독일관념론: 사행(事行)

 

서양철학 내에서 능소, 주객 분리를 넘어선 절대(絶對)를 인간 마음의 심층 활동성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초월적 관념론’에서 발견된다.9] 칸트에 있어서 ‘초월적 통각’ 또는 ‘순수 통각’이라고도 불리는 ‘초월적 자아’는 주객대립의 경험적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현상초월적 주체이다.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해 구성된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선에 있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9]근세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인간 존재가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으로, 인간의 의식활동은 주관 영역의 심리적 작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객포괄의 절대는 상대적 주객 너머의 제3자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스콜라철학에서의 기독교적 神이 그런 존재이다. 그러다가 근세 이후 무분별적 절대를 외적인 신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초월적 관념론’이 시도된다. 일체의 의심가능근거가 배제된 절대적 인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데카르트가 발견한 의식주체의 사유활동성이 그 발단이다.

 

그후 라이프니츠가 표층적 의식보다 더 심층에서 작용하는 인간 마음의 활동성을 주장하며 그것을 의식되지 않는 지각, ‘미세지각’이라고 칭하였다. 미세지각 차원에서는 지각하는 마음과 지각된 세계가 이원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이 미세지각론에 근거해서 그는 현상세계를 오직 지각된 것으로서만 인정하며, 그렇게 세계를 지각하는 마음의 활동성을 소우주로서의 마음A, 모나드의 본질적 활동성으로 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음의 능동적 활동성을 현상구성의 절대적 활동성으로 체계화한 것이 칸트철학이고, 그 체계를 완성한 것이 독일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세계를 구성하고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이 초월적 자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주관)라고 간주하는 경험적 자아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는 객관세계에 대면해 있는 현상의 일부분으로서의 자아, 주객 대립 속의 자아(마음a)이며, 전자는 그러한 주와 객, 세계와 경험자아를 포괄하는 현상초월의 자아(마음A)인 것이다. 바로 이 주객동일성으로서의 초월적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피히테는 주객으로 분리된 일상적 의식차원에서 출발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주체인 나와 나의 앎의 대상인 사물과의 끈은 무엇인가?"10]

10]피히테/한자경 역, ?인간의 사명?(서광사, 1996), p.88

 

그리고 그는 주객과 능소를 매개하는 끈을 주체-객체성 또는 주객동일성으로서 ‘자아’로 간주한다. 주객동일성으로서의 자아는 주객대립으로 주어지는 현상적인 경험적 자아와 구분되는 초월적 자아이다.11]

 

11]초월적 자아를 주객동일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소위 객관세계가 그 자체 존재하는 실유가 아니라 정신의 작용에 의해 구성된 현상임을 밝힘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사명?에서 피히테는 치밀한 논증을 통해 관념론체계를 확립하고 있으며, ?전체 지식론의 기초?에서는 그러한 초월적 자아, 절대자아에서 출발하여 지식론체계를 완성한다. 쉘링 역시 주관과 객관, 인식과 존재를 통합하는 궁극적인 ‘무제약적 절대’는 주객 대립 안에 주어지는 상대적이고 제약된 현상 안에서 구해질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감각대상으로서의 사물도 아니고, 신앙대상으로서의 신도 아닌 “절대적인 무제약적 자아”라는 것이다.

 

“신은 그 자체로서 그의 인식의 실제 근거일 수는 있지만, 우리에 대해서 그런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에 대해 그 자체 객체이기 때문이다.”(쉘링/한자경 역,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1999, p.31)

그는 “주체와 객체의 개념은 그 자체 이미 절대적인 무제약적 자아의 담보이다”(같은 책, p.38)라고 말한다. 이 무제약자에서 존재원리와 사유원리가 일치한다는 것은 비로 이 무제약자 안에서 주객이원성, 인식과 존재의 분리가 극복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본질이 곧 이 끈이다. 나는 주체이며 객체이다. 그리고 이 주체-객체성, 앎의 자기 자신에로의 귀환이 곧 내[피히테]가 자아라는 개념으로서 지시하는 것이다."12]

12] 피히테, ?인간의 사명?, p.89

 

"자아는 주체와 객체의 필연적 동일성, 즉 주체-객체이다. 자아는 어떤 매개도 없이 단적으로 그것이다."13]

13]피히테/한자경 역, ?전체 지식론의 기초?(이하 ?지식론?으로 약함), 1996, p.24

 

 

주관과 객관, 인식과 존재, 사유원리와 존재원리가 동일한 이 자아의 활동성을 피히테는 ?지식론?에서 행위(Handlung)와 사실(Tatsache)를 결합하는 근원적 활동성으로서의 사행(事行/Tathandlung)이라고 부른다. 사행은 “단적으로 그 자신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정립하는” 14]자아의 활동성이다. 자아에 있어서는 자기정립의 행위와 그것의 존재가 구분되지 않는다.

14] ?지식론?, p.24 이하에서 언급하는 절대자아의 자기정립과 자아에 의한 비아의 반정립, 그리고 자아와 비아와의 종합에 관한 논의는 피히테, ?지식론?, 제1부, 제1, 2, 3장 참조.

 

 

"자아의 자기 정립은 순수 활동성이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 그리고 자신에 의한 단순한 정립에 의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자아는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단순한 존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렇게 자아는 행위하는 자이며 동시에 행위의 산물이다. 자아는 활동적인 것이며 동시에 활동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행위와 사실이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행의 표현이다."15]

15]?지식론?, p.21

 

 

자아의 이 자기정립에 근거해서 비로소 그 안에 나 아닌 세계가 비아(非我)로서 반정립될 수 있고, 그 결과 세계 아닌 나(가분적 자아/경험적 자아/주관)와 나 아닌 세계(가분적 비아/경험세계/객관) 간의 대립과 종합의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자아의 자기정립인 마음A의 활동성은 주객이원화된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대상의식으로서의 마음a의 작용에 앞서 작용하는 근원적 활동성이다. 자아의 이 활동성이 일체 현상이 가지게 되는 실재성의 근원이 된다. 16]

 

16] ?지식론?, p.66 “모든 실재성의 근원은 자아이다. 자아에 의해 그리고 자아와 더불어 비로소 실재성의 개념이 주어진다. … 모든 실재성은 활동적이다. 그리고 모든 활동적인 것은 실재성이다.”

 

 

 

 

사행으로서의 자아의 자기정립은 주와 객, 인식과 존재의 현상적 이원화에 앞서 동일 근원으로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순수 자기활동성이다. 앞서의 거울비유로 말하자면 주객 대립의 현상적 세계(가분적 비아)와 그에 마주한 경험적 자아(가분적 자아)는 거울 속의 상(소연경/상분)과 그 상의 비침(능연식/견분)에 비교될 수 있다. 반면 그런 현상존재를 정립하는 절대적 자아의 자기활동성인 사행은 그러한 거울의 능연과 소연을 여의어도 남겨질 거울 자체의 고요한 비침(寂照)의 활동성에 비유될 수 있다. 자아의 자기정립의 활동성은 현상적인 능소분별, 현상적 자아와 현상적 비아의 분별이 있는 곳에는 이미 현상의 가능근거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소분별의 현상적 차별상 넘어 작용하고 있는 절대 자아의 사행이 인간 마음의 본성 또는 정신의 근원적 활동성으로 간주된다.

 

이상 불교의 공적영지나 독일관념론의 사행이 주객분별 이전에 현상세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본성, 초월적 자아의 근원적 활동성이라는 것을 논하였다. 그것은 중생 누구에게나 이미 갖추어진 마음의 빛이며 근원적 자기자각성이고, 따라서 ‘불성(佛性)’이며 ‘본각(本覺)’이다. 본각의 차원에서 보면 이미 누구나 불성을 갖춘 부처이다.

 

그러나 중생 모두가 이미 깨달은 부처라는 말은 거짓이다. 불성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성 내지 본각을 깨달아 아는가 모르는가 인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요 본성에 미혹하면 중생이니, 중생은 본각은 있되 그 깨달음의 시각(始覺)이 없기에 부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본성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공적영지나 사행을 상을 비추는 거울 자체의 고요한 비침, 적조(寂照)에 비유할 때 또는 현상세계를 보는 눈의 활동성에 비유할 때, 이제 문제는 세계를 보는 눈이 과연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가, 눈이 눈 자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Ⅲ. 본성에의 무지: 무명(無明)

 

1) 마음활동성의 자기의식

 

인간의 본성은 공적영지 내지 자기정립의 절대적 활동성으로서의 마음이다. 본성이 마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물과 달리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알려지는 자각성 내지 의식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적영지는 “중생의 본래적인 자각성”17]으로서 이미 자각되어 있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공적영지는 중생 누구나 이미 갖추고 있는 본각(本覺)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공적영지이냐는 물음에 대해 지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금 내게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그것[너의 마음]이 공적영지의 마음이다. 왜 반조(返照)하지 않고 밖에서 찾으려 하는가."18]

18]지눌, ?수심결?(?한국불교전서?, 제4권, 711중),

“汝今問我者 是汝空寂靈知之心 何不返照 猶爲外覓”

 

 

공적영지의 마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공적영지의 마음이다. 이미 갖고 있으면서 왜 밖에서 찾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무엇인지를 묻는냐는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본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면, 다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본각이 이미 각이라면, 다시 시각(始覺)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19]

 

19]원효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 “본각이 있기에 본래 범부가 없다고 말하지만, 시각이 아직 있지 않기에 본래 범부가 있는 것이다(然雖曰有本覺故本來無凡 而未有始覺故本來有凡)”라고 말한다. 원효,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2권(?한국불교전서?, 제1권, 749상); 은정희 역, ?대승기신론소․별기?, p.144

 

 

독일관념론 역시 인간은 누구나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과 더불어 자신의 능동적 활동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나는 생각한다’의 자기의식으로 표현하였으며,20] 칸트는 그것을 다른 모든 표상을 수반하는 것으로서의 ‘나는 생각한다’의 표상으로서 “자기 활동성의 단순한 지적 표상”이라고 말한다.21]

 

20]데카르트의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서는 데카르트, ?성찰?, 제1, 2권 참조.

피히테는 이 명제의 직관적 성격 내지 자아의식성을 강조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그것을 충분히 의식의 직접적 사실로서 고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피히테, ?지식론?, p.26

21]칸트, ?순수이성비판?, p.278

 

자아의 자기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성을 독일관념론자들은 ‘지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천적으로 행위할 때 자기 자신을 수동적 규정성이 아닌 능동적 활동성으로 의식한다. 이 능동성의 의식을 수동적인 감성적 직관과 구분하여 지적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음의 능동적 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인 지적 직관이 있기에 자기 반성적인 철학적 사유 역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22]

 

22]피히테는 일상적 행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철학체계인 지식론 역시 자아의 절대적 활동성에 대한 직관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지식론은 … 지적 직관, 즉 자아의 절대적 자기활동성의 직관에서 출발한다. … 지식론이 말하는 지적 직관이란 존재에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로 향하는 것이다.” 피히테, ?지식론에의 제2서론?, 제6장 참조.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피히테는 칸트가 자아의 능동성과 자발성의 자기의식을 말하고 그에 기반하여 정언명령의 도덕체계를 세운 한, 칸트 역시 지적 직관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피히테 및 독일관념론자들이 칸트가 구분한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의 차이를 간과하고, 자기인식에 해당하는 지적 직관을 자기의식으로 오해한데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나는 행위들에 있어서 나의 자기의식의 지적 직관이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며 손이나 발도 움직일 수가 없다. 오직 이 직관을 통해 나는 내가 그것을 한다는 것을 안다. 오직 그것을 통해 나는 나의 행위와 그 행위에 있어서의 나를 그 행위의 객관으로부터 구분한다. 자신에게 어떤 활동성을 부여하는 자는 곧 이 직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삶의 기원이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죽음이다."23]

23]피히테, ?지식론에의 제2서론?, 제5장.

 

"우리에게 지적 직관이 없었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객관적 표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며 어떠한 초월적 사유, 초월적 구상력도 없었을 것이고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철학도 없었을 것이다."24]

24]쉘링, ?지식론적 관념론의 설명을 위한 소고?, 제1권.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이미 다 통찰하여 알고 있는 것인가? 견성은 이미 성취된 것인가? 만일 이처럼 자아가 사행으로서의 자기자신의 정립의 활동성을 이미 알고 있다면, 독단은 왜 발생하는 것인가?

 

 

2)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지적 직관)의 구분

 

그러나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지적 직관은 자아의 자기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일 뿐 자기 인식이 아니다. 자기활동성에 대한 직접적 통찰로서의 직관이 아닌 것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을 구분한다.

 

 

"자기 자신의 의식은 자기 자신의 인식과는 다르다."25]

 

25]칸트, ?순수이성비판?, p.158

자기의식을 인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런 직관적 내용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의식은] 주관을 순수 의식 안에서 그것의 본래 모습 그대로, 즉 수용성으로서가 아니라 순수 자발성으로서 드러내주지만, 그 본성에 대해 그 이상의 어떠한 인식도 제공하지 못한다.”(p.271)

 

 

자기의식은 자기활동성에 대한 의식일 뿐, 그런 활동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직접 바라보는 직관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지적 직관이라고 할 수 없다. 사행이라는 자기정립의 활동성을 세계를 보는 눈의 활동성, 눈의 봄이라고 본다면, 눈이 활동하는 한 눈의 자기의식은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활동성으로서의 눈이 눈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가, 눈이 자기 자신을 직관하고 확인하여 아는 자기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정신의 활동성을 직관적으로 확인하여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인간은 자신을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의식하며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런 능동적 활동성 자체를 직관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직관할 경우에도 내적 직관형식으로서의 시간형식에 따라 직관할 뿐이며 따라서 그렇게 직관된 자아는 결국 시간형식 하에 주어진 현상적 자아, 대상화된 과거의 주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그 자신의 활동적 마음A를 그 자체로 직관하여 인식할 수 있다면, 인간은 감성적이 아닌 지적 직관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런 직관은 없다.

칸트는 그것은 신적 존재에게나 가능한 직관이라고 본다. 인간이 지적 직관의 결여로 자기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 자신에게 신비로 남을 뿐이다.26]

 

26]이러한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의 구분은 인도 논리학에 있어 現量 중에서 감각과 지각을 제외한 자각(자기의식)과 定觀(자기인식=지적 직관)의 구분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자각에 입각한 감각과 지각이 일상적인 대상의식이라면, 자각은 그렇게 대상을 인식하는 자기 자신의 의식인 자기의식이며, 정관은 바로 그런 자기를 다시 직관하여 아는 지적 직관에 해당할 것이다. 정관은 비량 아닌 현량이기에 사유 아닌 직관이지만, 대상인식인 감각이나 지각처럼 감성적 직관이 아닌 지적 직관이다. 그런데 자각은 대상세계를 의식하는 누구나 이미 가지고 있는 자기의식이지만, 정관은 특별한 수행의 선정을 거쳐 비로소 도달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수행을 고려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정관 내지 지적 직관이란 불가능하다는 칸트식 주장이 오히려 더 정확할 것이다. 불교가 정관, 지적 직관 내지 견성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수행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반면 독일관념론자들은 칸트가 구분한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의 차이를 간과 내지 무시하고 자기인식의 ‘지적 직관’을 자기의식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지적 직관은 칸트적 의미로는 자기의식에 해당하며, 칸트적 의미의 지적 직관은 그들에게도 부정되고 있다.

 

 

"내가 그것[자아의 자기활동성/사행]을 근원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나는 나의 행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한다. 단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의식하는 것이 아닐 뿐이다."27]

 

27]피히테, ?인간의 사명?, p.83 이에 이어 “왜냐하면 나는 감각과 동시에 대상의 표상을 직접 의식하기 때문이다”라고 부연설명한다. 즉 자아의 자기정립의 작용이 과 비아반정립의 작용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것은 그 작용결과로서의 세계가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의식(주관/견분)은 그 의식과 독립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대상(객관/상분)을 단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라고 느낀다.

 

반면 독일관념론은 그와 같은 주객이원론,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의 이원화를 비판하며, 대상세계란 근원적으로 마음의 작용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대상세계는 마음이 그린 상일 뿐이며, 그 상을 보는 주관은 주객도식에 따라 대상세계에 대해 스스로 수동적이라고 느끼지만, 실제 대상의식은 수동적 의식이 아니라 대상의 표상을 산출해내는 능동적 활동성의 의식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피히테는 “대상의 의식은 곧 나에 의한 대상의 표상의 산출의 의식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피히테, ?인간의 사명?, p.84) 이와 마찬가지로 아뢰야식에 대해서도 그 식전변결과로서의 기세간과 신체가 의식되는 만큼 현행식으로서의 아뢰야식 자체가 이미 의식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정신의 활동성을 의식하되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활동성의 의식은 있지만, 그 활동성을 그런 것으로서 아는 자기 인식은 없다는 말이다. 마음의 자기활동성이므로 그 활동성은 우리에게 의식되어 있다. 우리는 영묘한 자기의식, 영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본성은 본각이기에 이미 자각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본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할 뿐이다. 결국 문제는 마음의 활동성이 바로 공적영지이기에 마음이 스스로 자신을 알긴 알면서도 자신을 바로 그런 공적영지로서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는 것’과 ‘무엇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아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공기 속에 사는 자는 공기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기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기를 공기로서 안다는 말은 아니다. 공기를 바로 그런 공기로서 알 수 있기 위해서는 공기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공기와 공기 아님 또는 공기 있음과 공기 없음의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공기 아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예를 들어 숨을 멈추어 공기 없음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이것이 공기가 아닌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 비로소 공기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공기를 공기로서 알 때 비로소 공기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공기 아님을 알 수 있기 위해 이미 공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기를 공기로서 알기 전에 이미 공기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그 무엇으로서 알기 위해서는 그 무엇과 더불어 그 무엇의 부정을 함께 알 수 있어야 한다. 그 무엇에 그것을 그것 아닌 것과 구분짓는 한계가 그어져야만, 그것을 그것 아닌 것이 아닌 것, 바로 그것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하되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의 활동성을 벗어난다거나 멈추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의식[자아의 자기정립의 활동성]을 결코 추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28]

28]피히테, ?지식론?, p.23

 

 

모든 차별상은 색에 의해, 경계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체의 색과 경계선이 사라지면, 각각의 바탕이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된다. 일체 현상을 포괄하는 바탕, 우주 전체를 감싼 허공은 끝 또는 한계가 없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한계 없는 무한, 상대 없는 절대의 허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A이다. 그 마음의 한계 밖에 나설 수 없는 이상, 그 무한과 절대의 마음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마음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마음은 마음을 추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의식하면서도, 누구나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을 가지면서도, 마음을 바로 그런 절대와 무한의 마음으로서 의식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함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인 무명(無明)이다. 따라서 중생은 본각(공적영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의 불각(不覺) 상태에 있다. 무명이 있기에 불각이고, 불각이 있으므로 다시금 시각(始覺)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떻게 중생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는 견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무한의 마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인가?

 

피히테는 마음을 마음으로서 의식하는 길을 마음이 스스로 마음 아닌 것을 설정하는 것, 즉 자아가 자아 안에 비아를 반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계 없는 무한, 상대 없는 절대가 스스로 한계를 긋고 스스로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아는 세계를 산출한다. 그것이 비아의 반정립, 현상세계의 산출이다. 그렇게 산출된 반정립된 현상세계, 즉 비아를 다시 부정함으로써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 아닌 자아로서 확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마음이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서 자각하는 길은 공적의 마음A로부터 그 안에 등장하는 주객대립의 현상세계를 부정함으로써이다. 마음A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인간은 주객, 능소의 망분별에 따라 자아와 세계를 실유로 집착하여 업을 짓고, 그 집착적 업력에 따라 다시 분별적 자아와 세계가 형성되어 윤회가 계속된다. 업력에 따라 윤회할 오온이 형성되며 그 오온에 상응하는 기세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가상의 현상세계로부터 그것의 부정으로서 그 근원인 마음A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A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객, 능소 분별의 현상세계는 무분별적 마음A가 그 자신의 자기 확인에 이르기 위해 형성한 가상이고 현상이다. 다만 그 가상의 현실을 실유라고 생각하며 거기 매달려 있는 한, 무분별적 마음A로의 복귀, 반조(返照), 자기 확인은 발생하지 않는다. 가상을 형성하는 것은 다시 그것을 부정하여 그것 아닌 것으로서의 무분별적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생멸의 가상으로부터 불생불멸의 진여(眞如)에 이르고자 함이며, 상으로부터 성에 이르고자 함이다. 그래서 절대자아는 자신 안에 비아(非我)를 반정립하고 다시 그 비아를 부정하여 비아 아닌 자아를 확인하고자 하며, 일심(一心)은 무명 속에서 윤회하면서 육도의 기세간을 형성하지만 결국은 육도윤회를 벗어 해탈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A로서의 자신의 본성의 확인이 곧 견성이다.

 

견성을 위해 스스로 현상을 만들고 다시 부정하는 것, 무한과 절대의 마음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 유한화한 후 다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독일관념론과 불교가 마찬가지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유한을 부정하고 무한으로 나아가는가의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다.

 

 

Ⅳ. 본성의 확인: 견성

 

1) 독일관념론: 실천적 행위의 길

 

피히테에 따르면 무분별적 마음A의 활동성, 절대자아는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바로 자기 자신으로서 인식하기 위해 마음A(절대자아)는 스스로 자아의 자기정립에 이어 자아 안에 비아를 반정립한다. 그렇게 해서 절대 자아 안에 비아가 반정립되면며, 절대자아는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로 분할되며, 그 둘 사이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규정하는 대립과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다.

 

가분적 비아에 의해 가분적 자아가 규정되는 과정이 인식이며, 반대로 가분적 자아가 가분적 비아를 규정하는 과정은 실천이다. 가분적 자아가 가분적 비아에 의해 규정되는 인식과 달리 실천행위에서는 자아가 비아(객관 현상세계)를 규정하고 부정함으로써 비아를 자아화하여 자아의 영역을 확장시켜나간다. 이처럼 비아를 부정하는 실천 과정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 아닌 것으로서, 즉 자아로서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절대자아는 자기 확인을 위해 자아 아닌 비아를 반정립하고 다시 실천행위 속에서 그 비아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비아 아닌 자아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자아와 비아의 투쟁적 관계 속에서 비아의 부정으로서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확인되고 확보되는 자아는 비아와 대립해 있는 가분적 자아(마음a)이지 절대 자아(마음A)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비아의 부정은 바로 가분적 자아의 확장일 뿐이며, 이는 결국 한 가분적 자아에서 그 보다 더 확대된 가분적 자아에로의 경계선의 이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아와 비아가 대립해있는 현상세계 내에서의 수평적인 경계이동일 뿐이지,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 둘 다를 포함하는 현상 전체의 부정을 통해 절대자아에로 나아가는 그런 수직적 초월은 아닌 것이다. 결국 경계 자체를 초월해서 절대자아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분적 자아의 경계를 절대자아 쪽으로 이동하여 가분적 자아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절대자아에로 접근해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비아가 완전 부정되어 절대 자아의 통일성에 이른다는 것은 피히테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자아는 오직 비아가 부정되는 과정에서만 자아로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비아가 남아 있는 한에서만 그 비아의 부정으로서 자아의 활동성이 자각되는 것이므로, 자아는 대상세계와의 투쟁관계 하에서만 대상 아닌 자아로서 의식되는 것이다. 결국 비아 부정의 순간 절대자아는 자아로 작용하긴 하지만, 비아 부정을 통해 확인된 자아란 절대자아가 아닌 확장된 가분적 자아일 뿐이다.

절대자아는 가분적 자아의 무한한 확장이 지향하는 궁극지점으로 이념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이와 같이 해서 피히테에 있어서는 절대자아가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절대자아의 단적인 자기인식, 자기동일성의 확보는 추구해야할 이상일 뿐 실현가능한 현실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절대자아의 자기 확인, 마음A의 자기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독일관념론 역시 칸트적 의미의 지적 직관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에게 가능한 직관은 현상의 직관일 뿐이고, 가능한 의식은 인식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대상의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A를 그 자체로서 의식에 포착하는 지적 직관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쉘링은 자아를 확인하는 자기인식의 길을 부정한다. 정신의 활동성(그는 이 자기의식을 지적 직관이라고 칭했음)은 자기의식의 방식으로 의식될 뿐, 그것 자체가 그런 것으로서 직관되지 않는다. 즉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음A는 주객동일성으로서 의식의 조건은 되지만, 그 자체가 의식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적 직관은 절대적 자유와 마찬가지로 의식(意識) 안에 나타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객체를 전제하는데 반해, 지적 직관은 그것이 아무런 객체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29]

29] 쉘링,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p.55

 

 

우리가 자아로서 활동하지만 그것이 의식 안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직관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마음A의 근원적 활동성으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 활동성을 직접 직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추론하여 반성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마음A는 사유의 대상이지, 직관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오직 대상의식으로서만 가능하므로 그 자체가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적 의식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2) 불교: 종교적 수행의 길

 

불교에 있어 견성(見性)은 성(불성)을 직접 관하는 것으로, 그것은 성에 대한 추론적 사유가 아닌 직접적 직관을 의미한다. 견성은 인간 마음의 근원적 활동성인 공적영지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그에 대한 직관이어야 한다. 그 직관은 비량(比量)이 아닌 현량(現量)이되 단순히 경험적인 감각이나 지각과는 구분되며 단순한 자기의식으로서의 자각(自覺)과도 구분되는 현량, 즉 정관(定觀)이다. 나아가 공적영지를 주객을 포괄하는 마음 자체의 자기활동성이며 식 자체의 자기의식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증분이라고 본다면, 견성은 다시 자증분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는 증자증분이 된다. 30]

 

30]물론 여기서 식의 四分은 현상으로 변현하는 근본식으로서의 아뢰야식의 사분이 된다. 아뢰야식의 견분을 자아로, 상분을 세계 자체로 간주하는 것이 곧 아집과 법집이다. 이때 자아(견분)은 보여진 세계 안에서 찾으므로 상분인 유근신의 작용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만큼 자증분은 식 자체로서 작용하되 그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어두운 무명에 쌓여 있다. 따라서 번뇌와 집착의 말나식이 그 견분과 상분을 실아와 실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견성은 정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증자증분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나아가 수행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이미 존재하는 본성인 ‘공적영지’와 구분해서 수행을 통해 비로소 얻게 되는 지혜(반야, prajna)로서의 ‘證悟의 智’라고 부를 수도 있고, 寂照의 본성을 관한다는 의미에서 ‘返照’라고 부를 수도 있다.

 

 

 

 

대상의식 아닌 자기의식으로서의 공적영지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는 증자증분은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가? 그것은 선정을 통해 얻어진 직관인 정관이므로 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의 수행인가?

 

주객과 능소의 분별 너머 그둘이 분리되지 않은 자증분을 그 자체로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나와 세계, 인식과 존재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그 지점에 의식을 가지고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일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의식표층을 통과하여 마음 심층에 도달하여 무분별의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주객, 능소대립의 구도로 되어 있다. 능연의 주관적 의식활동은 소연의 객관적 의식대상을 가지며, 후자가 없이는 전자가 성립하지 않는다. 의식대상이 없으면, 의식활동도 없다. 경이 멸하면 식도 따라 멸함이 경식구민(境識俱泯)이다. 의식활동이 언제나 의식대상을 지시하며 의식대상과 함께 한다는 것, 의식대상이 없는 의식활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서양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성(指向性)’이라고 칭한다. 먹히는 대상이 없으면 먹는 것이 아니듯이, 의식의 대상이 없으면 의식활동이 없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먹는 것을 뜻하듯이, 의식한다는 것은 무엇(지향적 대상)인가를 의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의식대상이 없어지면 그 대상의식도 따라 없어지면서, 의식 자체가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영지나 지적 직관을 인식 차원에서 확인하자면, 이러한 우리의 일상적인 주객대립구도의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의식대상이 없이도 대상의식이 아닌 방식으로도 의식이 의식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인가? 대상없는 의식이 가능한가? 자신의 본성, 공적영지를 발견하기 위한 수행이 곧 적성등지법(寂惺等持法)이다. 마음의 내용, 마음의 상들을 지워나가면서 마음 대상이 사라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따라서 혼미한 혼침에 빠져들지 않고 깨어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에 고요하게 대상을 잊고 단정하게 앉아 바깥 상을 취하지 말고 마음을 거두어들여 안으로 비추어 본다.

우선 고요함으로써(적)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또랑또랑함으로써(성) 혼침을 다스린다. 혼침과 산란을 고루 제어하며 나아가 취하고 버린다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31]

 

31]지눌, ?권수정혜결사문?(?한국불교전서?, 제4권, 701중),

“卽於初中後夜 爾忘緣兀然端坐 不取外相 攝心內照

先以寂寂 治於緣慮 次以惺惺 治於昏沉 均調昏散 而無取捨之念”

 

이 수행방식은 지눌에 있어 ‘無心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지눌은 空甁이란 것이 병안의 내용물이 없다는 뜻이지 병 자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듯이, 無心이란 마음의 내용이 되는 망념의 심 작용(마음a)이 없다는 것이지 마음 자체(마음A)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처럼 마음내용, 마음 작용의 대상들을 없애나가되(적) 마음 자체의 밝음과 깨어있음(성)은 유지하는 것이 무심법이다. 이런 방식으로 무념지심, 무심지심을 그 자신의 진심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눌은 어떤 방식으로 견성에 이를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서 다시 알기를 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제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 하여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제 눈인데 왜 다시 보려 하는가? 만일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신령한 앎도 그와 같이 이미 제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일 알려고 하면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되리니, 다만 알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성을 보는 것이다.”(지눌, ?수심결?, ?한국불교전서?, 제4권, 710상)

 

이는 지눌이 견성을 본성으로서의 공적영지를 직접 보는 직관(現量)이 아니라, 단지 공적영지가 있다는 반성적 사유(非量) 또는 있다는 믿음(信解) 정도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남기는 구절이다. 그러나 지눌이 논하는 적성등지법이나 무심법은 모두 견성에 이르기 위한 수행과정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마음의 자기확인인 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견성의 見이 경험적 사물인식에서 육안으로 보는 인식방식(分別之識)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것, 그런 방식으로 보고자 해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라고 본다. 적성등지법 내지 무심법에 의해 견성하게 되는데, 그 견성의 순간은 頓悟이며, 이를 見道라고 한다. 그리고 지눌은 이 견성에 근거해서 다시금 과거의 업장들을 닦아내는 수행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 수행이 漸修이며 이것이 修道에 해당한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방식에 있어서는 의식객체가 사라지면 의식작용도 함께 사라지면서 의식은 잠들어버리고 만다. 생각을 없애면 혼미하여 잠드는 것이다. 의식은 늘 대상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고, 공적영지는 직관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동일성은 의식이 아닌 존재, 마음이 아닌 몸의 차원으로 간주되고 마는 것이다.32] 그렇지만 그것이 공적영지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의식에서 대상을 없애서 대상의식차원의 의식이기를 멈추어 적(寂)이 되면서도, 그 의식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어 성(惺)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성등지법은 정확히 무엇을 시도하는 것인가?

 

32]불교의 공적영지나 독일관념론의 사행이 그 자체 그것으로서 인식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것이 표층 의식(제6의식/경험적 대상의식/마음a)보다 더 심층에서 작용하는 마음활동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한과 절대의 마음A를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여 알 수 없는 것은 그 마음이 한계 없는 무한이면서, 그 무한의 마음이 유한한 현상적 의식의 기반이되 그 자체는 의식화되지 않는 무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마음활동의 결과는 현상세계로서 의식에 주어지지만, 그 마음의 활동성 자체는 의식심층의 무의식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서양철학에 있어 의식보다 더 심층적인 마음의 활동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한 철학자는 라이프니츠이다. 의식되지 않는 마음의 활동, 그런 무의식적 앎을 그는 ‘미세지각’이라고 부른다.

 

미세지각은 마음의 작용이기는 하되 그 지각의 강도가 너무 미세하거나 일률적이기에 의식화의 문턱을 넘어오지 못하는 그런 지각이다. 이로써 그는 의식의 심층에서 너무 미세하게 작용하여 미처 의식되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한 셈이다. 지금까지 논한 마음a의 활동이 표층의 의식활동이라면, 마음A의 활동은 의식되지 않는(무의식적인) 심층의 마음활동으로서의 미세지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각의 정도가 강해짐에 따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분별하여 알게 되는 지각이 이전에 의식되지 않던 바로 그 지각이기에, 또 우리가 분별하여 인식하는 세계가 미세지각 차원에서 지각되는 바로 그 세계이기에, 지각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지각차원에 이르기까지, 세계 역시 무의식적으로 지각된 것에서 의식적으로 지각된 것에 이르기까지 단절적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이 연속성에 근거해서 미세지각을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마음작용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에만, 표층적 의식차원의 앎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 그것을 단지 몸의 작용이라고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존재와 인식을 이원론적으로 분별하는 마음a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마음(마음A)을 의식(마음a)과 동일시하고, 마음a와 구분되는 마음A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다. 이 경우에는 예를 들어 공기를 공기로서 아는 것이 의식적 분별작용이라면, 그 분별작용에 앞서 그냥 공기를 아는 것은 결국 의식 내지 마음이 아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아는 것이라고 말하려 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에 대해서는 사유주체로서의 내가 아는 것보다 내 몸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몸의 철학’은 이런 관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대상의식에 있어 뇌파는 β파라고 한다. 이는 대상에 따라 사이클이 바뀌면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불안정한 파이다. 여기에서 바깥으로 향한 의식을 되돌려 안으로 향하게 되면 의식은 더 이상 대상에 따라 움직이는 대상의식이 아니라 의식 자체를 의식하는 내부의식이되는데, 이 때 고요한 평정을 갖춘 뇌파는 좀 더 긴 파장의 α파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의식이 고요해지면, 즉 의식에서 의식대상을 없애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상태, 한마디로 무심(無心)이 되다 보면, 우리는 곧 잠들게 된다. 경이 없으면 식도 없기 때문이다. 잠든 수면뇌파는 파장이 더 길어지면서 θ파로 바뀌고 그 때 우리는 꿈의 세계로 빠져든다. 꿈에서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폭넓은 내적 의식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잠이 더 깊어지면 더 이상 꿈도 꾸지 않아, 외부의식도 내부의식도 멎어버린 무의식 단계가 된다. 이때 뇌파는 아주 긴 파장의 δ파가 된다.

 

우리의 두뇌파장이 β에서 α파, θ파로 바뀜에 따라 우리가 더 이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고 마는 까닭은 우리가 이미 강도가 강한 대상적 자극에 익숙해져서 내적인 미세한 자극들에 둔감해져 그것들을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활동만이 있는 원초적 상태에서는 δ파나 θ파 정도의 내적 자극만이 있을 것이며, 그런 미세한 자극들도 모두 감지됬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외적 자극으로 인한 β파에 익숙해진 이상 우리는 그런 자극이 있는 β파 상태에서만 깨어있고 그런 감지가능한 자극이 없으면 더 이상 깨어있지 못하고 잠을 거쳐 무의식에 빠져들고 만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생명활동은 우리 자신에게 전혀 의식되지 않으며, 그것은 모두 무의식 차원의 활동으로 간주되고 의식 또한 그런 활동과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어, 결국 존재와 의식, 생명과 사유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 33]

 

33]이는 의식화가능해지는 자극의 역치가 점점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치가 올라가는 것은 그만큼 의식이 둔감해진다는 것이며 많은 마음활동이 무의식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본래는 마음의 통제 하에 있었을 많은 신경활동이 의식화되지 않음으로 해서 자율신경으로 바뀐 것일 수도 있다. 자극의 의식화의 역치가 상승하는 경우는 일상적으로도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손가락이 바늘에 찔려 피가 나면 그 아픔이 의식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다른 손가락이 칼에 벨 경우 두 번째 아픔만 의식될 뿐 첫 번째 아픔은 더 이상 아픔으로 의식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강한 자극을 따라 의식화의 역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적성등지법은 그와 같은 분열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무의식으로 화해버린 존재와 생명을 다시 의식화하여 마음A의 활동성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식의 대상을 지워 고요한 적정상태(적)에 들어가면서도 깨어있음(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두뇌파장이 α파, θ파 나아가 δ파가 되면서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다는 것이다. 각성상태를 유지하면서 깊은 내면의식과 나아가 무의식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깊은 내면의식에서는 시간 공간을 초월하게 되며 무의식에서는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원화된 분별의식을 초월하게 된다. 이는 의식이 깨어있는 채로 내부의식을 통과하여 무의식의 세계 또는 무심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외부의식과 내부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게 되며, 무의식상태에서 자율적으로 작동하던 신경들을 모두 의식하여 비자율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해서 주와 객, 능과 소의 분별을 넘어선 마음A의 활동성을 그 자체로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외부의식에서의 분별적 나를 벗어나 그 보다 더 심층에서 작용하는 식 자체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의식이 각성된 채로 꿈의 세계에 들어가니 깨어있음과 꿈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의식이 각성된 채로 죽음과도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니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의 자연발생적인 흐름과 동요를 막아 고요한 지(止)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마음이 깨어있어 사태를 명료하게 의식하고 주목하는 관(觀)의 수행과도 상통한다. 사념처관 역시 적성등지법의 방식으로 의식 심층에서 작동하는 마음A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하여 알고자 하는 수행법이다.34]

나아가 사선(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의 경지도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의식으로서 무분별적 경지에 들어 그것을 마음A로 확인하는 적성등지의 수행법이다.35]

이처럼 의식내용을 없애면서도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여 대상의식 아닌 자기의식에 도달하여 자기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것이 불교적 수행이다. 이는 주객을 분별하는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고 멸함으로써 무분별의 경지로 넘어서는 것이다.

 

34]몸, 느낌, 마음, 법을 관하는 사념처관의 수행법 역시 이런 문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에서의 관은 3인칭적 관찰이 아니라, 내적으로 일인칭적으로 직관하는 것이다. 즉 직관대상을 직관하는 마음을 동시적으로 관해야 한다. 처음에는 4념처를 대상으로 관하다가, 그 대상의 생멸의 순간을 관하는 순간 그 생멸이 그것을 관하는 마음과 동시적으로 그 마음의 활동성을 따라 생멸하는 것임을 알아채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관하는 마음을 알아채게 되며, 관해진 대상과 관하는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몸이 사념처관의 방식으로 관해지기 전에는 많은 부분이 의식에 들어오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자율신경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념처관을 통해 몸의 상황, 예를 들어 피의 순환이나 대뇌활동조차도 내적으로 의식화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율신경이 아니라 비자율신경이 된다. 그렇게 해서 관의 대상이던 몸이 관하는 마음과 하나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35]초선에서 4선까지의 선수행과정은 주객대립의 대상의식에서 마음 심층으로 침잠하여 주객미분의 마음 자체의 활동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적 사유로서의 심사와 주관적 느낌인 희와 락 등을 넘어서서 주와 객, 능연식과 소연경이 소멸된 마음 자체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능연식과 소연상을 없애면 공적만이 남겨진다. 마치 거울에서 거기 비친 상을 지우면 상도 상의 의식도 없어지고 거울 자체만 남듯이, 마음에서 대상과 대상의식을 지우면 공적만 남는다.

 

그러나 그렇게 남겨진 거울의 있음, 공적의 있음은 우리가 결코 추상해낼 수 없는 있음이다. 그것의 없음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한이 배제된 무한이고, 상대가 없는 절대다. 그것은 무한이고 무변이다. 따라서 이를 空無邊處라고 한다.

추상해낼 수 없어서, 그것의 있음과 없음을 구분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공적을 의식없음으로가 아니라, 명료한 의식으로 직시하는 것, 의식이 그 공을 직관하는 단계가 4선 너머의 단계이다. 무변의 공을 직관한다는 것은 그 공이 추상적 공간이 아니고 자기자각의 영지임을 깨닫는 것이다. 무변의 공은 곧 무변의 식이다. 그러므로 이를 識無邊處라고 한다.

 

그러나 그 식 안에 제한된 대상이 없으므로 식이 머무르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無所有處이다.

 

그런데 그 상태를 공을 의식한 것(相)이라고 해야 하는가, 의식하지 못한 것(非相)이라고 해야 하는가?

무한 내지 공은 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그것을 의식했다고도 할 수 없으므로, 비상이며,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으므로 비비상(非想處)이다.

그러므로 非想非非想處이다.

 

 

경험적 자아로서의 마음a의 상태에서 보면 의식대상이 없을 때 의식은 잠들고 만다. 그럼에도 마음은 경험적 자아와 경험적 세계를 포괄하는 활동성으로서 작용한다. 현상적 차별성이 사라진 후 드러나는 바탕, 상이 멸하고 드러나는 성은 공적이면서 영지의 마음이다. 우리 각각이 그런 공적영지의 마음이기에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경험적 규정성을 넘어선 자유로운 능동적 주체로 의식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빈마음으로 의식한다. 마치 물 속의 물고기가 물을 알 듯이 우리는 우리 마음을 안다.

 

그러나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밖에 나서보지 않고 물을 물로서 확인할 수 있겠는가? 이 세계가 마음이 만든 세계라면, 세계를 벗어나지 않고, 삶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 세계와 삶의 경계에 선 마음을 마음으로서 알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세계를 벗어나고 삶을 벗어나는 경지, 살아서 죽는 생사불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을 마음으로서 아는 견성(見性)은 바로 그러한 경지를 말할 것이다. 적성등지법은 그런 견성을 위한 수행법이다.

 

 

Ⅴ. 마치는 말

 

불교나 독일관념론이나 인간의 본성을 주객분별 이전의 절대적 무분별의 마음A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이를 공적영지라 하고, 독일관념론은 그것을 사행이라 한다. 현상세계를 형성해내는 마음의 활동성인 것이다. 그렇게 산출된 현상세계는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정된다. 그 부정을 통해 마음 A는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비아의 현상세계를 부정하는 방식, 비아 아닌 것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길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자아 확인의 길을 구체적 삶의 실천 과정으로 보며, 다른 하나는 마음 자체의 직관,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하나는 현상세계 변혁을 위한 변증법적 실천윤리에 주목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내적 깨달음을 위한 수행론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비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확장함으로써 절대자아에 이르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자아와 비아의 구별 자체를 없앰으로써 절대 일심에 이르려고 한다. 이처럼 도달하고자 하는 절대적 마음A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도달 방식에 있어 독일관념론과 불교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며, 따라서 그 다른 길을 따라 확인된 것도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다.

 

독일관념론에 있어 자아 비아의 투쟁속에서 비아를 부정하면서 확인하는 자아는 결국 현상 너머의 마음A가 아니라 현상 안에 등장하여 자기를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는 마음a일 뿐이다. 여기서 마음A의 절대자아는 도달될 수 없고 확인될 수 없는 이념이고 이상일 뿐이다. 인간은 그 이념을 향해 전진해가지만 그 전진은 역사 안에서 완료될 수 없는 무한전진일 뿐이다. 역사는 자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다. 비아의 현상세계를 자연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자연을 부정하고 극복하여 그것을 자아화, 인간화, 문명화하는 자연과의 투쟁과정이 된다. 그리고 자아의 완전 승리로서 비아가 완전히 부정되어 자아의 절대적 동일성에 이른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불교는 현상적 자아와 현상적 세계 간의 갈등에 있어 그 경계를 자아확장의 방식으로 이동해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36] 보다 인간화된 현상세계의 건설, 보다 아름다운 꿈의 기획이 아니라, 현상으로부터의 초월,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러한 초월과 깨어남을 성취가능한 것으로 본다. 석가가 깨달음을 통해 생사윤회를 넘어섰듯이 인간 누구나 석가가 설한 그 방식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결국은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36]물론 이 세간안에 불국토를 건설하겠다는 이념이 있기는 하지만, 불국토는 모두가 이미 해탈한 경지 또는 모두가 해탈을 지향하는 경지로서, 모두가 깨어난 초월적 세계이지, 이 현실 세계의 확장은 아닌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무명을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마음A의 자기확인이 있지 않다면, 즉 진정한 견성(見性)이 있지 않다면, 현상적 자아(마음a)의 무한한 자기확장 그리고 비아(非我)의 부정은 아집에 가득찬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외적으로 세계를 향해 자기를 실현하려 하기 전에 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여실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관념론자들은 왜 초월적 자기확인을 시도하지 않고 수평적 자아확장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왜 의식의 절대적 비약, 수행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지를 추구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초월은 오직 신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분리, 마음과 몸, 영과 육의 갈등은 인간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며 운명으로 간주된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의 추구는 그러한 인간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기독교적 견지에서 말하면 신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길이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한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오로지 자신의 일생을 걸고 진지하게 수행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마음, 본성, 견성, 공적영지, 무명, 적성등지법, 독일관념론, 사행, 자기 의식, 지적 직관 

 

The  Nature of the Mind and its Intuition

-A Comparative Study between Empty-Spiritual-Knowledge in Buddhism and Intellectual-Intuition in German Idealism -

 

Han, Ja Kyoung

 

The human mind usually acts in subject-object-division and through this act it gathers all kinds of differentiating knowledge about the world. However Buddhism tries to arrive at non-differentiating knowledge and declares that the human mind essentially acts in an undivided way. This act, which is the absolute un-differentiating knowledge of self, is the nature of human mind. Buddhism refers to this as Empty Spiritual Knowledge'(空寂靈知).

 

German Idealism shares the same opinion as Buddhism about the essential nature of the human mind. It proves that all kinds of empirical activities of the mind depend on one absolute act. It considers this absolute act as the nature of the human mind and calls this Fact-Act'(Tathandlung, 事行).

 

In this paper I will argue that the Empty-Spiritual-Knowledge in Buddhism and the Fact-Act in German Idealism are the transcendental essence of human beings as undivided Absolute one, which comprehends both oneself and world, mind and body(matter), knowing and being, etc. Insofar they are of the same opinion. However in the method of recognizing the nature of human mind as such and how to actualize it in reality, they don't agree. Buddhism teaches the way of spiritual meditation, while the German Idealism chooses the path of practical or political activity.

should be different from relativism which goes only its own way without concern others. It is as open as they can convert to other religion with volition to learn other faith and reform themselves. Therefore the opening must not be strategic but be honest one. This honest opening might be possible only in the case of tentative self-denial. Without this tentative self-denial there can't be self-transcendency and without self-transcendency it is impossible to make true reconciliate or agreement. Then, the true multi-religious pluralism can be possible from self-denial.

 

Buddhism is the religion to make self-denial. The foundation of self-denial of Buddhism can obviously be found in the absence of ego theory, the Dharma of pratítya-samutpãda, the upãya theory, the middle way theory

 

 

 

 

 

 

 

 

 

 

 

 

[무념] 자기 확인을 통한 자기 운명에 대한 도전 / 한자경 교수

마음의 本性과 見性의 문제 ― 불교의 공적영지空寂靈知와 견성見性, 독일관념론의 사행事行과 지적가치知的直觀의 비교 /한자경이화여자대학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이 세계는 내가 바라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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