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청정심이 곧 부처 - 법흥 스님

수선님 2021. 12. 12. 13:00

'청정심이 곧 부처’ 맑은 마음 갖는 공부하세요.

 

법흥스님(송광사 조실)

 

 

처음에는 멋모르고 했던 것이 두 번, 세 번 하려면 두려울 때가 있다. 반복되는 경험 속에 얻어지는 익숙함과는 다른 무엇. 그것마저 극복했을 때가 자신을 향상시키고 진일보 하게 되는 때이다. 또, 겹겹이 쌓여가던 속박에서 벗어난 작은 해탈이리라.

 

순천 송광사를 찾아가는 길도 그랬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던 3월 13일, 나그네는 밤길을 달려 송광사에 갔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같은 시각에 다시 송광사를 찾았다.

 

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기 위해 도량을 가득 메웠던 대중은 간 곳 없이 절집은 고요했다. 밋밋하던 도량 한 켠의 매화나무 가지에는 매화 봉오리가 잔뜩 물올라 있었다. 매화꽃 또한 10여 일전 송광사를 장엄했던 대중 같은 봄 손님이다.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는 변함 없었다.

 

송광사 방우산방(放牛山房)에서 법흥 스님을 만났다.

 

방우산방은 법흥 스님의 은사 조지훈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오대산 토굴 ‘방우산장’에서 따온 말이다. 조지훈 선생은 방우산장에서 지내며 오대산 스님들에게 외전을 강의했다.

 

법흥 스님의 기억력은 탁월하다. 경전을 비롯해 조계종 스님들의 이력, 송광사 역사 등을 줄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이들 모두 스님을 ‘이 시대의 아난’이라고 칭송한다. ‘아난’을 모르는 이도 “스님은 컴퓨터세요, 녹음기가 따로 없네요.”라며 탄복하는 분이 법흥 스님이다.

 

법정 스님 입적으로 효봉 스님의 상좌 중에는 법흥 스님만이 남았다. 맏상좌로 조계총림 방장을 지낸 구산 스님(1909~1983)을 비롯해 환속한 고은 시인, 김완일 법사 등이 효봉 스님 상좌였다.

 

근현대 선지식의 한 분인 효봉 스님(1888~1966)은 ‘절구통 수좌’라 불렸다. 법관 출신 출가자로 유명했던 스님은 와세다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생활을 하다 첫 사형선고를 내린 후 생사를 고뇌하다가 38세에 늦깎이로 출가했다. 출가 후 치열한 구도의 노력 끝에 깨달음을 얻은 효봉 스님은 1937년 송광사 선방 삼일암에서 조실로 10년을, 1946년부터 5년간은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 초대종정 등을 역임했다.

 

 

법정ㆍ법흥 스님은 사형사제간이다. 법흥 스님은 3월 13일 사형의 다비식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송광사 선덕 현호 스님,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 중앙종회 의장 보선 스님, 원로의원 월탄 스님, 선원대표 혜국 스님 등과 거화봉을 들었다. 이후 17일 법정 스님의 초재에서 법흥 스님은 추모사를 통해 뜨거운 형제애를 보여줬다.

 

“법정 사형님, 서울삼성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전에 찾아뵈려 했으나 생전에는 못 뵙고 추모사를 하게 돼 송구스럽습니다. 1960년 팔공산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이 ‘법정, 법흥 들어와라’하시며 ‘화두를 어떻게 드느냐’고 했을 때 몸 둘 바를 모르고 떨었던 때가 기억납니다. 1975년 정부기관서 사형님의 전화를 도청하고 편지를 뜯어봐 법정 사형님은 송광사로 내려오셨습니다. 원고료 몇 푼으로 불일암 중창불사를 하던 사형을 도우며 가까이 모셨던 것이 생생합니다. 사형님이 산문집 <버리고 떠나기>을 통해 송광사 행사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강원도 산골로 떠난 후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법정 사형님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교육포교의 대전략가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수필가입니다. 세상은 제행무상, 생자필멸, 회자정리하는 것이지만, 존안을 뵐 길이 없는 이 중생의 슬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법흥 스님의 기억력은 놀라웠다. 스님은 1주일 전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 영전에 올렸던 추모사를 송광사에서 나그네에게 그대로 전했다.

 

“법정 스님이 1932년생이어서 나보다 속가 나이는 한 살 어렸어. 하지만 5년 먼저 출가했으니 내 사형이지. 나는 1958년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스물아홉이던 1959년 대구 동화사에서 출가했어. 해인사에서 글 쓰던 법정 스님이 1960년 정월 보름에 동화사 금당에 왔을 때 만났어.”

 

법흥 스님이 회상하는 법정 스님은 자기 하고 싶은 공부만 했던, 얄밉도록 실속 있게 살았던 ‘사형’이었다.

 

“법정 스님과 1961년 해인사 선방에서 같이 지냈어. 그때 법정 스님이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번역본을 냈고. 해인사에서 보니 스님은 <신동아>, <사상계> 같은 잡지를 보고 있었어. 스님은 주지ㆍ삼직(총무ㆍ교무ㆍ재무 등 소임)을 단 한 번도 산 적이 없었어. 내가 동화사에서 교무 소임 볼 때 법정 스님에게 ”같이 지내자“고 하니, 스님이 나보고 ‘스님 공부나 하지 뭐하려고 교무보고 있소’라고 묻더군. 하하하.”

 

법흥 스님이 동화사 교무 소임을 살 때는 사찰 재산이 처음 등록되던 때였다. 스님은 동화사 70여 말사의 촛대, 향로 하나까지도 일일이 만년필로 옮기며 동화사 말사의 재산을 기재한 장본인이다. 손이 부르트게 펜을 잡고 일하는 자신과 달리 하고 싶은 대로 살았던 사형이 야속하기도 했을 법한데 두 스님의 사형사제지간은 돈독했다. 군사정권 때 비판 글을 잡지에 게재했던 법정 스님은 중앙정보부 감찰이 도를 넘자 송광사로 내려왔다. 원고료 80만원을 들고 불일암 불사를 시작했던 사형을 도운 것은 당시 송광사 주지를 살던 법흥 스님이었다.

 

“1980년 10ㆍ27 법난 이후 이를 수습하려고 꾸려진 비상중앙총회에 법정 스님과 함께 들어갔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법정 스님은 그것도 2~3달하고 그만뒀을 만큼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지.”

 

스님은 나그네에게 “요즘 법정 스님 책이 15만원이나 한다며?”라고 물었다. 나그네도 우스개로 “스님, 사형스님 책이니 많이 갖고 계시겠네요?”라고 반문했다.

 

“아니, 하나도 없어. 몇 권 있던 것도 얼마 전에 청와대(박재완 수석)에서 찾길 래 다 보내줬어.”

 

 

법흥 스님 방에는 책이 가득하다. 무엇이든 주기 좋아하는 스님이 건네는 선물 가운데 책은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다. 2009년 스님은 소장해 온 350여 권의 도서를 기증해 고려대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나그네가 스님을 만나는 동안 문안 인사를 여쭈러 온 한 스님에게도 스님은 책을 건넸다. 나그네도 책을 받았다.

 

“책에 길이 있어. 난 그 길을 주고 싶은 거야. 내가 선물한 책을 보면서 발심하면 그보다 더한 선물이 어디 있겠어. 자네도 받아서 읽고 발심하는 사람이 되게나.”

 

법흥 스님은 어려서부터 불심 깊은 집안에서 자랐다.

 

“속명이 윤주흥인데 식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중(주흥)아~ 중(주흥)아~’로 들리쟎아? 절이라면 그저 좋았어.”

 

스님은 대학 졸업 후 출가 원력을 세웠다. 고려대 재학 당시 등하교길마다 고려대 뒤 개운사에서 부처님께 절 올리고, 처소 인근의 신설동 청룡사 새벽예불을 빼먹지 않을 만큼 스님의 불심은 남달랐다. 스님은 출가를 위해 대승사 묘적암을 찾았고, 그 곳에서 스님은 일타 스님을 만났다.

 

“‘출가하려 왔다’ 하니 일타 스님이 ‘한 아들이 출가하면 구족이 생천한다’며 그 자리서 삭발해 주셨었어.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라 속가집에서 대승사까지 40리 길을 지게로 쌀을 지어 나르며 공양주 노릇을 했지. <초발심자경문>도 배우고 3일 동안의 1만배 정진도 했고. 일타 스님이 수행처를 옮기면서 효봉ㆍ인곡 스님이 있는 동화사로 가서 혜암 스님을 만나라고 일러주셨어.”

 

혜암 스님은 법흥 스님의 범상치 않음을 간파하고 효봉 스님에게 인도했다. 효봉 스님은 법흥 스님에게 “얼굴이 스님상인데 어찌 속가에 있었느냐”며 반겼다.

 

“효봉 스님은 ‘스님이 됐으면 참선밖에 더 있느냐? 강사가 죽을 때 후회하며 죽는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운다 해서 생사를 해탈하느냐? 기도와 주력은 제 욕심 때문에 한다’며 참선하라고 강조하셨지.”

 

3년만 밑에서 참선 공부하라는 효봉 스님의 당부가 있었지만, 법흥 스님은 큰 절이 보고 싶어 미래사를 떠났다. 은사인 효봉 스님만큼 아니지만 늦깎이 출가를 했던 법흥 스님은 늦깎이 출가를 만회하려고 쉼 없이 정진했다. 통도사 보광전, 해인사 선원, 송광사 선원, 동화사 금당선원, 월내 묘관음사 등에 방부를 들이고 정진했다.

 

“‘무(無)’자 화두를 들고 정진했지만 건강이 허락하질 않았어. 그래서 기도를 했지. 오대산ㆍ정암사ㆍ법흥사 적멸보궁을 비롯해 남해 보리암, 부석사 무량수전, 강화 전등사 등 기도하러 안다닌 곳이 없어.”

 

 

법흥 스님은 해인사에서는 성철 스님 권유로 340일 동안 17만배 기도를 했다. 그리고 또 다시 340일 동안을 하루 네 번 1시간 씩 마지를 올리며 기도 정진했다.

 

스님의 하루는 새벽3시 ‘대불정능엄신주’과 ‘법화경요품’ 독송 등으로 시작된다. 대웅전과 각 전각을 돌며 절을 올리는 스님의 순례는 송광사 주지를 할 때부터 30여 년 넘게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스님에게 기도법을 물었다.

 

법흥 스님은 “구산 스님은 ‘목탁 치며 자기가 부르는 소리를 스스로 들으며 기도해야 한다.’고 했고, 일타 스님은 ‘구하는 마음 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마음 씀씀이에 따라 정토에 나기도 하고, 고해에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마음은 상이 없으니 무상이야. 그런데 이 마음이 모든 것을 지배해. 내가 짓는 마음이 극락도 만들고 지옥도 만드는데,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가?”

 

육조 혜능 스님이 의발을 빼앗으러 온 혜명 스님에게, 오도 후 입을 연 제일성이 “선도 생각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 혜명스님의 본래면목은 어떠한가?(不思善 不思惡 正與時 那箇是明上座 本來面目)”였다. 그 말끝에 혜명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법흥 스님은 “이것이 중도실상의 법문이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일체선법을 닦아야 하는데, 바로 마음을 닦는 것이다. 불교공부는 결국 마음공부”라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마음을 닦는 것이 수심(修心)이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양심(養心)이며, 마음을 쓰는 것이 용심(用心)”이라면서 “어느 하나 먼저라 할 것도 없고,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나 자신이 무엇인가 반성해봅시다. 사람은 과연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어야 하는가. 나는 왜 존재하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법흥 스님은 “불교의 가르침은 자신에의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며 “불교의 사상은 불이 자재 평등 해탈 중도”라고 말했다.

 

특히, 스님은 맑은 마음, 감사하는 마음, 용맹스런 마음을 강조했다.

 

 

“맑은 마음(淸淨心)을 갖는 공부에 제일 힘써야 해. 임제 스님은 ‘청정심이 곧 부처’라 했어. 내 마음이 맑으면 부처의 마음이 되고, 내 마음이 더러우면 축생의 마음이 되는 게야. 사심 없고, 탐진치 없는 마음, 광명정대한 마음을 가져야 해.”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머금고 달아나니(海底泥牛月走),

바위 앞에 돌호랑이가 아이를 안고 졸고 있다(巖前石虎抱兒眠).

철뱀이 금강신장의 눈에 끼어드니(鐵蛇鑽入金剛眼),

곤륜산이 코끼리를 타고 백로가 이끈다(崑崙騎象白驚牽).

 

 

나그네는 방우산방을 나오는 길에 들어갈 때는 보이지 않던 산방의 편액을 보았다. 고봉 화상의 <선요>에서 옮겨진 저 말을 알게 되는 때, 나그네도 청정심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송광사를 나서는 길, 법흥 스님의 가르침이 물소리 바람소리처럼 나그네를 적신다.

 

 

■법흥 스님

 

1931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했다. 1958년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59년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후 통도사 해인사 상원사 대승사 미래사 망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한 법흥 스님은 1974~1977년 송광사 주지를 지냈다.

 

1980년 불교정화중흥회의 사무총장, 제4ㆍ5ㆍ8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조계종 원로의원, 2008년 대종사에 추서됐다. 저서로 <선의세계> <계율강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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