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통해 안을 보호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면서 밖을 보호하는 것은 진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자호경(自護經)
[원문]
(一二二九) 如是我聞 :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波斯匿王獨靜思惟, 作如是念 : ‘云何自護? 云何不自護?’ 復作是念 : ‘若有行身惡行․行口惡行․行意惡行者, 當知斯等為不自護. 若復行身善行․行口善行․行意善行者, 當知斯等則為自護.’ 從禪覺已, 往詣佛所, 稽首佛足, 退坐一面, 白佛言 : “世尊! 我獨靜思惟, 而作是念 : ‘云何為自護? 云何為不自護?’ 復作是念 : ‘若有行身惡行․行口惡行․行意惡行者, 當知斯等為不自護. 若復行身善行․行口善行․行意善行者, 當知斯等則為自護.’”
佛告大王 : “如是, 大王! 如是, 大王! 若有行身惡行․行口惡行․行意惡行者, 當知斯等為不自護, 而彼自謂能自防護. 象軍․馬軍․車軍․步軍以自防護, 雖謂自護, 實非自護. 所以者何? 雖護於外, 不護於內. 是故, 大王! 名不自護. 大王! 若復有行身善行․行口善行․行意善行者, 當知斯等則為自護. 彼雖不以象․馬․車․步四軍自防, 而實自護. 所以者何? 護其內者, 名善自護, 非謂防外.” 爾時, 世尊復說偈言 :
“善護於身口, 及意一切業,
慚愧而自防, 是名善守護.”
時, 波斯匿王聞佛所說, 歡喜隨喜, 作禮而去.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파사닉왕은 혼자 고요히 사색하다가 이런 생각에 잠겼다.
‘어떤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것인가?’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일 어떤 이가 몸으로 악을 행하고 입으로 악을 행하며 뜻으로 악을 행하면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몸으로 선을 행하고 입으로 선을 행하며 뜻으로 선을 행하면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는 선정에서 깨어나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한 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혼자서 고요히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떤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것인가?’
또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몸으로 악을 행하고 입으로 악을 행하며 뜻으로 악을 행하면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몸으로 선을 행하고 입으로 선을 행하며 뜻으로 선을 행하면 그들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만일 몸으로 악을 행하고 입으로 악을 행하며 뜻으로 악을 행하면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잘 보호한다고 말합니다. 상군(象軍) 마군(馬軍) 차군(車軍) 보군(步軍)으로써 자기를 보호하면서 스스로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비록 밖은 보호하고 있을지라도 안을 보호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왕이시여,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왕이시여, 만일 어떤 이가 몸으로 선을 행하고 입으로 선을 행하며 뜻으로 선을 행하면 그것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비록 상군, 마군, 차군, 보군의 네 가지 군사로써 자기를 보호하지 않지만, 사실은 자기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을 보호하는 자는 곧 자기를 잘 보호하는 것이지, 밖을 보호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존께서 다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모든 업을 잘 단속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 스스로 지키는 것
이것을 잘 지켜 보호하는 것이라 한다.
그때 파사닉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
[해석]
이 경은 ≪잡아함경≫ 제46권 제1229경 <자호경(自護經)>(T2, p.336a-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3:5 Attānarakhita-sutta(SN.Ⅰ.72-73)이다. ≪별역잡아함경≫ 제3권 제57경(T2, p.393a-b)도 이 경과 내용이 비슷하다.
파사닉왕(波斯匿王)은 빠세나디(Pasenadi, Sk. Prasenajit)를 음사한 것인데, 그는 붓다시대 강대국이었던 꼬살라(Kosala, 憍薩羅國)의 국왕이었다. 니까야에서는 그를 ‘빠세나디 꼬살라 왕(rājā Pasenadi Kosala)’이라고 표현하고 있다.(SN.Ⅰ.72)
이 경은 빠세나디 왕과 붓다가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다. 대화의 주제는 ‘어떤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빠세나디 왕이 혼자 고요히 사색하다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은 스스로 ‘몸과 입과 뜻으로 선(善)을 행하면, 그것이 곧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고, 반대로 몸과 입과 뜻으로 악(惡)을 행하면, 그것이 곧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고 결론을 내렸다.
왕은 자신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붓다를 찾아갔다. 붓다는 왕의 말을 듣고 나서 왕이 내린 결론이 올바른 것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덧붙여 왕이 신변보호를 위해 상군, 마군, 차군, 보군의 네 군사들이 밤낮으로 지키고 있지만, 그것은 진정으로 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님을 일러주었다. 또한 붓다는 왕이 선행을 통해 안을 보호하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면서 밖을 보호하는 것은 진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이 경의 핵심이다.
빠세나디 왕은 꼬살라의 국왕 마하꼬살라(Mahā Kosala)의 아들이었다. 그는 당시 딱까실라(Takkasilā)로 유학하여 릿차위(Licchavi)의 마할리(Mahāli)와 말라(Malla)의 반둘라(Bandhula) 왕자 등과 함께 공부했다. 그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마하꼬살라 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DhpA.i.338)
붓다시대의 사꺄(Sakya, Sk. Śākya, 釋迦族)는 꼬살라에 예속되어 있었다. ≪숫따니빠따(Suttanipāta, 經集)≫ 제422게(偈)에서 붓다는 자신이 ‘꼬살라국의 주민(Kosalesu niketino)’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꼬살라와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마가다(Magadha, 摩竭陀國)뿐이었다. 붓다시대 꼬살라와 마가다의 두 강대국은 정략결혼을 통해 화친(和親)을 맺고 있었다. 이를테면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의 여동생 꼬살라데위(Kosaladevī)는 마가다의 빔비사라(Bimbisara) 왕과 결혼했고, 빠세나디 왕의 딸 와지라(Vajirā)는 빔비사라 왕의 아들 아자따삿뚜(Ajātasattu)와 결혼했다.
두 강대국 중에서 마가다의 빔비사라 왕이 먼저 붓다께 귀의했다. 그러나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은 자기 나라에 예속된 사까족 출신의 붓다를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아내 말리까 왕비(Mallikā Devī)의 권유로 붓다께 귀의하게 되었다. 붓다의 후반부 약 24년간 꼬살라의 사왓티에 주석하면서 교화를 펼쳤다. 빠세나디 왕은 일생동안 붓다께 자문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사까족과의 관계가 빗나가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빠세나디 왕은 붓다와 인척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DhpA.i.339; J.i.133; iv.144) 그는 사꺄족에게 자기 아내로 삼을 공주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사꺄족은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마하나마(Mahānāma)와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와사바캇띠야(Vāsabhakhattiyā)라는 딸을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에게 보냈다. 이 빠세나디 왕과 와사바캇띠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위두다바(Viḍūḍabha)였다. 위두다바 왕자는 성장하여 외갓집인 사꺄족의 까삘라왓투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위두다바는 격분하여 만일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제일 먼저 사꺄족을 몰살시켜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빠세나디 왕은 왕자시절 딱까실라에서 함께 공부했던 말라국의 반둘라(Bandhula) 왕자를 나중에 총사령관(senāpati)으로 임명했다. 빠세나디 왕은 부패한 신하의 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반둘라 총사령관과 그의 아들 서른두 명을 한꺼번에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날 반둘라 총사령관의 아내 말리까(Mallikā)는 붓다를 비롯한 오백 명의 비구들을 초청해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공양이 끝날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말리까 부인에게 무상함과 관련된 법을 설하고 떠났다.
그 후 빠세나디 왕은 반둘라 총사령관의 조카 디가까라야냐(Dīghakārāyaṇa)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빠세나디 왕의 나이 80세 때, 왕은 디가까라야나에게 훌륭한 마차를 준비하도록 하고, 붓다께서 머물고 있던 메달룸빠(Medaḷumpa)라는 삭까족들의 성읍으로 갔다. 왕은 붓다의 처소에 이르러 다섯 가지 왕의 징표(pañcarāja-kakudha-bhaṇḍa)인 칼(khagga), 터번(uṇhīsa), 부채(vālavījani), 일산(chatta), 신발(upāhana)을 디가까라야나에게 맡기고 붓다의 향실(Gandhakuṭi)로 들어갔다.
디가까라야나는 ‘예전에 이 왕이 사문 고따마와 독대를 한 뒤 나의 외삼촌을 그의 서른두 명의 아들과 함께 죽였다. 지금 다시 독대를 하려는 것을 보니 아마 나를 죽이려나 보다.’(MA.iii.350)라고 생각하고, 왕의 다섯 가지 징표를 가지고 서둘러 군대로 돌아가 왕의 아들 위두다바(Viḍūḍabha)에게 왕의 징표인 “일산을 내걸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위두다바 왕자도 동의했다.
한편 디가까라야마는 빠세나디 왕에게 한 마리의 말과 칼, 그리고 한 명의 수행원을 남겨두고, “만약 왕이 살고 싶으면 돌아오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위두다바의 일산을 내걸고 사왓티로 갔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빠세나디 왕을 폐위시키는데 일조했다.(MA.iii.352)
붓다와 독대를 마치고 나온 왕은 디가까라야마와 군대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시녀로부터 전후 사정을 듣고, ‘이제 나는 나 혼자 그곳으로 가서는 안 된다. 라자가하로 가서 내 조카 아자따삿뚜와 함께 내 왕국을 되찾겠다.’고 생각하고 라자가하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라자가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문이 닫혀있었다. 그는 성 밖의 객사에서 시녀의 무릎에 지친 몸을 뉘었으나 그날 밤에 죽고 말았다. 아자따삿뚜 왕이 빠세나디 왕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는 위두다바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MA.iii.354-355; MN.ii.118; MA.ii.753; DhpA.i.3; J.iv.150); 대림 옮김, ≪맛지마 니까야≫ 제3권(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12), pp.369-382 참조)
한편 꼬살라의 왕위에 오른 위두다바는 붓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까삘라왓투를 공격하여 사까족을 전멸시켜 버렸다. 이 때문에 사까족은 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위두다바는 동생 제따(Jeta) 왕자가 자신의 모반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여 버렸다.
빠세나디 왕은 붓다와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 그는 죽을 때까지 붓다를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가 얼마나 붓다를 존경하고 흠모했는지는 ≪맛지마 니까야≫의 <법탑경>(MN89)에서 확인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는 빠세나디 왕과 관련된 경들이 많이 수록되어있다.
대표적인 것은 ≪상윳따 니까야≫ 제1권 제3 꼬살라- 상윳따(Kosala-saṃyutta)에 수록된 25개의 짧은 경들이다. 또한 ≪앙굿따라 니까야≫ 제3권 <꼬살라경>(AN5:49)도 그와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빠세나디 왕의 아내 말리까 왕비(Mallikā Devī)와 관련된 경들도 많이 남아있다. 그녀는 붓다에 대한 돈독한 신심으로 사찰을 건립하여 상가에 기증하기도 하는 등 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빠세나디 왕의 아들 브라흐마닷따(Brahmadatta)는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고,(ThagA.i.460) 그의 여동생 수마나(Sumanā)도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ThigA.22; SN.Ⅰ.97; AN.Ⅲ.32)
마 성 <팔리문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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