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한국 불교학자] <24> 정태혁 / 정승석
배우며 생각하며 수행하다
[69호] 2017년 03월 01일 (수) | 정승석 |
편집자 주
* 인도철학회에서는 2014년 11월 28일, ‘한국 인도철학 50년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재직했던 제1세대 학자들의 업적을 고찰하고, 그 발표문을 논문으로 개정하여 《인도철학》 제42집에 게재하였다. 이 글은 필자가 여기에 게재한 논문을 《불교평론》의 기획에 부합하도록 개편하고 일부 내용(특히 서두)을 추가한 것이다.
1. 드러냄 없이 드러난 삶
향운(香雲) 정태혁(鄭泰爀)은 1922년 10월 23일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오도리에서 연일(延日) 정씨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나서, 2015년 4월 16일 미국 뉴욕에서 향년 93세로 별세했다.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해 영결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후학과 제자들은 그해 6월 3일 동국대학교 정각원에서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고인을 추모했다. 추모하는 이들에게 정태혁은 입이 아니라 마음과 손으로 생동하는 학자였다.
정태혁의 생애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로는 정중동(靜中動)이 가장 적격이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중에 드러나는 활동은 있되, 그 무언의 동(動)은 집필과 수행이었다. 그래서 그의 생애에는 화려하거나 독보적인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의 정중동은 불교학의 진작과 응용을 선도하는 동력으로 드러났다.
향운 선생은 동국대학교를 퇴직한 지 12년이 지난 2000년에 출판한 《불교산책》에 “배우며, 생각하며, 수행하며”라는 부제를 달았다. 필자는 그간 가장 오랫동안 제자로서 선생과 대면해 왔기에, 그 부제는 선생의 삶을 집약적으로 자술한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태혁의 학문을 조명하는 것도 이 자술의 함의를 상술하는 것으로 가능하고 더욱 적절할 수 있다.
정태혁의 삶은 나름대로 꿋꿋하고 치열한 구도적인 노력으로 점진적인 성취를 일구어내는 여정이었다. 이 점은 정태혁의 생애를 대략 돌이켜보는 것으로 수긍할 만하다. 그의 여정에서 분기점이 될 만한 것들만 짚어보자면, 1942년부터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도중 1943년 월정사 출가, 1952년부터 1969년까지 중고등학교 교사, 그 사이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일본 유학으로 석 · 박사 과정 수료, 원광대학교 조교수 자격으로 강의하다가 1971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전임강사로 부임, 1977년 대만에서 철학박사 학위 취득 등을 들 수 있다. 그는 퇴직한 이후로 종교단체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학장과 연구소장, 학술단체의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도 퇴직 이전보다 더 많은 저 · 역서를 발표하였다.
이하에서는 배움과 생각과 수행을 동시 진행형으로 일관해 왔던 정태혁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소개할 것이지만, 이에 앞서 공개된 자료를 중심으로 그의 주요 이력을 개괄해 둔다.
1942년 양정중학교 졸업 후, 청석국민학교 교사
1943년 월정사에 입산하여 이종욱(李鍾郁) 스님의 도제로 수도
1946년 덕수상업중학교 교무과 근무
1948년 세종국어교사양성소 교무 주임
1952년 덕수중학교 교사
1955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56년 덕수상업고등학교 교사
1961년 경동고등학교 교사
1962년 일본 도쿄(東京)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 전공 수사(석사)과정 수료
1963년 일본 오타니(大谷)대학교 대학원 불교학 전공 박사과정 수료
1966년 용산고등학교 교사
1969년 원광대학교 조교수
1971년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전임강사
1977년 중국(대만) 문화대학 중화학술원 철학박사 학위 취득
1988년 동국대학교 정교수 정년퇴직
1991년 동방불교대학교 학장,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 노인문제연구소 소장
1997년 인도철학회 회장
1998년 한국정토학회 회장,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이상과 같이 정태혁은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중고등학교의 교사를 거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의 교수로 퇴직하기까지 교육자로서 삶을 일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소천 스님을 만나는 것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어 일시 오대산 월정사에 입산수도하였고, 해방이 되자 국어 교사로서 우리의 말과 글을 되찾아 보존하는 데도 노력을 쏟았다. 그가 발표한 많은 기고문과 저술에는 다른 학자들에 비해 현저한 국어 사랑의 흔적이 배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정태혁은 수행자로서 삶을 자각하면서 이를 제자들에게 일깨우곤 하였는데, 20대에 갓 들어서서 월정사로 출가했던 경험이 이의 계기가 된 듯하다. 그는 자신의 출생지이자 퇴직 후의 거주지였던 오도리(悟道里)의 의미를 자부심으로 표명하곤 했다. 정태혁의 이 같은 의식은 요가 수행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일본 유학 당시에 요가를 알게 된 이래, 국내 학자로는 처음으로 요가를 수련하고 지도해 왔으며, 만년에는 실용적 요가와 함께 불교의 수행 정신을 일반인에게 보급하는 데 주력했다. 그가 퇴직 이후 더욱 줄기차게 저술 활동에 전념하여 숱한 결실을 맺은 것도 그러한 수행의 저력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향후 정태혁의 유고가 출판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출판된 그의 마지막 저서는 《선(禪)의 단맛을 보라》(2010)이다. 그는 마침내 불교적 수행의 단맛을 보면서 생애를 마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정태혁은 정년퇴직한 지 10년째인 1998년 4월, 새삼스러울 정도로 뒤늦게 동국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필자는 같은 해 8월, 이를 기념하여 《인도철학과 불교의 실천사상》이라는 제목으로 ‘향운 정태혁 박사 논총’을 기획하여 발간하였다. 필자는 이 기념 논총을 발간하기 위해, 그가 발표한 숱한 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기고문과 논문들을 총 24편으로 선별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원론편, 수행편, 응용편으로 분류했다. 이 분류는 바로 교육과 연구에 관한 정태혁의 신념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학들에게 각인된 정태혁의 업적과 삶을 최대한으로 압축하자면, 정태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는 것이 무난하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정태혁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범어와 서장어의 문법서를 저술하였고, 이 어학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불교학과 인도철학의 학문적 기초를 닦아 놓았다. 또 인도철학에서 수행의 공통 기반인 요가를 실천과 학문으로 소개하고 연구함으로써 수행의 정도(正道)를 제시했다.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는 최초로 밀교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 학문의 세계를 현실 세계와 접목하여 종교와 철학의 정신으로 인간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2. 배우며 가르치다
정태혁은 청석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는 것으로 교육자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덕수중학교, 덕수상업고등학교, 용산고등학교, 경동고등학교 등의 교사, 원광대학교의 조교수를 거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의 교수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교육 단계의 전역을 섭렵하면서 ‘배우며 가르치는 교육’을 실천하였다.
정태혁의 ‘배우며 가르치는 교육’은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교사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東京)대학교 석사과정, 오타니(大谷)대학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동국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대만의 문화대학 중화학술원에서 마침내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이처럼 정태혁의 배움은 교사가 된 이래 박사가 되기까지 35여 년간 지속되었지만,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그의 교육적 신조는 정년퇴직할 때까지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여느 교수의 경우에도 연구하는 것은 가르치기 위한 공부의 일환이기는 하다. 그러나 정태혁의 경우에는 가르치기 위해 연구와 공부로써 배우는 습관이 유독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었다. 그가 퇴직할 때까지 함께 지낸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는 가르치기 위해 배우고, 배운 것은 강의 일정대로 온전하게 가르친다는 것을 교육적 신조로 견지한 듯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에는 인도철학과의 다양한 교과목을 소수의 교수들이 담당해야 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강의는 적합한 교재가 없이 이루어지기 일쑤였고, 교수는 매 학기 전공 분야와 일치하지 않는 교과목도 강의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태혁은 새로운 교과목을 담당할 때마다 반드시 강의록을 작성하여 교재로 배포했다.
당시에는 수필(手筆)로 작성한 원고를 다시 초를 먹인 특수 용지에 철필로 써서 등사판으로 인쇄하는 번거롭고 조야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러한 열성과 노력은 그가 국내 최초로 범어와 서장어의 교재(《표준 범어학》 《기초 서장어》)를 출판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는 전혀 생소한 특수 문자를 등사판 인쇄로는 구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수의 학생들을 위해 정식 책자로 출판하게 된 것이다.
정태혁은 강의를 소홀히 한 적도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도 그랬지만, 특히 1970년대의 대학에서는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학사일정대로 온전하게 강의가 이루어지는 학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명의 학생이 출석해 있더라도 정상적으로 꿋꿋하게 강의를 진행했다. 이처럼 ‘배우며 가르치는 교육’의 결과로 출판된 것이 국내 학자의 저작으로는 가장 방대한 인도철학 개론서인 《인도철학》(1984)이다.
정태혁의 교육적 신조와 신념은 대학원 강의에서도 여전했다. 당시 대학원 수업에서 상당수 교수들은 개설된 교과목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전공 주제로 강의를 진행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개설된 교과목과 반드시 합치하는 강의를 준비하여 진행했다. 이 역시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신조, 아는 만큼 가르치면 그 이상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실천한 사례일 것이다.
정태혁은 일선 교사를 거쳐 대학교수이자 학자로서 후학을 양성해 왔다. 그런 만큼 우여곡절의 많은 난관을 겪어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체험을 교육으로 승화하여, 교육적 신조를 고수하면서 그 과정에서 체화된 인품과 위의로써 제자들을 묵언으로 훈화하고 원조했다. 이 덕분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그의 감화를 입은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특히 그는 인도철학 분야에서 제1세대 학자로서는 가장 많은 박사와 교수를 배출하였다.
3. 생각하며 수행하다
정태혁은 1988년 2월 정년퇴직하기까지 출판한 20권보다 더 많은 23권의 저 · 역서를 퇴직 이후에 출판했다. 이 같은 노력과 업적은 한마디로 ‘생각하며 수행하는 학문’의 결과라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교육자이자 학자로서 배우고 생각한 것을 끊임없이 기고문으로 발표해왔으며, 특히 수행과 신행을 교양적 차원에서 심화하는 저술에 주력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해 왔다. 이 사실은 그의 저 · 역서를 분석하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이에 앞서 그가 후학을 위해 개척하거나 개발한 학문적 업적의 특색을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 연구에서 범어와 서장어를 통해 원전에 의거한 해석을 시도했다. 이것이 불교학의 정도이며, 국내 최초로 《표준 범어학》과 《기초 서장어》와 같은 문법서를 출간함으로써 정도의 문을 열었다. 이것은 한문으로 번역된 2차 자료에만 의지하여 불교를 연구하던 종래의 풍토를 일신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써 국내 불교학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작금에 이르러 후학들이 범어와 서장어의 학습을 필수적인 기초 과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의 선구적인 노력의 여파이다.
둘째, 국내의 인도철학 분야를 개척하면서 특히 불교와 인도철학의 비교 연구에 주력하여, 이 같은 학풍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동국대학교에서 인도철학과는 불교의 본토인 인도의 사상적 배경과 연관하여 불교를 이해함으로써 불교학을 진작시키려는 취지에서 창설되었다. 정태혁은 불교학 전공 학자로서 이 같은 학과 창설의 취지를 비교 연구로써 선도적으로 구현하였다. 이 점을 대변하는 논문으로는 〈불교의 삼존불(三尊佛)과 인도교의 삼신(三神)〉(《한국불교학》 제3집, 1977), 〈바가바드기타(Bhagavadgītā)에 있어서의 박티요가(Bhakti-yoga)의 불교적 수용과 정토교(淨土敎)〉(《불교학보》 제22집, 1985), 〈요가의 발전과 불교에의 수용(受用)〉(《인도철학》 제8집, 1992), 저서로는 《법구경과 바가바드기타: 불교와 요가의 향기로운 만남》(2009)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요가를 비롯한 인도문화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밀교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밀교에는 인도문화, 즉 힌두이즘의 요소가 많이 습합되어 있기 때문에, 밀교 연구에는 힌두이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 지식으로 필수적이다. 이로 인해 그간 국내의 불교학계에서는 밀교를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 심도 있게 고찰한 학자가 거의 없었다. 이에 정태혁은 밀교에서 대승불교의 진수를 발견하고, 교학과 신행의 양면에서 밀교의 불교 본래적 의의를 밝혀내는 데 주력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을 일람하면 중관학으로 시작한 그의 불교학적 노선은 밀교 연구로 귀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는 국내 밀교 연구의 개척자로 불릴 수 있다. 이 점을 대변하는 밀교 관련 논문으로는 〈무상유가호마의궤(無上瑜伽護摩儀軌)의 구조와 의의〉(《불교학보》 제16집, 1979)를 비롯한 8편, 저서로는 《밀교》(1981), 《정통 밀교》(1982), 《밀교의 세계》(1996), 《금강대승밀교총설(金剛大乘密敎總說)》(2003)이 있다.
국어 교사로서 문학도였던 정태혁은 불교 잡지 《녹원》 3호(1957. 2)에 〈출가〉라는 기고문을 발표한 것으로 본격적인 집필과 저술 활동을 개시했다. 이후 그가 발표한 기고문들은 논문과 단행본을 포함하여 500여 편에 이른다. 이 중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저 · 역서는 43권이다. 이 43권에서 3분의 2 이상인 32권은 저서이며, 나머지 11권은 역서를 비롯한 기타 서적이다.
총 43권의 저 · 역서를 내용별로 분류해보는 것으로 정태혁의 관심사와 해당 분야의 기여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인도철학 관련은 10권, 불교 관련은 15권, 인도철학과 불교의 양측에서 통용되는 것은 2권이다. 그리고 전체를 학술과 교양이라는 두 성격으로 구분하면 학술서는 12권, 나머지 31권은 교양서에 속한다. 31권의 교양서 중에서는 불교와 인도철학의 수행을 집중적으로 취급하는 서적이 12권이고 나머지의 상당 부분은 불교의 신행을 지도하는 서적이다.
저작의 성격으로 드러나는 정태혁의 학문적 관심사는 단적으로 ‘수행과 신행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관심사를 많은 저 · 역서로써 대중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동시에, 학술적 고찰로써 관심사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가 발표한 25편의 논문은 그 성격에 따라 교학이론, 수행실천, 비교응용이라는 세 분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로써 그의 지향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논문들 중 교학이론은 8편, 수행실천은 11편, 비교응용은 6편이다. 이 중 비교응용은 이론의 실제 적용 및 실천을 지향하므로 실천 분야에 포괄될 수 있다. 이 경우, 그는 이론 분야보다 두 배 이상으로 실천 분야를 연구하는 데 주력한 셈이 된다.
실천 분야에서도 정태혁이 각별하게 주력한 것은 밀교이다. 그의 전체 논문의 약 3분의 1에 상당하는 8편이 밀교 관련 논문이다.
정태혁이 학문적으로 밀교에 주력한 것은, 불교의 수행과 실천이 사실상 밀교에서 정점에 도달했다고 통찰한 불교관에서 기인한다. 그의 이러한 불교관은 논문 〈금강정경(金剛頂經)의 오상성신관(五相成身觀)의 대승적 의의와 실수법(實修法)〉(《동양학》 제21집, 1991)에 천명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21세기를 지향하며 현대를 살고 있는 불교는 21세기를 지향하는 교리에 맞추어서 수행도 하고, 실천도 해야 할 것이다.”라는 한 구절로 자신의 불교관을 집약했다.
이처럼 정태혁의 교육과 학문에서는 수행과 실천이야말로 일관된 키워드이다. 그는 수행과 실천의 마지막 열쇠를 밀교로 제시하였으며, 그가 밀교 연구의 개척자로 불릴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정태혁이 불교에 입문하여 평생 배우며 생각하며 보낸 삶은 결국 수행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 학문과 실천
정태혁의 학문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중도(中道)로 출발하여 밀교로 귀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요가 연구 및 수행은 중도와 밀교의 연결 노선에서 일관되었던 실천 정신의 일환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하기로는 중도와 요가의 연관이 선뜻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요가 수행을 중도 실천에 유익한 것으로 인식한 데에서 정태혁 특유의 학문관과 실천관을 엿볼 수 있다.
정태혁은 요가를 학문적 방면으로 우리나라에 도입한 최초의 공헌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요가를 직접 가르치기도 하고 요가가 심신의 건강에 유익하고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해 오긴 했지만, 자신을 요가 철학자로 표명한 적은 거의 없었다. 반면, 정태혁은 강의실 안팎에서 종종 자신의 전공이 중관학임을 강조하곤 했다. 그의 중관학 관련 논문이 희소한 탓으로, 정태혁이 중관학 전공자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중관학을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으로 천명한 것은, 자신의 불교적 신조 또는 관심사에 기인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술들에서 가장 빈번하게 드러나는 것은 중도를 실천하는 삶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들 중 학자로서 초창기에 발표한 〈월칭조 범문 중론석 관성체품 역주(月稱造 梵文 中論釋 觀聖諦品 譯註)〉(《불교학보》 제9집, 1972)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짐작건대 정태혁의 학문적 정체성과 인생관은 이 논문에서 표명한 인식의 소산인 듯하다.
여기서 정태혁은 시설(施設)과 실상(實相)을 중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시설과 실상을 구현하는 것이 바로 ‘공(空)의 도리’라고 파악했으며, 이 ‘공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밀교라고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밀교의 실천법을 중시한 배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불교산책》에서 “입으로 자기의 서원을 외우고 항상 즐거움 속에서 어떠한 것에도 끌리지 않고 공(空)의 도리에 의해서 처사(處事)하면 스스로 내 몸에 부처님의 인계가 얻어지니 이것이 삼밀성불이 아니고 무엇이랴.”라고 토로하는 것으로, ‘공의 도리’가 밀교 실천의 근간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다. 삼밀성불의 삼밀이 밀교 실천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태혁의 학문 세계에서는 중도와 밀교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여기서 요가는 양자의 실천적 매개체가 된다. 근대 이후 유럽 학자들에 의해 인도학이 성행했을 때에도 인도에서는 밀교에 해당하는 탄트라에 대한 연구가 금기시되었다. 이때 인도 최초로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를 학술 저서로 출판한 다스굽타(Shashi Bhushan Dasgupta)는 “요가의 교의는 인도의 사상 중 다른 어느 학파의 교의와도 비교하거나 대조하는 데 매우 적절하고 큰 이점을 갖고 있다.”라고 단언했다. 정태혁이 8편의 요가 관련 단행본을 출판할 정도로 요가의 역할에 주목하고 이에 대한 연구에 주력한 것도 다스굽타의 이러한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정태혁은 이 같은 ‘중도-요가-밀교’의 삼각관계로 불교의 실천론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논문이 〈밀교의 실천 철학과 요가 수법(修法)의 성취〉(《불교학보》 제19집, 1982)이다. 정태혁은 여기서 중도와 요가와 보리심이 대락(大樂)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동등한 수단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같은 논문에서 중도를 모든 실천의 최상 원리로 확신한다.
그러므로 정태혁에게는 학문적으로 가장 주력하여 연구했던 밀교도 중도의 삶을 추구하는 긍정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이처럼 정태혁의 학문에서 밀교는 곧 중도의 발전이며, 공(空)의 자각에서 이루어지는 긍정적인 실천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러한 실천이 바로 자비행이요, 자비행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실천 철학의 원리가 바로 중도였다.
이상과 같이 정태혁이 초지일관하여 강조하는 중도란 ‘공의 자각’을 현실의 삶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소위 운동권 학생의 현실 참여에 멘토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을 정도로 불교를 현실 지향적인 실천 철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에 투철했던 그에게 실천의 동력을 개발하는 것이 요가와 밀교의 수행법이다. 그러므로 정태혁은 이 둘을 중도의 삶을 추구하는 긍정적인 수단으로 확신하였다.
끝으로 정태혁의 학문과 실천을 다시 일괄하자면, 그는 중관학을 기점으로 밀교를 섭렵하면서 불교의 이념을 수행으로 실천하는 학문과 삶을 견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도를 요가와 밀교의 수행법으로 실천함으로써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같은 정태혁의 노력은 그의 교육과 학문과 삶에 면면히 배어 있었다. 정태혁은 80세에 임박한 만년에 이르러 그간 체득한 중도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내가 내 마음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수행이요, 내 마음과 몸이 내 마음대로 즐겁게 되는 것이 열반이다. 이것이 가장 뛰어난 행복인 것이다. 지금 나는 즐겁고 편안하다. 나의 나이는 알 바가 아니며, 알 필요도 없다. 즐겁고 편안한 지금의 이 마음을 관조하면서 저 찬란하고 화려한 화장 세계에 일체의 불 · 법 · 승과 더불어 즐길 뿐이다.”(《멋지게 살고 멋지게 가는 길》 p.321)
정태혁은 여기서 죽음을 초월한 달관과 관조를 드러낸다. 그에게는 교육과 학문과 삶이 곧 중도를 체득하는 수행이었기에 즐겁고 편안한 관조가 가능했을 것이다.
5. 정진하는 노년의 삶
정태혁의 삶은 종교적 수행으로 얻은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그 지식과 행동을 다시 수행으로 정화해 온 여정이었다. 문학도요 교육자로서 출발했던 정태혁의 인류애적 감성은 학문적 지성과 조화를 이루어, 지적 탐착에 빠지거나 얽매이는 일이 없이, 유연하면서도 정(正)과 사(邪)를 준엄하게 적용하여 경책함으로써 각성을 유도하곤 하였다. 이것이 정태혁에게는 일종의 교육철학이었을 것이다.
정태혁은 정년퇴직 이후 수행과 실천의 지도자로서 각종 단체의 추대를 받았다. 즉 동방불교대학교 학장을 위시하여 한국요가학회, 한국정토학회, 한국요가-아유르베다학회 등의 회장을 역임하고, 한국요가문화협회의 ‘구루’로도 추대되었으며, 사회복지법인 연꽃마을의 노인문제연구소 소장 등도 역임하였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큰 정태혁의 역할과 공헌은 수행의 대중화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인용문으로 소개했듯이, 그가 “21세기를 지향하며 현대를 살고 있는 불교는 21세기를 지향하는 교리에 맞추어서 수행도 하고, 실천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일종의 예언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21세기에 들어선 작금에 이르러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웰빙과 힐링을 추구하면서 요가와 명상과 같은 수행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해(1991)에 출판한 《붓다의 호흡과 명상》에서도 “온갖 사회악이 난무하는 불안 속에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건강과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붓다가 설하신 이 호흡법과 명상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라고 확신했다.
비록 정태혁이 수행의 대중화에 지대한 역할과 공헌을 했다고 하더라도, 후학들이 주목하여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은 그의 불교적 신조와 인생관일 것이다. 정태혁에게 중관학의 요체인 중도는 실천 철학이었다. 그가 후학들에게 당부한 정진은 어떠한 정진일까?
정태혁이 중도의 실천으로 삶을 일관하고자 노력해 온 점을 고려하면, 그가 말하는 정진이란 중도를 바르게 체득하고 자비행으로 실천하는 것임이 분명할 것이다. 그가 《불교산책》에 “배우며 생각하며 수행하며”를 부제로 붙인 것은 바로 정진의 지침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후기를 다음과 같은 독백으로 마무리했다.
인간의 삶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진리의 길을 따라서 배우고 생각하며, 가야 할 곳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 거룩한 순간에 이렇게 살고 있는 이 사실이 얼마나 엄숙하랴.
대지를 굳게 딛고, 눈을 똑바로 뜨고, 곧데 뚜벅뚜벅 걸으면서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고 싶다.
한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속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 있기에 이 숲은 장엄하다.
불교의 이 숲에는 아침 이슬이 영롱하고, 연못에는 연꽃이 웃고 있다.
나는 잠시 멈추고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중얼거린다. 이 길을 따라오라고 …….
여기서 정태혁이 말하는 “불교의 이 숲”에 있는 “이 길”이란 다름 아닌 ‘중도’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후학에게 따라오길 권하는 중도는 단지 학문을 일컫는 것이 아닐 것임도 분명하다. 혹시 그것이 학문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 학문은 실천적인 학문일 것이며, 수행하는 학문일 것이다. 정태혁이 주력했던 요가는 보편적인 수행 수단이며, 밀교는 불교적인 실천 수단이다. ■
정승석
동국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장, 일반대학원장 역임. 주요 논문으로 〈인도 철학에서 자아 개념의 공유와 차별〉 〈유식(唯識)의 이유에 대한 요가 철학의 비판〉 등과 《인도의 이원론과 불교》 《윤회의 자아와 무아》 《인간학 불교》 등의 저서와 《불전해설사전》(편역), 《요가수트라 주석》(역주) 등의 역서 다수. 현재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인도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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