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1 내 안에 있던 게 아닌 외부 조건들과 만나 생긴 것
마음2 조건에 따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
마음3 관성화 된 행동서 벗어나 매순간 변화시키는 것
마음1 내 안에 있던 게 아닌 외부 조건들과 만나 생긴 것 / 이진경 교수
불교적 사유를 요약하는 명제 중 하나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비슷한 의미로 ‘마음’이란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마음과 무관하게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은 불교적 사유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니 마음먹기 달렸다. 그러니 마음 하나 고쳐먹으면 지금 여기가 바로 일승법계요 극락”이라는 말은, 굳이 절 근처에 가지 않아도 종종 듣게 되는 말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지만
마음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마음은 내 안에 있던 게 아닌
외부 조건들과 만나 생긴 것
‘스타워즈’나 ‘매트릭스’ 같은 영화를 보면,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믿고, 그게 불교의 요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음이 분명하다. ‘스타워즈’에서 제다이 기사들을 훈련시키는 마스터 요다는 마음을 집중하면 늪에 빠진 전투기마저 들어 올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말 “일체유심조”다. 정신으로 돌을 드는 연습 중이었건만, 그걸 보고 “믿을 수 없어”라고 하는 루크에게 “그래서 넌 실패한 거야”라고 말한다. 신심이 있고, 그걸 최대치로 집중할 수 있으면 돌도 비행기도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총알을 피하고 고층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는 ‘매트릭스’의 장면들 역시 모든 게 마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결가부좌를 한 채 공중부양을 하는 분들도 있다지만, 직접 본 적이 없거니와 그건 불교수행보다는 서커스에 속한다고 보는 나로선 영화에서 보는 저런 장면을 만화적 공상이라고 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모를 일이다. 그렇게 신심이 없기에, 해보려고도 하지 않기에 안 되는 것인지도.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걸어볼 생각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신통력’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곤 생각하지 않기에 그런 신심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마음에 관한 것이라면, 사실 왕가위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가령 ‘2046’에서 사랑하던 여인과의 이별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차우는 자신에게 다가온 여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전 연인과 같은 이름에 끌려 품어 안았던 도박사 수리첸의 마음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랑하고자 하지만 사랑하지 못한다. ‘동사서독’에서 구양봉 또한 연인이었으나 형수가 된 여인을 잊지 못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해결사’가 되어 불모의 삶을 방황한다. 모용연은 해결사 구양봉에게 동생과의 약속을 어긴 황약사를 죽여 달라하고 모용언은 그런 오빠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지만, 구양봉은 실은 그게 배신당하고도 여전히 사랑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 분열되어 표현된 것임을 알게 된다. 모두들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지만 마음먹은 대로 살긴커녕 자신의 마음조차 어떻게 할 줄 몰라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유심조’하면 흔히 예로 드는, 해골물을 마셨던 원효의 고사도 그렇다. 맘먹기에 따라 해골물도 맛있을 수 있겠지만 해골을 본 이상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안되는 게 문제 아닐까? 내 마음조차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삶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는 내 마음이나 내 맘대로 하자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분들은 부처의 경지에 올라 ‘대자유’를 얻은 분들일 텐데, 그런 분들은 평생을 선방에 앉아 있는 분 가운데서도 극히 희소하지 않은가. 그걸 보면 그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생각도 든다.
지나간 것을 굳이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지나가버려 없고, 지나가는 것 또한 잡지 않으면 지나가는 것이 마음의 ‘실상’이라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오지 않은 것을 구하려 하고, 지나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며, 지나간 것을 잊지 못해 고생한다. 차우나 구양봉은 지나간 것을 잊지 못해 그것을 붙잡고, 아니 그것에 붙잡혀 산다. 모용언은 오지 않은 이를 미워하면서도 붙잡고 싶어 하며 혹시 오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게 중생인 우리의 마음이다. 하여, 그 마음이 만든 방황이 있고 그렇게 고통스레 방황하는 세상이 있고, 그런 세상 속에서 매일매일 결정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삶이 있다. 어쩌면 실상을 깨치지 못한 우리의 실제 삶은 차라리 이 방황하는 마음이 만든 세상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사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분들이 왜 ‘일체유심조’를 말했던 것일까? 그렇게 말했을 때의 ‘마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내 마음조차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다시 되짚어보자. 왜 내 마음이 내 맘대로 되지 않을까? 가령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먹고 싶어지는 건 일종의 ‘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여기서 먹고 싶다는 마음은 정확하게 말하면 음식과 나의 감각기관이 만나면서 일어나는 것이겠지만, 굳이 대비하여 말하자면, 절식해야지 굳게 결심하고 있는 내 마음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음식에 속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고’, 침대에 누우면 자고 싶어지고, 좋아하는 여자를 보면 사랑하고 싶어지고….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 부지중에 어느새 하고 싶어지게 되는 것은 모두 이런 식이다. 음식이 있다고 다 먹고 싶어 하진 않는다고 하겠지만 그 마음조차 내 의지보다는 배부른 내 신체에 속한 것일 게다. 며칠 굶겨도 그럴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싫어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맥클루언의 유명한 명제가 뜻하는 게 바로 이것일 게다. TV나 자동차, 혹은 돈이나 옷 등의 미디어(매개)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립적 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특정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교환을 위해 돈이란 매개물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일단 돈이 나타나면 돈을 벌기 위해 생산하고 교환하게 된다.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라는 명령, 그게 돈의 메시지고, 우리는 대개 그것을 따르게 된다. 그건 우리 마음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는 돈에 속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맘먹는다는 것은 저렇게 내게 주어진 조건을 따라 내 마음 밖에서 오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지’란 없다고 스피노자는 확언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쓴다고 할 때에도, 그것은 그가 읽은 책이나 그가 겪은 어떤 사건, 혹은 사람이 무언가 쓰도록 촉발했기 때문이고, 그런 자극을 표현한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행위조차 신체의 어떤 상태가 그것을 요구한 것에 따른 것이다. 신장이나 방광이 앞장서서 하는 그런 촉발이 없다면 소변기 앞에 서려는 마음이 생겼을 리 없다. 오줌을 누는 것도 내가 맘먹기 이전에 신체나 혀가 맘먹은 것이고, 그 신체에 흡수된 수분이 ‘맘먹은’ 것이다. 내가 내 뜻대로 행위한다고, 즉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믿는 것은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을 모르고 있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할 때, 그 마음은 저렇듯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하는, 내게 다가온 것들에 속한 마음들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하려는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음식에 속한 마음, 침대에 속한 마음, 바퀴에 속한 마음, 방광에 속한 마음 등등이.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들과 내가 만나서 일어나는 게 마음이니, 마음이란 그런 만남의 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장 안에서 일차적인 것은 내 맘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게 아니라 바깥에서부터 내 마음 안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나의 마음이란 그런 것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텅 비어 있는 마당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마음이란 그렇게 밖에서 들어온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게 어디 나뿐이랴! 내가 하는 언행에 화를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는 내 옆에 있는 이들도 그렇다. 내 집에 사는 개미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다. 과자부스러기에 스며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이 개미의 촉수를 부르고, 개미를 쫓아내려는 인간의 마음이 개미의 행적을 숨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 내 마음 바깥에서 들어오는 저 마음들의 연쇄, 그것이 나의 마음을 만들고, 개미의 마음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나나 개미를 특정한 양상으로 행동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유심조’는 연기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연기법의 다른 표현이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일체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내 마음 밖에서 내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그것들에 속한 ‘마음’들이 나를 만들고 모든 것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유심조’는 차라리 내 마음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식의 관념론과 반대되는 방향의 사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마음2 조건에 따라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 / 이진경 교수
일체유심조의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게 다가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속한 마음이다. 음식에 마음이 속한다는 말이나 TV에 마음이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의식’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라고 할 때에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 행동에 의해 내가 만난 무언가에 작용하여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양파와 감자에 작용하여 잘게 자르도록 하고 섞어서 요리를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라면, 마찬가지로 나에게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음이라고 해야 한다. 내가 침을 흘리게 만들고, 내가 생각지 못한 쇼핑을 하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마음이라 해야 한다.
35억년 지속된 생명역사는
외부적 조건에 적응하려는
모든 생명체가 갖는 마음의
기억들이 집적된 결과물
그렇다면 그런 마음들을 관통하는 것을 지칭하는 ‘마음’이란 개념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들을 묶어서 ‘마음’이라는 하나의 말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어떤 것에 작용하여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의 ‘마음’이란 염두에 둔 대상에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야기하는 능력이고, TV의 ‘마음’이란 나나 오바마 대통령이나, 그걸 보고 있는 누군가에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그렇게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을 갖고 있다. 개는 개 나름의 능력을 갖고 있고, 소나무는 소나무 나름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첼로는 첼로 나름의 능력을, 바위나 흙조차 그것 나름의 능력을 갖고 있다.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그리고 생물은 생물대로, 무생물은 무생물대로 모두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큰 것’만 그런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넘어져 무릎이나 팔이 깨져본 이들은 알 것이다. 상처를 조심스럽게만 다루어준다면, 피부가 예전처럼 재생된다는 것을. 그렇게 신체를 재생하는 것은, 단백질을 합성하여 체세포를 만드는 유전자의 작용이다. 즉 유전자의 마음이 깨진 신체를 재생한다. 아니, 그것이 생물의 신체를 만들어낸다. 특정한 아미노산을 찾아 모아서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활동의 최소단위인 코돈들도 마음을 갖고 있고, 자신의 특정한 짝 아니면 결합되길 거부하는 뉴클레오티드들도 마음을 갖고 있다. 우리 신체의 가장 작은 부분들 모두가 마음을 갖고 있다. 작용하여 변화를 산출할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개념을 일반적인 것으로 추상하여 이해한다면, 이제 ‘일체유심조’란 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앞서와 약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어떤 것에 작용하여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칼이나 요리, TV나 자동차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시야가 좁은 것이다. 토끼의 신체는 그것에 작용하여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 풀의 능력이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 인간의 신체는 거기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벼나 콩, 혹은 소나 돼지가 만들어낸 것이다. 풀 위에 내리는 비는 습기 머금은 대기에 작용하여 태양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숲의 나무를 흔드는 바람은 대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든 자연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모든 자연현상을 포괄하는 자연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바로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나의 마음은 어떤가? 이미 앞서 본 것처럼 그것 역시 마음이 만들어낸 것 아닌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만들어내는 능력을 뜻하는 마음이 모든 걸 산출하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능산적(能産的) 마음’이라면, 나의 마음, 개미의 마음 등 각각의 마음은 그것에 의해 산출된 능력이란 점에서 ‘소산적(所産的)인 마음’이다.
각각의 마음은 모두 무언가를 만들어낼 능력을 갖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그것은 어떤 조건에서, 어떤 마음들의 연쇄에 의해 만들어졌는가에 따라 다른 산출능력을 갖는다. 흑인을 노예로 삼으려는 마음들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의 마음과 자유인으로 대하려는 마음과 상대하는 흑인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유전자조차 그러하다는 걸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 9월, 유럽전역에서 퇴각하던 독일군의 거점 중 하나였던 네덜란드 서부의 주요도시에서 독일군에 저항하는 철도파업이 일어나고 빨치산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보복하기 위해 독일군은 식량봉쇄조치를 취한다. 1945년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된 이 봉쇄조치로 2만2000명이 굶어죽었다. 식량봉쇄에 따른 기근은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론 그 사이 엄마의 자궁에 있던 태아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인상적인 것은 임신 초부터 기근의 영향을 받은 아기들은 예상과 달리 평균보다 몸집이 컸으며, 이후 평균의 2배 정도가 비만한 신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후성유전’이라고 설명되는 이 현상은, 임신 시의 기근에 반응하여 유입된 영양소를 저장하는 유전자가 최대한 활성화되었기에 발생한 것이다. 기근을 만들어낸 마음들이 최소식량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최대한을 흡수하여 저장하는 유전자들의 ‘마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우리의 유전자는 35억년 생명체의 역사 속에서 생존에 유리했던 것들이 집적된 것이다. 빛과 이산화탄소만 있으면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엽록체의 ‘마음’은, 서로 먹고 먹히는 만남 속에서 박테리아들의 ‘마음’들이, 그들의 생존조건이 된 물이나 대기에 속하는 ‘마음’들이 뜻하지 않게(!) 만들어낸 것이다. 정교하게 작동하는 우리의 눈은 빛에 반응하는 박테리아를 기원으로 하는 세포들에 의해, 빛을 조건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광수용체에게 ‘손을 내미는’ 빛이 사라지면, 빛을 보려는 마음도, 신체적 능력도 사라진다는 것을 두더지의 퇴화된 눈은 잘 보여준다. 그런 유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움직여지는 우리의 신체, 우리의 마음은 35억년 생명의 역사가 만들어온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마음’이라고 부르는 나의 마음, 너의 마음은, 이런 점에서 보면 모두 35억 년 간 생명의 역사라고 불리는 연기적 조건이 기억되고 집적된 것이며, 그런 외부적 조건이 내부화된 것이다. 나에게 작용하는 모든 마음들이 응집되어 내부화된 것이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그 외부적 조건이 생명체의 마음속으로 접혀 들어가며 만들어진 ‘주름’, 그것이 나의 신체요 나의 마음이다. 만나는 조건마다, 만나는 마음들에 따라 모두 다르게 접혀 들어가며 만들어진 주름, 그것이 ‘소산’으로서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 개미의 마음이고, 내 눈의 마음, 내 유전자의 마음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마음3 관성화 된 행동서 벗어나 매순간 변화시키는 것 / 이진경
외부에서 다가왔던 것은 지나가거나 물러서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부화된 것은 그것이 지나간 뒤에도 남으며, 물러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마음들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기록하여 두며,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기근을 겪은 태아의 유전자가 기근을 예상하여 최대치로 영양소를 흡수하고 집적하는 능력을 가동시키고, 그런 식으로 살아남으려는 마음을 신체에 담아 지속시키듯이. 빛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듯이. 이는 ‘마음’이란 말로 표현되는, 신체를 움직여 반응하며 작용을 하고 변화를 만드는 능력에 안정성과 지속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달라진 조건에 부적절하게 대처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궁핍을 경험한 이가 궁핍에 대비하는데 현재의 삶을, 아니 미래의 삶조차 귀속시켜버리고, 성공을 경험한 이가 그 성공에 안주하여 다른 삶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것이 심해지면 과거의 경험에 고착되어 증상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병적인 마음이 되기도 한다. 생존을 지속하려는 마음이 과거의 어떤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작용능력을 고정하고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내부화된 마음이 변화된 조건에서 분리된 삶을, 마음의 작용을 유지하고 지속해간다. 생명체의 마음이 종종 물리적 물체만큼이나 관성적·타성적 성향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의미는
패턴화 된 행을 따르는게 아닌
외부의 연기적 조건에 반응해
관성 힘을 넘어서게 하는 마음
바깥에서 다가와 내 마음 속에 들어왔던 것들을 ‘나의 것’으로 내부화한 것이 나의 마음이다. 하여,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다가온 외부에 내부화된 방식으로 반응하며 작용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일종의 ‘조건반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양한 종류의 습관이나 기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대단히 불확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같은 음반에 녹음된 동일한 음악이지만, 어떤 때는 몰두하여 감동하며 듣게 되고 어떤 때는 귀에 겉도는 소리로 듣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같은 봉투에서 나온 똑같은 차(茶)이건만 어떤 때는 맛있다고 반응하고 어떤 때는 맛없다고 반응하는 게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란 이런저런 양상으로 내부화되고 ‘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는 어떤 자성도 없는 것이기에 이런 것이다. 그것은 연기적 조건과 함께 다가온 마음에 반응하여 작용을 만들어낼 능력일 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애초에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계나 사물 또한 다르지 않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복사점 주인 양반은, 주인 발소리만 들으면 고장 났다던 복사기가 멀쩡하게 작동한다는 얘기를 농반진반 해준 적이 있다. 컴퓨터를 많이 사용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컴퓨터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반응하지 않으며, 항상 똑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공지능’을 제거한 채 센서로 감지되는 사물에 어떻게 반응할지만을 사전에 프로그래밍한 로드니 브룩스의 로봇들은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행동패턴들을 만들어낸다. 흔히 ‘창발’이라고 부르는 이런 현상은 자연계에도 존재한다.
이런 미결정성과 불확정성의 폭이 커서, 지나간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능력이 과거의 패턴을 벗어날 가능성을 가진 것들에 대해 우리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마음이 가진 미결정성의 정도가 내부화된 것에 따른 관성적인 반응을 벗어나는 크기를 가질 때, 내부화된 주름은 예상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만난 조건에 대응하며 다른 주름들을 만들면서 펼쳐지는 그런 작용의 양상이 그때 나타나게 된다. 상이한 기억들 가운데서 좀 더 나은 작용의 양상을 찾아내는 학습능력이나, 기억된 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창안의 능력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마음에 속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만나게 되는 것들에 대처하여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은 고양될 수 있다. 관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와 행동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능력은 이로부터 나온다 할 것이다.
수행(修行)이란 행(行)을 닦는다(修)는 말이다. 행이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35억년의 역사를 갖는 과거의 ‘숙업’이 쌓여 만들어진 능력이고, 일상적인 생존을 위해 신체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습관적인 의지들이며, 자신이 만났던 과거의 경험이 내부화되어 만들어진 마음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관성적·타성적인 성향을 갖는다. 하던 대로 하려는 성향, 하던 것을 계속하려는 성향이 그것이다. 그 관성적인 성향만을 갖고 있다면, 인간이든 생명이든 관성적인 힘에 의해 운동하는 사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생명’이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은 그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릴 수 있을 때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미결정성의 힘을 가동시켜 관성적인 선에서 벗어나는 선(이를 에피쿠로스는 ‘편위선(clinamen)’이라고 명명하고, 들뢰즈는 ‘탈주선’이라고 명명한다)을 그릴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그 마음 안에 형성된다. ‘행을-닦는다’ 함은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을 증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조 스님의 유명한 화두 덕분인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곧 부처고, 모두가 그런 마음이 있다는 점에서 부처라는 말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고 음식을 보면 어느새 손을 내미는 나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이지 부처의 마음이 아니다. 정해진 성향에 따라 패턴화된 행(行)을 반복하게 하는 그 마음은, 아무리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들이대도, 부처 아닌 중생의 마음일 뿐이다. 그건 부처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도 아니다. 마음이란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갖는 작용의 능력이고,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작용하고 손을 내미는 그 마음을 부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연기법의 작용 자체, 혹은 연기법에 따라 작용하는 자연 자체가 바로 그 부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법신불’이라고 하는 부처가 바로 이를 뜻하는 게 아닐까?
부처라는 말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어떤 ‘인격’을 떠올리는 이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런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해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때마다 적절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부여된 이름이 부처라고. 어떤 결정성도 갖지 않기에 어떤 연기적 조건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자체에, 앞서 능산적인 능력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했던 그런 능력에 붙인 이름이 부처인 거라고. 애초에 모든 마음이 그렇기에, 비록 내부화돼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관성적인 그런 마음의 작용을 넘어,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이 바로 부처라고.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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