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 태자가 성장한 곳은 어디인가

수선님 2022. 2. 27. 13:04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3>

피프라흐와인가, 틸라우라코트인가



 

저 히말라야 산밑에
정직한 한 민족이 살고있다.
그들은 태양의 후예이며,
석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빈비사라왕이여 나는 그 가문에서 태어났다.
 <수타니파타>

<인도 피프라흐와 유적>사진설명: 인도측은 여기에서 싯다르타가 태어나 성장했다고 주장한다.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난 싯다르타는 카필라바스투성으로 옮겨져 무럭무럭 자라났다.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아시타 선인의 예언처럼 별다른 장애없이 성장했다. 7살 때 비슈바미트라를 스승으로 초빙해 학문을 익히는 등 카필라바스투에서 싯다르타는 유복한 유년시절과 꿈많은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뛰어다녔을 카필라바스투의 정확한 소재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출생지·성도지·초전법륜지·열반지 등 부처님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 거의 다 발견됐음에도, 유년·청년시절을 보낸 카필라바스투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그나마 적지않은 고고학자들의 노력 결과 네팔측은 '틸라우라코트'를, 인도측은 '피프라흐와·간와리야'를 각각 카필라바스투라고 주장한다.


"성장한 곳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변환경은 그러나 한 인간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자라난 곳의 사회적·정치적 환경이 성장기의 청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카필라바스투 소재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네팔이 카필라바스투라고 주장하는 틸라우라코트는 1899년 인도 고고학국의 무케르지에 의해 처음 발굴됐다. 무케르지가 이곳을 카필라바스투라고 비정한 것은 퓨러박사의 아쇼카 석주 발견 덕분이다. <대당서역기>(사무엘 빌이 1884년 영역) 등의 자료를 토대로 인도 고고학국의 퓨러박사가 1895년 3월 틸라우라코트 동남쪽 3km 지점에 있는, 니갈리하와 마을 근방의 '니갈리 사가르' 못가에서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를 발견했고, 이듬해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를 찾아냈다.


이것들을 근거로 1899년 인도 고고학자 무케르지는 틸라우라코트 근방을 발굴했지만, 틸라우라코트가 카필라바스투임을 입증한 확실한 단서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후 네팔 정부가 1966년부터 1971년에 걸쳐 틸라우라코트 유적의 서쪽 성벽을 발굴했고, 1967년부터 일본 잇쇼(立正)대학 고고학 조사단이 사업에 참여했다. 발굴 결과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됐고, 유물들은 지금 틸라우라코트 입구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추가발굴에서도 틸라우라코트가 '카필라바스투' 임을 입증할 명문이 새겨진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2002년 3월19일 서서히 달아오르는 대지의 열기(熱氣)를 뚫고, 네팔 룸비니 근처의 대성석가사(주지 법신스님)에서 틸라우라코트로 출발했다. 허름한 민가(民家) 옆으로 난 길을 지나 틸라우라코트 입구에 도착하니, 유적지 주변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서문(西門)을 열고 유적지 들어서자, 관리인이 따라 붙었다. 유적지 곳곳엔 몇 아름씩 되는 고목(古木)들이 즐비했고, 햇빛을 가리는 수림(樹林) 덕분에 유적지에서는 '따가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관리인의 설명에 의하면 틸라우라코트 유적은 동서로 약 400m, 남북으로 약 500m 규모. 서문과 동문(東門) 사이에 궁성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는데, 그곳엔 특히 큰 나무들이 즐비하다. 궁성터에 앉아 몇 아름씩 되는 고목을 보고 있으니 - 이곳이 고고학적으로 카필라바스투임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 그 옛날 여기서 뛰놀던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이 환영처럼 어른거렸다. 룸비니에서 옮겨지는 장면, 어머니가 죽은 줄 모르고 보채는 모습, 성장해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는 장면, 석가족의 다른 청년들과 기예(技藝)를 다투는 모습 등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궁성터와 동문 사이에 난 길을 따라 북쪽으로 400m 정도 가면 두 기(基)의 큰 스투파 터가 있다. 큰 것은 지름이 15.6m, 작은 것은 7.8m. 스투파에서 북쪽으로 조금 나가면 반강가 강(江)이 동북쪽에서 서북쪽으로 굽이쳐 흐른다. 이처럼 네팔측 카필라바스투는 상당히 풍요로운 곳이다. 넓디넓은 평야, 건기에도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반강가강 등을 보노라면 '슛도다나'(싯다르타 아버지)가 왜 '깨끗한 쌀의 왕'(淨飯王)이라는 뜻을 가지게 됐는지를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피프라흐와에서 출토된 부처님 사리병>사진설명: 부처님 사리병이라는 명문이 적혀있다.

틸라우라코트에서는 '카필라바스투' 명문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인도측이 주장하는 '피프라흐와·간와리야'에서는 '카필라바스투' 글자가 새겨진 사리용기·유물이 발견됐다.

 


북 인도의 광대한 평야에 둘러싸인 피프라흐와는 벽돌로 쌓아 올린 거대한 스투파를 중심으로, 주위에 승방(僧房)이 줄지어 서있는 형태. 룸비니 서남쪽 14.5km, 틸라우라코트 남동쪽 25km 지점에 있는 피프라흐와가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898년. 이 지방의 지주였던 영국인 펩페는 빈센트 스미스의 지적에 따라 기단부 직경 35m, 높이 6.5m나 되는 거대한 스투파를 발굴했다.


정상으로부터 약 3m 아래 지점에서 사리용기가 하나 발견됐고, 정상에서 5.4m 아래쪽에 사암으로 만든 큰 석관(石棺)이 있었다. 높이 15cm, 직경 10cm 크기의 사리용기 4개가 석관에 들어있었다. 5개의 사리용기(현재 꼴까타 인도박물관 소장) 가운데 뚜껑 표면에 브라흐미 문자가 새겨진 사리용기가 특히 고고학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것은 샤카족의 붓다인 세존의 사리병으로 명예로운 형제·자매·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로 명문이 해독됐기 때문이다. 영국의 동양학자 프리트처럼 "세존의 친족인 샤카족의 유골"로 읽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어찌됐던, 인도 학자들은 명문을 근거로 "피프라흐와 스투파는 <대반열반경> 기록대로 부처님 입적 후 석가족이 사리의 1/8을 얻어 세웠다는 그 탑"이라고 주장했다.


1970년 이곳에서 다시 중요한 유물이 발견됐다. 중앙 스투파 동쪽 승원 유적에서 40여 점의 테라코트제 표식과 항아리 뚜껑이 나왔는데, 테라코트 가운데 한 개에 "이 정사는 데바푸트라가 카필라바스투 비구 승가에 기증하는 것이다"는 명문, 항아리 뚜껑 뒷면에 "카필라바스투"로 해석되는 글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데바푸트라'가 2세기 중반 북인도를 통치했던 쿠샨왕조의 호불왕 카니쉬카왕(A.D 144∼170)으로 파악한다. 명문을 근거로 인도 학자들은 이곳이 카필라바스투라고 확신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법현·현장스님이 보았다는 성터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인도발굴단은 근방을 샅샅이 뒤졌다. 카필라바스투 성터를 찾기 위해. 결국 1975년 피프라흐와 서남쪽 1km 지점에서 거대한 건축물의 기초를 발견했다. 간와리야 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간와리야 유적을 발굴한 인도 발굴단장 쉬리바스타바는 "고대의 유물과 건축물의 구조로 보아 이것이 석가족 족장이고 샤카무니의 아버지엿던 슛도다나왕이 거주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발표했고, 적지않은 학자들도 이 주장에 동조했다. 쉬리바스타바는 1996년 인도 고고학국이 펴낸 <피프라흐와·간와리야 발굴보고서(Excavations at Piprahwa and Ganwaria)>에서 자신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명문화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카필라바스투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코나카무니(과거 칠불 가운데 다섯 번째 부처님)부처님의 스투파가 카필라바스투 근방에 있다고 법현·현장스님은 지적했는데, 피프라흐와 근방에는 탑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틸라우라코트 근방에 '코나카무니 아쇼카 석주'(니갈리 사가르)가 발굴됐기에, 코나카무니 스투파는 틸라우라코트 근방에 있었다는 것이 틀림없다"(전 동국대교수 호진스님)는 점이다.


다음으로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카필라바스투 왕궁을 둘러싼 14∼15리의 견고한 성(城)의 기초가 현장스님이 방문할 당시에도 있었다."는데, 피프라흐와 주변에는 성터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특히 <불국기>·<대당서역기> 등은 카필라바스투 주변의 여러 유적을 언급하고 있지만, 핍페가 발굴한 피프라흐와 중앙 스투파에 대한 설명은 없다. 때문에 '피프라흐와·간와리야'가 카필라바스투라고 확정짓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 것이 사실이다.


2002년 3월18일 인도 대지에 내리쬐는 땡볕을 받으며, 피프라흐와·간와리야에 도착했다. 유적지 주변의 논·밭에는 밀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사진으로만 보다 막상 직접 보니 스투파는 과연 엄청나게 컸다. 스투파 주변 승원(僧院)에는 승방(僧房)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었고, 궁성 터로 추정되는 간와리야 유적에도 방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피프라흐와 승원 유적보다 간와리야 유적의 벽돌이 높게 쌓였다는 점이 달랐다. 과연 어느 곳이 진짜 카필라바스투일까. 싯다르타가 청춘을 불사르고, 인생의 무게를 느끼며 고뇌했을 카필라바스투는 어디일까. '틸라우라코트'인가, 아니면 '피프라흐와·간와리야'인가.

<틸라우라코트, 피르라흐와 일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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