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제2강 인도의 자연환경
막스 뮬러(Max Müller, 1823-1900)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휴스턴 스미스(Huston Smith)는 “영국만 아는 사람이 영국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알겠는가?”[Huston Smith, The Word's Religions, New York: HarperOne, 1991, p.1, “What do they know of England, who only England know?”]라고 반문했다. 다른 종교를 알지 못하면 자신의 종교도 알지 못한다는 역설법이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만 아는 사람은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좌불교도들은 대승불교를 모르고, 대승불교도들은 상좌불교를 모른다. 상좌불교도들은 대승불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승려가 받은 구족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대승불교도들도 상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해 버린다. 이처럼 어느 한쪽 불교만 아는 사람은 불교의 다양한 양상과 다양한 철학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불교는 단일한 체계가 아니다. 불교는 이단(異端)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입멸 후 100년경부터 교리와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부파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부파불교는 일천년 간 지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진보적인 부파교단의 출가자와 재가지를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 성립된 대승불교는 중국으로 전해져 중국식 종파불교로 발전했다. 급기야 기존의 불교교리를 모두 부정하는 선불교(禪佛敎)가 중국에서 나타났다. 한국불교는 중국화 된 불교의 영향을 직접 받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예전에는 한문으로 전해진 경전이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정보와 통신의 발달로 다른 나라의 불교와 한문대장경 외에 빨리 삼장은 물론 범본이나 티벳대장경까지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정보 덕분에 과거보다는 불교도들의 시각이 넓어졌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의 불교도들은 이처럼 변화된 정보를 접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식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출가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율장과 불교교단사를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출가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되고, 불교교단에 대한 역사를 알아야 현재 어떻게 수행하고 포교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재가자는 인도불교사나 불교사상사 등을 공부해야 불교가 어떻게 성립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불교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불교의 극히 일부만을 가지고 불교의 전부인양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꼴이 되고 만다.
붓다의 가르침인 불교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시대 인도의 종교와 사상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왜 그러한 가르침을 설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상적 배경은 물론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붓다교설의 참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종교도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이다.
만일 석가모니 부처님이 유럽이나 미국에 태어났다면, 지금과 같은 불교교단의 제도나 계율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제자들을 빌딩 숲속의 노숙자로 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사의법(四依法: 걸식, 분소의, 수하좌, 진기약)에 의한 생활은 기원전 6세기 인도라는 사회에서는 가능했다. 그러나 이 사의법은 나중에 인도에서도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용도 폐기되다시피 했다. 지금은 구족계를 받을 때 이런 것도 있다는 식으로 한번 알려줄 뿐 유명무실해졌다.
만일 부처님이 티베트나 몽골 등 극한 지방에 태어났다면, 제자들에게 맨발로 삼의일발(三衣一鉢)에 의지해 수행하라고 제도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1년 중 6개월이 겨울인 티베트나 러시아에서 죽지 않고 생존하려면 두꺼운 털모자는 물론 장갑과 목도리 신발,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내피와 외피 등 수많은 보호 장구들이 필요하게 된다. 구족계 250계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필요 없는 조항들이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는 그 역사적 배경, 즉 자연환경과 사회환경 속에서만 이해 가능한 것이다. 종교라고 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가 탄생한 지역의 역사적 배경, 특히 자연환경과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교의 개조(開祖)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우선 그가 살았던 당시 인도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그 당사자가 살았던 자연 환경과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역사적 배경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붓다의 생애와 그 역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붓다 시대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사상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은 곧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종교는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붓다 시대의 인도와 인도 문명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붓다의 생애와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인디아(India, 印度)라는 말은 본래 대수(大水), 대해(大海), 대하(大河) 또는 인더스강(Indus)을 뜻하는 산스크리트(Sanskrit, 梵語) ‘신두(Sindhu)’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신두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힌두(Hindhu)로 변하고, 다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인더스(Indus)로 바뀌고, 인더스에서 현재의 인디아(India)라는 영어가 파생됐다.[원의범, 『인도철학사상』(서울: 집문당, 1977), p.11, p.81, p.361] 하지만 인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인디아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본래 산스크리트나 힌디어로 된 인도의 호칭인 ‘바라뜨-칸다(Bhārat-khaṇḍa)’ 또는 ‘바라뜨-와르샤(Bhārat-vaṛsa)’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영원히 번영하는 사람들’ 또는 ‘영원히 번영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 명칭은 바라따(Bhārata)족의 서사시 ?마하바라따(Mahābhārata)?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자이나교의 성전(聖典)에서도 사용됐다. 일찍이 리그베다(Ṛgveda) 시대에 갠지스(Gaṅgā)강 상류의 광활한 지역을 통일하여 성세를 이룬 전설적인 바라따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에서 바라본 인도 아대륙의 모습
인도는 히말라야(Himālaya) 산계(山系)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로서 그 면적은 서유럽의 전 지역에 필적하는 약450만 제곱킬로미터이며, 현재는 인도공화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등으로 나뉘어졌다. 인도의 북쪽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산계(山系)와 힌두쿠쉬(Hindukush) 산맥(山脈)을 경계로 아시아 대륙과 구분된다. 동서는 그 지맥(支脈)인 아라칸 산맥과 술라이만 산맥으로 구분되며, 남쪽으로는 코모린 곶(Comorin cape)을 꼭지점으로 하는 광활한 역삼각형의 모양으로 펼쳐져 인도양(印度洋)에 돌출되어 있다.
아라칸 산맥(Arakan Mts.)은 미얀마의 서부 아라칸 지방에서 인도의 북동부에 위치한 아삼 지방에 이르는 습곡 산맥을 말한다. 길이는 950킬로미터에 이르고 최고봉은 3,094미터인 빅토리아산이다. 연안에는 치타공, 시트웨 등의 도시가 있다.
술라이만 산맥(Sulaiman Range)은 파키스탄 북부에 있는 산맥으로 길이는 약 450킬로미터이다. 펀자브와 신드 등 인더스강 유역의 저지대와 발루치스탄 산지를 갈라놓은 큰 산맥이다. 기후가 건조하지만 소나무, 떡갈나무, 올리브가 자라며 소수의 발루치스탄 민족이 농업과 목축에 종사한다.
또한 인도는 그 지리적 특색에 따라 ①히말라야 지역, ②힌두스탄(Hindustan) 평원(平原), ③인도반도 또는 데칸(Decan)고원 지역 등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분류 외에도 인도를 ①인더스강 유역, ②갠지스강 유역, ③빈드야산맥 이남 지역 등 세 지역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인도의 국토는 광활하기 때문에 기후도 매우 다양하다. 남쪽은 북위 8도에서 북쪽은 37도까지 이르러, 대부분은 아열대(亞熱帶)에 속하나, 그 기후는 몬순(moon soon, 계절풍)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고, 하천(河川)의 수량도 연중 크게 변화한다. 또 몬순의 도래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뭄바이(Mumbai)[1995년 11월에 봄베이(Bombay)를 뭄바이(Mumbai)로 개칭했다.]가 며칠씩 큰비로 시달려도 델리(Delhi)는 건조한 날이 계속된다. 강수량도 아삼(Assam)의 실롱 구릉(丘陵)이 세계에서 최대량을 기록하는 데 반하여 라자스탄(Rājasthān)의 서부에는 사막이 전개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 환경의 차이는 곧 생활 문화의 차이로 연결된다. 아직도 원시림이 남아 있는 히말라야 산록의 계곡이나 분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더위가 극심한 평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같을 수 없다. 라자스탄의 모래 먼지와 열풍이 몰아치는 지방과 벵갈(Bengal)이나 아삼(Assam)처럼 다습한 지방과는 자연의 모습도 사람들의 의식주나 기질도 전혀 다르다. 데칸고원 지대에는 그 나름의 정신적 문화적인 풍토가 존재한다. 다양한 인도의 자연은 참으로 다양한 생활 문화를 산출하며, 거기에 인종이나 언어 상황마저 결부되게 되면 그 다양성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에서 다양한 인도의 종교와 철학들이 발생했다.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 중에서 유물론(Cāravāka)을 제외하고 인간이 당면한 실존적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기 위함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불교의 사상체계는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두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전개과정을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전개과정을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한다.
인도의 육파철학 가운데 상캬(Sāṃkhya, 數論)와 요가(Yoga, 瑜伽)철학의 사상체계도 두 가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불교와 상캬․요가철학의 사상체계가 유전과 환멸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불교와 요가철학은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점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상캬와 요가철학에서는 뿌루샤(puruṣa)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만, 불교에서는 뿌루샤와 같은 불생불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의 緣起說(paṭiccasamuppāda)과 상캬의 전변설(轉變說, pariṇāmavāda), 인중유과론(因中有果說, sāktāryavāda)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인도의 정통철학에서 말하는 불변하는 아뜨만(ātman)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불교와 힌두교는 하나가 되어 버린다. 실제로 인도에서 불교가 유아론(有我論)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힌두교 속에 습합되어 버렸던 것이다. 사실 불교의 외형적인 제도나 문화 따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붓다께서 강조한 무아론을 유아론으로 잘못 받아들이면 불교는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이 점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 《한국불교》제672호 2018년 2월 5일 6면 ―
마성 스님 약력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취득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에서 <삼법인설의 기원과 전개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 외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5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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