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744p 가격 33,000 원
2020년 11월 초 서점에 공급합니다
이번 증보판은 편집체제를 완전히 바꾸어
각주 형식 체제로 하였고
주석 항목을 늘렸으며
아래의 역자보충을 더하였습니다
| 역자보충 3 |
‘물질세간 물질의 형성’, ‘중생세계 생명의 형성 원인’ 이 두 절(節)의 문장은 그 내용이 대단히 난해하므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인터넷상의 저자의 ‘능엄경 강좌’ 제23, 24, 25집에서 뽑아 번역하여 보충합니다.
능엄경이 제기한 문제는 바로 아난이 제기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어떻게 지(止)를 닦고 정(定)을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명심견성(明心見性)하고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가?’입니다. 여기 이전에서는 부처님과 아난이 논변하기를, ‘어떠한 것이 명심견성인가? 마음은 무엇인가? 이른바 능히 보는 성[能見之性]은 어떠한 것인가?’를 논변하였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주만유 생명의 본체 문제를 토론하였는데, 이 본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명사로 바로 심성(心性)이므로, 심성 문제입니다. 이 심성 문제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중점인데, 부처님은 우리에게 일러주시기를, “본래의 마음[本心]은 매우 크니 스스로 이 몸과 마음, 우리들 현재의 생명인 이 심신에 있어서, 큰 것을 도리어 작은 것으로 여기고,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여기지 말라. 본래 있는 자성은 대단히 위대한 것이니 현재 가지고 있는[現有] 이 생명을 그런 작은 범위에 축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한 뒤 이제는 부루나가 제기한 문제, 다시 말해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미 우리들의 본래 있는 자성이 ‘본연청정(本然淸淨)’, 본래 청정하며 ‘주변법계(周邊法界)’, 법계에 두루 있어 있지 않는 곳이 없다, ‘묘명(妙明)’, 본래 묘(妙)하고―미묘하여 불가사의하고, ‘명(明)’―명백(明白)하고 광명(光明)하며, 청정(淸淨)하다’라고 하셨는데, 왜 이 물질세계와 우리의 이 생명이 있게 되었습니까? 자성이 본래 원명(圓明)하고 청정한데, 왜 이 물리세계 만유의 현상과 우리들 이런 개별적인 생명들이 생겨나올 수 있습니까?”라는 문제인데, 이제부터의 답변은 이 문제에 대한 것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앞의 3권까지는 본체 문제입니다. 그런데 본체는 어디에 있을까요? 결코 우리의 심신 밖으로 떠나지 않아서, 안[內]과 밖[外] 중간(中間) 모두 다 ‘이다’ 아닌 곳이 없습니다[無所不是]. 칠처징심(七處徵心)에서 부처님은 모두 ‘아니다[不是]’라고 말씀하셨고, 팔환변견(八還辨見)에서도 모두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최후의 부처님의 결론은 그 모두가 다 ‘이다[是]’이며, ‘이다도 없고 아니다도 없다[無是不非]’였습니다. 이제 이 문제에 답변하시니 특별히 주의하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원문을 중복하겠습니다. 부처님은 답변을 시작하십니다.
“불언(佛言), 부루나(富樓那), 여여소언(如汝所言),” “네가 방금 제기하여 묻는 말 대로, “청정본연(清淨本然)”, 자성 자체는 본래 청정하다.”
주의하기 바랍니다, ‘본연(本然)’은 바로 본래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주의하기 바랍니다, ‘본연’, 본래 바로 그러한 모습이어서, 자성은 바로 본래 그러합니다. 본래 청정하니 따로 하나의 청정을 구하지 않으며, 우리는 현재에도 청정합니다. ‘본연청정’, 본래 그러하여 청정합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으로, 우리의 이 심성 자체는 본래 청정합니다. 중문의 고문은 문자를 도치(倒置)하는 문화여서 ‘청정본연’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방금 나에게 묻기를, 자성이 본래 청정한 바에야, “운하홀생산하대지(云何忽生山河大地)?”, 왜 우주만유, 물리세계와 우리들 개체 생명의 그렇게 많은 차별들이 존재합니까?”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 말 이 두 마디를 중복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여상불문여래선설(汝常不聞如來宣說)?”, 다음 여덟 글자에 주의하기 바랍니다.“성각묘명(性覺妙明), 본각명묘(本覺明妙)”,
이 여덟 글자에 특별히 주의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능엄경을 연구함에 있어, 이것은 ‘제일의(第一義) 형이상의 본체로부터 어떻게 형이하의 우주만유가 생겨나고 정신세계와 물리세계 그리고 우리 생명이 어떻게 오는 것인가?’인데, 이것은 하나의 큰 문제입니다. 제1권부터 제3권까지는 모두 형이상의 본체를 말했습니다. 형이상의 본체가 어떻게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여기에 있는 여덟 글자가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루나여 너는 내가 말한 적이 있는 것을 늘 듣지 않았느냐? 부처가 말한 ‘성각묘명(性覺妙明), 본각명묘(本覺明妙)’”, 이 여덟 글자의 두 마디 말이 중점인데, 능엄경 여기에서의 중점입니다. 원문에 부처님이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너는 내가 ‘성각묘명, 본각명묘’를 말하는 것을 늘 듣지 않느냐?”
“부루나언(富樓那言), 유연(唯然).”
부루나가 ‘유연’!이라고 답합니다. ‘유연’은 현재 중문으로 두 글자의 번역인데 실제로는 진정으로 ‘유(唯)’라고 읽어야 마땅합니다. ‘유’는 현재 우리가 말하는 예! 이고, ‘연(然)’은 그렇다 입니다. “너는 내가 ‘성각묘명(性覺妙明), 본각명묘(本覺明妙)’를 말하는 것을 늘 듣지 않느냐? 너는 아직 기억하느냐?” 부루나가 말합니다, “‘유연’,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가지 의미를 중문으로 하나로 합하면 ‘유연’인데, ‘그렇습니다’로서 바로 대답하는 말입니다.
“세존(世尊)”, 그가 말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아상문불선설사의(我常聞佛宣說斯義)”, 맞습니다. 저는 당신이 설법하시면서 바로 그렇게 강연하는 것을 늘 들었습니다.”
무엇을 강연했을까요? ‘성각묘명(性覺妙明), 본각명묘(本覺明妙)’인데, 이 중문의 네 글자를 만지작거리면서 묘(妙)ㆍ명(明)ㆍ성(性)ㆍ각(覺), 네 글자를 이리 저리 거꾸로 놓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나라의 대유(大儒) 고정림(顧亭林)이 말하기를, “불학은 연구할 수 없다. 두 개의 물통이 한 통에는 물이 있고 한 통은 비어있는 것이어서, 이 통에 쏟아 부었다 다시 저 통에 쏟아 부어 넣으니 바로 이 한 통의 물이다.”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는 이런 경전 같은 것은 그런 모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성각묘명, 본각명묘,’ 어떻게 묘할까요? 막명기묘(莫名其妙)라고 하는데, 다시 네 글자를 더해서 이런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 여덟 글자에 대해서 부처님은 제3권 이전에서, 능엄경은 칠처징심과 팔환변견으로 시작하여 형이상 자체를 줄곧 설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른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서 비밀이 없습니다. 그러나 최대의 비밀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루나여, 나는 늘 ‘성각묘명(性覺妙明)’을 말한다.” 우리의 이 자성은 본래 또렷한 것이며 본래에 바로 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성은 본래에 깨달았으며[覺悟] 미혹한[迷] 적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미혹하지 않아서 온갖 중생은 자성이 본래 각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묘합니다. 묘는 어디까지나 묘이며, 묘는 묘해서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유(有)’도 묘의 작용이고 ‘공(空)’ 또한 묘의 작용입니다. ‘공’도 묘공(妙空)이고 ‘유’도 묘유(妙有)입니다. 어떻게 비워버릴 수 있을까요? 대단히 묘합니다. 어떻게 ‘유’가 생겨나오는 것일까요? 대단히 묘합니다. 묘는 어디까지나 묘이기 때문에 ‘성각묘명(性覺妙明)’, 본래 명백하여 흐릿하지 않으며, 또한 광명한 것입니다. 물리세계에서는 광명하고, 정신세계에서 명(明)은 바로 명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禪)을 닦거나, 불법을 학습하거나, 현교를 닦거나, 밀종을 닦으면서, 당신이 정좌하는 중에 광명을 보는 경우, 이 광명은 생리작용이며 물리작용입니다. 당신이 이 유상(有相)의 광명을 자성의 작용―상(相)으로 본다면 괜찮지만, 그것을 자성의 체(體)라고 여긴다면 틀렸습니다.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자성은 미혹한 적이 없다. 이 성(性) 자체는 스스로가 바로 밝은 것[明]이며 대단히 묘하다[妙]. 바로 명백한 것이요 광명한 것으로, 스스로 각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람들 중에 어느 사람이 각성이 없겠습니까? 누가 당신을 때리려고 하면 피할 줄을 알고, 당신이 피로하면 잠잘 줄을 알고, 배고프면 먹을 줄 아는, 이 영각(靈覺)의 성은 본래 있습니다. ‘성각’은 본래 묘합니다. 이 작용이 얼마나 묘합니까! 당신 자신의 생각이 스스로 생각을 알고, ‘자기가 지금 들은 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나는 알아들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며, 당신의 본래 이 성이 깨달아서[性覺], 자기가 또렷이 압니다! 대단히 묘한 것이기에 ‘성각묘명(性覺妙明)’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성을 알면 그것은 본래에 각입니다. 본각(本覺)은 미혹한 적이 없고 누구도 미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어디에서 깨달음을 하나 구하는 겁니까? 당신은 무슨 깨달음을 구해서 뭐 하자는 겁니까? 당신은 여태까지도 깨닫지 못함이 없었는데, 당신은 어느 날 깨닫지 못합니까? 어느 날 미혹한 적이 있습니까? 본래 영각 자성은 매우 또렷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보면 볼 줄 알고, 책을 보면 이것은 본(本) 자이며 이것은 각(覺) 자인지를 알아서, 모두에 또렷합니다. 본각은 대단히 명묘(明妙)합니다. 그것은 본래 그러하니, 당신이 닦아야 비로소 광명이고 닦아야 비로소 명백하다는 것이 바로 이 여덟 글자의 의미라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각명묘(本覺明妙)’입니다. 뒷날 우리 불학은 그것을 분류하였고, 중국의 불학은, ‘온갖 중생이 본래 부처요 사람마다 자성이 본래 부처이다’는, 이것을 ‘본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미혹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그래서 도를 닦고 불법을 학습하면서 깨달음이 열리기[開悟]를 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선(禪)을 배우든 밀종을 배우든 정토를 배우든 어느 날 닦아서 거기에 도달하여 홀연히 깨닫고는, ‘응! 바로 이 본래이구나.’합니다. 그것은 지각(知覺)이라고 하는데, 이제 막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지각이 깨닫기 시작했는데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하나의 본각을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하나의 ‘본각명묘(本覺明妙)’를 깨달았습니다. 교리로 분류한다면 ‘성각묘명(性覺妙明)’은 지각의 경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깨달음이 열리고서야[開悟] 비로소 느끼기를, ‘자기 자성을 깨달으니[覺悟], 하, 그렇게 묘하군, 하, 그렇게 명백하며 본래 이루어져 있군[現成]’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 자성의 본래가 ‘본각명묘(本覺明妙)’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본래를 당신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선종 조사가 말하기를 깨달았음과 아직 깨닫지 못했음은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어느 조사, 황벽(黃檗) 선사도 말하기를, “이른바 대철대오(大徹大悟)한 사람은 어떠할까? 지난 시절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不異舊時人].” 나는 여전히 나이고, 너는 여전히 너이며, 그는 여전히 그입니다. 코는 여전히 코이고 눈은 여전히 눈입니다. “단지 지난 시절의 행위 부분이 다를 뿐이다[只異舊時行履處].” 사람됨과 일처리나 말하는 등등의 언행거동이 모두 달라졌습니다. 왜 다르겠습니까? 보세요, 당신이 보기에 그는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자신으로서,...‘성각묘명(性覺妙明)’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덟 글자는 능엄경 앞쪽 제1권부터 제3권까지의 결론의 요점입니다.
제4권 시작에서 부루나가 묻습니다, “자성이 본래 청정한 것이라면, 이미 청정한 바에야 왜 엉망진창으로 이런 산하대지가 생겨나는 겁니까? 만유의 현상이 생겨나고 인류의 세계가 생겨나는 겁니까?” 이것을 부루나가 물어야 했습니다. 아난도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바로 화엄(華嚴) 경계와 잇닿아집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세계는 좋지 않고 만유가 좋지 않다.’라고 여기는 것은 역시 망견(妄見)입니다. 이 만유 세간은 묘공(妙空) 묘유(妙有)이며, 좋다고 말할 것도 없고 좋지 않다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온갖 것이 지극한 진선미(眞善美)입니다. 그래서 중국문화 입장에서 말하면 회오리바람이 불고 뇌성이 치며 비가 내리면[颶風雷雨], 태풍이 불어와 온갖 것을 쓰러뜨리면, 우리들은 좋지 않다고 느끼지만 천지의 입장에서는 무슨 좋지 않음이 없고. 한숨을 한 번 쉬고 피로해서 한 번 움직인 것과 같아서 무슨 좋지 못함이 없습니다. 산은 여전히 산이요 땅은 여전히 땅입니다. 어떤 때는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땅을 청소하는 것처럼 청소가 되어 좀 깨끗하고 좀 청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온갖 것은 본래 모두 청정하다는 것이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제3권에서 부루나가 이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은, 부처님이 유식법상(唯識法相)으로써, 진여와 아뢰야식의 작용과, 제7식 제6식 등등의 작용, 그리고 물리세계의 작용을 설명한 것과 같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는 이 아뢰야식이 어떻게 바람을 일으키고 파랑을 만들어 이 세계만유의 이런 차별 현상으로 변해서 나올 수 있는지를 말하는데, 부처님이 하신 말씀과 질문이 대단히 묘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도를 깨닫기를 바라는데, 부처님은 부루나에게 묻습니다, “너는 내가 ‘성각묘명(性覺妙明), 본각명묘(本覺明妙)’라고 설하는 것을 늘 듣지 않느냐?” 부루나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늘 듣습니다.”.....
목 차
역자의 말 3
저자 서언 16
능엄경 대의 요지 29
능엄경 대의 풀이
(능엄경 제1권)49
제1장 심성본체론 51
문제의 시작 51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일곱 가지 인식을 변별하다 53
진심과 망심의 체성을 분간하다 72
심성 자체를 가리켜 확인시키다 75
(능엄경 제2권)88
제2장 우주와 마음과 물질에 대한 인식론 90
우주만유 자성 본체에 대한 인식 90
자성과 물질 현상계의 여덟 가지 분석 97
객관의 물리세계와 자성 능견의 주관이
둘이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다104
자성 본체는 자연과 인연화합을 초월한다 114
개별 업보와 공동 업보의 원인 119
제3장 심리와 생리 현상은 자성 기능이 발생시키는
상호변화이다126
심리와 생리인 5음 작용 경험의 분석 130
(능엄경 제3권) 136
심리와 생리인 6근 작용(오관과 의식) 경험의 분석 138
심신과 외부경계 작용(12처) 경험의 분석 147
심신과 외부경계 사이(18계) 경험의 분석 160
제4장 물리세계와 정신세계는 둘 다 자성 기능의
나타남이다183
지수화풍공 5대 종성의 분석 183
심의식(心意識)인 정신 영역의 투시 195
(능엄경 제4권)207
물리세간 물질의 형성 208
중생세계 생명의 형성 원인 215
제5장 불법을 닦아 익히는 실험 원리 308
개인의 해탈 성불과 단체와의 관계 308
자성 진심을 증오하는 법칙과 원리 316
우주시공과 물리세간 속박의 해탈 법칙과 원리 325
자성을 수증하는 법칙과 원리 340
(능엄경 제5권)348
자성 해탈 수증의 총강 350
스물다섯 분의 실제수행 실험방법의 자술 365
(능엄경 제6권)410
(능엄경 제7권)455
제6장 불법을 닦아 익히는 단계와 방법 457
불법을 배우고 수행에 입문하는 기본 계행 457
불법을 닦고 배우는 진도 단계를 가리켜 보임 483
(능엄경 제8권)487
55위 수행의 성위(聖位)와 경계의 함의 494
지옥과 천당의 유무와 사람의 정신심리와의 인과관계 516
10종의 신선도와 천인 사이의 정신 심리적 관계 521
(능엄경 제9권)523
제7장 불법의 선정과 지혜를 닦아 익히는 과정 중의
잘못과 갈림길577
자성이 공한[性空] 정각에 대한 기본 인식 577
색음(色陰) 구역
생리와 심리 상호변화 범주의 마구니 경계580
수음(受陰) 구역
감각 변환(變幻)범주의 마구니 경계587
상음(想陰) 구역
상념 속에서 정신환각(精神幻覺)범주의 마구니 경계599
(능엄경 제10권)615
행음(行陰) 구역
심리적 생리적 본능 활동과
우주와 마음과 물질에 대한 인식의 편차618
식음(識陰) 구역
유식(唯識)경계 속에서 나타나는 편차635
5음 해탈과 명심견성을 곧바로 가리킨 결론 647
능엄경 법요 찬주 653
증보 능엄경 법요 찬주 수증차제 661
정창파 선생 발문 670
저자 후기 675
범망경 681
저자 소개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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