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해의 불교란무엇인가] <8> 지혜로운 자의 행동양식
너와 나 ‘상의성’이 연기의 제1법칙
지혜로운 자, 즉 깨달은 자의 깨달음의 내용은 곧 연기(緣起)의 진리이고, 연기의 진리의 제1 법칙은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라 했다. 이를 다시 설명하자면, 내가 나의 존재근거가 아니라 내 앞에 놓인 모든 네가 나의 존재근거라는 뜻이다.
사용자의 존재근거는 노동자이고 남편의 존재근거는 아내이며, 독자의 존재근거는 책이고 교수의 존재근거는 학생이며, 아버지의 존재근거는 아들이고 스님의 존재근거는 신도이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또한 어떤 한 존재의 존재근거는 단수가 아니라 무한한 복수이다. 사실 공기까지 포함해서 내 앞에 놓인 나 이외의 모든 너는 다 나의 존재근거다.
“내 앞에 놓인 모든 것에 감사하고 공경”
자신과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진리
지혜로운 자, 즉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자는 내 앞에 놓인 이 모든 너에게 무한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네가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으니 어찌 너를 향해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용히 눈을 감고 내 앞의 모든 네가 다 나의 존재근거라는 연기의 진리를 되새겨 보면, 내 앞에 놓인 모든 너를 향해 아주 자연스럽게 감사와 공경의 마음이 솟구친다.
그렇다면 내 앞에 놓인 모든 너에게 감사하는 자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가? 내 앞에 놓인 모든 너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내 앞에 놓인 모든 너를 소중하게 여기는 행동, 존중하는 행동, 아끼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지혜롭지 못한 자, 연기의 진리를 모르는 자의 행동은 자신 앞에 놓인 너를 향해 멸시하고, 함부로 대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행위의 극단적인 행태가 바로 존재의 파괴, 즉 살생이다. 일반적인 생명의 요소는 호흡, 지각, 운동, 생식(生殖)이다. 초기불교는 이러한 요소를 파괴하는 것을 살생이라 한다.
대승불교는 이뿐만 아니라 기능, 작용, 역할을 갖는 일체의 존재를 모두 생명으로 보고자 한다. 불교는 숨 쉬고 인식하고 움직이고 번식하는 모든 존재들, 나아가 일체존재 전부를 중생(衆生)으로 보고, 그 존재를 파괴하는 행동을 살생으로 간주한다.
옷이라는 존재가 추위와 더위를 막고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느낌을 갖게 하는 기능과 역할과 작용을 갖는다면, 그런 것들이 아직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거나 파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살생이다. 돌 한 덩어리 흙 한 줌도 마찬가지다.
연기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 지혜롭지 못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은 존재의 파괴를 저지르지만, 지혜로운 자는 일체존재의 생명을 온전케 하고자 한다. 즉 불교는 호흡, 지각, 운동, 생식하는 일체 생명을 도우며, 나아가 기능과 작용과 역할을 갖는 일체존재의 그것을 십분 발휘하도록 돕고자 한다. 불교는 이러한 일체의 행동을 방생(放生)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한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자는 내 앞에 놓인 모든 너에게 감사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 존재를 온전케 하고자 한다. 어리석은 자는 나의 존재근거가 너임을 모르고, 네가 사라질 때 나도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마는 공동운명체임을 모른다. 따라서 너와 나를 분립적, 대립적, 쟁투적 존재로 인식하고, 너를 희생시켜 나를 위하고자 한다. 그러나 너의 파괴는 내 존재근거의 파괴임으로 결국 나의 파괴로 이어진다.
연기법을 깨달은 자, 지혜로운 자가 취하는 제 1 행동 원리는 방생, 즉 감사와 공존이다. 이는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행복하게 하는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윤영해의 불교란무엇인가] <9> 지혜로운 자의 행동 원리
자업자득… ‘인과법칙’의 확연함을 읽는다
연기법을 깨달은 자, 지혜로운 자가 취하는 제 2 행동 원리를 논하기 전에 붓다 당시의 인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행동의 일반적 원리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자.
행위, 행동을 뜻하는 한자어는 업(業)이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카르마(karma)에서 온 말인데, ‘하다, 완수하다, 만들다’ 등의 뜻을 갖는 동사[k]에서 파생되어 ‘행위, 활동, 일’ 등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업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중생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하게 되는 일체의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살아 있는 일체 존재의 행위에 대한 인도 사람들의 독특한 교설[業說]은 베다(Veda)시대부터 시작해서 브라흐마나(Brhmaa)와 우파니샤드(Upaniad) 및 요가(Yoga)사상 등 힌두 전통 전반은 물론 자이나교(Jainism)와 불교의 교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이론이다. 업설은 인도 사람들의 사상과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업설은 기본적으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인과의 법칙’ 위에서 성립한다. 또한 악한 행위에는 악한 업보가 따르고 선한 행위에는 선한 과보가 따른다는 '윤리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다. 이처럼 인과성과 윤리성이라고 하는 이중 구조를 가짐으로써 결국 업설은 윤리적인 인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업의 결과는 예외 없이 업의 주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자업자득의 법칙’이라고 한다.
성격에 따라 시기만 다를 뿐
지은 업엔 반드시 결과따라
업의 인과법칙이란 업은 예외 없이 원인과 결과라는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는 뜻이다. 얼핏 보기에 모든 행위는 실현되는 그 순간 그 자체로서 끝나고 사라진다. 그러나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하지 않는다. 업은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긴다. 향을 태우면 향은 타서 사라지지만 향기가 옷에 베어들어 남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업이 남긴 이 흔적을 업력(業力)이라고 하는데, 이 업력은 업의 주체 속에 잠재적인 에너지로 남아 있다가 기회가 오면 그에 상응하는 어떤 결과를 초래한다. 업력은 그것을 만든 존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업의 인과법칙은 식물의 씨앗과 열매로 비유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전적으로 씨앗에 의해서 결정된다. 콩이라는 열매는 콩이라는 씨앗의 결과이고 팥이라는 열매는 팥이라는 씨앗의 결과이다. 같은 밭의 같은 조건에 심고 키우더라도 하나는 콩이 되고 다른 하나는 팥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콩이나 팥이라는 씨앗 때문이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열리거나 팥을 심었는데 콩이 열리는 법이 없는 것처럼 업인(業因)에 따라서 정해진 업과(業果)가 생겨난다.
업의 인과법칙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은 업은 여하튼 반드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지은 업의 성격에 따라서 금생에 나타나기도[順現業]하고 내생에 나타나기도[順生業] 하며 내 후생에 나타나기도[順後業]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로 나타난다.
“금생에 지은 악업의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말라. 아직 그 열매가 익지 않았을 뿐이다. 금생에 지은 선업의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아쉬워하지 말라. 아직 그 열매가 여물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경구에서 업력과 과보의 인과법칙의 확연함을 읽을 수 있다. 업인은 반드시 업과를 초래하고야 만다는 것이 업의 인과법칙이다.
[윤영해의 불교란무엇인가] <10> 업의 윤리법칙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가 선업
업의 윤리법칙이란 업이 물리적인 인과의 법칙이 아니라 윤리적인 선악의 법칙이라는 뜻이다. 업이 인과의 법칙을 따른다는 의미는 선한 업에는 선한 과보가 따르고 악한 업에는 악한 과보가 따른다는 뜻이다.
공을 발로 차서 앞으로 튀어나가게 하는 단순한 물리적인 행위의 인과관계를 두고 업의 법칙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앞으로 열 걸음을 걸어 나아갔으면 뒤로 열 걸음을 물러나야 한다는 기계적인 인과법칙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행위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를 초래하자면 반드시 윤리적 행위라야만 하는 것이다.
즉, 어떤 행위가 업이 되어 과보를 초래하자면 최소한 그 행위가 선악의 어느 쪽에 해당되어야만 한다. 선업도 아니고 악업도 아니어서 윤리적으로 중성적인 업, 즉 무기업(無記業)일 경우에는 과보가 초래되지 않는다.
선절대적이지 않은 선.악업
똑같은 행위도 결과 달라
업이란 업을 짓는 자신과 그 업의 대상이 되는 남에게 모두 좋은 결과를 초래하여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를 말하며, 악업이란 업을 짓는 자신이나 남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하여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선업과 악업의 고정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행위가 경우에 따라서 선업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악업이 될 수도 있다.
사냥꾼의 화살을 맞은 사슴이 도망치다 나무꾼 아저씨를 만나 숨겨 달라도 애원했다. 가엽게 여긴 나무꾼은 나뭇단 속에 사슴을 숨겨 주었다. 헐레벌떡 뛰어 온 사냥꾼은 사슴의 행방을 물었고 아저씨는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여기서 사냥꾼은 거짓말을 했으니 악업을 지었는가? 아니다. 나무꾼은 사슴의 목숨을 살렸고, 사슴은 목숨을 건졌고, 사냥꾼은 살생을 면했으니, 행위자와 행위의 대상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따라서 비록 거짓말을 했으나 이는 선업인 것이다. 사냥꾼은 끼니를 놓치는 작은 손해를 봤지만 살생을 면하는 큰 이득을 봤으니 이는 좋은 결과이다.
지혜로운 이는 열 가지 행위를 엄금하고 그 반대의 열 가지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이를 십악업(十惡業)과 십선업이라고 한다. 전자는 생명을 죽이는 행위(殺生), 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는 행위(偸盜), 부정(不貞)한 성행위를 하는 일(邪淫),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거짓으로 말하는 행위(妄語), 서로 다른 말로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행위(兩舌), 험담, 욕설 등으로 남을 해치는 행위(惡口), 부풀리고 꾸며서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행위(綺語), 남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貪欲),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瞋恚),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어리석고 잘못된 마음(痴暗) 등 열가지다.
후자는 모든 생명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살리는 행위(放生), 자신의 소유와 노력을 남에게 베풀어 돕는 행위(布施), 청정하고 온당한 성생활을 하는 일(淨行 혹은 梵行),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眞實語), 한결같은 말로써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화합시키는 행위(和合語), 부드럽고 찬탄하는 말로써 남을 기쁘게 하는 행위(柔順語), 사실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질박하고 올곧게 말하는 행위(質直語), 자신의 노력과 소유를 남에게 베풀어 도우려는 마음(布施心), 고통스럽고 욕된 일도 참고 견디며 기다리는 마음(忍辱心), 연기법(緣起法)으로 우주와 인간의 실상을 꿰뚫어 봄으로써 이기적 집착심에서 벗어나는 마음(智慧心)의 열 가지이다.
십악업과 십선업 모두 앞의 세 가지 행위는 신업에 해당하고, 중간의 네 가지 행위는 구업에, 뒤의 세 가지 행위는 의업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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