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부처님 오시는 날
2006년 5월 5일 부처님오신날
법정스님
길상사가 위치한 성북동에는 외국 공관이 많기 때문에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면 근처 많은 외국인들이 연등 구경을 하러 절을 찾는다. 올해는 3천여 개의 연등이 걸렸다. 한국 조각계의 거장이며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선생이 2000년 4월에 화강암으로 제작한 마리아상을 닮은 관세음보살상도 근처 가톨릭 수도원의 사제와 수녀들을 자주 초대한다. 이날 스님은 법문을 하기 위해 여느 때처럼 강원도 오두막에서 어두운 새벽에 출발해 먼 길을 왔다. 절 마당에서 마주친 벽안의 서양인 여성이 스님에게 합장하며 인사를 건넸다. “Happy Buddha's birthday !(부처님 생일을 축하합니다)” 그러자 스님도 합장하며 그 여성에게 화답했다. “Happy your birthday !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부처님 오신 이날이 있어서 우리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저 같은 사람도 사찰에 올 일이 없고 또 여러분도 절에 다닐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남남이지만 ‘오늘’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영향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오늘’이 없다면 이런 절도 없고, 이런 자리도 마련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화창한 봄날 함께 이런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지나온 인류 역사에서 부처님 같은 뛰어난 성인이 계시지 않았다면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부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과 노자, 장자 등 인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스승들이 안 계셨더라면 현재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 개인의 삶을 돌아볼 때도 그렇습니다. 일찍이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현재의 나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우리에게 의지처가 있다는 것, 귀의처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삶은 중심을 잃고 끝없이 헤멜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신앙을 갖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사는 사람이 있지만, 신앙 덕분에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길로 가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부처님 법을 마나게 된 인연이 다행스럽고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기 때문에 제 말보다는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경전을 몇 구절 함께 음미해 보려보 합니다. 초기 경전인 <숫다니파타>는 경을 한데 모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절이 기원정사입니다. 그곳에서 가장 많은 안거를 했고, <숫다니파타>를 비롯해 근본 경전인 <아함경>과 대승경전(부처 사후 대승운동이 일어나면서 편찬된 경전들)인 <금강경>을 이 기원정사에서 설하셨습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 인간 삶에 으뜸가는 행복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이 <수타니파타>의 ‘으뜸가는 행복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은 그 경에서 몇 구절 뽑아 읽어 보려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고
어진 사람과 가깝게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이런 경전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 나에게 어리석은 요소는 없는가? 나는 선한 인간의 대열에 들 수 있는가?
인간은 홀로 형성되지 않습니다.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친구들, 만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마치 이슬비 속에서 서서히 옷이 젖듯이 좋은 친구는 좋은 친구대로 또 나쁜 친구는 나쁜 친구대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어리석어집니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면 도박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술꾼과 어울리면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지혜로운 사람과 가까이하면 자기 자신도 지혜로워집니다.
삶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경의 요소가 움트는 일입니다. 존경할 만한 대상이 없는 인생은 삭막한 인생입니다. 자기 성장을 할 수 있는 발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바른 서원을 세우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습니다. 남의 것을 가로채거나 남의 자리를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삶이 소멸됩니다. 자기다운 삶을 살려면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베풂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말 한 마디, 눈빛 하나도 공덕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이 없어도 맑은 눈빛, 다정한 얼굴, 부드러운 말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원을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원은 삶의 지표와 같은 것입니다. 원이 강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원의 힘이 약하면 작은 바람에도 휩쓸려 넘어갑니다. 원은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공동체적이며 이웃과 함께 누립니다. 그래서 큰 원을 세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욕구라 해도 개인적인 것은 욕심이고, 공동체적이고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은 원입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일체의 고난과 재난을 건넌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보살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모든 중생의 고통과 재난을 건넌다는 것입니다. 건넌다는 말은 곧 건진다는 의미입니다. 타인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도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고통의 세계에서 고통을 벗어난 세계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헌신함으로써 나 자신도 구제를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것이 보살의 원입니다.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오늘날에는 가정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만나 함께 식사하는 일조차 없습니다. 우리말의 ‘식구’는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 한솥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있어 부부가 한집에서 따로 밥을 해 먹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집은 차디찬 가옥이지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은 따뜻한 곳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밖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하는 장소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 주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이 해체된 가옥엔 치유의 길이 없습니다. 갈등밖에 없으며, 더 이상 쉴 곳이 아닙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말년에 외롭게 지냈기 때문에 동양의 대가족제도를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해체되고 있지 않습니까? 서로 불편하다고 해서 뿔뿔이 흩어져 지냅니다. 어버이날에나 한 번씩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고, 어쩌다 외식이나 하는 정도입니다. 물론 농경사회에서 이루어진 가족 단위와는 다르겠지만 현대사회라고 해서 가정의 틀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스럽지 않은 것.’
모든 것에는 우선순위가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나라 다스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순위가 있는데 선거철만 되면 그것을 무시하고 표를 긁어모으기 위해 엉뚱한 짓을 합니다. 일에 질서가 없으면 혼란스럽습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에게 질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베풀고
이치에 맞게 향동하며
비난을 받지 않게 처신하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베푸는 것을 수직관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평적으로 나누는 일입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습니까? 부모와 사회와 친구에게,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무수한 관계 속에서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그런 도리를 안다면 스스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인간적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나누어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길, 인간의 도리에 맞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비난받지 않게 처신하라.’ 사람이 인색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비난받는 것입니다. 이웃과 나누어 갖고 인간의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한다면 남에게 비난받을 일이 없습니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악한 일 하지 말고 선한 일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입니다. 마음을 맑히려고 따로 노력할 것 없이, 악한 일 하지 않고 선한 일 하면 스스로 마음이 맑아진다는 소리입니다. 남과 나누어 가질 때 마음이 열립니다. 마음이 열린 상태가 바로 맑아진 상태입니다.
악을 싫어해 멀리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흘히 하지 말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술은 적당히 마시면 약이 되지만, 적당을 넘어서면서 술이 술을 불러서 취하게 합니다. 지금 병원마다 간이 망가져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평생 쓸 장기를 독한 알코올에 늘 담아 두었기 때문에 간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맑은 정신을 갖고도 어려운 세상인데, 스스로 술에다 정신을 절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덕행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덕행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남과 나누어 가질 때 덕이 쌓입니다. 그때 겹겹으로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내 마음이 열려야 이미 열려 있는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지,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열려 있는 세상은 나와 무연無緣합니다.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삶에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든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겪는 것입니다. 어떤 외부 상황 탓에, 세상이 잘못되고 누군가가 나빠서 내 삶이 이렇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답게 삶을 자주적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맺힌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삽니까? 각자의 인생을 위해서 사는데, 누구 탓을 하지 마십시오. 원망하면 내 마음이 구겨집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운 일도 잘 풀립니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뒤틀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언론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언론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들 의식 속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언론에는 순기능도 있지만 역기능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가르침을 들으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이 시대에는 누구를 존경하거나 겸손을 지니는 미덕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갖든지 만족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옛날 우리가 흙을 가까이하고 살던 농경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알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고마워할 줄 모르면 그야말로 가난 한 사람입니다. 삶의 질은 부피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그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무엇이 남겠습니까? 집, 재산, 자동차. 명예, 다 헛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세상과 작별할지 모릅니다. 지위 고하가 없습니다.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다음 순간을 누가 압니까? 과연 내가 생을 살아오면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들은 다 허망하고, 한때 걸쳤던 옷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이웃과의 나눔, 알게 모르게 쌓은 음덕, 이것만이 내 생의 잔고로서 남습니다. 이것은 소멸되지 않고, 전통적인 인도 사람들 생각에 의하면 내생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종자가 됩니다. 내생에 내가 받아 쓸 씨앗입니다.
‘때로는 가르침을 들으라.’ 아무 생각 없이 삶을 살아가다 보면 제자리걸음하고 관념화되고 무기력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눈뜬 사람들, 지혜로운 스승들의 가르침을 들으라는 말입니다. 자기 삶을 거듭 충전하고 새롭게 다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근심이 없어 편안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세상의 복잡한 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자기 신념이 확실한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또 평소에 세운 원과 나누어 가진 덕행의 잔고가 있기에 세상사에 부딪쳐도 중심을 잃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소유물을 지녔다 할지라도 마음이 불안정하고 평화롭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이것이 불타 석가모니의 행복론입니다. 부처님은 <숫타니팥타>의 ‘천한 사람’ 편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승려가 한 집에 걸식을 하려고 막 들어섭니다. 그러자 바라문이 화를 잔뜩 내면서 “이 까까중놈아, 이 엉터리 사문아! 들어오지 말고 거기 서 있거라. 이 천한 놈아!” 하고 욕을 퍼붓습니다. 대승경전에 는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초기 경전이어서 사실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이 어떤 것이 천한 사람인가를 낱낱이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입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 때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는 신분의 벽이 높은 사회였습니다. 2,500년 전의 세상입니다. 바라문이니 제2계급인 크샤트리아니 날 때부터 가문에 의해 주어진 세습화된 신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제도입니다. 날 때부터 귀족과 천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귀족도 되고 천민도 될 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경전에 보면 부처님을 눈뜬 사람, 널리 보시는 분, 깨달을 사람, 지혜의 눈이 열린 분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부처님을 가리켜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합니다. 두 발 가진 생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부처님오신날이 과거완료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신 날’이라는 것은 이미 오셨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엔 종교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오신 날’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오신 날’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하지만 ‘오시는 날’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신 날’은 과거완료형이고 ‘오시는 날’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부처의 씨앗을, 깨달음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활짝 열리면 저마다 부처입니다.
부처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길을 가리키는 스승입니다. 그 가르침을 통해서 내 안의 불성을 일깨우고 꽃피워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각자 이 시대 부처의 분신임을 자각하고 자신이 부처의 한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로 충만한 삶을 통해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날마다 ‘오시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초록이 눈부신 이 좋은 날, 침묵의 대지에서 저마다 살아있음을 꽃과 잎으로 마음껏 펼쳐 보이는 이 계절, 다들 복 받으십시오. 각자 삶의 현장에서 이 시대의 부처가 되어 한몫씩 하시기 바랍니다.
- 법정스님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서 발췌 -
[출처]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부처님 오시는 날|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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