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같이 하는 이와 함께 하리라
- 2009년 5월 부처님오신날 법문 중에서 -
법정스님
부처님 오신 날은 좋은 날입니다. 덕분에 우리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것이 진정한 불법(佛法)인지 한 번 돌이켜 봅시다. 머리 깎고 먹물옷 입었다고 해서 출가 수행자라고 할 수 있는가? 또 절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동참한다고 해서 재가신도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불자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인지 한번 살펴보자는 말씀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후기에 결집된 대승경전과 달리 불타 석가모니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여시어경(如是語經》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실려 있습니다. ‘여시어경’이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원문에는 ‘어떤 비구’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이해하기 쉽게 ‘어떤 사람’이라고 바꿔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마한 일에 화를 내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하는 이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추상적인 용어이지만, 검찰이나 판사들이 쓰는 법과는 달리 부처님이 평소에 가르쳐 주신 교훈, 즉 교법을 이야기합니다.
절에 다닌다고 해서 불교도일 수 있는가? 겉만 보아서는 그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 년에 한 차례씩 부처님 오신 날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과연 이것이 진정한 종교 생활을 위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런 기회에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간순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진정한 불자일 수도 있고 사이비 불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준엄한 가르침입니다.
“설령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 내 그림자처럼 나를 따른다 하더라도, 생각이 다르고 뜻이 다르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존재”란 소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집안 살림도 제쳐 놓은 채 절이나 교회에 자주 다니는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절이나 교회에 전혀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마음 씀이 훨씬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절에 와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그대로 일상의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데, 불필요한 말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사람들이 절이든 교회든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신도뿐 아니라 수행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불자의 모습인지, 어떤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연등 밝히고 불공 올리고 기도만 하고 헤어진다면 부처님 오신 날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순간순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진정한 불자인지 가짜 불자인지가 판명됩니다.
경전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내게서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을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 때문에 격정을 품지 않고 화를 내는 일도 없으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지 않고 도심(道心)이 견고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내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나 또한 그의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까와는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나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함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스승과 제자, 연인, 부부, 도반 등 한 집 한 도량에서 산다 할지라도 뜻이 같지 않으면 그 거리는 십만 팔천 리입니다. 뜻이 같아야 한 가정을 이루고 한 공동체를 이루고, 한 도량을 이룹니다.
불타 석가모니와 우리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2,5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또한 인도와 우리나라는 그 거리가 수만 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일상생활에 그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그러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살아 있는 가르침은 늘 현재 진행형입니다. 2,500년 전 어떤 특정한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대중을 상대로 한 설법이라 할지라도 그 가르침이 살아 있다면 지금 바로 이 현장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가르침은 과거 완료형입니다. 이미 과거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가르침은 늘 지금 여기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곧 법을 본다.”
이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나는 늘 함께 한다.”
글의 출처 : 맑고향기롭게
[출처] 뜻을 같이 하는 이와 함께 하리라|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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