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원효(元曉)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수선님 2022. 8. 28. 11:48

[평론 3]

 

 

원효(元曉)스님의 오도송(悟道頌)

 

 

Ⅰ. 해골물 일화(一話)

 

신라시대 원효대사(617~686년)는 불교를 대중화시켜 누구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우리나라 대표적 고승이다.

 

원효대사가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 중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일화는 유명하다.

 

원효대사는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7살 아래였던 의상대사와 당나라로 향했다. 고구려 국경을 넘던 중 병졸들에게 잡혀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오르는 구도심을 잠재울 수 없었던 원효대사는 다시 의상대사와 구법의 길을 떠났는데 두 스님은 한기를 피해 무덤 사이에서 잠을 청했다. 한 밤중 원효대사가 갈증을 느낀 나머지 손으로 잠자리 주변을 뒤적이다 바가지 같은 것에 고인 물을 한숨에 들이마셨다.

 

다음날 잠에서 깬 스님은 간밤에 마셨던 바가지를 찾으려 주위를 살폈는데 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해골만 뒹굴고 있었다. 바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해골이었고, 마셨던 물은 해골 안에 고여 있던 썩은 물이었다.

 

스님은 속이 메스꺼워 토하는 순간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실 때는 그렇게 달던 물맛이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게되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니!”

 

원효대사는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아부거당(我不去唐)

-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 참조 : 감(龕: 감실 감 → 사당안에 신주를 모시는 당), 분(墳: 무덤 분)

 

 

잠에서 깬 의상대사는 다시 떠날 준비를 했지만 원효대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의상대사는 “스님, 왜 길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하고 물었고, 이에 원효대사는 “우리가 당나라 유학을 떠난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의상대사가 “도를 구하기 위해서지요”라고 대답하자 원효대사는 “이미 도를 구했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겠지요”라는 말을 남기고 신라로 돌아왔다.

 

스님은 그 깨달음으로 중생들을 위해 설법했고,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이후 스님의 덕행은 신라 방방곡곡에 널리 퍼졌다.

 

평생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함께 하며 부처님 법을 전하는 한편 근본적으로 모두가 한 불교임을 가르치는 화쟁(和諍)사상으로 종파적 아집이 만연했던 신라불교를 서로 화해시키는 등 우리민족의 위대한 사상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 출처: 제주불교신문 승인 2009.09.09. 15:28 이병철기자 인용>

 

 

 

Ⅱ. 생애 (生涯)

 

신라의 압량주(押梁州)(현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내마(奈麻)였던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으로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은 것으로 보아 뼈대 있는 집안인 것 만은 분명하다.

 

다만 의상은 진골 출신임이 확실하지만 원효는 출신이 확실치 않으며 6두품 출신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중국에서 성이 설씨인 신라인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묘지명에 '설씨는 신라의 김씨에서 나왔다.'는 문구가 있는 점, 아무리 왕의 뜻이었다고는 하나 공주와 결혼했다는 점을 들어 사실은 신라 방계 왕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소수 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신라 왕족인 요석공주를 왕후로 맞이해 설씨 족단에 편입되었다는 설이 더 일리있는 추정일 듯하다

 

부처님처럼 모친이 해산하러 가는 길에 산기를 느끼고 밤나무 사이에서 출산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은 한 톨이 사발만 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서 일하는 머슴이 "우리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한끼에 밤 두 톨밖에 안 준다."하고 관가에 고발했는데 관리가 고발을 받고 와서 막상 보니 밤 한 알이 큰 사발만 한지라 앞으로는 한끼에 밤 한 톨만 주라.하고 판결을 내렸다고 하며 원효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는 사라사(娑羅寺)라는 절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사 터로 알려진 자리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는데 건물은 후대에 지었다고 한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여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舞)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

<출저: 삼국유사, 원효불기 (元曉不羈 )>

 

머리도 안 깎고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칭하고 술도 마시고 마치 파계승이나 땡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설법을 남겼다. 대중들에게 '구제'라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도끼 드립으로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신라시대에 손꼽히는 유학자 설총을 탄생시킨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원효는 태종 무열왕의 사위이자 김유신의 동서가 되는 셈이다.

 

비구승이 어떤 동기에서든 求女의 의사 표시를 그것도 시중에서 큰 노래로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불교 교리상 특히 원효의 계율관에 비추어 보아도 위배되는 것이며 파계한 뒤에도 요석궁에 머무르지 않고 소성거사를 자처하면서 전보다 더한 난행과 고행을 한 원효의 행적을 보아서도 원효와 요석궁의 인연은 원효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태종 무열왕의 정치적 책략이 작용했다는 것. 반면 파계를 통해 소성거사를 칭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재가자로 지내면서 활동하였으니 공식적으로 소성거사라고 불러야 맞다는 주장이 있다. 이외에도 금역(禁域)을 출입하는 데에도 거침없었다고 한다.

 

의외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염불을 창시한 일화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무아미타불은 원효가 만들었지만, 관세음보살을 덧붙인 사람은 의상이다. 따로 사용할 경우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며 저 2개를 붙여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는 내생을 주관하고 관세음보살은 현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나무아미타불은 "아미타 부처께 귀의합니다."라는 의미로 내생을 보장받는다는 의미가 강하다. 의상이 덧붙인 관세음보살은 현세구복적인 의미가 강한 데다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둘을 묶어 염불한다고 해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이렇게 묶음으로써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어 화엄종의 기본이 되었다. 화엄종을 제안한 사람은 원효고 완성시킨 사람은 또 의상인데 둘은 친구로 당나라 유학길에 같이 올랐었다.

 

<출처: 나무위키>

 

 

Ⅲ. 업적 (業績)

 

불교 사상을 깊게 접할 일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원효 하면 그냥 해골물을 마신 스님 정도의 이미지지만, 사실 불교계 전체 역사를 통틀어 손꼽을 만한 사상가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승려가 꽤 많았는데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당대 최고의 대승불교 논문이었고, 십문화쟁론은 당시 유행하던 불교 이론을 묶어 정리해놓은 책이었다.

 

일본 승려 장준이 쓴 인명대소초(因明大疏抄)에 따르면, 원효가 현장삼장 법사의 오류를 지적한 상위결정비량(相違決定比量) 논의가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의 학승들이 접하고는 원효가 있는 동방을 향해 세 번 절했다고 써져 있다. 불교에서 세 번 절하는 대상이 누군지 생각해보자.

 

고려를 통해 원효의 저서를 받아 본 요나라 황제 도종이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적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하다가 불교적 이해도가 높아진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되었다고 한다. 대승기신론소는 후에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지는 위업을 달성하여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돈황 판본이 발견된 적도 있다.

 

십문화쟁론도 만만치 않다.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이라고까지 불린 진나(陳那)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을 보더니 "이 원효란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불교에서 '아무개의 후계'라고 하면 특정 고승·대덕의 환생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즉 스승님이 여기서 다시 태어나셨나…스승님이 왜 여기서 보이는 거지? 했다는 얘기. 본토 학파에서 자기네 스승님과 동일시할 정도면 그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 하다.

 

또한 금강삼매경론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는데, 오우미노 미후네(淡海三船)라는 관료가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가운데 설씨 성 가진 판관 한나마(대나마)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라는 사실을 알고 감격하면서 그에게 시를 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승려로 출가한 사람들에게 수행할 것을 권하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이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승려들이 출가해서 입문서로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포함되었다.

 

원효가 불교의 가르침을 풀이해 부른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는 처용무와 마찬가지로 무애무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 궁중무용으로 편입되어 조선 초기까지 남아있었는데, 불교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궁중무용에서 빼버렸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효명세자가 창작한 악무 가운데 동명의 무악이 있기는 하지만 무애무가 사라진 지 2백 년이 지난 데다 한 명이 추던 것이 열두 명으로 늘어났고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추는 춤으로 변했으며, 불교적 색채는 전혀 없는 등 둘은 서로 전혀 다른 춤이다. 삼국유사나 파한집 등의 기록에는 원효가 시중에서 광대들에게 얻은 호리병 하나를 얻어 저자에서 부르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는데, 후세에 그것을 본떠 무애무라는 춤을 제작할 때는 호리병 끝에 방울과 오색 비단을 매달아 장식했다고 한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발을 세 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같고 목은 여름 자라같은데/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등 고려 시대 무애무를 본 사람들의 시에서 무애무의 춤사위를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중기 신라 불교문화가 현세구복적(현실의 복을 비는 것)이었던 것에 비해, 원효가 주로 설파한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말 그대로 '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왕생'이기 때문에 내세구복적이다. 신라 시대에 현세구복적 불교로 가장 대중화된 종파는 의상의 화엄종이다.

 

<출처: 나무위키>

 

 

 

Ⅳ. 평 론 : 대 원경(圓鏡)

 

 

1. 마음 밖에서 구하지 말자.

 

六祖 혜능선사(慧能禪師)의 재가수행게(在家修行偈)에는 다음과 같은 명귀가 들어 있습니다.

 

“ 菩提只向心覓 何勞向外求玄 / 보리지향심멱 하노향외구현/ 보리는 마음에서 찾아야만 하거늘, 쓸데없이 밖에서 찾아서야 되겠는가 ”(참조 한자: 멱(覓: 찾을 멱, 찾다. 구하다)

 

[출처] 육조 혜능 대사(六祖 慧能 大師)의 偈頌|작성자 곡두 인용]

 

여기서 보리(菩提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 무상정등정각: 최고의 깨달음 )를 지칭합니다. 이른바 중국어로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인도 산스크리어에만 존재하는 원문 단어를 발음나는대로 중국어로 표기하여 번역한 이른바 음사(音似)로 번역한 대표적 단어입니다. 따라서 금강경 2분에서 수보리 존자께서 부처님께 드리는 첫 질문에 나오는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은 최고의 보리심(菩提心)으로 깨달음은 곧 “마음의 세계”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불자들(=비구, 비구니 포함)은 마치 깨달음이 마음 밖에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보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천경개(山川景槪)가 좋은 명사찰 또는 기도발이 잘 받는 소문난 사찰을 찾아다니면서 기도를 합니다. 조계사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제가 체험한 바로는 대한민국에서 삼존불상이 제일 큰 절은 우리 조계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닌가요? 그러나 이는 불상의 세계이지, 마음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는 금강경에서도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금강경 제26분(法身非相)에 실린 제3사구게에 그대로 실린 내용입니다. 제26분에서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 능히 32상을 여래라 볼(觀)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서 관(觀)의 개념은 13분(如法受持分)에세 “능히 32상을 여래라 볼(見)수 있겠느냐?”의 견(見)의 개념과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13분의 견(見)은 “정확히 본다”는 정시(精視)의 의미라면, 26분의 관(觀)은 “일체를 본다”는 일람(一覽)한다는 의미라 할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SEE”와 “LOOK”의 뉴앙스 차이라고 봅니다. 이는 수보리도 13분에서는 “아닙니다”하고 단호하게 답변을 하지만, 26분에서는 “그렇습니다.”라고 답변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13분에서는 “부처님이라 볼 수 있겠느냐?”고 “부처님 자체”를 지칭하여 물었지만, 26분에서는 “부처님과 비슷한 분들 = 사이비부처님 = 자칭 부처님이라 칭하는 사람(이하, ”사이비부처“라 칭하기로 합니다) ”을 지칭하여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수보리도 순간 착각을 일으켜 “그렇다”고 답하자, 부처님은 그럼 32상을 갖춘 전륜성왕도 부처님이냐“고 벼락같이 호통을 치십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수보리는 ”아닙니다. 부처님이시여. 32상을 가지고 부처라 볼 수 없습니다.“고 자신의 답변이 잘못됬음을 알아채고는 바로 수정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어, 모든 불자들에게 경계하십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 만약 색으로서 나를 본다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사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어도 진리의 실상(참모습)을 만나 보지 못하리라.“고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불교는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수복(修福)만을 일삼을 뿐 수도(修道)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분명 소명세자 마저도 ”법신비상(法身非相)/ 진리의 실상(모습)은 상(相)이 아니다“라고 깨달아, 이를 경계하여 제목으로 채택하여 붙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불교는 동서남북 - 갖은 상(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심지언 그 불상(相)에 혼(魂)까지 불어넣는 의식이 성행되고 그 불상을 맹신하는 극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목불상(相)에 도금(淘金)한다하여 무슨 복(福)을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말이 못 믿으시겠다면, 추운 겨울이 오면, 한번 아궁이에 넣고 군불을 때보십시오. - 만약, 살아있다면, 불사리(佛舍利)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사리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위급하고 병들고 다급한 불자님들은 사이비 목불에도 쉽게 체면이 걸리고, 옆에 큰스님이 큰소리 한번 치면 쉽게 전율을 느낄 것입니다. 이름하여 공포입니다. 그러니 불자님들이 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자유를 빼앗긴 마음세계에서 어찌 행복한 삶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봄이 찾아올수 있겠습니까?? 제발 조계사 불자님들은 부처님을 여러분의 마음밖에서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 우리 조계사 후배님들 - 저하고 각자 금강경에 손을 얹고 약속합시다!!! 10년, 20년.... 마음밖에서 찾는다면, 죽어도 도로아니타불일 뿐입니다.

 

 

 

2.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저는 조계사 불교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때의 저의 초기 불심은 목숨까지 바친 논개의 절개보다더 깊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붓는 정열은 사랑보다더 강하다. 아아 강낭콩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중생심)위에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불심) 흘러라“ - 그러니 하루하루를 푸르고 푸른 중생심인 내마음위에 붉고도 붉은 부처님의 마음을 수를 놓는다는 심정으로 금강경을 외우고,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논개처럼 나라를 더 사랑하게 되고, 부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불자님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사고는 그 폭과 무게 면에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 부처님(양귀비 꽃)을 내 인생의 스승님으로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내 인류, 내 조국, 내 사회, 내 이웃, 내 가족, 내 아내를 하나가 되어 더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비단 나만의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조계사 불자님들의 마음 또한 똑같다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같은 대스승님을 모심으로 써, ”이화불이귀무이(已和不二歸無二/ 이미 둘이 아님의 지경을 이루고, 둘이 없음의 경지로 나아간다는 의미 )“의 도에 이르렀다 할 것입니다.

 

저는 조계사 불교대학에 다닐 때 여기저기 걸린 여러 주련(柱聯)중에도 다음주련을 유별나게 좋아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선종의 총가람답게 두 주련은 빛나고 있겠지요.

 

 

以心傳心 是何法 / 이심전심 시하법 / 마음과 마음으로써 전하는 그 법은 무엇인고

佛佛祖祖 唯此傳 / 불불조조 유차전 / 부처님과 조사들이 오로지 전한 것이 ”그 마음“이니,

曹溪山上 一輪月 / 조계산상 일륜월 / 조계산에 떠 있는 둥근 달(둥근 마음= 圓心)은

萬古光明 長不滅 / 만고광명 장불멸 / 그 빛(마음의 광명)은 변함없이 만고를 밝게 비추리.

 

어디에 붙어있느냐고요? 예, 일주문(一株門)에 붙어 별처럼 빛나고 있답니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

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진리)를 알고 싶거든

應觀法界性 一切有心造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관할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어디에 붙어 있느냐구요? 예, 대웅전(大雄殿) 호야나무위에 별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또 “일체유심조”와 관련하여서는 이런 대방광불화엄경의 사구게도 있지요.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 /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으니, 능히 모든 세상일을 다 그려내도다.

五蘊實從生 無法而不造 / 오온실종생 무법이불조 / 오온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무엇 하나 만들지 않는 것이 없구나.

 

또 잘나가는 트롯트 가수 정동원은 “여백(餘白)”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노래를 마치 자기의 인생곡같다면서, 구성지게 불렀지요.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늙어 가는 게 슬프겠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저녁이면 벗게 되니까

 

내 손에 주름이 있는 건

길고 긴 내 인생에 훈장이고

마음에 주름이 있는 건

버리지 못한 욕심에 흔적

 

청춘은 붉은 색도 아니고

사랑은 핑크빛도 아니더라

마음에 따라서 변하는

욕심 속 물감의 장난이지

 

그게 인생인거야

전화기 충전은 잘 하면서

내 삶은 충전하지 못하고 사네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인생을 쫓기듯 그렸네

 

마지막 남은 나의 인생은

아름답게 피우리라

 

고로, 조계사 불자님들이여! 내 마지막 남은 인생은 “마음”이란 물감을 가지고, 아름답게 붉은 열매를 맺고, 흰 눈처럼 깨끗하게 채색하여 한송이 매화꽃을 피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꽃을 부처님전 바치면서, 밝게 웃으면서 이 세상을 떠납시다.

 

 

 

 

 

 

 

 

 

원효(元曉)스님의 오도송(悟道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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