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
모든 모습은 마음에서 만들어지므로, 모든 모습은 허망하다. 모든 모습을 모습이 아니게 보면 본래 모습 없는 마음을 보는 것이니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다. 모습을 모습이 아니게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모습으로 보면 모습으로 분별하는 것이고, 모습을 모습 아니게 보면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면 둘로 나누는 것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이법(二法)이고,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불이법(不二法)이다. 모습으로 보면 어떤 모습이 있고,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모습 있음이 곧 모습 없음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마음이 있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망상이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망상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상(相)이라 하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성(性)이라 한다. 마음은 본래 하나이다. 본래 하나인 마음을 상(相)과 성(性)으로 나누어 말하니, 비유하면 상(相)은 물결을 보는 것이고 성(性)은 물을 보는 것이지만 물결과 물은 둘이 아니다.
모습은 모습이 아니라는 말은 연필은 연필이 아니라는 말처럼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말이니, 분별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별이 끊어졌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이다. 불가사의한 불이중도의 법 즉 불이법(不二法)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견성에서는 분별이 끊어지고, 마음이라고 할 만한 물건도 없으니 무심(無心)이고, 얻을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라고 할 무엇이 있고 얻을 것이 있다면, 곧 분별이고 이법(二法)이다. 육조혜능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명백하게 선언하고서, 다시 말하기를 “불성(佛性)을 명백히 보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不二法)인 것이다. …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밝혔다.
불이법이므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할 수 없고, 취하거나 버릴 수 없고,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고 나눌 수 없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고 이름 붙일 수 없고, 알거나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얻거나 잃을 수 없고,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고,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어리석다거나 깨달았다고 할 수 없고, 머물 곳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모든 선한 생각 악한 생각을 응당 모두 없애야 한다. 이름 붙일 만한 이름이 없지만, 자성을 일러 둘이 없는 성품이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자성이다.” – 육조혜능
“즉시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고, 끊어짐이 있다거나 끊어짐이 없다고 헤아리지 않으며,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평상심이다. 경전에 말하기를, ‘범부의 행위도 아니고 성인의 행위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의 행위이다.’라고 하였다.” – 마조도일
“악(惡)에 부딪치는 대로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선(善)에 부딪치는 대로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聲聞)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악(善惡)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옳다고 여기는 것을 ‘이승(二乘)의 깨달음’ 또는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음으로 돌아가고 또 머물지 않는다는 지해(知解)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하는데, 이미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또 머물 것이 없다는 지해(知解)도 내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깨달음’이라 한다.” – 백장회해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인은 마음을 취하지만, 마음과 경계 모두를 잊어야 참된 법이다.” – 황벽희운
“밝은 눈을 가진 도 배우는 이라면 마구니와 부처를 모두 쳐버려야 한다. 그대가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生死)의 바다에서 떴다 가라앉았다를 계속할 것이다.” – 임제의현
“만약 이 두 분이 활용한 곳을 알아차린다면, 일상생활 가운데 경계에 접촉하고 인연을 만나는 곳에서 세제(世諦)를 펼치지도 않고 불법(佛法)의 이론을 만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미 이 두 쪽에 발을 딛지 않는다면, 자연히 한 개 살아날 길이 있음을 반드시 알 것입니다.” – 대혜종고
“불법은 지극히 묘하여 둘이 없다. 다만 아직 묘한 곳에 이르지 못했다면 서로 길고 짧음이 있다. 진실로 묘한 곳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니, 자신의 마음이 마지막 진실이고 본래부터 깨달아 있음을 진실하게 알 것이고, 진실하게 자재(自在)할 것이고, 진실하게 안락할 것이고, 진실하게 해탈할 것이고, 진실하게 깨끗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오직 자기의 마음을 쓸 뿐이니, 자기 마음의 변화를 붙잡으면 바로 쓸 뿐, 옳고 그름은 묻지 말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사량하면 바로 옳지 않게 된다.” – 운암진정
② 불이법에는 얻을 것이 없다
선에서는 모습에 머물지 않는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본래 마음을 나타내는 방편의 말로서 ‘얻을 것이 없다’는 구절을 자주 사용한다. 얻거나 잃는 것은 곧 있다거나 없다는 것처럼 양쪽에 떨어진 이법(二法)이요 분별이다. 공부를 하여 어떤 경지(境地)를 얻었다거나, 어떤 능력을 얻었다거나, 어떤 힘을 얻었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분별이니 망상이다.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의 마음이라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욕구를 가지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이러한 잘못에 떨어지지 말라는 경고로써, 본래 마음을 깨달으면 달리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라고 하는 방편의 말을 한다.
“얻을 수 있는 법이 조금도 없음을 일러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라 한다.” – 금강경
“자성에는 본래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다. 만약 얻는 것이 있어서 망령되게 화복(禍福)을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번뇌요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에서는 무념을 세워서 으뜸으로 삼는다.” – 육조혜능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인과(因果)․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수행이 원인이고 깨달음이 결과라고 허망하게 생각한다. 마음을 비우는 선정에 머물러 긴긴 시간을 지나면,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깨닫고 나서 다시 미혹해진다.” – 마조도일
“부처는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도리에 어긋난다. 도리는 구함이 없는 도리이니, 구하면 잃는다. 만약 구함 없음에 집착하면, 도리어 구하는 것과 같다. 만약 무위(無爲)에 집착하면, 도리어 유위(有爲)와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기를 ‘법을 취하지도 않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않고, 법 아님이 아닌 것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래께서 얻은 법은 진실도 아니고 헛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 백장회해
“본래의 부처에게는 진실로 한 물건도 없으니, 텅 비어 통하고 고요하면서 밝고 묘하고 안락할 뿐이다. 깊으면 저절로 깨달아 들어가니 곧장 바로 이것이다. 모자람 없이 다 갖추고 있어서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비록 무한한 세월 동안 정진수행하고 모든 지위를 거치더라도, 한 순간 깨달을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원래의 자기 부처를 깨달을 뿐, 그 위에 다시 한 물건도 더할 수 없다. 깨달았을 때에 오랫동안 행해 온 노력을 돌이켜 보면 모두가 꿈속의 허망한 짓일 뿐이다. 그래서 여래는 말하기를 ‘나는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에서 참으로 얻은 것이 없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연등부처는 나에게 수기(授記)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깨달음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 황벽희운
“그대들은 곳곳에서 ‘닦을 것도 있고 깨달을 것도 있다’라고 말들 하지만, 착각하지 말라. 설사 닦아서 얻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생사(生死)의 업(業)이다. 그대들은 또 육도(六度)와 만행(萬行)을 고루 닦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일이다.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곧 지옥 갈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며, 경전을 보고 가르침을 살피는 것 역시 업을 짓는 일이다.” – 임제의현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조사가 서쪽에서 왔지만, 역시 전해 줄 수 있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전해 주고 전해 받는 것은 무명(無明)의 법이요 유위(有爲)의 법이지, 지혜의 법도 아니고 무위(無爲)의 법도 아닙니다.” – 대혜종고
③ 불이법에는 단계가 없다
선에서는 불이중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방편의 말로써 단계가 없다는 말을 한다. 마음은 불이법(不二法)으로서 둘이 아니니 원래 단계가 없다. 그러므로 수행한다고 하여 마음이 단계적으로 점차로 달라져가는 일은 없다. 만약 수행하여 마음이 점차로 달라져가는 단계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마음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니 본래 불이법인 마음은 아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경험하는 마음의 모습을 분별함으로써, 흔히 이런 잘못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단계가 없다는 방편의 말은 바로 이런 잘못에 떨어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수행과는 상관 없이 언제나 여여(如如)하다. 이 여여한 마음을 모습으로 분별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는 모습이 없어지면, 본래 마음은 언제나 여여하다. 그러므로 무심(無心)이 곧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자성에는 시비도 없고 어리석음과 지혜도 없고 혼란됨과 안정됨도 없다. 순간순간 반야로서 비추어보아 늘 법상(法相)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세울 무엇이 있겠는가? 자성을 스스로 깨달으면, 문득 깨닫고 문득 수행하니, 또한 점차(漸次)가 없다. 그러므로 일체법을 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법이 적멸(寂滅)한데 어찌 점차 닦을 것이 있겠는가?” – 육조혜능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인과(因果)․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려 허망한 생각을 하여 원인을 닦아 결과를 얻으려 한다.” – 마조도일
“만약 상근기(上根器) 중생이라면 문득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을 듣고 바로 알아차려서,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즉시 본성을 깨닫는다.” – 마조도일
“따라서 도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잃고 자기의 본래 마음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밖에서 찾고 구하며 애써 노력하여 순차적으로 깨달으려 한다면, 무한한 세월을 애써 구하더라도 영원히 깨달음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당장 마음이 없음만 못하다.” – 황벽희운
“그러므로 조사(祖師)는 모든 중생의 본래 마음을 곧장 가리켰던 것이다. 마음의 본바탕이 본래 부처이니, 수행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밝거나 어두운 것도 아니다. 밝음이 아니기 때문에 밝음이 없고, 어둠이 아니기 때문에 어둠이 없다. 그러므로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다.” – 황벽희운
“한 번 마침에 모두를 마치는 것이며, 한 번 깨달음에 모두를 깨닫는 것이며, 한 번 증득(證得)함에 모두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 타래의 실을 끊음에 한 번 끊으면 한꺼번에 끊어지는 것처럼, 가없는 법문을 증득함에도 단계란 없습니다.” – 대혜종고
④ 불이법에는 머묾이 없다
불이중도(不二中道)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無住)이다. 육조혜능은 <금강경>의 “머묾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구절을 듣고서 깨달았다고 한다.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곧 분별 속에 있는 것이다. 머물 곳이 있다는 것은 분별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물건도 얻을 수 없는데, 마음이 머물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범부중생이 분별하여 집착하는 것이고, 그 머물러 있는 곳에 얽매여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과 해탈은 곧 무주(無住)이다.
“자신의 본성을 보면,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옳지도 않고 틀리지도 않으며, 머물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 육조혜능
“머묾 없는 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 마조도일
“만약 더럽거나 깨끗한 마음이 사라지면, 얽매임에도 머물지 않고 해탈에도 머물지 않아서, 유위(有爲)․무위(無爲)․얽매임․해탈 등의 마음의 테두리가 일절 없어서, 삶과 죽음 속에서도 그 마음이 자재할 것이다.” – 백장회해
“모든 법은 본래 가질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머물 곳도 없고,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음을 명확히 알아서 허망한 생각을 내지 않으면, 곧장 깨달음을 얻는다.” – 황벽희운
“그대가 생사(生死)․거주(去住)․탈착(脫著)에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지금 법을 듣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형상도 없고 근본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이 활발발하게 움직여서 수만 가지 경계를 시설(施設)하지만, 작용(作用)하는 곳이 따로 없다.” – 임제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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