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8.벽안법인
제대로 공부 안하려면 시주 밥값 내 놓아라
늦은 나이에 출가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정진하여 후학들의 귀감이 된 벽안법인(碧眼法印, 1901~1987)스님.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며 매사를 정확하게 판단했던 스님은 정화불사후 중앙종회 의장을 3차례 역임하며 종단을 반석에 올렸다. 벽안스님의 수행과 삶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스님과 승가대학원장 지안스님의 증언으로 구성했다.
“제대로 공부 안하려면 시주 밥값 내 놓아라”
마하연.운문암 등 제방선원에서 화두 참구
동국대 이사장 지내며 인재불사도 관심 많아
○…금강산 마하연과 백양산 운문암 등 남북의 제방 선원을 순력(巡歷)하며 정진에 몰두한 스님이 어느 날 제주도에 있는 도반의 절을 찾았다. 도반스님이 외출하고 없는데, 한 신도가 불공을 드려 달라고 왔다. 난감한 일이었다.
불연(佛緣)이 닿은 후 오직 선원에서 정진했던 벽안스님에게 염불을 하면서 불공을 하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정성스럽게 공양물을 준비해온 신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도반이 돌아오려면 한나절은 지나야 했다.
어쩔수 없이 스님은 불단에 공양물을 올리게 한 후 목탁을 치고 요령을 흔들며 염불(?)을 해 줬다고 한다. 너무 ㅌ봄볜눗� 염송하는 소리에, 신도는 “오늘 제사가 참으로 잘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때 스님이 외운 것은 경전이나 염불이 아니고 사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大學)> 서문이었다고 한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낸 스님은 소임 보는데 엄격함을 우선 하면서도 자상한 마음으로 대중을 인도했다. 예불할 때 대중에 앞서 독송을 인도하는 ‘창불(唱佛)’은 주로 젊은 학인들이 소임을 본다. 창불을 잘한 이가 있으면, 예불이 끝난 후 방으로 불러 포장을 뜯지 않은 양말 한 켤레를 건넸다. 절집 살림이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다. 비록 양말 한 켤레였지만 격려의 마음을 담아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이무렵 통도사는 매일 아침 대중공양을 하면서 전날 학인들의 시험결과를 발표했다. 100점 맞은 학인이 있으면 “오늘 아침에 100점 맞은 사람 누군고. 오라해라”해서 메리야스를 선물로 주곤 했다. 하지만 공부를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나쁜 사람들. 그리 공부 안하려면 시주 밥값 내 놔라.”
○…스님들이 마당 한켠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이때 벽안스님이 시자를 통해 한 장의 메모를 전해왔다. “풍문즉 정구를 친다고, 그래선 안 될 일이지.” 공부에 힘 써야할 스님들이 배드민턴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경책이었다. 한번은 학인이 종무소 직원 자전거를 타고 신평리까지 갔다가 벽안스님을 만났다. 절로 돌아온 스님은 강사를 불러 “아침에 자전거 타고 간 아이 누군가 조사해라. 그리고 그 아이 보내라”며 꾸중을 했다. 출가사문이 정진에 몰두하지 않고, 배드민턴이나 자전거를 타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스님의 뜻이었다.
○…벽안스님은 상하를 대할 때 언제나 예(禮)로서 맞이했다. 아무리 어린 사미라고 해도 함부로 ‘야, 자, 저’라고 하지 않고 여법하게 대했다. 세수 30세 정도 된 상좌가 통도사 강사(지금의 강주)를 맡아 법문을 할때 벽안스님은 다른 대중과 똑같이 삼배를 하고, 법문이 끝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앉아 있었다고 한다.
○…벽안스님 은사 경봉스님과 월하스님 은사 구하스님은 사형사제간 이었다. 구하스님이 사형이고, 경봉스님이 사제였다. 때문에 월하스님과 벽안스님은 세속으로 치면 사촌에 해당한다. 세수는 벽안스님이 위였지만, 촌수로 따지면 월하스님이 위였다. 어느 날 대중이 모든 모인 자리에서 월하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부터 법당의 좌차(座次, 좌석의 차례)를 제일 상석에 벽안스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벽안스님은 “아닙니더. 그런 법이 어디 있는교. 별당(당시 월하스님이 머물던 요사채)스님이 앉으셔야 됩니다.” 이 같은 일화가 있을 정도로 월하스님과 벽안스님은 서로를 존중하고 아꼈다.
○…벽안스님은 은사 경봉스님과 불과 아홉 살 차이였다. 하지만 언제나 차수를 하고, 무릎 꿇은 채 은사의 말을 경청했다. 경봉스님이 만년에 몸이 불편하여 외출을 삼가고 있을 때. 벽안스님은 매일 아침 큰절에서 극락암까지 걸어와 문안을 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극락암에 도착한 벽안스님은 은사 스님이 주석하는 경내에는 지팡이를 짚고 들어가지 않았다. 암자 입구에 있는 감나무에 지팡이를 세워놓고, 들어갔다. 은사 계신 곳에 지팡이를 짚고 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 때문이었다.
○…벽안스님은 금강산 마하연선원 석우(石友)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다. 당시 청담스님이 입승을 맡았고, 성철스님과 지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생사를 걸고 공부하고 있었다. 식량과 땔감 등 동안거 결제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런데 청담스님이 “아차, 하나를 빠트렸네”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벽안스님이 “무엇을 빠트리셨나요”라고 질문했다. “화목(火木)을 준비 못했네요” “밥 지을 나무와 땔감은 모두 해 놓았습니다.” “그게 아니고, 다비할 나무가 없어요.” 청담스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철에 모두 목숨을 떼 걸어놓고 정진할 텐데, 용맹정진하다 죽는 사람 안 나오라는 법이 없습니다.” 당시 초발심을 내고 마하연을 찾은 벽안스님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결국 그해 동안거는 밥 지을 나무와 땔감을 조금씩 아끼며 정진을 해야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벽안스님의 전신이 불덩이처럼 심하게 열이 났다. 당시 입승인 청담스님과 대중들이 “지대방에 가서 쉬라”고 권했지만, 벽안스님은 사양했다. “무상함을 느껴 발심 했는데, 죽기를 무릅쓰고 정진하다 여기서 죽는다면, 더 이상 원이 없습니다.”
벽안스님의 원력에 대중들이 더 이상 쉬라고 권하지 못했다. 열은 쉽사리 내리지 않고 머리는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다음은 당시 일을 회상한 벽안스님 육성이다. “어느 날 갑자기 무엇인가 툭 터지는 폭발음이 들리더라고. 그런데 불덩이 같았던 몸이 가벼워져서 마치 구름을 탄 것 같았어. 그러니까 구름 위에 몸이 떠 있는 기분이었지. (나를) 괴롭히던 것이 몸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지. 그 뒤부터 열이 내리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져서 아무렇지 않았어.” 생사를 건 정진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났던 것이다.
○…“보살님, 법당에 가면 불전함이 있으니, 그곳에 넣으세요.” 당신을 찾아온 신도가 보시금을 드리자, 봉투를 다시 건네며 불전함에 넣으라고 했다.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스님의 삶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통도사 주지, 종회의장, 동국대 이사장 소임을 보았지만 스님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별했고, 당신 앞으로 일체 재산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남몰래 보시했을 만큼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지녔던 어른이다.
■ 오도송 ■
大道元來無繫縛(대도원래무계박)
玄機何處關形成(현기하처관형성)
九旬磨劍寒霜白(구순마검한상백)
擊罷祖關各方行(격파조관각방행)
“대도는 원래 얽매임이 없으니,
현묘한 기틀을 어찌 모양과 소리에서 찾으랴,
구순동안 서릿발 같은 지혜의 칼을 가니,
조사관을 격파하고 마음대로 노닐리라.”
■ 임종게 ■
靈鷲片雲(영축편운) 往還無際(왕환무제)
忽來忽去(홀래홀거) 如是餘時(여시여시)
“영축산 조각구름 오고가는 짝이 없네.
홀연히 왔다 홀연히 가니 이와 같고 이와 같더라.”
■ 행장 ■
모든 일 사리에 맞게
공평무사하게 ‘처리’
1901년 경북 월성군 내남면에서 부친 박순진(朴淳鎭) 선생과 모친 월성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스님은 35세 되던 해 금강산 마하연 석우스님 회상에서 정진하며 불가(佛家)와 인연을 맺었다.
제방선원에서 참구하던 스님은 3년 뒤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鏡峰)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 사문이 됐다. 43세에 부산 범어사 영명(永明)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주지를 두 차례 지냈으며, 원효학원 이사와 동국학원 이사로 인재불사를 실천했다. 동국학원(지금의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중앙종회 의장을 세 차례 지내며 종단의 기틀을 닦았다. 1966년에는 세계불교승가대회 한국불교대표로 참석했으며, 1980년에는 조계종 원로원장으로 추대됐다.
양산 통도사에 있는 비문에는 스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선사는 천성이 교결(皎潔,조촐하고 깨끗함)하고 미목(眉目, 얼굴)이 청수(淸秀, 깨끗하고 준수함)하며, 본사(本寺)의 가람을 수호하고, 제반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리(事理)에 의당(宜當)함을 따라 공평무사하게 처결(處決)하셨다.”
스님은 만년에 머물던 요사채에 ‘寂堂(적묵당)’과 ‘淸白家風(청백가풍)’이란 편액을 걸어 놓았다. 이는 당신이 지녔던 수행의 면목을 보여주는 글귀이다. 붓글씨 또한 스님 성품을 닮아 단아했다. 스님은 1987년 12월25일 통도사 적묵당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87세, 법납 50세.
벽안스님 제자로는 지일.성묵(省).지한.지정.정각.성호.도훈.종범.정안.범하.지안.지춘.지관.성묵(性).도승.인산.지준.도원.지견.지학.지태.법전.법선.법형.지근.지선.지철.지활 스님이 있다.
통도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477호/ 2008년 11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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