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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학 어디까지 왔나 / 김원명

수선님 2022. 11. 13. 12:25

한국 불교학 어디까지 왔나 / 김원명

특집 - 한국 불교학의 현재와 미래

1. 머리말

한국 불교학이 어디까지 왔느냐를 문제 삼기 위해서는 어디에서 왔느냐를 함께 문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디까지 왔느냐는 어디에서 왔느냐를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가르침이 처음 고대 한국에 전해질 당시부터 다시 생각해보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처음 고대 한국에 전해진 이후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던 그 틀에 대해서 묻고 싶다.

그 이해 틀은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우선은 번역이고, 나머지는 내용이다. 외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한문 불전을 들여오게 된다. 이때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한문 불전의 원언어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한국인들의 대상언어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수입 종교로서 불교에 스며 있는 그 사상과 지혜를 이해할 수 있는 혹은 격의(格意, concept-matching)할 수 있는 자생적인 이해 틀로서의 존재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본문에서 우선, 한국 불교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와 다음으로, 한국인들의 불전 번역의 문제와 마지막으로, 어떤 자생적 지혜 전통이 불교의 무엇으로 혹은 불교의 무엇을 어디까지 말하고 있는지 다루어보고자 한다.

 

2. 한국 불교학이란 무엇인가?

‘불교학’은 19세기 유럽인들에 의한 창안된 ‘부디즘(Buddhism)’에 대한 일본인들의 번역어로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역사에 등장했다. 19세기 이전 유럽인들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불교도들이 거주하는 지역의 해외 선교 활동을 위해 집필한 글로부터 불교 관련 지식을 얻다가, 19세기 들어 번역된 경전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불교를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오리엔탈리즘의 시각과 태도를 가진 유럽적인 방식인 부디즘으로 창안해 재구성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느님은 죽었다’고 주장하여 탈근대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니체(Nietzsche, F.W., 1844~1900)가 자신을 ‘유럽의 붓다’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19세기 유럽에서 유럽의 근대가 가진 모순을 극복하려는 탈근대의 색조와 함께 부디즘을 구성했다. 다른 한편, 영미권의 초기불교 학자들은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 T.W., 1843~1923)와 ‘빨리경전협회(The Pali Text Socety)’가 소개한 스리랑카불교를 통해 남방불교를 만났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1881년에 창립한 ‘빨리경전협회’를 통해 죽을 때까지 총 94권 이상을 번역하였는데, 그는 불교가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종교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황순일에 따르면, 이들의 영향으로 많은 불교학자가 아직까지도 “남방 테라와다의 빨리 삼장이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 가장 가깝고” 그래서 가장 순수한 불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유럽의 근대가 일본을 통해 번역되고 해석되며 수입되는 과정에서, 당시 유럽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으로 탈근대적 색조를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안 종교로 이해된 ‘부디즘’이 유럽의 근대로 이해되어 불교학이란 한자로 번역되고 해석되며 수입된 것이다.

한국의 근대 불교학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의미의 학술 서적으로 기념비적 연구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국불교사 전체의 계통적 흐름을 시기별로 그리고 주제별로 나누어 총정리하고 있다. 유럽에서 수입된 근대 불교학의 연구방법론은 바로 문헌학과 역사실증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연구방법론으로 연구되어 엄밀한 사료적 근거를 바탕으로 객관적 서술을 하면서도 저자의 불교 해석을 담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 책의 연구방법론은 한국 불교학 연구에 표준의 초석을 다졌고,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불교 문헌 및 금석문 자료가 집성되고 또 연구가 축적되면서 한국불교 전체 역사와 전통에 대한 그림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은 한국어가 아닌 한문으로 쓰였고 인용도 한문 원문을 그대로 썼다는 점이다. 그것이 2010년에 8권의 현대 한국어로 번역 및 주석되기 전에는 일부 불교 전공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독자에게 읽힐 수 없었다. 이능화의 연구는 당시 수준에서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고 현재까지도 참고할 많은 연구를 담고 있다.

한국 불교학의 정체성에 대한 현대적인 자각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불교학계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규정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통불교론이다. 그런데 권상로(權相老, 1879~1965)가 한국불교사를 분리와 통일의 두 관점에서 체계화하는 과정에 원효 불교를 통불교란 용어로 먼저 규정하고 있다. 최남선의 통불교론 주장은 바로 그다음 해에 나왔다. 이어 김경주, 허영호, 김영수가 통불교 전통을 한국불교의 특색으로 주장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즉 해방 이후에 조명기 · 박종홍 · 민영규 · 이기영 등으로 이어지며 학술적으로 굳어졌고,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 철학과에 부임한 심재룡(1943~2004)이 1980년대 들어 이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에까지 이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최남선의 통불교론은 당시 일제의 식민 지배 속에서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의 《이조불교》(1929)와 같은 일부 일본인 학자들의 책에서 한국불교에 대한 식민지적 인식의 폄하에 대한 반발로서 한국 문화와 한국불교의 역사성과 그 성취를 드러내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심재룡의 의견에 공감하고 계승하고 있는 버스웰(Busswell, Robert E.)은 한국불교사를 ‘한국’불교라는 민족적 전통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이해하며, 근대 한국불교의 정체성 만들기의 출발점이 최남선의 통불교론이라고 주장했다(1998). 이봉춘은 심재룡 유의 한국불교의 성격 규정에 대한 반성적 문제 제기가 한국 불교학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리라 보면서도, 최남선의 통불교 외에 조명기의 총화불교 등으로 규정하는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성격 규정이 여전히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조은수는 키틀러(Ketelaar, James)의 연구와 조르겐센(Jorgen-sen, John)의 연구를 근거로 통불교라는 용어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 불교인들이 자주 쓰는 용어였고, 최남선이 일본에 머물 당시 일본에서 쓰던 용어를 한국불교의 장점을 선양하기 위한 용어로 차용했을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메이지 시대 불교도들이 통합주의적인 불교관을 개발하기 위해 일본의 13세기 화엄종 승려 교넨(凝然, 1240~1322)에 주목하여 ‘통불교’ 용어를 구성했고, 그것이 이후 일본 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교넨은 바로 신라 원효(元曉, 617~686)의 글을 좋아했고 원효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조은수는 키틀러가 밝히고 있는 바로 이 점을 소개하고 있다. 조은수는 시대를 뛰어넘는 한국불교의 보편적 특성을 찾기보다는 한국불교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과 그에 따른 다양한 성격들을 연구하다 보면, 그 속에서 새로운 모습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본다.

위와 같은 한국 불교학 정체성에 대한 담론과 무관치는 않지만 결을 달리하는 담론이 한국 근대 불교학에 관한 연구들이다. 이 시기에는 한국불교의 근대 혹은 근대성과 관련된 한국 ‘근대’ 불교가 문제시되었다. 근대와 탈근대에 대한 불교학 외 한국 학계의 논의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주로 이루어졌다. 이후 그것이 불교학계에도 이어졌다. 김경집의 〈근대불교의 연구 현황과 과제〉(1996) 이후 한국 근대 불교학에 대한 여러 연구자의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진행된 한국 불교학계의 반성 및 전망에 대한 연구 결과물을 낸 이들은 다음과 같다. 김광식(1998, 2006), 심재관(2001), 권영택(2003), 이민용(2005, 2012), 조성택(2006, 2012), 황순일(2007), 이재헌(2007), 이봉춘(2008), 김기종(2008), 신규탁(2008), 박재현(2009), 김종인 · 허우성(2010), 김용태(2010, 2011a, 2011b, 2011c), 송현주(2012), 김원명(2016a, 2016b) 등이다.

이 글의 제목에는 ‘근대’가 빠져 있다. 즉 “한국 불교학 어디까지 왔나”이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는 근대 혹은 근대성이 더 이상 관심의 주요 대상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인들을 위한, 한국인들의 불교학을 한국 불교학이라 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에 처음 불교가 수입된 이래로 고려 및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종교 혹은 철학으로서 불교를 학문 대상으로 삼을 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보고 싶다. 우리말로 이야기하고 묻고 따지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것인가? 그리고 묻는 이 스스로의 의식이 없다면 그것이 누구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말 번역이 없으면, 스스로의 주체 의식이 없는 우리말 이해가 없는 한국 불교학이라면, 그것이 한국 불교학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 완전하지 않은 반쪽 한국 불교학 같은 느낌이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3. 불전의 한글 번역 어디까지 왔나

한국 불교학의 현대화에는 현대 한국어와 한글로의 번역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번역은 과거의 언어와 문화를 현대의 언어와 문화로 번역하는 것이며, 불교를 학문의 대상으로 생산하고 소비한 과거 지식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현대 학문의 대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학자들과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보통 교양인들의 언어와 문화로 번역하는 것이다. 번역이 필요한 이유는 언어적인 차이의 문제도 있고, 종교 사회 문화적인 차이도 있다. 그것들 간의 차이가 없다면 번역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들 사이에 차이가 너무 크다면 번역은 불가능할 것이다.

온전한 번역은 대상언어 사회와 원언어 사회의 수준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가능하다. 즉, 두 대상언어 사이에 사회문화적인 수준과 종교철학 수준이 비슷해야 어느 정도의 번역이 가능하다. 각 사회의 지적 전통이 비슷해서 대상언어의 어휘와 원언어의 어휘가 충분하면서도 번역을 이해할 독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대상언어 사회의 포용적인 사회정치적 구조가 있어야 한다. 온전한 번역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입말(口語)과 일치하는 글말(文語)의 문자체계가 있어야 한다. 한국어로의 불전 번역 역사는 간단치가 않다. 유럽의 그것과도 다르고 중국의 그것과도 다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내용을 거시적으로 알 수 있는 연구물은 아직 마땅한 것 같지 않다.

불교 도입 당시 고대 한국은 고구려(372) · 백제(384) · 신라(?)의 사회였다. 이 시대 나라들은 글말로는 한문 사회였고, 입말로는 고대 한국어 사회였다. 이들은 글말인 한문 불전을 도입했으나 입말로의 번역은 기록될 수 없었다. 다만 고대 한국어를 구사하며 고대 한국어로 사유하며 이두 표기를 한다든지, 향찰 표기를 한다든지, 구결을 붙인다든지 하는 정도에서 한문 불전이 고대 한국어적으로 해석되었다.

원효는 《열반경종요》에서 열반의 번역 가능성과 번역 불가능성을 다루기도 했다. 그는 니르바나(Nirvana)가 열반(涅槃)으로 음역된 한역과 적멸(寂滅) 그리고 멸도(滅度)로 의역된 한역을 설명하면서 ‘깨달음’ 혹은 ‘깨침’에 해당하는 고대 한국어로의 의역을 이해하고 고민했을 것이다. 또 《기신론소》에서는 부처님 말씀인 원음(圓音)을 일음(一音)으로 해석하고 또 다른 종류 중생이 각기 인연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이해하는 것을 중음(衆音)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 설총(薛聰, 660?~?)은 구경을 우리말로 읽어 학생들에게 강론했다든가 경서를 우리말로 읽는 방법을 터득하고 이두를 정리하고 집대성했다는 것을 통해 번역에 대한 고전적인 고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앞으로 수행해야 할 연구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원효 시대에 불전에 나타나는 일심(一心)을 한마음 혹은 하나인 마음 혹은 하느님 마음 등의 고대 한국어로 이해했다면, 일심의 일을 하나 · 한 · 하느님에 대한 대상언어의 문화 · 종교 · 사상을 통해 번역하여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문제 제기나 연구가 아직은 우리 학계에서 거의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앞으로 이 흔적을 찾는 세밀한 연구가 우리와 미래 세대 연구자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고려까지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대상언어 사회의 포용적인 사회정치적 구조가 있었다. 또 동아시아에 통용되던 한문이라는 글말 번역이 이미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를 거치며 많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신라와 고려에도 도입되어 읽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소수의 지식인만이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까지는 일반인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입말 번역을 기록할 완벽한 문자체계가 없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훈민정음 창제가 있었다. 조선의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이 훈민정음을 창제(1443)할 당시 입말인 중세한국어 언해본으로 번역 · 출간될 때까지는 한문 불경의 입말로의 번역과 그 기록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본격적으로 입말 한국어로 기록된 번역 불전이 생겨나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후 50년간 출판된 책들 가운데 불경언해 출판물이 60%에 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는 문제는 앞으로 불교학계에서 짚어볼 주제인 것 같다.

세종이 수양대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에게 1449년 《능엄경》을 번역하라고 명해, 언해가 시작됐다. 이후 1461년 8월 22일에야 《능엄경》의 언해를 마쳤고, 세조는 교서관(校書館)에 명해 같은 해 10월 활자본으로 간행해 반포했다. 1461년 설치된 간경도감에서 《능엄경언해》(목판본 1462, 1472, 1495) 《법화경언해》(1463) 《금강경언해》(1464) 《반야심경언해》(1464) 《원각경언해》(1465) 등 많은 불경을 중세한국어로 번역 · 출간했다. 세종과 그의 아들 세조는 모든 이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하려는 꿈을꾸었다. 시대를 앞서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과 세조 그리고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성삼문(成三問, 1418~ 1456), 신숙주(申叔舟, 1417~1475)를 비롯한 훈민정음 창제를 도운 일군의 집현전 학사들은 모든 이들이 쉽게 읽고 쓰고 이해할 문자를 만들어 글말과 입말의 일치를 통해 지식의 보급을 꿈꾸었다.

이 시대에 세종과 세조가 꾼 꿈, 즉 양반은 물론이고 양인들과 노비들까지도 쉽게 알아듣고 쓸 수 있는 입말의 글이 이후 왜 쉽게 일반화되지 못했던 것일까? 또 모든 이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하려는 그들의 꿈은 왜 500년이 지나서야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그 시대적 한계란 무엇인가? 종이와 인쇄 가격이 너무 비쌌다. 또 조선은 정치적으로 신분제 사회로서 극소수의 양반 계층 외에 책을 읽고 지식 습득을 할 여유, 즉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필요성도 없었다. 한문을 쓰는 중심 문화의 지식인인 양반 유학자들에게 한문 불전은 물론이고 한글 불전도 필요치 않았다. 한문을 쓰지 못하는 주변문화의 양인과 노비들은 한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한글 불전이 필요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너무 비쌌고 불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인도 아니었다. 당시의 그들에게 한글 불전은 필요치 않았다. 숭유억불 시대의 사회 · 정치 · 문화적 장벽이 불전의 한글 번역을 더디게 만들었다. 유교 중심 사회에서 종교자유 사회로의 변화와 평등사회로의 변화와 같은 사회정치적 변화 그리고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과 경제구조의 변화 등등이 더 필요했다.

1894년 대한제국의 모든 포고문을 한글로도 반포하라는 칙령도 있었지만,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 이후 대한제국과 일제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어와 한글 사용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법적으로는 양반 신분이 사라졌다. 양인과 노비 그리고 승려는 독립적인 사회적 존재로 변했다. 같은 해 승려의 한양도성 출입도 허용되었다. 1911년에는 사찰령이 반포되며, 불교계가 일제 총독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일제 식민사회하에서 전 국민의 조상이 양반이 되는 사회가 촉진됐다. 한국인들의 조상이 노비인 사람은 사실상 사라졌고, 그들의 조상이 양반이라는 자기동일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 그들은 한문으로 관료를 뽑던 과거시험이 사라진 시대에 한문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어졌다. 또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던 전통 한지 대신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양지로 책을 인쇄하게 되면서 책값이 현저하게 낮아질 수 있었고, 일반인들을 위해 책을 펴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당시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은 한글 사용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백용성(白龍城, 1864~1940)은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았고 불경의 한글 번역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실천을 하게 되었다. 백용성이 《금강경》을 한국어로 번역(1921)하고, 이영재가 〈조선일보〉에 27회 연재한 〈조선불교혁신론〉(1922)에서 불경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후, 백용성의 번역은 계속됐다. 백용성은 1922년부터 1939년까지 22권의 불경을 번역했다. 한편 1464년 간경도감에서 발행된 《금강경언해》의 원간본 계통의 책이 1495년에도 인출되었는데,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이 책을 복간한 중간본(1575) 책판을 보수하여 1932년 많은 부수를 인쇄해 출간했다.

일제 식민시기에 일본어와 일본 글을 써야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에 대한 반발로 한글과 한국어 사용은 오히려 독립운동이 되었고, 시대 흐름이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불전의 한글 번역은 탄압과 견제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일군의 다른 민족종교보다는 보편종교라는 지위를 통해 일제와 타협할 여지가 있어서 계속될 수 있었다.

해방 후 사실상 새로운 나라 대한민국이 설립되고 나서는 그들 조상이 양반이었느냐보다는 친일파였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6 · 25 전쟁 이후 남쪽에서는 공산주의자였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쪽은 공산주의 사회였고 종교가 부정되는 사회였으므로 불전 번역과 관련된 문제는 논외로 하겠다.

1962년 마침내 조계종이 종단 3대 종책 사업의 하나로 불전 번역 사업을 채택했고, 조계종에서 구성한 역경위원회 사업으로 시작된 ‘고려대장경’ 전체 번역이 2000년에 완결되었다. 1991년 은정희의 《대승기신론소기회본》의 역주서는 불전 번역에 새로운 반향을 주었고, 이에 준하려는 번역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은정희 역주는 불교학자들도 읽고 인용하는 학술번역서의 지위를 가진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문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미래 한글 세대에게는 외국어 같은 면이 없지 않다. 앞으로 이런 점들은 한글세대를 위하여 한글세대 학자들에 의해 더 개선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에서 2007년 ‘한국불교전서’ 번역 사업을 시작해 2021년 1월 29일 ‘한국불교전서’ 100권 출간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 외에도 개별 연구자들의 훌륭한 번역 및 주석서가 나오고 있고, 다소 부족해 보이는 번역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불전 모두가 아직은 그것을 읽고 사유하며 그것을 논문에 인용하며 논하는 정본으로 정착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번역의 정확성 문제라든가, 번역문의 오 · 탈자, 번역문이 비문이거나 아름답지 못한 점, 보다 상세한 주석의 필요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사회와 학계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그 극복의 시간이 느리고 빠르고의 차이는 있겠으나 차차 극복되고 해소될 것이다.

영어에 보다 익숙한 이중 언어를 구사하는 미래의 한글 세대에게는 한문 용어가 많이 나오는 어려운 한글번역 불전보다는 쉬운 영어번역 불전이 더 가깝고 이해하기 좋은 불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미래 한글세대들은 앞으로 개선된 한글 불전번역을 주로 읽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번역들과 시대에 맞는 용어와 해석들이 반영된 보다 읽기 쉬운 새로운 번역들로 업데이트되어야 할 것이다. 주석과 해석도 더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더 많은 불교학 연구자들과 번역자들도 필요하다.

이 외에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저술들이 외국어로 번역된 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번역은 원효 《금강삼매경론》(Busswell, Robert E., 2007)이라든지 《이장의》(Muller, A. Charles, 2012) 등이 영어로 번역되었거나 번역 중에 있다. 버스웰과 뮐러 등은 한국불교 주석서와 한국 불교사원의 강원 교재 등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 2015년에는 최원호에 의해 원효 《기신론소기회본》이 프랑스어로 처음 완역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원효의 사유가 프랑스 철학계에서도 그들 철학과 비교 연구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번역들과 소개는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불교학은 아니다. 이런 번역은 주로 외국인을 위한 한국 불교학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번역들은 한국불교 연구자들의 다양한 층위를 만들고 연구 범위와 관점들을 확대해 갈 것이고 한국 불교학의 세계화에 기여할 것이다.

1차 문헌을 주로 다루는 불교 관련 연구자들과 달리, 예를 들어 심리학자나 의학자와 같은 불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서 불교의 응용 내지는 불교와 비교 · 융합하는 한국인 불교 연구자들이 불전을 읽을 때 굳이 한문 불전이나 산스끄리뜨나 빨리 혹은 영어 불전을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의미를 잃지 않고 추론이 잘못되지 않는” 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리로 가르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원효의 일음(一音)과 중음(衆音) 이해처럼, 앞으로도 각 시대에 맞게 ‘우리말에 맞게’ 번역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한국어 번역 불전들에 다소의 오역과 오 · 탈자 및 비문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주석이 다소 빈약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말에 맞는 한국어 번역 불전을 통해서 불교에 대한 더 많은 중생들 나름의 이해를 할 수 있고, 더 많은 연구물을 낼 수 있을 것이다.

 

4. 불교 학문 어디까지 왔나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가 도입될 당시는 고구려(372) · 백제(384) · 신라(?)의 삼국 체제 사회였다. 이 당시의 종교와 문화 전통은 고대의 조선 문명을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 중원 문명과 교류하면서 입말로는 고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였고 글말로는 중원 문명 글말인 한문을 사용하는 사회였다. 이들이 한문 불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당 대에 노장적으로 혹은 유가적으로 격의해 이해했듯이 고대 한국에서는 한국인의 격의(格意, concept-matching)를 통해 이해했을 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이 불교를 도입할 당시 어떻게 격의했을까에 대해서는 한국 불교학계에서 이렇다 할 진지한 논의가 없는 것 같다. 고대 한국인들이 불교가 도입될 당시 고대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으로 격의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종교학이나 철학에서는 더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고대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무엇일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윤병렬에 따르면, 고조선 문명의 고대 한국인들은 고인돌을 한반도와 만주 및 요하 지역과 산둥성 일대에 걸쳐 전 세계 현존 고인돌의 60% 정도를 세운 고인돌 문명인들이다. 그들은 이 고인돌 덮개돌에 별자리들을 새겼고 그것들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또 알게 모르게 그것들을 전승했지만 그 기원을 망각해오고 있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주목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이오니아 밀레토스의 탈레스(Thales, BC 624–620~BC 548–545)가 585년의 일식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가 하늘의 별들을 보다가 웅덩이에 빠졌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하늘을 사랑했던 것처럼, 고대 조선의 한국인들은 하늘과 별들을 관찰했고 사랑했다. 박창범에 따르면, 우리 문명은 기원전 2333년에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다섯 개의 별들이 루 별자리에 모였다는 기록 등 천문 현상 기록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보유한 그야말로 천문학의 나라다. 고대 한국인들은 그들이 만든 고인돌들의 덮개돌에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

현상학자 롬바흐(Rombach, H., 1923~2004)의 말을 빌려 말하면, 고대인들은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고대 조선인들도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고대 조선 문명의 하늘에 대한 사유와 천문학 지식은 후대에 계승되었다. 고인돌 덮개돌에 나타나는 28수의 별자리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계승되고, 조선 초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도 계승되었고, 현대에 우리가 쓰고 있는 만 원짜리 그림 안에도 계승되고 있다. 윤병렬에 따르면, 그들의 고향은 하늘이고 죽은 뒤에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으로 돌아가 수많은 별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이 되었다가 은하수를 따라 남하하여 생명을 관장하는 남두육성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이들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귀천사상과 윤회사상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불교의 육도윤회와 연기법을 그들의 이와 같은 자생적인 이해와 비슷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은 경천사상과 귀천사상 그리고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대 조선의 건국 이야기를 통해서도 나타나듯이 그들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고대 한국인들의 별을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한 사상은 불교를 이해하는 사고 틀이었을 것으로 가정한다. 그들 자신 안에 내재한 천명(天命) 내지는 천성(天性)의 고귀함에 대한 인식은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불교의 내재적 불성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불교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원효가 ‘성자신해(性自神解)’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이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자경도 이와 유사하게 말하고 있듯이,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에게 공적영지(空寂靈知)로 이해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수준에서 이해되고 표현되는 것으로 보인다. 원효와 같은 고향, 즉 경산 사람이었던 승려 일연은 그들 자신의 부계는 환인(桓因) 즉 하느님이고 모계는 웅녀(熊女) 즉 대지모신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되고자 갈망한 곰은 동굴에서 수행의 시간을 거쳐 자신 안의 고귀함을 깨닫고 인간으로 진화했다. 그것은 인간 싯다르타가 수행을 통해 니르바나를 얻게 되어 붓다가 되는 것으로 격의될 수 있는 이야기로 보인다. 고대 한국인들이 붓다의 니르바나를 웅녀의 깨달음과 유사한 것으로 격의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신문관, 1918)에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가 불교를 수용하고 교학이 일어난 시대이기에 ‘경교창흥’의 시대로 규정하는데, 그 ‘경교창흥’의 바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한국 불교학계에서는 아직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에 대한 관심이 ‘한국적인’ 불교학으로서 한국 불교학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규정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학 내의 학자들은 고대 한국인들의 자생적인 불교 이해 틀에 대한 연구에 아직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 한국 사상과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개척 상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원언어를 이해할 대상언어의 이해 틀이 비슷한 수준이 아닐 때 번역이 불가능하듯이, 외래 종교인 불교를 도입 초기에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니 적어도 격의하기 위해서라도 비슷한 수준의 자생적인 전통 종교사상 틀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 없이 불교의 도입과 토착화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전통 사찰을 답사하다 보면, 그 터가 불교 전래 이전에 전통 신앙지였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본다. 7세기 원효와 같은 위대한 불교 승려가 신라에 출현한 것은 신라 내의 자생적인 종교와 지성의 수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원효의 일심사상은 하나이신 하늘에 계신 님인 하느님의 이해 틀로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화쟁사상은 삼국통일의 역운적(易運的) 사건과는 별개로, 고대 조선의 자생적인 정치 사상적 메커니즘에서 출현한 합좌제도나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정치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존재 지혜의 이해 틀이 근저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또 최치원(崔致遠, 857~?)이 말하고 있는 삼교를 포함하는 풍류라는 현묘지도가 이런 종류의 자생적인 종교전통이며 존재 지혜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이능화나 이후 불교학자들 연구들에서는 이런 종류의 한국학적인 한국 불교학에 대한 고민은 잘 나타나지 않는 것 같다.

이능화는 고려시대의 불교를 선과 교가 함께 융성한 ‘선교병륭’ 시대라고 이름했다. 이는 보조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나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주장과 그 전통을 잘 정리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는 조선시대를 ‘선교통일’의 시대로 이름했다.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의 임제종 법맥이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을 거쳐 후기까지 이어졌고, 휴정이 선을 중심으로 교를 포섭하면서도 유 · 불 · 도의 조화를 말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화쟁사상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요청에 따른 응답 차원에서 고려할 존재 지혜 전통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능화는 조선시대 불교를 쇠퇴기로 폄하하는 후루타니 기요시(古谷淸) 같은 일본인 학자들의 제국주의적 시각과 달리 한국불교의 정체성이 형성된 시기로 본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불서의 수와 인물 그리고 정보는 가히 숭유억불의 시대로만 단순화해 간주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불교학은 일본을 통해 수입된 유럽적 근대의 불교학 연구방법론을 지향하면서도 동시에 일본의 식민적 관점에 반발하는 내용의 불교학 연구와 전통적인 강학과 주석적 불교학이 혼재하면서 이어진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임제종을 계승하는 조계종단에서 간화선을 학문적으로나 신행의 측면에서 선양하려는 노력들이 지속되고 있다. 동국대, 승가대, 금강대, 위덕대와 같은 종립대학에서는 전문적인 불교학 연구가 교육이 계속되고 있고, 그 외 여러 학교에서는 서양철학과의 비교연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종홍은 서양철학자이면서 동양철학과 한국철학 그리고 불교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며 사실상 서울대학교에서 심재룡과 같은 불교철학 연구자들이 나올 수 있도록 영감을 준 학자이다. 그는 현상학과 불교철학을 비교하며 향내적(向內的) 특징으로 불교철학을 설명하기도 했다.

신라와 통일신라 불교 연구는 어느 정도 진행된 것들이 있으나, 그 이전에는 거의 다룰 수 없었던 백제불교 연구에 대해서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연식과 독일인 연구자 플라센의 혜균 《대승사론현의기》의 백제 찬술설 연구 논문이다(2006). 이 책은 원효 이전 저술로서, 7세기 백제와 신라의 삼론학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다. 불교 문헌학적인 연구방법론에 입각한 많은 연구물을 내는 김천학도 백제 삼론학의 실마리를 알 수 있는 연구들도 발표하고 있는 점은 현대 한국 불교학의 고무적인 모습이라 생각한다.

박성배, 오법안, 심재룡, 길희성 등 한국불교 관련 연구로 영어권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쓴 1세대들이 1980년대에 연구물들을 내면서 다소의 변화가 생겼다. 이후 유시 버클리(U.C. Berkley) 출신 불교학자들과 수니(SUNY, Stoneybrook) 출신 불교학자들, 유시엘에이(UCLA) 출신 불교학자들이 대표적인 한국불교 연구자들로 한국과 미국 학계에서 미국적인 한국 불교학으로 한국 불교학에 많은 자극을 주고 있다. 2010년대 이후 박진영은 동아시아 불교학 특히 선과 화엄 및 젠더 문제 등 폭넓은 연구를 하고 있다. 홍창성은 불교학을 심리철학적 관점에서 비교 및 융합적으로 연구하는 등 한국 불교학계에 자극을 주고 있다. 이들은 미국에서 철학자로 활동하며 불교를 연구하는 한국인들이다.

최근 홍창성이 지적하고 있듯,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조건에 의해 임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연기(緣起)와 이에 기반해 어떤 존재자도 고정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무아와 공의 가르침이 붓다 가르침의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학자들과 현대의 승려들 가운데 이에 모순되는 ‘참나’라든가 주인공을 사용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 있다. 이것들도 현대 한국 불교학자들에게는 고민하고 연구할 주제 중심의 불교학 연구가 아닐 수 없다.

프랑스고등연구원(EPHE)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원호는 프랑스 현대철학 관점에서 원효의 일심사상을 비교 연구하는 학위논문을 발표하고, 학위논문의 부록으로 원효 《기신론소기회본》의 프랑스어 최초 완역을 발표하기도 했다(2015). 콜레쥬 드 프랑스에 재직하는 그의 지도교수인 호베르(Robert, Jean-Noël, 1949~  )는 이 논문에 대해 “문헌학과 종교적 철학적 사유체계를 동시에 보여준 논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나는 최원호와 같은 연구자들에게서 문헌학에 기반한 종교철학적 연구, 특히 프랑스적 철학에 기반한 어떤 한국적 불교학 연구가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아직은 그가 발표한 이렇다 할 연구물은 없지만, 그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지만 발표되지 않은 사유의 글들이 기대된다.

최근 들어 시도되는 비교 연구 내지는 융합 연구들 가운데 의학과 불교학을 비교 연구한 융합 연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7년 창립된 한국명상치료학회나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 그리고 2008년 창립된 한국불교상담학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명상과 심리학 및 치료에 관심을 갖는 연구들이 많아졌다. 또 불교가 ‘고통을 없애서 행복을 준다’는 점에서 현대의 심신의학이나 라이프 스타일 의학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 현대의 정신신경면역학이나 심신의학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의 실천과 수행이 통증과 고통을 완화하는 데 의학적 효과가 실제로 있다는 것이다. 엔돌핀과 같은 진통제, 세로토닌과 같은 우울증 치료제, 도파민과 같은 파킨슨병 치료제 이외에도 항암제, 소염제, 항산화제 등과 같은 무수한 내인성 약물들이 실제로 우리 신체 내부에서 만들어지고 있고, 이러한 물질의 생성과 조절을 우리 마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맺음말

이 원고를 준비하면서 한국 불교학의 연구 범위가 아주 방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또 중요한 연구성과들이 아주 많다는 것도 더 알았다. 나의 과문을 반성하는 계기도 됐다. 지면의 한계상 다루지 못한 것이 많아 아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일단 마무리를 짓고, 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자는 다짐을 한다. 간단히 정리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한국 불교학 관점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한국불교의 보편적 특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다. 그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것을 찾는 것은 모든 배움과 물음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숙명이다. 예를 들어, 붓다의 실체를 부정하는 무아의 중심 없는 가르침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해석학적 지평에서 중심 없이 흔들리고 있다. 같은 한국인들이라 하더라도 힌두교적 영향하에 있는 이들, 노장의 영향하에 있는 이들, 유가적 영향하에 있는 이들, 기독교적 영향하에 있는 이들과, 하늘을 사랑하고 별을 사랑한 천문의 나라, 고인돌의 나라 후손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그들의 시대와 그들의 믿음 지평에서 받아들인다. 최대한 붓다 가르침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그들 나름의 언어로 이해하고 깨닫게 되며 자신들의 언어를 잊었다가 또다시 그들 자신의 언어로 또는 침묵으로 그것을 드러낸다.

한국 불교학 관점에서 모든 불전은 한글화해야 한다. 그런데 불경의 한글화 사업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전의 한글화 사업은 여전히 한국 불교학의 미래다. 그 출발은 세종과 세조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1895년 대한제국에서 모든 포고문을 한글로 공지하라고 하기까지 한자 전용 시대였다. 그래서 불전도 한문으로 한자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글 세대에게 굳이 그것이 한자로 한문으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현재와 미래의 한글 세대를 위해 지금 한국 불교학에서는 불전의 온전한 한글 번역이 더욱 필요하다. 붓다의 가르침이 한글로 한국어로 될 때, 한국어와 한글을 아는 모든 이들에게서 그 빛이 더욱 반짝이게 될 것이다.

한국 불교학 연구자들은 이제 동국대 출신에 국한하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 국내 여러 대학의 다양한 전공에서 박사학위 연구자들을 배출하고 있으며, 2000년대 이후 해외 유학 연구자들도 더욱 많아졌다. 일본과 중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많은 연구자들이 귀국해 활동하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인도, 스리랑카 등에서도 불교학 관련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구자들이 있다. 학문 풍토와 배경이 다른 여러 대학과 여러 나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들의 증가로 연구의 방향과 내용도 다양해지고 풍부해지고 있다.

모든 불교학 연구들을 통해 그들 자신 안에서 반짝이는 자신의 별을 모두 자기 눈으로 찾기를 바란다. 그 별이 텅 비었든 무엇인가로 충만하든, 그들이 믿는 믿음에 의해 온전한 그 자신의 언어로 온전한 그 자신의 빛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붓다와 다르지 않게 드러나기를! ■    

 

김원명 wonhyoph@hanmail.net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학과장, 인문대학 부학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한국 근대 불교학의 과제와 전망〉 〈조주의 선문답에 대한 언어비판적 분석〉 등과 저서로 《원효》, 역주서로 《원효의 열반경종요》 등 다수가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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