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수선님 2022. 11. 6. 14:39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지음/ 노혜숙·유영일 옮김, 2004, (주)양문

1장. 마음은 내가 아니다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아무리 다가가도 붙잡을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어떠한 힘 앞에서도 부서지지 않는 그 무엇, 겉거죽의 나보다 훨씬 위대한 그 무엇에 연결된 상태입니다. 내 이름과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 상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단절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스스로를 외로운 섬으로 여기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엄습하고 안팎으로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 다시 말하자면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선 감정적인 고통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감정적인 고통은 육체의 고통과 질병의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원망, 증오, 자기 연민, 죄의식, 분노, 우울, 질투, 심지어는 사소한 조바심조차도 모두 고통의 모습들입니다. 쾌락이나 감정적인 도취는 고통의 씨앗을 함께 내포하고 있어서 언젠가는 반대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 내는 고통과 마음과 육체 속에 아직 살아 남아 있는 과거의 고통이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순간 고통을 창조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과거의 고통을 녹일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장. 고통에서 벗어나기

  지구에 사람은 없고 식물과 동물만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도 여전히 과거와 미래가 있을까요? 그래도 여전히 시간이 가치를 지니게 될까요? 거기에서는 '지금 몇 시야?'라든가 '오늘이 며칠이야?'라는 질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떡갈나무나 독수리는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을 겁니다. "시간이라고?" 그리고 답할 것입니다. "글쎄,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이지 뭐. 시간은 지금이야, 달리 뭐가 있겠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면, 과거에 받은 고통의 찌꺼기를 당신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시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실생활에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현재의 순간만이 내가 갖고 있는 전부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을 삶의 구심점으로 삼으십시오. 시간 속에 살면서 잠깐씩만 '지금 이 순간'에 들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살면서 실제로 필요한 경우에만 과거와 미래를 잠깐씩 방문하도록 하십시오.

  현재의 순간에 항상 '네'라고 말하십시오. 이미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는 것보다 무익하고 어리석은 태도가 있을까요? 삶은 항상 '지금'이 있을 뿐인데도, 그러한 삶 자체에 반대하는 것보다 더 미친 짓이 있을까요? 있는 그대로 내맡기십시오. 삶에게 '네'라고 말하십시오. 그제야 삶은 당신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3장.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시간은 전혀 귀중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란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시간에서 벗어난 한 지점인 '지금'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당신이 과거와 미래에 초점을 맞출수록 당신은 가장 소중한 '지금 여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랗다면 왜 '지금'이 가장 중요할까요? 무엇보다 '지금'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현재'야말로 우리의 전체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남아있습니다. 삶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아닌 삶이라는 건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4장. 마음은 지금을 교묘히 회피한다

  생각과 감정을 지켜보는 법을 배워서 자신의 내면에 일상적인 무의식이 배경처럼 깔려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면, 당신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무의식 상태에서는 한시도 편안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판단하고, 불평하고, '지금'과는 동떨어진 상상을 하는 등, 현존에 대한 저항을 곳곳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감정의 차원에서는 또 어떨까요? 불안, 긴장, 권태, 초조함이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모두가 마음의 습관적인 저항 방식입니다.

  당신은 말할지도 모습니다. 언젠가는 그것을 해내겠다고. 당신은 목표에 지나치게 전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재의 순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고 있지 않나요? 그래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떤 미래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만일 그러한 마음의 유형을 발전시킨다면 당신은 무엇을 얻거나 달성했더라도 현재가 결코 충분히 만족스러울 리 없습니다. 미래가 항상 더 좋아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불만스럽고 부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많은 사람이 행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행복은 미래에 올 수 없습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충분히 받아들이십시오. 지금 가진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가진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에 대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현재의 순간에 대해 감사하면서 지금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면 언젠가 행복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이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목적지나 방향을 아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행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 내딛고 있는 걸음이라는 것을. 그것이 전부입니다.

  삶의 여정에는 외부적인 목적과 내면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외부적인 목적은 목표나 목적에 도달하고, 계획한 것을 달성하고, 이런 저런 일을 성취하는 것으로, 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미래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지금 내딛는 걸음보다 목적지가 더 중요해진다면, 우리는 내면적인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행의 내면적인 목적은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와는 관계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 순간의 의식 수준과 관계가 있습니다. 외부의 여행은 수많은 발걸음을 포함합니다. 내면의 여행은 오로지 하나, 지금 내딛는 걸음뿐입니다. 그 걸음을 좀 더 깊이 인식하면, 거기에 이미 목적지뿐 아니라 다른 모든 발걸음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한 걸음이 아름답고 훌륭한 행위로 변화되고 완벽해집니다. 그것은 우리를 현존 속으로 데려가고, 현존의 빛이 그것을 통해 비쳐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 여행, 자기자신 속으로의 여행의 목적이자 완성입니다.

5장. 지금 여기에 깨어 있다는 것

  선사들은 통찰의 순간을 '삼매'라고 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현존하는 무심의 순간입니다. 삼매는 영속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반가운 일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달음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여러 번 경험했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웅장함, 신성함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존이 필요합니다. 맑게 개인 밤하늘의 무한한 공간을 응시하면서, 그 완전한 평온함과 불가해한 광활함에 위압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숲속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진정으로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습니까? 고요한 여름 저녁 해질 무렵에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지해야 합니다. 잠시 개인적인 고민거리를 털어버리고, 과거와 미래,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바로 완전한 현존이 요구되는 겁니다.

  외부적인 형상의 아름다움 너머에는 이름을 부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깊은 내면의 성스러운 본질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러한 내면의 본질이 언뜻언뜻 비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현존하고 있을 때에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불가해한 본질과 당신의 현존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없어도 그것이 거기 있을까요?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십시오. 거기서 당신 자신을 찾아 보십시오.

6장. 몸 안에 뿌리 내리기

  '존재'를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존재'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데도, 마음은 항상 그것을 움켜잡아서 작은 상자에 넣고 그 위에 이름표를 붙이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존재' 속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합쳐져 있습니다.

  '​존재'는 이름과 모습을 초월하여 영원히 '내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당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깊이 뿌리내린 상태로 머무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당신이 보고 만질 수 있을 몸은 당신을 '존재'로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당신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은 겉껍데기에 불과하며, 기껏해야 좀 더 깊은 실재를 제한하고 왜곡해서 지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본연의 상태에서는 좀더 깊은 실재를 보이지 않는 몸 안에서 활기찬 내면의 현존으로 매순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안으로부터 몸을 느끼는 것이며, 몸 안의 생명을 느끼고 그로써 당신이 외적 형태를 초월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때는 마음으로만 듣지 말고 몸 전체로 들으십시오. 몸 안의 에너지 영역을 느끼면서 들으십시오. 그러면 생각으로부터 주의력이 돌려져서 마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고요한 공간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만 온통 사로잡혀서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줄 모릅니다. 상대방이 말하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에 더 많이 신경씁니다. 더 나아가서 정말 중요한 것, 다시 말하자면 상대방의 말과 마음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존재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물론, 당신은 당신 자신의 존재를 통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됨의 실현이요 사랑의 시작입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당신은 모든 삼라만상과 하나입니다.

7장.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기

  당신은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외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의 뒤쪽 어딘가에서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는 고요함을 당신은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와 현시된 세상 사이에, 신과 이 세상 사이에 놓인 다리가 됩니다. 이렇게 근원과 연결된 상태를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가 현시된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어떻게 분리되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안에 있는 생명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내적인 본질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 속에 널리 스며 있습니다.

  모든 소리는 침묵에서 태어나서 침묵으로 돌아가서 소멸하며, 살아있는 동안에도 침묵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침묵은 소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소리, 모든 곡조, 모는 노래, 모든 말이 지닌 특성이며 동시에 현시되지 않은 세계의 일부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서 침묵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침묵만큼 신성한 것이 없다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 사이의 무언(無言)의 틈새를 의식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내면은 점차 고요해질 것입니다. 내면이 고요하지 않으면 침묵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밖에는 침묵이 흐르고 안에는 고요함이 자리잡으면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8장. 성숙한 인간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체적인 즐거움이나 여러 가지 심리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런 것들이 두려움이나 결핍감에서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육체적인 쾌락을 통해 얻어지는 생동감이나 심리적인 만족을 통해 얻어지는 좀더 안전하고 완전한 자의식입니다. 불만족스럽거나 불충분한 상태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만족은 필연적으로 단명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만족이나 충족의 조건을 자꾸만 '지금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상상의 지점에 갖다놓게 됩니다.

  '이런 것을 얻고 저런 것에서 자유로워질 때, 그때가 되면 나는 만족할 것'이라는 생각은 무의식적인 마음이 미래의 어딘가에 구원의 환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은 두려움, 고통, 결핍감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모든 갈망과 욕구와 욕심,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그것은 편집증적인 생각과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심리적으로 필요로 하는 과거와 미래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에게 지금 여기서는 그런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려면, 그래서 자유롭고 만족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러저러하게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구분하고, 분류하고, 실행하고, 성취하고, 달성하고, 무언가를 이해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시간을 구원으로 가는 수단으로 보고 있지만, 실은 시간이야말로 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이 그곳에 갈 수 있는 지점은 '지금 여기'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이미 거기에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거기에 도달합니다. 당신이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당신은 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조건도 이용할 수 있지만, 특별한 조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접근하는 지점은 오로지 '지금'뿐입니다. 이 순간으로부터 멀어지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동반자가 필요한가요? 그 자리에서 '지금'으로 들어가십시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지금'으로 들어가십시오.

  마음은 근본적으로 판단하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고, 있는 그대로에 저항함으로써 갈등과 사건과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 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마음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지 않는다면, 마음의 이런 충동적인 성질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판단을 중지하는 순간 당신은 실제로 마음에서 해방됩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십시오. 그런 다음엔 당신의 파트너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십시오. 변화를 위한 가장 커다란 촉매는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을 판단하거나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당신은 에고를 즉각 초월하게 됩니다. 모든 마음의 게임과 중독적인 집착이 일시에 막을 내립니다. 더 이상 희생자도 가해자도 없으며, 비난하고 비난받는 일도 없게 됩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고, 상대방의 무지에 휘말려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도 없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함께 '지금' 속에서 더 깊이 현존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 신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생명체의 밑바닥에 흐르는 영원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당신 자신과 삼라만상 속에 깊이 내재한 '하나의 생명'의 현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신의 사랑입니다.

9장. 행복과 불행을 넘어선 곳에 평화가 있다

  동식물을 지켜보면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지금 여기'에 온전히 내맡기는 법을 배우십시오. '존재'를 배우십시오. 하나가 되는 법을, 자기자신이 되는 법을, 참되게 존재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한 완전함을 배우십시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삶과 죽음을 문제 삼지 않는지를 배우십시오.

  마음이 만들어 내는 온갖 대립을 초월하면 당신은 깊은 호수 같은 존재가 됩니다. 당신의 외부적인 삶의 상황은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호수의 수면과 같습니다. 주기와 계절에 따라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바람이 불고 거칠게 파도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호수 깊은 곳은 언제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당신은 호수의 수면이 아니라 호수 전체입니다. 당신은 고요하게 남아있는 당신의 깊은 내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삶의 상황에 연연함으로써 변화에 저항하지 않습니다. 당신 내면의 평화는 외부적 삶의 상황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변하지 않는, 시간이 없는, 죽음이 없는 존재 안에 거주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겉거죽의 세상에서 행복이나 성취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끊임없이 변화되는 세상을 즐기고, 세상과 더불어 놀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고,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 무엇에도 집착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10. 내맡김의 지혜

  어떤 사람들은 '내맡김'이라고 하면 패배와 포기, 삶의 도전 앞에서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부정적인 의미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내맡김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 대책 없이 수동적으로 참고 지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지 않고 긍정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내맡김은 삶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지혜입니다. 당신이 삶의 흐름을 경험하는 유일한 장소는 '지금'이므로, 내맡김이란 지금의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에 대한 내면의 저항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저항은 마음의 판단과 부정적 감정을 통해 있는 그대로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세상살이가 잘못 돌아갈 때 그렇게 말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과 지금 있는 것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고통의 틈새입니다. 세상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라면, 살아가면서 일이 잘못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고통과 슬픔을 겪지 않으려면 온전히 내맡기기 위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마자, 당신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존재'와 연결됩니다. 저항은 마음입니다.

  내맡김은 순수한 내적 현상입니다. 외부적으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내맡긴다고 해서 모든 상황을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단지 '지금'이라고 불리는 미세한 조각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당신의 내면에는 당신의 삶의 상황을 구성하는 일시적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며, 내맡김을 통해서만 거기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생명이요 당신이라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시간 없는 현존의 영역에서 영원히 존재합니다. 예수는 이 생명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오직 한 가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