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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귀 기울이면 자비심이 싹 튼다” - 틱낫한

수선님 2022. 12. 11. 13:57

“고통에 귀 기울이면 자비심이 싹 튼다”

 

틱낫한 스님(Thich Nhat Hanh 釋一行, 1926~ )은?

베트남 출신의 승려이다. 명상가, 평화운동가, 시인으로도 불린다. 불교사상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해 ‘참여불교의 주창자’, ‘인류의 영적스승’이란 별칭도 갖고 있다.

1926년 행정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16살에 출가했다. 불교의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면서 “모든 불교는 삶에 참여한다.”는 참여불교(Engaged Buddihsm)운동을 주창하고,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는 실천적 사회운동을 펼쳤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강의하였다.

베트남전쟁 때는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전쟁 난민을 돕기 위한 사회청년봉사학교를 열었다. 이런 활동으로 1967년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불교평화 활동을 이유로 베트남 정부에 의해 귀국 금지조치를 당해 1973년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베트남전쟁 후 프랑스로 들어오는 보트피플을 위해 수용소를 세웠고, 1975년 파리 근교에 ‘스위트 포테이토’를, 1982년 보르도에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를 세워 명상공동체를 이끌었다. 1990년에는 미국 버몬트주에 승원 ‘단풍림’과 수행원 ‘그린 마운틴’을 설립하기도 했다.

불교의 명상법을 일상과 접목한 〈화〉, 〈틱낫한의 사랑법〉 등 80여 권의 저서를 썼다. 1995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2013년 5월 방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한 틱낫한 스님.
 

제임스 도티(James Doty)는 스텐포드대 신경외과 의학박사이다. 그가 소속된 CCARE센터(The Center for Compassion and Altruism Research and Education, 자비와 이타심 연구·교육을 위한 센터)는 자비로운 언행의 신경학적 근거와 기반을 연구해 왔다. 그 결과, 마음수행을 통해 뇌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과학자들은 이런 관계를 발견하는데 수백 년이 걸린 반면, 수행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 그들은 놀랐다. 그들은 이 연구를 통해 자비심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이롭게 하고, 행복감을 고취시키며, 나아가 혈압을 낮추고, 수명을 연장시켜준다는 결과를 도출해냈다.

도티 박사는 틱낫한 스님의 강연의 진행을 맡았다. 그는 먼저 열여섯 어린 나이에 출가한 동기를 궁금해 했는데, 스님은 “열한두 살쯤 불교 잡지 표지에서 부처님 그림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평온해 보여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제 주변 사람들 중에 그렇게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됐다.”고 답했다.

이어 베트남전쟁 당시 많은 스님들이 사찰에서 수행에 전념할 때,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해 스님은 “마음챙김은 나의 몸과 마음 · 의식의 구조와 함께 가족 · 공동체 · 국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을 포함한다. 내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면 타인의 고통이 보이고, 그들이 덜 괴로워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진다.”면서 “불교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교학보다는 (전쟁 중에)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수행을 하고 싶었다. 불교를 공부해, 이를 가족과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적용해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 도티 박사는 스님에게 마음챙김을 바탕으로 어떻게 하면 상대의 고통에 제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오랜 기간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도 일상 속에서 마음챙김 수행을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다음은 그에 대한 답변형식의 강연이다.

사람들은 고통에 대한 인식을 두려워하는데, 그러다 결국 고통을 다룰 수 있는 힘에 대한 희망마저 잃습니다. 스스로의 고통을 먼저 다루지 못하면 타인을 도울 수 없습니다. 마음을 ‘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세요. 숨쉬기 · 좌선 · 걷기 수행 등을 통해 고통을 감소시키며, 긴장감을 떨쳐내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틱낫한 스님이 강원도 월정사에서 자비심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3초의 들숨으로 가능한 마음챙김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들숨에 집중하여 마음을 몸에 돌려보내세요. 들숨에 마음챙김의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3~4초 밖에 지속되지 않는 들숨만으로도 마음챙김 · 집중 · 통찰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한순간에 오롯이 하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에서 나를 견고히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삶의 경이로움에 다가서면 이곳에 존재함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은 3~4초간의 마음챙김 수행 후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바로 여기, 현재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즉시 즐거움과 행복이 생성됩니다. 충분히 쉬운 일이지요. 마음챙김 수행자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행복을 만들어 냄으로써, 고통 · 분노 · 폭력 등과 같은 감정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자비로워지는 것이지요. 타인에 대한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돌볼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수행자들은 고통 받는 방법과 고통을 다루는 방법을 배웁니다. 마치 연꽃을 피워내기 위해 진흙을 사용하는 법을 알아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 없이는 행복과 자비도 없습니다. 수행자는 마음챙김과 집중의 에너지를 통해 내재된 고통을 감지하고, 부드럽게 다독이며, 자신의 고통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 자체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고통도 마음챙김과 같이 에너지의 일종이기 때문에 에너지를 끌어안으면 변화가 옵니다.

우는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고통을 달래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에너지가 아이의 몸을 통과해 고통을 완화해 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정성을 다해 아이를 계속 안으면 아이가 느끼는 고통의 원인을 파악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고통을 다독이는 수행자는 자신의 아이를 안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 자신의 아이를 부드럽게 다독여주세요. 고통을 억누르려 하지마세요. 아이를 윽박지르면 안 되죠. 행복의 근원인 이해심과 자비심을 끌어내기 위해 고통을 활용하세요. 진흙과 연꽃의 관계처럼 고통과 행복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고통에 귀 기울여 고통의 성격을 간파하고 나면, 이해심과 자비심이 생깁니다. 이것이 자비심의 생성원리입니다.

타인을 잘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고통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집중하면 그 사람은 고통을 다룰 줄 몰라서 고통의 피해자가 되었고,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에게 고통을 전가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면, 더 이상 그에게 화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하는 대신, 여러분은 그가 고통을 덜 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일상 속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 가능합니다.

틱낫한 스님을 비롯한 사부대중들이 월정사에서 숲걷기명상을 하고 있다.
 
 
 

 

고통과 행복은 ‘더불어’ 있다

 

자비심에 있어 고통에 대한 이해는 아주 중요합니다. 진흙에서 연꽃이 피듯 고통의 유용함을 생각해보세요. 제가 생각하는 불국토는 고통이 없는 곳이 아닙니다. 고통 없이는 행복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더불어 있음(interbeing)’의 가르침입니다. 오른쪽 없이는 왼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더불어 상호 연기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자비심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면 꽃은 꽃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꽃에서 구름을 볼 수 있습니다. 구름 없이 꽃은 자랄 수 없습니다. 저는 꽃에서 햇살 · 각종 유기물 · 정원사 · 토양과 같은, 꽃이 아닌 요소들을 봅니다. 이 요소들이 모여서 꽃이 삶의 경이로움을 피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비도 이와 같은 한송이 꽃입니다. 자비가 아닌 요소들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고통에 귀 기울일 용기가 있다면 누구나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대다수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도피합니다. 고통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신 소비를 통해 고통을 덮어버리려 합니다. 음악 · 음식 · 인터넷 등은 우리가 ‘자신에게 귀향(going home to ourselves)’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것에는 불안감 · 슬픔 등과 같은 독소가 내재되어 있고, 결국 우리 마음 속 고통은 커져만 갑니다. 진정한 수행은 자신의 두려움에 귀향하는 것입니다.

 

중앙승가대학에서 학인 스님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하고 있다.
 
 
 

수행을 이제 막 시작했다면 마음챙김 수행공동체의 집단 에너지에 기대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수행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비는 개인적 에너지일 수도 있지만, 집단적 에너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수행은 한 방울의 물과 같습니다. 한 방울의 물은 강물 전체가 그를 껴안아 운반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내주어야 합니다.

자비는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플럼빌리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서로에 대한 화 · 의심 · 공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쳐다보거나 대화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첫 주에는 두 그룹이 따로 마음챙김 숨쉬기, 걷기 등을 통해 고통을 다독이거나 안는 연습을 하도록 합니다.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며 고통이란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도록 합니다. 곧 분노 · 의심 · 공포 같은 감정은 잘못된 인식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마음챙김과 집중은 이해와 통찰력을 가져오고 이를 통해 부정적 감정을 전환해 나갑니다.

둘째 주에는 ‘마음을 다해 듣기(deep listening)’와 ‘자비롭게 말하기(compassionate speech)’ 연습을 합니다. 한 그룹은 타인에 대한 질타나 비난 없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고, 우리 100여 명은 앉아 마음챙김 수행에 몰입해 자비의 에너지를 생성함으로써 그들이 말하기 힘든 것도 뱉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다른 한 그룹은 ‘마음을 다해 듣기’를 연습합니다. 우리는 잘 듣기 위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타인의 말이 짜증이나 화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면 우리는 곧 자비심이 흐트러지고, 더 이상 듣기를 계속 할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나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를 듣고 있어. 이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뱉어내고 덜 고통스러워하도록 도와줘야지.’라고 말해보세요. 이러한 자비심이 계속 유지되면 더 이상 말하는 사람에게 화나 짜증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잔뜩 하고 있지만, 내가 지적을 하면 언쟁이 될 테니 지금 이 시간은 듣기만 해야지. 그리고 며칠 후에 잘못된 생각을 고칠 수 있도록 넌지시 알려줘야지.’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듣기의 미학입니다.

중앙승가대학 학인 스님들이 틱낫한 스님의 지도아래 이완명상을 체험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하는 4박5일 명상수행에 동참한 한 스님이 월정사에서 ‘5가지 마음챙김’에 대한 법문을 들은 후 질문을 하고 있다
 
 
 

마음을 넓혀주는 사무량심

이런 수행을 통해 다른 편 사람들도 우리 편 사람처럼 고통 받고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저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이 고통 받고 있음을 알게 되면 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이 모두는 10여 일 만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수행이 끝나면 그들은 하나가 되어 중동으로 돌아가는데, 다른 사람도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납니다.

자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의 네 가지 다른 요소도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자애(慈, loving kindness)’입니다. 사랑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이는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애는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의지와는 다릅니다.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 할수록 상대는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리안(durian)’이라는 열대과일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저는 그 과일을 못 먹습니다. 가끔 제 건강을 생각해서 두리안을 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저를 사랑함으로써 저를 괴롭게 만듭니다(웃음).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자애는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많은 시간과 깊이 있는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다음은 ‘자비(悲, compassion)’가 있습니다. 자비에는 고통을 달래주는 힘이 있습니다.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자세히 관찰하고, 잘 들어야 합니다. 이해는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행복과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비로 스스로를 돌보시기 바랍니다.

세번째는 ‘즐거움(喜, joy)’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상대를 울게 만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선물을 사주지 않고도 상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마음챙김을 통한 호흡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해보세요. “당신을 위해 내가 여기 있어요.” 사랑하는 것은 상대의 곁에 있어주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여러분의 존재를 상대에게 내어줍니다. 나의 존재를 내어주면서 상대의 존재도 인지하게 되고, 그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됩니다. 다음에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서 나는 정말 행복해요.”라고 말해보세요. 사랑받는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받는 일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일들이 서로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포용성(捨, inclusiveness)’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면 상대의 문제는 내 문제가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야, 그건 자기 문제야.”라고 하지는 않겠죠?(웃음) 진정한 사랑에 있어서 행복과 고통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계속 사랑을 확대해 나가다보면 아마 여러분은 우리 모두를 보듬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네 가지 요소를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부릅니다. 사무량심은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주어 끝없이 넓어지게 할 것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은 한 잔의 물에 한 줌의 소금을 섞고는 “이 짠 물을 마실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소금을 거대한 강에 뿌리면 여전히 수천 명의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자비심으로 가득한 마음이 넓은 사람은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한 줌의 소금은 큰 강을 고통스럽게 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사람 · 동물 · 식물 · 유기물을 모두 보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권한 사랑입니다.

차별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으면 더 이상 괴로움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위해 진정한 사랑을 일구고 가꾸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뭉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나면, 우리에게 사회를 변화시킬 힘이 생길 것입니다.

 

이혜인

부산외국어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영어 · 교육학 · 한국불교를 공부했다. 2013년 초 인도에서 열린 샤카디타 세계불교여성대회에서 통 · 번역을 했던 것을 계기로 불교 번역에 입문했다.

번역·이혜인 ggbn@gg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