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 이야기

수선님 2023. 3. 12. 13:25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 이야기> 

중국 송나라시대 선승으로 임제종(臨濟宗) 양기파(楊岐派)에 속하며, 속성은 해씨(奚氏), 대혜(大慧)는 호, 종고(宗杲)는 법명으로, 지금의 중국 안휘성(安徽省-안후이성) 선성시(宣城市)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꿈에 신인(神人)이 한 스님을 모시고 오셨는데, 얼굴은 검고 코는 오뚝했다. 침실에 이르렀기에, 그 스님의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북악(北岳)이라고 대답했다. 잠을 깨고 보니 태기가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날에 찬란한 빛이 방을 비추니, 온 마을 사람들이 놀라면서 기이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대혜는 장난을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그가 열두 살 때 하루는 서당에서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먹물 통을 던졌는데, 그만 선생님의 모자에 맞고 말았다. 먹물을 뒤집어쓴 선생님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어린 학동은 300냥의 배상금까지 물어내야 했다.

그가 돌아와 말하기를, “세간의 서적을 읽는 것이, 어찌 출세간의 법을 궁구(窮究)하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하더니, 16세에 출가를 단행했다. 출가 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수행하다가 마지막에 <벽암록(碧巖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 선사 문하에 들어가 임제선(臨濟禪)을 수행해 깨달음을 얻어 마음의 눈을 떴다. 그의 나이 37세 때의 일이었다.

스승 원오 선사 열반 후, 1137년에 항주(杭州)의 경산(徑山) 능인사(能仁寺)로 옮겨가 선종을 크게 선양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천 명의 승려들이 몰려와 설법을 들었고, 제자만도 2천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당시 송 황제였던 효종(孝宗)에게 설법을 하고 대혜선사(大慧禪師)’란 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선사를 부를 때 대혜종고(大慧宗杲)’라고 한다. 

일생을 오로지 설법과 수행에만 정진하다가 1163년 어느 날 저녁에 한 별똥이 아주 밝은 빛을 내면서 경산 서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대중들이 봤다. 스님께서 그 후 몸이 조금 불편함을 보이다가 대중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일 가겠다.”하더니, 그날 저녁에 유표(遺表)를 손수 쓰고 아울러 뒷일을 부탁했다. 이에 요현(了賢)이라는 제자가 게()를 청하니, 선사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섰다. 

 

생야지임마(生也只恁麽) - 삶도 이대로 였고, 

사야지임마(死也只恁麽) - 죽음도 이대로인데, 

유게여무게(有偈與無偈) - 남길 말이 있느니 없느니 하니, 

시심마열대(是甚麽熱大) - 이 무슨 번거로움이냐. 

 

대혜 선가가 활동하던 당시 고승들은 입적이 다가오면 임종게(열반송)을 남기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대혜 선사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제자들은 한 말씀 남겨야 한다는 입장과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의논 끝에 요현이 게를 청한 것이다. 

그런데 대혜 선사의 생각은 달랐다. ()의 생명력을 상실한 채 형식화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대혜 선사는 게송이 없으면 죽지도 못하느냐?”고 일갈했을 정도로 그런 풍토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다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스승의 한 마디를 기다리니, 그래서 남긴 열반송이 “(남길 말이)있고 없음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며, 이 무슨 번거로운 일이냐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미 삶과 죽음(生死), 오고 감(去來)을 초월했으니 더 이상 게송에 집착하지 말라는 사자후였다. 모든 집착을 떨쳐버린 선사다운 마지막 모습이라 하겠다.

이런 임종게를 남기고 태연하게 입적하시니, 세수는 칠십 다섯이요, 법랍은 오십 여덟이었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시호를 보각(普覺)이라 내리고 탑호를 보광(普光)이라고 하사했다. 그래서 대혜 보각(大慧普覺)이라고도 한다. 스님의 어록이 대장경을 장식하고, 그의 법을 이은 사람들이 팔십삼 인이나 됐다.

대혜 선사는 선승이었지만 현실 참여적인 성향이 강해서 당대의 이름난 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리를 문답했고, 비판을 할 때는 매우 엄격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때 주고받은 편지글을 모은 것이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인데, 이를 줄여서 <대혜서(大慧書)>라고도 하며, 더 줄여서 <서장(書狀)>이라 부르는 어록이다. 

대혜 선사는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 1130~1200)에게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를 준열하게 비판했던 주희이었지만, 과거시험을 볼 때 <서장(書狀)>을 시험장에 가지고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대혜 선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혜 선사가 활동하던 당시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북쪽에는 여진족의 금()나라가 세력을 확장해서 송나라를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북쪽은 금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고 남쪽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남송(南宋)이라 부르는 시기(1127~1187)로 한족은 굴욕으로 여겼다.

이러할 때,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와 화친하자는 주화파와 국권을 회복하자는 주전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대혜는 주전파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주화파 진회(秦檜) 일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대혜는 반역을 도모했다는 모함을 받아 승적을 박탈당하고 1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호남의 형주(衡州)와 광동의 해주(海州)로 유배당했다. 그러다가 1156년 진회(秦檜)가 죽자, 고종의 사면으로 유배 생활에서 돌아와 승적을 회복했다. 

그는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이 무렵, 그 유명한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조동종(曹洞宗)의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 선사와 수행체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굉지 선사가 열반에 들었을 때는 대혜 선사가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논쟁은 치열하되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과 갈등을 일삼는 오늘의 우리나라에 큰 교훈이 된다.

 

대혜 선사가 남긴 <서장(書狀)>은 편지글이기는 하지만, 선사상(禪思想)의 핵심을 뽑아내어 토론하거나 가르치는 내용이라서 후대에 승려와 학자, 일반 신도 사이에 널리 읽혔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주된 내용은 당시 선종 종파 중의 하나인 조동종(曹洞宗)의 묵조선(黙照禪)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임제종의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한 것이다. 묵조선은 오직 고요하게 참선을 통해 마음의 본질을 깨우쳐 들어가는 것이다. 완전한 삼매 속에서 마음을 집중해서 고요한 마음의 근본을 바라보는 수행으로 무념(無念)을 주로 삼고 무상(無想)을 종으로 삼는 수행법이다.​ 묵조선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천태종(天台宗)의 지관수행(止觀修行)에서 찾을 수 있다.​ 지관수행을 통해 바로 법성을 깨우치도록 하는 것인데, 말이 쉬워서 곧바로 무념무상(無念無想)에 들어간다고 하나, 망상으로 가득한 일반인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수행법이기 때문에 명나라 이후에는 간화선 수행에 밀려 명맥이 끊기고 만다. 오늘날은 일본의 조동종에서 이런 수행을 일부 할 뿐 대부분 선불교에서는 묵조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혜 선사는 묵조선을 검은 산의 귀신 굴(黑山鬼窟)’로 빠지게 하는 수행이며 고목의 불 꺼진 재(枯木死灰)’처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조용히 좌선만 해서는 무기(無記), 즉 수행할 때 생기는 멍한 상태에 빠져 결코 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 앞장서지 않고 고요히 침묵만 지키고 있던 조동종에 대한 비판의식 또한 담겨있었다.

대혜 선사의 저술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서장(書狀)> 등이 있다. 특히 <서장>은 대혜 선사가 그의 문하와 거사 및 유학자들의 질문에 답한 선()의 요지를 설명한 편지글이다. <벽암록>과 더불어 간화선 교과서로 불리며, <대혜서(大慧書)>라고도 하는 대혜 선사의 어록인 셈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로 공부를 하듯 조선시대 승려들에게도 단계별 교육과정이 있었다. 이것을 이력(履歷)’이라고 부르는데, 사미과(沙彌科)-사집과(四集科)-사교과(四敎科)-대교과(大敎科) 4단계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사집과는 중등교육과정에 해당하는 단계로서 당나라 승려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 <도서(都序)>, 송나라 승려 고봉 원묘(高峰原妙, 1238~1295)의 법문을 모은 <선요(禪要)>,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종밀의 저서를 요약하고 해설을 붙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그리고 <서장(書狀)>이 핵심 교과서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서장>은 승려라면 누구나 다 한번쯤 읽어보는 책이었다.

 

대혜 선사 이전에 중국의 전통적인 선은 조사선(祖師禪)이었다. 조사선에서는 언하대오(言下大悟)가 전통이었다. , 선사의 설법을 듣고 즉시 깨달아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근기가 낮아져서 이런 방법으로 깨닫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그래서 옛 스님들의 설법이나 행장을 하나의 규칙으로 정해서 공안 또는 화두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대혜 선사는 이 공안(화두)만을 전심전력해 의심하고 참구해 깨닫는 것을 추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한 것이다. , 여러 조사(祖師)들이 선 수행을 돕기 위해 사용했던 간결한 문구인 공안(公案)을 화두로 삼아 탐구해 가는 간화선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길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대혜 선사의 영향으로 이후 중국 불교는 간화선이 주류 선풍으로 자리 잡게 됐고,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도 전파돼 한국 선종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간화선(看話禪)에서 ()’은 주시하다, 참구하다는 뜻이고, ‘()’는 화두(話頭)를 가리킨다. 따라서 간화란 화두를 참구한다는 뜻이다.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화두를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그리고 이 큰 의문을 일으키기 위해 화두를 드는 것이다. 

화두(話頭)’는 글자 그대로 언어의 머리라는 뜻으로 어떤 말로 표현하기 이전의 도리라는 뜻이다.​ 화두는 깊은 도리를 담고 있는 말 밖의 소식을 전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무엇인가(이 뭣꼬)?’ ‘돌장승이 눈물을 흘리는 도리’, ‘무불성(無佛性)’ 등 수많은 화두 중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가장 알맞은 화두를 주어 의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꼭 앉아서 좌선만 해야 하는 다른 수행법보다 큰 장점이 있다.

간화선은 다른 말로 화두선(話頭禪), 혹은 대혜선(大慧禪)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무념무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란하고 망념이 가득 찬 마음을 화두에 집중시켜 일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무심하게 하는 것은 힘들지만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비교적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념(無念)에서 일념(一念)으로 수행 방법을 변화시킨 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분별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무분별 직관적인 방법으로 참구하는 것이다. ,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으로 일구의 공안에 몰두하는데, 예를 들면, ‘개에게는 불성이 없나(狗子無佛性)’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 3(麻三斤)’ 등을 화두로 해서 마음에 의심의 덩어리(疑團)을 일으켜서 참구해 의단을 깨뜨리는 것이다. 의단을 깨뜨리면 즉시 의식의 속박을 초월하고, 마음속의 지견(知見)이 쉬게 되며, 일상의 관습적인 성격ㆍ사유를 일으키는 것들을 쳐부수고, 세속의 명예와 이익 그리고 시비분별로 들끓는 번뇌를 벗어나서, 밝고 맑고 철저한 마음으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쳐도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간화선이 나오게 된 것은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 천 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로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고 사람들도 경전이나 책을 통해 아는 게 많아져 번뇌도 그만큼 복잡하고 많아져 묵조선의 수행으로 번뇌를 없애고 삼매에 이르러 깨우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세상이 돼서 마음을 하나로 붙들어 맬 장치가 필요해져서 화두선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간화선이 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마음을 화두에 모아 삼매에 이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며, 화두의 도리를 깨우쳐 지혜가 발현되도록 밝게 깨어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에 목이 마른 불자들은 어려운 간화선을 멀리하고 부처님이 가르쳤던 초기의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간화선은 선불교 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수행체계다. 여러 공부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화두를 참구함으로써 깨침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가장 뛰어난 수행법이라고 말하곤 한다. 오늘날 간화선을 빼놓고 한국불교를 말할 수 없다. 이 수행법이 한국불교 조계종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남방에서 유행하는 수행법들이 소개되면서 비판을 받고 있지만, 간화선은 한국불교에서 800년을 이어온 전통적인 수행체계다. 우리나라에서 여름과 겨울, 두 번의 안거(安居) 기간에 실행되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이다. 이 특별한 수행법을 개발한 인물이 바로 대혜 종고(大慧宗杲).

 

끝으로 <서장>의 내용 중 일부(앞부분)를 소개해 보겠다. 

 

1. 증시랑 천유(曾侍郎 天遊)에게 답함(물음의 글). 

※여기 나오는 글에서 ()’은 대혜 선사에게 글을 보낸 분의 성씨이고, ‘시랑(侍郎)’은 벼슬 등급인데, 지금의 중앙부서 차관급에 해당한다. 그리고 천유(天遊)’는 그분의 자()이고, ‘()’가 이름이다. 그러니 시랑 벼슬을 했던 증개(曾開)란 분과 대혜(大慧) 선사 간에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첫 번째 글은 증개란 분이 대혜 선사에게 보낸 물음의 글이다. 증개라는 사람에게 보낸 대혜 선사의 답장이 여러 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분이 여러 번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가 지난날 장사(長沙)라는 지방에 있으면서 원오(圓悟) 선사의 편지를 받아보니 스님(대혜)을 일컬어 만년에 서로 만났으나 얻은 바가 매우 기특하고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거듭 그 말씀을 생각한 지가 지금 8년이 됐습니다만 직접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항상 한탄하면서 오직 간절히 사모해 우러러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발심(發心)해서 선지식을 찾아뵙고 이 일(일대사인연)을 여쭈었으나 20살 이후에 혼인과 벼슬에 꺼들림을 당해 공부가 순일(純一)하지 못하고 이럭저럭 지금의 늙음에 이르렀습니다. 아직까지 들은 바 없어 항상 스스로 탄식하고 부끄럽게 여기지만 뜻을 세워 발원(發願)함은 진실로 얕은 지견(知見)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지 못하면 그만이려니와 깨닫는다면 반드시 바로 옛 조사스님들께서 몸소 증득한 곳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크게 쉬는 곳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 마음은 비록 일찍이 한 생각도 물러남이 없었으나 스스로 공부가 마침내 순일하지 못함을 느꼈으니 뜻과 원은 크나 역량이 작다하겠습니다.……

지금 다행히 가정의 세속 인연을 다 마치고 한가하게 있으면서 다른 일 없어 바로 간절히 스스로 채찍질해 처음 세운 뜻을 갚고 싶습니다만 다만 직접 가까이서 가르침을 얻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일생의 허물을 이미 낱낱이 아뢰니 반드시 이 마음을 훤히 비춰주실 수 있으시니, 바라옵건대 자세하게 경책(警策)하고 제시해주십시오. 평소에 마땅히 어떻게 공부를 해야 거의 다른 길을 밟지 않고 바로 본분 자리와 서로 계합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을 드림도 허물이 또한 적지 않으나 오로지 정성을 바칠 따름입니다. 스스로 숨기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불쌍하다 하겠습니다. 지극히 여쭙니다. 

 

2. 증시랑(曾侍郎)에게 답함(1) 

 

글을 써서 보낸 것(편지)을 받으니 어릴 때부터 벼슬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큰스님들을 참예(參禮)했다가 중간에 과거와 혼인에 꺼들림을 당하고, 또 나쁜 견해와 습관에 이김을 받아 순일하게 공부할 수 없었던 것으로 큰 죄로 삼으며, 또한 무상한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환영이어서 하나도 즐거운 것이 없음을 깊이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일대사인연을 참구한다고 하니 심히 병든 노승의 뜻에 맞습니다. 

그러나 이미 선비가 되면 나라에서 주는 녹으로 생활하게 되고 과거, 혼인, 벼슬살이는 세속에서는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니 또한 그대의 죄가 아닙니다. 

조그마한 죄를 가지고 크게 두려움을 내니 무시광대겁(無始曠大劫)으로부터 참된 선지식을 받들어 모시고 반야(般若)의 종지(種智)를 익혀옴이 깊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니 그대가 말한 큰 죄라는 것은 세속의 성현도 또한 면할 수 없는 것이니 다만 헛된 환영이어서 구경법(究竟法)이 아님을 알아 마땅히 이 불법 문중에 마음을 돌이켜서 반야의 지혜의 물로써 더러운 때를 씻어 없애고 청정하게 스스로 처신해 지금부터 한 칼에 두 동강을 내어(과단성 있게) 다시 (번뇌가) 이어지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반드시 앞(과거)도 뒤(미래)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미 환()이라고 했으니 짓는 때(업을 짓는 것)도 또한 환()이며, 받는 때(과보를 받는 것)도 또한 환이며, (환인줄) 알고 깨닫는 때도 또한 환이며, 미혹해서 전도된 때도 또한 환이며,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환입니다. 

지금 그릇된 줄을 알았다면 환약(幻藥)으로써 다시 환병(幻病)을 치료한 것이니 병이 나아 약을 없애면 전과 같이 다만 옛사람이 됩니다. 만약 달리 사람이 있고 법이 있다는 것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견해인 것입니다. 

그대는 깊이 생각해서 오로지 이와 같이 공부해가되 때때로 고요한 가운데에 절대로 수미산(須彌山), 방하착(放下著) 두 가지 공안을 잊지 말고, 지금부터 착실히 공부해가되 반드시 이미 지난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또한 생각하지도 말지니, 생각하거나 두려워하면 곧 도에 장애가 될 것입니다. 

오로지 모든 부처님 앞에 제 마음이 견고해 영원히 물러남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의지해 선지식을 만나 한마디 말에 바로 생사(生死)를 여의고,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깨달아 증득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지혜를 목숨으로 함)을 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크나큰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하옵니다.”라고 큰 서원(誓願)을 세우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오래오래 하면 깨닫지 못할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

편지를 받아보니 그대가 편지를 보낼 때 집에 모셔놓은 불상에 향을 피우고 멀리서 내가 있는 암자에다가 절을 한 후 보낸다고 하니 그대의 정성스런 마음 지극하고 간절함이 이와 같습니다. 서로 떨어져 있음이 비록 그다지 멀지 않으나 아직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지 않아 생각나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말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번잡스럽게 말을 많이 한 것 같으나 또한 정성이 지극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니 감히 말 한마디 글자 하나도 당신을 속이지 아니했습니다. 

만약 그대를 속였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될 뿐입니다. 

또 기억해 보니, 선재동자가 최적정(最寂靜)이라는 바라문(婆羅門)을 만나서 성어해탈(誠語解脫)을 얻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깨달음에 대해 과거에도 물러남이 없었고 현재에도 물러섬이 없었고 미래에도 물러남이 없어 무릇 구하는 바를 성취함은 모두 정성의 지극함이 미치는 바에 연유한 것임을 봤습니다. 

그대는 이미 죽의포단(竹倚蒲團-참선할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의자와 창포로 만든 방석)으로 벗을 삼았으니 선재가 최적정 바라문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오직 이와 같이 공부해 나간다면 깨달음을 성취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성어(誠語)---‘성어해탈(誠語解脫)’에서 불자라면 해탈은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성어(誠語)’란 말은 그 유래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치폐설존(齒弊舌存)’이라는 고사가 있다. 

중국의 사상가이며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눈이 많이 내린 아침에 숲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에 노자는 깜짝 놀랐다. 노자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굵고 튼튼한 나무 가지가 처음에는 눈의 무게를 구부러짐 없이 지탱하고 있었지만 점차 무거워지는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소리였다. 반면 이보다 가늘고 작은 가지들은 눈이 쌓임에 따라 자연스레 휘어져 눈을 아래로 떨어뜨린 후에 다시 원래대로 튀어 올라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를 본 노자는 깊이 깨달았다. 

저 나무 가지처럼 형태를 구부려 변화하는 것이 버티고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로구나.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이기는 법이구나. 부드러운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자신을 낮춰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좋은 것을 취하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이기는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노자가 평소에 공경하여 따르던 그의 스승 상용(商容)이 노환으로 자리를 보전하게 됐다. 그때 노자가 그를 찾아가 마지막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자 상용은 갑자기 입을 쩍 벌렸다가 다물고는 물었다. 

내 이()가 아직 있는가?” 

없습니다.” 

그는 다시 입을 벌렸다 다물며 물었다. 

내 혀는 있는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상용이 말했다. 

내 말을 이해하겠는가?” 

노자가 말했다. 

단단한 게 먼저 없어지고 부드러운 게 남는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상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네, 천하의 이치가 모두 그 안에 있다네.” 

이것이 치폐설존(齒弊舌存)’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의 글을 성어(誠語)라 한다. 이치와 내용이 알차다는 말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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