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경(看經)수행의 의미와 신행(信行)절차
인신나득(人身羅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하였습니다. 또 천수경에 불법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42 팔난품(八難品)에 불법을 만나기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팔난(八難)이란 부처님을 볼 수 없거나, 불법을 들을 수 없는 여덟 가지 곤란한 처지의 중생을 이야기합니다. 이를 살펴보면, "첫째, 재지옥난(在地獄難), 둘째, 재축생난(在畜生難), 셋째, 재아귀난(在餓鬼難), 넷째, 재장수천(在長壽天), 다섯째, 재울단월난(在鬱單越難), 여섯째, 세지변총난(世智辯聰難), 일곱째, 농맹음아난(聾盲音啞難), 여덟째, 불전불후난(佛前佛後難)"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처한 경우, 짐승의 몸을 받은 경우, 주린 귀신이 되었을 경우, 장수천에 났을 경우, 울단월국토에 사는 중생인 경우, 세상지식에 너무 팔려있는 경우, 귀먹고 눈멀고 벙어리인 경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 전이나 가신지 오랜 후의 경우 등입니다. 이러한 여덟 가지 중 앞의 지옥·축생·아귀의 난(難)은 중생의 생활이 너무 괴롭거나 어리석거나 욕심이 많아 법을 닦기가 어려운 것이고, 다음의 장수천·울단월의 난(難)은 생활이 너무 풍요롭거나 즐거워서 법을 닦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장수천은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 하늘 중에 색계의 네 번째에 속하는 천상계로 이곳의 수명은 오백대겁이나 되므로 도(道) 닦을 마음 을 내지 않고 울단월은 사바세계의 수미산 북쪽에 위치하는 구로주(俱蘆洲)라는 곳인데 복락이 넘치기 때문에 역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너무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은 적절한 환경에는 살고 있지만 중생 자신이 청각장애, 시각장애, 언어장애의 장애인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 법을 닦기 어렵고 혹,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소유했더라도 세상 놀음이나 일에 팔려 있으면 법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학문이나 다른 종교 또는 취미와 오락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불법(佛法)은 한낱 생활의 도구정도나 미신 밖에는 안되므로 자기의 가치 척도로 헤아려보고 배척하거나 불신하기 쉽습니다. 불전불후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육신을 지닌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므로 인해 법이 드러나 있지 못 해서 도를 닦기 어려운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분이 오시기 이전의 중생들이라든가 반대로 부처님이 나타나셔서 법은 설해 놓으셨지만, 세월이 너무 오래 경과된 까닭에 법이 쇠퇴해져서 믿음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중생들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인간 몸을 받았고 다행이 거룩한 불법을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불법을 만났어도 참다운 불교, 참다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면 참 불교, 참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직설에 의지하는 것일 것입니다.
불교의 어떤 수행을 하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수행을 한다면 그릇된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할 때에 신심도 확고해지고 수행의 진척도 빨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경전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무한의 성스러운 결과가 있는지를 인식시켜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내용은 거해스님이 번역한 {법구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수행자 두 사람이 고통을 이기는 수행을 하면서 48년간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수행자는 수도생활을 그만두고 결혼을 했다. 그는 결혼 뒤 아기를 낳았는데, 자기 아내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옛 친구를 찾아가 예경을 올렸다. 그런데 수행자는 정작 부부에게는 수명장수를 축원해 주었지만 이 날의 주인공인 아기에게는 한 마디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기의 부모는 당황하여 그 이유를 묻자 수행자는 대답하였다.
"이 아기는 이레 동안만 살 수 있으면, 나는 죽음을 막을 아무런 지혜가 없소. 오직 부처님만이 이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지혜를 갖추신 분이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부는 부처님이 계시는 수도원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부처님께 공손히 절을 올렸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도 이들 부부에게는 수명장수에 대한 축복을 내리셨지만 아기에게만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잠시 후 부처님은 이 아기에게 죽음이 가까웠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이 아기를 살리려면 집 앞에 정자를 짓고 그 정자 안에 아기를 누인 다음 비구들로 하여금 경전을 7일 동안 외게 하라고 일러 주셨다. 그래서 곧 비구스님들이 경을 외게 되었는데 경을 외는 마지막 날에는 부처님도 직접 참석하셨다. 그때 천상 세계의 모든 천왕들과 천신들도 그곳에 모여들었다.
이때 야차가 아기를 데려 가려고 정자 문 밖에서 서성거리며 경이 어서 끝나 비구들이 자리를 뜰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위력이 높은 천왕들이 직접 그 자리에 참석하는 바람에 자리를 비켜주다 보니 자꾸만 아기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왕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마침내는 아기로부터 2요자나(yojana, 약 14말일, 60에서 80리)나 되는 거리까지 멀어져 버렸다.
이 날 비구들과 모든 참석자들은 밤을 밝혀가면서 경 외기를 계속하였는데 비구들은 아기를 침상에서 일으켜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게 하였다. 이때가 되자 부처님께서는 "수명이 장수하여라"라고 아기를 축복해 주셨다. 그러자 부모는 아기가 얼마나 살 것인가를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아기는 120살까지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 아기가 나이를 보시 받았다고 하는 뜻으로 '아유왓다나'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말씀은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에 대한 설법내용입니다. 즉, 덕이 높고 나이 많은 어른을 항상 존경하고 받드는 사람은 수명장수하고 용모가 아름다워지며 늘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설법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부처님의 경전을 믿지 않으면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어른을 공경하고 존경하여도 수명이 연장되는데 하물며 부처님의 경전을 독송하면 반드시 수명이 연장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무한의 공덕을 쌓는 것이고 수행의 바른 성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대승경전이든 간에 수지, 독송, 서사, 해석, 설법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무한한 공덕이 된다는 것에 대한 근거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와 관련한 {법화경}의 내용을 음미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법화경}에 법사의 자격으로 {법화경}을 읽으면서 수행이 곧 성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우리에게 어떤 수행을 하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법화경}에서 가르치는 불도를 자신의 공덕이나 깨달음을 위해서 닦으면 공덕이 되지만 자신의 수행이나 깨달음을 남에게 전해 주면 바로 전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법사품(法師品)]에서 말하는 법사란 법을 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법화경}은 어떤 수행자와 법사를 가르치고자 하는지 그것이 [법사품]의 과제입니다. 먼저 [법사품]의 수행내용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법화경} 전체나 {법화경}에 있는 한 게송의 구절이라도 수지하고 독송하며 해설하고 사서하는 사람, 이 경을 듣고 잠시라도 기뻐하는 이는, 마침내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부처가 되리라. 가만히 한 사람을 위해서 {법화경}의 전체나 또는 한 구절만이라도 설한다면 알지어다.
이 사람은 여래의 사절이며 여래의 일행이 되느니라. 하물며 많은 사람을 위해서 설한다면 어떻겠느냐? 약왕아, {법화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해서 이 경이 있는 곳이라면 탑 안에 별도로 사리까지 안치할 필요가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냐하면 이 경 속에 여래의 전신이 이미 있기 때문이니라. {법화경}을 마음으로 받아 지니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면 그 사람이 바로 여래의 사절이고 여래의 일행이며, 여래가 될 사람이라고 한다. 또한 {법화경}이 있는 곳에는 여래의 몸 전체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별도로 사리를 모실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상의 [법사공덕품]에서는 {법화경}을 수지, 독송, 서사, 해설하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청정해져서 보통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초능력을 발휘한다고도 하였습니다. [법사품]이나 [법사공덕품]에서 똑같이 {법화경}을 신봉하는 다섯 가지 공덕이 여래나 여래의 일행이 되는 조건임을 강조합니다. 이 다섯 가지 공덕을 행하는 사람을 오종법사(五種法師)라고 부릅니다.
먼저 {법화경}을 수지(受持)하는 것, 즉 마음으로 받아 지닌다는 것은 몸과 입과 뜻의 삼업 중에서 뜻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수지'는 {법화경}의 내용을 이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면에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법화경}을 읽고 외우고 해설하는 것은 입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것이요, {법화경}을 쓰는 일은 몸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오종법사는 몸과 입과 뜻으로 {법화경}을 신봉하는 셈입니다. 또 {법화경}을 받드는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 마음속으로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는 것은 주로 자기자신을 위한 수행에 속하며 해설하는 일은 남을 위한 전법에 속합니다. 자기수행의 자세는 그대로 전법이 되고 남을 위한 해설은 자기공부의 수행이 됩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수지, 독송, 서사, 해설, 전법의 오종법사를 말하면서도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에게 추가의 요건을 부과합니다. 다시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약왕아, {법화경}을 설하는 자는 어떻게 설해야 할 것인가?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만 비로소 이 경을 설 할 수 있느니라. 여래의 방이란 대자비심(大慈悲心)이요, 여래의 옷이란 인욕심(忍辱心)이요, 여래의 자리란 온갖 것이 공(空)하다는 도리이니라."
법사가 {법화경}을 설하려면 여래의 방에 들어가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대자비심과 인욕심을 갖추는 것이요, 공(空)의 도리를 철저하게 체달(體達)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공사상은 바로 반야사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야와 자비와 인욕을 갖추어야 {법화경}을 설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반야는 단순한 반야가 아니라 육바라밀을 지혜에 회향한 반야이기 때문에 결국 육바라밀의 실천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궁극 목표이고 여래의 몸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전수행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간경수행의 개요
수행에 있어서 간경수행은 가장 기초적인 수행이므로 나름대로 여러 방편을 통해 이루어져왔습니다. 이 방편들은 크게 열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를 일러, {중변불변론}의 [무상승품]에서는 십종수지(十種受持) 또는 십종전통(十種傳通)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불자라면 마땅히 실천하여 닦아야 할 열 가지 경을 보는데 아주 중요한 요체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승의 법이나 모든 경전을 열람하여 닦아 나아감에 열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베껴 쓰는 것이요. 둘째는 공양함이요, 셋째는 베풀어서 남에게 줌이요, 넷째는 다른 이가 읽고 외우면 한 마음으로 들음이요, 다섯째는 자신이 독송함이요, 여섯째는 자신이 이치대로 이름과 글귀와 맛과 뜻을 취함이요, 일곱째는 도리 그대로와 이름과 글귀와 맛을 나타내 설명함이요, 여덟째는 바른 마음으로 듣고 욈이요, 아홉째는 조용한 데서 이치대로 헤아림이요, 열째는 이미 뜻이 들인 것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닦아 익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책은 시공을 넘어 성인이나 위인, 선각자들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최선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통해 부처님을 만나고 역대 선지식을 만나는 일이 많아질 때 불교의 미래도 밝아질 것입니다. 더구나 부처님을 만나는 최선의 길은 경전을 읽고 실천하는 것임을 각성해야하겠습니다.
2. 간경(看經)수행의 의미
간경(看經)은 경전을 통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으로써 생각으로만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그 말씀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안개낀 숲길을 걷는 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간경수행자는 진리를 익혀, 안으로는 끊임없이 마음을 향하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행실을 가다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선가귀감}에서는, "경을 보면서 마음속을 향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만 권의 글을 모두 보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을 보면서 마음으로 살피지 않는다면 어디 이익이 없는 데만 그치겠습니까? 필경 사견(邪見)과 아만(我慢)만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와 다만 마음만 번거롭게 하는 마구니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육조스님께서는 법달스님이 문구 외우는 데만 급급하여 헐떡거릴 뿐 번뇌와 망상의 분별심을 쉬지 못함을 보시고, "참 독경이란 경의 뜻이 마음 가운데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마음을 밝히어 성품을 보는 것을 보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면 이것이 경을 굴리는 것이지만,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경에게 굴림을 받는 것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게송을 보겠습니다.
마음이 미혹하면 법화가 굴리고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를 굴리나니
오래 읽어도 밝히지 못하면 경 뜻과 원수 되리라.
생각이 있으면 생각이 삿되니 유무를 다 안 따지면 백우거(일불승) 길이 놀리라.
그렇습니다. 수행을 위한 간경을 특히 전경(轉經)이라고 하여 법을 굴린다고 하는데, 경전을 읽고 그 뜻을 마음으로 깨달으면 경을 굴리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지식을 쫓아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네 구절의 게송 하나라도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고 몸소 실천하여 깊은 뜻을 스스로 체득하여야 참다운 간경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3. 간경수행의 원리
모든 불교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듯이 간경수행의 목적도 결국은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성불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란 말로써 전해질 수 없으며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언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은 일반적인 글이 아닙니다.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으로 부처님은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를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게 언설로 표현한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분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간경수행의 원리입니다. 즉, 말을 통해서 말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영명연수선사는 {만선동귀집} [제2장]에서 자문자답하시길,
묻기를, "많이 듣고 널리 읽으며 배워 익히고 기억해 가지며, 또한 글 뜻을 따라 궁구(窮究)하는 등으로 어찌 견성(見性)할 수 있겠습니까?."
답하길, "만일 말을 따라 견해를 내고 글과 함께 알음알이를 지으며, 말에 집착하여 뜻을 잊고 교(敎)를 좇아 마음을 미혹해 손가락과 달을 분간치 못한다면, 곧 성품을 보기 어렵겠지만, 그렇지 않고 말을 인하여 도(道)를 깨닫고 교(敎)를 빌려서 종지(宗旨)를 밝히며, 지혜롭게 말씀에 들어 깊이 부처님의 뜻을 탐구한다면 실로 다문(多聞)에 나아가 보장(寶藏)을 이루며 배움을 쌓으므로 서 또한 지혜의 바다를 삼을 것이니, 범부로 좇아 성인에 듦이 모두가 현학(玄學)의 힘을 인함이요, 위태한 곳에 처하여 평안함을 얻음이 다 미묘한 뜻(妙旨)의 공(功)으로 도움을 받은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말이란 도(道)에 드는 계단이요, 교는 사(邪)와 정(正)을 가려내는 먹줄과 같은 것이므로 {80화엄경} [십지품]에 이르기를,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머물게 하려 한다면 반드시 무장애해탈지(無障 解脫智)를 떠나지 말 것이니, 이 무장애해탈지는 일체법여실각(一切法如實覺)을 떠나지 않으며, 일체법여실각은 무행무생행혜광(無行無生行慧光)을 떠나지 않고, 무행무생행혜광은 선선교결정관찰지(禪善巧決定觀察智)를 떠나지 않으며, 선선교결정관찰지는 선교다문(善巧多聞)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해서 요달(了達)하여 알게 되면 정법(正法)을 더욱 배로 하여 부지런히 닦아 익힘을 구할 것이니, 밤낮으로 언제나 법문 듣고, 법을 기뻐하고, 법을 즐기며, 법을 의지하고, 법을 따르며, 법을 알고, 법을 따르며, 법에 도달하고, 법에 머물며, 법을 실행하기를 발원할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부지런히 불법을 구해서 있는 바 온갖 재물을 아낌이 없고 또한 따로 귀중하고 얻기 어려운 물건이 있음을 보지 않으며, 다만 오직 불법을 선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 근심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법화경}에서, "만일 근기가 날카롭고 지혜가 명료한 사람에게라면 다문강식(多聞强識)이라도 그를 위해 설할 수 있으리라"하신 말씀을 논하여 해설하기를, "지혜가 있으나 다문(多聞)함이 없으면 곧 실상을 알지 못할 것이니, 비유하면 캄캄한 곳에서 눈은 있으되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다문(多聞)하나 지혜가 없다면 또한 실상을 알지 못하리니, 흡사 밝은 데서 다시 등불까지 있으나 눈이 없어 못 보는 것과 같다. 또한 많이 듣기도 하고 겸하여 지혜도 맹렬하고 날카로우면 곧 가르친 바를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려니와, 그러나 들음도 없고 지혜도 없다면 이를 일러 사람 몸이 소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교(圓敎)의 이품(二品)엔 선관(禪觀)에 겸하여 독송하기를 권하였으니, 이것은 위(位)에 머물러 물러나지 않으면 비로소 듣는 법에 싫어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로 듣는다면 관하는 힘을 돕게 되고 바로 배우면 종지(宗旨)의 공(功)을 이루는 것인데, 일부러 소나 양 같은 눈을 지어서 방향을 가리지 못하고 또한 어리석고 고지식한 마음에 처하여 숙맥(菽麥)을 분간치 못해서야 되겠는가?]라고도 하였습니다.
4. 간경수행의 필요성
이와 같이 간경(看經) 수행을 통해 본성을 찾는 길이 분명하기에 간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선가에서 불립문자라 하여 교(敎)를 배우는 것을 꺼리고 경전마저 멀리하니 그것은 눈을 뜬 장님을 만드는 결과로써 눈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두운 밤길을 등불도 없이 가는 것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란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즉, 문자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지 문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부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현재 부처님과 만나서 부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어찌 허물이 되겠습니까? 허물이 있다면 보는 사람이 지혜로써 궁구하지 아니하고 생각으로 분별하고 지식을 쌓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믿음을 저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같은 물을 먹어도 소는 젖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경전은 부처님께서 문자로 나타내신 법신(法身)일진데 어찌 그 길을 통하지 않고 도(道)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간경(看經)의 필요성과 바른 태도를 간명하게 밝히신 {죽창수필}의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글은 계율의 부흥과 선정일치(禪淨一致)를 강조하신 명대의 운서주굉스님(1535∼1615)께서 말년에 후학들을 위해 저술한 것으로 공부하는 후학들에게 아주 요긴한 말씀들입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선비들이 불교를 비방하는 것을 보고, 선입견과 경솔한 판단으로 깨닫지 못했었다. 그 후 우연히 계단(戒壇)과 강당(講堂)에서 몇 권의 경을 구하여 읽어보고는 비로소 크게 놀라며, '이와 같은 책을 읽어보지 못했던들 거의 인생을 허송할 뻔하였다'하고 생각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눈에 스쳐본 적이 없는 자들이 무수하다. 실로 보배산을 눈앞에 두고도 찾아 나서지 않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비록 읽기는 하지만 말만을 따라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자신의 문장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데 불과하며,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잠시도 그 이치를 궁구(窮究)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보배산을 찾아 나서기는 했으나, 그 보배를 찾아 취하지 않는 자라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비록 토론하고 강연하기는 하지만, 또한 글자나 풀이하고 문장을 해석하면서 서로 아만(我慢)을 내세우는데 불과하여, 어려서부터 장성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잠깐도 진실하게 수행하고 실천하지 않는다. 보배를 취하여 손에 가지고 놀거나 감상하며, 혹은 품속에 넣고 옷소매 속에 간직했다 도로 내버리는 자들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마음의 밭에 묻으면 마침내 도(道)의 종자를 이루게 될 것이므로 불경을 불가불 읽어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는,
"어떤 참선에 대하여 자부하는 자가, '달마는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 견성(見性)하기만 하면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염불을 자부하는 자도,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을 만나는 것이다. 어찌 반드시 경전이 필요하랴'하였다. 이 두 사람이 진정으로 얻은 것이 있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굳이 더 논할 일이 없겠지만, 실제 얻은 것이 없이 이런 말을 했다면, 이런 일들은 대개 자신의 교리에 통달하지 못한 허물을 숨기려 하는 자들일 것이다.
나도 평소 염불을 숭상해 왔으나, 애써 사람들에게 경전을 읽기를 권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염불의 가르침이 어찌 저절로 온 것이겠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경전 속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의 중생들이 어떻게 10만 억 찰 밖에 아미타불이 계신 줄 알 수 있겠는가? 또한 참선하는 이들은 교(敎) 밖에 따로 전한 것이라고 핑계하고 있으나, 교를 여의고 참구하는 것은 삿된 인(因)이요, 교를 버리고 깨닫는 것은 삿된 견해임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그대가 참구하여 깨달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경(經)의 가르침으로써 인증(認證)]해야 할 것이요, 교와 더불어 합치하지 않는다면 이는 모두 사견(邪見)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육경과 사서로써 표준을 삼아야 하고, 불교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삼장(三藏) 십이분교(十二分敎)로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전이 아니라면 어떻게 불법을 만날 수 있으며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경전을 멀리하는 것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부모 곁을 떠나 멀리 가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낱 미혹한 망상을 벗어버리지 못한 범부중생으로써 부처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늘 경전을 보고 마음에서 잊지 않아야 몸과 마음에 허물이 생기지 않고 불법을 향해 올곧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을 보고서 신행(信行)생활을 하면 그 느낌이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그냥 귀동냥으로 들어서 염불을 하거나 참선을 하거나 주력을 할 때보다 믿음이 돈독해져서 수행에도 많을 진전이 있을 것입니다.
5. 간경수행의 대상(경전과 그 의미)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경을 비롯하여 수행자들이 지켜야할 계율을 담은 율장, 경과 율에 대한 해석이나 교리에 대한 연구성과를 모은 논장(論藏) 등의 삼장(三藏)으로 나누어지지요. 즉, 경(經), 율(律), 논(論) 삼장(三藏)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로 일체경(一切經), 또는 대장경(大藏經)이라고도 부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처음에 암송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으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후대에 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함께 모여 합송(合誦)함으로써 경전을 결집하였습니다. 경전의 결집은 무려 4차, 또는 6차에 걸친 결집이 있었다고 하며, 3차 결집 때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B.C.1세기경(약 B.C.83년)이라고 하였습니다.
1차 결집(500결집)은 저 유명한 부처님 입멸 직후, 가르침의 산실을 막고, 교권의 확립을 위해, 가섭존자께서 상수가 되어 500명이 모여 아난존자께서 경(經)을 외워 내고, 우바리존자께서 율(律)을 외워 내어서 경(經)과 율(律) 이장(二藏)이 결집하였다고 합니다. 2차 결집(700결집)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후 100년경 계율에 대한 이의(異義)가 생겼기 때문에 베살리에 야사가 주체가 되어 700인이 모여 율장이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제3차 결집(1000결집)은 불멸 후 200년 경 아쇼카왕의 주도 아래서 수도 화씨성(華氏城, 파탈리푸트라)에서 목갈리푸트라 티샤가 상구가 되어 1000명의 비구가 모여 경, 율, 론 삼장(三藏) 전부를 집성했다고 합니다.
제4차 결집은 2세기경 카니슈가왕의 주도 아래 협존자(파르슈바)와 세우(비수비트라)존자가 상수가 되어 카슈미르국의 비구 500인이 모여 삼장(三藏)에 해석을 한 {대비바사론}을 성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승경전과 논서과 밀교경전의 성립을 5차와 6차로 보고 있습니다. 하여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3차 결집까지는 인정하고 있으나 그 이후의 결집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여튼 인도에서 처음에 경전이 마가다어나 빨리어로 아함경이 수록되고 대승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수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원 전후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빨리어 경전과 한역 경전입니다. 특히 한역 경전은 아함경과 그에 대한 주석서를 비롯하여 대승의 경(經)과 논(論)을 총망라하고 있으므로 그 중요성을 말로 다 할 수 없겠습니다.
우리 나라도 고려 때 거란의 침입을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극복하고자 성립하였다가 유실되고,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국란극복의 의지를 대장경 편찬사업으로 발휘하여 오늘날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게 되었습니다. 고려 팔만대장경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중의 하나로 선정되면서 국내외적으로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문화재로써가 아닌 살아있는 법신(法身) 부처님의 말씀으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경전을 통해서 살아 계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접하는 것입니다.
경전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당시의 중생들과 그 뒤의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베풀어놓으신 자애로운 은혜가 가득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경전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불·보살님의 현신(現身)인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경전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자내증(自內證)의 세계를 또 다른 모습으로 남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은 바로 부처님께서 영원한 모습으로 살아 계시는 또 하나의 여래인 법신(法身)인 진리의 몸인 셈입니다.
6. 간경수행의 대상인 경전의 구분
부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일정하게 규정되어진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즉, 중생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진리로 가는 길, 깨달음의 길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그만큼 방편도 다양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경전에도 다양한 형식과 방법, 내용을 갖추고 있는데 이에 따라 9가지 또는 12가지로 구분하여 설하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9부경(部經)이 먼저 성립되고 다음에 12부경(部經)이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먼저 9부경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최초로 정리된 9가지 종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이는 계경(契經), 중송(重頌), 수기(授記), 게송(偈頌), 감흥어(感興語)인 무문자설(無問自說), 여시어(如是語), 본생담(本生譚), 미증유법(未曾有法), 방광(方廣) 등입니다.
그리고 12부경(部經)은 {대지도론} 33권에서 말하길, "보살마하살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부경(部經)인 1) 수트라(S tra, 契經), 2) 게야(Geya, 重頌), 3) 가타(Gatha , 偈頌), 4) 니다나(Nidana, 因緣), 5) 이티브리타까(Itivrttaka, 本事), 6) 자따까(Jataka, 本生譚), 7) 아드부따다르마(Adbhutadharma, 未曾有), 8) 아와다나(Avadana, 譬喩), 9) 우빠데사(Upadessa, 論議), 10) 우다나(Udana, 無問自說), 11) 와이뿔리야(Vaipulya, 方廣), 12) 비야까라나(Vyakarana, 授記), 논의 등의 경을 듣고 또 모든 성문들이 들었거나 듣지 않은 것을 듣고자 하며, 그를 모두 다 외고 받아 지니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수트라(Sutra)
계경(契經) 또는 법본(法本)이라 하며 경전 가운데 법의를 직설한 장행문(長行文)입니다. 계경은 이치에 계합하고 근기에 계합한 경전을 말합니다. 모든 경 가운데 사실 그대로 직설하는 것을 수다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 등의 4아함과 5부니가야인 모든 마하연경과 2백5십계경 등입니다. 삼장에서 나오는 그 외에도 역시 모든 경이 있는데 모두 이것을 수다라(修多羅)라 합니다.
2) 게야(Geya)
응송(應頌) 또는 중송(重頌)이라 하며 앞의 장행문에 응하여 거듭 그 뜻을 운문으로 편 것, 곧 송을 말합니다. 모든 경전 안에서의 게송을 기야라고 합니다.
3) 비야까라나(Vyakarana, Veyyakarana)
수기(授記) 또는 화가라(和伽羅)라고 하며 보살이나 부처님 제자들에게 성불한다는 예언을 수록한 경문으로 경에 말한 것을 문답으로 해석하고 또 제자의 다음 세상에 태어날 곳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그만큼의 아승지겁을 지나면 부처님이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 법에서 중생에게 수기를 하시려면 먼저 "모두 빙그레 웃으시면서 한량없는 광명을 네 개의 어금니에서 내시었는데, 이른바 청색, 황색, 적색, 백색, 옥색, 자색, 등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4) 가타(Gatha)
풍송(諷誦) 또는 고기송(孤起頌)이라 하며 장행문에 의하지 않고 곧 게송의 구를 짓는 것입니다. 법구경이 이런 경우입니다. 여섯 글귀, 세 글귀, 다섯 글귀 등 그 글귀의 많고 적음은 정해 있지 않는데도 역시 기야라 하며 또한 가타라고도 합니다.
5) 우다나(Udana)
자설(自說)이라고 하며, 묻는 사람이 없이 부처님이 스스로 설한 경으로 아미타경 등입니다. 우타나(優陀那)라 함은 법이 있다는 것인데, 부처님은 반드시 말씀을 하셔야 되는데도 질문한 이가 없으면, 부처님은 대략 질문의 실마리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6) 니다나(Nidana)
연기(緣起) 또는 인연(因緣)으로, 경 가운데서 견불문법(見佛聞法)의 인연과 부처님의 설법교화의 인연을 설한 것입니다. 모든 경전의 서품으로 인연경과 같습니다. 니타나(尼陀那)라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 법이 본래 일어난 인연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 때문에 이런 일을 말씀하셨다"거나, 수트라 중에서는 "어떤 사람이 물었기 때문이 그를 위하여 이 일을 말씀하셨다."거나, 비니(毘尼) 중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범하였기 때문에 이 계율을 정하셨다"고 하는 것 등으로 온갖 부처님의 말씀이 일어난 인연의 일을 모두 니타나라고 합니다.
7) 아와다나(Avadana)
비유(譬喩)라고 하며 경 가운데에 비유하여 설한 것입니다. 아파타나(阿波陀那)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모양과 비슷한 일의 부드럽고 얕은 말입니다. 마치 중아함 중의 장아파타나경과 장아함 중의 대아파타나와 비니 중의 이십억아파타나 등입니다.
8) 이티브리타까(Itivrttaka)
본사(本事)라 하며 부처님께서 특히 제자들의 과거 세상에 있었던 인연을 설한 경문으로 법화경 가운데 약왕보살본사품 같은 것을 말합니다. 여시어경(如是語經)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끝맺는 구절이어서 "내가 먼저 말하기로 한 것을 이제 다 말하여 마쳤다"고 말하는 것이요. 둘째 삼장과 마하연 이외에 다시 경이 있어 이를 일목다가(一目多迦)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다가라고도 합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이 사자는 비바시불 때에는 바라문의 스승이었는데 부처님을 설법하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로 왔는데 그때 대중들은 법을 듣느라 함께 말하는 이가 없자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구업 때문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91겁 동안을 축생업에 떨러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의 처소에 와서 마음이 청정한 까닭에 해탈하게 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등의 것을 인연이라 합니다.
9) 자따까(Jataka)
본생(本生)이라고 하며 부처님이 자신의 과거세의 인연을 설한 경문입니다. 본생경이라 하는 것은, 옛날 보살이 일찍이 사자였을 때 숲 속에 있으면서 한 마리의 원숭이와 함께 친하게 지냈습니다. 원숭이는 두 마리의 새끼를 그 사자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마침 독수리가 배가 고파서 먹이를 찾고 다니다가 사자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원숭이 새끼를 채 가지고 나무 위에 가 앉아 있었습니다. 사자가 잠에서 깨어 독수리가 새끼를 채어간 것을 보고 돌려달라고 했으나 돌려주지 않자, 자기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자신의 겨드랑이 살을 뜯어내어 그 원숭이의 새끼들과 바꾸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중생을 과거 생에서 구제한 일들이 많이 있는 설화로 이것을 본생경이라 합니다.
10) 와이뿔리야(Vaipulya)
방광(方廣)이라 하며 광정(光正) 광대한 진리를 설한 경문입니다. 광경(廣經)이라는 것은 마하연(摩訶衍) 즉 대승을 말하는 것으로, 이른바 반야바라밀경과 육바라밀경과 운경과 법운경과 대운경 등 이러한 한량없는 아승지의 모든 경전이니, 아뇩다랴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하여 말씀하신 경입니다.
11) 아드부따다르마(Adbhutadharma)
희유법(稀有法), 미증유법(未曾有法)이라 하며 부처님의 여러 가지 위신력을 나타낸 부사의사를 기록한 경문을 말합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갖가지의 신력을 나타내면 중생들이 보고 전에 없던 일(未曾有)이고 신이(神異)하게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른바 부처님께서 탄생할 때 몸으로 큰 광명을 놓아 삼천대천의 세계와 어두운 곳을 비추신 것입니다. 땅은 크게 진동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으며 나무는 음성을 내고 하늘의 음악이 울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등등의 한량없는 희유한 일들을 말씀하신 것을 바로 미증유경이라 합니다. 즉, 모든 경전을 설하시려고 하실 때에 부처님의 모습이 여느 때와는 달라 보이거나 광명을 놓는 등의 갖가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12) 우빠데사(Upadessa)
논의(論議)라 하며 법의 이치를 논의와 문답의 형식으로 논해진 경문을 말합니다. 논의경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질문한 이에게 대답하면서 그 까닭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주제에 따라서 모든 이치를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치 부처님께서 사성제를 말씀하실 때와 같고 주로 외도나 지식이 풍부한 제자들과의 문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문답에서 그 뜻을 널리 해석하는 것을 바로 우바제사라고 하였습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경문을 구분하면서 이러한 모든 경전들을 수지독송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12부경의 핵심이 바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입니다. 반야란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이란 도피안(度彼岸)을 말하지요. 즉, 반야바라밀이란 지혜로써 이 고통스런 언덕을 건너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바른 행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지요. 반야바라밀의 구체적인 내용은 연기(緣起)의 다른 표현인 공(空)입니다. 즉, 모든 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상(無相)이며 무주(無住)이며 무집착(無執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체의 존재나 현상들 속에서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 고정된 의식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자재한 본질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지혜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에 오온(五蘊)이 텅 비었음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고액을 벗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본질은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니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아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한 것이기에 현실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의 실상을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무릇 형상 있는 존재들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볼 수 있으면 곧 여래인 법신(法身) 진여(眞如)를 보리라"하였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현실 가운데 있으나 현실 속에 묻혀 버린 사람, 즉, 자기 중심적 관념에 사로잡혀 갇혀 버린 사람은 진실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관념을 벗어버려야 진실을 증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조차도 방편임을 분명히 알아 집착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뗏목에 비유하셨습니다. 뗏목은 강물을 건너는 데에 요긴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언덕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범부 중생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수행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방편인줄 모르고 그것을 절대화시키고 또 하나의 관념화되어 버린 의식에 집착하여 온갖 또 다른 의식을 만들어 움켜지고 있는 한 참다운 진리는 요원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대한 올바른 의미입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아는 알음알이로 남에게 주어들은 말들로 경전을 도외시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강의나 선지식으로부터 들은 내용들을 부처님의 경전을 통해 검증하고 또 이를 자내증(自內證)하여 다시 경전을 통하여 점검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불법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손가락 끝을 따라 달을 봐야지 손가락만 보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간경 수행자는 경을 읽을 때 이 점을 명심하여 그 요체를 파악하는 데 노력해할 것이지만, 다만 문구나 지엽적인 견해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일체 경을 수지독송 할 때에 반야바라밀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7. 간경수행의 대상인 경전의 선택
경전의 바다는 아주 넓고도 심오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경전이 있어서 수행자가 그것을 모두 읽고 익히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먼저 경전 가운데 핵심이 되는 경들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게 마련입니다. 이를 원효대사는 '요의경(了義經)'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의경(了義經)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적당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원만하게 두루 익히기 위해서는 이런 방편적 개념을 어느 정도 따르는 일도 필요합니다. 더구나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분에게 이 방법은 매우 요긴하게 쓰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중국에서는 일찍이 교상판석론으로 대두되어 각 종파별로 자신의 종파의 최고경전을 소위경전으로 삼아 이것을 바탕으로 전체 경전을 배치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리적인 면에서의 천태의 5시8교판과 자파 중심적인 화엄의 5교 10종 교판(敎判)입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경전의 실제적인 편찬 순서와는 맞지 않고 각자 자기 종파의 경전을 최상으로 여기고 이에 입각하여 세운 체계이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다시금 조직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경을 읽는 목적에 따라 나누어 보았습니다.
1) 입문자의 필독서
(1) 입문서 - 예불문, 불교입문, 불교학개론, 인도불교사, 중국불교사, 한국불교사 등
(2) 경전 - 법구경, 숫타니빠다, 대반열반경
(3) 보살행 - 자타가
(4) 수행자세 - 유교경, 성구경, 초발심자경문, 보왕삼매론, 부모은중경 등
일단 경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현대 서적들 중에서 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도서를 읽고, 수행자의 마음가짐과 생활자세를 일깨워 줄 경문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2) 교리 공부를 위해
(1) 초기 - 4아함경(한글아함경, 아함경, 대반열반경), 5부니까야
(2) 부파 - 구사론, 대비바사론, 청정도론, 4아함, 5부니까야
(3) 반야 - 금강경, 소품반야경, 대반야경, 중론, 대지도론,
(4) 유식 - 해심밀경, 섭대승론, 유식삼십송,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5) 여래장(불성) - 승만경, 열반경, 여래장경, 보성론
(6) 유식과 여래장 종합 - 능가경, 능엄경, 대승기신론
(7) 화엄 - 화엄경 중에 십지경과 입법계품, 보현행원품, 현담
(8) 천태와 법화- 법화삼부경, 법화경종요, 마하지관, 소지관
(9) 정토 - 정토삼부경, 반주삼매경, 무량수경종요
(10) 밀교 - 대일경, 금강정경, 이취경, 보리도등론, 보리도차제론
(11) 신앙 - 예불문, 천수경, 아미타경, 지장경, 보현행원품, 관세음보살보문품
이상은 너무나 방대한 경전들이기 때문에 우선은 정선된 아함경을 먼저 읽고, 반야경 중에서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습니다. 가능하면 소품반야경과 대품반야를 쭉 읽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유마경과 승만경, 해심밀경 정도를 읽고 열반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능엄경과 능가경, 대승기신론을 읽고 화엄경과 법화경을 읽습니다. 이 중에서 법화경은 사경이나 독경용으로 많이 선택되는 경이므로 이 때에는 이 순서에 상관없습니다. 또 화엄경은 양이 방대하므로 품별로 나누어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입법계품과 십지경은 반드시 읽어야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쉬운 불교를 원하시면 정토경전을 권합니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함경을 가장 먼저 보는 것인데, 아함경도 양이 많으므로 주제별로 추려놓은 현대서적을 이용하여 읽어 나가면 공부를 쉽고 재미있게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율이나 참선수행에 있어서도 아함경에 기초적인 내용들이 나옴으로 계율과 수행법 부분을 따로 모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주시하시는 봐와 같이 아함(阿含, Agama)경은 전승(傳承)이란 의미로 스승이 제자에게 전해준 내용입니다. 이러한 아함경에서 주목해서 배워야할 교상(敎相)은 먼저 부처님의 생애를 철저하게 보고서 삼법인설 또는 사법인을 근간으로 유위(有爲)의 실상론의 입장에서 삼과(三科)설과 육계(六界)설과 수미산설, 연기론적 입장에서 인과론을 비롯한 유루(有漏)의 번뇌론과 육육법(六六法)과 연기설, 그리고 수행론적 입장에서 중도설과 선정설, 무위(無爲)의 해탈론적 관점에서 삼해탈(三解脫)과 팔해탈(八解脫)인 무루(無漏)의 오분법신(五分法身) 등입니다.
3) 계율수행을 위해
(1) 5계 - 우바새경, 우바새오계상경,
(2) 8재계 - 지재경(재경), 사천왕경,
(3) 10선계 - 십선경, 십선업도경, 십지경론, 십주비바사론,
(4) 보살계 - 범망경, 보살영락본업경, 우바새경, 재경, 유가사지론, 십선경
이러한 경전들은 모두 아함경에 들어있습니다. 특히 5계, 8재계, 십선계는 아함경을 보면 기본적인 지침을 얻을 수 있으며 보다 상세한 내용은 우바새 5계상경이나 우바새계경을 보면 되고, 특히 십주비바사론에서는 대승적 관점에서 각종 계에 대한 구체적인 관점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끝으로 보살계는 5계, 8재계, 십선계가 충분히 몸에 익은 사람이 받는 계입니다. 이와 관련된 경을 보는 분도 마땅히 앞의 계가 충분히 익은 후라야 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경전을 읽을 때 그래야 하지만 특히 보살계는 마음으로 가지는 계로서 범망경을 비롯하여 보살계를 설한 경론을 읽을 때에는 계의 근본 정신을 깨우치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불살생계는 모든 계율의 근본이며 이에 대한 적극적 실천법으로 방생이 있습니다. 방생에 대해서는 중국 우서주굉스님의 <계살방생문>을 보면 좋습니다.
4) 참선수행을 위해
(1) 현대서 - 선의 비밀, 선불교강좌, 선종사상사, 선의 역사와 선사상
(2) 소승선 - 성구경, 대념처경, 안반수의경, 청정도론, 구사론
(3) 대승선 - 능엄경, 능가경, 금강삼매경, 금강경, 유마경, 대승기신론 등
(4) 조사선 - 선가귀감, 선문촬요, 육조단경, 신심명, 증도가, 묵조명, 무문관, 벽암록
먼저 현대 선에 관한 서적을 열람하여 선에 대한 개념을 확실하게 인식한 다음에 경전들로서 그 개념들을 확인해 가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은 아함경 속에 있고, 안반수의경은 독립경이기는 하나 문장이 난해하므로 아함경 속의 입출식념경 등을 통해 익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므로 아함경 가운데 사념처관과 오정심관 및 37조도품에 관한 경문을 모아 읽습니다. 그리고 나서 능엄경, 원각경, 금강경을 읽고 대승선의 경지를 한번 가늠해 봅니다. 그 다음에 좌선의를 보고 선문촬요 중에 이입사행론, 혈맥론과 절관론, 수심요론, 전심법요, 관심론, 진심직설과 돈오입도요문과 육조단경, 신심명, 증도가, 묵조명, 선가귀감을 읽습니다. 물론 무문관과 벽암록, 선문책관, 각종 조사어록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권장하고 싶은 것은 선가귀감과 선문촬요의 내용이 수행자의 배울 바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므로 먼저 이것을 보고 나중에 경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육조단경과 신심명을 비롯한 조사어록은 어느 정도 공부가 익은 후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들 대승경전이나 조사어록은 수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며, 혹 이해가 되었다 하더라도 수행을 통해 나름대로 체득한 이후에 다시 읽어보면 처음에 읽은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가 와 닿을 것입니다. 또한 수행 중에 자신의 경험한 것을 점검하거나 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지침서 역할도 합니다.
이렇게 갈래를 나눈 것은 편의상 이름 붙여 놓은 것이지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어느 것이나 하나만이라도 재대로 익혀 깨달음에 이를 수 있으면 나중에는 저절로 다 통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5) 염불, 기도, 독경, 진언수행을 위해
(1) 참회 - 천수경, 정찰선악업보경
(2) 염불 - 아미타경,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반주삼매경
(3) 수지독송 - 지장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약사경, 금강경, 법화경 등
(4) 보살행 - 보현행원품, 화엄경 등
(5) 주력 - 신묘장구대다라니, 능엄신주, 츰부다라니, 광명진언 등
위의 경전은 순서에 관계없이 상황에 따라 그때 그때 읽되 한 경을 지속적으로(천독, 만독) 읽는 것이 좋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경전 중에 금강경과 법화경, 지송한글화엄경도 수지독송하기 좋은 경입니다. 그 이유는 어느 경보다 수지독송의 공덕을 강조한 경이기도 하고, 금강경의 경우 선종의 정수를 잘 표현한 경이기 때문에 옛부터 조사스님들께서도 거기에 의지하여 불법의 이치를 설파하곤 하셨습니다. 또한 조계종의 소위경전이기도 하며 분량도 적어 외워서 암송하기도 좋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경론과 어록은 모두 한글번역본이 있는 것들로 고른 것입니다. 경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여 쉬운 개론서들만 읽을 것이 아니라 직접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와 닿는 대로 참구하고 실천해나가면 공부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공부에 큰 진척 있으시길 빕니다.
8. 간경수행의 갈래와 공부법
그러면 구체적으로 간경수행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간경수행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서사(書寫)와 공양(供養), 시타(施他)와 제청(諦聽), 피독(披讀)과 수지(受持), 개연(開演)과 풍송(諷誦), 사유(思惟)와 수습(修習) 등 10가지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서사(書寫)
서사는 부처님이 설하신 경율론를 옮겨 씀으로써 법이 단절되지 않도록 이어가면서 내면적으로는 자신을 살펴보는 공부법입니다. 경전을 옮겨 쓸 때에는 가장 깨끗한 바탕에 가장 깨끗한 도구로 써야 하며, 옮겨 쓰는 글씨의 모양이나 속도도 한결같아야 합니다. 경을 쓰면서 그 글자를 마음속에 같이 쓰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옮겨 쓰기 시작하거나 끝낼 때나 갈무리할 때 개경게나 개법장진언 등을 염송하는 것이 좋습니다. 옮겨 쓴 경전은 아무렇게 방치하지 말아야 하며, 깨끗하게 싸서 잘 갈무리해야 합니다. 경전을 옮겨 쓰는 것은 부처님의 상을 조성하여 널리 받들게 하는 것과 같은 일이므로 옮겨 쓴 경전도 이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만 전해줄 수 있습니다. 다만 경전을 옮겨 쓸 때 반드시 한 경전을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다 옮겨 쓴 다음에 다른 경전을 옮겨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간경 수행의 대표적인 한 방법으로 사경은 널리 행해지고 있어서 사경법회를 정기적으로 하거나 사경을 주된 수행법으로 하는 사찰도 있습니다. 또한 사경은 계층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실천되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호응이 좋은 수행입니다. 요즘은 사경 교재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있으므로 그런 것을 이용하면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정성과 경전의 내용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2) 공양(恭養)
공양은 부처님의 경전이 있는 곳을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곳처럼 공경하고 존중히 공양하는 것입니다. 경전이 곧 부처님이므로 공부하는 이는 거기에 실린 말씀을 들을 때마다 부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간경수행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다른 글을 보듯이 쉽게 경전을 읽으려 드는 것은 부처님을 스승으로 받드는 예법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경전이 곧 부처님임을 믿으며 그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공부입니다. 그러면 경전에 공양을 어떻게 하느냐 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찰에 가서 법당에 정좌하고 경전을 독송하여 부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모든 공양 중에 이 경을 공양하는 것이 최상의 공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경전을 보시하는 것도 공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시타(施他)
시타(施他)는 경전을 자기 개인의 전유물로 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베풀어 이익을 주는 실천공부입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실천으로 보시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말씀이 담겨있는 경전을 보고 오히려 그것을 아끼는 마음에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어찌 바르게 읽었다 하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주어 읽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법보시란 이름으로 경전이나 불서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천도재나 49재를 지내는 경우 후손들은 망자를 위해 많은 양의 경전류를 사찰이나 동참대중에게 보시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공양(供養)과 시타(施他)는 거의 동일하다고 하겠으나 공양은 부처님께 경전을 독송해 올리는 것이 주안점이고 시타는 다른 사람에게 경전을 읽어 주거나 베푸는 것입니다.
4) 제청(諦聽)
제청은 다른 이가 읽고 해설하는 일체 경법을 듣고 깊이 애락(愛樂)하며 진심을 다하여 살피고 자세히 듣는 공부입니다. 옛적에 보살님이 몸을 나투셨으나 자기의 상에 빠져 뵙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언제 어느 모습으로도 오실 지 모릅니다. 자신의 상에 빠지지 말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이 들리는 곳이면 모두 부처님의 또 다른 현신으로 여기는 마음을 내야 하겠습니다.
경전에 실린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때로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말을 들으면, 그를 선지식으로 여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도 물론 제청에 해당합니다. 수행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부처님이 여러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셨음을 알게 되어 잇습니다. 자신이 가진 상으로 말미암아 타인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면 올바른 간경행자라 할 수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법을 청하며 법을 연설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 즐겨 들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경전을 강의하는 곳이면 반드시 빠뜨리지 마시고 가서 듣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주의하실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나 쉽다는 경박한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처음 들으니 너무 어렵고 자주 들었으니 쉽다고 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만 경전의 내용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5) 피독(披讀)
피독(披讀)은 경전을 언제나 펴서 보고 읽어 손에서 놓지 않는 공부입니다. 한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거든 잊지 말고 기억하여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 손에서 놓지 않고 경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은 스승께 한 마디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다 들어 깨우치기 전에 또 다른 말씀을 들을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 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반드시 그 말씀을 올곧게 깨우쳐야 할 것이며, 그 말씀이 스쳐지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늘 부처님의 말씀을 떠올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독(披讀)의 수행입니다. 여기서 주의하실 내용은 경전을 자기 머리가 닿는 이상의 높이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 넘어 다니는 불경한 일입니다.
6) 수지(受持)
수지(受持)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가르침을 스승으로 좇아 이를 본받고 잘 갈무리하여 잊지 않도록 하는 공부입니다. 앞의 피독이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는 것이라면 수지는 다시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도 잊지 않고 받아가져 지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피독과 수지는 간경 수행자의 필수적인 행법이라 하겠습니다.
7) 개연(開演)
개연(開演)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때때로 언제나 연설하고 열어 보여 사람들에게 믿어 알도록 하는 공부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름대로 깨침이 있었을지라도 그 깨침이 자기만의 쓰임일 수 없으므로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 무엇인지 기회 있을 때마다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수지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으로 갈무리했다면, 개연을 통해 그것을 바로 비추어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어느 한 쪽에만 매달리면 원만한 공부가 되지 못할 수도 있기 대문에 이 두 가지를 늘 아울러서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8) 풍송(諷誦)
풍송(諷誦)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의 도법을 널리 범음(梵音)으로 소리내어 맑게 읊어 선양함으로써 널리 사람들로 하여금 듣기에 즐겁게 하는 공부입니다. 풍송을 할 때는 가장 깊고 맑은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즉, 잡념과 삿된 생각을 텅 비워 버리고 마음을 고요히 하며 호흡을 잘 가다듬어 발음을 정확하게 하고, 중간에 경전의 말씀을 한 소리라도 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풍송을 할 때 목탁 등을 사용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이 함께 풍송하기 편리하게 하고, 또한 주변을 장엄하게 하여 마음에 깊이 새기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9) 사유(思惟)
사유(思惟)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깊이 헤아려 이치를 터득하는 공부입니다. 즉, 불법의 이치를 터득하는 비결은 사유를 통해 사유를 깨고 뛰어 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알고 있는 알음알이로 이해하거나 생각이 아닌 깊고 깊은 의문으로 한마음이 될 때 문득 이치가 환하게 알아질 것입니다. 즉,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문구에만 매달리다보면 그 문구가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내용은 놓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10) 수습(修習) 또는 간경선(看經禪)
피독(披讀)과 수지(受持)는 경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으며 마음에 새기고 받아 지녀 명심하는 공부임에 비해 사유와 수습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실제로 이치를 터득하고 그것을 몸에 익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대로 엄밀하게 닦아 그 열매를 맺는 공부입니다.
따라서 사유를 통해 이치를 알았다면 다시 그것을 완전히 자기 것이 되도록 몸에 익히고 나의 생각이나 말이나 생활에 습관화하는 단계를 거쳐 깨달음을 완성합니다. 선종에서도 화두참구 후에 보림을 하는 것도 다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간경수행에서도 깊은 사유를 실천합니다. 이를 간경선(看經禪)이라고 합니다. 간경(看經)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본다는 의미이고, 선(禪)이란 마음을 오로지 집중하여 삼매 속에서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말씀이 수록된 경전을 지극한 믿음으로 읽어 마음속에 새기면서 그 의미를 잘 이해하여 현실생활에 실천하는 첫 걸음이 간경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간경수행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불교신행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수행법으로 나름대로 여러 방편을 통해 실천되어져왔다고 합니다. 즉, {중변불변론}의 [무상승품]에 의하면 이 방편들을 크게 열 가지로 구분하는데, 이를 일러 십종수지(十種受持) 또는 십종전통(十種傳通)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수행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열 가지 간경법이란 뜻입니다. 대승의 법을 수행하는데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쓰고 베낌이요,
둘째는 공양함이요,
셋째는 베풀어서 남에게 줌이요,
넷째는 다른 이가 읽고 외우면 한 마음으로 들음이요,
다섯째는 자신이 읽음이요,
여섯째는 자신이 이치대로 경명과 글귀와 맛과 뜻을 취함이요,
일곱째는 도리 그대로와 경명과 글귀와 맛을 나타내 설명함이요,
여덟째는 바른 마음으로 듣고 욈이요,
아홉째는 조용한 데서 이치대로 헤아림이요,
열째는 이미 뜻이 확고한 것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닦아 익히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간경수행을 간경선(看經禪)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대승장엄경론}에서 말하기를,
"먼저 경전의 제목에 대해서 사유하고 마음에 새기는 수행을 한다. 다음에 경전의 글귀를 따라서 사유관찰(思惟觀察)해 간다. 세 번째로 경전 전체의 낱낱의 글에 대한 뜻을 새기고 사유하면서 경전의 내용에 따라서 관찰하면서 사유하는 것이다. 네 번째로 경전의 뜻을 더더욱 세밀하게 이해하면서 사유한다. 다섯 번째는 경전의 내용을 종합하여 관찰하면서 경전의 핵심적인 내용을 종합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끝으로 경전의 궁극적인 의미를 실현하여 모든 공덕을 총괄하면서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발원한다. 이것이 공덕을 쌓는 자량(資糧)행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이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에 있듯이 간경수행의 목적도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성불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란 말로써 전해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어떻게 언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경전은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언설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진리를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게 언설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깨달은 분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 속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간경수행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경전 자체가 진리라는 것을 간경수행을 통해서 자기화 하는 것이 바로 자각증지(自覺證智)의 과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간경수행을 통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그 핵심은 경전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고 합니다. 즉, 경전을 공부하는 사람이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 대하느냐 부처님께서 직접 나에게 설법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느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만약 경전에 대해서 지식을 쌓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경전을 보는 것이 오히려 아만(我慢)과 교만(驕慢)을 쌓고 무수한 시비분별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장애가 될 뿐입니다. 이에 가장 중요한 점 하나는 경전을 접하여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보는 경전은 그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내게 지금 법신(法身)으로 나투어 설해 주신다고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경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다고 깊이 공경하면서 경전의 말씀마다 헛된 것으로 보거나 읽지 않고, 언제나 마음에 새겨 잊지 않으며 가슴에 다지고 다져서 생각생각 익히는 중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일까?'하고, 화두로 삼아 부처님의 참뜻을 꿰뚫어버리자 하는 진실한 의문을 가슴에 담고 입으로 읊으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사유함이 끊이지 않으면 문득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와 닿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씩 깨달아 가다보면 드디어 모든 이치가 훤히 밝아지고 번뇌업장도 눈 녹듯 사라져서 밝은 지혜가 솟아날 것입니다. 따라서 8만4천가지 진리의 말씀이 사무쳐서 모두 통달되어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아지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일시에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간경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심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엇이든 내면적으로 관념화되고 피상적으로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뗏목에 비유한 무쟁삼매(無諍三昧)입니다. 즉, 어떤 대상에도 집착해서는 안되고 머물러서도 안 되겠습니다. 만약 수행의 과정에서 생긴 소득이 있다면 그만 증상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간경선(看經禪) 또는 간경수행(看經修行)의 요체입니다.
긴 글 끝가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공덕으로 구경에 본래 부처였음을 확증하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마하살...()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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