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 통해 바른길로 나아가 윤회 종식해야
범부는 오온을 자아라고 집착해 결국 스스로 괴로움에 빠져들어
성자도 괴로움이라는 1차 화살은 맞지만 집착 않기에 2차는 피해
끊임없는 수행·정진만이 범부의 삶서 성자의 삶으로 전환하는 길
범부와 성자는 어떻게 다른가? 범부의 삶과 성자의 삶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 범부와 성자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중에서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大迦旃延) 존자가 동료 비구들에서 설한 것이 가장 명료한 것 같다. ‘웃데사위방가 숫따(Uddesavibhaṅga-sutta, 總說分別經)’(MN138)에서는 범부와 성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도반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존중하지 않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지 않고 성스러운 법으로 인도되지 않고, 바른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고, 바른 법에 정통하지 않고, 바른 법으로 인도되지 않아서 물질을 자아라고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 그의 물질은 변하고 달라집니다. 그의 물질이 변하고 달라지기 때문에 알음알이는 물질의 변화를 따라 무너져버립니다. 물질의 변화를 따라 무너져버림으로 인해 동요와 (해로운) 법이 생겨나서 마음을 압도하여 머뭅니다. 마음이 압도되어 그는 걱정하고 속상해하고 애착하고 취착하여 동요합니다.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을… 알음알이도 이와 같다.”
“도반들이여, 여기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존중하고 성스러운 법에 정통하고 성스러운 법으로 인도되고, 바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바른 법에 정통하고 바른 법으로 인도되어 물질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물질은 변하고 달라집니다. 그의 물질이 변하고 달라지더라도 그의 알음알이는 물질의 변화를 따라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변화를 따라 무너짐으로 인해 동요와 (해로운) 법이 생겨나지 않아 마음을 압도하여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이 압도되지 않아서 그는 걱정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애착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아서 동요하지 않습니다. 느낌을… 인식을… 심리현상을… 알음알이도 이와 같다."(대림 스님 옮김, 맛지마 니까야 제4권,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12, pp.457-459)
위 인용문에 나타나는 “물질을 자아라고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는 대목은 붓다시대의 외도(外道)들이 주장하던 20종의 아견(我見)을 말한 것이다. 즉 ①색(色)은 아(我)이다. ②색(色)은 아(我)의 소유이다. ③아(我) 가운데 색(色)이 있다. ④색(色) 가운데 아(我)가 있다.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이와 같다. 이렇게 해서 20종의 아견이 생긴다. 이 20종의 아견은 붓다의 무아설에 위배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육체가 ‘나’이고, 육체는 나의 소유이며, 자아 안에 육체가 있고, 육체 안에 자아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가 육체가 변하면 마음이 그것에 압도되어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애착하고 취착하여 동요하게 된다. 그 근본 원인은 무아(無我)의 이치를 꿰뚫어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 경전의 내용을 요약하면, 범부는 오온(五蘊)을 자아라고 여기고, 오온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고,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고 여기고, 오온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다가 오온이 변하면 동요를 일으켜 마음이 압도되어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애착하고 취착하여 동요한다. 그러나 성자는 오온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오온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여기지 않고, 자아 안에 오온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오온 안에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다가 오온이 변하고 달라지더라도 동요를 일으켜 마음이 압도되지 않으며, 걱정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애착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아서 동요하지 않는다.
‘잡아함경’ 제5권 제109경에서도 “어리석은 범부는 색(色)이 아(我)라고 보며, 아(我)와 다르다고도 본다. 아(我)가 색(色)에 있고, 색(色)이 아(我)에 있다고 본다.” 이처럼 범부들은 육체가 자아이고, 자아와 다르다고 보고, 자아에 육체가 있고, 육체에 자아가 있다고 보고 오온에 집착한다. 이것을 오취온(五取蘊)이라고 한다. 이 오취온 때문에 범부들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성자는 오온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꿰뚫어 알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
또한 범부는 성자와 바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고, 성스러운 법과 바른 법에 정통하지도 못하고 그러한 법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반면 성자는 성자와 바른 사람을 존중하고, 성스러운 법과 바른 법에 정통하고 그러한 법으로 인도된다. 이와 같이 범부는 일생 동안 정법을 만나지 못하고 헤매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성자는 정법을 만나 바른 길로 나아가 결국에는 윤회를 종식시킨다. 이것이 범부와 성자의 다른 점이다.
요컨대 범부는 오온을 자아라고 여긴다. 그러다가 그 오온이 변하고 달라지면 동요하고 마음이 압도되어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애착하고 취착하고 동요한다. 반면 성자는 오온을 자아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오온이 변하고 달라지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이 압도되지 않아서 걱정하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고 애착하지 않고 취착하지 않아서 동요하지 않는다.
이처럼 범부는 오온을 자아라고 집착하여 괴로움을 스스로 불러들이지만, 성자는 오온을 자아라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을 스스로 불러들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괴로움이라는 1차 화살은 범부와 성자 모두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범부는 1차 화살로 인해 2차 화살을 맞지만, 성자는 2차 화살을 맞지 않는다. 이것이 범부와 성자의 또 다른 점이다.
이와 같이 오온의 변화로 인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면 범부요, 오온의 변화로 인해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면 성자인 것이다. 따라서 범부의 삶은 괴로움으로 가득 찬 허망한 것이지만, 성자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찬 값진 것이다. 범부는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지만, 성자는 정신적 행복을 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물질적 행복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끝으로 범부의 삶에서 성자의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이 요구된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51호 / 2020년 9월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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