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 인연에 따라 교화 결정되는 사람 먼저 전법
붓다가 모든 중생을 제도 못한 까닭은 중생의 근기 다르기 때문
전법해됴 교화 안되는 사람과 스스로 불문에 드는 사람도 있어
다른 죵교 맹신자 교화보다는 가능성 있는 사람 교화가 효율적
붓다는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붓다는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없다. 전지전능하다는 신(神)도 일체중생을 구제하지 못한다. 붓다 재세 시에도 모든 사람들을 다 교화하지 못했다. 더더구나 붓다의 면전에서 붓다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도 중에는 붓다가 일체중생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붓다를 전지자(全知者, The Omniscience)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붓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다 교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붓다는 깨달음을 이룬 뒤 부처의 눈(佛眼, Buddhacakkhu)으로 세상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중생들 가운데는 번뇌가 적은 사람과 번뇌가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과 둔한 사람,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과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과 후세와 죄과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Vin.Ⅰ.6-7; MN.Ⅰ.169)
붓다가 처음 설법하기를 망설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연못에는 아직 물밑에 있는 연꽃도 있고, 수면에 거의 올라온 연꽃도 있고, 물위로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는 연꽃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사람들도 수준의 차이가 있지만, 그 중에 뛰어난 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붓다는 법을 설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면 인간의 능력에 차별이 생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경에서는 “중생들의 인내심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임이 다르고, 배움의 정도가 다르고, 다른 견해에 의지하고, 구하는 바 즐거움이 각기 다르고, 익힌바 업(業)이 다르기 때문이다”(T1, p.8b)고 설한다. 이 때문에 설법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붓다의 설법을 응병여약(應病與藥) 혹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붓다는 세 가지 종류의 환자에 비유하여, 교화의 대상을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분했다. 이것은 어떤 부류의 사람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길라나 숫따(Gilāna-sutta, 환자경)’(AN3:22)에서 붓다는 세 가지 종류의 환자에 대해 언급했다. 경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환자는 적당한 약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병이 회복되지 않는다. 둘째 환자는 적당한 약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상관없이 병이 회복된다. 셋째 환자는 적당한 약을 얻을 때에만 병이 회복되고 적당한 약을 얻지 못하면 병이 회복되지 않는다. 이 중에서 셋째 환자를 위해 적당한 음식과 적당한 약과 적당한 간병인을 보내 간호해야 한다. 나아가서 이 환자 때문에 다른 두 종류의 환자도 간호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사람은 여래가 설한 법과 율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상관없이 유익한 법(善法)들에 대해 확실함과 올바름에 들지 못한다. 둘째 사람은 여래가 설한 법과 율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상관없이 유익한 법들에 대해 확실함과 올바름에 든다. 셋째 사람은 여래가 설한 법과 율을 들을 때에만 유익한 법들에 대해 확실함과 올바름에 들고, 법과 율을 듣지 못할 때에는 유익한 법들에 대해 확실함과 올바름에 들지 못한다. 이 중에서 셋째 사람에게 교법을 설해야 한다. 나아가서 이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법을 설해야 한다.(AN.Ⅰ.120-122)
이 경에서 말하는 교화의 대상은 셋째 사람이다. 붓다가 설한 법과 율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간에 믿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가지 않는 첫째 사람과 붓다가 설한 법과 율을 듣거나 듣지 않거나 간에 믿음을 일으켜 바른 길로 나아가는 둘째 사람은 우선 교화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교화가 시급한 사람은 붓다가 설한 법과 율에 대한 설법을 들으면 믿음을 일으켜 바른 길로 나아가지만, 설법을 듣지 못하면 믿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가지 않는 셋째 사람이다. 이 셋째 사람은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해서 첫째와 둘째 사람을 완전히 포기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어떤 잘못된 견해에 빠져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은 첫째 환자와 같아서 아무리 훌륭한 붓다의 가르침을 설해도 그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 한 교화가 불가능하다. 반면 둘째 사람은 그냥 두어도 언젠가는 붓다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결국에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게 된다. 따라서 굳이 교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선생님이나 부모의 강요가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는 학생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것과 같다.
문제는 첫째 부류의 사람이다. 다른 종교의 맹신자나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철저한 자각이 없는 한 교화가 불가능하다. 그런 사람을 교화하겠다고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차라리 아직 붓다의 가르침을 접하지 못해 믿음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따라서 불교의 포교 대상도 셋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단순히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이 붓다의 바른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구도심(求道心)이 없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필자가 몇 년 전부터 개설하고 있는 초기불교 강좌에 참여했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주된 원
인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기존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싶어 한다. 정치와 관련된 뉴스나 정보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가 듣고 싶지 않은 뉴스나 정보는 철저히 외면한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붓다의 가르침을 설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백약이 무효인 첫째 환자와 같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49호 / 2020년 8월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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