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공(誌公, 418~514) 화상십사과송(十四科頌)>
지공(誌公) 화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 당시의 고승이다.
그의 저서 <대승찬송(大乘讚頌)>은 502년 황제에게 바친 글이라고 한다.
지공 화상은 당시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알릴 정도로 유명해서 고구려왕이 공양물을 보냈다는 기록이 전하며, 신라에까지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해인사(海印寺) 창건설화에도 등장하는데, 현재 해인사에 「지공증점지(誌公曾點地)」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는 “지공 화상께서 점지해준 자리”라는 뜻이다.
즉, 지공 화상이 지정해준 자리에 해인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지공 화상에 대한 기록은 여러 책에 나와 있는데, 특히 <신승전(神僧傳)>이라고 하는 책에도 전한다. 이는 신비한 스님들에 대한 기록인데, 이와 같은 책에 기록돼있는 것을 보면 도사다운 특이한 스님의 행적을 짐작하게 한다.
지공 화상 성은 주(朱)씨고 섬서성(산시성) 남쪽에 살았으며 어려서 출가했다.
처음 출가해서 은사의 인연을 맺은 사람은 도림사(道林寺)의 승검(僧儉)이었다.
차츰 자라면서 지공 화상은 예언을 잘 했으며 시와 문장에도 능했다. 특히 민중들에게 덕화를 많이 끼친 인연으로 훗날 황제들이 그의 덕을 추앙해서 시호를 내리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관재대사, 묘각대사, 도림진각보살, 도림진각대사, 자응혜감대사, 보제성사보살, 일제진밀선사 등의 시호가 많이 있다.
지공 화상의 저서로는 <대승찬송(大乘讚頌)> 10수 외에 <십사과송(十四科頌)> 14수, <십이시송(十二時頌)> 12수 등이 있는데, 고려의 백운(白雲) 화상이 편찬한 유명한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심경(直指心經)>에 <대승찬>과 <십사과송> 전문이 실려 있다.
짧은 시구 속에 불교적 삶의 진수를 잘 표현한 <대승찬송>은 흔히 <대승찬(大乘讚)>이라고도 하는데, 제목 그대로 대승적 삶에 대한 찬탄의 노래다. <신심명(信心銘)>, <증도가(證道歌)>와 더불어 선불교 삼대 선시(禪詩)로 꼽힌다.
<대승찬송> 10수라고는 했으나 매 수마다 구절의 수효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내용에 따라 10수로 나누기도 하고, 24수로 나누기도 한다. <대승찬>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 수재목전난도(雖在目前難覩)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는데, 비록 눈앞에 있지만 보긴 어려운 법이다.
약욕오도진체(若欲悟道眞體) 막제색성언어(莫除色聲言語)
만약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하면, 소리와 형색과 언어를 제거하지 말라.
언어즉시대도(言語卽是大道) 불가단제번뇌(不可斷除煩惱)
언어가 곧 큰 도이니 번뇌를 끊어 제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번뇌본래공적(煩惱本來空寂) 망정체상전요(妄情遞相纏繞)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하지만 망령된 생각이 번갈아 서로 얽힌다.
대승의 진리를 찬탄하는 첫 구절부터 ‘도(道)’를 이야기하고 있다.
큰 도[大道]란 무엇인가. <신심명>에도 첫 구절에 지극한 도[至道]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 지금 이곳의 눈앞에 있다는 말이다.
비록 지금 눈앞에 있지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인생의 의미를 누리지 못한다면 언제 어디서 다시 인생의 의미와 보람이 있겠는가.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거나 불문에 들어와서 견성성불을 한 이후라야 꼭 그 사람의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가치는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무엇을 하며 살든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매 순간 모두가 그 사람의 소중한 삶이다.
이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곧 대승적 삶이다.
그러므로 만약 도의 참모습을 깨닫고자 한다면 지금 이렇게 보는 사물과 듣는 소리와 말하는 이 사실을 제외하고 따로 찾지 말라.
보고 듣고 말하는 이 순간의 이 사실이 곧 도의 참다운 모습이다.
그대로가 진정한 인생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삶이다.
이것이 진정 큰 삶이라는 진리를 찬탄한 것이다. 곧 실상(實相)이 그대로 진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지공 화상은 <대승찬(大乘讚)> 강설을 통해 대승이란 소승과 대승이라고 하는 차별된 나눔이 아님을 강조했다. 대승 즉 대중(大衆)에 대한 찬탄을 통해 승속(僧俗), 남녀, 노소, 빈부, 귀천의 차별과 경계가 전혀 없는,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사실’을 깨우쳐 주신다.
일체 존재로부터 해탈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속된 인간들의 행태가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천둥소리에 놀란 개가 이미 끝나버리고 없는 소리인데도 어디론가 무턱대고 짖어대는 것과 꼭 같다고도 하겠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밝은 눈을 뜨고 해탈감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직지심경(直指心經)>을 편찬한 백운(白雲景閑, 1299~1374) 화상의 이름은 경한(景閑)이고 호(號)가 백운으로 고려 말기 충렬왕 때 전라도 정읍(고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출가해 전국의 사찰에서 수십 년 동안 수행하다가, 50이 넘은 나이인 1351년 원(元)나라에 가서 인도 승 지공(指空禪賢, 1300~1363) 화상에게 법을 묻고, 임제종의 맥을 이은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 화상의 법을 잇고 돌아왔다.
1365년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선사의 천거로 해주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돼 종풍을 크게 떨쳤다. 1372년에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의 주요 말씀을 초록한 <직지심체요절 - 직지심경> 상⋅하 2권을 편찬하고, 1374년 77세에 천녕(川寧-현 경기도 여주)의 취암사(鷲岩寺)에서 입적했다.
그 후 1377년에 제자들에 의해 <직지심체요절>이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됐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무려 78년을 앞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378년 6월에는 경기도 여주의 취암사에서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됐다.
※공교롭게도 <대승찬(大乘讚)> 외에 <십사과송(十四科頌)>을 저술한 지공(誌公, 418~514) 화상과 백운 화상의 스승이고, 인도 출신이며, 고려에 다녀가기도 한 지공(指空, 1300~1363) 화상의 한글 발음이 같아서 혼동하는 수가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학승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오늘날로 치면 대학원이나 그 이후 보임을 하는 학습교재였다고 하겠다.
선(禪)을 공부하는 학승들로 하여금 일체의 사심과 망념에서 떠난 진실 된 마음을 중시하는 무념무상을 궁극의 경지로 삼아 자신의 선풍을 펼치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위해 책을 편찬했을 것이다.
이 책 제목의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글귀에서 따 온 것으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직지심경(直指心經)>의 흥덕사 금속활자본은 현재 하권만이 전해지고 있으나 다행스럽게도 취암사의 목판본이 상⋅하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상권에 수록된 내용을 알 수 있다.
취암사 본의 이 책 상권 내용은, 과거 7불의 간략한 게어(揭語)를 필두로 이들 7불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은 인도 제1조인 마하 가섭 이하 제28조인 보리 달마까지의 28존(尊)과 달마를 시조로 하는 중국의 2조 혜가(慧可) 선사 등 5조사(祖師)와 그리고 그 법맥을 이은 후세의 여러 고승들에 이르기까지의 법어로 돼있다.
하권에서는 역대의 모든 부처와 조사들이 도를 깨치고 권하는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의 끝에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이름을 붙여 백운 화상이 편찬했음을 밝혔다.
하권의 앞부분에서는 선사들의 문답으로 도를 토론한 내용이 있으며, <대승찬송> 10수, 십사과송 14수 전문이 실려 있다. 아마 백운 화상이 지공 화상을 무척 존경했던 것 같다.
그런데 금속활자본인 <직지심경(直指心經)> 하권이 프랑스에서 발견된 것은,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 때 우리나라에 프랑스 대리공사로 서울에 와서 근무한 적이 있었던 꼴랭 드 플랑시(V. Collin de Plancy, 1853~1922)가 수집해 간 장서에 들어 있었던 것이 그 후 골동품 수집가였던 앙리 베베르(Henri Vever, 1854~1942)에게 넘어 갔고, 그가 1950년에 사망하자, 유언에 따라 현재까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재불(在佛) 서지학자 박병선(朴炳善, 1928~2011, 여) 박사가 피리 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어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경>을 찾아낸 것이다. 195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사회교육과(역사전공)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 간 박병선 박사는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67년부터 13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서고를 뒤져 소문으로만 돌던 <직지심경>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한국 측에 그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오랜 연구 끝에 <직지심경>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지공화상 14과송(誌公和尙十四科頌)> 주요내용
1.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님(菩提煩惱不二)
중생은 도(道) 닦기를 알지 못하고 문득 번뇌만을 없애고자 하니 번뇌는 본래 공적(空寂)하거늘 도(道)를 가지고 다시 또 도를 찾는 것이 아닌가. 일념(一念)의 마음이 바로 이것인데 어찌 딴 곳에서 찾아내려 하는가. 대도(大道)는 목전(目前)에 분명하게 있는데도 미도(迷倒=미하고 안정이 없는 것)한 어리석은 사람은 불성(佛性)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2. 지키고 범하는 것이 둘이 아님(持犯不二)
장부(丈夫=깨친 사람)는 행동할 때에 걸림이 없으니 계율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지킴과 범함은 본래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리석은 이들은 그에 속박 당한다.
지혜로운 이는 하는 일이 모두 공하지만 성문은 부딪치는 일마다 막히기만 한다.
대사(보살)의 육안은 원만하고 두루 통해 있지만 이승(二乘)의 천안(天眼)에는 가리운 것이 있다.
3.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님(佛與衆生不二)
중생은 부처와 더불어 다를 게 없고 어리석음과 다를 게 없음이니 어찌 모름지기 밖을 향해 보배를 구할 것인가.
몸 밭(身田)에 스스로 명주(明珠-맑은 구슬)가 있는 정도(正道)와 사도(邪道)가 둘이 아닌 것을 알면 범부와 성인의 길이 같음이니 깨치고 미한 것이 본시 차별이 없는 것이며 생사와 열반이 일여(一如)함이로다.
4. 이치와 일이 둘이 아님(理事不二)
부처와 중생은 같은 종자인지라 중생이 곧 이 세존(世尊)이거늘 범부가 망녕되게 분별을 내어 없는 가운데서 있는 것을 집착해서 미분(迷奔)하고 있으니 요달(了達)하면 탐⋅진(貪嗔=욕심내고 성질냄)이 고정함이니 어느 곳이 진문(眞門)이 아니리요.
5. 고요하고 산란함이 둘이 아님(靜亂不二)
번뇌는 곧 보리요, 무심(無心)하면 곧 무경(無境)이다. 생사가 열반과 다른 것이 아니요, 탐과 진(貪嗔)도 불꽃같고 그림자와 같을 뿐이니 지혜로운 자는 무심으로 부처를 구하고 미련한 자는 밖을 향해 치달리면서 부질없이 일생을 헛되이 보낸다.
6. 선과 악이 둘이 아님(善惡不二)
육진(六塵=眼⋅耳⋅鼻⋅舌⋅身⋅意)이 본래 공적(空寂)한데 범부들이 집착을 망녕되게 냄이로다. 생사가 평등한 사해(四海)이어니 누가 얇고 누가 두터운 것이겠는가. 대도(大道)는 자연스러워 마음을 가지고 헤아림을 쓰는 것이 아니로다. 깨쳐 알면 모든 법이 평등하고 소연해 청허(淸虛)하고 쾌락하리라.
7. 색과 공이 둘이 아님(色空不二)
법성(法性)에는 본래부터 청⋅황(靑黃)이 없는데, 중생이 부질없는 문장을 지어서 나는 남을 말하고 제 마음대로 고치고 보고 분노하고 미치고 어지러워서 원통(圓通)한 묘리(妙理)를 알지 못하니 어느 때에 진상(眞常=참되고 항상함)을 깨쳐 알리요. 스스로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타인의 약방문은 물리쳐야 하리라.
8.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님(生死不二)
세간의 모든 법이 환(幻)과 같으며 생과 사도 마치 번갯불과 같음이니 법신은 자재원통(自在圓通)해서 산하(山河)에 출입해도 간격이 없으며 전도망상(顚倒妄想)이 본래 공해 반야(般若)는 미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으며 삼독 자체가 스스로 해탈된 것인데 어찌 모름지기 생각을 거두어 선(禪)을 할 것이 있으랴.
9. 끊어지고 항상함이 둘이 아님(斷常不二)
단견(斷見)은 세상만사가 무상하듯 사람도 한번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 공무(空無)로 돌아간다는 그릇된 견해를 말하며, 상견(常見)은 세계나 모든 존재, 그리고 인간의 자아가 실재로 영원히 존재한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장부(丈夫)는 운용(運用)이 당당해서 소요자재(逍遙自在)하며 방해로움이 없고 일체가 능히 해치지 못하는 것이니, 견고함이 마치 금강과 같고 이변(二邊=有와 無)에 집착하지 아니해 중도(中道)가 소연함이니 끊는 것도 아니요, 두는 것도 아니어서 오욕(五欲=食⋅色⋅名⋅財⋅睡)과 탐⋅진 자체가 부처요, 지옥 천당과 다른 바 없는데 미련한 사람은 망영되게 분별을 내어서 생사에 유랑해 심히 미쳐있는 것이다.
10. 진과 속이 둘이 아님(眞俗不二)
법사(法師)가 설법을 지극히 잘도 하는데, 마음속에는 번뇌를 여의지 못해 입으로는 문자를 설해 남을 교화한다고는 하나 남의 나고 늙는 일만 더하고 있음이니 참과 거짓은 본래 둘이 아닌 것이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자는 진금(眞金)을 버리고 풀섶을 뒤지는 것과 같으니 마음속에 삼독(三毒)을 버리지 못하면 알지 못하니라. 어느 때에 도(道를) 얻겠는가.
11. 풀고 얽는 것이 둘이 아님(解縛不二)
율사(律師=계율을 지키고 남을 가르치는 스님)가 계율을 가지고 자기를 얽어매고 자기를 얽어매기에 또한 남을 얽어매는 것이니 밖으로 위의(威儀)를 지어 편하고 고요해 보이나 마음속은 큰 물결이 출렁이는 것과 흡사해 생사를 구해내는 선벌(船筏-뗏목)을 타지 못하니 어떻게 애하(愛河)를 건너가리요. 진종정리(眞宗正理=참뜻과 바른 이치)를 모르면 사견(邪見)의 말이 번다하게 많으리라.
12. 경계와 비치는 것이 둘이 아님(境照不二)
경(境)은 일체의 대상(對象)을 의미하고, 조(照)는 대상을 알아보는 지혜를 말한다.
그리하여 대상과 그것을 알아보는 지혜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말이다.
선사(禪師)가 몸소 무명(無明)을 여의면 번뇌가 어디로 쫓아오겠는가.
지옥과 천당이 한 모습이며 생사와 열반이 이름만이 있는 것이니 또한 탐⋅진⋅치(貪嗔痴)를 가히 끊을 것도 없고 또한 불도(佛道)를 가히 이룰 것도 없음이다.
13. 움직여 쓰는데 꺼림이 없음(運用無礙)
장부는 도도하고 자재해 귀공자와 왕과 높은 벼슬자리가 부럽지 아니하며, 사시(四時=語黙動靜)에 마치 금강(金剛)과 같으며, 고와 낙에 마음은 항상해 다르게 고쳐지지 아니하며, 법의 보배(法寶)가 저 수미산(須彌山)에 비유되고, 지혜는 저 강해(江海)와 같아서 팔풍(八風)에 거리낌이 되지 아니하며, 또한 정진에 해태(懈怠)함이 없어서 마음대로 가라앉았다 솟았다 하면서 뒤치고 솟아오르는 데에 종횡자재(縱橫自在)하며, 도검(刀劍)이 머리에 닿아도 막을 생각 없을 만치 스스로 편안하여 괴롭지 아니하다.
※팔풍(八風) 경계---아래와 같은 경계에 동요하지 말아야 도를 이룬다.
① 나에게 이로울 때나(利)
② 내외 형편이 쇠잔할 때(衰)
③ 남이 나를 헐뜯을 때나(毁)
④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때(譽)
⑤ 남이 나를 칭찬할 때(稱)
⑥ 남이 나를 희롱할 때(譏)
⑦ 고생스러울 때(苦)
⑧ 편안하고 즐거운 때(樂)
14. 미하고 깨침이 돌이 아님(迷悟不二)
미(迷)했을 때는 공(空)을 가지고 색(色)을 삼으나 오(悟)했을 때는 색(色)을 가지고 공을 삼는 것이니 미와 오가 본래 차별이 없으며 색과 공이 마침내는 같은 데로 돌아감이니 어리석은 사람은 남쪽을 불러 북쪽을 만들고 지혜한 자는 동서가 원래 없는 이치를 통달하고 있다.
아래 글은 지공 화상이 14과송을 끝내면서, 존재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세속적 안목을 가진 사람들을 비유로 꾸짖었다.
사람의 육신과 아울러 모든 존재는 실로 텅 비어 공한 것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재산과 명예와 건강과 장수와 온갖 부귀영화를 찾아 쫓아다니는 모습이 마치 목이 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잘못보고 마실 물인 줄 알아 미친 듯이 달려가는 것과 같고, 개가 천둥소리에 놀라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아지랑이는 본래 물이 아닌데(陽焰本非其水)
목마른 사슴이 미쳐서 바삐 쫓아가네(渴鹿狂趂怱怱).
자기의 몸도 거짓이라 진실이 아니거니와(自身虛假不實)
공을 가져서 다시 공을 찾고자 하는가(將空更欲覓空).
세상 사람은 미혹하고 전도됨이 너무 심해(世人迷倒至甚)
마치 개가 천둥소리에 놀라 짖는 것과 같도다(如犬吠雷叿叿).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할자 본 <직지심체요절>을 찬술한 백운 화상(白雲和尙)은 수많은 경전과 조사의 어록들을 열람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요긴한 법어들만을 초록했는데, 그 중에서 지공(誌公) 화상의 가르침이 아마도 제일 가슴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지공 화상의 <대승찬(大乘讚)>과 <십사과송(十四科頌)>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모두 다 <직지심체요절>에 수록했다. 다른 선지식들의 법어와 비교해 볼 때 열배도 훨씬 넘는 대단히 많은 양이다.
그것으로 미루어 백운 화상의 수행정신과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족히 짐작할 수 있다. 즉, 지공 화상의 안목이 곧 백운 화상의 안목이며, 백운 화상의 안목이 곧 지공 화상의 안목이었을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무비 스님의 글을 많이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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