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1. 깨달음 후 수행은 닦음이 아니다, 대자유 속 펼침이다 ~ 35. 봉암사의 전설, 그곳의 시간은 따로 흘렀다

수선님 2023. 6. 25. 13:26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1. 깨달음 후 수행은 닦음이 아니다, 대자유 속 펼침이다 


『“성철이 7년 동안 제방에서 머물고 있었음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보임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절인연이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성철이 봉암사로 간 까닭은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하여 지혜와 자비를 전파하려 했음일 것이다.”』

▲ 성철 스님은 깨친 후에도 7년 동안 안거를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하고자 봉암사로 향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깨친 후에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송광사, 수덕사, 간월암, 법주사, 도리사, 대승사, 통도사 등 제방에서 안거를 했다. 1940년 오도송을 외친 이후 7년 동안 안거를 거르지 않았다. 이를 오후보임(悟後保任)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돈오돈수, 즉 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 대해탈경계에 도달했으면서도 왜 성철은 수행을 계속한 것인가. 선종에서는 견성하면 모든 것을 원만히 증득한다고 했는데 다시 무슨 수행이 필요한가. 깨쳤다지만 혹시 아직까지 무언가 남아있어 닦고 배우는 것이 아닌가. 번뇌가 멸진해도 습기가 남아있어 그것을 없애는, 즉 돈오한 뒤에 다시 점수를 하는 돈오점수가 아닌가. 그렇다면 성철 역시 점수(漸修)를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점수론의 지눌과 돈수론의 성철은 결국 오후보임에서 확연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갔으니,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지눌 ‘수심결’)

“고불고조의 말씀을 살펴보면 무심을 철저히 증득한 것을 견성이라 하고,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할 일이 없는 대무심지를 보임이라 하였다.” (성철 ‘선문정로’)

결국 성철이 주장하는, 또 깨닫고 난 후 체득한 것으로 보이는 보임이란 자유자재한 대무심삼매(大無心三昧)를 일컫는 것이다. 깨달은 뒤에 망상을 하나하나 끊는 것이 보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체 망념이 일어나지 않아 할 일이 없는 대무심지’를 ‘증도가’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閑道人]’의 경지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깨친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구하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다(不除妄想不求眞)’고 했다. 성철은 이를 풀이하면서 ‘망상이 일어나도 그대로가 참됨이니, 망상을 내놓고 달리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해석하면 큰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가한 도인은 망상이나 참됨도 완전히 끊어졌기에 그것들이 들어설 곳이 없는 경계를 지칭한 것이다.

도인의 ‘한가함’이란 우리가 세속에서 누리는 ‘풀어진 시간’ 속의 느긋함이 아니다. 도인은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끄달림에서 벗어난 대자유 속에 있음이다. 망상과 참됨이라는 양변을 떠난 중도의 시간 속에 놓여 있음이다. 따라서 견성했을 때의 대무심경계에서 온갖 일상사를 자유자재로 영위하는 것이 오후보임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술 마시고 여자를 품는 행위를 달관의 기행 또는 무애자재의 만행으로 여길 수는 없다. 깨달은 도인에게 그런 망상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기행과 만행을 하는 자가 있다면 증오가 아닌 단지 해오를 얻은 사람일 것이다.

‘심경(心經)’에서도 도(道)는 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했다. 깨달은 후 더 수련했다고 해서 그 경지가 깊어지거나, 또 방일한다고 해서 깨침이 부서진다면 그것은 도의 본체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한 번 깨친 도는 늘 일상 속에 있음이다.

성철은 법어집 ‘돈오입도요문론 강설’의 부록인 ‘제방문인참문어록(諸方門人參問語錄)’에서 이런 우화를 들려주고 있다.

‘원율사(源律師)라는 이가 와서 물었다. 
“화상께서도 도를 닦으실 때 공력을 들이십니까?”
“그렇다 공력을 들인다.”
“어떻게 공력을 들이십니까?”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스님과 같이 공력을 들인다 하겠습니까?”
“같지 못하다.”
“왜 다릅니까?”
“그들은 밥을 먹을 때에 밥을 먹지 않고 백 천 가지 분별을 따지며, 잠을 잘 때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백 천 가지 계교를 일으킨다. 그것이 다른 까닭이다.”
율사는 입을 다물었다.’

무심지를 체득한 도인은 시절인연의 형편에 따라 자유자재하다. 같은 차를 마시고 같은 밥을 먹어도 범부는 온갖 망상 속에 차를 마시고 밥을 먹지만 도인은 일체 망념을 떨치고 차를 마시며 밥을 먹는다. 그래서 도인은 차와 밥맛을 제대로 안다. 범부나 깨친 이나 겉보기에는 평범하다. 도인도 때론 아이처럼 화를 내고 사소한 일에도 기뻐한다. 하지만 그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빛을 감추고 속세의 티끌과 함께 함이니(화광동진 和光同塵) 진흙에 빠져 물을 묻혀도(타니대수 拖泥帶水), 온 몸을 털로 덮고 머리에 뿔을 이고 있어도(피모대각 被毛戴角) 흔들림이 없다.

“스님께서는 보임에 대해서 병이 다 나아서 병이 없는 그 깨끗한 자리를 보호하는 것이 보임이지, 병 있는 몸을 다시 고친다는 것은 보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혜암 스님)

그렇다면 오후보임 속의 ‘수행’이란 무엇인가. 성철은 깨달은 후의 수행이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유위행(有爲行)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을 하자니 ‘수행한다’ ‘짓는다’고 표현했지만 도무지 하는 바가 없고 짓는 바가 없다. 닦을 것이 있고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수행한다’ ‘짓는다’고 한 것이 아니다.” (성철 법어집 ‘선문정로’)

그렇다면 오후보임은 어떤 경지이며 깨달은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깨달음 후의 수행이란 원증한 후의 일상생활로서 겨울이면 핫옷 입고 여름이면 삼베옷을 입으며 배고프면 밥을 먹고 때맞춰 예불을 드리는 것이다. 일상사 그대로가 무량불사(無量佛事)이다.” 
“돈오견성하면 불지(佛地)이므로 오후점수(悟後漸修)는 필요없고 불행(佛行)을 수행한다 함이니, 이것이 무심을 원증 후의 무사행(無事行)이다.” (성철 법어집 ‘선문정로’)

오후보임은 바로 무량불사이며 불행(佛行)이다.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실천이다. 깨달음 이후의 일상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마음이 특별한 것이니, 이는 마음속에 세상이 맑게 비침이었다. 깨달았으면 불법을 전해야 했다. 부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음을 알았으니 ‘가르쳐야’ 했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깨달은 자들은 부처가 세상에 온 일대사 인연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비행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도 중생제도의 자비행이 아니던가. 이미 깨달은 보리달마가 숭산 소림사에서 면벽하고 9년 동안 좌선을 한 것은 완전히 깨달음을 얻지 못해 다시 수행하고 있었음이 아니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습기를 제거하는 시간이 아니라 불법을 전수해줄 사람을 찾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혜가에게 법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선종의 초조가 된 것이다.

육조 혜능도 오조 홍인대사로부터 법통을 계승하는 가사를 받고 몰래 남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무식한’ 혜능에게 법통이 넘어가자 수백 명의 학인들이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 쫓아왔다. 목숨이 실 끝에 매달린 듯 위태로웠다. 혜능은 신분을 속이고 산속에 숨어 사냥꾼과 더불어 16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불법을 전파할 기회를 얻고 사자후를 토했다. 혜능도 날마다 살생을 하고 육식을 하는 무리 속에서 내일을 기다렸다.

천태종에 혜사(慧思)선사가 있었다. 그는 깨친 후 외딴 산봉우리에 머물며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물었다.

“도를 깨닫고도 왜 하산해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십니까?”

세상의 의심과 비난에도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 속에서 제자 한 명을 키웠다. 그가 바로 천태종을 일으킨 지자(智者)대사였다. 지자는 동방의 작은 석가로 불렸다. 혜사는 세상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 제자 한 사람으로 족했다. 자신보다 더 출중한 제자를 길렀으니 그것이 하화중생을 성취한 것이었다. 임제 스님의 ‘할’과 덕산 스님의 ‘방’도 결국 깨달음 이후의 불행(佛行)이었다. 그 고함과 몽둥이가 불법을 깨웠으니 깨달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성철이 7년 동안 제방에서 머물고 있었음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보임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절인연이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성철이 봉암사로 간 까닭은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하여 지혜와 자비를 전파하려 했음일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절인연을 살펴 자신의 할 일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해방공간에서도 승, 사찰, 종단 모두가 오염되어 어느 한 곳도 성한 데가 없었다. 이 땅의 불교는 몇 군데 손질하고 고쳐서 다시 세울 수 없었다. 부처님을 팔아먹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몰아내야 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성철은 도반들과 그 시작을 책임지기로 했다. 7년 동안 웅크리고 있던 성철이 마침내 서른여섯에 일어섰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6호 / 2015년 8월 1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2. 봉암사 결사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봉암사 결사 소식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멀리 번져나갔다. 해가 바뀌자 해인사 가야총림 공사에 참여했던 청담과 도반 향곡이 올라왔다. 이어서 월산, 홍경, 응산 등이 합류했다. 그리고 참된 수행에 목이 말랐던 젊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 봉암사를 품고 있는 희양산. 봉암사 결사 소식이 퍼져나가자 수좌들은 안광을 뿜으며 희양산 속으로 들어왔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1947년 가을이었다. 성철, 우봉(1898~ 1953), 보문(1906~1956), 자운이 문경 희양산 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봉 50세, 보문 42세, 자운은 성철보다 한 살 많은 37세였다. 네 선승은 그간의 ‘더부살이’를 끝냈다. 우리끼리 반듯하게 살아보자고 뜻을 모았다. 우봉은 사찰운영의 책임을 지겠다 했고, 보문은 향후 10년 동안 장경(藏經)수호에 진력하겠다고 했다. 그 약속이 철석같았다. 청담은 해인사 총림의 중책을 맡고 있어 합류하지 못했다. 걷고 또 걷다보니 멀리 희양산의 흰 바위가 보였다. 그 위세가 당당해서 흡사 단풍 든 산이 거대한 바위를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 사람은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붙잡고 산을 올랐다.

봉암사는 퇴락하여 금방 스러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 왜색에 물들지 않았다. 아니 왜색에 물들지 않았기에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대처승들이 살고 있었다. 대처승 주지는 이웃 주민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해서 해방 후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대처승들이 모두 떠나 버려 속세의 질펀한 노랫가락이 흘러들지 않았다.

봉암사 결사는 이렇듯 넷이서 시작했다. 세수로 따지면 중년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세속과 거꾸로 살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있었다. 승단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온갖 것들을 삼켜 그 모습이 기괴했고 다가가면 악취가 진동했다. 하지만 정작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불교는 한없이 작아졌지만 승려들은 부처를 팔아 배를 채웠다. 해방이 되어서도 이 땅의 불교는 남의 복이나 빌어주며 세속에 빠져 있었다. 이 때 홀연 선승 몇이서 선방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거대한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승단에 네 명이 받쳐 든 촛불로 무엇을 밝히겠는가. 상식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의 원력은 상식이 아니었다. 작은 것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몇이서 마음을 모아 태산을 허문 적이 있었다. 바로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와 요세의 천태종 백련결사가 그것이다. 특히 정혜결사는 거대한 죽비가 되어 타락한 불교를 깨웠다. 고려 무인시대는 칼이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정권이 바뀌면 권력에 기댔던 승려들이 죽임을 당했다. 시체가 산을 이뤘다. 하늘에서 까마귀 울음이 쏟아졌다. 불교 내부에서는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때 지눌이 일어섰다. 그리고 불법으로 저들을 찔렀다.

“땅에서 쓰리진 자, 땅을 짚고 일어서라.”

공명(共鳴)이 무서웠다. 세상과 타협했던 승려들은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고려불교는 그렇게 변방 깊은 산속에서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지눌의 정혜결사도 시작은 초라했다. 서너 명의 도반이 수행공동체를 결성하고, 함께 선정과 지혜를 닦았다. 팔공산 거조사 작은 암자에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 작은 모임이 결국 부패한 고려불교를 뒤집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봉암사 결사 또한 하루를 살아도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자는 데서 출발했다. 아무리 작더라도 청정한 법과 계율이 있는 공간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부패한 조선불교를 쳐부수러 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부숴야 했다. 지닌 무기라고는 오로지 부처님 말씀 하나였다. 부처님의 길, 그것은 오래되었기에 새로운 길이었다. 변함없는 진리의 길이었다. 모두 부처님이 남긴 마지막 말을 새겨야 했다.

“내가 죽은 후에는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

부처님이 설한 법은 명확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비틀거나 외면할 뿐이었다. 중은 세상과 거꾸로 살아가야 했다. 세상은 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지만 불교는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봉암사 결사는 기복을 버리고 수행으로 옮겨가자는 것이었다.

성철은 봉암사에 들자마자 다시 해인사로 향했다.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중인 장경을 봉암사로 옮겨와야 했다. 바로 김병룡 거사가 기증한 불서였다. 성철은 우봉과 함께 불서를 트럭에 싣고 나와 대구역에서 다시 점촌까지 화물로 부쳤다. 며칠 후 화물이 도착했다는 통보를 받고 불서를 트럭에 실어왔다. 길은 희양산 아래서 끊겼고, 불서는 대중들이 이고 져서 경내로 옮겼다. 당시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트럭을 동원한 것만 봐도 불서를 모셔오는 일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성철은 불서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겨울을 앞두고 곳간에 쌓아둔 나락 가마니를 보는 듯했다. 불서들은 어쩌면 봉암사 결사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수행에 필요한 또 다른 양식이었다.

이런 광경을 희양산 흰 바위는 모두 들여다보고 있었다. 희양산(998미터)은 백두대간의 단전 부위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산이다. 희양(햇볕曦 볕陽)이란 이름만큼이나 특이하다.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으로 내달리는 형상(지증대사)’이며 ‘봉황이 머리를 들고 하늘로 막 오르려는 기세인 봉황등천(鳳凰登天)의 형국(최치원)’이다.

봉암사는 희양산 남쪽 너른 터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30리 계곡을 끼고 있어 천하 길지로 꼽힌다. 바위산은 봉황을 닮았고, 계곡은 용처럼 흘러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불렸다. 879년(신라 헌강왕 5)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대사의 비문에 창건에 얽힌 이야기가 적혀있다. 대사가 지세를 살피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며 절을 지었다. 이후 선풍을 크게 떨쳤고 신라 후기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 정진대사가 중창했고 당시 봉암사에는 3000여 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지증, 정진대사를 기리는 탑비가 남아있다.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정진했다. 조선 초에는 배불론(排佛論)에 맞서 현정론(顯正論)을 설파했던 함허, 득통 스님이 말년을 보냈다. ‘동방의 출가승은 도를 물을 때 반드시 봉암사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문신 김정(1670~1737)의 기행문을 보면 조선 후기까지 봉암사는 사세가 당당했음을 알 수 있다.

‘암자와 큰 사찰이 웅장하고 크게 지어졌으며, 불상이 1천 구(軀)요, 스님들이 1만을 헤아리니 외산의 유점사인가?’ (임노직 ‘희양산 봉암사 기행기록’)

그러다 1907년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고, 1915년 윤세욱 주지가 요사와 영각 등을 신축했다. 이후에 봉암사를 찾은 학자 조남룡(1863~1930)은 이런 글을 남겼다.

‘예전에는 사찰의 모습이 웅장하였으나 병신년(1896) 난리를 겪으면서부터는 모두 잿더미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절로는 다만 이층각 뿐이었다.’ (임노직 ‘희양산 봉암사 기행기록’)

해방 이후 봉암사는 특별한 선승들이 모여서 반듯하게 살았다. 조계종단은 1982년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했다. 봉암사 결사를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선언이었다. 지금은 전국에서 산문을 닫고 수행에만 정진하는 단 하나의 사찰이다.

봉암사 결사 소식은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멀리 번져나갔다. 해가 바뀌자 해인사 가야총림 공사에 참여했던 청담과 도반 향곡이 올라왔다. 이어서 월산, 홍경, 응산 등이 합류했다. 그리고 참된 수행에 목이 말랐던 젊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도우, 혜암, 성수, 보경, 보안 등이 안광을 뿜으며 희양산 속으로 들어왔다. 열서너 살 먹은 의현도 산문을 넘어와 두리번거렸다. 법전은 해인사로 가려다 봉암사에 들렀다. 잠시 머물다 떠나려 했지만 성철과 봉암사 생활에 그만 마음을 뺏겨 주저앉았다.

“절은 초라하고 쇠락해 있었으나 그 안에서 정진하고 있는 수좌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산세 만큼이나 힘이 있었다.”

비구니들도 결사에 참여했다. 당시 비구니들은 공식적인 불교의식에 참여할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낮았다. 대부분 작은 암자에서 밭농사를 짓거나 탁발을 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자연 비구니들은 비구승 눈밖에 있었다. 그런데 성철과 청담, 자운은 비구니들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며 결사에 참여시켰다. 실로 대단한 발상이었다. 그 밝은 눈이 비구니계에 새 바람을 몰고 왔다. 처음에는 청담의 딸 묘엄과 묘찬(1926~1989), 묘명(?~1955), 지원(생몰 미상), 재영(생몰 미상)이 참여했다. 이들은 봉암사 근처 백련암에 기거하며 낮에는 봉암사로 내려와 대중들과 함께 생활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결사는 치열했고 봉암사는 늘 깨어있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전부였다. 하나가 모두를 움직이게 했다. 희양산 흰 바위는 개혁을 알리는, 햇볕으로 희게 타오르는, 거대한 횃불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3. 잡신을 몰아내고 비단 승복을 불태우다 



『“비단 승복과 나무 바리때를 부수고 잘라서 마당에 쌓아놓고 성철이 직접 성냥을 그어 불태워버렸다. 그 속에는 성철이 지니고 있던 은행나무 바리때도 있었다. 스승인 동산 스님이 내려준 것이었다. 발우를 주는 것은 법통을 이으라는 무언의 바람 아니었던가. 이 소문을 멀리서 들은 동산이 노기를 섞어 말했다.” 』

▲ 괴색 가사를 입은 스님들. 봉암사 결사 때 처음 입었던 괴색가사는 원색을 파괴하여 가장 검소한 옷이 되었다. 가장 낮은 색이지만 어떤 색도 받아들이겠다는 포용의 원(願)이 서려있다. 사진 하지권 작가

 

봉암사 첫 공사는 법당 정리였다. ‘부처’ 아닌 것들은 모두 없애버렸다.

“우리 한국불교는 가만히 보면 간판은 불교 간판을 붙여 놓고 있지만, 순수한 불교가 아닙니다. 칠성단도 있고, 산신각도 있고, 온갖 잡신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법당에 잡신들이 들어앉을 수는 없는 것이니 법당 정리부터 먼저 하자, 그리하여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이외에는 전부 다 정리했습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습니다.” (성철 ‘방장 대중법어’)

다음은 불공과 재(齋)의식을 바로잡았다. 개인적인 불공과 재는 신도가 직접 성심껏 기도하고 염불하도록 하고 스님이 중간에 끼어들지 말도록 했다. 당시 절에서는 칠성기도가 성했다. 신도가 소원을 빌면 스님이 목탁을 치며 축원해 주었다. 성철이 일렀다.

“꼭 부처님께 정성 드리고 싶으면 개인 스스로가 알아서 물자를 갖다놓고 절하도록 하게 합시다. 우리 같은 중이 중간에서 삯꾼 노릇은 하지 말자는 겁니다.”

시주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게 했다. 성철은 영가천도(넋을 인도하는 의식)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님 말씀에 누가 죽어 사십구재를 지내게 되면 경전을 읽어주라 했지 북 두드리고 바라춤 추라고는 안했습니다.”

절에서 이른바 푸닥거리를 추방했다. 마침 봉암사에서 사십구재를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3재쯤 지낼 무렵인데 갑자기 목탁마저 쳐주지 않는다고 하자 참으로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안 할랍니다. 어디 절이 이곳 뿐입니까? 그런데 재도 지내지 않으면 스님들은 뭘 먹고 삽니까?

성철 또한 그 신도를 보며 딱한 표정을 지었다.

“산에 가면 솔잎이 널렸고, 개울에 물 출출 흘러내리니 우리 걱정은 마시오.” 

가사, 장삼도 비단으로 만든 것은 훌훌 벗어던졌다. 면 옷만 걸치도록 했다. 색깔 또한 붉은색은 버리고 이미 대승사에서 만들어봤던 괴색으로 통일했다. 괴색은 청, 황, 적의 3색을 섞어 원색을 파괴한 것이었다. 가사는 분소의(糞掃衣)라 하여 부처님과 제자들이 버려진 옷이나 수의로 기워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 ‘색’이 살아있을 수 없었다. 옷에서 원색을 추방했다.

장삼도 새로 만들었다. 성철은 송광사에 머물 때 삼일암에 소장되어 있던 보조국사의 장삼을 유심히 살펴보았었다. 그 장삼은 검박하면서도 기품이 서려 있었다. 양공(良工, 바느질 소임)인 자운이 송광사에 가서 보고 그 모양대로 만들었다. 그 후 송광사에 보관 중이던 보조국사의 장삼은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만일 성철이 눈에 담아 오지 않았다면 지금 스님들의 보조장삼, 고승장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리때(밥그릇)도 쇠나 질그릇만 지니도록 했다. 부처님이 와철(瓦鐵)로 하라 했으니 나무나 다른 재료로 만든 것은 모두 폐기했다.

비단 승복과 나무 바리때를 부수고 잘라서 마당에 쌓아놓고 성철이 직접 성냥을 그어 불태워버렸다. 그 속에는 성철이 지니고 있던 은행나무 바리때도 있었다. 스승인 동산 스님이 내려준 것이었다. 발우를 주는 것은 법통을 이으라는 무언의 바람 아니었던가. 이 소문을 멀리서 들은 동산이 노기를 섞어 말했다. 
“싫으면 다시 돌려줄 것이지. 그 귀한 것을, 어른이 준 것을 깨어버렸다고!”

그러나 결사를 하는데 이것저것을 따질 수 없었다. 스승의 서운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결기가 시퍼런 공동생활에 예외를 둘 수는 없었다.

또 봉암사 식구들은 육환장을 들고 다니도록 했다. 육환장은 머리에 두 개의 걸이가 붙어 있고 한쪽 걸이마다 조그만 고리가 세 개씩 붙어 있었다. 그러니 양 걸이마다 세 개씩 모두 여섯 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 나무 지팡이였다. 육환장을 들고 다녀야하는 이유를 성철은 이렇게 설명했다.

“육환장 양 걸이는 진속이제(眞俗二諦)를 표현한 것이고, 여섯 개의 고리란 육바라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의 나무지팡이는 중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환장은 그저 나무지팡이가 아니라 중도 위에 서 있는, 이제가 원융하고 육도가 원만구족한 불교진리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기척을 내어 짐승들이 미리 달아나도록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스님들이 이 육환장을 짚고 다녔습니다.”

삿갓도 새로 만들어 썼다. 그러자 곧바로 항변이 들어왔다. 삿갓은 조선시대 천민들이나 썼고 승려들을 천민 취급하여 쓰고 다니게 한 것인데 왜 굳이 쓰려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성철이 나섰다.

“중국의 법문에 삿갓이야기가 빈번하게 나오고, 청규(淸規)에도 삿갓을 쓰도록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가사 장삼은 절 안에서도 반드시 입도록 했고, 산문을 나설 때에는 육환장을 짚고 삿갓을 쓰도록 했다. 당시에 이런 차림이 다른 승려들에게는 별나게 비쳤을 것이다. 비구니 묘엄은 뭇사람들의 시선이 별났다고 말한다.

“여름에 육환장 짚고, 삿갓 쓰고, 삼베 장삼 입고, 걸망지고 비를 줄줄 맞고 가면 모두 큰스님 오신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식생활도 바꾸었다. 아침에는 꼭 죽을 먹고 저녁은 약석(藥石)이라 해서 조금만 먹었다. 인도의 율장에는 ‘오후 불식’이라 했지만 중국불교에서는 약(藥)삼아 조금만 먹었다. 참선하는 데 기운을 차릴 정도만 약처럼 먹었던 것이다.

봉암사 살림은 여전히 가난했다. 특히 불공과 재를 지내주지 않으니 신도들 발길이 끊기고 시주 또한 끊겼다. 먹고사는 방편을 없애버렸으니 결국 탁발에 나서야 했다. 탁발은 돌을 던지면 돌을 맞고 욕을 하면 욕을 먹어야 했다. 한데 봉암사 스님들이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이 발우가 넘치게 밥과 곡식을 내놓았다. 돌아오는 길엔 탁발 자루가 가득 찼다. 봉암사에는 과거 대처승들과는 완전히 다른 무리의 선승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청정한 살림살이가 신도들이나 혹은 나무꾼들의 입을 통해 산 아래로 내려가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탁발은 하심(下心)을 심기에는 무엇보다 탁월한 수행이었다. 원래 비구란 ‘걸식(乞食)하는 자’라는 뜻이었다. 탁발을 나가면 아만은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귀한 몸’이라 생각한다. 사실 사람은 세상의 누구보다 자신을 숭배한다. 하지만 목숨을 발우에 담아야 했기에 그런 아만은 붙어있을 수 없었다. 또 탁발은 중생에게도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심어주었다.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산문을 나섰다. 탁발을 나가면 며칠씩 길 위에 있었다. 산 아래 마을에서부터 멀리는 괴산, 수안보까지 걸어갔다. 집안에 들어가 염불을 해주면 곡식을 걸망에 부어주었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스님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잠자리 역시 탁발해야 했다. 아무데서나 되는 대로 자야했다. 법전은 주로 자운과 함께 탁발을 나갔다. 따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해질녘이면 다시 만났다.

“주로 공동묘지 앞에서 만났는데 시주 받은 돈은 잘 세어서 바랑에 넣어두고 쌀은 한데 모아놓은 뒤 얻어온 떡과 과일을 먹고는 나란히 앉아 이를 잡곤 했다. 내의 속에 하얗게 서캐까지 깔아놓으며 종횡무진 하는 이를 잡지 않으면 스멀스멀 온몸이 가려워 밤에 잠을 자기 어려웠다. 사랑방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면서 옮아온 이였다.” (법전 자서전 ‘누구 없는가’)

공동묘지에 앉아 노을빛에 이를 잡는 탁발승. 상상만 해도 평화롭다. 탁발승의 맑은 기운이 무덤 속으로 흘러들어 죽은 자의 밤도 평화스러울 것이다. 법전은 그 평화롭던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발우 하나 들고 밥을 얻으러 다니면 천하가 내 집인 것 같았다. 걱정할 것 하나 없이 마음이 편했다.”

묘엄도 봉암사에 들어오기 전 탁발을 나갔다. 동짓달 찬바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함창이라는 마을에서 30집을 넘게 돌고나니 걸망이 무거웠다. 탁발을 마치고 묘희와 함께 점촌을 향해 걸었다. 다리를 건너는데 바로 그 밑에서 걸인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묘엄과 묘희는 그들에게 탁발한 쌀을 모두 퍼주었다. 또 한참을 걷다보니 이번에도 작은 다리 밑에서 한 여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떨고 있었다. 두 비구니는 여인에게 내복을 벗어주었다. 한겨울 찬바람에 온몸이 떨려왔지만 기분은 날아갈 듯 상쾌했다.

다음날 묘엄은 봉암사에 올라가 아버지 청담에게 탁발 후의 보시를 자랑삼아 얘기했다. 청담은 잠자코 듣다가 이렇게 일렀다.

“기쁜 마음이 있으면 그건 진정한 보시가 아닌기라. 기쁘지도 않고,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도 없이 무심으로 하는 보시라야 진정한 보시인기라. 줘도 줬다는 생각 없이 하는 보시, 그걸 무주상보시라고 하는 긴데, 앞으로는 내가 누굴 도와줬다, 내가 오늘 좋은 일했다, 그런 생각도 없이 해야 하는 기다.” (묘엄 구술 ‘회색 고무신’)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4. 새로운 옛길, 공주규약을 만들다 



『“신도들은 스님을 보면 삼배를 해야 했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승려는 신도가 찾아오면 달려가 배례했으니, 천한 무리임을 자처했던 질곡의 세월에서 벗어남이었다. 그날 신도들은 모두 스님들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렸다.” 』

▲ 성철 스님이 직접 써내려간 공주규약은 분명하고도 엄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한 공주규약은 조계종단의 계율과 규범이 됐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봉암사 식구들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스님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실천했다. 중국 옛 총림의 청규정신으로 돌아갔다. 당나라 때 백장은 아흔이 넘어서도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았다. 제자들이 건강을 염려하여 호미를 몰래 감춰버렸다. 그러자 백장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제자들이 문밖에서 그 연유를 물었다.

“내가 아무런 덕도 없는데 어찌 남에게 수고를 끼칠 것인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을 뿐이다.”

봉암사 대중은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해야 했다. 이는 지키기 어려웠다. 밥 짓고 나무해오고 또 밭 매는 것도 직접 했다. 삯꾼, 일꾼은 들이지 않았다. 공양주도, 부목도 내보냈다. 아침 공양 전에는 반드시 마당을 쓸었고 오후에는 1시간30분 정도 밭을 매는 울력을 한 후에 다시 산에 올라 나무를 해 와야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성철이 밖에 나갔다 돌아와 보니 유독 밭이 환했다. 풀 하나 보이지 않아서 밭고랑에 개미가 보일 정도였다. 누가 봐도 스님네 솜씨는 아니었고 삯꾼을 산 것이 분명했다. 성철이 원주를 불렀다.

“우리 원주스님이 보살이야. 대중들과 밭을 매느라 참 욕봤네. 그동안에 어떻게 저 많은 밭을 다 맸는지 모르겠네.”

삯꾼 산 것이 들통 난 원주가 이리저리 변명을 했다. 성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도둑놈아. 누가 삯꾼 사서 밭 매라고 했냐. 왜 맘대로 봉암사 규율을 깨뜨리는 거야. 당장 나가라, 이 도둑놈아.”

원주는 새벽에 달아나버렸다.

또 대중은 하루에 나무를 석 짐씩 하도록 했다. 각각의 지게가 있어야 했으니 지게가 스무 개도 넘었다. 나무 울력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몇이서 도망을 가버렸다. 자운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간 대중이 다 없어지면 어찌 살라고 그러나. 나무 두 짐씩만 하도록 하시게.”
“그건 안 될 말이지. 사람 하나 도망가면 한 짐씩 올려야지.”
“그러면 다 도망갈 거야.”
“그러면 자운하고 나하고 둘이만 남겠네.”
“에잇, 나도 갈 참이야.”

심성이 무던한 자운도 염려할 정도로 봉암사 생활은 고단했다.

성철은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해 공주(共住)규약을 만들었다. 직접 붓을 들어 써내려간 행동규칙은 분명하고도 엄했다. 공주규약은 함께 살기위한 당시만의 규약이 아니었다. 조계종단의 계율과 규범 등이 여기서 비롯됐으니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있다. 공주규약은 오래된 새 법이고 새 길이었다.

-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온힘을 다하여 수행하여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을 빨리 이룰 것을 기약한다.
-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개인적인 의견은 절대 배척한다.
- 일상에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물 긷고 나무하고 밭일하고 탁발하는 등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특별한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
- 신도가 불전에 공양하는 일은 재를 지낼 때의 현물과 지성으로 드리는 예배에 그친다.
- 용변 볼 때와 잠 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장삼과 가사를 입는다.
- 사찰을 벗어날 때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으며 반드시 함께 다닌다.
- 가사는 마나 면으로 한정하고 이것을 괴색(壞色)한다.
- 발우는 와발우(瓦鉢盂) 이외의 사용을 금한다.
- 날마다 한번 능엄대주를 독송한다.
- 날마다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 초하루와 보름에 보살대계를 읽고 외운다. 
- 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 앉는 순서는 법랍에 따른다.
- 방사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하고 서로 잡담은 절대 금한다.
- 정해진 시각 이외에 누워 자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 필요한 모든 물건은 스스로 해결한다.
- 그 밖의 규칙은 선원의 청규와 대소승의 계율체계에 따른다.
- 이상과 같은 일의 실천궁행을 거부하는 사람과는 함께 살 수 없다. 

성철은 승려와 신도 사이의 관계도 새롭게 설정했다. 당시만 해도 승려들은 신도들에게 반말을 들어야 했다. 억불숭유의 잔재였다. 승려들을 높여야했다. 그것은 부처님을 높이는 첩경이었다.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신도의 스승이니 스님에게 세 번의 절을 하도록 했다. 이는 성철의 권유로 율장을 공부했던 자운의 공력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불교는 계율이 희미해지고 진정한 율사가 없었다. 불교의 뼈가 없는 셈이었다. 성철은 자운의 근기를 믿었다. 어느 날 자운에게 말했다.

“자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야 계율을 세우는 일이지.” 
“그럼 그 계율을 세워주는 일을 맡아주지 않겠는가?”

자운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산중에서는 누구나 선사가 되고 싶어 했다. 계(戒)를 세우는 일이 중요하긴 했지만 선승에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또 계율이 실종되었으니 다시 공부해야 했다. 자운도 율사보다는 선사가 되고 싶었다. 자운은 대중을 사하촌의 국수집으로 초대했다. 국수를 대접하며 넌지시 거부의 뜻을 밝혔다. 성철의 권유를 우회적으로 뿌리치려 했다. 그런데도 대중은 국수만 얻어먹고는 선뜻 동조하지 않았다. 실망한 자운이 국수그릇을 던져버렸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성수 스님으로부터 들은 얘기.)

자운은 성철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 자운은 결국 도반의 간절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했다.

“내 비록 근기가 약하지만 열심히 해보겠네. 도와주시게.”

이후 자운은 밤낮없이 경전을 끼고 살았다. 계율을 발굴하고 정리하여 이를 꿰어 놓았다. 자운의 공부는 산을 이뤘다. 하루는 자운이 봉암사를 찾아온 신도들에게 ‘범망경’을 설했다.

“무릇 승려는 국왕이든 부자이든 아무리 권세당당한 자라도 결코 그 앞에서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이를 듣고 있던 성철이 나섰다.

“범망경의 가르침을 따릅시다. 앞으로는 누구든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도록 합시다. 이것은 우리가 높임을 받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높이자는 것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임은 세속의 영화를 끊고 엉뚱한 짓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이기도 했다. 직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었다. 직분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후 신도들은 스님을 보면 삼배를 해야 했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조선 500년 동안 승려는 신도가 찾아오면 달려가 배례했으니, 천한 무리임을 자처했던 질곡의 세월에서 벗어남이었다. 그날 신도들은 모두 스님들에게 세 번의 절을 올렸다. 

어느 날 깨끗하게 차려입은 노부인이 경내에 들어섰다. 마침 성철이 마당에 서 있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비가 와서 진창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 번이나 절을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향곡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결사에 뒤늦게 합류한 향곡에게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장면이었다. 노부인은 당시 사회부 장관이던 전진한의 어머니였다. 향곡은 그날 일을 두고두고 얘기했다.

봉암사에서도 보살계(菩薩戒) 수계식을 열었다. 재가불자들이 지켜야하는 계율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자운 스님이 ‘범망경’ 속에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봉암사에서 제대로 된 보살계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서울, 부산, 대구, 진주, 마산에서 신도들이 몰려왔다. 깊은 산 속에 수백 명이 모였다. 당시 큰 사찰에서는 보살계첩을 주면서 천 원씩을 받았다. 꽤 큰돈이었다. 성철이 이를 나무랐다.

“우리나라에 불사는 많은데 흔히 불사, 불사하지만 불사하는 것 하나도 못 봤어. 전부 장사지. 장사속이다 이거여. 우리는 불사 한번 제대로 해봅시다. 장사는 하지 말고.”

성철은 계첩을 새로 만들도록 했다. 보살계를 받으면 천원을 받는 대신 천화불(千化佛)이라 해서 천 번 절을 하게 했다. 즉 밤새 천 번 절을 해야 보살계를 받을 수 있었다.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한 번은 70줄의 노인이 절을 하지 않았다. 한 눈에 봐도 뻗정다리였다. 노인이 성철에게 사정했다.

“스님, 저는 다리가 이래서요.”

또 80줄의 노인이 말했다.

“스님 저는 아파서 일주일 동안 미음만 먹다가 왔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미음단지.”

성철은 그래도 봐주지 않았다.

“절 못하면 보살계 안 받으면 될 것 아니오. 당장 나가시오, 나가.”

그러면 뻗정다리 노인도, 미음만 먹던 노인도 열심히 절을 했다. 천 배를 채웠다. 훗날 ‘삼천 배’는 봉암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09호 / 2015년 9월 9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5. 봉암사의 전설, 그곳의 시간은 따로 흘렀다 



『“향곡과 성철이 비를 흠뻑 맞아가며 맨발에 어깨동무를 하고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향곡은 성철에게 문수라 부르고, 성철은 향곡에게 보현이라 불렀다. 서로 문수야, 보현아를 부르며 빗속을 오가자 대중은 처마 밑에 우르르 모여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 봉암사 태고선원의 선방 모습. 봉암사는 예나 지금이나 수좌들의 산실이다. 백련문화재단 제공

 

봉암사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봉암사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걸망을 싸는 스님도 많았다. 성철에게 ‘적당히’란 없었다.

‘20여 명의 수좌가 한 방에 앉아 벽을 마주하고 선정에 들면 태고의 정적이 감돌았다. 발우공양을 할 때도 밖에서 보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엄숙하고 법다웠다. 좌선을 하다가 행여 졸기라도 하면 성철 노장이 고함을 지르고 주장자로 내리쳐서 감히 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법전 자서전 ‘누구 없는가’)

성철의 ‘고함’과 ‘몽둥이질’은 봉암사에서 비롯됐다. 성철은 선방 문을 조용히 연 적이 없었다. 와락 열어 제치고 들어와 방안을 오가며 고함을 지르거나 주장자를 내리쳤다.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사람에게는 어김없이 벼락이 떨어졌다.

“밥값 내 놓거라. 이놈들아!”

성철은 틈만 나면 ‘밥값 내 놓으라’고 다그쳤다. 대중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떤 때는 수좌의 멱살을 틀어쥐고 계곡으로 끌고 가서는 물에 처박아 버렸다.

안거 결제나 해제 때에는 법문이 있었다. 그날은 거대한 공포덩어리가 봉암사를 짓눌렀다. 산사가 긴장감에 터질듯했다.

“땡땡땡 땡땡땡”

운집종이 울리면 대중이 빠짐없이 큰방에 모였다. 법문은 주로 성철이나 향곡이 했다. 두 사람은 법문을 하다가 느닷없이 아무에게나 달려들어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방식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았다.

“한 마디 일러라!”

누가됐든 답을 못하고 허둥댔다. 그러면 어김없이 몽둥이로 두들겼다. 봉암사 큰방 안에 있던 대중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더러는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큰방을 뛰쳐나갔다. 하안거 결제일이었다. 그날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향곡이 법문을 하다가 갑자기 주장자를 집어 들어 우지끈 분질러 반 토막을 내더니 밖으로 던졌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향곡이 대중 앞으로 달려들었다. 겁에 질린 묘엄은 얼른 큰방을 뛰쳐나갔다.

‘신발 신을 여유가 없어서 양 손에 신발 한 짝씩을 들고 맨발로 뛰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은 채 정신없이 달아나다보니 어느새 보리밭까지 와 있었다. 묘엄은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보리밭으로 들어가 엎드려 숨었다.’(묘엄 구술 ‘회색 고무신’)

고함과 몽둥이가 난비했지만 봉암사 수좌들은 이를 고마워했다. 자신이 부족함을 뉘라서 일깨우겠는가. 다만 큰스님의 몽둥이질에도 선뜻 분심(憤心)이 생기지 않는 자신의 미욱함이 서러울 뿐이었다. 선지식들이 살아있는 봉암사에는 많은 일화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나이가 같은 성철과 향곡이 그 중심에 있었다.

향곡은 성철의 권유로 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다. 성철이 ‘봉암사에서 함께 공부하자. 만일 오지 않으면 쫓아가서 정진하고 있는 토굴에 불을 지르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향곡은 곧바로 부산 월내 묘관음사를 나와 곧바로 희양산에 올랐다. 어느 날 성철은 도반 향곡에게 의미 있는 물음을 던졌다.

“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일체 망념을 떠난 경지에 이르렀느냐는 물음이었다. 조금이라도 망념이 남아있으면 마음에 실상이 제대로 비치지 않으니, 곧 한번 크게 죽었다 다시 살아나야 분명하고 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매일여가 되었다 해도 그것은 가사(假死)이니 거기서 한 번 더 죽어야 진정한 죽음이자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즉 대사각활(大死却活)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려보았느냐는 물음이었다. 

향곡은 성철의 질문에 꼼짝하지 못했다. 자신을 점검해봐야 했다. 그날부터 대분발심이 일어나 정진에 들어갔다. 며칠 동안 바위 위에 앉아 있기도 했고, 쩌렁쩌렁 산천이 울리도록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향곡은 삼칠일(21일) 동안의 용맹정진 끝에 활연대오했다. 향곡은 오도송을 지었다. 

문득 두 손을 보니 전체가 드러나네 
삼세 불조들은 눈 가운데 꽃이로다
숱한 경전과 그 많은 이야기들은 이 무슨 물건인가 
이로 하여 불조들이 목숨을 잃었구나
봉암사의 한바탕 웃음 천고의 기쁨이구나 
희양산 노래가 만겁에 한가롭다 
내년에도 둥근 달은 다시 떠오르겠지
금풍이 부는 곳에 학의 울음 새롭구나 

향곡은 정진하던 봉암사 산내 암자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맨 먼저 자신을 진리에 이르게 한 ‘탁마의 도반’ 성철을 찾아갔다. 

“이제 성철이가 아는 불법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바른 법을 알았다.” 

이때부터 성철과 법(法)싸움을 벌였다. 봉암사 대중은 당시에 일어났던 일화들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법거량이었다. 이제 봉암사 결사의 주역들이 점차 사라져 이들이 남긴 문헌들을 통해 당시의 일들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보살계가 열리는 날이었다. 비가 사납게 쏟아졌다. 그럼에도 많은 신도가 일찍 봉암사를 찾아왔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 봉암사 계곡물은 거세게 흘렀다. 그때 향곡이 비를 맞아가며 홀로 경내를 거닐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바삐 걸어 성철의 거처로 뛰어들었다. 성철은 객승을 맞아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향곡은 다짜고짜 성철의 멱살을 틀어쥐고 밖으로 나왔다. 

향곡과 성철이 비를 흠뻑 맞아가며 맨발에 어깨동무를 하고 마당을 왔다 갔다 했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향곡은 성철에게 문수라 부르고, 성철은 향곡에게 보현이라 불렀다. 서로 문수야, 보현아를 부르며 빗속을 오가자 대중은 처마 밑에 우르르 모여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갑자기 성철이 소리쳤다. 

“구덩이를 파라, 한 구덩이에 죽자.” 

이번에는 성철이 향곡의 멱살을 틀어쥐고 대문 쪽으로 끌고 갔다. 대문을 발로 차서 열고는 향곡을 패대기쳤다. 향곡은 졸지에 대문 밖으로 고꾸라졌다. 성철은 대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버렸다. 흡사 몸집이 큰 곰 두 마리가 씩씩거리는 것 같았다. 대중은 숨을 죽이고 계곡의 물소리만 악을 썼다. 인자한 부처님을 뵈러 왔는데 희한한 일을 보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했던 신도들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변했다. 더러는 몸을 떨거나 비명을 질렀다. 

판자 대문의 벌어진 틈으로 향곡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향곡이 대문을 흔들었다. 대문은 열리지 않고 철컥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갑자기 성철이 대중을 향해 소리쳤다. 

“저 대문 좀 열어줘라.” 

그러나 누구 하나 감히 나서지 못했다. 향곡은 계속 대문을 흔들었다. 

“철컥철컥 철컥철컥” 

대문에서 나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빗속에서도 대중의 귀에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이를 지켜본 묘엄에게는 그 광경이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훗날 그날의 목격담을 이렇게 전했다. 

‘그때였다. 성철 스님이 갑자기 헌식돌로 쓰이는 커다란 돌을 들고 대문 앞으로 가더니 소리 안 나게 빗장을 살짝 들어둔 채 그 앞에서 두 손으로 돌을 들고 지키고 서 있었다. 

향곡 스님이 또다시 잠긴 줄로만 알고 힘껏 대문을 밀치니 왈칵 대문이 열렸다. 그 순간 성철 스님은 들고 있던 그 큰 돌을 향곡 스님의 배를 향해 던지니, 그 큰 돌이 향곡 스님의 배에 맞고 그대로 발등에 떨어졌다. 참으로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중들은 모두 악! 소리를 낼 뻔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향곡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성큼성큼 들어와 성철 스님과 어깨동무를 하더니 한바탕 크게 웃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하……” 

성철 스님과 향곡 스님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봉암사 가득히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참으로 문수보살 후신인 모양이다. 참으로 보현보살의 후신인 모양이다.’ 

봉암사 대중들은 넋을 잃고 두 큰스님의 기이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비도 그치고,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묘엄 구술 ‘회색고무신’에서) 

이제는 전설로 남아있는 봉암사 결사의 명장면이다. 그 시간은 흘러가 우주 속에 흩어졌지만 성철과 향곡이 있던 봉암사의 시간은 따로 흘렀을 것이다. 거창했던 도반의 법거량은 ‘시간의 사리’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치열하게 수행한 선승들이 누리는 자유였다. 봉암사에서 묵언정진을 주로 했던 청담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는 법거량이니 오해하면 안 된다.” 

[법거량(法擧量) :

스승에게 깨침을 점검 받는 것 선종, 특히 간화선은 화두(話頭)를 참구해서 깨침을 얻는다. 그런데 수행자가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기준은 사실상 객관적으로 없다. 어떤 시험을 치르는 것도 아니고, 몇 년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형식이나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기본 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아무나 깨침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기 때문에 선종에서는 인가(認可)를 중시 여긴다.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공부, 즉 화두를 타파했는지를 검증 받는 것이다. 혼자서 도(道)를 깨달았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의 방식은 주로 스승과 제자의 문답(問答) 형식으로 진행된다. 깨침(法)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법거량(法擧量)이라 한다. 법거량을 통해 스승이 제자의 깨침이나 화두 타파를 인정해 주면, 인가를 받는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답(答)만 제자에게 남겨진다. 법거량은 스승과 제자가 마주 보며 1대 1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중 앞에서 법사와 참가자가 문답을 통해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문답으로 진행되는 법거량의 질문은 어떤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진행되며, 답이 막혀서도 안 된다. 화두를 타파했다면 모든 의심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답 또한 정확하고 막힘이 없어야 한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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