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6. 불멸의 결사, 4종정 7총무원장이 나오다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
봉암사는 희양산 흰 바위만큼이나 높이 솟았다. 봉암사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퍼져나갔다. 선승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부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절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선방에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봉암사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본보기였고 기준이었다. 객들은 그들의 수행정진에 자신을 빗대보기도 했다.
신도들과 일반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지게 지고 줄지어 나무하러가는 스님들의 행렬마저 반듯하게 보였다. 누더기를 걸쳤지만 얼굴에 구김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자긍심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마을 아낙들의 입에서 전에 없던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구 저 스님은 인물도 훤하네. 사위 삼았으면 좋겠네.”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이 성수 스님에게서 들은 얘기)
“스님들이 전부 누더기 차림이고 얼굴은 벌건 게 참으로 멋있게 보이더라구. 이전의 대처승들하고는 딴판으로 보이더구만. (…) 깨끗한 스님들을 보니, 은근히 나도 출가하고픈 생각이 들었지.” (혜명 스님)
종단에서도 봉암사 결사를 비상하게 지켜봤다. 청담의 제자 정천이 봉암사에 오게 된 과정을 더듬어보면 불교계가 봉암사 결사를 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천은 가야총림에 머물며 봉암사로 떠난 스승 청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스승은 오지 않았다. 대신 봉암사 결사 소식만 들려왔다. 정천은 봉암사에서 반듯하게 살고 싶었다. 이를 눈치 챈 효봉 스님이 물었다.
“너도 가고 싶으냐?”
“예, 스님.”
효봉은 봉암사 결사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길 안내를 해줄 비구니를 붙여 정천을 봉암사로 보냈다. 효봉은 친히 일주문까지 나와서 정천과 작별했다.
“중노릇 잘하거라.”
이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가야총림이 있지만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겠다는 봉암사 결사를 효봉이 인정한 것이었다. 아직도 대처승들이 절 살림을 장악하고 있는 큰 절은 봉암사 결사를 따라갈 수 없었다. 모두가 존경했던 효봉이 정천의 의중을 떠보고 길잡이 비구니를 딸려서 봉암사로 보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광식 지음 ‘아! 청담’ 참조)
봉암사에 끊겼던 신도들이 찾아들고, 사방에서 대중공양이 들어왔다. 경(經)만을 읽어주는 데도 재를 지내 달라며 줄을 섰다. 성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봉암사에) 사는 사람들이 스님 같고 귀신을 맡기면 천도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나씩 둘씩 재 해달라고 들어와요. 우리 법대로 ‘금강경’이나 ‘심경’을 읽어주는데, 그만 재가 어떻게나 많이 드는지, 왜 그런가 들어보니, 무슨 탈이 나가지고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한다, 별짓을 다해도 천도가 안 되는데, 봉암사에만 잡아넣으면 그만이다, 이것입니다.” (성철 ‘방장 법어’)
성철 이름 또한 높아졌다. 하루는 부산지역 신도들이 찾아와 법문을 해달라고 졸랐다. 향곡을 따르는 무리였다. 성철이 난색을 보이자 향곡까지 나서서 청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성철은 진정한 불공에 대해서 설했다.
불공은 절집이 아닌 세상 속에서 행해져야 하며 부처님이 얘기한 불공은 결국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 일렀다.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을 가르쳐주는 곳이어야 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 대상이었으니 불공의 대상은 오히려 절밖에 있었다. 부처님도 ‘나에게 돈 갖다 놓고 명과 복을 빌려하지 말고, 참으로 나를 믿고 따른다면 내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이르셨다. 배가 고파 길가에서 죽어가는 강아지에게 식은 밥 한 덩이를 주는 것이 부처님께 만반진수를 차려놓고 수천 만 번 절하는 것보다 훨씬 공이 크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성철이 말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명도 주고 복도 준다고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이란 불공 가르치는 곳이지 불공드리는 곳이 아니란 얘기지요. 불공은 절 밖에 나가 남을 돕는 것입니다.”
성철은 확실히 달랐다. 복 받으려면 부처님 앞에 재물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신도들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감동했다. 성철은 인간의 참모습이 부처와 다름없음을, 만물은 일체가 장엄하고 숭고하다는 것을 일깨웠다. 자신이 존귀한지 모르고 스님의 축원으로 복을 받으려는 행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렸다.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날 법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신도들은 옷깃을 여몄지만 정작 절집에서는 아우성이 일었다. 부산, 경남 지역 사찰의 승려들이 들고 일어났다. 성철의 법문이 결국 절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것 아니냐고 흥분했다.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 죽으라는 소리냐. 승려와 신도를 갈라놓는 것이 결사이고 혁신이란 말인가.”
파문은 서울까지 번졌다. 총무원에서도 경위를 따져 물었다. 그러나 성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산이 떠나갈 듯 일갈했다.
“부처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까. 그건 영광일 뿐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전할 뿐 딴 소리는 할 수 없다.”
승려는 결국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할 뿐이니, 신도들이 부처를 봐야지 부처가 아닌 승려들만 보게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훗날 성철은 참된 불공에 대해 설했다. 내용은 봉암사 법문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어떤 도적놈이 나의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 자꾸 죄만 짓는가.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누구든지 머리를 깎고 부처님 의복인 가사장삼을 빌려 입고 승려 탈을 쓰고 부처님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모두 도적놈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승려가 되어 가사장삼 입고 도를 닦아 도를 깨우쳐 중생을 제도하지는 않고, 부처님을 팔아 자기의 생활도구로 먹고 사는 사람은 부처님 제자도 아니요, 승려도 아니요, 전체가 다 도적놈이라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철 ‘방장 대중법어’)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 수좌들은 성철의 장좌불와가 얼마나 됐는지 손가락을 꼽아가며 헤아렸다. 6년이다, 아니 8년이다, 아마 10년은 됐다며 서로 우겼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성철에게 묻지 못했다. 성철은 봉암사에서도 상좌를 들이지 않았다. 아직 제자를 둘 나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봉암사 대중은 누구도 새벽 예불에 빠질 수 없었다. 예불 때에는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을 읽었고 108배 참회를 했으며 능엄주를 독송했다. 또 자장율사의 게송을 외웠다. 신라 시대 자장은 나라에서 벼슬을 맡으라고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칙명을 내려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했다.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시를 지어 자신의 결의를 전했다.
“차라리 부처님 계율을 지키며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계율을 어기며 백 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死)”
대중이 자장의 시를 합송하면 당시의 결기가 살아난 듯 봉암사 경내가 자못 비장했다.
초하루와 보름에는 포살을 했다. 그동안 승려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고하지 않았다. 더러는 불교가 참회의 종교임을 알고 있었지만 범계(犯戒)를 어떻게 씻어야 할지 몰랐다. 봉암사의 포살은 청정비구의 길로 나아가는 귀중한 의례였다. 자운이 계를 설하고 모두가 1000배씩 절을 했다. 그렇게 한없이 낮아지고 맑아진 후에 도반 앞에서 죄를 고했다.
“기억나는 것은 금강산에서 온 비구니스님이 참회를 할 때인데 연지, 즉 손가락을 태우고 참회할 때에 청담 스님이 그 방법을 일러주고, 목탁을 치면서 진두지휘하던 장면이 선하지.” (‘아! 청담’ 혜명 스님 인터뷰)
청정한 법의 구름이 도량을 덮고 있었다. 봉암사 결사는 현대불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아봤기에 현 조계종의 기틀이 잡힌 것이다. 지금도 그 치열함을 후학들이 기리고 따르니 불멸의 족적임이 분명하다. 성철은 하루에 한 장씩 찢는 일력에 봉암사 결사의 소회를 밝혔다.
“고불고조의 유칙(遺勅)을 완전하게 실행한다함은 너무도 외람된 말이기는 하였지만 교단의 현황은 불조 교법이 전연 민멸(泯滅)되었으니 다소간이나마 복구시켜 보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교법 복구의 원칙하에 나의 수시 제안이 있을 것인 바, 그 제안에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대중은 무조건 추종할 것을 새삼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성철의 제안이란 바로 ‘공주규약’이었다. 봉암사 대중은 이를 실천하여 성철의 표현대로 ‘그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대중 전체의 과감한 노력으로 그 성과는 일취월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불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봉암사 결사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봉암사 참여 대중을 다시 헤아려 본다.
비구: 성철 청담 자운 우봉 보문 향곡 종수 혜암 월산 응산 홍경 도우 청안 일도 성수 법전 보경 보안 영신 정천 만성 지관 혜안 보일 혜명 혜정 혜연 혜조 의현
비구니: 묘엄 지원 재영 묘찬 응민 오선 혜민 지용 혜일 원명 지현 혜해 수진 묘각 묘명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사람 중에서 4종정(청담, 성철, 혜암, 법전)과 7총무원장(청담, 월산, 자운, 성수, 의현, 법전, 지관)이 나왔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7. 봉암사를 나오다
『“성철이 가만히 보니 시절이 수상했다. 스님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성철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 모두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봉암사의 실질적인 대표로 인식되어 ‘손봐 줄 대상’이었다. 당시 편을 가르는 사회 분위기로는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들이 산문을 넘어왔다. 문경 봉암사는 빨치산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었고, 실제로 산사람들이 봉암사 인근에 자주 출몰했다. 이에 군경의 출동도 잦아졌다. 빨치산은 기어이 봉암사에도 들이닥쳐 식량을 약탈해갔다. 어느 날은 깎아놓은 곶감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봉암사 일대는 감나무가 많아서 곶감은 겨울 양식의 하나였다. 맑은 도량이 갑자기 혼탁해졌다. 고요했던 산사에 고함 소리가 난무했다.
한번은 군인 70~80명이 올라와 절에서 잤다. 자신들을 빨치산 토벌대라고 했다. 빨치산을 수색하러 가야하니 절에서 밥을 해달라고 했다. 난처해진 청담이 성철에게 어쩌면 좋으냐고 물었다. 성철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며 토벌대장을 불렀다.
“당신들이 군율(軍律)이 안서면 싸움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절에도 법이 있소. 우리가 여기 들어온 뒤로 여태 한 번도 아침에 밥해 먹은 적이 없어요. 당신네들이 들어서 우리가 여태까지 죽 끓여 먹던 법을 깨야 되겠소?”
“그야 안 되지요.”
성철의 설득에 군인들이 마을로 내려갔다. 봉암사에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다보니 군인과 경찰이 봉암사 승려들을 의심했다. 봉암사는 빨치산에게도 경찰에게도 불온한 곳이 되어갔다.
1949년 봄, 부처님오신날을 보낸 직후였다. 봉암사 백련암의 비구니들이 나물을 뜯으러 나갔다. 고사리를 꺾고 다래순도 땄다. 나물을 찾던 묘엄은 문득 둘러보니 도반은 보이지 않고 깊은 산속에 홀로 있었다. 그때 갑자기 코앞에서 괴물이 나타났다. 묘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괴물은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황토가 범벅인 두루마기를 입고 얼굴에는 숯검정을 칠한 사내였다. 사내는 북에서 내려왔다며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묘엄이 가지 않겠다고 버티자 총을 꺼내 위협했다.
그때 나물을 캐던 묘찬이 이 광경을 보고 달려왔다. 묘찬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출가했고 묘엄보다는 6살 위였다. 묘찬은 묘엄 대신 자신을 데려가라고 소리쳤다. 사내가 난감했던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사내 둘이 나타났다. 모두 황토 묻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세 사내가 두 비구니를 끌고 가려 했다. 묘찬이 한 사내의 등짝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차라리 우리를 죽이시오.”
“정말 죽어도 못가겠다는 거야!”
“그렇소. 우리는 불도를 지키면서 단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부처님 법을 어기며 백년 살기를 원치 않소.”
아침저녁으로 외우던 자장율사의 시가 용기이고 힘이었다. 이념에 휘둘리기 보다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러자 사내들 태도가 확 바뀌었다.
“이렇게 철저한 분들이 여승을 하고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내 하나가 총을 거두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사실 저는 산 아래 가은지서 지서장입니다.”
사내들은 모두 빨치산이 아닌 경찰이었다. 경찰이 승려의 사상을 시험해보려 변장을 하고 속을 떠본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비열하고 더러운 짓이었다. 묘찬이 달려가 지서장의 뺨을 후려쳤다. 지서장은 잠자코 있었다. 만일 순순히 따라나섰다면 어찌할 뻔 했던가. 저들에게 사람 목숨은 별 것이 아니었다. 내 편이냐 네 편이냐만 따졌다.
다리에 힘이 빠진 두 비구니는 비틀거리며 봉암사로 내려왔다. 그리고 청담과 성철 앞에서 소리 내어 울었다. 분하고 서러웠다. 봉암사에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래도 비구니들이 위험하니 거처를 옮기도록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결국 비구니들은 걸망을 챙겨야 했다. 백련암을 나와 봉암사 계곡 한 편에 서있는 마애불을 찾아갔다. 고려시대부터 봉암사의 성쇠를 지켜본 돌부처께 하직인사를 했다. 다시 큰절로 내려와 법당에 엎드렸다. 진정 아쉬웠다. 몇 번씩 봉암사를 돌아보며 비구니들은 희양산을 내려갔다. 성철과 청담을 비롯한 대중이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총구는 봉암사 결사까지 겨누고 있었다. 경찰이 조사할 것이 있다며 봉암사 대표를 경찰서로 나오라 했다. 성철은 삿갓을 쓰고 육환장을 짚고 경찰서로 들어섰다. ‘봉암사식 나들이’ 차림이었다. 그러나 경찰들이 보기에 성철의 차림새는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경찰들이 호통을 쳤다.
“당신이 누군데 어디 함부로 창을 들고 들어오는거야!”
성철은 제대로 해명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절에 돌아와서는 이내 청담에게 화풀이를 했다.
“절이 위험한데 묵언만하고 있을 거야!”
그 날로 청담은 묵언을 그만 두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봉암사 아랫마을 출신으로 이 광경을 지켜본 혜명 스님은 당시 일을 이렇게 전했다.
“그때 청담 스님은 철스님을 보시고는 혼자 말씀하시기를 ‘철스님이 도인인데 이런 일 하나 수습하지 못한다’고 한탄을 하였어. 내가 보기에 철스님은 문자를 갖고 하는 것은 도가 텄지만, 사회활동이나 사람과 대면하는 것에는 능하지 못했거든.” (김광식 지음 ‘아! 청담’ )
성철이 가만히 보니 시절이 수상했다. 스님들도 하나둘 흩어졌다. 성철은 경찰과 빨치산 양쪽 모두에 의심을 받고 있었다. 봉암사의 실질적인 대표로 인식되어 ‘손봐 줄 대상’이었다. 당시 편을 가르는 사회 분위기로는 양쪽에서 모두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성철은 수행도량을 옮기게 된 당시 정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을이 되고 보니, 뭣인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딴 사람은 있어도 괜찮지만 나는 거기 있으면 안 되겠다 말입니다. 그래서 추석 지나고 난 뒤에 대중공사를 했습니다. ‘나는 떠나야 하니까 그리 알고, 순호(청담) 스님한테 전부 맡기니 입승스님 시키는 대로 하시오.’ 그렇게 말한 뒤 봉암사를 나왔습니다.”
성철이 먼저 떠난다고 하니 청담의 심기가 편치 않았던 듯하다. 두 사람의 작별을 지켜본 정천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철스님이 장경과 책을 싸서 봉암사를 떠나가면서 청담 스님에게 잘 있으라 인사를 하니 청담 스님은 철스님에게 ‘안 죽으면, 만나보겠지’라고 퉁명스럽게 응대했지.”
성철이 전쟁이 터질 것을 예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훗날 봉암사 주변 사람들은 “뭣인가 좀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작 성철 자신은 “소발에 쥐잡기로 그리 된 것”이라 얘기했다. 하지만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옮긴 것은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만히 보니 시절이 잘못 돌아간단 말입니다. 나무를 베어다가 켜서는 책이 좀 있었는데 나무로 궤짝을 짜 가지고 책을 모두 괘 속에 넣었습니다. 그래 놓고 향곡 스님을 시켜서 트럭을 하나 가져오라 해서는 책을 밤중에 실어다가 향곡 스님 토굴인 월래(月來)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6•25사변이 일어나기 바로 일 년 전입니다.”
불서를 실은 트럭이 어둠을 헤치며 희양산을 내려갔다. 어쩌면 결사의 상징물이 봉암사를 떠나가는 것이었다. 불서를 먼저 보내고 서너 달이 지나 성철은 부산 기장군 묘관음사로 거처를 옮겼다.
성철이 산문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밤중에 빨치산들이 몰려왔다. 어림 20명이 넘어 보였다. 대중을 모두 큰방으로 모이게 했다. 경찰에 자신들의 동태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원주인 보경을 묶어서 꿇어 앉혔다. 끌고 가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죽이면 그냥 죽어야 했다. 빨치산들은 일체유심조, 유물론, 유심 같은 말을 뱉으며 나름 불교에 대해 얘기했다. 허망한 종교라며 승려들을 폄하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들먹였다. 함께 먹고 함께 쓰는 공산주의야 말로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청담이 나섰다. 빨치산을 상대로 그들의 설익은 논리를 물리쳐야 했다. 그러나 총을 든 그들을 설복시키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좋은 말로, 쉬운 말로 다독여야 했다. 한 사람을 설득시키면 다른 사람이 나섰다. 청담은 빨치산 서너 명을 상대로 불교의 다양한 소재를 들어 그들의 편견을 녹였다. 불교가 그들의 사상보다 더 평등하다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 장면을 지켜 본 혜명 스님이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스님은 경을 보고, 지견을 얻었고, 참선도 하였으니 말이 청산유수거든. 그런데 빨치산들은 자꾸 말이 막히거든. 그 빨치산 대장은 나하고는 동네 불알친구거든. 이름이 장붓들이라고. 키만 크고, 학교도 못 다닌 녀석인데. 그래 나는 더욱 말도 못하고 숨을 죽이며 그 장면을 보았지.” (김광식 지음 ‘아! 청담’)
마침내 산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 10시경에 시작한 산사람들과의 대화는 새벽 두, 세 시경에 끝이 났다. 산사람들은 총구를 거뒀다. 보경을 풀어주면서 자신들이 나간 후 3시간 후에 신고하라며 사라졌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2호 / 2015년 9월 30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8. 처음 본 아버지를 처음 본 바다에 묻었다
『“"이윽고 성철이 향곡과 함께 나타났다. 깁고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수경은 마음속으로 ‘저 분이구나’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그 순간 성철이 소리 질렀다. 가라, 가!"』
봉암사를 나온 성철은 향곡과 함께 묘관음사에서 겨울을 맞았다. 묘관음사는 월내(부산 기장군)라는 작은 어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바다가 가까웠다. 운봉 스님(1889~1946)이 토굴을 짓고 정진하던 곳에 1941년 절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운봉은 경허의 세 달 중 하나인 혜월(하현달)의 법을 받았다. 그리고 향곡에게 법을 전했다.
향곡은 1943년 스승을 묘관음사로 모셔와 지극히 받들었다. 운봉에게 미질(微疾)이 있자 향곡이 물었다.
“이제 어디로 돌아가시렵니까?”
스승이 주저 없이 답했다.
“이웃 마을 시주네 집에 물소가 되리라.”
“그러면 소라 불러야 합니까, 스님이라 불러야 합니까?”
“풀을 먹고 싶으면 풀을 먹고, 물을 먹고 싶으면 물을 마시리라.”
운봉은 1946년 4월 열반에 들었다. 성철이 이곳에 들기 3년 전 일이다. 묘관음사는 향곡이 머물며 선풍을 일으켜 단시일에 수행의 명소가 되었다.
성철은 ‘바다가 보이는’ 묘관음사가 마음에 들었다. 성철은 깊은 산 속 만큼 바닷가를 좋아했다. 가야총림이 마음에 들지 않자 도우를 시켜 바닷가 수행처를 알아보라고 이른 적도 있었다. 경내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날마다 ‘묘관음사’라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을 것이다.
당시 체구가 당당한 성철과 향곡이 함께 거닐면 경내가 꽉 찰 정도였다고 한다. 두 선승을 바라보는 대중은 보는 것 자체로 마음이 그득했다. 묘관음사 경내에 성철과 향곡의 수행 일화를 기리는 탁마정(琢磨井)이 있다. 도반의 목덜미를 잡아 우물에 처박고서 서로를 경책하며 경계를 점검했던 현장이다.
성철은 묘관음사에서 신실한 제자 비구니 인홍 스님(1908~1997)을 얻었다. 인홍은 8년 동안 머물던 오대산을 나와 묘관음사에 머물고 있었다. 인홍은 1941년 오대산 지장암으로 출가했다. 한암 스님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고,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인홍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선수행의 전범을 보여준 한암을 존경했다. 특히 한암이 설하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몇 번씩 전율했다.
‘인홍은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서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노래했다. 세간에 영화롭고 욕되는 일들 알고 보니 거품이요 몽환(夢幻)이로다. 오늘날 법문 듣고 모두 잊으니 천지가 내 것이요 광명뿐일세.’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인홍은 그러나 한암과 오대산을 떠나와야 했다. 바로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1949년 봄, 오대산을 내려와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묘관음사에 걸망을 내려놓았다. 인홍은 이곳에서 성철을 만났다. 인홍 세수 42세, 성철은 38세였다. 성철을 본 인홍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성철 스님은 삼십대 말의 젊은 선객이었으나 이미 도를 이루어, 쏘아보는 눈빛만으로도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도인이었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눈에서 황금빛을 발했고 상대방을 무언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인홍은 묘관음사 선방에 들어 도반인 장일, 성우, 묘찬 등과 면벽수행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향곡이 인홍에게 공부의 경계를 물었다. 인홍이 답하자 향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성철이 일어나 인홍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다시 말해보시오.”
그러자 인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 가로막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성철이 다시 다그쳤다.
“하루 중 아무리 바쁠 때라도 화두가 끊어지질 않고 꿈속에 밝고 밝아 항상 한결 같아도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문득 화두가 막연하면 소용없는 법, 다생겁으로 내려오는 생사고를 어떻게 하겠는가?”
성철은 인홍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의 경계를 설명하고 이 세 관문을 뚫어 화두를 깨치라 일렀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법문은 인홍의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홍에게는 삼분단(三分段) 법문이 새롭고 신비로웠다.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인홍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의 공부는 실로 보잘 것이 없었다.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기필코 도를 이루리라.”
선승은 크게 의심(大疑團)한 후에는 크게 용맹하고 크게 마음을 내야했다. 인홍은 이때 대용맹(大勇猛), 대분심(大賁心)이 일어났다. 이후 성철처럼 등을 바닥에 대지 않고 생활했다. 잠이 밀려들면 일어나 행선을 했다. 한밤 묘관음사 경내를 걷고 있으면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깨달음에 목마른 비구니에게 바다가 보내주는 묘음(妙音)이었다.
겨울날이었다. 인홍은 화두를 들고 경내 연못가를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성철이 나타나 인홍에게 공부의 경계를 물었다. 인홍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성철은 얼어있는 연못으로 인홍을 밀쳐버렸다. 훗날 그때 그 순간을 인홍은 이렇게 회상했다.
“겨우 연못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미 옷은 물에 푹 젖어 얼음이 쩍쩍 달라붙었지. 바닷바람이 오죽 차야지. 그러나 나는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어. 그대로 서서 정진하며 옷을 다 말렸지. 그때 내 정신이 돌아왔어. ‘조금 아는 것은 아는 것도 아니구나. 그것조차 버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평생 살아오면서 그때 발심했던 마음을 철두철미 잊지 않고 살았어.”
성철과 인홍은 이렇게 스승과 제자가 되었다. 인홍은 세수로 4년 아래인 성철을 일평생 스승으로 섬겼다. 성철이 어디에 있든 찾아가 꿇어앉았다. 성철사상을 전하는 비구니로 일생을 살았다.
1950년 1월, 묘관음사에 딸이 찾아왔다. 열세 살 수경(불필 스님)은 서울에서 초등학교(6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큰 손녀 도경이 진주여중 입학을 앞두고 갑자기 죽자 할아버지 이상언은 “진주는 인연이 아니다”며 수경을 서울로 보냈다. 마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막내 삼촌이 아버지를 한번 만나러 가자고 찾아왔다. 사실 수경은 아버지가 스님인 것이 못마땅했다. 산속에 사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던 큰스님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거지일까?’ 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가족을 버린 채 산속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씩 미워하는 마음이 쌓이지 않았나 싶다.” (불필 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그러니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과 다소의 설렘도 있었다. 삼촌은 수경에게 말했다.
“형님을 만나 한판 해야지. 기필코 불교를 때려 부수고 올 거야.”
막내는 집안의 유풍(儒風)을 어지럽히고 식구들을 팽개친 큰형에 대해 반감이 없지 않았다. 해 질 녘 묘관음사 입구에 도착했다. 수경은 절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산기슭을 오르다 보니 투박한 외모의 스님이 불쑥 나타났다. 보기에 무서웠다. 향곡이었다. 성철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는 향곡이 수경을 기특한 눈으로 쳐다봤다.
“철 수좌가 ‘오늘 이상한 사람이 온다’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어. 내가 잡아올 테니 잠깐 기다려라.”
이윽고 성철이 향곡과 함께 나타났다. 깁고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수경은 마음속으로 ‘저 분이구나’ 생각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버지였다. 그 순간 성철이 소리 질렀다.
“가라, 가!”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잖아도 마뜩찮았던 수경은 대번에 돌아서며 삼촌 팔을 끌었다.
“집에 빨리 가자, 삼촌.”
그러자 향곡이 도반의 딸을 달랬다. 방으로 데려가 음식과 과자를 내놓았다. 그리고 하룻밤을 재웠다. 다음 날이 되어도 아버지 성철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경은 아버지를 향한 작은 그리움마저 지워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절 아래를 내려다봤다. 어제 저녁 무렵에는 저물어 보이지 않았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산골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자란 수경이 처음 보는 바다였다. 수경은 처음 본 아버지를 처음 본 바다에 묻었다.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묘관음사에서 있었던 일도 바다에 모두 흘려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큰형을 만나고 온 막내 삼촌은 별 말이 없었다. 수경이 표정을 살피니 불교를 때려 부수겠다는 호기는 오간데 없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막내삼촌이 나직이 말했다.
“나도 출가해버릴까.”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3호 / 2015년 10월 7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9. 제자의 간청에 생식을 멈추다
『“성철은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도 생식을 고집했다. 그러자 앞니가 벌어지고 손톱이 엷어져 휘어졌다. 향곡이 그것을 보고 몇 번이나 생식을 멈추라 말했다. 그러나 성철은 한 마디로 물리쳤다. 그러던 성철이지만 제자의 간곡한 청만은 뿌리칠 수 없었다. 출가 이후 16년 동안 고집했던 생식을 포기했다.”』
6·25전쟁이 터졌다.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야만의 시간은 누가 풀었는가. 피 냄새가 작은 동쪽나라를 뒤덮었다. ‘으뜸 가르침’이라는 종교도 흐르는 피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광기가 스며있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내용도 모르는 이념을 물고 죽어갔다. 깊은 산속 절집도 총을 든 사람들이 접수했다. 절이 불타고 스님들이 쫓겨났다.
전쟁이 터지기 석 달 전 봉암사에 남아있던 청담, 법전, 정천, 지관이 희양산을 내려왔다. 이로써 봉암사 결사가 끝났다. 청담이 묘관음사에 머물던 성철을 고성 문수암으로 불러들였다. 문수암은 688년(신라 신문왕 8)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주변 산세가 수려하고 기암에 둘러싸여 일찍이 해동의 명승지로 알려졌다. 남해 금산 보리암,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더불어 영남의 3대 기도처로 꼽힌다. 바다를 내려다보면 남해 한려수도의 섬들이 크고 작은 점으로 떠 있다. 바다가 배경인 거대한 수묵화는 볼 때마다 달랐다. 점들은 때로는 짙게 때로는 옅게 풀어졌다. 문수도량 문수암에서 성철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남쪽지방에도 인공기가 휘날렸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갈랐다. 절마다 ‘죽음’이 들어왔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승려들은 기도하고 염불했다.
“비행기가 진주 폭격하고 하는 것, 고성 문수에서 다 보았습니다.” (성철)
멀리 진주 시내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밤에는 하늘마저 시뻘겋게 물들었다. 하지만 문수암의 문수보살은 그 어떤 지혜도 내려주시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사람들만 굽어보고 계셨다.
이듬해 성철은 고성 문수암을 떠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문수암으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성철과 청담의 명성을 듣고 신도와 승려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했다. 봉암사에서처럼 살기 어려웠다. 결국 이듬해 성철은 약수로 유명한 통영 안정사 은봉암으로 옮겨갔다.
은봉암은 634년(선덕여왕 3)에 창건한 고찰이다. 벽방산(벽발산으로도 불림) 은봉암은 안정사에서 가파른 산길을 타고 올라가야 나타났다. 경내에서 바라보면 바다가 훤히 보였다. 눈이 솔바람을 맞는 것처럼 시원했다. 성철은 묘관음사, 문수암에 이어 다시 바다가 보이는 절에 머물렀다. 은봉암은 대처승의 절이었다. 성철을 따르는 신도는 하나도 없었다. 또 곁에 행자 한 명도 없었다.
“이때 문일조라는 분이 고봉 스님의 추천을 받아 은봉암으로 큰스님을 찾아왔어요.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하니 ‘그러면 저 계단 끄트머리에 똑바로 서봐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답니다. 마치 혜가 스님이 눈 속에서 법을 구했듯, 꼬박 24시간을 서있고 나서야 스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죠.” (도우 스님)
성철이 은봉암에 있다고 알려지자 찾아오는 스님들이 많았다. 대처승 식구보다 성철에 딸린 승려들이 더 많다보니 더부살이가 편치 않았다. 토굴이라도 지어 따로 살림을 차려야 했다. 일조가 큰절로 내려가 안정사 주지에게 토굴 하나 짓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큰 절에서 은봉암으로 올라가는 산자락에 토굴을 지었다. 도우와 일조가 흙을 이겼다. 처음으로 ‘성철의 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가삼간이었다. 주위에는 돌담을 둘러치고는 천제굴(闡提窟)이라 이름 붙였다.
천제는 산스크리트어 ‘이칸티카(icchantika)’를 음사한 일천제(一闡提)를 줄인 말이다. 일천제는 영구히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무리를 일컫는다. 부모를 죽이거나 부처와 나한을 죽여서 그 죄업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질 자들이다. 이와 관련 중국 남북조시대에 살았던 도생 스님(369~434)의 고사가 전해진다. 도생은 뛰어난 법사였다. ‘열반경’에 능통한 도생은 일천제 부류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전국의 법사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생을 죽이려했다. 하지만 도생이 어리고 문장이 뛰어남을 감안하여 강남으로 추방했다. 당시는 불법이 장강(長江) 이북에만 퍼져있었다. 도생은 강남에 띠집을 짓고 살면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즉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도생은 돌과 나무들을 대상으로 설했다. 그리고 물었다.
“나는 일천제라도 최후에 성불할 수 있음을 믿는데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그러자 앞에 서 있던 바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바로 ‘도생의 설법에 바위가 끄덕인다[生公說法 頑石點頭]’는 고사이다.
천제굴이란 ‘부처가 될 수 없는 이의 굴’이었으니 매우 역설적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라도, 어떤 경우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긍정의 가르침이 들어있다. 또한 그 속에는 득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깃들어 있었다. 천제굴에 청담, 자운, 운허, 서옹, 향곡, 혜암 등이 수시로 찾아왔다.
처음에는 일조, 지호, 도우, 법전 등이 성철과 함께 살다가 다들 떠나고 법전만이 성철 곁을 지켰다. 법전은 천제굴 주변의 밭을 갈았다. 공양을 지어 바치고 청소하며 빨래했다. 정성을 다해 스승을 모셨다. 성철은 생식을 고집하여 몸이 쇠약했다. 제자는 스승을 위해 항상 약을 달여 드렸는데 그 농도가 일정해서 맛이 한결같았다. 법전이 고안해 낸 ‘저울추 약탕기’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다 보면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해 약의 양이 들쭉날쭉했다. 그때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다. 숯불을 화로에 담아 재로 잘 덮어 화기를 조절하고, 약단지를 공중에 매달고 나뭇가지를 비스듬히 하여 저울대처럼 만들어 추를 달았다. 약이 불에 졸아 추 무게와 같아지면 수평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약이 달여져 원하는 양이 되면 평행이 되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안심하고 약을 달일 수 있었다.” (법전 자서전 ‘누구 없는가’)
천제굴에서는 ‘봉암사 공주규약’을 잊지 않고 실천했다, 비록 두 사람만 있었지만 철저하게 지켰다. 수행에 전념하며 능엄주를 외우고 예불대참회를 계속했다. 스승과 제자 둘이서 올리는 예불이었지만 언제나 지극하고 장엄했다. 살이 에이는 새벽 추위에도, 더운 여름날의 저녁에도 정성을 다해 모든 생명붙이의 행복을 축원했다.
법전은 하루 종일 분주했다. 엉덩이 붙일 새가 없었다. 이런 법전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끔 천제굴에 들렀던 인홍이었다. 비구니 인홍은 곁에서 성철을 모시고 싶었다.
‘저녁예불을 하면서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108배를 하고 있는 모습도 조촐하지만 장엄했다. 함께 살면서도 그들은 말이 없었다. 제자는 오로지 스승을 시봉하고 살림을 하면서 참선 공부만 할 뿐이었고, 스승은 스승대로 일상에서 부처님 법대로 하루 스물네 시간 사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제자는 부엌바닥에 밥상 대신 깔개를 깔고 상을 차렸다. 어둠이 내리면 남포불 아래서 스승과 제자는 묵묵히 공양을 했다. 어둠 속에서 천제굴은 평화로웠다. 두 사람에게는 안식이 깃들었다. 몸이 부서질 듯 곤했어도 법전은 스승과 함께 있음이 행복했다.
어느 날 생식을 하는 스승에게 법전이 감히 간했다.
“스님 이제 그만 생식을 멈추시지요.”
그러자 성철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이놈이 무슨 수작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스님, 제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스님의 생식을 준비하려면 손이 너무 가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화식(火食)을 하시지요.”
생식 공양을 준비하려면 번거롭기도 했지만 법전은 스승의 건강이 무척 염려되었다. 매사에 정성을 다해 시봉을 해도 스승의 몸은 나아지지 않았다. 토굴생활에 공양까지 시원치 않으니 스승의 야윈 몸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법전은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여쭈었다.
성철은 봉암사 결사를 하면서도 생식을 고집했다. 그러자 앞니가 벌어지고 손톱이 엷어져 휘어졌다. 향곡이 그것을 보고 몇 번이나 생식을 멈추라 말했다
. “성철이 너 이러다 죽는다. 정 생식을 하려거든 참깨를 섞어먹어라.”
그러나 성철은 한 마디로 물리쳤다.
“참깨가 그리 몸에 좋으면 너나 처먹어라.”
그러던 성철이지만 제자의 간곡한 청만은 뿌리칠 수 없었다. 출가 이후 16년 동안 고집했던 생식을 포기했다.
“좋아, 내일부터 화식을 하지.”
법전은 기뻤다. 새삼 벌어진 스승의 앞니가 눈에 들어왔다. 법전은 성철을 시봉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참선이라 여겼다.
“진정한 스승은 생활 전체가 그대로 법문이다. 스물네 살에 봉암사에서 노장을 첫 대면한 이후, 나를 이끌어주실 스승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후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허물조차 법인가 했다.” (법전 스님)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4호 / 2015년 10월 14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0. 성철은 몽둥이로 말했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
『“성철은 다시 혜춘에게 주장자를 내리쳤다. 혜춘 역시 매를 피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성철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 이렇듯 가혹한 경책은 선종사에서도 흔치 않았다. 성철은 몽둥이로 말하고 있었다.”』
도인으로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천제굴을 찾아왔다. 어느 날 여섯 보살이 토굴을 찾아왔다. 안정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천제굴로 올라왔다. 혜춘도 그중 하나였다. 혜춘은 4남매를 둔 세칭 ‘높은 집 마나님’이었다. 성철이 돌아가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맨 마지막에 혜춘을 보며 말했다.
“왜 불교를 믿으려 하는가?”
“성불하려고 믿습니다.”
답을 듣고 성철이 무심히 말했다.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구나.”
그러자 혜춘은 의문이 들었다. 바다를 배가 아닌 송장을 타고 가야하는 비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다음 날 함께 온 보살들이 떠났지만 혼자 남아 성철에게 답을 달라 졸랐다. 그래도 눈길 한번 주지 않자 단식에 돌입했다.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집에 못갑니다.”
성철이 마지못해 달랬지만 혜춘은 막무가내였다.
“우리더러 송장을 치우라고 할 작정이냐. 밥이나 먹고 내려가라.”
“굶어죽어도 먹지 않고, 또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천제굴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혜춘을 성철이 불렀다. 혜춘이 큰 절을 올리고 앞에 앉았다.
“인간이 희구하는 게 무엇인가.”
“행복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행복은 유한이냐, 무한이냐”
“무한한 행복을 바라지만, 죽으니까 유한한 것 아닙니까.”
“그럼 무한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 공부를 해보겠느냐.”
“믿어지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철은 우선 절 만 배를 하라 일렀다. 만 배를 끝내니 2만 배를 하라했다. 2만 배를 끝내니 다시 3만 배를 하라 했다. 그리고 다시 4만 배를 시켰다. 그렇게 합쳐서 10만 배를 마치자 성철은 미리 써둔 법문을 내밀었다.
1. 생사윤회의 근본인 부모, 형제, 부부, 자녀간의 애정을 영단(永斷)해서 돌아보지 말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끊을 것.
2. 선악시비 어디에도 절대 관여치 말고 수행만 할 것.
3. 하루 20시간 이상 용맹정진 할 것.
4. 남녀노유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부처님 같이 공경할 것.
5. 여하한 일이든 내가 옳다는 아심(我心)을 내지 말고 생사의 전쟁을 끊을 것.
법문을 보는 순간 혜춘은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고 있던 고급시계를 성철에게 드렸다. 그때까지는 성철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이니 혜춘이 그럴 만도 했다. 성철이 그걸 받아서 던져버렸다. 그리고 흡사 오물덩어리를 만진 듯 손을 털었다.
“그때 저는 다이아몬드 1캐럿하고 같은 가격의 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 이것 다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어 큰스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리니까 큰스님은 고만 손으로 탁 치더니 멀리 던져버리셨어요.” (혜춘 스님)
성철은 혜춘을 인홍이 있는 성주사로 보냈다. 그러면서 사람을 시켜 단단히 일렀다.
“사람을 하나 보내니 도량으로는 들이되 선방에는 들이지 마시게.”
인홍은 성철이 일러준 대로 혜춘을 내쳤다. 법당에도 선방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혜춘도 보통이 넘었다. 유발한 채 법당 추녀 밑에 거적을 깔고 앉아 화두를 들었다. 대중은 그런 혜춘을 모른척했다.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시아버지가 도지사였지만 혜춘은 대중의 발밑에 엎드렸다.
‘부엌에 앉아 꽁보리밥에 소금에 절인 김치 조각 하나 놓고 밥을 먹었다. 몸집이 좋고 다식(多食)을 했던 혜춘 스님은 채공 소임자에게 부탁하곤 했다. “이 거지에게 밥을 좀 더 주시오.” 그러나 성주사 후원의 책임자는 결코 그녀에게 밥을 더 주는 일은 없었다. 인홍 스님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렇게 혹독하게 두어 달을 보내고 나자 성철 스님은 혜춘 스님의 출가를 허락했고, 비로소 해인사 약수암에서 창호 스님을 은사로 삭발했던 것이다.’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1951년 여름, 경남 창원 성주사에 비구니스님이 모여들었다. 오대산 월정사, 사불산 대승사 등에서 정진하던 스님들이 전쟁을 피해 삼삼오오 산문을 넘어 왔다. 이들은 모여서 치열하게 정진했다. 이른바 ‘성주사 결사’였다. 봉암사 결사를 이어받아 그때 마련한 ‘공주규약’을 실천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장삼을 벗지 않았고, 백장청규 사상을 실천했다. 나무하고 밭농사를 지으면서도 눕지 않고 정진했다. 비구에게 봉암사 결사가 있었다면 비구니에게는 성주사 결사가 있었다. 그 중심에 인홍이 있었고, 그 뒤에는 성철이 있었다.
성주사 결사에 참여한 대중은 안거가 끝나면 천제굴에 가서 성철의 법문을 들었다. 성철은 해제 때에 천제굴 출입을 허락했다. 해제 전날이면 성주사 대중은 물론이요 신도들도 천제굴로 몰려갔다. 그 맨 앞에 역시 인홍이 있었다. 천제굴에 도착하면 간단히 요기를 하고 곧바로 참선에 들었고, 밤새 정진을 하고 나서 아침에 법문을 들었다.
그날도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당에서 성철을 기다렸다. 비좁은 법당은 대중으로 꽉 찼다. 산새 소리만 들릴 뿐 법당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성철이 들어왔다.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내리쳤다.
“쿵!”
새벽이 찢어졌다. 성철은 시퍼런 눈길로 대중을 바라봤다. 성철의 안광이 대중의 마음을 꿰뚫었다. 눈길이 법전과 혜춘을 향했다.
“한 마디 일러보라!”
지금까지 공부한 경지를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법당 안은 깊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예리했다.
“모두 마당으로 나가라.”
대중을 경책하기에는 법당이 좁았다. 대중이 모두 마당으로 나와 앉았다. 성철은 제자 법전을 향해 주장자를 내리쳤다. 제자는 스승의 매를 미동도 하지 않고 맞았다. 어깨와 등짝으로 주장자는 매섭게 떨어졌다. 법전 대신 대중이 신음을 토했다.
‘스승과 제자란 저런 것이구나.’
‘깨달음을 향한 정진은 멀고도 숭고하구나.’
성철은 다시 혜춘에게 주장자를 내리쳤다. 혜춘 역시 매를 피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성철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자식까지 두고 온 수행자가 그렇게 정진해서야 되겠는가.”
성철이 법전과 혜춘을 택해 매질함은 결국 공부의 싹수가 있음이었다. 상근기를 지녔으면서도 스스로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그 사실을 깨쳐줌이었다. 일찍이 이렇듯 가혹한 경책은 선종사에서도 흔치 않았다. 성철은 몽둥이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
법석(法席)이 거둬진 후에도 혜춘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손등의 피를 닦아주며 인홍이 혜춘을 일으켜 세웠다. 인홍은 새삼 묘관음사에서 성철이 자신을 연못 속에 빠뜨렸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의 분심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인홍은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성철이 진정 고마웠다.
‘후학들에게 내리쳤던 주장자는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요, 후학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격려였다. 하화중생에의 뜨거운 원력이기도 했다. 출가 수행자가 목숨을 내놓고 공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혜춘에 대한 경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주사에 머물 때 혜춘이 문밖에서 인사를 드리자 성철은 벌건 화로를 던졌다. 불은 피했지만 재를 뒤집어썼다.
“분한 생각에 잠이 안 왔습니다. 그 후, 눈 시퍼렇게 뜨고 공부를 했는데요, 자꾸 고맙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 분해서 분심이 나서 진짜 눈 뜨고 잠 안자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스님 고맙단 생각이 샘솟아서 용기가 더 났지요.” (혜춘 스님)
전쟁으로 산하가 핏빛으로 물들었지만 천제굴에서는 선승들이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땅에 살기(殺氣)가 가득했지만 천제굴에는 바다에서 맑은 바람이 올라왔다. 혜춘은 성철의 바람대로 바른 길을 걸었다.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고, 윤필암과 석남사 등에서 36안거를 성만했다. 해인사에 보현암을 세워 비구니 선원을 개설했다. 후학을 길러내며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우뚝 섰으니 진정 영원한 행복을 찾음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