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 ~ 45.“쓸모없어야 도를 이룬다” 딸의 법명을 불필이라 짓다

수선님 2023. 7. 9. 13:07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 


『“성철은 천제굴을 찾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이때부터 성철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 한국 불교사에 ‘삼천배’란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승려란 결국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 부처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철은 삼천배를 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시오. 나는 해줄 게 없습니다.”』

▲ 성철 스님은 성주사에 총림을 세울 생각도 했다. 또 이곳에서 참다운 시주가 무엇인지를 가르쳤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1952년 창원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이어받은 성주사 대중이 성철을 모셔왔다. 성주사는 불모산(佛母山)에 있다. 불모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을 지칭한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를 싣고 온 왕비가 아들 7명을 입산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해서 그리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일곱 아들은 모두 성불했다고 한다. 불모산에 비구니들이 원을 세우고 결사를 했음은 허 왕비의 발원이 천 년 넘어 다시 꽃을 피웠음이었다. 

성철은 이곳에 내심 총림을 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성주사에서도 대처승과의 갈등이 있었다. 대처승들은 끊임없이 불모산을 올라왔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절을 내 놓으라 윽박질렀다. 그때마다 인홍이 나서서 대처승들을 물리쳤다. 비구니의 일갈은 어느 장부보다 힘이 있었다. 

“승가의 근간은 청정이요, 그것을 지키는 것은 바로 계율 아닙니까? 청정을 무너뜨리고 계율을 어긴 그대들은 부처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습니까? 머리 깎고 독신으로 사는 수도자는 처자를 데리고 살림하지 않는 것이 전통인데 왜승들을 본받아 사찰 안에서 대처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 채 수도에 전념하는 청정 도량에 와서 절을 내놓으라니, 부처님 법 어디에 그런 일이 있답니까?”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절 뺏기 싸움은 어쩌면 전쟁보다 지독했다. 온갖 욕심이 엉켜있었다. 성철은 성주사에 총림을 열겠다는 원을 접어야 했다. 성철은 4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정법수호의 회상을 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 중심에 인홍이 있었기에 성철이 성주사를 특별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성철이 성주사에 도착해서 부처님을 뵈러 법당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문득 눈을 들어 보니 현판에 법당 중창 시주자 이름이 크게 쓰여 있었다. 

‘법당 중창 시주 윤ㅇㅇ’

법당을 중수한 그는 마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재력가였다. 성철은 그 사람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큰스님이 관심을 보이자 시주자가 곧바로 달려왔다. 성철이 에둘러 말했다.

“소문에 당신이 신심이 깊다고 모두들 칭찬하더이다. 나도 법당 위를 보니 그 표가 얹어 있어서 당신이 신심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시주자는 큰스님의 칭찬을 듣고 기뻐했다. 성철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간판 위치가 잘못된 것 같아요. 간판이란 남들이 많이 봐야하는데 이 산중에 붙여 놔봐야 몇 사람이나 와서 보겠소. 그러니 저걸 떼어내 마산역 광장에다 갖다 세우면 어떨까 합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옮겨봅시다.”

시주자의 안색이 금세 바뀌었다.

“스님, 정말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운 줄 알겠소? 설마 저 간판을 얻으려 시주를 한 것은 아니지요?”
“스님 잘못했습니다. 몰라서 그랬습니다.”
“몰라서 그랬다고? 그러면 고치면 되지. 이왕 잘못된 것을 어찌하겠소.”

시주자는 제 손으로 현판을 떼어 내어 아궁이에 넣었다. 법당임을 알리는 현판이 불쏘시개가 되었다. 잠시 밥 한술 짓는 정도의 불길을 내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성철은 남들 모르게 남을 돕는 게 진짜 불공이라 말했다. 자신의 공덕을 알리는 순간 그것이 날아가 버림을 왜 모르느냐고 탄식했다. 

“아까운 돈으로 남 도와주고, 몸으로 남 도와주고는 왜 입으로 공덕을 부수어 버리는가.” 

성철은 이듬해 봄 다시 천제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여름, 1953년 7월27일 이 땅에서 총성이 멎었다. 휴전이 이뤄진 것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절과 불교문화재가 불에 탔다. 많은 승려들이 죽거나 다쳤다. 남과 북은 절속에서도 싸웠다. 북에서 내려온 승려들은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접수하고 남조선불교연맹을 조직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와 북한을 찬양하는 노래를 보급하는 등 선전활동을 했다. 태고사는 전쟁 보급품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 둔갑했다. 다시 국군이 밀고 올라오자 태고사는 부상병 수용소가 되었다. 시가전이 치열하게 벌어진 탓에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은 부상자들로 넘쳐났다. 전쟁은 믿음의 공간을 부쉈다.

한암 스님(1876∼1951)이 전쟁 중에 입적했다. 1951년 3월 자신이 주석하고 있던 상원사를 구한 후 75년 동안 걸치고 있던 육신을 벗었다. 죽음 앞에서 선사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한암의 이야기는 만고의 귀감이었고, 지금은 오대산의 전설이 되었다. 오대산에 들어온 국군은 인민군과 빨치산의 은신처를 없애겠다며 닥치는 대로 전각에 불을 질렀다. 군인들은 월정사를 태우고 다시 상원사로 몰려갔다. 상원사 대중은 피난을 가고 노승이 홀로 법당에 앉아 있었다. 교정에 추대되었지만 평생 상원사를 떠나지 않은 한암이었다. 불을 지르겠다며 비켜 달라고 하자 노승은 잠깐 기다려 달라 했다. 한암은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다시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자신도 법당과 함께 태워 달라 말했다. 

“부처님 제자로 법당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니 어서 나를 태우시오.”

몸 어디에도 두려움이나 노여움은 붙어 있지 않았다. 낯빛이 평온했다. 국군 장교는 노승의 의연하고 기품이 서린 언동에 꼼짝 할 수 없었다. 결국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절 마당에서 태웠다. 연기를 피워 법당을 태우는 시늉만 내고 떠나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암은 좌탈입망했다. 만공, 수월 등과 함께 선풍을 진작시킨 한암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이름이 누리를 덮어 권력이 그의 이름을 가져가 팔았지만 한암은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선사의 최후는 향기로웠다. 

성철은 천제굴에서 전쟁의 상흔을 씻겨 주었다. 슬픔과 아픔을 품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사에서 왼편으로 난 산길을 올라왔다. 그리고 토굴에 들어 성철에게 자신의 상처를 꺼내보였다. 성철은 모든 악업은 과거로부터 지은 것이라며 먼저 참회부터 하라고 일렀다. 불공의 참의미와 지혜로운 삶을 일러주었다. 

성철은 천제굴을 찾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이때부터 성철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 한국 불교사에 ‘삼천배’란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승려란 결국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 부처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철은 삼천배를 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시오. 나는 해줄 게 없습니다.”

1953년 초가을, 전쟁통에 아버지를 잃은 15세 소년이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 천제굴을 찾아왔다. 소년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맹장염을 알았지만 전쟁 중이라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당시에 성철은 악신(惡神)도 천도시키는 귀신 쫓는 도인스님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년은 고모와 함께 천제굴에 올랐다. 고모는 이미 마산에서 성철의 가르침을 받으러 천제굴을 오르내렸던 불자였다. 15세 소년이 아버지 천도재를 지내러 왔으니 성철은 이를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성철의 천도의식은 독특했다. 무속의 굿이나 유가의 제례를 흉내 낸 천도재에 익숙한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성철은 경전만을 독송했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봉암사 결사 때처럼 신도들이 직접 장만한 음식을 불전에 공양토록 했다. 가졌건 못 가졌건, 지위가 높건 낮건 직접 밥을 지어 올리게 했다. 그런 성철의 모습이 소년에게는 당당하고 고고하게 보였다. 

성철은 소년에게 밥을 지어 올리게 하고 삼천배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위로의 설법을 했다. 인생의 무상함과 죽음의 의미를 들려주었다. 소년은 감격했다. 충만한 기운에 휩싸였다. 육신의 아버지를 보내고 마음의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바로 성철이 천제굴에서 얻은 첫 번째 제자 천제이다. 

처음에 ‘초발심자경문’을 읽게 했다. 하루 한 쪽씩을 외워야 했다. 소년이 더듬거리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렸다. 다음에는 ‘채근담’과 ‘한산시’를 외우게 했다. ‘사서삼경’으로 한문 실력을 기른 다음에야 비로소 불교 교리를 익히게 했다. 소년은 위장이 좋지 않았다. 전란 중에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소년에게 위장약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적게 먹으라 일렀다. 

1953년 겨울은 몹시 춥고 허기졌다. 성철을 시봉하던 처사마저 집에 문제가 생겼다며 가버렸다. 결국 성철은 소년과 둘이서 겨울을 나야 했다. 성철은 밥을 짓고 소년은 국을 끓였다. 그해 겨울은 굶다시피 했다. 간혹 부산 신도들이 매서운 겨울추위를 뚫고 올라와 양식을 내려놓았다. 

천제는 평생 성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성철은 상좌를 들이지 않았다. 천제는 조계종단사에 전무후무한 ‘10년 행자’였다. 어느 날 성철이 말했다. 

“너도 이제 스승을 찾아라. 나는 평생 상좌를 두지 않기로 했으니 운허 스님한테 가거라.”

그러나 천제는 이를 거절했다. 처음 성철의 말을 거역한 셈이다. 

“10년 행자로 살았는데 20년은 못 살겠냐고 했지. 가르침을 받으러 왔지 중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어깃장을 놓았어요. 그때 (상좌를 안 들이겠다는) 그 룰을 깨지 않았으면 뒤의 상좌들은 아마 없었을 거야.” (천제 스님)

천제는 이후 어머니와 동생 다섯을 불가로 불러들였다. 육남매가 스님이 되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2015년 10월 28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2. “허명이 아니구나, 네 놈이 도인은 도인이구나”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면 꼭 퍼부어야 할 말들을 준비해갔다. 아들을 보자마자 외쳤다.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그런데 그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만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더는 따져들지 못했다. 아들은 대장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 아들이 출가하자 살생으로 석가에게 복수하겠다며 아버지는 경호강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았다. 이제 그 경호강에서 성철 스님을 기리는 무리가 방생을 하고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천제굴에 딸 수경이 찾아왔다. 묘관음사에서 만난 지 5년만이었다. 이번에는 성철이 불러들였다. 전쟁이 나자 수경은 서울서 진주로 내려와 진주사범 병설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1953년 봄,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수경은 진주 숙모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이듬해 늦봄 어느 날 스님이 수경을 찾아왔다. 성철이 보낸 법전이었다. 스님은 아버지 성철과는 달리 유독 키가 작았다.

“큰스님께서 다녀가라셨다. 방학이 되면 천제굴에 한번 오도록 해라.”

수경은 그러나 내키지 않았다. 수경은 친구 따라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방학을 맞아 산청 묵곡리로 돌아오자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 성철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마도 할머니와 아버지가 말을 맞춘 것 같았다.

할머니 강상봉은 이미 자운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아 불명이 초연화(超然華)였다. 성철이 머무는 곳에 철마다 찾아가 이것저것을 살피고 다시 속가로 돌아왔다. 세속에서도 계를 지키며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수경은 할머니의 청에 딴청을 피우다가 할 수 없이 따라나섰다. 수경보다 네 살 위의 막내 고모와 함께 안정사로 향했다. 1954년 여름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에게 줄 음식과 과일을 잔뜩 싸서 머리에 이었다. 한데 길을 잘못 들어 산길을 헤매다 날이 저물었다.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천제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벽방산은 통영 인근에서 가장 높고 골이 깊었다. 이내 산길을 오르내리다 지쳐버린 세 사람은 산 속 아무 데나 몸을 부렸다. 여름이라 한뎃잠을 잘만 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천제굴이 지척이었다. 바로 옆에 두고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수경이 보기에 초가삼간 천제굴은 절이 아니었다. 저런 집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제굴 앞마당에서 아버지와 딸이 서로를 쳐다봤다. 누더기 차림의 성철은 여전했다. 이고 간 과일과 음식을 보더니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것들 저 산 아래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오거라.”

동생과 딸은 음식과 과일 보따리를 들고 다시 산을 내려가야 했다. 할머니는 아들의 성정을 알면서도 무엇이든 속가에서 이고 왔다.

성철은 천제굴 좁은 방에서 딸과 마주 앉았다. 딸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 
“행복을 위해 삽니다.”

수경은 턱을 들어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얼굴에 불만이 묻어있었다.

“그래, 행복에는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인 행복이 있다. 그러면 너는 어떤 행복을 위해 살려고 하느냐.”

순간 수경은 아버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을 보았다. 그리고 영원한 행복이란 말에 감전된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물음은 단순한데 영혼을 흔들었다. 그 순간을 수경은 이렇게 회고했다.

“영원한 행복과 일시적 행복이 있다 하실 때, 나는 벌써 나의 생을 결정 내버리고 말았다. 스님들을 싫어하면서도 내면의 세계는 불연(佛緣)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불필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수경은 정신을 가다듬어 스님아버지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영원하고 어떤 것이 영원한 행복입니까?”
“행복은 인격에 있지 물질에 있는 게 아니다. 자기가 절대적 존재이며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닦아서 참으로 완전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부처님처럼 도를 깨친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대자유인이고, 이 세상의 오욕락을 누리고 사는 것은 일시적 행복을 누릴 뿐이지.”
“부처님처럼 도를 깨치는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면 도를 깨칠 수 있다.” 

딸의 마음이 움직였다. 성철은 이를 간파하고 곧바로 ‘삼서근(麻三斤)’이란 화두를 내렸다.

“옛날 중국에 동산이라는 큰스님이 있었지. 한 수좌가 스님에게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하고 물었지. 그러자 큰스님께서 ‘삼서근이니라’ 하고 대답했다. 어째서 삼서근이라 했는지 오늘부터 자나 깨나 생각해 보거라. 마음을 닦는 것이 불교이다. ‘어째서 부처를 물었는데 삼서근이라고 했는가’ 하고 의심을 해 보거라.”

화두에 대해서 설명하던 성철이 수경에게 물었다.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보라. 이게 무슨 말이겠느냐?”

그것은 출가를 결심한 수경에게 던진 성철의 첫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 수경의 생은 그 답을 찾는 여정이었다. 영원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그래서 험하고도 아득했다.

“이제 학교는 그만 두고 참선공부만 하겠습니다.”

성철은 끝을 맺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며 학교를 마저 마치라고 일렀다. 졸업까지는 세 학기를 남기고 있었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이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듣고 있던 동생이 말했다.

“스님, 저도 출가하겠습니다.”

그러자 성철은 고개를 크게 저었다.

“너는 몸이 약해서 안 된다.”

여동생은 낙담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경은 천제굴 앞에서 눈을 들었다. 눈앞에 통영 앞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묘관음사에 갔을 때도 바다가 보였다. 그 때는 바다에 아버지를 묻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버지가 준 ‘삼서근’이란 화두가 물결 위에 둥둥 떠다녔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돌아오는 길에 수경의 고모는 줄곧 풀이 죽어있었다. 막내고모는 수경이 보더라도 인물은 좋았지만 몸이 약했다.

“도인도 차별을 하나봐. 자기 딸은 출가를 권유하고 나는 하지 말라고 말리니.”

막내 고모는 불필 스님(수경)의 말을 빌리면 ‘출가(出家) 아닌 출가(出嫁)’를 했다. 훗날 겁외사를 세울 때도 남편과 함께 힘을 보탰다.

묵곡리로 돌아온 수경은 이전의 손녀가 아니었다. 할아버지 이상언은 천제굴을 다녀온 후 손녀가 달라졌음을 금방 눈치챘다. 큰 손녀는 죽고, 둘째 손녀까지 출가할 기미를 보이자 묵곡리 속가는 다시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아들을 찾아 나섰다.

“지가 올리는 없고 내가 가서 봐야지.”

1936년 출가했으니 거의 20년 만에 아들을 찾아 나섰다. 속이 무너져 내려도 참고 참았던 아버지는 이제 ‘유림의 갓’을 벗어던지고 아들을 보러 길을 나섰다. 무심한 아들이고 야속한 아들이었지만 혈육을 어쩔 것인가. 묵곡리로 날아든 아들에 대한 명성은 이미 자신이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법력이 크고 높아 악신(惡神)도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지 놈이 뭔데 온 집안 식구들을 석가(釋家)로 끌어들인단 말인가.’

안정사에서 천제굴을 물으니 한 스님이 왼쪽 길을 가리켰다. 가을이었지만 산길을 오르자니 땀이 맺혔다. 버젓한 큰 절을 두고 아들은 토굴 속에 있다고 했다. 이윽고 천제굴이 나타났다. 천제굴은 묵곡리 속가의 행랑채보다 누추했다.

‘도가 무엇이길래 저런 곳에 기거한단 말인가.’ 

아들 성철이 나왔다. 부자가 마주 보았다. 아버지는 유가(儒家)에서 사람의 길을 찾고, 아들은 불가(佛家)에서 영원한 삶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흰 두루마기를 입었고 아들은 잿빛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발을 하고, 아들은 삭발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만나면 꼭 퍼부어야 할 말들을 준비해갔다. 아들을 보자마자 외쳤다. 

“석가모니가 내 원수다!” 

그런데 그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만 아들의 모습을 보고는 더는 따져들지 못했다. 아들은 대장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누더기를 걸쳤지만 누구보다 늠름했고 눈에서는 빛이 났다. 야윈 얼굴임에도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허명은 아니구나. 네 놈이 도인은 도인이구나.’

글을 읽고 인간의 도리를 논했던 아버지가 어찌 사람 됨됨이 하나 몰라보겠는가. 아버지는 말을 삼켰다. 이내 돌아서서 하늘만 쳐다 볼 뿐이었다. 성철은 그런 아버지를 묵묵히 지켜봤다. 세속의 인연이었지만 부자지간은 얼마나 엄중한가. 아버지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아버지는 발길을 돌렸다. 

뒤따르던 아들이 조용히 말했다. 

“앞으로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묵곡리로 돌아온 아버지는 혼잣말을 하듯이 얘기했다. 

“내 아들이지만 이제 어찌 할 수가 없구나.”

아버지 이상언은 경호강에 쳐놓은 그물을 손수 거두었다. 아들이 출가하자 눈 부릅뜨고 이 악물며 산 것을 잡아들이라 소리쳤었다. ‘살생함으로 아들을 뺏어간 석가모니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쳐놓았던 그물이었다. 부인 강상봉이 이를 한 쪽 눈으로 지켜봤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3. 대처승의 저주가 일주문에 수북한데 어찌 경내가 평화롭겠는가 



『“성철이 천제굴에서 있을 당시 한국불교는 정화운동에 휩싸였다. 성철은 정화운동의 본질은 불교개혁인 만큼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전념하자고 주장했다. 수행 정화를 해야지 힘을 동원한 세몰이식 사찰점거는 더 큰 부작용을 몰고 올 것이라며 이를 경계했다. 성철의 판단은 옳았다. 이때 동원된 ‘급조된 승려’ 문제는 이후 두고두고 한국불교의 발목을 잡았다.”』

▲ 1960년 11월19일, 불교정화의 완수를 기하기 위해 거리를 행진하는 비구스님들.

 

1954년 5월21일 대통령 이승만은 매우 특별한 유시(諭示)를 발표했다.

“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가라.”

유시란 관청에서 백성에게 내리는 가르침이다. 당시 대통령 유시는 곧 힘을 수반한 법이었다. 이승만은 대처식육을 허용하는 일본 불교는 우리의 전통불교와는 융합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결혼한 대처승들은 친일승려들이니 절에서 축출함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의 유시로 불교계는 정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었다.

사실 대통령의 유시가 있기 오래 전부터 왜색 불교를 추방하고 우리 고유의 청정 승풍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백양사에서 결성된 고불총림은 내부 혁신을 통해 참된 불법을 전파하고자 했다. 비구승을 정법중, 대처승을 호법중이라 하고 대처승은 제자를 두지 못하게 하여 결국 도태시키도록 만들었다. 성철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도 왜색 불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불교를 ‘부처님 법대로 살아서’ 일으켜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나서서 불교계 정화를 천명하자 불교계는 대통령의 의중 탐색에 부심했다.

그렇다면 대통령 이승만은 왜 불교를 찍어서 유시를 발표했을까. 거기에는 여러 설이 있다. 우선 대통령이 어느 사찰에 들렀는데 대처승 부인이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대처승을 몰아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가장 많이 유포되어 있다. 또 동산 스님 등 불교계의 건의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누구는 정치적 이유를 들이대기도 한다. 발췌개헌을 통해 폭력으로 집권을 연장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불교를 제물로 삼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를 향해 정화를 ‘명령’한 것은 매우 부적절했다. 더욱이 이승만은 감리교 신자였다. 그럼에도 거리낌 없이 대처승 추방을 표명한 것은 나름 국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를 향해 무려 8차례의 유시를 내린 것도 여론의 지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됐든 대처승들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순응할 것인가.’

전국의 명찰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대처승들은 모든 더듬이를 동원하여 위기의 실체를 알아보고 난국을 헤쳐 나갈 궁리를 했다. 그리고 대통령 뜻이 완고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내 굴복하기로 했다. 그동안 권력에 기대 본 승려들은 권력의 속성을 잘 알았다. 곧바로 중앙교무회를 열어 종헌을 개정했다. 9월에는 중앙종회를 열어 종권을 내려놓고, 비구승에게 사찰을 내주기로 결의했다.

비구승들은 이승만의 유시를 앞세워 정화(대처승 입장에서는 법난)운동을 전개했다. 교단정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에 전국비구승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이어서 비구승대회를 열어 ‘대처승은 승적에서 제거할 것, 대처승은 호법중으로 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분종을 천명하면서도 호법중은 될 수 없다고 맞섰다. 그것은 대처승더러 행정 등이나 맡아보며 수행승의 뒷바라지를 하라는 것이었다. 비록 처를 거느렸다고 해도 나름 부처님을 섬기며 수행했다고 생각하는 대처승들은 비승(非僧) 취급에 분노했다.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비구 측 주장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처승들의 반격이 가시화되자 동산, 청담, 월하 스님 등 불교지도자들이 다시 경무대를 찾아가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11월4일 “왜식 종교관을 버리라”는 ‘더 강력하고 더 세밀한’ 유시를 발표했다.

대통령의 유시를 믿고 비구승들은 물리적인 충돌도 서슴지 않았다. 시정의 폭력배와 거리의 깡패들까지 동원했다. 권력의 비호 아래 정화란 이름으로 폭력을 끌어들인 것이다.

태고사를 차지하려는 비구와 대처 간의 물리적 충돌로 불교의 위상은 수직으로 추락했다. 비구승들이 진입하여 사찰 현판을 ‘曹溪寺(조계사)’로 바꿔 달면 다시 대처승이 몰려와 현판을 ‘太古寺(태고사)’로 달았다. 결국 비구와 대처승들은 곳곳에서 유혈충돌을 빚었다. 폭력배들이 법당에 난입했다. 경내에 유혈이 낭자했다. 유혈 충돌 후 양측은 법정다툼에 들어갔다. 종교가 사법부의 판결에 의지해야 했다. 신도들은 한숨을 쉬고, 일반인들이 혀를 찼다.

사찰마다 부처님을 속인 업장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불교계는 참회 대신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만 뺏으려 들었다. 어디 부처님 법에 ‘폭력’이 있었는가. 쫓겨난 대처승들의 저주가 일주문에 수북한데 어찌 경내가 평화로운 것인가. 내 탓은 않고 남 탓만 하는 승단에 어찌 화해가 스며들 것인가.

성철이 천제굴에서 있을 당시 한국불교는 정화운동에 휩싸였다. 성철은 정화운동의 본질은 불교개혁인 만큼 절 재산을 모두 사회에 내주고 승려는 걸식하며 수행에 전념하자고 주장했다. 수행 정화를 해야지 힘을 동원한 세몰이식 사찰점거는 더 큰 부작용을 몰고 올 것이라며 이를 경계했다. 성철의 판단은 옳았다. 이때 동원된 ‘급조된 승려’ 문제는 이후 두고두고 한국불교의 발목을 잡았다. 또 더 좋은 밥그릇을 챙기려는 ‘사찰 쟁탈전’은 종단을 수렁에 빠뜨렸다. 수행 정화를 통해 고승들을 많이 배출했다면 그 그림자만 보고도 경배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관권에 휘둘리며 권력에 짓밟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때 비구승들은 성철과 청담을 주목하고 있었다. 성철은 천제굴에서, 청담은 고성 문수암에서 정진하고 있었다. 두 스님이 일어서면 승단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했다. 효봉, 동산 등 노장들이 산을 내려오라 전갈을 보내고 젊은 수좌들은 성철과 청담을 찾아갔다. 성철은 비구승들의 청을 일축해버렸다.
“정화란 싸움이 아니다. 우리가 먼저 맑아져서 종단을 맑게 해야 한다.”

하지만 청담은 젊은 수좌들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한국불교가 자신을 원한다면 몸을 던져 세속의 늪에 빠진 도량을 건져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청담의 생각으로는 정화불사를 위해 다른 한 명이 있어야 했다. 바로 성철이었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천제굴을 찾아갔다. 누더기를 입고 있는 성철에게 함께 서울로 가자고 했다.

“지금의 정화 불사는 봉암사 결사에서 싹을 틔운 것 아닌가. 이제 우리가 결사를 완성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정화란 안으로 정진력을 키워 내실을 기하면서 이뤄져야지, 자기편을 늘려 사찰을 뺏는 싸움이 되면 ‘묵은 도둑 쫓아내고 새 도둑 만드는 꼴’이 아닌가.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부처님 법대로 살고 중답게 정진하는 것이라 믿네. 지금은 우리에게 봉암사 결사가 새롭게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하네.”
“미래를 내다보면 성철 말이 맞네만 당장 비구승이 정진할 도량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부처님 말씀을 붙드는 것이 먼저 아니겠나.”
“결국 나 혼자 가라는 말이구먼.”

청담은 그렇게 혼자서 올라갔다. 그리고 정화불사의 한 복판에 서 있게 되었다. 그래도 가끔 사람을 보내 성철을 끌어내려 했다. 끝내 성철은 청담에게 시를 써 보내 자신의 의지를 내보였다.

‘세 칸짜리 띠집에 본래부터 머무르고 있으니/ 한 길 신비로운 광명이 만고에 한가롭구나/ 시빗거리를 나한테 가져와서 왈가왈부 하지마라/ 뜬 세상에 천착하는 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로다’

연못에 물이 흐려 고기가 떠났다면 물을 맑게 해야지 다른 연못을 찾을 일이 아니었다. 고기(수좌)는 물(법)이 맑으면 저절로 연못(승단)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밖을 장악하기보다는 안을 먼저 다스리자는 성철의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철은 대중을 교화한다고 떠들다가 결국 대중에 동화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약한 한국불교의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 본 것이다. 이후 한국불교는 얼마나 많은 곡절을 겪어야 했는가. 모두 안이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평화와 자유는 결코 반목과 질시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대립은 투쟁을 낳고 투쟁은 멸망을 낳습니다. 미움은 결코 미움으로 지워질 수 없습니다. 지극한 자비의 도리가 실현되어야 할 소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철 법어)

철학자 윤구병은 학창시절에 서돈각 교수와 해인사 백련암에 주석하고 있는 성철을 찾아갔다. 이야기 끝에 불교정화운동과 관련해서도 ‘말씀’을 얻고자 했다. 성철이 대뜸 일갈했다. 윤구병은 그날 성철의 노한 음성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똥개 두 마리가 똥 덩어리를 놓고 싸우고 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4. 또 한 번의 출가 ‘10년 동구불출’ 



『“성철은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치라고 했다.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른바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출가였다. 비구와 대처승의 절 뺏기 싸움이 한창일 때 성철은 불교의 내적 정화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 해인사 주지에 임명되자 성철 스님은 사직원을 종정에게 보낸 뒤 파계사 성전암으로 향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천제굴에서 가족과 화해를 했다. 딸에게는 출가를 권유했고, 딸은 영원한 행복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또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갔고, 결국 아들을 대장부로 인정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다시 속연을 끊음이었다. 통영은 산청 속가와도 가까웠다. 성철에게 가깝고 먼 것은 거리가 아니었다. 인연 있는 이들이 너무 많이 찾아왔다. 그들로부터 다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미 성철이란 법명은 누리에 널리 퍼져 있었다. 종단은 성철의 생각과 말 한마디를 귀하게 생각했다. 조계종은 1955년 9월 성철을 해인사 주지에 임명했다. 종단의 일방적인 조치였다. 성철은 곧바로 사직원을 종정에게 보냈다. 결국 해인사 주지에 도반인 자운이 취임했다. 자운은 성철의 임명장을 지니고 가서 해인사 주지직을 인수했다.

성철은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마침 팔공산 파계사의 한송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파계사 산내 암자인 성전암이 비록 낡았지만 기세와 인연이 범상치 않으니 다시 일으켜 세워보라는 것이었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파계사는 아홉 갈래로 흩어진 물길을 붙잡아 모은다는 뜻으로 파계사(把溪寺)라 했다고 한다. 804년(신라 애장왕 5) 심지 스님이 창건한 고찰로 그 이후 조선시대 개관 스님이, 다시 현응 스님이 새로 지었다. 현응은 숙종의 부탁으로 세자의 잉태를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숙빈 최 씨가 현몽하고 세자를 낳았다고 한다. 바로 영조였다.

성전암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현응이 영조 탄생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린 곳으로 알려졌다. 경북의 3대 참선도량 중 하나로 꼽는다. 성전암은 파계사에서 1킬로미터 남짓 산길을 올라야 나타난다. 한송은 성철과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함께 정진했다. 선승으로서 성철의 면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송은 파계사를 수행제일 도량으로 조성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불사를 하고 있었다. 성철이 자신이 구상하는 가람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성철은 1955년 가을 통영 안정사 천제토굴을 빠져 나왔다. 오나가나 불서가 문제였다. 트럭에 실린 불서는 벽방산 산 밑에서 팔공산 산 밑으로 옮겨졌다. 성전암은 벼랑에 붙어 있어 흡사 제비집 모양이었다. 막상 도착해보니 경내에는 변변한 건물 한 채 없었다. 그래도 눈을 들어보니 단풍이 고왔다. 늦가을이었다. 뜰이 넓지 않아서 건물을 줄이고 마당을 넓히기로 했다. 쉽지 않은 공사였다. 법전이 팔을 걷어붙였다. 독성각은 법당으로 쓰고 나한전에 불서를 모셨다. 벼랑의 제비집(성전암)에 책이 들어가 가득 찼다.

성철은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치라고 했다.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른바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출가였다. 비구와 대처승의 절 뺏기 싸움이 한창일 때 성철은 불교의 내적 정화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성철은 더 철저히 수행하는 전범을 보였다. 출가-제방 편력-오도-대중결사를 마치고 독거 수행에 들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수행납자의 길이었다. 천제, 성일, 만수 세 행자가 성철을 시봉했다. 모두 10년 만에 제자가 된 이들이었다. 집을 다 고친 후 떠나갔다.

1956년 봄 성전암에 딸 수경이 찾아왔다. 수경은 친구 옥자와 함께 팔공산을 올라왔다.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막 졸업한 갓 스무 살 처녀였다. 수경은 파계사를 지나 성전암이 가까워지자 묵곡리 속가의 식구들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삼촌, 숙모…. 성전암에 오르면 찾아가 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교사 발령을 받았지만 수경은 학교가 아닌 산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삼촌은 중이 되더라도 교편을 1년만 잡고 가라 했다. 또 어머니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 더 공부하라 했다. 고집불통 수경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호소이자 애원이었다. 하지만 수경은 성철 스님의 얘기만을 머릿속에 넣고 살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참선공부만 하며 살겠다는 수경에게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매듭을 못 지으면 큰일도 성공할 수 없다. 졸업을 하고 오거라.”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삼촌은 마지막으로 가족회의를 열어 설득해보기로 했다. 막상 가족들이 둘러앉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는데 수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릅니다. 누구든 제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절에 가지 않겠습니다.”

그 말로 끝이었다. 누가 수경을 대신하여 죽을 것인가. 할아버지 이상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이 집 나갈 때도 울지 않던 이상언이 손녀가 출가한다니 눈물을 보인 것이다. 그 눈물 앞에 수경은 물론 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른 봄밤이 아팠다. 멀리서 새 울음이 그 정적 속을 파고들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부처님은 6년 만에 도를 깨치셨지만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3년 만에 도를 깨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지만 어디 속세로 돌아왔는가. 식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수경은 할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 당부가 각별했다.

“절에 가면 버섯은 송이버섯 외에는 절대로 먹지 말거라. 산에는 독버섯이 많다. 그리고 이걸 가져가거라.”

이상언은 한약봉지를 내밀었다. 언제든지 중탕(重湯)을 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일종의 보약이었다. 약을 받으며 수경은 문득 할아버지 얼굴을 쳐다봤다. 유독 주름살이 눈에 띄었다.

‘많이 늙으셨구나.’

더욱 기가 막힌 사람은 어머니 이덕명이었다. 일찍 남편이 집을 나가고, 큰 딸은 죽고, 이제 남은 둘째 딸이 어미 가슴에 못을 박고 있었다. 시부모가 있어서 제대로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러움은 안으로만 삼켰다. 수경은 그렇게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할아버지 이상언을 보지 못했다

.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성전암 경내에 들어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신분을 박차고 다시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성전암에는 천제, 만수, 성일 세 행자가 있었다. 선방에는 법전, 혜암, 일타 등이 정진하고 있었다. 수경과 옥자는 성철에게 3배를 올렸다.

“참선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나왔습니다.”

수경은 졸업을 하고 왔으니 참선공부 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성철은 아직 도시의 물이 빠지지 않은 수경과 옥자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출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수행자는 가난부터 배우고 하심(下心)해야 한다. 저 마을로 내려가 탁발부터 해보라.”

둘은 마을로 내려가 제법 번듯한 집에 들어갔다.

“밥 좀 주세요.”

도회지 신여성 둘이서 밥을 달라 하자 정작 놀란 것은 그 집 식구들이었다. 며느리가 상을 푸짐하게 차려 내놓았다. 아마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며 밥을 먹는 두 처녀를 흘끔거렸다. 밥을 잘 얻어먹고 성전암에 올라와 성철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다. 성철은 혀를 찼다.

“아직 멀었구나.”

수경과 옥자는 뭔가 배우고 싶었다. 하루 빨리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싶었다. 수험 공부를 하듯,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듯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영원한 길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성철은 두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당시에는 그 말이 마음에 닿지 않았다. 먼 훗날에야 알아차렸다. 성전암에서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팔공산을 내려와야 했다. 당시에는 비구니 사찰이 흔치 않았다. 해인사 말사인 청량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성철은 직접 작성한 법문 노트를 내밀었다. 친필은 단정했다. 머리말부터 수경의 가슴을 덥혔다.

“호화코 부귀코야 맹산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하여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오
과연 그렇다. 생자필멸은 우주의 철칙이라. 대해거산(大海巨山)도 필경은 파멸하거든 하물며 그 사이에 끼어 사는 구구한 미물들이랴! 천하에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죽음을 못 면해서 소나무 밑에서 티끌이 되나니, 모든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몇몇이냐’라고 노래함도 이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이다.
초로인생(草露人生), 초로인생,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수경에게 법문노트는 생명수 같은 것이었다. 왜 대자유인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불교의 기초를 가르치고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한자 한자 적은 것들이었다. 수경과 옥자는 법문노트 앞에 ‘백비(百非)’라 썼다. 감히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이 귀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19호 / 2015년 11월 18일자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5.“쓸모없어야 도를 이룬다” 딸의 법명을 불필이라 짓다 



『“해제일에 성전암을 찾아온 수경과 옥자에게 성철은 각각 불필(不必)과 백졸(百拙)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이 돼야 도를 이룰 수 있고, 백 가지 즉 만사에 못난 사람이 돼야 성불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 백련암 장경각 앞에서 인홍, 묘엄, 불필 스님과 함께 한 성철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수경과 옥자는 매화산 자락에 있는 청량사로 들어갔다. 유발한 채 성철이 내린 화두를 들고 정진했다. 수행의 교과서는 성철의 법문노트였다. 성철이 써 준 12두타행(12고행)을 그대로 실천하려 했다.

‘성하고 새것은 누가 주더라도 받지 않는다./ 여벌옷은 쌓아두지 않는다./ 누구든지 청해서 주는 것은 받지 않고 오직 얻어서만 먹는다./ 가난한 집이나 부잣집이나 가리지 않고 차례로 얻어먹는다./ 한 번 앉아 먹고 두 번 먹지 않는다./ 조금 얻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구걸하지 않는다./ 오후에는 과즙과 꿀물도 먹지 않는다./ 산이나 들이나 인가와 먼 고적한 곳에서 살고 사람들과 섞이지 않는다./ 항상 묘 터에서 사람의 뼈들을 보며 정진하여 무상을 깊이 느껴 발심을 돕는다./ 집 안에서 살지 않고 항상 나무 밑에서 공부한다./ 나무 밑도 반 집 안 같아서 오히려 애착이 생기는 고로 아무것도 덮이지 않는 곳에 산다./ 타락은 게으른 곳에서 옴으로 항상 앉아서 눕지 않고 용맹정진한다.

12두타행을 다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근본정신만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니 잊는다면 이는 수도인이 아니요 부처님 말씀과 같이 불문의 대적(大賊)이다. 의복은 항상 떨어진 것으로 몸 가릴 정도면 족하니 세상 사람과 같이 잘 먹고 잘 입으려면 출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의식은 영양 부족이 안 될 정도, 거처는 바람과 비를 가려 병나지 않을 정도로 취해야지 조금이라도 사치한 것은 절대로 못쓴다.

깊이 인과를 믿어 시주의 물건은 비상(砒霜)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하루 먹은 밥 세 발우는 근본을 따지고 보면 시주의 피땀인지라 시주의 피 세 그릇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금생에 도를 깨치지 못하면 한 방울 물이라도 다 갚아야 되나니 어찌 무섭지 않으랴.’ (성철 ‘법문 노트’)

의욕은 넘쳤지만 지혜가 깊지 못하고 요령이 부족했다. 몸에 이상이 왔다. 안거 해제 무렵에는 잇몸이 붓고 이가 솟았다. 조급함은 결국 병이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성철의 가르침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경은 상기(上氣)병까지 났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듯했다. 성철을 찾아가 상기병을 호소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면전에서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급하면 찾는 게 아버지였다. 성철은 상기 내리는 법을 써서 주었다.

‘氣海丹田 腰脚足心(기해단전 요각족심)’

“좌복에 앉아 온몸의 기운을 높은 절벽의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고, 족심에 생각을 두면 열이 내릴 것이다.”

성철은 수경과 옥자에게 다음 수행처를 정해 주었다. 바로 인홍 스님이 있는 태백산 홍제사였다. 둘은 홍제사에서 한 철을 보내고 대승사 윤필암을 거쳐 묘적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해제일에 성전암을 찾아온 수경과 옥자에게 성철은 각각 불필(不必)과 백졸(百拙)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세상에 쓸모없는[不必] 사람이 돼야 도를 이룰 수 있고, 백 가지 즉 만사에 못난[百拙] 사람이 돼야 성불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름을 받고 수경이 물었다.

“하필 왜 불필입니까?”
“하필(何必)을 알면 불필의 뜻을 안다.”

그것은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불필’이 필수라는 얘기였다. 바보처럼 공부만 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니 쓸모없음이 필연이라는 것이었다.

1957년 가을 두 사람은 머리를 깎았다. 인홍 스님을 은사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석남사 대웅전에서 사미니계를 받았다. 인홍이 막 석남사 주지를 맡아 중창 불사를 시작할 즈음이었다. 석남사는 가지산 동쪽 기슭에 있다.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개창한 도의국사가 824년에 창건했다.

가지산 석남사는 인홍이 다시 세운 비구니 사찰이었다. 처음 석남사에 와보니 신라 고찰의 모습은 간 데 없고 대웅전과 극락전, 요사채만 쓰러질 듯 서있었다. 터가 넓어서 더 을씨년스러웠다. 세속의 여인으로 있을 때는 약했지만 산사의 비구니들은 강했다. 퇴락한 석남사를 오직 비구니들이 힘을 모아 번듯하게 일으켜 세웠다. 주지 인홍은 직접 법당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를 이었다. 성철을 만나 새롭게 법(法)눈을 뜬 인홍은 석남사를 성철사상을 실천하는 도량으로 조성했다. 인홍은 곧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로지 큰스님 법에 의지하고 그분의 지도 아래 비구니 위상을 세워보겠다는 원력으로 석남사를 이끌었다.”

인홍은 어언 ‘가지산의 호랑이’라 불리었다. 성철은 ‘될성부른 떡잎’들은 인홍에게 보냈다. 불필도 백졸도 그들 중 하나였다. 성철과 인홍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챙겼다. 이런 일이 있었다.

가지산 나무들이 잎을 떨구는 가을날이었다. 인홍은 갑자기 배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상좌들이 병원으로 옮겼으나 의사들은 병명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제자들은 스승을 큰 병원으로 옮겼다. 다시 정밀 검진을 받았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췌장이 곪아 터지기 직전입니다.”

곧바로 수술 날짜를 잡았지만 모든 것은 절망적이었다. 인홍도 자신의 최후를 준비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불필이 성철을 찾아가 위급한 상황을 알렸다. 성철은 한참 동안 생각을 가다듬더니 이내 방책을 얘기했다.

“너희 대장 아직 죽으면 안 된다. 살려내야 한다. 이렇게 하거라. 돌아가서 능엄주와 대참회로 삼칠일 기도를 해라. 스무하루 동안 목탁소리와 염불소리가 일분일초도 그쳐서는 안 된다. 향을 피워놓고 두 사람은 백팔대참회를 하고 두 사람은 능엄주를 해라.”

성철이 이른 대로 석남사 대중은 조를 짜서 기도를 시작했다. 16명을 네 팀으로 나눴다. 네 사람이 6시간 동안 기도하면 다른 팀이 이어받았다. 그렇게 24시간 내내 능엄주와 백팔참회가 끊기지 않았다.

인홍이 수술실에 들어갔다. 8시간이 걸리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후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석남사 대중은 기도와 염불로 삿된 것들을 쫓아냈다. 마침내 인홍이 사흘 만에 깨어났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며 말했다.

“수술대에 누워있는데 문수보살님과 보현보살님, 그리고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이 나타나시어 내 배를 만져주셨다.”

가피였다. 칼을 들었던 의사는 기적이라고 했다. 1000명 중 한 명도 살아남기 힘든 수술이라고 했다. 기적의 현장을 지켜본 불필은 그 감회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혼연일체를 이루었던 아름다운 기도 회향을 잊지 못한다. 지극한 기도에 가피를 내리신 부처님, 기도 방법을 알려주시며 살려내라고 하신 큰스님, 큰 수술을 이겨내신 은사스님. 나는 살아오신 스님께 삼배를 올리던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살아왔다.”

인홍은 불필을 각별하게 살피며 수행정진을 독려했다. 불필은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하고, 석남사 심검당에서 100일 동안 눕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을 했다.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대원사, 오대산 지장암 등 제방에서 정진했다. 안거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성철과 인홍의 바람대로 불필은 수행에 모범을 보여 비구니계를 이끌었다.

성전암에서 성철의 일과는 단조로웠다. 아침에 공부하고 다시 밤에 공부했다. 이를 해와 달이 지켜봤다. 또 그 해와 달을 천제, 만수, 성일 세 행자가 성철과 함께 지켜봤다. 성철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또 누구를 간섭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깨달음과 앎을 다시 성찰했다. 물리학, 열역학, 수학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모두가 훗날의 불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제자 천제가 보기에도 스승의 공부는 대단했다.

“1950년대에 서구의 학술 자료를 구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지요. 성철 스님은 본인이 장서를 보거나 간혹 찾아오는 학자들과 얘기를 하다 새로운 주장을 담은 책이나 자료가 나왔다고 하면 꼭 구해 달라 당부했습니다. 한국 관련 정치면이 구멍이 난 ‘타임’지를 구독하셨고, 당시 화보 월간지의 대표지였던 ‘라이프’지도 구독하셨으며, 저에게도 외국어 연수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교관련 서적이나 역사관련 사료를 수집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천제 스님)

불교는 노인들이 붙들고 있는 ‘늙은 종교’가 아니었다. 지식이 넓어지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더 새로워지는 종교’였다.

성철은 제자들에게도 공부를 많이 시켰다. ‘세속적인’ 학문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자 천제는 천재(天才)라는 별명을 얻었다. 산중에서 배운 영어실력이 수준급이었기 때문이다. 천제는 일어, 범어, 한문에도 능했다.

“성철 스님은 불전을 원전으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어를 알아야 하고, 또 범어 공부를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라고 하셨습니다.”

천제와 함께 ‘10년 행자’인 만수도 별명이 ‘사전’이었다. 공부하라는 성철의 성화에 사전과 옥편을 줄줄 외웠기 때문이었다. 성철이 5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라는 말이 전해지지만 이는 부풀려진 것이라고 한다. 성철은 한문과 일어에는 막힘이 없었지만 다른 언어는 다소 더듬거렸다고 한다. 


김택근 법보신문 고문(언론인·시인) 
출처: 법보신문 1320호 / 2015년 11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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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성철은 천제굴을 찾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이때부터 성철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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