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유식학입문 唯識學入門 / 오형근박사

수선님 2023. 7. 9. 13:23

유식학입문 唯識學入門

* 유식학입문(불광출판부)/오형근박사

Ⅰ. 유식학(唯識學) 약사(略史)

불교는 유심사상(唯心思想)에 입각하여 교리를 대부분 설명한다. 모든 것은 마음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상을 기초로 하여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도 서로 불가분리한다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이 서로 평등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선(善)과 악(惡)을 나타내는 주체는 정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인공은 마음인 것이다.

마음을 학술적으로 말하려면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핵심적인 표현은 심의식(心意識)이라고 할 수 있다. 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원시불교(原始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도 정신을 설명할 때 소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다 대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심(心)을 아라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를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을 의식(意識) 등 육식(六識)으로 정하여 완전히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이론을 체계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식학은 인도(印度)에서 싹이 트게 되었으며 열매를 맺어서 중국에 전해지고 중국으로부터 한국(韓國)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식학은 여러 나라의 불교발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인간의 심성(心性)을 이해시키는 데도 많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다음에는 인도에서 유식학이 성립되고 발달하는 과정과 그리고 중국과 한국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인도 유식학의 성립

유식학은 마음을 중심하여 설명하는 학설을 말한다. 물론 마음을 중심하여 설명하는 학설은 원시불교(原始佛敎)에도 있었고 소승불교(小乘佛敎)에도 있었다. 그러나 소승불교에서는 심의식(心意識) 등의 유심사상을 소극적으로 설명하였으며 이들 사상을 대승불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유식학을 성립시킨 학자와 교리발달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유식학(唯識學)의 성립

유식학을 성립시킨 학자는 무착보살(無着菩薩)이다. 무착(Asanga)보살은 A.D4세기경(佛滅 九百年)에 인도의 간다라(Gandhara)라는 나라의 수도인 푸루사푸라(Purusapur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뜻한 바 있어서 화지부(化地部)라는 소승불교의 종파에 출가하여 열심히 공부하였다. 소승불교의 학설을 모두 연구하고 다음에는 대승불교에 귀의하여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갖고 대승불교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수행을 잘한 결과 신통력(神通力)을 구족하게 되었다.

무착보살은 평소에 생각하고 연구한 학문에 대하여 풀리지 않은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하루는 신통력으로 도솔천에 계시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도솔천에 올라갔다. 무착보살은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설법 듣기를 발원하여 심오한 설법을 들었다.

그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불자(佛子)들을 강당에 모이게 하고 미륵보살로부터 들은 교리를 대중들에게 설법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설법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삿된 학설이라고 비난하면서 믿지 않았다. 무착보살은 중생들을 교화하겠다는 원력(願力)을 세우고 도솔천으로 다시 올라가서 미륵보살을 친견하고 미륵님이 직접 하강하여 교화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미륵보살은 무착의 소원대로 아유다국(阿踰陀國)의 강당에 밤에만 내려와서 설교하였다. 이 설교를 들은 대중들은 환희심을 갖게 되었고 진리를 깨달은 바가 많았다.

이 설법회는 밤에만 4개월간 지속되었으며 이때 무착보살은 그 미륵보살의 설교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편집하여 발간하였다. 이 때 편집하여 발간된 책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百卷)],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대승장엄론(大乘莊嚴論)], [변중변론(辯中邊論)],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密經論)] 등이다. 이들 논전들은 유식학을 연구하는데 가장 필요한 교과서라고 해서 유식가에서는 오대부론(五大部論)이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무착보살의 원력에 의하여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설교를 한 것이 유식학의 근본사상인 오대부론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전설은 바수반두전(婆藪槃豆傳)에 나오는 설화이며 옛날에는 이 설화를 신앙으로 믿어왔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일부 학자들은 그 시대에 생존한 미륵보살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다. 현재 대장경(大藏經)에는 오대부론을 미륵설(彌勒說)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 책은 무착보살이 저술한 책을 신앙심에 의하여 미륵의 이름으로 법공양(法供養)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유식학은 위에서 말한 전설과 같이 미륵보살이 신앙심의 인물이었지만 고대로부터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어 왔으며 실질적으로는 무착보살이 창립한 학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착보살은 종래의 학문을 보다 적극적인 유심주의적(唯心主義的)인 사상으로 개혁하여 유식학을 창립한 것이다. 당시에 유통되었던 [해심밀경(解深密經)], [십지경(十地經)], [아비달마경(阿毘達磨經)], [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을 접하고 이들 경전에서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이며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무착보살은 대승경전의 사상을 더욱 연구하여 [섭대승론(攝大乘論)]과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과 [아비달마경론(阿毘達磨經論)] 등을 저술하게 되었다. 이들 논전이 저술됨으로써 유식학에 대한 기초적인 사상과 이론을 충분히 보급하게 되었다.

그런데 무착보살의 친동생인 세친보살(世親: Vasubandhu)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는 소승불교의 부파(部派)에출가하여 소승교리를 연구하고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있었다. 무착보살은 대승불교를 비방하는 세친보살(世親菩薩)의 행위를 염려하고 자신의 숙소로 오라고해서 [십지경(十地經)]을 보여주고 유식사상을 설명하여 대승불교에 귀의케 하였다. 세친보살은 대승불교에 귀의한 후 열심히 연구하여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과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과 [십지경론(十地經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저술하였다. 세친의 저술 가운데 가장 주목된 것은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이었다. 왜냐하면 유식삼십론에 의하여 체계화된 유식학을 널리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유식삼십론의 주석(註釋)

유식삼십론은 위에서 설명한 미륵보살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무착보살의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기초로 하여 원시적인 유식학을 종합하여 조직체계화한 논전이다. [유식삼십론]은 광범위한 유식사상을 삼십게송(三十偈頌)으로 축소한 것이기 때문에 잘 정돈되고 체계화된 것이기는 하나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이 명저(名著)의 사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주석서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이 논전에 대한 주석가(註釋家)는 28명의 학자가 있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게 주석한 학자는 10명이었다. 이들 10명을 흔히 십대논사(十代論師)라고 칭한다.

십대논사들은 미륵보살의 저서와 무착보살의 저서와 그리고 세친보살의 저서와 여러 대승경전을 인용하여 유식삼십론을 자세하게 해설하고 주석을 하여 일반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석서의 권수는 한 사람이 10권씩을 저술하였으며 이들 저술을 모두 합치면 100권이 된다. 각각 10권의 주석서를 쓴 십대논사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친승(親勝), (2) 화변(火辯), (3) 덕혜(德慧), (4) 안혜(安慧), (5) 난타(難陀), (6) 정월(淨月), (7) 호법(護法), (8) 승우(勝友), (9) 최승자(最勝子), (10) 지월(智月) 등이다.

이들 학자들이 주석한 유식삼십송의 주석서는 인도에 유학온 중국의 현장법사(玄藏法師)가 스승인 나란타사(那爛陀寺)의 법주(法主) 계현논사(戒賢論師)의 도움으로 대보리사(大菩提寺)에 거주한 현감거사(玄鑑居士)로부터 입수하게 되었다. 그후 현장법사는 중국으로 가지고 와서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이름으로 한역(漢譯)하여 널리 보급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인도에서 유식학이 성립된 역사를 요약하여 살펴보았다. 무착보살의 원력으로 성립된 유식학은 세친논사에 의하여 조직체계화되었으며 십대논사(十代論師)에 의하여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밖에 유식학자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 그리고 자증분(自證分) 등 심분설(心分說)을 주장한 진나논사(陣那論師)를 비롯하여 중국의 현장법사(玄?法師)를 지도한 계현논사(戒賢論師)도 있다. 그리고 무착보살의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주석한 무성논사(無性論師)와 업력(業力)과 종자(種子)가 본래 존재한다고 주장한 호월논사(護月論師) 등이 있다. 이러한 유식학자들이 인도의 유식학을 발전시켰으며 여타의 학문발전에도 영향을 많이 끼쳤다.

2. 중국의 유식학 전래

중국에는 유식학이 인도로부터 삼차에 걸쳐서 도입하게 되었다. 첫째는 보리유지(菩堤流支)삼장이 AD 508년(永平元年)에 중국에 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번역하여 지론종(地論宗)의 유식학을 펴게 되었다. 그 후 진제삼장(眞諦三藏)이 AD 563년(天嘉四年)에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번역하여 섭론종(攝論宗)의 유식사상을 전파하였다. 그 뒤에 현장법사(玄藏法師)는 인도에 17년간 유학하고 645년에[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주석서 100권을 가지고 귀국하여 [성유식론(成唯識論)] 10권을 번역함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유식사상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 유식학이 세 차례에 걸쳐서 도입되었다. 이들 유식학은 사상의 차이가 많아서 후대의 학도들에게 많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이유는 각 종파간에 심체설(心體說)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서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1) 지론종(地論宗)에서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 등 팔종의 심체를 설하였다. 이 가운데 전칠식(前七識)은 번뇌가 있는 망식(妄識)이고 제8식인 아리야식은 청정한 심체라고 주장하였다.

(2) 섭론종(攝論宗)에서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아다나식(阿咤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 아마라식(阿摩羅識) 등 구종의 심체를 설하였다. 섭론종은 구종의 심체 가운데 전팔식(前八識)은 번뇌가 있는 망식이지만 제9의 아마라식은 청정한 심체이며 진여성(眞如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아라야식(阿賴耶識) 등 팔종의 심체를 설하였다. 법상종은 이들 팔종의 심체 가운데 앞의 칠식은 망식이고 제8의 아라야식은 그 자체는 번뇌를 야기하지 않지만 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망식이라고 하였다.

이들 망식들은 그 자체가 불성(佛性)이며 식의 실성(實性)은 섭론종의 아마라식에 해당하기 때문에 따로 분리하여 심체로 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식학을 이념으로 한 세 종파들은 각기 심체설이 다르다. 그러기 때문에 유식학에 어두운 학도들은 심체설에 대한 혼돈을 야기하기 쉽다. 이와 같은 종파들의 사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발전한 가운데서도 제일 뒤에 전래한 법상종의 유식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불교사에 영향을 끼쳤다.

법상종의 교학은 현장법사(600~664)가 인도로부터 귀국할 때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과 [유식삼십론석(唯識三十論釋)]을 들여옴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 가운데서도 [유식삼십론석]을 중국어로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책으로 번역함으로써 법상종의 유식학이 신속하게 성장하였다. 그 후 법상종이라는 한 종파가 형성되었으며 그 초조(初祖)는 현장법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상종에서는 현장법사의 제자인 규기법사(窺基法師)를 제 일 종조(宗祖)로 모시게 되었다. 그것은 규기법사(632~682)가 실제로 법상종을 창립하였고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예로 들어 법상종의 종지가 불타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다는 교판(敎判)의 사상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 등을 저술하여 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규기법사는 장안(長安)의 자은사(慈恩寺)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자은대사라고 부르며 종명도 종조의 호를 따서 자은종(慈恩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상종의 제 이 종조는 혜소대사(慧沼大師:650~714)이며 혜소대사는 규기법사의 제자로서 성유식론요의등(成唯識論了義燈)을 저술하여 교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법상종의 제 삼 종조는 지주대사(智周大師:668~723)이다. 지주대사는 혜소대사의 뒤를 이어 성유식론연비(成唯識論演秘) 등을 저술하여 유식사상을 널리 보급하였다.

3. 한국의 유식학 전래

한국에 유식학이 전래된 것은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중국에 가서 섭론종(攝論宗)의 교학을 공부하고 온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자장율사(慈裝律師)도 [섭론(攝論)]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원측법사(圓測法師:613~696)가 중국에 유학하여 지론종과 섭론종과 법상종의 유식사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크게 발전시켰다.

원측법사는 15세에 당시에 유명한 학자로 알려진 법상대사(法常大師)와 승변대사(僧辯大師)에게 섭대승론을 공부하는 등 종파를 초월하여 대승교리와 소승교리를 함께 연구하였다. 그는 어학도 육개국(六個國)의 국어에 달통할 만큼 뛰어난 재질이 있었고 학문이 훌륭할 뿐 아니라 수행도 잘하여 당시 중국의 실력자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존경을 받았다.

원측법사는 유명한 사찰인 서명사(西明寺)에 주석하며 제자들을 교육하였기 때문에 호를 서명(西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측법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 유식학파가 형성하게 되었는 바 이들을 서명학파(西明學派)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의 유학승들이 많이 모여 원측법사의 지도를 받고 또 대를 이어 학파를 형성하였다고 해서 신라의 유식종(唯識宗)이라고도 부른다.

원측법사는 현장법사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강의할 때 그 강의를 듣고 규기법사(竅基法師)보다 소(疏)를 먼저 써서 발표하였으며 모든 면에서 규기법사보다 뛰어났다. 그리고 규기법사 등 중국계통의 법상종은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유식학만을 최상의 진리라고 고집한 것과는 달리 원측법사는 안혜논사(安慧論師)의 유식학을 비롯하여 모든 학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였다.

원측법사는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등 많은 저술을 하여 한국과 중국의 유식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현재 남아있는 둔윤법사(遁倫法師)의 [유가론기(瑜伽論記)]와 태현법사(太現法師)의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 등에도 원측의 유식학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이는 법사의 유식학이 신라불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원측법사의 유식학은 도증법사(道證法師)에게 학맥이 이어졌으며 도증법사는 중국에서도 원측법사의 학설을 옹호하였고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 등을 저술하여 신라계의 유식학을 널리 보급하였다. 그밖에 서명사(西明寺)의 자선법사(慈善法師)와 대천복사(大薦福寺)의 승장법사(勝莊法師)도 원측법사의 제자였다. 그리고 도증법사의 학맥을 이은 학자는 태현법사(太現法師)라고 한다. 이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태현법사가 성유식론학기에서 도증법사의 학설을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서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유식학은 원효대사(元曉大師)도 많이 연구한 학자였다.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의상대사(義湘大師)는 현장법사의 학문을 흠모하여 당나라에 유학을 가고자 하였다. 이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있는 말이며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서 현장법사가 전한 유식사상이 신라에 많이 도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효대사는 각종 저술에서 [유가사지론]과 [성유식론] 그리고 [섭대승론] 같은 유식사상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여러 교리를 해설할 때 유식사상에 의거하여 해설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의상대사도 화엄학자(華嚴學者)였지만 저술할 때 유식사상을 인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불교는 유식학을 바탕으로 한 저술이 많았다. 신방(神昉)대사와 승장(勝莊)대사와 순경(順璟)법사 등 많은 유식학자를 배출하였으며 당시의 학자들 가운데 유식학에 관한 저술을 한 권 이상 한 사람이 많았다. 이러한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전해져서 불교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한편 신라의 유식학은 일본(日本)으로 전해져서 일본유식학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 유식학입문(불광출판부)/오형근박사

唯識學入門

Ⅱ. 심식설(心識說) 개요(槪要)

불교는 모든 중생을 위한 종교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중심의 종교이며, 인간을 구제하기 위한 종교이다. 그러므로 교리의 내용도 인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인간의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진여성(眞如性) 등 깊은 성품까지도 설명하여 인간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 원시불교에서부터 비롯하며, 소승불교시대는 더욱 논리화되었다. 그러나 불타가 말씀해 놓으신 교리를 보다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소승교리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여 또 다른 인간의 심성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것이 A.D 4세기경에 나타난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A.D 4세기경 무착보살(無着菩薩)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이 학문은 인도는 물론 중국을 거쳐 한국에도 도입되었으며 특히 신라시대에 많이 연구되었다. 유식학은 인간의 마음이 주체가 되어 삶의 현상을 창조한다는 대승적인 학문이며 동시에 인간의 심성을 가장 세분화하여 설명해 주는 학문이다. 그 사상의 핵심을 보면,

* 번뇌로운 마음을 중심으로 한 선악에 윤회하는 중생을 설명하는 학설(相).

* 청정무구한 불성과 진여심을 설명하는 학설(性).

* 선악의 범부심을 정화하는 보살도적 수행을 설명하는 학설(因位)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세 가지 학설을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의 마음을 안식(眼識) 등 8종(八種)의 마음으로 분류하여 선과 악의 정신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8종의 마음 가운데,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선악의 행동이 나타나며 그 행동이 원인이 되어 선악의 현상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그 마음의 종류와 명칭을 보면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라야식(阿賴耶識) 등 8식(八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마음은 항상 번뇌를 가진 범부심을 말한다. 선행과 악행을 야기하며 동시에 선인(善因)을 조성하여 선과(善果)를 받고 악인(惡因)을 조성하여 악과(惡果)를 받으면서 인고에 얽매여 윤회하는 마음을 설명하는 학설인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사상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선과 악을 야기하는 범부심이 있는 가운데 그 마음의 실성(實性)은 지혜로 우며 선과 악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실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진여성과 불성과도 통하며 이를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고도 한다. 아마라식은 무구식(無垢識)이라고 번역하며 인간의 청정한 마음을 의미한다.

이 청정한 마음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구족되어 있는 마음이며 모든 진리를 한눈으로 다 보고 깨달을 수 있는 대지혜(大智慧)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래 착한 본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보존하고 있으며 모든 진리와 통할 수 있으며 열반과 해탈을 실현할 수 있는 본성을 항상 보존하고 있다.

셋째로 위에서 말한 번뇌로운 8식을 정화하여 지혜와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고통이 없고 항상 안락한 대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정화는 물론 중생과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도를 수행하여 많은 공덕을 쌓아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수행은 번뇌로운 심성을 정화하여 본래의 불심(佛心)을 회복하고자 하는 대승적인 윤리와 도덕을 실천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유식학을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셋째의 수행설을 제외하고 첫째의 8식설과 둘째의 식(識)의 실성인 진여심 등은 모든 인간의 성품을 설명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셋째의 수행설은 망심을 정화하여 진여심을 회복하는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8식에 대한 성품을 분류하면 선성(善性)과 악성(惡性), 그리고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無記性)으로 분류된다.

이는 선악의 상대적인 심성이며 항상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 아집에 사로잡힐 수 있는 번뇌의 심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심성은 영원하고 불변한 번뇌심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일시적인 번뇌심으로 본다. 이러한 범부심이 정화되면 이들 마음의 본바탕이며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의 지혜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인간은 선과 악이 대립되는 마음의 소유자로서 온갖 번뇌를 야기하면서 본래 소유한 참다운 마음을 덮어버린 상태에 놓여있다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 논술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요지를 몇 가지로 나누어 말 할 수가 있는데, 이들 심성을 유식학에 의하여 이른바 심리학적으로 해설하려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좀 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위에서 거론한 안식 등 8식을 전체로 설명하고, 또 이들 식의 실성인 지혜와 진여심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리고 유식학에서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준유식사상이라 할 수 있는 여래장식(如來藏識)과 불성(佛性) 등도 함께 설명해 볼까 한다.

다시 말하면 여래장식은 아라야식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심성설로서 즉 우리 인간의 마음에 부처님과 같은 여래의 심성을 부장(覆藏)하고 있다는 사상을 펴나가는 심성의 명사이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에 의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불안(佛眼)으로 일체의 중생을 관찰해 보니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우치한 마음 가운데 에 여래의 혜와 여래의 안(眼)과 여래의 몸이 있으며 이 여래는 부동자세로 결가부좌하고 있더라. 선남자야, 일체의 중생은 어느 세계(諸趣)에 있더라도 번뇌로운 몸 가운데 여래장이 항상 번뇌에 오염되지 않고 진리로운 덕상(德相)을 구비하고 있는 것이 나와 같아서 하나도 다름이 없더라."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성은 여래장과 같은 것으로서 부처님과 다름없는 지혜로움과 지혜의 눈과 몸을 구족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도 거의 같은 말이 있다.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옛적부터 무량한 번뇌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가난한 집에 진금(眞金)이 있어도 가족들이 모르고 사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심성에 여래장과 불성이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말씀을 확실히 믿고 마음을 덮어 지혜로운 활동을 방해하는 번뇌심을 수행을 통하여 정화해 나가면, 누구나 자신에게 이미 보존해 왔던 여래장심과 불성을 점차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하여 자신의 불성을 완전히 회복하면 부처님과 같이 지혜로움과 무한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성 및 진여에서 나타나는 지혜를 유식학에서는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 4지(四智)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지혜는 곧 불성에서 나타나는 지혜의 광명으로서 항상 우리 마음속에 빛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사는 것이 중생이며 번뇌를 야기하여 스스로의 불성을 장애하며 덮어버리고 무지하게 사는 것이 중생의 입장이라고 하였다. 이는 마치 자기 속의 보배를 망각하고 남에게 구걸하여 항상 열등의식을 갖고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론(佛性論)에서는 불타가 중생들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은 중생들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5종의 과실을 없애준다는 것은

첫째, 중생들에게 열등의식을 없애주기 위하여

둘째, 무지한 사람의 교만심을 없애주기 위하여

셋째, 허망한 집착을 없애주기 위하여

넷째, 진실된 진리에 비방함을 없애주기 위하여

다섯째, 거짓된 자기에 대한 아집을 없애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중생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기 위하여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一切衆生皆有佛性)는 교설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경전이 중생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지만, 이들 다섯 가지 법문 중 중생들의 열등의식인 하열심(下劣心)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매우 큰 자각을 불러 일으켜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과 지혜로움을 망각하고 스스로 열등의식을 갖고 남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감히 스스로를 멸시하고 또 나약하게 생각하는 사상을 떨쳐버리고 항상 전지(全知) 전능(全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의 불성을 계발하는데 정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성에는 8식과, 8식의 본성이며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 그리고 여래장성과 불성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떠나서 설명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표현이다.

그밖에도 공성(空性)과 불공성(不空性), 그리고 유아성(有我性)과 무아성(無我性) 내지 이숙성(異熟性)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표현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심성(心性)에 대한 표현들은 인간의 일심(一心)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일심의 오묘함은 한이 없어 과거의 성현들도 마음을 언어로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필자도 얕은 지식으로 일심의 도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세속지(世俗智)로 전공한 유식학이라는 학문에 의하여 위에서 소개한 8식과 불성, 그리고 주변의 인간성과 관련된 학설을 참고하여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소승불교의 심식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름이 많다. 그리고 그 이름 하나 하나의 뜻이 조금씩 다르다. 그것은 불교에서 그만큼 인간의 마음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종래의 복잡한 심성설을 종합하여 식상(識相)과 식성(識性)으로 크게 구별하여 설명하게 된 것이다.

이를 설명하고 있는 미륵(彌勒)과 무착(無着) 초창기의 유식학은 인간의 심층심리를 탐구하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므로 매우 복잡하였다. 그러나 세친논사(世親論師) 이후의 후기 유식학은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과 [백법론(大乘百法明門論)] 등을 통하여 잘 정리되었고 또 식상과 식성 등으로 구별하며 이론을 정리하고 있다. 이제 그 구별에 따라 전자인 식상에 대해 그 유래 등 하나하나 살펴볼까 한다.

1) 원시불교의 심식설

위에서 유식학에서는 우리 마음을 식상(識相). 식성(識性)으로 구별하여 설명한다고 하였다. 그 식상은 범부심을 뜻하고 식성은 불성(佛性) 또는 진여성(眞如性)을 의미하며 그리고 불심(佛心) 또는 보살심(菩薩心)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보살심은 정화의 길에 있는 심성이기 때문에 완전한 식성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범부심보다는 마음의 정화가 거의 이루어졌다는 입장에서 보살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식상은 곧 번뇌를 야기하고 선행과 악행을 일삼아 그 행동의 업력으로 안락과 고통을 받게 되는 유루심(有漏心)을 뜻하고 식성은 청정무구하고 생과 사를 떠난 해탈의 마음이며 열반의 진리를 실현하는 무루심(無漏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식학의 특징은 범부들의 마음(識相)을 낱낱이 해설하여 번뇌와 악을 야기하여 윤회하게 되는 동기 등 원인과 결과를 상세하게 설명하여 계몽해 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은 대승불교 가운데 범부의 심성과 현실의 입장을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 유식학적 심성설이 어떻게 성립하게 되는가 그 유래를 간단히 설명하고 내용 설명에 들어갈까 한다.

불교의 심식설(心識說)은 원시불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원시교리인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 이른바 삼과설(三科說)에서 이미 원시적인 심식설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내용이 비록 원시적인 심식설이기는 하지만 범부의 심식을 매우 깊이 설명하고 있다.

즉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인간의 마음을 육식(六識)으로 분류하여 모든 정신생활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심식으로부터 나타나는 행위는 곧 업인(業因)이 되고 이 업인은 다음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등, 인과의 도리도 잘 설명하고 있다.

2) 소승불교의 심식설

원시불교의 심식설은 소승불교에 이어져 더욱 발전을 보게 된다. 소승불교는 일명,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라고도 하는데 이는 매우 탐구적인 명칭이다. 즉 아비(阿毘)는 공경하고 결택(決擇)한다는 뜻이며, 달마(達磨)는 진리 또는 물질과 정신계를 모두 포함한 법(法)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명칭이 말해 주듯이 아비달마 불교 시대는 정신계와 물질계를 깊이있게 탐구하고 정신계와 물질계는 모두 업력의 힘에 의하여 운영되고 유지된다는 이론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논리를 업감연기(業感緣起)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업력에 의하여 결과로 초감(招感)되고, 감응되어 연기(緣起)된다는 것이다. 연기라는 말은 인연이 모아 결과가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며, 이를 의역하면 창조라는 말로도 쓰인다. 무엇이든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승불교는 업력에 의하여 인간의 현실은 물론 삼계 육도(삼계 六道)인 우주도 창조되고, 또 정신의 현상도 선과 악 등 유루성(有漏性) 등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는 필연적으로 그 업력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마음을 중심하여 밝혀내는 데 힘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하여 원시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육식설(六識說)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의 작용론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를 심소(心所)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육식은 행동을 나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마치 국왕이 무엇이든 마음대로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심왕(心王)이라 하고, 이 심왕에 소속되어 착한 행동(善行)과 나쁜 행동(惡行)을 야기하는 정신작용을 심소(心所)라고 이름하였다.

이들 심왕과 심소의 행위에 입각하여 선업과 악업이 결정된다. 이러한 심소론(心所論)은 [품유족론(品類足論)]과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구사론(俱舍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소승 가운데서도 가장 잘 정리된 구사론에 의하면 선법(大善地法)과 악법(大煩惱地法) 등을 야기하는 46종의 심소법(心所法)이 있다.

이와 같이 심왕(心王)과 심왕에 의하여 나타나는 심소(心所)가 곧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 행동은 곧 업인으로 조성되어 마음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곧 결과로 현실에 나타나기도 하고 미래세에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업력의 결과를 순현보(順現報), 순차보(順次報), 순후보(順後報), 순수정보(順不定報)라고 분류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러한 학설을 기초로 하여 선인(善因)은 선과(善果), 악인(惡因)은 악과(惡果) 등의 인과법뿐만 아니라 수시로 변천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이숙(異熟)의 인과법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업력은 마음속 어느 곳에 보존되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종래의 육식(六識) 가운데 제6의식(意識)이 있는 눈, 귀, 코, 혀, 몸 등으로 인식하는 마음을 통제하고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며, 동시에 평소에 몸과 마음으로 조성되는 업력까지도 보존하는 주체라고 믿어왔었는데 그러나 그 의식이 불완전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의식이 평상시에 잘 활동할 때에는 별로 문제가 없지만 그러나 만약 어떤 불의의 사고나 극한 상황하에서 의식이 분명치 않을 때는, 의식의 체성이 영원한 생명체로서, 또는 미래세까지 이어지는 윤회의 주체가 과연 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업력의 보존체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심리분석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민하던 소승논사(小乘論師)들은 제6의식(意識) 이외에 또 다른 심성(心性)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 심성은 금생과 내생에 관계없이 중생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또 업력도 보존하여 주며 동시에 인연에 따라 모든 결과까지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마음의 주체를 소승불교시대의 여러 부파(部派)들은 다각도로 탐구하여 다음과 같은 심체들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대중부(大衆部)는 근본식(根本識)이라 하고, 상좌부(上座部)는 유분식(有分識)이라 하며, 독자부(犢子部)는 보특가라(補特伽羅), 화지부(化地部)는 궁생사온(窮生死蘊), 경량부(經量部)는 세의식(細意識) 또는 일미온(一味蘊)이라고 명칭을 정하여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 인간의 심성을 부단히 연구하고 탐구하여 합리적인 인과사상과 윤회사상 등의 교리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심성은 한없이 넓고 깊어서 이 시대에도 그 논리가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 의무를 대승불교에 넘기게 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의 심식설은 그 시대의 사상 가운데서 핵심이 되었지만 아직도 불교의 사상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데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그리하여 A.D 4세기경 무착보살이 출세하여 대승적인 심식설로 개혁하기에 이른다. 무착보살은 [해심밀경]의 심의식(心意識)설 등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소승불교에서 주장해 온 육식설에다 제7말나식(末那識)과 제8아라야식을 더 보태어 8식설로 논리화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소승불교의 육식설과 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심소(心所)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를 설명하는 이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승불교에서는 전념(前念)이 후념(後念)에 대한 의지처가 된다고 해서 전념(前念)을 의근(意根)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의식불명 등 심식의 단절이 있으면 고정불변한 의근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근본 번뇌의 발생과정과 의근을 진리롭게 설명하려면 제7말나식이라는 심성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말나식을 우리 인간의 죄악의식(罪惡意識)의 발생처로 하고, 또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무착보살은 제8아라야식을 정하여 이 심식이 있음으로 인하여 모든 심식을 유지시켜 주고 생명과 수명도 유지시키는 가능성이 있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업력이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어 현재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며, 또 미래의 윤회도 가능케 하는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을 8종으로 분류하여 모든 정신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 심의식(心意識)사상과 팔식(八識)

위에서 심식설의 유래를 살펴보았다. 원시불교의 심식설과 소승불교의 소승불교적인 심식설에서 진일보한 것이 대승불교의 유식학에 속하는 팔식설(八識說)이다. 그런데 이들 팔식설을 설명하기 전에 또 하나의 중요한 학설을 소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심성을, 이른바 심의식(心意識)이라고 표현하는 학설이다. 이 심의식 사상은 글자 그대로 인간의 심성을 잘 표현해 준 심성설이다. 이 사상도 역시 원시불교에서 비롯되며 소승불교에 이어서 유식학 조직에 크게 기여한 학설이다.

먼저 원시불교에 나타난 심의식 사상의 개요만을 소개하고 다음에 소승불교의 아비달마와 대승불교의 유식학에 나타난 심의식 사상을 비교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원시불교에서는 심(心), 또는 의(意), 식(識) 등을 산발적으로 거론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잡아함경] 등에서는 심의식을 동시에 거론하여 그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心意識)은 잠시도 정지되어 있지 않고 밤낮으로 전변(轉變)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 심의식은 잔나비가 임야에서 나뭇가지를 잡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면서 잠시도 쉬지 않는 것과 같이 하나의 마음도 항상 움직이면서 활동하는 상태에 있다고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심의식은 번뇌심을 의미하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면 곧 없어지는 심성(我已彼欲心意識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원시불교에서는 심의식에 대하여 안정된 심성이 아니라 항상 번뇌로운 작용을 야기하고 있는 심성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번뇌심은 욕심 등 번뇌가 없어지면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는 심상(心相)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승불교시대에 와서 더욱 확대하여 설명되고 있다.

1) 소승의 심체일설(心體一說)

소승불교는 마음의 체는 하나라고 하였다. 즉 소승불교의 논서에 속하는 [품류족론(品類足論)]과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등에 의하면 "심(心)은 곧 의(意)이며, 의(意)는 또 식(識)으로서 그 체성(體性)은 서로 같으며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소승불교시대에는 심의식(心意識)이라는 명칭이 서로 표현만 다를 뿐 그 체성은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의식사상이 일반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체사상을 통해 본다면 인간의 심성은 그 체성이 각기 다르며 활동도 다르게 한다는 학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인간의 심체(心體)는 유일한 것이며 그 활동하는 작용만 다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표적인 학설은 소승불교를 최종적으로 종합하여 정리하였다는 세친론사(A.D 4세기)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에 잘 나타나 있다.

아비달마구사론에 의하면 “심의식 세 가지 이름은 그 표현의 뜻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그 체성은 유일하다(心意識三名 所詮議難異 而體是一)”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여 소승불교는 우리 인간의 심체(心體)를 하나로 본 것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친론사는 심의식의 내용과 작용을 매우 심오하게 설명하고 인간의 심성이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심(心)은 집기(集起)라는 뜻이 있으며, 집기라는 말은 여러 가지 정신활동(心所作爲)과 몸과 입과 뜻의 행동 등으로 조성되는 업력을 심(citta)에 집합하여 보존했다가 정신과 육체 등의 행동으로 출현케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 등 여러 행동을 업력이라고 하는데, 그 업력은 밖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다음의 결과인 행동과 미래세의 과보 등을 생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 의(意)는 사량(思量)이라는 뜻으로 범어(梵語)로는 manas라고 하며 이를 음사하여 말나(末那)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나에는 사량의 뜻이 있으며 사량의 내용은 마음속의 인식대상(所緣境)을 집착하면서 인식(量度)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량심(思量心)은 자신의 진여성을 잘못 이해하여 집착하면서 번뇌를 야기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思)은 말과 행동을 발동시킨다는 뜻도 있다.

* 식(識)은 요별(了別)의 뜻으로 해석한다. 즉 범어인 Vijinona(毘若南)을 번역한 말로서 모든 대상(境界)를 인식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주관과 객관계를 대상으로 하여 좋다 나쁘다 하는 인식을 하는 것이 요별의 뜻이다.

이상과 같이 세친논사는 심의식을 매우 합리적으로 해석하여 정신활동의 내용을 종래의 이론보다 훨씬 깊고 넓게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심의식 사상은 대승불교에 이어지면서 유식학에서는 소승적인 사상을 대폭 개혁하고 또 그 사상을 대승적으로 크게 증보하였다.

2) 대승의 심체별설(心體別說)

위에서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의 심체일설을 살펴보았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심체일설을 혁신하여 심체별설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심의식을 각각 분리시켜 오늘날의 팔식사상으로 조직화하였던 것이다. 유식학에서 심의식 사상을 가장 중요시하고 있는 경전과 논전을 예를 들면 [해심밀경]의 심의식상품(心意識相品)을 비롯하여 [유가사지론], [현양성교론], [아비달마론] 등 여러 경론을 들 수 있다.

이들 경론에 의하면 심(心)과 의(意)와 식(識) 등은 그 활동과 역할하는 작용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체성도 각기 다르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소승불교에서 대체로 심의식의 체성을 동일하다고 본 것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에서는 다르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에는 심체(心體)의 동일성과 심체의 구별성을 말하는 심체일설(心體一說)과 심체별설(心體別說)이 전통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심체별설을 설명하는 심의식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심(心)은 곧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말하며 아라야식은 정신과 유체 등으로 조성한 업력과 일체의 종자(種子)를 능히 집취(集聚)하여 보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은 일체시(一切時)에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인간이 사는 객관세계도 반연하여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 의(意)는 말나식에 해당하며 항상 사량의 작용을 야기한다. 사량이린 말은 무아(無我)의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의 전도심을 나타내는 망심(忘心)의 작용을 항상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의(意)는 염오(染汚)의 번뇌를 야기한다고 해서 염오의(染汚意)라고 별칭한다. 이 말나식은 심층심리에 속하는 심체로서 내면세계의 진실성을 망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며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사종의 번뇌를 항상 야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진리에서 이탈하고 죄와 악을 범하게 된다고 하였다.

* 식(識)은 육식(六識)을 말하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식들이 활동하는 내용은 항상 요별(了別)하는 작용을 나타낸다. 요별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여 안다는 뜻으로 중생들이 모든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사물의 성(性)을 보지 못하고 겉모양(相)만을 보면서 이것저것 구별하는 차별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식(識)이라고 하면 항상 대상(境界)을 요하며 그 대상을 인식하는 상대적인 작용이 있음을 뜻한다. 이는 경계가 없는 이치(無境界)와 모습이 없는 진리(無相法)을 깨닫지 못한 마음의 인식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심의식 사상은 원시불교에서 시작하고 소승불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유식학적인 팔식사상의 발달에 기초가 된다. 즉 심(心)은 아라야식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이라 하며, 식(識)은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식(六識)이라 하는 등 심의식을 각각 팔식(八識)에 배정하여 대승적인 심식사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의 심식사상과 나아가서 불교의 심성사상 발달을 알려면 심의식 사상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한 것은 심의식 사상을 모두 번뇌가 있는 염오의 심성으로 보아왔다는 점이다. 마음에는 번뇌를 동반하는 유루심과 번뇌가 없고 청정무구한 무루심이 있다고 보는 것이 통례인데 위에서 살펴본 심의식은 전자의 유루심에 속한다.

그리하여 심의식 가운데 심은 윤회의 주체이며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아라야식으로 인정하고, 의는 항상 사량심과 번뇌심을 야기하는 말나식으로 인정하며, 식은 우리 인간의 일상 정신생활인 인식과 선악의 행위를 유발하게 하는 육식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심성과 정신생활을 논리화하는 데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Ⅲ. 전오식(前五識)과 제6의식(第六意識)-1

위에서 불교의 심식사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제는 설명을 더 하지 않아도 우리 인간의 심성을 낱낱이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유식학의 심식사상을 소개하기로 한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심식사상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의 심성을 8가지로 분류하여 그 성질과 작용을 논하고 또 선과 악을 논한다.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을 8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마음의 의지처인 육체의 기능도 함께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구성을 면밀히 관찰 해 볼 때 아무리 마음이 인간의 주체가 된다고 하더라도 육체의 도움없는 마음은 그 역할을 못할 뿐 아니라 인간적인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자성과 삶을 설명하면서도 마음과 불가분 관계에 있는 육체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을 갖고 육체적 기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육체 없는 정신이 있을 수 없고, 정신이 없는 육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원만한 삶은 정신과 육체의 조화 속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고 육체와 정신의 인연관계를 동시에 설명하고 있는 것이 유식학의 특징이다.

그리고 또 우리 인간의 삶은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하여 그 인식여하에 따라 고통과 안락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그 인식의 대상을 철저하게 알아야 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에서는 우리 인간이 물질적인 세간(世間)에 의지하여 살고있기 때문에 역시 그 물질계는 우리 인간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해명한다.

그것은 물질계를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물질계와 정신계가 서로 마찰없이 조화를 이루는 화합의 경지에 도달토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처하고 있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적나라하게 파악하고 이해시켜 진정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확립시켜 주자는 데 있다.

이제 인간의 망심(妄心)에 해당하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의식, 말나식, 아라야식 등 팔식을 가지고 차례로 그 성질과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편의상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5식(五識)을 먼저 설명해 나갈까 한다.

1. 전오식(前五識)과 오경(五境)

위의 제목에서 전오식이라고 명제를 붙인 것은 유식학을 설명할 때 위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팔식의 순으로 정하여 설명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 제 6의식 이전의 오식을 함께 설명할 때의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이들 오식을 함께 자주 설명하게 되는 동기는 이들 식의 성질이 거의 같고 또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하는 작용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 오식의 성질과 역할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로 식에 대한 개념부터 뚜렷이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식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는 뜻이 있는데 이는 요즘의 인식이라는 말과 통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식은 마음과 물질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고 모습에 얽매이며 망각하여 집착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식(識)이라고 할 때 항상 상대를 요하는 인식주(認識主)이며 그 상대를 망각함과 더불어 선(善), 악(惡) 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무기(無記) 등 세 가지 성질(三性)로 요별하여 알아내는 기능을 가진다고 정의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을 나쁘게 느끼면 괴로움(苦), 좋게 느끼면 즐거움(樂)이 있게 된다. 그리고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게 느끼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捨) 등으로 받아들이는 주체가 곳 식체(識體)이다.

이상과 같이 심식은 항상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인식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식학에서 범부의 심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 심식은 팔식 하나하나가 인식의 대상이 다르며 작용도 다르며 의지하는 의지처도 다르다. 그러나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들 심식은 진리를 망각하여 번뇌를 야기하고 그 번뇌로 말미암아 본래의 식성(識性)에서 발생하는 지혜로움이 장애를 받기 때문에 절대의 진리인 진여성(眞如性)과 무아(無我)의 본성을 망각하게 된다. 그리고 작동하는 심식은 번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는 하나이고 상대성이 아니지만 무위(無爲)의 진리에 배반하여 상대성을 야기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심식은 일시적으로 온갖 번뇌를 띄면서 상대적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이들 번뇌가 정화되면 식의본성인 진여(眞如)와지혜가 다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 때는 온갖 사물을 상대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절대의 경지에서 관찰하며 동시에 그 사물의 겉모습이 아닌 실상과 본성을 한번에 알 수 있게 되는 경지를 열게 된다. 이를 증득(證得)이라 하고 또 식(識)이라는 말 대신에 지혜(智慧)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상을 종합하여 전식득지(轉識得智), 즉 번뇌로운 심식을 전화하여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의 핵심사상은 망식(妄識)을 정화하여 지혜를 증득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본성은 본래 모든 진리와 통하며 또 그 실상을 관찰할 수 있는 지혜를 보존하고 있었지만 언젠가 망상을 야기하여 진리를 망각하고 절대의 경지에 눈이 어두워 상대적으로 보아 온 습성을 가지고 살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에 설명되는 심식은 곧 범부의 입장인 번뇌심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미리 말해 둔다.

1) 안식(眼識)과 색경(色境)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전오식의 성질을 차례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먼저 오식 가운데 안식(眼識)을 살펴보기로 한다. 안식은 우리 마음 가운데 눈으로 보는 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안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요별 또는 분별의 작용을 가지고 인식의 대상을 요별하게 된다. 그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빛깔(色)이다. 이 빛깔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나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등 네 가지 현색(四顯色)을 말하고, 또 하나는 우리가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볼 때 빛깔(顯色)만을 보는 것이 아니고, 길고(長). 짧고(短). 모나고(方). 둥글고(圓). 높고(高). 낮고(下). 바르고(正). 바르지 못한 것(不正) 등 사쌍 팔종(四雙 八種)의 모양다리를 식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형색(形色)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안식을 통하여 객관계의 사물을 여러 가지로 구별하여 보게 되는데 그 인식의 대상을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한다. 이는 곧 요별의 대상, 즉 인식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인식의 주체인 안식과 안식의 대상인 소연경의 관계를 보면 인식의 주체인 안식이 능히 그 대상을 인식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때의 안식은 능연식(能緣識)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 능동적으로 대상에 대하여 선과 악 등의 성질을 구별하는 입장에 있고, 그 대상은 인식되어지는 입장에 있으며 동시에 항상 식에 의하여 그 가치가 규정되는 수동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는 말을 붙이게 된다.

능연과 소연은 서로 인연을 맺는다는 뜻과 통하며 인연을 맺어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은 능동적으로 사물을 좌우하는 능동자임을 알 수 있고 또 사물 등 물질계는 수동적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능연과 소연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인식의 내용을 확실히 해주는 논리인 것이다.

다음으로 안식은 어디에 의지하여 활동하게 되는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우리는 무조건 마음 또는 식 등으로 말할 뿐 그 식의 의지처(依止處)를 모르고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식관이 흐려지고 막연하여 확신을 갖기가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안식 등 여러 심식의 의지처를 확실히 정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안식의 의지처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안식은 안근(眼根)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것이다. 이 안근은 우리의 육체 위에 있는 일부분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곧 우리의 눈, 즉 육안(肉眼)을 의미한다. 위에서 잠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마음은 육체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는 것이며, 육체의 도움이 없으면 인간으로 있는 한 그 활동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육체의 일부인 안근(眼根)은 안식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그것은 발식취경(發識取境)의 도움을 준다. 즉 안식을 발생시켜 인식의 대상인 소연경(所緣境)을 인식케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취(取)라는 말은 범부들이 모든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고 취착(取着)하는 번뇌를 야기한다는 뜻에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즉시 집착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안식을 발생시켜 현색(顯色)과 형색(形色) 등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케 하는 안근은 부진근(扶塵根)과 승의근(勝義根)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이들 두 가지 근(根)은 우리 육체의 기능과 내용을 대변하고 있으며 또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먼저 부진근은 순수한 물질적인 육체를 말한다. 물질은 견고한 성질을 의미하는 지성(地性)과 물 기운을 말하는 수성(水性), 그리고 더운 기운과 불기운을 뜻하는 화성(火性)과 물질의 생동력을 의미하는 풍성(風性) 등의 사대성(四大性)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물질관이다. 그리하여 이들 사대성은 인연이 화합함에 따라 극미(極微)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물질을 성립시키는 본질이 되는데 우리 육체도 물질인 이상 사대성의 인연으로 조립된 것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승의근(勝義根)은 육체내에 극미와 같은 미세한 물, 순수한 육체인 부진근 속에서 본질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육체로서의 역할을 다하도록 하고 안식(眼識) 등 심식으로 하여금 발식취경케 하는 승묘(勝妙)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부진근은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의 부분을 의미하며 승의근은 육안의 대상이 아니며 불보살의 지혜로서만 알 수 있는 극미의 경지이다. 그러므로 승의근은 육체내의 보이지 않는 경지를 이루면서 전체의 육체를 생동케 하는 중요한 부분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안근은 육체의 일부분이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장엄(莊嚴)해 주고 동시에 승의근을 토대로 안식의 직접적인 의지처가 되기도 하며 또한 식을 활동케 한다. 그러므로 근(根)에는 의지처(依止處), 도양(導養), 장엄 등의 뜻이 있다. 이러한 기능을 가진 안근은 안식과 불가분리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식의 활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왜냐하면 안식은 이 안근에 의지하여야만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는 등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이식(耳識)과 성경(聲境)

안식은 위에서 대략 설명한 바와 같고 다음은 이식(耳識) 등 나머지 식의 성질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이식(耳識)은 육체의 기관인 이근(耳根)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뜻에 의하여 이식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이다. 그 활동하는 범위와 내용은 앞에 설명한 안식과 거의 같다. 다만 인식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식은 글자 그대로 귀로 들어서 아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이식의 대상은 소리일 뿐이다. 소리를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성경(聲境)이라고 한다. 성경은 이식의 경계 즉 인식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대상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으로 구별된다.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소리에 대하여 좋다(樂), 나쁘다(苦),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師)는 등 그 내용을 구별하는 것은 이식이므로 이식은 능히 반연하는 능연(能緣)의 입장에 있고, 반대로 소리들은 인식에 의하여 반연되어지는 대상이며 동시에 수동적인 입장에 있으므로 소연경(所緣境)이라고 한다. 그밖에 이식의 성질이 선성(善性), 악성(惡性),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無記性) 등 삼성(三性)에 통하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안식과 동일하다.

3) 비식(鼻識)과 향경(香境)

다음 비식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코를 통하여 냄새를 맡아서 내용을 아는 마음을 가리킨다. 비식은 육체의 구조인 코와 불가분리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의하여 육체의 구조적인 코를 비근(鼻根)이라 하고 동시에 코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마음이라는 뜻에서 비식(鼻識)이라고 이름한다. 비식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냄새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활동을 하는데 그 대상의 이름을 향경(香境)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향(香)이라는 말은 향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냄새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냄새가 식별되는 내용은 여러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나 이를 종합하여 대체로 악향(惡香) 또는 호향(好香) 등으로 구별한다. 이들 악향과 호향에는 그 냄새의 범위가 육체의 구조인 비근(鼻根)과 균등하게 나타난 냄새가 있으면 이를 등향(等香)이라 한다. 그리고 그 냄새가 좋은 냄새(好香)이거나 나쁜 냄새(惡香)이거나 비근보다 더욱 많은 양을 대할 때가 있을 수 있는데 이를 부등향(不等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식의 대상인 냄새의 양이 비식의 의지처인 비근보다 작을 때도 있고 많을 때도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비근과 동등한 양이 아니라는 뜻에서 부등향이라고 하는 것이다.

4) 설식(설식)과 미경(味境)

다음에는 설식(舌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설식은 혀로 음식 등 입으로 들어오는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말한다. 동시에 식의 이름도 설근(舌根)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뜻에서 정해진 이름이다. 그리고 설식은 맛을 알고 뜨겁고 찬 것을 구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도 미경(味境)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달고. 짜고. 맵고. 시고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맛을 미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설식은 미경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활동을 하며 그 대상이 마음에 맞고 안 맞고에 따라 우리 인간의 고(苦)와 낙(樂)을 가져다주는 마음인 것이다.

5) 신식(身識)과 촉경(觸境)

다음으로 신식(身識)은 우리 몸 전체에 촉감을 느낄 수 있고 또 몸에 닿는 것은 다 알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눈. 귀. 코. 입 등 네 가지 인식기관을 제외한 그밖의 모든 몸을 의지하여 활동하는 마음인데 그 의지처를 신근(身根)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신식은 이 신근에 의지하여 활동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시에 신근은 항상 신식의 의지처이면서 신식을 도와서 원만히 활동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신식은 몸을 통하여 몸이 닿는 곳만을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인식의 대상을 촉경(觸境)이라고 이름한다. 촉경의 내용을 보면 첫째로 지성(地性), 수성(水性), 화성(火性), 풍성(風性) 등 네 가지 성질로 이루어진 모든 물질계를 포함하여 촉감의 대상을 총망라한 이름이다. 다시 말하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물질계는 물론 육안으로 잘 볼 수 없는 공기도 몸에 와 닿는 것이므로 촉경에 속한다.

이와 같이 육안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물체가 육체에 닿는 것은 모두 촉감의 대상이 되므로 촉경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무덥거나 추운 것,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 무겁거나 가벼운 것, 뜨겁거나 찬 것,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나는 것 등은 모두 촉경에 해당한다.

이상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들 오식(五識)은 육체상의 조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활동하며 그 의지처(根)이 다르고 인식의 대상(境)이 다를 뿐 여타의 성질은 거의 같다. 이 오식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오관(五官)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들로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능히 체험할 수 있는 정신영역이다. 그러나 이들 오식은 현량(現量)과 같은 식별의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 대상의 오묘한 내용까지를 잘 관찰하여 선악의 구별과 가치를 정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 여기에는 반드시 제6의식이 가담하여야 만이 대상의 내용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오식(五識)과 의식(意識)과의 관계와 의식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2. 제6의식(第六意識)과 의근(意根)

제6의식이라는 말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설명할 때 앞에서 살펴본 안식 등 전오식 다음에 설명하게 되고 또 전오식 다음의 제6위에서 설명하는 식이라는 뜻이다. 이 의식은 전오식에 의하여 식별되는 대상을 다시 확인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 마음을 의식이라고 하는데 이 심식은 본래 전오식과 함께 단순히 식(識)이라고만 호칭되었던 것을 이 식의 의지처인 근(根)의 이름을 따서 식명을 붙인다는 원칙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

1) 의식(意識)과 의근(意根)

본래 의식(意識)이라는 명칭은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도 이미 써 왔던 이름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대승불교와 크게 다르다. 먼저 소승불교의 경우를 보면 대승불교와 같이 의식이 의지하는 소의근(所依根)의 이름을 따서 심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의식이 의지한다는 의근(意根)의 사상에 있어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와의 의견이 크게 다르다.

그 내용을 보면 소승불교에서는, 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은 안근 등과 같이 육체의 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정신적인 것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의근을 일명 심근(心根)이라고도 부른다. 이 심근에 해당하는 의근은 대승불교에서와 같이 일정한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 중 앞의 작용이라고 단정하였다. 여기서 마음의 전 작용이란 눈(眼識), 귀(耳識), 코(鼻識), 혀(舌識), 몸(身識), 뜻(意識) 등 여섯 가지 마음(六識)이 앞 생각(前念)과 뒷 생각(後念)을 나타내는데 이 중 앞 생각을 뜻한다.

앞 생각은 앞에서 없어지면서 뒷 생각을 발생시키는(前滅後生)바탕이 되며 뒷 생각은 앞 생각에 의지하여 발생하게 되므로 뒷 생각의 의지처인 앞 생각을 의근(意根)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에서는 이들 육식에는 모두 전념과 후념을 되풀이하는 마음으로 모두 의근의 뜻이 있으나 그러나 안식 등 전오식은 안근 등 육체상의 의지처(所依處)가 있으므로 심근(心根)에 해당하는 의근의 뜻이 약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육체상의 의지처가 없는 의식에만 의근의 뜻을 부여하게 되었다. 즉 의식이 내면세계의 주체가 되면서 의식의 전념을 의근으로 하여 후념이 나타나는 등 의식의 활동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을 의식 자체에서 발생하는 앞 생각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순수한 마음의 앞 생각을 의근이라고 한다면 평소 건전한 정신상태하에서는 이 이론이 타당하다.

그러나 만약 의식불명이 되거나 어떤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상태가 고르지 않는 등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된다면 그 때는 그 의근의 의미를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 속하는 유식학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없애고 영원성이 있는 의근을 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식의 종류를 소승불교의 육식(六識)사상에다 말나식과 아라야식을 더하여 팔식(八識)사상을 건립하였다. 이에 따라 단절됨이 없는 의근사상도 정립하게 되었으며 그 의근(意根)은 곧 제7말나식이라고 하였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유식학에서는 심의식(心意識)사상을 논할 때 심(心)을 아라야식이라 하였고, 의(意)를 말나식이라 하였으며, 식(識)을 안식 등 6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6식 가운데 여섯 번 째의 식을 의식이라고 별명을 붙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식의 의지처인 소의근에 따라 심식의 이름을 붙이는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즉 제6식은 제7말나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종래의 소승불교에서 앞 생각을 의근으로 생각했던 것을 혁신하여 말나식을 의근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말나(manas)라는 말을 의역하면 의(意)라는 뜻인데 이 의(意)라는 이름을 제6식에 양보하여 제6의식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제7식은 제6식과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원어 그대로 말나(末那, manas)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중국의 현장법사가 역경할 때 정한 것이며 현장법사 이전에는 제6식과 제7식을 의의식(意意識)이라고 번역하여 후세 학인들에게 혼돈을 야기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의근사상은 소승과 대승의 견해가 크게 다르며 유식학에서 크게 발전시켜 과거, 현재, 미래 할 것이 없이 삼세(三世)를 통하여 단절되지 않은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다시 말하면 설사 의식불명이 된다 하더라도 그 의근은 단절되지 않은 것으로서 그 이유는 의식의 의지처인 말나식이 단절되는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의식불명의 상태에서 다시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위에서 의근(意根)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즉 의근은 소승불교적인 앞 생각(前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제7말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의근은 의식을 비롯한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의 의지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의근은 직접적으로는 제6의식의 의지처이기는 하지만 이는 서로 주종(主從)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은 그 체성(體性)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상호간에 의지하고 공존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의근에 의지하는 셈이 된다.

이와 같이 의근은 내면의 정신세계를 잘 유지시켜 주는 의지처가 된다. 그런데 뒤에 이야기할 문제이지만 말나식과 아라야식은 식 자체인 체성의 내용에 의하여 이름이 정해진 것이고 제6의식만은 의지처인 의근을 이름을 따서 식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2) 의식(意識)의 광연(廣緣)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근에 의지하는 의식은 안식과 이식 등 전오식과는 달리 내면의 의식활동을 전담하는 등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그 활동의 범위에 따라 의식을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광연의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이 의식은 법경(法境)을 인식한다. 법경이라고 하는 법(法)은 물질계(色法)와 정신계(心法)를 모두 포함한 진리를 말하며 경(境)은 곧 인식의 대상을 뜻한다.

동시에 이들 물질계와 정신계는 그 내용별로 부정(不淨)한 것(有漏法)과 청정한 것(無漏法)으로 나누어 구별하기도 하는데 이들 유루법과 무루법을 모두 상대하여 인식활동을 펴는 것이 제6의식의 활동영역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모든 대상을 상대적인 경지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도 인식한다. 만약 의식에 여러 가지 번뇌가 있는 심식일 때는 모든 법을 상대하여 선과 악 또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無記) 등으로 분별하지만 그러나 의식이 정화(淨化)되어 청정심으로 있을 때는 모든 법(諸法)을 상대적으로 보지 않고 마음과 물질계가 하나의 경지를 이루는 절대의 경지(唯識無境)를 관조하게 된다. 이때는 번뇌의 장애를 받는 의식이 아니라 의식 속의 번뇌를 정화하여 나타나는 지혜로 관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진상(眞相) 그대로 의식 속에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광범위하게 역할을 하고 또 다양하게 작용을 하는 의식은 어떠한 내용으로 역할을 하는지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3) 오구의식(五俱意識)

의식은 객관세계를 관찰하며 판단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나 객관세계의 사물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앞에 안식 등 오종의 심식(五蘊)에 가담하여 그 대상을 분별한다. 그러므로 이 의식의 별명을 오구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안식이 눈(眼根)에 의하여 색깔(色境)을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의식이 이에 가담하여 청색, 황색 등 색깔의 내용을 파악하고 좋다, 나쁘다 하는 등 최종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또 이식이 소리(聲境)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그 소리가 높고, 낮고, 좋다, 나쁘다 하는 등 여러 가지 소리의 내용을 식별한다.

다른 심식도 마찬가지이다. 즉 코로 냄새를 맡는 비식이 냄새(香境)를 맡을 때, 그리고 혀로 맛을 아는 마음인 설식이 맛(味境)을 식별하고자 할 때, 또는 몸으로 닿는 곳마다 촉감(觸境)을 느낄 때와 같은 모든 현상에 의식은 즉각 그들 심식과 함께 반연하게 된다.

그리하여 의식은 냄새가 좋다거나 나쁘다든가 또 맛에 대하여 쓰다, 달다, 시다, 짜다, 등을 구별하고 그리고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그 내용이 딱딱하다, 부드럽다, 차다, 덥다 등은 이 의식이 모두 구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이 그 대상을 식별하기는 하나 완전한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 의식이 이들 심식들에 필히 가담하여 분별하는 식이라는 뜻에서 오구의식이라고 한다.

4) 분별의식(分別意識)

제6의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여 인식활동을 한다고 해서 오구의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또 의식은 전오식의 인식대상인 색깔(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 촉감(觸境) 등 오경(五境)의 대상을 안식 등 오식보다 더욱 분별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분별의식(分別意識)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보통 분별력이라고 말할 때 곧 이 의식의 분별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제6의식은 전오식의 의지처가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전오식에 대한 의식을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오식에게 네 가지 의지처(四依)가 있는데 이 가운데 의식은 분별력을 빌리는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분별의식이라고 하며 또 전오식에 대한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그런데 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객관계의 인식대상을 분별하는 것은 물론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다가 단독으로 인식활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 오후의식(五後意識)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전오식과 인식의 대상을 같이 반연하여 식별하는 오구동연의식(五俱同緣意識)이 있는가 하면,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으나 그 대상에는 같이 반연하지 않고 단독으로 어떤 대상을 생각하며 반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고 이름한다.

한 예를 들면 우리가 눈으로 어떤 그림을 볼 때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을 주시라고 한다. 주시는 그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보고 이해한다는 뜻인데 그러나 그 그림만을 계속 응시하며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그림에서 눈을 떼고 또 다른 대상을 접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감각기관은 육체상에 조직된 눈, 코, 혀, 귀, 몸 등 오관으로 구별되는데 이들 오관을 통하여 그 기능에 따라 소리, 냄새, 촉감 등을 서로 바꾸어 가면서 인식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한 대상만을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6의식은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여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분별하다가 다른 대상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전오식과 관계없이 단독으로 전오식과 함께 보고 들었던 일들을 그 후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후의식(五後意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하며 또한 전오식과 함께 야기하였으나 전오식과 동일한 대상을 반연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오구부동연의식(五俱不同緣意識)이라는 별명을 붙이게 된다. 이와 같이 의식의 기능은 다양하고 또 광범위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별명이 많게 된다.

5) 독두의식(獨頭意識)

의식의 또 하나의 별명을 보면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의식의 객관계와는 전혀 관계없이 마음 안에서 단독으로 활동하는 의식을 이름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두의식은 내면세계에서 단독으로 의식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기억하고 회상하면서 생각하는 일이라든가 또 현재의 일은 물론 미래의 일을 추리하고 예측하며 계획하는 일 등은 모두 이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 깊은 사유에 빠져 생각하는 일이 많고 또 여러 가지 잡념을 야기하여 온갖 생각을 하는 때가 많다. 이러한 심리작용은 모두 독두의식에 속하는 것이며 그 내용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독두의식도 내용별로 다시 분류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그것은 곧 몽중의식(夢中意識)과 독산의식(獨散意識) 그리고 정중의식(定中意識) 등을 말한다. 이들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 몽중의식(夢中意識)

몽중의식은 글자 그대로 꿈 가운데서의 의식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꾸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꿈은 천태망상으로 나타나고 또 비현실적인 꿈들이 너무 많아 꿈을 꾼 자신도 꿈의 내용을 믿으려 하지 않고 동시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때가 많다. 이러한 꿈의 주인공을 불교에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이들 꿈을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순전히 환상이며 거짓된 작용이라는 것이다. 이는 의식이 아무런 근거없이 헤매는 거짓작용을 나타낸 것으로서 되도록 꿈이 없는 것을 정신건강에 유익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꿈은 공허한 의식작용으로서 실다운 것이 없기 때문에 의식의 피로만 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건전한 의식에는 꿈이 없다고 하며 꿈이 없는 의식은 정신의 건강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 하나의 꿈은 전혀 거짓된 것만은 아니라는 견해이다. 그 이유는 유가사지론 등에서 꿈이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체험한 사실이 의식을 통하여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은 전혀 현실과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꿈은 가몽(假夢)과 실몽(實夢)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즉 가몽은 거짓된 꿈을 날하고 실몽은 실제의 체험과 경험이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실몽의 경우는 유식학적으로 해몽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생활 속에서 객관계와 주관계를 모두 포함한 법경(法境)을 인식하는 심식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전오식과 같이 인식의 활동을 하면서도 최종적인 결정은 의식이 하기 때문에 그 결정적인 의식활동이 꿈속에서 사실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구별하여 수발업(隨發業)과 정발업(正發業)이라고도 한다. 발업이라는 말은 행동을 하고 또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눈, 귀, 코, 입, 몸 등 오온을 통하여 활동하는 전오식은 자연발생적으로 외부의 인연에 따라 나타나며 또 수동적으로 의식에 따라서 활동하는 심식들이기 때문에 전오식의 행동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의식은 전오식과 는 달리 의식적이고 사유적이며 어떤 동작을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 하는 것을 능동적으로 생각하면서 한다. 그리고 전오식과 더불어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도 그 내용과 가치를 결정하는 심식은 곧 의식이기 때문에 이 의식의 활동을 정발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기능은 매우 강력하고 주관계의 활동을 독차지하기 때문에 그 활동의 업력이 이른바 아라야식 속에 잠재하여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는 잠이 깬 상태나 잠을 자고 있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항상 의식을 통하여 평소 익혔던 일들이 현재의 심행(心行)과 신행(身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생에 익혔든 아니면 몇 년 전에 익혔든 관계없이 한 번 경험하고 체험한 것은 의식을 통하여 다시 실현되기 때문에 꿈속에 실현된 것에 대한 의식을 몽중의식(夢中意識)이라고 이름한다.

나) 독산의식(獨散意識)

다음에는 독산의식(獨散意識)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독산의식은 평소의 의식이 안정되지 못하고 다른 심식과는 관계없이 단독으로 헤매는 것을 뜻한다. 단독으로 헤매는 것은 마음의 안정을 상실하고 인식의 대상(法境)과도 일치하지 못하며 방탕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의 의식은 산만하고 분열된 현상을 보이며 정처없이 밖을 향하여 달려 나가려는 산란심소(散亂心所)를 야기하게 된다.

심소(心所)는 의식의 체(體)에서 나타나는 작용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의 행동에 의하여 나타나는 작용을 말한 것으로 이러한 독산의식은 산란하여 흩어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암기력(暗記力)이 없어지게 된다. 이들 내용을 종합하여 산란의식(散亂意識)이라고 명칭한다. 이와 같이 의식이 극도로 정상을 잃고 산만하게 되면 비정상의식으로 변하게 되며 결국 광식(狂識)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때의 광식은 사실을 곡해하는 전도(顚倒)된 마음을 가리키며 우리는 이를 미쳤다고 표현한다.

예들 들면 눈병이 난 사람이 푸른 하늘을 누렇게 보는 것과 같이 모든 대상을 올바르게 보지 못하고 착각과 환각을 야기하는 예가 많다. 이러한 비량심(非量心)이라고 한다. 즉 그릇되게 인식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의식의 인식 내용을 세 가지로 구별하여 말한다. 그것을 삼량(三量)이라고 하는데 양(量)이라는 말은 헤아린다는 뜻으로서 양탁(量度)이라고 하며 이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삼량의 내용을 보면 첫째는 현량(現量)이요, 둘째는 비량(比量)이며, 셋째는 비량(非量)의 내용으로 구별한다. 현량은 앞에 놓인 사물을 틀림없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무엇이나 틀림없이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량(比量)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여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비량은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간혹 틀리게 인식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예를 들면 담장 너머에 뿔이 보였을 때 이를 추리하여 소가 있음을 알아낼 수 있는 반면에 소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소와 비슷한 뿔을 가진 또다른 동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먼 곳에 연기가 보일 때 그곳에는 불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구름을 연기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비량(比量)은 간혹 틀릴 수 있는 인식의 내용을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 비량(非量)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사를 그릇되게 판단하는 인식의 내용이다. 이상과 같이 인식의 내용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산란의식은 비량의 인식을 파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여 산란심을 없애는 정신생활이 매우 긴요한 것이다.

6) 정중의식(定中意識)

다음으로 제6의식에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는 별명이 있다. 정중의식은 마음의 안정을 통하여 앞에서 말한 산란의식과 같은 마음을 정지한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선정(禪定) 가운데 유지되는 의식을 말하며 동시에 입정(入定) 가운데 나타나는 지혜로운 마음을 정중의식이라 한다. 여기서 정(定)이라는 말은 마음이 동요되지 않은 경지(不動心)를 말하며 또한 산란하지 않은 마음(不亂心)의 경지를 뜻한다.

이러한 마음은 마음을 요란케 하고 분열시키며 지혜의 활동을 장애하는 번뇌(煩惱)를 정화한 마음이기 때문에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또 상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 경지에서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定)의 뜻을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고도 한다. 즉 마음과 대상이 하나가 된 경지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는 마음에 한 점의 잡념도 없고 번뇌가 없는 경지이기 때문에 마음과 인식의 장애를 부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상과 같이 정중의식은 마음이 가장 잘 정화된 청정심에서 나타나는 의식을 말한다. 이 의식에서는 오직 진리만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열(禪悅)과 법열(法悅)에 해당하는 희열(喜悅)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심식을 말하여 무분별식(無分別識) 또는 무차별식(無差別識)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통일되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평등심만이 나타날 뿐이며 선정과 지혜가 동시에 나타난 심일경성(心一境性)이기 때문에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그러므로 정중의식에 의하여 나타나는 모든 대상(法相)은 그 실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확실히 나타나며 차별없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인식되는 경지를 증득(證得)이라 한다.

증(證)이라는 말은 경계(境界)가 없다는 뜻으로서 합일(合一)의 경지를 뜻한다. 이는 곧 각(覺)과도 통한다. 모든 대상(法相)을 진리롭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깨닫는 경지는 피차(彼此)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피차가 없는 하나의 경지에서 체득하고 득입(得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모습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체(法體)가 지닌 체성(體性)까지도 인식한다. 이는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정중의식인 것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의식이다. 여기에는 번뇌의 속박이 없기 때문에 항상 자유로우며 고통이 없고 편안한 열반(涅槃)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7) 의식(意識)과 번뇌작용(煩惱作用)

이상으로 제6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제6의식은 우리 인간의 심식(心識) 가운데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며 우리 생활의 전부를 결정하는 정신이다. 때로는 눈. 귀. 코. 입. 몸 등 오관(五根)을 통하여 전오식(前五識)과 함께 객관세계(六境)를 인식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의 역할을 하고, 또 대내적으로 단독으로 사유하고 생각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추측하며 계획도 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이 잠을 잘 때 나타나는 몽중의식(夢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를 정화한 가운데 항상 안정하고 청정하게 나타나는 정중의식(定中意識)의 역할도 한다.

이와 같이 의식(意識)은 물질과 정신계 그리고 부정(不淨)과 청정(淸淨)의 세계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증득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가 모든 심식 가운데서 가장 넓다. 그리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광범의한 역할을 하는 의식에 깊은 이해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활은 이들 의식생활이 핵심이 되며 의식생활 여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하고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두말할 것도 없이 정중의식의 생활이다.

현대인에게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주는 주체는 곧 정중의식 뿐이며 동시에 복잡한 산업시대에 잡념과 망상을 극복하고 가정은 물론 직장에서까지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려면 정중의식의 생활화를 실천하는 길뿐이다.

이제 정중의식에 의하여 정화되는 대상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그 대상은 위에서 소개한 산란의식이며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6의식을 산란케 하는 것이 곧 번뇌이다. 번뇌는 의식을 산란케 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뇌를 야기하는 근원은 제6의식이 아니라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이라고 한다. 이 말나식이 진리를 망각하여 비진리적인 번뇌망상을 야기하며 제6의식에 크게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제7말나식을 설명할 때 다루기로 하고 제6의식 자체에도 번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나식만큼 근원적인 번뇌는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번뇌는 제6의식이 오히려 광범위하게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을 주도하는 정신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제6의식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산란의식의 상태가 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바람직한 의식생활은 곧 정중의식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지혜를 방해하고 의식을 흐리게 하여 불행한 업력만 조성하는 정신작용은 무엇인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진리를 망각하여 진리로운 가치관을 상실한 채 고통을 받게 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야기하는 무명(無明)이 있게 되는데 이는 의식의 행위를 그릇되게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야기하며 열반(涅槃)과 보리(菩堤)를 장애한다. 아집은 무아(無我)의 경지인 순수한 자아를 망각하고 집착하여 끝없는 이기심을 나타내는 근원이 되며, 법집은 모든 인연으로 구성된 사물의 진실성을 망각하고 그 사물들에 대한 집착을 야기하여 끝없는 소유욕을 나타내며 온갖 악행을 유도하는 근원이 된다. 이들 탐심이 앞서니까 자신의 의식에 거슬리면 즉각 진심(瞋心)을 내며 또한 자기만이 제일이라는 아만(我慢)을 나타낸다.

이러한 마음들은 항상 자기만을 생각하는 정신작용들이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나타나는 지말번뇌(枝末煩惱)들은 남을 멸시하고 질투하며(嫉), 한탄(恨)하기도 한다. 그리고 남을 속이며( ), 동시에 자기 이익을 위하여 아첨(諂)하고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한다.

이와 같이 아집과 법집에 의하여 나타나는 의식은 뚜렷한 진리관이 없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차지 못하고 오히려 놀고, 방탕한 것이 행복인양 착각한다. 동시에 게으른 마음(懈怠心)과 방종(放逸)하는 마음을 갖고 세월을 하송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무참(無慙)과 무괴(無愧)라는 마음으로 반성과 참회를 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번뇌에 가로막힌 의식은 항상 혼침(?沈)과 흔들리는 도거(掉擧)의 마음을 중심하여 산란하고 침체된 의식 속에서 악업(惡業)만 조성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의식작용들을 유식학에서는 근본번뇌(根本煩惱)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수번뇌(隨煩惱)라고 부른다. 번뇌는 마음을 번거롭게 하며 혼란시키고 고뇌를 일으키는 작용으로서 이를 곧 악(惡)이라고 표현한다. 악은 또 고통과 연결되는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모든 의식의 번뇌현상은 죄업과 일치되며 불행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을 통한 살생 등 십악업(十惡業)과 불살생 등 십선업(十善業)과는 매우 다른 심리적인 업력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더욱 심리적으로 세분화한 죄업설인 것이다.

이상으로 제6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의 현상 그리고 산란의식적인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의식생활은 각자의 수행력에 의하여 정화되며 정화된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을 정중의식(定中意識)이라 한다. 이 정중의식은 선업(善業)의 핵심이 되며 위에서 말한 번뇌의식과는 달리 모든 생활을 밝게 그리고 지혜롭게 이끌어 준다. 왜냐하면 정(定)에서 나타나는 의식은 모든 진리를 확신하는 지혜를 동반하며 그 생활을 열반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Ⅲ. 전오식(前五識)과 제6의식(第六意識)-2

3.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과의 관계

이제까지 안식으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왔다. 그 다음의 순서는 제7말나식을 살펴야 할 차례다. 그러나 여기서 말나식을 설명하기 전에 마음의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위에서 6종의 심식을 이미 설명하였는데 이들 심식에는 수많은 작용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용들을 확실히 알지 않으면 심식의 내용도 완전히 알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의 체성과 작용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의 체성과 작용의 관계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마음의 체성을 흔히 심왕(心王)이라고 한다. 그것은 마음의 체성이 마치 국왕이 명령을 내리면 그 밑에서 근무하는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하는 바와 같은 비유를 들어 명칭한 이름이다. 즉 심왕은 마음의 체성이고, 심소(心所)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신하가 국왕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듯 마음의 체성에 의하여 나타나는 작용도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심식(心識)은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심소는 신하가 국왕에 소속되어 수족처럼 역할을 하듯이 심왕의 소유물로서 심왕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을 다하는 작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심소라는 뜻은 심왕이 소유한다는 뜻에서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고 한 명칭을 줄인 이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왕과 심소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불가분의 관계를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권5에 의하면,

"첫째, 심소는 항상 심왕에 의지하여 작용을 야기한다(恒依心起故).

둘째, 심소는 항상 심왕과 더불어 상응하면서 활동한다(與心相應).

셋째, 심소는 항상 심왕에 소속하고 계속된다(繫屬於心)"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심소는 심왕에 소속하여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소는 심왕의 소유물로서 아소(我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러한 깊은 관계가 있는 마음의 체성과 마음의 작용은 거의 행동을 같이 한다. 그 행동을 같이하는 관계를 상응(相應)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면 그 4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心王)과 마음의 작용(心所)은 행동을 야기할 때 그 시간이 동일하고,

둘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의지하는 장소(所依根)가 동일하며,

셋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의 대상(所緣境)이 같고,

넷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동일한 일(事)만을 한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체성과 마음의 작용은 행동하는 시간(時)과 의지할 곳(所依根)과 인식의 대상(所緣境)과 활동하는 일 등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그 대상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내용만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같이 나타나 어떠한 대상을 인식할 때 마음의 체성인 심왕은 그 대상에 대한 전체의 모습(總相)을 인식하고 또 마음의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는 그 대상의 전체는 물론, 그 대상 안에 지니고 있는 낱낱의 모습(別相)을 일일이 인식하는 성질을 가진다.

이러한 활동들을 행상(行相)이라고 하는데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인식하는 행동의 모습을 뜻한다. 이들 심왕과 심소의 행상관계를 예를 들어보면 마치 그림 그리는 화가가 하나의 화폭에 전체의 본을 그려 놓으면 그 제자가 화폭의 구석구석을 그려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과 마음의 작용 즉 심왕과 심소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며 동시에 모든 대상을 인식한다. 그런데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따로 분리시켜 말할 수 없는 것이 정신세계이기는 하나,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들의 성격을 분명히 따로 작용(心所)만을 분리하여 그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심소론(心所論)이라고 한다. 즉 심소만을 가지고 논술하는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심소론에 의하면 마음의 작용은 51종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또 이들 51종을 각각 성질별로 구별하여 다시 육위(六位)의 분야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6위 51종의 심소(六位 五十一心所)라고 한다. 물론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무한한 작용들이 있으며 또 원시불교에서 소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마음(心王)의 작용(心所)설을 해설한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종래에 설명되어 왔던 심소설들을 엄밀하게 취사선택하여 우리 인간의 마음에 필히 없어서는 안 되는 심적 작용만을 재조직하였다. 이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심체와 심작용에 대하여 그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육위(六位)의 심작용을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심소의 육위를 보면, 1) 변행심소(邊行心所), 2) 별경심소(別境心所), 3) 선심소(善心所), 4) 번뇌심소(煩惱心所), 5)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6) 부정심소(不定心所) 등으로 분류된 심소를 말한다. 이들 육위의 심소들은 마음의 작용에 나타나는 그 기능과 성질별로 구별한 것이다. 이들 육위심소에 대해서 하나하나의 뜻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변행심소(遍行心所)

변행심소는 어떤 심식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반드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심식에 두루 나타나면서 그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뜻한다. 여기에는 5종의 심소가 있는바 촉(觸), 작의(作意), 수(受), 상(想), 사(思) 등을 말한다.

촉의 심소는 팔식(八識) 가운데 한 식(識)이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최초로 그 심식의 작용이 대상에 닿는 것을 촉(觸)이라 한다. 예를 들면 눈의 시선(眼識)이 보고자 하는 대상물(色境)에 닿거나 귀로 듣는 마음(耳識)이 어떤 소리에 닿았을 때의 찰나를 촉이라 한다. 이는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물에 마음이 닿는 순간을 뜻한다.

이와 같이 촉이 성립되면 그 즉시에 마음 안에는 경각심(警覺心)이 나타난다. 이를 작의심소(作意心所)라고 한다. 이 작의심소는 갑자기 큰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는 등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보통은 자연스럽게 작용하니까 작의심소의 작용을 알 수 없지만 불의의 사건을 접할 때는 능히 알 수 있는 작용이다.

그 다음에는 수심소(受心所)가 야기한다. 이는 작의심소가 앞에 무엇이 나타났다고 경종을 울려주면 그 대상의 내용을 영접하여 사실 그대로 안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한다. 만약 그 대상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괴로움으로 받아들이고(苦受) 또 마음에 알맞으면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樂受) 된다. 그리고 대상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며 그저 그런 대로 좋고 나쁜 생각 없이 무심히 받아들이게(捨受) 된다.

그 다음 상(想)은 밖을 통하여 어떤 대상이 마음 안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대상의 모습을 구별(取像)하는 작용을 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심소(思心所)는 마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의 모습에 대하여 선(善)이다, 악(惡)이다 하는 선악의 결정을 내려주는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심소를 오변행 심소라고 하는데 이들 작용은 어떤 심식에서든지 반드시 나타나 그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주는 정신작용인 것이다.

2) 별경심소(別境心所)

별경심소는 위에서 말한 변행심소와 같이 모든 대상(境)에 다 같이 두루두루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따로따로 인식의 대상 위에 나타나 특성 있게 인식활동을 한다. 그 종류는 욕(慾), 승해(勝解), 염(念), 정(定), 혜(慧) 등 다섯 가지이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욕(慾)은 인식의 대상에 나아가고자 하며 항상 희망을 갖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그 희망은 마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마음이 지혜로우면 선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고, 마음이 무지하여 번뇌가 많으면 악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누구나 욕심(慾心)을 갖고 있는데 선욕(善慾)을 갖느냐 아니면 악욕(惡慾)을 갖느냐에 따라 그 행위도 선행 또는 악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 승해(勝解)는 어떤 경지를 결정적으로 이해하고 정(正)과 사(邪)를 분명히 아는 심리작용 이다. 이러한 것은 선정(禪定)의 수행과 여러 수행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청정하여져서 모든 사물과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이해하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 염(念)은 일찍이 마음에 암기하고 익혔거나 있었던 일들을 마음속에 분명히 기억해 두는 심리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이 염은 다른 생각과는 달라서 안정된 마음에 의지(定依)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사실을 받아서 기억할 때 그 내용을 마음속에 분명하게 기록(明記)하여 두는 심소이다.

* 정(定)은 첫째로 마음의 번뇌를 제거하여 모든 잡념을 없애며 동시에 심식이 대상을 인식할 때 동요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관(觀)하는 심리작용을 말한다. 이 정심(定心)은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마음속의 지혜를 나타나게 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심이 나타나면 반드시 지혜가 나타나게 되며 그 지혜는 인식대상의 모습(相)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성질(性)까지도 관찰하여 그 대상이 지닌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이러한 지혜를 결택지(決擇智)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사리(事理)를 분명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지력(智力)이 있기 때문이다.

* 혜(慧)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관찰하는 대상(所觀境)에 대하여 옳고 그름(是非)을 분명하게 선별하여 주는 마음이다. 이 혜는 간택(簡擇)함을 성(性)으로 하고 또 모든 의심을 끊고 확신을 갖게 하는 인식능력으로서 단의(斷疑)를 업(業)으로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오종의 별경심소는 여러 심소 가운데 하나하나 나타나서 비록 번뇌심이지만 지혜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심리작용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변행심소는 어느 심식에나 자주 나타나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반면에 오별경심소는 모든 객관계의 대상을 올바로 인식하고 내면의 정신계를 안정시키며 지혜롭고 조화롭게 생활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심리작용들이다.

이들 심소들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번뇌가 감소할 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마음을 정화하여 바람직한 심소가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 일환으로 불교적 수행을 하는 것이다. 수행은 곧 정(定)과 혜(慧)를 나타내는 촉진제가 되는 것이며 동시에 행복과 안락을 가져다 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마음의 체성(心體)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마음의 작용(心所) 가운데서 변행심소와 별경심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 가운데는 그 성질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의 심소(善心所)와 악의 심소(惡心所)를 말한다. 이들 두 심소는 마음의 체성(心王)에서 나타나는 작용들로서 그 성질이 상대적이며 내면세계는 물론 객관세계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대조적이다.

다시 말하면 착한 행동은 선의 심소에서 나타나며, 악한 행동은 악의 심소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심소의 행위에 따라 선업(善業) 또는 악업(惡業)이 조성된다. 동시에 이들 업력에 의하여 우리 자신의 정신계와 객관세계의 고락(苦樂)을 조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들 선업과 악업은 사망할 때 선도(善道)로 이끌어 주고 또 악도(惡道)로 이끌어 주는 핵심역할을 한다. 이제 선심소(善心所)와 악심소(惡心所)의 종류와 내용이 무엇인지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3) 선심소(善心所)

유식론에 의하면 선의 심소는 11가지가 있다. 그 종류를 보면, 신(信), 참(慙), 괴(愧), 무탐(無貪), 무진(無瞋), 무치(無痴), 근(勤), 경안(輕安), 불방일(不放逸), 행사(行捨), 불해(不害) 등 11종(種)을 말한다. 이들 선심소 살펴보기로 한다.

* 신(信)은 신심(信心)을 뜻한다. 불교에서 선을 논할 때 신심이 가장 으뜸이라고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여러 선행의 종류를 얼마든지 말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종교적으로 선(善)을 논할 때는 먼저 부처님의 진리를 확신하지 않고서는 불교적 선행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선행 가운데서도 신앙심이 으뜸이 되며 이 신앙심 여하에 따라 선행의 결과도 좌우된다는 것이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신앙은 첫째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신(信)을 수정주(水淨珠)에다 비교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수정주는 아무리 혼탁한 물이라 할지라도 이 수정주만 혼탁한 물 속에 넣으면 즉각 맑아지게 되며 모든 것이 밝게 비칠 만큼 청정하게 하는 기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갖는 신심도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데 있어 수정주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식학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진리의 실성(實性)을 확신하는 것이다. 진리의 실성은 곧 우리 자신이 보존하고 있는 본성이며 넓은 뜻으로 보면 진여성(眞如性)이며 불성(佛性)을 뜻한다. 이는 절대의 진리로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진실성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무한한 지혜와 가능성을 나타내 주며 온 세상을 극락세계로 환원하여 진리로운 세계를 구현해 주는 본질이기도 하다.

둘째로는 불(佛), 법(法), 승(僧) 삼보에 대한 덕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불타의 덕성을 확신하며 불법을 신앙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것은 신앙한 만큼 불타의 가호가 내리며 항상 보살펴 주신다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인과(因果)의 공능(功能)이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즉 세간적인 선업과 출세간적인 선업은 반드시 능력과 세력이 있어 세속적인 행복은 물론 출세간적인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주고 또 창조할 수 있으며 무한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는 공능(功能)을 확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을 하면 반드시 선과가 성취되고 악행을 하면 악과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확신하는 것은 신앙의 중요사상인 것이다. 동시에 삼라만상의 실체에도 각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앙은 진리를 확신하고 불타를 비롯한 삼보(三寶)에 대한 신앙과 인과응보의 확신을 포함하여 종합적인 신앙관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앙심은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에 속한다.

* 참(慙)은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를 즉각 반성하고 어질고 착한 것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는 특히 마음속으로 어떤 잘못을 범했으면 곧 다른 사람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동시에 반성하며 다시는 악행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 괴(愧)는 세속에서 정해 놓은 규칙과 윤리 도덕을 위반했을 때 곧 반성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와 더불어 악법을 멀리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며 이미 착한 행동을 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앞으로 윤리와 도덕에 따르겠다는 마음가짐을 굳게 하는 정신작용이다.

* 무탐(無貪)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아니하며 자기 소유의 재산도 극단적인 탐심을 내지 않는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심을 버리고 정당한 노력에 의하여 진리롭게 자신과 재산을 유지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애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 무진(無瞋)은 모든 사람과 심지어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성내는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고통스러움이 있어도 이를 참고 자비롭게 대하는 마음이다. 춥고 더우며 갈증이 나고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일체 짜증을 내지 않고 참고 견디며 여유 있는 마음으로 대하는 정신작용이다.

* 무치(無痴)는 모든 진리와 사물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무지(無知)를 야기하지 않는 마음이다. 즉 일상생활을 통하여 항상 지혜롭게 살며 자신의 심성(心性)과 객관계의 사물을 옳게 관찰하여 행동에 있어서도 선행만을 하는 정신작용이다.

* 근(勤)은 곧 정진을 뜻하며 선행에 근면함을 뜻한다. 평소 악을 정화하고 자신과 사회를 정화하는데 근면하고 진리를 실현함에 있어 모든 게으름을 퇴치하며 용감하게 추진해 나가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 경안(輕安)은 여러 가지 번뇌에 의하여 몸과 마음이 무거운 것을 떨쳐버리고 수행력으로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평안함을 뜻한다. 그리고 혼탁하게 하고 침체시키는 이른바 혼침(昏沈)을 정화하고 또 마음을 동요케 하는 도거(掉擧)를 제거하는 선정의 마음으로 일체의 산란심이 없는 정신상태를 뜻한다.

* 불방일(不放逸)은 모든 생활에서 방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시간을 허비하고 방탕하는 것을 방지하고 뚜렷한 수행관과 생활관을 갖고 목적을 향하여 꾸준히 정진해가는 것을 뜻한다.

* 행사(行捨)는 마음의 동요를 없애고 항상 평등하게 유지하는 마음이다. 즉 사(捨)는 마음의 침체와 혼탁함에 끌리지 않고 또 동요(掉擧)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등한 마음으로서 매사에 꾸준하면서 안정을 유지하는 정신작용이다.

* 불해(不害)는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해를 끼치지 않고 아껴주는 자비심을 말한다.

이상으로 선심소(善心所)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러한 선의 정신작용은 심체(心體)에 의하여 그때 그 때 나타나게 된다. 이 내용으로 봐서 선의 심소는 마음과 육체의 정화는 물론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정신작용이라 할 수 있으며 이들 선의 심소만을 잘 수용하며 생활한다면 참으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윤회도상에 있는 우리 인간의 심성은 후천적으로 선과 악의 양대정신으로 나누어져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선의 정신작용과는 달리 악의 정신작용도 수시로 야기하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번뇌라고 한다.

4) 근본번뇌(根本煩惱)

악의 작용은 곧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오히려 앞에서 말한 선(善)의 작용을 방해하고 교란시키며 무지의 세계로 빠뜨리는 작용을 뜻한다. 그러므로 번뇌의 뜻은 다양하며 대소(大小)의 번뇌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번뇌는 항상 내심(內心)을 요란시키고 혼탁(混濁)케 하며 안정된 마음을 전환시켜 여러 유정(有情)들을 복잡하게 하고 흐리게 만든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번뇌는 안정된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고뇌케 하며 지혜로운 마음을 덮어 버리고 장애하는 기능을 한다고 해서 부장(覆藏) 또는 장애(障碍)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 그리고 번뇌는 인간의 내심에서 여러 가지 잡념을 야기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정신을 방해하며 스스로 고민하고 불안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구속된 생활을 하게 한다고 해서 계박(繫縛) 또는 결박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번뇌는 작용이 다양하며 별명도 많다. 그러므로 번뇌를 백팔번뇌(百八煩惱)라 하고 또 팔만사천번뇌(八萬四千煩惱)라고도 한다. 마음의 작용이 한이 없음과 같이 번뇌의 작용도 한이 없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본이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가 여섯이고 근본번뇌에서 파생된 수번뇌(隨煩惱)가 20종류가 있다고 하며 이들 번뇌는 수많은 번뇌 가운데서 극히 제한된 수만을 엄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근본번뇌라고 하는 것은 번뇌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를 말하고 이와 같이 뿌리 역할을 하는 근본번뇌에서 다시 파생하여 가지처럼 뻗어나는 번뇌를 수번뇌, 또는 지말번뇌(枝末煩惱)라고 한다. 즉 수번뇌는 근본번뇌에 따라서 나타나는 번뇌라는 뜻으로 사실상 우리 현실에서 번뇌로 작용하는 마음은 거의 수번뇌이다. 그러나 근본번뇌의 작용은 제7말나식의 미망(迷妄)으로 인하여 최초에 나타나는 탐(貪), 진(瞋) 치(痴) 등 근본번뇌에 의하여 작동하게 된다. 이와 같이 탐, 진, 치 등 번뇌를 근본번뇌라고 하는데 이는 원시불교에서도 가장 중요시하였고, 소승불교를 거쳐 대승불교에 와서도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그것은 치심(痴心) 때문이다. 치심은 무명(無明)을 의미하며 무명은 무아(無我)에 대한 망각으로 말미암아 아집(我執)을 야기하게 하고 더불어 물질계의 법칙까지도 망각하여 법집(法執)을 야기하는 무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 가운데서 치심이 으뜸이라고 한다. 이러한 치심을 유식학에서는 심리적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결국 제7말나식의 치심(痴心)이 진여성에 해당하는 무아(無我)를 최초로 망각하여 나타나는 번뇌를 아치(我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아치의 번뇌에 의하여 지혜로운 본성이 가려지고 망심들이 부각하여 범부심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는데 이를 아견(我見)이라고 이름한다. 즉, 자아에 대한 망견(妄見)을 뜻하는 것이며 이들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도 한다. 전도된 마음에 나타나는 정신작용이 올바르게 나타날리 없으며 이들 잘못된 정신작용을 내용별로 나누어 근본번뇌 또는 수번뇌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함은 이들 번뇌들은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모두 죄악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인 죄악인 것이며 이들 주관적인 죄악에서 객관화한 것이 육체적인 행동의 죄악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앞에서 살펴본 선의 심소(善心所)에 대하여 번뇌들을 악의 심소(惡心所)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정신작용(心所)에 의하여 선행(善行), 또는 악행(惡行)으로 나타나며 선행과 악행은 곧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되며 이 선업과 악업은 다음의 선과(善果)와 악과(惡果)를 가져올 인과응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제 악의 작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식학에 있어서도 악은 곧 번뇌를 뜻한다. 번뇌는 마음에서 발생하여 마음을 다시 어지럽히고 어둡게 하는 작용을 뜻한다. 즉, 마음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하고 아집을 야기하며 또 법집을 야기하는 것을 비롯하여 온갖 무지의 작용을 일으킨다.

아집(我執)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이 공(空)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인연의 집합체인 자아에 대해서 실로 고정적인 자기가 있는 양 집착하는 번뇌를 말한다. 그래서 이 아집을 없애려면 내가 공했다고 관찰하는 아공관(我空觀)을 닦아야 한다. 또 법집(法執)이란 모든 사물이 법칙을 망각하여 마치 그 사물들이 영원히 존재하는 양 착각하여 집착을 야기한 번뇌를 말한다.

이러한 법집을 없애려면 만법(萬法)이 공하였음을 철저히 관찰하는 법공관(法空觀)을 수행하여야 한다. 아무튼 아집과 법집으로 말미암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는데 이에 의하여 이른바 근본번뇌가 야기하고 이 근본번뇌에 의하여 다시 지말적인 수번뇌가 발생한다.

근본번뇌는 번뇌의 뿌리 역할을 하고 지말번뇌는 가지 역할을 하는 번뇌이다. 그 종류를 보면 근본번뇌에는 육종(六種)이 있고, 지말번뇌에는 20종의 번뇌가 있다. 이를 따로따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근본번뇌는 번뇌의 근본이라는 뜻에서 본혹(本惑)이라고도 칭한다. 혹(惑)이라는 말은 번뇌와 통하는 말로서 진리에 미혹했다는 뜻이 있다.

여기에는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악견(惡見) 등 육종의 번뇌가 있는데 이들은 극히 근원적인 번뇌들이다. 차례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탐(貪)은 자신에 대한 탐심이 가장 기본적인 것이며 이를 아집(我執)이라 한다. 또 사물에 대한 탐심이 있는데 이는 법집(法執)이 기본적이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는 한 악행이 그치지 않고 계속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미래에 나쁜 과보를 받을 업인이 되며 윤회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이기심이 되는 아집을 앞세우는 탐심은 금물이며 항상 진리로운 정진(精進)에 의하여 정당하게 재산을 모으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 진(瞋)은 성내는 마음을 뜻한다. 성내는 것은 마음에 맞지 않으면 모두 진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와 상대에서 마음에 거슬리면 성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좁은 생각이다. 유식학에서는 우리 오관을 통한 모든 인식의 대상물이 마음에 거슬리면 성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며, 그리고 내면세계의 불만족도 마찬가지로 본다. 이는 자비를 방해하는 심리작용이며 심리적 불안과 마음과 몸에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작용을 야기하게 된다.

* 치(痴)는 번뇌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로서 연기(緣起)의 도리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한 것을 의미하며 이를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치는 모든 진리에 어리석다는 뜻이며 어리석다는 것은 곧 무지를 뜻하기 때문에 무명이라고도 한다. 이는 모든 사리(事理)에 대하여 망각한 것을 뜻하며 정상적인 마음이 비정상적으로 전화되었다는 뜻으로 전도심(顚倒心)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이 치심은 모든 번뇌의 의지처가 된다. 그 이유는 진리를 망각하여 모든 번뇌를 야기하게 되는 것은 치심이기 때문이다. 치심에 반대되는 것을 지혜라 하며 지혜를 항상 방해하기 때문에 번뇌 중 치심이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다.

* 만(慢)은 치심으로 말미암아 아집 등 이기심이 나타나 나라는 것을 확고하게 맹신하고, 자기 이외의 사람들은 하찮케 생각한 데서 나타난 거만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남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추태를 부린다. 그리하여 자신의 덕성을 상실하고 천한 태도만을 보이는 심리작용이다.

* 의(疑)는 오관을 통하여 인식하는 상대를 잘 모르고 확신을 갖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심리작용이다. 이를 유예(猶豫)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진리에 대한 소신을 방해하는 것을 뜻한다.

* 악견(惡見)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 망각하고 착각된 마음으로 추구하는 견해를 말한다. 그리하여 이는 번뇌에 가려서 진리를 잘못 판단하는 염혜(染慧)를 항상 야기하며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고 동시에 선견(善見)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작용까지도 한다. 이 악견(惡見)은 유신견(有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더욱 세밀하게 설명하는 것이 통례이다.

첫째, 유신견(有身見)은 살가야견(薩迦耶見)을 번역한 말로서 살가야(Salkaya)는 유신(有身)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몸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등이 모여 임시로 구성된 것인데 이 오온(五蘊)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 것이며 이를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하며 또한 위신견(僞身見)이라고도 한다.

둘째, 변견(邊見)은 자신의 몸에 집착한 유신견의 망견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 몸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을 말하며 이러한 견해를 상견(常見)이라고 한다. 또 이 몸은 사망 후에는 영원히 없어지게 될 것이며 단멸(斷滅)하게 될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는데 이를 단견(斷見)이라고 한다. 진리는 항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갖는 것은 진리에 어긋나는 생각이기 때문에 이를 변견이라고 한다.

셋째, 사견(邪見)은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고 선악의 윤리적 사상을 부정하는 견해를 뜻한다.

넷째, 견취견(見取見)은 유신견과 같이 자신에 대한 집착을 야기하여 그것을 최고의 것이라고 집착하며 진리에 맞지 않는 견해를 나타내서 많은 비난을 받을 만한 견해를 말한다.

다섯째, 계금취견(戒禁取見)은 계금(戒禁)은 계법으로 금한 것을 말하며 취견(取見)은 그 계법에 집착하여 현실과 진리에 맞지 않는 계법을 강요하는 견해를 뜻한다. 이는 특히 외도(外道)들이 생천(生天)을 목적으로 나체로 있거나 머리를 뽑고 회가루를 바르며 불 속과 물 속에 투신하는 등 불필요하게 삿된 계율(邪戒)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어서 이러한 계법을 경계하는 뜻이 있다.

이상과 같은 오견(五見)을 합쳐서 악견이라고 하는데 이는 바른 진리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본 육번뇌는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악(惡)을 논할 때 항상 이들 번뇌가 인용된다.

5) 수번뇌(隨煩惱)

이는 근본번뇌에 의하여 파생된 것이므로 지말번뇌(枝末煩惱)라 하며 본명은 수번뇌(隨煩惱)이다. 이는 수혹(隨惑)이라고도 호칭되는데 혹(惑)은 곧 번뇌의 뜻과 같다.

이 수번뇌에는 분(忿). 한(恨). 부(覆). 뇌(惱). 질(嫉). 간(아낄). 광(속일). 첨(諂). 해(害). 교(교만할). 무참(無慙). 무괴(無愧). 도거(掉擧). 혼침(昏沈). 불신(不信). 해태(懈怠). 방일(放逸). 실념(失念). 산란(散亂). 부정지(不正知) 등 20종의 번뇌가 있다.

이들 20종의 수번뇌를 소. 중. 대로 나누어 소수혹(小隨惑), 중수혹(中隨惑), 대수혹(大隨惑)이라고 한다. 이들 수번뇌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가) 소수혹(小隨惑)

* 분(忿)은 자기 이익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성내는 것을 말하며 이는 진심(瞋心)보다는 약한 작용이다. 이러한 분에 의하여 포악한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 한(恨)은 위에서 말한 분심을 앞세워 항상 악을 품고 원수로 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마음에는 항상 원한이 있고 고통(熱惱)이 있게 된다.

* 부(覆)는 자신의 죄를 덮어놓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자신의 죄업이 널리 알려지면 명예와 이익이 손실될까 두려워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는 번뇌이다.

* 뇌(惱)는 분함과 한탄함을 갖고 항상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는 번뇌이다.

* 질(嫉)은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이 잘 살고 출세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말한다.

* 간(아낄)은 재산과 진리를 아끼기만 하고 남에게 물질을 베풀어주지 않고 진리를 설하여 지혜를 심어주지 않는 것을 뜻한다.

* 광(속일)은 명예와 이익을 위하여 남을 속이고 교만하고 부덕하면서도 덕이 있는 것처럼 남을 속이기만 하며 동시에 정직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 첨(諂)은 남에게 아첨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며 또한 본심을 속여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번뇌이다.

* 해(害)는 모든 사람과 생명체에게 자비롭지 못한 마음으로 손해와 괴로움을 끼치는 행위를 말한다.

* 교(교만할)는 자신이 성공한 일이 있으면 교만을 부리거나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상의 번뇌는 10가지 작은 번뇌라는 뜻에서 십소수혹(十小隨惑)이라고 한다.

나) 중수혹(中隨惑)

다음은 중수혹을 알아보기로 하는 바 여기에는 무참(無慙)과 무괴(無愧) 등 두 가지가 있다.

* 무참(無慙)는 잘못을 범하고도 마음속 깊이 부끄러운 생각을 갖지 않으며 동시에 현인과 선법(善法)을 경거망동하게 경멸히 여기는 행위를 뜻한다.

* 무괴(無愧)는 세상의 안정을 돌보지 않고 포악한 일에만 종사하면서 추호도 부끄러운 생각을 갖지 않고, 반성할 줄 모르는 악덕을 말한다.

이상 두 가지 번뇌를 중수혹이라 한다.

다) 대수혹(大隨惑)

다음 대수혹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도거(掉擧)는 마음이 요동하여 안정을 잃게 하는 번뇌이다. 그리하여 평등한 마음과 선정(奢摩他)를 방해하는 작용을 항상 한다.

* 혼침(昏沈)은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려 할 때 항상 혼미하게 하고 침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경쾌하고 안정된 마음(輕安)과 지혜로운 선정(毘鉢舍那)을 방해하는 심리작용인 것이다. 이는 도거심소와 함께 선정을 방해하는 작용이라고 널리 알려져 오고 있다.

* 불신(不信)은 진리에 대한 소신이 없고 불타의 덕성과 인과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번뇌이다. 그러므로 게으름만 피고 시간을 낭비하는 행동만 하게 된다.

* 해태(懈怠)는 글자 그대로 게으름을 뜻한다. 이는 악을 끊고 선을 닦는 일에 태만하며 평소에 노력하지 않는 번뇌를 말한다.

* 방일(放逸)은 진리관을 뚜렷이 갖지 못하고 선업을 닦는 일에 방종하며 방탕함을 뜻한다.

* 실념(失念)은 진리로운 일을 명백하게 기억(明記)하지 못하고 동시에 산란한 마음에 의존하여 정념(正念)을 상실한 번뇌이다.

* 산란(散亂)은 정신을 밖으로만 향하여 달리게 하고 또 객관계의 대상(所緣境)에 대해서 나쁜 견해(惡慧)만을 유발하도록 한다.

* 부정지(不正知)는 어떤 대상을 관찰할 때 항상 오해하도록 하는 심리작용이다. 이는 능히 정당한 지식을 방해하고 선업을 닦지 못하게 하는 치심(痴心)의 일부분으로서 마음을 우매하게 작용하는 번뇌이다.

이상과 같은 8가지 번뇌를 8대수혹(八大隨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수번뇌 가운데서 가장 큰 작용을 가진 번뇌로서 정신을 혼란케 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수번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나타나는 번뇌들로서 정신수행에서 항상 경계해야 할 번뇌들이다.

Ⅳ.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1. 말나식(末那識)의 성립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은 말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의 발견이다.

말나식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원시불교와 소승불교에서 설명하고 있는 육식(六識)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육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데, 평상시의 의식생활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 내용을 보면 평상시의 의식에 나타나는 선(善)의 생각과 악(惡)의 생각 그리고 선의 행동과 악의 행동 가운데 특히 선의 행동만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과 또 종교에 귀의하여 누구보다도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맹세하고 사는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선행을 낙으로 알고 생활한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뜻밖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갖게 하는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평소의 생활태도가 매우 착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던 사람이 갑자기 흉악한 범행을 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경우가 가끔 화제거리로 등장하는 예가 흔히 있다.

이와 같이 평소의 의식생활에 나타나지 않다가 나쁜 마음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가 다시 의식을 통하여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마음을 관찰하며 탐구하는 유식학도들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하여 마음이 정화해 갈 때,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식학자들은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충분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요가(yoga)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한역(漢譯)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라고 하는데 이들이 닦는 요가, 즉 명상은 불교적 선정(禪定)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선정을 닦는 유가행파들이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였다. 부사의(不思議)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던 것이다.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를 지니고 있어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제6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말나식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하여 심의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해석방법은 종래에 내려오던 심의식사상을 소승불교와는 달리 확대 해석하여 심(心)을 아라야식으로 해석하고,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하였으며,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식(六識)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가행파들은 곧 유식학도로서 종래의 심의식 사상을 혁신하여 대승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범어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라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하게 되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팔식(八識)으로 분류되어 작용하고 있다고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상이 후세에 중국에서 번역될 때 한문으로 제7식(第七識)을 의(意) 그리고 육식 가운데 제6식(第六識)을 의식(意識)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진제삼장 등 구역가(舊譯家)에 속하는 유식학자들이 번역한 것이고 그 뒤에 현장법사가 인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많은 범본(梵本)을 번역할 때 제7식은 말나식(末那識)이라 번역하였고, 제6식은 의식(意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구유식가(舊唯識家)들이 번역한 의(意), 의식(意識)은 의(意) 자가 두 번 반복되어 논전 등에 자리잡고 있으니까 후학들이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장법사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제7식인 의(意)를 원어로 두기로 하고 말나(manas)라고 번역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국과 한국의 유식학계에서는 그 후 말나식과 의식으로 그 성질을 분명히 하여 읽게 되었고 설명해 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고 있는 심식으로 단정하였다. 그리하여 유식학파에서는 의식과 말나식에 나타나는 번뇌의 성질과 심체의 성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선정(禪定)의 이름도 구별하여 호칭하고 있다. 그것은 선정을 수행할 때 의식의 번뇌만을 정화하는 선정의 이름을 무상정(無想定)이라 하였고, 또 의식의 번뇌는 정화되었지만 때때로 의식에 영향을 주면서 아직도 번뇌의 작용을 야기하며 또한 번뇌 중에서 가장 뿌리가 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지니고 있는 말나식까지 정화하여 완전히 해탈케 하는 선정의 이름을 멸진정(滅盡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들은 이와 같이 선정의 이름을 정하여 불교 이외의 종교인 외도(外道)들은 무상정을 닦아 의식까지의 번뇌만을 정화하지만 불교(聖敎)에서는 더욱 깊이 있는 말나식의 번뇌까지 정화하고, 완전히 해탈의 경지에 도달케 하는 멸진정을 수행한다고 외도의 선정사상과 구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이 우리 인간의 심성 내에 있다고 보고 그 체성을 독특하게 설명하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말나식의 체성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말나식(末那識)의 체성론(體性論)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다. 말나식의 사량은 삼량(三量)설에 비하면 비량(非量)에 속한다. 비량이라는 말은 비(非)는 그릇 비(非)자로 해석하고 량(量)은 헤아린다는 말로서, 즉 인식한 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대상을 그릇되게 인식하여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번뇌식(煩惱識)의 인상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이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사량(思量)이라는 뜻도 식의 작용에 포함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 말하는 8식(八識)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는 데 있다. 이제 말나식을 다른 식과 몇 가지 비교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안식(眼識) 등 전5식(前五識) : 이들 전5식은 사량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사량하는 작용은 하지 않으며 또 오식의 심체는 그 작용이 간간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전5식은 항상(恒) 지속하고 심세(審細)한 사량심이 부족하다(恒審俱無).

* 제6의식(意識) : 의식은 심세(審細)한 사량심은 야기하나 그 심체의 작용이 가끔 단절되는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출생하면 사량의 작용이 단절되고 무상정(無想定)에 들면 역시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또 멸진정(滅盡定)에 들면 역시 의식의 작용이 단절되고 극심한 수면(極睡眠)에 들면 의식작용이 단절되며, 그리고 졸도하거나 의식불명(極悶絶)일 때 의식작용이 단절되는 등 이상의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작용이 단절된다고 한다. 이러한 경우를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은 오위무심의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심세(審細)한 사량의 작용은 야기하지만 말나식과 같이 심체가 항상 지속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량식(思量識)으로 취급을 받지 못한다(審而非恒).

* 제8아라야식 : 아라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심이 될 자격을 잃게 된다(恒而非審).

* 제7말나식 : 말나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속과 심세한 사량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명실공히 사량심의 자격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라야식과 같이 삼계를 윤회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량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은 항상 심세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恒審俱有).

이상과 같이 제7말나식은 여타의 심식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작용을 항상 야기하므로 이 식을 사량식(思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어떻게 사량의 작용을 일으키며 그 사량의 내용은 무엇인지 이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식이든 심식은 인식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사량하고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세친논사(世親論師)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다.

다음의 제이능변(次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나라고 이름한다(是識名末那). 말나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依彼轉緣彼) 사량하는 것으로서 성과 상을 삼는다(思量爲性相).

이를 해석해 보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모체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자체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가령 어머니 태(母胎) 안에 태어날 때 인간의 모습으로 아라야식이 최초로 능히 변화한다고 해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그 다음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심식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심식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依彼)하여 전생(轉)해 가지고 다시 인식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반연(緣彼)하며 사량하는 것이며 이것을 성질과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량의 뜻은 아라야식의 참 모습인 무아(無我)의 경지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망각하고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는 번뇌를 야기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3. 말나식(末那識)과 사번뇌(四煩惱)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말나식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깊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번뇌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말나식에 두고 있으며 말나식은 항상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는 마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사번뇌는 영원한 진리이며 중도(中道)의 경지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해서 문득 망각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한 데서 나타나는 번뇌의 작용을 말한다. 그 번뇌의 종류는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가지를 말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아치(我痴) : 아치는 나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우리가 보통 집착심으로 나를 내세우는 나가 아니라 그 집착심이 있기 전의 나를 뜻한다. 그것은 곧 무아(無我)라고도 하며 진아(眞我)라고도 한다. 이러한 나는 다른 말로 말하자면 진여성(眞如性) 또는 불성(佛性) 그리고 법성(法性)과도 통하는 나이다. 이와 같은 나에 대하여 전도된 마음으로 착각하고 집착하는 작용을 치(痴)라 하며 치는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무명은 무지로서 모든 진리를 비진리적으로 전도(顚倒)하는 마음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도란 마음이 뒤집어졌다는 말이며 항상 진리를 정반대로 착각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이러한 작용에서 나타나는 마음을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심을 아치(我痴)라 할 수 있는데 아치의 마음이 야기하는 그 순간을 해설하여 아집(我執) 또는 법집(法執)이라 한다.

아집은 아치와 통하는 말로서 마음 위에 떠오르는 것들이 인연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망각하고 또 평등한 무아(無我)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집착함을 뜻한다. 또 법집은 진리로운 법칙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를 집착함을 뜻한다. 즉 마음속의 진실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법집이고 동시에 나라고 고집하는 것을 아집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집과 법집은 동시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아집과 법집이 없는 경지가 곧 무아(無我)인 것이며 이 무아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을 부단히 수행해야 한다. 마음을 수행하는 도상에서 제일 먼저 정화되는 것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 오식이고, 그 다음에 정화되는 마음은 의식(意識)이다. 그리고 최후에 정화되는 마음은 말나식(末那識)으로서 이 말나식이 정화 될 때, 위에서 말한 아집과 법집이 없어지고 또 여기서 말하고 있는 아치(我痴)의 번뇌도 없어진다. 이러한 경지를 우리는 성불(成佛)의 경지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며, 또한 오도(悟道)라고 한다.

그 이유는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심을 말나식이라 하고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범부의 것이며, 반대로 만약 말나식의 번뇌가 다 정화되었다면 성불의 경지로서 다시는 더 정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곧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며 동시에 무한한 진여의 경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의 번뇌사상과 수행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이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말나식을 기준으로 하여야 하며 종래의 학자들도 또한 그렇게 하여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의 위치는 오도(悟道)의 경지를 설명할 때에 매우 필요할 뿐 아니라 번뇌와 수행을 설명할 때도 중요한 이론적 근거로 삼아왔다.

* 아견(我見) : 아견은 위에서 살펴본 아치라는 번뇌가 야기한 후에 곧 나타나는 망견(妄見)을 뜻한다. 즉 무아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하고 이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견(邪見)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번뇌심이 매우 고정되어 나라는 집념이 강화된 경지를 말한다. 아집의 작용이 고정화되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하며 이러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음으로써 온갖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7말나식이 제6의식의 의지처인 의근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말나식의 아집과 법집의 영향을 받아 자기 이익을 위한 모든 행동을 나타나게 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에 의하여 작용되는 아견의 현상은 보통 행동에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대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아만(我慢) : 아만은 아치의 번뇌에서 아집이 생기고, 아견에서 더욱 객관화된 번뇌이다. 즉 나를 밖으로 나타내려는 심리가 싹 튼 것이며, 그 생각이 강하게 나타나면 오직 자기만이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못하다는 태도가 은연중에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평등한 진리에 대한 망각과 더불어 집착한 나를 거만하게 나타내는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아만에는 자신이 남보다 수승하다는 아승만(我勝慢)이 있고, 또 자신이 다른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이 고귀하다는 아등만(我等慢)이 있으며, 그리고 실제로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높고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나타내는 태도는 겸손한 체 하는 아열만(我劣慢) 등의 구별이 있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멸시하는 태도는 모두 아만에 속한다.

* 아애(我愛) : 아애는 마음속 깊이 집착한 자아(自我)에 대하여 참으로 소중하다고 애착하는 정신작용을 뜻한다. 즉 마음속에 참다운 자아(眞我)를 망각한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비진리적이고 일시적인 자아(假我)를 설정하여 고정적으로 탐심(貪心)과 애착심을 야기하는 마음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에는 사번뇌(四煩惱)가 항상 야기하게 된다. 이들 사번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모두 나(我)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참다운 나에 대한 망각(痴)과 더불어 파생되는 망견(妄見)과 거만과 탐애 등의 심리작용을 사번뇌라고 하는데 이들 심리작용은 항상 자아를 유일무이한 제왕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서 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작용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집착된 나(有我)는 항상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그 실체는 영원히 불멸하는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들을 모두 번뇌의 근본이 된다고 해서 근본번뇌(根本煩惱)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번뇌가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 그밖에 가지와 같은 번뇌(枝末煩惱)를 야기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말나식과 더불어 시작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과거로부터(無始劫來)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시도 단절됨이 없이 야기하는 번뇌라고 일러오는 것이다. 참으로 이들 번뇌는 가장 미세(微細)하기 때문에 범부들의 지혜로는 가히 알 수 없다고 하였으며 팔지(八地)보살 이상의 성인들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전해온다.

그것은 이들 번뇌 가운데서도 아치(我痴)는 평등한 일여(平等一如)의 진아(眞我)에 대하여 최초로 착각하는 번뇌에 속한다. 이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아직 분화(分化)되기 이전의 번뇌로서 이러한 번뇌의 경지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상분과 견분이 미분화된 상태의 번뇌라는 뜻은 상분(相分)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며, 견분(見分)은 능히 인식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마음속의 주관(見分)과 객관(相分)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분별의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절대경지인 진여성(眞如性)을 망각한 것이 아치의 번뇌로서 그 망각한 심리작용이 아직 객관화되지 않은 채 무명만이 나타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마치 기신론(起信論)에서 말하는 업상(業相)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원효대사와 현수대사 등이 주석한 {기신론소(起信論疏)}에 의하면 업(業)이란 동념(動念)을 뜻하며 일심(一心) 위에서 일념(一念)이 최초로 동요한 상태를 업상(業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미세한 경지를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유식학(唯識學)의 심분설(心分說)을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서 마음의 작용은 무궁무진함을 나타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모든 심식의 인식내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 사분설(四分說)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론은 매우 타당성이 있어서 기신론 주석가들도 인용하고 있다.

가령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인식할 때 마음 위에 떠오르는 영상을 상분(相分)이라 하고 동시에 그 상분을 상대로 하여 선악(善惡)의 내용으로 분별하는 작용을 견분(見分)이라 한다. 그리고 그 견분작용을 다시 자체 내에서 틀림없는지의 여부를 증명하는 작용을 자증분(自證分)이라 이름하며, 또 자증분을 뒤에서 재증명하는 작용을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사분(四分)작용이 있는데 이는 주로 상대적 인식내용을 설명할 때 많이 활용한다. 이에 의하여 상대를 떠난 절대의 진리는 상분과 견분의 상대성이 없는 경지인 것이며, 따라서 설사 진리를 망각하였다 할지라도 아직 객관화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에서 상견미분(相見未分)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하여 기신론의 업상(業相)의 상태나 유식학의 아치의 상태가 서로 동일한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의 사번뇌는 매우 미세한 것이며 동시에 이를 정화하는 데는 부단한 수행이 뒤따르게 된다. 이를 완전히 정화하려면 이른바 삼현(三賢)보살의 수행으로도 불가능하며 적어도 십지보살(十地菩薩) 중 제7지보살(第七地菩薩)의 지위에 올라야 말나식에서 작용하는 아집의 번뇌가 겨우 없어진다.

그 밖의 법집과 미망의 습기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로서 구경각(究竟覺)을 증득한 경지에 도달해야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생기번뇌란 선천적이며 또한 원천적인 번뇌라는 뜻으로서 이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이르러서 소멸하게 되며 동시에 성불의 경지에 오르면 완전히 정화되는 번뇌이다.

이러한 경지에 대해서 세친의 유식삼십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라한의 성위(聖位)와 멸진정의 선정과 출세간의 경지에서만이 말나식의 번뇌가 없어질 수 있다(阿羅漢滅盡定出世道無有)'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라한의 경지는 불타의 경지를 말하며, 또 멸진정은 구경(究竟)의 정각(正覺)을 이루는 금강유정(金剛喩定)에 해당하는 선정을 뜻한다. 그리고 출세도는 속세적인 번뇌와 세간적인 번뇌를 해탈한 진리의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청정한 마음을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 보살도의 수행력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되고 정화되니까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오로지 진여의 성(眞如性)만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진여성을 아무런 번뇌의 장애없이 완전히 증득하고 관찰하는 경지를 또한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견성이라는 말은 선가(禪家)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선가에서도 말나식의 사량심(思量心)과 도거심(掉擧心)을 정화하는 것을 선정이라고 하였고 또 말나식의 번뇌를 완전히 정화한 경지를 견성이라고 하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1

위에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 7식(七識)을 살펴보았다. 이 일곱 가지 식(識)은 우리 인간의 정신활동에 온갖 심부름을 다 하는 심식이다. 눈으로 색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며, 몸으로 촉감을 느끼는 등 전오식(前五識)은 오근(五根)을 통하여 부지런히 출입하면서 객관계를 접촉하고 또 선과 악을 대하며, 고와 낙을 맛보며 일을 한다.

그러나 그 전오식만으로는 결정적인 판단과 분별력이 부족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의식이 가담하여 선악과 고락을 구별해 준다. 그리고 내면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사를 생각하고 추리하며 예측하고 판단하며 온갖 인간의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이와 같은 의식이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고 선악의 행동을 하고자 결정을 내릴 때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시작되고 또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정화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다.

다음 말나식은 본래 인간이 천부적으로 보존하고 있는 불성과 진여성인 본성에 대한 착각을 야기하며 무지의 근본이 되는 무명을 형성하는 최초의 정신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타의 심식도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되며 우리 인간의 마음은 선성과 악성으로 갈라지는 분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마음을 유루심(有漏心)이라 하며 유루심이 잠재하고 있는 한 선업과 악업을 조성하면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에는 작용에 해당하는 심소(心所)가 있으며 심소는 51종(五十一心所)이나 있어 인간정신의 활동은 다 여기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이 다양한 성질을 가진 전칠식(前七識)과 식에서 발생되는 심소의 활동은 모두 업력이 되는 것인데, 그 업력은 과연 어디에 보존되어야만 하는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무엇에 의하여 유지되며 수명도 무엇에 의하여 좌우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자들이 추구하고 탐구함에 의하여 비로소 아라야식(alaya- vijnana)이라는 정신체가 발견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아라야식이 앞에서 말한 정신(七識)과 육체(五根)을 유지시켜 주고 또 이들 정신과 육체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도 보존하여 다음의 결과를 받도록 해 주는 주체가 된다.

이 아라야식은 인도의 무착보살을 비롯한 선각자들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다. 이미 보존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체를 부처님은 이미 가르쳐 주셨지만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였고 무착보살이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이제 무착보살을 비롯한 여타의 선각자들이 저술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성유식론(成唯識論)},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 등 여러 유식학 계통의 논서들에 의하여 아라야식의 내용을 하나하나 해설하기로 한다.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여러 번역자에 따라 아라야(阿梨耶. 阿리耶), 아라야(我羅耶) 등으로 표현된 것이 많다. 그 뜻은 번역자들에 의하여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체로 같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중국의 현장법사(玄裝法師 600~664)가 번역한 것으로 이른바 신역(新譯)이다.

그러나 그 밖의 칭명은 대부분 현장법사 이전에 번역한 구역(舊譯)에 속한다. 그 뜻은 종파(宗派)에 따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지론종(地論宗) 계통에서는 아라야식을 청정식(淸淨識)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상종(法相宗)과 섭론종(攝論宗) 계통에서는 망식(妄識)으로 보았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법상종의 의견을 따라 설명해 온 것이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어느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식학 이해에 도움이 되고 또 우리의 현실에 맞는 이론이라면 모두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삼상(三相)

아라야식을 설명하고자 할 때 먼저 그 내용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다. 첫째는 자상(自相), 둘째는 과상(果相), 셋째는 인상(因相)이다. 이들을 합쳐 아라야식의 삼상(三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세 가지 모습이라는 말로서 이들 삼대 모습(三大相)을 잘 이해하면 아라야식의 전모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심상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자상(自相)은 아라야식의 자성(自性)을 말하며 다른 말로는 아라야식의 성능(性能)을 뜻한다. 이 자상은 여타의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을 제외하고 따로 내용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삼상(三相)의 뜻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상은 아라야식의 자체에 대한 자성(自性)과 성능(性能)을 말하며, 과상은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결과와 모습을 뜻한다. 그리고 인상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만물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내용을 말한다. 이제 이들 삼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자상(自相)

아라야식의 자상은 이 식의 총체(總體)를 의미한다. 유식론에 의하면 자상은 총체이고 과상과 인상은 별체(別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자상은 중생들의 선업과 악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의 뜻도 가지고 있고, 또 중생들이 지은 선업과 악업의 업인(業因)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상의 뜻도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아라야식 자상은 과상과 인상의 내용을 가지고 자체(自體)를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상과 인상을 떠나서 따로 자상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제 아라야식의 자상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alaya)는 본래 인도말인 범어(梵語)로서 장(藏)이라고 한역(漢譯)하였다. 장(藏)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업력들을 감싼다는 뜻에서 포장(包藏)이라는 뜻도 있고, 또 업력들을 포함시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에서 함장(含藏)이라는 뜻도 있으며,

그리고 정신과 육체 등 모든 것을 포섭하여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섭지(攝持)라 하며 동시에 무엇이나 잘 포섭한다는 뜻에서 포섭(包攝)이라는 뜻도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에는 다양한 뜻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정신의 체성이라는 뜻을 부가하여 아라야식(alaya -vijnana)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아라야식의 자체를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렇게 분류한 것은 앞에서 설명해 온 7식(七識)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과의 관계를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 데서 비롯된다. 이들 삼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 능장(能藏) : 능장이라 함은 아라야식이 모든 업력을 능히 포섭하여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이 업에는 반드시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세력과 힘이 있다는 뜻에서 힘력(力)자를 부가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이 업력은 또 종자(種子)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종자(씨앗)가 반드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는 뜻을 따서 호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업력을 종자라고 별명을 붙여 부를 때가 많은데 특히 아라야식과 관계되는 업력들을 종자라고 보통 부른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전7식이 행동하여 조성한 업력, 즉 종자를 능히 포장하여 보존한다는 뜻에서 능장(能藏)이라 한다. 이러한 능장의 뜻은 중생들이 행동으로 조성하는 모든 업력을 하나도 밖으로 유실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자업자득의 법칙에 의하여 자기가 지은 업력에 대하여 자신이 받도록 해 주는 정신적인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전7식이 조성한 종자와의 관계에서 능장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모든 종자는 소장(所藏)의 입장이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능동적으로 종자를 포섭하여 유지시키는 입장이 되고 또 이때의 종자는 수동적인 입장으로 아라야식에 의하여 포섭되어지고 포장되어지는 입장이 되므로 이를 소장(所藏)이라 한다. 여기에 능장과 소장의 상대적인 뜻이 있다.

* 소장(所藏) : 소장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는 달리 아라야식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종자를 포섭함을 뜻한다. 그리고 반대로 전7식이 조성한 선악업(善惡業)의 종자는 오히려 능동적인 입장에서 아라야식에 보존되고자 해서 포섭되므로 이들 종자를 능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칠식의 모든 정신과 육체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아라야식에 들어가서 스스로 보존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큰 창고가 화물이 들어와 쌓아도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듯이 종자를 맞이하므로 이때의 아라야식을 소장(所藏)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능장과 소장은 서로 불가분리한 이치에 의하여 이름한 것이다.

* 집장(執藏) :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진 것에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위에서 말나식을 설명할 때, 말나식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망각하고 아라야식의 견분(見分) 등 아라야식을 집착하는 번뇌를 항상 야기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아라야식은 항상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며, 또 집착을 당하는 입장의 뜻을 집장(執藏)이라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집장은 그 행위에 입각해서 능집(能執) 또는 소집(所執)이라고 하는데 능집은 말나식이 능히 아라야식을 집착함을 말하고 소집은 반대로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진 뜻을 따서 명칭을 정했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수동적으로 소집의 입장에 있는 집장(執藏)의 뜻이 있다. 이 집장의 뜻은 위에서 말한 능장과 소장의 뜻도 중요하지만 아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로서 범부심(凡夫心)이라는 대명사를 붙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뜻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집장의 뜻이 아라야식에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과상(果相)과 인상(因相)의 뜻도 범부의 성질과 인과의 내용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집장의 뜻을 제거하는데 많은 수행과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인 능장, 소장, 집장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집장의 뜻은 아라야식을 망식(妄識)으로써 윤회하도록 만드는데 깊은 관련이 있으므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말나식과의 관계로서 말나식이 집착함을 내지 않았다면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의 고해(苦海)에 윤회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과 말나식과의 집장의(執藏義)는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왜 집착심을 야기하게 되었는가. 이는 매우 부사의한 경지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어떤 물건을 내놓듯이 보여 줄 수는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대 학자들은 이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또 그 실상을 알려 주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한 비유를 여기에 소개하여 집장의 뜻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보탬이 되고자 한다.

본래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진리를 지니고 있었다. 아공이란 본래의 자아는 아집의 번뇌가 없는 공한 진리의 위에 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공한 진리는 곧 진리의 실성(實性)을 뜻하며 그 진리의 실성은 아무런 집착될 여지가 없는 중도적 존재이다. 있는 듯 하면서도 없고 없는 듯 하면서도 항상 있는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원리 위에 존재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실성은 항상 무아(無我)의 진리이며 나라고 집착(我執)할 수 없는 공(空)한 이치가 곧 아공의 진리이다. 안에서도 공(內空)하고 밖에서도 공(外空)하며 안과 밖이 동시에 공(內外空)란 진리를 항상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라야식의 실성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공한 진리에 의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부사의한 신통력을 항상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원경지의 진리를 착각하여 고정된 자아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말나식의 아집이다.

다음 아공과 더불어 아라야식의 자체의 법체도 공한 것이다. 아라야식의 자체는 여러 가지 인연의 화합으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한 이치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모든 삼라만상도 공한 진리 위에 개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법공(法空)의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하등의 집착할 까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범부들은 아집과 더불어 인연의 취집(因緣聚集)의 법을 망각하여 집착(法執)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이 공한 이치를 설명하고 증명해 주기 위하여 사물의 바탕은 일미진(一微塵)이라는 비유를 많이 든다. 즉 미진은 무형(無形)의 존재이면서 유형(有形)의 사물을 형성하는 본질이다. 왜냐하면 미진은 극소의 존재이므로 육안으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진이 하나하나가 인연이 되어 모이면 크고 작은 유형의 사물로 나타나게 된다.

또 그 사물이 인연이 다 되어 없어지면 다시 미진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미진과 사물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미진을 떠난 사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며 무와 유가 공존한 것이 현재의 사물인 것이다.

그러나 보통 중생들은 그 본질을 망각하고 형상이 있는 겉모습만을 보고 마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사량하고 분별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사물은 모든 분별과 이원(二元)적인 것을 떠나 초월적인 존재지만 내심(內心)의 망념(妄念)이 싹터 그 실성의 진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겉모습만을 보고 실체가 있는 것으로 착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큰 거울 속의 광명에 황홀하고 또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착각하여 자기 모습의 그림자가 진실한 자기인 줄로 알고 그에 집착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본래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 광명을 갖고 우주의 진리가 그 경지(鏡智)에 비치도록 하는 실성(實性)을 지니고 있었는데,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본성인 말나식이 대원경지에 비친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 황홀경에 착각하여 차별심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야기하여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망각함은 물론 아집과 법집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집을 없애려면 자아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찰하여 대원경지를 나타내는 실성, 즉 불성(佛性)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또 법집을 없애려면 모든 내외의 법체에 대한 실성을 관찰하여야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도 일미진(一微塵)의 본성까지 관찰하여야 사물의 전체를 볼 수 있고 또한 진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본성은 어떠한 그림자나 겉으로 나타난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만 보는 습성이 있으며 그러한 관찰은 말나식이 아라야식의 본성을 망각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하고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어지고 집착되어지는 것 등의 집장의(執藏義)가 생기게 되었다. 즉 능히 집착하는 능집자(能執者)와 수동적으로 집착되어지는 소집자(所執者) 등 상대적인 세계가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이 능분별자(能分別者)와 소분별자(所分別者) 그리고 능집자와 소집자의 관계는 말나식과 아라야식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심성의 근본이 되는 내면세계에서 극히 미량이나마 능소의 분별심이 시작되니까 지말식(枝末識)인 제6의식을 비롯한 육식(六識)에는 추동(?動)의 파도처럼 분별심이 야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 있게 되며 결국 끝없는 무명(無明)과 전도심(顚倒心) 위에 꿈속의 생활이 전개된다.

이와 같이 무명이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번뇌들은 진리를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거짓 마음의 현상들이며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로운 마음의 인식을 실체없는 몽식(夢識)의 작용에 많이 비유한다.

예를 들면 꿈속에서 활동하는 의식은 꿈속의 사물과 현상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또 소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꿈속들의 사물들은 꿈을 깨고 나면 꿈속의 환상이 없어지게 되어 꿈속의 환상에 지나지 않고 또 그것은 실체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객관계의 사물을 보는 것과 마음 속의 정신계를 관찰하여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도 다 몽중의식(夢中意識)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그 실성을 착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유식사상은 이러한 잘못을 시정하고 올바른 진리관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을 내세운다. 즉 오직 일심(一心)뿐이며 일심 외에는 어떠한 경계(境界)나 상대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더불어 모든 것은 마음속의 존재라는 인식과 하나의 경지에서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 곧 유식관(唯識觀)이며 여기에 일진법계(一眞法界)가 전개된다.

또한 여기에 유가사상(瑜伽思想)이 도입된다. 유가(yoga)는 인도의 선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유가의 선정으로 망심을 정화하고 집착을 제거하며 여러 갈래로 분열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의 마음으로 통일될 때 말나식과 같은 집착심이 없어지고 또 집착된 아라야식의 집장의 뜻도 없어지는 경지가 나타나게 된다. 아무튼 꿈속에 나타난 것은 실체가 없는 헛것이며 고정된 경계가 없는 바와 같이 번뇌심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임시이며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말나식의 망심은 견고하여 쉽게 정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으로 인하여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게 되었는데, 그 집장의 탈을 해탈하려면 어느 시기에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에 집장의 뜻이 있는 기간과 없는 경지 등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는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이고, 둘째는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이며, 셋째는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분류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 기록된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 :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나식이 아라야식에 대하여 집착(執藏)하여 실체의 나라고 애착하는(我愛), 번뇌가 지속되는 기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에 집장(執藏)의 뜻이 있는 동안을 뜻한다. 술기(述記)에 의하면 집장의 뜻은 곧 번뇌장(煩惱障)의 뜻으로서 항상 아집을 나타내는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하였다. 아라야식에 이러한 아애(我愛)와 집장(執藏)의 번뇌가 활동하는 현행(現行)의 뜻이 있는 기간은 항상 이기주의적 중생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마음과 육체적 행위는 선과 악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확률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그 행위에 의한 선업과 악업이 분명히 조성되며 선업과 악업은 또 분명히 산과와 악과를 초래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리하여 선악의 세계에 윤회하게 되고 또 때로는 선과를 받고 악과를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는데 이 기간을 아애집장현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애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보통 범부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등은 물론 초지보살인 극희지보살(極喜地菩薩)로부터 제7지 원행지보살(第七地遠行地菩薩)의 지위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말나식에 의한 아애와 집장이 현행하는 기간은 아주 추악한 범부로부터 이미 성위(聖位)에 오른 제7지보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기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상(我執相)의 내용도 대소의 차이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초지보살 이전의 범부중생들에게는 말나식의 아집이 강하여 아라야식의 집장의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초지보살 이상 제7지 보살까지는 말나식의 아집상이 미세하며 극소의 작용만을 야기하다가 결국 보살의 수행력으로 말미암아 제7지 보살 이상은 결국 말나식의 아집이 단절되게 되며 동시에 제8아라야식에게도 집장의(執藏)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동시에 이 경지에 오른 성인들의 제8식을 아라야식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이라는 명사는 아애집장현행위의 기간인 제7원행지보살수행위까지만을 사용하고 그 이상의 성위(聖位)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 : 위에서 제8식(第八識)에게 아라야(阿賴耶)라는 명칭이 사용하게 되는 기간을 제7지 보살까지만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제8지인 부동지보살(不動地菩薩)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法雲地菩薩)에 이르기까지의 제8식에는 순수한 무루심(無漏心)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에 말나식의 아집 현상은 없어도 선업에 의한 과보를 받는 생멸심은 아직도 남아있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범부로부터 제10지 법운지보살까지의 제8식을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지 보살 이상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의 보살들은 추악한 업력으로 악도에 윤회하고 있는 범부중생들에 비하면 벌써 윤회는 해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악과는 아니라 하더라도 선업에 의하여 선과를 받는 인과응보의 업과(業果)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업에 의한 과보를 박게 되느냐'라고 할 때 다름아닌 제8식이 주체가 되어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은 이숙식(異熟識)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제8식이 선과 악의 업력에 의해서 다른 과보를 받는다는 이숙(異熟)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숙이라는 말은 항상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으로서 제8식이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으므로 거기에는 이숙이라는 뜻이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제8식이 중심이 되어 범부들은 물론 제10지 보살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루업(無漏業)이라 할지라도 그 업력에 의하여 업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과보를 받으므로 선악업과위하고 한다.

*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 : 이는 제8식이 유루세계(有漏世界)인 범부로부터 완전한 무루세계(無漏世界)인 불타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집지(執持)하며 불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범부들이 조성한 선업과 악업도 능히 포장하여 유지시켜주고 또 보살들의 선업과 청정무구한 무루업(無漏業)도 추호도 유실하지 않고 보존해 주며 동시에 모든 번뇌를 해탈한 부처님의 무루업까지도, 계속 단절되지 않게 보존하여 주는 심식이 제8식이라는 뜻이다.

이때의 제8식을 아다나식(阿陀那識)이라고 부른다. 아다나(Adana)라는 말은 모든 정신계와 또 육체까지도 잘 유지시켜 준다는 뜻에서 집지(執持)라고 번역한다. 그러므로 아다나식은 위에서 말한 아애집장현행위와 선악업과위 등의 뜻보다 넓은 뜻을 갖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제8식에는 그 내용에 따라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이숙식(異熟識) 그리고 아다나식(阿陀那識) 등 여러 별명들이 있다. 그것은 그만큼 광범위한 작용과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2) 아라야식(阿賴耶識)의 과상(果相)

위에서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을 능장(能藏), 소장(所藏), 집장(執藏) 등 삼장(三藏)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들 삼장 가운데 집장이, 아라야식이 망식(妄識)으로 있는 한 아라야식의 뜻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라야식을 장식(藏識)이라고 번역하듯이 전7식의 행위를 비롯하여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능장과 소장의 뜻도 집장의 뜻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상(果相)의 내용도 모든 업력을 보존하는 능장의 뜻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상은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초래되는 과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보는 업력을 보존한 장식 내의 종자로부터 업인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는 서로 부합하고 화합하여야 성립될 수 있다. 이는 업인을 보존하는 능장과 그 업인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과상(果相)의 내용은 서로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인 과상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살펴본 아라야식의 자상(自相)은 아라야식 자체에서 야기되는 내용인 것이고, 이제 고찰하고자 하는 과상은 아라야식이 중심이 되어 중생의 과보를 받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대한 설명은 그 작용에 따라 별명을 붙여 다양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제8지 보살 이상의 성인들이 수행력에 의하여 말나식의 아집을 끊어버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상에 속하는 집장의(執藏義)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자상의 자체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게 상속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과상(果相)은 아라야식의 업력에 의하여 받은 결과로서 한 세상만 살고 죽을 때에는 과상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과상은 자상보다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상을 유식학에서는 일취생(一趣生)의 과체(果體)라고 한다. 일취생이란 삼계육도 가운데 한 중생계에서 태어나서 그곳의 중생의 탈을 쓴 과보를 받고 살다가 사망할 때 까지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상은 아라야식이 자체 내에 보존한 업력에 끌려 어느 세상에서 과보를 받고 사망할 때까지의 과체를 뜻한다. 물론 학문적으로는 아라야식(靈魂)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때 아라야식의 삼상(三相) 중 과상(果相)을 필수적인 내용으로 설명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과상에 대한 설명을 보면 제8식은 선업종자(善業種子)와 악업종자(惡業種子)에 의하여 삼계(三界)와 육도(六道)에 초생(招生)하게 되며 이는 태(胎) 란(卵) 습(濕) 화(化) 등 사생(四生)의 총보(總報)로서 이를 이숙과(異熟果)라고 한다. 이는 과상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풀이해 보기로 한다.

제8아라야식은 그 성질이 본래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무부(無覆)는 아라야식 자체에서는 번뇌가 없다는 말이다. 부(覆)는 번뇌라는 말과 그 뜻이 통하는 말이다. 그 이유는 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어둡게 덮어버리고 빛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부장(覆藏)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 의하여 집착되어 수동적인 소집장(所執藏)의 뜻만 있고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능집(能執)의 작용은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제6의식 등 육식이 악업을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뜻에서 아라야식을 무부성(無覆性)이라 한다. 그리고 무기성(無記性)이라는 말은 아라야식이 선성(善性)에 속하지도 않고, 악성(惡性)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선성에도 기록(記)되지 않고 또 악성에도 기록되지 않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무기성(無記性)이어야 선보와 악보를 받을 종자를 공정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식논사에 의하면 아라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 때문에 무기성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만약 아라야식이 선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거나 악성에 치우친 성질을 갖고 있다면 이는 미래의 과보를 받을 주체로서 그 자격이 상실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이미 선성이라면 악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입장이 되고, 또 아라야식이 이미 악성이라면 역시 선업의 종자를 거부하거나 보존할 수 없는 바탕이 되고 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그 자체에 번뇌가 없는 무부성(無覆性)이어야 하고 또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으로서 당당히 업력을 보존할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문헌과 같이 아라야식은 선업종자와 악업종자를 함께 보존하고 있다가 그 선업과 악업의 세력에 의하여 삼계와 육도의 세계에 출생하여 과보를 받게 된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뜻하며 이를 다시 육도라고 한다. 육도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 등의 세계를 말한다. 이들 세계의 내용도 확실히 알아야 아라야식을 중심한 윤회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세계설은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업력에 따라 삼계 육도에 두루두루 다니며 윤회하게 되는데 그 과보를 받는 출생의 형태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생(四生)이라고 한다. 사생은 중생이 태어나는 네 가지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말한다. 태생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모친의 태중에 태어나는 것을 뜻한다.

난생은 닭과 같이 모든 중생들이 알(卵)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며, 습생은 곤충과 같은 생명체가 습기에 의하여 출생하는 것을 말한다. 끝으로 화생은 지옥중생과 천국의 천인들과 같이 부모나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독으로 몸을 나투어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중도적 입장에서 악업의 세력이 강하면 악도에 출생하고 선업의 세력이 강하면 선도에 태어나는 등 삼계육도의 여러 세계에 사생의 여러 모습으로 출생하게 되는데, 최초에 태어나는 총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이때의 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총보의 뜻은 아라야식이 총체가 되어 출생할 때 출생하는 태아의 전체 과보를 받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태아로 태어날 때, 이목구비 등 여러 신체적조건과 정신적인 작용 등을 구비하고 발생하는 가장 근원적인 총체를 총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이 총보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신작용과 육체의 별체가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총보를 성립시키는 아라야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하고 총보에서 다시 여러 가지 업력(異熟習氣)의 도움으로 정신과 육체가 점차 구비되어지며 성장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숙생은 총체에서 별체가 발생하여 태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며 이 가운데 출생의 근본이 되는 이숙식을 진이숙(眞異熟)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8아라야식을 이숙식이라고 별명을 붙인다. 이숙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면 이숙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업력에 의하여 금생의 몸과 다른 몸을 내생에 변화시켜 과보를 받는다는 뜻에서 이숙식이라고 부른다. 이숙은 그 뜻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 시간적으로 찰나찰나 몸과 마음이 변천한다는 뜻(異時而熟)과 둘째, 공간적으로도 찰나찰나 마음이 변한다는 뜻(變異而熟)이 있고, 셋째, 과보의 종류를 달리 바꾼다는 뜻(異類而熟)도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이숙의 뜻 가운데 윤회하면서 과보를 받는다는 뜻은 세 번째의 이숙설이 가장 적합한 학설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적이고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이숙은 우리 인간이 현재 살고 있으면서 정신과 육체가 선과 악으로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뜻 가운데 동시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망하여 내생에 다른 몸으로 출생하는 것에서 이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숙의 의미는 매우 광범위하다.

이와 같이 모든 이숙의 뜻은 아라야식을 제외시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이 없으면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고 종자를 보존할 수 없으며 또 윤회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이 이숙식이 되고 또 과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성유식론장중추요(成唯識論掌中樞要)]에 의하면 "진이숙(眞異熟)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업과(業果)요, 둘째는 부단(不斷)이며 셋째는 변삼계(遍三界)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업과(業果) : 이는 위에서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에 대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라야식이 중심하여 전생의 업력에 따라 과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성질이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기 때문에 선업과 악업을 함께 보존하여 선보도 받을 수 있고 악보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부단(不斷) : 부단은 아라야식의 체성이 계속 유지되며 영원히 단절되지 않기 때문에 간단없이 계속 삼계육도에 윤회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변삼계(遍三界) : 변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를 두루두루 윤회하면서 업력에 따라 새로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심식(心識)은 오직 아라야식 뿐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단절됨이 없어 계속 상속하고 동시에 어떤 업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업보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은 세 가지 뜻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또 진이숙(眞異熟)인 이숙식(異熟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밖의 심식들은 어찌하여 진이숙이라 할 수 없고 또 이숙식이라고 할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제7말나식은 그 체성에 염성(染性)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고 한다. 그 염성은 곧 번뇌를 야기하며 번뇌는 다름 아닌 말나식의 성품이 악성(不善性)이며 또한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라는 것을 뜻한다.

윤회의 주체는 그 바탕에 선악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해야 하는데 말나식에 번뇌의 성질이 있다는 것은 그 자격이 없다는 엄격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업력에 의한 과보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두 가지 자격은 가지고 있다. 즉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7말나식은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항상 부단(不斷)하며 상속(相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계에 어디에나 두루두루 단절됨이 없이 지속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이 두 가지를 구비하고 있으나 다만 업과의 뜻이 없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이숙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제6의식의 경우를 보면 이 의식은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으나 부단의 뜻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이숙식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제6의식은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거나,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 등의 선정에 들면 그 염오(染汚)의 체성이 단절된다고 한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졸도하거나 의식을 상실했을 때의 극민절(極悶絶)과 수면(睡眠)이 깊이 들었을 때의 극수면(極睡眠) 등 이러한 경우에는 의식이 단절된다.

이상과 같이 다섯 가지 경우에 의식이 단절되는 것을 오위무심(五位無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오위무심이 있기 때문에 제6의식은 윤회의 주체가 못되며 동시에 진이숙(眞異熟)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업과와 변삼계의 뜻은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선과 악과 무기 등에 공정하게 통하고 또 삼계, 육도에도 두루 단절되지 않고 윤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안식(眼識) 등 전오식은 업과의 뜻은 있어도 부단(不斷)과 변삼계(遍三界)의 뜻이 없다. 그러므로 말나식과 의식과 함께 진이숙(眞異熟)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심식들은 업과와 변삼계와 부단의 뜻에서 하나 내지 둘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진이숙의 자격이 없고, 오직 아라야식만이 모두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로서 진이숙의 자격이 있다고 한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2

1.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삼상(三相)

3) 아라야식(阿賴耶識)의 인상(因相)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을 살폈다. 아라야식은 인연에 따라 여러 가지 중생의 몸을 받고 또 그 몸과 정신을 부단히 변화시키고 또 유지시킬 수 있는 체성(體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이숙식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또 아라야식은 진이숙(眞異熟)으로서 과보를 받는 총체라는 뜻에서 과보식(果報識)이라고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과보식은 과체(果體)로 최초에 과보를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아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중생이 삼계와 육도 내에서 업력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을 때, 과보를 아라야식이 최초로 받으며 그리고 능히 변화시켜 무형(無形)의 업력과 더불어 유형(有形)의 과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은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최초의 생명체이며 근원이다. 여기에 의지하여 칠식(七識)과 육근(六根)이 생기며 출생 후도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생활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인간의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것을 아라야식의 별명인 아다나식(阿陀那識)에서도 알 수 있다. 아다나식을 집지식(執持識)이라고 번역하며, 집지(執持)의 뜻은 모든 선업과 악업을 비롯하여 정신과 육체도 함께 잘 붙들어 유지시킨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우리 인간을 비롯하여 중생의 과보를 받는데 매우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이숙식(異熟識)으로 과보를 받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이 과보체(果報體)를 출생하는 내용을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 학설은 이른바 인간의 태아(胎兒)가 출생하는 것과 그 내용이 같으므로 불교적 태아설과 함께 설명해 보고자 한다.

가) 인능변(因能變)과 태아(胎兒)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능히 변천한다는 뜻으로서 과보에 대한 원인의 변화를 설명하는 학설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이 불교의 교리는 반드시 원인을 밝혀주는 것이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능변은 모든 중생이 과보를 받을 때, 그 업인이 어떻게 변화하여 과보가 발생하는가를 소상히 알려주는 학설이다.

물론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들이 출생하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적어도 사생(四生)의 내용을 다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나 모든 교리가 그렇듯이 여기서도 우리 인간을 대표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인능변과 과능변도 인간의 태아와 관계시킴으로써 더욱 현실성이 있고, 또 이해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태아로 출생하기 전에 어떠한 영혼이 어머니 태중에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과거 소승불교에서 가장 많이 취급해 왔고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위에서 말한 인능변과 과능변의 총체가 되는 아라야식을 말할 때 많이 나타난다.

소승불교에서는 그 문제를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등 사유(四有)의 사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유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중유(中有)는 전생에 지은 모든 업력을 지니고 사망해서 다시 출생하기까지의 중간 생명을 뜻한다.

* 생유(生有)는 중유 기간의 영혼(阿賴耶識)이 출생의 인연을 만나 이승에 출생하는 순간을 말한다.

* 본유(本有)는 중유가 출생하여 이승에서 살다가 사망하기까지의 생명체를 뜻한다.

* 사유(死有)는 이승에서 살다가 인연이 다 되어 사망하는 순간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소승불교에서는 중생이 윤회하는 과정을 사유(四有)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사유 가운데 중유와 생유가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아라야식의 인능변과 과능변과의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설명의 편의상 비록 소승불교의 교설이지만 요약하여 인용해 보기로 한다.

소승불교의 중유설은 매우 인격화된 논리를 갖고 있다. 즉 중생이 사망하면 49일을 전후하여 거의 내세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생활을 5,6세의 아동만큼이나 큰 존재로서 냄새를 맡고 식사를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은 중유는 매우 검은 빛을 발휘하며 업력이 같은 무리들끼리 산다. 선업을 많이 지은 중생들은 그 몸에서 매우 흰 빛을 발휘하며 역시 선업을 가진 중유들끼리 산다.

중유는 부단히 출생처를 찾아 우주 공간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므로 중유의 별명을 구유(求有)라고도 한다. 구유라는 말은 공간에 있으면서 출생처를 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유를 건달바라고도 하는데, 이를 번역하면 심향(尋香)이라 하며 심향은 냄새를 먹고 사는 중유의 생활을 나타낸 말로서 냄새를 찾아다닌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공간에 있는 중유는 이승의 출생처를 찾아다니다가 만나면 다시 생과 사를 되풀이하게 된다. 자신의 업력과 인연이 맞는 부모와 세계를 발견하면 곧 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유는 천안(天眼)과 같이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멀어도 다 볼 수 있는데 다만 업력에 적합한 것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은 업력과 합당한 부모와 환경을 발견하면 급속도로 그 세상에 알맞은 업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인간계의 부모를 발견했다면 욕계의 부모는 음욕(淫慾)이 많은 중생들이 많으니까 그 중유도 곧 부모에 대한 애정을 품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가 될 중유는 부친에게 애정을 품고, 남자가 될 중유는 모친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

이는 욕계의 이성(異性)이 서로 상대를 사랑하는 업력과 부합하는 업력의 발로이다. 그리하여 중유는 이승의 모친에게 있는 태중(胎中)이 곧 궁전과 같다고 착각하고 태내에 점점 접근하여 결국 탁태(託胎)하고 만다.

이와 같은 중유가 태어나는 과정은 소승불교의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과 대승불교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에서 유사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확실히 내세우지 못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아라야식(阿賴耶識)을 내세워 태중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 이론이 곧 아라야식을 중심한 총보(總報)와 별보(別報)의 설명이다. 그리고 대승유식학에서의 소승불교의 중유 대신에 아라야식을 윤회의 주체로 하여 모태(母胎)에 태어나는 최초의 생명체로 확정짓게 된다.

나) 아라야식(阿賴耶識)에 대한 8가지 증명

이와 같이 윤회의 주체로 확정짓게 된 이유를 유가사지론에서는 여덟 가지를 들고 잇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전생에 지은 업력을 무엇이 보존하였다가 금생에 태어나게 하는가? 아라야식이 존재함으로써 전생에 업력을 보존할 뿐 아니라 금생에도 출생할 수 있고 또 안식(眼識) 등 여러 심식(心識)도 활동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육식(六識)도 활동할 수 있고 또 선악의 업력도 조성하게 되는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이 세상의 최초의 생명체가 있을 수 없고 또 다른 정신체(心識)도 생기(生起)하지 못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안식 등과 함께 활동하는 의식과 의식의 기억력이 명료하게 나타날 수 없고 또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유루종자(有漏種子)와 무루종자(無漏種子)를 간단없이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또 육식신(六識身) 체성 등은 단절이 많은데 무엇으로 인과응보의 업력설을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중생 각자가 행동하는 아업(我業)과 인식의 대상인 경업(境業)과 중생이 의지하는 의업(義業)과 중생이 살고 있는 기업(器業) 등 사종업(四種業)을 설명할 수 없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의 사려(思慮)가 자유롭게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정(禪定)의 유무(有無)를 구별하기 힘들게 된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멸진정(滅盡定)과 같은 깊은 선정에 들 수 없고 또 멸진정에 들면 심식(心識)과 육체가 서로 분리될 것이며 현재의 수명도 단절되는 모순을 따르게 될 것이다.

* 만약 아라야식이 없다면 인간이 사망할 때 상체(上體)가 마비되거나 하체(下體)가 냉촉(冷觸)되면서 점점 시체화하는 절차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의식도 점차 마멸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에 단절될 것이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이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팔종의 증거를 들고 있다. 물론 그 가운데는 깊이 생각하여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도 없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아라야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 생활을 설명할 때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많다.

특히 그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날 때 최초의 생명체가 생기할 수 있는 것은 곧 아라야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사망할 때 최후까지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도 아라야식 때문이라고 주장한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진리이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는 인간의 주체를 여덟 가지 증거를 들어 규명하려고 노력하였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세의식(細意識)과 일미온(一味蘊), 그리고 보특가라(補特伽羅)와 궁생사온(窮生死蘊), 또는 근본식(根本識) 등 여러 심식사상(心識思想)을 내세워 윤회의 주체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라야식 사상만큼 그 이론과 사상이 구족하지 못하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서 아라야식이 가장 진리적인 이론을 구비하고 있는 심식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날 때도 가장 최초의 생명체가 되고 있음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어머니 태중에 최초의 생명체로 안착한 것은 아라야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식(識)은 모태에 태어나면 정지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착 즉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부모의 정혈(精血)과 아라야식과 화합할 때 최초의 태아가 출생하게 되는데, 그 후 즉시 인간의 모습을 꾸미는데 활동을 개시한다.

이때의 부모는 연(緣)이 되고 아라야식은 업력과 함께 인(因)이 되며 인과 연이 함하여 결과(果報)가 생기는 것인데, 그 태아는 곧 과보이다. 인과법에 있어서 인과 연의 도움이 없으면 과를 발생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아라야식에는 연이 있어야 하고 그 연은 바로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전생의 인(因)과 부모의 연(緣)이 합하여 태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러나 탄생한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계속 태아의 내용은 업력과 연에 의하여 완숙되어지게 된다. 여기에는 아라야식이 핵심이 되어 그 내용을 완숙하게 되도록 하는데 그것이 곧 인능변(因能變)의 조화이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모태에 안착하자마자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를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동시에 아라야식에 보존된 전생의 업력이 부모의 연이 가해짐으로써 능히 변화를 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업인이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곧 인간의 형체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업인이 연을 만나 인간의 과체(人體)를 형성시킨다는 뜻이다. 그 인(因)의 내용은 등류습기(等流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 등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제 두 습기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 등류습기(等流習氣)

등류습기(等流習氣)의 뜻은, 등(等)은 상사(相似) 즉 서로 같다는 뜻이고 유(流)는 유류(類流) 즉 종류와 무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습기(習氣)는 전7식(前七識) 등이 활동하여 익히고 습관들인 기운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습기는 다음의 결과를 가져올 업력과 같으며 종자(種子)라는 별명도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등류습기는 전생에 모든 정신(七轉識)과 육체 등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을 뜻하는데, 그 중에서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받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즉 동등한 종류(等類)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習氣)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받게 하고 악인(惡因)은 악과(惡果)를 받게 하는 것으로서, 이를 친인연종자(親因緣種子)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인(因)과 연(緣)이 친한 것만이 인과응보가 될 수 있는 업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유식론(成唯識論)]에는 등류습기가 인연이 되는 것은 과보가 인(因)과 유사하다(等流習氣爲因緣故 果似因)라고 하였다.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에는 '등류의 뜻은 인연이 생하므로 인연의 법은 반드시 그 성질이 동등하다(等類義 爲因緣生 因緣之法 必同性故)'라고 하였다.

즉 인성(因性)과 과성(果性)이 동등한 인과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업력을 등류습기라고 한다.

이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자업자득의 철저한 인과법칙을 설명하는데 유용한 업인설이다. 다시 말하면 전생의 악업은 금생에 악보를 받도록 하고 또 전생의 선업은 금생에 선보를 받도록 하는 것이 등류습기의 업력이다.

등류습기는 때로는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도 한다. 이 명언종자는 우리의 마음이 인식의 대상을 의식할 때 언어와 명사를 연상하면서 행동한 업력종자를 뜻한다. 명언은 표의명언(表義名言)과 현경명언(顯境名言)으로 나누어진다.

* 표의명언은 어떤 사물의 뜻과 의리(義理)를 평가하고 표현하는 것을 뜻하고, 또 평가하고 표현할 때 명사(名詞)와 구문(句文)을 사용한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나 행동할 때 그 뜻을 생각하고 평가하며 또 언어 문자로 말하거나 그 뜻을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내용의 행위가 우리 생활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업력의 이름을 명언종자라고 한 것이다. 그것은 제6의식이 이미 명사와 문구가 붙어있는 대상을 반연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 현경명언은 마음(心識)이 인식의 대상을 마음속에 능히 비추어 그 대상의 명사와 문구를 환하게 생각하여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대상의 모습을 마음 위에 올려놓는 것을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의 모습을 견분(見分)이 분별하고 요별할 적에 그 대상의 명사와 명구(名句)를 생각하면서 하게 되므로 그 행동 속에 명사와 명구가 개입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업력의 이름도 명언종자라고 지은 것이다. 이들 두 가지를 분명히 나누어 말할 것 같으면 표의명언은 반연되어지는 인식의 대상(所緣境)의 이름과 명구의 수동적 뜻을 생각하면서 표현하는 행동의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현경명언은 칠전식(七轉識)이 능동적으로 인식의 대상을 반연하여 그 명언과 구문을 분별하는(能緣識) 것에서 조성되는 종자를 뜻한다. 이와 같이 표의는 수동적인 소연(所緣)이고, 현경은 능동적인 능연(能緣)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등류습기에는 명언종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심식(心識)의 활동(能緣識)과 인식의 대상(所緣境)을 보다 넓게 그리고 심오하게 업사상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등류습기는 업인으로서 반드시 같은 성질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 이숙습기(異熟習氣)

이숙습기(異熟習氣)는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 이숙습기라는 업력은 반드시 인(因)과 과(果)가 동일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異性)을 초감(超感)하기 때문이다. 이숙(異熟)이란 말은 이미 위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찰나찰나 변천하고 변화시킨다는 뜻으로서 인과에 있어서도 인(因)과 과(果)가 반드시 동일하게 성립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因)의 성질과 다른 과(果)가 서로 다르게 성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숙습기의 조성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六識)이 한다. 이들 육식이 활동하는 행위는 선업과 악업, 그리고 무기업 등 세 가지 성질의 업력으로 조성되는데, 이들 업력들은 제8아라야식에 보존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그 성질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흔히 증상연(增上緣)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내에는 이미 선업과 악업 등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위에 육식이 찰나찰나 선악의 행위를 통하여 선악의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 이들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薰習)될 때 기존의 업력에게 새로운 업력의 영향을 끼쳐 기존 업력으로 하여금 본래의 성질을 변질케 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면, 이미 나쁜 짓을 하여 악업의 업력을 보존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착하게 변하여 선행을 많이 하면 그 선업이 기존의 악업에 영향을 주어 다음의 결과를 악업과는 다른 선과를 초래할 수 있는 인과의 도리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의 진리는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없으면 고정적인 인과사상으로 정립되어 나쁜 사람은 항상 나쁘고 좋은 사람은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융통성 없는 인과사상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종교적 선업을 많이 닦아도 이미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선인이 될 수 없게 되고 또 아무리 악업을 지어도 이미 선업을 좀 지어놓은 사람은 악인이 될 수 없는 인과법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상을 일인주의(一因主義)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과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육식의 활동여하에 따라 변하며 또 아라야식의 내용도 찰나찰나 변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박토에 씨앗을 심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후 좋은 거름을 주어서 잘 가꾸면 그 씨앗은 박토에 그대로 있다가 나는 것보다 훨씬 잘 클 것이다. 또 씨앗은 나쁘지만 그 토질이 좋은 데다 거름을 잘 해주면 그 씨앗은 토질과 거름의 영향으로 매우 잘 커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인과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여 기존의 선업과 선과를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과거에 악업을 지었다고 생각되면 더욱 선업을 지어 그 악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물론 없애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因)이란 한 번 지어 조성해 놓으면 하나의 세력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을 공능(功能)이라고 하며 공능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인력(引力)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업력을 인이라 하고 인을 또 종자(種子)라고 비유하여 부른다.

이러한 종자의 힘에 의하여 열매를 맺듯이 업력은 삼계의 세계에 두루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이숙습기라 한다. 이숙습기는 친생자과(親生自果)하는 등류습기와는 달리 친생이과(親生異果)하는 법칙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법칙에 의하여 아라야식은 내생의 총과보를 받을 수 있는 진이숙(眞異熟)이 되고 또 이러한 진이숙은 후천적으로 지은 업력에 의하여 또 다른 과보를 받을 수 있게 되는데 이때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한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지은 육식의 업력이 먼저의 진이숙을 변화시키는 증상연(增上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업력에 의하여 몸을 바꾸어 윤회할 수 있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현세의 몸도 찰나찰나 변천하여 다른 인간의 내용으로 변천할 수 있다. 참으로 이숙습기는 오묘한 진리가 담겨있는 가장 현실적인 업력설의 하나이다.

이상으로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두 습기설을 살펴보았다. 이 두 습기설은 두 가지 업력설로서 앞으로 과보를 받는 결과에 대하여 가장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업력이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因能變)이라 한다.

인능변은 또 위에서 살펴본 등류습기와 이숙습기 등 두 가지 습기, 즉 두 가지 업력의 변화를 내용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업력이 다음의 과보를 받기 위해서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이러한 업력은 또 변화시킨다는 뜻에서 인업(引業)이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과보를 끌고 다니는 인력(引力)을 말하여 인업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인업에 의하여 제8아라야식이 과보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과보를 이숙과(異熟果)라 한다. 이숙과는 또 진이숙과 이숙생으로 구별하여 설명된다. 진이숙은 곧 아라야식이 최초에 과보를 받을 때 이름한 것이고 동시에 이 진이숙을 끌고 온 업력의 이름을 인업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 진이숙에서 발생되는 업과를 이숙생(異熟生)이라 하며 이숙생은 아라야식으로부터 발생되는 전칠식(前七識)을 뜻한다. 그리고 칠식과 더불어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 등 육근(六根)도 이숙생에 속한다. 왜냐하면 진이숙으로부터 몸과 정신작용이 동시에 변화하여 결과로 나타나며 인간의 모습과 내용을 구비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할을 하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 한다. 만업은 구석구석 빈틈없이 하나의 과보를 원만하게 구족되도록 해주는 업력이라는 뜻이다. 이는 마치 스승이 윤곽(眞異熟)을 그려 놓으면 제자가 그 자세한 내용까지도 채워 그려 넣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내용으로 한 업력의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그 업력이 세분화하여 과보의 총체를 끌고 오는 업력을 인업(引業)이라 하고 그 총체 위에 하나하나 인간의 형체를 구비해 주는 업력을 만업(滿業)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업에 의하여 끌려온 과보를 총보(總報)라 하고, 또 만업에 의하여 하나하나의 정신계와 이목구비 그리고 오장육부가 형성되는 것을 별보(別報)라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능히 받도록 변화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무루업(無漏業)을 제외한 선업은 가히 사랑스러운 과보(可愛果)를 받고 또 악업의 종자는 가히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比可愛果)를 반드시 가져오게 하는 초감(招感)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것을 이숙습기(異熟習氣)라 한다. 이는 삼계의 윤회를 가능케 하는 업력으로서 업종자(業種子) 또는 유지습기(有支習氣)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유지습기란 삼계에 윤회하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선악업은 정발업(正發業)과 수발업(隨發業)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것은 전육식 가운데서 제6의식의 활동에서 조성되는 업력을 정발업이라 하고 또 의식을 제외한 안식 등 전오식이 활동하여 조성된 업력을 수발업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심식의 활동 내용에 의하여 명명된 이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의식은 결정적인 활동을 하지만 오식(五識)은 대부분 의식에게 수종(隨從)하여 활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업(發業)이라는 뜻은 곧 모든 심식의 행동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동이 발생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다름 아닌 업력을 즉시 발생시키고 선악업을 조성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식의 활동에는 서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정발업과 수발업 등 여러 업력의 이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업력들이 모여 아라야식에 보존되었다가 과보를 가져올 때 능변하는 것을 인능변이라 한다.

인능변은 아라야식이 이승의 부모의 연(緣)을 만났을 때 선악업과 함께 과보를 발생하기 시작하여 그 과보를 완성할 때까지 능히 변화하는 업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업력의 세력이 변화없이 과보를 받을 수 없다.

이제 설명하고자 하는 과능변(果能變)도 인능변의 태아가 생겨나는 순간부터 완전한 인간이 형성될 때까지의 변화과정을 뜻한다. 이는 업력과 더불어 과보의 변화와 과보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因)과 과(果)는 불가분리하며 항상 동시에 변화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 없는 과능변이 있을 수 없고, 과능변 없는 인능변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근원을 따진다면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는 바와 같이 인능변이 과보에 대한 근원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생의 업력이 아라야식에 실려와서 부모의 연을 만나 그 연의 도움으로 인간의 과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과능변은 곧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 말하기를 "과능변은 두 가지 습기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果能變 謂前二種習氣故)"라고 한 바와 같이 업력의 결과이다. 여기서 두 가지 습기란 말할 것도 없이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를 뜻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업력(習氣)에 의하여 과보의 완성이 가능하다.

이들을 엄격히 구별하여 말하면 인능변은 종자인 업력에 의하여 태아(果報)가 모태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變現)을 말한다. 그러나 과능변은 종자, 즉 업력에 의하여 생겨난(因生) 현재의 과보(現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인능변은 내적인 원인론(原因論)인데 반하여 과능변은 외적인 결과로서 인간의 형체를 구성해 나아가는 외부의 변화(變現)를 뜻한다.

이러한 과능변의 내용을 능변과 소변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능변(能變)은 소변(所變)에 반대되는 어구로서 능히 창조적인 입장인 능조자(能造者)를 뜻하며, 소변은 창조되어지는 피조물(被造物)의 입장을 뜻한다.

이는 불교가 어떤 특정적인 유일신(唯一神)을 부정하고 인과의 법칙을 내세워 업력을 창조자 대신으로 내세운 표본이 되는 것이다. 본래 능조자격인 원인과 피조물격인 결과도 없는 것이 진리(眞如)의 세계이다.

그러나 윤회하고 있는 중생계는 필연적인 인과법칙이 있는 것이며 그 논리가 곧 여기서 말하는 인능변과 과능변의 내용이다. 이러한 능소(能所)의 관계는 자기의 업력(自業)이 자신을 창조(自得)한다는 자업자득의 관계를 설명하는 논리이다.

마) 이숙습기(異熟習氣)의 과보(果報)

인능변(因能變)과 과능변(果能變)의 진리는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심오한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인능변은 등류습기와 이숙습기라는 업력이 연을 만나 능히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뜻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과능변이라고 한다.

인능변 가운데 등류습기의 능변(能變)은 선인은 선과를 가져오게 하고, 악인은 악과를 가져오게 하는 등 업인(業因)과 과보(果報)가 그 성질에 있어서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등류과(等類果)라고 말한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등류인(等類因)에 의하여 등류과가 초래된 것이며 또 동류인(同類因)에 의하여 동류과(同類果)가 결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우리가 평상시에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인과법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등류습기의 내용보다 더욱 복잡하고 또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인과법칙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이숙습기의 논리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업인과는 달리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력을 뜻한다.

예를 들면 지옥의 중생이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고, 또 인간이 사왕천(四王天)과 제석천(帝釋天) 등 여러 천국에 태어날 수 있는 윤회의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것은 곧 이숙습기의 원리에 의하여 가능한 것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숙이라는 뜻은, 변천한다는 뜻과 변화한다는 뜻과 교환한다는 뜻 등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이는 인과의 부사의한 도리를 설명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매우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유식학의 인과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숙의 내용을 중국의 규기법사(窺基法師)는 [성유식논술기(成唯識論述記)]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종류의 변화과정 등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넓혀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 시간을 달리하여 변천하는 것(異時而熟)

시간을 달리한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는 시시각각 변천한다는 뜻이다. 먼저 원인의 변천을 살펴보면 중생 각자가 업력을 아라야식 속에 훈습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그 업력을 곧 종자라고도 표현한다. 이 종자는 아라야식 속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변천 또는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찰나찰나 변천하면서 다음의 결과를 맺을 때까지 생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를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고도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는 서로 인과 연이 되어 먼저의 종자는 다음 시각의 새로운 종자로 변천하면서 항상 생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종자가 종자를 출생시킨다는 말은 동일한 종자가 다음의 새 종자로 발생한다는 뜻으로서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내용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력이고 또 항상 새로운 생명력으로서 여러 가지 생활을 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주체인 아라야식은 인간의 의식과 육체를 새롭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은 새로운 연을 만나면 즉시 우리 인간의 정신인 칠전식(七轉識)의 활동과 육체의 새로운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 이를 전문적인 언어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즉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원인이 되고 인간 내부와 주위의 환경은 연이 되는 것이며 현재의 행동과 인간의 주변에 나타난 새로운 상태가 곧 결과가 된다.

이와 같이 종자(種子)가 현행(現行)을 발생시킨다는 말은 인간이 현재의 생활에서 보고 듣고 익힌 여러 가지 지식과 습관을 곧 아라야식 내에 다음의 지식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이것이 다음의 행동과 지식 그리고 습관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 지식과 습관이 업력이 되어 현재의 행동과 지식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을 현행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행이라는 말은 현재의 정신 행위, 육체적 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습을 뜻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과거에 각자가 익히고 배웠던 습관과 지식으로서 자신의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의 발생이며 표현인 것이다.

이러한 지식과 습관의 발생은 현재의 생활을 뜻하는데 현재의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종자에 의한 결과로서 이 결과인 행위는 다시 원인을 조성하는 내용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정신 생활과 육체 행위는 아라야식의 업력 즉 종자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으로서 실현되는 정신과 육체의 행위는 결과임과 동시에 업력을 조성하여 다시 자신의 아라야식 내에 업력인 종자를 보존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라고 한다. 즉 현재의 행동은 아라야식 내에 종자를 훈습(薰習)한다는 말이다. 훈습한다는 말은 조성(造成)한다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며 좀 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조성해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킨다는 뜻이 된다.

이상과 같이 인과응보(因果應報)는 전생과 금생, 또는 금생과 내생 등과 연결시켜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논술하기도 하지만 이는 오히려 소승적인 인과설이다. 그러나 대승적인 인과응보 사상은 곧 현재의 생활 숙에서 인과가 시시각각으로 성립되고 또 전개되며 찰나찰나에 업력을 조성하고 동시에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면 바로 앞에 듣고 보았던 것은 곧 아라야식 내의 종자가 되며 그것은 또 다음 찰나의 지식과 습관으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야말로 찰나에 인과가 성립되는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사상이며 또한 찰나인과사상(刹那因果思想)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간을 고정시켜 운명에 얽매이게 하는 신(神)의 창조설과 또는 고대의 이교도들의 숙명적이고 운명적인 인과론과 업보사상을 타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르쳐 주는 사상인 것이다. 찰나에 변천과 변화가 없는 인과사상은 인간의 발전을 저해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승유식학(大乘唯識學)에서는 고대 인도의 운명론적인 인과사상을 타파하고 현재의 불행과 빈곤과 고통의 상태를 찰나에 자신의 정신과 육체적인 행위와 현행에 의하여 개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개조와 아울러 행복과 부귀와 안락한 상태의 환경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에 이숙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 공간적으로 변천하는 것(變異而熟)

이는 위에서 살펴본 이시이숙(異時而熟)의 논리와는 조금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물론 넓은 안목으로 보면 따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내용에지만 그러나 학문적으로 구별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려면 따로 분리하여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이이숙(變異而熟)이라는 말은 정신과 육체 또는 모든 사물이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변천하고 변화하고 있다는 뜻을 갖고 있다. 즉 시시각각으로 겉모습만 변천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정신을 비롯한 모든 내용도 변천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령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부모로부터 태어나면서 변천해 왔고 현재도 찰나찰나 그 내용은 변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천의 인과법칙이 없으면 인간의 내용은 발전할 수 없고 개선될 수 없으며 또 새로운 인간으로 교육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중심한 모든 심식은 시시각각으로 변천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 나갈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심식들에 의존한 육체의 내용과 외모도 심식의 선과 악의 여하에 따라 발전하고 또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밖의 자연계도 인간과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며 인간의 선악 여하에 따라 자연계도 선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종류를 달리하여 이루어지는 것(異類而熟)

종류 즉 과보를 달리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과 내용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 성립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생의 과보와 금생의 과보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결과가 나타난 것을 뜻한다. 가령 윤회과정에서 인간이 사망하여 극락세계에 태어났다고 하면 금생의 인간의 몸과 내생의 극락세계의 몸과 서로 다른 종류의 몸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것도 하나의 변천이기 때문에 이숙의 의미가 있다.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삼계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생과사를 되풀이하면서 다른 몸을 받게 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이류이숙에 해당한다.

이상과 같이 이숙이라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숙의 진리도 업력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중생의 세계는 업력과 관련되어 진행되기 때문에 업력의 내용을 자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 업력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일한 인과 과가 연결되도록 하는 등류습기라는 업력도 있지만 항상 다른 종류로 변천시켜 과보를 받도록 하는 이숙습기도 있다는 것이 인과사상의 핵심이 되어 왔다.

이 이숙습기는 다른 과보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적극 힘을 발휘하는 업력으로서, 이는 주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전6식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이다. 이들 심식에 의하여 조성된 선악의 종자가 아라야식에 훈습될 때,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이숙무기종자(異熟無記種子)를 도와서 다른 성질의 결과를 초래케 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의 이숙습기를 증상연종자(增上緣種子)라고도 한다.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 즉 업력에 대하여 어떤 과보나 결과를 발생하도록 연(緣)이 되어주고 힘을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이숙무기종자라는 말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가 인간의 정신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업력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무기(無記)종자로서 다른 힘을 빌려서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 종자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육식(前六識)이 찰나찰나 활동하면서 조성한 업력이 아라야식에 훈습되면서 이미 보존되어 있는 이숙무기종자에 힘이 되어 주고 업력을 증가시켜 주는 증상연종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에 이숙무기종자는 새로 증가해 오는 증상연종자 즉 이숙습기의 선성 또는 악성의 여부에 따라 선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고 또 악의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이때에 조성된 육식(六識)의 업력은 기존의 업력을 도와서 다른 결과의 과보를 맺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 업력의 이름도 이숙습기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안식 등 육식의 업력을 이숙습기라 하고 이 이숙습기는 또 다른 업력을 도와서 이숙과(異熟果)를 가져오도록 하는데 그것은 전6식의 업력은 분명히 선, 악, 무기 등 삼성(三性)에 통하고 또 선악의 훈습력(薰習力)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이숙습기로서 증상연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이를 분별훈습종자(分別薰習種子)라고도 한다.

그러나 제7말나식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이므로 유부(有覆)는 무명 등 번뇌의 뜻으로서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뜻이 있으나 그 성질이 무기성(無記性)이므로 강력한 이숙인(異熟因)이 될 수 없고 동시에 자신의 결과(自果)도 가져오도록 하는 역할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숙습기로서 이숙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은 전6식의 업력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리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찰나찰나 전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재 마음이 착해서 착한 행동을 했을 때의 업력이 아라야식 내에 들어가 먼저 잘못을 저질러 조성된 종자에 증가하여 악의 내용을 약화시켜 악의 종자로 하여금 선의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을 후자의 행위에 의한 업력이 증상연이 되어 그 내용을 변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나쁜 종자가 좋은 비료 등을 만나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숙습기의 논리에 의하여 이숙과(異熟果)라는 말이 있게 된다. 즉 전자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한다. 선과 악을 되풀이하면서 사는 것이 중생인데, 특히 인간생활에 있어서 마음의 업력에 따라 선인(善人)이 될 수도 있고 악인(惡人)이 될 수도 있는 이치를 가르쳐 주는 것이 이숙습기와 이숙과의 진리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고 동시에 윤회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승에서 저승에 태어날 때 이승의 몸과는 달리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날 수 있는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곧 이숙인(異熟因)과 이숙과(異熟果)의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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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과능변(果能變)과 태아(胎兒)

위에서 이숙(異熟)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그 가운데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이류이숙의 뜻도 있었다. 이 이류이숙의 뜻은 이숙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말인 것이다. 다른 종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은 전생에서 금생의 몸을 받고 금생에서 내생의 몸을 받는 등 이승에서 저승의 다른 몸을 되풀이하면서 받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이 전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이승의 부모를 만나 어머니의 태내(胎內)에서 태어나는 순간 저승의 몸과 다른 몸을 받아 출생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인능변과 과능변이 이루어진다. 인능변(因能變)은 업인(業因)이 인간의 모습을 능히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의 과보를 형성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의 도움을 받아 인간의 몸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과능변이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아라야식을 비롯한 말나식과 의식 등이 차례로 형성되는데 이때의 이라야식을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아라야식이 최초로 변화하여 인간의 마음을 형성한다는 뜻이다. 다음의 정신계가 말나식인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 한다. 그리고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 육식을 제삼능변식(第三能變識)이라 한다.

이와 같이 어머니 태안에 태어난 태아는 아라야식을 중심하여 차례로 변천하며 모든 정신계를 형성하고 그 심식(心識) 하나하나는 또 사분(四分)의 내용으로 변화하여 인식의 활동을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계의 심식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의 뜻이 있는데 분별과 요별의 뜻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사분설(四分說)이라 한다. 사분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각식(各識)의 내용으로서 인식의 대상(六境)을 마음 안에서 인식하는 내용을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분(相分)은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의 인식대상이 마음 안에 비치는 영상(影像)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마음이 그 사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영상을 오관(五根)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끌여들여 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상분은 마음 안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상분을 인식하는 또다른 인식작용이 있는데 이를 견분(見分)이라 한다.

이 견분은 견조(見照)한다는 뜻으로 상분에 해당하는 대상물을 좋다(樂), 나쁘다(苦),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捨)고 하는 식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서 상분은 객관계(客觀界)가 되고 견분은 주관계(主觀界)가 된다.

이와 같이 한 식(一識) 안에 객관과 주관이 나누어져 모든 진리를 인식하는 것을 이른바 분별심 또는 요별심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 안에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있다는 것은 곧 상대적인 마음의 형상으로서 진리롭게 관찰할 수 있는 합일(合一)의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견분은 상분에 대해서 선이다, 악이다,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니다라는 세 가지 성질로 인식을 하는데 여기에는 또다시 그 견분의 인식이 틀림없는지를 거듭 확인하는 자증분(自證分)이라는 심분(心分)이 있다. 심분이라는 말은 마음의 분한 또는 역할이라는 뜻으로서 심식 내에는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말이다.

이 자증분은 식(識 )의 역할에서 가장 중체가 되며 상분과 견분은 이 자증분 위에서 활동하는 작용이다. 그러므로 자증분은 항상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또 활동한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동시에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심분(心分)의 내용을 달팽이에다 비유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달팽이는 전체의 몸이 있는데 그 머리 위에 두 뿔이 밖으로 튀어나와 이것이 밖을 내다보는 눈의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달팽이에 심분을 비유해 보면 자증분은 달팽이의 몸과 머리에 해당하며 상분과 견분은 달팽이 머리 위에 나타난 두 뿔과 뿔 위에 있는 두 눈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심식 하나하나에는 상분과 견분 그리고 자증분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그밖에 심분(心分)은 증자증분(證自證分)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증자증분은 앞의 자증분의 활동을 뒤에서 재증명해 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와 같이 팔식은 각기 사분(四分)의 작용이 있는데 이들 사분의 작용은 과능변을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즉 과능변이란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부모를 만나 과보를 받을 때 그 과보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그 과보는 다름 아닌 어머니 태 안의 태아를 말한다.

그러므로 총과보(總果報)를 받은 아라야식이 처음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심식이라는 뜻에서 이를 초능변식이라고 한다. 이 아라야식에 의하면 제이능변식인 말나식이 나타나고 또 제삼능변식인 의식 등 육식이 변화하여 정신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八識)이 차례로 변화하여 인간의 정신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그 팔식 하나하나에는 그 식이 발생하는 찰나에 위에서 말한 사분의 작용이 활동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태 안에 태어난 태아의 정신계는 태어난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인간적인 정신활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태아이므로 지상에 태어난 아이들 만큼 밖의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지만, 그 태아는 모태의 세계가 전 우주와도 같은 견해를 갖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는 좁은 공간으로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 태아는 그것을 모르고 넓은 공간 못지않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태아는 인간의 생활이 어머니 태 안에서 시작되며 비록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 태아라 할지라도 팔식의 정신계는 원만히 구족하고 있다. 그리하여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식별하는 능력을 구비하게 된다.

신라의 유식학자인 원측법사(圓測法師)는 그가 저술한 [해심밀경소]에서 어머니가 뜨거운 물을 마시면 태 안에 있는 태아는 뜨거워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느낀다고 하였고 또 어머니가 매우 찬물을 마시면 그 태아는 추워서 덜덜 떠는 고통을 느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들에 의하면 태아도 지상의 인간과 같이 모든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튼 유식학적으로 보는 인생은 아라야식의 탁태(託胎)로부터 시작되며 탁태한 그 태아는 즉시에 팔식을 구족하고 동시에 사분작용을 야기하여 태내의 모든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 인간의 과보를 받는 절차이며 과능변의 핵심인 것이다.

그런데 과능변의 뜻에는 위에서 설명한 심식의 구성과 사분작용의 활동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형성과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제 육체가 형성되는 태내오위(胎內五位)를 살펴보기로 한다.

* 갈라람(Kalala)

육체의 형성과정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의하여 살펴보면 부모의 탐애(貪愛)로 말미암아 몇 방울의 정혈(靜血)이 모태 안에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마치 우유가 결집된 상태와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전생의 업력을 지닌 아라야식이 포함됨과 동시에 전생의 모든 것은 끝나고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하였다.

이를 갈라람이라고 하는데 갈라람(Kalala)이라는 말은 곧 응활(凝滑)이라는 뜻이 있으며 응활은 응고된 물방울이라는 뜻이다. 이 갈라람은 최초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화합하여 출생한 최초의 사람이다.

정신과 육체가 화합한 갈라람이 태 안에 생겨남과 동시에 정신계가 형성되고 또 육체의 본질이 형성된다. 이들의 형성내용을 분류하여 보면 정신적인 변화와 형성은 이숙식 또는 능변식이라 하고, 육체를 포함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과보는 이숙과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신과 육체가 갈라람이 중심하여 점차 구비하게 된다.

그 육체의 본질은 견고한 성질(堅性), 액체의 성질(溫性), 따뜻한 성질(煖性), 생동하는 성질(動性) 등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지대(地大), 수대(水大), 화대(火大), 풍대(風大) 등 사대(四大)라고 부른다.

이러한 성질로 구성된 육체의 본질은 처음으로 갈라람이라는 인간의 형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인간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상태이기는 하나 그 내용은 완전한 인간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아에 대한 조심성이 따르게 되며 또한 임신부로서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태아가 이러한 갈라람의 위치에 있는 기간은 태내에 태어나면서부터 일주일간을 말한다.

* 액부담(額部曇)

이 갈라람에서 더욱 발전한 인간의 형태를 액부담(額部曇)이라 하며 이 액부담(Arbuda)은 액체적인 육체가 점차 응고되어 그 위에 엷은 피부(薄皮)가 생겨나는 위치를 뜻한다. 마치 끓인 우유 위에 막이 생기는 것과 같이 살결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 액부담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2주(第二週)의 기간을 말한다.

* 폐시(閉尸)

다음은 폐시(閉尸)의 기간으로서 이 폐시(Pesi)의 기간은 태아가 태어난지 제3주(第三週)에해당한다. 이 기간은 태아의 살결이 제법 견고해지고 혈육이 잘 형성되는 육체가 마련된다. 그러기 때문에 폐시(Pesi)라는 범어를 혈육(血肉)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 건남위(鍵南位)

다음 태아의 기간은 건남위(鍵南位)에 들어가게 되며 건남위(Ghana)의 태아는 근육이 견고해진 아이를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건남을 견육(堅肉)이라 번역하며 이는 제사주(第四週)의 태아에 해당하는 것이다.

* 발라사(鉢羅奢)

다음으로 건남위의 태아가 더욱 성장하여 사지(四肢)와 오장(五臟)과 육부(六腑)가 완성되는 기간으로 이를 발라사(鉢羅奢)라고 한다. 발라사(Prasakha)는 지절(支節)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곧 인간의 형체가 완전히 구비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발라사의 기간은 위에서 말한 사위(四位)의 태아 기간보다도 훨씬 긴 기간이므로 어머니의 태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까지를 말한다.

이상과 같이 태아가 태어나면서 지상에 출생하기 이전의 변화는 쉴새없이 진행되는데 이러한 변화는 모두 과능변의 형태이며 동시에 이숙과의 내용을 뜻한다. 요컨대 이러한 태아관(胎兒觀)은 모두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서 과거의 업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모의 차이와 빈부의 차이 등 육체적 차별이 있게 되고 부모와 주거지 등 환경의 차별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전생에 지은 업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승의 과보의 차별이 있게 될 뿐이지 인간의 근본 자성까지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윤회하는 중생은 어느 세상에 태어나더라도 처음에는 약간의 차별이 있는 과보를 받지만 일단 과보를 받은 중생들은 평등한 입장에서 삶을 시작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전생의 업력은 선업 또는 악업(因是善惡)이지만 금생의 과보를 받고나면 그 과보의 내용은 선성에 치우치지 않고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 무기성(果是無記)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전생의 악업에 의하여 금생의 악보를 받고, 또 전생의 선업에 의하여 금생의 선보를 받는 인과가 있으나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이라는 것이다.

무기라는 말은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적 입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승에 출생한 태아는 귀천과 빈부의 환경을 접하기는 하지만 그 태아들의 자성(自性)은 평등한 것이다. 즉 누구나 꼭 같은 입장에서 이 세상의 삶을 출발하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진리에 의하여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도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도 부자도 되고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부잣집 아이라 할지라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태아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본성이 곧 불성(佛性)이고 지혜의 체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성을 바탕으로 한 아라야식이 인간의 과보를 받게 되면 이를 진이숙(眞異熟)이라 하고, 아라야식으로부터 육식 등 여타의 정신과 육체가 형성되는 것을 이숙생(異熟生)이라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태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4) 공업(共業)과 사회(社會)

위에서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는 내용을 알아보았다. 아라야식이 인간의 모든 내용을 형성할 수 있는 진체의 업력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총보(總報)라고 한다. 그리고 이 아라야식으로부터 모든 정신에 해당하는 일곱 가지 마음(七轉識)과 여러 정신작용(五一沈)이 형성되고, 또 육체의 부분이 하나하나 형성되는데 이들을 모두 별보(別報)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뿌리에서 가지와 줄기가 자라나듯이 아라야식이라는 근본식(根本識)에서 지말식(枝末識)과 육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원만히 형성되면 인간으로서 정신적인 행위와 육체적인 행위가 시작된다.

삼계와 육도 가운데 인간계(人道)의 과보를 받고 인간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여러 중생의 종류 가운데 인간계에 태어나서 살도록 하는 업력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습을 구비하고 인간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둘 것은 업력이란 인간이 태어날 때 자신의 몸과 마음만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세계도 창조하게 한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이 사는 세상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생하면서 태어남을 말한다. 이를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공업은 그 사회를 공동으로 유지시키는 업력을 말하는데 가령 한국에 사는 사람은 한국을 유지시키는 업력을 발휘하여 한국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뿐 아니라 한국 내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모두 공업을 발생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 등 자연계까지도 원만하게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세계에 사는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이 악화된다면 그 사회는 물론 자연계도 악화되어 고통스러운 세계로 변하며 심지어는 자연계가 파괴되는 결과까지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공업은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을 뜻하는데 그 공동질서를 유지하는 힘이 무질서해지면 공동사회도 필연적으로 무질서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생태계는 뭇 생명체가 발생하는 공업력으로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의 행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 행위는 자신에게만 한하는 업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개인에 한하는 업력은 불공업(不共業)으로서 불공업은 자신의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타나는 공업은 이와 다르다.

공업은 공동사회를 형성해가는 사회적인 힘이다. 그 힘을 표현하여 업력(業力)이라고 이름한다. 업력은 다음의 결과를 반드시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업력은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오는 불공업이 있는가 하면 공동사회의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공업이 있다.

이러한 업력은 이 세상에 출생할 때부터 발휘하게 되는데 업력의 사상을 알고보면 그 행동을 함부로 할 수 없는 조심성이 따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남과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공업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개인질서와 더불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인과법은 중생의 질서를 잡아주는데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불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유식학에서는 인과법을 믿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믿음(信)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의 덕성(佛德)을 신앙하고,

둘째는 인간의 청정자성(佛性)과 자연에 포함된 진여성(眞如性)에 해당하는 실성(實性)을 신앙하며, 셋째는 모든 인과는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공능함을 발휘하는 공능(功能)을 신앙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의 신앙은 인과법칙을 신앙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행위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반드시 그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는 인과법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신앙하지 않게 되면 행동이 거칠어지고 행동이 거칠면 자신의 불행은 물론 사회에도 불행을 가져다주는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행동은 원인이 되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행해지는 개인과 사회는 결과가 된다. 동시에 모든 삼라만상도 자체의 공능과 진여의 세력이 있음을 신앙하는 것이다.

* 마음의 행위

이상과 같이 인과는 곧 개인과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법칙이 되는 것이며 그 인과를 조성하고 창조하는 원동력은 마음이다. 마음은 모든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의 내용은 각양각색이어서 한편으로는 보살심(菩薩心)을 발휘하여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이기적인 마음인 아집(我執)과 모든 것을 혼자만 가지려는 욕심(我所)이 앞서는 마음이 있다.

아집과 소유욕이 강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제6의식에서 보통 나타나지만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내면의 심층심리에서 충동질하는 제7말나식에 원인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말나식으로부터 보살심을 방해하고 여러 진리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장애하는 무명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명은 모든 것이 평등한 진리이며 주관과 객관계가 통일된 본성을 망각하고 나타나는 무지를 뜻한다. 본래 본성은 자기와 다른 사람과 통할 수 있고 모든 진리와 연결되는 바탕으로서 이기심이 아니라 자비심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를 무아성(無我性)이라 하며 무아성은 곧 자타(自他)가 없으며 모든 생명체를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불심이다.

이러한 무아를 진아(眞我)라 하며 진아는 나 가운데 가장 참된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나라고 할 때 육체만을 나라고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아집을 앞세우는 나를 말할 때가 많다.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내가 제일이라는 아만(我慢)과 나만을 사랑하는 아애(我愛)를 앞세운 나를 가리키는 때가 많다.

이는 완전히 본래 지니고 있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아치(我痴)의 소산으로서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무명은 또 불성 및 진여성에 해당하는 참된 자아를 망각한 심리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아치라고 한다.

동시에 본심에서 반대의 마음으로 돌아서 무지의 마음을 나타낸다고 해서 이를 전도심(顚倒心)이라고 한다. 전도심은 모든 것을 반대로 생각하며 행동하도록 충동질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행위에 따라 육체의 행위도 결정되기 때문에 마음의 수행이 선행하지 않는 한 육체의 행위도 정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마음을 고치도록 하고 그 마음을 고치는데는 염불과 참선을 닦아야 한다는 등 부단한 노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불과 참선만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무명과 아집과 아애와 아만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문제는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그 마음의 병은 자신만이 고칠 수 있을 뿐이며 어떤 성자도 고쳐줄 수 없다고 한다. 스스로 무명을 야기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수행하여 그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5)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위에서 공업과 불공업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업력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 각자가 찰나찰나 행동을 통하여 조성해 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업력은 즉각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고 또 미래에 과보를 받도록 하기도 하는데 이들 업력이 어디에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중생들이 눈(眼識). 귀(耳識). 코(鼻 識). 혀(舌識). 몸(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등으로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며 생활하는데 그 행위로 말마암아 조성되는 업력은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다음에 과보를 받도록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아라야식을 내세운다. 이 아라야식은 인간의 몸(五根)과 인간의 행동으로 조성되는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과 그밖에 인간이 사는 사회까지도 잘 포섭하고 섭지(攝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전생의 업종자(業種子)와 자신의 몸(五根)과 그리고 자신이 살게되는 세계(器世間)을 능히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며, 또 이 세상에 출생한 후에도 자신의 업력을 보존하고 몸과 마음을 유지시켜 주며 동시에 이 세상이 건전하게 유지해 가도록 하는 것은 모두 아라야식이 한다.

출생할 때 몸과 종자와 세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을 과능변(果能變)이라고 하며 이를 아라야식의 과상(果相)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생 전이나 출생 후에도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몸과 업력과 세간을 유지시키는 모든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아라야식의 인상(因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일체종자식이라는 말은 일체의 사물과 정신계가 성립되는 업력을 제공하고 전달하는 심식(心識)이라는 뜻이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종자식은 일체의 선업과 악업인 유루업(有漏業)과 동시에 수행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청정한 업력인 무루업(無漏業)을 모두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종자식은 칠전식(七轉識)이 훈습한 종자를 잘 보존하고 섭지하였다가 인연을 만나게 되면 곧 그 종자로 하여금 그 중생이 사는 현재 생활에 나타나게 하고, 그 중생이 사는 현상계(現象界)도 변현(變現)하게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변현이라는 말은 업력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를 스스로의 업력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는 자신이 창조하면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전생의 업력으로 자신과 사회를 창조하여 나타났고, 또 현재 사는 자신과 사회도 자신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에 의하여 창조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모든 주체는 여러 심식 가운데서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에 이상과 같은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를 라야연기(賴耶緣起)라고 한다. 즉 모든 정신계와 물질계는 오직 아라야식으로 말미암아 연기(緣起)되어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연기라는 말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업력과 종자는 이에 부합하는 연을 만나서 결과 즉 과보를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연을 만나야 결과를 발생하게 된다. 만약 업력이 연을 만나지 못하면 항상 그대로 아라야식에 보존되데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연은 결과에 대한 역할이 업력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 인(因)과 연(緣)은 과(果)를 가져오게 하는데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반반씩 힘을 가하여 과보가 초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종자가 있다면 그 종자는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을 만나지 못하면 발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때의 종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업력이고 또 흙과 물 등 자연적인 조건은 연이 된다.

이상과 같이 항상 인과 연이 부합되어야 하는데 이 인과 연은 결과에 대하여 동등하게 역할을 한다. 인만 있어도 안 되고 연만 있어도 안 되며 인과 연과 과가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 못지않게 연도 중요한 것이다.

개인생활에 있어서 한 사람의 마음과 육체를 청정하게 하는데 그 사회의 환경이 많은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그 환경은 그 사람에게 모두 연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은 인식의 대상인 객관계와 자연계를 연으로 하여 성장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가 모두 연이 되어 준다.

그리하여 환경은 그 사람이 성장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아라야식의 종자가 좋게 싹이 트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과 사화교육 등 모든 교육도 연이 되는데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연을 만나 자신의 아라야식에 있는 종자가 잘 자라는 것은 자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도리는 무궁무진한 진리이며 심오한 경지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연기를 창조라고 한다. 악인(惡因)이 선연(善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선과(善果)를 맺을 수도 있고 반대로 선인(善因)이 악연(惡緣)을 만나면 중성적인 악과(惡果)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두 연기의 도리이며, 동시에 창조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는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여의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을 모든 것의 총인(總因)이라 하며 동시에 아라야식에 모든 원인이 있다는 뜻으로 인상(因相)이란 별명을 붙이는 것이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3

2. 아라야식(阿賴耶識)과 업력(業力)보존

아라야식은 모든 법을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을 보존하고 또 원인이 되어 주기 때문에 인상(因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모든 종자를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도 유실하지 않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종자식이라는 별명은 앞으로 과보를 가져올 종자를 보존할 수 있는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종자의 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종자론이라고 한다. 종자론은 종자와 업력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으로서, 여기에는 열 가지 설명이 있다.

그 열 가지 항목을 들면,

1. 출체문(出體門),

2. 일이분별문(一異分別門),

3. 가실분별문(假實分別門),

4. 이제분별문(二諦分別門),

5. 사분분별문(四分分別門),

6. 삼성분별문(三性分別門),

7. 신훈본유분별문(新熏本有分別門),

8. 구의다소문(具義多少門),

9. 쌍변생인이인문(雙辯生引二因門),

10. 내외종사연분별문(內外種四緣分別門) 등을 말한다.

이들 열 가지 내용은 종자의 사상을 잘 설명해 주고 또 여러 가지 인연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학설이다. 이들 내용을 모르면 업력과 종자로 말미암아 과보를 초래하는 인과사상을 모를 만큼 매우 중요한 사상이므로 여기에 요약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 인과(因果)의 동일성[出體門]

인과의 동일성은 업인의 체성이 뚜렷하여 동일성의 업과를 분명하게 가져오도록 하는 인과사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 정의는 '모든 종자는 제8아라야식 가운데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친히 자과(自果)를 출생시키는 공능(功能)의 차별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뜻을 보면 종자는 오직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이며, 소승부파(小乘剖破)인 경량부(經量部)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몸과 마음 등에 함께 의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업력은 몸에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라야식에만 보존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와 같이 칠전식에 의하여 조성된 종자는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선인은 선과만을 초래하고 악인은 악과만을 초래하는 등 존자의 세력(功能)이 뚜렷하게 있음을 말한다. 이것을 친히 자과를 초인(招引)하는 공능의 차별이라고 한다. 공능의 차별이라는 말은 업력의 차별이 분명히 있다는 말로서 선업과 악업이 선과와 악과를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함을 뜻한다.

이렇게 인(因)과 과(果)의 성질이 분명하여 여타의 인과와 차별이 있게 하는 종자는 등류인(等類因)과 인연(因緣)과 명언종자(名言種子) 등이다. 이들 업인은 동일한 성질의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숙인(異熟因)과 증상연(增上緣) 등의 업인과 연(緣)은 동일한 과보를 초래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이숙인은 선인이 악과를 초래하며 또 악인은 선과를 초래케 하는 등 인(因)과 과(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가령 선인이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뒤에 안과 밖으로 악연(惡緣)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때의 선인은 동일한 성질의 선보를 초래하지 못하게 된다.

특히 증상연이 그러한 역할을 많이 한다. 증상연이란 업인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선인에다 선연이 되어 더욱 선과를 가져오도록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선인에 악연이 되어 악과를 가져오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증상연은 광범위한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선인에 악연이 되어 중성적인 악과를 가져오게 하고, 또 악인에 선연이 되어 중성적인 악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 증상연은 다른 연의 뜻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예를 들면 친인연(親因緣)은 악인과 선인에 대하여 동일한 성질의 연을 가하여 동일한 과보를 받도록 한다. 이와 같이 연의 뜻도 다양하기 때문에 인과의 사상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인과의 도리는 이숙인과 이숙과와 같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자는 변화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는 출체문은 업인과 결과가 동일한 인과응보를 초래하는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즉 인이 선이면 과보도 선이고, 인이 악이면 과보도 악과이다 라는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인과 악인은 동일한 과보를 받게 하였으면 그 과보는 비록 선과와 악과의 상태로 나타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 자체는 무기성(無記性)임을 강조하고 있다. 무기성은 선성(善性)도 아니고, 악성(惡性)도 아닌 성질을 뜻한다. 이들 내용을 전문적으로 표현한 것을 요약하여 보면 업인은 선악이지만, 과보는 무기성(因果善惡, 果是無記)이다 라고 한다.

'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과보는 표면상으로는 선과 악의 차별이 있지만 그 과보의 내용인 정신의 바탕은 평등하다는 말이다. 정신의 바탕이 평등하다는 것은 누구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각(自覺)의 본성이 있다는 말이며, 자각의 본성이 있는 까닭에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하면 새로운 경지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은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근면하게 생활하면 무엇이든지 새로운 환경을 창조할 수 있음을 뜻한다.

2)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밀접한 관계[一異分別門]

종자는 아라야식(Alaya-vijnana)을 비롯하여 모든 심식과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종자는 인이 되고 식의 현행(現行)은 과가 된다. 여기서 현행이란 말은 현재의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식의 현행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로부터 발생한 결과로서 이를 과라고 한다. 동시에 식의 현행은 또 결과이면서 하나의 행위이기 때문에 업이 되며, 이 업은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세력을 구비한 채 하나의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에 보존하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가리켜 종자는 식의 현행을 발생하고 (種子生現行), 식의 현행(活動)은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내에 훈습하고 보존하게 된다(現行熏種子)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와 심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서 이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러한 진리는 아라야식과 종자와의 사이에 더욱 두텁게 나타난다. 아라야식은 본체가 되고 종자는 작용이 되며, 종자는 원인이 되고 아라야식 내에서 의식을 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는 현행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와 아라야식 그리고 종자와 모든 심식의 현행 등의 관계가 하나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불가분리하다.

그런데 이들 종자는 아라야식 안에 있으면서 아라야식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인이 되고, 아라야식의 활동은 결과가 되는 진리가 있다. 아무리 만물의 근본이 되고 또 만물을 창조하는 아라야식이라고 할지라도 인과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도 그 체성은 영원한 진리의 성(性)에 해당하지만 그 위에서 활동하는 범부의 마음은 인과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유루심에 속하기 때문에 무루심이 나타날 때까지는 인과법에 얽매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아라야식 안에 있는 무루종자(無漏種子)는 청정한 수행으로 조성되는 무루종자의 훈습(薰習)으로 말미암아 현행할 때까지는 고요히 보존되어 있게 된다. 무루종자를 훈습한다는 말은 청정한 수행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청정한 업력을 조성하게 된다는 뜻이다. 청정한 업력을 조성하게 되면 이미 보존하고 있는 불성 또는 진여성에 해당하는 무루종자에게 조연(助緣)이 되어서 그 무루종자로 하여금 결과로 나타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그 무루종자가 마음에 나타나 마음을 지혜롭게 하고 또 보리심이 무성하게 하여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실현하게 된다. 이것도 역시 이숙(異熟)의 의미가 실현된 경지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아라야식 내에 있는 무루종자는 무루의 조연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루의 부정한 마음에 오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어 있게 된다.

동시에 유루종자만이 유루심인 아라야식과 서로 인이 되고 과가 되면서 찰나찰나 지속하고 있으며 또한 윤회중생을 어디론가 정처없이 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무루종자를 부활시켜 깨달음과 안락 그리고 지혜의 생활로 환원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종자의 가실을 밝힘[假實分別門]

유식학에서 업력에 해당하는 종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임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쟁이 많았다. 종자가 임시인 것이며 동시에 가(假)라고 주장한 학파는 공종(空宗)이다. 이들 공종을 대표하는 청변(淸辯)이라는 학자는 업력인 종자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모든 사물은 생겨났다가(生), 잠시 동안 머물러 있게 되고(住), 그리고 변천하여(異), 없어지는 것(滅)과 같기 때문이다. 즉 종자도 생, 주, 이, 멸의 과정을 밟는 것이기 때문에 임시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의 병(甁)은 본질이 있다. 그 본질은 불교에서 말하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등 사대(四大)의 원소(色素)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 같이 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대(四大)의 인(因)에 의하여 만들어진 병은 결과(果)가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본질인 색소와 만들어진 병은 서로 불가분리(不可不二)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병은 무정(無情)이며 동시에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임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법(萬法)의 원인인 종자(種子)도 가법(假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주장한 공종의 논리에 대하여 유식종(唯識宗)에서는 그 논리를 달리하여 일체의 만법은 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만법에는 진여성(眞如性)과 관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종자와 진여는 불가분리(不一不二)한 관계 속에 만법이 존재하므로 그 종자는 가법이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유식종의 주장을 더 말해 보면, 만약 종자가 가법이라면 진여도 가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진여가 가법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내세우는 불성(佛性)과 진승의제(眞勝義諦)와 열반과 성불 등도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법을 창조하는 종자는 실유성(實有性)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식종과 공종의 견해 차이가 있어 왔는데, 유식종에서는 종자의 실재(實在)를 주장하며 진여와도 불가분리한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유식종은 종자가 실재하는 것이며, 그 종자에 대하여 정신계와 물질계가 연기(緣起)되어지며 또 창조되어진다고 하였다.

4) 종자(種子)의 진속(眞俗)관계[二諦分別門]

종자는 만물의 원인이 되며 창조의 근원이 됨을 밝히는 것이다. 즉 세상을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진제는 진리적 성(性)을 의미하고 속제는 현상계의 속성(俗性)을 뜻한다. 그러나 이들 두 진제와 속제는 이론상 둘로 표현할 뿐이지 실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물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眞)은 단독적으로 진일 수 없고, 속(俗)은 단독으로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즉 진은 속에 의한 진이고, 속은 진에 의한 속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진제가 성립하면 속제도 성립하고, 속제가 성립하면 진제도 성립한다. 이는 곧 진과 속이 둘이 아님을 말한 것이며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 속에 진리가 운영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들 내용을 예로 표현하면, 마치 손수건으로 토끼를 엮어 만든 것을 토끼라고 하는, 실물의 인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손수건을 토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손수건은 본질인 진제에 비유하고 토끼의 모습은 속제에 해당하는 현상계에 비유한 것이다. 토끼와 손수건이 둘이 아니듯이 진제와 속제도 둘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는 만법과 진여가 불가불리(不卽不離)한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비유인 것이다. 동시에 종자도 만법과 진여와도 불가불리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다.

5) 마음의 인식작용과 업력(業力)의 보존[四分分別門]

아라야식에는 사분의 작용이 있다. 물론 그밖에 모든 심식에도 사분작용이 있다. 사분이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 등을 말한다. 이들 사분은 식(識)의 내용과 활동을 분류한 것으로서 상분은 외부의 현상을 식의 안에서 꼭 같은 모습으로 현상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견분은 그 상분에 영상으로 나타난 모습을 상대하여 인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자증분은 견분의 역할이 틀림없는지에 대하여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뒤에서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아라야식 등 심식에는 네 가지 작용이 있는데 이러한 작용 가운데 종자는 어떤 작용에 의지하고 또 보존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을 종지(宗旨)로 삼고 있는 법상종(法相宗)에서는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이론에 따르고 있다.

호법의 이론에 따르면 종자는 사분(四分) 가운데 자증분에 포섭(包攝)된다고 하였다. 선업종자와 악업종자 등 온갖 종자는 식의 중심인 자증분에 보존되었다가 다시 의식(意識) 등 여러 심식을 통하여 온갖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만물이 생각 속에 떠오르게 되며 또한 육체적인 행동까지도 야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아라야식의 자체(自體)에 해당하는 자증분에 의존하였다가 연(緣)을 만나면 즉시 상분에 나타나게 되며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마음의 현상은 상분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나타나는 모든 삼라만상은 상분에 포섭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분은 객관계의 현상을 나타내주는 의식 속의 객관계이며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의 삼라만상도 상분을 통하여 의식 속에 나타나며 의식 속에 나타난 모든 영상을 견분이 견조(見照)하여 선악을 구별하고 고락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 가운데의 모든 종자는 현상계의 사실로 나타난다고 볼 때 그 소재처(所在處)는 상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분은 식체(識體) 안에서 견분의 반연처이면서 또한 인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루종자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종자는 선악의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유루종자를 말한다. 이와 같이 청정하지 못한 유루종자가 유루식(有漏識)의 주체인 아라야식에 보존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청정무구한 행위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어디에 보존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유루식과 무루종자의 성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무루종자는 염오(染汚)된 아라야식에 의존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체성(體性)에 의존하여 보존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의 현상(現相)은 유루식이지만 본래 지니고 있는 체성은 곧 진여성이며 또한 불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를 유식종에서는 유식성이라고 부르는데 이 유식성은 곧 진여성으로서 식의 실성(實性)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중생들은 부정한 마음에 해당하는 유루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히 본성(本性)이 되는 실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식의 실성과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같고 또 잘 융화가 되기 때문에 모든 무루종자는 유식성에 의존하며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가 유식성에 보존되었다가 만약 청정한 수행으로 무루(無漏)의 마음이 나타나면 청정한 견분인 정견(淨見)을 나타나게 하고 또 청정한 상분을 나타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하면 중생이 만약 무루위(無漏位)에 오르면 염오성(染汚性)이 퇴치되고 식의성(識性)인 무루성이 청정한 사분에 해당하는 정분을 야기하게 된다. 이때의 무루종자는 무루견분(無漏見分)과 무루상분(無漏相分)을 야기시키는 힘이 되며 무루의 견분은 또 무루의 상분을 상대로 관조(觀照)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유루종자는 유루(有漏)의 아라야식의 자증분에 보존되어 있다가 상분을 통하여 정신계의 현상을 나타내며 식의 성에 보존되어 있다가 수행자의 무루심을 통하여 무루의 견분과 무루의 상분으로 나타나게 된다.

6) 선악종자와 무루종자의 보존[三性分別門]

아라야식 안에는 선(善)의 업력과 악(惡)의 업력 그리고 무기(無記)의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업력(業力)인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보존되어 있는데, 무루의 종자와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매우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선의 종자와 악의 종자 그리고 무기의 종자 등 이른바 삼성종자(三性種子)는 그 성질이 변하여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이숙종자(異熟種子)이다.

그러므로 이들 세 가지 성질을 가진 종자들은 아라야식의 별명인 이숙식에 능히 보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숙식은 무기성(無記性)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숙무기성(異熟無記性)인 이숙식에는 선, 악, 무기 등 삼성종자가 보존되어 있다가 앞으로 연을 만나게 되면 그 결과로 나타나며 또한 과보를 받게 된다.

이러한 내용들을 섭용귀체문(攝用歸體門)과 성용별론문(性用別論門)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섭용귀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라야식은 체(體)이고 종자는 용(用)이다. 유루종자는 유루식인 제8아라야식과 더불어 그 체성이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피차의 성질과 종류(性類)가 함께 유루에 속한다. 유루라는 말은 번뇌가 있고 선과 악의 종자에 의하여 선악의 과보를 받는 등 변화무쌍한 염오의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청정치 못한 부정의 성질을 유루라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과 종자는 꼭같이 유루에 속하기 때문에 서로 통할 수 있으며 동시에 종자는 용(用)으로 포섭되어 삼체(體)인 아라야식에 귀의(歸依)하여 무기성에 섭장(攝藏)하게 된다.

둘째, 성용별론문은 종자인 작용(用)과 제8아라야식인 체(體)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내용을 말하면 능히 활동하면서 종자를 훈습하는 칠전식(七轉識)과 종자로부터 출생하는 현재의 행위(現行)가 선악 등 삼성(三性)에 서로 통하므로 종자도 동일하게 선과 악과 무기성에 통한다.

그러나 무루종자의 체성은 오직 선(唯善)뿐이다. 이 선은 곧 절대선(絶對善)을 뜻하며 절대선을 수행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선과 악이 상대되는 상대선(相對善)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같은 선이라 할지라도 상대선은 유루선이라 하고 절대선은 무루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절대선에 의하여 조성된 무루종자는 그 성질이 독특하여 유루성이 있는 아라야식의 상분에 보존되지 않고 무루성인 아라야식의 성(性)에 보존하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무엇이든지 정화할 수 있는 능대치(能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으나 아라야식의 인과성(因果性)은 오직 무기성이며 동시에 정화되어야 할 소대치(所對治)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루종자는 일반적인 선악업종자와는 달리 아라야식의 이숙무기성에 보존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청정무구한 진여성에 보존된다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모든 업종자가 비록 아라야식에 보존된다고 하더라도 무루종자와 유루종자와의 보존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매우 일리가 있는 학설이며 동시에 진리에 맞는 논리인 것이다.

7) 선천적인 업력과 후천적인 업력[新熏本有分別]

위에서 업력의 보존관계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들 업력과 종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여 그 업력의 지배하에 중생이 윤회하고 또 과보를 받는 것인지 아니면 중생 각자가 이승에 출생하면서 후천적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업력이 조성되어 있는 것에 의하여 중생들이 업보를 받고있다고 한다면 이는 숙명론 또는 운명론에 떨어지는 인과사상이 될 것이다. 반대로 이승에 출생하여 비로소 업력을 조성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면 전생에서 금생에 출생하기 전까지의 업력을 어디서 구하느냐가 문제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학자들이 많은 논쟁을 벌여왔는데 고래로부터 있어왔던 학설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기로 한다.

가) 호월(護月)논사의 본유설(本有說)

먼저 인도의 학자인 호월논사(護月論師)는 업력이란 새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며 본유설(本有說)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선업과 악업 등 모든 업력은 아라야식에 본래부터 보존되어 있는 것이며 그 업력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업력은 새로 조성된 것이 아니며 설사 새로운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이미 보존된 종자에 조력하여 현실의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증상(增上)의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행동은 과거의 업인을 결과로 나타나게 하는 조연(助緣)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호월논사는 만약 종자가 새로 생긴다면 동일한 종자가 많이 생기게 되며, 인(因)은 많이 생기는데 과보는 하나(多因一果)밖에 되지 앟는 비진리가 전개되기 때문에 인과법이 문란해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종자(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이 없는 과보(無因果報)를 초래하게 되고 또 보살도적인 수행을 하여도 청정한 지혜인 무루지(無漏智)의 발생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는 무루지와 불성과 같은 진리의 성품이 보래부터 보존되어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월논사의 업력사상은 업력이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운명론에 빠질 우려가 많다.

나) 난타(難陀)논사의 신훈설(新熏說)

다음으로 난타논사(難陀論師)의 신훈설(新熏說)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신훈설은 글자 그대로 업력과 종자는 본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출생하여 새롭게 훈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종자란 옛적부터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것이므로 행동이 있는 한 종자도 새로 훈습되며 조성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자는 태초부터 찰나찰나 조성되는 것이며 또 무루의 종자도 역시 수행과 포교 그리고 보살도에 의하여 찰나찰나 훈습되고 조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훈설은 너무나 현실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면이 없지 않다.

다)호법(護法)논사의 합성설(合成說)

다음은 호법논사(護法論師)의 신구합성설(新舊合成說)을 살쳐보기로 한다. 호법논사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본유설(種子本有說)과 신훈설(新熏說)을 종합하여, 종자는 본래 보유한 것도 있고 새로 훈습하여 조성되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만약 본래 보존되어 있는 종자와 새로 훈습되는 종자가 없다면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정신계인 칠전식과 아라야식과의 인과관계가 없어지게 되므로 이는 부당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자가 새로 훈습되어 조성되고 본래 보유하고 있는 종자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유루심의 활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유루종자가 무루종자를 발생하는 모순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호법논사는 무루종자를 비롯한 여러 선악업종자가 이미 보존되어 있다가 금생에 나타날 수도 있고, 또 찰나찰나의 행동에 의하여 훈습되는 종자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호법논사의 업력사상은 중국과 한국에 많은 영향을 끼쳐 왔으며 이를 옛적부터 정설로 믿어 왔다.

말하자면 업력은 전생에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금생의 연을 만나 과보를 받고 또 아직도 결과로 나타나지 않은 업력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업력은 이승에 출생하자마자 다시 의식활동을 통하여 새롭게 조성해 나가며 자신을 찰나찰나 개선해 가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종자의 보존상태를 알아보았다. 종자는 아라야식에 선천적으로 이미 보존된 것도 있고 후천적으로 새로 조성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로 되어 왔다. 그리하여 중생들은 전생에 지은 업력을 아라야식에 보존하여 이승의 과보를 받게 되었고 또 아직도 남아있는 유루종자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루종자는 친인연(親因緣)과 증상연(增上緣) 등 여러 인연을 만날 때까지 아라야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眞如性)에 보존하게 된다. 무루종자는 수행하는 불자들에게 내적인 친인연이 되어 무루의 실천으로 나타나게 하고 심지어는 성불(成佛)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유루종자는 중생들로 하여금 현생에서도 악한 과보(惡報)와 고통을 받게 하고 그리고 일시적인 선보(善報)와 안락한 생활만을 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중생은 본래 지니고 있는 여러 종자의 힘에 의하여 선악의 행동을 할 수 있고 동시에 그 행동은 또 새로운 종자를 훈습하고 조성하는 인과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본래 보존된 것도 있고 또 찰나찰나 새롭게 조성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업력사상에 의하여 인간의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도 있지만, 그 성질이 새롭게 개선되고 발전하는 가능성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종자의 성질은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4

3. 종자(種子)의 성질과 육의(六義)

종자는 곧 업력의 뜻이며 업력은 인간의 행위를 비롯하여 중생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된다는 것을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조성된 종자는 미래의 과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는데 그 종자의 내용에는 여섯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여섯 가지 의미는

첫째로 종자는 찰나찰나 생멸을 반복할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둘째,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발생하면서 그 결과와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종자는 항상 지속적이면서 발전적이어야 한다.

넷째, 종자는 선악의 성질이 분명하여야 한다.

다섯째, 종자는 여러 인연을 기다렸다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여섯째, 종자는 자신의 성질과 꼭 같은 성질의 결과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여섯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종자육의(種子六義)라고 한다. 이들 종자육의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찰나 생명의 성질[ 刹 那 生 滅 義 ]

종자는 찰나에 생멸하는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윤회의 법과 그리고 유위(有爲)의 법은 찰나에 생멸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종자는 무상하게 변화하는 사바세계와 중생의 선과 악 또는 고통과 안락 그리고 생과 사 등의 현상계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찰나찰나 생과 멸을 되풀이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생멸의 법을 창조하는 만법의 종자는 그 자체도 생멸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식학의 주장이다. 만약 생멸이 불가능한 종자라면 찰나에 생멸하는 만법을 발생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찰나에 생멸하는 종자만이 만법을 연기(緣起)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진여법(眞如法)과 무위법(無爲法) 등 상주하는 불생불멸의 진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주불변의 무위법은 무루종자만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동시의 인과[ 果 俱 有 義 ]

인과가 동시에 존재하여야 한다. 이것을 유식학에서는 과구유(果俱有)라고 한다. 아라야식 내의 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행동을 능동적으로 발생하는 능생(能生)의 원인이다. 능생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결과도 동시에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자는 현재의 행동과 현상을 발생하는 종자임과 동시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행동과 현상은 바로 결과가 되며, 이 결과는 또 다시 종자가 되어 아라야식 안에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에 대해서 결과가 되며, 동시에 업력이며 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인과 동시의 연기법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과구유라 한다.

이러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만약 앞에 훈습된 종자가 시간의 간격이 있게 되면, 그 종자와는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비진리적인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과는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리고 전후가 없는 현재성을 유지하여야 한다.

3) 동일한 성질의 유지[ 恒 隨 轉 義 ]

종자는 반드시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 이를 항수전(恒隨轉)이라고 한다. 항수전은 앞과 뒤의 변화가 없이 항상 그 성질을 유지시켜 가면서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지속성이 없다면 인과의 도리에서 벗어나 원인없는 결과(無因有果)를 초래하는 인과의 무질서를 가져올 우려가 있게 된다. 그리고 원인은 있어도 결과가 없는 유인무과(有因無果)의 잘못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자는 제8아라야식 안에서 영원히 그 성질이 변하지 않고 불과(佛果)에 이르기까지 지속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그 종자를 잘 보존하는 지종(持種)의 뜻을 살려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는 여러 식 가운데 오직 아라야식만이 가능하다고 하며 다른 식들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가령 제7말나식은 최고의 수행위인 금강심위(金剛心位)에 오르면 염오식(染汚識)으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전5식(前五識)은 항속(恒續)의 의미가 없어지며, 제6의식은 오위무심(五位無心)의 경우에 단절되는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말식(枝末識)은 종자를 지속시키지 못하는 흠이 있게 된다.

오직 아라야식만이 종자를 보존할 수 있고, 또 그 종자는 선의 내용과 악의 내용 등 자체의 성질을 변함없이 지속시키는 이른바 일류상속(一流相續)의 성질을 갖도록 하는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4) 성질의 분명성[ 性 決 定 義 ]

종자는 아라야식 가운데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잡란(雜亂)치 않고 일정해야 한다. 이를 성결정(性決定)이라고 하며 종자는 성질이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전7식이 활동하고 현행(現行)하는 내용이 선행(善行)이라면, 이 선행의 업력이 아라야식 안에 보존될 때도 선성(善性)의 종자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성질과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훈습되어지는 종자도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삼성(三性)의 성질 가운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던 간에 그 성질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어야 함을 뜻한다.

5) 조연의 기대[ 待 衆 緣 義 ]

종자는 위에서 말한 찰나멸(刹那滅), 과구유(果俱有), 항수전(恒隨轉), 성결정(性決定) 등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종자에 대한 조연(助緣)이 없으면 결과를 발생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자든지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으면서 연(緣)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유식학에서는 대중연(待衆緣)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인(因)은 연(緣)을 만나야 과보를 발생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 연은 바로 만날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만나기도 하여 그 연이 도래할 때까지의 그 인의 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과 연이 화합하여야 과를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를 발생하는 데는 인만이 단독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도 과에 대해서 인 못지 않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관찰할 때 인(因)과 연(緣)은 과(果)에 대해서 평등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연의 내용을 보면 안으로는 여러 심식을 비롯하여 경각심(警覺心) 등 작의(作意)의 정신작용(心所)과 심식의 의지처인 근(所依根)과 그리고 인식의 대상이며 객관세계에 해당하는 육경(六境) 등이 모두 연에 해당한다. 이들 연은 아라야식 내에서 종자들끼리 서로 연이 되어 생동하고 있는데, 이들 인을 상대로 하여 결과를 발생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연은 인에게 조력하여 과보를 받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그리고 연은 인과 과와의 관계를 매우 밀접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타종교에서 오직 하나만의 원인(原因)이 다른 연의 도움없이 즉흥적으로 결과를 발생한다는 이론을 배격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발생적인 창조설을 부인하고 유일신(唯一神)적인 창조설에 해당하는 일원론(一元論)을 배격하는 사상이기도 하다.

6) 종자와 과보의 동질성[ 引 自 果 義 ]

종자에는 각각 선성과 악성 그리고 무기성 등 여러 성질의 종자가 있다. 이러한 종자의 성질에 따라 결과의 성질도 동일하게 정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말하여 인자과(因自果)라고 한다. 인자과라는 말은 선의 종자는 선의 과보를 받도록 하고 악의 종자는 악의 과보를 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성격의 결과를 초인(招引)함을 인자과라 한다.

이러한 인과의 법칙은 여러 가지 성질의 종자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현상계의 모습과 개체를 조성하고 발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는 만유(萬有)의 제법을 창조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일한 원인이 만물을 창조한다는 외도(外道)들의 삿된 사상을 배격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불교 이외의 종교와 사상을 외도라고 하는데, 이 외도들은 우주 안에는 유일신이 삼라만상을 창조하였다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편 하나의 원리(一因)가 다양한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안에 있는 삼라만상이 유일신에 의하여 창조되었거나, 또는 유일한 원리에 의하여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일인(一因)이 많은 결과(一因多果)를 창조하게 되는 비진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인다과설을 배격하고 다인다과설(多因多果說)을 주장하는 것이 곧 불교의 인과설이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종자의 성질은 다양한 것이며 동시에 다양한 결과를 발생시키고 또 창조하는 원동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종자는 반드시 위에서 설명한 여섯 가지 의미(種子六義)를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5

4. 만법(萬法)은 유식(唯識)

위에서 종자에 대한 여섯 가지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종자에는 내종(內種)이 있고 또 외종(外種)이 있다고 한다. 내종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종자로서 위에서 설명한 육의(六義)를 구비하고 있는 종자를 말하고 외종은 자연계에 생성하고 있는 곡식(穀麥) 등을 말한다.

이들 외종은 아라야식에서 발생한 공종자(共種子)를 의미하기 때문에 종자의 육의(種子六義)를 구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정신계(八識界)를 떠나 밖에 있는 종자라고 하더라도 아라야식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계의 외종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아라야식 안에 있는 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되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인간의 정신과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공종자란 말은 자기 혼자만의 이용물이 아니고 여러 중생과 더불어 공동으로 이용하는 사물과 환경을 발생하는 종자라는 뜻이기 때문에 진실한 종자(實種子)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종자는 우선 가명으로 종자라고 할 뿐이며 실제의 종자가 못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종자는 결과에 대하여 북돋아 주는 증상연은 되어도 직접 결과를 발생시키는 친인연의 역할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종자의 육의가 구비한 종자만큼 직접적인 역할을 못하고 간접적인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이라는 말이 있게 된다. 단변은 친히 변현시키는 친소변(親所變)의 상분(相分)에 해당하며 이 상분은 또 제8아라야식의 상분으로서 이를 내종(內種)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상분은 내종에 해당한다.

이러한 아라야식의 내종은 직접적인 아라야식의 상분을 변현하기 때문에 이를 단변(單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이 단변에서 다시 변현하여 외부의 현상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이를 중변(重變)이라 한다. 그리고 또 이는 외부의 현상계를 변현시키는 종자라는 뜻에서 외종(外種)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종자에는 여러 가지 성질의 것이 있고 또 밖으로 결과를 발생할 때도 이중적인 변화를 얘기하기 때문에 이를 분류하여 단변 또는 중변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 종자도 자신의 수용물을 발생하는 것을 불공종자(不共種子)라 하고 동시에 여러 중생들이 함께 수용하는 사물과 자연계를 발생하는 종자를 공종자(共種子)라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을 달리 분류하여 내종과 외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종자에 대한 논리들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진리를 설명하고 또 확인시키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6

5. 생명체와 물체를 이끄는 업인(業因)

내종(內種)과 외종(外種) 그리고 단변(單變)과 중변(重變)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생인(生因)과 인인(引因)도 단변과 중변의 내용과 흡사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 생인과 인인은 또 다른 독특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생인에 대해서 말해 보면 글자 그대로 결과를 발생시키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이 생인으로부터 발생하는 결과(果)는 여러 가지 과보 가운데 가장 근본을 이루는 과보로서 이를 근과(近果)와 정과(正果)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무성논사(無性論師)는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비유하여 생인을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생인은 십이연기 가운데 식(識)을 발생하는 업인이 되는 것이며 이 식을 근과라고도 하였다. 그것은 금생에 출생하는 식이 전생의 생인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또 가장 가까운 인연관계를 맺고 있는 결과라는 뜻에서 말한 것 같다.

세친논사(世親論師)는 이를 정보(正報)라고 하였으며 식물에 비유하면 곡맥(穀麥) 등이 종자에서 직접 발생하기 시작한 그 자체를 생인이라고 하였고 동시에 이는 내종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아무튼 이 생인이라는 것은 종자 자체가 발생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을 비유하여 내종이라 하고 같은 결과이지만 종자와 근접한 것을 근과 또는 정보라고 한다.

다음 인인은 앞에서 말한 근과와 정보라는 것과는 달리 원과(遠果) 또는 잔과(殘果)를 발생하는 업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 인간이 출생할 때 최초로 태어나는 생명체를 정보라 하고 그 위에 이목구비 등 여러 형상이 구비되는 것을 별보(別報)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과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이름도 별명이 있게 되는데, 정보를 발생한 종자를 생인이라 한다면 별보를 발생시키는 종자의 힘을 인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인에 의하여 발생되는 별보를 원과 또는 잔과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곡맥(穀麥) 등이 발아하여 그로부터 성장하는 줄기, 가지, 잎, 꽃 등은 모두 인인에서 발생하여 성장하며 이들을 말하여 원과, 잔과 또는 별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인을 외종이라고도 부른다. 그 뜻은 내부의 과보보다 외부의 과보를 발생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인인은 더욱 확대 해석되어 외부의 세계에 나타나 있는 모든 사물까지도 유지시켜 주는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것은 세친의 주장으로서 가령 외부에 있는 수목이 수명이 다하여 고목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고목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있으면서 점점 썩어질 때까지 남아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식목이 다 없어질 때까지 무엇이 유지시켜 주느냐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체는 유루의 업력에 의하여 존재하고 유지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친논사는 수명이 다한 고목도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초목들은 생인과 인인에 의하여 생존하며 고목과 같은 것은 인인에 의하여 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시체와 다른 잔재가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점차 부패되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은 인인의 힘에 의하여 그 몸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종자론(種子論)에서 일체의 삼라만상은 아라야식에 보존된 종자에 의하여 창조되어지고 또 유지된다는 말을 더욱 보충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만을 중심하여 설명하면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물과 식물은 물론 수명이 다한 시체와 고목 등 목석도 종자의 인력(引力)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1) 불공종자(不共種子)와 공종자(共種子)

종자는 내종(內種)과 외종(外種)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생인(生因)과 인인(引因)으로도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또 종자를 불공종자와 공종자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위에서 살펴본 내종과 외종 등의 역할과 흠사한 점이 없지 않으나 좀더 자세하고 광범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과보와 공동의 과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불공종자(不共種子)의 내용을 보면 불공종자는 글자 그대로 공동의 업력이 아닌 개인적인 업력으로서 자신만이 과보를 받고 또 자신만이 수용하고 이용하는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신계는 말 할 것도 없고 적어도 몸의 과보를 받게 하는 종자를 불공종자라고 한다.

다음 공종자(共種子)는 공동사회와 공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를 뜻한다. 중생이 어디에 출생하든지 그곳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게 된다. 다른 생명체와 같이 살 때는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회가 있고 또 공동으로 활용하는 사물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물체 그리고 공동의 자연계는 무엇이 창조하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데, 이는 각자의 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것이다. 중생 각자의 몸은 업력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받아들여지는데 공동의 사회와 자연계 등 공유물의 연기(緣起)설은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식학에서는 공동의 사회와 공동의 사물은 공동의 업종자(業種子)에 의하여 유지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진리에 입각하여 종자설도 확대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자란 마음을 중심한 행동에 의하여 창조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하여 유지되는 업력과 종자는 스스로 몸을 포함한 공동의 사회까지도 유지시킬 수 있어야 만법(萬法)은 유식(唯識)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종자를 논할 때 종자는 모습이 있는 과보와 결과를 창조한다고 해서 모습과 직결시켜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공상종자(共相種子)와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 등이 그것이다. 즉, 상(相)은 모습을 뜻하며 그 모습은 만유의 모습을 유지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종자에게 모습의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들 종자에 대한 자세한 분류를 보면 불공상(不共相)은 불공중공(不共中共)과 불공중불공(不共中不共) 등으로 분류하여 세계와 사물을 창조하는 원리로 설명한다. 이러한 분류들은 인간을 비롯한 동물과 동물이 의지하고 사는 사회와 사물의 성질이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설명하고자 한 종자의 이론인 것이다. 이제 종자의 각 분류대로 설명해 보기로 한다.

2) 불공중불공종자(不共中不共種子)

이 불공중불공종자는 종자의 성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미세한 위치에 있다. 이는 이름이 의미하는 것과 같이 공동의 것이 아닌 중에서 또한 공동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자기 혼자만의 소유물을 창조하는 종자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의 것이라고 하면 인간의 정신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육체가 포함될 수 있으나 외부의 육체는 남에게 고용될 수 있으므로 포함시키지 않고 육체 가운데서도 육체의 본질인 승의근(勝義根)에 해당하는 것까지는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승의근은 육체의 본질이며, 무형(無形)의 육체이기 때문에 남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정신계와 같이 오직 자신만이 소유하며 사용할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공중불공종자는 인간의 정신계와 육체의 본질인 승의근까지를 발생하고 또한 창조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3) 불공중공종자(不共中共種子)

이 불공중공종자는 위에서 살펴본 불공중불공종자보다는 약간의 외형을 형성하는 업력을 뜻한다. 이를 인간에 비유한다면 우리 자신의 신체를 의미한다. 육체는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만이 이용하고 사용하는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남에게 고용될 수도 있는 몸이기 때문에 공유물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은 공동의 것이 아니면서도 공동의 것이기 때문에 이 몸을 창조하는 종자의 성질도 불공중공종자(不共中共種子)라 이름 붙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즉 인도의 유식하자인 안혜논사(安慧論師)는 피부에 해당하는 부진근(扶塵根)은 물론 승의근까지도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변현(變現) 또는 창조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호법논사(護法論師)는 사람의 피부 등으로 이루어진 객관계의 육체는 고용인이 노비(奴婢)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변현되거나 창조되지만, 지. 수. 화. 풍(地 . 水. 火. 風) 등 사대(四大)로 창조된 육체의 성질인 승의근만은 고용주가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또 사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불공중불공종자의 창조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른바, 외부의 육체에 해당하는 피부 등 부진근만이 불공중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되고 승의근은 불공중불공종자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4) 공중불공종자(共中不共種子)

이 공중불공종자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제외하고 그밖에 대지위에 있는 가옥과 전답 등을 발생하고 형성하는 업력을 뜻한다. 이 말은 모든 생명체와 공동으로 소유하는 자연 가운데서도 개인의 소유가 있게 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넓은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누구에게나 소유할 수 있는 몫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식학에서는 공중불공종자라는 종자설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에 의하여 유지된다는 것이다.

5) 공중공종자(共中共種子)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은 후천적으로 개인소유도 있지만 영원히 공동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의 소유가 많다. 산과 들과 바다 그리고 공기와 물 등 산하대지는 영원히 공동의 소유물인 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소유물을 유지하는 업력사상이 곧 공중공종자(共 中共種子)사상이다. 이는 산하대지가 한 중생의 업력에 의하여 모두 유지된다는 뜻이 아니라 일부분을 유지시키는 몫을 가지고 나왔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가히 셀 수 없는 뭇 생명체가 살고 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생명체의 업력에 의하여 지구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에 사는 중생들의 업력이 악하면 지구의 자연상태도 악화되어 그 생명체들이 살기에 불편하도록 환경이 조성된다. 반대로 지구상의 생명체가 업력을 선하게 발생하면 지구의 자연상태는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체가 살기 좋도록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축소하여 보면 우리 주변의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으로 종자의 내용을 네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그 가운데 종자가 각자의 몸과 마음을 변현하고 또 창조하는 핵심 세력이 된다는 것은 인과응보사상에서 많이 말하는 내용이지만, 인간외의 객관 세계까지도 종자에 의하여 유지되고 건설된다는 학설을 쉽게 접할 수 없는 이론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상을 포함하여 만법(萬法)은 유식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종자가 이 세계에 보탬이 되고 세계를 유지시키는 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하여 유식학에서는 그 이치를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 칸에 수백 개의 전등이 있다고 하자 그 방에 새로운 전등을 하나 더 켰다고 해서 별로 그 밝음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그 방에 한 전등이 꺼졌다고 해서 별로 그 밝음의 차이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도 공업(共業)을 발휘하면서 이 세상에 한 사람이 태어나거나 아니면 사망할 때, 그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그렇게 알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를 생각하면서 공업설(共業說)을 이해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7

6. 훈습을 받는 마음과 훈습을 하는 마음( 所 熏 과 能 熏 )

위에서 여러 가지 종자설을 살펴보았다. 종자는 미래의 결과를 가져올 원인으로서 매우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종자가 아라야식 내에 보존되어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즉각 현실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유루와 무루, 선과 악 등 종자가 아라야식 안에 안주(安住)하고 있다가 수시로 외부와 내부의 연의 도움(助緣)을 받아 현실 생활 위에 다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과거에 익혔던 지식과 습관 등을 말하며 이는 곧 새롭게 전개되는 정신의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곧 훈습에 의하여 조성된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또 훈습(薰習)의 논리가 전개된다.

훈습의 논리는 아라야식과 그밖의 칠전식(七轉識)과의 관계를 논리화한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이식(耳識)은 성경(聲境)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등 모든 식(諸八識)은 제각기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하여 활동하는 것을 훈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心)을 팔식(八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유식학은 팔식의 활동이 서로 마찰하지 않고 충분히 활동할 수 있다는 또 다른 면을 설명하고자 훈습설을 전개하고 있다.

유식학의 훈습설에 의하면 팔식의 활동은 훈습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훈습은 종자와 업을 조성하는 산모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팔식의 내외의 활동이 곧 종자를 조성하는 훈습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의하여 훈습에 대한 내용을 현실성 있게 해석하게 된다. 즉, 우리 인간이 정신을 통하여 지식을 익히고 배우며 개발하는 것을 생활수단으로 삼는다는 뜻을 살펴서 훈(熏)은 개발(開發) 또는 유치(由致)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개발은 전에 없었던 지식과 사상, 정신 그리고 육체적인 기술과 습관성 등을 새롭게 개발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개발된 내용들은 하나도 유실하지 않고 미래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기술로 나타날 수 있는 종자로서 아라야식에 보존시키게 된다.

이러한 종자를 신훈종자(新熏種子)라 한다. 동시에 이 개발은 이미 아라야식에 보존된 지식과 사상 및 기술과 같은 원인종자(原因種子)를 돕는 조연(助緣)이 되어 현실의 정신생활 속에 발생하도록 한다는 뜻도 있다.

다음 유치(由致)의 뜻도 이미 보존되어 있는 아라야식 내의 종자를 밖으로 유치하여 현실생활에 현행(現行)의 상태로 표현되도록 하는 역할을 말한다. 이와 같이 개발과 유치의 뜻은 현재의 정신생활과 밀착된 뜻을 지니고 있다.

다음 습(習)에 대한 뜻을 살펴보기로 한다. 습의 내용에는 생(生), 근(近), 삭(數)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부언하면, 습은 익힌다는 뜻으로서 종자를 아라야식 내에 새롭게 조성하되 시시각각 자주 익힌다는 뜻에서 삭(數)이라 하며 전체의 뜻을 종합하여 자주 훈습함을 말한다.

그리고 근(近)은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로 하여금 시간적으로 즉시 훈습한다는 뜻이다. 끝으로 생(生)은 아라야식 내에 있는 종자를 결과로 발생케 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수, 근, 생의 뜻을 종합하여 보면 종자를 자주(數) 훈습하고 동시에 그 종자로 하여금 바로(近) 발생(生)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훈습의 뜻에는 매우 현실성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자의 훈습에는 밖으로부터 훈습되어지는 종자가 있는가 하면 안에서 밖으로 발생하는 훈습의 뜻도 있는 것이다. 즉, 밖에서 안으로 훈습되어지는 것은 곧 아라야식을 말하고 그 종자를 능동적으로 훈습하는 심식은 칠전식이다.

그렇다면 종자의 훈습을 받는 아라야식은 어떠한 내용으로 훈습을 받게 되며 동시에 훈습을 하는 칠전식은 어떠한 내용이 있어 훈습을 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심식의 활동을 말하여 소훈식(所熏識) 또 능훈식(能熏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종자의 훈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식을 소훈식이라 하고 이와 반대로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하는 식을 능훈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종자의 훈습 내용을 분류하여 소훈식 또는 능훈식으로 명칭을 붙이고 있다. 이들 별명들을 팔식에 관계시켜 보면 아라야식은 소훈식이 되고 그밖에 말나식 등 칠전식은 능훈식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훈식과 능훈식은 무조건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소훈사의(所勳四義)와 능훈사의(能熏四義)로서 설명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훈습을 받는 마음 ( 所 熏 識 )

소훈식(所熏識)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훈습을 받는다는 뜻이 있다. 이는 칠전식이 훈습하는 종자를 아라야식이 수동적으로 훈습을 받는 입장을 뜻한다. 이와 같이 종자와 업력의 훈습을 받는 심식에는 반드시 네 가지 조건을 구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에는 다른 식에 구비할 수 없는 네 가지 조건(四義)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네 가지 조건 즉 사의(四義)는 첫째, 견주성(堅住性) 둘째, 무기성(無記性) 셋째, 가훈성(可熏性) 넷째, 화합성(和合性) 등을 말한다. 아라야식에는 이와 같은 네 가지 뜻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칠전식의 훈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훈처(所熏處)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종자가 육의(六義)를 구비하였기 때문에 결과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들 네 가지 뜻은 다음과 같다.

가) 견주성( 堅 住 性 )

견주성의 뜻은 윤회하기 시작한 태초(太初)부터 번뇌망상이 해탈되는 구경위(究竟位)이 이르기까지 성질이 변하지 않고 일류상속(一類相續)한다는 뜻이다. 일류상속은 일류(一類)는 곧 견(堅)을 뜻하며, 상속(相續)은 주(住)를 뜻한다. 이 말은 훈습을 받는 곳(所熏處)은 그 성질이 견고하며 지속적으로 안주(安住)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훈습된 종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안보(安保)의 기능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훈습처인 아라야식이 수시로 변질한다면 그 곳에 훈습되어 포장(包藏)된 종자는 안주하지 못하게 되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이는 보살수행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견도(見道)의 수행위에 오를 때 유루종자는 점점 없어지고 칠전식의 번뇌도 정화되어 무루식으로 변질하게 된다. 그러나 오직 종자의 훈습처인 아라야식만은 최후까지 윤회의 주체로서 지속하며 또 성불(成佛)할 때 까지 유루업을 지속시켜 준다. 그러므로 아라야식만이 종자의 훈습처가 되고 또 윤회의 주체로서 자격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교설은 소승불교의 경량부 등이 업력은 몸과 마음애 같이 훈습(色心互熏)하게 된다는 이론을 배척하는 이론이기도 하다.

나) 무기성( 無 記 性 )

아라야식과 같은 소훈처는 반드시 모든 종자를 평등하게 받아들이는 성질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성질은 무기성(無記性)이어야 한다. 무기성은 선성(善性)과 악성(惡性)에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기성(無記性)인 아라야식은 선업과 악업 등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훈습되어 오는 종자들을 모두 공정하게 받아들이는 장소에 적합한 것이다. 이는 다른 심식들이 선과 악에 치우치는 성질을 갖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특성인 것이다.

만약 훈습을 받아 저장하는 장소(所熏處)가 이미 선성이거나 악성이었다면 선악업을 공정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장소가 되고 만다. 예를 들면 어떤 장소에 독한 향기가 이미 배어 있다면 그 장소에는 다른 향기가 안착할 수 없는 것이며 동시에 배격되고 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자의 훈습처는 오직 무기성이어야 하며 그 무기성을 지닌 심식은 오직 아라야식뿐이라고 한다. 여기에 모든 종자는 자재하게 훈습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 가훈성( 可 熏 性 )

가훈성(可熏性)은 어떤 종자든지 훈습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견밀성(堅密性)과 대조하여 하는 말이다. 견밀성이란 무엇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견고하고 밀착된 성질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견밀은 마치 암석과 같은 것에 물을 부어도 잘 젖지 않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훈습을 받는 장소는 견밀성이 아닌 가훈성으로서 무엇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라) 화합성( 和 合 性 )

화합성(和合性)은 소훈식인 아라야식이 능훈식인 칠전식과 어떠한 경우라도 마찰없이 화합하는 것을 뜻한다. 아라야식과 칠전식은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이탈하거나 마찰없이 중도적으로 부즉불리(不卽不離)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다른 쪽의 훈습과 시간이 다른 전후의 간격이 있는 훈습은 받지 않는다.

만약 훈습을 받는 장소(所熏處)가 안식 내지 말나식 등 칠전식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면 정신의 문란과 인과의 질서가 파괴되며, 또 다른 사람의 업과(業果)를 받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소훈처인 아라야식은 다른 지말식들과 항상 화합하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른 식들의 훈습을 받는 장소로서의 아라야식은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훈습을 하는 마음( 能 熏 處 )

능훈식(能熏識)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능히 훈습을 하는 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팔식 가운데서 아라야식을 제외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등 칠전식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면서 선업과 악업 등 온갖 업력을 아라야식을 상대로 능히 훈습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전식(轉識)이라는 말은 심식의 성질이 선 또는 악 등으로 시시각각 전변(轉變)하고 변화하며 또 여러 작용을 전생(轉生)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여러 가지 성질로 활동하는 마음을 전식이라 한다.

이러한 칠전식을 능동적으로 훈습하는 심식들이라고 해서 능훈식(能熏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능훈식들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뜻을 구비하여야 능히 훈습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된다고 한다. 그 네 가지 뜻은 곧 유생멸의(有生滅義), 유승용의(有勝用義), 유증감의(有增減義),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 등을 말한다.

이들 네 가지 뜻을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한다.

가) 유생멸의( 有 生 滅 義 )

번뇌가 있는 유루적인 모든 것을 생멸이 있는 법(生滅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훈식도 무상하게 항상 전변하는 생멸의 성질을 갖고 있어야 선악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생과 멸을 되풀이하기 때문에 생멸심(生滅沈)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원리가 없으면 선악의 업력을 능히 훈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위법(無爲法)은 생멸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므로 여기서는 제외된다.

나) 유승용의( 有 勝 用 義 )

능훈식(能熏識) 습기(習氣) 또는 업력을 훈습하고 증장(增長)시키는데 수승한 작용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업과 악업을 능히 훈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칠전식은 선행과 악행 그리고 지혜를 장애하는 유부성(有覆性)을 강하게 나타내는 승용(勝用)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능히 선악업을 훈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라야식과 색법(色法) 등은 그렇지 못하다.

다) 유증감의( 有 增 減 義 )

능훈식은 반드시 증감(增減)의 뜻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과 멸, 선과 악이 되풀이되는 유루식은 수행에 의하여 정화될 수 있고, 무루위에 오르면 필연적으로 염오의 성질이 감소되고 반대로 청정한 무루법은 증장되는 진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량심이 가장 많은 말나식의 성질도 제8지(第八地)의 보살위에 오르면 자연히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칠전식에는 증감의 뜻이 있게 마련이다. 만약 능훈식에 증감의 뜻이 없다면 아무리 수행하여도 그 마음이 정화되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중생들은 영원히 선악업만 짓게 되고 또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할 수 없게 되는 비진리가 따르게 된다.

이와 같이 능훈식에는 증감의 뜻이 구비되어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번뇌의 마음이 정화되어 무루의 보살위와 불과위(佛果位)에 오를 수 있게 되는 인과의 도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증감은 유루식(有漏識)에 한하고 무루식(無漏識)에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만약 무루법(無漏法)에 증감이 있다면 부처님도 청정하지 못한 유루식으로 다시 타락해야 하고 또 생사에 윤회해야 하는 비진리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증감은 번뇌가 많을 수도 있고 감소 할 수도 있는 유루식에 한정되며 청정무구한 무루식에는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무루진여(無漏眞如)의 세계는 부증(不增)하고 불감(不減)하기 때문이다.

라) 능소화합의(能 所 和 合 義 )

능소화합의(能所和合義)는 칠전식인 능훈식(能熏識)과 아라야식인 소훈식(所熏識)이 서로 화합하여야 함을 말한다. 능훈식의 기능이 아무리 다양하고 활동적이라고 하더라도 업력과 종자를 훈습할 때 소훈처(所熏處)인 아라야식과 서로 화합하지 않으면 능훈식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훈처인 아라야식과 마찰하여 종자를 훈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훈식이 새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자를 소훈처에 훈습할 때 소훈식과 추호도 마찰없이 화합하여 원만하게 훈습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서로 화합하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닌, 또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 부즉(不卽)과 불리(不離)의 관계를 유지하여야만이 새로운 종자를 능동적으로 훈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능훈식인 칠전식은 네 가지 뜻을 구비하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네 가지 뜻(四義)을 가졌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하여 능동적으로 종자를 훈습할 수 있다. 그리고 소훈식도 역시 네 가지 뜻을 구비하여야만이 모든 종자의 훈습을 받고 또 안보하며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Ⅴ. 제 8아라야식(阿賴耶識)과 삼상(三相)-8

7. 청정심과 무루훈습(無漏薰習)

위에서 여러 면으로 종자의 훈습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대부분 유루훈습(有漏薰習)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유루훈습과는 내용이 다른 무루훈습(無漏薰習)에 대한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진리로운 본성(眞如性)을 지니고 있었지만, 언젠가 홀연히 무명(無明)을 야기하여 진리를 망각하고 또 번뇌를 야기하면서 고통을 받는 업인(業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명이 마음속에 나타나는 시기는 가히 알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러므로 {기신론(起信論)}에서도 그것을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하였다. 무시무명의 뜻을 직역한다면 '시작이 없는 무명'이라는 뜻인데, 그러나 이를 의역한다면 '무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마음속에서 무명이 나타나는 것을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 하며 이로부터 그 마음을 생멸심(生滅心)이라 한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학에서는 제7말나식이 무아의 진여성을 망각하여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하기 시작하였다는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범부들은 언젠가 진리에 대한 무명을 야기하여 여타의 번뇌를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번뇌들을 누(漏)라고 한다. 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누설(漏泄)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의 비유적인 명사로서 내심(內心)에서 탐진치(貪瞋痴) 등 근본번뇌가 약동하여 주야로 눈, 귀, 코, 입, 몸, 의지 등 육근문(六根門)을 통하여 번뇌를 누설시키기 때문이다.

번뇌를 누설한다는 말은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누(漏)는 유주(留住)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번뇌가 누설하여 그 업력으로 말미암아 욕계(欲界)와 색계(色界), 그리고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의 윤회세계에 머무르게 하고 거주하게 하며 또한 해탈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사론(俱舍論)}에서도 유정(有情)으로 하여금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부터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생사에 유전(流轉)케 하는 것을 누(漏)라고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악인(惡因)을 조성하여 고과(苦果)를 받도록 하는 것이 번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인과업보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고 이를 우리 생활주변의 인식론적 차원에서 말한다면 마음의 번뇌는 모든 인식의 대상(諸境界)에 대하여 애착심을 머물게 하는 유주(留住)의 뜻이 있다. 그리고 또 계속 육근(六根)을 통하여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三惡道)에 누락(漏落)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누락의 뜻도 있다.

이상과 같이 누(漏)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며 이러한 누(漏)가 마음속에 있으면 이를 유루심(有漏心)이라 하고, 또 유루심으로부터 발생하는 향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되는 업력과 종자를 흔히 유루업(有漏業) 또는 유루종자(有漏種子)라 한다. 이 유루종자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이와 같은 유루종자에 의하여 생사고와 윤회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自覺)이 당연히 있게 된다. 이러한 자각심이 싹트는 것을 발심(發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발심에 의하여 불심(佛心)이 나타나게 된다.

윤회의 고통과 현재의 정신적인 고통을 면하려면 불심을 통한 선행을 해야 하며 더욱 나아가서 진리로운 행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선행은 선업을 조성하고 진리로운 행동은 무루업(無漏業)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악행과 상대되는 선행이기 때문에 선보(善報)는 받을 수 있어도 영원히 윤회의 고통을 해탈시킬 수 있는 업력을 조성할 수 없다. 그러나 진리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무루업은 반드시 윤회의 고통에서 해탈시킬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佛子)들은 일거수 일투족의 행동을 진리롭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정화가 없으면 누(漏)가 정화될 수 없고 누가 정화되지 않으면 항상 유루심에 입각한 행동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마음이 정화되면 자동적으로 청정한 무루심이 나타나며 무루심에 의하여 행동하게 되면 그것은 곧 무루종자가 조성되고 또 훈습된다는 것이다.

그 훈습처는 제8아라야식의 자체분(自體分)에 의부(依附)하여 있게 된다. 왜냐하면 무루종자는 유루종자와 달리 청정하고 진리로운 업력에 속하기 때문에 표면으로 유루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의 대상(所緣)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루종자는 견분의 인연처이며 소연경인 상분(相分)에 포섭(攝)되지 않고 아라야식의 자체분에 의지하여 있게 된다고 한다.

처음 발심하면 비록 무루심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더욱 정진함을 계속하면 무루종자가 강하게 되며 결국 유루심의 영역을 정화하게 된다. 따라서 유루종자도 추방되며 불성 또는 진여성도 점차 나타나고 구경에는 완전한 성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무루심이 나타나고 무루종자가 조성되려면 먼저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생공무루(生空無漏)와 법공무루(法空無漏), 그리고 생공과 법공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공무루(二空無漏)가 성취되어야 한다. 이들 공관(空觀)은 진리에 합당항 사상을 발생시키며 동시에 진리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바탕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 공관을 통하여 무루종자가 조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공사상을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인간은 여러 인연으로 집합된 존재이므로 그 내용에는 공(空)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다는 공관을 가져야 한다. 즉 나는 오온(五蘊)이 임시로 화합(假和合)된 것임을 관하여 애착과 집착을 떨쳐버리고 수련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생공관(生空觀)이라 하고, 또 아공관(我空觀)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음 인간은 안으로는 자신의 자성을 관찰하고 밖으로 삼라만상을 관찰하되 그 자성(自性)과 삼라만상의 체성이 공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법공관(法空觀)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자체와 사물의 자체까지도 공의 이치와 더불어 존재하는 것임을 중도적으로 관찰하여 그에 대한 고정관념인 애착과 집착을 떨쳐버리게 하는 수행이 곧 법공관인 것이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나(我)'라는 생각과 '나의 것(我所)'이란 생각이 동시에 없어지게 되는데 이를 이공관(二空觀)이라 한다. 이러한 공관을 통하여 자신의 머음속에 묻혀있는 온갖 지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 지혜들을 방해하고 장애를 부렸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정화하게 된다. 즉, 번뇌장은 마음의 편안함과 안정을 유지하는 열반(涅槃)을 파괴하는 것이며,

소지장(所知藏)은 인간의 본성에서 항상 발휘되는 지혜광명을 장애하고 무지(無知)케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지혜력에 의하여 사라지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유식학에서 말하는 사지(四智)와 불성(佛性)이 나타나며 이 불성을 흔히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고도 한다.

사지(四智)는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등을 말하며 아마라식은 청정식(淸淨識), 또는 무구식(無垢識)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아마라(阿摩羅)는 무구(無垢) 또는 청정하다는 뜻으로 청정한 진여심 그리고 불성을 하나의 식(識)으로 명칭하게 된 것이다.

아라야식을 비롯한 팔식의 유루식은 아공과 법공 등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곧 마음의 정화가 되며 아마라식과 사지(四智)와 같은 무루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 무루식의 활동에 따라 무루종자를 훈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루식이 나타나는 데는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워가면서 부단히 정진하여 무루종자를 하나하나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마치 한 푼 두 푼 은행에 저축하여 결국 많은 돈을 모으듯이 우리의 수행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범부들의 깨달음은 매우 미미하여 오히려 불각(不覺)이라 이름하였고 이승(二乘)과 처음 발심한 보살들의 깨달음을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초지(初地)로부터 구지(九地)에 이르기까지의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이 마음을 점차 깨달아가는 것을 수분각(隨分覺)이라 하였으며, 십지보살(十地菩薩)이 원만히 수행하여 최초에 무명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고 완전한 심성으로 안주(安住)하는 것을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이와 같이 유식학에서도 무루종자를 훈습하며 깨달아가는 단계를 삼현(三賢)과 십지(十地)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는 초발심부터 시작하여 성불에 이르기까지의 수행단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을 피하고 다만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등의 무루행(無漏行)만을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1) 견도(見道)의 수행

견도(見道)는 여러 설법을 자주 듣고, 깊고 견고한 대심(大心)을 발휘하여 진리로운 무루종자를 훈습해 가는 경지를 말한다. 견도의 보살은 초지보살이며 환희지보살(歡喜地菩薩)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속한 보살은 삼공(三空)의 지혜를 나눈다.

첫째로 보살은 생공(生空)의 진여(眞如)를 관하여 생공 다음에 얻어지는 지혜(後得智)를 갖게 된다. 즉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온갖 망상을 텅 비워버리는 곳에서 온갖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지혜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로 보살은 법공의 진여를 관하고 수행을 계속한 공덕으로 법공의 후덕지를 증득한다.

셋째로 생공과 법공이 함께 성취되는 구공(俱空)의 진여를 증득하여 관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여 구공의 후득지를 갖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후득지는 생공관과 법공관 등 진리관을 갖고 수행을 열심히 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마음속의 지혜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견도의 경지는 공관을 갖고 모든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하는 수행을 쌓아 처음으로 진리다운 진리를 조견(照見)한 경지를 말한다. 이러한 경지는 능히 집착하는 마음도 없어지고 집착되어질 대상도 없는 절대의 경지에서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가 열리게 되는데, 이를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진리를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 평등하게 관찰하여 합일의 경지에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진지(眞智)가 나타나서 마음을 동요시켜 장애를 야기하는 번뇌장(煩惱障)을 소멸하고, 또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지혜를 방해하는 소지장(所智障)도 소멸하게 된다.

이제 말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은 번뇌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이 되는 번뇌로서 사실상 수행은 이 두 근본번뇌(根本煩惱)를 퇴치하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뇌장은 아집을 발생시키고, 소지장은 법집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공관을 통하여 번뇌장을 퇴치하고 인간의 본심인 평화로운 열반을 중득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한편 법공관을 통하여 소지장을 퇴치하고 역시 인간의 본성인 모든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보리(菩提)를 증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열반은 마음의 평화와 안락을 뜻하고 보리는 마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지혜를 뜻한다.

2) 수도(修道)의 수행

수도(隨道)는 일명 수습위(修習位)라고도 한다. 이러한 수도위(隨道位)는 위에서 살펴본 견도의 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더욱 용맹정진하는 보살의 수행을 말한다. 보살의 수행은 대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십바라밀은

* 남에게 물질과 진리를 베풀어주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스스로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남을 도와 윤리적 실천을 수행하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진리탐구와 중생구제에 어떠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를 능히 참아내는 인욕바라밀(忍辱 波羅蜜)

* 보살은 역시 진리를 탐구하고 중생을 구제할 때 방탕과 나태한 생각을 가지면 안 되고 전장에서 적군과 싸우는 것과 같은 무퇴의 정진으로 책임완수를 하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 선정은 마음을 평등하게 하며 동요의 정신을 버리고 항상 안주케 하는 선정바라밀(禪定波 羅蜜)

* 모든 사물을 진리롭게 관찰하고 불교적인 인연법과 연기법을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바라

밀(智慧波羅蜜)

* 보살은 무상관(無相觀)을 갖고 진리로운 방편으로 수행을 완수하는 방편바라밀(方便波羅 蜜)

* 보살은 부단히 보리를 구하는 발원(求菩提願)과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발원(利樂他願) 등을 하며 쉼없이 정진하는 원바라밀(願波羅蜜)

* 지혜와 힘을 축적한 열 가지 힘(十力) 등을 발휘하여 중생을 구제하는 역바라밀(力波羅蜜)

* 일체의 법을 반연하고 진여를 반연하여 진리롭게 수행정진하는 지바라밀(智波羅蜜) 등을 말한다.

이상과 같은 십바라밀을 수행하되 자기 이익만을 추루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정화하고 사회를 정화하는 보살도를 계속 정진함으로써 무루심이 나타나고 또한 무루종자가 축적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오묘한 진리를 관찰할 수 있는 묘관찰지(妙觀察智)와 또 모든 진리를 평등하게 관찰할 수 있는 평등성지(平等性智)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수도위의 기간은 초지보살로부터 제십지보살까지의 수행을 말한다. 이와 같이 점차 수행하여 무루종자를 훈습해 가면 결국 불타의 경지인 구경위(究竟位)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3) 무학도(無學道)의 수행

무학도(無學道)는 일명 구경위라 칭하기도 한다. 십지를 수행하여 무루종자를 계속 추적해 온 나머지 불과(佛果)에 이른 것이다. 번뇌를 끊고 진리를 증득한 이른바 단혹증리(斷 惑證理)의 수행이 완수된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마침내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어 안식 등 전오식(前五識)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화되고 제6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며, 제7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전환되고, 제8아라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전환하는 등 모두 지혜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식사상의 목적은 유루식을 전환하여 무루지(無漏智)를 획득하는데 있다고 해서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사상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러한 수행을 통하여 위에서 말한 사지를 증득하면, 그때는 무루의 정신작용(心所)만이 상응한다고 한다.

그 무루의 상응심소(相應心所)는 21종으로서 변행의 오심소(遍行五心所)와 별경의 오심소(別境五心所)와 선의 십일심소(善十一心所) 등을 말한다. 이들 심소의 내용은 위에서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피하기로 한다.

아무튼 사지에 무루의 21심소가 원만히 이루어지면 여기에는 오직 무루종자만이 훈습하게 되며, 결국 무루세계를 수용하고 동시에 중생에게도 회향하는 진리의 세계가 전개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무루종자의 훈습은 일시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보살행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마음 안에 무루심과 무루종자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구경에는 완전한 무루세계를 완성할 수가 있다.

Ⅵ. 팔식(八識)의 명칭과 정신작용 - 1

1. 팔식(八識)의 명칭과 성질

앞에서 말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사번뇌(四煩惱) 등 근본이 되는 번뇌가 말나식에 의하여 야기된 것이지만 말나식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타의 심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심식은 그 체성(體性)이 각각 서로 다르지만 밀접한 관계를 갖고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서 소의처(所依處)를 들 수 있다. 소의처라는 말은 모든 심식이 의지할 곳을 의미하며 그 의지의 장소는 육체의 오근(五根)도 되지만 심식과 심식간에 상호 연결하여 의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행과 악행이 어떤 한 식(識)만의 단독행위라고 볼 수 없는 내용이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말나식의 번뇌는 가장 근본이 되어 여타의 심식의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차의 심식이 서로 연관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보통 한 심식을 설명할 때, 십 종(十種) 또는 팔 종(八種)의 내용을 분류하여 설명한다. 이제 모든 마음이 어디에 의지하여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간추려 살펴보기로 한다. 그 내용을 분석하면 팔 종이 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식의 명칭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2) 그 식에서 발생하는 작용은 실다운 업력(實種子)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거짓된 종자(假種子)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인가?

3) 식의 성질은 어떤 내용인가?

4) 모든 심식은 삼계육도에 윤회하는 동안 출생처에 따라

여러 심식(八識)의 번뇌는 어느 정도인가?[繫界]

5) 모든 심식의 의지처는 어디인가?[所依處]

6) 심식의 인식현상은 어떤 것인가?[三量]

7) 심식의 인식대상은 어떤 것인가?[所緣境]

8) 심식의 작용은 몇 종류나 되는가?[心所相應]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심식내용을 알아보는데 여덟 가지로 분류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내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국의 규기법사 등 유식학자의 입장이다. 이제 여덟 가지 중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던 것과 약간 중복되기는 하지만 간단히 살펴보면서 말나식의 번뇌가 여타의 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심식(心識)의 명칭

석명(釋名) : 심식에는 반드시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그 이름의 출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규명하여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첫째로 안식(眼識)은 안근(眼根)에 의지하기 때문에 안근의 이름을 따서 안식이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육체상의 각 부분의 형체 이름보다 정신의 체인 이름이 늦게 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식(識)의 이름이 정해지기까지는 여러 가지 토론이 있었다. 그것은 심식의 작용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안식을 예로 들어보면, 안식은 몸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요벌(了別)의 인식작용을 갖고 있으니까 객관계의 대상인 빛깔(顯色)과 모습(形色) 등을 인식의 대상(色境)으로 하여 분별작용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식의 의지처인 육안의 이름을 따서 안식이라고 이름하느냐 아니면 인식의 대상인 색경의 이름을 따서 색식(色識)으로 하느냐 하는 등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한 결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안식의 인식대상인 색경은 변천하고 파괴되어도 안식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일이 없다. 그러나 만약 육체의 의지처인 육안(肉眼)에 해당하는 안근(眼根)이 파괴되거나 병이 나면 시각(視覺)이 흐려지고 또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볼 때, 안식에는 색경보다는 안근이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또 설사 천상세계에 가서 출생한다 할지라도 식(識)과 근(根)은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다는 이론에 따라 안식(眼識)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간혹 경(境)의 이름을 따서 색식(色識)이라고 칭명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상과 같이 식의 이름을 정할 때, 심식과 가장 가깝고 또 일반생활에서도 불가분리한 관계를 맺고 있는 소의근(所 依根)의 이름을 따서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승뿐만 아니라 내생에 만약 색계천(色界天)과 무색계천(無色界天) 등 천국에 가서 태어나게 된다면 하나의 심식이 하나의 소의근에 의지하여 객관계의 사물을 대할 때를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촉감을 동시에 갖게 된다는 경전의 말씀이 있다. 이에 의하여 식과 근은 항상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객관계의 인식대상은 일정하지 않고 한 식과 한 근에 의하여 여러 대상(六境)이 동시에 수용(受用)되는 경지가 전개되기 때문에 근의 이름을 따서 식명(識名)을 정하는 것이 진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안식은 안근의 이름을 땄고 의식(意識)은 말나식에 의지하므로 의근(意根)에 해당하는 말나(意)의 이름을 땄다.

그리고 말나식(末那識)과 아라야식(阿賴耶識)은 식자체(識自體)에 의존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자체의 기능에 따라 식명을 지은(自體得名) 것이다. 이러한 경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가행파들이 선정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는 말나식과 아라야식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들은 심식이 서로 의존하면서 그 체성이 단절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체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 두 심식은 여타의 육식과는 달리 당체(當體)의 이름을 따서 식명을 정한 것이다.

그 이유를 보면, 말나식은 곧 의근으로서 제6의식의 소의근이 되며 또 아라야식에 의지하기는 하나 그 명칭만은 자체의 독특한 사량(思量)의 뜻이 있으므로 이에 따라 말나식이라고 정한 것이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藏)의 뜻에 따라 아라야(阿賴耶)라고 이름한 것이다.

동시에 이 식은 모든 심식(前七識)의 의지처가 되고 근본이 된다는 뜻에서 근본의(根本依)라 하고 또 근본식이라고도 하는데 다른 식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원히 불멸하는 심식이므로 자체의 뜻을 따라 아라야식이라 식명을 정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심식의 이름을 정할 때 유식가에서는 원칙을 세우고 또 진리로운 근거에 의하여 한 것이다.

2) 심식(心識)의 종자(種子)

종자의 가실문제(種子假實) 어떤 심식이든 전칠식은 그 체성과 작용을 야기하며 활동하고자 할 때는 아라야식에 보존되어 있는 업력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게 된다. 보통 업력은 이미 여러 심식들이 선행과 악행 등을 나타내어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것을 뜻한다.

이 업력은 다시 다음의 결과를 발생하는 씨앗이 된다고 해서 종자(種子) 또는 인(因)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자가 다음의 심식활동에 힘과 세력(功能)이 되어질 때, 그 종자는 거짓된 종자(假種子)인가 아니면 실다운 종자(實種子)인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식은 실종자(實種子)에 의하여 모든 작용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또 모든 심식은 행위를 통하여 종자를 조성할 때 분명히 가종자(假種子)가 아니라 실다운 종자만을 조성하며 다음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업력을 아라야식에 보존케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식의 활동과 종자와의 관계를 밝히는 일환으로 옛적부터 종자의 가실(假實)문제를 따져온 것이다.

3) 심식(心識)의 성류(性類)

성류(性類)라는 말은 모든 심식의 성질을 부여하여 밝힌다는 뜻이다. 보통 심식들이 활동할 때, 그 성질에 따라 나타나게 되는데, 그 심식의 성질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유식학에 의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심식, 의식 등 육식은 선성과 통하고 악성과도 통하며 선성도 아니고 악성도 아닌 무기성에도 통한다고 하였다. 즉 무기성은 선과 악의 내용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성질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육식은 선성과 악성과 무기성의 성질을 다 갖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성질(三性)의 행위를 나타내어 업력도 선업과 악업과 무기업 등을 조성하는 심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말나식은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으로서 항상 번뇌를 야기하는 역할을 많이 한다.

부(覆)라는 말은 부폐(覆蔽) 또는 부장(覆障) 등의 뜻으로서 심식의 진실성인 진여성과 불성 등의 본성을 가로막고 장애하는 번뇌를 의미한다. 말나식은 이러한 부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지혜를 장애하고 무지를 야기하여 제6의식 등 여타의 심식에 진리를 망각하게 하는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로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야기하게 되며 동시에 청정한 무루(無漏)의 성도(聖道)를 은폐하면서 끝없이 윤회를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부성(有覆性)은 너무나 미세하기 때문에 선과 악의 성질과 같이 객관화되지 못한 상태의 번뇌이므로 무기성(無記性)이라고 한다. 그것은 제6의식과 같이 외부 대상(外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아라야식을 상대로 인식하면서 번뇌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부무기성인 말나식은 지혜를 장애하는 번뇌는 야기할지라도 과보를 가져오도록 하는 업인은 조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번뇌가 전체의 심식에 궁극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업인을 조성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아라야식의 성질은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다. 이 말은 아라야식 자체에는 부폐와 부장의 성질이 없다는 것이며 이 아라야식에서 번뇌를 야기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은 그 체성이 번뇌를 야기하지 않고 또 선과 악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아라야식에 선업과 악업을 보존할 수가 있게 된다고 한다.

만약 아라야식이 본래 번뇌의 성질이 있고 또 선성에 치우치거나 악성에 치우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후천적으로 전칠식(前七識)이 조성하는 모든 선업과 악업을 보존할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아라야식의 성질이 선성이라면 악업이 훈습될 수 없고 반대로 악성이라면 선업이 훈습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이 무부무기성이기 때문에 모든 업력을 보존하고 또 전칠식의 활동에 업력의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자질을 구비하였다고 본다.

이상과 같이 각 심식에는 성질이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이에 의하면 심식의 역할과 행위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며 정신생활의 내용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오식(前五識과 제6의식(第六意識)은 선과 악과 무기 등 삼성(三性)의 정신작용을 야기하는 심식들로서 선악관을 정립하는데 매우 용이한 사상이다.

그리고 말나식의 유부무기성과 아라야식의 무부무기성이라는 해석은 흔히 설명되는 학설이 아니기 때문에 심체의 작용을 파악하는데 매우 뜻깊은 심식설(心識說)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팔식(八識)에 대한 명칭과 종자(種子)의 가실(假實)문제와 그리고 성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그 밖의 성질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4) 심식(心識)의 계박(繫縛)

계계(界繫)라는 말은 팔식(八識)이 삼계와 육도에 윤회하는 도중에 번뇌에 의하여 어떻게 구속을 받고 또 어떻게 업력에 의하여 구속을 받고 있는가를 밝히는 명사이다. 즉 계(界)라는 말은 세계라는 뜻으로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등 삼계(三界)의 윤회세계를 말한다.

다음 계(繫)라는 말은 계박(繫縛) 또는 결박의 뜻으로서 이는 번뇌가 심식(心識)을 억압하고 구속한다는 뜻이 있다. 이는 심리적인 번뇌의 작용을 객관화한 것으로서 실은 번뇌의 뜻이다. 왜냐하면 번뇌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업력(業力)이 달라지고 그 업력이 억압이라면 마음을 구속하고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계의 뜻은 심식이 번뇌에 의하여 계박된 실태와 또 번뇌에 의하여 조성된 업력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다는 뜻을 밝히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전오식(前五識)의 계계(界繫)

인간의 심식 인 팔식 가운데 안식과 이식, 신식 등 삼식(三識)은 초선천(初禪天)까지만 계박의 뜻이 있다. 다시 말하면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에 윤회하는 가운데 많은 복과 선업을 닦아 색계에 해당하는 초선천에 출생하면 안식과 이식와 신식에는 번뇌가 없고 동시에 업력의 구속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안 선업을 닦고 선정을 닦아 그 마음이 청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삼식은 그 이상의 이선천(二禪天)과 삼선천(三禪天) 등 수승한 중생이 태어나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번뇌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 까닭은 욕계와 초선천까지는 번뇌가 많고 작은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아직도 미량의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계(界繫)의 뜻이 있게 된다. 그러나 초선천 이상의 천국에 출생하면 위에서 말한 삼종의식에는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 비식과 설식은 앞에서 말한 삼식보다도 더 빨리 청정해져서 욕계까지만 번뇌의 속박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 이식(二識)에게는 욕계(欲界)에 한해서 계계의 뜻이 있게 되며 지옥에 태어나면 번뇌가 더욱 가중하여 계계의 의미가 더욱 많게 된다. 왜냐하면 번뇌가 두텁고 악업이 많아서 심한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욕계에서 가장 복이 많고 살기 좋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나면 비식과 설식은 미량의 번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계계의 뜻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심식은 매우 청정하고 지혜광명이 항상 나타나서 모든 사물의 이치를 진리롭게 수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이들 심식은 번뇌의 속박이 서로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의하여 비식과 설식이 팔식 가운데서 가장 빨리 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안식과 이식과 신식이 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후삼식(後三識)의 계계(界繫)

다음으로 의식과 말나식과 아라야식 등의 계계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삼식은 모두 욕계, 색계, 무색계 등 삼계 가운데 어디에 거주하든지 번뇌가 남아있게 된다고 한다. 물론 이들 심식에는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으나 악의 뿌리인 근본번뇌가 미량이나마 성불과 해탈의 직전까지는 남아있게 되므로 삼계에 두루 윤회하면서 계계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은 외적으로 향하여 분별하며 번뇌를 야기하는 외향식(外向識)이지만 안식 등 전오식에 비하면 내면의 정신체이고 또 염오식(染汚識)인 말나식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심식이기 때문에 성불하기 직전까지는 있게 된다. 그리고 말나식은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초의 무명도 이 식이 야기하고 또 최후까지 무명을 보존하고 있는 심식이기 때문에 삼계에서 해탈하기 전까지는 번뇌를 지니게 되며 동시에 삼계에 두루 통계(通繫)하게 된다.

다음 아라야식도 역시 삼계에 윤회하는 동안 어디서나 계계의 뜻이 있다. 그것은 의식과 말나식에 번뇌가 있는 한 그 번뇌식들이 훈습하는 업력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과 말나식이 선정과 염불 등의 수행에 의하여 정화되고 또 자체내에 있는 유루종자가 다 정화되며 나아가서 무루종자만이 남아 있을 때 계속(繫 屬)의 뜻이 없게 되고 또 계박의 뜻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기 전까지는 계계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다.

5) 심식(心識)의 의지처(所依處)

모든 심식에는 의지처가 있다. 대체로 말하면 우리의 육체는 마음의 의지처로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의지처의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마음은 육체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도 있고 또 육체와는 달리 순수한 마음으로만 구성된 의지처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정신도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 심식 가운데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은 육체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심식들이다. 그런데 이 오식은 다 같이 육체에 의지하지만 육체의 구성과 조직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육체에 의지하여 활동하는 것도 각각 다르게 된다. 그 육체의 구성과 조직을 이름하여 오근(五根)이라 한다.

오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눈(眼根), 귀(耳根), 코(鼻根),혀(舌根), 몸(身根) 등을 말한다. 이들 오근은 육체상에 나타난 감각기관으로서 마음이 이곳에 의지하여 객관계의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根)은 마음이 의지한다는 뜻에서 의지처(依止處) 즉 소의근(所依根)이라고도 이름한다. 그리고 육체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장엄(莊嚴)이라 하며 또 인간자신을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인도(引導)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에는 부진근(扶塵根)과 승의근(勝義根)의 뜻이 있다. 부진근은 우리가 만지고 볼 수 있는 육체의 조직을 뜻하고 승의근은 몸 전체에 근원을 이루고 있으나 도저히 알 수 없는 경지를 말한다. 그렇지만 이 승의근은 전체의 몸이 유지되도록 해 주고 또 심식이 여기에 의지하여 활동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전오식(前五識)은 몸에 의지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부진근보다 승의근에 직접 의지하여 객관계를 인식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뜻에서 근(根)을 발식취경(發識取境)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발식취경이란 심식(心識)을 발생(發識)시키며,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取境)케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근에는 여러 식이 공동으로 의지(共依)하는 근의 뜻이 있고, 또 오직 한 식(一識)만이 의지(不共依)하는 근의 의미가 있다.

먼저 오직 일식만이 의지하는 경우를 보면, 안근은 오직 안식만이 의지하는 곳이고 이근도 오직 이식만이 의지하는 곳이며, 비근은 비식만이 의지하는 곳이고, 설근은 설식만이 의지하며 신근은 오직 신식만이 의지하는 곳이 된다. 이와 같이 오근(五根)과 오식(五識)은 단독 의지처가 되고 또 단독 의지하는 심식이라는 뜻에서 불공의라 한다. 즉 공동으로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한 식과 한 근만이 의지한다는 뜻이다.

다음, 제6의식(第六意識)의 불공의(不共依)는 의근(意根)이다. 의근의 정의는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유식학에서의 의근은 말나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려둔다. 제6의식은 말나식을 의근으로 하여 가장 밀접한 위지처로 하기 때문에 말나식을 의식의 불공의라고 한다.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의지처는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이다. 말나식은 어느 식보다도 아라야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은 말나식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에서 불공의(不共依)의 뜻이 있게 된다.

그리고 아라야식은 말나식에 의지하며 또한 불공의의 뜻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말나식이 의근(意根)이기 때문이다. 이 의근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식(意識)의 의지처도 되고 말나식 자체는 물론 아라야식의 삼식(三識)의 의지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의근은 내면의 모든 정신계를 유지시켜 주고 동시에 활동하도록 도와주는 등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은 공의(共依)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공의라 함은 공동의 의지처라는 뜻이다. 그런데 심식(心識)은 각식(各識)의 개성이 뚜렷하면서 안으로는 서로 의존하는 인연관계를 맺는다. 여기에 공의(共依)의 뜻이 있다.

예를 들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은 오근(五根)에 의지하여 활동하면서 객관계의 사물을 인식할 때는 의식(意識)의 도움을 받게 되기 때문에 의식을 공동의 의지처로 하며 이를 분별의(分別依)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의식이 오식에 가담하여(五俱意識) 선(善)과 악(惡) 등을 분명히 분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전오식에 대한 공동의 의지처이면서 동시에 분별의가 되는 것이다.

다음은 말나식이 공의(共依)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전오식과 제6의식 등 육식이 말나식에 의지하여 염오(染汚)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육식에 대한 공의가 되면서 동시에 여타의 심식을 오염시키는 염오의(染汚依)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나식은 아치(我癡)와 아견(我見) 등 근본번뇌를 야기하며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식에 의지하는 심식들은 필연적으로 번거로운 작용을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말나식은 육식(六識)에 대하여 염오의(染汚依)의 뜻이 있게 된다.

아라야식도 공의(共依)의 뜻이 있다. 왜냐하면 아라야식은 모든 심식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식이든 이 아라야식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아라야식에 의존하여야만이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아라야식은 공의도 되지만 모든 심식의 근본적인 의지처라는 뜻에서 근본의(根本依)라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모든 심식의 뿌리라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바와 같이 육체도 이 아라야식에 의하여 생존할 수 있고 또 심식들도 이 아라야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식은 모든 업력(業力)을 보존하고 있다가 심식들이 필요로 랗 때 즉시 보급해 주는 생명력의 의지처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심식들은 각기 불공의로서 단독 밀접한 의지처를 갖고 있으면서도 공동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정신계의 역할을 다하기 위한 진리적인 조직기능인 것이며 이러한 정신계의 조화 속에서 사는 것이 인간이다.

Ⅵ. 팔식(八識)의 명칭과 정신작용 - 2

2. 팔식(八識)의 정신작용(心所相應)

다음은 팔식(八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을 알아보기로 한다. 심소상응이란, 심소는 작용으로서 각 심식에는 어떠한 심소가 서로 응하며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논술하는 것이다.

즉 심식은 모든 행동을 주재(主宰)와 같이 결단력이 있게 주관한다는 뜻에서 심왕(心王)이라고 하는 반면에 심소(心所)는 왕에 소속하여 명령만 받고 움직이는 신하처럼 결정권이 없이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심왕은 각식(各識)의 체성에 해당하며 심소는 각식의 체성에 의하여 발휘하는 작용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각식에는 어떤 종류의 심소가 상응하고 있는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전오식(前五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첫째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오식(前五識)은 동일한 심소와 상응한다. 그 종류는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심소들 가운데서 변행심소(遍行心所)의 5종과 별경심소(別境心所)의 5종과 선심소(善心所)의 11종과 탐. 진. 치(貪. 瞋. 癡) 등 삼번뇌와 팔대수혹(八大隨惑) 8종과 무참(無慙), 무괴(無愧) 등 중수혹(中隨惑) 2종 등 34종의 심소를 말한다. 이들 심소는 동시에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한 심소만 야기하게 된다.

2) 제6의식(第六意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제6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51종이 있다. 이들 심소는 유식학에서 정신작용으로서 엄선한 숫자이며 의식(意識)에는 이들 심소가 다 나타나있는 것이다. 그만큼 광범위한 활동을 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3)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다음 제7말나식과 상응하는 심소는 18종이다. 18종의 심소는 변행심소의 5종과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 사번뇌와 팔대수혹의 8종과 별경심소 중 혜심소(慧心所) 등을 합친 정신작용을 말한다.

4)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의 심소상응(心所相應)

끝으로 제8아라야식은 변행심소의 5종만이 상응하는 작용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심식에는 각 종의 작용이 있으며 그 종류들은 수시로 우리 정신생활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물론 근본번뇌와 같은 심소들은 밖으로 표면화되지 않고 작용하며 진리를 착각하도록 유도하는 것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정신작용들이다. 이상으로 팔식에 관계되는 모든 성질과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유식학의 핵심사상인 아라야식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Ⅵ. 팔식(八識)의 명칭과 정신작용 - 3

3. 심식(心識)과 인식(認識)의 대상

1) 심식(心識)의 삼량(三量)

심식(心識)은 인식주(認識主)로서 어떤 대상의 내용과 모습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심식은 요별(了別)과 분별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든 진리의 내용을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밝히려 하는 것이 유식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마음의 성격도 나타나고 또 사물의 내용도 인식주인 마음의 인식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물의 자체는 항상 진리로운 것이며 선악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주관에 의하여 인식되어지는 것이 사물이므로 인식하는 마음이 순수하고 청정하며 진리로운 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사물도 청정하고 또 진리롭게 마음속에 비쳐진다. 그러나 마음이 악한 마음이라면 사물도 악하게 나타나고 또 마음이 선하다면 그 사물도 선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객관계의 사물은 오직 마음에 의하여 그 가치가 정해지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논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삼량(三量) 논법이다. 삼량이란, 심식의 세 가지 인식내용을 뜻한 것으로서 양(量)은 헤아린다는 말이며 동시에 마음의 대상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헤아린다는 것은 인식을 뜻하며 이를 양탁(量度)이라고도 칭한다. 이러한 양탁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과 비량(非量) 등이 있다. 이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현량은 눈앞에 있는 사물을 틀림없이 보고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틀림없이 인식하는 것을 현량이라 한다.

둘째로 비량(比量)은 사물과 사물을 비교하고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을 비교하며 또 현재의 것과 미래의 것과도 추리하여 비교할 수 있는 심식의 작용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여 판단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인식내용에 있어서 비량(比量)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모든 것을 비교하며 또 현재는 현재에 입각하여 무의식 속에 비교하면서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계획과 억측 등도 현재의 것과 비교하면서 생각하는 것인데 이들 심리활동은 모두 비량(比量)에 속한다.

특히 현재의 것을 비교한다는 말은 과거에 보고 듣고 익혔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현재의 사물을 관찰하는 것으로서 아무리 현재의 것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의 지식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비량(比量)인 것이다.

그러나 현량은 틀림없는 인식을 뜻하고, 비량의 인식은 거의 틀림없는 인식으로 나타나지만 가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비유를 들면 담 너머에 보이는 뿔만 보고도 그 밑에 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와 같이 뿔을 가진 동물이 많고 또 소가 가지고 있는 뿔과 유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가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더 들면, 가령 먼 산의 연기를 보고 그 밑에는 반드시 불이 있을 것이라고 비교하여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먼 곳의 구름을 연기로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식의 비량은 거의 틀림없는 인식의 내용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가끔 틀릴 수 있는 인식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비량(非量)은 위에서 말한 현량(現量)과 비량(比 量)과는 달리 모든 것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비(非)는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의미한다. 심식(心識)이 무명(無明)을 비롯하여 온갖 번뇌의 장애를 받아 객관계의 사물과 진리 그리고 주관계의 법칙에 대해서도 그 진실을 망각하여 항상 비진리적으로 관찰하고 생각하며 인식하는 것을 비량(非量)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눈병 난 사람이 푸른(靑色)하늘을 보고 누렇다(黃色)고 하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심식에는 삼량의 인식내용이 있다. 그러나 모든 식에 일률적으로 삼량의 뜻이 다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차별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전오식(前五識)과 제8아라야식은 오직 현량(現量)의 인식만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 심식이 가장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을 하며 동시에 사물이 지니고 있는 진실을 가장 잘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6의식 또한 삼량의 인식활동을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전오식 등에 영향을 많이 주고 있다. 즉 의식(意識)은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작용뿐만 아니라 비량(非量)도 하는 심식이므로 주관에 해당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나 삼량의 인식활동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팔식(八識) 가운데 유독 제7말나식만은 비량(非量)의 인식만을 하게 된다고 한다. 말나식은 내면에 잠재하여 있는 심식으로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망각하는 등 진여성(眞如性)을 비진리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말나식은 또 여타의 심식에 비량의 영향을 주어 진리를 착각하게 하는 전도심(顚倒心)을 유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심식에서 나타나는 삼량(三量)의 작용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2) 심식(心識)의 소연경(所緣境)

위에서 삼량의 인식내용을 살펴봤다. 심식은 이러한 인식활동을 하는 것으로서 그 인식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는 것이 소연경(所緣境)의 설명이다. 소연경은 반연되어지는 데상, 즉 인식되어지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반연하고 인식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심식이다. 심식은 인식(了別)하는 것을 성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인식할 대상을 요구하고 또 찾게 된다. 그러므로 심식은 항상 능동적인 입장에 있으며, 인식되어 지는 대상은 또 수동적인 입장에 있게 된다. 그러기에 심식(心識)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인식의 대상을 소연(所緣)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능연은 능동적으로 반연하고 인식한다는 뜻이 있고, 소연은 수동적으로 반연되어지고 인식되어진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경(境)은 경계(境界)의 뜻으로서 인식의 한계를 뜻하고 또 대상을 뜻한다. 이와 같이 심식과 소연경은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에 있으며 심식은 주관의 입장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로 공존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주관이 없는 객관이 있을 수 없고, 객관이 없는 주관이 있을 수 없다. 이제 심식과 소연경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심식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라야식(阿賴耶識) 등을 말하고, 소연경은 색경(色境), 성경(聲境), 향경(香境), 미경(味境), 촉경(觸境), 법경(法境) 등을 말한다. 이들을 서로 관계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안식(眼識)의 소연경(所緣境)

안식(眼識)은 색경(色境)을 인식한다. 색경의 본질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다. 지(地)는 견성(堅性)으로서 물질의 견고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물첼르 보호하고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수(水)는 물질의 습성(濕性)을 뜻하며 물질에 대하여 윤택(潤澤)하게 하며 서로 화합(引攝)시켜 흩어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화(火)는 난성(煖星星)으로서 물질의 따뜻한 기운과 불의 성질을 뜻하며 물체로 하여금 성숙케 하고 그 자체가 부패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풍(風)은 물질의 동성(動性)으로서 물질의 운동과 동요는 물론 물체로 하여금 생장(生長)케 하는 동력을 말한다.

이와 같이 지. 수. 화. 풍을 사대(四大)라 하는데, 대(大)는 주변(周邊)의 뜻으로서 이 네 가지 성질은 어떤 물질 속에서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성질이 처음 물질로 나타날 때 최소의 단위를 극미(極微)라 한다. 극미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단위를 말하며 이 단위부터 미진(微塵), 수진(水塵), 금진(金塵) 등 점차 큰 물체를 이룬다. 그리고 큰 단위로 변화할 때는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큰 산도 되고 천체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대 중에서 지대(地大)의 세력이 강하면 육지와 같은 고체의 물질이 되고, 또 수대(水大)의 세력이 강하면 바닷물과 같은 액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화대(火大)의 세력이 강하면 불이 되고, 풍대(風大)의 세력이 강하면 물질의 동력이 되며 바람과 같은 풍력(風力)도 생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상과 같이 사대(四大)는 여러 가지로 물질의 바탕이 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또 능조(能造)의 뜻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오종인(五種因)으로서 생(生), 의(依), 입(立), 지(持), 양(養)의 인력(因力)을 말한다. 먼저 생인(生因)은 사대가 물질을 생성하는데 근본원인(根本原因)으로서 마치 자모가 자식을 생산하는 것과 같다. 다음 의인(依因)은 사대가 물질의 질료인(質料人)으로서 물질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마치 제자가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다음 입인(立因)은 물질에 대한 구성인(構成因)으로서 물체는 사대에 의하여 한 단위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대지(大地) 위에 만물이 구성되어 존재하는 것과 같다. 다음 지인(持因)은 유지인(維持因)의 뜻으로서 사대는 물체를 유지시켜 주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음식물이 모든 생물의 수명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다음 양인(養因)은 동력인(動力因)으로서 사대가 모든 물체를 성숙케 하고 성장시키는데 원동력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마치 수분이 여러 수목을 윤택하게 하고 양육시키며 성장케 하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대는 물질의 성질로서 무형의 성질이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 표면화될 때 유형의 물질이 된다. 유형의 물질을 상대하여 사는 범부들은 안식(眼識)을 통하여 유형의 색경(色境)을 대할 때, 그 색경을 두 가지로 구분하여 인식하게 된다. 즉 현색(顯色)과 형색(形色) 등을 말한다.

현색은 청(靑), 황(黃), 적(赤), 백(白) 등이 물질 위에 나타나는 색깔을 뜻하는데 이를 물질의 사본색(四本色)이라고 한다. 이 사본색으로 부터 변화하여 나타난 것이 팔종색(八種色)이다. 팔종색은 구름(雲), 연기(煙), 안개(霧), 그림자(影), 빛(光), 밝음(明), 어둠(闇) 등을 말한다. 이들 색은 자연의 색깔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들을 다른 물질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형색으로 나타나는 종류를 보면 형색이란 모습과 모양으로 나타나는 물체를 구별한 것을 뜻한다. 길고(長), 짧고(短), 모나고(方), 둥글고(圓), 높고(高), 낮고(下), 바르고(正), 바르지 못한 것(不正) 등 팔 종으로 구별하여 말한다. 이를 상대적인 색깔이라는 뜻에서 사쌍팔종(四雙八種)의 색(色)이라고 이른다.

이러한 형색도 안식의 인식대상이며 현색과 함께 20종의 색깔이 되는데 이들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색깔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색경관(色境觀)이다. 이상의 모든 색이 안식의 소연경이다.

나) 이식(耳識)의 소연경(所緣境)

이식(耳識)의 소연경(所緣境)은 성경(聲境)이다. 다시 말하면 소리를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것이 이식으로서, 그 소리는 동물의 소리와 물질의 소리로 크게 나누어 설명한다. 동물의 소리는 소리의 내용은 다르지만 대체로 음성이 있다고 본다. 이는 이미 집수된 바 있는 종자를 원인으로 하여 감정이 있는 동물의 소리를 발성한다는 뜻에서 유집수대종위인(有執受大種爲因)이라 한다. 그리고 물질에 의하여 나타나는 소리는 동물과는 달리 감정이 없기 때문에 무집수대종위인(無執受大種爲因)이라 한다. 소리는 마음에 맞는 소리(可意聲)과 마음에 맞지 않는 소리(不可意聲)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식의 인식대상이며 소연경이다.

다) 비식(鼻識)의 소연경(所緣境)

비식(鼻識ml 소연경은 향경(香境)으로서 이는 여러 냄새를 총칭한 말이다. 좋은 냄새(好香)가 있고 나쁜 냄새(惡香)가 있다. 그 냄새들은 육체에 알맞은 유익한 냄새(等香)가 있고 육체에 맞지 않고 건강에 피해를 주는 불이익의 냄새(不等香)가 있다. 이들 냄새들은 모두 비식에 의하여 식별된다.

라) 설식(舌識)의 소연경(所緣境)

설식(舌識)의 소연경은 미경(味境)이다. 미경은 달고, 시고, 짜고, 맵고, 싱겁고 하는 등 맛에는 이들 여섯 가지 맛이 가장 기본적이라고 본다. 이 여섯 가지 맛에서 여러 가지 맛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며 그 밖의 맛은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마) 신식(身識)의 소연경(所緣境)

신식(身識)의 소연경은 촉경(觸境)이다. 신식은 몸으로 감촉하여 식별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도 몸에 닿음으로써 인식되어진다. 그 감촉의 내용은 매끄럽고, 껄끄럽고, 무겁고, 가볍고, 차고, 배고프고, 갈증나고 하는 등 7종의 촉감이 가장 기본적이다. 물론 그 밖의 표현도 있고 촉감도 있지만 이에 준하여 생각하면 된다. 이상과 같이 각 심식에는 인식의 대상이 있으며 이들 대상을 상대로 활동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바) 제6의식(第六意識)의 소연경(所緣境)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이 인식의 대상으로 하는 내용을 살폈다. 이제는 제6의식과 제7말나식과 제8아라야식의 식별대상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제6의식의 인식대상을 보면 제6의식은 물질계와 정신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대상을 다 인식하는 심식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범위가 가장 넓으며 이 범위를 모두 합쳐 법경(法)이라고 한다. 이때의 법(法)은 곧 물질과 정신을 다 합쳐 총칭하는 말로서 유형(有形)의 것과 무형(無形)의 것을 총망라한 말이다. 물질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안식 등 전오식(前五識)과 더불어 활동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으로서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등 객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신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모든 무형의 대상을 포함하여 내면세계의 인식대상 등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의 대상들을 법처(法處)라고도 한다. 그런데 의식은 전오식과는 달리 물질과 정신적인 것을 함께 오묘한 경지까지 인식의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합쳐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이라고도 한다. 이는 또 극략색(極略色), 극향색(極향色), 수소인색(受所引色),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 등으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극략색은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모든 물질 가운데서 가장 적은 극미(極微)의 색상(色相)을 뜻한다. 여기에는 오근(五根)과 오경(五境)과 사대(四大) emdd; 포함된다. 이러한 색법(色法)은 능히 장애(能?)가 될 수 있고, 또 능히 장애를 받을 수도 있는(所?) 물질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극미의 경지이기 때문에 오직 의식(意識)만이 반연하여 이해하고 식별할 수 있는 대상에 속한다.

다음 극향색은 서로 장애되거나 접촉할 수 없는 물질을 뜻한다. 예를 들면 공간계(空間界)와 그림자와 광명(光明)과 어두움(闇) 등을 들 수 있다.이들 색법(色法)도 장애의 가능성과 서로 접촉하는 물질(有對色)에 속하기는 하지만 지혜에 의하여 분석되는 극미의 모임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상으로 볼 때 큰 단위의 물체로 보이지만 이들을 분석하여 관찰하면 미립자의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립자까지 접근하여 인식할 수 있는 심식은 곧 의식이다.

다음 수소인색(受所引色)은 가르침과 스승(敎師)에 의하여 감수되는 내면의 인식대상을 뜻한다. 이를 무표색(無表色)이라 하는데 이는 남에게 나타내 보일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가령 다니고(行) 거주하고(住) 앉아있고(坐) 누워있고(臥) 잡고(取) 버리고(捨) 구부리고(屈) 펴고(伸) 하는 등 신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 보일 수 없는 내면세계의 작용이기 때문에 무표색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몸(身)과 입(口) 그리고 뜻(意) 등으로 실천하는 율법(戒律)도 포함된다. 이는 다른 표색과는 달리 다른 율동적인 것을 뜻한다.

다음 변계소기색(遍計所起色)은 정신적인 환상에 의하여 나타나는 인식의 대상을 말한다. 제6의식이 번뇌로 말미암아 착각을 야기하여 실체가 없는 가상의 대상을 집착하는 것을 뜻한다. 즉 변계(遍計)라는 말은 두루두루 비진리적으로 착각하고 집착한다는 뜻이며 환각(幻覺)으로 공화(空華)와 같은 헛것을 실체가 있는 양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변계소기색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착각을 야기하여 생겨난 허망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허망한 의식을 독산의식(獨散意識) 또는 산란의식(散亂意識이라고 한다.

다음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은 자유롭게 나타내는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또 번뇌에 구애를 받고 모든 물질의 진실성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해탈(解脫)과 정려(靜慮)의 혜안(慧眼)에 비치는 경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일명 승정과색(勝定果色)이라고도 부른다. 즉 수승한 선정에서 나타난 대상물을 뜻한다.

특히 유식학에서는 유가(瑜伽)사상을 부르짖고 있는데 유가(yoga)는 곧 명상이며 명상은 또 중국의 선정에 해당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유가라는 말은 번뇌심을 정화하여 객관계의 진리를 올바로 깨닫고 증득하게 하는 수행에 해당한다. 이러한 유가, 즉 선정에 의하여 자재로운 마음이 나타나며 자재로운 마음 위에 자유롭게 대상물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경지들을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제6의식의 인식대상은 매우 광범위하다.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아비달마잡집론(阿毘達磨雜集論)] 제일(第一)에 나오는 해석으로서 이는 이미 소승불교에서 십이처(十二處)의 법처(法處)라는 말을 인용한데서 유래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십이처 중의 법처는 의식의 인식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의 의식(意識)은 정신계와 물질계를 모두 인식 범위로 하고 있으며 그 인식의 심도도 물질의 극미에 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사) 제7말나식(第七末那識)의 소연경(所緣境)

다음 제7말나식의 소연경을 보면 말나식은 항상 제8아라야식의 견분(見分)만을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다. 위에서도 이미 말나식은 아라야식으로부터 전변(轉變)되어 독립된 심식(心識)이 되어 가지고 다시 아라야식을 반연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라야식을 평등하게 반연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실아(實我)의 집착을 내어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번뇌만을 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이라는 말은 각 심식의 내용과 역할을 네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사분설(四分說) 가운데의 하나를 말한다. 즉 견분은 각 심식의 핵심적인 인식작용으로서 그 활동의 작용을 착각하여 집착을 야기한 것이 곧 말나식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심성 내부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아라야식을 상대로 하여 망상을 야기하는 심식이 곧 말나식이다.

아) 제8아라야식(第八阿賴耶識)의 소연경(所緣境)

다음 제8아라야식의 소연경을 알아보기로 한다. 아라야식의 소연경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아라야식 내에 보존된 종자를 반연하며, 둘째는 자신을 둘러싼 육체(五根)을 소연경으로 하고 있다. 셋째는 인간이 몸담고 사는 객관세계를 반연하여 인식하고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 세 가지 내용을 좀 더 설명하면, 아라야식은 칠전식(七轉識)의 활동과 육체의 행동에 의하여 조성되는 업력인 종자를 자체 내에 보존하는 장식(藏識)으로서 그 종자를 항상 반연한다. 마치 어머니가 품안에 있는 어린 아기를 상대로 어루만지듯이 아라야식도 자체에 훈습되어 오는 종자를 비롯하여 모든 종자를 상대로 하여 반연한다는 것이다. 다음 육체는 곧 안근 등 오근(五根)을 뜻하며 이들 오근을 반연하여 그 오근이 안전하거나 위태로움의 운명을 함께 하면서 꾸준히 유지시켜 주는 주체가 곧 아라야식이다.

끝으로 아라야식이 객관세계인 기세간(器世間)을 상대로 반연한다는 것이다. 기세간이 하나의 물체로서 큰 덩어리인 천체이지만 실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안에 있는 존재로서 아라야식이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입장이다. 마음 밖에 따로 경계가 없으며(心外無境), 만법이 오직 심식에 존재한다(萬法唯識)는 말에서 그 진리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모든 심식을 유지시켜 주고 또 종자와 오근을 수령(受領)하며 각수(覺受)하고 집섭(輯攝)하며 동시에 주위 환경을 비롯하여 온 세계를 유지시켜 주는 부사의(不思議)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안식을 비롯한 팔식(八識)의 소연경을 살펴보았다. 팔식과 소연경의 관계에서 인간의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길흉과 행복과 불행도 다 여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알아서 사물의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물의 인식 여하에 따라 선(善)과 악(惡)이 대두되는 것이며 이 선과 악은 곧 업력으로 전환하여 자신을 끌고 가는 가공할 만한 인과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Ⅶ. 삼종자성(三種自性)과 삼무성(三無性)

유식학에서는 삼종자성(三種自性)과 삼무성(三無性)이라는 학설이 있다. 이들 학설은 유식학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그리고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에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원전의 학설을 요약한 것이 세친의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이다. 유식삼십론의 게송(偈頌)을 주석한 것이 [성유식론(成唯識論)]이다.

이와 같이 삼종 자성과 삼무성에 대한 학설이 여러 곳에 설명되어 있다. 삼종자성의 내용에 의하면 우리 마음인 식(識)을 떠나서 외부세계에서는 따로 진실한 경계(實境)가 없다는 사상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 등을 말하며 그 세 가지 삼종자성과 삼무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변계소집성은 인간은 아집과 법집 등의 번뇌를 야기하며 생활하는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 의타기성은 인간의 정신생활과 그 밖에 있는 외부의 물질계를 포함한 모든 자연계는 유일한 원인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다인(多因)과 다연(多緣)이 집합하여 성립하였음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 원성실성은 변계(遍計)의 번뇌는 허구성이며 의타(依他)의 인연이 집합하여 성립된 삼라만상도 일시적 존재(假有0이며, 오직 진여성(眞如性)만이 영원한 존재이며 진실되고 또 만물의 체성(性)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삼종자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하나의 자성(自性)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삼무성설이다.

삼무성(三無性)이란 모든 번뇌의 성질은 허무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상무성(相無性), 모든 것은 인연의 모임이고 자연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 체성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생무성(生無性), 본래 진리는 허공과 같이 고정된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승의무성(勝義無性)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삼종자성과 삼무성은 모든 번뇌와 물질 그리고 정신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관찰케 하고 깨닫게 하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이 삼종자성과 삼무성은 앞에서 설명해 온 모든 교리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이며, 동시에 진리와 비진리성을 잘 분류하여 설명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들 삼종자성과 삼무성의 내용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삼종자성(三種自性)은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중생의 현실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그 진리성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교리이다. 세 가지 성질이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각각 다른 내용으로 설명된 것이 삼종자성의 특징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삼종자성(三種自性)

1)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

변계소집성(邊計所執性)의 변계는 주변계탁(周遍計度)의 뜻이다. 주변계탁은 진리를 두루 착각하고 집착하며 인식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제7말나식과 제6의식 등의 마음이 진실하고 초연한 진리와 그리고 인연의 모임에서 형성된 삼라만상(諸法)에 대해서 그 진리성을 망각하고 오히려 아집과 법집 등의 집착을 나타내어 지말번뇌까지도 두루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교학에서는 능동적으로 망상을 나타내는 능변계(能遍計)와 수동적으로 집착되고 계탁(計度)되어지는 소변계(所遍計)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능변계는 제7말나식이 제8아라야식의 견분(見分)을 능히 망각하고, 또 진실성을 망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아라야식의 견분이란 아라야식의 체성에서 나타나는 작용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 체성의 작용을 진실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로 망각(妄覺)하여 아집과 법집을 야기함을 뜻한다.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체성이란 진여성(眞如性)과 불성(佛性) 또는 무아성(無我性) 등을 말하며 이를 계교(計較)하고 사탁(思度)한 것을 계탁(計度)이라 한다. 그러므로 계탁은 비진리적인 생각으로 진리를 대하거나 사물을 반연하는 심리작용을 뜻한다. 다음으로 제6의식이 육경(六境)을 상대로 능히 계탁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주변계탁이라는 말과 같이 주변(周遍)을 두루두루 어떤 것이나 다 상대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변계탁은 제6의식이 어떤 대상이든지 두루두루 상대하여 선(善), 악(惡), 무기(無記) 등 삼성으로 구별하며 인식함을 뜻한다. 그러나 제7말나식은 오직 아라야식의 견분만을 상대로 아집을 야기하기 때문에 계탁의 뜻은 있지만 주변의 뜻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주변계탁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심식의 변계에 대하여 여러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즉 난타(難陀)와 호법(護法) 등은 능변계의 마음은 오직 의식과 말나식에만 있을 뿐이고, 그 밖에 전오식(前五識)과 아라야식 등 오, 팔식(五, 八識)에는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안혜논사(安慧論師)는 모든 마음에는 허망분별(虛妄分別)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능변계와 망집심(妄執心)의 작용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만약 의식과 말나식을 제외한 전오식과 아라야식에는 능변계의 뜻이 없다고 한다면, 허망분별의 뜻도 없다고 보아야 하며 허망분별의 뜻이 없다면, 이는 곧 유루심(有漏心)이 아니라 무루심(無漏心 )으로 보아야하는 모순이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혜논사는 유루란 이미 허망분별을 자성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오식과 아라야식은 비록 계탁과 같은 근본번뇌는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그 자성에 대하여 유상(有相)의 망상을 나타내는 미세한 분별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안혜논사는 심식 전체의 분별심을 말할 때 전오식과 아라야식은 법집만 있고, 말나식에는 인집(人執)만 있으며 의식에는 아집 그리고 법집 등 이른바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와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등을 함께 구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심식의 능변과 집착의 내용에는 각 학자마다 의견이 서로 다르다. 여기서 아집은 인연의 법칙에 의하여 형성되는 연기법(緣起法)을 망각하여 주관적인 실체를 고집한 작용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법집은 사물의 개체 하나하나가 인연의 창조임을 망각하고 그 무명에 의한 집착을 야기한 것을 말하여 법집이라 한다. 우리 인간은 마음의 자성과 내외의 물체에 대한 무지 때문에 아집과 법집이 공한 것임을 망각하고 동시에 온갖 번뇌를 야기하게 된다. 이를 통털어서 변계라고 한다.

호법논사는 이러한 능변의 사상을 심식별로 분류하여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 네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심식이 두루 활동하되 계탁하지 않은 것[遍而非計]을 들 수 있다. 이때의 심식은 무루의 제식(無漏諸識)과 유루의 선식(有漏善識)을 말한다.

* 심식이 계탁은 하되 두루두루 광범위하게 계탁하지 않은[計而非遍] 심식이 있는데, 이는 곧 유루의 제7말나식(有漏諸七末那識)이다.

* 두루 계탁하고 또한 두루 주변하며[亦遍亦計] 활동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는 유루와 염오를 겸한 제6의식을 말한다.

* 심식 가운데 두루 활동하지도 한고 두루 계탁하지도 않은[非遍非計]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유루의 전오식(前五識) 및 아라야식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모든 심식의 계탁과 더불어 두루 활동한 것을 매우 명료하게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호법에 의하면 아집과 법집의 지속성은 만약 제6의식이 단절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말나식은 단절되지 않은 식이기 때문에 항상 범부적인 집착이 유지되며 동시에 여타의 심식(諸八識)에게도 염오케 하므로 이들을 일러 유루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계탁심(計度)에 의하여 집착되어지는 대상은 어떤 내용들인가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변계의 모든 심식은 인연법에 의하여 생기하는 자성(依他起自性)을 망각하고 이를 집착하며 두루 계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연법이란 연생법(緣生法)이라고도 하며, 연생법은 정신과 유체 그리고 객관계의 삼라만상이 일인(一因) 또는 일연(一緣)만으로 발생하거나 창조된 것이 아니고, 다인(多因)과 다연(多緣)이 집합하여 발생되며 또한 창조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생법은 실제로 집합되어 있는 현상계이기 때문에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관찰하면, 임시 모여 있는 것뿐이며 구경에는 무상하게 흩어져 없어지고야 마는 무(無)가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와 공(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식정(識情) 위에 나타나는 영상(影像)을 실제로 있는 것인 양 착각하여 실재의 나(實我)와 실재의 법(實法)이 있다고 집착한 것을 무명이라 한다. 범부들은 이것을 아집으로 하고 법집으로 하는 미망의 생활이 시작되는데 이러한 미암은 제6의식과 제7말나식에 의하여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미망은 의타기성(依他起性)의 인연법에 대하여 망분별(妄分別)과 망정(妄情)에 의하여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집착하는 현상을 당정현상(當情現相) 또는 중간존경(中間存境)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망각된 분별에 의하여 인식되는 실아와 실법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 동시에 이들은 마음 가운데 나타나는 이른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의 연생법(緣生法)을 집착한 계탁분별(計度分別)의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또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변계소집성은 인연가유(因緣假有)의 법을 착각한 것이기 때문에 그 체성이 없는 것이며, 또한 체성이 도무지 없는(體性都無) 것이다.

그리고 또 변계소집성은 허구의 것으로서 정만 있고 진리성은 없다고 해서 이를 정유리무(情有理無)라고 한다. 비유를 들면 이는 마치 털이 없는 거북이에게 털이 있다고 하고, 또 뿔이 없는 토끼에게 뿔이 있다고 하는 비진리적인 판단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허구의 무지를 가리켜서 구모토각(龜毛兎角)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무지를 비유하여 깨닫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계의 현상이 마음에 비쳤을 때의 영상(相分)을 잘못 판단하여 번뇌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견분의 집착(見分執着)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변계소집성의 현상을 상분과 견분의 현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에 비쳐지는 영상이 상분과 견분과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분별되는데 그 분별되는 영상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와 비진리는 마음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이며 이를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한다. 그러나 진여의 경지는 망심의 반연처가 아니라는 것이다.

2) 의타기성(依他起性)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물질과 정신(色心)의 현상 무두가 중연(衆緣)에 의탁하여 생기하기 때문에 이를 의타기라고 한다. 중연이란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 등 사연(四緣)을 말한다.

이들 사연이 서로 관계지어져야 일념(一念)의 행동이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생각은 연에 의하여 발생한 결과이므로 이를 연소생(緣所生)이라 하며, 이들을 종합하여 말하면 중연이 생기는 결과라는 뜻으로 중연소생기(衆緣所生起)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중연이 모여 발생하고 생기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내용을 정신의 생기와 물질의 생기로 나누어 보면 연(緣)내용이 서로 다르다. 첫째로 정신(心法)과 정신작용(心所法)이 생기할 때는 위에서 말한 사연(四緣)이 모두 구비하여야 가능하다. 둘째로 물질계(色法)가 생기할 때는 반드시 인연과 증상연 등 이연(二緣)만 구비하여도 생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신계와 물질계는 인연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것도 설사 일법(一法)이라 할지라도 자연생법(自然生法)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연생법(緣生法)은 색법과 심법은 모두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의타기성은 심상(心上)에 임시로 세워진(假位) 현상에 지나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거나 상주법이 아니라, 환(幻)과 같은 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를 여환가유(如幻假有)라고 한다.

이러한 의타기성을 분류하면 염분(染分)과 정분(淨分)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백법론(百法論)에 의하여 분류해 본다면 심왕(心王) 8, 심소(心所) 51, 색법(色法) 11,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24 등 94법은 유루연생법(有漏緣生法)이라 하며 또한 염분(染分)이라 한다. 다음 정분의 의타(淨分依他)는 무루의 유위법(有爲法)을 모두 포섭하고 또 원성실성(圓成實性)인 진여법도 모두 다 정분에 속한다.

이와 같이 의타기법은 유루와 무루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타기성의 진리를 지혜롭게 관찰하지 못하므로 변계소집성을 야기하여 많은 집착을 일으키며 생사에 윤회하게 된다. 그러나 지혜롭게 관찰하면 집착을 일으키지 않으며 동시에 진리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3) 원성실성(圓成實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원만하게 성취하며 진실함을 구족한 것을 뜻한다. 그 뜻을 알아보면 먼저 원만(圓滿)은 진여의 체가 모든 법에 주변한다는 뜻이고, 성취(成就)는 진여의 체가 항상 지속(常住)하여 생과 멸이 없고(不生不滅) 또 변화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실(眞實)은 진여의 체가 모든 것의 진리가 되고 또 모든 것(諸法)의 실성(實性)으로서 허망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성실성은 곧 불성(佛性)이며 모든 중생의 본성으로서 헛되지 않고(非虛謬) 또 그 체성이 전혀 없지도 않다. 이러한 내용들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도 칭한다.

무위법에는 식변무위(識變無爲)와 법성무위(法性無爲)가 있다. 식변무위는 능히 활동하는 정신세계에서도 불변의 정신이 있는 것을 말하며 능연식(能緣識)의 상분에 사물의 영상이 보여도 무위와 같이 변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행위인 유위(有爲)의 활동을 하면서도 변하지 않은 정신이 있기 때문에 사물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를 식변무위라고 말한다.

다음 법성무위는 마음이 변하여 생긴 상분(識變相分)이 아니고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자체를 말한다. 여기에는 폐전진여(廢詮眞如)와 의전진여(依詮眞如)가 있다. 폐전진여는 언어로서 표현할 수 없고 때묻은 사고로도 미치지 못하는 진여를 말한다. 이는 오직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만이 증지(證智)할 수 있는 절대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볼 때 진여 또는 무위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는 것이 진여인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진여를 이언진여(離言眞如)라고도 한다.

다음 의전진여(依詮眞如)는 진여의 진상을 규명하여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진여를 원만. 성취. 진실 등의 내용을 따서 원성실성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진여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언어를 빌리지 않으면 안되므로, 이를 흔히 의언진여(依言眞如)라고 한다.

이상으로 원성실성의 뜻을 살펴보았다. 여기에는 다시 상무상문(相無常門)과 누무루문(漏無漏門)을 함께 설명하는 원성실성의 내용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의타기성인 현상계는 무상(無常)과 유위(有爲) 등 생멸무상(生滅無常)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연법의 집합과 인연법의 해산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들 법들은 틀림없는 진리의 운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상주성과 무위성의 진여가 뒷받침하여 불변의 진리가 유지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을 원성실성이라 한다. 그러므로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이다.

다음으로 누무루문(漏無漏門)의 교리는, 유루(有漏)는 인연법에 의하여 전개되므로 이는 의타기성에 속하고 무루와 무루유위도 원성실성에 속한다. 이들 누(漏)와 무루는 그 체성이 염오(染汚)된 것이 아니며 항상 전도(顚倒)를 떠나 존재하기 때문에 진실만이 있고 또 두루 모든 경계를 반연할 때도 염오법을 떠나 항상 진여만을 반연하게 된다. 이러한 진여의 세계를 실현하고 사는 세계를 불보살의 세계라고 한다. 이상으로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 그리고 원성실성의 삼종자성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변계소집성은 망정(妄情)으로 미혹하여 실아(實我) 실법(實法)을 나타낸 것뿐이며, 실은 허구의 것이므로 이는 감정만 있고 이성은 없는 것으로서 이것을 정유이무(情有理無)라고 한다. 다음 의타기성은 인연에 의하여 생기하는 현상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가유(假有)인 것이다.

그러나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의 실성으로서 영원히 불변의 진리가 존재하는 진유(眞有)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일체가 아니면서 또한 다르지도 않은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 이 둘은 진실된 이치만을 보존하고 있다고 해서 이유정무(理有情無)라 한다.

이상과 같이 일체의 만유를 삼성으로 분류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삼종자성이며 이러한 사상에 의하여 상무성(相無性) 등 삼무성의 사상이 성립된다. 즉 변계소집성은 본래 번뇌는 체상(體相)이 없는 것이므로 상무성이고, 의타기성은 중연(衆緣)에 의하여 생기하며 자연생이 아니므로 생무성(生無性)이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근본 무분별지의 경계이며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승의(勝義)를 항상 구현하고 있으므로 이를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삼종자성의 진리를 관찰하며 수행하면 종합적인 진리관이 더욱 뚜렷해지리라고 믿는다.

2. 삼무성(三無性)

위에서 삼종자성(三種自性)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삼종자성은 실제로 인연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자성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삼무성의 학설이다. 삼무성의 학설은 변계소집성의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相無性)이라 하고, 또 의타기성의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생무성(生無性)이라 하며, 그리고 원성실성의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을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삼종자성은 자성이 없는 것이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성(無性)이라고 한다. 진여의 무성에 입각하여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과 생무성과 승의무성 등 세 가지 진리인 것이며 이들 삼무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상무성(相無性)

상무성은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실상은 본래 자성이 없고 공중의 꽃(空華)과 같이 환상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보면 변계라는 말은 두루 집착하면서 생각한다는 뜻이며 번뇌가 있는 마음이 세간의 사물에 대해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집착하는 것을 변계소집이라 한다.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법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며 그 인연법을 지혜롭게 관찰하면 필경에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망심(妄心)은 무지해서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집착심을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망심에 의하여 나타난 모든 모습은 무상한 것이며 결국 없어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고 하며 상무성(相無性)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치를 유식학에서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상분은 마음에 나타난 사물의 모습을 뜻하고 견분은 마음 위에 나타난 사물의 모습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견분은 사물의 모습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집착을 두루 나타내게 되며 그 집착하는 번뇌를 변계(遍計)라 하고 집착되어지는 사물을 소집(所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변계소집은 곧 정화되어야 할 망심의 모습들이며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무성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능히 집착하는 것(能取)과 집착되어지는 것(所取)은 모두가 감정만 있고 이성이 없는 정유이무(情有理無)인 것이며 이러한 망심의 작용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하고 변계소집성은 허상이며 임시 나타난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무성(相無性)이라고 한다.

2) 생무성(生無性)

생무성(生無性)은 정신계와 물질계가 모두 인연에 의하여 생기하는 것이며 자연생이 아니라 인연생이기 때문에 그 내용에는 자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물질은 지, 수, 화, 풍 등의 인연을 맺어 형성된 것을 말한다. 지(地)는 물질의 견고한 성질(堅性)이며 수(水)는 물질안의 물기운을 뜻하고 화(火)는 물질안의 불기운을 뜻하며 풍(風)은 물질안의 동력(動性)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성질들이 원인이 되고 연(緣)을 만나면 물질의 개체가 형성되므로 이것을 인연의 모임이라고 한다. 인연이 집합하여 조성된 모든 사물은 변천하여 해산하게 되며 결국 본래의 성질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인연의 모임인 개체(依他起性)는 자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의타기성은 자연생(自然生)이 아니라 무상(無常)한 것이며 무아(無我)한 것이라고 하며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인연이 집합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성(性)이 없다고 보지 않으며 여기에는 염분의타(染分依他)와 정분의타(淨分依他)의 성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염분의타는 분별심의 인연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정분의타는 청정심으로 이루어지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을 뜻한다.

이와 같이 생무성(生無性)은 환사(幻事)와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여러 인연에 의탁하여 출생한 것은 무성(無性)하다는 이치를 설명한다. 인연법은 망집(妄執)과 같이 자연성(自然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설(假說)로 무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연생은 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3) 승의무성(勝義無性)

승의무성은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진리를 더욱 나타내는 학설이다. 원성실성은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떠나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에 의하여 나타나는 진여성(眞如性)을 뜻한다. 진여성은 있는 것(有)과 없는 것(無)에 치우치지 않은 성질을 말하며 중도적인 진리를 뜻한다. 그러므로 망심의 반연처가 아닌 것이며 변계소집성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연에 입각하여 형성된 의타기성(依他起性)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며 이를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라고 칭한다. 원성실성은 인연법과 완전히 하나가 된 것도 아니고 또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닌 것이며, 서로 불가분리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연의 진리를 유지해 가고 있는 성질을 뜻한다. 이와 같이 인연법은 원성실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원성실성의 인연관계를 초연한 승의무성(勝義無性)의 진리가 있다.

예를 들면 큰 허공에 비록 여러 생각이 두루두루 차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색(衆色)은 자성이 없이 나타나듯이 승의무성도 원성실성과의 관계가 그와 같은 것이다. 승의는 모든 법의 승의를 말하며 그 법의 승의는 진여(眞如)를 말한다. 진여의 진(眞)은 진실한 것이며 허망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여(如)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변역(變易)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진실은 일체의 위치에 부여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성질은 변천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진리가 온 세상에 충만해 있다는 것이며 이를 일진법계(一眞法界)라고 하며 승의무성이라고 이름한다.

Ⅷ. 유식학의 수행설(修行說)

위에서 유식의 법상(法相)에 대해서 대략 설명하였다. 법상은 마음의 현상과 물질의 현상을 말한다. 그러한 현상에는 반드시 진여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을 마음의 실성(實性)이라고 이름한다. 위에서 마음이 실성에 해당하는 진여성(眞如性)에 대한 설명을 삼무성(三無性)의 설명으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삼무성의 진리를 완전히 깨닫기 위하여는 보살의 수행이 필요하다.

수행의 목적은 팔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얻는데 목적을 두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 수행의 절차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 등 오위로 나누어 설명하게 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량위(資糧位)의 수행

자량위는 수행의 자질을 향상하는 수행위를 말하며 이 수행위는 만법은 유식(萬法唯識)이라는 진리를 처음으로 알게 되는 보살들의 수행을 뜻한다. 자량위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수행하면서 마음을 닦는 것이며 수행의 절차에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등 삼십위의 단계가 있다. 이들 삼십위를 모두 합쳐서 자량위라고 하며 자량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를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이 되는 번뇌는 정화되지 않으므로 매우 초보적인 수행위에 속한다.

그리하여 자량위에서는 미세하고 깊이 집착하는 마음은 정화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번뇌의 뿌리인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번뇌형상이 남아있게 된다. 능취와 소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망심과 분별심의 번뇌망상을 야기하고 있음을 뜻한다.

2. 가행위(加行位)의 수행

가행위는 자량위에서 수행하는 마음을 더욱 경책하여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수행을 뜻한다. 이 수행은 난(煖)과 정(頂)과 인(忍)과 세제일(世第一) 등 사선근(四善根)으로 나누어 설명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가행(煖加行)은 하품의 심사관(下品尋思觀)을 수행하며 경계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는 명득정(明得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한다.

2) 정가행(頂加行)은 상품의 심사관(上品尋思觀)을 닦고 경계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는 명증정(明增定)을 수행한다.

3) 인가행(忍加行)은 하품의 여실지관(下品如實智觀)을 수행하고 집착된 경계는 모두 공(空)한 것임을 인가하는 인순정(忍順定)을 수행한다.

4) 세제일법가행(世第一法加行)은 상품의 여실지관(上品如實智觀)을 수행하며 유식의 도리를 깨닫는다. 여기서는 선정을 간단없이 수행하는 무간정(無間定)을 닦는다.

이와 같이 가행의 보살행을 실천하면 집착심과 차별심을 발생하는 능취와 소취의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번뇌가 완전하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는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만을 정화하게 된다. 분별기의 번뇌는 후천적인 번뇌를 뜻하는 것이며 여기서 진일보하여 근본이 되는 번뇌를 정화하려면 부단하게 보살도를 정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통달위(通達位)의 수행

통달위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자량위와 가행위를 통하여 부단히 수행한 결과 진리의 눈이 트이게 되었으며 따라서 무분별의 지혜가 발생하여 진여를 체달하고 달관하게 되며 이러한 경지를 통달이라고 한다. 통달은 진리를 통달했다는 뜻으로서 진리를 통달했기 때문에 마음에는 집착과 탐욕을 나타내는 분별심(分別心)이 없어지게 된다.

분별심이 없어진다는 것은 마음속에 견분(見分)의 분별작용이 없어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견분의 분별작용이 없어진다는 것은 능취와 소취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적인 인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인식이 실현되게 되며 따라서 진여성(眞如性)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 칭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므로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고 지전의 수행위를 자량위와 가행위라고 칭한다.

이와 같이 통달위는 십지(十地) 가운데서 초지의 수행위를 뜻하며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를 말한다. 초지보살의 경지는 비록 견분(見分)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별하는 작용이 없는 것이라고 하며 분별은 없지만 아직도 반연하는 작용이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4. 수습위(修習位)의 수행

수습위는 위에서 말한 통달위에서 정화하지 못한 마음을 더욱 정진하여 정화하는 수행위를 말한다.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아공은 나 자신이 공한 것을 깨달은 것이고 법공은 인연의 법이 공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물은 인연의 집합과 더불어 공동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지혜로 그 본성을 잘 관찰하면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극미(極微)의 형성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는 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들이 아공과 법공의 진리를 완전히 깨달으려면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는 선정을 수행하여야 가능하게 된다. 금강유정은 최상의 선정을 뜻하며 이 선정은 제십지보살(第十地菩薩)의 수행심에만 나타나는 선정이다. 번뇌의 정화는 제6의식과 제7말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초지(初地)에서부터 점점 정화되기 시작하여 제칠지(第七地)의 보살수행에서 번뇌장이 정화되고 아집이 단절된다.

그 후 보살은 더욱 수행하여 아직도 단절되지 않은 소지장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법집을 정화하기 위하여 계속 수행하여야 하며 제십지(第 十地)에 진입하여 금강유정을 수행하여 단절하게 된다. 번뇌장과 소지장이 단절되면 그동안 번뇌의 장애를 받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했던 지혜가 활발하게 나타나서 모든 법체를 확실하게 관찰하게 된다. 그 지혜들을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칭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망식이 정화되면 나타나게 되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의 번뇌가 정화되면 발생하고,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의 번뇌종자가 정화되면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도의 수행을 통하여 망식(妄識)의 번뇌가 정화되면 마음의 진여성에 발휘되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는 번뇌장이 정화되면 열반(涅槃)이 실현되고 소지장이 정화되면 보리(菩提)가 발생한다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보리와 열반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며 보살도를 수행하는 가운데에 마음의 번뇌가 한하나 정화된 이러한 수행들을 모두 합쳐서 수습위(修習位)의 수행이라고 한다. 수습위의 수행은 초지보살의 수행으로부터 제십지보살의 수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되는 수행이다.

5. 구경위(究竟位)의 수행

구경위는 자량위와 가행위와 통달위와 수습위의 수행을 통하여 팔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경지에 오른 것을 말한다. 자량위로부터 구경위에 이르기까지의 수행기간은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걸린다. 삼겁을 다시 분류하면, 자량위에서 통달위까지 도달하려면 1겁(劫)이 걸리고, 통달위에서 제팔지보살의 수행위인 수습위까지 도달하려면 1겁이 소요되며, 제팔지보살의 수습위에서 구경위에 오르기까지 1겁이 걸린다.

이들 수행기간을 모두 합치면 3겁이 된다. 3겁 동안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나아가서 중생을 구제하는 등 이타적인 수행을 해야만이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이타적인 수행 가운데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수행하는 것이 유식학의 수행사상이다.

십바라밀은 1) 보시(布施), 2) 지계(持戒), 3) 인욕(忍辱), 4) 정진(精進), 5) 선정(禪定), 6) 지혜(智慧), 7) 방편(方便), 8) 원(願), 9) 역(力), 10) 지(智) 등의 바라밀을 뜻한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到彼岸]는 뜻으로 십종의 바라밀을 수행하면 유식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유식의 실성(實性)인 진여성을 깨닫고 성불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들 십바라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 보시바라밀은 물질과 정신을 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물질을 베풀어준다는 재시(財施)가 있고, 진리를 설명하여 사상을 길러주는 법시(法施)가 있으며,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다. 보살은 이와 같은 보시바라밀을 수행하여 중생들을 계몽하고 복되게 해 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2)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 지계바라밀은 보살 스스로의 계율을 잘 지키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삼취정계(三聚淨戒)를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삼취정계는 첫째, 마음과 몸을 바르게 하고 스스로의 범죄를 방호하는 율의계(律儀戒)를 실천하고, 둘째, 중생들에게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고 심지어 짐승의 공포까지도 없애주는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실천한다. 셋째,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모든 이익을 가져다주는 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를 실천한다. 이와 같이 이타적인 계율이 삼취정계이며 대승적인 계율사상이다.

3)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 인욕바라밀은 모든 일에서 고된 일을 참고 성취하는 것을 뜻한다. 인욕은 내원해인(耐怨害忍)과 안수고인(安受苦忍)과 제찰법인(諸察法忍) 등 3인(忍)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3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원해인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항 때 인욕하며 지혜롭게 피해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안수고인은 추위와 더위 등 자연의 나쁜 조건을 극복하고 죽음이 닥쳐올 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도 이를 능히 참으면서 보살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셋째, 제찰법인은 사성제(四聖諦) 등 여러 진리를 관찰하고 진리를 통달하기 위하여는 어려운 고통을 참고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4)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 정진바라밀은 선법을 행하고 보살행을 할 때 게으름을 퇴치하고 근면하게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정진은 피갑정진(被甲精進)과 가행정진(加行精進)과 무퇴정진(無退精進)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피갑정진은 병사가 전장에서 두려움 없이 근면하게 전투하여 적군을 격퇴하는 것과 같은 근면성을 말한다. 둘째, 가행정진은 견고한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지 용감하게 완수하는 근면성을 말한다. 셋째, 무퇴정진은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싫어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후퇴하지 않는 근면성을 말한다.

5)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 선정바라밀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함이 없이 미세한 번뇌까지도 정화하는 선정을 뜻한다. 정(定)과 지혜(慧)를 함께 수행하여 진여를 증득하는 근본지(根本智)를 나타내고 인연법과 더불어 유위법(有爲法)을 반연하는 후득지(後得智)를 발생하는 것을 뜻한다.

6)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 지혜바라밀은 선정을 닦아 발생되는 지혜를 말하며 지혜는 마음의 번뇌가 없어짐에 따라 분별심이 전환하여 나타나는 마음을 뜻한다. 지혜는 삼라만상이 인연법으로 형성된 연기법을 알고 연기법을 알게 되면 중생의 불성도 알게 된다. 따라서 지혜를 가진 자는 대자대비의 이타행(利他行)도 실천하는 인격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7)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 방편바라밀은 방(方)은 훌륭한 방법과 정직을 뜻하고 편(便)은 편리하게 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일체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고 근기에 계합하는 방법과 수단을 편리하게 활용하여 구제사업을 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방편바라밀로 말미암아 마음속 깊이 발생하는 미세한 번뇌를 단멸하게 된다.

8) 원바라밀(願波羅蜜) : 원바라밀은 보리와 열반을 속히 증득하기를 발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원(願)은 구보리원(求菩提願)과 이락타원(利樂他願)의 내용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첫째, 구보리원은 큰 깨달음과 불과(佛果)가 성취되기를 발원하는 것이고, 둘째, 이락타원은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구제하겠다는 발원을 뜻한다.

9) 역바라밀(力波羅蜜) : 역바라밀은 보살이 자신의 수행과 이타행을 하면서 보다 더 힘을 내어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역(力)에는 수습력(修習力)과 사택력(思擇力)이 있다. 수습력은 모든 힘을 다하여 정화운동을 가행하는 것을 뜻하고 사택력은 모든 진리를 지혜롭게 선별하고 사리를 진리롭게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10) 지바라밀(智波羅蜜) : 지바라밀은 일체의 법을 관찰하여 승의(勝義)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세속에 있는 모든 것과 중생의 근기까지도 빠짐없이 다 알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보살이 수행하는 십바라밀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보살은 자량위의 수행을 할 때부터 육바라밀 내지 십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며 유식학에서는 십바라밀의 실천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십바라밀은 모든 수행을 집약한 수행관이며 이 바라밀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 중생을 교화하며 사회를 불국토(佛國土)로 건설하게 된다.

이와 같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겸한 수행으로 말미암아 본래 소유하고 있는 불성(佛性)을 장애하는 번뇌장과 소지장의 번뇌가 없어지고 동시에 모든 번뇌가 없어지게 된다. 번뇌가 없어지게 됨으로써 불성에서 발휘되는 지혜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며 무애자재하게 작용을 하게 된다. 망식이 강하면 지혜가 약해지고 지혜가 강해지면 망심이 약해진다는 말과 같이 자량위 때부터 지혜가 점점 강해지기 시작하여 구경위에 도달해서는 망식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혜만 원만하게 작용하게 된다.

이들 지혜를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한다. 성소작지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오식이 정화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혜이고, 묘관찰지는 제6의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평등성지는 제7말나식이 정화되어발생하는 지혜이며, 대원경지는 제8아라야식이 정화되어 발생하는 지혜이다. 이러한 지혜는 우주의 진리를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불타의 삼신(三身)과 더불어 작용하게 된다.

불타는 사지(四智)를 구족하고 삼신(三身)을 구족하였으며, 삼신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말한다. 이들 삼신을 통하여 불타의 자비가 육도의 중생들에게 미치기 되며 삼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법신(法身)은 자성신(自性身)이라고도 하며 이는 진여(眞如)의 체성이며 진리적인 몸을 뜻한다. 그러므로 법신은 만법의 체성이며 모든 진리의 의지처이고 여러 덕(衆德)의 집합체인 것이다.

2) 보신(報身)은 3겁(劫)을 수행하여 과보로 받은 불타의 몸을 말한다. 불타는 과보를 받아 수용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한다. 십바라밀을 비롯하여 여러 공덕으로 받은 과보를 혼자서만이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베풀어주는 자비의 실천이 따르기 때문에 이를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수용신은 여래의 대원경지와 제팔식의 진여성을 말하며 이는 여래 자신만이 수용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한다. 타수용신은 십지보살들이 수용하는 불타의 덕성을 말하며 이는 평등성지에 의하여 발생하는 응신(應身)을 뜻한다.

3) 화신(化身)은 여래가 하급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몸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성소작지를 변현하여 나타내는 불신을 뜻한다. 그러기 때문에 화신을 변화신(變化身)이라고도 한다. 변화신은 자량위의 보살과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등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정토(淨土)와 예토(穢土)에 거주하는 불신을 말한다.

위에서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 구경위 등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이들 수행사상은 이타적인 원리로 구성되었으며 이타적인 수행을 통해서만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불의 경지인 구경위에 도달하여서도 다시 보신과 화신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불타의 자비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근본이념이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유식학이 흥기하여 전래된 역사와 팔식을 비롯하여 여러 교리를 설명하였고, 망식을 정화하여 지혜를 나타내어 성불의 경지에 도달하는 수행사상도 함께 설명하였다. 이들 내용들은 비록 자세하지는 못하더라도 유식학의 길잡이는 되리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더욱 체계있고 자세하게 쓴 글을 발표할 것을 기약하고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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