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사상(唯識思想, 산스크리트어 vijnapti-matrata) 개요>
무착 보살 탱화
차례
1. 유식사상(唯識思想)이란
2. 유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라 한다.
3. 유식학의 대가들
4. 유식사상의 특징
1)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의 관계
2) 유식사상이란 마음에 관한 것이다.
3)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추구하고 있다.
5. 주요 유식사상
1) 8식(八識)의 구조
2)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
3) 심왕(心王, citta)과 심소(心所, caitta)
4) 유식 4분설(四分說)
5) 유식 사지(唯識四智)
6) 4선근(四善根)-4가행위(四加行位)
7) 유식수행 5위(唯識修行五位)=수도 5위(修道五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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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식사상(唯識思想)이란
유식사상(산스크리트어 비즈납티 마트라/vijnapti-matrata)은 유식학, 유식론, 유식설 혹은 유식불교, 유식유가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마음의 역할과 구조 기능, 마음의 현상을 밝히는 불교심리학이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마음을 정적(靜的)인 면으로 정의하는데 반해, 불교 심리학에서는 정신생활을 동적인 면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 심리학에서도 일부 역동적 심리 이론을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유식(唯識)의 산스크리트어 표현은 vijnapti matrata이다. matrata 는 only 라는 뜻이고. vijnapti는 vijnana에서 온 말이다. vijnana는 식(識)이다.
유식학은 실제적인 수련에 의해 성립된 불교 심리학으로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심리학일 것이다.
그런데 그 이론이 너무나 번잡해서 옛날부터 힘든 학문의 대명사로 지목돼 왔다.
따라서 까다롭고 방대한 유식의 이론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므로 여긴 최대한 간추려서 논의를 하겠다.
유식사상은 용수(龍樹, Nagarjuna, AD 150~250?)가 정립한 중관사상(中觀思想)에서의 공사상(空思想)이 지나치게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용수가 죽고 80여년이 지난 4세기 전반에 대두됐다.
그리하여 유식사상은 중관사상의 공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발전시켰다. 즉, 용수가 말하는 공(空)의 개념을 연기의 성품을 해석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공(空)을 ‘허무’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하며 내세운 논리가 유식(唯識)사상이다.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에 의해서 최초로 천명된 유식사상은 미륵의 제자인 무착(無着, 아상가/Asanga, AD 310~390)과 그에 이은 무착의 동생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 320~400?)에 의해서 조직화되고 체계화됐다.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그리하여 팔만대장경을 손에 넣고 쥐어짜면 남는 것은 마음 심자(心) 하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유심론(唯心論)적 성격은 초기불교에서부터 있었다. 초기에 6처(六處)와 12처(十二處)설이 있었는데, 여기서 12처란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인식기관에 의거해 여섯 개의 영역으로 구분한 것이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인 <아함경>엔 ‘마음은 일체법의 근본이 된다.’라고 했으며, ‘마음이 번거로우면 중생이 번거롭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이 청정하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대승적으로 유식학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화엄경>의 유심사상이다.
그리고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 심외무경(心外無境)이라고 해서 ‘만법(萬法)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식(識)의 표상(表象)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인식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표상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마음을 떼어 놓고는 불교를 논할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유식(唯識)과 유심(唯心)은 같은 말이고, 유식사상은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과 <해심밀경> 등의 만법유식(萬法唯識)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유가유식학파의 선구적인 유가사(瑜伽師)들은 선정을 닦는 과정에서 자각한 갖가지 영상은 다만 식(識,, vijnapti=마음)일 뿐이라는 지각이 곧 ‘유식(唯識)’이라 했다.
그리고 유식에 바탕 해 현상계의 모든 것은 오직 표상식(表象識)일 뿐이라는 명제가 이 학파 학설의 기본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유식불교는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을 좀 더 현실화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에 있어서 삶의 공간인 현실, 즉 대중세계를 인정하고, 깨달음 즉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간 단계인 보살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를 구분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이론을 현실성 있게 체계화했다.
그리하여 여래장사상이나 화엄사상, 천태사상 등은 모두 유식불교의 이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유식불교의 영향을 받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속제[俗諦, 심생멸문(心生滅門)]와 진제[眞諦, 심진여문(心眞如門)]를 구분하고, 일심이문(一心二門)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유식학은 중관학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현실성을 받아들여 일단 대승불교를 완성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후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는 유식학의 바탕 위에 여러 종파가 부침하게 됐다.
2. 유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유가행파(瑜伽行派)라 한다.
유가행파(瑜伽行派)는 용수의 중관파(中觀派)와 더불어 대승불교의 두 기둥을 이룬다. 유가행파란 유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흔히 유가유식(瑜伽唯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유식사상과 중관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대승불교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만큼 중요한 사상들이다.
유가행(瑜伽行)이란 요가차라(Yogacara)라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역한 말이다.
요가(Yoga)라는 원어의 발음을 한자로는 유가(瑜伽)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유가행, 즉 ‘요가차라’는 요가의 실천을 뜻한다.
말 그대로라면 유가행파는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가리키겠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도에서 몸을 비틀며 하는 체육운동의 하나인 요가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유가행파는 요가의 실천에 기반을 두면서, 이론적으로는 유식설(唯識說)이라는 독자적인 교의를 확립하고서, 중관파와 함께 인도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대승불교의 학파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를 굳이 유가행파(瑜伽行派)라는 명칭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인도의 유명한 육파철학(六派哲學) - 4세기 굽타왕조(Gupta王朝) 때 인도에서 확립된 정통 브라만 사상에 속하는 여섯 가지의 철학 체계 중의 하나로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몸을 비틀어가며 하는 운동인 요가 수행자들의 뿌리인 요가(Yoga)학파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불교의 유심론적(唯心論的)인 경향이 첨예화돼 하나의 특별한 학파를 이룬 것이 유가행파라 할 수 있다. 유식설을 주장하는 유가행파가 독립된 학파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공(空)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요구가 있었다. 즉, 중관학파의 공사상을 허무주의로 해석하려는 사고방식을 시정할 필요가 대두됐던 것이다.
그리고 유가행파에서는 인간의식을 탐구하다가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이라는 근본식(根本識)을 획기적으로 발견을 한 것이다. 이 위해한 발견으로 그동안 교리 상 항상 문제가 돼 왔던 윤회의 주체를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 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존재를 산출해 내는 근본식(인식작용)으로서 제8식인 아뢰야식이라는 것을 설정하고, 이것을 근본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제7말나식(末那識, Manas)과 6식을 배치한 8식설을 주창한 것이다.
3. 유식학의 대가들
유가사지론
• 미륵(彌勒, Maitreya/마이트레야, AD 270?~350?)---미륵은 승려의 이름인 경우와 보살의 이름인 두 가지가 있다. 유식학의 창시자인 미륵은 미륵보살과 다른 실존 인물로 본다. 남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출신으로서 불교에 귀의해 유식학을 펼쳐서 유가행파(유식학파)를 열어 그 개조가 됐고, 제자로 무착(無著, 300?~390?)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무착이 편집 출간한 미륵의 저서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등이 있다.
• 무착(無着, Asanga/아상가/阿僧伽, 300?~390?)---대승불교의 유식론을 체계화했으며, 북인도 간다라국(Gandara)의 수도 푸루샤푸라(Purusapura) - 현재의 파키스탄에 있는 페샤와르(Peshawar) 출신이고, 세친(世親)의 형이다.
처음에는 부파불교 화지부(化地部)에 출가해 열심히 수행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뒤에 미륵의 가르침을 받게 돼, 대승불교의 모든 경론을 연구하고 유식불교를 확립했으며, 유가행파의 대표적 논사가 됐다. 유식설을 조직 체계화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지었고, 그 외에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을 저술했으며, 미륵의 주요저서인 <오대부론(五大部論)>를 편집 출간했고, 유식사상을 확립했다. 이와 같이 여러 대승경전과 미륵과 무착의 논전에 나타난 유식사상을 초기유식학이라고 한다.
• 세친(世親, Vasubandhu/바수반두, 320?~400?)---천친(天親)이라 하기도 하고, 바수반두(婆藪槃豆)라고 음사한다. 무착의 친동생으로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에 출가해 소승 교리를 연구하고 대승불교를 비판하고 있었다. 무착은 대승불교를 비방하는 세친의 행위를 염려해 대승불교에 귀의케 했다.
이후 세친은 무착의 유식학을 계승해 이를 완성시켰으며, 여러 대승경전을 연구해 대승의 개척자로 불린다. 유가행파를 인도 대승불교의 주류로 이루어냈으며, 그의 유식학을 조직유식학(組織唯識學)이라고 칭한다. 조직유식학은 8식의 심체[심왕(心王)]와 심체의 작용[심소(心所)]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들 정신계와 물질계의 인연관계도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을 말한다.
세친의 저서엔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俱舍論)>이 있고, 미륵 ― 무착으로 이어진 유식학을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결집했다. 세친은 <유식이십론>에서 우리의 인식활동을 꿈에 비유하면서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인식은 식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논했다.
그리고 세친의 또 다른 저서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은 모든 유식사상을 백 가지 단어에 포함시켜 체계화한 논전이다.
• 진나(陳那, Dinnaga/딘나가)---5~6세기에 활약한 인물로 진나(陳那)는 음사한 이름이고, 의역해 대역룡(大域龍)이라고도 한다. 불교논리학인 인명론(因明論)을 대성시켰다. 남인도 브라만가문 출신으로 불교로 개종한 후 출가했다. 이후 세친의 문인이 돼 특히 유식과 논리학에 정통하게 됐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학을 정립함으로써 인도논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유식설에서는 견분(見分)⋅상분(相分)⋅자증분(自證分)의 삼분설을 주장했다. 저서로는 <정리문론(正理門論)>, <무상사진론(無相思塵論)>. <관총상론송(觀總相論頌)>, <장중론(掌中論)> 등이 있다.
• 호법(護法, Dharmapāla/다르마팔라, 530~561)---달마바라(達磨波羅)로 음역한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주석을 더해 세친의 사상 해석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다. 6세기 중기 드라비다국 대신(大臣)의 아들로 태어나, 그 나라 공주와의 결혼 첫날밤에 신방을 몰래 빠져나와 출가했다. 그의 학문은 대⋅소승에 모두 정통했고, 특히 유식학 연구의 대가였다. 그는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지어 유식사상의 기반을 다졌다. 이 논서는 현장(玄奘)을 통해 중국에 전해져 중국 법상종 성립의 계기가 됐다.
• 안혜(安慧, Sthiramati, 510~570)---남인도 나라국(羅羅國) 출신의 승려로, 유식학과 인명(因明)에 정통했다.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대한 주석서 <유식삼십송석론(唯識三十頌釋論)>을 지었고, 그 외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등의 저서가 있다.
• 현장(玄奘, 602?~664)---중국 당나라시대의 승려로 자신의 교리적 의문에 해답을 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먼 여행을 떠났다가 나란타사(那爛陀寺)에서 계현(戒賢) 논사의 지도를 받으며 유식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산더미같이 많은 불교 경론들을 갖고 귀국했다. 많은 책을 가져온 현장은 당(唐) 태종의 유래 없는 환영을 받아 막강한 국가적 후원 아래 여러 불경을 한역했다. 중국 유식학 계통의 법상종이 열릴 기초를 닦았으며, 당시 현장의 문하에는 국내외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서 현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그의 번역 작업을 돕고 그 문헌들의 주석에 전력을 쏟았던 사람이 규기(窺基, 632~682)였다.
• 규기(窺基, 632~682)---중국 법상종의 사실상 개조로서, 자은대사(慈恩大師) 혹은 대승기(大乘基)라고도 불린다. 17세에 출가, 현장(玄奘)의 제자가 돼 유가유식종(瑜伽唯識宗)을 전수받고, 다시 인명학(因明學)을 익혔으며, 28세 때 스승을 도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번역했다. <성유식론>의 번역에 있어서는 단지 규기만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 후 <성유식론>의 연구에 힘써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를 저술했고, <법화현찬(法華玄贊)>,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 등 50부(部)를 저술해 사람들이 그를 백본소주(百本疏主) 혹은 백본논사(百本論師)라고 했다.
규기는 한마디로 7세기 즈음 동아시아의 가장 위대한 불교 주석가라고 할 수 있다. 규기는 백본소주(百本疏主)라고 불리듯 새로 유입된 수많은 불교 경론을 번역하고 주석하는 일에 자신의 온 지성을 쏟아 부었다. 그의 작업 중 뛰어난 것은 여러 유식학설을 한데 모아 집대성한 〈성유식론>을 번역한 일과 <성유식론술기(成唯識論述記)>를 직접 쓴 것이다. 이 논서와 그 주석서들에서부터 중국의 새로운 유식학, 즉 법상종이 시작됐으므로 규기는 법상종의 초조로 불리게 됐다. 물론 그의 불법 계승과 방호에 빛을 발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그의 스승 현장의 원력이 많이 작용했다.
• 신라의 유식학---중국에는 유식학을 이념으로 한 지론종과 섭론종, 그리고 법상종이 생겼다. 이에 대해 한국의 유식학은 원광법사(圓光法師, 555∼638)가 섭론종을 수학했고, 다음으로 신라의 원측법사(圓測法師, 613∼696)가 종합적으로 연구했다. 원측법사는 15세에 중국에 유학해 처음에는 섭론종의 유식학을 전공했으며, 그 밖에 대승과 소승의 교학을 연구하고, 어학도 뛰어나 6개 국어를 잘 해 현장의 번역 작업을 도왔다.
원측법사는 이어서 현장법사가 도입한 법상종의 유식학을 연구해 <성유식론>과 <유가사지론> 등에 대한 연구서를 규기보다도 먼저 발표했다. 이와 같이 원측은 규기를 비롯한 중국계의 학자들과는 달리 모든 유식학을 종합해 일승(一乘)적인 사상을 건립했다.
그리고 국내에서 유식학을 전공한 학자로는 원효(元曉)를 들 수 있다. 원효는 <해심밀경>과 <성유식론>, <유가사지론> 등 많은 유식학의 경전과 논전을 연구해 주소(註疏)를 썼다. 현재 남아있는 저술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이장의(二障義)>를 비롯해 <유가사지론소>와 <성유식론소> 등이 있다. 또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 등 현존의 저술에 유식학을 가장 많이 인용했다. 원효는 진제(眞諦)가 전한 아마라식(阿摩羅識)설과 현장(玄奘)이 전한 아뢰야식설을 함께 인용한 것으로 봐서 섭론종과 법상종의 유식학을 모두 통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저술에 의해 신라의 유식학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현재도 일본과 중국의 불교학자들은 신라인들의 저술을 연구해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 유식학은 신라의 고승인 지통(智通)과 지달(智達), 지봉(智鳳) 등이 일본에 건너가 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 유식학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저술을 통계해 보더라도 일본은 물론 중국보다도 더 많았다. 이러한 학풍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쇠퇴했다.
4. 유식사상의 특징
1)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의 관계
불교의 목적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서 고통의 현실 세계를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나와 우주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현실 세계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고 있으며, 그 부정을 뒷받침해 주는 진리가 연기법(緣起法)이다. 붓다는 연기법에서 온갖 현상들은 다만 인연 따라 존재할 뿐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후에 부파불교에서는 만법(萬法)은 무아ㆍ무상이지만 그 만법을 이루는 요소(실체)는 존재한다고 주장했으며, 다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의 실체설을 부정하는 공적 반야사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공(空)사상의 공을 설명하기가 난해하므로 보충적으로 설해진 것이 중관사상(中觀思想)이다. 그러나 중관사상 역시 현실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어 다시 나타난 사상이 바로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용수(龍樹)의 중관사상에 의해 이론적 기반을 구축했던 공사상(空思想)은 필연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인식의 문제를 쟁점으로 부각시키게 했다.
유식설은 이러한 인식 문제를 해명하면서 고도의 심리학적 이론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유식사상은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인간 인식의 한계성 및 심층심리와 거기에 잠재한 이기성(利己性)의 실태를 정면에서 추구하고, 진실한 자기의 모습, 그리고 마음에 대한 성찰과 탐색을 했다.
중관사상은 공의 논리를 전개했으나 체계적인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현실적 존재가 어째서 이 같은 질서 위에 성립돼 있는가 하는 까닭을 체계적으로 고찰한 것이 유식사상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식(識, 인식작용)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상의 요점은 상식적으로는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라고 믿어지는 물질적인 것일지라도 그것은 모두 인식작용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작용이 보는 것이라면 그 대상, 즉 경계(境界)는 보여지는 현상세계라는 것이다.
반야사상이 지나치게 출가자 중심의 사상이었다면 유식사상은 중생과 깨달은 자를 구분해 현실성을 인정하면서 인간의 심층심리를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이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는 공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을 했고, 인간의 심원한 인간 심성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공과 마음의 해탈을 가르치고자 했다.
중관불교가 초기불교이래의 예지를 강조하고, 인간존재의 이법을 탐구하며 반야와 공의 실천을 강조했다면, 유식불교는 마음의 심층세계와 해탈의 심리를 탐구했다. 그리하여 이 양자는 대승불교사상의 양대 기둥을 이루었다.
2)유식사상이란 마음에 관한 것이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서 정립된 유가학파의 근본철학인 유식사상은 일반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도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돼 있는 종자로부터 인식되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대상은 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견분(見分)이 상분(相分)을 인연해서 인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2차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했다.
<성유식론>에 의하면, 유(唯)는 마음 밖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이고, 식(識)은 오직 심체뿐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를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한다. 유식무경은 오직 마음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마음에 의지해 존재하며 마음 밖에 어떤 것도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광활한 초원에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이 나무를 보고, 지친 나그네는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목수는 베어서 가구를 만들고 싶어 할 것이고, 상인은 팔아서 돈을 벌고자 할 것이다. 또 화가는 스케치하기에 바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의 사물을 놓고 각자 생각과 행동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식(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식이 곧 마음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행복과 불행의 가치는 우리들 마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마음은 나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주체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마음이라 할 수 있을까. 마음은 크게 보면 곧 식(識)이다.
식이란 다섯 감각기관이 그 대상을 인식하는 감각적 인식(전5식/前五識)과 이를 분별하는 의식(意識) 내지는 인식활동이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식을 이와 같이 정의 할 수 있으나, 유식불교에서는 이 식(6식) 외에 인간의 정신세계가 제7식 말나식(manas)과 제8식 아뢰야(alaya)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8식을 넓은 의미에서 마음이라 한다. 그리고 마음은 작용을 통해 겉으로 들어난다. 즉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곧 마음의 작용이다.
3)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추구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마음의 현상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분석한 철학이 유식학이다.
유식학은 우리 인간에게 고통과 번뇌를 가져다주는 근본으로서 실체적인 개념, 즉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것이 있다는 관념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실체적인 개념이 생겨나는 마음의 구조와 그러한 개념을 떠난 진실된 마음의 구조를 상세히 밝혔다.
곧 우리의 마음은 서로 관계하며 연기(緣起)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마음으로 바꾸어지는 구조를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 유식에서 말하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구조이다.
불교의 근본목적은 부처님과 같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중생들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전식득지를 통해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곧 전식득지는 불교가 목적으로 하는 지혜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규명한 것이다.
5. 유식사상의 중요 개념
1) 8식(八識)의 구조
유식학에서는 심상의 체성을 8종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며 이것이 8식설이다. 이는 심의식(心意識)을 분류한 것으로서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하고, 의(意)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하며,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종의 심체로 나누어 설명하며, 이들 심체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6식(六識)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를 6근(根)이라 해서 안(眼-눈)⋅이(耳-귀)⋅비(鼻-코)⋅설(舌-혀)⋅신(身-몸)⋅의(意-뜻)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 대상인 육경(6境)을 만날 때, 육근을 통해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6식(6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식이다. 초기 불교에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육근이 육경을 만났을 때를 조건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육식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눈⋅귀⋅코⋅혀⋅몸뚱이(피부)⋅마음(뜻)의 6종의 감각기관, 즉 6근과 그 대상인 물질(色)⋅소리(聲)⋅냄새(香)⋅맛(味)⋅촉감(觸)⋅사물 혹은 현상[법(法)]의 6경, 그리고 이 6근 ‧ 6경을 연(緣)으로 해서 생기는 6가지 마음의 활동, 즉 6식을 합한 것이 18계이다.
그러던 것이 유식학(唯識學)이 발전하면서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여덟 가지[팔식(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그리고 그 식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했는데, 8식 중에서 제일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다섯 개의 감각기관(五根)과 연결된 식(識)으로서, 이것이 가장 바깥에 나타난 거친 식이고, 맨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전5식(前五識)이라고 했다.
제1식은 눈으로 봐서 생기는 식이라 해 안식(眼識)이라 하는데, 즉 눈(眼)이 색(色)을 접촉하면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꽃을 보고 꽃을 알아보는 게 안식이다.
제2식은 귀로 들어 생기는 식이라 해 이식(耳識)이라 하는데, 즉 귀(耳)가 소리(聲)를 접촉하면 이식(耳識)이 일어난다. 소리를 듣고 그거서이 소리라고 아는 게 이식이다.
제3식은 코로 맡아 생기는 식이라 해 비식(鼻識)이라 하는데, 즉 코(鼻)가 냄새(香)를 접촉하면 비식(鼻識)이 일어난다. 냄새를 맡고 냄새를 아는 게 비식이다.
제4식은 혀로 맛을 봐 생기는 식이라 해 설식(舌識)이라 하는데, 즉 혀(舌)가 맛(味)을 접촉하면 설식(舌識)이 일어난다. 혀로 맞을 보고 맛을 느끼는 게 설식이다.
제5식은 몸으로 느껴 생기는 식이라 해 신식(身識)이라 하는데, 즉 몸(身)의 피부(觸)에 접촉하면 신식(身識)이 일어난다. 몸이 접촉했을 때 뭣이 닿았다고 느끼는 게 신식이다.
이처럼 5근(五根)이 5경(五境)을 만나 일어나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는데, 이 전5식은 매우 현재적이어서 당장 느끼는 대로 생겨나는 인식이다. 이와 같이 식(識) 가운데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등 전5식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등 5근(根)이라는 육체의 다섯 부분에 의지해 활동하는 심식들이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제6식은 어디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식이냐 하는 것이다. 보통 제6식이 의(意)를 근거로 해서 활동한다고 하지만 그 의근(意根)이라는 생각의 덩어리가 어떻게 제6식의 근거(뿌리)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견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소승불교의 견해를 보자.
인간의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 즉,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생각밖에 못한다. 한꺼번에 두 가지 세 가지 생각을 못한다 말이다. 그 대신 한 가지 생각은 다음 한 가지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런 현상을 두고 ‘생각은 흐름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因)과 연(緣)이 돼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등무간연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뒷생각의 뿌리가 앞생각이 된다. 즉, 앞생각을 의근으로 해서 뒷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6식의 의지처는 몸뚱이의 일부분이 아니라 생각[의(意)]이라서 심근(心根)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식 활동에는 전5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상이라든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일어나는 여러 사고, 기억, 추리, 예상 따위의 복잡하고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것들을 제6식인 의식이라 한다.
즉, 제6식인 의식(意識)은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생각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마음을 뜻한다. 현재는 눈, 귀, 코, 혀, 몸 등 5근을 통해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인식할 때 선과 악을 결정하며, 모든 생각을 결정해 정신작용을 나타내고, 몸의 행동도 결정한다. 이 의식은 생각이 깊고 넓으며 모든 것을 반연해 생각한다는 뜻에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즉, 제6식인 의식은 전5식보다 포괄적인 사고 작용으로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통각작용(統覺作用)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제6식인 의식은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등 전5식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인식이어서 우리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강 제6식인 의식(mano-vijnana)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사고하는 정신적용 대부분이 이 제6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쓰는 의식(意識)이라는 말이 바로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하고, 분별 시비하는 마음이어서 요별식(了別識)이라고도 한다.
실제 예를 들어보자. 소리라는 경계는 눈(안근)으로 들어올 수 없다. 반드시 귀(이근)로만 들어온다. 입이나 혀를 통해서 소리를 인식하는 건 아니다. 즉, 어떤 소리(경계)가 내 귀(이근)를 통해 들어와서 이식(耳識)이 일어나고 대뇌피질에 있는 의식(제6식)으로 가서, 아! 이것이 차 소리구나, 아니면 기다리던 두부장수가 왔구나! 하고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독서삼매에 들어 있으면 밖에서 차 소리나 두부장수 종소리가 났지만 못 듣는다. 이식(耳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귀(이근)가 들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6식이 작용을 해 주어야 차 소리고 두부장수 소리고 분별을 할 것인데, 제6식 의식이 온통 책에만 매달려 있어서 이식(耳識)의 작용을 도와주지 않으니까 못 듣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경계가 다섯 가지 식을 통해 느낀 것을 제6식(의식)이 도와주어야 그것을 장미꽃이다, 비행기 소리다, 커피 냄새다, 꿀맛이다, 하고 각기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몸으로 접촉해서 좋거나 싫은 것도 경계(촉경)이지만, 마음속에서의 온갖 느낌들, 이를테면 외로움, 답답함, 우울함, 질투 등의 느낌도 경계(법경)이고, 일상의 삶에서 시달리는 것은 경계 아닌 것이 없다. 중생은 온갖 경계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마음작용은 모두 제6식의 몫이다.
그리하여 좋은 경계가 닥치면 즐거워하고, 나쁜 경계가 닥치면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이 모두가 의식의 몫이다. 허나 수행자의 삶은 그 어떤 경계가 와도 좋고 나쁨의 분별이 없이 늘 여여(如如)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여여함을 추구하는 것이 곧 수행이다.
그런데 이 제6식이 동물에게도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동물에게도 제6식은 있다. 먹을 것을 보면 침을 흘리는 개의 마음이 단순한 신경 반사작용이 아니라, ‘거칠지만 판단할 줄 아는 마음’, 다시 말해 제6식의 결과라는 말이다.
애완견이 주인의 마음을 읽고 눈치를 보는 것 역시 제6식이 작용해서 그렇다.
그러니 동물들은 그저 지능이 낮을 뿐, 비록 거칠지만 의식이 있다.
개에게 비록 미약한 6식은 있으나 불성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개는 스스로 수행을 하지 못하고, 따라서 성불할 수가 없다. 물론 사람도 개보다 못한 사람이 많겠지만.
② 제7식 - 말나식(末那識, manas)
초기불교에선 6식까지만 상정했지만, 유식학에서는 제6식인 의식의 뿌리로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을 상정했다.
즉, 대승의 유식사상에서는 제7식 말나식을 의(意)라 하는데, 제6식이 이 의(意)를 소의(所依)로 하므로 ‘의식(意識)’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러니 제6식은 제7 말나식을 소의로 하는 식인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제6식을 표층의식이라 한다. 본심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을 새로이 설정한 것이다.
소승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을 봤으며, 의식의 근거가 앞생각이라 했다. 즉, 소승불교에서는 앞생각이 뒷생각의 뿌리가 된다고 봤으나 유식학에서는 말나식을 상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나식은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 ― 잠재의식으로서,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
그리고 더 깊은 잠재의식이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다. 이처럼 유식학에서는 8식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식(識)을 마음이라 하지만, 그것은 가벼운 마음을 일컫는 것이고, 보통 마음이라 하면 전5식을 포함한 제6 의식을 일컫는다. 그러나 좀 더 포괄적인 마음 혹은 생각이란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일컫는다. 그리고 제7식부터는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심리로 들어간다. 따라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 잠재의식이다.
이상과 같이 식이란 표면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잠재의식도 포함한다. 장미꽃을 보고 장미꽃이라는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전에 장미꽃을 본 경험이 잠재의식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면에 처음 보는 어떤 물건이 있다고 하자. 그 게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전에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이 없다면 현재의 인식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제6식은 보다 심층의식인 제7식, 제8식의 근거 위에서 제대로 의미를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의 육신은 수만 년을 거쳐 진화해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육신의 진화에 따라 진화해왔다. 그리하여 초기 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던 것이 대승불교 유식학의 발전에 따라 ‘식(識)’이라는 인간의 마음은 여덟 가지(8識)로 구성돼 있다고 보게 됐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식(識)을 단계적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즉, 5근(오관/五官)에 의지해서 생기는 식을 전5식(前五識)이라 부르고,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의식(意識)이다. 이 제6식인 의식이 전5식을 총괄한다.
이와 같이 눈, 귀, 코, 혀, 몸, 마음(意)의 여섯 기관이 외부세계와 직접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인식이 6식인데, 그 중 제6식인 의식은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의 전5식(前五識)과는 좀 다른 높은 차원의 식이어서 대뇌의 언어활동은 대체로 제6식인 의식에 속하며, 이 제6식까지를 보통 표층의식이라 한다.
그리고 유식학에서는 제6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하는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manas-vijnana)이며,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라고 해서 제7식부터는 심층의식이라 하며, 무의식의 영역이라 했다.
따라서 제1식부터 제6식까지의 표면의식(표층심리)은 인간의 본심이 아니고, 표층심리를 벗어나 심층의식으로 들어가는 제7 말나식이 나의 실체인 영혼을 일컫는다고 했다. 제7식부터 여러 가지 번뇌에 뒤덮인 본심이란 말이다.
제7식 말나식을 마나스식(Manas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칠감(七感), 전식(轉識),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말나식보다 더 심층의식으로서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이고, 이 제1식부터 제8식까지를 통틀어 생각 혹은 마음이라 한다.
인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두 형제에 의해 유식학(唯識學)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AD 4세기 후반경인데, 인도에서 유식학도들이 인간의 심리를 관찰해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것이 바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의 발견이다. 인류 역사에 특기할 만한 발견이었다. 서양에서 잠재의식의 발견은 그 1500년 뒤 프로이드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 제7식은 제6식보다 심층심리이다.
말나식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에서 설하고 있는 6식(六識) 사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의 체(體)이다. 다시 말하면 6식 가운데 의식(意識)이 광범위한 활동을 하므로 평상시의 의식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나 상식을 초월한 정신계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식학(唯識學)에서 제6식의 뿌리로 제7식 말나식(末那識)을 상정함으로써 해결했다.
그리고 유식학도들은 선정을 닦거나 기타 여러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정화해 갈 때, 일부 번뇌는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다시 말하면 그 정도면 마음이 완전히 정화돼 견성(見性)과 오도(悟道)의 경지에 충분히 도달했다고 할 만큼 수행의 위치에 올랐는데도 심층심리에서 미량의 번뇌가 아직도 남아있어서 지혜의 활동에 방해를 부리고 있음을 알아낸 것이다.
예를 들면 AD 4~5세기 인도의 유식학파 사람들은 내심(內心)을 관찰하는 내관(內觀)을 많이 하면서 부사의한 정신계를 깊숙이 관찰하며 선정을 닦았다.
그런데 그들이 그 선정에서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의식에서 나타나는 번뇌는 이미 정화됐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더욱 깊이 있는 심체에서 근원적인 번뇌가 있어서 그 경지를 해탈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하면 제6 의식이 평소의 의식생활을 이끌고 있는데, 이러한 평상시의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心體)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심체에서 나타나는 번뇌까지도 정화해야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제6식인 의식 외에 또 다른 심체를 제7 말나식과 제8 아뢰야식이라고 명명했다. 이와 같은 말나식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 심⋅의⋅식(心․意․識) 3식 사상을 대승적으로 해석했다. 즉,
․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해석하고,
․ 의(意)를 말나식으로 해석했으며,
․ 식(識)을 안. 이. 비. 설. 신. 의 등 6식(六識)으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나(manas)에 해당하는 의(意)를 육식 이외의 심체로 간주하고 아뢰야식과 더불어 별체로 선포했으며, 범부들의 심체는 8식으로 분류돼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상과 같이 말나식은 종래의 의식과는 또 다른 심체로서 특히 근본적인 번뇌를 야기하는 오염된 심식(心識)으로 단정했다. 그리고 제6식이 바로 이 제7식인 의(意)를 소의(所依)로 하고 있는 식이므로 그 이름을 ‘의식(意識)’이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6식 외에 전5식조차도 오염시키는 게 제7 말나식이다. 결국 제7 말나식은 6식 모두를 오염시키므로 6식에 대한 염오의(染汚依)가 되는 셈이다.
• 제7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다.
그리고 유식학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제7식의 작용이 활발하다고 했다. 인간의 자기 존재성을 자아(自我)라 하며, 자아를 인식하는 정신작용이 자아의식이고, 이 자아의식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제7식인 말나식이다.
‘나’라고 하는 강력한 아집의 본원인 것이다. 그래서 제7식 말나식을 자아의식이라 한다.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제7식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고 무관심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그러한 심리작용은 자기 자신의 자의식에 집착해서 생기는 것이기에 아집(我執)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어리석음은 바로 이 제7식의 자의식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있다’, ‘이것이 나다’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무명의 뿌리이다. 자기의 존재에 집착하는 인간은 ‘나’라는 사람, 내가 여기 있다, 나는 고귀한 존재로서 남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잘 났다, 오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자기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 제7식은 이기심이 있는 의식이다.
인간은 자아의식 때문에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험적 정보에 의존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전부인양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이기심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제7 말나식에 항상 상응해서 더럽고 끈질긴 4가지 버릇인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4번뇌가 일어난다고 본다.
• 제7식은 사량(思量)하는 작용을 한다.
식(識)이라는 말은 요별(了別) 또는 분별(分別)이라는 뜻 이외에 사량이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그리고 8식에는 모두 사량의 뜻이 포함돼 있다. 그런데 유독 말나식에만 사량의 뜻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은 말나식이 여타의 식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이다. 그래서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예컨대 누가 나를 때렸을 때 제5식인 신식(身識)이 촉감의 정보를 제6식으로 전달하면 제6식은 ‘아프다, 기분 나쁘다’라는 분별을 한다. 그러면 바로 제7식이 헤아려 활동을 한다. 누가 때렸지? 아니 저 자식이! 좋아 한판 붙어주지. 그리고는 코피가 터져라 주먹을 휘두르며 싸움을 하게 된다. 아니면 ‘아이고, 센 놈이구나, 도망가자.’ 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이런 결정을 제7식이 사량하는데, 제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런데 6식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가치중립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제7식인 말나식이다. 이 식은 사량식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제6식이 분별해 놓은 정보를 사량하고 판단해 구체적인 행위를 결정한다.
즉, 제6식이 분별한 좋다거나 싫다거나, 아니면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는 것에 대해 이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배척할 것인가, 아니면 무관심을 나타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제7식 말나식이다.
• 말나식은 그릇되게 인식, 사량하는 경우가 있다.
제7식 말나식부터의 인간 심리 관찰을 보면, 불교에서 ‘마음’이란 단어의 분석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려준다. 우리가 잠을 자며 꿈을 꿀 때의 마음, 대상이 없는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깊이 사유하는 마음, 정신착란이 일어나 제 정신이 아닐 때의 마음 등은 어느 깊이의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
서양의 심리학 개념으로는 무의식, 잠재의식 정도인데, 그것은 표현이 좀 모호하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어느 깊이까지 ‘침투’해 들어가느냐 하면, 대개의 경우 바로 이 제7식까지이다. 제7식을 ‘생각하고 헤아려 인식한다’는 사량식(思量識)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모든 판단과 행동은 바로 이 식을 통해 나오고 그 결과가 업이 돼 저장된다. 즉, 인간의 거의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삼는 최종적 마음이 제7식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요한 제7식이 항상 옳은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뜻이지만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도 포함돼있다.
즉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더러 그릇되게 인식하고,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국가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판단 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제7 말나식이 잘못 사량하기 때문이다.
③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의 인식활동을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 다섯 가지 감각기관(5근/五根=5관/五官)이 인식하는 ‘전5식(前五識)’과 정신부분인 제6식인 의식(意識)을 합해서 6식(六識)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의 뿌리가 되는 것이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이다.
말나식은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제6식보다 한 단계 깊은 마음의 세계이다.
그리고 제7식 말나식보다 더 심층에 숨어있는 잠재의식이 제8식 아뢰야식이다.
이 제8식 아뢰야식이 제7식 말나식의 뿌리(의지처)이다.
즉,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말나식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제8식 아뢰야식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한다는 점에서 정(淨)과 염(染), 선과 악 모두의 의지처가 된다.
마음이 정이나 염이 되고, 행동이 선이나 악이 되는 것은 그 근저에 아뢰야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뢰야식 자체가 오염(汚染)의 근원일 수도 있고, 청정(淸淨)의 근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아뢰야식(제8식, 心)은 자아의식(제7식, 意)과 대상의식(6識)을 총괄해서 마음의 흐름에서 주체가 되는 잠재의식이다. 6식의 활동은 인식된 것을 계속해서 보존할 수 있는 보존성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 어느 곳을 막론하고 항상 변하지 않고 그 존재가 이어져 갈 수 있는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를 따로 상정하고 있다.
즉, 업의 저장소로 윤회의 주체가 되는 그것이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이다.
모든 일어난 일이나 생각들을 전부 받아들여서 기록하고 저장하는 카메라의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의식이 아뢰야식이다.
여러 행위가 필름에 찍히듯이 업이 돼 아뢰야식에 전부 저장되게 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업장(業藏=업의 창고) 혹은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즉 6식을 통해서 얻어지는 모든 작용이 제7식 말나식을 통해 아뢰야식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바로 말나식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과거 행위의 온갖 잔상(殘像)들을 저장하는 훈습작용을 한다.
우리가 잠자다가 꾸는 꿈은 제6의식의 영역인데, 전생 또는 이전에 내가 지은 행위(업)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제8아뢰야식에 저장돼 있다가 꿈을 꿀 때 제6의식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장된 종자가 다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것을 ‘현행(現行)’이라 하는데, 현행은 종자를 낳고, 종자는 현행을 낳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행한 나쁜 생각과 행동은 나쁜 종자를 낳고, 선한 생각과 행동은 선한 종자를 낳는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다.
종자가 현행으로 나타날 때도 악한 종자는 반드시 악한 행동과 생각을 낳고, 선한 종자는 선한 행동과 생각을 낳는다.
여기에서 인과응보(因果應報), 업보(業報)사상이 나온다.
자기가 한 행동과 생각이 빠짐없이 아뢰야식 속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에 처하면 의식으로 살아나서 그것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계속되고 있으며, 저장된 종자는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전생에서 이생으로, 이생에서 내세로 계속 이어지면서 세세생생(世世生生) 윤회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의식 가운데 하나인 아뢰야식에는 모든 행위(업)가 발생 즉시 자동적으로 저장 입력된다.
행동하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저장되는 의식의 저장 탱크, 선악의 저축 뱅크다.
그리하여 6식의 심층에 아뢰야식이 있으며, 이 아뢰야식은 육체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내생으로 이관된다고 한다.
이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바로 업(業)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이란 전생의 아뢰야식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죽으면 종자(아뢰야식)는 다른 모태를 만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이 바로 윤회이다.
따라서 여기에 저장돼 있는 업에 의해 내생이 결정된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 혹은 실체라고 하며, 이것을 ‘아뢰야연기설(阿賴耶緣起說)’이라고 한다. 즉,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에 의해 일체 만법이 연기하는 것이 아뢰야연기설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의 심신을 오염된 상태에서 청정한 상태로 질적 변화를 시키는 전식득지(轉識得智)에 있다. 그것이 수행이며, 수행을 통해서 아뢰야식 속에 있는 악한 종자를 남김없이 소멸시켜야 완성된 인간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계속 반복해서 선정 수행을 함으로써 아뢰야식 속의 악한 종자를 다스려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헌데 원래는 8식까지만 있다고 했으나 인간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도 진화해 후대에 제9식인 아마라식(Amala)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 성립됐다.
④ 제9식 아마라식(阿摩羅識/Amala-vijnana)
제9식 아마라식을 암마라식(菴摩羅識) 혹은 아말라식(阿末羅識)이라 음역하기도 하고, 무구식(無垢識), 진여식(鎭如識), 혹은 백정식(白淨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제8식 아뢰야식 이외에 반야(般若)의 지혜가 곧 제9식 아마라식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 때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진제(眞諦, Paramartha, Gunarata 499∼569) 계통의 섭론종에서는 9식설을 주장했고, 당나라 현장(玄奘, 602-664) 계통의 법상종에서는 8식설을 주장했다. 섭론종의 9식설을 구(舊)유식이라 하고, 현장의 8식설을 신(新)유식이라 한다.
신라 유식의 대가 문아(文雅)=원측(圓測)은 9식설을 취하지 않고 8식설을 취함으로써 종래의 섭론종이 주장하는 제9 아마라식을 제8 아뢰야식의 정분(淨分)으로 이해했다.
제8식 아뢰야식까지로 모든 식을 마무리한다는 주장은 아뢰야식 가운에 염(染)⋅정(淨), 곧 오염된 식과 청정한 식이 같이 아울러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청정한 식 즉 백정식의 요소가 아뢰야식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새삼스레 무슨 필요로 9식설을 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9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오염된 식과 청청한 본래 식은 차이가 있으므로 마땅히 별도로 시설해야 한다고 한다. 즉, 유식론에서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8식 중,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에서 완전히 벗어나 깨끗해진 상태에 이른 것을 아마라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 나’를 의미하고,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는 종자(種子)의 역할을 한다고 하며, 인간의식의 가장 저변에 있다고 한다.
제6식의 저변에는 제7식인 말나식이 있고, 그 7식에서 보다 깊이 들어가면 제8식인 아뢰야식이 있으며, 그 아뢰야식의 근본으로 아마라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 아마라식이 이른바 불성(佛性)이어서 제9식이 곧 부처님의 심식이라고 한다.
현장(玄奘) 이후에 <해심밀경> 같은 경전에서 이러한 제8식에 가려 있는 무명이 없어진 깨끗한 식을 상정해서, 제8식 외에 감추어진 식을 제9식 아마라식이라고 했다. 제9식이라고 해서 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반야(般若)이고, 8식이 성불하면 제9 아마라식이 되며, 제9식 아마라식에 이르면 곧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아마라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8식은 모두 허망한 것이며, 제9식인 아마라식만이 진실한 것이라 한다. 즉, 제8식인 아뢰야식이 미망(迷妄)을 버림으로써 청정상태에 이른 것이 제9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9식 아마라식은 일반 중생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 서민 대중이나, 아니면 이제 겨우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들일진대 감히 부처님의 경지인 제9식이야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부처님 경지가 아닌 중생들이야 8식까지만 논의해도 되는 것이다.
2)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
유식 3성이란 유식불교에서 우리 마음의 존재 양식, 그리고 만유의 실상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이는 모든 존재의 양상을 마음속으로 환원해 3종으로 분류한 것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체만법은 3성을 떠나지 못한다. 그리고 3성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인데, 3성은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지 스스로 자성(自性)을 지닌 것이 아니어서 모두 무성(無性)이다.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계산해서 집착하므로 변계소집(遍計所執)하지만 보살은 3성이 있으나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므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쓴다.
이러한 3성은 유식사상의 중심개념이자 유가유식종이나 법상종 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근본교의 중의 하나이며,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①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parikalpita-svabhāva)
‘변계소집성’의 이름 가운데 ‘변계(遍計)’는 진리를 망각하고 이리저리 잘못 헤아려 억측하는 것으로 주관적인 자신의 감정과 욕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악시비(善惡是非)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져 마음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을 그냥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계산하면서 보고 듣고 하므로 잘못 보고 잘못 듣게 되기 때문에 변계한다. 그리고 소집(所執)은 변계에 의해 잘못 보거나 계산된 대상에 대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계(計)’는 계탁(計度, 헤아려 판단함)을 뜻하는데, 무명을 일으킨 무지를 말한다.
그리고 변계소집이란 사물을 잘못 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함이며, 모든 착각은 다 변계소집이다.
중생은 모두 무명(無明)과 탐(貪)⋅진(瞋)⋅치(痴)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진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바로 보지 못하고, 번뇌를 야기해 악업을 짓는다. 그리하여 온갖 분별로써 마음속에서 지어낸 허구적인 대상,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중생의 망상에만 있고 참다운 이치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 좋아하고 전쟁까지 한다. 즉, 본래 없는 것을 범부의 망상으로 갖가지 추측ㆍ억측을 통해 있다(有)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가 본래 없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일반 가정의 경우,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지만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이니까 예쁘고도 예쁘다. 헌데 이것도 정에 끌려, 자식에 집착해서 치우치게 본 것이다. 이처럼 망상으로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이 곧 변계소집성이다.
중생은 매사에 집착하는 이와 같은 변계소집성에 얽매여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을 뿌리 채 뽑아버리면 우리 집안이나 가정, 마을이나 나라, 온 세계나 우주에 평화가 올 것이다.
②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svabhāva)
‘의(依)’는 의지, 의탁의 뜻이고, 제법이 타(他)를 의지해 일어난다는 말로서 인연(因緣)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한 연기법을 유식에서는 바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이는 만물이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뜻으로, 사물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성소멸(生成消滅)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의타기성은 인연이기 때문에 무자성, 자성(自性)이 없다는 소리이고, 즉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나타내는 유식의 철학관이다.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이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한 송이 꽃이 피는 것도 꽃씨나 태양이나 기후, 공기와 물과 영양분이 뿌리와 줄기와 잎에 영향을 미쳐 생기는 일이다. 즉, 우주 천지의 모두가 거기에 관련돼 있다.
이와 같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인다라망(因陀羅網)처럼 온 세상이 연결돼 있다.
남을 의지해 존재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의타기성으로서 우주 만물 그 어디에도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고, 그 어느 것도 자기의 원인만으로는 나지 못하며, 반드시 다른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 사바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다 이처럼 인연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나’라는 존재, ‘너’라는 존재, 풀 한 포기조차도 모두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태양계(太陽系)나 우주의 뭣이든 다 인연 따라서 잠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현상계의 모든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이 인연이 돼 나타나는 이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고 공(空)이다. 사바세계에 있는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무상하고, 공(空)이고, 허망하다는 말이다.
마음 또한 의타기로 생긴다.
마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인 경계와의 인연으로 인해 일어난다.
상대에 의해서만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5근 6식을 지니고 있어도 경계인 상대가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5근 6식이 다 잠들어 꿈도 꾸지 않는다면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뜨고 깨어나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으로부터 부딪치게 되는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수도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또 사라지고 한다.
이런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중생들 삶의 보편적인 본래모습이다.
그런데 의타기성에서 분별심을 일으켜 왜곡시켜 보면 변계소집성이 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원성실성이 된다. 의타기성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체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뜻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자리로서 함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③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ṣpanna-svabhāva)
원성실성은 본래적인 것,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난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한다.
원만, 성취, 구경, 진실의 의미로서 이른바 불성(佛性), 법성(法性), 본성(本性), 진여(眞如), 실상(實相)의 경계가 원성실성이다.
즉, 원만성취가 이루어진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자리가 원성실성이고, 중도이며, 이것이 우리의 본래성품이다.
그러나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 진여, 부처와 여래가 보이지 않는다.
한 송이 꽃을 보더라도 꽃은 꽃대로 자연 그대로 피어나온 것이데, 그 꽃을 두고 중생은 곱다, 안 곱다, 예쁘다, 밉다 하고 마음을 일으킨다. 본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따라서 본래대로 본다면 진여불성이다. 이것이 바로 진여연기(眞如緣起)이고, 중도(中道)로서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다운 우주의 실상(實相)이다.
비유컨대, 밤에 뱀인 줄 알고 놀랐는데, 다음날 자세히 살펴보니 노끈임을 알게 됐다는 예화가 있다. 여기서 뱀인 줄 알고 놀란 것은 변계소집성의 상태이다. 그런데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게 된 것은 그 모습에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거기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해져서 그렇게 놀란 것이다. 이는 노끈과 마음이 인연화합한 것이므로 의타기성이다. 그러나 뱀이 아니라 노끈임을 알게 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3) 심왕(心王, citta)과 심소(心所, caitta)
우리 몸[색(色)]에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6근(六根)]이 있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대상[6경(6境)]에 부딪쳤을 때 여섯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데 이것을 식(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식이 일어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렇게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부파불교시대에 마음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고, 이 때 치밀하게 고찰된 교학의 전통을 훗날 이어받은 대승불교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식을 세분해서 8식으로 나누었다. 즉, 6식 외에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vijnana)과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을 설정해서 전체 8식으로 나누었다. 이 8식을 마음의 주체 혹은 마음의 체성(體性)이라 해서 심왕(心王, citta)이라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통상 마음이라 일컫는 식(識)에는 마음의 주체가 되는 심왕(心王)과 그에 종속돼 있는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 마음부수, caitta)라는 것이 있다. 마음의 체성을 심왕(心王)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체성이 마치 국왕과 같아서 명령만 내리면 그 신하들은 무조건 복종해서 함께 따라다녀야 하는 것에 비유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신하가 국왕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듯 마음의 체성에 의해 나타나는 작용도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심왕(心王)은 국왕에 비유할 수 있고, 심소(마음부수)는 신하가 국왕에 소속돼 수족처럼 역할을 하듯이 심왕의 소유물로서 심왕이 하라는 대로 심부름을 다하는 작용인이다.
따라서 ‘심소(心所)’란 심왕이 소유한다는 뜻에서 심소유법(心所有法)이라고 한 명칭을 줄인 이름이고, 일명 ‘마음부수(附隨)’라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따라다니는 마음이란 뜻이다.
심왕과는 전혀 관계없이 심소만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없으므로, 심소란 심왕에 소속된 다양한 심리활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작용한다는 말일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다. 광고를 보다가, ‘아! 이 게 그 유명한 로렉스 시계구나’ 하는 안식(眼識)이 일어나고[심왕], 동시에 좋다,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일어난다[심소]. 이때 눈은 안근(眼根)이고, 물건은 대상(色=境)이며, ‘로렉스 시계구나’하는 것은 심왕이고,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심소이다.
8가지 심왕은 혼자 움직이지 않고 신하를 대동하듯이 늘 심소를 대동해서 움직이는데, 그 심소엔 51가지가 있다.
심왕은 여덟 가지(8식)로 한정돼 있지만, 심소는 매우 다양하다. 유식학에서는 다양한 심소들을 크게 여섯 가지로 분류했다[심소의 6위(6位)].
① 변행심소(邊行心所) 5가지
② 별경심소(別境心所) 5가지
③ 번뇌심소(煩惱心所) 6가지
④ 수번뇌심소(隨煩惱心所) 20가지
⑤ 선심소(善心所) 11가지
⑥ 부정심소(不定心所) 4가지
이렇게 6위에 모두 51가지 심소가 있다. 학파에 따라선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이들 6위의 심소들은 마음작용에 나타나는 그 기능과 성질별로 구별한 것이다.
4)유식 4분설(四分說)
유식 4분(四分)이란 유식학에서 인식의 성립과정을 네 부분으로 나눈 것을 말하다.
심(心)과 심소(心所)의 작용을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의 네 가지로 나눈 것이다.
이러한 4분은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식(識) 자체가 대상을 변화해 인식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식은 주관과 객관을 변화시켜서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처음부터 4분으로 나눈 것은 아니다. 처음 4세기경의 무착(無着, Asanga)과 5세기 초의 난타(難陀, Nanda)는 2분설을 주장했고, 5세기 말에 진나(陳那, Dinnaga)는 3분설을 내세웠으며, 6세기에 이르러 호법(護法, Dharmapāla)이 4분설을 정립했다.
유식에서는 마음[식((識)] 속에는 반드시 두 갈래[2分]가 있다고 말한다. 의식 속의 주체적인 측면인 견분[능연(能緣)]과 그 대상의 측면인 상분[소연(所緣)]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러한 2분설은 유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심분설(心分說)이다.
① 견분(見分)과 상분(相分) - 유식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모든 식(識)은 주관과 객관으로 변화시켜서 인식한다고 한다. 즉, 이 말은 존재를 인식으로 환원한다는 것으로, 유식의 주요한 담론이다. 즉, 아래와 같다.
견분(見分, 能) - 의식 내의 주체
상분(相分, 所) - 의식 내의 객체
그리하여 마음 위에 나타난 모든 모습을 경상(境相)이라 하는데, 이를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유식에서는 인식대상을 상(相, nimita)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2분만을 생각하면, 우리의 식을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보는 자’가 바로 견분에 해당하고 ‘보이는 대상’이 상분에 해당한다. 유식에서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작용은 바로 이 상분과 견분의 대립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견분은 보는 인식하는 주관이고, 상분은 보여지는 대상, 인식대상인 객관을 말한다.
② 자증분(自證分) -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에 의한 자신의 인식 작용을 확인하는 부분.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면 저것이 무엇이라고 인식한 결과가 나오는데, 이걸 증명하는 부분이 자증분이다.
인식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을 인식한다고 할 때는 이미 주객이 분리돼 있는 상태이다. 의식이 주객이 분리되지 않는 것을 관했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되는 말이다. 자증분(自證分)이라는 것은 식장(識場)에서 견분과 상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앎을 말한다. 즉, 견분과 상분 둘 사이의 인식작용을 확인하는 작용이다.
③ 증자증분(證自證分) - 자증분을 다시 증지(證知)하는 인식작용, 자신의 인식 작용을 다시 확인하는 부분을 말한다. 자증분은 스스로 증명하는 부분, 우리 마음 자체를 말한다.
증자분에서 ‘자(自)’는 견분이고, ‘증(證)’은 증지의 뜻으로 자체 상 견분의 작용을 인지하는 것이고, 증자증분의 ‘증(證)’은 증지이고, ‘자증(自證)’은 자증분이므로 자증분의 작용을 거듭 인지하는 것이 증자증분이다.
자증분은 사물을 파악하는 자기의 인식작용(견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즉, 자증분은 견분과 상분 둘 사이의 인식작용을 확인하는 작용이지만 증자증분은 이 자증분을 재확인하는 부분이다.
견분과 상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자증분이 있는 만큼, 그 자증분의 작용을 다시 확인하는 또 하나의 마음작용이 요청된다. 그리하여 증자분을 확인하는 또 다른 마음작용이 증자증분이다.
한 예로 동트기 전 골목길에서 돌장승을 보았다 하자.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생긴 것이 꼭 사람 같아 보이니, 평소에 겁이 많은 사람은 이 돌장승을 보고 강도로 오인할 수 있겠고, 비교적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사람은 그대로 돌장승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4분설에서는 이 양자의 마음 자체를 자증분으로, 사람 같이 생긴 ‘그 무엇’인 인식 대상을 상분으로, 강도로 보거나 돌장승으로 보거나 하는 마음속의 인식 방식을 견분이라 부른다.
이것은 ‘강도다’ 또는 이것은 ‘돌장승이다’라고 하는 일차적 판단은 자증분, 견분, 상분,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비로소 성립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일차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일차적 판단을 대상으로 삼는 반성적 마음이 일어나며, 이러한 반성적 마음을 4분설에서는 증자증분이라 부른다. 즉 ‘아! 강도가 아니고 돌장승이구나’ 하고 결론을 내는 것이 증자증분이다.
5) 유식 4지(唯識四智)=불과사지(佛果四智)
유식학은 불교사상 중에서 특히 이론적인 학문의 성질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데, 유식학파 교리에 의하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이와 같은 수행의 과정을 거친 결과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란 중생의 업식(의식)이 맑아지면 지혜로 바뀐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서로 관계해 연기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범부의 8가지 의식이 변해 대원경지(大圓鏡智)⋅평등성지(平等性智)⋅묘관찰지(妙觀察智)⋅성소작지(成所作智)의 4지가 된다고 한다.
즉, 우리의 의식 가운데 가장 심층의식으로 불리는 제8식 아뢰야식이 정화돼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심층의식이 지혜로 바뀜으로써 나머지 의식도 지혜로 바뀌게 되는데, 제7식 말나식이 정화돼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뀐다. 편등성지란 자아의식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대아적(大我的) 지혜이다.
그리고 제6 의식이 정화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고, 이어서 안 ․ 이 ․ 비 ․ 설 ․ 신 등 전5식이 정화돼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뀌는데, 이는 실제 행동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모두 지혜롭다는 이성적 지혜를 의미한다.
① 대원경지(大圓鏡智)---대원경지는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무명(無明)을 모두 제거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지혜이다. 즉, 오염된 유루(有漏)의 제8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진여본성이 드러난 청정한 지혜란 말이다. 비추어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아뢰야식에서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② 평등성지(平等性智)---오염된 제7 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이다. 즉, 유루의 제7식을 전환해 얻는 무루(無漏)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여기서 평등한 성품이란 진여(眞如)를 말하며, 진여는 체성이 평등해 일체법에 두루 함으로 평등성이라 한다. 또한 지혜가 그것을 반연(攀緣)하므로 평등성지라고 한다. 말나식에서 자아집착 작용에 의한 모든 차별심이 소멸돼 일체를 평등하게 보며,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제도 활동을 하게 된다.
③ 묘관찰지(妙觀察智)---오염된 유루의 표면의식인 제6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무루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실상을 잘 관찰해 자유자재로 설법을 베풀어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는데 사용하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즉, 묘관찰지는 중생의 근기(根機)를 알아서 불가사의한 힘을 나타내고 훌륭하게 법을 설해 모든 의심을 끊게 한다.
④ 성소작지(成所作智)---불과(佛果)에 이르러 오염된 유루의 전5식(前五識)이 변혁해 이루는 무루의 지혜이다. 즉,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등의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는 지혜이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하므로 성소작지라고 한 것이다. 이 지혜는 모든 중생을 관찰하며 근기에 따라 이익을 주는 지혜로서, 이 지혜는 본심에서 발생하는 원력(願力)에 따라 이타적인 자비의 사업을 성취한다. 즉, 본원(本願)의 해야 할 일을 해 마치는 지혜이다.
6) 4선근(四善根)=4가행(四加行)
유식불교에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으로 수행 5위(修行五位)라 한다.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로서 보살 5위(菩薩5位), 수도 5위(修道5位)라고도 한다. 이 다섯 단계의 제2위인 가행위(加行位) 내에 다시 범부중생이 해탈,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네 단계가 있어 이를 사선근(四善根) 또는 사가행(四加行)이라고 한다.
4선근(四善根) 또는 4가행(四加行)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중생이 해탈,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처음 수행해야 할 네 단계를 말한다. 물론 이런 과정을 밟지 않고 매우 드물게 순서 없이 바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업장도 가볍고 총명해야 한다.
대개 사람의 경우, 본래 불성이 있다고 하나 나쁜 버릇에 물들어 있고, 업장(業障)을 많이 지어서 이것을 녹여 들어가려면 순서를 밟아가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순서를 밟아 올라가는 시초의 단계를 4선근(四善根)이라고 하는 것은 착한 뿌리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뜻이다.
4선근에는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世第一)의 네 단계이고, 이 네 단계의 수행과정을 거쳐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에 이르게 된다. 이런 과정을 알지 못하면 혼자 토굴 같은 곳에서 열심히 수행을 해서 어떤 경계를 만나면, 이 게 어떤 경지인지 몰라서 헤매게 된다. 다음은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에 밝힌 네 가지 수행단계의 요약이다.
① 난위(煖位) - 4선근 가운데 첫 번째 자리로, 불을 일으키기 위해 나무와 나무를 서로 문지르면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그 마찰열에 의해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과 같이, 번뇌를 없애는 불이 생기기 전에 접촉된 부분의 선근을 이에 비유해 난(煖)이라고 한다. 이 난위란 선정에 의해 사물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 범부의 지혜로써 4제(四諦)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로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② 정위(頂位) - 정(頂)이란 산꼭대기를 의미하는데, 범부의 지혜로는 최상의 단계이므로 정수리라 한다. 이 선근은 그래도 불확실한 선근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정(頂)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인위(忍位)에 들게 되며, 물러서면 난위(煖位)에 떨어지는 위치로서,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 같다 해서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범부의 지혜로써 사제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최상의 단계이다.
③ 인위(忍位) - 인위에서는 선근이 확정돼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수용하는 위치를 말한다. 즉, 범부의 지혜로 4제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서 이를 인정해 받아들이는 단계로서, 사제의 이(理)를 인가(忍可)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단계이다.
④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 아직도 번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는데, 유루법(有漏法)이 존재하는 세간 중에서 최상의 선근이 일어난 위치라는 말이다. 즉, 가장 뛰어난 범부의 지혜에 이른 단계로서 그 다음 단계가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이다.
7) 유식수행 5위(唯識修行五位)=수도 5위(修道五位)
유식에서 수행 5위(修行五位)란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하며, 수도 5위(修道5位)라고도 한다.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모든 인식활동으로 얻어진 번뇌를 정화하고, 이의 본성인 진여성(眞如性)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유식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8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識)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된 허망한 인식인 망식(妄識)을 대승적인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지혜를 증득하는 수행 5위에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가 있으며, 그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자량위(資糧位) - 자량위는 수행의 첫걸음으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를 말한다.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지혜와 복덕, 선근과 공덕을 쌓는 준비단계이다. 매우 초보적인 이 단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는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번뇌는 아직도 정화되지 않고, 허망한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나와 너’가 존재하고, 매사에 상대적이며, 의존적이라는 것을 머리로 깨달은 상태이다.
옛날에 먼 길을 가려면 노자(路資)와 식량(食糧)을 준비해 가듯이 자량위 수행은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자량으로 삼는다.
② 가행위(加行位) - 가행도(加行道) 또는 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하는데,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실질적인 유식수행(唯識修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일주일이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이 가행위(加行位)로서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고도 한다.
③ 통달위(通達位) -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도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즉, 보살 십지(十地)의 첫 단계인 환희지[초지(初地)]에 입문한 상태를 말한다.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로서 성인의 지위에 든 것이다.
통달위에서는 참으로 마음의 흐름을 명확히 보아 무아(無我)인 줄 알게 되고,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는데, 지전의 수행위가 자량위와 가행위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진여(眞如)의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
④ 수습위(修習位) - 수도위(修道位)라고도 하며, 통달위에서 아직도 정화하지 못한 부분을 더욱 정화하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이다. 그 동안 긴 기간에 걸쳐서 끊임없는 수행과 그로 인해 체득된 무분별지의 발현에 의해 아뢰야식 중에 있는 번뇌와 주객체의 잠재력을 함께 단절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그리하여 소지장(所知障)이 없어지고, 동시에 번뇌장(煩惱障)이 정화되면서 그 동안 장애를 받아 발휘되지 못했던 지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이는 점차 부처의 경지에 가까워져 가는 본격적인 수행 과정이다. 보살 십지 중 첫 단계인 초지의 둘째 단계이고, 삼도(三道)로 말하면 수도(修道)에 해당한다.
⑤ 구경위(究竟位) - 구경위는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의 4위의 수행을 통해 8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지위에 오른 과위이다. 즉, 구경위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의 보살들이 수많은 기간에 걸쳐서 수행을 한 결과 마침내 마음이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에 머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중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체적인 감각이나 의식 등의 주관적인 인식활동을 통해 얻은 모든 알음알이들이 완전히 제거돼 다시는 번뇌나 망상과 같은 삿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이상이 유식에서 말하는 5위의 수행단계로서, 중생은 현재 번뇌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정화하면 번뇌가 사리지고,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의 수행으로 보살도에 나아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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