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능(慧能) 육조단경(六祖壇經)
혜능(慧能) 육조단경(六祖壇經)
혜능(638~713) 중국스님, 선종의 제6조. 오조 홍인의 법을 받다. 남쪽에 가서 법을 폈기 때문에 이를 남종이라 함. 문하에는 회양, 행사 등 뛰어난 제자가 많다.
반야 (般若)
보리(菩提)와 반야(般若)의 성품은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지만, 마음이 어두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아 자성(自性)을 보아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의 불성(佛性)은 본래 차별이 없으나 다만 막히고(迷) 트임(悟)이 같지 않으므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있게 된 것이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 법을 말해 그대들에게 각기 지혜를 얻게 할 것이니 정신차려 잘 들어라.
세상 사람들이 입으로는 종일 반야(般若)를 말하면서도 자성 반야(自性般若)는 알지 못하니, 마치 먹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도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일이다. 입으로만 공(空)을 말한다면 만겁을 지나더라도 견성(見性)할 수 없다. 마하반야바라밀은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음으로 행할 것이요 입으로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허깨비와 같이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한다면 곧 마음과 입이 서로 응(應)하는 것이다. 본 성품이 부처요 성품을 떠나서는 부처가 없다. 마하(摩訶)란 크다는 뜻이니, 심량(心量)의 광대함이 허공과 같아 끝이 없다는 말이다. 모나거나 둥굴지도 않으며, 크거나 작지도 않다. 또한 푸르고 누루고 붉고 흰 빛깔과 상관없으며, 위 아래와 길고 짧음도 없고, 성내고 기뻐할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과 선하고 약함도 없다. 머리도 꼬리도 없는 것이어서, 모든 부처님의 세계가 다 허공과 같다. 사람들의 미묘한 성품이 본래 공(空)해서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므로, 자성(自性)의 진공(眞空)도 그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공에 걸리지 말아라. 무엇보다 공에 걸리지 말 것이니, 만약 아무 생각도 없이 멍청히 앉아만 있으면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질 것이다. 허공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해와 달과 별,산과 물과 풀과 나무, 악인 선인 천당 지옥, 그리고 큰 바다나 수미산도 다 이 허공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성품이 공한 것도 이와 같다. 자성이 모든 법을 포함하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만법은 사람들의 성품 속에 있다. 만약 남의 선악을 보더라도 취하고 버리는 분별이 없이 거기 물들지 않으면 마음이 허공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입으로만 말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으로 행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마음을 비우고 아무 생각도 없이 고요히 앉아 스스로 크다고 일컫는다면, 이런 사람과는 더불어 말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그는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넓고 커서 법계(法界)에 두루해 있다. 쓰면 아주 분명하고, 응용에 따라 일체를 알아서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곧 일체이며, 가고 옴에 자유로와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이것이 곧 반야다. 모든 반야지(般若智)가 다 자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마음을 쓸 때 잘못이 없으면 이것이 진성(眞性)의 자용(自用)이다. 하나가 참될 때 모든 것이 참된 것이다. 반야는 지혜이니 언제 어디에서나 생각생각이 어리석지 않아, 항상 지혜롭게 행동하면 이것이 곧 반야행(般若行)이다. 한 생각 어리석으면 반야가 끊어지고,한 생각 슬기로우면 반야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대개 우치해서 반야를 보지 못하고 입으로만 곧잘 말하는데 마음은 노상 어리석다. 반야는 형상이 없으니 슬기로운 마음이 곧 그것이다. 바라밀은 피안에 이른다는 말로서 생멸(生滅)을 떠난다는 뜻이다. 대상에 집착하면 생멸이 일어나 물에 있는 물결과 같으니 이것이 차안(此岸)이요, 대상에 걸림이 없으면 생멸이 없어 물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피안(彼岸)이다. 그러므로 범부가 곧 부처이며, 번뇌가 곧 보리(菩提)다. 앞 생각이 어두웠을 때는 범부였지만, 뒷 생각이 깨달으면 곧 부처다. 앞생각이 대상에 집착했을 때는 번뇌이지만, 뒷 생각이 대상을 떠나면 곧 보리인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은 가장 높고 가장 귀해 으뜸가는 경지이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또한 머무는 것도 아니지만,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여기서 나오신 것이다.
일행삼매
일행삼매(一行三昧)란 가고 멈추고 앉고 눕고 간에 항상 곧은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 말씀하기를 '곧은 마음이 도량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淨土)다'라고 한 것이다. 마음으로는 아첨하고 굽은 짓을 하면서 입으로는 곧은 체하거나, 입으로는 일행삼매를 말하면서 마음은 곧지 않게 하지 말라. 곧은 마음으로 행하여 모든 것에 걸리지 말라. 어리석은 사람은 법상(法相)에 집착하여 일행삼매를 가리켜 말하기를 , 가만히 앉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무정(無情)과 같아서 오히려 도(道)를 막는 인연이 된다. 도는 반드시 통하여 흐르게 해야 하는데 어찌 도리어 막히게 할 것인가. 마음이 무엇에고 걸리지 않으면 도가 곧 통해 흐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무엇에 걸린다면 이것은 스스로 얽히는 일이다.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저 사리풋타가 숲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유마힐에게 꾸중을 들은 일과 같을 것이다. *¹어떤 사람은 '앉아서 고요히 마음을 관해 움직이지않고 일어나지 않게 하면 이것이 공(功)이 된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어리석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집착해 전도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이와 같은 상교(相敎)는 크게 그릇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념 무상 무주
본래 바른 가르침에는 돈(頓)과 점(漸)이 없다. 사람의 바탕에 총명하고 우둔함이 있어 우둔한 사람은 차츰 닦아가고 총명한 사람은 단박 깨닫는다. 그러나 스스로 본심을 알고 본성(本性)을 보면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헛이름(假名)을 붙인 것이다. 내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무주(無住)로 본(本)을 삼았다. 무상이란 상(相)에서 상을 떠남이요, 무념이란 염(念)에서 염이 없음이요, 무주란 사람의 본성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밉거나 원수거나 간에, 서로 말을 주고 받거나 좋지 못한 수작을 걸어 오더라도 모두 헛것으로 돌려, 대들거나 해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지난 경계를 생각하지 말라. 만약 지난 생각과 지금 생각과 뒷 생각이 잇따라 끊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얽매임이다. 모든 존재에 생각이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무주(無住)로써 근본을 삼음이다. 밖으로 모든 상(相)을 떠나면 이것이 무상(無相)이니, 상에서 떠나기만 하면 곧 법체(法體)가 청정하므로 무상으로 체를 삼은 것이다. 모든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無念)이니, 제 생각에 항상 모든 대상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아주 없애버리면, 한 생각이 끊어지면서 곧 죽어 딴 곳에 태어나니, 이것은 큰 착오이므로 배우는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만약 법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기만 잘못 되지 않고 남까지도 잘못되게 한다. 또 자기가 어두워 보지 못하면서 부처님말씀을 비방까지 한다. 그러므로 무념을 세워 종(宗)을 삼은 것이다. 무념으로 종을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어둔 사람이 입으로만 견성했다 하면서 대상에 생각을 두고, 생각 위에 문득 삿된 소견을 일으켜 온갖 지저분한 망상을 낸다. 자성(自性)은 본래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만약 얻은 것이 있다 하여 망녕되이 화복(禍福)을 말하면 이것이 곧 지저분한 삿된 소견이다.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은 것이다.
그러면 무(無)란 무엇을 없앰이며, 염(念)이란 무엇을 생각함인가. 무란 두 가지 모양이 없고 모든 쓸데 없는 망상이 없는 것이며, 염이란 진여(眞如)의 본성품을 생각함이다. 진여란 곧 염의 본체이며 염은 진여의 작용이므로 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고,눈 귀 코 혀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가 없다면 눈과 귀와 소리와 물질이 곧 없어질 것이다. 진여의 자성에서 생각을 일으키면 육근(六根)이 비록보고 듣고 깨닫고 알더라도, 모든 대상에 물들지 않고 참 성품이 항상 자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이르기를 '모든 법상(法相)을 잘 분별하되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 것이다.
좌선과 선정
좌선(坐禪)은 원래 마음에 집착함도 아니고 청정에 집착함도 아니며 또한 움직이지 않음도 아니다. 만약마음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마음이 본래 망녕된 것이므로 알고 보면 환(幻)과 같아 잡을 데가 없다. 청정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인데 망념(妄念) 때문에 진여가 파묻힌 것이니, 망념만 없으면 성품이 저절로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일으켜 청정하게 한다 함은 도리어 청정한 망념을 내는 것이 된다. 망념이란 처소가 없으니 집착하는 것이 곧 망념이며, 청정은 형상이 없으니 조촐한 티를 내어 공부한다 함은 도리어 조촐한 데 얽매어 제 본성을 막는 일이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음을 닦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남의 시비와 선악과 허물을 보지 말 것이니, 이것이 곧 자성의 움직이지 않음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몸은 비록 움직이지 않으나 입을 열면 곧 남의 시비 장단과 좋고 나쁨을 말하게 되니 이것은 도를 등지는 짓이다. 마음을 고집하거나 청정을 고집하면 곧 도에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좌선이라 하는가. 이 법문 중에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밖으로 일체 선악의 환경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좌(坐)라 하고, 안으로 자성을 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한다.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상(相)을 떠남이 선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다 .만약 밖으로 상에 걸리면 안으로 마음이 어지럽고, 밖으로 상을 떠나면 마음도 따라서 어지럽지 않다. 본 성품은 저절로 청정하며 스스로 안정한 것이지만, 대상만을 보고서 대상을 생각하므로 곧 어지럽게 된다. 만약 모든 대상을 보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참된 정(定)이다. 밖으로 상을 떠나면 곧 선(禪)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定)이니, 외선(外禪)과 내정(內定) 이것이 선정이다. 보살계경(菩薩戒經)에 이르기를 '내 본성품이 본래 청정하다' 하였으니, 생각생각에 본성의 청정함을 보아, 스스로 닦고 행하여 스스로 불도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오분 법신향(五分法身香)
이 일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이니, 어느 때든지 순간순간 그 마음을 밝혀 스스로 닦고 스스로 행하면 자기의 법신을 보고 자기 마음의 부처를 보아 스스로 건지고 조심할 것이다. 먼저 자성의 오분 법신향(五分法身香)을 전할까 한다. 첫째는 계향(戒香)이니, 자기 마음속에 그릇됨이 없고 악독함이 없고 질투와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정향(定香)이니, 여러 가지 선악의 환경을 보더라도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다. 세째는 혜향(慧香)이니, 자기마음에 거리낌이 없어 항상 지혜로써 제 성품을 비춰보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할지라도 자랑스런 마음이 없으며, 손위를 공경하고 손아래를 생각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를 가엾이 여김이다. 네째는 해탈향(解脫香)이니, 마음에 반연함이 없어 선도 생각하지 않고,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유자재하여 거리낌 없음이다. 다섯째는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마음은 선과 악에 거리낌 없더라도 공(空)에 빠져 고요함만을 지키면 옳지 않다. 그러므로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 자기 본심을 알고 부처의 이치를 통달하여 빛에 화(和)하고 사물에 대할지라도 나와 남이 없어 뒤바뀜이 없는 지혜의 참 성품에 이른다. 이와 같은 향은 저마다 자기 안에서 피울 것이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다.
무상참회
이제 너희에게 무상 참회(無相懺悔)를 주어 삼세의 죄과를 없애고 몸과 말과 생각의 세 가지 업을 청정하게 할 것이니 나를 따라 이와 같이 부르라.
'제가 순간순간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데에 빠지지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 온 나쁜 짓과 미련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데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교만하고 진실치 못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가 순간순간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게 하소서. 이전부터 지어온 나쁜 짓과 질투한 죄를 모두 참회하오니 단번에 소멸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이것이 무상 참회다. 참회란 무엇인가.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한 죄를 다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지나간 허물을 뉘우칠 줄 알면서도 앞으로 있을 허물은 조심할 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니, 이것을 어찌 참회라 할 것인가.
사홍서원
이미 참회하였으니 이제는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해야 한다. '내 마음의 중생이 끝없어도 건지리이다. 내 마음의 번뇌가 다함없어도 끊으리이다. 내 마음의 법문이 한없어도 배우리이다. 내 마음의 불도(佛道) 위없어도 이루리이다.' 중생을 건진다 함은 내가 그대들을 건진다는 것과같은 뜻이 아니다. 마음속의 중생이란 삿되고 어두운 생각, 망녕되고 진실하지 못한 생각, 착하지 못한 생각, 질투하는 생각, 악독한 생각, 이와 같은 생각이 모두 중생인 것이다. 저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로 건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기마음을 스스로 건질 수 있을까. 자기 마음속의 그릇된 소견과 번뇌와 무지를 바른 견해로써 건진다. 바른 견해는 지혜로 하여금 어리석음을 깨뜨리고 스스로 건지게 한다. 그릇됨이 오면 올바름으로, 미혹(迷惑)이 오면 깨달음으로, 어리석음이 오면 지혜로, 악이 오면 선으로 건지는 이것이 참으로 건짐이다. 그리고 번뇌를 끊는다 함은 자성의 지혜로 허망한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고, 법문을 배운다 함은 스스로 성품을 보아 항상 바른 법을 행하는 것이다. 또 불도를 이룬다 함은 항상 마음을 낮추어 참되고 바르게 행동하며, 미혹도 버리고 깨달음에서도 떠나 항상 지혜를 내며, 참된 것도 없애고 망녕된 것도 없애어, 바로 불성(佛性)을 보면 곧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삼귀의
네 가지 큰 서원을 발한 이는 불 법 승의 자성 삼보(自性三寶)에 귀의 하여라. 불이란 깨달음이고 법이란 올바름이며 승이란 청정함이다.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그릇되고 어두운 것을 내지 않고, 욕심을 적게하고 만족하게 생각하여 재물과 색을 떠나면 이것이 양족존(兩足尊)이다. 마음이 올바름에 귀의하여 그릇된 소견이 없으면 남과 나를 따지는 일도, 탐욕과 애욕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이욕존(離欲尊)이다.
그리고 마음이 청정에 귀의하면 온갖 지저분한 것과 애욕에 물들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중중존(衆中尊)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인데,범부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밤낮으로 삼귀계(三歸戒)를 받는다고 한다. 만약 부처에게 귀의한다면 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를 보지 못한다면 무엇을 의지해 돌아갈 것인가. 그러니 귀의(歸依)한다는 말이 우습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신의 부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지할 곳이 없다. 이제 스스로 깨달았다면 저마다 제 마음의 삼보에 귀의하여라. 안으로 심성(心性)을 고르게 하고밖으로 남을 공경하는 것이 스스로 귀의함이다.
마음이 밝아야 경을 알 수 있다
법달(法達)은 홍주(洪州) 사람인데, 일곱 살에 출가하여 항상 법화경(法華經)을 읽었다. 어느 날 조사(祖師)에게 와서 절하는데 머리가 땅에 닿지 않았다. 조사가 꾸짖어 말했다. "그렇게 머리 숙이기가 싫으면 무엇하러 절을 하느냐. 네 마음속에 필시 무엇이 하나 들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을 익혀 왔느냐?"법달이 대답했다. "법화경을 외우기 이미 삼천 독에 이르렀습니다.""네가 설사 만 독을 하여 경 뜻을 통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허물이 된다는 걸 모르는구나. 내 게송을 들어보아라.
절이란 본래 아만을 꺾자는 것 어째서 머리가 땅에 닿지 않는가 〈나〉라는 게 있으면 허물이 생기고 제 공덕 잊으면 복이 한량없는 것을."조사가 다시 말했다. "네 이름이 무어냐?""법달(法達)이라 합니다.""네 이름이 법다이라니 어떻게 그리 일찌기 법을 통달했느냐?
네 이제 이름을 법달이라 하니 그동안 얼마나 힘써 외웠나 허투루 외는 것은 소리만 돌 뿐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된다.
네게 이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너를 위해 말해 주겠다 부처는 말이 없는 것임을 믿으면 저절로 입에서 연꽃이 피리라."법달이 게송을 듣고 뉘우쳐 사과를 했다. "앞으로는 반드시 모든 것을 공경하겠습니다. 제가법화경을 외우긴 했으나 경 뜻을 알지 못해 항상 의심이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크신 지혜로 경 뜻을 말씀해주십시오.""법달이 법은 통달하였어도 네 마음은 모르는구나.
경에는 본래 의심이 없는데 네 마음이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다. 너는 이 경의 주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제가 어둡고 둔해 다만 겉으로 글자나 읽었을 뿐이니 어찌 그 뜻을 알겠습니까.""그러면 나는 글자를 알지 못하니 어디 그 경을 한 번 읽어 보아라. 듣고서 풀이해 주겠다."법달이 소리 높이 읽어 가다가 비유품에 이르자, 조사는 그만 그치라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경은 본래 인연 출세(因緣出世)로 주제를 삼은 것이니, 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했을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경에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이 한 가지 큰 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 하였으니, 큰 인연이란 부처님의 지견(知見)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어두워 상(相)에 걸리고,안으로 어두워 공(空)에 떨어지니, 만약 상에서 상을 떠나고 공에서 공을 떠나면, 안과 밖이 함께 어둡지않을 것이다. 이 법을 깨달으면 한 생각에 마음이 열리리니 이것이 부처님 지견을 얻는 길이다.
너는 경 뜻을 잘못 알아 가지고 그것은 부처님 지견을 말한 것이지 우리들 분수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말아라. 이것은 곧 부처님을 헐뜯고 경전을 비방하는 일이다. 너는 이제 부처님 지견이라 네 자신의 마음이요,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네가 그동안 쓴 것을 대단하게 여겨 그것으로 자랑삼는다면 얼룩소(犁牛)가 꼬리를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그러면 뜻만 알면 수고스럽게 외우지 않아도 좋습니까?""경에 어찌 허물이 있다고 네가 외우는 걸 못하게 하겠느냐. 다만 막히고 트임이 사람에 달리고 더하고 덜함이 자신에게 달렸으니, 입으로 외우고 실제로 행동하면 이것이 곧 경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외워도 실행하지 못하면 이것은 오히려 경에 읽히는 것이다." 법달은 이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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