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六祖壇經)의 무주․무념․무상
중국의 선종은 신수(神秀, ?-706)의 북종(北宗)과 혜능(慧能, 638-713)의 남종(南宗)으로 나누어지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혜능의 육조단경328)은 혜능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것은 사실 혜능의 저술이라기보다는 남종선(南宗禪)의 일반적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따라서육조단경이 혜능의 사상을 나타낸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남종선의 사상을 대표하는 데는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서는 육조단경의 내용 가운데 무주․무념․무상을 말한 대목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329)
육조단경에서는 무념(無念)이 종(宗)이고, 무상(無相)이 바탕[體]이며, 무주(無住)가 근본[本]이다.330) 이는 무념․무상․무주가 육조단경의 내용 속에서도 비중 있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풀어보자. 무주(無住)를 먼저 살펴본다. 세간의 선(善)과 악(惡), 좋은 것[好]과 보기 싫은 것[醜], 내지 원수와 친한 사람에 대해서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헐뜯고 싸울 때, 이러한 것을 공(空)이라고 생각해서 은혜를 갚거나 해칠 것을 생각하지 말고, 생각 생각마다 앞의 경계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앞생각, 현재의 생각, 뒷생각이 생각 생각마다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면 얽매이는 것이요, 모든 대상세계에 대해 생각 생각마다 머무는 것이 없으면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무주(無住)를 근본[本]으로 하는 것이다. 무념(無念)은 모든 대상에 대해 마음이 번뇌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자기 생각에서 항상 모든 분별의 경계에서 벗어나고, 분별의 경계에 대해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무상(無相)은 바깥으로 모든 상(相)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상(相)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당체(當體)는 청정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무상(無相)을 바탕[體]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에 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세간의 선과 악, 좋은 것과 추한 것 내지 원수와 친한 사람에 대해서 말로 접촉하면서 공격하면서 싸울 때, [이러한 것을] 공(空)이라고 생각하고 해(害)를 당한 것에 복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생각 생각 가운데 앞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앞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과 뒤의 생각이 생각 생각마다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묶이는 것[繫縛]이라고 이름하고, 모든 대상에 대해 생각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이 묶임이 없는 것[無縛]이다. 이것이 머무르지 않음[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바깥으로 모든 모습을 벗어나는 것을 무상(無相)이라고 이름한다. 모습을 벗어나면 곧 법의 근본[法體]이 청정해진다. 이것이 무상으로 바탕[體]을 삼는다는 것이다. 선지식이여! 모든 경계에 대해서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이 무념(無念)이다. 자신의 생각에서 항상 모든 경계에서 벗어난다면 경계에서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331)
그리고 육조단경에서는 무념(無念)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무념’에서 ‘무(無)’자는 어떤 일도 없다는 것이며, ‘염(念)’자는 어떤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무(無)’자는 두 가지가 없는[無二] 모습이니 모든 번뇌의 마음이 없는 것이고, ‘염(念)’자는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하는 것인데, 여기서 진여는 염(念)의 체(體)요 염(念)은 진여의 용(用)이다. 따라서 진여의 자성(自性)이 염(念)을 일으키는 것이지, 눈, 귀, 코, 혀가 염(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한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무(無)는 어떤 일이 없다는 것이며, 염(念)은 어떤 물건을 염한다는 것인가? 무(無)라는 것은 두 가지 모습[二相]이 없다는 것이니 모든 번뇌[塵勞]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염(念)이란 것은 진여의 본성(本性)을 염(念)한다는 것이니 진여가 염(念)의 체(體)이고, 염(念)은 진여의 용(用)이다. 진여의 자성(自性)에서 염(念)을 일으키는 것이지, 안(眼)․이(耳)․비(鼻)․설(舌)이 염(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32)
이상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무주(無住)는 집착의 대상에 대해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무념(無念)은 모든 대상에 대해 번뇌에 빠지지 않는 것인데, 더 자세히 말하면 무(無)는 번뇌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고, 염(念)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염하는 것이며, 무상(無相)은 상(相)에 집착하지 않아 진리의 당체(當體)가 청정하게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을 천태의 일심삼관과 비교해 본다. 천태는 공(空), 가(假), 중(中)을 말하였는데, ‘공(空)’은 집착에 대한 부정이고, ‘가(假)’는 집착의 대상이 아닌 정관(正觀)의 대상을 인정한 것이고, ‘중(中)’은 공(空)을 통해서 가(假)가 성립함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무주(無住)는 공(空)의 의미이고, 무념(無念)은 가(假)의 의미이다. ‘무념’에서 ‘무’는 두 가지 모습이 없다는 것 곧 번뇌가 없다는 것이며, ‘염’은 진여본성을 염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공(空)을 통해서 집착의 대상이 아닌 정관(正觀)의 대상인 진여본성, 곧 가(假)로 나가는 것이다. 무상(無相)은 중(中)의 의미이다. 무상(無相)은 상(相)에 집착하지 않아서 진리의 당체(當體)가 청정하게 드러난다는 것인데, 여기서 ‘상’에 집착하지 않음은 공(空)이고, ‘진리의 당체(當體)’가 청정하게 드러남은 가(假)이므로 공(空)이면서 가(假)를 포용하는 것은 바로 중도의 맥락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육조단경의 무주․무념․무상 | 천태의 일심삼관 |
무주(無住): 집착의 대상에 대해 마음을 비우는 것 | 공(空): 집착을 부정한다. |
무념(無念): 번뇌가 없이 진여본성을 염하는 것 | 가(假): 정관의 대상은 인정한다. |
무상(無相): 상(相)에 집착하지 않아서 진리의 당체(當體)가 청정하게 드러나는 것 | 중(中): 공(空)과 가(假)를 포용하는 것 |
Ⅶ. 결론
이 논문에서는 중국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현세간주의라고 보고, 이 점이 중국불교 사상가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검토하고자 하였다. 우선, 논의를 전개해 가는 중심을 천태지의의 일심삼관에 두었다. 일심삼관에는 중국불교의 현세간주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이러한 점이 천태지의에서만이 아니고 삼론종의 길장, 정영사 혜원, 화엄종의 법장, 선종의 육조단경에도 모습을 바꾼 채 나타난다는 것이 이 논문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점이다.
천태의 일심삼관은 공(空)․가(假)․중(中)이 하나라는 것이다. 공(空)에 초점을 맞추면 공 속에 가(假)와 중(中)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공(空)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세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다만 집착의 대상으로 현실세계를 인정할 수는 없으므로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로 가유(假有)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점에서 천태의 일심삼관은 중국불교의 현세간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도불교처럼 피안(彼岸)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의 세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공(空)을 통해 파악된 현실세계는 가(假)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세계를 가(假)로 파악한다면 혹시라도 집착의 대상이 될 가능성도 존재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앞의 공(空)도 부정하고 가(假)도 부정한다는 비공비가(非空非假)의 중도(中道)가 제시된다. 이것을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공(空)도 인정하면서도 가(假)도 수용한다는 긍정적인 논의로도 전개된다. 공(空)과 가(假)를 부정한 중도의 세계에서는 공(空)의 의미도 온전히 드러나고 가(假)의 의미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태의 일심삼관의 의미가 다른 중국불교사상가에서도 나타난다. 삼론종의 길장이 주장한 이제합명중도(二諦合明中道)에서 공(空)․가(假)․중(中)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속제중도는 현상계의 존재방식을 중도의 관점에서 접근하려는 것이고, 진제중도는 진실한 세계를 중도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며, ‘이제합명중도’는 속제중도와 진제중도를 아울러서 중도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 ‘이제합명중도’를 파악하는 세 가지 관점[三種方言]이 있다. 제1방언(第一方言)은 집착을 깨뜨리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므로 공(空)과 상응하고, 제2방언(第二方言)은 집착을 깨뜨리지만 다시 자신의 주장을 세우고 있으므로 이는 가(假)와 의미가 통한다. 이는 공(空)의 부정을 통한 현실이론의 긍정이라는 점에서는 일심삼관의 가(假)와 그 의미가 일치한다. 제3방언(第三方言)은 평도문(平道門)에 입각해서 중도를 밝히는 것인데, 이는 일심삼관의 중(中)과 의미가 통한다. 제3방언은 제1방언과 제2방언의 의미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다. 제1방언에서 집착을 깨뜨리는 데 주안점을 둔 것과 제2방언에서 집착을 깨뜨린 다음에 자신의 이론을 세우는 데 강조점을 둔 것을 포용하는 것이 제3방언이다. 다시 말하자면, 집착을 깨뜨리고 자신의 이론을 세워서 현실을 보면 그대로 진실한 세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천태 일심삼관의 공(空)이면서 가(假)라는 중도(中道)의 포괄적․긍정적인 측면을 부각한 것이다.
정영사 혜원이 이해하고 있는 공(空)사상에서도 일심삼관의 의미가 등장한다. 정영사 혜원은 진여법에 3가지 측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공(空)․유(有)․비유비무(非有非無)이다. 진여는 모든 모습과 성품을 벗어났기 때문에 공(空)이고, 또한 진여에는 모든 불법(佛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불공(不空: 有)이며, 진여법은 유(有)와 무(無)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비유비무(非有非無)라는 것이다. ‘비유비무’는 유(有)도 부정하고 무(無)도 비판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다시 유(有)와 무(無)를 다시 수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현실의 존재가 결코 집착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지가 되고, 그 점을 유(有)와 무(無)가 한 몸이라고 정영사 혜원은 말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정영사 혜원도 천태의 일심삼관의 의미를 또 다른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화엄종 법장이 말하는 십현연기(十玄緣起)에도 천태 일심삼관의 의미가 발견된다. 십현연기는 10가지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을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십현연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일즉일체(一卽一切)에 대한 설명이고, 둘째 이러한 일즉일체를 여러 방면에서 확장해서 설명한 것이며(본론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음), 셋째, 회통의 정신을 말하는 항목이고, 넷째 인간의 한 마음에 모든 공덕이 간직되어 있다는 지적이며, 다섯째화엄경을 통해 십현연기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십현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즉일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과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으로 압축된다. ‘제법상즉자재문’은 공의 세계를 일즉일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고, ‘일다상용부동문’은 공(空)하지만 현실세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법상즉자재문은 일심삼관의 공(空)과 연결되고, 일다상용부동문은 일심삼관의 가(假)와 상응하는 것이다. 십현연기에서 일심삼관의 중(中)에 대한 명확한 지적은 없지만, 공(空)과 가(假)를 말한 것을 합쳐놓으면 그것이 중(中)의 의미가 되므로, 십현연기에서 말한 것이 일심삼관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선종의 육조단경에서는 무주(無住)․무념(無念)․무상(無相)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도 천태 일심삼관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무주’는 근본[本]이고, ‘무념’은 종(宗)이며, ‘무상’은 바탕[體]이다. ‘무주’는 집착의 대상에 대해 마음을 비우는 것이므로 공(空)의 의미이고, ‘무념’은 번뇌의 마음이 없어서 진여(眞如)의 본성을 염하는 것이므로 이는 공(空)을 통해서 가(假)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다. 무상은 상(相)에 집착하지 않아서 진리의 당체(當體)가 청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相)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空)이고, 진리의 당체가 청정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가(假)이므로 무상은 공(空)과 가(假)를 합쳐놓은 것이고, 이것은 공(空)이면서 가(假)라는 말이므로 중(中)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육조단경의 무주․무념․무상은 일심삼관의 다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천태의 일심삼관이 삼론
종의 길장, 정영사 혜원, 화엄종의 법장, 선종의 육조단경에도 표현을 달리 한 채 나타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여기서도 주목할 점이 있다. 천태의 일심삼관에서 중(中)은 공(空)과 가(假)를 부정하는 측면과 공(空)이면서 가(假)라는 포괄적․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는데, 삼론종의 길장과 정영사 혜원과 선종의 육조단경에서는 포괄적․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고, 화엄종의 법장은 십현연기에서 중(中)을 명확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굳이 해석하자면 공(空)이면서 가(假)라는 포괄적․긍정적인 중(中)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천태 일심삼관의 설명 가운데 중(中)이 공(空)과 가(假)를 부정하는 측면보다는 공(空)이면서 가(假)라는 포괄적․긍정적인 측면이 중국불교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이런 측면이 중국불교의 현세간주의 요소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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