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는 대승 불교로서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을 강조한다. 보리심의 원인으로는 대비심(大悲心)을 들 수 있다. 대비심이란 일체 중생이 고통을 여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대비심을 원인으로 하여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고자 부처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보리심을 갖게 되며, 이러한 보리심(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유정(有情)을 보리살타, 즉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한다.
《수습차제》에 따르면, 일체 중생을 자신의 외아들처럼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한 명도 빠짐 없이 고통에서 구제하려는 대비심(大悲心)과, 대비심을 바탕으로 삼아승지겁 동안 위 없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견고한 보리심이 밤낮 없이 저절로 일어날 때 처음 대승에 입문하는 보리심이 생겼다고 본다.[3] 그 밖에도 《현관장엄론》에서는 보살의 수준에 따라 22 종류의 보리심이 있다고 설하였다. 이처럼 보리심은 대승의 입문인 동시에 핵심 중의 핵심이다.
보리심의 개발은 티베트 불교 수행 단계 중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작은 시냇물을 마실 힘도 없다면
큰 바다의 물을 어떻게 들이킬 수 있겠는가.
이승二乘(성문승과 연각승)도 능숙하지 못하다면
대승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지장십륜경》(법장 譯)
벤첸라마 롭상예세, 《보리도차제의 마르티 일체지로 나아가는 지름길》(법장 譯)
보리심의 동기 발현과 보리심의 실천(현교의 육바라밀, 사섭법과 밀교의 수행 등)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인 보리도차제(람림)의 삼사도(三士道) 중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상사도 수행에 앞서 예비수행(가르침을 듣고 설하는 법, 선지식을 섬기는 법 등), 하사도(下士道, 이번 생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다음 생의 행복을 위해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멀리함), 중사도(中士道,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목적으로 계정혜戒定慧를 수행함) 등의 기반이 갖춰진 후 상사도에 입문하게 된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 단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수행 체계 참조.
"생각하는 것은 남을 돕고자 생각 하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 《보리도차제광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장애를 없애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모든 성취를 가져오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아름다운 용모, 무병장수, 많은 중생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보리심입니다.
중생의 가난함과 괴로움, 슬픔을 없애는 것은 보리심입니다.
수행을 한다면 보리심 수행의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보리심이 일어나게 되면 악업을 정화하고 모든 복덕자량을 쌓는 것입니다.
보리심의 관한 법을 여러분들이 듣고 접한 것은 굉장히 큰 기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최대로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일체중생들을 성불의 지혜로 내가 이끌겠다"는 마음을 내고 그러한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심하세요.
제14대 달라이 라마
제14대 달라이 라마도 "처음에는 일체 중생을 위한 보리심을 내는 것이 불가능해보였지만, 60년 넘게 보리심에 대해 사유하고 수행한 끝에 최근에 와서야 진정으로 보리심을 발하게 되었다."고 법문 중에 종종 언급한다. 달라이 라마도 평생 동안 수행한 끝에 진정한 보리심을 낼 수 있었고, 올바른 보살들은 여러 겁에 걸쳐 보리심을 수행한다고 경전에서 언급하였는데 일반 수행자들이 오랜 기간 보리심 수행에 정진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대승에 입문하려는 수행자는 우선 경론에 의거하여 (보리심의 원인인) 사무량심, 보리심, 보살도의 정확한 의미와 학처(學處) 등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마음 동기와 행위를 점검하며 보리심을 지속적으로 증장시켜야 한다.
보리심의 이익/공덕과 희유함에 대해 《입보살행론》은 다음과 같이 찬(讚)했다.
캄캄하게 어두운 밤이라도 천둥이 치면
번개 빛이 잠시 대지를 밝히는 것처럼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중생들의 마음 속에
선한 생각이 잠시 일어나나이다.
이와 같이 선의 힘은 언제나 미약하고
죄악의 힘은 매우 강대하고 무서우니,
수승하고 원만한 보리심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선으로도 그 악을 극복하기 어렵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깊이 사유하신 부처님들께서
보리심의 이익이 가장 광대함을 발견하셨으니
중생이 보리심에 의지해서 불법(佛法)을 수행한다면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지복을
반드시 얻게 되나이다.
존재(=有)의 무수한 고통을 극복하기를 바라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며
많은 행복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졌다면
결코 보리심을 버려서는 안 되나이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순간
윤회의 감옥에 갇혀있는 불쌍한 중생이라도
선서善逝(=부처님)의 아들인 불자佛子(=보살)라 불려지고
신들(=天)과 사람들에게 예경의 대상이 되나이다.
보리심은 가장 수승한 연금액(鍊金液)과 같나니
오염되고 탁한 범부의 부정한 몸을
고귀한 부처님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이러한 보리심을 아주 견고히 지켜야 하나이다.
중생의 인도자이신 부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깊이 사유하시고 [보리심을] 매우 존귀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고통스런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는 진귀한 보배와 같은
보리심을 굳게 지켜야 하나이다.
다른 선업은 모두 파초(芭蕉)와 같아서
열매를 맺고 나면 시들어버리지만
보리심의 나무는 열매를 맺고 난 뒤에도
시들지 않고 오히려 계속해서 열매를 맺나이다.
큰 두려움이 있을 때 힘있는 이에게 의지하듯
보리심에 의지하면, 극중한 악업을 지었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보리심에 의지하지 않는가.
겁말(劫末)의 맹렬한 불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보리심은] 온갖 죄업을
일순간에 완전히 소멸시켜주므로
보리심의 공덕은
무량한 것이라고
자애로운 미륵보살은
선재동자에 말씀하셨나이다.
《입보살행론》<보리심의 공덕>(석혜능 譯)
《입보살행론》(석혜능 譯)
장님이 쓰레기 더미에서
보석을 얻은 것처럼
운 좋게
지금, 저에게도 보리심이 생겼습니다.
중생의 죽음도 사라지게 하는
최상의 감로(甘露)도 보리심이며,
중생의 가난함을 없애는
줄지 않는 재물도 보리심입니다.
중생의 병을 완쾌하게 하는
최상의 영약(靈藥) 또한 보리심이며
윤회의 길을 헤매다가 지친 중생에게
휴식처가 되는 푸른 나무입니다.
모든 중생이 악도(惡道)에서
벗어나게 하는 토대이며
중생의 번뇌를 사라지게 하니
마음의 달[月]이 떠오릅니다.
중생을 무지(無知)하게 하는 허상(虛像)을 뿌리째 뽑아내는
커다란 태양이며
정법(正法)의 우유를 잘 저어
정수인 버터를 뽑아낸 것입니다.
윤회의 길을 여행하는 중생이
안락하고 즐거운 삶을 바랄 때
보리심은 최상의 행복에 머물게 하며,
중생의 긴 여행에 안도감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모든 부처님 앞에
모든 중생을
성불(成佛)과 행복한 길로 안내하니
천신(天神)을 비롯한 모든 중생이여! 기뻐하소서.
《입보리행론》제3품 (양지애 譯)
2.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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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타락시타의 제자이자 날란다 사원의 12대 학장
까말라쉴라(Kamalaśīla)
이렇게 뿌리인 연민심을 수습하여 익숙해진 다음에는 보리심을 수습(修習)한다. 보리심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이다.
까말라실라,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해심밀경》, 《수습차제》등에서는 진리를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의 두 차원으로 설명하는 이제설(二諦說)에 입각하여 보리심을 각각 세속(世俗) 보리심(속제 보리심, saṁvṛiti cittotpāda)과 승의(勝義) 보리심(진제 보리심, paramārtha cittotpāda)으로 정의하였다.
2.1. 세속 보리심[편집]
2.1.1. 정의[편집]
세속 보리심은 연민으로써 모든 유정(有情)을 윤회로부터 꺼내고자 서약하는 것이다.
《해심밀경》(자홍 譯)
세속 보리심이란 연민심으로 모든 중생을 확실하게 고통에서 건져내기로 서원한 다음,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생각하면서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보리(무상정등각)를 염원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첫 마음을 일으키는 것(초발심初發心)이다.
세속 보리심은 또한 《보살지》의 〈계품〉에서 보여준 의궤에 따라 보살의 율의에 청정하게 머무는 스승에게서 [보리심계를 받아]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그와 같이 세속 보리심을 일으킨 후에는 승의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다.
까말라실라, 《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세속 보리심이란 공성을 아직 완전히 증득하기 전, 보살이 처음 발심하여 자량도(資糧道)에 입문할 때 대비심(大悲心)을 원인으로 삼아 일으키는 보리심이다. 일반적으로 보리심이라면 주로 세속 보리심을 뜻한다. 로종(lojong) 수행도 주로 세속 보리심을 개발하는 수행이다.[4] 그러나 부처의 일체종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속 보리심과 승의 보리심 둘 모두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2.2. 승의 보리심[편집]
2.2.1. 정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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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바라밀을 존격화(尊格化)한 반야불모[5]
공성과 자비를 핵심으로 하는, 매우 명료하며 부동(不動)하여 희론(戱論)의 극단을 떠난 것이다. [...]
승의 보리심은 출세간이며 희론의 극단에서 벗어난 것, 매우 명료하며, 승의의 유경(有境), 무구(無垢), 부동(不動), 바람 없을 때의 버터램프의 이어짐과 같이 매우 밝은 것이다.
《해심밀경》(자홍 譯)
승의 보리심이란, 세간을 벗어난 것이며 모든 희론을 여읜 것이고, 극히 밝은 것이며, 수승한 의미의 영역이다. 오염이 없는 것이며, 흔들림이 없으며 바람 없는 곳의 버터불처럼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의 성취는 항상 공경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샤마타와 위빠샤나의 요가를 수습하여 익숙해짐으로써 이루어진다.
까말라실라,《까말라실라의 수행의 단계》(오기열 譯)
승의(勝義) 보리심은 곧 공성(空性)을 바르게 아는 무분별의 지혜를 뜻한다. 승의 보리심은 공성을 현량(現量)으로 인식하는 견도(見道) 이상의 보살부터 갖게 된다.
2.2.2. 공성의 이해[편집]
2.2.2.1. 인무아(人無我)[편집]
티베트 불교에서는 공성에 대한 지혜를 얻는 차제(次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①끊임없이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찰나생멸의 무상(無常) → ②몸과 마음(오온) 외에 따로 '나'란 없다는 거친 무아(無我) → ③'나'라는 실체가 없어 이름과 생각(名言)뿐으로만 존재하는 미세한 무아(無我) → ④공성(무자성無自性)을 깨닫는 바른 지혜
■ 무아(無我)에 대한 네 가지 핵심(གནད་བཞི་ 네 시)
① དགག་བྱ་ངེས་པའི་གནད་ 각쟈 ㅇ에빼 네
- དགག་བྱ་ [각쟈] : 부정해야 할 바, 부정의 대상, 무엇이 없다고 할 때 그 것.
- 중생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 '나'라고 하는 개별적 실체가 있다는 인식인 아상(我相), 아집(我執)이 있다(구생아집俱生我執). 이를 경전에서는 유경(有境, 주체)이라 한다.
- 이러한 유경의 대상(경境, 객체)을 분석해서 잘 알아야 한다. 유경의 인식 대상인 경(境)에는 오온(색수상행식)이 있다. 오온을 제외하고 별도로 '나'가 따로 없다. 오온 외에 '아트만', '참나'[6] 등 상호의존하여 발생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아(我)는 없으며, 있다고 여기는 착각을 아상, 아집이라 한다.
- 아상, 아집을 소멸시키려면 '아트만', '참나' 등 부정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부정해야 한다. 만약 부정 대상을 부정하지 못하거나, 부정 대상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면 단견(斷見) 혹은 상견(常見)의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예를 들어 무아에 대한 설명 중 '없다'고 할 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윤회, 인과, 업, 해탈 등을 모두 부정하는 단견(斷見)에 떨어지게 된다. 유(有)ㆍ무(無)의 두 가지 아(我) 문단 참조.
② ཁྱབ་པ་ངེས་པའི་གནད་ 캽빠 ㅇ에뻬 네
- ཁྱབ་པ་ [캽빠] : 충족함.
- 아상이 집착하고 있는 '나'라는 실체가 있다면, 오온과 하나(一)로 또는 따로(異) 있는 것 말고는 없음을 충족한다.
- 예를 들어 '노르부'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다면, 노르부는 집 안 또는 집 밖 둘 중 하나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오온 안에 있든지 오온 밖에 있든지 둘 중 하나를 충족함이 확실하다.
③ གཅིག་བྲལ་ངེས་པའི་གནད་ 찍델 ㅇ에빼 네
- 자성이 하나(一, གཅིག་)가 아님.
- '나'와 '나의 오온'이 완전히 하나라고 하면, '나',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행동'이라고 아(我)와 아소(我所)로 나눠서 따로 구분할 수 없다.
- 이렇게 '나'와 '나의 오온'을 하나라고 보게 되면, 내가 하나인 것처럼 다섯인 '오온'도 하나라고 해야 하거나, '오온'이 다섯이듯 '나'도 다섯이라고 해야 한다.
④ དུ་བྲལ་ངེས་པའི་གནད་ 두델 ㅇ에빼 네
- 자성이 다수(異, དུ་མ་)가 아님.
- '나'와 '나의 오온'이 완전히 다르다면, '나'와 '나의 오온'은 완벽히 무관한 서로 다른 독립된 실체여야 한다. 분리된 측면에서는 '나'와 '나의 오온'이 다르지만 실체로서는 다르지 않다면 이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성이 다수가 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다.
- 또한 '나'와 '나의 오온'이 서로 다르다면, 만약 질병, 노화, 죽음이 발생하여도 '나'는 그러한 것들을 겪지 않게 된다. 따라서 '나'는 생멸(生滅)등 오온의 특성을 갖지 않는 잘못이 있게 된다.
- 만일 '나'와 '나의 오온'이 다르다면, 오온을 제외하여야 '나'를 규정할 수 있게 된다.
∴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나'는 없다.
제14대 달라이 라마,《초심자의 새로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선설善說(ལེགས་བཤད་བློ་གསར་མིག་འབྱེད་ཅེས་བྱ་བ་བཞུགས་སོ།, Opening the Eye of New Awareness)》
제14대 달라이 라마,《로사르믹제(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게셰 소남 초펠 譯)
이러한 논리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온 외에 별도로 영원불변한 '아트만', '참나'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대개 자신의 주관적 체험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은 증명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며 믿음, 신념의 영역에 해당한다. 설사 주관적 체험을 인정하더라도 이들의 '아트만', '참나'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오온의 일부인 의식의 특정한 상태, 경계(境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김성철 동국대(경주) 교수는 《우파니샤드》 등에서 언급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를 불교적 관점에서 사무색정(四無色定) 중 하나인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서 경험하는 의식의 일시적인 상태, 경계로 해석하였다. 김성철, 《불교 초보 탈출 100문 100답》
그나마 식무변처정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선정에 속하지만, 대부분은 깊은 잠에 빠지거나 기절한 것 같은 무기(無記), 혼침(昏沈)의 상태를 경험한 후 이를 "분별망상이 끊어진 자리", "참나" 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 주의를 요한다. 명상 중의 각종 체험이나 삼매(三昧, samadhi)는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이를 통해 번뇌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질 수는 있지만, 무아ㆍ공성에 대한 바른 지혜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번뇌의 근원인 아집을 제거할 수 없으며, 이러한 현상에 집착하고 진정한 '나'라고까지 여긴다면 도리어 아집이 더욱 공고해지는 폐단을 초래하여 해탈은 더욱 요원해진다.
불교의 소승과 대승, 그리고 대승의 현교와 밀교 등 모든 가르침에서는 무아의 견해를 설하고 있다. 행(行)의 측면에서는 삼보에 귀의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에 있으며, 견해의 측면에서는 사법인(四法印)을 인정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다. 사법인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고 말씀하셨기에, 일체법이 공하고 무아(無我)임을 모든 불교도가 인정한다.
불교의 4대 학파(유부, 경량부, 유식파, 중관파)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무아는, '나'(아트만, 원질)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부분으로 나뉠 수 없는 하나도 아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유식파에서 주장하는 법무아의 견해는 마음과 마음의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관파에서는 현상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법무아를 주장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중관의 열쇠》 (게시 소남 걀첸 譯)
외도와 불교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방편 측면에서 삼귀의, 견해 측면에서 인무아(人無我) 인정이다. 게시 텐진 남카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브라만교도같은 외도들은 무상(無常)하고, 부분이 있으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오온과 달리, 오온과 별도로 존재하는 상일주재(常一主宰)[7]하는 인아(人我)를 주장하므로 불교도나 불교 수행자는 될 수 없다. 불교 부파 중 윤회의 주체로서 오온과는 다르지만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非卽蘊非離蘊) 뿌드갈라(Pudgala, 補特伽羅)의 존재를 주장한 독자부, 정량부 역시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무아설을 위배했다는 혐의로 '불법에 붙은 외도(附佛法外道)'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근현대 불교학자들 중에도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나 미즈 리스 데이비스(Mrs. Rhys Davids)처럼, 상대부정(paryudāsa-pratiṣedha)같은 문법적 요소나 경전의 일부 구절을 근거로 "오온은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이지만, '아트만', '참나' 등 오온을 제외한 나머지 무언가는 아(我)이며, 자성(自性)이 있다"는 식의 비아설(非我說) 혹은 진아설(眞我說)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오온 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나'가 있다", "자성이 다수이다"란 주장과 별 반 다를 바 없는 가설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는 이미 상술하였고 이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승 논사들에 의해 논파당하였다.
한편 석가모니는 상주론자들이 비록 불교도는 아니지만 인과를 부정하는 단멸론자보다는 훨씬 우월하다고 보았다. 상주론자들은 인과를 부정하지 않기에 선한 행위를 실천하여 좋은 과보를 누리고, 수행을 통해 지혜자량과 복덕자량을 일부 쌓을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상견常見으로 인해 쌓을 수 있는 자량의 한계가 있다. 자량도資量道의 세제일법世第一法에서 상견은 완전히 극복된다). 인과를 부정하여 수행도 필요없다고 여기면 자량을 쌓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기에 차라리 승의제의 공성을 부정할지언정 세속제의 인과를 인정하는 편이 낫다.
2.2.2.2. 법무아(法無我)[편집]
그대가 [자성(自性)이 성립하지 않는] 자아를 보듯이
모든 법(法)에도 그렇게 적용해야 한다.
모든 법은 허공과 같아
자성이 전혀 없다.
《삼매왕경(samadhirajasutra)》
오온(五蘊)으로 대변되는 일체 현상의 무아(無我), 즉 법무아(法無我) 역시 위에서 설명한 인무아(人無我)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물병의 경우, 물병은 수많은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구성된다. 물병을 이루는 여러 작은 부분, 입자들은 근취인(近取因,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물병을 만드는 장인의 노력 등은 구유연(俱有緣, 부수적인 원인)이 되어 물병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원인과 조건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겨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되는 물병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며,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부중생의 의식은 마치 법의 자성, 즉 법아(法我)가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므로, '나' 뿐만 아니라 법에 대해서도 상술한 '무아에 대한 네 가지 핵심'을 철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분석 끝에 전도(顚倒)된 인식의 대상은 해체되어 사라지고, 마음에 떠올렸던 인식 대상은 단지 이름과 생각(名言)으로만 존재하며 그저 연기(緣起)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되어 법무아(法無我)를 깨닫는다.
위에서 언급한 '무아에 대한 네 가지 핵심' 외에도 여러 다양한 논리적 추론들[8]을 통해 무아, 공성에 대해 그릇됨 없이 바르게 알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집중 명상(Skt. sthāpyabhāvanā; Tib. 'jog sgom)을 통해 샤마타를 획득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분석하는 명상인 분석 명상(Skt. vicārabhāvanā, Tib. dpyad sgom)을 통해 비파샤나를 획득한다.[9] 티베트 불교에서는 샤마타 수행과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샤마타, 비파샤나 수행과 그 결과로 얻게 되는 비파샤나로 수행과 결과를 명확히 구분하는 편이다. 보살은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함께 닦아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 곧 승의 보리심을 점차로 발현하게 된다. 샤마타와 비파샤나를 통해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점차 강화될수록, 공성(空性)으로서의 연기(緣起), 연기로서의 공성이란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더욱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볼 수 있다. 이는 석가모니불의 수승하고 바른 지견(智見)과 일치한다. 그 밖에 공성에 대한 설명은 티베트 불교/중관 사상 참조.
제14대 달라이 라마,《초심자의 새로운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선설善說(ལེགས་བཤད་བློ་གསར་མིག་འབྱེད་ཅེས་བྱ་བ་བཞུགས་སོ།, Opening the Eye of New Awareness)》
제14대 달라이 라마, 《로사르믹제》(게셰 소남 초펠 譯)
BandPhoto 2021 0...
서울 삼학사(랍숨섀둡링) 주지 게시 텐진 남카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법에는 가유(假有)와 실유(實有) 2가지가 있다. 가유와 실유를 정의하는 여러 기준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자기동일성(identity)의 인식 여부이다. 어떤 법이든 그것을 인식할 때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해서 인식해야 한다면 가유이고(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그 사람의 성격, 형상 같은 오온의 특성을 먼저 떠올리는 것) 어떤 법이든 그것을 인식할 때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하지 않고 법 자체의 동일성, 즉 자성(自性, svabhava)이나 자상(自相, svalaksana)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실유이다.[10] 따라서 자아 혹은 개아(個我, pudgala)는 가유이고 실유가 아니다.
상일주재(常一主宰)하는 아(我)를 거친 인아(人我), 독립적 실유(實有)인 아를 미세한 인아라고 한다. 외도는 오온과 별개로 존재하는 상일주재하는 아를 주장하고, 소승의 유부, 경량부와 대승의 유식학파, 자립논증 중관학파 등은 자아와 오온이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유부는 오온의 화합, 경량부는 의식, 유식학파는 아뢰야식, 자립논증 중관학파는 사례의 의식(의식 중에 특별한 의식)을 '나'라고 여긴다. 그리고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자아는 명명할 정도의 수준으로 가설(假說)된 것이라고 말한다.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하고 자아는 명언(名言)으로 가립(假立)되었을 뿐이라는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관점에서 볼 때, 소승~자립논증 중관학파까지의 불교 학파들은 모두 자아를 가유라고 주장하지만 오온이나 의식 등의 법(法)은 독립적 실유로 여기는 미세한 아집(我執)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대승의 유식학파에서 아뢰야식을 건립하는 것 또한 실유의 자아를 건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선 아(我)가 상일주재가 아님을 이해한 후 아가 독립적 실유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전자보다 후자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후자를 미세하고 전자를 거칠다고 하는 것이다. #
2.2.2.3. 마음(의식)의 공성[편집]
세간의 유정은 대부분 식온(識蘊)을 헤아려 ‘나[我]’라고 집착하고, 그 밖의 다른 온을 헤아려 ‘내 것[我所]’이라고 집착하는 까닭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이한정 譯)
흔히 대상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견문각지見聞覺知) 인식 작용을 하는 마음(의식)을 변치 않는 '나', '자아', '영혼' 등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러한 마음(의식) 또한 원인과 조건에 의존하여 찰나생멸을 반복하는 연속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6식(六識)[11]의 각각은 원인들, 즉 각각의 6식 자체의 인식 기능, 대상, 즉각적인 조건 등에 의존하고 있다. (2) 식(識)의 경험이 하나로 단일하게 보일지라도, 그 경험은 깊은 정념 속에서 선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지극히 짧은 순간들의 식(識)으로 이루어져 있다. (3) 각 순간의 식(識)도 바로 전 순간의 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바로 다음 순간의 식(識)에게 영향을 준다. 이들 서로 다른 순간들의 식(識)은 단절된 사건들이 뒤섞인 것이 아니라, 연속을 형성한다.
“어리석은 사람아, 조건이 없으면 식(識)이 발생할 일도 없기 때문에, 식(識)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갈애 멸진의 긴 경(MN 38:5)》
석가모니는 ‘식(識)’이 자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사띠(Sati) 비구는 의식이 조건들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저절로 존재하며,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이주하며, 업(業)을 만들면 그 과정에서 변화되는 일이 없이 그 업의 결과를 경험한다고 믿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식 또한 조건에 의해 발생한다며 사띠 비구를 심하게 질책했다.
실재하는 것은 없다.
오온, 원소, 감각, 감각 기관,
주체, 객체가 온전하게 사라진
법무아와 동일한
내 마음은 본래 발생한 적이 없는
공성 그 자체이다.
《구햐싸마자 딴뜨라(Guhyasamāja tantra)》(양지애 譯)
마음은 윤회와 열반 등 모든 인식하는 현상의 토대이다. 죽음의 과정에서 거친 의식은 정광명(淨光明) 같은 초미세의식에 용해되고, 환생할 때 거친 의식은 초미세의식의 기반으로부터 다시 나온다. 거친 의식에서 건설적인 생각과 파괴적인 생각이 생겨서 업(業)을 만든다. 번뇌에 찬 생각의 결과로 윤회가 오고, 출리심과 보리심과 지혜와 같은 도덕적 마음 상태의 결과로 열반을 성취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부처의 반열반(般涅槃, parinirvana) 이후에도 부처의 청정하고 자각(自覺)하는 특성을 가진 마음(의식)의 연속은 계속 이어지며 이를 단절할 원인은 없다고 본다.[12] 그러나 이러한 가장 미세하고 청정한 마음, 밀교에서 말하는 족첸의 '릭빠(rig pa)'나 무상요가 딴뜨라의 '정광명(淨光明, ‘od gsal)'조차 순간들로 구성된 연속으로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이며 독립된 실체가 아닌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에 승의(勝義)로 존재하지 않으며, 외도(外道)의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영혼', '아트만', '참나' 등과 같지 않다.
정광명 같은 미세한 마음/의식은 윤회와 열반을 얻는 기반이지만, 마음은 '마음'이라는 명언(名言)으로만 가립(假立)되었을 뿐 그것의 독립적이고 불변(不變)하는 실체를 찾고자 한다면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즉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 혹은 마음의 법성을 안다는 것은 '주체(혹은 마음/의식)의 무자성=주체의 공성'을 온전히 깨닫는 것과 같다. 무상요가 딴뜨라 등 밀교(密敎)의 공성에 대한 견해와 현교(顯敎)인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공성에 대한 견해는 일치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2.2.3. 공성과 자비의 관계[편집]
성문 연각 등은 능인으로부터 태어나고
부처님은 보살로부터 태어나시니
자비심과 둘이 아닌 마음(공성)과
보리심은 보살들의 씨앗이다.
연민심이란 승리자의 원만한 결실로
이것의 씨앗이며 성장시키는 물과 같고
오랫동안 수용하는 대상을 성숙시키는 것이기에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자비를 찬탄하는 것이다.
먼저 나라고 자신을 애착하고
나의 것이라고 사물에 집착이 생겨나니
도르래처럼 자유가 없는 중생에게
자비를 일으키게 한 모든 것을 공경한다.
중생은 움직이는 수면 위의 달과 같이 흔들리고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본
이러한 보살의 마음은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기 위해 자비로 순응하고
보현(普賢)의 원력으로 잘 회향하여
환희에 머무는 그것을 초지(初地)라 부르며
그때부터 초지를 얻게 되었으므로
보살이라 불리는 호칭을 얻는다.
《입중론》(양지애 譯)
불교에서 지혜와 함께 자비를 강조하므로 불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자애심, 자비심, 보리심 등의 도덕적이고 선한 마음은 거친 의식에 해당하며 초미세의식 자체는 선악(善惡)을 떠난 중립적인 의식이다. 또한 미세의식과 거친 의식 모두 본질은 공(空)이며 선악의 분별은 조건지어진 연기(緣起)에 해당한다. 자애심, 자비심, 보리심 등의 도덕적인 마음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되는 의식이므로 후천적인 계발과 함양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도-티베트 불교의 윤리론, 수행론에 토대가 된다.[13]
만약 "본래 부처", "자성불(自性佛)"같은 레토릭처럼 중생이 본래부터 붓다의 특성, 공덕을 본질로 갖는 존재라면, 자신의 본질과 어긋나게 번뇌에 오염될 수 없고 따라서 번뇌를 제거하고 공덕을 갖추기 위한 가르침과 수행은 불필요했을 것이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할 이유도 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불성ㆍ여래장 교설과 그로부터 파생된 레토릭들을 축자적, 존재론적으로 해석하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모순이 발생하므로 '불성ㆍ여래장은 장차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칭한다'와 같은 적극적, 수행론적 해석이 요구된다. 유식학파에서는 여래장을 '(미래에) 부처의 공덕이 될 마음의 청정한 종자(種子)'로 해석하며,[14] 중관학파에서는 '그러한 마음의 본질인 공성(空性)'을 여래장으로 본다. 마음의 본질이 독립적 실재성, 즉 자성(自性)이 없이 공하기 때문에 번뇌에 염오(染汚)될 수 있고, 또한 번뇌를 소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가르주나가 《중론》 등에서 천명하듯, 만약 마음이 공하지 않고 자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로 인해 어떠한 연기적(緣起的) 사태도 성립할 수 없다.[15]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그리하여 실제에는 연(緣)의 화합에서 싹이 나옵니다. 또한 스스로에서 나지[自生] 않으며, 또한 남에게서 나지[他生] 않으며, 또한 스스로와 남이 합하여서 나지[自他合生] 않으며, 또한 자재천(自在天)에서 나지[自在天生] 않으며, 또한 때와 방위에서 나지[時方生] 않으며, 또한 본성(本性)에서 나지[本性生] 않으며, 또한 원인 없음에서 나지[無因生] 않으니, 이를 생기는 법의 차례라고 합니다.
《불설도간경》(김성구 譯)
그 어떤 것이든 그 어느 곳에서든 자체로부터건, 남(他)으로부터건, 그 양자에서건, 무인(無因)으로건 사물[=존재]들의 발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중론》(김성철 譯)
《중론 개정본 - 산스끄리뜨 게송의 문법 해설을 겸한》(김성철 譯)
비(非)불교도들은 무상(無常)한 오온(五蘊)과 별도로 자성을 가진, 즉 원인과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이며 고정불변한 존재인 영혼, 아뜨만, 참나, 자재천(自在天, Īśvara) 등을 상정한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존재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원인과 조건으로 구성된 연기법계(緣起法界)와 어떠한 상호작용도 할 수 없는 공허한 관념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상키야(Sāṇkhya) 학파같은 비불교도들은 '절대적이고 항상한 근본 원인에 이미 결과가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결과를 자체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힘이 근본 원인에게 있다'는 사물의 발생 방식인 자생(自生)이 성립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생은 여러 경론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논파되었는데, 가령 《중론》의 주석서인 《청목소》에 따르면 어떠한 사물도 자기 자체로부터 발생할 수 없고 반드시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에 의지해야 한다. 만약 다른 인연없이 자기 자체로부터 생겨난다면 원인과 조건은 없는 꼴이 되어 버린다. 또한 자기 자체로부터 생겨난다면 한 존재에 '생기게 하는 자체'와 '생겨난 자체'라는 두 개의 자체가 있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 또다시 생겨나는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소급의 오류(Reductio ad Infinitum)에 빠지게 된다.《중론 개정본 - 산스끄리뜨 게송의 문법 해설을 겸한》(김성철 譯)
즉 자재천, 창조주, 신(神) 같은 절대자나 혹은 절대자를 내재화(內在化)한 영혼, 아뜨만, 참나 등 독립적이고 영원불변한 형이상학적 존재가 있고 그것들이 완벽하고 순선(純善)한 본질을 갖고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그러한 존재들은 어떠한 인과적 발생도 초래할 수 없는 무력(無力)한 존재이며 불교의 연기법은 그러한 근본 원인/제1원인의 존재를 부정한다. 설사 이들이 논리를 초월하여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하거나 구현해낼 수 있을지라도, 《입보리행론》에서 지적하듯 인식불가능한 불가사의를 논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의미한 행위이다. 또한 《이교도의 경(Titthāsutta)》 에서는 만약 절대자라는 근본 원인이 있다면 마땅히 세계에 만연한 번뇌와 악행의 책임도 절대자에게 있음을 지적한다. 더군다나 절대자가 선한 존재라면, 전능하고 선한 존재가 악을 만들어냈다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적 딜레마까지 해명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16]
(여기서는 신이나 신을 내재화한 자아를 도덕적 근거로 삼았을 경우 발생하는 문제를 불교적 관점에서 간략히 고찰해보았다. 신명론(神命論, Divine Command Theory)은 대개 완벽하게 선한 본질을 가진 영원불변한 신의 명령을 도덕적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와 같이 정의된 신이 도덕적 가치를 창조하거나 명령할 수 없음은 자생의 부정을 통해 밝혔고, 신이 완벽한 선함을 본질로 갖지 않음은 선한 본질에서 악이 창조된 모순을 통해 밝혔다. 굳이 신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아도 신이 도덕적 근거가 되기에 타당하지 않음은 충분히 논증할 수 있어 언급하지 않았으나, 여러 경론에서 신이나 아뜨만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논증된 바 있다.)
'영원불변하고 순선무악(純善無惡)한 자아'라는 관념은 그것의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존재에 대한 갈애(渴愛, tṛṣṇā)인 유애(有愛, bhava-taṇhā)를 충족시켜 일시적 만족감을 주고 경우에 따라 도덕법칙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는 있다. 실제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절대자에 대한 믿음 그 자체만으로 도덕적 정서를 고취하고 도덕율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金)으로 만든 사슬 또한 여전히 속박하는 사슬이듯, 불교적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는 중도(中道)에서 벗어난 극단적 견해인 상견(常見)으로서 아집(我執, ātma-grāha)의 소산이다. '아집으로 인식하는 것과 일치하게 (인식대상인)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유아론(有我論)은 불교의 무아론과 양립할 수 없는 직접 모순 관계이다. 따라서 무아를 인식하면 자연스럽게 유아라는 인식은 사라지며, 아직 유아의 인식이 남아있다면 이는 무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된다. 때문에 유아라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한, 무아의 인식을 통한 번뇌의 소멸과 해탈은 불가능하며 윤회의 고통은 지속된다.
나아가 선법(善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공력(功力)이나 수습(修習)에 의하지 않고 획득되는 것이며, 둘째는 요컨대 공력이나 수습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이를 곧 생득선(生得善, 선천적으로 획득된 선)과 가행득선(加行得善, 후천적 노력에 의해 획득된 선)이라고 이름한다. 여기서 공력이나 수습에 의하지 않고 획득된 선법의 경우, 만약 소의신(所依身) 중의 종자가 아직 손상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성취'라고 하고, 만약 소의신 중의 종자가 이미 손상된 상태라면 그것을 일컬어 '불성취'라고 한다.
《아비달마구사론》(권오민 譯)
(문) 어떠한 것이 생득선(生得善)입니까?
(답) 예전에 한결같이 익힌 것에 연유해서 이와 같은 과보를 성취하는 것을 가리킨다. 자체적인 성품에 연유해서 이 같은 처(處)에 태어나서 사유하지 않고도 자유로이 경계에 따라[任運] 즐거움에 머물게 된다.
《대승아비달마집론》(이한정 譯)
물론 불교도 도덕성의 선천적 측면을 인정한다. 그러나 본질주의적 입장과 달리 불교에서는 선천적 도덕성 또한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결과라고 본다. 과거 생(生)의 행위 내지 업(業)에 의해 개개인의 타고난 도덕적 정서, 인지, 행동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처럼 결정론과 본질주의를 배격하고 변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진화론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진화론이 유전자 중심의 유물론인데 반해 불교는 업 종자로 변화를 설명하는 비(非)물질주의라는 차이가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통상적 의미의) 도덕성은 업 중에서도 유루(有漏)의 선업(善業)과 무루업(無漏業)에 의해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17] 그리고 과거의 업으로 인해 형성된 도덕성은 다시 현재의 업에 의해 강화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다. 업에 의한 마음/의식의 변화는 궁극적으로 마음/의식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공(空)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번뇌는 일시적이며 마음/의식의 본질은 공성으로서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붓다의 지혜와 자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즉 불교에서의 자비는 신이나 아뜨만, 참나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라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인 연기와 공성에 근거한 자비이며, 자비의 최종 형태 또한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가 결합한 무연자비(無緣慈悲)이다.[18] 무연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필수불가결하지만, 지혜만으로 무연자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자비심은 지혜와 방편에 해당하는 각기 다른 법(法)이기 때문이다. 단, 지혜와 자비를 함께 수행하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가 발달할수록 무명(無明)에 얽매인 중생들에 대한 연민이 늘어나고, 자비심을 수행하면 공성에 대한 명상이 용이해지며 일시적으로 거친 번뇌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귀류논증 중관학파의 견해에 의하면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는 성문, 연각, 보살 삼승이 모두 가지고 있지만 대비심을 원인으로 하는 보리심 없이는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없다.[19] 따라서 보살은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 뿐 아니라, 원만한 부처의 과위를 얻는 종자이며 육바라밀 등 보살행의 실천을 증장시키는 대비심(大悲心)에 대해서도 수행하여야 한다.
반야학의 권위자인 겔룩의 학승 게셰 빨덴 닥빠(dpal ldan grags pa) 스님은 대비심의 정의에 대해 '일체중생을 대상으로 모든 허물과 고통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슴 속 깊이 저절로 생긴 연민심'이라고 말하였다. 수없는 전생 동안 일체 중생이 나의 어머니 아닌 적이 없으며, 때문에 그들 또한 이번 생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인 지모(知母), 내 어머니였을 적 은혜를 기억하는 염은(念恩), 그 은혜에 보답해야겠다는 보은(報恩), 모든 중생이 행복하길 바라는 자심(慈心) 등 네 가지를 대비심의 공통적이지 않은 주된 원인으로 삼는다.
진정한 대비심은 꾸밈없이 저절로 일어날 정도의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대비심에 익숙해지게 하는 조건들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마치 집착과 같은 번뇌도 익숙해지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 같이 대비심도 익숙해질수록 저절로 꾸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샨띠데바의 《입보살행론》에서 “익숙해지면 쉬워지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다르마끼르띠의 《석량론》에서도 “마음이 자비 등에 익숙해지면 저절로 생기게 된다.”라는 등의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였다.
대비심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 설명하자면, 무아를 닦는 것과 같이 대상을 뚜렷하게 보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경우에 주로 족곰(집중명상)을 해야 하는 것과 달리, 자비를 닦는 것과 같이 마음의 힘을 증장시키려 하는 경우에는 주로 여러 가지 이유에 관해 분석하는 쬐곰(분석명상)을 해야 한다. 대비심에 관한 분석명상에서 처음에는 부모, 가족, 친지 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서 시작하여 다음으로 자신에게 손해도 이익도 주지 않은 주변 사람, 나중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원수까지 대상을 확장해나간다. 또는 질병, 기아, 형벌, 혹한과 혹서, 도살, 폭행, 재난 등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들을 사유하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를 발원하고, 그 뒤 업과 번뇌에 시달리는 삼계(三界)의 모든 중생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을 얻기를 바라는 대자대비심이 가슴 속 깊이 일어나도록 노력하고 익숙해진다.
게셰 빨덴 닥빠, 《공성과 자비에 대한 고찰의 요지(སྟོང་ཉིད་དང་བྱམས་བརྩེའི་སྐོར་རྟོག་འཆར་གནད་བསྡུས།)》(게셰 소남 걀첸 譯)
게셰 빨덴 닥빠 스님이 제시한 자비심의 함양법은 '칠종인과법(七種因果法)'이라 일컬어지며, '칠종인과법'을 토대로 '자타상환법(自他相換法)'이라는 자비와 무아, 연기 개념이 결합된 더욱 심오하고 광대한 수행법을 익히게 된다. 자타상환법은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중생들 역시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생들은 이기심과 자기 집착으로 인해 남들을 희생시키며, 그 결과 행복을 바라면서도 정작 죄책감과 근심, 두려움을 얻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근시안적 이기심을 버리고 타인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의 행복을 원하게 되면 그 결과 행복한 타인들로 인해 자기 자신 역시 행복해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신과 남의 입장을 바꿔 자신의 행복에서 타인의 행복으로 목표를 전환하는 것을 자타상환법이라고 한다. 자타상환법을 장애없이 행하기 위해서는 '나(我)', '나의 것(我所)'이 존재한다는 아집에서 벗어난 무아(無我)와 나와 남이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연기성(緣起性)을 인지해야 한다.
(외도) 만일 [나(我)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므로] 유정(有情)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냐고 한다면
(중관) [해탈·성불의] 결과를 위해 행한 것을
무지로 인해 잘못 알고 곡해한 것일 뿐이다.
(외도) [실제로] 유정이 없다면 [세세생생 자비심을 닦은] 결과(성불)는 누가 받느냐고 하면
(중관) [진제(眞諦) 면에서 자비수행으로 성불하지 못함은] 사실이지만 무지로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아집을 제거해야 하지만 바로 막지 못한다.
《입보리행론》<지혜품>(게셰 소남 걜첸 譯)
서양의 일부 불교학자들은 자비심과 공성에 대한 대승 불교의 가르침이 모순된다고 이해하였다. 예컨대 예수회 사제이며 뛰어난 불교학자였던 하인리히 두몰린(Heinrich Dumoulin)은 지혜와 자비의 통일에 대해 "이 관점의 문제점은 인간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주장처럼 덧없는 인간 존재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도와주고 구원하는 사람도 없고, 도움과 구원을 받는 사람도 없음을 알아차림하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실체의 환상에 얽매이지 않으면 보다 활동적이고 자유롭게 자비를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주장에는 논리적인 모순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비심도 틀림없이 실재가 아니고 그런 자비심은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고통받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까르마 까규의 스승인 제9대 따렉 꺕괸(sgra legs skyabs mgon) 린뽀체는 공성에 의해 자비심의 효력이 줄어들지 았으며 오히려 공을 바르게 이해할 때 진정으로 자비심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인에게 세속제에 해당하는 자비심을 느끼더라도, 자비심이 승의제인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와 결합해야만 비로소 타인을 고통으로부터 진정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현상을 꿈처럼 보는 것은 세상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자비와 공성이 결합할 때, 별개의 독립적인 주체와 객체로 이루어져있다는 이원적(二元的) 인식을 초월하여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불이(不二)의 인식으로 진정으로 무한하고 열린 자비를 발현할 수 있다. '자기'와 '타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코 근본적으로 자비로워질 수 없고 끊임없이 삶에 고통을 초래하게 된다.
따렉 꺕괸,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이창엽 譯)
8세기 경 중관논사였던 샨띠데바도 유사한 의문에 직면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샨띠데바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아가 없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중생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세속제(世俗諦)에서는 중생도 존재한다고 답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속 세계의 유효성 안에서 명언(名言)으로 가립(假立)된 자아가 환(幻)과 같이 가유(假有)로 존재하며, 자비를 베푸는 대상 역시 세속제의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말한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논쟁의 상대자는 만약 중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비를 베푼 결과, 즉 성불(成佛)은 누가 받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샨띠데바는 질문 내용이 승의제(勝義諦)에서는 사실이나 그러한 질문은 논점을 잘못 이해하여 생긴 오해라고 답한다. 승의로서는 중생에 실체가 없지만 세속에서는 고통받는 중생이 엄연히 존재하며,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우리는 고통의 원인인 아집(我執)을 제거하는 해탈과 성불의 도(道)에 종사할 수 있다.
여기서 고통의 원인인 아집은 사물과 사태에 자성이 있다고 여기는 무명(無明)을 가리킨다. 아집의 제거는 아집의 인식대상인 일체법의 자성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하다. 앞서 말한 승의제에서 실체가 없다는 말도 무자성(無自性)과 같은 의미이다. 즉 부정해야 할 대상은 자성이지 (고통, 자비, 윤회, 해탈, 성불과 같은) 세속의 인과(因果)가 아니다. 만약 인과까지 부정하면 단견(斷見)에 치우치게 된다.
《달라이 라마의 지혜명상》(최로덴 譯)
제14대 달라이 라마, 《부정적인 감정 극복하기》
3. 원보리심과 행보리심[편집]
cuttingties robe...
날란다 사원에서 《입보살행론》을 설한 샨티데바[20]
보리심을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나니
발원하는 원보리심과
발원한 것을 실행하는 행보리심이나이다.
어디를 가고 싶어하는 것과
실제로 가는 것이 다르듯이,
현명한 이들은 이 두 가지 보리심의 차이를
순서대로 알아야 하나이다.
《입보살행론》(석혜능 譯)
《입보살행론》에서는 보리심을 원보리심(願菩提心)과 행보리심(行菩提心)으로 구분한다. 원보리심은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소망이다. 그리고 행보리심은 원보리심을 실제로 이루기 위해 보살계와 육바라밀, 사섭법 등을 실천함을 의미한다. 원보리심과 행보리심을 각각 눈과 다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원보리심을 통해 가야할 곳을 보고, 행보리심을 통해 그곳에 이르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3.1. 원(願)보리심[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원(願)보리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행(行)보리심[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행(行)보리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관련 서적[편집]
소원을 들어주는 모든 보석보다
더 소중한 모든 존재를 위하여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니
언제나 제가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나를 가장 낮은 사람으로 여기고
마음 깊이
다른 사람을 윗사람으로 받들게 하소서.
그 무엇을 행하건 내 마음을 잘 살피기를
그리고 나와 남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단호히 맞서 물리치게 하소서.
매우 부정적이며 고통에 억눌려
성품이 밝지 않은 사람을 보면
마치 귀한 보물을 찾은 듯이
그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남들이 나를 시기하여
부당하게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해도
좌절은 내 몫으로 받아들이고
승리는 그들에게 바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몹시 나를 고통스럽게 해도
변함없이 그를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요약하면 이익과 기쁨은
직간접으로 내 어머니였던 모든 중생께 드리며
내 어머니의 모든 상처와 고통은
은밀히 내가 떠맡게 하소서.
이러한 모든 행이 세속 팔풍에 물들어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이 환영임을 깨달아
애착 없이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랑리 탕빠,《수심팔훈》(양지애 譯)
로종과 관련된 문헌으로는 《보행왕정론(보만론)(Ratnāvalī)》, 《보살지(Bodhisattvabhūmi)》,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Bodhicaryāvatāra)》, 《마음을 다스리는 8가지 게송(수심팔훈, 수심팔송)(blo sbyong tshigs rkang brgyad ma)》, 《수심칠요(blo sbyong don bdun ma)》, 《보살행37송(rgyal sras lag len so bdun ma)》 등이 있다.
국내에 번역된 관련 서적은 다음과 같다.
(일부 서적은 절판된 점 참고 바람)
#(중관)보만론/보행왕정론
《보만론》 (※ 링크를 누르면 pdf 파일이 바로 다운로드됨)
《보행왕정론》
#친우서
《친우서》
《왕에게 보내는 편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보리심석론
《보리심석론》(※ 링크를 누르면 pdf 파일이 바로 다운로드됨)
#보살지
《보살지》
#입보리행론/입보살행론
《달라이 라마의 입보리행론 강의》
《달라이 라마, 화를 말하다》
《달라이 라마의 지혜명상》
《께따까, 정화의 보석》
《샨띠데바의 입보리행론(개정판 2판)》 : 2022년 출간된 2번째 개정판
《입보리행론 역주》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샨티데바와 함께 읽는 입보리행론》
《샨티데바의 행복수업》
《입보살행론》
《입보살행론》(큰글씨본)
《입보살행론광석》상권 하권
《입보리행론 강해》1권 2권 3권 : 《입보살행론광석》의 개역판
《보살의 행에 들어가다(보살행입론)》
《자비 결과주의》
《행복한 삶 그리고 고요한 죽음》
《입보리행론 요해》
#수심칠요
《위대한 길에서 마음닦기》
《로종 마음수련》
《티베트 마음수련법 로종》
《마음 닦기 일곱가지 핵심 비결》
《아티샤의 명상요결》
《대승의 마음 닦는 법》
#보살행37송 #수심팔훈 #기타
《보살의 37 수행법》
《불자가 행해야 할 37가지 가르침》
《보살의 37 수행법》 (※ 링크를 누르면 pdf 파일이 바로 다운로드됨)
《보살의 길》
《티벳 스승들의 수행 이야기》
《티베트 사람들의 보리심 기도문》
《마음을 다스리는 보살의 수행법》
《용감한 보살의 보배염주》
《마음을 닦는 무기의 바퀴(로종 쵠차 콜로)》
티베트 불교/자비와 보리심의 강조
[1] 본 탱화의 관세음보살은 팔이 4개인 사비(四臂)관음이다. 4개의 팔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상징하고 흰 색 몸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함을 상징한다. 정수리에는 근본 스승(本師)인 아미타불을 정대(頂戴)하고 있으며 가운데 양 손에는 여의주, 오른손에는 수정 염주, 왼손에는 백련(白蓮)을 들고 있다.
[2] 관세음보살이 대비(大悲)의 본체인 대비심(大悲心)을 상징한다면, 따라보살은 대비의 작용인 대비행을 상징한다. 따라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화현한 화신(化身) 혹은 여성 수행자의 몸으로 성불한 부처로 알려졌다. 한역(漢譯)에서는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는 불모(佛母)'라는 뜻의 '도모(度母)'라고 번역했다.
[3] 대승(상사도)의 보리심 뿐 아니라 소승(중사도)의 출리심도 마찬가지로 밤낮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육십송여리론》의 주석처럼 "불타는 집에 갇혀 있던 이들이 그 곳을 벗어나고, 감옥에서 갇혀 있는 죄수들이 감옥을 탈출하려는 듯"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밤낮 없이 일어날 때 비로소 출리심이 생겼다고 본다.
[4] 보리심을 개발하는 로종 수행은 티베트 불교의 수행 체계인 보리도차제(람림)의 상사도(上士道)에 해당한다. 때문에 로종 수행을 하기에 앞서 이전 단계인 하사도(下士道)와 중사도(中士道)의 토대를 갖출 필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 불교/수행 체계 참조.
[5] 전통적으로 대승불교에서 자비는 부격(父格), 지혜는 모격(母格)에 해당한다. 자식이 아버지의 종성(種姓)을 따르듯, 반야 지혜는 성문ㆍ연각ㆍ보살 삼승(三乘)의 공통적인 원인이지만 자비의 정도에 따라 각각의 승(乘)이 구분되므로 자비를 아버지, 지혜를 어머니에 비유한 것이다. 티베트 불교 도상에서 보통 반야불모는 가운데 두 손으로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사진의 불상은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취하고 있다) 나머지 양 손에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저와 반야경을 지물(持物)로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6] 불성ㆍ여래장 계열이나 선종(禪宗)에서 방편교설로 제시하는 '진아(眞我)', '참나'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부정대상인 '참나'는 방편설이 아닌, 외도(外道)의 아트만과 같은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아(我)를 의미한다. 참고로 선종에서는 유무(有無)의 양변에 치우치지 않은 중도(中道)를 얻기 위해 갖가지 언어적 방편을 사용하는데, 가령 무변(無邊)에 치우친 경우 '한 물건(一物)'을, 반대로 유변(有邊)에 치우친 경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등을 설하여 고정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선종의 '참나' 역시 '한 물건'과 유사한 의도를 지닌 언어적 방편으로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참나'라는 방편설이 취지와는 달리 대중에게 많은 혼동을 야기하여 불교계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현재 한국 불교에서도 '참나'라는 표현을 점차 사용하지 않는 추세이다.
[7] 상(常): 상주성(常住性), 일(一): 무분(無分)의 일(一), 주재(主宰): 독립성
[8] 다른 추론들에 관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 7, 8장을 참조할 것.
[9] 분석 명상에 관한 국내 서적으로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우리가 명상할 때 꼭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
[10] 불교에서 법(法)의 독립성은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법의 독립성은 다른 법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립하는 것이고,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독립성은 다른 법의 특성에 의존하지 않고 그 법에 대한 인식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외도(外道)가 건립한 상일주재(常一主宰)로서의 아(我)는 존재론적 독립성을 내포하고, 소승 유부, 경량부와 대승 유식학파, 자립논증 중관학파가 건립한 독립적 실유(實有)로서의 아(我)는 인식론적 독립성을 내포한다.
[11] 전오식(前五識)인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식과 제6식(第六識)인 의(意)식을 가리킨다. 티베트 불교는 중관학파의 견해를 따르기 때문에 유식학파에서 주장하는 제7식 마나식, 제8식 아뢰야식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12] 티베트 불교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는 윤회를 지속시키는 업과 번뇌 등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되면 오염된 온(蘊) 또한 더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청정하고 자각하는 본성을 가진 마음의 연속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러한 연속을 단절시킬 다른 원인은 없다고 본다. 따라서 티베트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부처의 출생부터 반열반까지의 일생인 12상(相) 혹은 8상(相)은 중생을 교화하여 수행으로 이끌기 위해 보인 방편에 해당하며, 반열반 이후에도 부처의 청정한 마음의 연속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부처는 번뇌에 오염된 오취온(五取蘊)이 아닌 부처의 사신(四身)을 통해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제도행을 끊임없이 행하고 있다.
[13] 중국 근대 불교학자 여징(呂澂)은 유학의 성선론(性善論)에 영향을 받은 중국불교가 내면에 본래 갖추어진 각성(覺性), 깨달음을 중시하는 "반본(返本)" 위주인데 반해, 인도불교는 오염된 것을 청정한 것으로 전환하는 훈습(薰習), 수행을 중시하는 "혁신(革新)" 위주라고 보았다.김제란, 《세계의 불교학자 15.여징(呂澂) 》
[14] 《유가사지론》<보살지>에 따르면 보살의 종성에는 본성주종성(本性主種姓)과 습소성종성(習所成種姓)이 있다. 본성주종성은 '보살이 가진 6처의 특별한 양태이며 그와 같은 양상으로 연속적으로 내려온 것이고 무시이래로 자연적 성질에 따라 획득된 것'이고, 습소성종성은 '이전에 선근(善根)의 반복연습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종성은 종자(種子, bīja)라고도 불리는데, 종자는 식물학적 메타포로서 미래에 다른 상태로 변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나타낸다.《보살지》(안성두 譯) 이 중 본성주종성이 후대의 여래장 교설과 연관이 있지만, 《보성론》에서 볼 수 있는 일원적(一元的) 종성론과 달리 《유가사지론》의 본성주종성은 삼승(三乘)의 종성에 차별을 두는 다원적(多元的) 종성론에 해당하며 유식학파가 주장하는 구경삼승(究境三乘) 혹은 오성각별설(五姓各別說)의 근거가 된다.야마베 노부요시(Nobuyoshi Yamabe)《Once Again on “Dhātu-vāda”》 법장은 《섭대승론석》과 《유가사지론》의 종성 해석이 동일하다는 전제 하에, 《섭대승론석》의 "듣는 것에 의한 훈습(薰習)과 아뢰야식 가운데 해성(解性)이 화합한 것을 일체 성인이 깨달음의 원인으로 삼는다."는 구절에 근거하여《유가사지론》의 본성주종성과 습소성종성의 두 종성이 화합하여 하나의 깨달음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김천학, 《법장의 『화엄교분기』 종성론에 대한 균여의 이해》
[15] 중관학파에서 정의하는 불성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중관학파도 유식학파처럼 자성주불성(自性住佛性: 중생에게 갖추어진 불성)과 인출불성(引出佛性: 수행에 의해 발현되는 불성)을 말하지만 정의가 다르다. 중관학파에서 자성주불성은 '아직 번뇌가 없어지지 않은 마음의 공성(空性)'으로 붓다의 자성법신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인출불성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위한 종자(種子)'이며 붓다의 지혜법신으로 변화할 수 있는 유위(有爲)의 현상들을 가리킨다. 인출불성에는 보살지(菩薩地)를 순차적으로 성취하면서 점차 발달되는 자애, 자비, 지혜, 보리심, 믿음 같은 도덕적인 의식 상태 뿐 아니라 중립적인 심식(心識)까지 포함된다.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16]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선한 자아"라는 테제에 내재된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적 전제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과연 인식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사실이 존재하는가? 만약 존재한다면, 그러한 도덕적 사실들은 도덕 판단에 있어 언제나 "참"을 보장하는가? 무수히 많은 도덕적 선택 상황에 과연 절대적 참값이 존재하며, "내면의 선하고 참된 자아"가 그 값들을 본태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가능할지 생각해 볼 일이다.
[17] 예시로 든 생득선(生得善)은 유루(有漏)의 선법(善法)에 해당한다.
[18] 대비심(大悲心)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①중생연자비(衆生緣慈悲):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상(無常)이나 무자성(無自性)임을 깨닫지 않고 일으킨 대비심.
②법연자비(法緣慈悲): 법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자성임을 깨닫지 않고 무상임을 깨달은 지혜로 일으킨 대비심.
③무연자비(無緣慈悲): 무자성을 대상으로 하는 대비심. 중생이 무자성임을 깨달은 지혜로 일으킨 대비심.
[19] 티베트 불교에서 자기중심적 태도와 아집은 인과관계를 맺지 않아 하나가 다른 것의 원인이 되지 않으며 동질관계도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가 심상속(心相續)에 존재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하나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우리 자신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태도이고 아집은 자아가 존재하는 방식을 오해하게 만드는 요소로서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아(我)가 내재적으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견해, 어리석음의 번뇌인 우치(愚癡)에 해당한다(아집의 일반적인 의미와 불교적인 의미에 차이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번뇌장도 소지장도 아니며 따라서 윤회의 근원도 아니다. 성문, 연각은 아집을 근절하였지만 자기중심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8지 미만의 보살은 번뇌장을 제거 못해 아집이 남아있지만 반드시 자기중심적 태도가 있다고 볼 수 없다. 자기중심적 태도는 성문승, 연각승에서 해탈을 성취하게 하는 등 모든 훌륭한 활동을 하게 만드는 올바른 마음이지만, 부처를 이루기 위한 보살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버려야 할 대상이다. 보리심은 자기중심적 태도의 대치법(對治法)이고 공성을 인식하는 지혜는 아집의 대치법이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 《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
부연하자면 윤회를 벗어난 성문, 연각, 8지 이상 보살은 아집을 제거했지만, 자기 중심적 태도 혹은 이기심은 무상정등각을 이룬 붓다를 제외한 모든 중생이 갖고 있다. 그 중 보살은 보리심으로 자기 중심적 태도를 대치(對治)하는 존재다. 때로 어떤 보살은 오랜 습기(習氣)로 인해 자기 욕망을 우선시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마다 보살은 다른 중생을 위하는 이타의 보리심으로 자기 중심적 태도, 이기심을 대치(對治)해야 한다.
[20] 자신의 수행을 위해 지은 《입보살행론》을 날란다 사원의 전교생 앞에서 암송하던 중 제9장의 “모든 것은 허공과 같다(공하다)”는 구절에 이르자, 점점 높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모습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 암송을 끝까지 계속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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