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적 배경
인도 문화와 불교의 특성
한국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고 발전하여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되고 중국적 사고방식에 의해 변형된 중국불교를 수입한 것이다. 불교는 본래 유연하고 동화력이 강한 종교이므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고 특성 있게 발전한다는 것은 불교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본질과 뿌리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 중국불교나 한국불교도 근원지는 인도불교이고,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인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인 우리가 한국의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로 거슬러 올라가서 근원에서부터 재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B.C. 6~5세기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 활동했을 때 인도는 이미 인도-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가 천년 가까운 동안 발전했고, 또 인도-아리안 족이B.C. 1500년경부터 서북인도로 이주해 오기 전에 다시 천년이 넘도록 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을 창조하고 누렸던 원주민의 인더스 문명이 있었다. 그러므로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에 인도는 이미2천 년이 넘는 오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러한 문화적, 사회적 토양과 배경 속에서 불교가 탄생한 것이다. 불교는 결코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고타마 사문(沙門)’이라는 한 천재의 독창력에 의해 돌연히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이 연기법(緣起法)에 따른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불교의 발생도 많은 인(因)과 연(緣)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불교와 인도의 사상적 전통이 갖는 관계를 무시하고 불교만을 따로 떼어서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연기론적 사고방법으로써 불교의 발생 및 발전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문화와 전통들을 선입견 없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절 불교의 역사적 배경
1 문화적 배경─인더스 문명
1921년 죤 마살 경(卿)이 인더스 문명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이래 하랍파와 모헨조다로를 비롯해서 300여 군데서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남으로 봄베이, 북으로 히말라야, 동으로 델리에 이르는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화나 고대 이집트 문화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고대문명 가운데서 가장 발달한 것으로 평가한다.
B.C. 3000년에서B.C. 1500년 사이에 존속했던 인더스 문명은 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와 달리 문헌의 형태로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발굴된 유물과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으로 그 실상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하랍파와 모헨조다로의 유적은 인더스 인들이 당시의 고대문명 가운데서 가장 발달한 도시문명을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두 도시는 모두 서편 둔덕에 세워진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저지대의 시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 도시가 모두 잘 통제된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시가지는 주요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구운 벽돌을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도시계획이나 거대한 곡물창고와 성채로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기구와 능률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잘 지어진 거대한 공중 목욕소와 하수처리 시설, 그리고 위생시설이다. 집집마다 목욕탕과 하수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아 이들이 목욕과 청결을 중요시했으며, 모종의 종교적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더스 문명의 비밀의 일부를 드러내주는 다른 열쇠는 많은 양의 수공품들이다. 그 가운데는 몇 개의 돌조각과 청동조각이 발견되며,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진흙 조형(테라코타), 그리고 돌을 깎아 만든 인장(印章)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장기판과 십진법을 사용한 정확한 측량도구, 그리고 어린이의 장난감도 보인다.
테라코타 조형의 주요 소재는 동물의 수컷, 특히 황소이며, 인물조형의 경우는 반대로 다산(多産)과 관련된 여성의 모습이다. 진흙 조형보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인더스의 신앙과 종교의식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형상을 새긴 돌로 만들어진 인장들이다. 인장에는 인더스의 문자가 새겨져 있으나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인더스 인장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어 인더스 인들이 메소포타미아와 무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장에 새겨진 그림의 소재도 테라코타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수컷인데, 황소, 외뿔 가진 무소, 호랑이, 코끼리, 영양, 악어 그리고 신화적인 상상의 동물도 발견된다. 한 인장에선 물소 앞에 일렬로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동물들이 단순히 공예를 위한 소재가 아니라 종교적 예배와 의식의 대상임을 말해 준다. 동물들이 모두 수컷이고 또 뿔 달린 동물을 즐겨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이 자연의 힘, 내지는 남성적 생식력, 생명의 힘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예배의식을 통해 예배자도 그러한 힘을 받기를 기원했던 것 같다.
동물뿐만 아니라 신이나 사제(司祭)로 보이는 남성의 모습도 보인다. 머리에 뿔이 달린 장식을 하고, 낮은 평상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으며, 왼편엔 코끼리와 호랑이가, 오른편엔 외뿔소와 물소가 그리고 정면 밑에는 역시 뿔 달린 동물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주인이거나 신적인 존재로 추정된다. 동물과 더불어 나무도 성스러운 것으로서 예배 대상이 된 듯하다. 한 인장에선 길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높다란 머리장식을 한 남자가 나무 밑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뒤에서 거대한 염소가 굽어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인물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예배자를 두 마리의 코브라가 뒤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된 인장도 있다.
뿔 달린 동물의 수컷이나, 남근이 발기된 상태에서 뿔 달린 머리장식을 한 남성상은 모두 자연의 생산력 혹은 생명력을 나타낸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증거는 인더스 부지에서 발굴된 많은 양의 돌로 만든 링가(linga : 男根)상이다.
동물의 수컷이나 뿔, 링가 등이 상징하는 남성적 힘과 성력(性力)에 대한 숭배가 주로 상위 계층의 종교였다면 풍요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성신, 혹은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신앙은 대중과 가정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인더스 문명도 BC 1600년경엔 지진이나 강물의 범람 등 확인되지 않는 어떤 원인으로 몰락의 길에 들어섰고, B.C. 1500년경 아리안 족이 침입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인더스 문명의 생명력이 다해 가고 있었다. 철제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던 유목민인 아리안 족은 큰 어려움 없이 원주민을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더스의 도시가 몰락했다고 문화까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더스 문명은 민중 속에 살아남아 갠지스 강 유역이나 남인도로 확산되었다. 비록 정복당했지만 인더스 문화는 아리안 족 문화에 영향을 주어 베다 문화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아리안 문화와 혼융하여 더 커다란 종합을 이루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인장의 조각은 베다나 불교문화의 핵심인 요가나 선정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으며, 성스러운 뱀의 수호를 받으면서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에 잠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더스의 종교는 베다 문화가 대중화된 힌두교에서 시바(siva)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위대한 요기(yogi : 요가수행자)이자 동물의 주(主)인 시바는 수소 난디를 타고 다니며, 우주적 창조력의 상징인 링가로 표상된다. 또 정화(淨化)의 의식인 목욕하는 관행도 아리안 족의 문화가 아니며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라고 보인다.
2 종교 및 철학적 배경─베다(veda) 사상
베다 문화를 창조한 인도-아리안 족은 오늘날 이란이나 러시아, 그리고 유럽 인과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으로서, 모두 인구어족(印歐語族 :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인도문화의 주류는 베다를 원류로 하는 산스크리트 문화이며, 산스크리트(Sanskrit, 梵語)는 희랍 어, 라틴 어, 페르시아 어와 더불어 인구어의 가장 오랜 형태의 하나이다.
인구어의 모형(母型)을 사용하던 인도-아리안 족의 조상들은B.C. 3000년경 카스피아 해(海)와 흑해(黑海)사이의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확실치 않은 원인(자연재해로 추정됨)으로B.C. 2000년경부터 흩어져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무리는 서방으로 향해 이들이 오늘날 유럽 인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동방으로 향하였고 서(西) 투르키스탄의 초원지대에서 수세기 거주했던 듯하다. 이들은 페르시아 어와 산스크리트 어의 모어(母語)인 인도-이란 어를 사용했던 페르시아 인과 인도-아리안 인의 조상이다. 그 후 이들 중 한 무리는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이란 땅에 들어가 아리안계 이란 인의 선조가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B.C. 1500년경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 서북부의 펀잡(Punjab, 五河) 지방에 들어왔다. 이들이 바로 베다 문화의 주역인 인도-아리안 족이다.
많은 유물, 유적을 남긴 인더스 문명과 대조적으로 초기 인도-아리안 인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인구어로 전해하는 가장 오래 된 종교 문헌인 『리그 베다』뿐이다.
이것에 의하면, 인도-아리안 족은 반야만적인 유목민족으로서 육식과 술을 먹었으며 춤과 노래를 즐겼던 현실적이고 낙천적인 기질의 민족이었다. 손잡이 달린 도끼와 긴 활, 그리고 말이 끄는 수레를 전투에 사용했다. 도시와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를 건축했던 원주민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침입할 당시 인더스 문명이 이미 쇠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유목생활과 오랜 이동생활에서 단련된 체력, 말이 끄는 전차의 사용, 호전적인 무인 기질 등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원주민은 피부 빛이 검다는 의미의 ‘다사스(dasas)’로 불렸으며, 후대에 ‘다사’가 노비의 뜻으로 바뀐 것으로 미루어 선주민이4성계급의 마지막인 수드라의 신분으로 전락했다고 추정된다.
모계 중심적이고 풍요를 위해 지모신(地母神)을 숭배하며 농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던 원주민과 대조적으로 인도-아리안 족은 가부장적, 부계 중심적 대가족제도를 유지했으며, 딸보다 아들을 선호했다. 이런 습속은 오늘날 힌두 사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던 원주민과 달리 인도-아리안 족은 촌락을 기반으로 하면서 목축을 주업으로 한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벽돌을 굽거나 진흙을 구워 만든 조상이나 목욕탕, 하수시설도 없었고, 인장이나 도기(陶器)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힌두쿠쉬 산맥을 넘을 때 그들 특유의 몇 가지 문화를 인도로 들여왔다. 그것은 새로운 신들과 그들에게 바치는 찬가(讚歌), 그 찬가를 외우고 낭송하며, 신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전문가(이들이 후에 바라문 계급이 됨), 그리고 ‘소마(soma)’라고 부르는 정체 불명의 환각제(이것을 복용함으로써 르쉬[仙人]는 몰아지경에서 신들과 소통하고 찬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가부장적인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 사제촵무사촵서민으로 구성된3계급의 사회구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스크리트라는 정교하고 과학적인 언어 등이다.
초기 인도-아리안 족의 종교는 하늘, 태양, 바람, 폭풍, 비, 불, 번개 등 자연현상이 갖는 힘을 상징하는 자연신들(天, deva)에게 제화(祭火, 아그니)를 피우고 우유,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찬가(리트)를 부르고, 신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드리거나 신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은혜를 빌었다. 그 기도의 내용 역시 무병장수, 가축의 번식, 자손의 번영, 전쟁에서의 승리 등 매우 현실적이고 소박한 것이었다. 신들에 대한 이러한 찬가들은B.C. 1200∼1000년 사이에 점차로 『리그 베다』의 형태로 편집되었다.
1 베다 문헌
아리안 인이 창조한 문화를 선주민의 인더스 문명에 대해 베다 문화라고 부른다. 어원적으로 ‘베다’(Veda)는 ‘알다’라는 의미의 어근 ‘vid’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지식’을 뜻하며 베다 문헌을 ‘지식서’라고 번역한다. 베다는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도-아리안 인들의 탐구와 이해의 결과를 집성한 것으로서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인간의 저작이 아니라 신비적 직관력을 가진 르쉬(聖仙, r.s.i)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서, 즉 쉬루티(′sruti)라고 믿는다.
최초로 형성된 베다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리그 베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베다란 리그 베다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그 후 천여 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방대한 문헌의 기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의 절차와 형식이 점차 복잡해졌고, 제사의 의미나 성격도 크게 달라져 갔다. 제사가 복잡해짐에 따라 여러 명의 사제가 역할을 분담했다. 『리그 베다』의 찬가는 신을 제단에 초청하는 권청승(勸請僧, hotr.)에게 속했고, 제구를 다루고 제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행제승(行祭僧, adhvarya)이 제행에 따라 그에 적합한 제사(祭詞, yajus)를 읊었으며, 그 제사를 모은 것이 『야주르 베다』가 되었다.
그리고 『리그 베다』 가운데서 선정된 찬가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써 신을 찬미하는 가영승(歌詠僧, udga죚tr.)이 있으며, 그 노래의 모음이 『사마 베다』다. 처음엔 베다란 이 셋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차츰 민간 사이에서 행해졌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는 여러 가지 주문들을 모은 『아타르바 베다』가 제4의 베다로 추가되었고, 이것은 제사를 총감독하는 브라흐마나 승(僧)이 주관했다.
이상의4베다는 제사행위에 직접 사용되는 찬가, 노래, 제문, 주문들의 ‘집록’이라는 의미로 상히타(本集, sam.hita)라고 한다.
브라흐마나는B.C. 1500년경부터 수세기간 인도 서북부에 머무르면서 『리그 베다』을 편집했던 아리안족이B.C. 1000년경엔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델리 부근 즉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평원으로 내려온 후에 제작된 문헌이다. 이때는 바라문(사제계급), 크샤트리아(귀족계급), 바이샤(생산자)의 세 계급과 주로 아리안에게 정복된 원주민으로 구성된 수드라(노예계급)가 첨가된 사성제도(四姓制度)가 확립되었고, ‘사성제도’의 정점을 차지하는 바라문 사제들에 의해 제작된 제사 의식에 관한 문헌이 브라흐마나다.
아란야카는 힌두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네 단계, 즉 학습기(學習期), 가장기(家長期), 삼림기(森林期), 유행기(遊行期) 가운데 삼림기에 있는 바라문들이 만든 문헌으로서, 실제의 제의 대신 제의를 상징화하고 내면화시켜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한 문헌이다. 이것은 브라흐마나에서 우파니샤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중간단계를 점한다.
B.C. 800년경부터 아리안 인은 갠지스 강을 따라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바라문 중심, 제사(祭祀) 중심의 사고에서 점차 벗어나 형이상학적, 종교적 문제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수세기 간의 철학적, 종교적 모색의 결과를 모은 것이 우파니샤드다. 다음엔 베다의 사상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우파니샤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우파니샤드 이전의 사상
1) 『리그 베다』의 신관(神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 문헌인 『리그 베다』는 신(deva)들을 찬미한1,017개의 찬가 (r.c) 이루어져 있다. 한역 불전에선 천(天) 혹은 제천(諸天)으로 번역되는 ‘데바(deva)’는 ‘빛나다’라는 의미의 어근d v로부터 파생한 명사로서 라틴 어의 데오(deo)와 같은 어원이다.
신들의 거처는 보통 천(天), 공(空), 지(地)의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형식적으로 33천이라고 말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불의 신 아그니(Agni), 태양의 신 수르야(S죚vrya) 혹은 사위트르(Savitr.), 번개와 전투의 신 인드라(Indra), 소마(Soma), 새벽의 여신 우샤스(Us.as), 사법(司法)신인 와루나(Varuna), 언어의 여신 와츠(V죚ac), 하늘의 신 디아우스 피트르(Dyaus pitr.), 대지의 여신 프르티위(pr.thv ), 폭풍의 신 루드라(Rudra), 강물의 여신 사라스와티(Sarasvat ), 바람의 신 마루트(Marut), 우정의 신 미트라(Mitra), 조상의 신 야마(Yama)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 밀접히 연관되어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경이롭고 신비한 힘들을 상징화하고 신격화한 것이다. 『리그 베다』는 그러한 상징화된 힘들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경외하여 우유와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읊은 노래들의 기록들이다.
예를 들어 아그니 신은 베다 종교의 중심인 화제(火祭)의 신으로서, 소박한 베다 인들의 심성에 불은 경이롭고 두려운 힘으로 비췄다. 그것은 번개가 되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면서 양자를 결합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숲과 동물과 인간을 태우기도 하고, 고기와 야채를 음식으로 바꿈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며, 무엇보다 제사에선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을 연기의 형태로 신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므로 『리그 베다』 찬가의1/3가까이 아그니를 언급하고 있다.
소마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식물에서 추출된 환각물질로서 『리그 베다』의 시인들은 이것을 복용한 후 특수한 의식상태에서 신들과 소통하고 찬가를 읊기도 했는데, 소마 신도 그 물질이 갖는 힘을 상징화한 것이다.
불전(佛典)에서 제석천(帝釋天)으로 불리는 번개의 신 인드라는 인간을 해악으로부터 방어해 주고, 적을 정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며, 생명의 원천인 물을 방출해 주는 신으로서 『리그 베다』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고 있다.
언어의 여신 와츠는 언어와 그것의 바탕인 의식이 사회적 소통과 인간에 대해 갖는 경이로운 힘을 신격화한 것이다. 여신 우샤스는 하늘의 딸이며, 태양의 신부로서 밤의 어둠을 뚫고 나타날 태양 빛을 예기하며 희망과 기쁨을 상징한다. 또 우샤스는 잠재적 상태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둠과 혼돈으로부터 창조와 존재로의 이행을 상징하며, 또 모든 생명의 창조자인 태양(수르야 신)과의 재결합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만물을 뒤덮고 떠받치는 하늘과 대지가 갖는 경외로운 힘은 각각 디아우스 피트리와 프리티위로 신격화되었다. 디아우스 피트리는 희랍 신화의 제우스 파테르, 로마 신화의 쥬피터와 같은 근원을 갖는 신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매개하는 허공의 신인 와루나는 우주의 신성한 이법(理法)인 르타(r.ta)를 수호하는 사법신이다. 르타는 희랍 철학의 로고스에 상응하는 관념으로서 우주적 에너지에 리듬과 조화를 부여함으로써 이 세계가 혼돈과 무질서와 파괴로 나가지 않도록 통제하는 힘이다.
이렇게 존재의 기본적인 힘들을 신격화하여 이들을 찬탄하고 기뻐하고 제사드리는 것이 『리그 베다』의 종교로서, 이런 면에서 다신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다 인들은 이러한 신들과 여신들을 찬양하고 희생제를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이런 존재들 너머 더욱 근원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신성한 이법인 르타는 신들과 여신들도 그에 따라야 하는 보다 근원적인 힘이었다. 그러므로 신들에 대한 제의(yaj~na, 야냐)도 르타와 상응할 때는 신들의 도움이나 방해와 상관없이 바라는 결과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르따의 통제적 측면이 사회에 적용된 것이 다르마(dharma)이며, 후대엔 제사를 다르마와 동어어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을 넘어선 보다 근원적 존재에 대한 모색의 결과로 모든 신들을 하나로 구현한 위슈와카르만(Visvakarman, 만유의 조형자), 프라쟈파티(Praj죚qpati, 피조물의 주), 브라흐마나스파티(Brahman.aspati, 기도의 주)와 같은 추상적인 신 개념이 등장했으며, 더 나아가 인격성을 배제한 형이상학적 일원론으로까지 나아갔다. 『리그 베다』에선 “현인들은 단일자(Ekam-sat)를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라고 말하며, “현자들은 일자(一者, Ekam)를 아그니, 야마 혹은 마타리슈완 등 많은 형태로 표현한다.”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이 다수의 신들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다른 측면이라는 사상 때문에 베다의 선인들은 하나의 신을 다른 신들과 동일화시킬 수 있었고 다른 신들에 대해 관대할 수 있었다. 또한 신을 찬양드릴 때 그것에 최고 신에게 바치는 모든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뮐러는 교체신교(Kathenotheism)라고 불렀다.
요컨대 『리그 베다』는 다신교, 일신교, 교체신교 그리고 일원론이라는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2) 제사의 의미
베다의 종교는 곧 제사(yaj~na)의 종교다. 베다적 세계관에선 모든 사건과 행동은 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사가 세계의 중심이다. 마치 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돌듯이 세계는 제사 위에서 움직인다. 『리그 베다』의 원인가(源人歌, Purus.a─su죚kta)는 제사의 본질과 기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찬가다. 원인가는 천 개의 머리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발을 가진 원초적 인간인 푸루샤의 자기 희생, 즉 자기 제사에 의해 이 세계와 인간이 출현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제사는 지고의 힘이고 모든 존재는 이 힘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찬가는 또한 인간과 자연과 신들이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음을 노래하였다. 원인(源人)의 자기 희생(self-sacrifice)은 원초적 제사로서 베다 인은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밑바탕에 놓인 단일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로써 궁극적 존재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의 연결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제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원천으로 돌아감으로써 그 근원적 힘에 의해 삶과 세계를 재창조하고 재생하고자 한다. 제사란 인간과 신과 자연적 존재의 친교(親交)를 즐김이며 그 친교로부터 새로운 존재를 창조함이다. 베다의 선인에 따르면 이 친교와 그를 통한 힘의 획득은 삶을 유지하고 갱신시키는 데 필수 조건이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무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우주는 존재하는 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사엔 다음과 같은 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존재가 성취한 힘을 경축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성의 바탕으로 돌아감으로써 존재를 갱신하는 것이고, 셋째는 자기를 바침으로써 새로운 존재를 창조함이다. 제사는 단순히 신들에게 찬사와 공물을 바침으로써 그 대가로 이익과 은혜를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고 유지하려는 행위다.
그런데 제사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근원적인 힘인 르타에 상응해야 한다. 제사를 구성하는 율동적인 노래와 기도, 주의 깊게 통제된 봉헌과 예배 행위에 의해 르타의 중심으로 침투하여 궁극적 힘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만트라와 행위로 제사를 관장하는 바라문(사제)은 제사의 힘을 통해 우주를 통제한다고 여겼다.
3 우파니샤드의 사상
베다의 마지막 부분(anta)을 차지하며, 또 베다의 궁극적 취지라는 의미에서 ‘베단타(Veda죚nta)’라고도 불리는 우파니샤드는 어원적으로 자격을 갖춘 제자가 스승 가까이(upa-ni) 앉음(sad)을 의미하여, 우주와 인간의 궁극적 진리에 대한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이다. B.C. 800년 이후 수세기에 걸쳐 많은 철인(哲人)과 신비가들에 의해 형성된 이 문헌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일관된 것이 아니지만 이후의 인도 종교와 철학사상을 결정짓는 바탕이 되고 있다. 존재의 기본적 힘을 찬탄하고 존재의 근원에 회귀하여 세계와 삶의 재창조에 참여하는 행위인 제사가 아랸야까에선 내면화되고 상징화되기에 이르렀으며, 우파니샤드에 와선 그 근원적인 존재(=브라흐만, 梵)를 외적인 제사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제사, 즉 작은 나의 포기와, 참 나, 근원적인 자아(아트만)에 대한 명상적이고 신비한 지식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행위로부터 내적인 지식(직관적, 신비적 지식)으로 모색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의 요인은 초기의 낙관적인 관점이 바뀌어 생사의 반복적인 순환 즉 윤회와 삶의 피할 수 없는 한계들 즉 고(苦)의 관념이 우파니샤드 시대의 철인들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벗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그들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위(카르마)란 제사행위와 같은 좋은 행위일지라도 인과의 법칙에 따라 과보를 낳게 마련이고, 설사 내세에 조상들이 사는 하늘(天)에 태어나도 그 업력이 다하면 다시 죽어 지상에 돌아와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의 관념은 우파니샤드에서 확립된 이래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이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마침내는 그로 회귀하는 존재의 근원을 ‘브라흐만’(梵)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생사의 윤회에 영향받지 않는 불변의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된다면 더 이상 생사의 윤회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브라흐만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곧 브라흐만이 된다.”고 가르친다. 또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므로 브라흐만을 알고, 브라흐만이 된 자는 더 이상 욕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족과 지고의 축복 상태에 든다.
그러면 어떻게 브라흐만을 알 수 있는가? 브라흐만은 어떤 속성도 갖지 않고 또 모든 존재의 바탕이므로 다른 사물이나 대상을 인식하듯이 지각이나 개념적 사고에 의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브라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철인 야갸왈캬는 “그것을 안다고 하는 자는 그것을 모르는 자이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자는 아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브라흐만은 개념화될 수도 기술될 수도 없는 초월적 실재이지만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발견은 그것이 바로 가장 가까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참 나’ 즉 아트만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므로 아트만을 아는 자는 브라흐만이 되고 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가 우파니샤드의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 흔히 ‘타트 트왐 아시’(Tat-tvam-asi, 그대가 곧 그것이다) 혹은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 ‘이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리하여 존재의 힘을 축하하고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제사의 의미가 아란야카에서 내면화되었 듯이,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에 대한 모색은 인간 내면의 아트만에 대한 탐구로 내면화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제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하였다. 거짓된 나를 제사지냄으로써(자기포기, 희생) 근원적인 실재인 참 나, 대아(=아트만)로 회귀하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 우파니샤드적 제사의 의미다.
그러나 브라흐만과 둘이 아닌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최고의 가치로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트만 때문에 귀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것들은 언젠가 모두 소멸하지만 아트만은 시간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늙음과 죽음,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자 해야 하며 그것을 아는 자는 전 세계를 얻는다고 말한다.(『찬도갸)8.7~12)
그러나 아트만은 아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주체이므로 다른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으론 알 수 없다. 우파니샤드는 인드라 신이 101년이나 걸려 프라자파티 신으로부터 아트만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는 신화로써 아트만의 인식이 길고도 어려운 수련과 탐구를 요구하는 과정임을 예시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의식의 네 단계설(四位說)이나5장설(五藏說)에서 인간을 여러 가지 층으로 이루어진 심층적 존재로 분석하고 그것들이 모두 아트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아트만을 깨닫기 이전의 일상인들은 아뜨만이 아닌 신체나 감관, 마음 혹은 소유물 따위를 아트만으로 동일화하여 그에 집착한다. 그것이 바로 윤회와 고의 원인인 착각이고 무지다. 그릇된 자기 동일화에서 벗어나 아트만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와 고에서 해탈하려는 것이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목표였다.
우파니샤드에 바탕하여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킨 것이 ‘베단타’ 철학이며, 그중에서도 샹카라(A.D. 8세기경)의 아드와이타(不二) 베단타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4 베다 사상과 불교
B.C. 1500년경부터 시작된 베다 문화는 불교가 발생할 무렵인B.C. 500년경엔 이미 천년 가까운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비록 불교가 베다나 바라문, 그리고 제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문화 운동이기는 하나 베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인과응보 사상이나 윤회의 관념, 그리고 무지와 고(苦), 지(知)와 해탈, 요가와 명상(선정)의 방법 등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형성되었고, 비록 불교적으로 재해석되었을지라도 불교 특유의 관념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규범 등을 뜻하는 다르마(dharma, 法)도 『리그 베다』에서 만물에 질서와 조화를 주는 통제력인 르타(r.ta, 天則)에서 발전된, 힌두와 불교가 공유하는 관념이다. 또 『리그 베다』의 신(데바)들은 범천(梵天, 브라흐마), 제석천(帝釋天, 인드라) 등으로 불교 신화 속에 흡수되었다.
베다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하나는 라다크리슈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처럼 불교가 우파니샤드적 전통을 이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유사한 사상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적 전통과 불교는 유아적(有我的) 전통과 무아적(無我的) 전통으로 전혀 대립되는 사상이라고 하는 견해다.
앞에서 든 몇 가지 예가 시사하듯이 불교는 베다적 전통으로부터 적지 않은 덕을 입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불교를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우파니샤드의 한 갈래로 볼 수는 없다.
우선 드러나는 차이는 우파니샤드는 궁극적 실재를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이라고 적극적으로 내걸고 출발하는 데 반하여 불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스스로 체험해야 할 것(自內證法)은 말을 아끼고 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無記)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영역만을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불러 그것을5온, 12처, 18계, 12연기 등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도 비록 ‘아트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라는 유명한 문구가 가리키듯이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를 우파니샤드적 전통의 일부로 보는 것도 극단적 견해이지만, 양자를 유아론(有我論) 대 무아론(無我論)으로 대립관계에서 해석하는 것도 극단적 견해라고 생각한다. 우선 불교에서 ‘무아’(無我, ana tman)라고 할 때 부정되는 ‘아’(我, 아트만)의 의미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전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약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적(無記的) 입장에 모순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무아’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체법인 현상적, 경험적 차원에서의 인간을 이루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 즉5온에 독립적이고 영구불변한 실재성이 없음을 가르침으로써 아집과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도에서의 무아설은 불교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의4위설이나5장설도 유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교설이다. 예를 들어5장설은 신체나 생기(生氣), 마음, 의식 등이 아트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덮개(藏)라고 가르침으로써 나 아닌 것과의 그릇된 동일화와 그로 인한 집착을 소멸하고자 의도한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와 불교를 유아론 대 무아론으로 일반화하기 이전에 두 사상체계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조심스러운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의 특징은 우파니샤드의 유아론을 부정한 무아론이라기보다 무아론에 바탕하여 현상계(一切法)를 ‘연기’(緣起)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무아 → 연기 → 공 → 유식(唯識)으로 이어지는 불교적 개념들은 인도와 세계사상계에 대한 불교의 위대한 기여다.
2절 인도 문화의 특성
일반적으로 한 사물의 특성이란 다른 사물과의 비교에 바탕한 그 사물을 다른 사물로부터 구분해 주는 그 사물만이 갖는 성질을 가리킨다. 인도 문화의 경우에도 그 특성이란 우선 다른 나라나 다른 세계의 문화와 비교하여 인도만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가리킨다.
1 다양성
인도는 우선 지리적 환경이나 언어, 인종 그리고 종교와 사상의 다양성으로 특징지워진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은 먼저 지리적, 자연적 환경의 다양성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인도 문화권은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를 포함한다. 북으로는2천5백 킬로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아시아 대륙의 다른 지역과 분리되어 있으며, 남북으로3천 킬로에 뻗친 역삼각형의 인도 반도는 하나의 나라로만 볼 수 없는, 아(亞)대륙으로서 험준한 산들과 광막한 평원, 사막, 고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기후도 아열대의 타오르는 열기와 히말라야 지대의 만년설, 세계 최다 강우량과 사막의 건조함, 힌두스탄 평원의 풍요로움과 데칸 고원의 척박함 등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성격이 공존하고 있는 광할한 지역이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두번째 근거는 언어의 다양함이다. 백 가지가 넘는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그중 국가에서 공인한 주요 언어만 14개로서 전혀 다른 네 개의 어족(語族)으로 구분된다. 북부의 열 개 주요 언어들은 인구어 족에 속하는 산스크리트 어(梵語)에 바탕한 것이고 남부의 네 개의 주요 언어는 드라비다 어족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 둘은 외국어처럼 매우 다르다. 그러므로 북부 인도와 남부 인도는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며, 이것이 인도 사상과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인도 문화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또 다른 요소는 인도 대륙이 오랜 옛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주와 침입, 무역 등을 통해서 많은 민족이 만나고 교류해 온 무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B.C. 3000년경 이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검은 피부색의 문다 족, 드라비다 족을 비롯하여 인도-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 B.C. 6세기 말 다리우스1세의 서북 인도 정복에 따른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 2세기 후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과 서북 인도 침입 이후 희랍 미술의 영향(간다라 미술), 남인도와 로마제국과의 무역거래, 회교도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교도(拜火敎徒), 로마의 박해를 피해 남인도로 도피한 유대인,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이때 인도는 중국의 비단 제조술을 배워 로마에 비단을 수출함), B.C. 2세기 이후 차례로 인도에 침입한 중앙아시아의 파르티안, 스키티안, 쿠샨 족의 영향, 그리고 회교도의 침략과 무갈제국의 지배, 18세기 이후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의 침입과 150년간의 영국통치 등 전 세계의 문화가 인도에서 만났다. 그 결과 인도에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뿐 아니라 시크교, 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대교의 추종자들까지 있어 실로 세계의 종교 박물관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인도의 지리적, 언어적, 종족적, 정치적, 종교적 다양성에 또 하나 덧붙이자면 사상의 다양성이다. 인도철학사에서 우리는 세계철학사에 나타났던 거의 모든 사상의 유파를 발견할 수 있다. 일원론(베단타), 다원론(정리, 승론학파), 이원론(수론학파)이 있고, 쾌락주의적 유물론(順世派)과 고원한 정신주의가 공존하며, 숙명론(아지비카)과 회의론(산자야), 도덕부정주의가 고행주의(자이나교)나 인간의 무한한 영적 변형의 가능성을 믿는 불교나 요가 사상과 공존하고 있다.
종교 사상 역시 매우 다양하다. 불교나 자이나교는 무신론적이나 힌두교는 유신론적이고, 같은 힌두교 내에서도 일신교적인 종파가 있는가 하면 다신교적인 종파도 있다. 또 종교의 목표에 이르는 길이나 수행법도 추종자의 천성이나 기질에 따라 다양한 길이 제시되었다. 예배나 신앙은 그런 길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 밖에 지식의 길, 명상의 길, 봉사의 길 등이 있다.
세계에서 인도보다 더 다양한 문화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유화와 관용의 정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인도에는 다양한 종족과 언어, 철학체계와 종교들이 있어 왔으나 다른 나라에 비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해 왔다. 인도에선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처럼 사상 때문에 독배를 마셔야 했던 철학자가 없었고, 예수처럼 종교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했던 성인이 없었으며, 종교로 인한 박해나 전쟁도 없었다. 광신적인 교도가 없는 인도에선 자신이 따르는 종교나 사상 외의 다른 종교나 사상을 이단으로 몰거나 배제하지 않았다.
인도의 철인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실재는 단일하며, 또 그것은 언설과 개념적 사고, 분별을 넘어서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견해나 철학적 이론으로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사상과 교리나 견해들은 특정한 관점에서 본 부분적인 진리이며 전적으로 옳은 견해도 전적으로 틀린 견해도 없다. 특정 관점에서 본 나의 인식이나 견해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모두 틀렸다는 독단과 독선은 다툼과 불화와 편견으로 이끌며, 이런 태도야말로 해탈과 자유의 길에 방해가 되는 악이라고 보았다.
『리그 베다』에선 하나의 실재를 현자들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고 말한다.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종교나 교리,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만이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는 틀리다고 고집하며 다투는 사람을 불전이나 자이나 경전에선 일곱 명의 맹인과 코끼리의 우화로 풍자한다. 배를 만져 본 맹인은 코끼리는 벽과 같이 생긴 동물이라고 주장하고, 귀를 만져 본 맹인은 부채와 같은 동물이라는 등등 서로 자기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며 말다툼하나 사실은 이들 중 어느 누구의 말도 완전히 진실은 아니며, 반대로 어느 누구의 견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 모순되고 반대되는 사상도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상호보완적이며, 궁극적 실재의 한 측면을 가리키는 일면적, 부분적 진리일 수 있다. 외관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은 다양하나 그 근원과 바탕은 하나라는 사고가 인도의 관용과 유화의 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서양의 철학사가 한 철학자의 사상이 다음 철학자에 의해 비판, 부정되면서 직선적으로 발전해 왔다면 인도 사상은 여러 학파들이 동시에 공존해 왔다. 후대의 철학자는 전대의 철학자의 사상을 수용하여 재해석하고 새로운 사상을 첨가해 가면서 눈 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더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로 발전해 왔다. 인도 철학은 어떤 사상도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부분적이거나 낮은 단계의 진리로서 수용하면서 더 커다랗고 더 깊은 진리 속에 통합해 나가는 식으로 발전해 간다.
불교의 역사 속에도 인도 문화의 이러한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소승(小乘)의 성문(聲聞)과 연각승(緣覺乘)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보살승, 나아가 일불승으로 회삼귀일(會三歸一)된다. 초기불교를 수용하여 그 위에 새로운 사상을 첨가한 것이 대승불교이며 다시 대승을 수용하여 그 바탕 위에 새로운 것을 추가한 것이 밀교다. 각양각색의 불교 종파들은 불교를 분열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사상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러면서도 다양한 불교 속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관된 통일성이 있다. 이른바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이다
3 인도 종교의 특성
인도인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더욱 종교적이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라는 네 개의 종교가 인도에서 기원하였고 그중 불교는 인도를 넘어서 전 세계의 종교가 되었다. 인도인은 궁극적 실재, 지고의 가치와 힘을 나뉘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은 전체로 보았고 그것을 아트만(我), 브라흐만(梵), 푸루샤, 혹은 불성, 진여, 법계 등으로 불렀다. 개별적이고 특수하고 부분적인 현상들은 이 궁극적 실재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일시적인 드러남(顯現)이다. 그리고 이 궁극자는 바로 인간 내면 깊이 인간의 본바탕과 다름이 아닌 하나다. 인도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참 나, 혹은 불성을 회복함으로써 무상하고 분리되고 단편적인 현상에 속박되지 않는 영원한 자유(해탈, 열반)를 획득하는 것이다.
인도 종교의 공통된 특성은 인간의 일상적 삶을 무명과 업(카르마)에 기인하는 윤회의 속박과 고(苦)로 규정하고, 무명을 제거하고 속박과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요가)을 제시하는 점이다.
우파니샤드는 궁극적 실재를 적극적으로 아트만, 혹은 브라흐만이라고 부르는 데 반해 초기불교는5온을 아트만이 아니라고 표현했지만 그릇된 자기 동일화와 착각을 제거함으로써 속박과 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은 공통적 이다.
인도에도 초인간적인 신이나 불을 헌신적으로 숭앙함으로써 은혜의 힘으로 목적을 이루는 방법이 있긴 하나, 여타 종교에 비해 인도 종교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요가나 명상, 선정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직접 궁극적 실재(진리)를 실현한다는 사상이다. 인간에게는 단지 감각하고 사고하는 일상적 인식 능력뿐만 아니라, 요가 수행을 통해 개발되는 특수한 직관력 혹은 무분별지(無分別智), 반야지(般若智)가 있다. 주관과 객관의 이원적 대립을 넘어선 초월적 의식 상태에서 무차별적이고 나눠지지 않는 통합을 체험하는 신비주의가 인도 종교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나 인도의 종교는 신비주의와 정반대되는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종교이기도 하다. 인도에선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도의 종교는 철학적이고, 인도의 철학은 종교적이다. 기독교의 경우엔 종교는 유대 민족에서 기원되었고 기독교 철학(신학)은 희랍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인도의 경우엔 종교와 철학이 하나의 원천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서양의 경우처럼 종교와 철학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없다. 인도의 종교들은 무지 특히 나에 대한 무지가 미혹과 속박의 원인이므로 무지를 제거하기 위해 이 세계와 인간의 실상을 직시하고 그 본질을 통찰할 것을 가르친다. 그래서 인도에선 철학을 ‘통찰’(다르샤나), 혹은 ‘실재인식’(타트와 갸나)이라고 부른다.
인도 종교의 또 다른 특징은 내관적이고 심리학적이라는 것이다. 요가 즉, 명상은 내면의 심리과정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마음의 기능과 작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우파니샤드에선 인간의 의식을 ‘깨어 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꿈 없는 깊은 잠’ ‘초월적 의식상태’로 구분하였고, 인간의 자아를 다섯 가지 층으로 심층분석하였다. 샹캬 요가 학파나 불교의 유식학파에선 프로이트가 태어나기 천여 년 이전에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였고, 수행을 통해 무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했다. 초기불교의5온, 12처12연기설이나 아비달마의 이론들도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심리학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3절 불교 사상의 형성과 발생 과정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여 활동했던B.C. 6세기경의 인도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상적으로 커다란 변화와 전환의 시대였다. B.C. 1000년경 갠지스 강 상류지역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와 제식주의적 세계관에 바탕한 바라문 문화가 확립되었지만, B.C. 800년경엔 철제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갠지스 강 주변의 원시림을 개간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B.C. 6세기 무렵엔 갠지스 강의 중류, 하류 지역까지 개간되었다. B.C. 1000년 무렵엔 인도 문화의 중심이 갠지스 강 상류, 지금의 델리 부근이었다면, 불교가 발생했던B.C. 6세기경엔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인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발달한 철제 농기구와 갠지스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은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을 가능케 했고 잉여 농산물에 바탕하여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농촌 중심 사회에서 새로운 지역으로 개척해 들어가면서 원주민과의 혼혈도 빈번해졌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형성에 따라 바라문 중심의 사성계급 제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바라문의 절대적 권위, 제식만능주의, 베다의 절대적 신성성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치적으로는 종전의 촌락을 바탕으로 한 부족장 중심제에서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 혹은 공화제로 바뀌어 갔다. 라자(Raja)라고 불리는 군주들끼리의 영토와 권력 확대를 위한 싸움이 빈번해졌고 그 결과 군소의 부족들이 강대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초기불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중부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16대국 가운데서도 국력이 강했던 나라는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의 네 군주국이었고, 주변의 군소 국가들은 점차로 이들에게 합병되어 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카필라 왕국도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 코살라 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 대국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당시 특히 번성했던 대도시로서 참파, 라자가하(왕사성), 사바티(사위성), 코삼비, 사케타, 바라나시의6대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종래의 바라문을 정점으로 한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제식만능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농촌 중심 사회에선 브라흐마나(바라문, 사제), 크샤트리야(찰제리, 정치가, 군인), 바이샤(서민, 생산자), 수드라(노비)의 순서로 위계질서가 이루어졌으나, 새로운 시대에선 막대한 권력을 쥔 왕과 커다란 재산을 소유한 부호(長者)가 사회의 실권을 가진 가장 높은 신분으로 부상했다. 그만큼 새시대에선 바라문과 베다, 그리고 제사의 절대적 권위와 권능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전에선 종래의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가 크샤트리야, 바라문,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로 바뀌어 기술되어 있다.
이미 우파니샤드기(期)에 오면 철학적, 종교적 탐구가 바라문의 전유물이 아니고 크샤트리야나 여성들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B.C. 6세기경엔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이미 계급적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계층에서나 철학자나 구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리와 지혜는 계급을 초월한 가치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바라문이 아닌 크샤트리야 출신의 ‘고타마 사문’이 붓다(Buddha, 覺者)로서 인정받고 거대한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타(혹은 마하비라)도 크샤트리야 출신이었다.
제사 행위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인 브라흐만을 통제하고 획득하는 방법이며, 따라서 제사행위를 독점한 바라문만이 그 힘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신념에 대한 회의는B.C. 8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우파니샤드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으며,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그 절대적 힘과 지고의 가치인 브라흐만(梵)이 외적인 제사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실재하는 참 나(眞我), 즉 아트만에 대한 인식(智), 즉 자각에 의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베다 문화 자체에서도 낡은 가치와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던B.C. 6세기경의 중부 인도는 베다 문화의 흐름에 대립되는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이기도 했다. 전통과 정통적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反)문화(counter-culture) 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을 사문(沙門, raman.a)이라고 부른다.
불전에서도 바라문과 사문을 나란히 열거하고 있는데 당시 사문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바라문에 대해 새로운 시대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진보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일상적, 세속적인 의무와 책임을 벗어버리고 재가자들의 시여(施輿, 탁발)에 의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논쟁하면서 돌아다니는 출가유행자(파리브라자카)들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일화 가운데 마지막 성문 밖에서 목격한 광경이 바로 생사의 고(苦)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유행하는 사문이었고,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그 후 세속을 등지고 사문이 되어6년간의 탐구 끝에 붓다가 되었다.
당시의 인도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었으므로 수많은 사문들에 의해 각양각색의 사상들이 주장되었다. 불전(梵網經)에서는 그것을 62견(見)으로 자이나 문헌에선 363견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내용엔 윤회와 업을 인정하는 견해, 윤회와 업을 부정하는 견해,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대한 문제, 회의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62견, 363견의 경우는 그 견해를 주장한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사문과경(沙門果經)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의 다른 여섯 사문들의 사상을 기술해 주고 있다. 이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르며, 모두 특색 있는 주장을 표명한 자유사상가들이다. 이들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각자의 교단을 이끌었고, 추종자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에 이들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① 도덕부정론 :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 카사파는 인과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그는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을 행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니고 악의 과보도 발생하지 않으며, 반대로 보시를 하고 제사드리고 감관(感關)을 제어하고 진실을 말해도 선행이 아니고, 또 선의 과보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부정론은 그 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주장했으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② 숙명론 : 아지비카(A jv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 고살라는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의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도, 또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도 원인이 없는 것이며, 다만 자연의 결정과 상황과 천성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살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 영혼, 득(得), 실(失), 고, 낙(樂), 생, 사의 열두 가지 요소를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여겼다. 비록 영혼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도 원자(原子)와 같은 것이라고 본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그가 속한 교단의 명칭인 ‘아지비카’는 원래 생활법을 의미하지만 교단의 명칭으로서는 ‘생활법에 관한 규정을 엄밀히 준수하는 자’라는 뜻이고, 다른 교파에서는 ‘생계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역 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번역했다.
이 교파는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서도 불교나 자이나교도와 나란히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였고,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교세를 유지했으나 그 뒤엔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③ 유물론 :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모든 것이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와 그리고 이들 원소가 활동하는 장소로서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따위는 없으며, 인간은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네 원소가 각각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오직 현세뿐이고 내세는 없으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다.
존재론적으론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 쾌락주의인 아지타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로야타(Loka yata), 혹은 차르와카(Ca rva ka)파로 불리는 이 파는 한역 불전에선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번역한다.
④ 7요소설 : 파쿠다 카차야나는 지, 수, 화, 풍의 네 요소 외에 고, 낙, 영혼을 더해7요소를 인정했으나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만들어진 것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일도 없으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을 칼로 베어도 칼은 다만7요소 사이를 통과하는 것 뿐이며,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⑤ 회의론 :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 없이 진리 주장을 하는 독단론에 대해 산자야는 ‘내세가 있는가?’ ‘선악업의 과보는 존재하는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그런 것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애매한 답변을 하므로 ‘미꾸라지처럼 미끌미끌하여 잡히지 않는 설’이라고 불렸다. 불교의 62견 가운데는 네 가지 견해, 그리고 자이나교의 363견에서는 67종이 불가지론임을 미루어 당시 인식능력에 대해 회의한 사상가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 사리불과 목건련도 처음엔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경험의 범위를 넘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설(無記說)은 산자야로 대표되는 회의설에 바탕하여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⑥ 자이나교 :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다의 본명은 와르다마나이고, 깨달음을 얻은 후엔 마하비라(큰 영웅) 혹은 지나(승리자)라고 존칭되었다. 그의 생애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유사하여 비슷한 시대에 밧지 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고,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하여 그 후30년간 교화활동을 펴다가 72세에 입적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활동무대도 같고, 교리용어나 교단구성에서도 공통점이 많으며 경전도 빨리 어와 같은 계통의 속어(프라크리트 어)인 아르다 마가디 어로 씌어졌다.
그러나 사상적으론 다른 점이 많다. 모든 존재를 영혼(지바)과 비영혼(아지바)으로 나누고 비영혼은 다시 다르마(운동의 조건), 아다르마(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영혼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달리 상주변재하는 단일자가 아니라 다수이며 업에 따라 신체에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업(카르마)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됨으로써 그것을 윤회에 속박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미세한 업의 물질이 영혼에 부착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 방법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하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 진실어, 불투도, 불사음, 무소유의 다섯 가지 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 결과로 자이나교 특유의 종교적 관습이 생겨났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마셔서 죽이지 않도록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옷을 입지 않는 수행자도 있다. 이 때문에 불전에선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흰 옷을 입는 백의파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로 갈라져 있다. 자이나교는 인식론적으로 상대주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판단이나 견해는 특정한 관점에서의 일면적 진리이므로 반드시 ‘한 점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자야의 회의론에 대한 자이나교적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이나교는 이미 마하비라 재세시 튼튼한 교단을 형성했고, 그 후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3대 종교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인도에는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으며, 비록 소수이긴 하나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신도들이 농업을 버리고 일찍부터 상업을 주업으로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이상에서 육사외도의 사상을 간략히 조망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몇 가지 사상적 경향이 있다. 먼저 이들은 세계와 인간이 다수의 요소나 원리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브라흐만이라는 하나의 원리로부터 이 세계가 전개되었다는 바라문교의 전변설(轉變說)에 대해 다양한 요소가 결합하여 세계를 구성한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하였다.
구성요소 가운데는 심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도 원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유물론적인 색체가 짙다. 유물론에 바탕하여 인과업보나 내세, 윤회를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적 경향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인식론적으로 희의론과 상대주의도 전통적 가치와 사고방식이 붕괴되어 가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사상이다.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대립되는 태도가 공존하였다. 유물론과 연계되는 쾌락주의는 추종자가 많지는 않지만 도시 중심적인 당시 사회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불교와 육사외도의 사상과 비교해 보면 양자가 베다와 바라문과 제사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여러 점에서 입장의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적취설에 대해 불교는 실체가 없는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여 생멸한다는 연기설(緣起說)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불교는 인과업보와 내세와 윤회, 그리고 윤회로부터 해탈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런 점에선 베다에 속하는 우파니샤드와 견해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적인 면에서 불교는 회의론이나 상대주의에 대해 극히 실제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무기설(無記說), 즉 형이상학적 논쟁의 무용성을 주장한다. 또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지양한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바라문에 대립되는 사문운동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지만, 다른 사문들의 사고나 가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4절 불교의 특성
불교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불교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서울’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서울이 긴 역사를 통해 수많은 건물과 도로가 증대되면서 지금도 변화하고 있듯이, 불교도 시간적으로 2천5백 년의 긴 세월을 통해 공간적으로 남쪽으로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지로 북으로는 중앙아시아, 티벳, 네팔, 부탄, 중국, 몽고, 만주로 동으로 한국, 일본으로, 그리고 오늘날엔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세계로 확산되면서 시대와 지역의 특성에 따라 발전하고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어 변형되어 왔다.
그러므로 불교란 어떤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종교들의 집합이다. 거기엔 남방에서 신봉되는 상좌부 불교가 있고, 북방의 대승불교가 있으며, 대승불교 가운데서도 티벳불교와 중국의 선불교는 독특한 성격 때문에 다른 대승불교와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
이상은 지역에 따른 분류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세 개의 동심원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제일 가운데 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을 가리키고, 그 다음 원은 그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해석과 재해석을 통해서 발달한 불교를 가리키며, 마지막 원은 불교가 들어간 지역의 문화가 동화되어 덧붙여진 부분이다. 가운데 원이 초기불교라면, 중간의 원은 부파, 대승불교이고, 마지막 덧붙여진 것들은 우리 나라의 경우엔 산신이나 칠성신앙 같은 민간신앙이 그 예이고, 티벳은 본교라는 샤마니즘, 중국의 경우는 도교나 유교, 일본의 경우는 신도가 그 예다.
이렇게 다양한 교파들을 모두 ‘불교’라고 부르는 것은 이들이 모두 붓다께서 깨달음에 의해 무명을 소멸하여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났음을 믿고, 가르침(다르마, 法)과 그것을 통해 범부 중생들도 깨들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불ㆍ법ㆍ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각양각색의 불교에 통일성을 주는 근거다.
불교(Buddha-dharma, Buddha-s′a sana)란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깨우친 자[覺者, Buddha]의 가르침(dharma)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法)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불전 가운데서 역사적 붓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에 가장 가깝다고 하는 상좌부의 팔리 어 경전이나 한역의 아함(阿含) 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 입멸 후2∼3백 년간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다가B.C. 1세기경에 문자화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변형이나 첨삭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가르침인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이 그대로 전해진 것인지도 의문이다. 그러므로 부파에서 전해진 여러 경전들을 비교, 검토하여 공통되거나 비교적 자주 나타나는 교설은 원래의 가르침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종래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한 불교의 우월성이나 차이점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은데, 차이점과 동시에 공통점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 발생한 철학체계나 종교는 힌두교이든지 자이나교이든지 불교이든지 모두 업에 따른 인과응보와 윤회계의 고성(苦性), 그리고 윤회의 원인인 실재에 대한 무지 혹은 무명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요가와 그 결과로 얻어지는 해탈, 이런 기본적인 개념과 사고의 틀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나 아닌 것[非我]을 나와 그릇되이 동일화시키는 나에 대한 착각이 무지와 그로 인한 고(苦)의 원인이라 보고, 참 나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도 종교의 기본적이고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나 실재를 보는 방식,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설명과 해석방식, 그리고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음도 사실이다.
더욱이 사막의 종교인 셈 족의 유일신적, 권위주의적, 도그마적 종교들(유대교, 회교, 기독교)에 비하면 대조되는 점이 적지 않다.
① 불교는 다양성을 수용한다 :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문화의 특성은 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 역시 앞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단일한 철학과 종교가 아니라 다양한 철학과 종교의 집합이다. 남방불교와 북방의 대승불교, 현교와 밀교, 자력교와 타력교, 티벳불교, 선불교, 기타 중관, 유식,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등 수많은 교파와 종파들을 모두 합하여 ‘불교’라고 부른다. 이렇게 다양하지만 모두가 삼법인(三法印)을 믿고, 삼보에 귀의한다는 점에서 불교라는 통일성을 갖는다.
② 도그마(독단)의 초월 : 붓다의 가르침엔 정해진 법이 없으며[無有定法] 불법은 도그마나 독단적 교설이 아니다. 듣는 사람의 수준과 성향에 따라 설해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며, 환자의 병에 따라 처방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며, 방편시설(方便施說)이다. 유치원생에 대한 가르침과 대학원생에 대한 가르침이 같을 수 없으며 감기 환자에게 주는 약과 배탈 환자에게 주는 약이 같아선 안 된다. 그러므로 불교 교리 가운데는 근시안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가르침도 적지 않다. 궁극적 진리[勝義諦, 眞諦]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직 스스로 체험해야 하는 것[自內證, 所證法]이고, 말로 표현된 진리[所說法]는 가시설(假施說)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므로 교설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할 일종의 번뇌, 즉 병으로 본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에 비유되기도 한다. 뗏목은 강을 건넌 후엔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듯 이 교설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언어분별의 일종이다. 하나의 목적지에 이르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으며 불교의 여러 종파나 교설은 그러한 방법이다.
③ 불교는 유화와 관용의 종교다 : 다양함의 인정, 그리고 비도그마적인 특성과 관련된 불교의 또 다른 특성은 유화와 관용의 정신이다. 이것은 이미 인도 문화 일반의 특성으로서 앞에서 논의하였지만 불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불교는 긴 역사를 흘러오면서 광대한 지역으로 확산되어 왔지만, 어느 곳에서도 종교분쟁이나 종교전쟁을 일으킨 적이 없다. 위로부터의 권위나 바깥으로부터의 강요를 원치 않는 불교는 자율성과 자발성을 중시해 왔으므로 타종교의 신자를 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교세의 확장을 위해 타종교와 갈등하고 마찰하지 않는다. 타종교나 심지어는 토속적인 민간신앙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포섭하고 동화시켜 불교의 가슴 안에 껴안아 왔다. 그러므로 티벳에선 본이라는 무속신앙을 포용했고 중국에선 도교나 유교를 포용했으며, 한국에선 산신이나 칠성신앙을 포용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흑과 백으로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이므로 다른 종교도 낮은 단계의 부분적 진리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한다. 성문, 독각, 보살의3승이 마침내는 모두 일불승에 돌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는 타종교나 사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④ 불교는 인본주의다 : 서양의 사상사에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의 선언과 더불어 신(神) 중심적 사고에서 인간과 자아의 문제로 전환한 이래 인간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어 왔지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룸비니에서 태어난 직후 사방을7보씩 걸으면서 외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存)’이라는 선언으로써 처음부터 인본주의(휴머니즘)로 출발했다.
불교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다. 불교는 붓다, 즉 깨친 분의 가르침이면서[佛陀之敎] 동시에 모든 인간이 그 내면에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함으로써 가장 진화되고 완성된 인간인 붓다가 되기를 목표로 하는 종교[成佛之敎]다. 불교는 궁극적 가치와 종교적 진리(실재)가 저 멀리 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바로 인간의 삶과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치 금을 함장하고 있는 광석처럼 여래장(如來藏), 즉 여래를 품고 있는 모태다. 또, ≪열반경≫에선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가르친다. 미혹에 사로잡힌 범부들이 ‘나’라고 믿고 집착하는 것은 실은 다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5온으로서, 5온은 가아(假我)이고 비아(非我) 혹은 무아(無我)다. 그러나 참 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장 가까운 곳, 우리 존재의 심연에 감추어져 있다. 그것이 곧 여래이고 진여이고 열반이고 불성이다. 초기불교가 생멸하는5온이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고 고(苦)인데 대해 열반은 불생불멸 즉, 적정(寂靜, s~a~nti)이라고 부정적으로 표현한 데 반하여, 대승불교에선 열반은 상(常)이고 낙(樂)이고 아(我)이고 정(淨)이라고 긍정적,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열반=여래=진여=불성이 곧 참 나[眞我, 아트만]이고 대아(大我, 마하-트만)이다.
⑤ 불교는 비권위주의적인 자각의 종교다 :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 것이다. 믿음이나 신앙은 초기 단계에서 요구되는 방편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어떤 교설이든 권위 때문에 받아들이고 맹종해선 안 되며, 자신이 스스로 검토하고 실험하고 검증하여 바르다고 확인되었을 때 비로소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믿고 따르라’가 아니라 너 스스로 ‘와서 보라’(ehi passa)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불법의 특성이다. 이 점은 경직된 도그마를 거부하는 불교의 특징과 연관된 것이기도 한다.
⑥ 불교는 심리학적이고 분석적인 종교다 : 인본주의적이고 자각의 종교라는 불교의 특성과 연관된 불교의 또 다른 특성은, 불교가 세계의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인간의 의식세계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탐구하는 분석의 종교라는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본질이 마음에 있고, 궁극적 진리도 마음 속에서 발견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마음 혹은 의식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인 복합체이고 또 다양한 차원의 깊이가 있으며, 불교는 그러한 의식의 구성과 변형의 메커니즘에 대해 치밀하고 심도 있는 분석을 제공한다.
초기불교의5온, 12처, 18계설[三科], 12연기설, 그리고 부파의 아비달마 교학(중국에선 구사종), 대승의 유식설(중국에선 법상종)은 모두 미혹과 번뇌의 마음에 대한 정밀한 검토를 통해 초월적 의식 혹은 깨달음의 마음으로 변형시키기[轉迷開悟] 위한 실천적 심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서양에서 현대에 와서야 인정된 개인의식(프로이트), 집단무의식(칼 융)의 존재가 불교에선 이미 천여 년 이전인A.D. 4~5세기경에 알라야식(藏識)이라는 개념으로 유식학파의 중심이론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서양에선C. J. 융이나 에이브러햄 마슬로우의 제3세력의 심리학, 더 나아가 초개인(트랜스 퍼스널) 심리학에서 동양의 명상이나 신비체험에서 드러나는 초월적 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동양 고대의 지혜와 현대의 과학적 심리학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요가나 선불교, 유식불교에 대한 심리학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⑦ 불교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 석가모니 부처님의 시대엔 사문이라고 불리는 많은 자유사상가 내지는 구도자들이 활동했으며, 우파니샤드의 흐름에 속하는 사상가들과 더불어 갖가지 이론과 견해들이 난무하면서 서로 시비를 따지고 논쟁하기를 즐겼다. 그러는 와중에 62견, 363견, 혹은 육사외도라 불리는 이론들이 나타났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의 견해나 주장만이 옳다는 고집을 견착(見着)으로서 아집(我執)과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특히 경험의 범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나 지적 만족을 위한 이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불교의 목적은 생사윤회의 고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열반의 언덕으로 건네주는 것이며, 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을 위한 이론, 이기기 위한 논쟁을 거부했다.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세계는 시간적으로 영원한가, 끝이 있는가? 신체와 정신은 하나인가, 다른가 여래는 사후에 존속하는가, 소멸하는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침묵[無記]을 지켰다. 침묵의 이유는 회의주의나 불가지론(不可知論)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질문이 아예 문제로서 가치가 없고 무의미한 공리공론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고 또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 모습을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 비유했다. 독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이 당장 독을 제거하고 치료를 받는 대신, 이 화살을 만든 재료가 무엇이며, 누가 만들었고, 또 그것을 쏜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고 신분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현실을 떠난 요원한 이상이나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현상을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에 다름이 아니다. 범부들은 사물을 자기의 욕망이나 과거의 업력에 의해 왜곡된 의식으로 보기 때문에 실재가 아니라 자기의 주관이 투사한 영상을 볼 뿐이다. 불교는 바른 지견(知見)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서 계ㆍ정ㆍ혜의 삼학(三學)을 제시한다.
⑧ 불교는 근본적으로 수행의 종교다 : 불교는 타종교처럼 절대자를 숭배하고 찬양하고 기도드리는 종교라기보다 - 대승불교에서 이런 요소가 도입되긴 했지만 - 근본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물과 자기의 마음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요가수행(瑜伽行), 혹은 선정수행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수행의 종교다. 그러므로 출가한 스님은 다른 종교의 사제나 성직자처럼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아니라 스스로 수행하면서 남들도 이끌어 주는 수행공동체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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