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三國遺事 「義解」 삼국유사 「의해」

수선님 2023. 7. 9. 13:27

一然 일연

三國遺事 「義解」 삼국유사 「의해」

원광이 중국에 유학하다

[해제]

이 글은 신라에 본격적으로 중국 불교사상을 소개하기 시작한 원광(圓

光)에 관한 기록이다. 본래『삼국유사』에는 당 초기에 도선(道宣)이 편찬한

『속고승전』의「원광전(圓光傳)」과『삼국유사』를 편찬하던 고려 후기에 경

주지방에 전해지고 있던 『수이전(殊異傳)』에 실린「원광전(圓光傳)」의 내

용을 모두 싣고,『삼국사기』의 열전「귀산전(貴山傳)」의 내용 중에서 세속

오계와 관련된 부분과 또 다른 기록에서 백고좌법회와 점찰보 활동을 모아

엮었다. 이중 우리나라의 저술인 『수이전』의 기록을 통해 우선적으로 원

광의 생애와 활동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원광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도

선(道宣)의 기술로 자료적 가치는 높지만 중국에서의 활동을 주로 기술한

『속고승전』 부분은 제외하여 이 책을 편집하였다. 『속고승전』의 내용은 각

주에서 대비 설명하였다.

원광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고려 전기에 각훈(覺訓)이 편찬한『해동고승

전(海東高僧傳)』에도 온전한 전기가 실려 있다. 이들 전기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중국에 유학한 해와 신라에 귀국한 해에 대한 기록은『수이전』과『해

동고승전』 그리고『삼국사기』가 모두 같다. 그러나 죽은 해와 산 나이 등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수이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다른 기록은 각주에서 함께 검토하여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원광은 출가하여 삼기산에서 혼자 수행하다가 신인의 권유로 중국에 가

서 불법과 유학을 익혔다. 11년 만에 귀국하여 대승 경전을 강의하였으며,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에 중국의 군대가 신라를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글

을 짓기도 하였다. 귀산과 추항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세속에서 지킬 수 있는 오계를 알려주었고, 일반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가서사(嘉西寺)에 점찰보(占察寶)를 설치 운영하였다. 덕와 의가 높다고

이름났으며 문장도 뛰어나, 신라 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역주]

원광1)이 중국에 유학하다

경주2) 안일호장(安逸戶長)3)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고본(古本) 『수이전

(殊異傳)』4)에 실려 있는「원광법사전(圓光法師傳)」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법사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5)이고 왕경(王京) 사람이다. 처음에 승려

가 되어6) 불법을 공부하였는데, 나이 30세에 고요한 곳에 살면서 수도하려

는 생각을 하여 홀로 삼기산(三岐山)7)에 거주하였다. 4년 후 한 비구가 그곳

에 와서 (원광이) 거주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암자8)를 짓고 2년

을 거주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사납고 주술을 수련하기를 좋아하였다.

(하루는) 법사가 밤에 혼자 앉아 경(經)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신(神)의

소리가 나더니 (법사의) 이름을 불렀다. “훌륭합니다. 훌륭합니다. 그대의

수행이여. 수행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법(法)에 맞게 수행하는 사람은 드뭅

니다. 지금 근처에 있는 비구를 보니 재빠르게 주술만 닦고, 얻는 바가 없

이 시끄러운 소리로 다른 사람의 고요한 마음을 흩뜨릴 뿐입니다. 또 (그

가) 머무는 곳은 나의 갈 길을 막고 있어서 매번 오고 갈 때마다 나쁜 마음

이 일어날 정도입니다. 법사는 나를 위해 그에게 말을 해서 다른 곳으로 옮

기라고 해주십시오. 만일 그곳에 오래 머무르면 아마도 나는 죄업을 짓게

될 것입니다.”

다음날 법사가 가서 “내가 어젯밤에 신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비구는 다

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있

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비구는 “지극한 수행을 하는 사람도 악

마에게 현혹되는가 봅니다.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을 걱정하십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그날 밤 신이 다시 와서 “어제 내가 말한 것에 대해 비구

가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하고 물었다. 법사는 신이 화를 낼까 걱정하

여 “끝내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강하게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

까?”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신은 “나는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찌 말

을 조금 보탭니까? 단지 가만히 내가 하는 것을 보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인사하고 가버렸다. 밤중에 벼락치는 것 같은 소리가 있었는데 다음날 아

침에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머물던 암자를 묻어버렸다.

신이 다시 와서 말하였다. “법사가 이것을 보니 어떻습니까?” 법사가 “보

니 대단히 놀랍고 두렵습니다.”고 대답하자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나이는 거의 3천살이고, 신술(神術)이 매우 뛰어납니다. 이것은 작은

일인데 어찌 놀랄 일이겠습니까? 또한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법사가 오직

이곳에서 머무르기만 한다면 비록 자리(自利)의 수행은 있어도 이타(利他)

의 공(功)은 없고, 현재에 이름을 높이 떨칠 수 없으니 미래에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중국에서 불법(佛法)을 배워서 이 나라의 미

혹한 사람들을 인도하려하지 않습니까?” 법사는 “중국에서 도(道)를 공부

하는 것은 본래 바라는 바이지만 바다는 멀고 육지는 막혀 있어 스스로 지

나지 못할 뿐입니다.”고 대답하였다. 신이 중국에 가도록 행할 계책을 자세

히 가르쳐 주었다. 법사는 그 말대로 하여 중국에 들어가9) 11년을 머물며

삼장(三藏)10)을 두루 공부하고 유학(儒學)까지 함께 익혔다.11)

圓光西學12)

東京安逸戶長貞孝家, 在古本殊異傳, 載圓光法師傳曰.

法師俗姓薛氏, 王京人也. 初爲僧學佛法, 年三十歲, 思靜居修

道, 獨居三岐山. 後四年有一比丘來, 所居不遠, 別作蘭若, 居

二年, 爲人强猛好修呪術. 法師夜獨坐誦經, 忽有神聲呼其名.

“善哉善哉, 汝之修行, 凡修者雖衆, 如法者稀有. 今見隣有比

丘, 徑修呪術而無所得, 喧聲惱他靜念. 住處礙我行路, 每有去

來幾發惡心. 法師爲我語告, 而使移遷. 若久住者, 恐我忽作罪

業”. 明日法師往而告曰, “吾於昨夜有聽神言, 比丘可移別處,

不然應有餘殃.” 比丘對曰,“ 至行者爲魔所眩, 法師何憂狐鬼

之言乎?” 其夜神又來曰, “向我告事, 比丘有何答乎?” 法師恐

神瞋怒而對曰,“ 終未了說, 若强語者, 何敢不聽?” 神曰,“ 吾

已具聞, 法師何須補說? 但可黙然見我所爲.” 遂辭而去. 夜中

有聲如雷震, 明日視之, 山頹塡比丘所在蘭若. 亦來曰,“ 師見

如何?” 法師對曰, “見甚驚懼.” 神曰, “我歲幾於三千年, 神術

最壯. 此是小事, 何足爲驚. 但復將來之事, 無所不知, 天下之

事, 無所不達. 今思, 法師唯居此處, 雖有自利之行, 而無利他

之功, 現在不揚高名, 未來不取勝果. 盍採佛法於中國, 導群迷

於東海?” 對曰,“ 學道中國,是本所願, 海陸逈阻, 不能自通而

已.” 神詳誘歸中國所行之計. 法師依其言歸中國, 留十一年,

博通三藏兼學儒術.

1) 원광(圓光):신라의 고승. 전기에 따라 생몰년과 출가한 곳과 나이 등이 다르다.

『속고승전』에 따르면 532~630년,『수이전』에 따르면 554~637년이 된다. 원광

은 출가하여 삼기산에서 혼자 수행하다가 신인의 권유로 589년에 중국에 가서

불법과 유학을 익혔다. 성실, 열반, 반야, 섭론을 주로 수학하였다. 600년에 귀

국하여 경론을 강의하였으며,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에 중국의 군대가 신라

를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글을 짓기도 하는 등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였다. 청

도의 가서사(嘉西寺)에서 지내며 귀산과 추항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세속에서 지킬 수 있는 오계를 알려주었고, 일반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

해 점찰보(占察寶)를 설치 운영하였다. 불교사상의 발전과 점찰 수행의 보급 그

리고 지방사회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신라불교 발전에 큰 자취를 남겼다.

2) 원문의 동경(東京)은 경주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수도인 개경에 견주어 평양

을 서경(西京), 경주를 동경이라고 하였다.

3) 안일호장(安逸戶長):호장(戶長)은 고려·조선시대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해당 고을의 말단 실무행정을 총괄하였다. 목종(穆宗) 1년(998)에는 70

세가 되어 호장으로서 은퇴한 이들을 안일호장이라고 하고 퇴역전(退役田)으로

그 직전(職田)의 반을 주었다. 안일호장은 일종의 명예직인 셈이다.

4)『수이전(殊異傳)』:작자 미상. 통일신라 후기에 쓰여진 한문 설화집. 본래 이름

은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이다.

5) 설씨(薛氏)는 신라 육부의 한 성씨이다. 왕성인 김씨나 박씨보다 신분이 아래로

생각되어 육두픔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속고승전』에는 박씨(朴氏)이고

삼한의 진한(辰韓)인이라 하였다. 이처럼 신라 귀족 출신 인사의 성씨에 대해서

는 기록에 따라 다른 경우가 더러 있다.

6)『속고승전』에는 처음에 노장(老莊)과 유학(儒學)을 공부하고 제자(諸子)와 역사

를 배워 문명을 떨쳤는데 박학함이 중국에 못 미쳐 25세에 배를 타고 진(陳)나

라 금릉(金陵)에 가서 공부하였다고 하였다.

7) 삼기산(三岐山):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에 있는 산. 금곡산(金谷山)이라고

도 불리는데 3줄기의 시냇물(溪流)이 합쳐져서 삼기산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곳

에는 현재 금곡사의 터로 생각되는 폐사지가 남아 있다.

8) 원문에는 난야(蘭若)라 하였다. 난야는 aran3 ya의 음을 번역한 말로 비구들의 수

행처를 말한다. 는 발음에 의해 아란나(阿蘭那), 아란야(阿蘭若), 아란야가(阿蘭若

迦), 아련야(阿練若)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고, 뜻에 따라 무쟁성(無諍聲), 한적(閑

寂), 원리처(遠離處)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난야는 아란야의 약칭이다. 원래 수

행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이상 떨어진 한적한 곳에 위

치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이러한 장소에서 출가자들은 세속과 떨어진 채 두타행

을 실천하여야 했다. 그러한 실천 수행을 아란야행(阿蘭若 行)이라고 하며, 초기

대승이후 그러한 실천행이 강조되었다. 후에는 사찰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었

지만 본래적 의미로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 문장에서의 난야도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암자와 통하는 것이다.

9)『속고승전』에는 출가 전에 도가, 유교, 제자백가와 역사를 공부하고 몇십년 만

에 돌아왔다고 하였다.『속고승전』의 생몰년(532~630)으로 계산하면 556년이

된다.『삼국사기』에는 원광의 입진(入陳)년이 589년, 귀국년이 600년이라 하였

다.(『삼국사기』에는 원광에 대해 589년 입중, 600년 귀국, 608년 걸사표 작성, 613년

백고좌회 설법 등 여러 연대 기록이 있다.) 여기의『수이전』에 따르면 30세에 삼기

산에 들어가 4년 수도하고 다시 2년 뒤에 산신의 권유로 유학하였다 하였으니

36세가 된다. 11년 동안의 중국 유학 기간이『삼국사기』와 같다. 84세를 살았다

하였으니 이에 따르면 생몰년은 554년~637년이 된다.

10) 삼장(三藏):부처가 설한 경전인 경장(經藏),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규칙인 율

장(律藏), 경에 대한 뜻을 밝힌 논장(論藏). 곧 불교의 모든 전적을 말한다.

11)『속고승전』에는 중국 생활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처음에 장엄사(莊嚴寺) 승

민(僧旻) 제자의 강의를 듣고 진왕에게 출가를 요청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

았다. 강석(講席)을 두루 찾아 배우니 성실(成實)과 열반(涅槃)을 비롯하여 삼장

(三藏)과 석론(釋論)을 두루 공부하였다. 뒤에 오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가서

관법을 수행하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4아함과 팔정(八定)을 수련하

며 평생을 마치고자 하여 인사(人事)를 끊고, 성인의 자취를 유람하면서 속세를

멀리하였다. 한 신도의 요청에 따라 강의하기 시작하여 『성실론(成實論)』과 『반

야경(般若經)』을 강설하고 널리 중생들을 인도하였다. 외국에서의 전교활동이

었지만 명망이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나라 문제가 천하를 통

일하고 진나라에 들어오자 원광은 군대에 붙잡혀 죽게될 처지가 되었는데, 수

나라 대장이 절탑이 불타는 것을 보고 뛰어갔더니 불은 없고 원광만 탑 앞에 결

박되어 있어 그 이상함을 알고 풀어 놓아주었다. 589년에 수의 서울에 가서 섭

론(攝論)을 공부하여 명망을 떨쳤다. 공부가 다 이루어지자 신라에 돌아가고자

하였다.

12)『삼국유사』의해편 원문 대본은 韓6 p.340a1~354c9.

진평왕(眞平王)13) 22년(600) 경신년에〈『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음 해인

신유년에 돌아 왔다고 하였다.14)〉법사는 행장을 차려 동쪽으로 돌아가려 하였

는데, 마침 중국(에 와 있던) 사신을 따라15) 귀국하였다.16) 법사는 신에게

감사하려고 전에 머물던 삼기산의 절17)에 갔다. 밤이 되자 신이 와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바다와 육지 먼길을 가고 돌아옴이 어떠하였습니

까?” 법사가 대답했다.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 신이

말했다. “나 또한 신에게서 계(戒)를 받아 다음 세상에서도 계속 서로 도와

주는 약속을 맺고자 합니다.” (법사가) 다시 청하여 말했다. “신의 진짜 모

습을 볼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말했다. “법사가 나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내일 동이 틀 때18) 동쪽 하늘의 끝을 보십시오.” 법사가 다음날 그곳을 바

라보니 커다란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에 신이

다시 와서 물었다. “법사는 나의 팔을 보았습니까?” 법사는 대답했다. “보았

는데 대단히 신기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에서는 비장산(臂長山)이라고 부른

다〉19) 이에 신이 말했다. “비록 몸을 가지고 있지만 죽음만은20) 면할 수 없

습니다. 나는 어느 달 어느 날에 그 고개에서 몸을 버릴 것입니다.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영혼을 전송해 주십시오.” (법사가) 약속한 날을 기다려

서 가서 보니 옻칠처럼 새까만 늙은 여우 한 마리가 헉헉거리며 숨을 쉬지

못하다가 곧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귀국하자 우리나라의 국왕과 신료들은 지극히 공

경하여 스승으로 삼았고,21) (법사는) 늘 대승경전(大乘經典)을 강의하였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항상 변경을 침입하여 왕이 이를 매우 걱정하고 수

(隋)나라에 〈당(唐)이 맞다22)〉군사를 요청하고자 법사에게 걸병표(乞兵表)를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23) (그 글을) 황제가 보고서 30만 군사로 직접 고구려

를 정벌하였다. 이 일로 인해 법사가 유학에도 통한 것을 알게 되었다.24)

년 84세로 입적(入寂)하여25) 명활성(明活城)26) 서쪽에 장사 지냈다.27)

眞平王二十二年庚申,〈三國史云明年辛酉來〉 師將理策東還, 乃隨

中國朝聘使還國. 法師欲謝神, 至前住三岐山寺, 夜中神亦來.

呼其名曰,“ 海陸途間 往還如何.” 對曰,“ 蒙神鴻恩 平安到訖.”

神曰,“ 吾亦授戒於神, 仍結生生相濟之約.” 又請曰,“ 神之眞

容, 可得見耶?” 神曰, “法師若欲見我形, 平旦可望東天之際.”

法師明日望之, 有大臂貫雲 接於天際. 其夜神亦來曰, “法師見

我臂耶?” 對曰,“ 見已甚奇絶異.”〈因此俗號臂長山.〉 神曰,“ 雖有

此身, 不免無常之害. 故吾無月日捨身其嶺, 法師來送長逝之

魂.” 待約日往看, 有一老狐黑如漆, 但吸吸無息, 俄然而死.

法師始自中國來, 本朝君臣敬重爲師, 常講大乘經典. 此時, 高

麗百濟常侵邊鄙, 王甚患之, 欲請兵於隋〈宜作唐〉, 請法師作乞

兵表. 皇帝見, 以三十萬兵 親征高麗. 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

享年八十四入寂, 葬明活城西.

13)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 휘는 백정(白淨). 진흥왕(眞興

王)의 손자이며 동륜(銅輪)태자의 아들로서 숙부 진지왕이 화백회의에서 폐위

되어 즉위하였다.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이루

었다. 초기에 위화부(位和府)·선부서(船府署)·조부(調府)·승부(乘府)·예부(禮

部) 등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관서를 설치하여 관청 체계를 조직화

하고 부서간의 분업체제를 확립하고 말기에는 왕궁 업무를 맡는 내성(內省)을

두고 관원을 증원하는 등 지속적인 제도 정비를 통해 독자적인 왕권을 확립하

였다. 즉위 6년(584)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시용함

으로써 대외적인 자주성을 과시하였다. 한편 통일왕조 수・당과 빈번한 외교관

계를 수립하고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국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

는 등 불교 진흥과 문물 수용에도 앞장섰다. 진흥왕대의 영역 확장 이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잘 막아냈다. 딸인 덕만이 왕위

를 계승하여 최초의 여왕 선덕왕(善德王)이 되었다.

14)『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진평왕 22년 경신(庚申)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신유년이라 한 것이 이 세주의 내용을 고본『수이전』의 찬자가『구삼

국사』를 보고서 붙인 때문인지, 아니면 일연이 잘못 세주를 붙인 것인지 명확하

지 않다.

15)『삼국사기』신라본기 진평왕 22년에는 조빙사(朝聘使) 나마(奈麻) 제문(諸文)과

대사(大舍) 횡천(橫川)을 따라 귀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6)『속고승전』에는 신라에서 원광의 소식을 듣고 수나라에 돌려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하여 칙명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하였다. 원광이 갔다가 돌아

온 것이 수십 년만이었고, 신라 진평왕은 직접 만나보고 성인처럼 공경했다고

하였다.

17) 금곡사(金谷寺)를 가리킨다. 금곡사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비장산에 있

던 절이다. 금곡사는 선덕왕과 김양도(金良 圖)의 병을 낫는 등 많은 이적을 보였

던 밀교 교승 밀본(密本)이 주석했던 절이다. (『삼국유사』권5 密本摧邪 참조)

18) 원문에서 평단(平旦)이라 하였다. 평단은 동이 틀 때를 말한다.

19) 금곡산에서 북쪽 무릉산까지 이어진 산줄기를 긴 팔뚝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비장산(臂長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20) 원문의 무상지해(無常之害)는 죽음을 말한다.

21)『속고승전』에는 원광이 성격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가

졌으며 말할 때 늘 미소를 머금으며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

왕이 의복과 약과 음식 등을 손수 마련하여 복을 독차지하려 하였다 하고, 원광

이 죽기 전에 왕이 위문하며 백성을 구제할 것을 여러 번 부탁했다고 하였다. 일

반 사람들의 원광에 대한 존경 또한 대단했다고 하였다.

22)『삼국사기』신라본기에 진평왕 30년(608)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원광에

게 걸사표를 짓게 하였다 하였으니 당(618~907)이 아닌 수가 맞다.

23)『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평왕 30년(608)에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하여

원광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였는데 이에 대해 원광은 승려의 직분에는 어긋나지

만 백성으로서 다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24)『속고승전』에는 오가는 국서(國書)가 모두 원광의 가슴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25)『속고승전』에는 630년에 99세로 황륭사(皇隆寺)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다. 그

런데 이 기록은『속고승전』의 바로 앞 기록인 건복 58년(641)에 몸이 불편하여

7일만에 입적하였다는 기사와 배치된다. 이에 따라 원광의 생몰년을 각각의 기

록을 따라 532~630년 또는 542~640년, 543~641년 등 여러 가지로 추정한다.

26) 명활성(明活城):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명활산 정상에

쌓은 성. 둘레 약 6000m로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본기 실성왕 4

년(405)조에 명활성에 관한 기사가 있으므로 실성왕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

정되는데 축성 형식도 신라 초기 형식을 보이고 있다. 명활산은 경주의 동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다.

27)『속고승전』에는 원광의 신이를 사후 일화를 덧붙여 적고 있다. 아이가 태아 상

태로 죽었는데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아이를 묻으면 후손이 끊어지지 않는다

는 말이 있어, 원광의 무덤 옆에 죽은 태아를 묻었더니 바로 그날 그 태아의 시

체에 벼락이 쳐서 밖으로 내던져졌다. 그래서 전에 원광을 공경하지 않던 사람

들도 모두 우러러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광의 제자 원안(圓安)의 간단한

전기를 싣고, 원안이 기록한 원광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왕이 병환이 나서 낫지

않자 원광을 궁중에 청해서 밤마다 법을 설하고 계를 받아 참회하게 했더니 얼

마 후에 병이 나았다. 원광은 정법을 널리 펴 해마다 두 번 강론하여 후학을 양

성하고, 보시로 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충당하여 남은 것은 가사와 발우

뿐이었다는 것이다.

또『삼국사(三國史)』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어진선비인 귀산(貴山)28)이란 사람은 사량부(沙梁部)29)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箒項)30)과 벗이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상의하기를 “우리들은

선비와 군자와 함께 교류하려고 하는데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가짐

을 올바로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모욕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어

진 사람 곁에 나아가 도(道)를 묻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원광법사

가 수(隋)나라31)에 유학하고 돌아와 가슬갑(嘉瑟岬)32)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도 하는데 모두 방언이다. 갑(岬)은

세속에서 고시(古尸)라고 하므로 혹 고시사(古尸寺)라고도 하는데 갑사(岬寺)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천보 정도에 가서현(加西峴), 혹은 가슬현(嘉瑟峴)

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으니 이것이다.〉

두 사람이 그 문하에 나아가 말하기를, “세속의 선비가 어리석어 아는 바

가 없으니 한 마디를 내려주시어 평생의 교훈으로 삼게 해주기를 바랍니

다.” 원광이 말하기를, “불교에는 보살계(菩薩戒)33)가 있는데 그 조항이 10

가지이다. 그대들은 다른 사람의 신하로서 아마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 임금을 충성으로 섬길 것, 둘째 부

모를 효도로 섬길 것, 셋째 벗을 신의로 사귈 것, 넷째 전쟁에 임해서 물러

나지 말 것, 다섯째 산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할 것 등이다. 그대들은 이것

을 지키고 소홀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만 산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는 것은 알지 못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원광은 “육재일(六齋日)34)과 봄·여름에는 죽이지

않으니 이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다. 가축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과

소와 닭과 개를 이름이고, 작은 생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 점

도 안 되는 것을 이름이니 이는 산 것을 가리는 것이다. 이 또한 필요한 만

큼만 하고 많이 죽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세속의 좋은 계율이다.”라고 하

였다. 귀산 등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이를 받들어 실천하고 어김이 없

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뒷날 두 사람은 전쟁에 나아가 모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35)

또 건복(建福) 30년(613) 계유년 가을에 〈곧 진평왕이 즉위한 35년이다〉 수

(隋)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신라에) 왔다. 황룡사(皇龍寺)36)에서 백

좌도량(百座道場)37)을 개최하고 여러 고덕(高德)들을 초청하여 경전을 강

의하게 하였는데 원광이 가장 위에 자리하였다.38)

又三國史列傳云. 賢士貴山者, 沙梁部人也. 與同里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 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持身, 則恐不

免於招辱. 盍問道於賢者之側乎.” 時聞圓光法師入隋回, 寓

止嘉瑟岬〈或作加西 又嘉栖 皆方言也. 岬俗云古尸 故或云古尸寺 猶言岬寺

也. 今雲門寺東九千步許 有加西峴, 或云嘉瑟峴. 峴之北洞有寺基, 是也.〉. 二

人詣門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

誡.” 光曰, “佛敎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

堪. 今有世俗五戒, 一曰 事君以忠, 二曰 事親以孝, 三曰 交友

有信, 四曰 臨戰無退, 五曰 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

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特未曉也.” 光曰“ 六齋日

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

肉不足一臠, 是擇物也. 此亦唯其所用, 不求多殺. 此是世俗之

善戒也.” 貴山等曰, “自今以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後二人

從軍事, 皆有奇功於國家.

又建福三十年癸酉〈卽眞平王卽位三十五年也〉秋, 隋使王世儀至,

於皇龍寺設百座道場, 請諸高德說經, 光最居上首.

28) 귀산(貴山, ?~602):신라 진평왕 때 인물. 아찬(阿飡) 무은(武殷)의 아들로 추항

(箒項)과 함께 원광에게 세속오계의 가르침을 받았다. 진평왕 19년 백제와의 아

막성(阿莫城) 전투에 추항과 함께 소감(小監) 직책으로 출전하였다가 전사하였

고 이후 나마(奈麻)의 관등을 추증 받았다.(『삼국사기』 권45 열전 貴山)

29) 사량부(沙梁部):신라 6부의 하나. 양부와 더불어 육부체제의 중심을 이루었다.

30) 추항(箒項, ?~602):신라 진평왕때 인물. 귀산과 함께 원광에게 세속오계를 받았

다. 백제와의 아막성 전투에 귀산과 함께 소감(小監) 직책으로 출전하였다가 전

사하였고 이후 대사(大舍)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31) 수(隋):581~618. 중국 남북조를 통일하여 세운 나라. 북주의 황실과 인척이던

양견(楊堅, 文帝 재위 581~604)이 581년에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열

고, 589년에 남조 진을 멸망시켜 300년간의 분열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문제의 둘째 아들인 양제(煬帝, 재위 604~617)가 604년에 부왕을 시해하고 왕위

에 올랐다. 돌궐을 쳐 판도를 넓혔으나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고

구려를 침공하려다 실패하는 등 실정이 계속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618

년에 멸망하였다.

32)『삼국사기』권45 열전 귀산(貴山) 항목에는 귀산이 가실사(加悉寺)에 머물고 있

는 원광을 찾아 세속오계를 들었다 하였다. 가슬갑은 가슬사, 가서사(嘉栖寺)와

같은 절로 운문사 영역에 있던 절이다.

33) 보살계(菩薩戒):원래는 대승의 보살들이 지키는 계율로서 나타난 것인데 십중

(十重)·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설한『범망경(梵網經)』율장품(律藏品)과 소

승의 비구계와 같은 250계를 설한『선계경(善戒經)』이 근거가 된다. 전자는 종

래의 교단이 출가자를 위한 비구계와 재가자를 위한 팔관계(八關戒)를 둔 것과

달리 출가와 재가를 포괄하는 새로운 대승의 계율을 제시한 것이고, 후자는 종

래의 출가자를 위한 계율을 대승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불교계에서는 출가자를 위한 계율로서는 종래의 비구계를 사용하

면서『범망경』의 보살계를 재가신자를 위한 계율로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보살

계 10가지는 10중계를 가리킨다. 10중계는 살생하지 말라(不殺戒), 주지않은 것

을 훔치지 말라(不偸盜戒), 음행하지 말라(不婬戒),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戒),

술을 사지 말라(不酤酒戒), 남의 잘못을 말하지 말라(不說過戒), 자신을 칭찬하

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不自讚毁他戒), 아끼지 말라(不慳戒), 성내지 말라(不瞋

戒),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戒) 이다.

34) 육재일(六齋日):불교에서 특별히 몸가짐을 조심하며 마음을 단정히 하는 여섯

잿날로 매월의 8·14·15·23·29·30일이다. 인도불교에서는 원래 이 날에 재가

신자들은 사원에서 생활하며 재가자들이 지켜야 할 8가지 계율(八關)을 실천

하였다.

35)『삼국사기』에 의하면 귀산과 추항은 진평왕 24년(602) 8월에 백제가 아막성(阿

莫城)을 공격하였을 때 맞아 싸우다 전사하였다.

36) 황룡사(皇龍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던 절.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이 절은 칠처가람지(七處伽藍址:과거 7불이 주석했다는 경주 일원

의 일곱 사찰의 유적지)의 하나로서 규모나 사격(寺格)에서 신라 제일의 사찰이

며, 신라의 사상과 예술에서도 그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진흥왕 14년(553)에 새

궁궐을 월성 동쪽에 짓다가 거기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으므로 이를 고쳐 황

룡사라 하고 17년 만인 569년에 완성하였다. 이어 574년에는 3만 5천근의 장륙

상을 완성하고 584년에 금당이 이루어졌으며 645년에 높이 225척의 장대한 구

층목탑이 세워졌다. 49만근의 거대한 황룡사종이 있었고, 장륙상과 구층탑이

신라 삼보로 꼽힐 만큼 신라불교의 상징이었다. 고려 고종때 몽고 침공시에 소

실되어, 지금은 중문(中門)·목탑·금당(金堂) 등 주요 건물의 초석과, 금당 뒤쪽

으로 강당 자리와 회랑이 있었던 유지가 남아 있다.

37) 백좌도량(百座道場):백 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여는 도량. 대개 『인왕호국반야바

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婆羅蜜多經)』을 강설하며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과 기

후가 순조롭기를 비는 법회를 말한다. 이는 이 경에 국가가 혼란해지려 하거나 재

난이 있고 적이 침공하여 파괴하려 할 때 국왕이 이 경을 독송하고 도량을 장엄하

고 백 개의 불상과 백 개의 보살상과 백 개의 사자좌를 안치하고 백 명의 법사를

초빙하여 이 경을 해설하도록 하며 향과 꽃과 갖가지를 크게 공양하여 국왕과 대

신과 사부대중이 법대로 수행하면 재난이 없어진다고 한 데 따른 것이다.

38)『삼국사기』신라본기에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논의하여 말한다.

법흥왕(法興王)39)이 불법(佛法)을 전파한 이래 다리40)는 놓였지만 그 깊

은 사상은 전해질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마땅히 귀계(歸戒) 멸참(滅懺)41)

의 법으로 어리석은 대중들을 깨우쳐 주어야 했다. 그래서 원광은 자신이

머물던 가서사(嘉栖寺)에 점찰보(占察寶)42)를 설치하고 항상적인 규칙으

로 삼았다. 당시에 비구니 단월(檀越)43)이 있어 그 점찰보에 토지를 시납하

였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44) 토지 1백결이 그것으로서 옛 문서가 지금

도 남아 있다.

원광은 성격이 고요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였고, 말할 때 늘 미소를 머

금으며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45) 나이가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대

궐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의 여러 선비들 중에 덕과 의리가 있는 사람으

로 그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었으며 문장의 뛰어남도 한 나라가 그에게 쏠

릴 정도였다. 나이 80여세로 정관(貞觀)46)연간에 입적하였는데 승탑이 삼

기산 금곡사(金谷寺)에 있다.47)〈지금 안강(安康)의48) 서남쪽 골짜기로 또한 명활산

의 서쪽이다.〉

『속고승전』49)에서는 황륭사(皇隆寺)50)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곳

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황룡사를 잘못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

각된다. 분황사(芬皇寺)51)를 왕분사(王芬寺)라고 한 것과 같은 예이다.

위에 언급한 중국과 우리나라 두 전기의 기록에 의하면 성씨를 박씨(朴

氏)와 설씨(薛氏)라고 하고 출가한 곳을 중국과 신라라고 하는 등 마치 다

른 두 사람을 얘기한 것 같아서 감히 분명하게 정할 수 없다. 그래서 둘 다

수록하였다.

그러나 여러 전기들에서 모두 작갑(鵲岬)52)과 이목(璃目)53)과 운문사(雲

門寺) 등의 일은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 김척명(金陟明)이

함부로 항간의 이야기를 윤문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 운문사(雲門

寺)54) 개산조인 보양(寶壤)스님의 사적을 잘못 기록하고 (두 스님의 사적

을) 합하여 한 사람의 전기를 만들었다. 뒤에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55)

을 편찬한 사람이 이 잘못을 이어서 그대로 기록하였고, 이로 인해 지금 사

람들이 많이 잘못 알고 있다. 여기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한 자도 더하고

빼지 않고 두 전기의 기록을 자세히 수록하였다.

진(陳)56)나라와 수(隋)나라 때에 해동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가서 도를

물은 사람이 드물었고, 비록 있었다 해도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

광 이후에는 뒤를 이어 중국에 유학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니57) 원광이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찬한다.

바다 건너 처음 중국 땅의 구름을 뚫으니

몇 사람이나 오고 가며 맑은 향기 품었을까.

옛날의 자취는 청산에 남아 있고

금곡사와 가서사의 일은 들을 수 있네.

議曰 原宗興法已來, 津梁始置, 而未遑堂奧, 故宜以歸戒滅懺

之法, 開曉愚迷, 故光於所住嘉栖岬, 置占察寶, 以爲恒規. 時有

檀越尼, 納田於占察寶, 今東平郡之田一百結 是也, 古籍猶存.

光性好虛靜, 言常含笑, 形無慍色. 年臘旣邁, 乘輿入內, 當時

群彦, 德義攸屬, 無敢出其右者, 文藻之贍, 一隅所傾. 年八十

餘, 卒於貞觀間, 浮圖在三岐山金谷寺.〈今安康之西南洞也 亦明活之

西也.〉

唐傳云, 告寂皇隆寺, 未詳其地, 疑皇龍之訛也. 如芬皇作王芬

寺之例也. 據如上唐鄕二傳之文, 但姓氏之朴薛, 出家之東西,

如二人焉, 不敢詳定. 故兩存之. 然彼諸傳記, 皆無鵲岬璃目與

雲門之事. 而鄕人金陟明, 謬以街巷之說, 潤文作光師傳. 濫記

雲門開山祖寶壤師之事迹, 合爲一傳. 後撰海東僧傳者. 承誤

而錄之. 故時人多惑之. 因辨於此, 不加減一字. 載二傳之文詳

矣. 陳隋之世, 海東人鮮有航海問道者. 設有, 猶未大振. 及光

之後. 繼踵西學者憧憧焉. 光乃啓途矣.

讚曰 航海初穿漢地雲, 幾人來往挹淸芬. 昔年蹤迹靑山在, 金

谷嘉西事可聞.

39) 원문의 원종(原宗)은 신라에서 불교를 처음 공인한 법흥왕(法興王)을 말한

다. 법흥왕은 신라 제23대 왕. 재위 514~540년. 성 김(金)씨, 이름은 원종(原

宗)이다. 지증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朴氏)이고 비

(妃)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박씨이다. 517년에 병부(兵部)를 설치하여 군사권

을 확립하고, 520년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제정

하였으며 521년에 양(梁)나라와 국교를 열었다. 527년에 처음으로 불교를 공

인하였으며, 531년에는 상대등 벼슬을 새로 두어 국사(國事)를 총괄하여 맡도

록 하였다. 532년에 본가야(本伽倻:金官國)를 병합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

치하고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으며 536년에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40) 진량(津梁)은 나루터의 다리와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수단을 말한다. 즉 부처가

이 세상의 괴로움을 구제하여 깨달음의 경지로 이끄는 것을 뜻한다.

41) 귀계(歸戒) 멸참(滅懺):불법에 귀의하여 잘못을 참회하고 수행하는 것.

42) 점찰보(占察寶):점찰회를 열기 위한 재원. 점찰회는『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

業報經)』에 의거하여 자신의 전생의 업과 후생의 과보를 점친 후 그에 맞게 참

회와 수행을 행하는 법회 의식이다. 신라에서는 진평왕대부터 이 점찰회가 나

타나고 있는데 원광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43) 단월(檀越): dānapati. 사찰이나 승려에게 재물을 베푸는 불교 신자를 말한다.

44) 동평군(東平郡):부산 부산진구 지역. 원래 신라의 대증현(大甑縣)으로 경덕왕

대에 동평현으로 개명되어 동래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울주(蔚州)

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동래와 울주에 번갈아 소

속되었다.

45) 이 부분은『속고승전』의 구절을 거의 그대로 옮겨 묘사한 것이다.

46) 정관(貞觀)은 당 태종(太宗)의 연호. 627~649년.

47) 금곡사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비장산에 있던 절이다. 금곡사지에는 통

일신라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탑 일부와 기타 유적이 남아 있지만 별도의 부도

는 발견되지 않았다. 원광의 부도[僧塔]을 건립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최

초의 승탑이 된다.

48) 안강(安康):경북 경주시 안강읍. 원래 비화현(比火縣)이었는데 경덕왕때 지금

의 이름으로 바꾸고 의창군(義昌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말에 감무를 두었

으나 조선 초에 다시 경주에 예속시켰다.

49) 원문의 당전(唐傳) 곧『당고승전』은『속고승전』의 잘못이다.

50) 황륭사(皇隆寺):일연이 지적하고 있듯이 황룡사(皇龍寺)의 다른 표기로 생각된

다. 황룡사는 경주시에 있었던 절로 규모와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위상을 가졌

던 신라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51) 분황사(芬皇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황룡사와 마주보고 있는 절.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었다. 신라에 옛 부처 때의 인연 있는 일곱 절터 중의 하나로

꼽혔던 중요한 절이다. 자장이 귀국하자 머물게 했던 절이며, 7세기 중반에 원

효가 활동하며『화엄경소』를 지었던 절이다. 원효의 사후 아들 설총이 원효의

상을 빚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현재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

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국보 제30호인 분황사모전석탑 외

에 원효의 비인 화쟁국사(和諍國師)비편, 석정(石井) 등이 있다. 경덕왕 때인 755

년에 30만근이 넘는 거대한 동제 약사여래상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명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 등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이 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52) 작갑(鵲岬):청도 호거산에 있던 5개의 절. 대작갑사를 비롯하여 소작갑사·소

보갑사·천문갑사·가서갑사의 다섯 갑사(岬寺)가 있었다. 신라 말에 이들이 통

합되어 운문사(雲門寺)로 되어 현재에 이른다.

53) 이목(璃目):신라말에 활동했던 보양(寶壤)이 중국에서 귀국할 때 용왕을 만나

데려와 교화에 활용하였다고 하는 용왕의 아들이다.

54) 운문사(雲門寺):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호거산에 있는 절. 신라 진흥왕 21년

(560)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운문사 경역에 다섯 개의 절(五岬寺)가 있었는데 신

라말에 통합되어 운문사로 되었다. 원광(圓光)이 점찰법을 시행했던 가슬갑사

(嘉瑟岬)도 그중의 하나였다.

55) 해동승전(海東僧傳)은『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을 말한다.『해동고승전』은 고

려 1215년 경에 각훈(覺訓)이 편찬한 우리나라 고승들의 전기를 모은 책으로 현

재는 앞 부분인 유통(流通)편 2권만 남아 있는데, 불교의 전래와 수용, 구법고승

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권에는 삼국과 외국의 불교를 전래한 승려의 행

적이, 2권에는 중국과 인도로 구법의 길을 갔던 승려들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56) 진(陳):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에 속했던 나라로 남조 최후의 왕조(557~589).

진패선(陳覇先, 武帝 557~559)이 557년 양(梁)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였다. 선

제(宣帝, 568~582) 때에는 북제(北齊)를 공략하여 북쪽으로 진출했으나, 다음 후

주(後主, 582~589)는 측근을 중용하고 무장을 억압하여 점차 국력이 쇠퇴해져서

마침내 589년에 수(隋)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57) 동동(憧憧):왕래가 끊어지지 않는 모양을 표현한 말

보양과 배나무

[해제]

신라 말기에 운문사에서 활동하던 보양에 대한 전기이다. 운문사에 대한

기록은 운문사가 위치해 있는 청도군(淸道郡)의 주첩공문(柱貼公文)과 장

생표(長生標) 공문 및 고적비보기(古籍裨補記) 등의 고려시대 고문서를 인

용하여 기록한 특징이 있다.『삼국유사』의해편은 대체로 시기순으로 구성

되었는데, 신라 말에 활동한 보양이 이처럼 앞 부분에 들어 있는 것은 맞지

않다. 그 이유는 일연이 작갑사와 이목의 일을 다른 기록에서 원광의 전기

에 잘못 넣은 것을 지적하고, 이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삼국유사』에서는

원광의 바로 다음에 보양의 전기를 수록한 것이다.

보양은 운문사에서 활동하며 중국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귀국하던 도중

에 용궁에 들어가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과 함께 신라에 돌아와서 작갑사

(鵲岬寺)의 옛터를 찾아 중창하였다. 작갑사에는 다섯 절이 있었는데 후삼

국 혼란기에 모두 없어지고 대작갑사만 남았는데,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합하여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이름을 내렸다. 용왕의 아들은 항상 곁

에서 보양의 교화를 도왔는데,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다가 천제의 노여움

을 사기도 하였다. 보양은 운문사에 오기 전에 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서

지냈는데, 고려 태조의 원정에 전술적인 도움을 주어 태조로부터 토지를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운문사의 토지는 그후 작성된 고려 지방문

서에서 장생표가 11개나 되는 등의 기록으로 확인되며, 943년의 기록에는

보양이 삼강전(三綱典) 주인(主人)의 직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역주]

보양과 배나무58)

보양스님의 전기에는 고향 마을과 성씨나 가족이 실려 있지 않다.

청도군(淸道郡)59)의 관청 장적60)을 살펴보니, “천복(天福)61) 8년(943) 계

묘년62)〈태조 즉위 제26년이다〉 정월 어느날 청도군 지역의 이심사(里審使)63)

순영(順英)과 대나마(大奈麻)64) 수문(水文) 등의 주첩공문(柱貼公文). 운문

산선원(雲門山禪院)65) 장생(長生)66). 남쪽은 아니점(阿尼岾), 동쪽은 가서

현(嘉西峴).〈운운〉이라 하였고, 이 절의 삼강(三剛典)67) 주인(主人)68)은 보

양(寶壤)화상(和尙). 원주(院主)69)는 현회(玄會)장로(長老). 정좌(貞座)70)

는 현량(玄兩)상좌(上座)71). 직세(直歲)72)는 신원(信元)선사(禪師).”라고 하

였다.〈위 공문은 청도군 도전장(都田帳)73)에서 전하는 것에 준했다.〉

또 개운(開運) 3년(946) 병오년74)의 운문산선원 장생표탑(長生標塔) 공

문 1건에, “장생 11기. 니점·가서현·무현(畝峴). 서북은 매현(買峴〈혹은 면

지촌(面知村)이라고도 한다〉). 북은 저족문(猪足門) 등.” 이라고 하였다.

또 경인년(1230) 진양부첩(晋陽府貼)75)에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76)

각 도의 선종과 교종 사원이 창건된 연월과 상황을 자세히 조사해서 문서

를 만듦. 당시 차사원(差使員)인 동경(東京)77)의 장서기(掌書記) 이선(李

僐)이 자세히 조사하여 기재함. 정풍(正豊) 6년(1161)78) 신사년〈금(金)의 연

호이니 고려 의종 즉위 16년이다79)〉9월 군내의 옛 전적인 비보기(裨補記)80)

준함. 청도군 전 부호장(副戶長)81) 어모부위(禦侮副尉)82) 이칙정(李則禎)

의 집에 있는 옛 사람의 기록과 사람들에게 전해온 것을 기록한 것. 상호장

(上戶長)83)을 지내고 물러난 김양신(金亮辛), 호장(戶長)84)을 지내고 물러

난 민육(旻育), 호장동정(戶長同正)85) 윤응(尹應), 전의 기인(其人)86) 진기

(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用成) 등의 말. 그때 태수(太守)는 이사로(李

思老)이며. 호장 김양신은 나이가 89세, 나머지는 모두 70세 이상, 용성은

나이가 60세 이상.” 〈운운. 그 다음은 따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寶壤梨木

釋寶壤傳, 不載鄕井氏族.

謹按淸道郡司籍載, “天福八年癸酉〈太祖卽位第二十六年也〉正月

日, 淸道郡界里審使順英大乃末水文等柱貼公文. 雲門山禪院

長生, 南阿尼岾, 東嘉西峴〈云云〉. 同藪三剛典主人寶壤和尙,

院主玄會長老, 貞座玄兩上座, 直歲信元禪師.”〈右公文 淸道郡都

田帳傳准.〉 又開運三年丙辰, 雲門山禪院長生標塔公文一道. “長

生十一, 阿尼岾·嘉西峴·畝峴, 西北買峴〈一作面知村.〉, 北猪足

門等.” 又庚寅年 晋陽府貼.“ 五道按察使, 各道禪敎寺院始創

年月形止. 審檢成籍時, 差使員東京掌書記李僐, 審檢記載. 正

豊六年辛巳〈大金年號, 本朝 毅宗卽位十六年也.〉九月 郡中古籍裨補

記准. 淸道郡前副戶長禦侮副尉李則禎戶在古人消息, 及諺傳

記載. 致仕上戶長金亮辛·致仕戶長旻育·戶長同正尹應·前其

人珍奇等, 與時上戶長用成等言語. 時太守李思老, 戶長亮辛

年八十九, 餘輩皆七十已上, 用成年六十已上.”〈云云. 次不准〉

58) 원문의 이목(梨木)이라는 제목은 용왕의 아들 이목(璃目)과 같은 발음의 배나무에

서 따온 것이다. 이목(璃目)은 용이 되지 못한 큰 구렁이를 말하는 이무기와 음이

유사하여 따온 표현으로서, 여기에서 확장된 연상이 이후 본문에서 이목을 상징

하는 배나무(梨木)에 대신 벼락이 내리게 했다는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59) 청도군(淸道郡):현재의 경북 청도군. 본래 이서국(伊西國)으로서 신라에 편입

되어 이서군(伊西郡)이 되었다. 신라 때 이서군에서 나뉘었던 오악현 향산현 소

산현을 고려 태조 때 다시 통합하여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60) 원문의 사적(司籍)은 군(郡)내의 사원이나 전답(田畓) 등을 기록한 문서를 말한다.

61) 천복(天福):후진(後晉) 고조의 연호. 936~943년. 고려 태조 19~26년에 해당한다.

62) 원문의 계유(癸酉)는 계묘(癸卯, 943년)의 잘못이다.

63) 이심사(里審使):마을과 장원 등의 경계를 심사하는 관리로 추정된다.

64) 원문의 대내말(大乃末)은 신라 17관등 중의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를 말하

는데, 여기서는 고려 초 지방호족이 스스로 불렀던 관등으로 보인다.

65)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운문사(雲門寺)를 말한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

원리 호거산에 있는 절이다. 신라 진흥왕 21년(560)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진평

왕대에 원광(圓光)이 점찰법을 시행했던 가슬갑사(嘉瑟岬寺)도 운문사에서 가

까운 곳에 있었다. 이 지역에는 대작갑사 소작갑사 소보갑사 천문갑사 가서갑

사의 다섯 갑사가 있었는데 신라말에 모두 폐사되었다. 보양이 대작갑사를 중

창하여 작갑사로 삼았는데, 고려 태조가 다섯 갑사의 토지 500결을 모두 합쳐

작갑사에 주고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렸다.

66) 장생(長生):장생표(長生標). 사찰이 소유하고 있거나 또는 수조권(收租權)을 행

사하던 토지와 그 밖의 토지를 구별하기 위하여 그 경계지역에 세웠던 경계표

지이다.

67) 삼강전(三剛典):삼강(三剛)은 중국에서는 삼강(三綱)으로 표기하였으나 고려

에서는 대체로 삼강(三剛)으로 표기하였다. 삼강은 사원의 운영을 위해 설치한

직제로서 중국 북위시대에 지방 승관제로 시작된 상좌(上座)·사주(寺主)·도유

나(都維那)를 말한다. 당 중기 이후 상좌는 도사(都寺), 사주는 감사(監寺)·부사

(副寺)로 분화되고, 도유나는 유나(維那)·전좌(典坐)·직세(直歲)로 분화되어

삼강 직제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는 상좌와 유나의 직책이 자

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고려초에 선종 중심 산문에서 독자적인 직제로 삼

강전을 설치하고 원주·전좌·유나·직세 등의 직책을 두었다. 명칭은 삼강인데

직책은 고려초 자적선사비(941)까지는 원주·전좌·유나의 셋이었다가 대경대

사비(942) 이후부터 원종대사비(975)까지는 대체로 직세가 더해져 네 직책으로

정리된다. 이 운문사의 삼강전은 다른 예와는 달리 유나가 없는 대신 원주 위에

주인(主人)이 있어 네가지 직책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예이다.

68) 주인(主人):절의 운영을 책임지는 승려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삼강직의

가장 위에 거명되기 때문이다.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예로는 대경대사비(942)나

법경대사경유비(944)의 제일좌승(第一座僧)이나 징효대사비(944)의 원지주인

(院持主人)이 있다.

69) 원주(院主):고려 초 사원 직책인 삼강전에 설치한 승관. 대체로 가장 먼저 거명

되는 직책으로 선원을 대표하는 직책이다.

70) 정좌(貞座):고려 초 사원 직책인 삼강전에 설치한 승관으로 전좌(典座)의 다른

표기. 사원이 내적 운영에 필요한 일인 법상과 좌구[床坐]에 관한 일을 맡아 보

는 직책이다.

71) 상좌(上座):본래 승관제에서 사원을 대표하는 승려의 직책으로 쓰였으나 덕이

높은 승려를 지칭하는 경칭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4명의 승려에게 화상 장로 상

좌 선사의 각각 다른 경칭을 사용하고 있다.

72) 직세(直歲):고려 초 사원 직책인 삼강전에 설치한 승관. 한 해 동안 일을 맡아본

다는 데서 시작된 이름이다.

73) 청도군 도전장(淸道郡都田帳):청도군의 도전정장적(都田丁帳籍), 곧 청도군에

있는 토지대장을 말한다.

74) 원문의 병진년은 병오년의 잘못이다.

75) 진양부첩(晋陽府貼):진양부의 문서. 진양부는 고려 후기 최씨정권의 집정자인

최이(崔怡)가 만든 관부인데, 최이는 1205년 진주 전체를 식읍(食邑)으로 하여

지배하였다.

76)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오도는 고려시대의 지방 구획인 양광도(楊廣道)·경상

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교주도(交州道)·서해도(西海道)이다. 안찰사는 고

려 시대 관직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일종의 사신이다. 고려 초에는 절도사(節

度使)가 그 임무를 맡다가 현종 때 안찰사로 바뀌었으며 중간에 변동을 거쳐 예

종 때 다시 안찰사가 되었다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안렴사(按廉使)로 바뀌었다.

안찰사는 각 도를 순력(巡歷)하면서 수령을 비롯한 모든 외관에 대한 성적을 평

가·보고하는 한편, 농사에 대한 감찰과 기아 및 빈민 구제 등을 담당하였다. 또

한 군사를 장악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

였다.

77) 동경(東京):지금의 경주를 고려 때 부르는 이름.

78) 정풍(正豊):본래 정륭(正隆)인데 고려 태조의 아버지 왕륭(王隆)의 이름자를 피

하기 위해 풍을 대신 사용하였다. 정륭은 금(金) 해릉왕(海陵王) 제량(帝亮)의

연호로 1156~1161년간에 쓰였다. 정륭 6년은 고려 의종 15년인 1161년이다.

79) 고려시대에는 해를 세는데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세는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

元法)을 썼는데, 조선시대에는 즉위한 다음해를 원년으로 하는 유년칭원법(踰

年稱元法)을 썼으므로 1161년이 고려시대에 쓴 일연의 이『삼국유사』기록에서

는 의종 16년이어야 하지만 현재 의거하는 『고려사』는 조선시대에 기록한 것이

므로 의종 15년으로 기록한다. 따라서 주 21)의 의종 15년은 『고려사』 기록에 따

른 계산이며, 이곳의 일연의 의종 16년 기록은 고려의 기록으로 맞는 것이 된다.

80) 비보기(裨補記):풍수지리설에 따라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것을 기록한 책.

81) 부호장(副戶長):고려시대 향리직(鄕吏職)의 고위 관직. 가장 높은 관직인 호장

(戶長) 다음의 관직이다.

82) 어모부위(禦侮副尉):고려시대에 지방 실력자인 향리나 노병(老兵) 등 여러 세

력을 중앙의 지배기구에 편입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지급되었던 모두 29단계로

된 무산계(武散階)의 제25단계인 종8품 하(下)의 관등이다.

83) 상호장(上戶長):고려 시대 각 고을의 실무행정을 총괄하던 호장(戶長)들을 포

함한 향리(鄕吏)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설치한 관직.

84) 호장(戶長):고려시대 향리직의 가장 높은 관직. 지방에 독립된 읍사(邑司)를 구

성하여 향리들이 일정한 공무를 집행하도록 하였다. 향리직은 최상위의 호장·

부호장을 비롯하여 호정(戶正)·부호정·사(史)·병정(兵正)·부병정·병사(兵

史)·창정(倉正) 등의 직책이 있었다.

85) 호장동정(戶長同正):동정직은 검교직(檢校職)과 함께 고려시대에 정원이 제한

된 실직(實職)의 한계를 넘어 많은 사람을 관료체제에 흡수하기 위해 마련된 직

제인 산직(散職)이다. 산직인 동정직으로 제수된 호장을 말한다.

86) 기인(其人):고려시대에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의 왕권 아래 두기 위해 실시했

던 여러 조치 가운데 하나로서, 향리의 자제를 교대로 서울로 불러들여 입역(立

役)하게 한 것을 말한다.(『고려사』 권75 選擧志 3 其人)

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사원에 작갑사(鵲岬寺)87) 이하 중소사원들이

있었는데 후삼국의 난리통에 대작갑사·소작갑사·소보갑사(所寶岬寺)·

천문갑사(天門岬寺)·가서갑사(嘉西岬寺) 등 다섯 개의 갑사가 모두 무너

져 없어져서 다섯 갑사의 기둥만 대작갑사에 모아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윗글에서는 보양(寶壤)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법을 전

해 받고 돌아오다가 서해 가운데 이르자, 용이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염송하게 하고,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보시하였으며 아울러 첫째 아들 이

목(璃目)을 내주어 모시고 따라가게 하였다.

부탁하여 말하기를, “지금 삼국이 어지러워 아직은 불법(佛法)에 귀의하

는 임금이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함께 신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

을 짓고 지내면 적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몇 년 안에 반드시 불법

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타나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왔다. 이 골짜기에 이르자, 갑자기 노승

이 나타나 스스로 원광(圓光)88)이라고 하면서 도장 상자를 안고 나와서 조

사에게 주고는 사라졌다.〈생각해보면 원광은 진(陳)89)의 말기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개황(開皇)90) 연간에 돌아왔으며, 가서갑(嘉西岬)에서 살다가 황륭사(皇隆寺)91)에서 세

상을 떠났으니, 연수를 계산하면 청태(淸泰)92)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이 된다. 지금

여러 갑사가 모두 없어졌음을 슬피 탄식하였는데,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킬 것을 보고 기

뻐하여 이를 알린 것이다.〉

이때 보양 조사가 폐사를 일으키려고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

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었다. 내려와서 찾아보니 자취가 없어, 다시 올라가

서 바라보니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야 바다의 용이 까치 골짜기

[鵲岬]를 말한 것이 생각나서 그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과연 버려진 벽돌이

무수히 많이 있었다. 이것들을 모아 쌓아올리니 탑이 완성되었는데 남는

벽돌이 없었으므로 이곳이 예전의 절터임을 알았다. 절을 다 세우고 (거기

에) 살았고 그로 인해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羅代已來, 當郡寺院, 鵲岬已下中小寺院, 三韓亂亡間, 大鵲

岬·小鵲岬·所寶岬·天門岬·嘉西岬等五岬 皆亡壤, 五岬柱,

合在大鵲岬.

祖師知識〈上文云寶壤〉 大國傳法來還, 次西海中, 龍邀入宮中

念經, 施金羅袈裟一領, 兼施一子璃目, 爲侍奉而追之. 囑曰,

“于時三國擾動, 未有歸依佛法之君主, 若與吾子歸本國, 鵲岬

創寺而居, 可以避賊. 抑亦不數年內, 必有護法賢君出, 定三國

矣.” 言訖, 相別而來還, 及至玆洞, 忽有老僧, 自稱圓光, 抱印

櫃而出, 授之而沒.〈按圓光 以陳末入中國, 開皇間東還, 住嘉西岬, 而沒於

皇隆, 計至淸泰之初, 無慮三百年矣. 今悲嘆諸岬皆廢, 而喜見壤來而將興, 故告

之爾.〉 於是壤師將興廢寺, 而登北嶺望之, 庭有五層黃塔. 下來

尋之則無跡, 再陟望之, 有群鵲啄地. 乃思海龍鵲岬之言, 尋掘

之, 果有遺塼無數. 聚而蘊崇之, 塔成而無遺塼, 知是前代伽藍

墟也. 畢創寺而住焉, 因名鵲岬寺.

87) 작갑사(鵲岬寺):5 작갑사에서는 대잡각사를 말한다. 경상북도 청도군 가서현

운문산에 있었던 절로 지금의 운문사이다.

88) 원광(圓光):신라의 고승. 532~630년, 또는 554~637년. 589년에 중국에 가서 유

학과 성실과 열반 반야 섭론 등의 불법을 수학하고 600년에 귀국하였다. 중국의

군대가 신라를 도와주기를 요청하는 글과 같은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하고, 청

도의 가서사(嘉西寺)에서 지내다 귀산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세속에서 지

킬 수 있는 오계를 알려주었고, 지방사회에 불교를 전파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5-1 주1) 참조.

89) 진(陳):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에 속했던 나라로 남조 최후의 왕조(557~589).

진패선(陳覇先, 武帝 557~559)이 557년 양(梁)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였다. 선

제(宣帝, 568~582) 때에는 북제(北齊)를 공략하여 남쪽으로 진출했으나 다음 후

주(後主, 582~589)는 측근을 중용하고 무장을 억압하여 전차 국력이 쇠퇴해지고

마침내 589년에 수(隋)나라에게 멸망하였다.

90) 개황(開皇):중국 수(隋) 문제(文帝)의 연호, 581~600년. 신라 진평왕3~22년에

해당한다.

91) 황륭사(皇隆寺):『속고승전』에 원광이 황륭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는데, 황

륭사는 알려진 기록이 없다. 이는 황룡사의 잘못된 표기로 생각된다. 이 부분의

기록도『속고승전』의 표기를 따른 데서 온 것이다. 일연이 지적하고 있듯이 황

룡사(皇龍寺)의 다른 표기로 생각된다. 황룡사는 경주시에 있었던 절로 규모와

사격에서 신라 제일의 위상을 가졌던 신라불교의 중심 사찰이었다.

92) 청태(淸泰):중국 후당(後唐) 폐제(廢帝)의 연호, 934~935년. 신라 경순왕 8~9년.

얼마 후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스님이 이곳에 와서 절을 짓

고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오갑사의 토지 500결을 합쳐 절에 바쳤다.93)

청태 4년(937) 정유년에 사액(賜額)94)하여 운문선사(雲門禪寺)라 하고 가

사의 신비한 음덕(靈蔭)을 받들게 했다.95)

이목은 항상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드러나지 않게 도

왔다. 어느 해 가물어 밭의 채소가 타고 말라서, 보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더니 온 경내에 (비가) 넉넉했다. 천제(天帝)는 (이목이 자기 본분

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목이 급하게 되었음을 보양 스

님에게 알리자 스님은 그를 마루 밑에 숨겼다. 조금 후 천제의 사신이 뜰에

와서 이목을 내놓기를 청했다. 스님이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리키자 곧

그곳에 벼락이 쳤고 (사신은)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시들어 꺾였는데

용[이목]이 어루만지니 곧 살아났다.〈스님이 주문을 외워서 살아났다고도 한다.〉

그 나무가 근년에 땅에 넘어지니 어떤 사람이 빗장 뭉치로 만들어서 선법

당(善法堂)과 식당에 두었는데, 뭉치의 손잡이에 명문이 있었다.

未幾太祖統一三國, 聞師至此創院而居, 乃合五岬田束五百結

納寺. 以淸泰四年丁酉, 賜額曰雲門禪寺, 以奉袈裟之靈蔭. 璃

目常在寺側小潭, 陰騭法化. 忽一年亢旱, 田蔬焦槁. 壤勑璃目

行雨, 一境告足. 天帝將誅不識, 璃目告急於師, 師藏於床下.

俄有天使到庭, 請出璃目, 師指庭前梨木, 乃震之而上天. 梨木

萎摧, 龍撫之卽蘇.〈云師呪之而生〉 其木近年倒地, 有人作楗椎,

安置善法堂及食堂, 其椎柄有銘.

93) 폐허가 된 5개 작갑사의 땅을 모아서 대작갑사에 몰아 준 것이다.

94) 사액(賜額):임금이 사당(祠堂), 사찰, 서원(書院), 누문(樓門) 등에 이름을 지어

서 새긴 편액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95) 가사(袈裟)는 스님들이 입는 법의를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스님인 보양을 말한

다. 따라서 가사의 신비한 음덕을 받들게 했다는 것은 보양의 훌륭한 행적을 받

들게 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스님이 당(唐)나라96)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먼저 추화(推火)97)

봉성사(奉聖寺)98)에 머물렀다. 때마침 태조가 동쪽으로 정벌하여 청도 경

계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견성(犬城)〈산봉우리가 물에 다다라서 가파르게 서 있

는데, 요즘 민간에서 그 이름을 싫어하여 견성이라고 하였다.〉에 모여 교만을 부리

며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 스님에게 쉽게 제어할 방법

을 물으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대개 개라는 짐승은 밤만 맡고 낮은 맡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뒤는 잊고 있으니, 마땅히 낮에 북쪽을 쳐야 할 것입

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을 따랐더니 과연 (산적이) 패하여 항복하

였다.99) 태조는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세금 50

석을 주어 향화(香火)100)를 받들게 하였다. 이로써 절에 두 성인101)의 진

용(眞容)102)을 봉안하고 이 때문에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고 하였다.

(스님은) 후에 작갑사로 옮겨 가서 절을 크게 짓고 세상을 마쳤다.

스님의 행장은 옛 전기에는 실리지 않았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석굴사

(石崛寺)의 비허(備虛)〈혹은 비허(毗虛)라고도 한다〉스님과 형제로서, 봉성사·

석굴사·운문사의 세 절이 봉우리가 연결되어 나란히 하고 있으므로 서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뒷날 사람이『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103)을 고쳐 지으면서 작갑사의 탑

과 이목의 일을 원광전에 잘못 기록하고,104) 견성의 일을 비허전에 넣었으

니 이미 잘못된 것이다. 또『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05)을 지은 이도 이에

따라 글을 윤색하여, 보양의 전기가 없게 하여 후대 사람들이 의심나고 잘

못 알게 했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初師入唐廻, 先止于推火之奉聖寺. 適太祖東征至淸道境, 山

賊嘯聚于犬城〈有山岑臨水峭立, 今俗惡其名, 改云犬城〉, 驕傲不格. 太

祖至于山下, 問師以易制之述, 師答曰,“ 夫犬之爲物, 司夜而

不司晝, 守前而忘其後, 宜以晝擊其北.” 太祖從之, 果敗降.

太祖嘉乃神謀, 歲給近縣租五十碩, 以供香火. 是以寺安二聖

眞容, 因名奉聖寺. 後遷至鵲岬, 而大創終焉.

師之行狀, 古傳不載. 諺云,“ 與石崛備虛師〈一作毗虛〉爲昆弟,

奉聖·石崛·雲門三寺, 連峯櫛比, 交相往還爾”. 後人改作新

羅異傳, 濫記鵲塔璃目之事于圓光傳中, 系犬城事於毗虛傳,

旣謬矣. 又作海東僧傳者, 從而潤文, 使寶壤無傳, 而疑誤後

人, 誣妄幾何.

96) 당(唐)나라: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에 멸망한 중국의 왕조. 290년

간 20대의 황제가 왕위를 이어 지속되었다. 남북조의 오랜 분열시대를 통일한

수나라가 39여 년만에 멸망하고 뒤이은 왕조로서 세계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중

국의 성세를 이루었다. 당이 이룩한 문물과 제도는 동아시아 문화의 전형이 되

어 한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97) 추화(推火):경남 밀양군(密陽郡)의 옛 이름이다.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을 경덕

왕 때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 때 밀주(密州)로 고쳤으며, 고려 말

에 밀양부가 되었다.

98) 봉성사(奉聖寺):밀양에 있던 절. 고려 태조와 보양스님의 진용을 봉안하여 봉

성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봉성사는 신라 왕성인 경주에도 있었는데, 685년(신문

왕 5년)에 창건된 경주 봉성사는 7개 성전사원 중에서도 사천왕사 다음으로 꼽

히는 중요한 사원이었다.(『삼국사기』권38 직관 상) 또 밀교고승 혜통(惠通)이 신

문왕이 병이 난 것을 고쳐주었는데, 왕이 전생에 재상으로서 양민인 신충(信忠)

을 잘못하여 노예가 되게 하였다. 신충이 원한을 품어 왕이 병이 생기자 신충을

위해 절을 지어 명복을 빌도록 하였다. 이절이 곧 봉성사라고 한다.(『삼국유사』

권5 惠通降龍)

99) 견성 싸움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 사이에 전개된 것으로

견훤의 경주 침공(927년)과 왕건이 우세를 확보한 고창군 전투(930년) 사이에

전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100) 향화(香火):향을 피우고 등에 불을 켜는 것을 가리킨다.

101) 두 성인은 태조와 보양스님을 말한다.

102) 진용(眞容):모습을 그린 초상화나 빚어 만든 상(像).

103) 원문의 신라이전(新羅異傳)은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

각된다. 이 책은 전하지 않고, 수록되었던 설화 가운데 10편이 『삼국유사』를 비

롯한 후대의 다른 여러 책들에 각각 실려 전해진다. 저자는 박인량(朴寅亮) 이라

는 의견등이 있다.

104)『삼국유사』 권4,「원광서학」에 관련된 대목이 있다. “여러 전기에 작갑사와 이목

과 운문사의 일이 없다. 지방 사람 김척명(金陟明)이 잘못 항간의 설을 윤문하여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 운문사 개산조인 보양선사의 사적을 함부로 기록하고

합쳐서 하나의 전기로 만들었다. 뒤에 해동고승전을 지은 이도 이 잘못을 그대

로 기록하였고,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많이 잘못 알고 있다. 그래서 이를 가리고

자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두 전기의 기록을 자세히 수록하였다”라고 하

였다.

105)『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고려 전기 1215년 경에 각훈(覺訓)이 편찬한 우리

나라 고승들의 전기를 모은 책. 현재는 앞 부분인 유통(流通)편 2권만 남아 있는

데, 불교의 전래와 수용, 구법고승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권에는 삼국

과 외국의 불교를 전래한 승려의 행적이, 2권에는 중국과 인도로 구법의 길을

갔던 승려들의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기존 자료를 활용하며 우리 나라 불교의

의의와 승려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려는 의식이 엿보인다.

양지가 석장을 부리다

[해제]

신라시대의 가장 이름난 예술가인 양지의 전기이다. 양지는 이 전기에서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존상・천왕상・전탑의 기와,

사천왕사(四天王寺) 탑의 신장상, 법림사(法林寺)의 삼존불과 금강상 등을

제작하였다. 벽돌에 불상을 새겨 탑을 만들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편액을

쓸 만큼 글씨를 잘 쓴 종합예술가였다. 통일기에 여러 분야의 문화적 역량

이 확대되면서 불교 사상의 이해가 심화되고 대중들의 신앙이 진전되는 상

황과 어울려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 전기에서

는 양지의 예술가적 면모보다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을 더 강조하여 제

목으로 삼았다. 석장(錫杖)에 포대를 걸고 다니다가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신도의 집에 이르러 소리를 내면 그 집에서 재에 쓸 비용을 포대에 담아냈

고 포대가 가득차면 날아서 절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찬자 일연은

양지가 재주가 많고 덕이 넉넉한 대가로서 예술 활동만 했던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이 항목에서는 예술가 양지의 특이한 능력을 강조함과 동시에

영묘사를 만드는데 성 안의 사람들이 일을 도왔음을 서술하여 불사(佛事)

가 이루어지던 정경을 알리고자 하였다.

양지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권3 탑상 영묘사장륙(靈廟寺丈六)에도 간

단한 기록이 있지만 이 부분이 가장 상세하다.

 

[역주]

양지가 석장을 부리다

양지(良志)스님은 조상과 고향이 분명하지 않다. 오직 선덕왕(善德

王)106) 때에만 자취를 나타냈다.107)

석장(錫杖)108)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 두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단월

(檀越)109)의 집에 이르러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알고서 재의 비

용을 포대에 담았는데, 포대가 가득차면 날아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있

는 곳을 석장사(錫杖寺)110)라 하였다. 그 신이함을 헤아릴 수 없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한편으로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 없었다. 또 글씨

도 잘 썼다. 영묘사(靈廟寺)111)의 장륙삼존상·사천왕상112)·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四天王寺)113)탑 하부의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114), 법림사

(法林寺)의 주불 삼존상·좌우금강신상115)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

묘사와 법림사116) 두 절의 편액117)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서 작

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탑에 안치하고 절에 모셔 공

경을 다하였다.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선정에 들어 삼매(三昧)118)로써 대하는 것

을 만드는 방법으로 삼았다. 그래서 온 성안의 남자와 여자들이 다투어서

진흙을 날랐다. 그때 읊은 풍요(風謠)119)는 이렇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러운 이 많아라.

서러운 중생의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온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함께 일할 때에 모두 이 노래를 부

르니 대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의 비용은 곡식 23,700석이다〈혹은 금을 다시 칠

했을 때의 비용이라고도 한다〉.

논평하여 말한다.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충만했으며 대가(大家)120)

서 하찮은 재주에 숨은 자라고 하겠다.

찬한다.

재가 끝난 불당 앞에 석장 한가롭고,

고요한 오리향로에 전단향 피어오르네.

남은 경전 읽고 나니 다른 일 없어,

불상 만들고 합장하며 우러러 보누나.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

其所住, 曰錫杖寺. 其神異莫測, 皆類此. 旁通雜藝,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 天王像 幷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

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 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 法

林二寺額. 又嘗彫磚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 以正受所對, 爲揉式. 故

傾城士女爭運泥土. 風謠云,“ 來如 來如 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土人舂相役作, 皆用

之, 蓋始于此. 像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或云改金時租〉

議曰,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隱於末技者也.

讚曰 齋罷堂前錫杖閑, 靜裝爐鴨自焚檀. 殘經讀了無餘事, 聊

塑圓容合掌看.

106) 황철(黃鐵):니켈로 이루어진 광물로 누런 빛의 금속성 광택이 나고 불투명하

다. 여기에서는 구리를 말한다.

107) 보살: bodhi-sattva. 보리살타(菩提薩陀)로 음역하고, 줄여서 보살(菩薩)이라

하며 개사(開士) 등 여러 표현으로 한역한다. bodhi는 부처님의 지혜라는 의

미를 지니고 있으며, sattva는 생명 있는 존재인 유정(有情)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유래하여 보살은 위로는 지혜로써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자

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以智上求無上菩提, 以悲下化衆生] 유정으로 정의한다.

이를 도중생(度衆生), 각유정(覺有情) 등으로 번역한다. 성문(聲聞)·연각(緣覺)

과 함께 삼승의 하나이다. 보살은 여섯 가지 바라밀(波羅蜜)을 수행하여 미래에

불과를 성취하는 수행자이다.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원만하게 갖추어 용맹

하게 깨달음을 구하는 대승의 이상적인 수행자이다. 대승불전에서 각 부처마다

그의 교화를 돕는 2인의 보살을 묶어 1불2보살을 구성하고, 조형적으로 이런 불

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도 이 불보살상의 구성을 말한다.

108) 상개(爽塏):앞이 탁 틔어 밝은 땅. 고조(高燥), 높고 메마른 데란 말이니 높고 깨

끗하다는 뜻이다.

109) 동축사(東竺寺):경남 울산시 동부동 마골산 정상에 위치. 진흥왕 34년 창건. 왼

편에 미포(尾浦), 오른편에 염포(鹽浦)가 내려다 보인다.

110) 대건(大建):남조(南朝) 진(陳) 선제(宣帝) 때의 연호. 569~581년. 신라 진흥왕

30~진평왕3년.

111) 장륙존상(丈六尊像):1장 6척(一丈六尺)의 불상. 부처의 등신상(等身像)의 크기

이다. 여러 경전에 의거하면, 부처시대에 보통 사람의 키는 약 8척이었는데 부

처는 그 두 배였으므로 장륙(丈六)이라고 하였다. 보통 입상(立像)은 1장 6척의

장륙상으로, 좌상(坐像)은 8척으로 만든다.

112) 원문의 일고(一鼓)는 진군할 때 처음에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는 ‘단번에’ 라는 뜻으로 쓰였다.

113)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하다. “35년 봄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여 이

루었는데, 구리 무게가 3만 5천 7근이고, 도금한 무게는 1만 1백 98푼이었다.”

(『삼국사기』권4 진흥왕 35년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五千七

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114) “36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는데 황룡사 장륙상에서 눈물이 나와 발꿈치까지 흘렀

다.” (『삼국사기』권4 진흥왕 36년(575) 三十六年 春夏旱, 皇龍寺丈六像 出淚至踵.)

115)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휘 백정(白淨). 진흥왕(眞興

王)의 손자이며 동륜(銅輪)태자의 아들. 숙부 진지왕이 화백회의에서 폐위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

을 이루었다. 초기에 위화부(位和府)·선부서(船府署)·조부(調府)·승부(乘府)·

예부(禮部) 등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 관서를 설치하여 관청 체계를

조직화하고 부서간의 분업체제를 확립하고 말기에는 왕궁 업무를 맡는 내성(內

省)을 두고 관원을 증원하는 등 지속적인 제도 정비를 통해 독자적인 왕권을 확

립하였다. 즉위 6년(584)에 건복(建福)으로 개원(改元)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시

용함으로써 대외적인 자주성을 과시하고 통일왕조 수와 당과 빈번한 외교관계

를 수립하고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국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진흥왕대의 영역 확장 이후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잘 막아냈다. 딸인 선덕왕(善德

王)이 왕위를 계승하여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116) 이곳 본문과 『삼국사기』에서는 진흥왕 35년(574)에 장륙존상이 완성되었다고

하였는데, 일연은 이 부분에서는 진흥왕 다음의 진평왕 때 조성되었다는 견해

를 소개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오늘날 불상 양식으로 볼 때 아

육왕상 양식이라고 부르는 불상이 조성되는 시기가 7세기 중반부터 라는 점을

들어 조성 시기를 늦추어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신라의 보물로 불리던 황룡

사장륙상의 조성을 절 창건 백년 이후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는 황룡사

장륙상을 아쇼카왕의 연기에 연결시켜 미화하려는 데서 나온 설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7) 원본에는 ‘黃’이나 신라의 금석문 등 모든 관계 자료에는 ‘皇’이라고 나온다.

118) 원문의 정수(正受)는 삼매(三昧)를 말한다. 삼매는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며, 마음을 바르게 하여 망념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119) 풍요(風謠)는 민간에 유행하는 속요를 의미한다. 이 노래는 양지사석가(良志使

錫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신라 향가(鄕歌) 25수 중의 하나이다. 사

찰을 지을 때 불렀다는 데서 노동요로 보기도 하고, 불교적 주제의 향가로 보기

도 한다.

120) 원문에서 대방(大方)이라고 한 것은 대가(大家)를 말한다. 전문 분야에서 뛰어

난 권위를 인정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인도에 간 여러 스님들

[해제]

신라의 승려로서 인도에 불교를 구하러 간 승려들에 관한 기록인데 모두

당나라 의정(義淨)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의 내용

을 인용하여 엮은 것이다. 하지만 전체의 내용을 모두 옮기지 않고 일연이

나름대로 간략하게 요약하거나 정리한 것이어서 글자가 서로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실제로 행적을 기술한 이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한 사람뿐

이고, 나머지 승려들의 행적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삼국유사』이전에 편

찬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은『구법고승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

기면서 오히려 없는 내용까지 추가하였다. 이점은 구체적 행적보다 전체적

인 구법승들의 구법행의 어려움을 강조한『삼국유사』의 편찬 태도와 크게

비교된다. 이는 인도 구법 승려들의 전기를 자세히 기록하려는 것보다는

삼국과 신라의 불교사를 각각의 특징을 간추려 간략하게 정리하려 한 일연

의 편찬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

인도에 간 여러 스님들

광함(廣函)121)에 들어 있는『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122)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아리나〈혹은 야(耶)〉발마〈혹은 마(磨)〉(阿離那跋摩)123)스님은 신라 사람이

다. 처음에 불교124)를 구하려고 어려서 중국에 들어갔다. 성인의 자취를

참배하고자 용기를 더욱 내어, 정관(貞觀)연간125)에 장안(長安)을 떠나 인

126)에 이르렀다. 나란타사(那蘭陁寺)127)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많이

보고 패협(貝莢)128)에 베껴 썼다. 몹시 고향에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바라

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그) 절에서 입적하니129) 나이 70여 세였다.

이를 이어 혜업(惠業)과 현태(玄泰)130)·구본(求本)131)·현각(玄恪)132)·

혜륜(惠輪)133)·현유(玄遊)134)스님이 있다. 또 2명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스

님들이 있었다.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석가의 교화를 보려고 인도

로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은 중도에서 일찍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서 그곳

의 절에 머물렀지만, 끝내 신라135)와 중국에 돌아온 자는 없었다. 오직 현

태 법사만이 당(唐)에 돌아왔지만 또한 어디서 입적했는지 알지 못한다.

천축사람들이 해동(海東)을 ‘구구타예설라(矩矩吒䃜說羅)’라고 부르는

데, 구구타(矩矩吒)는 닭이라는 말이고, 예설라(䃜說羅)는 귀하다는 말이

다. 그곳에서 전하기를, “그 나라에서는 닭신을 공경하여 높이므로 깃을 꽂

아 장식한다”고 하였다.136)

찬한다.

천축 하늘 멀고 멀어 만겹 산 넘어인데

가련한 나그네 힘써 오르네.

몇 번이나 달은 외로운 배를 보냈건만,

구름 따라 돌아오는 이 아직 보지 못했네.

歸竺諸師

廣函求法高僧傳云, 釋阿離那〈一作耶〉跋摩〈一作磨137)〉新羅人也.

初希正敎, 早入中華. 思覲聖蹤, 勇銳彌增, 以貞觀年中, 離長

安, 到五天. 住那蘭陁寺, 多閱律論, 抄寫貝莢. 痛矣歸心, 所

期不遂, 忽於寺中無常, 齡七十餘.

繼此有惠業·玄泰·求本·玄恪·惠輪·玄遊, 復有二亡名法師

等. 皆忘身順法, 觀化中天, 而或夭於中途, 或生存住彼寺者,

竟未有能復雞貴與唐室者. 唯玄泰師, 克返歸唐, 亦莫知所終.

天竺人呼海東云 矩矩吒䃜說羅, 矩矩吒 言雞也, 䃜說羅 言貴

也. 彼土相傳云, 其國敬雞神而取尊, 故戴翎羽而表飾也.

讚曰 天竺天遙萬疊山, 可憐遊士力登攀. 幾回月送孤帆去, 未

見雲隨一杖還

121) 광함(廣函):『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의 함의 순서이다.『고려대장경』을 천자

문의 글자 차례로 정리했는데, 여기에서의 함은 광(廣)자 차례에 해당되는 함으

로 467번째이다.

122)『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당나라 승려 의정(義淨, 635~713)이 691년에 지은 인

도에 구법한 승려들의 전기. 원래의 이름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

高僧傳)』이다. 상·하 2권이며 의정 자신이 보고 들은 중국과 동아시아 승려들의

인도구법 행적을 기록하였다. 원래는 56명을 기록하였는데 뒤에 의정을 도와

불경을 번역한 정고(貞固) 등 4사람의 승려 전기가 추가되었다. 의정은 671년에

광주(廣州)에서 바닷길로 불서국(佛逝國)을 경유하여 인도에 들어간 뒤 나란타

사에서 10년간 공부한 후 범본(梵本) 삼장(三藏)을 구하여 687년부터 693년까지

불서국에 머물며 정고 등 4명의 중국승려와 함께 정리·번역하였다. 따라서 의

정이 인도에 있었던 7세기 후반 당시 중국으로부터 인도에 들어가는 교통로와

인도에서의 불교학 연구, 신앙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23)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목차에서는 아리나발마

(阿離那跋摩)라 하고 본문에서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라 하였다. 이를 구분

하여 일연은 주를 달았다. 그런데 ‘마(摩)’에도 ‘혹은(一作)’ 하고 주를 달았으나

정작 제시한 글자는 없다. 마(磨)자를 쓰려 한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

124) 원문의 정교(正敎)는 사교(邪敎)가 아닌 바른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를

말한다.

125) 정관(貞觀):당(唐) 태종(太宗)의 연호. 627년~649년.

126) 오천(五天)은 오천축(五天竺)과 같은 말로서 인도를 말한다. 인도를 다섯 구역

으로 나누어 동천축·서천축·남천축·북천축·중천축이라고 불렀다. 현장의 인

도 구법여행 기록인『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대표적으로 인도를 오천축

으로 분류 소개하였다.

127) 나란타사(那蘭陁寺): Nālandā 승원. 인도 비하르주 파트나 남서쪽의 옛 마가

다왕국의 수도 왕사성(Rājagr3 ha)의 북방 7km 지점에 있다. 5세기경에 세워진 최

초의 불교대학으로 아리야데바( Aryadeva 堤婆)·아상가( Asanga 無着)·바수

반두( Vasubandhu 世親)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신라의 여러 스님들도 이

절에 유학하였다. 현장(玄奘)이 인도를 여행하던 7세기에 인도의 가장 큰 사원

으로서 1만명 이상의 승려가 생활하며 대승과 소승 외에 베다·인명·성명·의

학·술수 등을 배우던 종합대학이었다. 유식학의 중심이었으며 후에 밀교의 중

심이 되었다. 호법(護法)·덕혜(德慧)·견혜(堅慧)·계현(戒賢)·지광(智光) 등 이

름난 논사들이 이곳에서 수학하고 가르쳤으며 중국 등에서 인도에 유학한 승려

들도 대개 이곳을 거쳤다. 현장·의정(義淨) 외에 신라의 혜업(慧業)·아리야발

마(阿離耶跋摩) 등이 이곳을 찾아 수학했다. 8세기에 굽타왕조가 몰락한 이후

점차 쇠미해져 12세기에 이슬람이 침입하여 사원을 불태움으로써 크게 파괴되

었으나 14세기까지 명맥은 이어 갔다.

128) 원문의 패협(貝莢)은 패엽(貝葉)을 말한다. 패엽은 패다라수(貝多羅樹, pattra)

의 잎으로, 잎이 크고 두꺼워 옛날 인도에서 종이가 많이 쓰이기 이전에 불경을

새기는데 쓰였다. 또 서사(書寫)하기에 가장 적합한 식물을 다라수(多羅樹,

tāla)라 한다. 다라수의 잎은 길고 재질이 조밀하여 사용에 적합하다. 잎을 잘 말

려 적절한 크기로 잘라 침이나 칼, 철필 등 날카로운 것으로 잎의 면에 경전 글

을 새기고 그을린 다음 그 위에 먹을 묻혀 닦아 내면 잎 면에 새겨낸 자국이 남

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만든 경전을 패엽경(貝葉經)이라 한다.

129) 원문의 무상(無常)은 죽는다는 뜻이다.

130) 현태(玄泰):『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는 현태(玄太)라고 표기되어 있다. 범

명(梵名)은 살파신야제바(薩婆愼若提婆)로 한역하면 일체지천(一切智天)이다.

티벳을 거쳐 중인도에 들어가 불적을 순례하고 경론(經論)을 검토한 후 귀국하

다 토곡혼(土谷渾)에서 도희(道希)를 만나 다시 대각사(大覺寺)에 갔다가 중국

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31) 구본(求本):『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의 목록에는 들어 있지만, 현존 본에는 그

의 전기가 빠져 있다. 후대에 결락된 것으로 생각되는데,『구법고승전』을 참조

했다고 밝힌『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제2권에도 그만이 빠진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결락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32) 현각(玄恪):정관 중에 중국의 현조(玄照) 법사와 함께 인도에 들어가 대각사(大

覺寺)를 참배하고 그곳에서 병이 들어 40세를 조금 넘은 나이에 입적하였다.

133) 혜륜(惠輪):『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는 혜륜(慧輪)으로 표기하였는데, 범명

(梵名)이 반야발마(般若跋摩)로 한역하면 혜갑(慧甲)이다. 불적을 순례하고자

하여 신라에서 배로 민월(閩越)에 이르렀다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가 현조(玄照)

법사가 인도에 들어갈 때 시자로서 함께 갔다. 암마라파국(菴摩羅跛國)의 신자

사(信者寺)에 10년간 머물다 의정(義淨)이 귀국할 무렵에는 그 동북방의 도화라

(覩貨羅) 사람들이 자기나라 승려들을 위하여 건립한 건타라산다사(健陀羅山荼

寺)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40세가 채 안되었다.

134) 현유(玄遊):『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으로 승철(僧哲) 선

사의 제자이다. 스승과 함께 인도에 들어갔다가 사자국(師者國)에서 출가한 후

스승을 따라 불교가 융성한 삼마달타국(三摩呾吒國)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다.

135) 원문의 계귀(雞貴)는 닭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 곧 신라를 말한다.

136) 이 구절을 통하여 신라의 닭 숭배가 인도에까지 알려진 것을 알 수 있으며 계림

(鷄林)이라는 이름도 이와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인들이 모자에 깃

을 꽂는 모습은 신라 특유의 의복풍속이다.

137) 磨자로 추정됨

혜숙과 혜공이 세상과 어울리다

[해제]

이 편은 혜숙과 혜공이 세속에서 어울린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교

단의 상층부 승려들이 지배층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한 데 반해서, 이들

은 일반민에 대한 종교적 관심을 표방하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불교

대중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혜숙은 화랑(花郞)에서 활동하다 은거하였는

데, 날카로운 안목으로 국선(國仙)과 같은 지도층 인사들의 방만한 행동을

비판하고, 다른 곳에 동시에 몸을 나타내거나 죽은 몸이 구름을 타고 사라

지는 등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을 뛰어 넘는 이적(異蹟)을 보였다. 혜공은

귀족의 집에 고용살이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영험을 보이고, 출가하였

으나 거리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이적을 보여 사람들을 교화하고자 하였

다. 원효와 어울리기도 했던 혜공은 역시 국가적 활동을 하던 명랑이 주재

하는 금강사 낙성회에서 유별난 행적을 보였고, 임종할 때도 허공에 떠서

죽음을 알리는 등 이적을 보였다.

혜숙과 혜공은 신라 불교 대중화의 토대를 다진 원효에 앞서 활동하며

선구를 이루었다. 이들이 사회 지도층과 가깝게 지내며 일반민들과의 연결

을 꾀했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 편의 기록은 이 시기 사회 상황

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화랑들이 자주 벌였던 사냥 활동의 실상, 하

층민들이 귀족들의 생활을 돕는 모습, 사찰이 새로 만들어지면 치르던 행

사 등이 그런 자료가 된다.

[역주]

혜숙과 혜공이 세상과 어울리다

혜숙(惠宿)스님은138) 호세랑(好世郞)139)의 무리 속에서 조용히 지냈는

데,140) 호세랑이 화랑 명부141)에서 이름을 물리게 되자, 스님도 적선촌(赤

善村)142)〈지금 안강현(安康縣)143)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은거한 지가 20여

년이 되었다.

당시의 국선(國仙)144)인 구참공(瞿旵公)145)이 일찍이 교외로 나가서 온

종일 마음대로 사냥을 하였다. 혜숙이 길 가에 나와서 고삐를 잡고 부탁하

기를, “소승도146) 따라가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하였다. 구참공이 허락

하자 이리저리 치달리며 옷을 걷어 부치고 서로 앞을 다투니 구참공이 기

뻐하였다. 힘든 일을 쉬고 앉게 되자 자주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는

데, 혜숙도 같이 먹으며 조금도 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이보다 더 맛있고 싱싱한 고기가 있는데 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구참공이 “좋다”고 하니 혜숙이 사람들을 물

리치고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그릇에 담아 올렸다. 혜숙의 옷에 피가 뚝뚝

흘러 내리는 것을 보고 구참공이 깜짝 놀라 말하기를, “어쩌다 이렇게 되었

는가?” 하였다. 혜숙이 말하기를, “처음에 저는 공이 어진 사람이어서 자신

을 헤아림이 사물에 미칠 수 있다고 여겼기에 따라온 것입니다. 지금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직 살육에만 푹 빠져 남을 해쳐서 자신을 기를

뿐입니다. 어찌 어진 사람과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저의 무리가 아닙니

다.” 하고는 마침내 옷을 털고 가버렸다. 구참공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혜

숙이) 먹던 것을 보니 그릇 안에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147)

구참공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였다. 진평왕(眞平

王)148)이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 오게 하였다. 혜숙이 여자와 침

상에 누워 자는 척하였더니, 중사(中使)149)는 천하다고 여겨 돌아가는데 7,

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다. (중사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

었더니 말하기를, “성안 신도의 집에 칠일재(七日齋)150)에 갔다가 법석이

끝나서 돌아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중사가 그 말을 왕에게 보고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어 신도의 집을 조사하게 하였더니 이 일 또한 사실이었

다.151) 얼마 지나지 않아 혜숙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152)

〈형현(硎峴)이라고도 한다.〉 동쪽에 장사를 지냈다. 그 마을 사람 중에 고개 너

머 서쪽에서 오던 자가 있었는데,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 곳에 오래 살아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습니

다.” 라고 하였다. 서로 인사하고 헤어져 반 리쯤 가더니 구름을 타고 가버

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례 치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여, 무덤을 열고 보니 짚신 한 짝

만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절이 있어 혜숙사라 하는데, 혜숙

이 살던 곳이라고 하며 또한 승탑이 있다.153)

二惠同塵

釋惠宿 沉光於好世郞徒. 郞旣讓名黃卷, 師亦隱居赤善村〈今

安康縣有赤谷村〉二十餘年. 時國仙瞿旵公, 嘗往其郊, 縱獵一日.

宿出於道左, 攬轡而請, 曰“ 庸僧亦願隨從, 可乎?” 公許之.

於是縱橫馳突, 裸袒相先, 公旣悅. 及休勞坐, 數炮烹相餉, 宿

亦與啖囓, 略無忤色. 旣而進於前曰,“ 今有美鮮於此, 益薦之

何?” 公曰,“ 善.” 宿屛人割其股, 寘盤以薦. 衣血淋漓, 公愕然

曰,“ 何至此耶?” 宿曰,“ 始吾謂公仁人也, 能恕己通物也, 故

從之爾. 今察公所好, 唯殺戮之耽篤? 害彼自養而已. 豈仁人

君子之所爲. 非吾徒也.” 遂拂衣而行. 公大慚, 視其所食, 盤

中鮮胾不滅. 公甚異之, 歸奏於朝. 眞平王聞之, 遣使徵迎. 宿

示臥婦床而寢, 中使陋焉, 返行七八里, 逢師於途. 問其所從

來, 曰 “城中檀越家, 赴七日齋, 席罷而來矣.” 中使以其語, 達

於上. 又遣人, 檢檀越家, 其事亦實. 未幾宿忽死, 村人轝葬於

耳峴〈一作硎峴〉東. 其村人有自峴西來者, 逢宿於途中, 問其何

往. 曰 “久居此地, 欲遊他方爾.” 相揖而別, 行半許里, 躡雲而

逝. 其人至峴東, 見葬者未散, 具說其由, 開塚視之, 唯芒鞋一

隻而已. 今安康縣之北, 有寺名惠宿, 乃其所居云, 亦有浮圖焉.

138) 혜숙(惠宿):진평왕 때의 승려. 출신성분은 알 수 없다. 호세(好世)가 이끄는 화랑

도에 승려낭도로 참여한바 있으며 600년(진평왕 22)에 안함(安含 579~640)과 함

께 중국유학을 시도하였으나 풍랑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안강현 적선촌에 은거

하였는데, 국선(國仙)인 구참공(瞿旵公)을 감화시킨 인연으로 진평왕의 부름을

받지만 이를 거부하였다. 동시에 다른 두 장소에서 출몰한다든가, 입적 후에 이

른바 ‘척리귀서(隻履歸西)’와 같은 여러 이적을 보여주었다. 신라 십성(十聖)의

한 사람으로 흥륜사 금당에 모셔져 추앙받았다. 고려의 일연 당시까지만 하더라

도 그의 승탑이 안강현 혜숙사에 전해지고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알 수 없다.

139) 호세랑(好世郞):진평왕대의 화랑. 울주 천전리서석(川前里書石)에 ‘수품(水品)’

과 함께 나오는 ‘호세(好世)’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譯註韓國古代金石文』 권2,

172쪽)

140) 침광(沈光)은 자취 또는 이름을 숨기는 것을 말한다.

141) 원문의 황권(黃卷)은 화랑도의 명부이다. 화랑도에 들어가는 것을 풍류황권에

이름을 올린다고 하였다.

142) 적선촌(赤善村):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부근에 있던 지역으로 추정되

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안강현에 적곡촌(赤谷村)이 있었다.

143) 안강현(安康縣):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본래 신라의 비화현(比火縣)

인데, 경덕왕 때 안강현으로 이름을 고치고 의창군(義昌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때 경주에 예속되었다.

144) 국선(國仙):화랑의 다른 이름. 또는 국선을 화랑의 상위조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145) 구참공(瞿旵公):신라 진평왕대의 화랑.

146) 원문의 용승(庸僧)은 소승(小僧)과 같은 뜻으로 스님이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147) 이 부분은 신체단련으로서 사냥을 즐기던 화랑에 대하여, 군자(君子)로서의 인

(仁)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랑도 정신에 불교와 유교의 가치관이 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인(仁)과 상통하는 불교식 표현이 불살생(不殺生)인데, 자신

의 다리 살을 베어서 살생을 일삼는 상대방을 감화시켰다는 이야기는 『사분율

(四分律)』 권52에 보인다.

148)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

국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5-1 주

13) 참조.

149) 중사(中使):궁중에서 파견하거나 왕이 보내는 사자(使者).

150) 칠일재(七日齋):사람이 죽은 지 7일이 되는 날에 부처 앞에 드리는 불공.

151) 이 부분은 불교도의 윤리의식이 남녀의 유별을 강조하는 『사분율(四分律)』에서

상(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려는 쪽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152) 이현(耳峴):『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의하면, 안강현 서쪽에 마이현(馬耳

峴)이 있다.

153) 이 대목은 남북조시기의 전설적 고승인 배도(杯度)나 달마(達磨)의 입적 후 이

적(異蹟)들을 연상시킨다.『양고승전(梁高僧傳)』권10 배도전에 의하면 배도가

입적하자 사람들이 그를 장사 지냈다. 며칠 후 북쪽에서 온 어떤 사람이 갈대 바

구니를 지고 팽성(彭城)으로 가는 배도를 만났는데, 그의 관을 열어 보니 가죽

신만 있었다고 한다. 선종 사서에서는 달마와 관련하여 ‘척리귀서(隻履歸西)’ 설

화를 수록하였다. 달마가 입적하자 웅이산(熊耳山)에 안장하였는데 서역에서

돌아오던 북위의 사신 송운(宋雲)이 총령(葱嶺, 파미르고원)에서 손에 짚신 한

짝만을 들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만났다. 그런데 돌아와 무덤을 열어보니 관

속에는 짚신 한 짝만 있었다는 것이다.

혜공스님은 천진공(天眞公)154)의 집에서 고용살이 하는 여자의 아들로,

어릴 때 이름은 우조(憂助)〈방언이다〉였다. 천진공이 일찍이 종기를 앓아

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우조가 나이 일곱살이

었는데 어머니에게 묻기를, “집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손님이 많습니

까?” 하였다. 어머니가 “나리께서 나쁜 병으로 돌아가시려 하는데 너는 어

찌 알지 못하느냐?” 하였다. 우조가 말하기를,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

다.”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이상히 여겨 천진공에게 알리자 천진공은

(그를) 불러 오게 하였다. 침상 아래 앉아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얼

마 안있어 종기가 터졌다. 천진공은 우연한 일이라고 여기고 크게 이상하

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윽고 장성해서는 천진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공

이 매우 마음에 들어하였다. 전에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

임하는 자가 있었는데, 천진공이 골라준 매를 얻어 임지로 갔다. 하루는 천

진공이 갑자기 그 매가 생각나서 이튿날 새벽에 우조를 보내어 매를 가져

오게 하려고 마음먹었다. 우조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잠깐 사이에 매를 가져

와서 새벽녘에 바쳤다. 천진공은 크게 놀라고 깨달아 비로소 예전에 종기

를 치료해준 일들이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알았다. 말하기를,

“제가 훌륭한 성인이 저의 집에 오신 것도 모르고 막말과 무례함으로 욕을

보였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스승이 되어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는 마침내 자리에서 내려가 절하였다.

영험과 기이함이 드러난 뒤 마침내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이름을 혜공

(惠空)이라고 바꾸었다. 항상 조그만 절에 살며 매번 미친 듯이 크게 취해

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어서 부궤(負簣)화상이라고 불

렀으며, 머무르는 절은 이로 인해 부개사(夫蓋寺)155)라고 하였다. 부개는

삼태기의 사투리이다. 매번 절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 여러 달이 되도록 나

오지 않아서 스님 이름으로 우물 이름을 삼았다.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을 입

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와서 절의 스님들은 이것으로 (혜공이 나오

는) 조짐으로 삼았으며, 막상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

만년에 항사사(恒沙寺)156)〈지금 영일현157)의 오어사(吾魚寺)158)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모래알처럼 많은159) 사람들이 출세하였기 때문에 항사동(恒沙洞)이라 이름하

였다”고 한다.〉로 옮겨 살았다. 그때 원효(元曉)160)가 여러 경전의 주해를 찬

술하면서 매번 스님에게 가서 의심나는 것을 물었는데, 혹 서로 농담도 하

였다.161) 하루는 두 사람이 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 먹고는 바위 위

에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리기를, “그대의 똥이 내

물고기다.” 라고 하였기 때문에 오어사라고 이름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것

이 원효스님의 말이라고도 하는데, 잘못이다.162) 그 지방에서는 그 개울을

잘못 불러 모의천(芼矣川)163)이라고 한다.

구참공이 일찍이 산에 놀러갔다가 산길 가운데서 혜공이 죽어 쓰러져 있

는 것을 보았다. 시신이 부어터지고 문드러져서 구더기가 생겨 있었다. 한

참을 슬퍼하다가 말고삐를 돌려 성으로 들어갔는데, 혜공이 크게 취해서 시

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또 하루는 풀로 새끼줄을 꼬아서 영

묘사(靈廟寺)164)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經樓)165)와 남문과 회랑을

둘러싸고는 강사(剛司)166)에 알리기를, “이 새끼줄은 3일 후에 풀어야 됩니

다.”라고 하였다. 강사가 이상히 여겼으나 그 말을 따랐다. 과연 3일 후에 선

덕왕(善德王)이 행차하여 절에 들어오자 지귀(志鬼)167)의 심중(心中)에서

불이 나와 그 탑을 태웠는데 오직 새끼줄로 묶었던 곳만 모면하였다.168)

또 신인종(神印宗)169)의 조사인 명랑(明朗)170)이 새로 금강사(金剛寺)171)

를 창건하여 낙성회172)를 베풀었을 때 훌륭한 스님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 스님만이 가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사르고 경건히 기도하고 조금 지

나서 스님이 도착하였다. 그 때 막 큰 비가 내렸는데 옷이 젖지 않고 발에

진흙도 묻지 않았다. 명랑에게 말하기를, “외람되게도 은근히 부르시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하였다. 영험스런 자취가 자못 많다. 죽을 때는 허공에

떠서 입적을 알렸으며, 사리는 수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일찍이『조론(肇

論)』173)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예전에 지은 것이다.”고 하였다. 그

가 승조(僧肇)의 후신임을 알겠다.

찬한다.

초원에서 멋대로 사냥하고 침상머리에 눕고,

술집에서 미친 듯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자네.

신 한 짝으로 허공에 떠서 어디로 가는가,

한 쌍의 진중한 불 속의 연꽃174)이로다.

釋惠空 天眞公之家傭嫗之子, 小名憂助.〈盖方言也〉 公嘗患瘡,

濱於死而候慰塡街. 憂助年七歲, 謂其母曰,“ 家有何事, 賓客

之多也?” 母曰, “家公發惡疾, 將死矣. 爾何不知?” 助曰, “吾

能右之.” 母異其言, 告於公, 公使喚來. 至坐床下, 無一語, 須

臾瘡潰. 公謂偶爾, 不甚異之. 旣壯, 爲公養鷹, 甚愜公意. 初

公之弟, 有得官赴外者, 請公之選鷹, 歸治所. 一夕公忽憶其

鷹, 明晨擬遣助取之. 助已先知之, 俄頃取鷹, 昧爽獻之. 公大

驚悟, 方知昔日救瘡之事, 皆叵測也. 謂曰,“ 僕不知至聖之托

吾家, 狂言非禮汚辱之, 厥罪何雪? 而後乃今願爲導師, 導我

也.” 遂下拜.

靈異旣著, 遂出家爲僧, 易名惠空. 常住一小寺, 每猖狂大醉,

負簣歌舞於街巷, 號負簣和尙, 所居寺因名夫蓋寺. 乃簣之鄕

言也. 每入寺之井中, 數月不出, 因以師名名其井. 每出有碧

衣神童先湧, 故寺僧以此爲候. 旣出 衣裳不濕. 晩年移止恒沙

寺.〈今迎日縣吾魚寺. 諺云,“ 恒沙人出世 故名恒沙洞.”〉時元曉撰諸經

疏, 每就師質疑, 或相調戱. 一日二公沿溪, 掇魚蝦而啖之, 放

便於石上. 公指之戱曰, “汝屎吾魚.” 故因名吾魚寺. 或人以此

爲曉師之語, 濫也. 鄕俗訛呼其溪曰 芼矣川. 瞿旵公嘗遊山,

見公死僵於山路中, 其屍膖脹, 爛生虫蛆. 悲嘆久之, 及廻轡入

城, 見公大醉歌舞於市中. 又一日將草索綯, 入靈廟寺, 圍結於

金堂與左右經樓及南門廊廡, 告剛司,“ 此索須三日後取之”.

剛司異焉而從之. 果三日, 善德王駕幸入寺, 志鬼心火, 出燒其

塔, 唯結索處獲免.

又神印祖師明朗, 新創金剛寺, 設落成會, 龍象畢集, 唯師不赴.

朗卽焚香虔禱, 小選公至. 時方大雨, 衣袴不濕, 足不沾泥. 謂明

朗曰,“ 辱召懃懃 故玆來矣.” 靈迹頗多. 及終, 浮空告寂, 舍利

莫知其數. 嘗見肇論曰,“ 是吾昔所撰也.” 乃知僧肇之後有也.

讚曰, 草原縱獵床頭臥, 酒肆狂歌井底眠. 隻履浮空何處去, 一

雙珍重火中蓮.

154) 천진공(天眞公):당시 신라의 귀족.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55) 부개사(夫蓋寺):삼태기를 진다는 부궤(負簣)와 부개(夫蓋)의 발음이 비슷하여

생긴 이름인데, 일연은 부개가 삼태기의 사투리라고 풀이하였다.

156) 항사사(恒沙寺):오어사(吾魚寺)가 있는 마을이 항사리이다.

157) 영일현(迎日縣):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 본래는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 또

는 오량우현(烏良友縣))으로 경덕왕 때 임정현(臨汀縣)이라 개칭하여 의창군(義

昌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으며, 고려 때 영일현으로 고쳤고, 현종 때 경주에

속하게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3 영일현(迎日縣) 건치

연혁(建置沿革)).

158) 오어사(吾魚寺):경상북도 영일군 오천면 항사리 운제산 동쪽 항사동에 위치한

신라 이래의 고찰. 절에는 원효성사의 것이라고 전하는 풀뿌리로 섬세하게 짠

삿갓(높이 1자, 폭 1.2자 가량)이 보존되고 있다. 부근에 자장암과 원효암이 있다.

159) 항사(恒沙):항하사(恒河沙)의 준말. 인도 항하(갠지스강)의 모래알을 말한다.

즉 셀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비유한다.

160) 원효(元曉, 617~686):중국에 가지 않고 신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경론을 탐구하

여 하나하나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평가한 종요(宗要)류의 저술을 펴내고, 더

욱 관심이 가는 경론에 대해서는 상세한 주석서를 썼다. 『십문화쟁론』으로 새로

운 화합의 불교관을 펼쳤고,『기신론소』와『금강삼매경론』의 일심(一心)사상을

체계화하여 신라불교의 가장 탁월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후에는 대중 교화에

매진하였다. 5-7 주273) 참조.

161) 조희(調戱):언어로 서로 희롱함을 뜻한다.

162)『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3 영일현(迎日縣) 불우조(佛宇條)에

서는 원효의 말이라고 하였다.

163) 모의천(芼矣川):기계현(杞溪縣)을 본래 모혜현(芼兮縣)이라 하였으므로(『삼국

사기』권34 지리지 良州 義昌郡 杞溪縣) 경주시 안강읍 북쪽에 있던 모혜현을 흐

르는 시내로 생각된다.

164) 영묘사(靈廟寺):영묘사(靈妙寺), 영묘사(零妙寺)라고도 한다. 신라에 있었다는

과거불 시대의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로, 신라 선덕왕 4년(635)에 창건되었

다. 문무왕 2년(662)과 6년(666), 8년(668), 성덕왕 2년(703) 등 여러 차례 불이 났

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중대 왕실에 의해 건립된 사원에 설치되어, 불교를 통제

하고 왕실의 원당(願堂)으로서의 봉사(奉祀) 기능을 하던 승정기구인 성전사원

(成典寺院)이었다. 상당(上堂) 1인과 청위(靑位) 1인, 사(史) 2인을 두어 성전사원

중에서는 비교적 간단한 기구였다.(『三國史記』 권38 職官 上) 봉덕사가 폐사되자

1460년에 성덕대왕신종을 이 절로 옮겨왔다고 하는데, 현재 정확한 절터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경주시 성진리 서천가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곳을 영묘

사 터로 비정하고 있는데, 근래에 현재 흥륜사라고 알려진 터에서 ‘영묘(靈廟)’라

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을 영묘사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165) 경루(經樓):불경과 서적을 넣어둔 누각.

166) 강사(剛司):사찰의 운영을 담당하던 기구인 삼강전(三剛典)과 관련된 이름으로

생각되어, 삼강전을 맡은 운영 담당 승려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67) 지귀(志鬼):신라 선덕 여왕 때 활리(活里)에 살았던 역인(驛人)이 선덕왕을 사

모하다 죽어서 지귀가 되었다고 한다. 선덕왕이 불공을 드리는 절에 따라오게

하였는데, 불공을 드리는 동안 잠들어 버린 지귀에게 선덕왕이 금팔찌를 가슴

에 놓고 갔다. 그런데 잠에서 깬 지귀는 너무도 기쁜나머지 기쁨이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불타올라 거리에까지 그 기운이 미쳤다. 그러자 선덕왕은 불

귀신을 쫓는 주문을 내놓았고, 백성들이 이것을 대문에 붙이면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168) 지귀심화(志鬼心火)의 설화는 용수(龍樹)가 찬술한『대지도론(大智度論)』권14

석초품중찬제바라밀의(釋初品中羼提波羅蜜義)에 나오는 술파가설화(術波伽說

話)에서 유래하는데, 술파가설화의 주제와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다.

즉 술파가설화가 여자의 음욕(淫欲)을 경계하는 데 비해서,『삼국유사』의 지귀

심화는 혜공의 신통력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조선시대 권문해(權文海)의『대동

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권20 심화소탑조(心火燒塔條)에서는 최치원의「수이

전(殊異傳)」을 인용하여 더 자세한 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혜공이 빠

진 채 화재를 예방하는 주문의 성립연기설화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169) 신인(神印)은 신인종(神印宗)으로 신라 중대에 크게 활동했던 밀교 종파이다.

신인은 범어 문두루(文豆婁 mūdra)의 의역이다. 개창조는 선덕왕대에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명랑(明朗) 스님이다.

170) 명랑(明朗):생몰년 미상. 7세기 신라의 신인종 승려. 자(字)는 국육(國育)이며,

사찬 재량(才良)의 아들이고 자장 스님의 외조카이다. 선덕왕 원년(632)에 당나

라에 유학했다가 3년 만에 귀국하였는데, 귀국하는 길에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용왕으로부터 황금 1천냥을 시주받았다고 한다. 귀국 후 시주 받은 황금

으로 절을 창건하여 금광사(金光寺)라고 하였다. 문무왕 때인 670년과 671년에

『관정경』과『금광명경』을 근거로 유가명승 12명과 함께 문두루비밀법을 설행

하여 신라를 공격해 오는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는데 공헌하였다는 설화를 남겼

다. 이와 관련하여 창건된 절이 사천왕사이다.

171) 금강사(金剛寺):금강사(金崗寺).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다.『삼국유사』권5 명랑

신인조에 나오는 금광사(金光寺) 또는 금우사(金羽寺)와 같은 사찰로 추정된다.

172) 낙성회:절을 새로 만들고 이를 기념하여 베푸는 잔치.

173)『조론(肇論)』:승조(僧肇 374~414)의 저술. 인식 대상의 현상과 본질을 각각 다룬

「물불천론(物不遷論)」·「불진공론(不眞空論)」, 인식 주체를 다룬 「반야무지론(般

若無知論)」, 수행의 결과 도달하게 되는 열반을 다룬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열반무명론」은 후대에 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조론』은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오류를 시정하고자 찬술되었다. 그 기본 입장은

공(空)과 가(假)의 두 극단을 중도(中道)로 지양하려는 데 있다. 승조는 반야공관

사상(般若空觀思想)을 내세워 이를 불교의 바른 이치로 선양하려고 하였다.

174) 화중련(火中蓮):불속에 연꽃이 피었다는 말로서 아주 드문 것을 말한다. 여

기서는 중생제도를 찬양하는 표현으로 쓰였다. 『유마경』 권중 불도품(佛道品)

8(大14 p.550b4~5. 火中生蓮華, 是可謂希有. 在欲而行禪, 希有亦如是.)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해제]

삼국시대 후반 신라불교의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계율과 여러 교학을

리 폈던 자장의 생애를 엮은 편이다. 진골 출신의 가문 좋은 자장은 재상과

같은 관직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왕

의 허락을 얻어 출가하였다. 문인들과 함께 당에 가서 불교를 익히고, 특히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기별을 받았으며 종남산 계곡에서도 수

행하였다. 신라에 돌아올 때 경전과 번당 등 장엄물을 가지고 왔으며 분황

사와 황룡사에서 지내면서 경론과 보살계본을 강의하였다. 교단이 비대해

지자 조정에서는 대국통(大國統)의 직책을 맡겨 승려들의 규범을 주관하

도록 하였고, 자장은 이에 계율의 엄정한 준수와 실천 그리고 지방 사찰의

검열과 장엄 법식의 제도화 등을 추진하였다. 승관직 설명에 붙인 각주에

서 부수적으로 신라시대 승관직 전반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많은 일반 사람들이 계를 받고 출가자가 늘어 났다고 한다. 특

히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아 계율의 중심도량으로 만들고,

만년에는 강릉의 수다사와 태백산의 석남원을 창건하는 등 10여 곳에 절

과 탑을 세웠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문수보살의 현신

을 알아보지 못하여 죽었다는 기록은 당시 불교계를 이끌던 최상위 승려의

마음가짐에 대한 인식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장의 전기는 같은 시대를 살던 도선이 편찬한 『속고승전(續高僧傳)』

(645년)에도 실려 있다. 『속고승전』에는 귀국후 만년의 일인 수다사 창건

이후의 기록이 없는 대신 그 이전의 기록은 더 상세하다. 같은 내용을 기

술한 부분은『삼국유사』와『속고승전』의 두 기록에 큰 차이가 없다. 도세

(道世)가 편찬한 『법원주림(法苑珠林)』(660년)에도 실려 있다. 신라 말기

에 황룡사탑을 수리하고 넣은「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

刹柱本記)」에는 황룡사탑을 세우는데 주도적인 활동을 했던 자장의 간단

한 기록이 있으며,『삼국유사』보다 조금 늦게 편찬된 민지(閔漬)의 『오대

산월정사사적(五臺山月精寺事蹟)』(1307년)에도 자장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어 비교된다.

[역주]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

대덕175) 자장(慈藏)176)은 김씨이니, 본래 진한(辰韓)177)의 진골(眞骨)178)

소판(蘇判)179)〈3등급의 관등 이름〉무림(茂林)180)의 아들이다.181) 그 아버지

는 높은 관직을 지냈는데 늦도록 후손이 없었으므로,182) 불교에 귀의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183)을 만들어 자식 하나 낳기를 희망하며 축원하기를,

“만일 아들을 낳으면 출가시켜 불가의 동량을 삼겠습니다.” 하였다. 어머니

가 문득 별이 떨어져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그로 인하여 임신하

였다. 태어나니 석존(釋尊)과 같은 날이었으며,184) 선종랑(善宗郞)185)이라

고 이름 하였다. 정신과 뜻이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장과 생각이 날로 풍부

해졌으나, 세상의 취미에 물들지 않았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자 더욱 세상

의 시끄러움이 싫어져서 부인과 자식을 버리고, 전원(田園)을 희사하여186)

원녕사(元寧寺)로 만들었다. 그윽하고 험한 곳에 홀로 자리를 잡고, 이리와

호랑이를 피하지 않았으며, 고골관(枯骨觀)187)을 닦는 데 조금도 게을리 하

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작은 방을 짓고 주위를 가시나무로 둘러막고 그 속

에 맨몸으로 앉아, 움직일 때마다 경계하여 찔리게 하고, 머리는 들보에 매

달아 정신이 혼미함을 쫓았다.188)

마침 재상189)자리가 비어 문벌로서 논의의 대상이 되었으나, 여러 번 부

름을 받고서도 나아가지 않았다. 왕190)이 이에 명하기를, “(관직에)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를 듣고서 말하기를, “내가 차라

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토록 계를 어기고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이 일을 듣고 왕이 출가를 허락하였다.191) 이에 바위

사이에 깊이 숨어 사니, 양식 한 톨도 얻지 못했다. 그 때 이상한 새가 과일

을 물어 바치니 손으로 받아 먹었다. 얼마 후 꿈에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

(五戒)192)를 주자 비로소 골짜기에서 나왔고, 마을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慈藏定律

大德慈藏金氏, 本辰韓眞骨蘇判〈三級爵名〉 茂林之子. 其父歷

官淸要, 絶無後胤, 乃歸心三寶, 造于千部觀音, 希生一息. 祝

曰, “若生男子, 捨作法海津梁.” 母忽夢星墜入懷, 因有娠. 及

誕, 與釋尊同日, 名善宗郞. 神志澄睿, 文思日贍, 而無染世趣.

早喪二親, 轉厭塵譁, 捐妻息, 捨田園爲元寧寺. 獨處幽險, 不

避狼虎, 修枯骨觀, 微或倦弊. 乃作小室, 周障荊棘, 裸坐其中,

動輒箴刺, 頭懸在梁, 以祛昏暝. 適台輔有闕, 門閥當議, 累徵

不赴. 王乃勅曰, “不就斬之.” 藏聞之曰, “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事聞, 上許令出家. 乃深隱岩叢, 糧粒不

恤. 時有異禽, 含菓來供, 就手以喰. 俄夢天人, 來授五戒, 方

始出谷, 鄕邑士女, 爭來受戒.

175) 대덕(大德):중국 오나라의 손권(孫權) 때 처음 등장하였으며, 수·당 때에는 번

역 승려에게 붙여졌다.(최치원,「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迦耶山海印

寺善安住院壁記)」『東文選』권64) 신라에서 대덕에 관한 최초의 임명기사는『삼

국사기』진평왕 24년에 지명(智明)을 임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신라가야산

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서는 선덕왕 때 지영(智穎)·승고(乘固)의 두 비구를 최

초의 대덕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승직(僧職)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 의하면, 50세가 되어야 대덕의

임명대상이 될 수 있고, 그 임기는 7년이라고 하였다.

176) 자장(慈藏):신라시대의 승려.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郎). 진골 무림(茂

林)의 아들이다. 638년 왕명으로 당(唐)나라에 가서 오대산(五臺山)을 순례하고

문수보살의 진신을 감응하여 가사와 사리를 받았다. 이어 종남산(終南山) 운제

사(雲際寺)에서 수행하고 도선(道宣)과 교유하였으며 643년 대장경과 여러 불

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섭

대승론』『보살계본』등을 강론하고 대국통(大國統)의 직책을 맡아 승니(僧尼)

의 규범과 승통(僧統)을 통괄하여 계율의 엄정한 준수와 실천 그리고 지방 사찰

의 검열과 장엄 법식의 제도화 등을 추진하였다. 황룡사 구층탑의 창건을 건의

하여 645년에 완성하였다. 또한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진신사리를 봉안하

며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세웠다. 649년에는 왕에게 상주하여 중국의 제도를 따

라 신라에서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했으며,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하였

다. 만년에는 서울을 떠나 강릉(江陵)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뒤에 태백산에

석남원(石南院, 지금의 淨岩寺)를 세웠다. 후에 계율종의 종조로 추앙되었다.

177) 진한(辰韓):백제로 발전한 마한, 가야로 발전한 변한과 함께 삼한(三韓) 중의

하나. 낙동강 동쪽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여러 나라 중의 하나인 경주지역의 사

로국(斯盧國)이 점차 다른 나라를 통합하여 신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여기에

서는 신라를 말한다.

178) 진골(眞骨):골품제도의 한 등급으로 성골 다음의 계급이다. 골품제도는 혈통에

따라 정치활동에서 사회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주어지는

제도로서 성골(聖骨)·진골 및 6~1두품까지 모두 8개의 신분층으로 구성되었

다. 진골은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의 최고 관등에 오를 수 있으며, 각 중앙관서

의 장관직을 독점한 계층으로 신라 귀족의 중심을 이루었다.

179) 소판(蘇判):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위. 잡찬(迊湌)이라고도 한다.

180) 무림(茂林):자장의 부친 이름을『속고승전(續高僧傳)』권24 자장전(慈藏傳)에

서는 ‘무림(武林)’이라 한데 비하여,『삼국유사』권1 기이2 진덕왕(眞德王)조에

서는 ‘호림(虎林)’이라 하였으며,『삼국유사』권4 이곳과 권5 명랑신인(明朗神

印)조에서는 ‘무림(茂林)’이라 하였다. 이는 원래 이름이 무림(武林)이었는데, 고

려 혜종의 휘가 ‘무(武)’였기 때문에 일연이 이를 피휘하고자 ‘호(虎)’ 또는 ‘무

(茂)’로 바꾸어 쓴 것이다. 김무림은 진덕왕 때 알천,유신 등 5인과 함께 남산 우

지암 회의에 참석한 당시 최고 귀족이었다.

181) 민지(閔漬)의 기록에는 자장이 무림의 둘째 아들이며 선덕왕의 친족으로,『두타

산삼화사사적(頭陀山三和寺事蹟)』에는 신라 왕손으로 각각 나온다.

182) 원문의 무윤(無胤)은 대를 이을 후손이 없다는 뜻이다.

183) 천부관음(千部觀音):‘1천 개의 관음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천수천안

관음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아직 변화관음 신앙이 활발해진 때가 아니

므로 천수관음으로 볼 이유가 없다.

184) 불탄일은 4월 8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북주 송름(宋懍)의『형초세

시기(荊楚歲時記)』에는 화북에서는 2월 8일을 불하생(佛下生)의 날, 성도일(成道

日)이라 해서 4월 8일과 함께 재식(齋食)을 베푸는 지방도 있었다고 한다. 또 수

두태경(杜台卿)의 『옥촉보전(玉燭寶典)』에는 수나라에서 2월 8일과 4월 8일에

모두 행상(行像)을 행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때에는 4월 8일을 주류로 하는 것

이 주류가 되었다.『당고승전』자장전에는 4월 8일이라 하였다.

185) 선종랑(善宗郞):「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에는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랑

(郞)’은 신라시대 귀족 자제의 이름 뒤에 붙는 접미사이다.

186) 여기서는 전원(田園)을 희사하였다고 하였고, 뒤에서는 태어난 집[生緣里第]를

절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187) 고골관(枯骨觀):백골관(白骨觀)이라고도 한다.『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석

가모니가 가섭보살에게 가르친 사념처(四念處)의 일종이다. 사념처란 우리의

심신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능, 즉 육체[身]·감각작용[受]·마음[心]·대상[法]

이 부정(不淨)하고, 괴롭고[苦],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임을 관찰하여 높은

단계의 공관(空觀)으로 들어가는 수행법이다. 특히 백골관은 다분히 염세적이

며 부정적인 수행법으로서 소승 계통의 선 수행인데, 『열반경』에서는 사성제(四

聖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관찰하기 위한 전제로서 중요시되고 있다. 중국

에서는 남북조 말기의 승조(僧稠 480~560)를 비롯한 상당수의 승려들이 화북지

방에서 이러한 사념처관을 수행하였다.

188) 이때 자장의 수행은 초기불교에서 강조하던 것과 같은 엄격한 수행이었음을 말

해 준다.

189) 태보(台輔)는 재상을 말한다.

190) 이때의 왕은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년)을 말한다.

191) 민지(閔漬)가 1307년에 찬술한『오대산월정사사적(五臺山月精寺事蹟)』가운데

있는「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 따르

면 자장이 선덕왕의 출사령을 거부한 때의 나이가 25세라고 한다.

192) 오계(五戒):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생명있는 것을 죽이지 말

라(不殺生), ②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말라(不偸盜), ③음행하지 말라(不邪

淫), ④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 ⑤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 이다. 여기서는 자

장이 출가하였는데도 오계를 받았다고 하였다.

자장은 스스로 변방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중국193)에서 크게 교화

되기를 희망하였다. 인평(仁平)194) 3년(636) 병신년〈즉 정관(貞觀)195) 10년〉

196) 왕명으로 문인인 승실(僧實) 등 10여 명과 함께 서쪽으로 당나라로

들어갔다. 청량산(淸涼山)197)을 찾아가니 산에 문수(文殊)대성198)의 소상

(塑相)199)이 있었다. 그 나라에서 서로 전해오기를, “제석천(帝釋天)200)

장인을 거느리고 와서 조각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상 앞에서 그윽히 감응

하기를 기도하니, 꿈에 문수대성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범어(梵語)로 된 게

송을 주었는데 깨어나 보니 해석을 할 수 없었다. 아침에 이상한 승려가 와

서 해석하여 주고〈이미 황룡사탑(皇龍寺塔)편201)에서 나왔다〉또 말하기를, “비

록 만 가지 가르침을 배워도 이 글보다 나은 것은 없다”라 하고, 가사와 사

리 등을 주고 사라졌다.〈자장이 애초에 이를 숨겼기 때문에『당고승전(唐高

僧傳)』에는 실리지 않았다.〉자장은 꿈에 이미 대성의 기별(記莂)202)을 받았

음을 알고는 북대(北臺)203)에서 내려가 태화지(太和池)에 다다랐다. 서울

로 들어가니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204)

모시게 하였으며, 총애하여 내리는 선물이 빈번하고 후하였다. 자장은 그

번잡함을 싫어하여, 천자에게 올리는 글을 보내고 종남산(終南山)205) 운제

사(雲際寺)206)의 동쪽 산비탈로 들어가 바위에 나무로 가설하여 방을 만들

어 3년을 살았다. 사람과 귀신이 계를 받고 영험스런 감응이 날로 오갔는

데, 말이 번거로워 싣지 않는다. 얼마 후 다시 서울로 들어가니, 또 칙서로

위로하고, 비단 200필을 하사하여 의복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藏自嘆邊生, 西希大化. 以仁平三年丙申歲〈卽貞觀十年也〉受

勅, 與門人僧實等十餘輩, 西入唐. 謁淸凉山, 山有曼殊大聖

塑相. 彼國相傳云,“ 帝釋天將工來彫也.” 藏於像前 禱祈冥

感, 夢像摩頂授梵偈, 覺而未解. 及旦有異僧來釋云〈已出皇龍

塔篇〉. 又曰,“ 雖學萬敎, 未有過此文.” 以袈裟舍利等, 付之而

滅〈藏公初匿之, 故唐僧傳不載〉. 藏知已夢聖莂, 乃下北臺, 抵太和

池. 入京師, 太宗勅使慰撫, 安置勝光別院, 寵賜頻厚. 藏嫌

其繁, 擁啓表, 入終南雲際寺之東崿, 架嵓爲室, 居三年. 人

神受戒, 靈應日錯, 辭煩不載. 旣而再入京, 又蒙勅慰, 賜絹

二百匹, 用資衣費.

193) 서쪽은 신라의 서쪽인 중국을 말하므로 여기에서는 당나라를 가리킨다.

194) 인평(仁平)은 신라 선덕왕의 연호로서, 인평 3년은 선덕왕 5년, 당 정관 10년으

로 636년이다.

195) 정관(貞觀):당 태종(太宗)의 연호. 627~649년.

196) 당나라에 들어간 연대에 대해서『속고승전(續高僧傳)』자장전에서는 정관 12년

(638)이라 하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선덕왕 5년(636)이라고 하였다. 이

곳『삼국유사』는『삼국사기』와 같이 636년이라 하였다. 638년은 선덕왕의 연호

로는 인평(仁平) 5년이다. 그런데 인평 원년은 선덕왕 즉위 3년에 해당하므로 2

년의 차이가 난다.『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인평 5년을 선덕왕 5년으로 착각

한 것으로 생각된다. 자장의 황룡사탑 건립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가장 이른 기

록인「황룡사구층목탑찰주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記)」에서는 “선덕대왕 즉위 7

년 대당 정관 12년 우리나라 인평 5년 무술년(大王卽位七年 大唐貞觀十二年 我國

仁平五年 戊戌歲)”라고 하여 선덕왕 7년(638), 인평 5년으로 간지 무술세를 포함

하여 확실히 말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자장의 입당년은 선덕왕 7

년(638)이 맞다.

197) 청량산(淸凉山):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오대현(五臺縣)에 있는 오

대산을 말한다. 문수보살이 거처하는 성지로 신앙되는 산으로『화엄경』보살주

처품(菩薩住處品)에 동북방에 청량산이 있고 여기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하

였다. 다섯 봉우리가 높이 솟았는데 뾰족하지 않고 평평하여 오대라고 이름하

였고, 높고 서늘하여 청량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오대 중에서도 가장 높은 북대

가 가장 손꼽히는 기도처이다.

198) 만수대성(曼殊大聖)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을 말한다. 문수의 산스크리트어

가 mañjuśri이므로 문수사리(文殊師利) 또는 만수실리(曼殊室利)라고 음역하

였다.

199) 소상(塑相):진흙으로 만든 불상.

200) 제석천(帝釋天): Śakkra Devānām indra.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

음역하며 천제석(天帝釋)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인 인드라인데 불

교에 수용되어 제석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가다국의 바라문으로 보시 공덕

을 쌓고 도리천에 나서 삼십삼천의 주인이 되었다.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신의

대표이며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에서 살면서 사천왕을

거느리고 매달 두 차례 육재일마다 사람들의 잘잘못을 살펴 보호한다고 한다.

201)『삼국유사』권3 탑상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편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자

장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감응하고 난 후 신인으로부터 황룡사에 탑을

세울 것을 부촉받은 것을 말했다. 그런데 신인이 게송을 풀이해 준 일은『삼국

유사』권3 탑상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편에 나온다.

202) 원문의 성별(聖莂)은 문수대성의 기별(記莂). 기별은 부처가 수행하는 사람에게

성불할 수 있음을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203) 북대(北臺):오대산 다섯 봉우리의 북쪽 봉우리. 오대산은『화엄경』에 따라 문

수보살이 거처하는 성지로 신앙되는 산으로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한다. 중

국에서는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오대현(五臺縣)에 있는 산인데, 오대

중에서도 북대가 가장 높고 기도처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도 문수가 상주한다

는 신앙이 생겨나서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이 그 성지가 되었다.『삼국유사』권3

탑상 「대산오만진신」에는 동대(東臺)인 만월산(滿月山)에 관음보살이, 남대(南

臺)인 기린산(麒麟山)에 8대보살을 수위로 한 지장보살이, 서대(西臺)인 장령산

(長嶺山)에 무량수여래를 수위로한 대세지보살, 북대(北臺)인 상왕산(象王山)에

석가여래를 수위로 한 아라한이, 중대(中臺)인 풍로산(風盧山)에는 비로자나를

수위로 한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하였다.

204) 승광별원(勝光別院):장안 승광사의 별원을 가리킨다. 승광사는 원래 수나라

문제가 넷째 왕자인 촉왕(蜀王) 수(秀)를 위하여 창건한 사찰로서, 담천(曇遷,

542~607)이 여기에 머물면서 북지섭론학(北地攝論學)을 개척하였으며, 당 초기

에도 여전히 섭론 연구의 중심지였다.

205) 종남산(終南山):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곧 예전 장안(長安)의 남쪽

40km 거리에 있는 높이 2604m의 산으로 남산(南山)이라고도 한다. 진령산맥이

동서로 달리는 중에 있으며 일대의 취화산(翠華山) 남오대(南五臺) 규봉산(圭峰

山) 여산(驪山) 등을 모두 포괄하여 말한다. 당대 불교의 중심지로 도선(道宣),

지엄(智儼), 종밀(宗密) 등 수많은 고승들이 수행하였고 많은 사원이 있어 계율

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선종 등이 성행했던 수당대 중국불교의 중심지였으

나 지금은 유적만 남아 있는 곳이 많다.

206) 운제사(雲際寺):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남쪽 40km 거리에 있는 서

안시 호현(戶縣) 종남산에 있던 절. 당나라 때 계율종의 개창조 도선(道宣)이 삼

매를 수행하였던 유서 깊은 절이다. 현재는 작은 절이 남아 있다.

정관 17년(643) 계묘년207)에 신라 선덕왕(善德王)208)이 글을 올려 귀환을

요청하였다. (당 태종이)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궁궐로 불러 들여 비단 한

벌과 채색 비단 500단을 하사하였으며, 동궁(東宮)209)도 200단을 내리고 또

예물을 많이 주었다. 자장은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

각하여 대장경(大藏經) 한 질과 여러 가지 번(幡)210)과 당(幢)211)과 화개(花

蓋)212) 등 복되고 이익됨이 뛰어난 것들을 요청하여 모두 실었다. (신라에)

도착하자 온 나라가 환영하였으며, 왕명으로 분황사(芬皇寺)213)〈『당고승전』

에는 왕분사(王芬寺)라 하였다〉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시중들고 받듦이 넉넉하

고 극진했다. 어느 해 여름에 궁중으로 초청받아『섭대승론(攝大乘論)』214)

을 강의하였다. 또 황룡사(皇龍寺)215)에서『보살계본(菩薩戒本)』216)을 7일

밤낮으로 강연하자,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어, 사부대중(四部大衆)217)이 모두 그 기이함에 탄복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진 지 오래 되었는데, 교법

을 보존하고 수행하며 받드는 일에 대한 법과 의례가 없는 듯합니다. 무릇

법과 도리가 아니고서는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고, 칙명으로 자장

을 대국통(大國統)218)으로 삼아, 승려들의 모든 규범을 승통(僧統)에게 위

임하여 주관하도록 하였다.〈살피건대 북제(北齊)219) 천보(天保)220) 연간에 전국에

십통(十統)221)을 설치하니, 담당 관청이 “마땅히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에

문선제(文宣帝)222)가 법상법사(法上法師)223)로 대통(大統)224)을 삼고 나머지는 통통(通

統)225)으로 삼았다. 또 양(梁)226)나라와 진(陳)227)나라 때에 국통(國統)228)·주통(州統)·

국도(國都)·주도(州都)·승도(僧都)·승정(僧正)·도유내(都維乃)229) 등의 이름이 있었는

데, 모두 소현조(昭玄曹)230)에 속하였으니 소현조는 승려를 관장하는 관청 이름이다. 당나

라 초에 또 십대덕(十大德)231)이 성행하였다. 신라 진흥왕(眞興王)232) 11년(550) 경오년

에 안장(安藏)법사를 대서성(大書省)233) 1인으로 삼았으며, 또 소서성(小書省)234) 2인이

있었다. 이듬해 신미년(551)에 고구려의 혜량(惠亮)법사235)를 국통으로 삼았으니 또한 사

주(寺主)라고도 하였다. 보량(寶良)법사를 대도유나(大都維那)236) 1인으로 삼았고, 주통

(州統)은 9인이고 군통(郡統)은 18인이었다. 자장에 이르러 다시 대국통 1인을 두었으니,

대개 비상설 직책이다. 마치 부례랑(夫禮郞)237)을 대각간(大角干)으로 삼고, 김유신238)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삼은 것과 같다. 나중에 원성대왕 원년(785)에 이르러 다시 승관

을 설치하고 이름을 정법전(政法典)이라 하였으며,239) 대사(大舍)240) 1인과 사(史)241)

2인으로 관사를 구성하였다. 승려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를 가려서 임명하되, 별다

른 일이 있으면 교체하나 따로 정한 연한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자주색 옷을 입은 무리

는 또한 율사(律寺)와 구별된다. 마을에 전하는 기록에 이르기를, “자장이 당나라에 들어

가자 태종이 무건전(武乾殿)에 맞이하여『화엄경』242)을 강의하기를 청하니 하늘에서 감

로가 내렸으며 비로소 국사를 삼았다”고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다.『당고승전』243)과『국사

(國史)』244)에는 모두 이러한 글이 없다.〉

貞觀十七年癸卯, 本國善德王上表乞還. 詔許引入宮, 賜絹一

領雜綵五百端, 東宮亦賜二百端, 又多禮貺. 藏以本朝經像未

充, 乞齎藏經一部, 洎諸幡幢花蓋, 堪爲福利者, 皆載之. 旣至,

洎擧國欣迎, 命住芬皇寺〈唐傳作王芬〉 給侍稠渥. 一夏請至宮

中, 講大乘論. 又於皇龍寺, 演菩薩戒本, 七日七夜, 天降甘澍,

雲霧暗靄, 覆所講堂, 四衆咸服其異.

朝廷議曰, “佛敎東漸, 雖百千齡, 其於住持修奉, 軌儀闕如也.

非夫綱理, 無以肅淸.” 啓勑藏爲大國統, 凡僧尼一切規猷, 總

委僧統主之. 〈按北齊天保中 國置十統, 有司奏宜甄異之. 於是宣帝, 以法上

法師爲大統, 餘爲通統. 又梁陳之間, 有國統州統國都州都僧都僧正都維乃等名,

總屬昭玄曹, 曹卽領僧尼官名. 唐初又有十大德之盛. 新羅眞興王十一年庚午,

以安藏法師爲大書省一人, 又有小書省二人. 明年辛未, 以高麗惠亮法師爲國統,

亦云寺主, 寶良法師爲大都維那一人, 及州統九人, 郡統十八人等. 至藏, 更置大

國統一人, 蓋非常職也. 亦有夫禮郞爲大角干, 金庾信太大角干. 後至元聖大王

元年, 又置僧官, 名政法典, 以大舍一人史二人爲司. 揀僧中有才行者爲之, 有故

卽替, 無定年限. 故今紫衣之徒, 亦律寺之別也. 鄕傳云, 藏入唐, 太宗迎至武乾

殿, 請講華嚴, 天降甘露, 開爲國師云者, 妄矣. 唐傳與國史皆無文.〉

207) 신라 선덕왕 12년

208) 선덕왕(善德王):신라 제27대 왕. 재위 632~647년. 634년에 분황사(芬皇寺)를 창

건하였고,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첨성대를 쌓고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였다. 5-3 주106) 참조.

209) 동궁(東宮):황태자·태자·왕세자를 일컫는 말. 이들의 거처가 왕궁의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210) 번(幡):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장엄불구(莊嚴佛具)의 하나로 깃발의

총칭이다. 원래 전투에서 군대를 통솔할 때 군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쓰인 것으

로, 불교에서는 부처와 보살의 위력을 나타낸다. 당(幢)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수 나라 때 불사의 공양구 중에서 번을 많이 사용했다. 그 모습은 삼

각형의 번두(幡頭), 장방형의 당신(幢身), 번두 하부와 번신 좌우의 늘어져 장식

된 번수(幡手), 번신 하부 즉 늘어져 장식된 번족(幡足)으로 이루어졌다. 각각의

색깔과 크기는 사용 장소와 용도에 따라 달라서 종류가 매우 많다.

211) 당(幢):부처나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는 장엄(莊嚴) 불구의 하나이다. 번

(幡)과 같이 부처와 보살의 위력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는 번(幡)과 구별되지

않지만, 원통은 당(幢), 긴 편(片)으로 된 것은 번(幡)이라고 한다.

212) 화개(花蓋):화개(華蓋)라고도 한다. 꽃 등으로 장식한 일산(日傘)이다.

213) 분황사(芬皇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

었다. 신라에 옛 부처 때의 인연 있는 일곱 절터 중의 하나로 꼽혔던 중요한 절

이다. 자장이 귀국하자 머물게 했던 절이며, 7세기 중반에 원효가 활동하며『화

엄경소』를 지었다. 경덕왕 때인 755년에 36만근의 거대한 동제 약사여래상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명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는

등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이 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5-1 주51) 참조.

214)『섭대승론(攝大乘論)』:이곳에서는 대승론(大乘論)이라 하여 일반적인 대승 논서

로 볼 수도 있으나『속고승전』자장전에서『섭대승론』이라 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다.『섭대승론』은 섭론(攝論)이라고도 한다. 무착(無著)이 지은 책으로 삼성설

을 기본으로 하여 대승교리를 설명하고, 나아가 유식설(唯識說)을 발전시켰다.

215) 황룡사(皇龍寺):경상북도 경주시에 구황동에 있던 절. 신라 진흥왕 때인 553년

에 착공하여 569년에 완공된 신라불교의 중심 사찰로 지금은 탑과 금당 강당지

등 절터만 보존되어 있다. 높이 225척의 장대한 구층탑(九層塔)과 3만 5천근의

장륙존상과 십대제자상, 49만근의 거대한 황룡사종 등을 갖추었던 신라 국찰

(國刹)이다. 5-1 주36) 참조.

216) 보살계본(菩薩戒本):보살계본에는 크게 범망계(梵網戒)와 지지계(地持戒)와 유

가계(瑜伽戒)의 세 계통이 있다. 범망계는 구마라집이 번역한『범망경』에 나오

는 것으로 보살계 10중계와 48경계를 설하고 있다. 지의나 법장 등이 이에 대한

소를 지었다. 지지계는 담무참이 번역한『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에 나오는 4

바라이(波羅夷)계와 41경계를 말한다. 유가계는『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나

오는 것으로 내용은 지지계본과 비슷하다.

217) 사중(四衆):사부대중(四部大衆), 즉 불교교단을 구성하는 네 부류, 즉 남녀 출

가자집단인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 남녀 재가자집단인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를 말한다.

218) 대국통(大國統):551년(진흥왕 12) 처음으로 전국의 불교를 지도 총괄하기 위하

여 국통(國統) 위에 1명을 두었던 직책으로 보인다. 일연의 주처럼 비상설직이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19) 북제(北齊):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에 속했던 나라. 550~577년. 동위(東魏)의

실권자 고양(高洋)이 효정제(孝靜帝)에게서 양위 받아 등극하여 국호를 제(齊)

라 하였다. 내부혼란으로 붕괴하여, 577년 북주(北周)에 패망하였다.

220) 원문의 천보(天寶)는 천보(天保)의 잘못이다.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의 연

호. 550~558년.

221) 십통(十統):북제(北齊)때의 승관(僧官)이다. 『속고승전(續高僧傳)』 권8 법상전

에 의하면 천보 2년(551)에 십통(十統)의 직(職)을 두었고 법상(法上)을 십통의

대표로 삼았으니 대통(大統)이라고 하고 나머지 9명은 통통(通統)이라고 하였

다고 한다.

222) 문선제(文宣帝):북제(北齊)의 건국자. 재위 550~558년. 동위의 최고 권력자인

고환(高歡)이 547년에 죽고 아들인 고징(高澄)이 계승하였으나 549년에 살해되

자 아우인 고양(高洋)이 계승하여 제위에 오르니 바로 문선제이다. 폭군이기도

했으나, 도살을 금하고 천하에 사원을 짓는 등 북제 일대에서 가장 불법이 융성

한 때였다.

223) 법상(法上, 495~580):남북조시대의 고승. 속성은 유(劉)씨이다. 동위와 북제에

걸쳐 40년 동안 대통으로서 불교를 통솔하였다. 특히 북제 문선제에게 신임을

받아 계사로서 존경받았다.『열반경』과『능가경』에 뛰어났으며,『불성론(佛性

論)』과『대승의장(大乘義章)』에 대한 소(疏)를 지었다. 제자로는 정영사 혜원(慧

遠, 523~592) 등이 있다.

224) 대통(大統):『수서(隋書)』 백관지 22에 의하면, 북위(北魏)·북제(北齊) 때 소현

시(昭玄寺)에 대통(大統) 1명·통(統) 1명·도유나(都維那) 3명을 두어 승려를 관

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북제 문선제는 십통(十統)을 설치하여 법상을 대통(大

統)으로 삼았다.

225) 통통(通統):소현십통(昭玄十統) 중 대통(大統)아래 있던 9명을 말한다.

226) 양(梁):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에 속했던 나라(502~577). 제(齊)나라의 상국이

었던 소연(蕭衍, 武帝 502~551)이 502년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올라 양나라를 건국

하였다. 무제는 불교신앙에 열중하여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548년 동위

(東魏)에서 망명한 후경(侯景)이 건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잇단 쟁투가 벌어

져 황제의 폐립이 빈번하다가 진패선이 557년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陳)

나라를 세움으로써 양나라는 멸망하였다.

227) 진(陳):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에 속했던 나라로 남조 최후의 왕조(557~589).

진패선(陳覇先, 武帝, 557~559)이 557년 양(梁)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였다.

선제(宣帝, 568~582) 때에는 북제(北齊)를 공략하여 북쪽으로 진출했으나 다음

후주(後主, 582~589)는 측근을 중용하고 무장을 억압하여 전차 국력이 쇠퇴해지

고 마침내 589년에 수(隋)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228) 국통(國統):북조(北朝) 동위(東魏)의 승관(僧官) 직의 하나. 승관제는 원래 소

현통(昭玄統)이라 하였는데 그 아래에 국도(國都)를 두었다. 승관제는 위진남북

조때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처음 설치하였다. 북위 도무제(道武帝) 황시(皇

始)연간(396~397)에 도인통(道人統)을 만들고 승려들을 관장하도록 하였고 흥

안(興安) 원년(452)에 승려 현담(賢擔)을 도인통으로 삼았고, 이후 담요(曇曜)가

뒤를 이어 사문통(沙門統)이라고 고쳤다. 신라에서는 진흥왕 12년(551)에 고구

려에서 망명해 온 혜량(惠亮)을 국통으로 임명함으로써 처음 설치되었다. 국통

밑에는 대도유나(大都維那)·대서성(大書省) 등의 승관이 있었고, 지방 승정을

담당하는 주통(州統)과 군통(郡統) 등이 있었다. 국통은 헌덕왕, 정강왕 때도 임

명된 기록이 있어 신라 말까지 제도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229) 도유내(都維乃):북위(北魏) 때에 설치된 승관(僧官) 이름. 문성제(文成帝) 흥안

(興安) 원년(452), 도유나를 중앙승관기구 감복조(監福曹)의 수장인 도인통(道人

統) 아래에 설치하였다. 감복조는 북위 효문제 때 소현시(昭玄寺)로 고쳤다. 동

위(東魏) 때는 소현 도유나를 국통(國統) 아래 두었다.

230) 소현조(昭玄曹):소현시(昭玄寺)라고도 한다. 남북조시대에 승려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관부이다. 북위 태무제가 폐불을 단행한 후 문성제가 즉위하여 452

년에 불교를 부흥하고 감복조(監福曹)를 설치하여 중앙 승정을 담당하도록 하고

도인통(道人統)과 도유나(都維那)의 직책을 두었다. 이것을 460년에 개칭한 것이

소현시(소현조)이다. 대통(大統) 1인과 통(統) 1인, 도유나 3인 그리고 관원을 두

어 지방의 사문조(沙門曹)와 주통(州統)·군통(郡統)·현통(縣統) 등을 통제하도

록 하였다. 북조의 여러 나라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승관제를 시행하였으나 남

조에서는 승정(僧正) 등의 승관이 있어 달랐다. 수와 당에서는 외교 관계를 담당

하던 홍려시(鴻臚寺) 아래에 소현시를 개칭한 숭현서(崇玄署)를 두었다.

231) 십대덕(十大德):당(唐)나라 시기의 승관(僧官). 고조(高祖) 무덕(武德) 3년(620),

자비사(慈悲寺)에 승관(僧官) 10명을 설치하고 십대덕(十大德)이라고 명하여 승

려와 교단의 일을 통솔하게 하였다.

232) 진흥왕(眞興王):신라 제24대 왕. 재위 540~576.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삼맥종

(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지증왕의 손자로,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

(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씨이며, 왕비는 박씨로 사도

부인(思道夫人)이다. 백제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의 요충지를 획득하고, 백제 성

왕을 전사시켰다. 이어 대가야를 평정하고, 창녕에서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에

이르는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다. 화랑제도를 창시하여 젊은 인재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233) 대서성(大書省):신라 때의 승직(僧職). 진흥왕 11년(550) 안장(安藏) 법사를 임

명하였으며, 문무왕 9년(669)에는 신혜(信惠)를, 헌덕왕 9년(817)에는 진노(眞

怒)를 임명하였다. 지위는 국통(國統)의 밑에 있었다.『삼국사기』에는 진흥왕 때

1인, 진덕왕 때 2인을 두었다고 하였다.

234) 소서성(小書省):신라 때의 승직(僧職).『삼국사기』권40 직관지 하에는 소년서성

(少年書省)이라고 하였다. 원성왕 3년(787)에 혜영(惠英)·범여(梵如)를 소년서성

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소서성은 원성왕 때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235) 혜량(惠亮)법사:고구려의 승려. 백제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온 신라 장군

거칠부를 따라 신라로 귀순하였고, 신라 최초의 승통(僧統)이 되어 백좌강회와

팔관재법을 주관하였다.(『삼국사기』권44 열전 居柒夫)

236) 대도유나(大都維那):신라 시대의 승직(僧職). 진흥왕 때 처음으로 보량법사(寶

良法師)로 대도유나를 삼았고, 진덕왕 원년(647)에 1인을 더하였다.

237) 부례랑(夫禮郞):신라 효소왕 때의 국선(國仙). 아버지는 사찬(沙湌) 대현(大玄)

이다.『삼국유사』권2 기이 만파식적편에는 실례랑(失禮郞)이라 하였다. 효소왕

원년(692)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천여 명의 낭도가 있었다고 한다.『삼국유사』

권3 탑상 백률사편에 의하면, 부례랑이 금란(金蘭) 지역에 갔다가 북명(北溟) 부

근에서 적인(狄人)에게 붙잡혔다. 이때 국보인 금적(琴笛)이 없어졌는데, 대현

(大玄)이 백률사(柏栗寺) 관음전에 빌었더니 부례랑이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금

적을 찾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 효소왕은 부례랑을 대각간으로, 대현을 태

대각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238) 김유신:595~673. 신라 때 장군. 본관 김해(金海),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

露王)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소판(蘇判)·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이다. 진평왕 31년(609) 화

랑이 되었고, 진평왕 51년(629)에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할 때 중당(中

幢)의 당주(幢主)로서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선덕왕 11년(642) 압량주(押梁

州) 군주(軍主)가 되었고, 644년 소판에 올랐다. 같은 해에 상장군(上將軍)이 되

었다. 진덕왕 원년(647)에 1월 여왕을 폐하려고 난을 일으킨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하였고, 648년에는 압량

주 군주로서 12개 성을 빼앗은 공으로 이찬으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

行軍大摠管)이 되었다. 654년에 진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재상이던 이찬 알천(閼

川)과 의논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태종 7년(660) 상대

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나라군 13만이 연합

하여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663년 8월 백제의 부흥군

을 두솔성(豆城)에서 대파하였고, 665년 당나라 고종으로부터 봉상정경평양

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8년에 나당 연합군이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도맡았다. 고구려

정벌 직후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직위에 오른 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문

무왕 13년(673)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 흥덕왕 10년(835) 흥무대왕(興武大王)

에 추존되었다.

239) 이 기록은『삼국사기』권40 직관지에 나온다. 정관(政官) 혹은 정법전이라 제목

을 달고 그 아래 직책으로 국통·도유나랑·대도유나·대서성·소년서성·주통·

군통을 인원과 함께 열거하였다.

240) 대사(大舍):①신라의 17등 관계(官階) 중 12등 관등. ②신라 관제의 장관 차관

다음의 직책으로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13관등인 사지(舍知)에서 11관등인

나마(奈麻) 관등의 관리가 임명되었다.

241) 사(史):신라 중앙 관청에 속한 하위 관직으로 주로 기록을 담당한 것으로 생각

된다. 17관등인 선저지(先沮知)에서 12관등인 대사(大舍) 관등의 관리가 임명

되었다.

242)『화엄경(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달은 지 이칠일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

이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

德)을 설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

向)의 보살 수행 계위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

을 묻고자 53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번역본은 60권

본, 80권본, 40권본의 세 가지가 있다.

243) 당전(唐傳):『속고승전(續高僧傳)』권4 자장전.

244) 국사(國史):거칠부가 편찬한 역사서인데, 여기에서는『삼국사기』를 가리킨다.

자장이 이처럼 좋은 기회를 만나 힘써 불교를 전파하였으니, 승니(僧尼)

오부(五部)245)로 하여금 각각 배움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15일마다 계를

설하고246) 겨울과 봄에는 모두 시험을 치루어247) 계를 지키고 어긴 것을 알

게 하였으며, 관원을 두어 그것을 유지하게 하였다. 또한 순찰사를 파견하

여 지방 사찰을 두루 검열하여 승려들의 잘못을 징계하고 바로잡았으며,

불경과 불상을 장엄하게 꾸미는 것을 일정한 법식으로 삼았다. 한 시대에

불교를 보호함이 이때 융성하니, 마치 공자(孔子)가248) 위(衛)나라249)에서

노(魯)나라250)로 돌아와 음악을 바르게 하니 아(雅)와 송(頌)이 각각 마땅

함을 얻은 것과 같다251). 이 때를 맞아 나라 사람들 가운데 계를 받고 불교

를 숭상하는 집이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되었으며, 머리 깎고 출가하는 자가

날로 늘어갔다. 이에 통도사(通度寺)252)를 창건하고 계단(戒壇)253)을 쌓아

사방에서 오는 이들을 출가시켰다.<계단 일은 이미 앞에서 나왔다.〉254) 또 태어

난 마을의 집을 새로 수리하여 원녕사(元寧寺)로 만들고 낙성회를 베풀어

『화엄경』만게255)를 강의하니, 52녀256)가 감응하여 몸을 드러내고 강의를

들었다. 문인들에게 그 숫자만큼 나무를 심어 그 기이함을 나타냈기 때문

에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일찍이 신라의 복장이 중국과 같지 않아 조

정에 (중국식으로 바꿀 것을) 건의 하니 모두 “좋다”라고 허락하였다. 이에

진덕왕 3년(649) 기유년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을 입고, 이듬해 경술년(650)

에는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어257) 처음으로 영휘(永徽)258) 연호를 시행

하였다. 이후로 매번 조빙(朝聘)할 때마다 서열이 변방의 윗자리가 되었으

니, 자장의 공이다.

藏値斯嘉會, 勇激弘通, 令僧尼五部, 各增奮學, 半月說戒, 冬

春總試, 令知持犯, 置員管維持之. 又遣巡使, 歷檢外寺, 誡礪

僧失, 嚴飾經像爲恒式. 一代護法, 於斯盛矣. 如夫子自衛返

魯樂正, 雅頌各得其宜. 當此之際, 國中之人, 受戒奉佛, 十室

八九, 祝髮請度, 歲月增至. 乃創通度寺, 築戒壇, 以度四來〈戒

壇事已出上〉. 又改營生緣里第元寧寺, 設落成會, 講雜花萬偈,

感五十二女現身證聽. 使門人植樹如其數, 以旌厥異, 因號知

識樹. 嘗以邦國服章不同諸夏, 擧議於朝, 簽允曰“ 臧.” 乃以

眞德王三年己酉, 始服中朝衣冠, 明年庚戌, 又奉正朔, 始行永

徽號. 自後每有朝覲, 列在上蕃, 藏之功也.

245) 승니(僧尼) 오부(五部):승단을 구성하는 다섯 종류의 스님들로, 비구(比丘)·비

구니(比丘尼)·식차마나(式叉摩那)·사미(沙彌)·사미니(沙彌尼)를 말한다. 20세

미만의 출가한 어린 남녀 스님을 사미·사미니라 하며, 사미니가 구족계를 받고

자 18세부터 20세까지 2년 동안 따로 육법을 배우며 시험하는 것은 식차마나라

한다. 20세 이상이 되어 구족계를 받은 남녀 스님을 비구·비구니라 한다.

246) 승단에서 동일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승려들이 매월 보름날과 그믐날에 15일마

다 모여 지난 15일 동안의 행위를 반성하고 잘못이 있으면 참회하고 교단에서

지켜야 할 조항인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함께 외우는 행사를 포살(布薩)이

라 한다. 자장은 이 포살을 시행한 것이다.

247) 승단에서 안거 마지막 날에 정진하던 대중들이 견(見) 문(聞) 의(疑) 삼사에 대

해 자신이 잘못을 범한 일이 있는지를 대중에게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을 자자

(自恣)라 한다. 포살과 함께 계율 시행의 중심을 이룬다. 자장은 이 자자와 비슷

한 계율 시험을 실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248) 원문의 부자(夫子)는 덕행이 높은 이를 일컫는 것으로 여기서는 공자를 말한다.

249) 위(衛)나라:중국 주(周)나라 때 하남성에 위치하였던 제후국의 하나.

250) 노(魯)나라:중국 주(周)나라 때 산동성에 위치하였던 제후국의 하나.

251) 아(雅)와 송(頌):『시경(詩經)』은 국풍(國風)과 아(雅, 大雅・小雅)와 송(頌)으로

이루어졌는데, 국풍은 여러 나라의 민요이고 아는 공식 연회에 쓰이는 정악(正

樂)이며 송은 종묘의 제사에 쓰이는 악시(樂詩)이다. 따라서 아와 송이란 『시경』

을 말한다.『논어(論語)』자한편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다음에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와 송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子曰, 吾自衛反魯, 然後樂

正, 雅頌各得其所)라고 하였다. 공자 때 시(詩)와 악(樂)이 뒤섞이고 빠지고 하여

혼란스럽게 되었는데,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살펴보고 시와 악의 도를

알았고, 노나라에 돌아와서 이를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252) 통도사(通度寺):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절. 646

년(선덕왕 15)에 자장(慈藏)이 중국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사리(舍利)·가

사(袈裟)·대장경(大藏經) 등을 금강계단(金剛戒壇)에 봉안하고 창건하였다. 이

에 따라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계단(戒壇)이 있는 불보(佛寶)사찰로서 한

국불교의 첫손 꼽히는 종찰이 되었으며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이

다. 계단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계단 앞에 세운 불상이 없는 대웅전을 비롯한 대

광명전 등 넓은 사역에 수많은 전당이 세워져 있는 대찰로서 문화재도 많다.

253) 계단(戒壇):수계(授戒)의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높은 단을 쌓아 마련한다. 신라

에서는 통도사 이후 신라 말에 부석사 화엄사 등에 관단(官壇) 즉 국가의 공적인

계단이 설치되어 승려들에게 수계하였다. 중국에서는 당의 도선이 667년에 장안

교외의 종남산 정업사(淨業寺)에 계단을 설치하고 이후 지방에도 보급되었다.

254)『삼국유사』 권3 탑상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편에 통도사 계단의 조성과

그 형상 그리고 전래 상황이 상세하게 기술되었다.

255) 잡화만게(雜花萬偈)는『화엄경』을 말한다.『잡화경(雜華經)』은 일반적으로 『화

엄경(華嚴經)』을 통칭하지만, 엄밀하게는『화엄경』중에서도 마지막 품인 입법

계품(入法界品)을 의미한다. 만게(萬偈)는『화엄경』의 전체 게송 수를 가리키는

데, 정확히는 60권본이 3만 6천게, 80권본이 4만 5천게, 입법계품이 10만게로 알

려져 있다.

256) 오십이녀(五十二女):52녀는『화엄경』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만났다는

53선지식이라는 설과 『화엄경』에 나오는 보살의 수행단계인 52위라는 설이 있

다. 여기서는 다음에 ‘지식수’를 심었다는 것으로 보아 53선지식을 말하는 것으

로 생각된다.

257) 정삭(正朔)은 정월 초하루를 가리키는데, 정삭을 받들었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

치권이 미치는 곳은 그 나라의 역법을 따랐다는 것이다. 신라와 당나라는 조빙

관계가 있었으므로 당나라의 정삭을 쓰게 된 것을 말한다.

258) 영휘(永徽):당 고종(高宗)의 연호. 650~655년. 진덕왕 4년~무열왕 2년.

만년에 서울을 떠나 강릉군(江陵郡)〈지금의 명주(冥州)〉에 수다사(水多

寺)259)를 세우고 살았다. 다시 이상한 승려 꿈을 꾸었는데, 형상이 북

260)에서 본 것과 같았다. 와서 알리기를,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그대

를 보리라.”고 하였다.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려 일어나 일찍 나가서 송정

에 이르렀다. 과연 문수대성이 감응하여 이르러, 법요를 물었더니 말하기

를, “태백산(太白山)261)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리라.”하고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송정은 지금까지 가시가 자라지 않으며 또한 매와 새매 종류가 깃들

지 않는다고 한다.〉자장이 태백산에 가서 갈반지를 찾다가 나무 아래에 커다

란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시자에게 말하기를, “여기가 갈반

지구나” 하였다. 이에 석남원(石南院)을 창건하고〈지금의 정암사(淨岩寺)262)

다〉문수대성이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나이든 거사가 남루한 방포(方

袍)263)를 입고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메고 와서 시자에게 “자장

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문지기가 말하기를, “(스승을) 시봉한264) 이래로

아직껏 우리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보지 못했는데 그대는 어

떤 사람이길래 이리도 미친 소리를 하는가?”라고 하였다. 거사가 말하기를,

“너희 스승에게 알리기나 하여라”고 하였다. 마침내 들어가서 아뢰니 자장

도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아마도 미치광이인가 보다”라고 하였다. 문지

기가 나와서 꾸짖으며 쫓아냈다. 거사가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

라! 아상(我相)265)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오.” 라고 하고는 삼

태기를 거꾸로 하여 털자, 개가 변하여 사자보좌(獅子寶座)가 되니 (그 위

에) 올라 앉아서 빛을 내며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위의266)

를 갖추고 빛을 찾아 남쪽 고개로 재촉하여 올라갔으나, 이미 아득하여 따

라가지 못하고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267) 화장하고 유골을 석혈(石穴)에

안치하였다.

무릇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10여 곳이나 되는데, 한 번 세울 때마다 반

드시 이상한 상서가 있었다. 그리하여 재가자268)의 공양이 거리를 메꾸어

며칠 지나지 않아 완성하게 되었다. 자장의 도구와 옷과 버선과 아울러 태

화지의 용269)이 바친 오리모양의 목침과 석존의 가사 등은 모두 통도사에

있다. 또 헌양현(巘陽縣)270) 〈지금의 언양(彦陽)〉에 압유사(鴨遊寺)가 있으니,

목침의 오리가 일찍이 여기서 이상한 일을 드러내었기에 이름한 것이다.

또 원승(圓勝)271)스님이 있는데, 자장보다 앞서서 중국에 유학하였다가,

함께 고향으로272) 돌아와 (자장이) 계율을 널리 펴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찬한다.

일찍이 청량산에 가서 꿈 깨어 돌아와,

7편3취273)를 일시에 열었도다.

승려와 속인이 옷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여,

우리나라 의관을 중국 것으로 만들었네.

暮年謝辭京輦, 於江陵郡〈今冥州也〉 創水多寺居焉. 復夢異僧,

狀北臺所見. 來告曰, “明日見汝於大松汀.” 驚悸而起, 早行至

松汀. 果感文殊來格, 諮詢法要, 乃曰,“ 重期於太伯葛蟠地.”

遂隱不現 〈松汀至今不生荊刺, 亦不棲鷹鸇之類云.〉 藏往太伯山尋之,

見巨蟒蟠結樹下, 謂侍者曰,“ 此所謂葛蟠地.” 乃創石南院〈今

淨岩寺〉, 以候聖降. 粤有老居士, 方袍纜縷, 荷葛簣, 盛死狗兒,

來謂侍者曰,“ 欲見慈藏來爾.” 門者曰,“ 自奉巾箒, 未見忤犯

吾師諱者. 汝何人斯, 爾狂言乎.” 居士曰,“ 但告汝師.” 遂入

告, 藏不之覺曰, “殆狂者耶.” 門人出詬逐之. 居士曰, “歸歟!

歸歟! 有我相者, 焉得見我.” 乃倒簣拂之, 狗變爲師子寶座,

陞坐放光而去. 藏聞之, 方具威儀, 尋光而趨登南嶺, 已杳然不

及, 遂殞身而卒. 茶毘安骨於石穴中.

凡藏之締構寺塔, 十有餘所, 每一興造必有異祥. 故蒲塞供塡

市, 不日而成. 藏之道具布襪, 幷大和龍所獻木鴨枕, 與釋尊田

衣等, 合在通度寺. 又巘陽縣〈今彦陽〉 有鴨遊寺, 枕鴨嘗於此現

異, 故名之.

又有釋圓勝者, 先藏西學, 而同還桑梓, 助弘律部云.

讚曰 曾向淸凉夢破廻, 七篇三聚一時開. 欲令緇素衣慚愧, 東

國衣冠上國裁.

259) 수다사(水多寺):삼국유사 권3 탑상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 五類聖衆)

편에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에는 띠집을 지었으며, 다음 신효거사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 범일의 문인 신의두타가 오서 암자를 세워 살았으며, 그 후에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와서 살아서 점차 큰 절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수다사는

자장을 계승하는 스님들이 지낸 곳임을 알게 한다.

260) 북대:자장이 문수의 감응을 얻고 신인을 만났던 중국 오대산의 북대를 말한다.

261) 태백산(太白山):강원도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에 걸쳐 있는 산. 백두대간의 모

산(母山)으로 오대산 두타산에서 내려와 솟구쳐 고봉으로 둘러싸여 솟아 있으

며 서남으로 내려가 소백산맥을 이룬다. 신라 때 국가의 주요 오악의 하나인 북

악(北岳)으로 존숭되는 등 산악숭배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정암사 외에 남

쪽 줄기를 따라 부석사 등 많은 사찰이 세워져 있다.

262) 정암사(淨岩寺):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태백산에 있는 절. 자장이 태백

산 갈반지에 창건한 석남원이 바로 이 정암사라고 한다. 창건하였다 하며 석가

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고려시대의 7층 수마노탑이 세워져 있어 우리나라 5대

보궁(寶宮)으로 꼽힌다.

263) 방포(方袍):가사. 특히 장삼을 말한다.

264) 원문의 건추(巾箒)는 수건과 빗자루를 말하는 것으로 어른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265) 아상(我相):잘못 깨달은 것에 집착하여 이를 참다운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266) 위의(威儀):예법에 맞는 몸가짐

267) 도세(道世)의 『법원주림(法苑珠林)』 자장전에 의하면, 자장은 가벼운 병에 걸려

서 영휘 연간(650~655)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大53 p.779c18~19. 因遘微疾, 卒於

永徽年中.)

268) 원문의 포새(蒲塞)는 이포새(伊蒲塞, upasaka)의 준말로서 우바새라고도 한다.

곧 출가하지 않은 남자 재가자를 말한다.

269)『삼국유사』 권3 탑상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편에 자장이 오대산으로 문수

를 친견하러 가서 문수로부터 게송을 받은 것을 일러준 것이 태화지의 용이라

하였다.

270) 헌양현(巘陽縣):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彦陽邑)의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

신라 지화현(知火縣)이었는데 경덕왕 때 헌양현으로 고쳐 양주의 영현이 되게

하였고, 고려 인종 때 언양으로 고쳤다.

271) 원승(圓勝):『속고승전(續高僧傳)』 권24 자장전에 부전(付傳)되어 있다. 자장보

다 먼저 중국에 들어가 삼학에 통달하고 귀국 후 자장을 도와 계율을 폈다.

272) 원문의 상자(桑梓)는 고향을 가리킨다. 옛날에 집 담 밑에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었으므로 여기서 고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73) 칠편삼취(七篇三聚):칠편(七篇)은 계율의 분과로서 바라이(波羅夷)·승잔(僧

殘)·투란차(偸蘭遮)·파일제(波逸提)·제사니(提舍尼)·돌길라(突吉羅)·악설(惡

說)의 7가지로 분류 한 것을 말하며, 삼취(三聚)는 대승 보살들이 받는 삼취정계

(三聚淨戒)로서 섭율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

를 말한다. 즉, 계율의 총칭이다.

원효가 얽매이지 않다

[해제]

신라 불교사상가로 첫손 꼽히는 원효의 전기이다. 이 편의 구성은 문헌

자료로 『송고승전』, 행장 그리고 향전을 참조하였고, 전해 들은 형태로 민

간 전승과 옛 기록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다니며 수행한 이모

저모와 널리 펼친 많은 자취는 『송고승전』과 행장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일일이 싣지 않는다. 다만 마을에 전해오는 기록에 한두 가지 특이한 일이

있다.”하여 전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수행과 교화에 관한 사항은 다른 자

료에 양보하였다. 또 지금도 내용 일부가 전하고 있는 「서당화상비」와 고

려 때 건립되었다는 「화쟁국사비」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이 편의

구성이 원효의 전기에 대한 온전한 복원보다 원효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전

하는 이야기를 채록하는 데 중점을 두었음을 말해 준다.

원효는 지방에서 태어나 여러 스승을 찾아 배웠고 의상과 함께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그만 두었다. 당시 신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경론에 대해 하나하나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평가한

‘종요(宗要)’류의 저술을 펴내고, 더욱 관심이 가는 경론에 대해서는 상세

한 주석서를 썼으며, 이들 경론을 총괄적인 관점에서 파악한『십문화쟁론』

을 저술하여 새로운 불교관을 펼쳤다. 여러 저술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기신론소』와『금강삼매경론』에서 체계화한 일심(一心)사상으로서, 이는

신라불교의 가장 탁월한 성과로 평가된다. 원효는 이러한 사상적인 성과와

더불어 직접 사람들을 만나 불교 신앙을 전하는 대중화 운동에도 앞장서서

신라 사회에 불교가 널리 알려지는 토대도 마련하였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결혼함으로서 교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교단 내에서 그의 불교 활동은 지

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후학들에게 폭넓게 계승

되었고 중국이나 일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역주]

원효가 얽매이지 않다

성사(聖師) 원효(元曉)274)의 속성은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

(仍皮公)인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연못 옆

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談捺) 나마275)이다. 압량군(押梁

郡)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276)〉불지촌(佛地村) 북쪽의 밤골 사라나무277)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속어로는 불등을촌(弗等乙村)이라고 한다〉.278)

사라나무에 대해서는 속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성사의 집은 본래 이

골짜기의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임신하여 달이 찼을 때 마침 이 골

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다. 매우 급해서 집

으로 되돌아갈 수 없어서 남편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워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나무를 사라나무라고 불렀다.”279)고 한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과 달라서 지금도 사라밤이라고 부른다.

옛부터 이렇게 전해 온다. “옛날에 어떤 절의 주지가 절의 종에게 한 사

람당 하루 저녁끼니로 밤 두개씩을 주었더니, 종이 관청에 소송을 제기하

였다. 관리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밤을 가져다 조사해보니 밤 한 개가 발우

에 가득 찼다. 그래서 도리어 밤을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하였다. 그 때문

에 밤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사가 이미 출가해서 그 집을 희

사하여 절로 만들고 초개사(初開寺)라고 하였으며, 사라나무 곁에 절을 지

어 사라사(裟羅寺)라고 하였다.

성사의 행장에는 “서울사람이다”라고 하였는데, 할아버지를 따랐기 때

문이다.『송고승전(宋高僧傳)』280)에는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다”라

고 하였다. 살펴보면 인덕(麟德) 2년(665년, 문무왕 5년)에 문무왕이 상주(上

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揷良州)를 설치하였다.281) 곧 하주

는 지금의 창녕군(昌寧郡)282)이다. 압량군(押梁郡)은 본래 하주에 속해 있

던 현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이니283) 상주(湘州)라고도 한다. 불지

촌은 지금의 자인현(慈仁縣)에 속한 곳이니,284) 곧 압량군에서 나누어진 곳

이다.

성사가 태어나니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285)이고 집 이름은 신당(新

幢)이다〈당은 속어로 털을 말한다〉. 처음에 어머니가 유성이 품에 들어오는 꿈

을 꾸고 그로 인해 임신하였다. 해산하려 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으

니, 진평왕(眞平王)286) 39년(617)으로 대업(大業)287) 13년 정축년이었다. 나

면서 총명함이 남달랐고 배움에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사방을 돌

아다니며 수행한 이모저모와 널리 펼친 많은 자취는『송고승전』과 행장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일일이 싣지 않는다. 다만 마을에 전해오는 기록에

한두 가지 특이한 일이 있다.

元曉不羈

聖師元曉, 俗姓薛氏. 祖仍皮公, 亦云赤大公. 今赤大淵側, 有

仍皮公廟. 父談捺乃末. 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 佛地村北

栗谷 裟羅樹下. 村名佛地, 或作發智村〈俚云弗等乙村〉. 裟羅樹

者, 諺云,“ 師之家本住此谷西南, 母旣娠而月滿, 適過此谷栗

樹下, 忽分産. 而倉皇不能歸家, 且以夫衣掛樹, 而寢處其中,

因號樹曰裟羅樹.” 其樹之實, 亦異於常, 至今稱裟羅栗. 古傳,

“昔有主寺者, 給寺奴一人, 一夕饌栗二枚, 奴訟于官. 官吏怪

之, 取栗檢之, 一枚盈一鉢, 乃反自判給一枚. 故因名栗谷.”

師旣出家, 捨其宅爲寺, 名初開, 樹之旁置寺曰裟羅.

師之行狀云, “是京師人”, 從祖考也. 唐僧傳云, “本下湘州之

人”. 按麟德二年間, 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 置揷良州. 則下

州, 乃今之昌寧郡也. 押梁郡本下州之屬縣. 上州則今尙州, 亦

作湘州也. 佛地村今屬慈仁縣, 則乃押梁之所分開也.

師生小名誓幢, 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 初母夢流星入懷, 因而

有娠. 及將産, 有五色雲覆地. 眞平王三十九年 大業十三年丁

丑歲也. 生而潁異, 學不從師. 其遊方始末, 弘通茂跡, 具載唐

傳與行狀, 不可具載. 唯鄕傳所記, 有一二段異事.

274) 원효(元曉, 617~686):신라의 고승. 속성은 설씨. 경산에서 태어나 여러 스승을

찾아 배웠고 중국에 가서 새로운 불교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도중에 그만 두었

다. 당시 신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경론을 탐구하여 하나하나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평가한 종요(宗要)류의 저술을 펴내고, 더욱 관심이 가는 경론에 대해서

는 상세한 주석서를 썼다. 이들 경론을 총괄적인 관점에서 파악한 『십문화쟁론』

을 저술하여 상호 대립적이 아닌 화합의 새로운 불교관을 펼쳤다. 여러 저술 중

에서도 핵심적인 것은『기신론소』와『금강삼매경론』에서 체계화한 일심(一心)

사상으로서, 이는 신라불교의 가장 탁월한 성과로 평가된다. 요석궁주와 결혼

하여 설총(薛聰)을 낳고 이후 직접 사람들을 만나 아미타불을 알려 주는 등 대

중 교화에 매진하였다. 9세기 초에 그를 기리는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가 세워

졌고, 고려 숙종 때 화정(和靜)국사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에는 앞의

세 저술 외에『화엄경소(華嚴經疏)』『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법화종요(法

華宗要)』·『이장의(二障義)』·『판비량론(判比量論)』 등 80여 종이 있다.

275) 원문의 내말(乃末)은 나마(奈麻)이다. 나마는 신라에서 시행된 관등제의 17관등

중 제 11위 관등으로 5두품 이상 받을 수 있는 관등이다.

276) 압량군(押梁郡)·장산군(章山郡):지금의 경북 경산시를 말한다. 본래 압독국(押

督國)이었는데 102년에 신라 파사왕(婆娑王)에 항복하여 장산군을 설치하였고,

일성왕 13년(136)에 압독이 배반하여 신라가 다시 평정하였다.『삼국사기』지리

지에는 지마왕(112~134) 때에 군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선덕왕 11년(642)에 압

독주를 설치하였다가 무열왕 8년(661)에 압독군으로 하였으며, 경덕왕이 장산

군(獐山郡)이라고 고쳤다. 고려 초에 장산군(章山郡)으로 고쳐 일연은 장산이라

주를 달았다. 충선왕대에 왕의 이름을 피휘하여 경산(慶山)이라 하여 지금 부르

는 이름이 되었다.

277) 사라나무:사라나무[沙羅樹, śāla]는 인도가 원산지로 3월경에 우유빛의 작은

꽃이 피는 아주 큰 나무이다. 석가모니의 생애와 관련하여 여러 전기들은 석가

모니가 무우수(無憂樹) 밑에서 태어났고 사라수 밑에서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빨리어 경전에는 태어날 때의 나무가 무우수가 아니라 사라나무였다고

한다. 원효의 출생과 사라나무의 연관 설화도 이런 석가모니의 생애를 연상하

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78) 원효가 태어난 곳에 대해서 경산시의 압량면 신월동, 압량면 당음동, 자인면 사

라골 사라지, 자인면 북사리 제석사 등 여러 견해가 있다.

279) 원효의 어머니가 사라밤나무 아래에서 옷을 나무에 걸고 해산하였다는 이야기

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그림으로 그릴 때 나무 주변으로 휘장을 둘러치는

것과 비슷한 구성이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해산하기 위해 친정으로

가다가 룸비니 동산에서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는데 무우수 가지를 붙잡고 석가

모니를 낳았다. 후대 사람들이 원효를 석존의 탄생에 견주어 추앙하고자 한 뜻

을 찾을 수 있는 설화이다.

280)『송고승전(宋高僧傳)』:원문에는 당승전(唐僧傳)이라 하였으나『송고승전』을

잘못 말한 것이다.『송고승전』권4 원효전(元曉傳)에는 “원효는 성이 설씨이

며 동해 상주 사람이다(釋元曉 姓薛氏, 東海湘州人也).”라고 되어 있다.『삼국유

사』의 바로 아래 기록에서 일연은 상주(湘州)를 상주(尙州)로 보았다.『송고승

전』은 송의 찬녕(贊寧, 919~1002)이 편찬한 승전으로『고승전(高僧傳)』『속고승

전(續高僧傳)』과 함께 3대 승전, 혹은『명고승전(明高僧傳)』과 함께 4대 승전으

로 불리는 중요한 사서이다. 찬녕이 982년에 칙명으로 편찬한 것으로,『속고승

전』에 이어 당 정관 연간부터 송 988년까지 이르는 343년간의 고승의 전기를 엮

은 것이다. 정전 531인에 부전 125인의 전기를 역경(譯經)·의해(義解)·습선(習

禪)·명률(明律)·호법(護法)·감통(感通)·유신(遺身)·독송(讀誦)·흥복(興福)·

잡과(雜科)의 10개로 분류하여 30권에 수록하였다.

281)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신라의 지방 행정조직. 경상북도 지역 일대에 상주를

설치하여 중심 고을은 감문주(금릉), 일선주(선산) 등으로 바뀌었으며, 경상남

도 지역 일대에 하주를 설치하여 비사벌(창녕), 대야(합천), 압량(경산) 등으로

중심 고을이 바뀌었다. 665년에 하주의 동쪽 지역인 양산을 중심으로 삽량주(뒤

에 양주)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압량군은 삽량주에 속하였다.『삼국사기』권34

지리지 양주(良州)에, “문무왕 5년인 인덕 2년에 상주와 하주의 땅을 나누어 삽

량주를 설치하였다(文武王五年 麟德二年, 割上州 下州地, 置揷良州.)”고 하였다.

282) 창녕군(昌寧郡):경남 창녕군. 555년에 신라가 비화가야(非火加耶)를 정복하고

하주(下州)를 설치하였는데 565년에 하주가 합천으로 옮겨 대야주가 되자 이곳

은 비사벌군(比斯伐郡)이 되었고 경덕왕 때 화왕군(火王郡)으로 바뀌었으며, 고

려 때 창녕군이 되었다.

283) 상주(尙州):본래 사벌국(沙伐國)으로서 신라 점해왕이 정복하여 주를 두었다.

법흥왕이 상주(上州)로 삼았고 진흥왕은 주를 없애 상락군(上洛郡)으로 하였으

며 신문왕이 다시 사벌주를 설치하였다가 경덕왕 때 상주(尙州)가 되었고 혜공

왕 때 다시 사벌주가 되었다.(『삼국사기』권34 지리지)

284) 자인현(慈仁縣):지금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고려사』권57 지리지에 “자인현

은 본래 신라의 노사화현(奴斯火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자인현으로 고쳤고, 장

산군의 영현이 되었는데, 고려 현종 때 경주의 속현이 되었다(慈仁縣 本新羅奴斯

火縣, 景德王改今名, 爲獐山郡領縣. 顯宗九年來屬.)”고 하였다.

285) 서당(誓幢):원효의 어릴 때 이름인데, 승려 시절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9세기 전반에 원효를 기리는 비를 세울 때 이름이 ‘서당화상비(誓幢

和尙碑)’인 것이 이를 말해 준다.

286)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년. 54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재위로 대내외적인 안정을 이루었다. 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의 명승을 중국

에 보내어 수학하게 하는 등 불교를 진흥시키고 문물을 수용하였다. 5-1 주13)

참조.

287) 대업(大業):수 양제(煬帝)의 연호. 605~617년.

성사가 일찍이 어느 날 길거리를 바람처럼 떠돌며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겠나.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다듬으

려네.”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했는데, 그 때 태종(太宗)288)이 이 노래를 듣고 말

하였다.

“이 스님이 아마 귀부인을 얻어서 훌륭한 아이를 낳고 싶은 모양이다. 나

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로움이 매우 클 것이다.”

그때 요석궁(瑤石宮)289)〈지금의 학원(學院)이 이곳이다〉에 홀로 사는 공주가

있었다. 궁중의 관리에게 명을 내려 원효대사를 찾아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왕명을 받들어 대사를 찾아 나섰더니 이미 남산(南山)290)

서 와서 문천교(蚊川橋)291)〈사천(沙川)이다. 사람들은 새내 또는 모기내292)라고 한

다. 또한 다리 이름을 느릅다리293)라고 한다.〉를 지나다 관리를 만났다. 일부러 물

에 떨어져 옷이 젖게 되어, 관리가 대사를 궁으로 데려가서 승복을 말리게

하였기 때문에 머물러 자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임신하여 설총(薛聰)294)

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영민하여 경전과 역사에 두루 통하였으니,

신라 십현(十賢)295)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말로 중국과 주변의 풍속과 물

건 이름을 알게 하였으며 육경(六經)296)과 문학을 풀이하니, 지금까지 우

리나라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이들이 이어받아 끊이지 않는다.

원효가 이미 계를 잃고 설총을 낳은 뒤로는 속인의 옷으로 갈아 입고 스

스로 소성(小姓)거사라고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추고 노는 커다란 박

을 얻었는데, 그 생김새가 크고 기이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華嚴經)』297)의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

다”298)라는 구절에 따라 ‘무애(無碍)’라고 이름짓고, 이에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퍼지게 하였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노래하

고 춤추며 교화하고 시를 지으며 다녀, 가난한 사람과299) 어리석은 무리

들이300) 다들 부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南無)를 부르게 하였으

니, 원효대사의 교화가 컸다.

師嘗一日風顚唱街云,“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人皆未喩,

時太宗聞之曰,“ 此師殆欲得貴婦, 産賢子之謂也. 國有大賢,

利莫大焉.” 時瑤石宮〈今學院是也〉 有寡公主, 勅宮吏覓曉引入.

宮吏奉勅將求之, 已自南山, 來過蚊川橋〈沙川. 俗云年川, 又蚊川.

又橋名楡橋也〉遇之. 佯墮水中, 濕衣袴, 吏引師於宮, 緇衣曬晾,

因留宿焉. 公主果有娠, 生薛聰. 聰生而睿敏, 博通經史, 新羅

十賢中一也. 以方音, 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

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

瓠,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 “一切無碍人, 一道

出生死,” 命名曰“無礙”, 仍作歌流于世. 嘗持此, 千村萬落,

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貜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

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288) 태종(太宗):신라 제29대 왕인 태종 무열왕(武烈王). 603~661년. 재위 654~661

년.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金龍 春)이고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

명(天明)부인이다. 왕비는 김서현(金舒玄)의 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文明)왕후이고, 그 사이에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 여러 아들을 낳았

다. 신라 사회가 무열왕에서부터 ‘상대(上代)’에서 ‘중대(中代)’로 바뀐다. 무열

왕대에 백제를, 그리고 이어 문무왕대에 고구려를 패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룩

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후 대체로 무열왕의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중대의 번영기를 누리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289) 요석궁(瑤石宮):지금의 경주 월성 서쪽에 있던 궁궐터. 요석궁의 공주는 대체

로 무열왕의 딸로 알려져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21 경

주 고적조에 “요석궁터는 경주부에서 남쪽 3리에 있던 향교 남쪽에 있다”고 하

였다.

290) 남산(南山):경주시 남쪽에 있는 남산을 말한다. 경주시 남쪽에 금오산과 고위

산의 두 봉우리를 잇는 산으로 남북 8km 동서 4km의 타원형을 하고 있다. 신라

4 영지의 하나로 곳곳에 유적이 많다. 동 남 서쪽에 모두 34개의 골짜기가 있는

데 각각 수십개씩의 절터와 석탑, 석불, 마애불 등이 산재해 있다.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지로부터 불교 수용 이후에는 수많은 불교 유적이 만들어져 이

곳에 불국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91) 문천교(蚊川橋):경주 시내의 월성 남쪽을 흐르는 남천에 있던, 지금 월정교(月

精橋)라고 전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이다. 근래의 발굴 조사에 의해 월정교

의 자리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292) 사천(沙川) 새내(年川) 모기내(蚊川):모두 경주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을 가리키

는 말이다.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경주 시내로 흘러들어오는 물을 새내라고 하

였는데, 이 표기를 사천(沙川) 또는 연천(年川)으로 하였다. 연천은 해→새의 변

화에 따라 표기한 새내의 다른 표기이다. 반월성 남쪽을 돌아흐르기 때문에 지

금은 남천이라고 한다.

293) 느릅다리(楡橋):『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경주 고적조에, “다리는 (요석)궁터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294) 설총(薛聰):원효와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일찍부터

경전과 사서에 정통하여 구경(九經)을 우리말로 읽어 후생들을 가르쳐 유학의

종주(宗主)가 되었다고『삼국사기』에서 평가한 신라의 대학자이다. 향찰을 집

대성하여 한문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도록 하고 한문과 유학 연구를 진전시켰

다.「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여러 꽃을 들어 왕이 정치를 잘하도록 풍자하였다

고 한다. 신라 십현(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았으며, 고려 때 홍유후(弘儒侯)

라고 추증하여 유학에 공헌한 첫번째 인물로 꼽혔다.

295) 신라 십현(十賢):『三國史記』 열전에 강수(强首)·최치원(崔致遠)·설총의 전기

가 실려 있고, 다음에 최승우(崔承祐)·최언위(崔彦撝)·김대문(金大問)·박인범

(朴仁範)·원걸(元傑)·왕거인(王巨人)·김운경(金雲卿)·김수훈(金垂訓)의 이름

이 실려 있다.

296) 육경(六經):중국의 가장 중요한 고전 여섯 가지를 말한다. 즉 시경(詩經)·서경

(書經)·역경(易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이다.

297) 화엄경(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달은 지 이칠일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

이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

德)을 설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

向)의 보살 수행 계위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

을 묻고자 53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번역본은 60권

본, 80권본, 40권본의 세 가지가 있다. 5-6 주242) 참조.

298)『화엄경』(60권본) 권5 사제품(四諦品)(大9 p.429b18~21)에서 문수사리의 “모든

부처가 오직 일승으로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지금의 모든

세상은 일마다 같지 않은가(一切諸佛, 唯以一乘, 得出生死, 云何今見一切佛剎, 事

事不同.)”라고 묻자, 이에 대해 현수보살이 답한 게송의 일부분이다.(大9 p.429b 文殊

法常爾, 法王唯一法. 一切無礙人, 一道出生死. 一切諸佛身, 唯是一法身. 一心一智慧,

力無畏亦然.) 중국 정토사상가 담란(曇鸞)도『정토론주(淨土論註)』권하에서 “시

방에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大40 p.843c20. 十方無碍人, 一道

出生死.)”고 하였다.

299) 상추옹유(桑樞瓮牖)는 뽕나무로 대문을 만들고 옹기로 창문을 만든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한 것을 말한다.(『莊子』讓王편 “原憲居魯, 環堵之室, 茨以生草, 蓬戶不完,

桑以爲樞, 而甕牖二室, 褐以爲塞, 上漏下濕, 匡坐而弦.”)

300) 확후지배(貜猴之輩)는 원숭이의 무리를 말하는 것으로 아는 것이 없어 무지몽

매한 이들을 말한다.

태어난 마을 이름인 불지촌과 절 이름인 초개사와 스스로 원효라고 부른

것은 모두 처음으로 부처를 빛나게 하였다는 의미이다. 원효라는 말도 방

언인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사투리로 첫새벽을 이른 것이었다. 일찍이 분

황사(芬皇寺)301)에서 지낼 때『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다가 제14 십회향

품(十迴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고 말았다.302) 또 일찍이 다툼 때문

에 백 그루의 소나무로 몸을 나누었으므로 다들 수행의 단계가 초지(初地)

라고 하였다.303) 또한 해룡(海龍)의 권유로 길거리에서 왕명을 받들어 『금

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304)를 짓는데 소의 두 뿔 위에 붓과 벼루를 두

었기 때문에 각승(角乘)이라고 하였으니, 본각(本覺) 시각(始覺)305)의 미

묘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大安)법사306)가 순서대로 배열하여 종이를

붙였으니 또한 마음이 통하는 사람307)이 화답한 것이다.

이미 입적한 후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안

치하여308) 돌아가심을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나타냈다. 설총이 그때 옆

에서 예를 올리니 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로 있

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찬한다.

각승은 처음으로 금강삼매경을 열고,

춤추는 박은 끝내 온 거리의 노래에 걸렸네.

달 밝은 요석궁에서 봄잠을 자고 가니,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보는 그림자만 비었구나.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皆初輝佛日之意

也. 元曉亦是方言也, 當時人皆以鄕言稱之始旦也. 曾住芬皇

寺, 纂華嚴疏, 至第四十廻向品, 終乃絶筆. 又嘗因訟, 分軀於

百松, 故皆謂位階初地矣. 亦因海龍之誘, 承詔於路上, 撰三昧

經疏, 置筆硯於牛之兩角上, 因謂之角乘, 亦表本始二覺之微

旨也. 大安法師排來而粘紙, 亦知音唱和也. 旣入寂, 聰碎遺

骸, 塑眞容, 安芬皇寺, 以表敬慕終天之志. 聰時旁禮, 像忽廻

顧, 至今猶顧矣. 曉嘗所居穴寺旁, 有聰家之墟云.

讚曰 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

掩芬皇顧影空.

301) 분황사(芬皇寺):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 선덕왕 3년(634)에 창건되

었다. 신라에 옛 부처 때의 인연 있는 일곱 절터 중의 하나로 꼽혔던 중요한 절

이다. 자장이 귀국하자 머물게 했던 절이며, 7세기 중반에 원효가 활동하며『화

엄경소』를 지었다. 경덕왕 때인 755년에 30만근이 넘는 거대한 동제 약사여래

상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이름난 화가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봉안

되어 있는 등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문화 유적이 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5-1 주

51) 참조.

302) 원문에는 제4 십회향품이라 하였으나 제14 십회향품의 잘못이다. (60권본)『화

엄경』은 권14~권22에 걸쳐 제21품인 십회향품이 설해졌다. 십회향은 보살이 수

행하는 52위 중에서 31위부터 40위까지로서, 지금까지 수행한 공덕을 일체 중

생을 위해 돌려주고 이 공덕으로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지위이다. 여기서 절필

했다는 원효의『화엄경소』는 처음에 8권이었는데, 이를 고려 때 의천이『화엄종

요』와 합쳐서 10권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서와 권3만 남아 있고 나머

지는 전하지 않는다.

303) (60권본)『화엄경』권23 십지품 제22-1(『大正藏』9-547중)에 초지보살이 출가하

면 능히 백 세계의 중생을 교화하고 백 겁의 일을 다 알고 백 가지 법문에 들어

가며, “능히 백으로 변신하여 하나하나의 몸에 백 보살을 나타내보여 권속으로

삼는다(能變身爲百, 於一一身, 能示百菩薩, 以爲眷屬)”고 하였다. 초지는 보살 십

지의 첫 단계로서, 보살 52위 중에서는 41위가 된다.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

들어가자마자 보살은 범부지(凡夫地)를 초월한 자가 되어 보살의 확정된 자리

에 들어가 깨달음을 궁극의 목적으로 한다는 중요한 지위임을 강조한다.

304)『금강삼매경소』:원효가 지은『금강삼매경』의 주석서. 이 저술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여 흔히『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이라고 격을 높여 부른다.『금강

삼매경』은 7세기에 신라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책으로서 스스로 모든 경전의

요점을 포함하고 있는 법 중의 으뜸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의 중심사상은 반야

공관(般若空觀)사상으로 파악되며, 원효가 지은『금강삼매경론』은 일체법이 오

로지 일심(一心)이며 일체중생이 하나의 본각인 일각(一覺)임을 강조하여 일심

사상의 실천원리인 일미관행(一味觀行)의 이치를 서술하고 있다.

305) 본각(本覺) 시각(始覺):수행에 의해 번뇌를 차례로 제거하여 마음의 근원을 깨

닫는 것을 시각(始覺)이라 하고, 모든 중생은 본성이 청정하여 본래부터 깨달음

의 상태라는 것이 본각(本覺)이다.『대승기신론』에서는 심생멸문에서 본각과 시

각의 구별이 생긴다고 본다. 진여가 무명의 연을 만나 미혹하게 되면 마음은 혼

미해져서 깨달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다. 그러나 본성의 작용은 청

정하여 본래가 깨달음 그것이기 때문에 본각이다. 불각이 본각 안의 작용과 교

법 밖의 연에 의해 차례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시각이라 한다. 시각은 수행자의

단계에 따라 불각,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으로 나누고,

결국 시각과 본각이 둘이 아닌 절대 평등의 대각에 도달한다고 한다.『송고승전』

원효전에서는『금강삼매경』이 본각과 시각을 종지로 삼는 것이어서, 소가 끄는

수레의 두 뿔 사이에 붓과 벼루를 두게 하여 소 5권을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306) 대안(大安):7세기에 활동한 신라의 승려.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항상 시장에서

구리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 하고 다녔기 때문에 대안이라고 이름하였다

고 한다. 신라 왕비가 병이 나서 바다 속 용궁에 들어가『금강삼매경』을 구해 왔

는데, 용궁에서 이 경은 대안 성자가 뒤섞인 순서를 바로 맞추고 원효가 해석서

를 풀어 강의하면 왕비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안에게 경전

을 맞추라고 명하자 대안은 궁궐에는 들어가지 않고 경전만 맞추겠다고 하여 8

품으로 완성하였다. 대안은 원효가 아니면 해석할 수 없다고 하며 원효에게 빨

리 가져가도록 하였고, 원효는 이를 받아 명작『금강삼매경론』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송고승전』권4 元曉傳). 이와 같은 전승은 대안이 교단불교와는 거리를

두고 활동하던 대중 포교 활동가였으며, 새로운 교학에 높은 수준의 이해를 갖

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307) 지음(知音):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일화에서 나온 말로서, 자신의 마음

을 알아주는 진정한 친구를 말한다. (『列子』, “伯牙鼓琴 志在高山 鍾子期曰 峨峨兮

若泰山…… 子期死 伯牙絶絃 以無知音者”)

308) 유해를 가루로 만들어 소상을 빚어 추모하는 것은 신라 탈해왕에게서도 볼 수

있다.『삼국유사』권1 탈해왕조에는 탈해왕이 죽자 소천구(疏川丘)에 장례지냈

는데, 유해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궁궐 안에 두었다가 다시 동악 곧 토

함산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사의 주석에 죽은지 한참 지난 680년에

뼈를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원효가 죽은

686년과 얼마 멀지 않는 시기이다.

의상이 교학을 전하다

[해제]

신라 화엄종의 개창자인 의상의 전기를 엮은 글이다. 의상은 삼국통일기

를 살면서 획기적인 교학 발전과 대중화를 이룬 통일신라 불교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사상적으로 법계연기를 중심으로 한 신라 화엄사상을 정

립하고 화엄종 종단을 이룩하여 지속적인 발전의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교

단을 중심으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선도하여 대중화에도 중요한 기반

을 제공하였다.

이 자료는『삼국유사』의 일반적인 편찬 예와 같이 최치원이 지은 「부석

존자전(浮石尊者傳)」을 토대로 하면서 이와 다른 자료들을 묶어 한 편을 이

루었다. 가계, 출가, 입당, 지엄의 현몽, 화엄 수학과 귀국, 부석사 창건, 현

수서간, 십찰, 저서, 십제자, 제자들의 활동, 특이한 행적 순으로 구성되었는

데, 생몰년조차 기록하지 않아 이 자체로는 의상의 온전한 전기가 이루어지

지 않는다. 이에 비해 『송고승전』「의상전」은 가계, 출가, 입당시의 원효 고

사, 등주의 선묘 인연, 지엄에게 수학, 귀국시의 선묘 인연, 부석사 창건과

선묘, 국왕의 전장시주 거부, 제자, 생활태도, 제자수련, 제자 저술, 입적 순

으로 구성되었다. 전체적인 구성 체계는 유사하지만 수록 내용에 차이가 있

다. 본래『삼국유사』자체가 최치원의「부석본전」과『송고승전』을 염두에

두고 이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을 골라 엮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연은 당시

에 의상의 전기로 정착되어 있던「부석존자전」을 염두에 두면서 화엄사상

을 신라에 수용하여 화엄종을 펴나간 것을 의상의 주요한 업적으로 평가하

여 이 편을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삼국유사』 「의상전교」는『송고승전』

「의상전」과 더불어 의상의 생애를 추적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이다.

『삼국유사』권3「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끝부분에 무극(無極)이

추가 인용한 「부석본비(浮石本碑)」에는 생애의 주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상호 비교된다.

[역주]

의상이 교학을 전하다309)

법사 의상(義湘)310)은 부친이 한신(韓信)이고 성은 김씨이다.311) 29세에

경주 황복사(皇福寺)312)에서 삭발하였다.313) 얼마 후 중국의 교화를 보려

고 마침내 원효(元曉)314)와 함께 요동으로 가다가 변방의 군사에게 첩자로

붙들려 수십일간 붙잡혀 있다 겨우 빠져나와 돌아왔다.315) 〈이 일은 최치원(崔

致遠)이 지은 본전(本傳)과316) 원효의 행장에 등에 있다.〉

영휘(永徽)317) 초년에 마침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배를 얻어 타고 중

국에 들어갔다.318) 처음에 양주(揚州)319)에 머물렀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유지인(劉至仁)이 관아 안으로 초빙하여 머무르게 하며 풍족하게 대접하

였다.320) 조금 있다가 종남산(終南山)321) 지상사(至相寺)322)에 가서 지엄

(智儼)323)을 배알하였다. 지엄의 전날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나서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324)까지 덮었는데, 그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325) 하나가 있고 광명이 멀리까지 미

쳤다. 꿈을 깨고는 놀라서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도착하였다. 특

별한 예로 맞아들이고 조용히 이르기를, “내 어제 꿈이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 하고는 입실(入室)을 허락하였다. (의상이) 화엄경의326) 미묘

한 뜻을 깊게 파헤치자 지엄이 뛰어난 인재를327)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새

로운 이치를 드러내고 깊고 은밀한 이치를 찾아내 328)남초와 천초가 본래

색깔보다 나아지듯 스승보다 낫게 되었다.329)

얼마 뒤에 신라 승상 김흠순(金欽純)330)이〈혹은 김인문(金仁問)331)이라고도

한다〉김양도(金良 圖)332) 등과 함께 당나라333)에 와서 감옥에 갇혔는데 고

종(高宗)334)이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이 몰래 사람을 보

내 의상에게 알려주고 먼저 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함형(咸亨)335)

년 경오년(670)에 본국에 돌아와서336) 조정에 사정을 알렸다. 이에 신인(神

印)337) 대덕(大德)338)인 명랑(明朗)339)에게 밀교의 단법(壇法)340)을 임시로

개설하게 하여 (담을)물리쳐 신라는 위기를 면하였다.341)

義湘傳敎

法師義湘, 考曰韓信, 金氏. 年二十九, 依京師皇福寺落髮. 未

幾西圖觀化, 遂與元曉, 道出遼東, 邊戍邏之爲諜者, 囚閉者累

旬, 僅免而還.〈事在崔侯本傳及曉師行狀等〉

永徽初會唐使舡有西還者, 寓載入中國. 初止揚州, 州將劉至

仁請留衙內, 供養豊贍. 尋往終南山至相寺, 謁智儼. 儼前夕

夢, 一大樹生海東, 枝葉溥布, 來蔭神州, 上有鳳巢, 登視之,

有一摩尼寶珠, 光明屬遠. 覺而驚異, 洒掃而待. 湘乃至. 殊禮

迎際, 從容謂曰, “吾昨者之夢, 子來投我之兆,” 許爲入室. 雜

花妙旨, 剖析幽微, 儼喜逢郢質. 克發新致, 可謂鉤深索隱, 藍

茜沮本色. 旣而本國承相金欽純〈一作仁問〉 良圖等, 往囚於唐,

高宗將大擧東征, 欽純等密遣湘, 誘而先之. 以咸亨元年庚午

還國, 聞事於朝, 命神印大德明朗, 假設密壇法禳之, 國乃免.

309) 의상의 전기는『송고승전』권4「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도 실려 있

는데, 주요 내용이 다르다.『삼국유사』권3「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끝부

분에는 무극(無極)이「부석본비(浮石本碑)」를 인용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요 사

실에 대한 명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310) 의상의 이름은 의상(義相, 의상 제자들의 기록인『법계도기총수록』, 신라 표원의

『화엄경문의요결문답』, 고려 균여의 『법계도원통기』, 고려의 「원융국사비문」, 「균여

전」,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 의상(義湘, 『송고승전』, 『삼국유사』), 의

상(義想, 신라 최치원의「법장화상전」, 고려의 「법인국사비문」, 고려 의천의 『원종문

류』와『대각국사문집』등) 등 여러 표기가 있다. 이곳『삼국유사』에서는『송고승

전』을 계승하여 의상(義湘)을 채용하였는데, 직계 제자들의 기술과 의미 등을

고려할 때 의상(義相)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의상(義相, 625~702)은 신라

화엄종의 개창자이다. 황복사에서 출가한 후 당에 유학하여 지엄에게서 화엄

을 배우고『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지어 일(一)과 다(多)가 걸림 없이 거듭

전개되는 법계연기 사상을 정립하였다. 귀국한 후 부석사(浮石寺)를 비롯한 여

러 절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과 화엄사상을 연마하고 정진하며 화엄종을 펴 나

갔다. 한편으로 교단에서 관음신앙과 미타신앙을 선도하여 사람들이 불교 신앙

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하였다. 제자들이 확장하여 창건하고 운영한 화엄

십찰은 통일신라 불교계의 중추를 이루었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

쳤다.『일승법계도』외에『아미타경의기』가 저술로 알려졌고,「백화도량발원문」

등 의상의 사상을 담고 있다고 알려진 저술이 몇 개 있지만 저술은 많지 않다.

지통(智通) 진정(眞定) 도신(道身) 표훈(表訓) 등 여러 뛰어난 제자가 있다.

311)『송고승전』「의상전」에서는 의상의 성을 박씨(朴氏)라고 하였다.

312) 황복사(皇福寺):경북 경주시 구황동(九黃洞) 낭산(狼山) 기슭에 있던 절. 현재

삼층탑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금당지, 귀부 등 절터 유적이 일부 남아 있

다. 692년에 신문왕비 신목왕후(神睦王后)와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孝昭王)이

돌아간 전왕 신문왕(神文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삼층석탑을 조성하고, 706년에

는 신문왕의 아들이자 효소왕의 아우인 성덕왕(聖德王)이 돌아간 신문왕, 신목

왕후, 효소왕을 위해 순금제 미타상을 조성하여 탑 안에 안치하고 그 사실을 기

록한 사리함기(舍利函記)를 남겼다. 신라말에 경명왕(景明王)이 돌아가자 황복

사에서 화장하기도 하였다.(『삼국유사』권1 왕력 景明王) 의상은 귀국 후에도 674

년에 황복사에서 진정, 표훈 등의 제자들에게『법계도』를 강의하였다.(『法界圖

記叢髓錄』 권상1 ; 上元元年 表訓眞定等十餘德, 從和尙所, 學法界圖印於皇福寺)

313)「부석본비」에서는 ‘관세출가(丱歲出家)’라 하여 20세 전후에 출가한 것으로 보

고 있다.『송고승전』에는 “장이출리(長而出離)하여 불법의 길에 들어섰고 약관

(弱冠)의 나이에 원효와 함께 당에 가기를 시도하였다”고 하여 20세 이전의 나

이에 출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314) 원효(元曉):617~686. 신라 불교철학을 정립한 고승. 당시 중요한 여러 경론에

대해 모두 그 대의를 파악하고 저술을 남겼으며,『대승기신론소』과『금강삼매

경론』을 통해 일심(一心)사상을 중심으로 불교 교학을 총괄하여 불교철학의 높

은 수준을 이룩하고 정토신앙을 대중에게 널리 전파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태종의 딸인 요석궁 공주와 결혼하여 설총(薛聰)을 낳았는데, 설총은 유학자로

큰 활동을 하였다. 5-7 주274) 참조.

315)「부석본비」에는 원효와 함께 했던 이 첫번째 입당 시도를 650년(永徽元年庚戌)

으로 명확히 기록하고, 고구려에 이르러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

리고『송고승전』에는 바닷가 당주(唐州) 경계에 이르러 억센 비를 만나 옛무덤

인줄 모르고 길가 흙집(土龕)에서 몸을 피한 일을 겪고 원효는 깨침을 얻어 돌

아오고 의상만 홀로 중국 등주(登州)로 건너갔으니 이 해가 669년(總章二年)이

라고 하였다.

316) 최치원이 지은 본전:최치원(崔致遠)이 신라 말에 지은 의상의 전기로「부석

존자전(浮石尊者傳)」이 원 이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 내용은 남아 있

지 않고 일부만『삼국유사』권3「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고려 초에 균여

가 의상의『법계도』를 해석한『법계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 고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권2「석안함(釋安含)」 등에 전한다.

317) 영휘(永徽):당 고종(高宗)의 연호, 650~655년.

318)「부석본비」에는 661년(龍朔元年辛酉)에 당에 들어갔다고 하였고,『송고승전』에

는 669년(總章二年)에 상선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생애

의 기록은「부석본비」가 가장 타당성이 있으므로 661년으로 본다. 669년은 의상

이 귀국하기 바로 전이라 맞지 않는다.

319) 양주(揚州):중국 강소성(江蘇省) 중부, 양자강(揚子江)의 북안에 가깝고 대운하

에 임해 있는 도시. 대운하 제일의 요충으로 강남 물자의 대집산지이다. 당나라

때 양주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양쯔강의 하구에 가까워 외국무역항으로 발전하

여 아라비아 상인도 다수 왕래하였다.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으로 황폐되

었다가 오대 시대에 오(吳)나라의 도읍인 강도부(江都府)가 되었고, 송나라 때

는 양주부(揚州府)가 설치되었다.

320)『송고승전』에는 산동(山東)반도에 있는 등주(登州)에 도착하여 마을에 탁발을

갔는데, 집주인이 의상의 용모가 수려한 것을 보고 오래 머물게 하였고, 이를 계

기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의상을 사모하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321) 종남산(終南山):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남쪽에 있는 높이 2604m의

산. 당대 불교의 중심지로 도선(道宣), 지엄(智儼), 종밀(宗密) 등 수많은 고승들

이 수행하였고 계율종, 화엄종, 법상종, 정토종, 선종 등이 성행했던 수당대 중

국불교의 중심지였다. 5-6 주204) 참조.

322) 지상사(至相寺):중국 섬서성 서안시 장안구 남쪽의 종남산에 있던 절로 수대에

정연이 창건하였다 한다. 지엄(智儼)이 이곳에 주석하여 법림(法琳)과 지정(智

正)을 따라 화엄을 배워 화엄종의 토대를 닦은 곳이며, 이 때문에 지엄을 지상대

사(至相大師)로 부르기도 한다. 의상과 법장이 이곳에서 지엄에게 화엄을 배웠

다. 근래에 복원하여 사찰 규모를 갖추었다.

323) 지엄(智儼, 602~668):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대사(至相大師) 또는 운화존

자(雲華尊者)로 불린다. 신라의 의상과 중국의 법장의 스승으로서 화엄종의 창

시자로 추앙되는 두순(杜順)을 따라 두순의 제자인 달(達)법사에게 배우고 법상

(法常)과 지정(智正)에게 교학을 연마하였다. 화엄경을 차례대로 해석한 『수현

기(搜玄記)』, 화엄사상의 요체를 담은『공목장(孔目章)』 『오십요문답(五十要問

答)』등을 저술하여 중국 화엄종의 기반을 이루고 그를 이어 법장이 대성하도록

한 인물이다.

324) 신주(神州)는 중국인이 자신의 나라를 말할 때 쓰는 말이다.

325) 마니보주(摩尼寶珠):마니(摩尼, mani), 마니주(摩尼珠)라고도 하며 보배구슬

의 총칭이다.(『玄應音義』 권1 ) 불행과 재난을 없애주고 흐린 물을 청정하게 하

는 덕이 있다고 한다. 여의주(如意珠, citta-man3 i)도 마니보주로 번역하는

데,(『圓覺大抄』권1하 ) 이는 용왕의 뇌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제석천의 소유이던

것이 부서져 떨어졌다고도 하며 부처의 사리가 변한 것이라고도 한다. 천수관

음(千手觀音)의 40개의 손 가운데 일정마니(日精摩尼)와 월정마니(月精摩尼)가

있는데, 이는 뜨거운 고뇌를 없애고 청량함을 주는 덕이 있다고 한다.

326) 잡화(雜花)는『화엄경』을 말한다.『화엄경』의 뒷부분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산스크리트본 gandavyūha를 뜻에 따라 번역하면 여러 가지 꽃(雜花)과 엄숙하

게 꾸밈(嚴飾)이 된다. 그래서『화엄경』을 잡화라고도 말한다. 화엄경(華嚴經)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

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달은 지 이칠일

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이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德)을 설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向)의 보살 수행 계위

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을 묻고자 53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번역본은 60권본, 80권본, 40권본의 세

가지가 있다. 5-6 주68) 참조.

327) 영질(郢質)은 학문과 문자를 서로 질의할 만한 상대자를 말한다.(『莊子』 郢人堊

漫其鼻端 若蠅翼使匠石斲之 匠石運勤成風 聽而之盡堊而鼻不傷)

328) 구심색은(鉤深索隱)은 심오하고 은밀한 사물의 이치를 찾아냄을 말한다.(『易經』

繫辭, 探賾索隱 鉤深致遠)

329) 남천저본색(藍茜沮本色)은 물들이는데 쓰는 쪽이나 꼭두서니가 물들이고 나면

본래 색보다 더 진하게 된다는 데서 나온 말로서 원래보다 더 나아짐을 말한다.

여기서는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말한다. 청람(靑藍) 곧 푸른색이 쪽에서 나

오지만 원래의 쪽보다 더 푸르다(靑出於藍而靑於藍)는 것과 같은 뜻이다.

330) 김흠순(金欽純)은 김양도(金良圖)와 함께 문무왕 9년(669) 5월에 백제와 고구려

패망 후 신라와 당 사이에 생긴 외교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당에 갔는데(『삼

국사기』권6 문무왕 9년) 당은 다음 해(670) 정월에 김흠순만 귀국을 허락하고 김

양도는 머물러 있게 하였다. 김흠순은 이해 7월에 국경구획도를 가지고 귀국했

다.(『삼국사기』권6 문무왕 11년 당에 보낸 답서) 김흠순은 김유신의 아우로 김흠

춘(金欽春)이라고도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었으며 문무왕 8년 고구려와의 싸움

에 김인문 김양도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참전하는 등 여러 차례 전

쟁에 나섰고, 당과의 외교에도 활약하는 등 문무왕 때 크게 활약하여 최고위인

각간의 관등에 올랐다.(『삼국유사』권1 기이 김유신 ;『삼국사기』신라본기 참조)

331) 김흠순은 670년 정월에 귀국했으므로 일연이 주석에서 제시한 견해처럼 계속

당에 숙위(宿衛)하던 김인문이 맞다.『삼국유사』권2「문호왕법민」에도 김인문

으로 되어 있다.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문무왕이 된 태자 법민(法敏)의 다

음가는 태종의 둘째 왕자로 7차례나 당에 들어가 숙위하며 대당 외교를 담당하

였다. 당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등 당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고

구려 패망 이후에는 악화된 신라와 당과의 사이에서 674년에 당에 의해 일방적

으로 신라왕으로 임명되는 등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당에서 죽었다.(『삼국

사기』권44 열전 김인문)

332) 김양도(金良 圖, ?~670):신라가 백제 및 고구려와 벌인 전쟁에 아찬 관등의 부

장군(副將軍), 대아찬의 장군(將軍) 직책으로 출전하였고, 6차례 입당하여 활동

하며 외교 활동을 하다 669년 김흠순과 함께 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죽었으며 문

장에 뛰어났다.(『삼국사기』권6 문무왕 10년 ;『삼국사기』권44 열전 김인문) 불교

를 깊이 믿어 어릴 때 갑자기 말을 못하고 전신이 마비되어 밀교의 고승 밀본(密

本)을 청해다 나은 일도 있고(『삼국유사』권5「밀본최사」) 두 딸 화보(花寶)와 연

보(蓮寶)를 흥륜사(興輪寺)에 사신(捨身)하여 절의 노비로 삼기도 하였다.(『삼국

유사』권3「원종흥법위촉멸신」)

333) 당(唐)나라: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에 멸망한 중국의 왕조. 290년

간 20대의 황제가 왕위를 이어 지속되었다. 남북조의 오랜 분열시대를 통일한

수나라가 39여 년만에 멸망하고 뒤이은 왕조로서 세계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중

국의 성세를 이루었다. 당이 이룩한 문물과 제도는 동아시아 문화의 전형이 되

어 한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334) 고종(高宗):당의 제3대 왕. 재위 650~683년.

335) 함형(咸亨)은 당 고종의 연호, 670~673년. 원문의 향(享)은 형(亨)의 잘못이다.

336)「부석본비」에는 함형 2년(671)에 귀국했다고 하였다고 하여 이곳과 1년의 차이

가 있다.

337) 신인(神印):무드라( mūdra, 文豆婁). 여기서는 밀교를 지칭한다. 신라 문무왕

때 명랑(明朗)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종단이다.

338) 대덕(大德):높은 덕행이 있는 고승에 대한 존칭. 중국이나 신라에서 승려의 직

책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왕이 천거하여 7년 임기로 활동하였는

데, 화엄종과 법상종에 두었다고 하였다.(崔致遠,「海印寺善安住院壁記」 및 金福

順,『新羅華嚴宗硏究』, pp.89~98 참조)

339) 명랑(明朗):신라 밀교의 고승으로 신인종(神印宗)의 종조로 꼽힌다. 사간 재량

(才良)의 아들이며, 자장의 누이인 남간(南澗)부인이 모친이다. (『삼국유사』권5

「明朗神印」)

340) 단법(壇法):밀교에서 기도하는 작법의 하나. 단을 설치하고 여러 불보살과 제

천(諸天)을 안치하여 행하는 수행법이다.

341) 이 이야기는『삼국유사』권2「문호왕법민」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668년에 당

고종이 김인문 등을 불러 당군을 요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는 당에 해를

끼치려 한다고 꾸짖고 감옥에 가둔뒤 50만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의상이 당에서 김인문을 만나 이 사실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왕에게 알렸

다. 왕이 걱정하여 신하들을 모아 회의를 하니 김천존이 명랑법사가 용궁에서

비법을 전해 왔으니 초청해서 물어보자고 하였다.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

왕사를 지어 도량을 열면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명랑이 비단으로 절을 임시

가설하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자신을 상수로 유가 명승 12인과 문두루 비

밀법을 수행하여 바다에서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가 모두 물에 빠지게 만들었

다고 하였다.

의봉(儀鳳)342)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太伯山)343)에 가서 조정의 명

을 받들어 부석사344)를 창건하고345) 대승을 널리 펴니 신비한 감응이 많았

다. 종남산 지엄의 문인 현수(賢首)346)가 『탐현기(探玄記)』347)를 저술하고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면서 함께 정성스러운 서신을 보내왔다. 서신은

이렇다.348)

서경(西京)349) 숭복사(崇福寺)350)의 승 법장(法藏)은 해동 신라 화엄법사

의 시자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 번 헤어진 지 20여 년이 되니 고개 기울이며

기대하는 정성이 어찌 가슴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구름은 만리에 뻗

쳤고 바다와 육지는 천겹으로 막히니 이 한몸이 다시 뵐 수 없는 것이 한스

러운데 연연한 그리움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생에 인연

을 같이하여 금생에 같이 공부하고, 이같은 과보를 받아 함께 화엄대경에

흠뻑 젖고 특별히 선사에게서 깊은 법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러러 듣

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뒤에 화엄을 열어 펴시고 법계

의 걸림 없는 연기를 널리 펴시어 중중한 제망(帝網)351)으로 불국을 새롭

게 하고 이익을 주심이 크고 넓다 하오니 기쁨이 더욱 깊습니다. 이로써 여

래께서 입멸하신 뒤에 불일(佛日)을 빛내고 법륜을 다시 굴려 불법이 오래

도록 머무르게 할 분은 오로지 법사뿐임을 알겠습니다. 저는 나아감에 이

룸이 없고 왔다갔다하나 더함이 없습니다.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건대 선

사의 은혜에 부끄러우나 분수에 따라 받아 지녀 버리지 않고 이 업에 의지

하여 내세의 인연을 맺기를 바라옵니다. 다만 스님352)의 장(章)과 소(疏)가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단하여 후인들을 이해시키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에 스님의 미묘한 말씀과 오묘한 뜻을 기록하여 억지로 의기(義記)를 만

들었는데, 근래에 승전(勝詮)353)법사가 베껴서 고향에 돌아가 그곳에 전하

오니 청컨대 상인께서는 잘잘못을 자세히 가려 가르침을 주시면 다행이겠

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다가오는 내세에 몸을 버리고 몸을 받음에 서로

함께 노사나불354)의 회상에서 이와 같은 다함없는 묘법을 들어 받고 한량

없는 보현원행(普賢願行)355)을 수행하고자 하옵니다. 만일 나쁜 업으로 인

해 하루 아침에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엎드려 바라건대 상인께서는 옛일을

잊지 마시고 어느 곳에356) 계시든간에 정도(正道)를 보여주소서. 인편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부탁하나이다. 갖추어 쓰지 못합니다.〈이 글은『원종문

류(圓宗文類)』357)에 있다.〉

儀鳳元年, 湘歸太伯山, 奉朝旨創浮石寺, 敷敞大乘, 靈感頗

著. 終南門人賢首, 撰搜玄疏, 送副本於湘處, 幷奉書懃懇. 曰

西京崇福寺僧法藏, 致書於海東新羅華嚴法師侍者. 一從分別

二十餘年, 傾望之誠, 豈離心首. 加以烟雲萬里, 海陸千重, 恨

此一身, 不復再面, 抱懷戀戀, 夫何可言. 故由夙世同因, 今生

同業, 得於此報, 俱沐大經, 特蒙先師授玆奧典. 仰承上人歸鄕

之後, 開演華嚴, 宣揚法界無㝵緣起, 重重帝網, 新新佛國, 利

益弘廣, 喜躍增深. 是知如來滅後, 光輝佛日, 再轉法輪, 令法

久住者, 其唯法師矣. 藏進趣無成, 周旋寡况. 仰念玆典, 愧荷

先師, 隨分受持, 不能捨離, 希憑此業, 用結來因. 但以和尙章

䟽, 義豊文簡, 致令後人, 多難趣入. 是以錄和尙微言妙旨, 勒

成義記, 近因勝詮法師, 抄寫還鄕, 傳之彼土, 請上人詳檢臧

否, 幸示箴誨. 伏願當當來世, 捨身受身, 相與同於盧舍那, 聽

受如此無盡妙法, 修行如此無量普賢願行. 儻餘惡業, 一朝顚

墜, 伏希上人, 不遺宿昔, 在諸趣中, 示以正道. 人信之次, 時

訪存沒. 不具.〈文載大文類〉

342) 의봉(儀鳳):당 고종의 연호, 676~678년.

343) 태백산(太伯山)은 태백산(太白山). 강원도 태백시와 경북 봉화군에 걸쳐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의 줄기가 동해안을 벋어 오다가 한반도 중앙부로 방향을 틀

어 내려가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 신라 오악(五岳)의 북악(北岳)으로 예전부터

신앙의 대상이었다. 부석사는 태백산 줄기가 벋어 내려 소백산에 이르기 바로

전에 솟은 봉황산 밑에 자리잡아 태백산의 흐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344) 부석사(浮石寺):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절. 의상이

창건한 신라 화엄종의 종찰이다. 『송고승전』에는 창건과 관련하여 반대하는 세

력을 물리치는데 용으로 변한 선묘(善妙)가 도왔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다.

345)『삼국사기』에도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고 기록하였다.(권7

문무왕 16년 2월)

346) 현수(賢首):643~712.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이며 화엄교학의 대성자. 이름은 법

장(法藏), 호는 국일법사(國一法師) 또는 향상(香象)대사, 강장(康藏)국사라고도

한다. 선조가 강거국 사람이어서 속성은 강씨(康氏)이다. 조부가 중국에 들어와

장안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 지엄에게 사사하여 화엄을 배웠는데, 지엄의 입적

후 28세에 박진(薄塵)에게 출가하였다. 서역 여러 나라의 언어와 산스크리트어

에 능하여 왕명으로 의정(義淨)의 역장(譯場)에 참여하였고, 신역 80『화엄경』과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등 10여종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측천무후의 후

대를 받아 화엄사상을 집대성하였고, 측천무후를 위해 화엄사상의 정수인 십현

연기(十玄緣起)를 설명할 목적으로 궁전의 금사자에 비유한『금사자장(金師子

章)』을 짓기도 하였다. 일생 동안 30여 차례나 화엄을 강의하고 화엄사상의 조

직화에 기여하였으며,『능가경』,『밀엄경』,『범망경』,『기신론』등의 경전에 주

석을 지었다.『화엄경』을 해석한『탐현기(探玄記)』를 비롯하여 화엄종의 체계를

세운『교분기(敎分記)』와『기신론소(起信論疏)』,『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범

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등의 많은 저서

가 있다. 제자로는 굉관(宏觀)·문초(文超)·지광(智光)·종일(宗一)·혜원(慧苑)

등이 있다.

347) 원문에는 수현소(搜玄疏)라 하였는데 이는『탐현기(探玄記)』의 잘못이다. 화엄

경에 대한 해석서로 지엄은『수현기(搜玄記)』5권을 지었고, 법장은『탐현기』20

권을 지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법장의 저술인 탐현기라야 맞는다. 만약 찬자 일

연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으리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글자는 ‘깊은 이치를 밝

힌 책’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348) 이 서신의 진적이 청대까지 중국에 전승되어오다 지금은 일본 천리대(天理大)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李丙燾, 1960 「唐法藏寄新羅義湘書에 對하여」 『海圓黃義

敦敎授華甲記念論叢』 ; 1976 『韓國古代史硏究』에 고쳐 실음) 이 서간은 별폭과 함께

고려 의천(義天)이 화엄 관계 역대 주요 문적을 모아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

에 실려 있다.(권22「賢首國師寄海東書」) 서신과 함께 보낸 책 목록을 적은 별폭

은『삼국유사』 권4「승전촉루(勝詮髑髏)」에 실어 놓았는데, 별폭의 진적은 전하

지 않는다. 여기『삼국유사』에 실린 글을 서간 원적과 비교하면 큰 의미 차이는

없으나 15군데의 글자 차이가 있고, 원적에는 마지막에 “법장이 합장합니다.

정월 28일”이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원종문류』에 수록된 글은 3군데 다른 부

분이 있다.

349) 서경(西京):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서안(西安) 곧 예전의 장안(長安)이다. 한나

라 때 전한의 수도는 장안이었고 후한의 수도는 낙양(洛陽)이어서 한대의 두 수

도 가운데 서쪽의 장안을 서경, 동쪽의 낙양을 동경(東京)이라 한다.

350) 숭복사(崇福寺):만년의 법장이 소안탑(小雁塔)으로 유명한 장안의 천복사(薦福

寺)에서 주석하였으므로 천복사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추정된다.

351) 중중제망(重重帝網)은 제망중중(帝網重重)과 같은 말로 제석천(帝釋天, Indra)

이 사는 제석궁의 보물 그물인 인드라망(因陀羅網)을 이루는 구슬이 서로서로

겹쳐 하나의 구슬에 다른 여러 구슬이 비쳐 보이듯이 화엄 연기의 이치가 서로

걸림이 없이 상입상즉(相入相卽)함을 비유한다.

352) 화상(和尙)은 고승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편지를 주고받는 의상과 법장의

스승인 지엄(智儼)을 말한다.

353) 승전(勝詮):신라 출신으로 법장의 문하에서 화엄을 배워 신라에서 전파한 승

려. 법장의 저술을 가져와 의상에게 전해주어 널리 알리게 하였고, 자신은 지방

에서 수행과 화엄 전파에 노력했으나 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한다.(『삼국유

사』권4「승전촉루(勝詮髑髏)」참조)

354) 노사나(盧舍那)는『화엄경』의 설법 주체인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말한다.

355) 보현원행(普賢願行):『화엄경』의 주요한 내용 중의 하나인 보현보살의 행원, 곧

보살의 실천 수도행을 가리킨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보현보살은 53선지식

을 찾아다니며 보살행을 배우는 선재(善財)의 구도행을 열어주고 마무리하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795년에 번역된 40『화엄』에서는 끝부분에 보현보살의

10대원을 추가하여, 이 부분이 보현행원 사상의 중심 토대가 된다. 보현보살의

10대원은 첫째는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하며(禮敬諸佛), 둘째는 부처를

칭송하고 찬탄하며(稱讚如來), 셋째는 널리 공양하며(廣修供養), 넷째는 업장을

참회하며(懺悔業障), 다섯째는 남이 짓는 공덕을 따라 기뻐하며(隨喜功德), 여섯

째는 부처님께 설법해 주시기를 청하며(請轉法輪), 일곱째는 부처님께서 이 세

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청하며(請佛住世),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우며

(常隨佛學), 아홉째는 항상 중생의 뜻에 따르며(恒順衆生), 열째는 지은바 모든

공덕을 모두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普皆廻向) 것이다.

356) 원문의 제취(諸趣)는 중생이 업에 따라 윤회한다는 하늘(天), 인간(人), 짐승(畜

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의 오취(五趣) 또는 여기에 아수라(阿修羅)를 더한 육

취(六趣, 六道라고도 함)를 말한다.

357) 원문의 대문류(大文類)는『원종문류(圓宗文類)』를 말한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

(義天)이 화엄에 관계된 역대의 주요 문적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지금은 전체

22권중 14권과 22권만 남아 있다. 여기 수록한 법장의 서간은 권22에 「현수국사

기해동서(賢首國師寄海東書)」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韓 4 p.635c4~636a13)

의상이 이에 열 개의 절358)에 가르침을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와 원주의 비마라사(毘摩羅寺)359),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360), 비슬산

361) 옥천사(玉泉寺),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362), 남악363)의 화엄사

(華嚴寺)364) 등이 그것이다. 또한 『법계도(法界圖)』 서인(書印)과 약소(略

疏)365)를 함께 지어 일승의 요점을 모두 포괄하니 천년의 귀감이 되어 다

투어 소중히 지니게 되었다. 다른 찬술은 없으나366) 솥의 음식을 맛보는

데 한 점 고기면 족한 것이다. 『법계도』는 총장(總章)367) 원년(668) 무진년

에 이루어졌는데368) 이 해에 지엄이 돌아갔으니369) 마치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데서 절필한370) 것과 같다. 세상에서 의상이 금산보개여래(金

山寶蓋如來)371)의 화신이라 전한다. 제자에 오진(悟眞), 지통(智通),372)

훈(表訓),373) 진정(眞定),374)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375) 상원

(相源),376) 능인(能仁), 의적(義寂),377) 등의 10대덕이 영수가 되니378) 모두

아성(亞聖)이라 할 만하며 각기 전기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

山)379) 골암사(鶻嵓寺)에 있으면서 매일 밤 팔을 뻗어 부석사의 등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380)를 지었는데 대개 (의상에게) 가르침을 친히 받

았기 때문에 글이 신묘한 경지에 이른 것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

國寺)381)에 주석하며 항상 천궁(天宮)에 왕래하였다.382)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제자들과 탑을 돌았는데 언제나 허공을 밟고 올라가고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탑에는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제자들도 계단

과 3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도니 의상이 돌아보며, “세상 사람들이 이것

을 보면 반드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된다.”고 하

였다. 나머지는 최치원이 지은 본전383)과 같다.

찬한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 건너 안개 티끌 무릅쓰니

지상사 문이 열려 상서로운 진객으로 모셨구나.

화엄을 캐어다 고국에 심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한가지 봄이로다.384)

湘乃令十刹傳敎, 太伯山浮石寺 原州毗摩羅 伽耶之海印 毗瑟

之玉泉 金井之梵魚 南嶽華嚴寺等是也. 又著法界圖書印幷畧

䟽, 括盡一乘樞要, 千載龜鏡, 競所珍佩. 餘無撰述, 嘗鼎味一

臠足矣. 圖成總章元年戊辰, 是年儼亦歸寂, 如孔氏之絶筆於

獲麟矣. 世傳湘乃金山寶蓋之幻有也. 徒弟 悟眞 智通 表訓 眞

定 眞藏 道融 良圓 相源 能仁 義寂 等十大德爲領首, 皆亞聖

也, 各有傳. 眞 嘗處下柯山鶻嵓寺, 每夜伸臂, 點浮石室燈. 通

著錐洞記, 蓋承親訓, 故辭多詣妙. 訓 曾住佛國寺, 常往來天

宮. 湘住皇福寺時, 與徒衆繞塔, 每步虛而上, 不以階升, 故其

塔不設梯磴. 其徒離階三尺, 履空而旋, 湘乃顧謂曰,“ 世人見

此, 必以爲怪, 不可以訓世.” 餘如崔侯所撰本傳.385)

讚曰 披榛跨海冒烟塵, 至相門開接瑞珍. 釆釆雜花栽故國, 終

南太伯一般春.

358) 십찰(十刹)은 의상의 가르침을 전파한 화엄종의 주요 사찰을 말한다. 여기에는

6개의 절을 꼽았고, 신라 말에 최치원이 지은『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십

산(十山)이라 하고는 중악 공산(公山) 미리사(美理寺), 남악 지리산(地異山) 화

엄사(華嚴寺), 북악 부석사(浮石寺), 강주(康州) 가야산(迦耶山) 해인사(海印寺),

보광사(普光寺), 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계룡산(雞龍山) 갑

사(岬寺), 삭주(朔州) 화산사(華山寺), 양주(良州)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語

寺), 비슬산(毘瑟山)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산(母山) 국신사(國神寺)의 12개

절을 들고, ‘경유여소(更有餘所)’라 하여 한주(漢州) 부아산(負兒山) 청담사(靑

潭寺)를 들어 십여 곳이라고 하여 실제로 13곳의 절을 들었다.(『韓國佛敎全書』

3-775하)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십찰은 반드시 10개의 절이 아니라 신라 후반에

화엄종의 주요 사찰로 꼽히던 절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359) 비마라사(毘摩羅寺):충북 단양군 영춘면 산중에 남한강 줄기를 내려다보며 자

리잡고 있던 절. 당시 영춘이 원주에 속했으므로 원주 비마라사라 하였다.

360) 해인사(海印寺):지금의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에 있는 절. 802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에 의해 중창된 화엄종 사찰이다. 신라 말 화엄종의 중

심사찰로 이곳에서 교리의 차이에 따라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으로 구분된 교

파가 있었다. 최치원도 만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고려 때 경론이 많이 간행되었

으며 조선초에 고려대장경판이 이곳에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361) 비슬산(毘瑟山):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산. 도성(道成)과 관기(觀機)가 수도하던

유적도 있었다.(『삼국유사』권3「包山二聖」참조). 비슬산을 창녕(昌寧, 比斯伐)의

화왕산(火王山) 옥천사로 보는 경우도 있고, 고성(固城) 연화산(蓮華山) 옥천사

로 보기도 한다.

362) 범어사(梵魚寺):지금의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에 있는 절.

363) 남악(南岳):신라에는 국가의 주요 산으로 오악을 설정하여 국가적인 제사를 지

냈다. 그중 남악은 지리산이다.

364) 화엄사(華嚴寺):지금의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에 있는 절. 8세기 중

반 경에 연기(緣起)가 대찰로 중창하였다. 연기는 근년에 출토되어 현존하는 755

년에 이루어진『화엄경』(80권본) 사경(寫經)의 주도 인물이기도 하다. 화엄사 장

륙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에는 60화엄을 새긴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있었는

데 파손되어 현재 1만 여 쪽의 조각이 남아 있다. 각황전 뒤편 언덕에는 중창 시

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뛰어난 조형의 사자석탑(獅子石塔)도 남아 있다.

365) 원문의 법계도서인병약소(法界圖書印幷略疏)는 의상의 대표적인 저술『일승법

계도(一乘法界圖)』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줄여서『법계도』라고도 부

르는 이 저술은 210자의 시구를 구불구불 구부러진 도형으로 구성한 게송과 그

에 대한 해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굴곡진 도형 부분을 「법계도인(法界圖

印)」, 전체를 『법계도』라고 구분해 부르기도 한다. 이곳의 ‘법계도서인’은 법계도

인, ‘약소’는 법계도의 해설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법계도』끝부분

에 ‘일승법계도는 시와 하나의 도인을 합한 것(一乘法界圖 合詩一印)’ 이라고 명

시하였고,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주석서인 고려 균여의『일승법계도원통기』에

서도 9자가 바르다고 하여 이를 확인하고 있다.(『一乘法界圖圓通記』권상, 韓4 1b)

366) 의상의 다른 저술로는『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등과 발원문 형태의 글이 더 있었다고 한다.

367) 총장(總章):당 고종의 연호, 668~669년.

368)『일승법계도』끝 부분에 “일승법계도는 시와 하나의 도인을 합쳐 말하는 것으

로,『화엄경』과『십지경론』에 의거하여 원교의 종요를 나타낸 것이다. 총장 원

년 7월 15일에 적는다(一乘法界圖 合詩一印, 依華嚴經及十地論, 表圓敎宗要. 總章

元年七月十五日記.)”라는 의상 자신의 기술이 있다.

369) 지엄은 668년 10월 29일에 입적하였다.(『華嚴經傳記』 권3 釋智儼,『大正新修大藏

經』 51-163하)

370) 획린(獲麟)은 공자가『춘추(春秋)』를 편찬하면서 “노(魯)의 애공(哀公) 14년(서

기전 477) 봄에 서쪽에 사냥가서 기린을 잡았다(哀公十四年春 西狩獲麟)”라는 데

까지만 쓴 데서 글을 마치는 절필(絶筆)을 이른다. 당대의 대시인 이백(李白)의

시에도 획린 구절에서 절필한다(絶筆於獲麟)는 구절이 있다.

371)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금광명경(金光明經)』 권2 공덕천품(功德天品) 제

8에 지심예배하는 제불세존에 보승여래(寶勝如來)를 필두로 그 중간에 ‘금산보

개여래’가 나온다.(『大正新修大藏經』16-345下) 곧 의상을 부처의 화신으로 추

앙하였다는 것이 된다. (60)『화엄경』권6 현수품(賢首品)에 “만약 몸이 금으로

된 산처럼 빛나 비추면 32상의 여러 상호를 갖추리라(若身顯耀如金山 具足衆相

三十二)”(『大正新修大藏經』 9-434상)하거나, 권7 불승수미정품(佛昇須彌頂品)에

“구루불의 몸은 금으로 된 산과 같아 여러 길상 중에서 가장 최상이다(拘樓佛身

如金山 諸吉祥中最無上)”이라 하고(같은 책, 441중),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금

산불(金山佛)’이라 하는 것들이(같은 책, 728상) 모두 원만한 상호를 구족한 부

처를 나타내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어서, 역시 의상을 부처의 화신으로 생각

하는 비유의 근거가 된다.『유마경』에도 여러 부처의 이름 중에 금산불(金山佛)

이 나온다.

372) 지통(智通):노비 출신으로 낭지(朗智)에게 배우다 의상의 뛰어난 제자가 된 신

라 승려. 의상이 소백산에서 화엄을 강의할 때 이를 기록하여 강의한 장소의 이

름을 따라『추동기(錐洞記)』를 엮었다.(『三國遺事』권5「朗智乘雲普賢樹」)

373) 표훈(表訓):경덕왕 때의 고승. 천궁(天宮)에 왕래하여 경덕왕의 후사(뒤에 혜공

왕이 됨)를 낳게 하였다는 인물이며,(『삼국유사』권2「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황복사에서 대정(大正) 각간에게 삼본정(三本定)을 강의하였고, 대정에 의해 불

국사가 창건되자 초빙되기도 하였다.(『삼국유사』권5「大城孝二世父母」) 흥륜사

금당에 봉안된 십성의 한 사람이다. 674년에 황복사에서 의상의 강의를 들었다

는 기록으로(『法界圖記叢髓錄』권상1) 보건대 의상의 제자와 경덕왕대(742~765)

의 고승 표훈을 동일 인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374) 진정(眞定):군인 신분으로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연명하던 기층민 출신으로서

의상의 뛰어난 제자가 된 승려이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출가를 미뤘으나 어

머니가 빨리 출가하기를 권해 의상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의

상이 그의 죽은 모친을 위해 90일간 화엄을 강의하였고 강의가 끝나자 모친이

하늘에 태어났다고 하여 불교적 효를 잘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기도 한

다.(『삼국유사』권5「眞定師孝善雙美」)

375) 양원(良圓):의상의 제자. 최치원의『법장화상전』에는 ‘양원(亮元)’으로 표기하

였다.

376) 상원(相源):의상의 제자.『법계도기총수록』에는 ‘상원(相元)’ 또는 상원(常元)

으로 표기하였다.

377) 의적(義寂):유식을 중심으로 20여부 60여 권의 많은 저술을 남긴 신라 법상종

의 승려. 법상종의 의적이 의상의 제자로 수록된 것은 의적이 의상에게 교학

에 대해 문의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의상의 제자로 잘못 기록된 것으로 본

다.(『法界圖圓通記』권1 ‘從法相來’)

378) 의상의 제자에 대해『송고승전』에는 지통(智通), 표훈(表訓), 범체(梵體), 도신

(道身)을 들었고, 최치원의『법장화상전』에는 진정(眞定), 상원(相圓), 양원(亮

元), 표훈(表訓)을 들었다.

379) 하가산(下柯山):경북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산. 학가산(鶴駕山)이라고도 한다.

380)『추동기(錐洞記)』:의상의 제자인 진정의 모친이 돌아가자 이를 추모하여 의상

이 소백산 추동에서 90일간의 화엄강의를 열고 이 내용을 지통이 2권으로 기록

한 책이다.(『삼국유사』권5「眞定師孝善雙美」에 사정이 알려져 있음) 그 내용의 일

부가 의상의『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를 모은『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

髓錄)』과 균여의『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 실려 있다. 근래에

그동안 법장의 저술로 알려진『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이 바로 이것이라는 견

해가 제시되었다.(金相鉉, 1996「錐洞記와 그 異本 華嚴經問答」『韓國學報』 84) 이

책을 다르게 부른 이름도 여럿이 있어, 고려 의천이 편찬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에는『요의문답(要義問答)』이라 하고『송고승전』에는『추혈

문답(錐穴問答)』이라 하였다.

381) 불국사(佛國寺):경북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吐含山)에 있는 절. 751년에 재상

을 지낸 각간 김대성(金大城)이 창건하기 시작하여 국가에서 완성하였다고 한

다.(『삼국유사』권5「大城孝二世父母」참조) 8세기 중반의 가장 조화된 조형과 사

상을 보여주는 신라의 대표적인 절로서 가람구조, 삼층탑과 다보탑 쌍탑의 조

영, 아미타상과 비로자나상 등의 불상, 갖가지 석조물 등의 뛰어난 조형미를 보

여주는 절이다.

382)『삼국유사』권2「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에 표훈이

경덕왕의 요청으로 천제(天帝)에게 가서 경덕왕의 후사(뒤에 혜공왕으로 즉위

함)를 얻어왔다고 적고 있다.

383) 최치원이 지은 가장 충실한 의상의 전기인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을 말한다.

최치원은 이밖에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辰願文)도 지었다.

384) 중국 화엄종을 일으킨 지엄이 활동한 지상사가 있는 종남산과, 그로부터 배워

온 의상이 세운 부석사가 있는 태백산에서 함께 화엄이 크게 진흥되었다는 뜻

이다.

385) 의상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이『삼국유사』와『송고승전』등의 전기류 기록 외

에「부석본비(浮石本碑)」가 있다. 고려시대에 가장 일차적인 자료로 여겨졌던

「부석본비」는『삼국유사』(권3「前後所將舍利」)에 일부가 전하는데, 특히 생애의

주요한 연대 기록을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다.(湘武德八年生丱歲出家, 永徽元年庚

戌, 與元曉同伴欲西入, 至高麗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 總章元年

儼遷化, 咸亨二年湘來還新羅, 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

사복이 말하지 않다

[해제]

원효와 같은 시기에 교유하며 활동하던 사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과부인

어머니가 남편도 없이 낳은 사복이 어머니가 죽어 장례지내는데 원효를 능

가하는 인식을 보여준 점이 주목된다. 특히 원효가 지혜의 호랑이로 비유

한 어머니는 사후 연화장세계에 가게 되는데, 이때 사복이 함께 간다는 사

실과, 지금 세상과의 연결점이 풀 줄기를 뽑아 나타나는 세계라는 점이 특

이하다. 후대 사람들이 그런 사복을 위해 절을 짓고 점찰회를 실시하였다

는 기록도 중요하다. 또한 사복에게는 여기에 기록한 사실 말고 황당한 말

이 많이 떠돌아다녔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복이 아도나 자장, 원효나

의상과 함께 신라 불교를 일으킨 ‘흥륜사금당십성(興輪寺金堂十聖)’의 하

나로 꼽힌 것은 이러한 수준 높은 활동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복에 대해서는 이밖에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

相國集)』 권23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도 나온다. 이규보가 부안의 원

효방(元曉房)을 찾았더니 곁에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살던 암자가 있었는

데,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원효에게 차를 달여 드리던 곳이라고 하였다.

사복의 일화가 원효에 덧붙여 여러 곳으로 파생된 한 예이다.

[역주]

사복이 말하지 않다

서울386) 만선북리(萬善北里)387)에 과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없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여 사

동이라 불렀다.〈아래에서 사복(蛇卜) 또는 파(巴)388) 또는 복(伏) 등이라고도 하였는

데,389) 모두 아이를 말한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효(元曉)390)는 고선사(高仙寺)391)

머무르고 있었다. 원효는 그를 보고 예로 맞이하였으나 사복은 답배하지

않고 말하기를, “그대와 내가 예전에 경전을 실고 가던 암소가 이제 죽었으

니, 함께 장사 지냄이 어떻소?” 라고 하였다. 원효가 “좋다”라고 하였다. 마

침내 함께 집에 도착하자 원효로 하여금 포살(布薩)392)하고 계를 주도록

하였다. (원효가) 시신에 다가서서 빌기를, “태어나지 마라. 죽음이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남이 괴롭다.”고 하였다.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고 하자,

(원효가) 고쳐 말하기를, “죽고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수레에 싣고 활리산(活里山)393)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하기를, “지혜로운 호랑이를 지혜로운 숲에 묻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

겠소?” 라고 하였다. 사복이 이에 게(偈)를 짓기를, “옛날 석가모니 부처께

서 사라수394)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제 또한 그와 같은 이가 있어 연

화장 넓은 세계로 들고자 한다.”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풀의 줄기를 뽑자

그 아래에 세계395)가 있었는데, 밝고 맑았으며 칠보로 된 난간과 누각이 장

엄하여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신을 메고 같이 들어가자, 그 땅이

갑자기 합쳐졌다. 원효가 이에 돌아왔다.

후대 사람들이 금강산(金剛山)396) 동남쪽에 절을 짓고 도량사(道場寺)라

고 하고는 매년 3월 14일에 점찰회(占察會)397)를 행하는 것을 일정한 규칙

으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나타나 오직 이것만 보였는데, 세상에서는 황

당한 말을 많이 붙였으니, 우습다.

찬한다.

못은 고요하고 용은 잠든다고 어찌 등한하리오,

길 떠나 보내는 한 곡조 번잡하지 않다.

고통스런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거늘,

연화장 생사의 세계가 넓기도 하구나.

蛇福不言

京師萬善北里, 有寡女, 不夫而孕. 旣産, 年至十二歲, 不語亦

不起, 因號蛇童. 〈下或作蛇卜, 又巴, 又伏等, 皆言童也.〉

一日其母死. 時元曉住高仙寺. 曉見之迎禮, 福不答拜而曰,

“君我昔日駄經牸牛, 今已亡矣. 偕葬何如?” 曉曰 “諾.” 遂與

到家, 令曉布薩授戒. 臨尸祝曰,“ 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

生也苦.” 福曰,“ 詞煩.” 更之曰,“ 死生苦兮.”

二公轝歸活里山東麓. 曉曰,“ 葬智惠虎於智惠林中, 不亦宜

乎?” 福乃作偈曰,“ 往昔釋迦牟尼佛, 裟羅樹間入涅槃. 于今

亦有如彼者, 欲入蓮花藏界寬.” 言訖拔茅莖, 下有世界, 晃朗

淸虛, 七寶欄楯, 樓閣莊嚴, 殆非人間世. 福負尸共入, 其地奄

然而合. 曉乃還.

後人爲創寺於金剛山東南, 額曰道場寺. 每年三月十四日, 行

占察會爲恒規. 福之應世, 唯示此爾. 俚諺多以荒唐之說託焉,

可笑.

讚曰 淵黙龍眠豈等閑, 臨行一曲沒多般. 苦兮生死元非苦, 華

藏浮休世界寬.

386) 경사(京師)는 서울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말한다.

387) 만선북리(萬善北里):위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안홍(安弘)이 만선사(萬善寺)에

살았다 하므로 만선사가 있는 곳 북방으로 짐작된다.

388) 사파(蛇巴):사복(蛇福)과 같은 말.『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흥륜사금당십성조

(興輪寺金堂十聖條)에는 ‘사파(蛇巴)’로 나온다. 사복의 ‘복’을 뜻으로 말하면 아

이(童)이고, 음을 따라 부르는 이름이 복(福), 복(卜), 복(伏), 파(巴) 등이다.

389)『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23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는 ‘사포성인(蛇

包聖人)’으로 나온다. 이규보가 부안의 원효방(元曉房)을 찾았더니 곁에 한 암자

가 있었는데 원효가 이곳에 와서 살자 사포성인(蛇包聖人)이 모시고 있으면서

차를 달여 드리던 곳이라고 하였다.

390) 원효(元曉, 617~686):중국에 가지 않고 신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경론을 탐구하

여 하나하나에 대한 대체적인 의미를 평가한 종요(宗要)류의 저술을 펴내고, 더

욱 관심이 가는 경론에 대해서는 상세한 주석서를 썼다.『십문화쟁론』으로 화합

의 새로운 불교관을 펼쳤고,『기신론소』와『금강삼매경론』일심(一心)사상을 체

계화하여 신라불교의 가장 탁월한 성과를 이루었으며, 후에는 대중 교화에 매

진하였다. 5-7 주273) 참조.

391) 고선사(高仙寺):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에 위치하는데 70년대 덕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수몰 직전 사지가 발굴되었는데, 탑이 금당 서편에 위치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9세기 초반에 이곳에 세워진 원효비인 서당화상비(誓

幢和尙碑)는 일찍이 파괴되었는데 상부 1편은 동국대박물관에, 하부 수 편은 국

립중앙박물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으며, 3층석탑(국보 제38호)과 목 없는 귀부는

발굴 무렵 국립경주박물관 뜰로 옮겨져 세워져 있다.

392) 포살(布薩): posadha, uposadha. 우포사타(烏逋沙他)·우파사(優婆娑)·포사타

(布沙他)·우파바소타(優波婆素陀) 등으로 음역되며, 장양(長養)·증장(增長)·선

숙(善宿)·정주(淨住)·근주(近住)·공주(共主)·설계(說戒) 등으로 의역된다. 출

가자가 보름마다(15일과 29일 또는 30일) 모여서 계경(戒經)을 설하며, 그동안 지

은 죄가 있으면 참회하여 선을 기르고 악을 없애는 의식을 말한다. 재가자의 경

우 매달 6재일(六齋日)마다 절에 가서 8계(八戒)를 지킨다.

393) 활리산(活里山):위치 미상. 경주 동북쪽에 위치한 명활산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394) 사라수(裟羅樹): śāla. 반낙엽성의 단단한 나무로 히말라야 기슭부터 인도 전

역에 퍼져 자라는데, 인도력으로 3월이면 우유빛 나는 작은 꽃이 핀다. 만년의

석가모니가 말라족이 사는 쿠쉬나가라 사라나무 숲에 당도하여 두 그루 사라수

사이에 북쪽으로 향하여 모로 누운 다음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때 아니게

꽃이 활짝 피어 마치 흰 학이 내려앉은 듯하였다고 하여, 곡수(鵠樹) 또는 학수

(鶴樹)라고도 하고, 석가의 입멸을 쌍림열반(雙林涅槃)이라고 부른다.

395) 연화장(蓮華藏) 세계: padmagarbha-lokadhātu. 화장세계(華藏世界), 화장계

(華藏界)라고도 한다. 비로자나불이 과거에 발원하고 보살행을 닦아 성취한 청

정장엄세계로서 공덕이 무량하고 광대장엄한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커다란

연꽃으로 되었는데, 그 속에 모든 국토와 만물을 간직하였기에 연화장세계라

한다.『화엄경』화장세계품에 의하면, 수미산 맨 위의 풍륜(風輪)에 향수해(香水

海)가 있고 그 속에 커다란 연꽃이 있는데, 연화장세계가 그 연꽃 안에 있다고

한다. 주위는 금강륜산(金剛輪山)이 둘러싸고 대지는 금강으로 이루어져 견고

하고 청정하며 평평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장엄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하

나하나의 세계에는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있다고 한다. 연화장세계의

중앙 향수해에서 나는 대연화는 시방세계를 널리 비치는 중심이며 부처가 그

안에서 나고 중생이 그 사이를 가득 채워 그 장엄한 구조는 크고 넓어 끝이 없다

고 하였다. 또『범망경』에 의하면 노사나불이 천개의 잎으로 된 연화대에 앉아

있는데, 천 잎 하나하나가 한 세계이며, 거기에 노사나불로부터 화현한 천 석가

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 있고, 다시 하나의 세계마다 백억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이는 무진연기의 깊은 진리를 비유한 것이다.

396) 금강산(金剛山):『화엄경(華嚴經)』보살주처품에 의하면 해중(海中)에 법기(法

起)보살(혹은 담무갈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산인데, 흔히 우리나라 강원도 금

강산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금강이라고도 부르는 백률사가 위치한 경주

북산을 가리킨다. 법흥왕 때 이차돈이 순교하자 그 목이 날아 떨어진 곳이 금강

산이다.

397) 점찰회(占察會):『점찰선악업보경(占察業報善惡經)』에 의해 열리는 법회. 신라

시대 원광(圓光)이 처음 열었다고 전한다. 목륜상(木輪相)으로 과거와 현세의

업을 점쳐 보고 참회하여 죄를 없애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진표가 간자를 전하다

[해제]

완산주 출신으로 미륵과 지장을 찾아 망신참회(亡身懺悔)의 수행을 한

진표의 전기이다. 진표는 금산사의 숭제(崇濟)에게 출가하여 계를 얻고자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23세에 선계산에서 처절한 망신참회의 수행으로 지

장보살의 현신으로부터 계를 받았다. 다시 영산사에서 용감히 수행하여 미

륵의 감응을 얻고『점찰경』과 증과(證果) 간자(簡子)를 받아 세상에 법을

전하고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가르침을 얻었다. 진표는 금산사와 아슬라주

(강릉)에서 법을 설하고 계를 주었으며 왕실에서도 보살계를 설하였다. 영

심(永深)을 비롯한 제자들이 속리산 등에서 간자를 이어받아 수행하였다.

이 편은 이 진표의 전기에 이어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수록된 수나라

때 탑참법(搭懺法)을 행하던 이를 소개하고 『점찰경』과 참법을 금지한 내

용을 소개한 다음, 이에 대한 일연 자신의 논평을 통해 『점찰경』의 의의를

인정하고 진표의 수행을 평가하였다.

『삼국유사』에는 원래 이 편에 바로 이어「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

鉢淵藪石記)」가 실려 있는데, 이는 고려 영잠(瑩岑)이 지은「관동 풍악산

발연수 개창조 진표율사 진신골장 입석비명(關東楓岳山鉢淵藪開刱祖眞表

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1199년)을 거의 그대로 수록한 것이다. 이 편의 기

록과 비교하면 대체적인 수행 내용 등은 같으나 출생과 보살의 현신 연대

가 다르고 수행으로 간자를 얻은 것이 지장과 미륵이 나란히 현신하였다는

등의 차이가 있다. 또 송의 찬녕이 지은『송고승전』(988년) 권14 명률편의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百濟國金山寺眞表傳)」은 출가 동기와 두 간자를 이

용한 참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역주]

진표가 간자398)를 전하다

진표(眞表)스님은 완산주(完山州)399)〈지금의 전주목(全州牧)〉만경현(萬頃

縣)400)〈혹은 두내산현(豆乃山縣)이라고도 하고 혹은 도나산현(都那山縣)이라고도 하는

데 지금의 만경이요 옛이름은 두내산현이다. 찬녕(贊寧)의『송고승전(宋高僧傳)』401)에서

진표의 고향 마을을 금산현(金山縣) 사람402)이라고 한 것은 절 이름을 현 이름과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403) 그의 아버지는 진(眞) 나마이고404), 어머니는 길보랑

(吉寶娘)이며 성은 정(井)씨이다.

나이가 12살이 되자 금산사(金山寺)405) 숭제법사(崇濟法師)406)의 문하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배우기를 청했다.407) 그의 스승이 일찍이 그에게 말했

다. “내가 일찍이 당나라408)에 들어가 선도(善道)409) 삼장(三藏)410)에게 가

르침을 받고 그 후에 오대산(五臺山)411)에 들어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현신을 감응하고 오계(五戒)412)를 받았다.” 진표가 아뢰기를, “부지런히 수

행하면 얼마 동안이면 계를 받게 됩니까?” 하니, 숭제가 말하기를 “정성이

지극하다면 1년 안에라도 된다.”고 하였다.

진표는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불사의

암(不思議庵)413)에 와서 머물러 삼업(三業)414)을 수련했으며 몸을 던져서

수행하는 참회법으로 계를 얻었다.415) 처음은 7일 밤을 기한으로 하여 오

체(五體)416)를 바위에 부딪쳐 무릎과 팔이 다 부서지고 피가 바위 벼랑에

비오듯 흘렀으나 성인의 감응이 없는 것 같았으므로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

고 다시 7일을 기약하였다. 14일이 지나자 지장보살(地藏菩薩)417)이 현신

하여 계율을 받았다. 이 때가 바로 개원(開元)418) 28년(740)419) 경진년 3월

15일 진시(辰時)420)였으니 (진표의) 나이는 23살이었다.421)

그러나 뜻이 미륵(彌勒)422)에게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할 수 없어 바로

영산사(靈山寺)[일명 변산(邊山) 또는 능가산(楞伽山)] 로 옮겨 다시 처음

과 같이 부지런하고 용감하게 수행하였다. 과연 미륵이 감응하여『점찰경

(占察經)』423) 2권〈이 경은 진(陳)424) 나라와 수(隋)425) 나라 무렵에 외국에서 번역된

것이니 여기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미륵이 이 경을 주었을 뿐이다.〉과 증과간자(證

果簡子)426) 189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그 가운데 제8 간자는 새로 얻은 묘

계(妙戒)를 말한 것이요, 제9 간자는 구족계(具足戒)427)를 더 얻은 것을 이

름이다. 이 두 간자는 바로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沈檀

木)428)으로 만든 것이니 모든 번뇌에 비유한 것이다. 너는 이것으로써 세상

에 법을 전하고 남을 구제하는 뗏목429)으로 삼아라.”430)

釋眞表 完山州〈今全州牧〉, 萬頃縣人〈或作豆乃山縣, 或作都那山縣, 今

萬頃, 古名豆乃山縣也. 贊寧傳, 釋表之鄕里云金山縣人, 以寺名及縣名混之

也.〉. 父曰眞乃末, 母吉寶娘, 姓井氏. 年至十二歲, 投金山寺崇

濟法師講下, 落彩請業. 其師嘗謂曰,“ 吾曾入唐, 受業於善道

三藏, 然後入五臺, 感文殊菩薩現受五戒.” 表啓曰, “勤修幾何

得戒耶.” 濟曰 “精至則不過一年.” 表聞師之言, 遍遊名岳, 止

錫仙溪山不思議庵, 該鍊三業, 以亡身懺悔得戒. 初以七宵爲

期, 五輪撲石, 膝腕俱碎, 雨血嵓崖. 若無聖應, 決志捐捨, 更

期七日. 二七日終, 見地藏菩薩, 現受淨戒. 卽開元二十八年

庚辰三月十五日辰時也. 時齡二十餘三矣. 然志存慈氏, 故不

敢中止, 乃移靈山寺〈一名邊山 又楞伽山〉, 又懃勇如初. 果感彌勒

現授占察經兩卷〈此經乃陳隋間外國所譯, 非今始出也, 慈氏以經授之耳.〉,

幷證果簡子一百八十九介. 謂曰 “於中第八簡子, 喩新得妙戒,

第九簡子, 喩增得具戒. 斯二簡子, 是我手指骨, 餘皆沈檀木

造, 喩諸煩惱. 汝以此傳法於世, 作濟人津筏.”

398) 간자(簡子):대나 나무로 만들어 문자를 기록하는데 쓰는 패쪽.

399)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라북도 전주(全州). 백제 때 완산으로 불리다가 555

에 완산주가 설치되었다. 백제가 패망한 뒤 신문왕 때인 685년에 완산주를 설치

하였고, 경덕왕 15년에 전주로 고쳤다. 고려 때는 전주와 완산으로 번갈아 불렸

으나 조선에 들어와 줄곧 전주로 불렸다.

400) 만경현(萬頃縣):백제 때 두내산현으로 신라 경덕왕 때 만경현으로 고치고 김제

군에 예속시켰다.

401)『송고승전(宋高僧傳)』:송의 찬녕(贊寧)이 982년에 편찬한 고승전. 당 정관 연간

부터 송 988년까지 이르는 343년간의 고승의 전기를 엮은 것으로 정전 531인에

부전 125인의 전기를 역경(譯經)·의해(義解)·습선(習禪)·명률(明律)·호법(護

法)·감통(感通)·유신(遺身)·독송(讀誦)·흥복(興福)·잡과(雜科)의 10개로 분

류하여 30권에 수록하였다. 권14 명률편(明律篇)에 실려 있는「진표전(眞表傳)」

은 그의 출가시기를 당 개원(開元) 연간(713~742)이라 하고, 사냥과 관련된 자

세한 출가 동기를 전하고 있다.

402)『송고승전(宋高僧傳)』권14 진표전(眞表傳)에 “진표스님은 백제 사람이다. 집은

금산에 있다(釋眞表者, 百濟人也. 家在金山.).” (大 50 793c)고 하였다. 금산현은 전

북 김제군 금산면이다.

403) 고려 신종(神宗) 2년(1199)에 발연사(鉢淵寺)의 주지인 영잠(瑩岑)이 지어서 세

운「관동 풍악산 발연수 개창조 진표율사 진신골장 입석비명(關東楓岳山鉢淵藪

開刱祖眞表律師眞身骨藏立石碑銘)」에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

(大井里)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이 글은『삼국유사(三國遺事)』의해(義解) 제5에

「진표전간」 다음 항목으로「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라는 제

목으로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404) 바로 이어서 진표의 성이 정씨(井氏)라고 하였으니 진표의 부친은 성명이 정진

(井眞)이 된다. 내말(乃末)은 신라 17관등의 제11관등인 나마(奈麻)의 다른 표기

이다. 진표는 백제인이니 통일 후 신라에서 구백제인을 포용하기 위해 수여한

관등일 것이다.

405) 금산사(金山寺):전라북도 김제군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신라 혜공왕 때인

766년에 진표가 미륵의 수기를 받고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에 불탄 것을 1626

년에 재건하였다. 주 법당인 미륵전에는 미륵 장륙삼존상이 있으며, 석련대(石

蓮臺) 등 신라시대의 유물이 남아 있다.

406) 숭제법사(崇濟法師):「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순제(順濟)라고 나온다.

407)「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진표는 스승인 순제에게 출가하여 사미계법

(沙彌戒法)을 받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1권과『점찰선악업보경(占察

善惡業報經)』2권을 받았다고 하였다.

408) 당(唐):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에 멸망한 중국의 왕조. 290년간 20

대의 황제가 왕위를 이어 지속되었다. 남북조의 오랜 분열시대를 통일한 수나

라가 39여 년만에 멸망하고 뒤이은 왕조로서 세계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중국의

성세를 이루었다. 당이 이룩한 문물과 제도는 동아시아 문화의 전형이 되어 한

국과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409) 선도(善道):선도(善導, 613~681)를 말한다. 당(唐) 나라 정토교(淨土敎)의 제

3조로서 스승 도작(道綽)과 함께 정토교를 크게 일으켰다. 현중사에서 도작에

게『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배우고 종남산(終南山) 오진사(悟眞寺)에 주석

하였다. 일생 동안『아미타경(阿彌陀經)』을 사경한 것이 10만여 권, 정토변상도

(淨土變相圖)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3백여 포(鋪)였다고 한다. 저서로『관경소』,

『법사찬』등이 있다. 그의 승탑이 서안 교외 향적사(香積寺)에 세워져 있다.

410) 삼장(三藏):경(經)·율(律)·론(論)등 불교 경전 전체를 말한다. 이에 모두 통달

한 고승을 삼장법사라고 부른다.

411) 오대산(五臺山):중국 산서성(山西省) 흔주시(忻州市) 오대현(五臺縣)에 있는 오

대산을 말한다.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가 높이 솟았는데 뾰족하지 않고 평평하

여 오대라고 이름하였고, 높고 서늘하여 청량산이라고 불렀는데,『화엄경』보살

주처품(菩薩住處品)에 동북방에 청량산(淸涼山)이 있고 여기에 문수보살이 상

주한다고 한 구절에 따라 문수보살이 거처하는 성지로 신앙되었다. 중국 불교

사상 사대영산(四大靈山)의 하나이다. 오대 중에서도 가장 높은 북대가 가장 손

꼽히는 기도처이다. 후한 때부터 산악숭배신앙의 성지로 여겨졌으며, 북위 때

이후 불교 성지로서 이름을 떨쳐 화엄경을 연구하는 이들이 오대산에 들어가

수행하였다. 8세기 후반에 불공(不空)이 금각사를 창건하여 오대산을 밀교의 성

지로 다듬었고, 이어 화엄종의 징관(澄觀)이 대화엄사에서 활동하며 오대산을

화엄성지로 재확인하여 이후 청대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신앙의 중심지가 되어

한국과 일본의 승려들도 순례가 이어졌다.

412) 오계(五戒):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생명있는 것을 죽이지 말

라(不殺生), ②남이 주지 않은 것을 훔치지 말라(不偸盜), ③음행하지 말라(不邪

淫), ④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 ⑤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 이다.

413)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庵):지금의 전북 부안군 변산 일대로 추정되는

곳.『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산에 불사의방장(不思議方丈)이 있는데 진표가 살

던 곳이며 백척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방장에 있고 그 아래는 무시무시한

골짜기라 하였다.(권34 부안현 佛宇) 조선시대에 변산에 불사의암이 있다고 전

승되어 온 것을 확인해 주는 자료이다.

414) 삼업(三業):신(身)·구(口)·의(意)의 업, 즉 신체와 언어와 의지로 짓는 모든 업

을 말한다.

415)「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명산을 돌아다니다가 27살(760년)에 보안현

(保安縣)에 있는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思議房)에서 수행하여 미륵상 앞에서

계법을 구하였다. 3년이 되어도 수기를 얻지 못해 발분하여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기도 하고, 3·7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돌에 몸을 부딪치는 참회행을 한지

3일만에 손이 부러지자 7일째에 지장보살이 손을 다시 고쳐주고 가사와 발우를

주자 더욱 정진하였다. 3·7일만에 천안을 얻고 지장보살은 계본을, 미륵보살

은 9와 8의 두 간자를 주며 이는 자신의 손가락 뼈로서 시각과 본각을 상징하는

데 장차 도솔천에 태어나리라는 가르침을 받으니 이때가 762년 4월 27일이었다

한다. 이어 금산사를 창건하고 764년에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766년에 금당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740년과 차이가 있다.

416) 오체(五體):머리와 양 팔, 양 무릎을 말하는데, 모두 둥글므로 오륜(五輪)이라

고도 한다.

417) 지장보살(地藏菩薩): Ksitigarbha.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아 석존이 입멸한 후

미륵보살이 이 땅에 내려와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지옥을 포함한 육도의 중생이 모두 성불하기를 서원한 자비와 연민의 보살이

다.『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에 조용히 참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대지와 같고

고요하게 생각함이 깊은 것이 신비하게 감추고 있는 것과 같아 지장이라 한다

고 하였다.(安忍不動, 猶如大地. 靜慮深密, 猶如祕藏. 故稱地藏.) 지장보살은 과거

먼 옛날에 어나 나라의 왕이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온갖 악한 짓을 많이 하므

로 중생들의 죄를 모두 없애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성불

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내었다고 한다. 이 지장신앙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지

면서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그때서야 깨달음을 이루겠다(衆生度盡, 方證菩

提.)”거나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地獄未空, 誓不成

佛.)” 라는 말이 생겨났다.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지장보살은 『대방광십륜경(大

方廣十輪經)』에 따라 머리를 깎은 승려의 형상으로 만들어 모신다. 대체로 왼손

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에는 육도를 상징하는 석장(錫杖)을 들고 있다.

418) 개원(開元):당(唐) 현종(玄宗)의 연호. 713~741년.

419) 신라 효성왕(孝成王) 4년.

420) 진시(辰時):오전 7시~9시.

421) 이에 따르면 진표의 생년은 718년이다. 그런데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따르면

734년이 되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

422) 미륵(彌勒): Maitreya. 미륵은 브라만 집안에서 출생하여 뒤에 부처님의 제자

가 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였다. 보살로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며 도

솔천(兜率天)에 살고 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여러 중생을 제도하고자 처음 발

심할 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이로 인해 자씨(慈氏)보살로 부른다. 석존

께서 미륵에게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수명이 4천세(인간의 시간으로

는 약 57억 6천만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였다. 이런 경설에 따라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이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 신앙과, 미륵이 부처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신앙의 두 가지 신앙이 있게 된다. 미륵

신앙은『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미륵성불경(彌

勒成佛經)』의 세 경전이 중심이 된다.『해심밀경』을 소의경전으로 삼는 법상종

에서는 이 경의 설주인 미륵을 금당에 봉안하고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423) 점찰경(占察經):『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2권. 수나라 보리등(菩提燈)

이 번역. 선악의 업보(業報)를 점찰하고 아울러 대승의 실천을 설한 경전인데,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보고 있다.

424) 진(陳):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조에 속했던 나라로 남조 최후의 왕조(557~589).

진패선(陳覇先, 武帝 557~559)이 557년 양(梁)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였다. 선

제(宣帝, 568~582) 때에는 북제(北齊)를 공략하여 북쪽으로 진출했으나 다음 후

주(後主, 582~589)는 측근을 중용하고 무장을 억압하여 전차 국력이 쇠퇴해지고

마침내 589년에 수(隋)나라에게 멸망하였다.

425) 수(隋, 581~618):중국 남북조를 통일하여 세운 나라. 북주의 황실과 인척이던

양견(楊堅, 文帝 재위 581~604)이 581년에 북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 왕조를 열

고, 589년에 남조 진을 멸망시켜 300년간의 분열을 끝내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문제의 둘째 아들인 양제(煬帝, 재위 604~617)가 604년에 부왕을 시해하고 왕위

에 올랐다.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고 돌궐을 쳐 판도를 넓혔으나 고

구려를 침공하려다 실패하는 등 내정의 실패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618년

에 멸망하였다.

426) 증과간자(證果簡子):증과(證果)는 수행한 결과로 얻는 과보(果報)로 최종의 증

과는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증과간자는 이러한 과보를 보여주는 간자이다.

427) 구족계(具足戒):출가자가 받아야할 계.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이다.

428) 침단목(沈檀木):침목과 단목을 함께 부르는 말로, 모두 향나무를 말한다.

429) 진벌(津筏)은 나루와 뗏목으로 물을 건너는 수단을 말하는데, 이 세상을 건너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불법을 비유해 말한다.

430)「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진표가 3・7일을 기약하고 수행하던 중 7일이

되던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석장을 흔들며 와서 가사와 발우를 주었다. 그리고

만 3·7일이 되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나타나 지장은 계본(戒本)을 주고, 미

륵은 2개의 패를 주면서 “이 두 간자는 바로 내 손가락 뼈이니 이것은 시각(始

覺)·본각(本覺)의 두가지 깨달음을 비유한 것이다. 또 아홉째는 법이(法爾)요

여덟째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로써 마땅히 과보를 알 것이다. 너

는 지금의 몸을 버리고 대국왕의 몸을 받아 후에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수기하였다고 한다.

진표가 미륵의 기별431)을 받고 금산사에 와서 머무르면서 해마다 법단

(法壇)을 열고 널리 법을 베푸니 단석의 정결하고 엄숙함이 말세(末世)에

서는 아직 없는 일이었다. 교화가 두루 미쳐 여러 곳을 다니면서 아슬라

주(阿瑟羅州)432)에 이르자 섬과 섬 사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물 속으로 맞아 들여 법을 듣고 계를 받았으니 이때가 천보(天寶)433) 11년

(752)434) 임진년 2월 보름날이다. 어떤 책에는 원화(元和)435) 6년(811)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원화는 헌덕왕대(憲德王代)이다436).〈성덕왕(聖德王)437)

로부터 거의 70년 쯤 된다.〉

경덕왕(景德王)438)이 이 말을 듣고 궁중439)으로 맞아들여 보살계440)

받고 조(租)441) 7만 7천석을 내렸으며 왕후와 인척들442)도 모두 계품(戒

品)443)을 받고 비단 5백단과 황금 50량을 보시하였다. 이것을 모두 받아서

여러 절에 나누어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그의 유골의 석함은 지금 발연사

(鉢淵寺)444)에 있으니445) 곧 바다의 무리들을 위해 계를 베풀던 곳이었다.

법을 얻은 수제자는 영심(永深)446)·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

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인데 모두 산문(山門)의 조사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의 간자를 이어받아 속리산에 살며 법통을 이은 제자

가 되었는데, 단을 만드는 법이『점찰경』의 육륜법(六輪法)447)과는 조금 다

르지만 산중에 전하는 본래 법규와 같이 수행하였다.

表旣受聖莂, 來住金山, 每歲開壇, 恢張法施, 壇席精嚴, 末季

未之有也. 風化旣周, 遊涉到阿瑟羅州. 島嶼間魚鼇成橋, 迎入

水中, 講法受戒, 卽天寶十一載壬辰二月望日也. 或本云元和

六年, 誤矣. 元和在憲德王代〈去聖德幾七十年矣〉. 景德王聞之,

迎入宮, 受菩薩戒, 嚫租七萬七千石. 椒庭列岳, 皆受戒品,

施絹五百端, 黃金五十兩. 皆容受之, 分施諸山, 廣興佛事. 其

骨石今在鉢淵寺, 卽爲海族演戒之地. 得法之袖領, 曰永深, 寶

宗, 信芳, 體珍, 珍海, 眞善, 釋忠等, 皆爲山門祖. 深則眞傳簡

子, 住俗離山, 爲克家子, 作壇之法, 與占察六輪稍異, 修如山

中所傳本規.

431) 성별(聖莂)은 부처가 제자에게 장차 부처가 될 것임을 기약하여 주는 예언을 말

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미륵의 기별(記莂) 곧 수기(授記)를 가리킨다.

432)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강원도 강릉(江陵).「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는 아

슬라주 교화에 앞서 금산에서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다가 동구의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해 두고 명주(溟州, 강릉)로 갔다고 하였다. 본래 고구려 하서량(河

西良)을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 명주(溟州)로 고쳤

다. 고려 때는 하서 또는 명주로 불리다가 충렬왕 때 강릉으로 고쳤다.

433) 천보(天寶):당(唐) 나라 현종(玄宗)의 연호. 742~756년.

434) 신라 경덕왕 11년.

435) 원화(元和):당(唐) 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806~820년.

436) 헌덕왕(憲德王)의 재위기간은 809~826년. 신라 제41대왕.

437) 성덕왕(聖德王)의 재위기간은 702~737년. 신라 제33대왕.

438)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성은 김(金), 이름은 헌영(憲英).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고, 효성왕(孝成王)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소덕태후(炤

德太后)이다. 비(妃)는 삼모부인(三毛夫人) 김씨(金氏)와 경수왕후(景垂王后) 김

씨(金氏)이다.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化政策)을 근간으로 하는 제도개혁

을 단행하였다. 757년에 녹읍을 부활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

현(縣)을 정비하여 지명을 한식(漢式)으로 고쳤으며 이어 관청과 관직의 이름을

한식으로 고쳤다. 불교의 중흥에도 노력하여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

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 石窟庵) 및 굴불사(掘佛寺) 등을 창건하였고, 각

사찰의 수축과 탑・불상 등 불교 조영물의 제작에 힘썼다.

439) 궁달(宮闥)은 궁중의 작은 문을 뜻하는 것으로서, 궁중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440) 보살계(菩薩戒):대승의 보살들이 지키는 계율로서 십중(十重)·사십팔경계

(四十八輕戒)를 설한『범망경(梵網經)』 율장품(律藏品)이 근거가 된다. 이는 종래

의 교단이 출가자를 위한 비구계와 재가자를 위한 팔관계(八關戒)를 둔 것과 달

리 출가와 재가를 포괄하는 새로운 대승의 계율을 제시한 것이다. 중국을 비롯

한 동아시아의 불교계에서는 출가자를 위한 계율로서는 종래의 비구계를 사용

하면서『범망경』의 보살계를 재가신자를 위한 계율로 하였다. 보살계 10중계는

살생하지 말라(不殺戒), 주지않은 것을 훔치지 말라(不偸盜戒), 음행하지 말라(不

婬戒),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戒), 술을 사지 말라(不酤酒戒), 남의 잘못을 말하

지 말라(不說過戒),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不自讚毁他戒), 아끼자

말라(不慳戒), 성내지 말라(不瞋戒), 삼보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戒) 이다.

441) 조(租):나라에서 거두는 세금의 한가지.

442) 초정(椒庭)은 산초나무를 바른 황후의 벽을 말하는 것으로 외척을 뜻하며, 열악(列

岳)은 아내의 백(伯)·숙(叔)·부모를 가리키므로 초정은 왕의 인척들을 말한다.

443) 계품(戒品):계의 품류(品類)와 종별. 5계·6계·10선계 등이 있다.

444) 발연사(鉢淵寺):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용계리 금강산에 있던 절. 진표가 창

건하여 고려 때까지 제자들이 명맥을 이어가 1199년에 진표를 기리는 비인 「관

동풍악발연수석기」를 세웠다.

445)「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진표는 명주 해변에서 물고기 등에게 계법을

주고 나서 고성군(高城郡)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수(鉢淵藪)를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어 7년을 지냈으며 명주 사람들이 기근에 허덕이자 구

원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불사의방과 진문대덕방(眞門大德房) 등에서

지냈는데 속리산의 영심(永深)과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찾아와 용맹정진

하며 계법을 청하자 가르침을 전하고 경전과 간자를 주며 길상초가 있던 곳에

길상사를 창건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시 아버지와 함께 발연사로 가서 도를

닦으며 효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이후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죽으니 제

자들이 그 시체를 옮기지 않고 공양하여 해골이 되어 흩어진 다음에 흙으로 덮

고 무덤으로 만들었는데 무덤에 소나무가 자라고 예경하는 사람들이 와서 유

골을 줍기도 하였기 때문에 유골이 모두 없어질까 염려하여 사주(寺主) 영잠(瑩

岑)이 1197년에 뼈를 주워 모시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였다. .

446) 영심(永深):신라의 승려로 진표의 제자.「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 의하면 속리

산에 있다가 융종(融宗)·불타(佛陁) 등과 함께 진표에게 가서 참회행을 보여주

어 진표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진표로부터『점찰선악업보경』과 간자 등을 받아

속리산으로 돌아와 길상사(吉祥寺)를 짓고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447) 육륜법(六輪法):『점찰선악업보경』의 제3륜상(第三輪相)에 의해 3세(三世)의 과

보(果報)를 점쳐서 189종의 차별상을 나타내는 법이다.

『당고승전(唐高僧傳)』448)을 살펴보면 이렇게 말하였다. “개황(開皇) 13년

(593)에 광주(廣州)449)의 어떤 스님이 참법(懺法)450)을 행하는데 가죽으로

쪽지 두 장을 만들어 선·악 두 글자를 써서 사람들에게 이것을 던지게 해

서 선을 얻으면 길하다 했다. 또 자박참법(自撲懺法)451)을 행하여 지은 죄

가 없어지게 한다고 하여 남녀가 함께 모여 요망스럽게 그 법을 받아들여

비밀히 행하였다. 청주(靑州)452)에서도 이 소문을 듣고 같이 행하였다. 관

사(官司)가 조사해보고 이를 요망하다고 했더니 그들은 말했다. ‘이 탑참

법(搭懺法)453)은『점찰경』에 따른 것이며 박참법도 여러 경전에「오체투지

(五體投地)하기를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한다」454)고 한 것에 의한

것이다.’ 그 때 이 사실을 아뢰니 (황제는) 내사시랑455) 이원찬(李元撰)456)

을 시켜 대흥사(大興寺)457)에 가서 여러 대덕에게 물었다. 대사문인 법경

(法經)458)·언종(彦琮)459) 등이 대답하기를,‘『점찰경』은 현재 두 권으로 되

어 있는데 첫머리에 보리등(菩提燈)이 외국에서 번역한 글이라고 쓰여 있

으나 근자에 나온 것 같습니다. 또한 옮겨서 전하는 것도 있는데 여러 기록

을 조사해 보아도 바른 이름과 번역한 사람이나 시기나 장소가 모두 없으

며 탑참은 여러 경과도 다르므로 따라서 행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칙명으로 이를 금지시켰다.”460)

이제 이것을 논평한다. 청주거사(靑州居士) 등의 탑참 등의 사건은 마치

큰 선비가 문자로 무덤을 파헤치는 것461)과 같으니 가히 범을 그리다가 이

루지 못하고 개 모양을 만든 것462)과 같다. 부처님이 예방한 것이 바로 이

런 것 때문이었다. 만약『점찰경』을 번역한 사람과 시기와 장소가 없다 하

여 의심스럽다고 한다면 이야말로 삼을 취하고 금을 버리는 것이다.463)

냐하면 그 경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단(悉壇)464)이 깊고 빈틈없어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고 게으른 사람을 격동케 함이 이 경전만한 것이 없다. 그러

므로 이름을 대승참(大乘懺)465)이라 하였으며 또 육근취(六根聚)466) 가운

데서 나왔다고도 한다.『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467)』과『정원석교록(貞元

釋敎錄)』468)중에는 정장(正藏)469)에 편입되어 있으니 비록 성종(性宗)470)

은 아니지만 상교(相敎)471)의 대승(大乘)으로는 또한 뛰어난 셈이다. 어찌

탑참·박참의 두 참법과 함께 말하겠는가?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472)에서 “부처가 장자(長者)473)의 아들 빈야다

라(邠若多羅)474)에게 일렀다. ‘네가 7일 낮 7일 밤 동안 너의 지난 죄를 뉘

우쳐 모두 깨끗이 할 수 있겠느냐?’ 빈야다라가 가르침을 받들어 밤낮으로

정성껏 하여 5일째 되는 날 저녁이 되자 그 방안에 여러가지 물건이 비오

듯 내려 수건·복두·총채·빗자루·칼·송곳·도끼와 같은 것이 그의 눈 앞

에 떨어졌다. 빈야다라는 기뻐하며 부처에게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말씀하

셨다. ‘이것은 티끌 세상을 벗어날 상이니, 베고 터는 물건들이다’475)라고

한것과 같다. 이에 의거한다면『점찰경』에서 윤(輪)을 던져 상(相)을 얻는

476)과 어찌 다르겠는가? 이에 진표가 참회를 일으켜 간자를 얻고, 법을

듣고, 부처를 본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경이 거짓이요

헛된 것이라면 미륵이 어째서 친히 진표스님에게 전해 주었겠는가? 또 이

경을 금해야 한다면 『사리불문경』도 또한 금할 것인가? 언종(彦琮)의 무리

는 금을 훔칠 때 (금만 보고) 사람은 보지 못했다477)고 할 수 있으니 독자들

은 자세히 살필 일이다.

찬한다.

말세에 나타나 몽매한 사람 깨우치니

영산(靈山) 선계(仙溪)에서 감응하여 통했다.

정성으로 탑참(搭懺)만 전했다 하지 마라

동해에 다리 놓은 어룡도 감화했도다.

按唐僧傳云,“ 開皇十三年, 廣州有僧行懺法, 以皮作帖子二

枚, 書善惡兩字, 令人擲之, 得善者吉. 又行自撲懺法, 以爲滅

罪. 而男女合匝, 妄承密行. 靑州接響同行, 官司撿察, 謂是妖

妄, 彼云,‘ 此搭懺法依占察經, 撲懺法依諸經中,「 五體投地如

大山崩」’ 時以奏聞, 乃勑內史侍郞李元撰, 就大興寺, 問諸大

德, 有大沙門法經彦琮等對曰, ‘占察經見有兩卷, 首題菩提燈

在外國譯文 似近代所出 亦有寫而傳者 撿勘群錄, 竝無正名譯

人時處, 搭懺與衆經復異, 不可依行.’ 因勑禁之.”

今試論之, 靑州居士等搭懺等事, 如大儒以詩書發塚, 可謂畵

虎不成, 類狗者矣. 佛所預防, 正爲此爾. 若曰, 占察經無譯人

時處, 爲可疑也. 是亦擔麻棄金也. 何則 詳彼經文, 乃悉壇深

密, 洗滌穢瑕, 激昻懶夫者 莫如玆典 故亦名大乘懺. 又云 出

六根聚中. 開元貞元二釋敎錄中, 編入正藏, 雖外乎性宗, 其相

敎大乘, 殆亦優矣. 豈與搭撲二懺, 同日而語哉?

如舍利佛問經, “佛告長者子邠若多羅曰, ‘汝可七日七夜悔

汝先罪, 皆使淸淨?’ 多羅奉敎, 日夜懇惻, 至第五夕, 於其室

中, 雨種種物, 若巾若帊若拂箒若刀錐斧等 墮其目前, 多羅歡

善, 問於佛. 佛言, ‘是離塵之相, 割拂之物也.’” 據此, 則與占

察經擲輪得相之事, 奚以異哉? 乃知表公翹懺得簡, 聞法見佛,

可謂不誣. 况此經若僞妄, 則慈氏何以親授表師? 又此經如可

禁, 舍利問經亦可禁乎? 琮輩可謂攫金不見人, 讀者詳焉.

讚曰 現身澆季激慵聾, 靈岳仙溪感應通. 莫謂翹懃傳搭懺, 作

橋東海化魚龍.

448) 당승전(唐僧傳)은『당고승전(唐高僧傳)』곧『속고승전(續高僧傳)』을 말한다.『속

고승전』은 당(唐) 정관 19년(645)에 도선(道宣, 596~667)이 찬술한 것으로 『고승

전(高僧傳)』곧『양고승전(梁高僧傳)』에 수록된 이후의 남북조에서 초당에 이르

는 승려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책으로 실제로는 665년까지 증보된 것으로 생각

된다. 모두 30권에 10개 항목으로 본전(本傳) 414인, 부전(附傳) 201인의 전기를

엮었다.

449) 광주(廣州):중국 광동성(廣東省) 광주.

450) 참법(懺法):참회 수행하는 법.

451) 자박참법(自撲懺法):자신의 몸을 부딪히는 등 고행을 행하고 참회하는 수행법

을 말한다.『당고승전(大50 p.435c29)에는 작가법(自撲法)이라 하였다.』

452) 청주(靑州):중국 산동성(山東省) 유방시(濰坊市) 청주시(靑州市). 산동반도 안

쪽에 위치한 도시이다.

453) 탑참법(搭懺法):글자를 던져 점쳐서 참회하는 수행법.

454)『염불삼매해경』(大13 p.796a 15~16)이나『현우경』(권1 大4 p.349c26~27)에 “몸을

땅에 던지기를 큰 산이 무너지듯 한다.” (以身投地, 如大山崩.)이라 하고, 『관불삼

매해경』(권9 大15 p.689a3~4)에는 “큰 산이 무너지듯 오체를 땅에 던진다.” (如大

山崩, 五體投地.)라고 하였다.

455) 내사시랑(內史侍郞):황제가 내리는 명령의 초고를 관장하는 관직명. 내사성의

장관 다음의 차관직이다. 당나라 초에 내사시랑이라 했다가 후에는 중서시랑

(中書侍郞)이라고 했다.

456)『당고승전(大50 p.436a4)에는 이원조(李元操)로 되어 있다.

457) 대흥사(大興寺):수와 당의 수도였던 중국 장안(長安)에 있던 사찰인 대흥선사

(大興善寺)를 말한다. 수(隋) 개황(開皇) 2년(582) 문제(文帝)가 척점사(陟岾寺)를

이건하여 세운 웅장한 사찰로 수·당대에 많은 승려들이 운집하여 수학하였다.

458) 법경(法經):수(隋) 나라 때의 승려. 594년 경전목록인 『중경목록(衆經目錄)』(다

른 목록과 구별하기 위해 찬자의 이름을 따서 법경록(法經錄)이라고도 함)을 찬술하

였고, 언종(彦琮)과 함께 번경대덕(翻經大德)의 임무를 맡았다.

459) 언종(彦琮, 557~610):수(隋) 나라 때의 승려. 592년 대흥선사(大興善寺)에 들어

가 번경(翻經)에 종사하였다. 번역한 경전은 23부 100여권이며, 602년『법경록

(法經錄)』을 본떠 경전 목록인『수중경목록(隋衆經目錄)』(언종록(彦琮錄) 또는

인수록(仁壽錄)이라고도 한다)을 찬술하였다.

460) 이 내용은『속고승전(續高僧傳)』권2 달마급다(達摩笈多) 조에 실려 있다.『삼국

유사(三國遺事)』의 인용문은 몇 글자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일치한다.

461) 문자로 무덤을 파해지는 것:『장자(莊子)』 외물편(外物篇)에 “유자(儒者)가 문자

로 무덤을 파헤친다(儒以詩禮發塚)”는 말이 나오는데, 말세의 유학자가 학문을

악용하여 무덤을 파는 악행까지 행한다고 풍자한 것이다.

462) 화호류구(畵虎類狗)의 고사로『후한서(後漢書)』마원전(馬援傳)에 나온다. 뛰어

난 사람의 호걸풍을 본떠 경박함에 빠진다는 뜻이다.

463) 삼을 취하고 금을 버리다(擔麻棄金)는『중아함경(中阿含經)』권16에 있는 고사

로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한다. 가난한 사람 둘이 여행을 하다가 길 옆에 마가 무

성한 것을 보고 함께 지고 갔는데, 또 가니 은이 있고 다시 가니 금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그 때마다 마를 은으로 바꾸고 은을 금으로 바꾸어 지고 갔으나 다른 한

사람은 처음에 진 것을 고집하여 마를 계속 지고 갔다.

464) 실단(悉壇): siddhānta. 성취·종(宗)·이(理) 등으로 의역한다. 부처가 중생을

교화한 가르침을 4개 범주로 나누어 4실단이라 하는데, 세계·각각위인(各各爲

人)·대치(對治)·제일의(第一義)가 그것이다.

465) 대승참(大乘懺):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에 의한 참법(懺法).

466) 육근취(六根聚):고제(苦諦)를 가리킨다. 육근은 안·이·비·설·신·의의 신체

의 여섯 감각 기관을 말하고 취(聚)란 모여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육근에 의해

고통이 생겨 모여 있음을 말한다.

467)『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당(唐) 나라 현종 개원(開元) 18년(730)에 지승(智

昇)이 편찬한 20권의 불서(佛書) 목록으로『개원록(開元錄)』『지승록(智昇錄)』

이라고도 한다. 전반부 10권은「총괄군경록(總括群經錄)」으로 불교가 중국에 들

어온 67년부터 730년까지 664년 동안 176명의 역경승들이 번역한 대소승 경·

율·론, 합계 2278종 7046권의 역경을 시대별·번역자별로 열거, 수록하였다. 후

반부 10권은「별분승장록(別分乘藏錄)」으로서, 이중 앞부분에는 경을 위주로 7

가지로 분류하여 수록하고, 끝부분 2권에는 대·소승의 입장목록(入藏目錄)으

로서 대장경에 수록된 경전 총계 1076부(部) 5048권의 목록이다. 이를 기준으로

“일체경 5천권” 등의 말이 생겨났으며, 역대 대장경의 조판은 대체로 이 목록에

따라 간행되었다. 지승은 대장경 목록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천자문(千字文) 순

서에 따라 차례를 매겼다.

468)『정원석교록(貞元釋敎錄)』:당(唐) 나라 덕종 정원(貞元) 10년(794) 원조(圓照)

가 편찬한 30권의 불서 목록으로『정원록(貞元錄)』이라고도한다.『개원록』에 더

하여 경론과 염송법(念誦法) 193권, 경론 소의(疏義) 64권, 새로 모은 고금제령

비표기(古今制令碑表記) 86권, 합계 343권과 이 책의 목록 2권을 더하여 345권을

수록하였다.

469) 정장(正藏):대장경에 정식 수록이 인정된 인도에서 저술된 경전.

470) 성종(性宗):법성종(法性宗)을 말한다. 일체 제법은 진여법성(眞如法性)에서 생

겨났다는 것에서 법성(法性)에 대한 추구를 종지(宗旨)로 하며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등이 이에 해당된다.

471) 상교(相敎):법상종(法相宗)을 말한다. 식(識)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제법의 현

상을 치밀하게 분류 고찰하고 진리의 차별상을 중시하므로 성종(性宗)에 대하

여 상종(相宗)이라고 불렸다.

472)『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은『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을 말한다. Śāriputraparipr

cchā. 1권으로 동진(東晉) 때의 번역되었으나 역자는 알 수 없다. 소승율부

에 속하는 대중부 전승의 경전으로 사리불(舍利弗)의 질문에 부처가 답하는 형

식으로 되어 있다. 계율 전승의 차례, 계율의 분파, 의발과 음식, 상법시대의 불

교, 빈야다라의 수계, 정식(淨食)과 부정식, 부처 친척의 출가, 부모와 스승의 은

혜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473) 장자(長者):가문이 좋고 재력과 덕을 갖춘 사람.

474)『사리불문경』(大24 p.902b4~5)에는 분야다라(分若多羅).

475)『사리불문경』(大24 p.902b4~16)의 내용을 중간 중간에 인용한 것. 약간의 글자

차이가 있다.

476) 윤(輪)을 던져 상(相)을 얻는다는 것은 선·악 두 글자가 새겨진 목륜(木輪)을 를

던져 나오는 대로 점쳐 참회 수행하는 탑참법을 말한다

477) 확금(攫金)은 남의 금을 훔칠 때 금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고사로

『열자(列子)』에 나온다.

승전과 돌 해골

[해제]

중국의 현수법장(賢首法藏)에게 화엄을 배워 신라에서 전파한 승전

이야기이다. 승전 자신의 생애 기술은 대부분이 빠져 있고 중국 유학과 화

엄 전수 사실을 집중적으로 실었다. 승전이 법장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

할 때 법장이 지엄에게서 동문 수학했던 선배 의상에게 서신과 함께 자신

의 저술을 보냈다. 여기에는 이때 가져온 저술 목록과 선물을 보내는 사연

이 적힌 서신 별폭을 모두 수록하고, 의상이 제자들에게 이 책을 강연하게

하였음을 말하였다. 법장이 보낸 서신 본문은 의상편에 실려 있다. 이 편은

승전의 법장 저술 전래에 이어서 징관의 신역『화엄경소』를 가져와 강연했

던 범수(梵修)의 이야기를 실음으로써 지속적으로 신라에 화엄이 전파된

뜻을 더하였다. 그리고 승전이 갈항사(葛項寺)에서 돌 해골에게 화엄을 강

의하고, 가귀(可歸)가 그 가르침을 계승하였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다른

편보다도 제목에 맞게 특정 사실만을 집중 편집한 『삼국유사』의 특성이 잘

드러난 항목이다.

[역주]

승전과 돌 해골

승전(勝詮)478) 스님은 그 출신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

국에 건너가 현수국사(賢首國師)479)의 강석에 나아가 현묘한 말씀을 받고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조예가 깊었다. 지혜가 뛰어나 은밀하고 세세한 것

을 찾아내고 심오한 것을 다 알아냈다. 인연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

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처음에 현수는 의상(義相)480)과 함께 공부하여

지엄(智儼)481)화상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학설에 대

하여 문의(文義)와 과목(科目)을 강연하고 기술하여 승전법사가 고향에 돌

아오는 편에 맡기니 의상도 이에 서신를 보냈다〈고 한다.〉

그 별지482)는 이렇다. “『탐현기(探玄記)』483) 20권인데 그중 2권은 미완성,

『교분기(敎分記)』484) 3권,『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485) 1권,『화엄범

어(華嚴梵語)』486) 1권,『기신론소(起信論疏)』487) 2권,『십이문론소(十二門論

疏)』488) 1권,『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489) 1권을 모두 승전법사가

베껴서 고향에 돌아갑니다. 전날에 신라 효충(孝忠)스님490)이 금 9푼을 보

내어 ‘이것은 상인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하오니 비록 서신은 받지 못했으

나 감사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제 서국(西國)491)의 군지(軍持)492)와 조관

(澡灌)493) 한 개씩을 보내어 작은 성의를 표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와서 서신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이 법장의 서신을 펴

보니 마치 스승 지엄의 가르침을 귀로 듣는 것만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

구 검토하여 문하 제자들에게 주어494) 이 글을 널리 강연하게 했다. 이 말

은 의상전에 있다.495)

이를 살펴보니 이 원융한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두루 퍼진 것은 실로 승

전스님의 공이다. 그 뒤 범수(梵修)496)스님이 있어서 멀리 당나라에 가서

새로 번역한 후분(後分)『화엄경(華嚴經)』497)에 대한 징관(澄觀)498)스님의

『화엄경소(華嚴經疏)』499)를 구해 돌아와 강연했다고 한다. 때는 정원500)

묘년(799)이었다. 이도 또한 불법을 구하여 널리 드날린 사람이라 하겠다.

승전스님은 상주(尙州)501) 영내의 개령군(開寧郡)502) 경계에 절을 짓고

돌 해골들을 관속으로 삼아『화엄경』503)을 강의했다. 신라의 사문 가귀(可

歸)가 자못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법등(法燈)을 계승하여504) 이에『심원장

(心源章)』505)을 저술하였다. 그 대략을 말하면, “승전법사는 돌 무리들을 거

느리고 논의하고 강연했으니 지금의 갈항사(葛項寺)506)이다. 그 돌 해골 80

여개는 지금까지 주지507)에게 전하고 있으니 자못 영험과 이적이 있다.”고

하였다. 그 밖의 사적은 비문에 모두 실려 있으며『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

實錄)』508)에 있는 것과 같다.

勝詮髑髏

釋勝詮, 未詳其所自也. 常附舶指中國, 詣賢首國師講下, 領受

玄言, 硏微積慮. 惠鑒超穎, 探賾索隱, 妙盡隅奧. 思欲赴感有

緣, 當還國里. 始賢首與義湘同學, 俱稟儼和尙慈訓. 首就於

師說, 演述義科, 因詮法師還鄕寄示, 湘仍寄書〈云云〉. 別幅云

“探玄記二十卷, 兩卷未成, 敎分記三卷, 玄義章等雜義一卷,

華嚴梵語一卷, 起信疏兩卷, 十二門疏一卷, 法界無差別論疏

一卷, 竝因勝詮法師抄寫還鄕. 頃新羅僧孝忠遺金九分云, ‘是

上人所寄’, 雖不得書, 頂荷無盡. 今附西國軍持澡灌一口, 用

表微誠, 幸願檢領. 謹宣.” 師旣還. 寄信于義湘. 湘乃目閱藏

文, 如耳聆儼訓. 探討數旬, 而授門弟子, 廣演斯文. 語在湘傳.

按此圓融之敎誨, 遍洽于靑丘者, 寔師之功也. 厥後有僧梵修,

遠適彼國, 求得新譯後分華嚴經, 觀師義疏, 言還流演. 時當貞

元己卯, 斯亦求法洪揚之流乎.

詮乃於尙州領內開寧郡境, 開創精廬, 以石髑髏爲官屬, 開講

華嚴. 新羅沙門可歸, 頗聰明識道理, 有傳燈之續, 乃撰心源

章. 其略云,“ 勝詮法師領石徒衆, 論議講演, 今葛項寺也. 其

髑髏八十餘枚, 至今爲綱司所傳, 頗有靈異.” 其他事迹具載碑

文, 如大覺國師實錄中.

478) 승전(勝詮):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에게 배우고 신라에 돌아와 화엄을 편

화엄종 승려.

479) 현수국사(賢首國師):중국 화엄종의 대성자 법장(法藏). 643~712. 지엄(智儼)에

게 의상과 함께 화엄을 배우고 측천무후의 후대를 받아 화엄사상을 집대성하였

으며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의 번역에도 참여하였다.『화엄경』을 해석한『탐현

기(探玄記)』를 비롯하여 화엄종의 체계를 세운『교분기(敎分記)』 외에『기신론

소(起信論疏)』,『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

疏)』,『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등의 많은 저서가 있다. 5-8 주345) 참조.

480) 의상(義相):625~702. 신라 화엄종의 개창자. 황복사에서 출가한 후 당에 유학

하여 지엄에게서 화엄을 배우고『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지어 일(一)과 다

(多)가 걸림 없이 거듭 전개되는 법계연기 사상을 정립하였다. 귀국한 후 부석

사를 비롯한 여러 절을 세우고 많은 제자들과 화엄사상을 연마하고 정진하며

화엄종을 펴 나갔다. 5-8 주309) 참조.

481) 지엄(智儼):602~668.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대사(至相大師) 또는 운화존

자(雲華尊者)로 불린다. 신라의 의상과 중국의 법장의 스승으로서 화엄종의 창

시자로 추앙되는 두순(杜順)을 따라 두순의 제자인 달(達)법사에게 배우고 법상

(法常)과 지정(智正)에게 교학을 연마하였다. 화엄경을 차례대로 해석한 『수현

기(搜玄記)』와 화엄사상의 요체를 담은『공목장(孔目章)』등을 지어 중국 화엄

종의 기반을 이루었다. 5-8 주322) 참조.

482) 법장(法藏)의 서신은「현수국사기해동서(賢首國師寄海東書)」라는 제목으로 전한

다. 韓4 p.635c4~636a13.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서신 원본은 일본 천리대(天理大)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삼국유사(三國遺事)』권4 의상전교(義湘傳敎)에는 서

신의 본문을 싣고, 이 승전촉루 항목에는 도서 목록인 별지를 나누어 실었다.

483) 탐현기(探玄記):『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탐현(探玄)』등으로 불리고 20

권이다.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당의 법장이 스승인 지엄의 『수현기(搜玄記)』

를 따라서 동진의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화엄경』의 대요를 해석한 것이

다. 10문(十門)으로 되어 있는데, 본격적인 해석인 수문해석(隨文解釋)에 앞서

교학의 연유와 차별, 종취(宗趣)와 제목의 해석, 번역 그리고 문의분제(文義分

齊)가 있다.

484)『교분기(敎分記)』:『화엄일승교분기(華嚴一乘敎分記)』.『화엄일승교의분제장

(華嚴一乘敎義分齊章)』,『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이라고도 하며 4권 혹은 3권

이다. 중국 화엄종을 완성한 당의 법장이 전체 교학을 소승교(小乘敎)·대승시

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의 5교와 아법구유

종(我法俱有宗)·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현통가실종

(現通假實宗)·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일체개공종

(一切皆空宗)·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원명구덕종

(圓明俱德宗)의 10종으로 나누어 체계화하고, 특히 원교 중에『법화경』은 동교

일승(同敎一乘)인데 비해『화엄경』은 별교일승(別敎一乘)임을 확실히 하여 화엄

의 우위를 확고히 하고 화엄종 형성의 바탕을 이루었다.

485)『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486)『화엄범어(華嚴梵語)』:『별번화엄경중범어(別翻華嚴經中梵語)』또는『화엄번범

어(華嚴翻梵語)』,『화엄범어급음의(華嚴梵語及音義)』라고도 한다.『화엄경』에 나

오는 산스크리트어를 해설한 책으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487)『기신론소(起信論疏)』:『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5권 혹은 3권이다. 당의

법장이 지은『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를 말한다.『대승기신론』이 여

래장연기 사상임을 밝힌 주석서로 이후의 주석서의 기본이 되었다.

488)『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십이문론종치의기(十二門論宗致義記)』2권이다. 당

의 법장이 용수(龍樹)가 지은『십이문론(十二門論)』을 인도 지광법사(智光論師)

의 삼시교판(三時敎判)을 받아들여 해석한 책이다.

489)『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대승법계무차별론소(大乘法界無差別論

疏)』 2권이다.『대승법계무차별론(大乘法界無差別論)』에 대해 당의 법장이 찬술

한 주석서이다.

490) 효충(孝忠):의상의 선불을 법장에게 전달한 신라 승려로 의상의 제자로 생각되

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91) 서국(西國):인도를 말함.

492) 군지(軍持): kundi, kundikā. 군지(君持) 또는 군치가(捃稚迦) 등으로 음역하고,

병(甁)·조병(澡甁)·수병(水甁) 등으로 의역한다. 범천이나 관음보살의 지물이

며 대승 비구가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할 물건의 하나이다. 물을 담아 가지고 다니

는 정병(淨甁) 이외에 여러 용도의 용기가 있으며, 도기나 청동 등으로 만든다.

493) 조관(澡灌):물을 담아 두는 주전자.

494) 의상은 제자인 진정(眞定)과 상원(相元), 양원(良圓), 표훈(表訓)을 불러 법장의

『탐현기』를 강의하게 하면서 “나를 넓히는 자는 장공이고, 나를 일으키는 자는

너희들이다.(博我者藏公 起我者爾輩)”고 하였다.(최치원, 『법장화상전(法藏和尙

傳)』)

495) 이 의상전은 신라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을 가

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구절은 현재 전하는 전적으로는 역시 최치원이 지

은『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의상전이라 하였

으므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부석존자전」에도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496) 범수(梵修):800년 전후하여 활동한 신라의 화엄 승려.

497) 후분(後分)『화엄경(華嚴經)』:『화엄경』은 세 차례 번역되었는데, 불타발타라(佛

馱跋陀羅)가 418~420년에 번역한 진본(晋本)이라 부르는 60권본, 실차난타(實

叉難陀)가 695년부터 699년까지 번역한 당본(唐本)으로 부르는 80권본, 그리고

계빈(罽賓) 등이 795년에 번역한 정원본(貞元本)이라 부르는 40권본이 있다. 여

기서는 마지막 40권본을 말한다.

498) 징관(澄觀) 738~839.:중국 화엄종의 제4조. 월주(越州) 산음인(山陰人)으로 속성

은 하후(夏侯)씨이고, 자는 대휴(大休)이며 호는 청량(淸涼)국사이다. 11세에 보

림사(寶林寺) 패(霈)선사에게 출가하여 계율과 삼론·기신·열반·화엄·천태·선

을 두루 익히고 유학에도 능통하였는데, 특히 법장의 화엄학에 열중하였다. 776

년에 오대산과 아미산을 순례하고 오대산 화엄사에서 방등참법(方等懺法)을 수

행하고 화엄종지를 펴서 이름을 드날렸다. 796년에 덕종의 부름으로 장안에 가

서 계빈삼장과 함께 (40)『화엄경』을 번역하고 종남산 초당사(草堂寺)에서 이 신

경의 소를 지었다. 덕종으로부터 청량국사의 호를 받고 순종과 헌종도 국사로

봉하였다. 3조인 법장의 직제자는 아니나 법장의 사상을 계승하여 4법계론을 완

성하고 선종의 발흥에 대응하여 화엄사상을 발전, 대성시켰다.『화엄경소(華嚴

經疏)』60권,『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90권,『화엄경강요(華嚴經綱要)』3권,『오온

관(五蘊觀)』,『삼성원융관문(三聖圓融觀門)』등 30여종의 저술이 있다. 제자로는

종밀(宗密)을 비롯하여 승예(僧叡)·법인(法印)·적광(寂光) 등 백 여 명이 있다.

499) 의소(義疏):징관(澄觀)의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를 말한다. 화

엄대소(華嚴大疏)라고 불리며 784~787년 사이에 저술한 80권본『화엄경』의 주

석서이다. 10문으로 나누어『화엄경』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밝혔는데 두 번째 장

교소섭(藏敎所攝)에서 제 교판을 소개하고 화엄이 5교 중에 원교임을 밝혔으며

세 번째 의리분제(義理分齊)에서 이사무애 등의 법계연기설을 밝혔다. 80화엄

의 해석은 이 징관소가 가장 중요하다. 지은지 10여년 만에 수용된 이 소와 함께

80화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00) 정원(貞元):당 덕종(德宗)의 연호. 785~805. 정원 기묘년은 799년으로 신라 소

성왕(昭聖王) 원년.

501) 상주(尙州):경상북도 상주시. 통일신라 신문왕 때 전국을 9주로 편제하면서 지

금의 경북 중서부 지역을 상주의 관할로 하였다.

502) 개령(開寧):경북 김천시(金泉市) 개령면(開寧面). 본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

고 감문군(甘文郡)이라 하였다가 경덕왕때 개령군으로 고치고 고려 현종 때 상

주에 소속되었다.

503) 화엄경(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달은 지 이칠일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

이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

德)을 설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

向)의 보살 수행 계위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

을 묻고자 53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번역본은 60권

본, 80권본, 40권본의 세 가지가 있다. 5-6 주242) 참조.

504) 전등(傳燈):스승에서 제자로 교법이 전해지는 것, 전법(傳法)과 같은 말로 법맥

이 전해져 끊이지 않는 것이 등불이 서로 이어져 그치지 않는 것과 같음을 비유

한 것이다.

505)『심원장(心源章)』: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506) 갈항사(葛項寺):승전이 창건한 경상북도 금릉군 남면 금오산 서쪽에 있던 절.

쌍탑이 있는데 동탑 상층 기단 면석에 758년(경덕왕 17)에 영묘사(零妙寺) 언적

(言寂)법사와 조문황태후(照文皇太后)와 경신태왕(敬信太王)의 세 자매가 발원

하여 건립하였다는 석탑기가 남아 있어 왕실과 관련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탑

은 원터에서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

되어 있다.

507) 강사(綱司)는 사원의 운영을 책임맡은 삼강전(三剛典)의 직책이라는 뜻으로 주

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08)『대각국사실록(大覺國師實錄)』:고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편찬한

『원종문류(圓宗文類)』를 말한다. 의천이 화엄종의 여러 전적을 모아 엮은 22책

분량의 이 책 권22에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서간이「현수국사기해동서(賢首國

師寄海東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심지가 조사를 잇다

[해제]

진표(眞表)의 제자인 영심(永深)을 계승하여 간자(簡子)로 점찰법을 수

행한 심지의 이야기이다. 심지는 헌덕왕의 왕자로서 공산(公山)에서 수행

하다 속리산의 영심이 개설한 간자 법회에 찾아갔다. 간절한 예배 끝에 간

자 2개를 받아 와서 산신과 함께 동화사(桐華寺) 참당에 자리를 잡아 모셨

다. 이어서 고려 예종 때 이 간자를 대궐에 가져다 예배하였다는 이야기를

싣고,『점찰경』에 나오는 189 간자 중에서 앞과 뒤 10여 개의 이름을 일일

이 들고 이것이 선악 과보의 차별상을 나타낸 것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

189 간자와『송고승전』 진표전의 108 첨자를 대비시켜 살펴 보고, 고려의

김관의(金寬毅)가 지은『왕대종록(王代宗錄)』에 진표의 가사와 189 간자가

석충(釋沖)에 의해 고려 태조에게 전해졌다는 기사를 수록하였다. 간자를

중심으로 진표에서 영심, 심지로 이어지는 계승과 석충의 전승 등 점찰 수

행의 계보를 엮어 이룬 것이 이 항목이다.

[역주]

심지가 조사를 잇다

심지(心地)509)스님은 신라510) 제41대 임금 헌덕대왕(憲德大王)511) 김씨

(金氏)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효도하고 우애가 있으며 천성이 사리에 밝

고 지혜로웠다. 15살512)에 머리를 깎고 스승을 따라 불도(佛道)를 부지런히

닦았다. 중악(中岳)513)〈지금의 공산(公山)〉에 머물러 있었는데 마침 속리산의

영심(永深)514)공이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불골간자(佛骨簡子)515)를 전해 받

아 과증법회(果證法會)516)를 개설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하고 찾아갔

으나, 이미 기일이 지난 뒤에 도착하여 참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에 마당에 앉아 땅을 치면서 대중을 따라 예배하고 참회 수행하였다. 7일이

지나자 하늘에서 큰 비와 눈이 내렸는데 서 있는 자리 사방 10자 가량은 눈

이 휘날리기만 할 뿐 내리지 않았다. 대중들이 그 신이함을 보고 법당에 들

어오도록 허락하였다. 심지는 사양하고 병을 핑계로 방 안에 물러나 있으면

서 법당을 향하여 가만히 예배했더니 팔꿈치와 이마에서 모두 피가 흘러 마

치 진표(眞表)공이 선계산에서 그런 것과 같았다.517) 지장보살518)이 날마다

와서 그를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법회가 끝나고 산으로 돌아갈 때 도중에서 두 간자가 옷섶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가지고 돌아가서 영심에게 아뢰었다. 영심이 말하기를, “간

자는 함 속에 있는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고 검사해보니 봉한 표

지는 예전대로인데 열어보니 없었다. 영심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거듭

싸서 간직하였다. (심지가) 또 가는데 처음과 같아서 다시 돌아가서 아뢰었

다. 영심이 말하기를 “부처님의 뜻이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그것을 받들

어 행하라.” 하고는 간자를 주었다.

심지가 그것을 머리에 이고 산으로 돌아오는데, 산신이 두 선자(仙子)519)

를 데리고 나와 맞이하여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심지를 이끌어 바위 위에

앉히고, 돌아가 바위 밑에 엎드려 삼가 정계(正戒)를 받았다. 심지가 “이제

땅을 가려서 성인의 간자520)를 모시려 하는데 우리들만으로 정할 일이 아

닙니다. 청컨대 그대들 3군521)과 함께 높은 데 올라가서 간자를 던져 점을

쳐봅시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산신 등과 함께 산꼭대기에 올라가 서쪽을

향해 던지니 간자는 바람에 날려서 날아갔다. 이때 산신이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막고 있던 바위 멀리 물러나니 숫돌처럼 평평하고,

낙엽이 날아 흩어지니 앞길이 밝구나.

불골 간자를 찾아 얻어서,

깨끗한 곳에 모시고 정성을 다하리.”

노래를 마치고 간자를 숲 속의 샘 안에서 찾았다. 곧 그 자리에 집을 짓

고 (간자를) 모셨으니 지금 동화사(桐華寺)522) 첨당(籤堂) 북쪽에 있는 작

은 우물이 이것이다.

고려523) 예종(睿宗)524)이 일찍이 성인의 간자를 맞이해 와서 대궐 안에

두고 첨례하며 공경하다가 갑자기 9간자 한 개를 잃어버려 상아로 그것을

대신 만들어 본 절에 돌려보냈다. 지금은 점점 변하여 같은 색이 되어 새

것과 옛 것을 구분하기 어려운데 그 재질은 상아도 옥도 아니다.

釋心地, 辰韓第四十一主, 憲德大王金氏之子也. 生而孝悌, 天

性沖睿. 志學之年, 落采從師, 拳懃于道. 寓止中岳〈今公山〉, 適

聞俗離山深公, 傳表律師佛骨簡子, 設果證法會, 決意披尋, 旣

至後期, 不許參例. 乃席地扣庭, 隨衆禮懺, 經七日, 天大雨雪,

所立地方十尺許, 雪飄不下. 衆見其神異, 許引入堂地. 撝謙稱

恙, 退處房中, 向堂潛禮, 肘顙俱血, 類表公之仙溪山也. 地藏

菩薩日來問慰.

洎席罷還山, 途中見二簡子, 貼在衣褶間, 持廻告於深. 深曰,

“簡在函中, 那得至此.” 檢之封題依舊, 開視亡矣. 深深異之,

重襲而藏之. 又行如初, 再廻告之. 深曰,“ 佛意在子, 子其奉

行,” 乃授簡子.

地頂戴歸山, 岳神率二仙子, 迎至山椒. 引地坐於嵓上, 歸伏

嵓下, 謹受正戒. 地曰,“ 今將擇地, 奉安聖簡, 非吾輩所能指

定, 請與三君, 憑高擲簡以卜之.” 乃與神等陟峰巓, 向西擲之,

簡乃風颺而飛. 時神作歌曰, “礙嵓遠退砥平兮, 落葉飛散生明

兮. 覓得佛骨簡子兮, 邀於淨處投誠兮.” 旣唱而得簡於林泉

中, 卽其地構堂安之, 今桐華寺籤堂北有小井, 是也.

本朝睿王, 嘗取迎聖簡, 致內瞻敬, 忽失九者一簡, 以牙代之,

送還本寺. 今則漸變同一色, 難卞新古, 其質乃非牙非玉.

509) 심지(心地):심지(心智)라고도 쓴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의 사리함기인「민

애대왕석탑기(敏哀大王石塔記)」에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838~839)을 추복하

기 위한 석탑 건립을 주관한 인물 중 승려로는 첫 번째로 나오는 전지대덕(專知

大德) 직책의 심지(心智)와 동일인으로 생각된다. 심지의 어머니인 헌덕왕비 귀

승(貴勝)랑은 민애왕과 동기간으로 충공(忠恭)의 딸이다(『삼국유사』왕력).

510) 진한(辰韓)은 원삼국시대 삼한(三韓) 가운데 하나로,『삼국사기(三國史記)』권

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 조를 보면 진한은 경상도 지방에 있었으며 그 중

심은 경주지방의 사로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진한은 신라의 이

칭으로 쓰였다.

511) 헌덕대왕(憲德大王):신라 제41대 왕. 재위 809~826. 휘는 언승(彦昇)으로 소성

왕(昭聖王)의 동생이다. 비는 각간 예영(禮英)의 딸 귀승부인(貴勝夫人)이다. 790

년(원성왕 6) 당나라에 다녀와 대아찬 잡찬을 거쳐 794년 시중(侍中), 795년 재

상이 되었다. 800년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이 즉위하자 병부령으로서 섭정을 하

였으며, 이듬해 상대등이 되었다가 809년 동생 제옹(悌邕)과 함께 난을 일으켜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 중반에 잦은 가뭄 등이 있었고 김헌창(金憲

昌)의 난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고 문물 교류를 하는 등

친당정책을 폈으며 대동강에 3백리의 장성(長城)을 쌓았다

512) 지학지년(志學之年)은『논어(論語)』에 공자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하

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15세를 말한다.

513) 중악(中岳):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라고 하며, 지금의 대구 팔공산(八公

山)을 가리킨다. 신라시대에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던 오악(토함산·지리산·계

룡산·태백산·부악) 가운데 하나로 중사(中祀)에 속하였다.(『삼국사기』권32,

잡지 제1 제사).

514) 영심(永深):신라의 승려로 진표의 제자. 속리산에 있다가 융종(融宗)·불타(佛

陁) 등과 함께 진표에게 가서 참회행을 보여주어 진표의 수제자가 되었다. 진표

로부터『점찰선악업보경』과 간자 등을 받아 속리산으로 돌아와 길상사(吉祥寺)

를 짓고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515) 불골간자(佛骨簡子):『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 조에 보면 진표가 미

륵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189개의 간자 가운데 제8·9간자는 미륵의 손가락 뼈

로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516) 과증법회(果證法會):과증(果證)은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

름을 말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법회이다.

517) 진표공이 선계산에서 그런 것과 같았다는 것은 진표가 선계산 불사의암에 머물

면서 온 몸을 던지는 망신참회(亡身懺悔) 끝에 14일만에 지장보살(地藏菩薩)에

게 계를 받은 것을 말한다.(『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

518) 지장보살: Ksitigarbha. 석가여래의 부촉을 받아, 석존이 입멸한 후 미륵보살

이 이 땅에 내려와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지옥을

포함한 육도의 중생이 모두 성불하기를 서원한 자비와 연민의 보살이다.『지장

십륜경(地藏十輪經)』에 조용히 참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대지와 같고 고요하게

생각함이 깊은 것이 신비하게 감추고 있는 것과 같아 지장이라 한다고 하였

다.(安忍不動, 猶如大地. 靜慮深密, 猶如祕藏. 故稱地藏.) 지장보살은 과거 먼 옛날

에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온갖 악한 짓을 많이 하므로 중생

들의 죄를 모두 없애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성불하지 않

겠다는 서원을 내었다고 한다. 이 지장신앙이 널리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중

생들을 모두 제도하고 그때서야 깨달음을 이루겠다(衆生度盡, 方證菩提.)”거나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겠다(地獄未空, 誓不成佛.)” 라는 말

이 생겨났다. 다른 보살들과는 달리 지장보살은『대방광십륜경(大方廣十輪經)』

에 따라 머리를 깎은 승려의 형상으로 만들어 모신다. 대체로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에는 육도를 상징하는 석장(錫杖)을 들고 있다.

519) 선자(仙子):선동(仙童).

520) 성인의 간자:미륵이 진표에게 준 부처님 뼈로 된 간자를 말한다.

521) 삼군:산신과 두 선동.

522) 동화사(桐華寺):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에 있는 절.『동화사사적기』에

의하면 혜공왕 8년(772)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진표의 계법과 간자를 계승한 심

지가 흥덕왕 7년(832)에 중창하였다고 한다. 심지는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

을 추복하기 위한 동화사 원당암 삼층석탑 건립을 주관하였다. 진표의 교법을

계승한 동화사는 법상종의 중요 사찰로서 고려시대에도 유가업, 법상종의 중심

사찰의 하나로 정종 2년에는 동화사 계단(戒壇)에서 경율(經律)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523) 원문의 본조(本朝)는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를 말한다.

524) 예종(睿宗):고려 16대 임금. 재위 1105~1122년.

『점찰경(占察經)』525)상권을 살펴보면 189간자의 이름을 서술하였다.526)

제1은 상승(上乘)527)을 구하여 불퇴위(不退位)528)를 얻음이요,529) 제2는 구

하는 바의 과보가 마땅히 깨침을 나타냄이요, 제3과 제4는 중승(中乘)530)

과 하승(下乘)531)을 구하여 불퇴위를 얻음이요, 제5는 신통을 구하여 성취

함을 얻음이요, 제6은 네가지 범행(梵行)532)을 닦아서 성취함을 얻음이요,

제7은 세간선(世間禪)533)을 닦아서 성취함을 얻음이요, 제8은 받고자 하는

묘계(妙戒)534)를 얻음이요, 제9는 일찍이 받은 구족계(具足戒)535)를 얻음이

요,〈이 글로써 (진표전간을) 교정하면 미륵보살536)이 말한 ‘새로 얻은 계’는 이번 생에

처음으로 얻은 계를 말한 것이요, ‘예전에 얻은 계’는 과거세에 일찍이 받았다가 이번 생

에 또 더 받음을 말한 것이니537) 수생(修生)538) 본유(本有)539)의 새롭고 오래된 것을 말

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제10은 상승(上乘)540)을 구하여 아직 신위(信位)에 머

무르지 않음이요, 다음은 중승(中乘)을 구하여 신위에 머무르지 않음이다.

이렇게 하여 172까지는 모두 과거세나 현세에서 혹은 착하기도 하고 혹은

악하기도 하여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 일들이다.541) 제173은 몸을 버려 벌

써 지옥에 들어간 것이요.〈이상은 모두 미래의 과보이다.542)〉제174는 죽어서 이

미 축생이 된 것이다.543) 이와 같이 해서 아귀(餓鬼)544), 아수라(阿修羅)545),

인(人)546), 인왕(人王)547), 천(天)548), 천왕(天王)549), 법을 들음(聞法)550),

551), 성승(聖僧)을 만남552), 도솔천에 태어남553), 정토에 태어남554), 부처

를 찾아 만남555), 하승에 머무름556), 중승에 머무름557), 상승에 머물러 해탈

을 얻음558)의 189가지가 이것이다.559)〈위에서 하승에 머무름으로부터 상승에 이

르러 불퇴위를 얻음을 말하였고 지금은 상승에서 해탈을 얻는 것 등을 말하여 이로써 구

별한 것이다.〉모두 삼세(三世)의 선악 과보의 차별상이다. 이로써 점을 쳐보

고 마음과 행한 일과 서로 맞으면 감응한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지극한 마

음이 아니므로 거짓560)이라고 하는 것이다.561) 그렇다면 제8과 제9의 두 간

자는 단지 189개 가운데서 나온 것인데 『송고승전(宋高僧傳)』562)에는 다만

108첨자(籤子)라고 했으니563) 어찌된 것인가? 아마도 저 백팔번뇌(百八煩

惱)564)의 명칭만 알고 말했을 뿐 경문은 찾아보지 않은 것 같다.

또 고려의 문사 김관의(金寬毅)565)가 지은『왕대종록(王代宗錄)』2권을

살펴보면 “신라말에 신라의 대덕 석충(釋沖)566)이 태조에게 진표율사의 가

사 한 벌과 계간자(戒簡子) 189개를 바쳤다.” 고 한다. 지금 동화사에 전해

오는 간자와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찬한다.

궁궐567)에서 나고 자랐으나 일찍이 속박을 벗어나

부지런하고 슬기로움은 하늘이 내셨구나.

마당 가득 쌓인 눈 속에 신이한 간자를 얻어

동화사 최상봉에 올라 간자를 날렸도다.

按占察經上卷, 敍一百八十九簡之名. 一者求上乘得不退. 二

者所求果現當證. 第三第四求中下乘得不退. 五者求神通得成

就. 六者修四梵得成就. 七者修世禪得成就. 八者所欲受得妙

戒. 九者所曾受得戒具.〈以此文訂, 知慈氏所言, 新得戒者, 謂今生始得

戒也, 舊得戒者, 謂過去曾受, 今生又增受也, 非謂修生本有之新舊也.〉 十者

求下乘未住信. 次求中乘未住信. 如是乃至一百七十二, 皆過

現世中, 或善或惡, 得失事也. 第一百七十三者, 捨身已入地

獄.〈已上皆未來之果也.〉 一百七十四者, 死已作畜生. 如是乃至餓

鬼, 修羅, 人, 人王, 天, 天王, 聞法, 出家, 値聖僧, 生兜率, 生

淨土, 尋見佛, 住下乘, 住中乘, 住上乘得解脫, 第一百八十九

等是也.〈上言住下乘至上乘得不退, 今言上乘得解脫等, 以此爲別爾.〉 皆三

世善惡果報差別之相. 以此占看, 得與心所行事相當, 則爲感

應, 否則爲不至心, 名爲虛謬. 則此八九二簡, 但從百八十九中

而來者也, 而宋傳但云百八籤子, 何也? 恐認彼百八煩惱之名

而稱之, 不揆尋經文爾.

又按本朝文士金寬毅所撰, 王代宗錄二卷云, 羅末新羅大德釋

冲, 獻太祖以表律師袈裟一領, 戒簡百八十九枚. 今與桐華寺

所傳簡子, 未詳同異.

讚曰 生長金閨早脫籠, 儉懃聰惠自天鍾. 滿庭積雪偸神簡, 來

放桐華最上峰.

525) 점찰경(占察經):『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2권으로 수나라 보리등(菩

提燈)이 번역하였다. 선악의 업보(業報)를 점쳐 살펴 보고 아울러 대승의 실천

을 설한 경전인데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으로 보고 있다.

526)『점찰경』 권상에 불자들이 삼세의 과보를 결정하고자 하면 삼륜을 세 번 던져

점수를 합계하여 그 수에 따라 선과 악을 정하는데, 그 가짓수가 189라고 하면

서 하나씩 그 의미를 서술하였다.

527) 상승(上乘):보살승(菩薩乘), 대승(大乘).

528) 불퇴위(不退位):수행으로 이미 얻은 공덕을 잃거나 물러서는 일이 없는 자리.

529)『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권상 大17 p.905b3~4. 一者求上乘得不退.

530) 중승(中乘):연각승(緣覺乘)

531) 하승(下乘):성문승(聲聞乘), 소승(小乘).

532) 네 가지 범행(梵行):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을 가리

키며, 이 네 가지 마음을 행하면 범천(梵天)에 나므로 범행이라 한다.

533) 세간선(世間禪):삼종선의 하나로 범부들이 수행하는 선.

534) 묘계(妙戒):보살의 대계(大戒).

535) 구족계(具足戒): upasampanna. 의역하면 열반에 친근하다는 뜻으로 풀이된

다.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가 갖추어야 할 계율로서 사미나 사미니가 갖추는 10

계에 비해 계품을 모두 갖추었다는 의미에서 구족계라고한다. 이 구족계를 얻

어야 비로소 정식 출가자 곧 비구 비구니의 자격이 주어진다. 일반적으로 비구

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말한다.

536) 미륵보살(彌勒菩薩):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천인(天

人)을 위해 설법하며 도솔천(兜率天)에 살고 있다는 보살이다. 석존께서 미륵에

게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수명이 4천세(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7억 6

천만년)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

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였다. 법상종에서는 중심 경전인『해심밀경』의 설주인 미륵의 상을 금당에 봉

안하고 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5-10 주422) 참조.

537) 이 항목 바로 앞에 실린『삼국유사』권4「진표전간」에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점

찰경』2권과 증과간자 189개를 주면서 그 가운데 제8간자는 신득묘계(新得妙

戒), 제9간자는 증득구계(增得具戒)이며 자신의 손가락뼈라고 하였다.

538) 수생(修生):수행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얻는 것.

539) 본유(本有):본래 고유하게 갖추고 있는 것.

540) 원문에는 하승(下乘)이라 하였으나『점찰경』원문(求上乘未住信)에 의하면 상승

(上乘)이라야 맞는다.

541) 이 인용은 『점찰선악업보경』과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172까지가 과거 현세 중

의 일이고 173 “지옥에 들어감” 이상이 미래의 과보라 하였으나,『점찰선악업보

경』에는 제172가 지옥에 들어가는 미래 과보의 시작이다. 이곳에서는 제188을

제외하여 마지막 제189는 같게 되었다.

542) 제173 이상(已上)은 미래세의 과보에 해당하는 제173(『점찰선악업보경』에는 제

172) 이후를 말한다. 윤회하는 6도(六道)의 맨 아래가 지옥이다. (『점찰선악업보

경』권상 大17 p.906b21~22. 一百七十二者捨身已入地獄)

543) 윤회 6도의 하나가 짐승으로 태어나는 축생이다. (『점찰선악업보경』 권상 大17

p.906b22~23. 一百七十三者捨身已作畜生)

544) 아귀(餓鬼): pretagati. 업에 의해 윤회하는 6도의 하나로 간탐, 질투 등의 악업

을 지은 이가 나게 되는 곳이다. 아무 것도 먹을 수 없는 아귀도 있고, 사람이 남

긴 물건이나 사람이 주는 것만 먹을 수 있는 아귀도 있다. (『점찰선악업보경』 권

상, 大17 p.906b23. 一百七十四者捨身已作餓鬼)

545) 아수라(阿修羅, asura):수라는 아수라(阿修羅)의 준말. 윤회 6도의 하나로 아

수라들이 모여 싸움만 하는 곳인데 아수라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인도의 귀신

아수라에서 유래하였다. (『점찰선악업보경』 권상 大17 p.906b23~24. 一百七十五者

捨身已作阿修羅)

546) 인(人):윤회 육도의 하나인 사람으로 태어나는 인도. (『점찰선악업보경』 권상, 大

17 p.906b24~25. 一百七十六者捨身已生人道)

547)『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b25 一百七十七者捨身已為人王

548) 천(天):윤회 육도의 가장 상위인 천도. (『점찰선악업보경』 권상, 大17

p.906b25~26 一百七十八者捨身已生天道)

549)『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b26~27 一百七十九者捨身已為天王

550)『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b27 一百八十者捨身已聞深法

551)『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b28 一百八十一者捨身已得出家

552)『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b28~29 一百八十二者捨身已值聖僧

553)『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b29~c1 一百八十三者捨身已生兜率天

554)『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c1 一百八十四者捨身已生淨佛國 일연은 불

국(佛國)을 정토(淨土)라고 표현했다.

555)『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c1~2 一百八十五者捨身已尋見佛

556)『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c2~3 一百八十六者捨身已住下乘

557)『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c3~4 一百八十七者捨身已住中乘

558)『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c4~5 一百八十九者捨身已住上乘

559) 이곳에는『점찰선악업보경』권상, 大17 p.906c4. “제188은 몸을 버리고 과증을

얻는다.(一百八十八者捨身已獲果證)”가 빠져 있다.

560) 허류(虛謬)는 언행이 허황하여 진실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561) 이곳『삼국유사』의 인용보다 상세한 서술이『점찰경』에 나온다.

562)『송고승전(宋高僧傳)』:송의 찬녕(贊寧)이 982년에 칙명으로 편찬한 고승전. 당

정관 연간부터 송 988년까지 이르는 343년간의 고승의 전기를 엮은 것이다. 정

전 531인에 부전 125인의 전기를 역경(譯經)·의해(義解)·습선(習禪)·명률(明

律)·호법(護法)·감통(感通)·유신(遺身)·독송(讀誦)·흥복(興福)·잡과(雜科)의

10개로 분류하여 30권에 수록하였다. 5-7 주280) 참조.

563)『송고승전』권14, 당백제국금산사진표전(唐百濟國金山寺眞表傳). 大50

p.794b2~3. 更加一百八籤, 籤上署百八煩惱名目.

564) 백팔번뇌(百八煩惱):중생의 번뇌의 수가 모두 108가지라고 하는데 번뇌를 구

분하여 세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565) 김관의(金寬毅):고려시대의 학자.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으며 문서 등

을 수집·정리하여 의종 때『편년통록』을 편찬하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여기에 수록된 고려 개국의 전설에 관련된 기사가『고려사(高麗史)』세가(世家)

에 인용되어 있다.

566) 석충(釋沖):석총(釋聰). 고려 태조에게 진표의 가사와 계간(戒簡)을 바치고, 궁

예에게 반대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567) 금규(金閨):금문(金門) 곧 금마문(金馬門), 한(漢)나라의 미앙궁(未央宮)의 궁문

으로 궁궐을 뜻한다

대현의 유가와 법해의 화엄

[해제]

신라 교학의 쌍벽인 화엄과 유식의 대립적인 모습을 엮은 편이다. 대현

은 유가(瑜伽)의 조사로서 용장사(茸長寺)에서 지내며 배우기 어렵다는 유

식의 심오한 것을 깨달아 자유롭게 분석하고 잘못된 것을 판정하여 우리

나라의 학자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중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덕왕 때

가뭄이 들자 궁궐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연하여 비를 바라는 재를

올릴 때 법력으로 우물물이 높이 솟구치는 기적을 보였다. 이듬해에 왕이

화엄의 법해를 황룡사에 초빙하여 『화엄경』을 강연하게 하고 대현의 기적

을 말하자, 법해는 바다를 기울여 물이 넘치게 하겠다고 말하였고, 그 말대

로 못이 넘쳐 궁궐이 떠내려 가고 감은사 앞 바닷물이 넘치는 더 큰 이적을

보였다. 이 항목은 대현과 법해를 통해 유식과 화엄 교학이 치열하게 경쟁

하며 사상을 연마하였고, 경덕왕 당시에는 화엄이 더 우위에 있었음을 말

해주는 사례로 설명된다.

[역주]

대현의 유가와 법해의 화엄

유가종568)의 조사인 대덕(大德)569) 대현(大賢)570)은 남산571) 용장사572)

에서 살았다. 절에는 석조 미륵573) 장륙상이 있었는데, 대현이 늘 불상 주

위를 돌면 석불도 또한 대현을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 대현은 다무릇 법상

종의 도리574)는 뜻과 이치가 깊고 심오하여 나누어 가려내기 어렵다. 중국

의 명사 백거이(白居易)575)도 일찍이 이를 파헤쳐 보았으나 해내지 못하고

말하기를 “유식(唯識)은 오묘하여 알기 어려우며 인명(因明)576)은 분석해

도 열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학자들이 배우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 대현이 홀로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잠깐 동안에 심오한 뜻을

알아 자유자재로 분석하였다.577) 동국(東國)578)의 후학들이 모두 그의 가

르침을 따르고 중국의 학자들도 때로 이것을 얻어서 안목으로 삼았다.

경덕왕(景德王)579) 천보(天寶) 12년(753)580) 계사년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대현을) 왕명으로 내전에 들어오게 하여『금광명경(金光明經)』581)

강연하며 단비를 빌게 하였다. 하루는 재를 올릴 때 발우를 펴 놓고 한참동

안 있었으나 정화수를 올리는 것이 늦었다. 감독 관리가 공양하는 이를 꾸

짖으니 공양 올리는 이가 말하기를 “궁궐 우물이 말라버려 먼데서 길어오

느라고 늦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대현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왜 일찍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였다. 낮 강연을 할 때가 되자 향로를 받쳐들고 잠

자코 있으니 잠깐 사이에 우물물이 솟아 나와 높이가 일곱 길 정도나 되어

찰당(刹幢)582)과 같아져서583) 온 궁중이 깜짝 놀랐다. 그래서 그 우물을 금

광정(金光井)이라고 이름하였다. 대현은 일찍이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

門)584)이라고 하였다.

찬한다.

남산의 불상을 도니 불상도 따라 얼굴 돌리고

청구에 부처의 광명 다시 중천에 걸렸네.

궁궐 우물에 맑은 물 솟게 하니

금향로의 한 줄기 연기인줄 누가 알리오.

瑜伽祖大德大賢, 住南山茸長寺. 寺有慈氏石丈六, 賢尙旋繞,

像亦隨賢轉面. 賢惠辯精敏, 決擇了然. 大抵相宗銓量, 旨理幽

深, 難爲剖析. 中國名士白居易, 嘗窮之未能, 乃曰,“ 唯識幽

難破, 因明擘不開”. 是以學者難承稟者, 尙矣. 賢獨刊定邪謬,

暫開幽奧, 㤆㤆恢恢游刃. 東國後進, 咸遵其訓, 中華學士, 往

往得此爲眼目.

景德王天寶十二年癸巳, 夏大旱, 詔入內殿, 講金光經, 以祈甘

霔. 一日齋次, 展鉢良久, 而淨水獻遲. 監吏詰之, 供者曰, “宮

井枯涸, 汲遠故遲爾.” 賢聞之曰,“ 何不早云?” 及晝講時, 捧

爐黙然, 斯須井水湧出, 高七丈許, 與刹幢齊, 闔宮驚駭. 因名

其井曰金光井. 賢嘗自號靑丘沙門.

讚曰, 遶佛南山像逐旋, 靑丘佛日再中懸. 解敎宮井淸波湧, 誰

識金爐一炷烟.

568) 유가종(瑜伽宗):유가는 yoga의 음역. 상응(相應)이라고 의역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 수련, 정신통일로 해석된다. 인도 불교의 유가행파(瑜伽行派,

Yogācāra)에서는 유식사상에 의하여 유가행을 체계화하였다. 유가 유식의 교의

는 현장(玄奘)의 인도 유학과 신역 경전을 통해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해져서 현

장의 제자 규기(窺基)에 의해 법상종(法相宗)이 개창되었다. 법상종은 유가종,

유식종(唯識宗) 등으로도 불리며, 고려시대에는 유가업(瑜伽業), 자은종(慈恩

宗), 상종(相宗) 등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569) 대덕(大德):덕이 높은 승려에게 붙이던 존칭. 당나라에서 승려에 대한 법계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신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승과

의 대선(大選)에 합격한 승려에게 처음으로 주는 승계(僧階)로서 쓰였다.

570) 대현(大賢):또는 태현(太賢)으로도 쓴다. 그 행적이 고요하고 덕행을 밖으로 드

러내지 않고 감추었기 때문에 대현이라고 이름하였고, 또 그것이 대현의 뜻이

라고 13~14세기 일본 승려들의『범망경』 관계 저술에 나타난다. 대현의 전기 자

료로는 이 내용 외에 당 천복사(薦福寺) 승려 도봉(道峯)의「대현법사의기서(大

賢法師義記序)」가 있으나 소략하여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도봉은 대현을 인도 중관파의 5대논사와 유식의 세친(世親)에 이어 공유(空有)

의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의 대의(大義)를 다시 펼친 인물로 평가하였다.

대현은 원측(圓測)의 제자인 도증(道證)이 귀국한 후 그에게 유식학을 수학하였

고 규기(窺基)에 비견되는 광범한 분야의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 경향은 ‘호

법정종(護法正宗)’을 내세워 신유식을 정통으로 하면서도, 구유식에서 출발하

여 신유식을 받아들였던 원측(圓測)과 신유식에 충실한 규기(窺基)의 유식학을

종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571) 남산:경주시 남쪽에 있는 남산을 말한다. 경주시 남쪽에 금오산과 고위산의 두

봉우리를 잇는 산으로 남북 8km 동서 4km의 타원형을 하고 있다. 신라 4 영지

의 하나로 곳곳에 유적이 많다. 동 남 서쪽에 모두 34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각각

수십개씩의 절터, 석탑, 석불, 마애불 들이 산재하고 있다. 신라시조인 박혁거세

의 탄생지로부터 불교 수용 이후에는 수많은 불교 유적이 만들어져 이곳에 불

국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572) 용장사(茸長寺):경주 남산의 서쪽 산중턱에 있던 절. 일제시기의 조사에서 ‘용

장사’라고 쓰여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절터에는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

은 독특한 구상의 삼층석탑(보물 186호), 이 항목에 나오는 대현이 불상을 돌면

불상도 얼굴을 따라 돌린다는 원형 대좌를 갖춘 석불좌상(보물 187호), 마애여

래좌상(보물 913호) 등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남아 있다. 신라 대현이 주석한

이후 별다른 사적이 전하지 않다가 조선 초에 김시습(金時習)이 말년을 이곳에

서 보내면서『금오신화(金鰲神話)』를 저술하였다.

573) 미륵(彌勒):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보다 먼저 입멸하여 천인(天人)을 위

해 설법하며 도솔천(兜率天)에 살고 있다는 보살이다. 석존께서 미륵에게 부처

가 되리라고 수기하였는데 그 수명이 4천세(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7억 6천만년)

가 될 때 장차 도솔천에서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삼회(三會)에 걸쳐 설법하여 각각 96억, 94억, 92억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법

상종에서는 중심 경전인『해심밀경』의 설주인 미륵의 상을 금당에 봉안하고 신

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5-10 주421) 참조.

574) 전량(銓量):전(銓)은 전(詮)의 오기로 생각된다. 전(詮)은 도리, 량(量)은 표준이

되는 원리를 말한다.

575) 백거이(白居易):772~846. 당나라의 시인.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

居士)이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나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사회를 비판하는 시가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 지방 관직으로

밀려나 오랫동안 항주자사 소주자사 등 지방직을 지냈다. 중앙으로 돌아와서도

관직보다 시와 거문고를 벗삼아 지냈고, 만년에는 용문석굴 인근의 향산사를

복원하여 지내며 불교에 심취하였다. 보편적인 주제에 유려하고 평이한 시를

써서 생존시에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사원에 써붙여지기도 하였다.

대표적 작품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다.

576) 인명(因明):hetu-vidya. 인도 고대의 논리학. 인도의 논리학은 니아야(Nyāya)

학파와 불교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5세기 경의 진나(陳那, Dignāga)에 와서 추리

추론에 있어 이유(因)의 옳고 그름을 명백히 하는 논리학으로 발전하여 이 이후

를 신인명(新因明)이라고 한다. 당 현장(玄奘)에 의해 진나의 인명서가 한역된

이후 법상종에서 인명의 연구가 중시되었다.

577) 회회유인(恢恢遊刃)은 자유스럽게 칼을 놀린다는 말로, 자유자재로 이치를 분

석한다는 뜻이다.

578) 동국(東國):동쪽에 있는 나라 곧 우리나라를 말한다.

579)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 742~765. 왕권 안정을 위해 한화정책(漢

化政策)을 시행하고 9주(州)·5소경(小京)·117군(郡)·293현(縣)을 정비하였다.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조하고,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와 굴불사(掘佛

寺) 등을 창건하였다. 5-10 주438) 참조

580) 천보(天寶):당 현종(玄宗)의 연호, 742~764년. 천보 12년은 경덕왕 12년(753).

581) 원문의 금광경(金光經)은『금광명경(金光明經)』을 말한다. 호국경전의 하나로

참회행의 실천과 함께 호국안민과 왕도를 강조하여 국가적 법회에 『인왕경』과

함께 자주 강경되었다. 5종의 번역이 있으나 진제(眞諦)의 구역과 의정(義淨)이

703년 번역한『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이 널리 이용되었다. 신라의 원

효(元曉)와 경흥(憬興)이 소(疏)를 지었고, 고려에서도 법상종 승려들이 기우(祈

雨) 등의 국가적 법회에 여러 차례 이 경을 강의하였으며 덕겸(德謙)이 왕명으

로 소를 짓기도 하였다.

582) 찰당(刹幢):찰(刹, ks3 etra)은 불법의 전당임을 알리기 위하여 절 앞에 나무나

쇠로 만들어 세우는 깃대 모양의 기둥으로 당간(幢竿)이라고도 한다. 당(幢)은

거기에 매다는 깃발을 말한다.

583) 원문의 재(齋)는 나란하다는 뜻의 제(齊)의 오기로 생각됨

584) 청구(靑丘):진숙(軫宿) 동남쪽에 있는 일곱 별을 말하는데, 동방의 나라라는 뜻

이 있어서 우리나라에 대한 별칭으로 쓰인다.

이듬해 갑오년(754) 여름에 왕이 또 대덕 법해(法海)585)를 황룡사(皇龍

寺)586)에 초청하여『화엄경』587)을 강연하게 하였다. 친히 가서 향을 피우

고 조용히 말하기를. “지난 여름에 대현법사가『금광명경』을 강연하니 우

물물이 일곱 길이나 솟았는데 그대의 법도는 어떠한지요?” 법해가 말하였

다. “다만 작은 일인데 무엇을 그리 칭찬하십니까? 곧 바로 바다를 기울여

토함산을 잠기게 하고 서울을 떠내려가게 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왕이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농담으로 생각하였다. 오시(午時)588)에 경을 강

연할 때 향로를 끌어 당겨 가만히 있으니, 조금 있다가 궁중589)에서 갑자기

울음소리가 나고 대궐 관리가 뛰어와서 보고하기를, “동쪽 못이 넘쳐서 내

전(內殿) 50여 칸이 떠내려갔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어찌할 줄 모르자

법해가 웃으며 말하기를, “동해를 기울이려고 하여 수맥이 먼저 불어났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 절을 하였다.

이튿날 감은사(感恩寺)590)에서 아뢰기를, “어제 오시에 바닷물이 넘쳐 불

전 계단 앞까지 들어왔다가 포시(晡時)591)에 물러갔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그를 더욱 믿고 공경하였다.

찬한다.

법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도 법계는 넓어

사해를 채우고 줄이는 것도 어렵지 않네.

백억 수미산592)이 크다고 말하지 마라

모두가 우리 스님의 손가락 끝에 있도다.〈이상은593) 법해를 말한 것이다.〉

明年甲午夏, 王又請大德法海於皇龍寺, 講華嚴經. 駕幸行香,

從容謂曰, “前夏大賢法師講金光經, 井水湧七丈, 此公法道如

何.” 海曰,“ 特爲細事, 何足稱乎. 直使傾滄海, 襄東岳, 流京

師, 亦非所難.” 王未之信, 謂戱言爾. 至午講, 引爐沉寂, 須臾

內禁忽有哭泣聲, 宮吏走報曰,“ 東池已溢, 漂流內殿五十餘

間.” 王罔然自失, 海笑謂之曰,“ 東海欲傾, 水脈先漲爾.” 王

不覺興拜. 翌日感恩寺奏, 昨日午時海水漲溢, 至佛殿階前, 晡

時而還. 王益信敬之.

讚曰, 法海波瀾法界寬, 四海盈縮未爲難. 莫言百億須彌大, 都

在吾師一指端.〈右海云〉

585) 법해(法海):8세기 중반 경덕왕 때 활동하던 화엄종 승려.

586) 황룡사(皇龍寺):경상북도 경주시에 구황동에 있던 절. 신라 진흥왕 때인 553년

에 착공하여 569년에 완공된 신라불교의 중심 사찰로 지금은 탑과 금당 강당지

등 절터만 보존되어 있다. 높이 225척의 장대한 구층탑(九層塔)과 3만 5천근의

장륙존상과 십대제자상, 49만근의 거대한 황룡사종 등을 갖추었던 신라 국찰

(國刹)이다. 5-1 주36) 참조.

587)『화엄경(華嚴經)』:『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불타의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으로 석존이

깨달은 지 이칠일째에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자나불을 설주로 문수와 보현보살

이 깨달은 내용을 설한 것이라 한다. 내용은 부처가 되는 인행(因行)과 과덕(果

德)을 설한 것으로 십지(十地)를 비롯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迴

向)의 보살 수행 계위를 중심으로 하고 후반부인 입법계품은 선재동자 보살행

을 묻고자 53선지식을 찾아 구도 편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번역본은 60권

본, 80권본, 40권본의 세 가지가 있다. 5-6 주241) 참조.

588) 오시(午時):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의 한낮.

589) 내금(內禁)은 궁중을 말한다.

590) 감은사(感恩寺):682년 신문왕이 전해에 돌아간 부왕인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창건한 절(『삼국유사』권2 기이 萬波息笛).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절

터가 남아 있다. 절의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

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어 해룡(海龍)이 되었다. 이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

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대종천을 가까이 두고 절 앞에 연못을 조성하였으며, 금당 마루

아래에 공간을 만들어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는 구조가 절의 설화와 일

치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금당 앞에 있는 대형 쌍탑은 통일 이후 새롭

게 나타난 석탑 양식으로 주목된다. 감은사는 신라 때 국가가 운영 관리하는 성

전사원(成典寺院)으로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영(令, 衿荷臣), 부사(副使, 上

堂), 판관(判官, 赤位), 녹사(錄事, 靑位), 사(史, 典)의 관직이 설치된 최고위급 사

원이었다.

591) 포시(晡時):신시(申時)로 저녁 해가 저물 때인 오후 3~5시 사이.

592) 수미산(須彌山): sumeru. 인도의 신화를 수용한 것으로, 불교의 우주관에서

이 세계의 중앙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는 산을 말한다. 이 산이 중심이 되어 주

위로 팔산(八山) 팔해(八海)가 겹겹이 둘러싸 한 세계를 이루니 이것이 수미세

계이다. 세계의 구조는 풍륜(風輪) 위에 수륜(水輪)이 있고 그 위에 금륜(金輪)

이 있어 산과 바다와 육지로 구성된 대지가 있는데 수미산은 그 중앙에 위치한

다고 한다.『장아함경』권18 염부제주품(閻浮提洲品)에는 수미산의 높이가 수면

위로 8만 4천 유순, 수면 아래로 8만 4천 유순이며, 산의 사면에 사천왕(四天王)

의 궁전이 있고 정상에는 33천궁이 있어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다고 하였다.

593) 원문의 石은 右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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