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불교사
동남아시아지역 불교를 남방불교라 지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방불교를 소승불교와 동일시하고 이 지역의 불교를 모두 같다고 생각하는 등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이 무지의 극치를 달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자료의 빈곤과 관점의 편협성으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될 것이나 남방불교에 대한 무지의 극복을 조금이라도 이루는데 이 글의 목표가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 불교의 성격과 이 지역 대중들이 현재 어떠한 관점으로 생활하는가에 중점을 두고 진행시키고자 하는 것을 먼저 밝혀 둔다.
우리는 먼저 동남아시아지역에 대한 고찰을 해봐야 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은 인도차이나반도와 인도네시아지역, 그리고 스리랑카(샤일론섬)까지도 포함하는 일정치 않은 경계를 가지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를 자세히 보면 마치 남성의 성기와 같은 모양인데 양옆으로 들어오는 인도 문화와 중국문화가 서로 부딪히는 문화국경선으로 크게 중국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과 인도의 지배적 영향을 받은 지역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물론 근대에 여러 유럽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필리핀에서처럼 기독교의 전파를 통한 서양화되고 불교적, 민족적 성향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지만 이들 지역은 불교를 빼놓고 역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불교국가들의 지역이다. 현재 동남아시아지역은 경제적으로 개발도상국이고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세계사에서조차 등한시되고 외면되는 지역이며 이것은 불교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랜 식민지로 강대국에 의해 수탈 당하면서 불교적 민족주의사관, 불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이 존재하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의 성기처럼 힘찬 기상들이 웅비하는 곳이다.
1. 동남아시아의 역사적 배경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불교사와 약간 동떨어진 듯한 역사적 서술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불교의 역사라 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동남아시아의 불교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간략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한다.
동남아시아지역을 먼저 지리적인 요건으로 살펴보자. 이 지역의 나라로는 버어마 연방사회주의공화국,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타이왕국, 민주 캄보디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공화국, 필리핀 공화국, 싱가폴 공화국, 그리고 스리랑카까지만 이 글에서는 포함하는 것으로 한다. 지형별로 나눈다면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 지역은 이슬람교도와 서양의 침입에 의해 불교권이 소멸했으며 이 사실은 민족적 전통성이 많은 부분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는 대승불교권과 소승불교권으로 나뉘어지는데 이런 다양한 종교 현황을 볼 때 수많은 외래 종교와 문화가 범람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도 얼마나 많은 대중들의 고통이 있었고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켜나가는데 엄청난 희생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적 요건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자. 일찌기 인도인들에 의해 황금의 땅이라 하여 정복되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개방은 시작되었다. 그 속에서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등을 포함한 인도의 발전된 문명이 들어온다. 이러한 흔적으로 3세기 전반 중국의 오(吳)나라는 메콩강 유역에서 세력을 떨친 부남(扶南,현재 캄보디아 지역에 해당)에 사신을 보내는데 그들은 [부남은 여자를 首長으로 하는 나체의 야만족이었는데 남쪽에서 상선을 타고 온 인도인에 의해 굴복되고 그 여왕을 아내로 삼아 인도의 풍속과 관습을 강요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캄보디아의 전설에도 이와 흡사한 내용이 전해지는 것으로 봐서 해상 교통에 의해 인도문화가 메콩강 하류지대까지 파급된 역사적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지역의 문자에서도 인도문화의 영향을 알 수 있는데 중세 이슬람교와 함께 퍼진 아라비아 문자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남인도의 그란다(Grantha)문자에 근거를 둔다. 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되고 있는 타이 문자, 버어마 문자, 수마트라의 바탁크 문자, 발리 섬의 문자 등이 모두 그란다 문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인도의 막강한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침입속에서 동남아시아에 비해 그 당시 엄청나게 발달한 인도문화에 융화되어 힌두교등의 문화와 함께 들어온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므로 사실상 이때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분리할 수 있는 시기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 또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쪽 중국의 잦은 침입을 받았던 월남만큼은 지속적인 중국의 침입과 지배를 받아 유 불 선 혼합형태의 중국식 대승불교가 전파되는 등 중국문화가 지배적으로 전파되었는데, 본래 월남이란 말은 중국의 월나라의 멸망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부족들이 정착하여 나라를 구성한데서 비롯한 말이다. 이 지역은 천여년 정도의 중국의 지배속에 있으면서 중국문화의 지배적 영향을 받았던 곳으로 다른 동남아시아지역과 역사적 출발점에서는 분리되는 곳이지만 본격적인 역사의 발전이 시작되면서 다른 동남아시아국가들과 비슷한 운명을 걷게 된다.
이후 근대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 프랑스등의 열강들에 의해 타이를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데 오랜 기간의 식민지 생활은 이들 국가의 국민들로 하여금 강한 반제국주의적 사고를 가지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을 비슷한 시기에 해방한 우리나라와 비교해 본다면 민족의 자존심을 미국과 일본에 팔고 있는 우리는 부끄러울 뿐이다. 이들은 과거 제국주의였던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배타적이며 그 영향으로 사회주의 특히 불교적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많다. 이러한 현상은 동남아시아지역의 불교 교리가 현실과 떨어진 신앙이 아니라 바로 현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바탕속에서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에도 불교를 통해 민중이 통일되었고 서양에서 물밀듯이 몰아치는 문화적 충격을 완충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남방불교】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된 불교를 남방불교라 한다. 이 지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이며 B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의 왕자 마힌다(Mahinda)가 파견되어 상좌부 불교를 전한 것이 효시가 된다. 이 불교는 팔리어(語) 경전을 믿기 때문에 팔리불교라고도 한다. 5세기에는 불음(佛音)이 인도로부터 건너와 팔리어 경전의 주석(注釋)을 집대성함으로써 상좌부 불교의 기초가 굳어지고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미얀마와 타이에는 이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졌다. 5세기에 미얀마로 건너간 상좌부 불교는 그 후 밀교[大乘]로 바뀌었다가 11세기 파간조(朝)의 전(全)국토통일과 함께 재흥되었고, 후에 본가인 스리랑카불교가 쇠퇴하자 상좌부 불교가 스리랑카로 역수입되었다.
한편 타이에는 8세기 무렵에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다가 후에 미얀마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진출하였고, 13세기 말에는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그 후 왕조의 보호 밑에 발전하여 지금은 이 지역 제1의 불교국이 되었다. 자바에는 8세기경 인도로부터 밀교가 전해져 번창하였으나 후에 이슬람권으로 바뀌었다. 캄보디아·라오스는 13세기 말부터 타이족의 침입으로 상좌부 불교가 전해져 오늘에 이른다. 인도차이나반도의 또 하나의 지역인 베트남은 옛날부터 중국과의 교섭으로 6∼7세기경 대승불교가 전해져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번영하였다.
2. 스리랑카 불교사
먼저 동남아시아 불교사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들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먼저 대승불교가 최고이고 상좌부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잘못된 관점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또 한가지는 이 지역에 속한 많은 나라의 불교역사를 이 작은 지면 위에 옮긴다는 자체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1) 스리랑카
이 나라는 인도 남단에 자리한 샤일론 섬에 있는 국가로 예로부터 <동양의 진주>, <보석의 섬>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곳에 불교의 전래는 다양한 전설이 있지만 대체로 석존의 입멸 후 서서히 전해졌으리라 여겨지고 본격적인 전도는 인도의 아쇼카왕의 아들(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에 의해서이다. 마힌다 일행이 스리랑카로 온 경로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며 이들은 서부 인도지역의 팔리어를 사용하는 상가(승가)로서 이 상가는 상좌부파였다.
이 당시 스리랑카의 국왕은 데바낭피아티사(재위 BC 250-210)로 이들에게 수도인 아누라다에 최초의 사원인 마하메가바나(大雲林)를 기증하였고 이것이 정비되어 마하비하라(大寺)라는 사원이 되었는데 이 사실로 미루어 봐서 스리랑카에도 자이나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우대 받았다는 것은 스리랑카에 벌써 불교가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이거나 건국신화에 인도에서 건너온 것으로 되어있는 왕족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역시 대륙에서 건너온 불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스리랑카에서는 불교가 별다른 저항 없이 처음부터 왕실의 지원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밧타가마니아바아(재위 BC 43-17)왕이 자이나교사원을 부수고 아바야기리비하라(Abhayagirivihara,無畏山寺)라는 사원을 세워 마하티사 장로에게 기증하는데 이 장로에게는 기존의 상가 입장으로 봤을 때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출가자이면서 일반 가정에 출입이 잦았으며 이 장로와 함께 있는 승려들도 왕의 신임을 믿고 오만한 행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강하게 비판되면서 상가에서 추방을 당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어쩌면 왕실의 신임을 얻기 위한 불교집안내 권력싸움에서 마하티사 장로가 밀려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때 그는 동조자와 함께 아바야기리비하라(無畏山寺)를 근거로 새로운 상가를 조직한다. 이것은 스리랑카의 불교사에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대사파(大寺派)와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계율을 중시하지 않는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으로 대사파의 경우 정법의 맥이 흔들린다는 위기감 형성과 그 당시 외부의 침입과 기아로 발생한 시대적 불안감이 결합되어 불교사상 최초로 최대 편찬사업의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5백의 비구가 암송으로만 전해지던 부처님의 교법을 문자로 옮기는 작업으로 경 율 논 세가지를 집성하고 주석까지 달아 아루비하라석굴에 보관하였다. 이것은 10여년의 기근과 전란속에서 왕실의 후원도 없이 행한 자주적 결속으로 비록 차이는 있으나 우리의 팔만대장경을 연상케 하는 대사업이다. 그리고 암송으로만 전하던 교리를 문자로 옮긴 대대적 사업이라는 점도 시대적 변혁으로 받아들일만 하며 스리랑카의 중요한 보물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이왕 보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리랑카의 불교보물에 대해서 몇가지 소개할까 한다. 먼저 전도사 마힌다의 여동생 상가미타가 부다가야의 보리수 남쪽 가지를 꺽어와 심은 보리수나무이다. 이것은 서민의 불교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도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다음은 스리랑카에서 목숨처럼 아끼는 보물로서 바로 부처님의 왼쪽 송곳니이다.
이것을 왕궁의 담마차카라는 곳에 안치하고 일년에 한번 무외산사로 옮겨 성대한 <불치제(佛齒祭)>라는 행사를 베푸는데 불치보호장관이 있을 정도로 관리에 힘을 쏟고 있으며 몇개의 모조품을 만들어 과거 외국의 침입과 약탈속에서도 진품만은 지켜올 수 있었다. 이렇게 독실한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 상좌부만 전래된 것은 아니다. 공(空)사상을 강조하는 대승계열의 방광부(方廣部)가 전래되지만(3세기초) 이단으로 간주되고 배척받는다. 계율과 전통을 중시하는 상좌부에게는 모든 것이 空이고 필요 없다는 식으로 공사상은 이해되었을 것이다. 또 7세기말경의 남인도 키스트나강 유역에서 성립된 밀교의 한 흐름이 스리랑카에서 행해지는데 한때 밀교의 중심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밀교의 신비주의는 결국 종교계를 혼돈의 상태에 빠지게 하고 무지한 이들이 믿는 가르침이라 하여 거센 비판을 받는다. 이리하여 비자야바후 1세(재위 1059-1113)가 버어마의 상좌부 장로를 초청해와 어지럽던 스리랑카 불교의 법통을 다시 잇게 한다. 스리랑카와 버어마등은 서로 자국의 불교가 쇠퇴하면 이웃나라의 장로를 초청하여 법통을 잇는데 이것은 같은 상좌부 불교로 원형에 가깝고자 노력하는 부파이므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국가의 차원을 떠나 그 만큼 불교의 법통을 중시하였기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붓다고사는 인도에서 태어나 출가한 후 마하나왕(재위 409-431)때 스리랑카로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 당시 번창하던 무외산사에 있었으나 대사쪽에 순수한 법통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옮겨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싱할라어의 주석서(註釋書)(미힌다장로가 인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경전에 대한 주석서이다.)를 수집하여 삼장에 대한 완전한 주석서를 편찬했는데 이것은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기억이 용이하면서 시적인 정서를 느끼도록 노력한 하나의 작품으로 그의 업적은 대승불교에서의 나가르주나(龍樹)에 버금가는 칭송을 받고 있다.
스리랑카불교는 확실히 민중 속에 파고들어가 그들에게 삶의 의의와 생활원리, 공덕관념에 근거한 선행 등을 가르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을 교단사 측면에서 보면 항상 왕권과 밀접한 관련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11세기에 버마, 13세기에 태국, 그리고 14세기에는 캄보디아로 각각 불교를 전파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불교는 배척당했다. 그 뒤를 이어 이섬은 네덜란드가 지배(1655-1799)하게 되는데, 이 때 다시 승단의 법통이 끊어졌다. 17세기초 스리랑카왕 비말라 담마 수리야2세는 버마에서 비구를 초빙해 법통을 이었으며, 17세기 후반에는 태국으로부터 다시 전법을 받았다.
현재 태국에 의해 부활된 씨암파, 버마에 의해 부활된 아마라푸라파와 라마니야파가 있으나, 씨암파가 가장 우세한 승단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스리랑카는 인구 1천500만명 가운데 67.4%가 불교도이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17.6%, 기독교 7.8%, 회교도 7.1%, 기타 0.1%이다. 이 가운데 불교도는 대부분 싱할라인이며, 힌두교는 남인도의 타밀계 인종에 한정되어 있다. 헌법에서는 <세속국가>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불교에 최우선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섬 전체는 불교적 세계관이 지배한다고 보아야 한다.
스리랑카에서 사찰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며, 중앙의 행정부서는 없다. 승정은 명예직이며 상징적이다. 승정의 임무는 수계식을 주도하고 합동행사나 주요업무에 대한 회의를 소집하여 주재하는 것이 전부다. 사찰 재정은 신도회에 의해 관리된다. 사찰의 헌금함은 승려와 신도, 은행측의 3자 입회하에 개봉되는데, 은행에 예금된 돈은 필요할 때 신도회에서 인출하고, 모자라면 신도회에서 모금하여 충당한다. 승려에게 금전을 보시하는 일은 없다. 공양은 신도회 주관으로 차례표를 만들어 대중공양을 올린다. 대중공양을 올리는 날은 그 집안의 경사날이다. 집안식구는 물론 친척까지 동원된다. 스님들에 대한 공경이 철저한 만큼 파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여자가 스님의 방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으며, 용무가 있으면 밖에서(대중이 보이는 곳) 대화한다. 스님이 여자와 어울려 웃는 일은 없다. 스리랑카스님들은 보통 12세쯤 되었을 때, 동진출가한다. 양가의 자제로서 장남이나 외아들이 아닌 건강한 어린이만 선택되며, 이들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사원교육제도인 <피레베나>에서 교리. 수행. 일반교양. 불경 등을 배운다. 이 학교에서는 세속의 신도도 교육을 받는다. 스리랑카에서의 불교의식은 대체로 밤에 행해진다. 신도들은 밤에 사찰을 찾아와 설법을 듣는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대개 꽃이며, 낯에 꽃을 채집해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담아와 공양을 한다.
중요한 불교의식으로는 포야데이와 페라헤라, 보리수공양 등이 있다. 포야데이는 매월 음력 보름날 하는 행사로 금욕, 참회의 날이다. 모든 신도는 이 날 육식을 금하며 흰옷을 입고 독경과 정진. 설법을 듣는다. 페라헤라는 유명한 불치(佛齒)를 코끼리의 등에 올려놓고 벌이는 순행제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민속행사의 하나다. 이 행사는 불치가 처음 들어온 4세기경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또 보리수 공양은 성수(聖樹)가 있는 마하보디사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 신도들은 나무 주위를 7번 돌며 물을 뿌린다.
스리랑카 스님들의 사회활동은 철저한 자비행의 실천이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유아원과 일요학교는 영세민을 위한 것이고, 고아라든가 지체부유자를 보호하는 곳도 불교단체이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사회사업가 아리야라트내씨도 독실한 불교신자다. 스리랑카 불교는 완전히 민중의 생활속에 파고들어가 있다. 집집마다, 사무실과 버스에도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아침 5시반 국영방송국의 예불방송에 맞춰 예불을 시작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3. 버어마(미얀마)의 불교
버어마는 버어마족과 카친족, 카렌족, 산족, 몬족등 다양한 종족이 모여 있으며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인도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 지형상으로 말레이반도까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상부와 하부로 나뉘어진다. 버어마족은 상부 평원지역에 있으면서 북인도지역에서 넘어온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하부지역은 인도의 아쇼카왕시대 전도사인 (기원전 3세기경) 소나와 유타라 라는 전도사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인 몬족이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하였다. 11세기초 버어마족의 영웅 아노라타왕(재위 1044-1077)이 버어마지역의 대부분을 통일시키고 몬을 공격했다. 몬을 공격했던 이유는 청정 비구와 팔리어 성전을 보내달라고 그 당시 몬의 왕이었던 마누하왕에게 요구한 것이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교를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아노라타왕은 1057년에 몬을 멸망시키고 팔리어의 삼장과 주석서들을 가져왔으며 비구 500여명을 자신의 파간왕국으로 데리고 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때부터 대승계열의 범어 성전 대신 팔리어 성전을 통일적으로 사용케한 것으로 이것은 통일된 버어마에 본격적으로 상좌부가 수립됨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파간에 완전한 상좌부 불교의 상가가 생기자 외국의 상가와 빈번한 교섭을 가지게 되는데 앞에 이야기 된 스리랑카에 비구들을 파견한 것도 11세기 후반인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 파간 왕국도 몽고군의 침입으로 1287년에 멸망하고 이백여년의 혼란 속에서 두개의 국가로 정리되는데 이 중 페구를 수도로 하는 라만냐데사의 왕 담마체디(재위 1472-1492)가 1475년 스리랑카에 대규모 파견단을 보내 새롭게 불교의 융성을 꾀하고자 하였고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장로들에게 켈레니아 도량을 마련하여 주었는데 이후로 스리랑카의 대사파에게서 전승해 온 순수한 작법으로 통일시켜 라만냐데사의 수계작법(부처님이 제정한 계법을 받는 세부적인 절차)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남방불교에서의 라만냐파 불교의 기원이 된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이러한 전통은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버어마는 국민의 85%가 불교신자로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생활면이 불교와 밀착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교의면보다는 계율면을 중요시해 온 버마불교는 스단마의 다수파, 스와에이진의 개혁파, 도바라의 엄격파 등의 셋으로 구별되고 있다.
1948년의 독립 이후에도 국민들의 불교 신봉의 태도는 변하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세계불교회의를 설치 불교연구와 포교를 추진하여 오고 있다.
또한 제6결집을 원조해 독립 후의 불교부흥과 정치에 있어서의 불교의 역할을 국내외에 과시하였다.
『미얀마의 민족과 불교』
현재 미얀마의 인구는 한국 인구와 비슷한 약 4700만 정도이며 이들은 버마어를 공통어로 사용하고 각 소수종족 고유의 언어 242종류가 공존하고 있다. 다수 종족으로 구성되된 미얀마에는 주 종족인 버마 족이 68%, 샨 족 9%, 꺼인족 7%, 라카인 족 4%, 중국계 3%, 몬족 2%, 인도인 2% 그 외 까친, 친, 꺼인 등의 소수종족이 5%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종족 중에 흥미로운 점을 가지고 있는 몇몇 종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황금의 삼각지대(Golden Triangle)'에 주로 거주하며 성격이 난폭하기로 유명한 '와'족을 보자. 이들은 초기 화전식 경작법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던 농경민으로서 약용으로 재배하던 아편을 점차 경제적인 목적으로 대량 생산하여 미얀마, 라오스, 태국의 경계지역에서 현재 세계 공급량의 6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다음으로 '버다웅'족은 여인들이 목에 링을 달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링을 달게된 유래라면 노예 상인에게 선택되지 않기 위해 행해졌다는 설도 있지만 현재는 그 수와 종류로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추측할 수 있다.
미얀마 종교는 불교국가라 불릴 정도로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불교 유적지, 문화뿐만 아니라 그 신도들의 구성비가 전체인구의 89.4%를 차지한다. 나머지 10%에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정령숭배자들 순위이다. 미얀마에 불교가 전래된 계기는 403년 인도 승려 부다고사(Buddhaghosa)가 하부 미얀마의 따톤(Thaton)에 빨리(Pali)어 경전을 들여오면서부터 상좌부 불교가 미얀마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실상 상좌부 불교가 융성하게 된 시기는 11세기버간왕조 아노야타(Anawrahta)왕이 상부 미얀마의 아예찌 불교를 축출하고 따톤으로부터 상좌부 불교를 도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융성하였다. 이렇듯 미얀마의 불교는 지배자에 의해 장려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는 국민적 정체성을 유발시키는 동인으로써 불교가 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과거 미얀마 왕조사를 보면 왕의 통치권이 왕실 주변에 국한되어 있을 정도로 대부분의 통치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배자가 국가를 유지하고 한정된 통치범위를 확대시키기 위해서 나라 전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불교의 보호 및 후원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었다. 이 결과로 국민들은 국가를 벗어나지 않고 안주할 수 있었다. 상좌부 불교는 이러한 이유로 미얀마인의 의식 속에 많은 비중을 차지 해 왔는데 그 예로 도처에 널려 있는 파고다, 마을마다 '짜웅'이라는 사원이 하나이상 있고 새벽마다 '폰지'(승려)들의 탁발행렬에 경건한 마음으로 시주하는 불도 신자들의 모습에서 쉽게 엿 볼 수 있다.
불교가 미얀마인의 의식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배경은 불교의 전통적인 사회적 역학 때문이다. 미얀마의 언어는 불경을 기록하였던 빨리(Pali)어의 영향을 받아 미얀마어로 정착할 수 있었고 불교의 법전인 담마(dhamma)가 법을 대신하였고, 승려들은 이를 다음세대에게 전달하는 교육적 역할을 담당했고, 사원들은 공공교육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렇듯 불교는 미얀마인들의 생활철학이자 가치관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4. 타이(태국)의 불교
타이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중심부에 있는 국가이다. 타이족이란 그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는 샴 족과 라오 족을 지칭하는 말인데 처음에는 중국 남쪽에 위치하며 대승불교권에 속했으나 차츰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크메르족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고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크메르족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이족은 이들의 영향 아래서 상좌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들도 국가를 세우고 14-16세기에 걸쳐 전성기를 누렸으나 1766-1767년에 그 동안 침공해 오던 버어마가 대군을 동원하면서 침략해 와 멸망하게 되고 대부분의 사원이 파괴되어 정확한 역사의 파악이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러나 한창 이름을 날렸던 아유티아 왕조때 시리스리야반사라마왕은 1361년 스리랑카 대사파의 가르침을 사신으로 하여금 받아오게 하여 국가적 가르침으로 삼았고 이후의 모든 왕들도 불교를 신봉하였다. 버어마에 의해 멸망한 후 많은 혼란기 속에서 1782년 방콕왕조가 들어선다. 이 방콕왕조는 몽구트왕(재위1851-1868)때 근대화가 되는데 그는 비구 생활의 경험이 있었으며 각종 개혁을 단행한다. 이 사실은 불교가 우리 나라에서는 수구세력이고 미신적이고 전근대적으로 인식되어지는 반면 이 지역에서는 새로운 사고를 추구할 수 있는 능동성과 근대적인 사고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태국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풍습입니다. 동네의 스님들이 시주 단지를 들고서 동네를 쭉 돌면 미리 나와 있는 동네 주민들이 스님들에게 그날의 일용할 양식과 절에서 필요한 소모품들을 시주하지요... 스님들은 어떤 음식이던지 가리지 않고 받아야하고, 또 불평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준 음식에 고기가 섞여 있어도 그냥 먹습니다.
위의 사진중에 왼쪽에 흰 옷을 입고 리어카를 끌고 있는 청년은 스님 도우미지요.... 넘 많은 음식을 시주 받으니까 이렇게 도우미가 스님 옆에 붙어 다니면서 시주한 음식을 대신 운반해 줍니다.
▒ 역사 ▒
13세기에 선주민인 몬족(族)과 크메르족이 쇠퇴하자 치앙마이를 수도로 정한 북부 타이의 랑나타이 왕국(타이유안족), 수코타이 타이를 수도로 정한 중부 타이의 수코타이 왕국(시암족), 라오스와 동북 타이에 걸친 란산 왕국(라오족) 등 타이 민족의 소왕국 이 각지에 생겼다. 아유타야 왕조(1350∼1767)는 위계전 제도(位階田制度)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를 구축하였다. 1767년에도 다시 미얀마 군대에 점령당했으나 아유타야 왕조의 무장(武將) 프라야 탁신[鄭昭]이 미얀마를 격파 하고 톤부리 왕조를 세웠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 열강들의 압력이 드세어져 1855년에 영국과 보링조약을 맺고 자유무역항과 치외법권을 승인하였다. 그 뒤 왕족 전제(專制)에 의한 정치적 부패에 불만이 높아지자 1932년 6월 24일 인민당이 무혈 쿠데타에 성공, 12월에 헌법을 공포하고 입헌군주국으로서 발족하였다. 열강의 진출로 아시아 각국이 식민지화된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1939년에는 국호를 시암에서 타이로 변경하였다. 1947년에 피분파(派)가 쿠데타로 프리디 등을 추방하고 군부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군부내에서 대립이 심해졌다. 사리트가 죽은 뒤 정권을 인계받은 타놈은 1971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군정 으로 환원시켰다. 1973년 12월 국왕은 타마사트대학 학장 산야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1976년 10월에는 군부가 타놈의 귀국을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제압한 데 이어, 새 내각을 발족시켰으나, 1977년 10월 국방장관 겸 최고사령관 크리앙사크가 타닌을 축출 하고 총리에 취임하여 1978년 새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1980년 2월 야당이 제출한 불신임안으로 사퇴하였고, 프렘 국방장관 이 총리에 취임하였다. 1988년 선거후 프렘은 정부에 남아있기를 권유받았으나 강력히 거절했다. 그의 후계자인 차티차이 춘하벤 은 쑨톤 콩쏨퐁 장군의 무혈반란으로 1991년 2월에 쫓겨났다. 선거를 하지 않고 임명된 군대수상은 1992년 3월 강력한 일반 여론의 항변에 의해 만들어져 새 입법하에 치뤄진 선거후에 정식 으로 취임되었다. 군대지배하의 잔혹한 진압이 수상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왕이 과도기에 시민의 수상을 임명하게 했다. 구민주당은 1992년 9월 선거에서 소수의 다수당을 이겨 추안 릭파이가 수상으로 있는 시민정부와 연합했다. 현재의 태국 은 입헌 군주제로 1932년 이래 현재의 국왕인 푸미폰 압둘야뎃(H.M. King 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에 이르기까지 태국의 국왕들은 국회를 통하여 입법권을, 수상이 이끄는 내각을 통하여 행정권을, 사법부를 통한 사법권을 행사해오고 있다.
사회구조와 가치관
불교국가이자 농업국가인 태국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으로 국가의 존립이래 외세에게 독립을 잃은적이 없는 국가로 알려져 있다. 국가 존립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태국인들은 왕을 중심으로 지혜를 다하여 극복하였으며
일찍부터 들어온 서양의 문명과 문화에 대하여도 결코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 이질적인 외래 문화를 태국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신문화로 태국화하여 발전시켜 오고 있다.
한 나라, 한 민족의 의식구조, 또는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보면 태국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타이족의 고유문화와 불교문화, 농경문화 그리고 1932년까지 지속된 전제군주제의 영향-싹디나 제도-을 간과하여 태국인의 의식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태국인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을 어떻게 하며 어떠한 행위를 할 것인가 하는, 또는 일상생활에서 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선택, 취향, 관심의 방향, 언행, 사고, 희망, 기호 등으로 표현되는 결정이 바로 태국인의 의식이자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엠브리(John F. Embree)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태국 사회는 '느슨하고 완만하게 구조화된 사회' 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엄격히 조직화된 집단들이 결여되어 있고 자발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신들의 행동을 규제받기 보다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유롭게 개인간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인간의 상. 하 관계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태국 사회구조의 특징이다. 이러한 것은 옛부터 국왕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전제군주국이었고, 따라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회내의 위계적 신분질서가 근래 태국사회에로 계속 이어져 온 것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태국은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의 혜택은 태국 사회내에서 집단의 필요성을 약화시키고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성향을 갖도록 했으며, 한편 태국인과 태국사회의 정신적인 면을 지배해 온 불교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생활철학"으로써 태국인의 가치관을 형성해 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타이족의 "타이"라는 단어는 "자유"를 의미한다. 엄격한 형식이나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무엇이든 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선호한다. 태국인들은 농업을 생업으로 하면서 자유스럽게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고 있다. "진짜 태국인은 농민이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태국인은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있다. 전인구의 약 80% 이상이 농업, 수산업, 목축업, 삼림업에 종사하고 있다. 땅을 중심으로 살고있는 이들은 농사를 중심으로 공동체적 모임이나 행사, 축제가 발달하였으며, 따라서 온 동네사람들은 마치 한 집안 식구처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어 공동체 의식이 강하고 낙천적이다. 땅이 생활의 원천인 이들은 별로 이사를 하지 않고 사회적 신분의 변화도 거의 없다. 대신 토지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가족을 중심으로한 응집력이 강하며, 전통적으로 가족중심의 자급자족을 위한 경제활동을 하고 있어 소비자와 생산자의 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농민들은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어서 인습이나 관습에 집착하며 변화에 스스로 적응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도시인보다 느리고 소극적이다. 따라서 태국인들은 깊은 사고를 하거나 창조적 고통을 기피하고, 무슨 일이든 빨리 끝내기를 바라며 일의 결과가 좋던 나쁘던 상관하려 하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했다는데서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영국인들은 연구하는데 재미를 느끼고 미국인들은 일을 하는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면, 태국인들은 일을 보는 것 그 자체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개인의 감정, 느낌, 관습에 의존하는 성향이 비교적 강하며, 원칙이나 이념보다는 자유를 선호하고 개인간의 관계를 더 중시한다. 인과응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부모에게 효도함은 물론 대인관계에서 은혜를 알고 보답할 줄 알아야 한다. 은혜를 모를 때에는 "아까딴유"라고 비난받는다. 그러므로 의식이나 체면을 중시하여 결혼, 장례식, 각종 잔치, 보시 등의 일상 생활상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낭비도 서슴치 않는다.
또한 태국은 권위주의 사회이며 신분사회이다. 건국이래 태국은 왕을 정점으로한 통치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13세기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정착하여 쑤코타이 왕국을 건립한 이래 1932년에 입헌혁명에 의해 민주주의 제도가 들어올 때까지 태국은 전제군주인 왕을 최고의 통치자로 한 절대왕국이었다. 쑤코타이 왕국에서 아유타야 왕국, 톤부리 왕국, 그리고 랏타나꼬신 왕조(현 짝끄리 왕조)에 이르면서 왕의 성격은 만백성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사랑과 자비, 불교적 윤리성에 입각한 통치자, 즉 탐마라차(Thammaracha, Dhammaraja, 정의로운 왕, 법왕)의 성격과 신왕(Thevaraja), 생명의 주인 (Lord of Life), 그리고 전 영토의 주인 (Lord of Land)의 성격을 지닌 카리스마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싹디나 제도에 따르면 태국인들은, 특히 평민은 누구나 상전을 섬기게 되어 있다. 평민은 왕이나 왕족, 또는 관료를 상전으로 모시고, 매년 일정기간씩(처음에는 6개월이었으나 아유타야 왕국 말기에는 4개월, 짝끄리 왕조 초기에는 3개월로 단축 됨) 상전을 위하여 경작하고 건설공사에 참여하는 등 봉사하고 부역을 하여야 했다. 상전들은 사법권이 없는 평민을 대신하여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러한 상전과 평민과의 관계를 흔히 후견인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라고 하고 있다. 이 후견인 관계는 태국인의 의식속에 자리잡아 아직도 인간관계를 비롯한 생활 여러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사회는 1932년 6월 24일에 입헌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잘 유지되어 공적인 면에서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엄격히 강조되는 사회였지만 사적인 인간관계는 극히 개인적이며 자유롭고 평화롭고도 낙천적이다. 왕실 및 고위 관료사회를 중심으로 서양의 신문화가 도입되고 독립유지를 위한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평민의 부역제가 폐지되고 노예제도 해방되었다.
태국인들의 의식은 윤회와 업보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는다"라는 의식을 굳게 믿는다. 특히 악과는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당사자가 아니면 후손이 받는다고 믿어 공덕쌓는 일에 정성을 다 한다. 아침마다 탁발나온 승려에게 음식을 바치거나 절의 사업, 예를 들어 불상을 조성하거나 사원을 수리하거나 승려의 여행, 승려에게 일용품을 지원하는 일 등등은 "탐분(make merit)의 일환으로 이루어지고 행해진다. 어려움에 처한 다른사람이나 동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자비심을 갖고 도와주는 것을 인간의 도리로 여긴다.
엣부터 사원은 태국인에게 있어 생활의 중심지이며, 승려는 생활의 스승이자 안내자였다. 그러므로 학교, 병원, 재판소, 오락장, 놀이터, 여행객을 위한 여관, 복지관, 집회장, 박물관, 양로원, 고아원, 창고, 장례식장 등의 기능을 하며, 승려는 종교적인 역할외에 스승, 상담자, 신문물 전달자, 재판관, 의료인, 정부와 국민의 가교 역할 등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은 시골일수록 강하다. 한마디로 불교와 사원, 승려는 태국 사회의 보수성과 일체감의 상징이며, 정신적 총체가 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승려와 사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태국 사회에서 승려는 절대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왕실에 있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사람은 승려밖에 없다. 승려는 국왕앞에서도 절하지 않는다.
승려가 엎드려 절해야 하는 대상은 부처님뿐이다. 이러한 승려와 승려가 거처하는 사원은 태국 사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1. 교육기관 : 종교에서 경전은 대개 번역하지를 않는다. 일반 다른 언어로 번역하게 되면 가르침의 참뜻이 얼마간은 변하거나 소실되기 때문이다. 한자로 번역된 경전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태국의 불교는 아직까지 팔리(Pali)를 쓰고 있다. 태국어에는 우리말의 한자어 수만큼이나 팔리어와 싼스크릿트어가 섞여 있다. 따라서 글을 잘 아는 사람은 승려였다. 태국에서 승려는 훈장이고 승려가 있는 절은 서당과 같은 곳이었다. 태국어에서 학교라는 의미를 지닌 "롱리얀"이란 말은 근대에 들어와 서구식 학교가 설립되면서 생겨난 신조어이다. 옛날에는 학교라는 단어가 아예 없었다. 절이 곧 학교이고 승려가 선생님이었다. 우리가 이름을 대개는 한자어로 짓듯이 태국사람들도 이름을 대개는 팔리어나 싼스크릿트어로 짓는다. 따라서 글을 모르는 주민들이 작명을 청해오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승려의 일이기도 했다. 태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절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 주로 승려들이 일반 학문을 하지 않고 정해 놓은 과정에 따라 불교를 공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험에 합격할 경우에 나름대로 속세에서 배우는 일반 학문의 학위에 버금가는 증서를 받고 그 학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2. 의료기관 : 태국에서 사원은 곧 병원이기도 했다. 오늘날처럼 병원이 많지 않던 시절에 글자를 아는 승려들이 주로 민간요법에 관한 서적을 읽고 의학 지식을 습득한 후에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위생과 보건을 돌보기도 했다. 따라서 누가 아프면 먼저 절에 와서 승려를 찾았고 승려에게서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의 승려들은 민간요법에 의한 의학지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3. 사회복지기관 : 불타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를 베푸는 승려와 사원은 그 자체가 사회복지기관이기도 했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절에 기거하면서 승려의 심부름을 하거나 절의 잔일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태국어로 "데카와트" 또는 "아람버이"라 부르는데 오늘날에도 태국 전역의 사원에 적지않은 아이들이 기거하고 있다. 또 사원은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잠자리를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잠자리를 제공해 준다. 오늘날까지도 태국을 여행하면서 절에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하룻밤 자고 가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밖에도 태국 사회에서 승려와 사원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교 국가인 까닭에 불교명절을 중심으로 한 태국의 축제나 큰 행사는 대개가 절에서 열려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화합과 단결을 이루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정문제나 주민들간의 불화가 있을 때에도 주민들이 찾아와 의논하고 이를 중재하여 처리해 주는 곳도 승려가 있는 사원이다. 이처럼 사원은 태국인들에게 공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사원은 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않될 정신적 구심점이며 마음의 안식처이다. 무슨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사원이다. 또 태국인들은 죽으면 승려를 모셔와 염불을 하고 장례를 치른 뒤에는 절에서 화장을 한다. 그러한 까닭에 사원은 태국인의 생의 종착지이며 승려는 삶의 최후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승려수업
승려수업이란 일정기간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승려로 불법을 익히고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태국의 불교적 전통이다. 태국의 건장한 남자라면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나 한 번 승려수업을 해야만 하는데 이를 "부엇껀비얏"이라고 한다. 또 승려수업을 하지 않은 사람을 "콘팁"이라 해서 '익지 않은 사람' 즉, 아직 선악이나 사리를 판단할 줄 모르는 미숙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성인 남자라 해서 누구나가 승려수업을 받는 것은 아니며 한쎈씨병, 나병, 간질병, 부채가 있는지, 자유인인지 등등 8가지를 심사해서 통과를 해야만 한다. 또한 태국의 승려들은 227가지의 계율을 지키며 생활하는데 이것을 "파라지카"라 하며 그 중 '살생의 죄', '여자를 범하는 죄', '훔치는 죄', '거짓말의 죄' 등 이 4가지("파티목카"라 칭함)를 범하면 교단에서 추방을 당하고 승적을 박탈 당한다. 태국에는 비구니들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옛날에는 332가지의 계율을 지켰다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너무 어려워 자동으로 없어졌다고 한다. 일단 승려가 되면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든 생활이 계율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아침 6시 전에 일어나게 되면 모두가 침소에서 나와 목욕을 하고 정해진 장소에 모이게 된다. 승려들이 모두 모이게 되면 마을에 탁발을 나가게 되는데 마을 전체를 구역별로 분류하여 거기에 따른 조를 편성하여 나누어 가게 된다. 따라서 어느 한 집도 승려가 다녀가지 않는 집이 없다.
태국인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독실하여 스님에게 공양하기 전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다.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면 지정된 장소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절대로 자신의 밥을 퍼서 먹을 수 없다. 절에서 일하는 소년들이 밥과 반찬을 떠서 바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다. 이를 "빡껜"이라 한다. 이는 승려는 남이 주는 밥만을 먹어야 한다는 불타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불교와 태국인
부모로 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이른바 모태신앙으로 불교가 태국인들에게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태국인들의 정신적, 물질적 불교문화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태국에는 현재 2만 9천 여개의 사원이 있으며 이 사원은 태국인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수시로 찾는 곳으로 정신적인 안식처로 또 하나의 집이라 할 수 있다. 태국인들은 절교하는 것을 "시주그릇을 엎는다"고 한다. 태국인들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서 승려에게 시주하며 1년을 시작하는 새해 첫날에도 시주로 한 해를 시작한다. 태국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단순한 목걸이가 아니라 스님상이다. 태국인들에게는 어느 스님은 질병을 걸리지 않게 하는 영험이 있으며 어느 스님은 재물을 가져다주는 영험이 있고 어떤 스님은 화를 입지 않게 하는 영험이 있다는 등의 믿음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이 총에 맞았는데 총알이 옷만을 뚫었을 뿐 살갗 하나 다치지 않았는데 그것이 다 그사람 목에 걸고 있는 스님의 영험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스님들은 사고 팔기도 하는데 스님상 중에 어느 것이 영험이 좋다고 알려지면 그 가격이 엄청나게 올라간다. 일부 절에서는 사진을 곁들여 신문에 판매 광고를 내기도 한다.
태국인들은 태어날 때는 집에서 태어나지만 죽어서는 모두가 절로 간다. 태국의 절 안에는 화장터가 있어 업을 다한 사람의 육신을 화장하고 영혼을 받아들여 쉬게 한다. 태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태국의 불교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캄보디아의 불교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 남부에 있는 조그만 나라이다. 캄보디아인은 이 지역에서 비교적 오래된 크메르족의 후예로 약 75%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술된 동남아시아의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내용중 부남에 관한 전설이 바로 현재 캄보디아의 지역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전설의 내용처럼 이 지역은 일찍부터 인도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부남시대에는 불교가 바라문교와 함께 서민들에게 깊이 침투하여 눈부신 발전을 했으며 중국의 구법승 義淨(635-713)의 동남아시아 여행기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권 1에는 [옛날에 부남국이라고 불렀던 나라가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천신을 모셨으며 뒤에 불교가 왕성해졌다. 현재는 나쁜 왕이 불교를 멸망시키고 승려도 없다. 지금은 불교 이외의 여러가지 종교가 성행하고 있다] 여기서 나쁜 왕이란 부남을 멸망시킨 진랍왕 바바바르만 1세로 추정된다. 진랍은 부남의 속국이었는데 독립을 쟁취하였다가 6세기 중엽 부남을 멸망시켰다. 이 당시(6세기경)에 관세음보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승불교가 유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시 상좌부불교와 바라문교도 성행하고 있었다. 이후 야쇼바르만 1세 (재위 889-900)때 크메르는 인도차이나반도의 태반을 지배할 정도로 발전하는데 이 시대에 대승불교는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1357년,1394년,1420년에 걸친 타이족의 침략으로 그들의 수도인 앙코르 톰을 포기하고 로베크로 새 도읍을 옮기면서 화려했던 시기도 막을 내렸다. 결국 1593년 샴(타이의 옛 이름)의 공격으로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타이족의 영향은 결국 상좌부불교를 제외한 대승불교와 바라문의 쇠퇴 및 멸망을 가져왔다.
캄보디아 약사
캄보디아에 역사상 최초의 국가가 푸난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국가는1-6세기경까지 메콩강 삼각주 유역을 중심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번창 하였으나, 6세기말경 톤넬샵을 중심으로 성장한 젤라왕국의 성장으로 인해 쇠퇴.
역사 학자들은 캄보디아 국가형태의 출현을 푸난 왕조와 젠라 왕조에서 찾고있다.
인도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를 도입, 크메르 문자로 발전시키나, 카스트제도와 같은 인도문명은 받아 들이질 않았다.
802년 Jayavraman 2세가 스스로를 神王으로 칭하고 앙코르 왕조를 열어 1431년 샴의 침략으로 쇠퇴할 때까지 크메르 민족은 주변 국가의 지배자로 성장하였다.
베트남 남부, 라오스, 미얀마 , 태국 일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형성, 앙코르와트와 수많은 사원과 뛰어난 관개시설등 세계적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중 Jayavraman 7세때가 가장 번창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431년 샴의 침략 후,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까지 샴과( 지금의 태국) 베트남의 지배를 번갈아 받으며 왕국의 명맥만 유지, 사실상 몰락. 이 거대 왕국 앙코르의 멸망으로 백만명이 넘었던 수도(지금의 앙코르왓이 있는 시엠립) 인구의 이동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역사가들의 추측으로 톤넬샵 호수변을 따라 현재의 캄보디아 수도인 프놈펜 근처로 이동한 것으로 판단.
-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모든 문화를 베트남식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캄보디아인의 증오 촉발
- 1864년 캄보디아는 샴과 베트남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자진하여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편입
- 1884년 Norodom왕은 프랑스의 강압으로 명목상의 왕위만 유지하고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겨주는 협정에 서명.
프랑스는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현지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불어나 프랑스식 이념을 전파하지 않는 대신, 베트남인을 데려다 식민통치의 도구로 사용
캄보디아는 후방의 물자지원 기지화하고, 캄보디아 인은 종속적인 지위로 전락(1945년 프놈펜 인구의 절반이 베트남인), 캄보디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배태 나. 시아누크 왕정
- 1941년, 프랑스는 조종이 쉬울 것으로 생각되는 19세의 Norodom Sihanouk를 아버지 Norodom Suramarit 대신 왕으로 즉위 시켰으나, 시아누크는 1945년 일본의 후원하에 독립 선언.
일본 패전 후, 프랑스가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나, 1953.11월 군사, 사법, 외교권을 시아누크에게 허용, 사실상 캄보디아 독립.
-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제네바 회의에서 독립 보장
1955년 시아누크는 아버지에게 왕위를 양위, 본인은 선거를 통해 총리 (실질적인 국가수반)로 취임, 1960 부친 사후 국가수반직 회복. 독립직후, 프랑스 유학파 지식인 계층 귀국(Salth Sar: 후에 Pol Pot로 개명, Ieng Sary, Khieu Samphan), 1963년 학생시위 후 시아누크의 대규모 좌익 숙청으로 지하조직화
-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 보급로 설치 허용, 미국은 월남전을 캄보디아까지 확대
- 1969.3.18 비밀리에 캄보디아 영토 폭격 개시, 1970.5월까지 B-52기 총 3,630회 출격
- 1973.8.15까지 미국은 총 54만톤의 폭탄 투하(2차 대전 전 기간 중 일본에 투하한 규모의 절반), 이로 인한 사망자는 약 80만명으로 추정
- 월맹은 캄보디아 영토내 더 깊숙히 잠적, 보급기지 설치, 전쟁확산
시아누크 왕 외유 중 1970.3.28 Lon Nol 장군 쿠데타 성공, 4.10 공화국 수립 (Khmer Republic) 선포다. 공산 캄보디아 론놀 치하의 공화국은 반정부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탄압, Khmer Rouge의 성장배경 제공
- 베트남인 대량학살로 KR과 베트남의 합작을 초래, 대도시의 절반 이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 공산주의자들은 국민적 인기와 영토에 대한 통제력 획득
- 1975.4.12 미국, 캄보디아 철수 완료
1975.4.17 크메르루즈, 프놈펜 입성, 급진혁명 추진
- 1976.1.5 민주 캄푸체아(Democratic Kampuchea) 선포
- 도시 疏開, 농업에 강제노동 투여, 화폐.의료.교육.통신 완전마비
- 통치 3년 8개월간 기아, 질병, 강제노동, 처형 등으로 인한 사망자 170만 내지 300만 명으로 추정
- 1979.1.7 베트남군 무력으로 캄보디아 점령, 크메르루즈내 친 베트남 세력인 헹삼린, 훈센을 세워 괴뢰정권(캄보디아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수립.
- 1982년, 시아누크, 손산, 크메르루즈 반베트남 연합전선 구축 - 망명정부 '민주캄푸체아 연립정부' 구성, 유엔의석 확보
- 1989.10월 동구권 몰락과 캄보디아 운영의 경제적 부담,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라 베트남군 철수 라. 현 정부 수립
- 1989.4.30 캄보디아 공산당은 국명을 State of Cambodia로 개칭, 탈 공산주의 추진 (당명도 캄보디아 인민당 CPP: Cambodian People's Party로 개칭)
- 투표에 의한 의회구성
- 사유재산 인정, 민영화 추진
- 형법등 각종 법령 정비
- 1991.10월 전당대회에서 Chea Sim을 총재, Hun Sen을 부총재로 선출
- 1990년 UN안보리, 포괄적 캄보디아 평화안 채택
1990.10월 자카르타 비공식회의에서 4개 정파간 Supreme National Council of Cambodia 설치 합의
- 시아누크의 FUNCINPEC, 시아누크 왕정에서 총리를 역임한 손산의 KPNLF(Khmer People's ational Liberation Front), 크메르루즈, CPP 등 4개 정파간 합의
- 1991.10.23 파리 평화협정 서명 (Agreement on a Comprehensive Plolitical Settlement of Cambodia Conflict)
- 참여국: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ASEAN 6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일본, 호주, 카나다, 인도, 유고등 19개국 참가 (프랑스와 인도네시아가 공동 주재)
- 시아누크 왕 지도하에 UNTAC(UN Transitional Authority of Cambodia)와 SNC가 18개월간 통치권을 위임, 신정부 구성 추진
- 1992.3월 45개국 22,000명으로 구성된 유엔사상 최대 규모의 평화유지군 파병, 정전협정 준수 여부 감시
- 1993.5.23-28간 UNTAC 주관하에 총선거 실시
- 470만명 유권자 등록, 90% 투표 참여 - 민족연합전선(Funcinpec) 45.47%, CPP 38.23%, 불교자유민주당(BLDP) 3.8% 획득, 각각 국회 120개 의석중 58, 51, 10석 차지, 군소당 Molinaka가 1석 차지
- Khmer Rouge는 Cambodian National Union Party를 구성 하였으나, 선거 불참
1993.6.14 제헌의회, 시아누크를 국가수반으로 선출
- 7.2 Funcinpec의 Ranariddh총재와 Hun Sen CPP 부총재를 캄보디아 임시정부의 공동 총리(Co- President)로 임명
1993.9.23 헌법 공포, 9.24 시아누크 왕 즉위, 라나리드와 훈센을 Co-Prime Minister로 임명하고, 중앙 및 지방의 모든 권력을 분점하는 독특한 연립정부 구성
1993.11.15-12.31간 UNTAC 요원 철수완료
6. 베트남의 불교
베트남을 월남(越南)이라고 하는 기원에 대해 전술한 바 있다. 월남은 중국과 끊임없는 연결속에서 비교적 상세한 역사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월남은 경제, 정치, 문화등 다양한 부분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反중국적 경향이 짙은 것이 특색이다. 기원전 111년 한무제에게 토벌되어 10세기까지 천여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는다. 물론 이 사이에 대규모의 반란이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정작 월남의 민중들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고 월남이 중국의 일부라는 생각이 사라진 것은 수나라의 지배를 받기 전 6세기경 잠깐 동안의 독립기를 거치면서부터 이다. 이후 10세기경 당의 멸망을 틈타 독립을 쟁취하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꽃 피운다. 베트남의 불교사에서 최초로 불교를 전한 이는 後漢 末에 중국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남하한 인물 가운데 모자(牟子)라는 학자라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추측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2-3 세기경 인도차이나반도의 모든 곳에 퍼져가던 인도의 승려와 상인들에 의해 불교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당시 국경의 남단이었던 교주에 상당수 인도 문화권의 사람들이 漢인과 베트남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만 봐도 이해될 수 있다. 이 교주라는 곳은 베트남에서 불교의 번영을 대변해 주는 도시로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중국의 삼국 위 진 남북조 시대의 왕성한 불교의 발전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월남이 중국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월남인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었다. 580년 교주의 법운사에서 인도의 선을 전한 남천축의 바라문 출신인 비니다류지가 이 시기에 활동하게 되는데 이후 비니다류지파의 선은 9세기경 無言通에 의해 시작된 무언통파와 쌍벽을 이루면서 베트남의 李朝 말기까지 법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 4조 청변 사이의 조사 이름이 확실치 않고 7세기 이후에야 일파로서 구체적 모양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베트남 불교는 중국 문화의 강력한 침투로 사실상 중국풍의 불교였다. 무언통파는 육조 혜능으로부터 따져 4대째인 백장(百丈)에게서 남종선을 이어 받은 무언통이 [어디에서나 생활에 충실하면 그것이 선]이라는 백장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무언통의 제자 감성을 제 1조로 하여 무언통파를 확립했다. 이름에서도 풍기듯이 비나다류지파는 인도의 선을 시작으로 한 파이고 무언통파는 중국의 선을 시작으로 한 것이다. 이것만 봐도 교주를 중심으로 베트남의 불교가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서 중심역할과 전달역할을 하면서 얼마만큼 불교 선진국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무언통파는 비니다류지파보다 백년 더 법맥을 잇다가 진조(陳朝) 聖宗(재위 1258-1278)에 의해 생긴 죽림파에게 이어졌는데 죽림파는 중국식 불교를 베트남식 불교로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독립후 초기 왕조인 정조(丁朝), (전)여조(前黎朝)의 짧은 기간을 지난 후 李朝를 거치면서 승려의 정치 참여가 아주 두드러지는데 마치 우리나라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국사가 있었듯이 이들 국가에서도 정책자문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이것은 중국의 영향이나 인재 등용의 문제를 불교만이 해결할 수 있었던 점도 있겠지만 얼마만큼 이 지역에서 불교의 세력이 정권에게 필요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정치참여 속에 이루어진 발전은 이조의 멸망뒤에 이어 생긴 진조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당시 왕이었던 인종이 무언통파 제17대 혜충(慧忠)을 스승으로 출가하는데 이 인종이라는 인물은 왕이었을때 몽고의 세차례에 걸친 원정을 물리친 시대의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죽림파는 대중들에게 쉽고 빠르게 퍼졌으며 몽고의 침입으로 더욱 발전한 민족의식은 죽림파를 베트남식 불교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발전하던 불교도 끊임없는 유교의 도입과 중국식 관직개편의 시대적 변화속에서 서서히 왕족과 중앙정치세력에서 밀려 나오게 된다. 진조시대부터 이 같은 징후는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불교는 그 대상을 귀족이 아닌 일반 백성에게로 돌려야 했고 서민들의 생활 깊숙히 잠식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불교가 밀려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 나라의 고려시대까지 우대 받아 오던 불교의 타락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교로서 존중받는 종교는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타락하기 마련이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종교로서의 청정성을 잃기 마련이며 더 이상의 국가 이념으로서의 매력을 잃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러한 속에서 진조가 망하고 중국의 명나라에 의해 1406년 월남지역은 또다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명은 베트남의 불교서적을 약탈해 가고 정토경전들을 유포시키는데 이는 불교를 통한 식민지정책중에 일환일 것이다. 하지만 서민들속에 살아 움직이던 불교는 베트남의 독립을 꿈꾸는 민족주의자로 둔갑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후 격렬한 투쟁속에서 다시 독립을 쟁취한 국가는 후여(後黎)인데 이 국가는 유교의 적극적 정치도입을 강력하게 하여 불교는 더욱 정치와 멀어지게 되고 서민들의 삶속으로 빠져든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서민속으로 들어간 죽림파 불교는 겉으로는 임제선을 주장하지만 염불과 밀교의식, 베트남 민간신앙인 신도(神道)를 혼합하여 정토교 계통의 연종(蓮宗)으로 성립된다. 이때부터 불교는 후에 완조(阮朝)시대를 거쳐 프랑스 식민시대까지 정치권의 비판세력으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외치는 민족종교로 그 모습을 변모시켜 나간다.
베트남의 종교
베트남의 주 종교는 불교와 천주교이다. 소수 기독교인과 베트남 자생 종교인 까오다이교인도 있다. 물론 무신자(Vo Than: 보턴)도 상당수 분포한다. 매일 조상의 단 앞에 향을 사르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종교성이 많은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전 국민의 60∼70%정도 불교를 믿는다. 불교를 다오펏(Dao Phat)이라고 부른다. 베트남 시골에서 노란 승복을 입은 탁발승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날씨가 더운 탓에 승복은 얇고 노출이 많은 편이다. 불교 신자들은 덕(德)을 베풀며 적어도 한 달에 4번은 채식을 한다. 껌짜이(Cam chay)라 불리는 채식은 음력 30, 1, 14, 15일 4일간 먹는다. 특히 음력 초하루, 보름 시내 껌짜이집(채식 식당)은 채식을 먹는 사람들로 분 빈다. 베트남 불교의 최대 명절은 부처님 오신 날(Ngay le phat dang)이다. 이 날 절 주위는 인산인해(人山人海)로 발 디딜 틈도 없다. 신자들이 절을 찾을 때는 사를 향(Nen huong)을 준비한다. 음력 7월 보름 부란(Vu lan)도 중요한 명절이다.
베트남은 프랑스 영향으로 17세기부터 많은 성당들이 세워졌다. 천주교는 다오티엔주어(Dao Thien Chua) 혹은 다오꽁야오(Dao Cong Giao)라 불린다. 전 국민의 15%정도가 천주교이며 도시마다 규모가 상당히 큰 성당들이 다수 있다. 주일날은 자리가 부족해서 밖에서 예배보는 성도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천주교는 성모 마리아(Duc Me)를 믿으며 각 집안마다 조상을 섬기는 단(Ban to tien)대신 마리아 상을 섬기고 있다. 띤란(Tin Lanh)이라 불리는 기독교는 신자가 1% 미만으로 아주 적으며 당국의 규제와 감시가 많다. 목사 수를 제한하며 그나마 있는 교회도 폐쇄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개인적인 가정 예배를 금지하고 반드시 당국이 허락하는 교회에 가서 모임을 가져야만 한다. 베트남에서는 기독교 선교 활동이 금지되며 만약 선교 활동을 하다가 적발될 때는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외 신자는 적으나 베트남 자생 종교 다오까오다이(Dao Cao Dai)가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사이공 북서쪽 떠이닌(Tay Ninh)지방에서 응오민찌에우(Ngo Minh Chieu)에 의해 창시되었다. 까오다이교는 기존에 있던 유교, 불교, 천주교 사상을 종합하여 만든 일종의 혼합 종교이다. 교인들은 인간의 선한 마음과 평등을 상징하는 턴못맛(Than 1 mat: 눈이 하나인 신)을 섬기며 흰옷을 입고 채식을 한다. 까오다이교는 반 프랑스 운동을 펼쳐 당시 억압받던 사이공 남부 지방에 급속히 퍼져 나갔다.
7. 라오스의 불교
14세기 란쌍왕조시대 상좌부 불교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라오스(LAOS)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유일하게 4면이 육지로 갇혀있는 라오스. 면적은 236,888㎢로 남한의 3배가 넘으나 인구는 5백만으로 10분의 1에 불과한 나라다. 인구의 95%가 불교신도로 대표적인 불교국가인 라오스에는 3000여개의 사찰에 2만여 명의 스님이 상주하고 있다. 도시전체가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도 루앙프라방을 방문한 5일은 라오스 스님들이 3개월간의 안거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이날 아침 5시부터 사찰 앞에는 신도들이 모여들어 탁발하는 스님들에게 정성들인 공양을 올렸다. 라오스 달력에 의해 음력 7월 5일 입재에 들어가는 안거는 우기인 3개월 동안 이어진다. 안거 중에는 가족과 친지의 죽음이 있을 경우 큰스님의 허락을 맡아 외부에 나갈 수 있을 뿐, 사사로운 출입이 금지된다고 한다. 라오스 내에서 스님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출가를 제외하고, 누구나 정식 스님이 될 수 없다. 스님이 되려면 지방행정기관과 라오인민청년동맹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가족 중 출가한 사람이 있을 경우 대단히 명예롭게 생각한다. 사찰에서도 새로운 출가자가 생기면 대나무에 긴 종이 연을 매단 퉁을 세워 축하한다. 라오스에는 각 마을마다 라오인 들의 주된 생활과 교육 문화공간인 사찰이 있다. 일정한 건축양식이 없는 라오스 사찰은 대개 대웅전을 중심으로 탑과 전통가옥양식인 요사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불두에는 수행의 상징인 육계가 탑처럼 높게 솟아 있고, 수인은 선정인 또는 시무외인이 대부분이다.
라오인 들은 사찰에서 스님들에게 국어 수학 역사 지리 등의 과목을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하여 교육을 받고, 결혼적령기인 20세 이전에 절에서 일정기간 거주하는 ‘사마네라’라고 하는 단기 출가제도를 전통적으로 거친다. 3개월에서 짧게는 1주일정도 단기출가를 하는데, 단기 출가할 때는 가족과 친인척 마을사람들이 모여 축복해 준다. 여기서, 일생을 통해서 실천해야 할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습득하기 때문에 그 어떤 사상적 영향보다도 불교적 전통을 유지하는 요인이 된다.
라오스불교가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과정에서도 불교국가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계승하고 전통의 뿌리를 잃지 않는 것은 라오불교협회와 라오신도들의 단합에서 나왔다. 라오스공산정권이 들어서며 20년간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다(?)’는 이유로 불교계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도 불교를 약화시키지는 못했고 라오스정부는 결국 종교를 인정하는 라오스식 공산주의로 바꾸어야 했다. 한국의 종단격인 라오불교협회는 라오스 불교계를 하나로 묶는 구심체다. 협회는 18개도의 지역별 협회가 조직돼 있고, 지역조직이 모여 중앙의 라오불교협회를 이끄는 체계적인 조직을 형성한다. 라오불교협회 산하에는 판따뚤라부(교육담당)와 위빠싸나부(수행담당)가 있다. 라오스 불교협회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여, 벽촌에 있는 절의 불사나, 수도승을 선출하는 데도 연합회의 승인이 필요할 정도다. 절에서는 왼쪽 어깨에 루트(하얀 천)를 두르는 것으로 스님에게 제자의 예를 표하는 라오스 신도들은 사찰의 평생소임인 주지임명 추천권한, 사찰의 운영과 재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 등 교단의 한축을 형성한다. 라오스 불교가 종교를 인정치 않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국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잃지 않았던 것은 신도들이 평소 존경하는 스님을 주지로 협회에 추천하는 권한 등 투철한 신심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오불교협회 회장 빗칫스님은 “협회는 4분야를 담당한다”며 “첫째는 출가여부 결정, 둘째는 교육, 셋째는 수행과 실천, 넷째는 사찰의 보수 및 신축이다”고 말했다. 스님은 “한국불자들이 처음으로 라오스 불교계를 방문해 줘 고맙게 생각하며, 교환방문을 시작으로 한국-라오스불교의 교류협력을 강화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 라오스 스님 일과
04:00 기상하여 예불
05:30 탁발
07:00 아침공양
08:00 위빠싸나 수행
11:00 점심공양
13:00 신도집 방문 축원
16:00 마을법회
18:00 명상
20:00 자유시간
22:00 취침
* 라오스 승가대학
4년제 학사관리 엄격
라오스 승가대학은 수도인 비엔티엔의 동뜨사원에 있다. 라오스 승가대학(사진)은 라오스불교를 움직이는 엘리트 승려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1년 예비과정, 3년 정규과정 총 4년제이다. 1년 예비과정은 300명, 2~4년은 200여명이며 교수는 10명이 봉직하고 있다. 학인들은 경, 율, 론 3장을 기본으로 공부하고, 학과는 학년 당 2개과로 영어, 불어 등 어문과인 악숀사와 수학 과학 등 이과인 쿠사로 나뉜다. 라오스 승가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사찰에서 추천을 받아, 각 지역 불교협회에서 실시하는 입학시험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서 300명을 선발하여 1년 예비과정에 입학한다. 1년 예비과정을 통해 60명을 선발하고, 이들이 2~4년의 정규과정을 거쳐 졸업하게 된다.
캄삐엔교수(심리학 전공)는 “1971년 승가교육 강화를 위해 대학이 설립됐다”며 “학승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라오스불교협회의 기둥이 되고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라오스 불교 출처: 현대불교신문 김원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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