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인 꼭두각시에 희롱 당하지 말라”
지리산 상무주암서 참선수행하며
40년간 두문불출 수좌 현기스님
전등사서 ‘벽암록’ 통해 대중설법
“공부란 내 밥을 내가 먹기 위함”
“지혜광명이 덮이면 경계 좆아 가
깨치면 거울 먼지는 본래 없게 돼”
강화 전등사(주지 여암스님)는 40여 년 동안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두문불출하며 간화선 수행정진 중인 수좌 현기스님을 초청해 벽암록 전등대법회를 봉행했다. 2월20일부터 25일까지 전등사 무설전에서 열린 이번 전등대법회에는 간화선 공부에 대한 사부대중의 갈증을 반영하듯 접수 이틀만에 모집인원 100명을 훌쩍 초과할 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울러 무설전 앞마당 등지에 빔프로젝트를 통해 실시간 시청하거나 전등사TV 등 유튜브를 통한 법문 청취도 적지 않았다. 현기스님의 법문 가운데 2월21일 오전에 열린 입재식에서 벽암록 1칙을 통한 설법을 요약,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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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마(是甚麽) 종하인호(鐘下人乎) 갑을병정(甲乙丙丁)이로다. 종소리 아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갑을병정이로다. 대면무사(對面無私), 얼굴을 마주함에 있어서 한 점의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지금의 이 자리가 영산회상이요, 달마 육조 설두선사 원오극근선사가 지금의 목전에 계십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전등사 스님들의 간청도 있었겠지만, 졸납이 출가 후 평생 화두와 씨름하면서 간간히 <벽암록(碧巖錄)>을 보면서, 벽암록에 눈을 뜨지 못하면 부처님 은혜를 갚지 못하고 시줏밥만 받아먹고 빚만 지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벽암록은 허맥이고 이름이며, 문자는 과유, 거짓이름 허상입니다. 지금의 목전에 이 성성한 물건이야 말로 즉득견성(卽得見性)입니다. 확연(廓然)하면 견성입니다. 벽암(碧巖)은 선외선사가 주석하셨던 중국 협산의 영천원 방장실(方丈室) 편액입니다. 이후 원오극근선사가 협산 영천원에 은거하시며 벽암록을 저술하셨습니다. 벽암록은 선문(禪門)의 불입문자 직지인심(不立文字 直旨人心)의 백칙공안(百則公案)을 설두중현선사가 송(頌)을 하셨고, 뒤에 원오극근선사께서 그 공안마다 수시(垂示)를 하고 또 공안에 중간중간에 착어(着語)를 붙이고 그 다음에 평창(評唱)을 하고 뒤에 또 다시 송을 하고 또 송에 착어를 하고 또 송에 평창을 하고 해서 선문의 본분종사(本分宗師), 설두중현선사·원오극근선사의 한 점의 흠점이 없는 살아있는 법문입니다.
수시(垂示)라고 하는 것은 공안을 손에 쥐고 대중 앞에 들어 보이는 뜻입니다. 아주 간략하고 그 내용이 잘 정리돼서 그 공안을 간명하게 보여주는 게 수시입니다. 앞산 너머 연기를 보면 벌써 불인지 압니다. 선문이 어려운 게 아닙니다. 산 너머 연기가 올라오면 불인지 압니다. 눈 앞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담장에 가려져 있어도 소가 지나가면 소뿔이 눈에 보입니다. 조그만 소뿔을 보더라도 소의 전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게 선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우리 사부대중 모두는 각자 자기 얼굴과 목소리, 면목을 갖고 있습니다. 면목은 해와 달과 같은 눈이 있으며, 천하 이치를 들으면 이치를 통달할 귀와 눈이 있습니다. 보면 뭣인지 알고, 하나를 들으면 천가지 만가지 이치를 밝히는 귀가 있습니다. 목기수량(目機銖兩)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눈앞에 법이 있고 선이 있는 것입니다.
수시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은 보통 사람이 일반적으로 보고 들으면 아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절단중류(截斷衆流)를 합니다. 절단은 끊는 것이다. 스님이 무슨 칼이 있어 끊겠습니까? 일체를 다 끊을 수 있는 명검을, 사람마다 본래 자기 손 안에 갖고 있습니다. 장마가 지면 온 산과 들판에 물이 차고 강에 모여 바다로 흘러갑니다. 그와 같이 중류가 있습니다.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심식(心識)을 끊는 것이 절단중류입니다. 미세한 심식이 존재하고 밤에 꿈을 꿔도 육식이 움직이고, 날이 새도 육식이 움직입니다. 그 중류를 끊을 수 있는 게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지혜금강보검입니다. 금강보검을 쓸 수 있으면 대자유, 대해탈입니다. 하지만 중류를 끊어내는 게 산을 잘라 내는 것보다 천배, 만배 더 어렵습니다.
양 무제는 손수 가사를 수하고선 사람들한테 반야경을 직접 설법합니다. 양 무제가 반야경을 설법할 때, 하늘이 감동해 꽃비를 내려주고 대지가 춤을 췄다고 합니다. 양무제가 어떤 능력이 있어서 눈도 뜨지 않았으면서 하늘에서 감동해 꽃비를 내려주고 대지가 춤을 췄을까요? 양 무제를 보면 아니지만, 부처님의 설한 반야경의 반야 지혜는 얼마나 출중한지, 고(苦)가 없는 해탈의 법문이니 춤추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대지가 감동해서 춤을 춘 것입니다. 이런 양 무제가 달마대사한테 뭐라고 말하기 전에 벌써 원오극근선사는 착어를 내렸습니다. 부즉류(不唧)를 설하는 자로구나, 즉 지혜롭지 못한 자로구나라고 한 것입니다.
양 무제는 달마대사에게 ‘어떠한 것이 성인의 제일가는 진리입니까’라고 소승과 대승경전 그 경전 내용의 극치를 물었습니다. 달마대사가 ‘확연하여 성이 없습니다(廓然無聖)’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무대에 꼭두각시가 있습니다. 무대 위 꼭두각시가 연기를 하면 알아듣기 쉽습니다. 꼭두각시가 눈물을 흘리면 관객들이 눈물 흘리고 웃고 춤추면 지켜보는 우리도 웃고 춤추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불법(佛法) 공부를 함에 있어서 문자에 의지해서 이해를 하는 것은 금강산그림과 그림떡과 같은 것입니다. 배고픈 이에게는 그림떡에서 눈에 땔 수가 없을 것이며, 금강산그림을 보면 그 그림에 눈이 팔려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금강산그림, 그림떡이 바로 무대 위 꼭두각시인 셈입니다. 문자를 벗어나야 합니다. 문자를 벗어나지 아니하면 꼭두각시에 희롱 당합니다. 달마대사는 한 칼에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사람도 뺏어버리고 경계인 꼭두각시도 단칼에 잘라버립니다. 이목구비, 견문각지(見聞覺知), 이 분별심도 단칼에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면 악몽 꾸다가 눈 뜨는 거 아니냐? 눈 뜨면 확연이고, 눈 뜨면 견성입니다. 확연은 실상 배고픈 이가 밥을 해서 그 밥이 자기 입속으로 들어가면 그 이상이 더 있겠습니까. 우리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내 밥 내가 먹을려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남의 밥을 먹는다는 것은 동물입니다. 내 손으로 밥을 해서 내 숟가락으로 입에 밥을 넣으면 그때가 어떤 때입니까. 외식제연 내심무천 심여장벽 가이입도(外息諸緣 內心無喘 心如墻壁 可以入道), 밖으로 끄달리는 모든 마음을 쉬고, 안으로 마음의 헐떡임을 없게 하여 마음을 장벽처럼 움직이지 않게 하면 도에 이룰 수 있습니다. 안으로의 망심이 없고 밖으로의 허망한 경계가 없어지면 쇄쇄락락(洒洒落落)입니다. 그 쇄쇄락락은 뭡니까. 화두가 일념됐을 때 마주치는 장벽, 도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한 마디도 말하면 무심경계, 무심일념, 심려장벽이 돼야 도에 들어갑니다.
달마대사는 양 무제가 상에 집착하는 그 사견을 단칼에 잘랐습니다. ‘확연하여 성이 없나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양 무제가 달마대사의 그 법문을 알지 못해 창피했을 것입니다. 얼굴이 붉어지고 눈동자가 여기저기 돌아갔습니다. ‘그 상태에서 짐을 대하는 자 그대는 누구인가?’ ‘알지 못합니다.’
<반야심경>에 오온이 공하다고 합니다. 오온이 공하면 무명이 다 사라집니다.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인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성색경계(聲色境界)입니다. 성색경계를 좇아감으로써 망지(妄知)가 생깁니다. 성색경계를 배우고 익혀 아는 척하지만 그건 꿈속입니다. 우리가 두 눈 뜨고 바보가 됩니다. 꿈이라는 미온을 쫓아간 것입니다. 미온은 지혜광명이 없는 먼지가 덮여싸여 깜깜한 거울입니다.
성색경계를 좇아가면 지식이 으뜸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살아가며 지식이 없으면 밥 먹고 살기 힘듭니다. 그런데 불법문중에선 그 지식이 망지입니다. 왜 이 세상의 소중한 지식이 불교에선 망지라고 할까요. 무대 위의 꼭두각시라고 본 것입니다.
확연불식(廓然不識)이라고 하는 게 벽암록 1칙 공안의 핵심입니다. 불식이라고 하는 건 비유하자면 우리 지혜광명의 거울에, 번뇌 때가 덮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울에 먼지가 가득 끼면 어떻게 됩니까. 육신경계에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지혜광명이 덮이면 경계를 쫒아갑니다. 깨치면 거울의 먼지는 본래 없는 것이 됩니다.
정리=박인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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