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구화산(九華山) 육신보살이 되신 13분의 스님 소개

수선님 2023. 11. 5. 11:57

#구화산 #육신보살 #김지장 #13분스님

 

 

내용:

『모든 것은 진짜다 하고 보면 애써 끼워 맞추는 꼴이 되기도 하고, 모두 가짜다 하고 보면 흘려 놓치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 모두 깊이 새길 것은 없다.

진정한 믿음과 신념은 강요도 세뇌도 아니며, 자기최면도 아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마음자세는 믿음을 어떤 대상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지장보살 성지, 구화산(九華山)에서 육신보살(肉身菩薩)이 되신 13분의 스님 소개>

오늘은 수행자에게 귀감이 되는 기록상(九華山化城寺記, 九華山志), 혹은 전설로 전해지는 구화산에서 육신보살이 되신 13분의 스님들 생애와 남기신 이야기를 각색하여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중국 4대 불교 성지는 절강성의 관음보살 보타산, 사천성의 보현보살 아미산, 산서성의 문수보살 오대산, 안휘성의 지장보살 구화산입니다.

구화산(九華山)은 중국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安徽省池州市靑陽縣)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화산에 지장신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곳이 신라 왕족 출신인 김교각(金喬覺) 스님이 수행하시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김교각 스님은 99세에 좌탈 입적하였는데, 기이하게도 3년이 지나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일반인이 수행자를 평가하는 것이 무례할 수 있으나, 좌탈은 아무나 할 수 없고 한평생 수행한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물론 좌탈은 할 수 있으나 조용히 혼자 수행하던 수행자는 좀 더 편안하게 누워서 입적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수행자는 물구나무 서서 입적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화장을 했을 때 사리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수행 정도가 높다고 할 수 없고, 일반인도 사리가 간혹 나오는데 평소에 금욕적 생활을 했던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또한 뇌파 측정으로도 살아있는 사람의 객관적인 수행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데, 이사잠(李嗣涔)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기공(氣功)수련자가 발공할 때 뇌파는 알파파(alpha 8~13 Hz, 의식상태도 무의식상태도 아닌 각성상태)에서 진폭(파동높이)이 대폭 증가한다고 합니다.

기공자가 발공시 뇌파 (공명태)

 

 

반대로 수행자가 좌선(坐禪), 입정(入定) 혹은 공(空)상태 일 때 뇌파는 알파파(alpha)에서 진폭이 대폭 감소하거나 혹은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도가 사부가 입정, 공 상태시 뇌파 (입정태)

 

 

불교에서 말하는 육신보살(肉身菩薩)처럼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현상은 세계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현상이 관찰된 분들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김시습, 학자, 승려(金時習 1435년~1493년 (이율곡의 김시습전)),

베트남 무칵민 승려(Vũ Khắc Minh 1579년~1650년),

프랑스 베르나데트 수비루 수녀 (Bernadette Soubirous 1844년~1879년),

러시아 다시-도르조 이티겔로프 라마승(Dashi Dorzho Itigilov 1852년~1927년),

대만 자항법사(慈航法師 본명: 애계영(艾繼榮)1893년~1954년),

태국 루앙포댕 승려 (Luang Pho Daeng 1894년~1973년)

이집트 미이라와는 다르게 외부적인 방부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사후에 시신이 부패되지 않고, X-ray 등을 찍어보면 뇌와 같은 인체 내부장기들이 고스란히 찍힌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현재까지는 과학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구화산 육신보살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김지장, (김교각)

 

1. 김지장(金地藏)(696~794) 당나라 (신라 新羅)

구화산 제 1대 육신보살인 김지장(金地藏) 스님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존칭과 이야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시대 구분없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덕호: 김교각(金喬覺), 법명: 김지장(金地藏), 석지장(釋地藏) 본명: 미상(분명하지 않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라(新羅) 왕족 출신이라고 합니다.

서기 696년에 출생하여 794년 99세에 좌탈 입적하셨는데, 시대는 당(唐)나라 때입니다.

구화산 화성사기(九华山化城寺记)에는 유지에 따라 제자들이 석함에 3년간 모시고, 다시 탑에 모시고자 석함을 열어보니,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마치 살아 계실 때와 같았다고 합니다.

시신을 옮기자 뼈마디 골절이 움직여 쇠사슬 소리가 났는데, 경전에 이르기를 보살의 몸은 쇠사슬과 같아서 뼈에서 울림이 난다(經云:菩薩鉤鎖,百骸鳴矣)고 되어 있어 그를 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불자(佛者)들은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 구절에 안인부동유여대, 정려심밀유여비(安忍不動猶如大, 靜慮深密猶如祕)이라 하여, 마음을 안정하고 인내하여 움직이지 않음이 대지(大地)와 같고, 고요한 사색(禪定)과 심오한 깊이는 마치 비밀창고 안 보물과 같다.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떠올리면서, 3년이 지나도 가부좌한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것은 마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된 것이라 생각하여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보고 그때부터 앞에 김씨 성을 붙여 김지장(金地藏)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육신탑(肉身塔)을 세워 공양했다고 합니다.

김교각 스님의 키는 당나라 기준 7척으로 현재 기준 약 212 cm입니다.

구화산에 있는 고배경대(古拜经台)에 가면 일반 성인 보다 약 2배 큰 김교각 스님의 발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발자국과 큰 키는 서로 어울리는 크기가 됩니다.

구화산 화성사기(九华山化城寺记)에는 김교각 스님의 골격이 비범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 일반사람들 보다 컸을 수 있습니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에 왕자로 있을 때 이미 화랑(花郞)교육을 받아 심신수행을 했는데, 왕태자 책봉과 왕위계승 문제로 자신 때문에 주변 왕자들과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719년 24세에 자신을 보호해 줄 개 한 마리와 차(茶)씨와 볍씨 등을 가지고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장왕보살을 지키는 신수 체청

 

 

지장보살 옆에는 체청(諦聽)이라는 신수(神獸)가 있는데, 원형은 신라에서 같이 데리고 갔던 삽살개라고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삽살개는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구화산에는 스님들이 녹차를 재배하여 지장차(地藏茶) 혹은 구화불차(九華佛茶)란 이름으로 판매하는데, 중국에서는 지역 특산차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구화산 지장차의 특징은 목에 좋으며, 기관지나 폐에 좋은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황산에서 자라는 차나무로 만든 황산모봉(黃山毛峰)도 지장차와 비슷하여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김교각 스님이 처음 구화산에 도착한 후, 동애암(東崖岩)에 굴을 파고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756년 김교각 스님이 61세가 되셨을 때입니다.

구화산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산에 올라 굴 안을 보니, 김교각 스님이 눈을 감고 수행하고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흰 흙(관음토)에 쌀을 조금 넣어 죽을 끓여 먹으면서도 용맹정진 고행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곳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주하여 절을 세웠는데, 지금의 화성사(化城寺)가 됩니다.

이후에 김교각 스님의 명성은 본국 신라(新羅)에도 전해져 여러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위해 바다를 건너왔는데, 그와 제자들은 양식이 부족할 때면 여름에는 흰 흙에 나물을 섞어 먹고, 겨울에는 땔감을 아끼고자 불을 조금 피우고 옷만으로 추위를 버텼다고 합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밭을 일구고 땔나무를 캐서 자급자족하였습니다. 김교각 스님은 1명의 종자(從者)스님과 남대(南臺) (남대南臺는 육신보전 자리)에 거주하였는데, 스스로 무게 약 18 kg의 마의(麻衣)을 지어 입고, 낮에는 옷으로 밤에는 바닥에 깔고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또한 화성사 방생지(放生池) 곁에 대(臺)를 세우고, 온 종일 향을 피우며 사부경(四部經)을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794년 여름 99세에 김교각 스님은 제자들과 고별하고 좌탈 입적하게 됩니다.

유언에 따라 석함에 3년 간을 모셨다가 석함을 개봉하니 기이하게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지장보살의 화신(化身)이라 숭앙(崇仰)하며 육신탑(肉身塔)을 세워 공양하였고, 현재는 육신보전(肉身宝殿) 건물 안 지하에 모셔져 있습니다.

무가선사

 

 

2. 무가선사(无暇禅师)(1513~1623) 명나라

법명: 해옥(海玉) 자: 无暇(무가) 무가선사(无暇禅师)는

서기 1513년에 출생하여 1623년 110세에 좌탈 입적 후 육신보살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백세궁(百歲宮)에 모셔져 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무가스님(无暇)의 고향은 순천완평(順天宛平), 지금의 북경시(北京市) 사람입니다.

어려서 출가하여 24세에는 산서성 오대산(五臺山)과 사천성 아미산(峨眉山)등을 여행하며 수행하다가 26세에 구화산에 도착합니다.

당시 구화산은 원나라(元)에서 명나라(明)로 변하는 시대라 전쟁 통에 사찰이 텅 비고 승려도 없는 처량한 상황이었습니다.

구화산 800미터에 위치한 동애봉(東崖峰) 거대바위 아래 굴을 찾아 머물며 좌선 수행하였습니다.

나중에 별을 따올 수 있다는 뜻의 적성암(摘星庵)을 짓고 계속 수행하였는데 현재 백세궁(百歲宮)이 됩니다.

인적 없는 산속이라 배고플 때면 야생 과일과 황정(둥굴레), 백합(百合) 뿌리 등을 먹으며 고행하였습니다.

(황정(黃精)은 익혀 먹거나, 법제하여 복용해야 하는데, 생으로 많이 먹으면 독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합니다.)

또한 생전에 설혈(혀의 피)과 금분(金粉)을 섞어 28년간 화엄경(華嚴經)을 사경 하였다고 합니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1966년~1976년) 백세궁 스님들은 홍위병들이 무가스님의 육신보살을 파손하는 것을 막고자 땅굴을 파고 숨겨 놓았는데, 그래서 다행히 현재도 백세궁(百歲宮)에 가면 육신보살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다음 다섯 육신보살상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융산 스님

 

3. 융산 스님(隆山和尙) (1758~1842) 청나라

법명: 융산(隆山) 세속 성씨: 주(朱)씨 고향은 건평(建平), 지금의 안휘성 선성시(安徽省 宣城市) 사람입니다.

청(淸)나라 때인 서기 1758년에 출생하여 1842년에 좌탈 입적 후 육신보살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차례 급제에 떨어진 서생(書生), 학자였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급제 응시는 단념하고 집에서 서당 선생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융산 스님도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아이들과 같이 논어(論語)와 대학(大學)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자신보다 나이 많은 아이들보다 더 잘 외웠다고 합니다.

그의 총명함을 본 아버지는 그에게 기대가 컸는데, 그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여 열심히 공부를 하였고, 시를 쓰면 당시 명사(名士)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1773년 15세이던 융산 스님은 병에 걸려 앓아 누워 학업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는데, 몸에 좋다는 약을 써도 병세가 나아지지 않자, 그의 아버지는 할 수 없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로 합니다.

굿을 시작하자 무당의 얼굴 빛이 크게 변하며, 융산 스님에게 아무 말없이 무릎을 꿇고 절을 몇 번하고 그냥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무당에게 왜 그런지 물어도 무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곳 마을에 도력이 높아 보이는 떠돌이 스님이 지나갔는데, 그 스님을 본 융산 스님의 아버지는 집에 모시고 공양하며, 스님에게 자신의 아이를 진찰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스님이 말하길 자신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 스님은 자신이 응급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약초환을 건네 주며, 혹시 모르니 먹여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다행히 융산 스님은 몸이 좋아져 일어나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떠돌이 스님이 떠나려 하자, 아버지는 스님에게 좀더 머물다 가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떠돌이 스님은 융산 스님과 같이 기분 전환도 할 겸 밖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지만, 융산 스님이 너무 그렇게 하길 희망하자 어쩔 수 없이 동의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떠돌이 스님을 따라 융산 스님은 오대산(五臺山),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山), 동백산(桐柏山)등 불교 성지를 돌며 보고 배웠는데, 이때 그는 출가할 마음을 품었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 출가하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욕설을 퍼부었지만, 결국 허락해 주었다고 합니다.

1776년 18세에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된 그는 구화산 인적이 드문 복호동(伏虎洞)(다른 이름 노호동(老虎洞)) 굴에 들어가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복호동 옆에 복호사(伏虎寺)를 세웁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예불을 하고 채소를 재배하며 보냈는데, 나머지 시간에는 대부분 복호동(伏虎洞) 굴에 들어가 법화경(法華經)을 독경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굴에 들어가 법화경을 독경한 세월은 20년 정도라고 합니다.

시간은 흘러 장노들의 추대를 받아 기원사(祇園寺) 절의 주지(住持)가 되었습니다.

이때 융산 스님이 주변에 말하길 내가 떠나면 복호사(伏虎寺)는 끝난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가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복호사가 불에 타 버렸다 합니다.

현재는 노호동 옆에 재건한 복호사(伏虎寺)가 있습니다.

기원사(祇園寺) 주지가 된 융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평생 법화경을 강연하고,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에 따라 의식과 규율을 따르게 하니, 기원사는 다시 명나라 시절 번성하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1842년 84세에 좌탈 입적하자 제자들이 그를 항아리에 담아 모셨다가 3년 후 항아리를 열어 보니 육신이 썩지 않아 금박을 입혀 공양하였습니다.

태평천국(1851년~1864년)과 청나라 간의 전쟁 때, 태평군이 불을 질러 기원사(祇園寺)가 불에 탔는데 다행히 바람이 불어 융산 스님의 육신보살은 타지 않고 남았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육신보살이 파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법용 스님

 

 

4. 법용 스님(法龍和尙)(1812~1909)청나라

법명: 법용(法龍) 1812년 하남성(河南省)의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겨드랑이 액취(腋臭)증을 앓아 그 냄새로 주변사람들로부터 차별 받고, 가족들도 그를 아껴주지 않아 어려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법용 스님은 섬서성 서안시(陝西省 西安市) 종남산(終南山)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사천성(四川)등으로 옮겨 다니며 점차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함풍년간(咸豊年間)(1851~1861), 약 39세~40세 때 구화산에 도착하여 각 사찰에서 참선 수행하였고, 청 광서년간(光緖年間) 약 63세에 천태봉(天台峰) 서쪽에 취운암(翠雲庵)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취운암(翠雲庵)을 짓다가 병으로 쓰러지고, 절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이도 스님(理道和尙)에게 맡깁니다.

1909년 97세에 법용 스님은 7~8년간 병으로 누워서 지냈는데, 어느 날 이도 스님(理道和尙)에게 말하길 “내가 평온하게 가야지 누워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고, 3일 후 좌탈 입적하였습니다.

이도 스님(理道和尙)은 7~8년간 누워있던 법용 스님이 마지막에 좌탈 입적한 것이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항아리에 3년간 모셨다가 열어보니 부패한 곳이 없어 금박을 입혀 육신보살로 모셨다고 합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육신보살이 파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상은 스님

 

 

5. 상은 스님(常恩和尙) (1818~1909) 청나라

법명: 상은(常恩), 세속의 성: 호(胡)씨이고, 자는: 랑덕(朗德)입니다.

상은스님은 1818년 용서(龍舒), 지금의 안휘성 서성(安徽省 舒城)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 배경, 출가 시기 등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대략 청 도광년말(道光年末)에서 함풍년초(咸豊年初) 약 33세에 구화산 감로사(甘露寺)에 들어와 입적 할 때까지 감로사에 상주(常住)하였다고 합니다.

처음 절에 들어와서는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3년간 공양간(절의 부엌)에서 밥을 하는 일을 했는데, 절에 스님들이 300명 이상 있어 밥을 하고 필요한 땔감을 구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멀리 가서 땔감을 구하는 것은 힘이 들었기 때문에 같은 일을 하던 동료 스님들은 감로사 주변에서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도 모두 베다 썼는데, 상은 스님은 동료스님들을 설득하여 재목이 되는 나무와 대나무는 베지 못하게 하니, 그 덕분에 몇 십년 후 감로사 주변에는 재목으로 쓸 만한 나무가 많아 졌다고 합니다.

감로사 옆에 돌계단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산에 오를 때 이 돌계단을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행인들의 편리를 위해 이 감로사 옆 돌계단길에 정자를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찻물을 주었습니다. (중국에서 나는 물은 거의 대부분 석회수이기 때문에 물을 끓여 마십니다.)

상은스님은 자원해서 이 일도 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상은스님이 주는 물을 마시면 반년 동안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그 이유를 묻자 상은스님은 “부처가 어떻게 일을 잘못할 수 있는가?” 라고 영문 모를 답변을 했다고 합니다.

상은스님은 평소에 식당에서 밥을 먹지 않고 다른 스님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었는데, 만약에 너무 많아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으면 음식을 말렸다가 나중에 다시 먹었다고 합니다.

3년 후, 종을 치는 일을 3년간 맡아 종을 쳤고, 또 3년이 지나 채소 밭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채소 밭에는 50여명의 동료 스님이 일을 하고 있어, 상은스님 본인은 채소 밭에서 잡일 등만 하였는데, 땅을 갈아엎고 채소를 심어야 하는 날이 오자, 상은스님은 산에 가서 대나무 몇 그루를 베어, 수십개의 대나무통을 만든 다음 이를 스님들에게 나누어 주며 벌레가 보이면 죽이지 말고, 대나무통에 넣었다가 나중에 휴식시간에 자신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스님이 벌레를 줍지 않고 일을 하자, 상은스님은 그 스님 앞에 가서 절을 하며 “부처의 말을 들으면, 좋은 보답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은 벌레들을 산에 다시 놓아주면서 벌레들에게 삼귀의(三歸依)를 말하며, 사람이 없는 장소로 가라고 했습니다.

동료스님 중에는 그런 모습에 비웃는 스님도 있었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져 그러려니 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상은스님은 산을 순찰하는 일도 맡았는데, 감로사가 관리하는 숲은 주변에 좋은 재목의 나무들이 있어 몰래 와서 나무를 베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상은스님은 나무를 베는 사람을 볼 때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에 가서 절을 하였는데, 이 방법은 효과가 있어서 결국 아무도 감로사에 가서 나무를 베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은스님은 노년에 감로사 도감(都監 주지를 보좌하는 일)이 되었고, 수염을 길렀다고 합니다.

1909년 91세에 입적을 예지(豫知)하고 목욕하고 예불을 마치고, 주변스님들과 고별 후 좌탈 입적하였습니다.

항아리에 모셨다가 3년 6개월 후에 열어보니 부패한 곳이 없어, 수염을 깎아드리고 금박을 입혀 육신보살로 공양하였습니다.

하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육신보살이 파괴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정혜 스님

 

6. 정혜 스님(定慧和尙) (1843~1922) 청나라 말~중화민국

법명: 정혜(定慧) 사천성 봉계 (四川省 蓬溪)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일은 약 1842년으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정혜 스님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8살 때 어머니와 같이 혜생사(慧生寺)에 갔는데, 정혜 스님은 그곳에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혜생사(慧生寺) 절을 지키던 개였다고 합니다.

혜생사(慧生寺)의 스님들은 어느 겨울 얼어 죽어가던 강아지를 주워 키웠는데, 주지(住持) 스님은 항상 그 강아지에게 불경을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 인연으로 정혜 스님은 출가하여 노승이 된 주지(住持)스님을 12년간 모셨다고 합니다.

정혜스님은 전생의 기억 때문인지 용맹 정진하였고, 생활은 매우 소박했으며,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적었다고 합니다.

혜생사 주지 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재가 불자인 거사(居士)들의 요청으로 아무도 없던 폐사찰인 연화사(蓮花寺)에서 생활하였는데, 어느 날은 2명의 행자스님이 연화사에 오게 되었습니다.

쌀이 부족하자 자신의 옷을 전당포에 주고 쌀로 바꿔 행자스님을 부양했는데, 다음날 이 소식을 듣고 감동받은 마을 사람들이 시주하여 연화사를 새로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치년간(同治年間1862~1875) 20대에 구화산에 도착한 정혜 스님은 태평군이 불태운 동애사(東崖寺) 복원에 착수하여, 1870년 약 28세에 유명종정(幽冥鍾亭)을 짓고, 이어서 대웅보전(大雄寶殿), 만불루(萬佛樓), 지장전(地藏殿)등을 재건하였는데 약 40년간에 걸쳐 동애사(東崖寺)를 복원하였습니다.

동애사 재건시기 방장(方丈)으로 있다가 기본 복원이 완료된 시기인 1890년 약 47세에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安徽省 池州市 靑陽) 수부묘(水府廟 원명: 남천사(南泉寺)에 들어가 은거하며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1922년 약 79세때 좌탈 입적 후 시신이 부패하지 않아 육신보살로 모셨는데, 1966년 문화혁명 시기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화덕 스님

 

7. 화덕 스님 (華德和尙) (청 同治年間(1862 or 1875)~미상) 청나라 말~중화민국

법명: 화덕 안휘성 수주(安徽省 壽州)사람으로 지금의 안휘성 수현(安徽省 壽縣)에서 청나라 동치년간(同治年間, 1862년부터 1875년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시기와 입적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어릴 때 무술을 익혔고, 책을 읽어 16세에 수재(秀才)가 되었습니다.

글과 시를 잘 쓰고, 매(梅)와 학(鶴)을 잘 그렸다고 합니다.

화덕 스님이 19세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술과 도박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동성(桐城)에서 어릴 때 배운 글 솜씨로 입에 겨우 풀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오대산에서 동성(桐城)으로 유랑하던 자칭 본인을 력사(力士힘이 센 사람)라고 소개하는 어느 스님을 만나 스승으로 모셨는데, 사제지간이지만 서로 거리낌이 없어 마치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력사 스님이 탁발(托鉢)하고 오면 그것을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화덕 스님은 어떨 때는 력사 스님의 옷을 빌려 입고, 어떨 때는 평상복을 입고 자기 마음대로 먹고 마시니, 불교 신자가 많이 있던 동성 마을 사람들은 그런 화덕 스님의 행실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정월대보름날 용등 축제 때 화덕 스님은 자칭 력사 스님 옷을 빌려 입고 거리에 나와 당자(鏜子 악기)를 마구 두드리며 놀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동성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덕 스님을 때렸습니다.

며칠간 상처를 치료하고 력사 스님과 화덕 스님은 구화산 동애선사(东崖禅寺)로 갔는데, 화덕 스님은 이 곳에서 6개월간 폐관 수련(閉關修鍊)을 하다가 못 참고, 동애선사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후 재건 중이던 구화산 용지암(龍池庵)에 도착하였는데, 주지 스님인 개불 스님(開佛和尙)이 화덕 스님을 좋게 보아서 용지암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화덕 스님이 마을로 내려가 시주(施主) 받은 자금이 용지암 재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로 내려갈 때면 계율을 어겨서 마을 부잣집 도련님과 술을 마시거나 간혹 도박도 하면서 시주를 받았는데, 그런 일 때문에 주지 스님에게 혼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용지암 재건 이후 화덕 스님은 계율을 엄수하고 염불하며 수행 정진하였다고 합니다.

간혹 한가할 때에는 용지암에 심어 놓은 흰색 매화를 그리거나 무예를 익혔습니다.

서예가 뛰어나서 용지암의 편액(扁額) 등 글씨는 모두 화덕스님이 쓰셨다고 합니다.

개불(開佛)주지 스님이 입적하기 전 용지암 주지를 화덕 스님에게 맡겼지만, 화덕스님 성격 상 사무(事務)에 예속된 생활을 싫어하였고, 주지스님의 제자도 아니고, 용지암 스님들도 그를 따르지 않아 실제 주지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용지암을 지을 때 많은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 공로를 인정하여 용지암에는 계속 머물러 지냈습니다.

입적 전에 예지(豫知)하고 주변 스님에게 고별하였는데, 주변 스님들은 화덕 스님의 그간 행실 때문인지 믿지 않았는데, 입적하기 전 미륵(彌勒)을 3번 외치고 좌탈 입적하였습니다.

제자들이 항아리에 3년 간 모셨다가 열어보니 시신이 썩지 않아 육신보살로 모셨습니다.

1966년 문화혁명 시기에 파괴될 것을 걱정한 화덕 스님의 손제자(孫弟子(제자의 제자)는 육신보살상을 화장(火葬)한 다음, 부도탑을 세워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대흥 스님

8. 대흥 스님 (大興和尙 1894~1985) 청나라 말~중화인민공화국(중국)

법명: 대흥(大興) 자: 유(維) 세속 이름: 주모화(朱毛和)

1894년 10월 24일 안휘성 태호현 우진 주가촌(安徽省 太湖縣 牛鎭 朱家村)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흥 스님은 키가 커서 185 cm(센티미터) 였다고 합니다.

생전에 “착한 사람은 스스로 좋게 하고, 악한 사람은 스스로 나쁘게 한다”(好人好自己, 壞人壞自己)라는 말을 하여 명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삶이 기구하여 7세 때 나쁜 사람에게 유괴되었다가 9세인 2년 만에 가족들이 그를 찾아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9세에 글 공부를 시작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2년만 배우고, 농사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1918년 24세 때 할아버지를 따라 안휘성 둔계 연화당(安徽省 屯溪 蓮花塘)에서 불교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후 남북 군벌 전쟁(南北軍閥混戰)으로 강제 군복무를 하게 되었고, 그렇게 6년간 나팔수로 군복무를 하다가 1925년 31세에 탈영하여, 구화산 백세궁(百歲宮)에서 출가하여 상법스님(常法和尙)에게 대흥(大興)이란 법명을 받고 스님이 됩니다.

그곳에서 6년간 물을 길어 나르거나, 산 밑에서 백세궁(해발871미터)까지 곡식을 나르는 힘쓰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31년 37세에 남경 고림(南京 古林) 만수사(萬壽寺)에서 과혜 스님(果慧和尙)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내다가, 오대산(五臺山), 아미산(峨眉山), 보타산(普陀山)등 불교 명산을 유랑하며 보냈습니다.

1936년 42세에 다시 구화산 백세궁(百歲宮)으로 돌아와 또 5년간 매일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1947년 53세에 청양현(靑陽縣) 화염산사(火焰山寺)에서 지내다가, 1958년 64세에 구화산 쌍계사(雙溪寺)로 가서 농사 일이나 20년 간 (동네 주민) 소를 몰며 지냈는데, 생활이나 음식에 대한 추구는 높지 않아 자신이 재배한 곡식과 채소를 가지고 한끼는 배불리 먹고, 한끼는 굶거나, 심지어 밥을 한번 하면 며칠을 그 밥만 먹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염불이나 수행을 할 때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하였고, 자주 구화산 구자암(九子岩)에 올라 좌선수행을 하였다고 합니다.

1966년부터 1976년 10년간은 중국 문화혁명 시기라 스님들도 강제 환속(還俗)하여 국가에서 주는 노동일을 하여야 했는데, 이때 받은 일이 소몰이 인 것 같습니다.

이 시기에 대흥 스님은 짚신을 신고 누더기 옷을 입고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공공공”(空空空)을내뱉거나, 마을 주민들에게 까닭 없이 “너희들은 다 바보요, 다 내 아들이다.” 같은 이상한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더럽고 미친 사람 모습으로 쌍계사에 계속 머물며 환속하지 않고, 스님생활을 계속했습니다.

대흥스님은 쌍계사 주변 주민들과 좋은 관계로 지냈는데, 전설에 의하면 마을 아이가 놀라서 소아 경기(간질)가 생길 때 대흥스님이 가서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세번 두드리면 아이가 정신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아이의 부모가 고맙다고 밥을 먹고 가라고 하면, 대흥스님은 사양하지 않고 “착한 사람은 스스로 좋게 하고, 악한 사람은 스스로 나쁘게 한다”라고 말하며 밥을 먹고 갔다고 합니다.

또 어느 날은 대흥스님이 땔감을 팔러 가는데, 마을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채소밭 울타리를 뽑아 땔감으로 쓰는 것을 보고, 몸이 병약해 나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어깨에 짊어진 나무를 할머니에게 모두 드렸습니다.

쌍계사에 빈손으로 돌아오자 다른 스님들이 물어보니 대흥 스님이 하는 말이 “나는 오늘 양어머니가 생겼다” 고 말했다 합니다.

전후 이야기를 듣고 쌍계사의 스님들도 대흥스님을 뭐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1984년 가을 90세에 대흥 스님은 이따금 입으로 말하던 “공공공”(空空空)이 “아미타불”(阿彌陀佛)로 바뀌었습니다.

1985년 91세되던 해 봄 어느 날 대흥스님이 쌍계사 주지 스님에게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지 스님이 어디로 가시느냐 물어보자 답변이 없었고, 언제 가시냐고 물어보자 3일 후라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새벽에 대흥스님이 심하게 넘어져 걸을 수 없게 되었고,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 있었습니다.

입적 전에 “화장(火葬)하고 싶지 않다”는 유언을 남기고 좌탈 입적하였는데, 원래는 불교계 규칙에 따라 7일 후 화장하려고 하였으나, 입적 나흘째 되던 날 마을 주민들이 화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 보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고 합니다.

쌍계사는 그 요청에 따라 7일 만에 시신을 항아리에 봉인한 뒤 그 위에 짚을 얹어 보관하다가, 1년 뒤인 1986년에는 마을 주민들이 자진하여 모금한 돈으로 항아리 밖에 원형 전탑을 세워 보관하였습니다.

3년 뒤에 탑을 부수고 항아리를 열어보니, 시신이 부패된 곳이 없어 육신보살이라 생각하여 불교협회의 동의를 받고 금박을 입혀 현재 쌍계사에 모셔져 있습니다.

자명 스님

 

 

9. 자명 스님(慈明和尙 1904~1991) 청나라 말~중화인민공화국(중국)

법명: 자명(慈明), 도참(道參), 자: 복여(福如), 세속명: 진만초(陳萬超), 젊은 시절 별명: 팔백근(八百斤) (480kg을 들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

평소 합장모(合掌帽)를 즐겨 쓰고, 가끔 산(鏟)(사오정이 들고 있는 것이 산입니다)을 들고 절 주변치안을 살폈다고 합니다.

자명스님은 1904년 7월 27일 강소성 고우현 삼하촌(江蘇省 高郵縣 三河村)어느 농민의 집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모친이 불교를 믿어 그 영향으로 자명스님은 어려서 부터 채식하며 불교를 믿었는데, 6살때는 스스로 보제사(普提寺)에 가서 소림사(小林寺) 무술교육을 했던 료경(了慶)스님에게 무술을 배웠습니다.

13세 때 형이 분가해 어머니를 따라 살다가,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전부터 마음에 있던 보제사(普提寺)로 가서 출가하여 료경 스님에게 법명 자명을 받고 스님이 되어 무술 등을 익혔습니다.

1934년 30세에 남경 보화산 융창사(南京 寶華山 隆昌寺)에서 수구족계(受具足戒)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됩니다.

1937년 33세에 양주 고민사 (揚州 高旻寺)에서 래과(來果) 노스님 아래서 좌선을 배우며 처음에는 공양간에서 밥하는 일을 하다가 래과 노스님의 신임을 받아 승치(僧値)(승려들이 규칙을 잘 지키고 있는지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60년대초 약 56세에 자명스님은 구화산에 도착하여 백세궁, 쌍계사 등 구화산 여러 사찰에서 수행하다가, 1966년 중국 문화혁명시기 62세에 강제 환속되어 동릉시 대통진(銅陵市 大通鎭)에서 가위나 칼을 갈고, 똥장수 일과 나무통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1980년에 구화산 사찰이 개방되자, 1981년 77세에 자명스님은 구화산에 돌아가 불교협회에 동애사(東崖寺) 옆에 있는 유명종정(幽冥鐘亭(범종이 있는 건물))에 머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여 3년 반 동안 그곳에서 지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유명종정(幽冥鐘亭)에서 잠을 안자고 저녁에는 좌선(坐禪)을 했다고 합니다.

1984년 80세에 자명스님을 구화산 불교협회는 정천문 영관전(正天門 靈官殿) 주지로 임명하여 그곳에 생활하였습니다.

영관전은 불상도 없는 그런 가난한 절이라 생활이 어려웠는데, 연세가 많아 자주 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불교 신자인 “양유여”가 다른 절에서 밥을 얻어와 자명스님에게 가져다 드렸는데, 자명스님은 다른 절도 형편이 나쁠 것이니 공짜로 먹을 수 없다고 늘 밥값을 지불해 밥 얻어 온 절에 주게 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낡은 승복을 꿰매 입어가며 아낀 돈으로 영관전에 불상 2개를 만들고 사찰을 수리하였습니다.

1991년 87세에 자명스님은 입적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지하고, 당시 기문(祁門)에 있던 68세 제자 덕귀스님(德貴和尙)을 불러 유언을 남겼습니다.

입적 전에 남겼다는 글이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해석마다 뜻이 다르겠으나, 개인적인 해석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망아성생멸(忘我成生滅),여시불변천(如是不變遷). 진지역방하(眞持亦放下),수주탄공야(誰住嘆空也).

(나를 잊어 생과 멸이 있으니 이 또한 바뀌지 않는구나. 참으로 지니고 있는 것 또한 내려 놓으니 누가 머물면서 공을 찬탄하리오?)

역시 3년간 항아리에 보관 후 열어보니 시신이 부패한 곳이 없어, 육신보살이 된 것이라 생각하여 현재 지장선사(地藏禪寺)에 모셔져 있습니다.

명정 스님

 

 

10. 명정 스님(明淨和尙 1928~1992)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중국)

법명: 명정(明淨), 세속명: 서방주(徐方柱)

명정 스님은 56세에 스님이 되여 참선(參禪)을 서서 3년, 앉아서 3년, 누워서 3년을 하고 입적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1928년에 안휘성 랑계현 동하향 쌍교촌(安徽省 郞溪縣 東夏鄕 雙橋村)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어린 시절에는 임시공으로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명정스님의 조상은 대대로 불교를 믿었기에 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비린 것을 멀리하고 채식하였습니다.

가뭄이 들면 자기집에 모아 놓은 물을 이웃집 논밭에 방류하여 도움을 주는 등 선행을 많이 해서, 이웃들은 그를 보살 같은 마음씨를 가졌다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명정스님은 스님이 되기전부터 스승없이 자신 스스로 오랫동안 좌선(坐禪) 위주로 수련을 하였는데, 매일 앉아 있는 명정 스님을 이해 못하던 이웃들은 그를 밧줄로 묶어 못하게 막았으나, 결국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문화혁명 때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시간은 흘러 1984년 56세에 구화산 전단림(旃檀林)이란 절에 가서 말하길 “여기가 바로 나의 집이다”라고 하며 절에 들어가길 원했지만, 당시 전단림 주지였던 유화 스님(惟和和尙)은 그가 절에서 생활하는 것을 거절합니다.

결국 명정 스님은 구화산 천태사(天台寺)로 이동해서 머물며 수행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다행히 천태사에서 만난 어느 스님이 그를 제자로 받아 주겠다고 허락했고, 그때 받은 법명이 명정(明淨)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스승에게 수행비결을 전수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법명을 주었다던 그 스승은 바로 구화산을 떠났고, 심지어 그 스승의 법명도 모르는 명정스님은 천태사에도 머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또다시 처음 갔던 전단림으로 온 명정 스님은 전단림에 머물게 해 달라고 말했지만, 또 다시 거절 당하고 밖에 있던 큰북 밑에 서서 밤을 지새웠는데, 그렇게 명정스님이 처음 서서 참선을 시작하였고, 전단림 안쪽에 위치한 위타전(韋陀殿)에서 3년간을 계속 서서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단림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수행을 한 것 같습니다.)

3년간 서서 참선을 한 후 3년은 앉아서 참선을 하였고, 나중에는 누워서 3년 간을 참선하였다고 합니다.

보통 하루 한끼를 먹고, 폐관(閉關)수련을 할 때면 열흘에 한번 밥을 먹었고, 계절 상관없이 맨발에 누더기 옷을 입고 두타행(頭陀行)을 하였는데, 말 수가 적고 이따금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말을 하니 마치 미친 스님 같았습니다.

1992년 9월 6일 64세에 좌탈 입적하면서 유언으로 자신을 화장하지 말 것이며, 나중에 썩지 않는 몸이 될 것이라 말했다고 합니다.

6년 뒤인 1998년 12월 1일 항아리를 개봉해 보니 시신이 부패된 곳이 없고 피부가 탄력이 있어 육신보살이 된 것이라 생각하여 전단림(旃檀林)에 모셨습니다.

인의 스님

 

11. 인의 스님 (仁義和尙(仁義師太) 1911~1995) 청나라 말~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법명: 인의(仁義)

인의 스님은 비구니(여자 승려)로 세속 이름은: 강소민(姜素敏) 입니다.

1911년 요녕성 심양(遼寧省 瀋陽)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당시 관습에 따라 전족(纏足)(헝겊을 발에 동여매고 접어 넣듯 묶어 조그만 발을 만드는 것)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7세 ~ 8세에 그녀를 서당에 보내 거문고나 서예, 그림 등을 배워 전통적인 숙녀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공부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자주 몰래 근처에 있던 사찰에 가서 스님의 불경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집에서 가져온 곡식을 절에 시주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심경(心經), 대비주(大悲呪)등을 능숙하게 외울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17세~18세에는 의학(醫學)에 관심이 많아 전통의학인 침구(針灸)를 배웠습니다.

1940년 29세에 오대산(五臺山) 현통사(顯通寺)에서 출가하여 법명으로 인의(仁義)를 받았습니다.

현통사에서 수행과 밭 일 등을 하며 보내다가, 1942년 31세에 요녕 중의학원(학교)(遼寧中醫學院)에서 4년간 의학 공부를 하였습니다.

1950년에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생하자, 1951년에 40세에 자원하여 군의관(軍醫官)으로 전쟁에 참전하여 3년간 군복무를 하였습니다.

1953년말에 귀국하여 통화 206병원(通化 206病院)에 배치 되어 근무하였습니다.

1954년 43세에 심양 대남관연영(瀋陽 大南關聯營)병원에서 침구과(針灸科)의사로 근무합니다.

1958년 47세에는 환성위생원(보건소)(環城衛生院)에 배치 되어 근무하였습니다.

1963년 52세에 이변강향(二邊江鄕) 삼변강촌(三邊江村)에 배치 되여 그곳에서 역시 의사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중국사회는 공산주의 시스템으로 근무지역은 국가가 지정 배치합니다.)

1976년 65세에 인의 스님은 통화시(通化市)에서 직접 진료소를 차려 근무를 합니다.

1982년 71세에 인의 스님은 오대산(五臺山) 탑원사(塔院寺)에서 구족대계(具足大戒)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됩니다.

같은 해에 남산사(南山寺)를 중수(重修) 하였습니다.

1983년 72세에 구화산에 온 인의스님은 감로사(甘露寺), 보제각(菩提閣) 등에서 머물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을 들여 통혜선림(通慧禪林) 등 고사찰을 복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하북성(河北省) 한단(邯鄲), 석가장(石家庄) 산서성(山西省) 혼원(渾源), 오대산(五臺山)등을 돌며 아픈 사람을 만나면 의술(醫術)로 도와주고, 오래된 사찰이 있으면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1995년 85세에 인의스님은 오대산에 있다가 4월경 구화산 통혜선림(通慧禪林)에 도착하였고, 11월28일(음력)에 좌탈 입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항아리에 3년 2개월간 보관하다 열어보니, 머리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머리털이 자라 있고, 치아가 온전하며, 피부 모공까지도 뚜렷한 모습인데, 신기하게도 오른손은 침(針)을 잡고 있는 듯한 손 형태였습니다.

현재는 통혜선림(通慧禪林)에 모셔져 있습니다.

관덕 스님

 

12. 관덕 스님 (寬德和尙 1942~1999)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법명: 관덕(寬德) 세속명: 우보천(于寶川)

1942년 호북성 황매현 오조진 도하교(湖北省 黃梅縣 五祖鎭 渡河橋)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 부터 불교를 믿고, 서당에서 고승들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18세에 부모님 뜻에 따라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두었는데, 결혼 4년 후에 아내가 병으로 죽자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하고 싶었으나, 연로한 부모님과 어린 아들, 딸을 보며 마음을 다잡고 세속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하지만 틈틈이 시간이 나면 절에 가서 불경을 읽고, 채식을 하며 생활하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녀들이 가정을 이루어 걱정이 없어진 그는 1992년 3월 50세에 호북성 기춘현(湖北省 蘄春縣) 대축사(大竺寺)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됩니다.

1994년 8월 52세에 구화산 기원사(祇園寺)에서 수구족계(受具足戒)를 받아 상주하며 지내다가 구화산에서 서쪽 약 2km(킬로미터) 떨어진 송수암(松樹庵)에 머물면서 구화산 사찰 변소에서 나온 분뇨를 퍼서 농지에 거름을 주며 수행하였는데, 관덕스님은 이때 금강경(金剛經)을 즐겨 읽고, 필사(筆寫) 하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암자 주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옷, 음식 등을 기부하고, 필요하면 돈도 주고 선행을 쌓았습니다.

1999년 입적 약 한달 전부터 밥 생각이 없어, 칡가루로 만든 죽을 가끔 먹었고, 1999년 4월 57세에 좌탈 입적하여 유언에 따라 항아리에 보관 후 3년 뒤 열어보니 시신이 부패된 곳이 없어 육신보살이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현재 구화산에서 약 3km 떨어진 지주시 청양현 두촌향 장성촌 (池州市 靑陽縣 杜村鄕 長城村) 송수암(松樹庵)에 모셔져 있습니다.

보문 스님

 

13. 보문 스님 (普文和尙(普文法師) 1912~2000)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중국)

법명: 보문(普文) 세속명: 방장생(方長生)

1912년 안휘성 육안(安徽省 六安)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8살에 구화산 관성전(關聖殿)(현재 천태사 하원(天台寺 下院))에서 출가하여, 10살에는 외삼촌과 함께 오랜 시간 구화산 천태사(天台寺)에 머물며 불경을 배웠습니다.

1935년 23세에 남경 보화산(南京 寶華山)에서 구족대계(具足大戒)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됩니다.

1940년 28세에 중국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전쟁이 발생하자, 보문스님은 자원해 군대에 입대하여 위생원(衛生員)(의무병)으로 군복무 하였습니다.

1945년 33세에 항일전쟁이 끝나자 천태사(天台寺)로 복귀하여 스님 생활을 계속 합니다.

군복무 시절 배운 의료지식과 산에서 나는 약초로 아픈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1958년 46세에 보문스님은 제자인 개보 스님(開寶和尙)과 함께 천태사(天台寺)에서 약 1.7 km(킬로미터) 떨어진 도승동(道僧洞) 동굴에 머물며 38년 간 생활하였습니다.

동굴주변에는 녹차나무와 버섯, 채소, 밤나무 등을 심고, 죽순과 약초 등을 캐서 자급자족하였고, 필요한 생활용품이 있으면 산에서 재배한 농산품을 교환해 사용하였습니다.

1998년 86세에는 항일전쟁때 파손된 관성전(關聖殿) 유적 자리에 굉학스님(宏學和尙)이 천태사 하원(天台寺 下院)이란 사찰을 재건하였는데, 굉학스님에게 부탁하여 본인이 처음 스님이 된 곳인 관성전(천태사 하원)에 머물며 노년을 보냈습니다.

2000년 1월 22일(음력) 88세에 좌탈 입적하였는데, 유언대로 시신을 항아리에 보관하고 3년 6개월 후에 만명이 참관하는 자리에서 항아리를 열어보니 시신이 부패된 곳이 없어, 육신보살이 된 것으로 여겨 천태사 하원(天台寺下院)에 모셨습니다.

보문스님을 끝으로 기록상 전해지는 13분의 육신보살 소개를 모두 마쳤습니다.

대중에게 공개된 자료는 일부분이라 자세한 수행방법과 이분들의 삶 전체를 알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동영상을 마치며…

신념과 믿음이란?

세뇌, 자기최면, 강요는 믿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절에서 석가모니 진신사리 전시회를 한다고 할 때 가장 이득이 없는 마음자세가 저게 “진짜일까? 가짜일까?” 하는 마음자세로 오직 실(失)만 있는 마음 자세입니다.

반대로 “저것은 확실히 진짜이다” 하는 것도 득(得)보다 실(失)이 많은 마음 자세입니다.

“저것은 아예 가짜 다”와 같은 동급의 마음입니다.

저것이 가짜일까? 진짜일까? 하는 마음은 조금 위의 마음 자세입니다.

진정한 신념과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은 “이게 진짜라면 나는 행운이다. 나는 잘 될 것이다. 나는 행복하다”가 진정한 신념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속 어느 한 곳에 “오늘 본 것이 가짜라면 내가 부족한 탓이다”가 깔려 있는 마음입니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믿음을 쏟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믿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저것이 진짜다, 가짜다” 하는 것은 믿음을 어떤 대상에 돌리는 것이고, “앞으로 나는 잘 될 것이다.” 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2022년12 기준, 구화산 육신보살 명단 총 17분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는 구화산 육신보살은 총 13분이고, 나머지 4분은 자세히 알려진 사실이 없습니다.

동영상에 소개 하지 않은 혜성 스님은 구화산 인덕 스님의 제자였는데, 입적한 장소는 구화산이 아니고, 입적 후 제자들 꿈에 나와서 본인의 육신을 구화산에 보관해 달라고 하여 제자들은 스승님의 뜻에 따라 현재는 구화산 감로사에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검수에 도움을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본 내용은 영리적인 사용을 제외하고 공유 및 복사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가면 이사잠 교수님 연구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뇌 알파파에 의해 정의되는 두 가지 기공 상태) (5)氣功與外氣,3. 李嗣涔,張楊全,1991, “由腦α 波所定義的兩種氣功態” J. Chin Med 2 (1): 30-46.,이사잠 교수님 개인 홈페이지https://sclee.website/ )

(본 글은 영리적인 목적 외에 공유해도 상관 없습니다.)

 

 

 

 

 

 

 

 

지장보살 성지 구화산(九華山) 육신보살이 되신 13분의 스님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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