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세친(世親, Vasubandhu) 보살 이야기>

수선님 2024. 2. 10. 14:24

<세친(世親, Vasubandhu) 보살 이야기>

일본에 전하는 세친상

 

우리가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그대로 이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가 산이며 나무, 그리고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고 할 때,

과연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아무런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단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철학사상은 말해주고 있다.

우리들은 일종의 색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색안경을 흔히 선입견(先入見) 또는 선입관(先入觀)이라 한다.

특히 좌파들은 이념의 노예들이다. 바로 여러 가지 가치와 판단, 그리고 억측으로 물들어 오염돼있는 주관(主觀)의 틀에 맞추어 사물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화엄경>에서는 마음은 마치 화가와 같아서 여러 가지 사물을 (제 마음대로)그려낸다고 했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을 중요시했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공부를 강조해 왔다.

심지어 그 마음의 작용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철학적 체계를 세우기까지 했다.

그것이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mika vadin)와 쌍벽을 이루는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 Vijnana vadin)이고, 그 유식학파를 확립시킨 인물이 세친(世親)이다.

유가유식학파를 개창한 사람들은 미륵(彌勒, Maitreya)과 무착(無着, Asanga), 세친(世親, Vasubandhu)의 형제이다.

그러나 이들 중 미륵이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란이 많으며, 대체로 실존 인물이 아닐 것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다만 유식학파의 교설을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격상시키기 위해 이상적인 보살 중에 한 사람인 미륵보살을 자파(유식학파)로 불러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듯이 아직까지는 확실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착과 세친 형제는 유식학파 체계를 공고히 다진 실존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개방된 터전에서 인생의 의미를 관조하며 해탈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내면의 빛을 안겨다주었다.

사실 그들은 실제 보살의 계위에 올랐다고 전해질 정도로 획기적인 연구 성과를 낸 인물들이다.

무착과 세친, 형제는 인도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한 굽타왕조 시대(Gupta dynasty, AD 320~550년경)의 인물들이다.

당시는 산스크리트어가 고도의 문법 체계를 갖춘 공식적인 철학용어로 자리를 잡아서, 산스크리트 문헌이 백화난만한 시기였다.

거기에 따라 사상의 자유 또한 확립돼, 여러 사상들이 거침없이 표현되고, 인도 육파철학(六派哲學)이 공고히 체계를 잡았으며, 그 밖의 여러 가지 종교나 철학도 자신들의 사상을 산스크리트어로 정리해 나갔다.

이에 따라 불교도 고도의 철학성을 갖추고 발전하게 됐으니, 중관학파는 용수(龍樹) 이후 여러 논사들이 출현해 발전을 이룩해 나갔고,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무착과 세친 형제가 나타나 자신들의 사상을 꽃피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실존성이 다소 의문시되는 미륵이 설했다는 미륵의 여러 저술도 사실은 무착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을 정도로 유식학파에서 그의 위치는 확고해, 가히 그 개조(開祖)라 할 만하다. 그의 저서로서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등이 있다.

그리고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이 가공의 인물이라면, 미륵의 저서로 알려진 <대승장엄경론송(大乘莊嚴經論頌)>, <변중변론송(辨中邊論頌)>, <금강반야경론송(金剛般若經論頌)>,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등도 무착의 저서로 봐야 한다.

그러나 유식학의 본격적인 발전은 그의 아우 세친(世親)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형 무착은 대승 보살의 길로 향하는 강한 열정과 대자비의 정신이 철철 흘러넘치는 감성의 소유자였음에 비해 동생 세친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날카로운 이성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불교의 모든 개념들을 세분화해서 그것을 정리해나간 세친의 주저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은 소승불교를 대표하는 논서일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부파불교의 중심이 되는 여러 사상(불교철학이나 세계관 등)을 조리 있게 정리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강요서이고, 동아시아에서도 널리 읽혀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불교의 교과서로 일컬어질 정도로 불법의 세밀한 분석과 정의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불교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위치는 로마가톨릭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이 차지하는 위치에 비견돼왔다.

또한 남방불교의 <청정도론>에 대비되는 북방불교의 아비달마를 집대성한 대표적 논서이기도 하며,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이 남아있다.

따라서 동생 세친(世親, Vasubandhu) 개인에 대해 이해하려는 것은, 이와 같이 세친이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세친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간혹 묻기를, “그는 과연 깨달음을 얻었을까?”라고 하는 의문을 던지곤 한다.

그리하여 세친은 유부에 출가해 아라한과를 얻었다고도 하고, 대승에서는 보살보다는 아래인 세제일위(世第一位)의 수행에 달했다고도 하지만, 아직도 이 질문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다소 분분하다.

하지만 세친이 깨달음을 얻었거나 얻지 못했든 간에 대ㆍ소승을 넘나들며 연구한 그의 불교사상사적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세친(世親, Vasubandhu)은 평소 모든 사상을 종합해 저술을 많이 했으며, 여러 부파에 두루 밝았다. 그리하여 소승이 최상의 진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대승에 귀의해 대승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그는 일생동안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열심히 연구와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유식’을 확립한 불교사상가로서 유식 이외에도 여러 대승경전을 연구했던 세친은 용수(龍樹) 이후 대승불교사상의 최고 개척자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만일 세친의 등장이 없었더라면 불교사상을 학습하고 연구하는 길이 어쩌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까지 평가받는 것은 그가 이루어 놓은 불교사적 업적이 지대함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그가 어떤 인물이며, 불교사적으로 어떤 업적들을 이루어 왔기에 이와 같은 평가를 받는지 살펴보자.

무착과 세친 형제는 인도 북서부 간다라(지금의 페샤와르) 지방 출신으로 중기 대승불교 승려들이라 할 수 있다. 동생 세친은 천친(天親)이라고도 하는데,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AD 320~400년, 또는 400~480년, 이렇게 두 가지 설이 있으며, 대략 4~5세기경에 활약한 인물이라고 하겠다.

처음엔 그의 형 아상가(Asa․nga, 無着)와 함께 당시 카슈미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출가했다. 그러나 형 무착은 일찍 소승을 버리고 대승으로 들어갔으나 세친은 소승에 집착해, 대승을 공격했다. 세친도 형 무착에 못지않게 대단한 천재였다. 그야말로 일람첩기(一覽輒記), 한번 보면 다 기억하는 기억력으로 수많은 경전과 문학을 섭렵했다.

그리하여 부파불교 중 최대의 학파이며 보수파를 대표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이 계통에서 분파한 경량부(經量部)에서 배웠으며, 그 배운 것을 저서 <아비달마구사론>에 제시했다.

그 후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쓴 그의 형인 아상가(Asa․nga, 無着)의 권유로 대승불교로 전향해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로부터 아상가에게 계승된, 모든 현상은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연구하게 됐다.

형 무착의 권고로 대승으로 귀의한 얘기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형 무착은 총명하고 지식의 이해도 깊은 동생 세친이 대승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매우 심려한 나머지 병에 걸려 드러눕고 말았다. 아우는 그 사실을 알고 형을 문병해 그 자리에서 대승의 이치를 듣고, 그것이 자기가 알고 있던 소승의 교리를 능가함을 깨우치고 대승불교로 들어섰다.

그러나 무착은 그것만으로 부족했던 모양인지 세친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너는 그 혀로 아주 교묘하고 멋지게 대승을 비난하고 공격해 왔다. 네가 만약 그 죄를 면하고 싶다면, 바로 그 혀로 아주 교모하고 멋지게 대승불교를 설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 결과 세친은 유식철학의 근본교설이라 불리는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삼자성게(三自性偈)> 등 많은 대승 논서를 짓거나 해석을 가해 유식철학의 체계를 굳건히 다졌다.

부파교단의 거장이었던 세친이 대승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0대 말이나 50대 초 무렵에 형 무착의 간절한 권고 때문이었다.

세친은 대승교학의 깊고 광대함을 깨닫고 과감하게 대승교단으로 전향했다.

젊어서 대승을 비불설(非佛說)이라고 비방하던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그 대신 대승불교를 홍포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유식불교는 미륵에 의해 창시되고 무착을 거쳐 세친에 의해 완성됐다고 하겠다.

특히 세친은 <유식삼십송>이라는 논서에서 유식의 대강을 5언 4구로 된 불과 30개의 게송으로 체계화시켰다.

이 짧은 게송을 통해 ‘모든 것은 인식과 인식의 변화일 뿐이다’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마음작용과 마음의 존재양태, 유식의 수행론에 대해 기술했다.

즉, 유식사상의 인식론, 존재론, 수행론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식삼십송>은 불교심리학의 중요한 텍스트다.

훗날 안혜(安慧, Sthiramati)의 <유식삼십송> 주석서인 <유식삼십송석(唯識三十頌釋)>이 저술되면서 더 많이 알려졌다.

세친의 저서에는 <십지경론(十地經論)>,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대승성업론(大乘成業論)>,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등이 있으며, <불성론(佛性論)>과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 등이 알려져 있다.

그 밖에 중기 대승의 주축이 되는 핵심적인 논서와 주요한 경전에 대해 뛰어난 주석서를 많이 남겨 천부론사(千部論師)로 불렸다.

천부론사는 소승 5백부, 대승 5백부의 논(論)을 지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대승으로 돌아서면서 세친은 인도 남동부에 위치했던 아요디야국(Ayodhya, 아유타국, 아요다국)으로 갔다고 한다. 다행히 아요디야국왕이 대승을 크게 보호하면서 세친은 절정기를 맞이했다가, 80세를 일기로 아요디야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세친의 전기에 관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 546년 남해를 거쳐 중국에 와서 <구사석론(俱舍釋論)>을 번역한 진제(眞諦, 파라마르타/Paramartha, 499~569)의 <바수반두법사전(婆槃豆法師傳)>

•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 현장의 제자로서 현장 역장(譯場)의 최고 필수자(筆受者-역어를 받아쓰는 사람)였던 보광(普光)의 <구사론기(俱舍論記)>

• 티베트인 타라나타(Taranatha, 1573~1615)의 <인도불교사> 등이 있다.

바수반두를 진제는 천친(天親)으로 번역했지만 현장은 ‘세친(世親)’이라 번역했다.

진제(眞諦)의 <바수반두법사전>에 따르면, 그는 불멸(佛滅) 900년 무렵 간다라의 푸루샤푸르(오늘날 페샤와르)에서 카우시카(Kausika)라는 성을 가진 바라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 설일체유부에 출가했다가 대승으로 돌아선 후 아요디야에 머물렀는데, 박학다문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계행이 깨끗하기로 이름 높았다.

그는 거기서 <아비달마구사론>을 저술했다. 그는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중심으로 해 서술하면서도 그 뜻에 치우침이 있는 곳은 경량부의 교의로써 논술했다.

그런데 당시 아요디야국 태자의 매부 바수라타(Vasurata)가 <대비바사론>을 중심으로 <구사론>의 문구를 비판하다가 도리어 논파 당했다. 이에 수치를 느낀 그는 설일체유부의 학승 중현(衆賢, 상가바드라/Samghabhadra) 법사에게 <구사론>을 논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중현 법사는 12만 송으로 이루어진 <수실론(隨實論)>을 지어 <비바사>의 교의를 옹호하면서 <구사론>을 논파했다. 그리고 세친과 직접 대론하고자 했으나 세친은 늙음을 탓해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 <아비달마구사론(Abhidharmakośa-śāstra)>

세친이 소승시대의 주요 저서인 <구사론(俱舍論)>은 산스크리트어 ‘존재 분석의 장(藏)에 대한 주석’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성립 유래에 대해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진제의 서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세친은 처음에는 유부학파에 속했다. 그런데 이 유부학파의 명칭인 설일체유부라는 학파명 그대로 “일체는 존재한다”는 뜻으로 존재의 여러 구성요소의 실재를 인정하는 학파였다. 즉, 법의 실체는 항상 존재한다는 뜻의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라는 명제를 주장했다. 이 유부학파는 당시 북인도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뻗친 가장 유력한 소승학파였다.

이 학파는 경ㆍ율ㆍ론 삼장 중 논장의 저작을 중요시해 초기에 <집이문족론(集異門足論)>, <법온족론(法蘊足論)> 등의 6족론(足論)이라 불리는 6론을 저작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경에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a-tya-nputra)가 <발지론(發智論)>을 저술함으로써 칠론(七論)이 완성돼 그 교의가 확립됐다.

그리고 이 <발지론>에 대한 주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카니시카왕(대략 AD 129~152년 재위)시대에 편찬됐다.

세친 역시 <대비바사론>을 배워, 고향에 돌아와 그것을 강의하고 그 대요를 600여 송으로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동판에 새겨 카슈미르의 논사에게 보냈지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자 그것에 대해 주석해서 정리한 것이 바로 <구사론(俱舍論)>이다.

<구사론>은 총 9품 3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역으로 2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서, 이 책의 특징은 〈대비바사론〉에 설해져 있는 내용을 하나하나 해석만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체계 정연한 새로운 구성 아래 그 설한 바를 요약한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유부의 학설이라도 그가 아니라고 본 것에 대해서는 경량부의 입장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을 ‘이장위종(理長爲宗, 理가 뛰어난 것을 宗으로 삼는다), 즉 다른 종파가 설한 것이라도 그 도리가 뛰어나면 그것 또한 채용하는 입장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구사론>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계 및 현상계를 초월한 초자연계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분석에 주력했다.

그러나 이 분석은 단순히 분석을 위한 분석은 아니다. 참다운 아비달마란 ‘열반의 법에 대한 청정한 지혜’라고 하듯이, 존재의 분석을 통해 무아(無我)를 깨달아 열반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앞서 세친의 철학적 입장이 ‘이장위종’이라고 했듯이, 세친은 <구사론>을 통해, 단지 유부사상을 정리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유부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고 그것에 대해 낱낱이 비판하고자 한 것이 세친의 본래 의도였다. 그렇다면 세친이 <구사론>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해 여러 답들이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존재와 인식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존재(存在)에 관한 비판을 보면, 유부는 ‘일체,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은 존재한다.’고 하는 ‘삼세실유설(三世實有說)’을 주장했다.

이에 세친은 오직 존재하는 것은 현재의 한 찰나일 뿐, 과거나 미래는 실유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세친은 모든 존재는 생하자마자 멸하는 바로 그 찰나에만 존재할 뿐, 과거나 미래에 변하지 않는 어떤 자성(自性)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식에 대한 것을 보면, 유부가 ‘식유필경(識有必境)’, 즉 인식에는 반드시 그 대상이 실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반면에, 세친은 ‘무소연심(無所緣心)’, 즉 대상이 없는 인식도 있다고 해서, 앞서 존재의 문제와 더불어 인식에 있어서도 상반된 관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상에 대한 인식이란 대상이 존재 그 자체로 인식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그 대상은 이미 소멸했기 때문에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한 찰나 전(刹那 前) 존재했던 대상이 남긴 표상, 즉 이미지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이미 소멸했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과거나 미래는 실유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친은 <구사론>을 지을 당시 대체로 경량부적 사상에 치우쳐 있었지만, 이후 무착의 권유로 다시 대승의 유식사상으로 전향하게 됨으로써 그의 사상적 행보는 더없이 넓어진다.

• 유식사상(唯識思想)

대승의 유식사상으로 전향한 세친의 사상을 그 저작 내용을 통해 정리하면, 대략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경전에 대한 주석서,

② 미륵(彌勒, Maitreya) 혹은 무착(無着)의 전작에 대한 주석서,

③ 그 자신이 직접 저술한 유식 논서 등이다.

이 중에서도 유식사상가로서 세친의 사상은 그의 대표적 논서인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과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대승 유식학자로서 이러한 저술을 통해, 기존의 유식설을 압축하고 보완한 것이다.

우선 유식(唯識, skt. vijnapti-matrata)이라는 용어는 마음작용(vijñapti)과 오직(mātrata)의 합성어으로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라고 하는 유가유식학파의 최대 명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은 다시 ‘유식무경(唯識無境)’으로 표현되는데, “경(境,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데, 오직 식이 경으로서 현현한다.” 혹은 “이들 모든 식은 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식이다.” 등으로 말해지는 것이다. 세친도 이런 유식적 사고를 계승해 자신의 저작인 <유식이십론>에서 ‘그것은 유식이다. 무경(無境)으로 현현하기 때문에’ 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유식삼십송>에서 ‘유식’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색을 더욱 깊이 해, 종래의 유식이라는 용어를 ‘유식(唯識)’과 ‘유식성(唯識性)’이라는 두 갈래로 나누어 쓰고 있다.

즉 “일체는 유식이다”고 하는 판단에서 쓰이는 유식과 “유식성에 머문다”고 하는 하나의 수행과정인 심적 경계를 나타내는 말로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결국 세친은 “일체는 유식이다”라는 말에 의지한 판단을 하나의 수단으로 삼아 지관(止觀)이라는 삼매를 통해, 그 유식이라는 판단조차도 소멸해버린 진실한 세계(眞如)에 들어가는 것을 ‘유식성’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종래에 보지 못한 세친의 사상적 발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세친은 경량부의 ‘업 상속(業相續)’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종자(種子)의 상속, 전변(轉變), 차별의 사상을 채용해, <성업론(成業論)>과 <유식이십론>에서 점차로 유식사상 쪽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곧 〈유식삼십송〉에서 독자적인 교설을 구성하는 ‘식전변(識轉變)’이라는 개념으로 유식을 보다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유식사상을 확립해 나간 것이다.

※전변(轉變)---전변은 변화의 뜻으로서, 특히 남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에 의해 자기 자신 속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인도철학에 있어서 전변설(轉變說)은 우주론(宇宙論)의 하나로서, 우주의 모든 것은 일원(一元)의 실재가 스스로 전개 변화해 생성(生成)된다는 설이다.

그리고 세친은 공식적인 토론에서 추론(推論)을 이끌어내는 절차(5단계)와 개인적 사고과정에서의 절차(3단계)를 서로 구별해 다루기 시작함으로써 인도 고전적인 추론 논법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론(推論)---어떤 일을 이치에 따라 미루어 생각해 논급(論及)하는 것을 말함. 미리 알려진 어떤 생각이나 주제를 근거로 삼아 새로운 판단, 또는 결론을 이끌어 냄을 말한다.

•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당나라시대인 661년 현장(玄奘)의 번역본에 의하면, <유식이십론은> 20수의 게송을 통해 외도와 소승의 치우친 소견을 깨뜨리고 유식의 가르침을 설한 논서이다.

비록 1권의 적은 분량이지만, 대외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저서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논서는 대승유식의 승묘한 도리를 안립(安立)하기 위해 오로지 외도와 소승의 삿된 견해를 논파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됐다.

첫머리에서 <화엄경> ‘십지품’의 말을 인용해 삼계유식(三界唯識)이라는 근본 명제를 밝히고, 이어서 외도와 소승의 비판에 답(答)함으로써 일체가 유식임을 논증했다. 또한 아(我)와 법(法)이 모두 무아(無我)라고 하는 대승의 가르침을 선양했다.

즉, 먼저 근본취지[宗旨]인 유식무경설(唯識無境說)을 안립한 다음에, 이것이 석존께서 설하신 경전에 의거한 것임을 밝히고[敎證], 바른 논리에 의거해 논증했다[理證].

세친은 이 논서를 저술해 유식무경설(唯識無境說)을 확립하고, <유식삼십송>을 통해 식전변설(識轉變說)을 완성시킴으로써 유식이론을 확고하게 했다.

그리하여 외도뿐만 아니라 설일체유부 등 소승에서 마음 밖에 실존하는 대상이 있다고 믿는 잘못된 집착에 대해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고 논파했다.

마치 현기증이 나거나 눈에 백태가 있으면 허공중에서 머리털, 파리, 허공 꽃 등을 보게 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부대상은 식(識)이 사현(似現)된 것일 뿐 실재가 아니라고 했다.

<유식이십론>은 산스크리트본이 전하고 있으며, 한역본은 현장 역 외에 진제(眞諦, 499~569) 역과 보리유지(菩提流支, ?~725) 역이 전하고, 티베트 역본도 전한다.

그리고 주석서로는 규기(窺基, 632~682)의 <유식이십론술기>와 신라 승 원측(圓測, 613∼696)의 <이십유식론소(二十唯識論疏)>가 있다.

•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유식이십론>과 함께 <유식삼십송>을 지은 것은, 대략 383년에서 391년 사이로 추정되며, 세친의 나이 70대 노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유식삼십송>은 이미 형 무착(無着)이 초안하고 그 아우인 세친이 완성한 것으로서 무아(無我) 무법(無法)이요, 오직 유심(唯心)임을 밝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불교사상의 핵심내용이라 하겠다.

<유식삼십송>은 유식의 대강을 5언 4구의 30개 송으로 정리해 총 120구(句)의 단문으로 유식학을 집약해 학문으로서 체계화함으로써 유식학파를 형성하는 원천이 됐다.

그리고 심소(心所)와 그 작용, 그리고 수행절차를 간명하게 설명한 송문(頌文)으로서 세친의 역작이라 하겠다.

심(心)ㆍ의(意)ㆍ식(識)의 3식을 바탕으로 해서 심체(心體)와 심작용(心作用)을 설명하고, 전5식(前五識)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밝혀, 수행으로 마음을 닦아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중생계에 새로운 수행의 정로(正路)가 열리게 된 것이다.

즉, <유식삼십송>은 유식의 대강을 마음의 변화와 마음작용(心所)을 압축해 설명하고 마음의 상태(相)와 마음의 바탕(性) 그리고 수행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하는 수행증과(修行證果)를 밝힘으로써 인간은 후천적 노력에 의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한 수행정로(修行正路)라 하겠다.

이렇듯 불교사상에 중추가 되는 <유식삼십송>은 <해심밀경>과 <대승아비달마경>에서 출발해 형 무착(無着)이 대강을 완성했으나 부족한 점을 세친이 보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완성에 이르렀다.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과 <유식삼십론송(唯識三十論頌)>의 차이

<유식삼십론송>은 한역대장경에 수록된 <유식삼십송>을 가리키는 문헌 이름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두 문서 간에 존재한다.

즉, <유식삼십송>은 오직 서른 개의 게송으로 구성된 바수반두의 저작물이지만, <유식삼십론송>은 서른 개의 게송 외에도 게송 사이사이에 한역자인 현장(玄奘)의 소개 글이 짤막한 주석의 형태로 삽입돼있다. 따라서 글의 분량 측면에서 <유식삼십론송>이 <유식삼십송>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유식삼십송>은 글의 모든 부분에서 저자를 바수반두로 볼 수 있지만, <유식삼십론송>은 글의 많은 부분에서 직접 글을 쓴 사람을 바수반두로 볼 수 없는 내용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유식삼십론송>을 <유식삼십송>에 대한 일종의 짤막한 형태의 간이 주석서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원문 외의 부가적인 내용이 많다.

• 공(空)과 유식현상론(唯識現象論)

세친은 용수를 중심으로 하는 중관불교(中觀佛敎)가 너무 공(空)을 강조한 나머지 모든 입장을 제거하는 허무론에 치우쳐 있기에, 그 약점을 극복하고자 모든 것의 입지 기반으로서 식(識, 마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이,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뿌리들 두고 있으며, 그 마음이 변화돼 나타난 것으로 보는 유식현상학(唯識現象學)이다. 즉, 세계는 우리들 인식의 표상(vijnapti)으로서의 세계일뿐이라는 유식(唯識)을 천명한 것이다.

세계는 우리 마음이 그려낸 표상(表象)일 뿐이다. 외부 대상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언어나 사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 마음은 다시 심층적인 마음의 씨앗인 아뢰야식(Alaya vijnana)에 저장돼 있다가 다시 외부 대상으로 표상된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윤회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우리의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공으로 비울 때만이 가능하다. 아뢰야식이 공으로 전환할 때 우리의 마음이 청청해져 그때 가서는 사실 자체, 사태 자체가 여실하게 보이며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의 행보를 내디딜 일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마음을 비우라고 한다. 마음을 비우게 되면 자연히 모든 욕심에서 떠나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청정해져 사태 자체를 올바로 직시할 수 있으며, 거기에 따라 어디 치우침이 없는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한 경지에 이르려고 하면 수행이 필요하다. 유식의 구도자들은 피나는 수행을 거쳐 일가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유식학파라는 말 외에, 수행을 강조해 유가사(瑜伽師, Yogacara), 즉 요가 수행자라 불렸던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 특히 황정일 교수 및 무비 스님의 글을 많이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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