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우리 나라의 유명하신 어른 스님

수선님 2024. 1. 14. 12:58

우리 나라의 유명한 어른 스님

 

1. 고구려 : 순도, 아도, 승랑, 혜자, 담징, 혜관

2. 백 제 : 관측, 겸익, 담욱, 혜인

3, 신 라 : 원효, 의상, 자장, 진표, 원광, 도선, 혜초, 원측

4. 고 려 : 나옹, 무학, 의천, 보우, 보조

5. 조 선 : 서산, 사명, 영규, 부휴, 경헌, 처영, 소암, 벽암,

회은 명조, 처능, 성능, 서봉, 편암, 진묵

6. 근 세 : 경허, 한암, 만공, 만해, 용성 등이 계신다.

우리 불자들이 꼭 기억해둘 만한 분들을 꼽아본다면 우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승랑(僧朗)과 담징(曇徵),

백제의겸익(謙益)과 혜총(慧聰),

신라의 원광(圓光)과 자장(慈藏),대안(大安)스님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승랑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넌가 상당한 학술적

성과를 이룬 분이고, 담징과 혜총은 일본에 불교와 함께 많

은 문화를 전수하신 분이며,

겸익은 인도까지 가서 경전과 율장을 가지고와 번역한 분

입니다.

그리고 원광은 세속오계를 설해 화랑도 정신의 기초를 제공

한 분이고,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만들고 신라 불교의

기틀을 다진 분이며, 대안은 민중교화에 매진하신 분이었습

니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는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원측(圓測)

,혜초(慧超)스님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원효는 교학의 발전과 민중교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분이고, 의상은신라 화엄종의 효시가 되는 분이며,

원측은 중국에서 활약한 학술적인 업적이 뛰어난 분이고,

혜초는 인도에 유학하여 {왕호천축국전}이라는 기행문을 남

긴 분입니다.

한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의천(義天)과 지눌(知訥),

일연(一然) 및 휴정(休靜), 유정(惟政)스님등을 들 수 있겠

습니다.

이 가운데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천태종의 창시자이고,

보조국사 지눌은 정혜결사를 일으켜 수해의 풍토를 진작시

킨 분이며 일연은 {삼국유사}를 지어 민족정기를 선양한 분

입니다.

또한 서산대사 휴정은 사명대사 유정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나라를 지켰을 뿐 아니라 교단의 기풍을 쇄신시킨

분입니다.

<경허 성우 1840~1912>

경허 성우(鏡虛 惺牛)스님은 한국 근대 선의 중흥조로 일컬

어질만큼 승풍 진작과 깨달음을 만행으로 회향한 근세 최고

고승이다.

선의 진면목과 선풍를 드날림으로써 한국선종이 새롭게 부흥

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수선결사(修禪結社)에서 나타난다.

1899년 해인사 결사를 필두로 화엄사 범어사등 수선사(修禪

社)를 창건하며 수선 붐을 일으켰다.

수선결사의 성격은 동수정혜(同修定慧, 보조지눌이 선풍을

진작한 후 서산대사 청허휴정을 거쳐오면서 면면히 이어진

정법안장), 동생도솔(염불을 통한 정토왕생을 추구),

동성불과(同成佛果,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보살의 비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선문촬요〉를 저술, 수행자들에게 선의 지침을 제공해

주었다.

말년에는 중생속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회향하기도 했다.

산중불교를 대중속으로 끌어와 중생교화에 앞장선 것은 가장

주목될 대목이다.

<용성 진종 1864~1940>

용성 진종(龍城 震鐘)스님은 선수행에 진력한 선사이자 계행에

철저한 율사, 3.1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에 주력한 역경가로서 한국 근세불교사의 거목으로 추앙

받는다.

무엇보다 일제 암흑기에 대각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불교현대

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스님은 선종교당(禪宗敎堂), 대각사란 도심 포교당을 세워 현대

식 포교방법을 최초로 도입하는가 하면, 불교의식 간소화 및

찬불가 제정, 경전 한글화를 통한 불교 현대화, 사회화, 대중화

를 선도했다.

또한 북청탄광 경영, 화과원(華果院) 운영등 승단의 경제적 자립

을 위해 선농일치를 주창한 것은 근대 한국 불교사의 가히 혁명

적인 실천이념으로 한국승단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만공 월면 1870~1946>

만공 월면(滿空 月面)스님은 경허의 혜명(慧命)을 이어 근·현대

한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청허와 사명이 조선중기 선의 중흥조이라면 경허·만공스님은

한국불교 근대 선의 중흥조라 불린다.

스님은 우주와 만물의 본체로서, 마음을 가장 중요시했다.

불교의 진수는 이 마음을 깨닫는데 있고 인간의 가치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3년간 금강산 마하연에서의 선지도와 1937년을 전후한 마곡

사 주지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스님은 또한 1920년대 초 선학원 설립운동을 했으며, 선승들

의 결사인 동시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모임 성격의

선우공제회운동에 참여했다.

<석전 정호 1870~1948>

근대 불교교육의 선구자로 교학발전에 공헌한 석전 정호스님

(石顚 鼎鎬)은 금봉 진응스님과 함께 근대불교 3대 강백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불교를 살리는 길은 곧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소신아래 조선불교 교정, 현 동국대 전신인 중앙

불교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으며 교육 일선에 투신했다.

삼장강설(三藏講設)은 물론 시문(詩文)과 경사자집(經史子集),

노장학(老莊學), 심지어 서법(書法)까지 겸통해 당대 석학과

의 교유가 많았다.

최남선은 “스님의 해박하심은 내외전(內外典)을 꿰뚫어 감히

내가 미칠바가 못된다”며 흠모했다.

아호인 석전도 추사 김정희가 크게 될 후손에게 남기라 전한

것을 받아 생긴 것.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정인보등 당대 석학과 교유속에 속명인

박한영으로 더 알려져 있기도 하다. 청담 운허 미당등 제자를

배출했다.

불교인의 시대적 자각을 교육을 통해 독려했던 스님은 불교

유신의 방법으로 참다운 계·정·혜, 이타행, 학교설립과 인재

양성, 포교의 현대화, 생산불교로의 전환, 인민에 대한 자선

사업 6가지를 주창했다.

<만암 종헌 1876~1946>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만암 종헌(曼庵 宗憲)스님. 교육과

수행, 전법등 수행자의 본분사를 지키는데 평생 한치의 흐트러

짐 없었던 근대 한국불교의 큰 봉우리다.

스님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에 대한 열정.

1917년 백양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전통 현대를 겸비한 승려

교육을 위해 광성의숙을 설립했고, 일반인을 위한 심상학교를

세웠다.

그뒤 1928년 박한영 스님과 함께 주도한 불교전수학교(동국대

전신) 설립, 1947년 전남 광산군의 정광중학교 설립등이 이어

졌다.

1925년 임제종 설립을 주도했던 스님은 50년엔 한암스님에

이어 제 2대 교정에 추대되면서 종단명칭을 조계종으로, 교정

을 종정으로 바꿔 한국불교의 법통을 세웠다.

<한암 중원 1876~1951>

한암 중원(漢岩 重遠)스님.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행

을 ‘소치는 구도행’에 비유하며 ‘돈오점수’를 설파했던, 선교를

아우른 근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다.

1899년 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선사를 만나 설법을

듣는 인연을 맺고 전법제자가 되어 수년간 문하에서 참선 공

부를 한다.

그 명성이 이미 자자해 스님이 30세 되던 1905년에는 통도사

의 조실로 추대됐고, 5년후엔 홀연 평안도 맹산 우두암으로

은거했다가 50세 되던해(1925년) 봉은사의 조실로 추대되기

도 한다.

많은 이들은 지금도 한암스님 하면 오대산 상원사를 떠올린다.

1925년 봉은사 조실 자리를 내놓고 상원사로 들어간 스님이

입적할때인 1951년까지 산문 밖을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데다,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이 상원사를 소각하려는 것을 몸을 던

져 막았던 일화 때문이다.

스님은 1941년부터 45년까지 조계종 초대종정을 역임했다.

<용운 봉완 1879~1944>

일제 암흑기에 민족독립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선 독립운동

가이자 근대 최고의 시인. 법호 만해로 더 알려진 용운 봉완

(龍雲 奉玩)스님은 이렇듯 한국 현대 불교사 뿐 아니라 현대

한국사와 문단사에도 기리 남을 기라성 같은 분이다.

스님은 민족대표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는등

민족 독립이라는 당대 현실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또한 불교혁신운동을 일으켜 한국 현대불교의 이정표를 세운

일도 큰 공적이다.

불교중흥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인

〈조선불교유신론〉저술, 불법홍포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월간‘유심’과 ‘불교’운영,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하려 했

던 이회광 일파의 원종에 맞서 임제종 운동을 펼친 일, 비밀결

사 만당을 결성했던 일등이 바로 그것이다.

<효봉 원명 1888~1966>

버림과 하심, 그리고 끝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궁극의 깨달음

을 구가하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을 실천한 상징적 인물로

효봉 원명(曉峰 元明)스님을 꼽는다.

‘한국인 최초의 법관’이라는 사회적 명망과 권위를 하루 아침

에 송두리채 벗어던지고 중생제도와 불교 정화에 투신한 대표

적 스님 가운데 한 분이기 때문이다.

석두화상을 은사로 37세란 늦깍이에 출가한 스님은 1년6개

월간의 토굴고행등 철저한 수행과 계행으로 한국불교의 손

꼽히는 선지식으로 남아있다.

이같은 철저한 계행과 수행력은 곧 한국불교의 숙원이었던

정화운동에도 참여케 했다.

1954년 동산 금오 금봉 청담스님과 함께 정화운동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앞장선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1957년), 초대 종정(1962년)등을 역임했다.

<동산 혜일 1890~1966>

당대 석학 오세창옹의 생질이자 주시경 선생에게서 신학문을

배운 동산 혜일스님(東山 慧日)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

범어사 용성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의 일생은 칼날같은 수행정신과 철저한 지계정신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선·교·율을 겸비한 스승으로 임종 직전까지 선방에서만 산

본분납자다.

참선정진은 물론 지계 교학 전법 불사 도제양성등 어느 한곳

에도 기움이 없었다. 해인사·금어선원·범어사 조실, 범어사

금강계단의 전계아사리를 겸하며 사부대중의 사표가 되었다.

스승 용성선사가 역경불사로 불교 현대화와 포교도생(布敎

度生)에 역점을 둔 반면, 동산선사는 순수한 수도승으로서

산사에서 일생을 마친 점이 다르다.

특히 스님은 여느스님보다 평등무차의 자비행과 이타행을

실천해 성철 자운 지효 화엄 능가 광덕스님등 1백30여명에

달하는 많은 상좌를 두었다.

<경봉 정석 1892~1982>

1907년 6월 성해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경봉 정석(鏡峰 靖錫)

스님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경전연구에 몰두했다.

어느 날 스님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구절에 충격 받고, 마음 속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참선에 몰두하게 된다.

해인사 퇴설당 안거를 시작으로 금강산 마하연·석왕사 등

이름난 선방을 찾아다니던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장좌불와 등 정진을 계속했다.

마침내 1927년 11월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

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50년을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이사장, 1949년 통도사 주지

등을 역임한 뒤, 1953년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로 추대 입

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납자·불자들을

지도했다.

<운허 용하 1892-1980>

근대 역경사에서 큰 획을 그은 운허 용하(耘虛 龍夏)스님.

대장경 한글화의 선구자인 스님은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

나 민족 독립을 위한 활동을 맹렬히 전개하다 출가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성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지낸다.

이해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스님은 그 뒤 흥동학교,

배달학교 등을 설립하며 아동들을 중심으로 한 교포교육에

전념했다.

1919년 ‘서로군정서’ 기관지 〈한족신보〉의 사장을 맡기도 했

던 스님은 21년 강원도 유점사에 들어가 경송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그 뒤 스님은 학인동맹을 조직하는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교육과 역경사업에 심혈을 쏟는다.

불교대중화를 위한 스님의 원력은 61년 국내 최초 〈불교사전〉

발간으로 나타났고, 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면

서 〈한글대장경〉 간행에 전념하며 근대 역경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수능엄경〉 〈사분비계니계본〉 〈범망경〉 〈묘법연화경〉등

스님이 역술한 주옥같은 경전들은 지금도 애송되는 것들이다.

<금오 태전 1896~1968>

“선리(禪理)가 없다면 불법의 명맥이 끊기는 것” 덕숭문중의 큰

산맥 금오스님은 참선의 중요성을 제방납자들에게 가르치며

일평생 수행으로 매진한 이 시대 선객이다.

1935년 직지사에 이어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쌍계사 칠불

선원, 동화사, 1953년 선학원등 전국 유수 선원에서 조실로

있으면서 상당법문과 격외법어로 후학을 제접했다.

수행을 위해선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만큼 칼날같은

수행력으로 불조의 심인을 전했다.

스님 자신도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수월선사등 선지식을 친견하

기 위해 전국 제방선원을 찾아다닐만큼 참선정진과 선풍진작을

몸소 실천했다.

1954년 정화불사때 전국비구승대회 준비위원회 추진위원장으로

승단재건에 참여한 것도 철저한 계행에서 비롯된 수행자다운

면모다.

1955년 조계종 부종정과 1958년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전강 영신 1898~1975>

경허 만공으로 불붙기 시작한 선맥은 전강 영신(田岡 永信)스님

으로 이어지며 근대선맥의 일가를 형성한다.

스님은 특히 일생동안 권위나 지위에 걸림없이 절차탁마한 수행

자의 표본으로 유명하다.

김천 직지사 곡성 태안사등서 정진하던 스님은 혜봉스님, 혜월

스님을 만나 선담을 나누고, 1923년 금강산 지장암에 있던 한암

스님을 찾아 선지를 담론한데 이어 만공선사를 만나 전법게를

받는다.

그후 육도만행의 운수행각을 벌이던 스님은 33세 젊은 나이로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 된 것을 비롯 법주사 복천선원, 김

천 수도선원, 광주 자운사등 전국의 제방에서 후학들을 제접

한다.

특히 6.25때 제자 송담스님을 보호하고 뒷바라지 하기 위해 시

정에서 장사를 했던 유명한 일화는 두고두고 스님을 사표로

존경받게 하는 것이다.

<고암 상언 1899~1988>

고암 상언(古庵 祥彦)스님은 제산 혜월 만공 용성 한암스님등 대

선객의 회상에서 25 하안거를 성만한 후 38년 용성스님에게 전

법계를 받았다.

1967년 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됐으며 1970년 해인총림 2대 방장,

72년 4대 종정, 78년 6대종정, 80년 용성문장에 취임했다.

88년 10월 25일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세수90, 법랍71세

로 입적했다.

자비보살의 무소유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스님은 소박하고 아

름답게 자신의 삶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였다.

재물이나 명예가 수행자에게 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스님은

자신에게 올려진 공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는 등

평생을 무욕청정으로 살았다.

<청담 순호 1902~1971>

청담 순호(靑潭 淳浩)스님은 불교정화운동등을 통해 일평생 교단

재건에 앞장선 분이다.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효시인 50명의 승려를 규합해 개운사서

전국학인대회를 결성한 것이나,

54년 선학원서 동산 효봉 금오스님등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

왜색불교 타파를 위한 정화의 기치를 내건 것등은 스님의 불교

중흥의 결연한 의지와 실천을 알게 한다.

이어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1955년)과, 통합종단 2대 종정

(1966년)에 이어 청정 승가 구현을 위해 종단 탈퇴선언(1969년)

까지 감행할 만큼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종단

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계종 3대 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가 바로 스님을 통해 제시

됐으며, 율법제일주의 확립과 승가대 건립, 대중불교와 청정

승가의 토대를 구축했다.

<구산 수련 1909~1983>

구산 수련(九山秀蓮)스님은 송광사 백양사 운문암 해인사 동화

사 금당선원등에서 수십안거를 성만한 선사다.

53년 통영미래사 창건, 56년 조계종 감찰원장, 62년 동화사 주지,

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한 후 초대방장을 맡았다.

73년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한 이래 79년 미국 L.A 고려사, 82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 미국카멜 대각사를 개원하는등 해외포

교에 진력해 큰 성과를 남겼다.

이와함께 69년 불일회를 창립 총재에 취임한 후 국내 대중포교

현대화에도 큰 획을 그었다.

효봉스님의 법맥을 이은 구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 동화사 금당

선원 청암사 수도암등지에서 참구한 선사로 한국 선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구산스님은 또한 선사로서는 드물게 해외포교와 대중포교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송광사 중창불사를 이뤄냈다.

<자운 성우 1911~1992>

자운 성우(慈雲 盛祐)스님은 범어사 해인사 선암사 대승사

도리사 불영사 금강산 마하연 등 전국 선원에서 서래밀지(西來

密旨)를 탐구했으며 1934년 4월부터 해인사에서 경·율장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율풍진작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오대산 동대 문수보살

상 앞에서 백일간 기도 끝에 서상(瑞祥)을 받은 스님은 1953년

한문본 비구·비구니계본과 사미·사미니율의 3만부를 간행·홍포

했다.

규정원장(1975)과 총무원장(1976)을 역임한 스님은 82년부터

단일계단 전계사로 1천76명의 수계자를 배출했으며, 스님이

배출한 보살계 수계자만도 1만7천82명에 이른다.

동국역경원장 등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한평생 청정율풍 진작

을 위해 노력했다.

<퇴옹 성철 1912~1993>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법어로 현대인에게 올바른 삶과 깨달음을

일깨운 퇴옹 성철(退翁 性徹)스님.

스님은 철저한 계행과 쉬운 법어로 한국불교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데 공헌했다.

청담 자운 월산스님등과 함께 일으킨 봉암사 결사나, 성전암에

서 8년간의 장좌불와 수행, 그리고 종정 추대 때도 산문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수행으로 일관한 선사다.

스님은 선풍을 바로 세우기 위한 사상적 모색을 끊임없이 펼친

불교사상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대표저서 〈선문정로〉를 통해 돈오점수론의 한계를 지적, 돈오

돈수에 입각한 간화선의 사상적 기원과 실천론을 천명했다.

이는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둘러싼 선논쟁의 계기를 부여

했으며, 조계종 종조를 보조 지눌이 아닌, 태고 보우스님으로

다시 강조하는 등 한국불교의 선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탄허 택성 1913~1983>

“유·불·선 삼교와 동양학의 대도를 관통한 당대의 석학” 탄허

택성(呑虛 宅成)스님은 소년기에 이미 부친에게 유학을 수학,

한학 전반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21살 때까지 유교의 진수를 터득하고, 노자와 장자의 도교까지

섭렵한 스님은 “좀 더 훌륭한 스승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오대산 한암스님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친 편지 왕래 끝에 1934

년 마침내 출가하게 된다.

출가 후 3년간 묵언하면서 오직 참선에만 정진했던 스님은

17년간 상원사에서 두문불출한 채 〈화엄경〉을 비롯한 내·외전

일체를 공부했다.

55년부터 본격적인 후학양성에 나서 오대산 연수원장, 동국대

대학선원장, 초대 중앙역경원장 등을 역임했다.

물론 스님이 전력을 기울인 부분은 〈화엄경〉 역경. 청량징관

의 〈화엄경소초〉와 이통현장자의 〈화엄론〉을 참조해

〈신화엄경합론〉 1백20권을 번역한 것은 “스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평가된다.

<금하 광덕 1927~1999>

금하 광덕(金河 光德)스님은 195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

을은사로 득도했다.

이후 범어사 금어선원 마산 장춘사등 제방선원과 무인도인 죽도

등지서 참선정진해 계·정·혜 삼학을 원만히 닦아 동산스님으로

부터 인가를 받았다.

56년 대각회 창립 초대회장, 58년 조계종 중앙감찰위원, 63년

대학생불교연합회 초대 지도법사, 봉은사 주지, 학교법인 대동

학원 및 학교법인 원효학원 이사, 74년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순수불교 운동지 월간 ‘불광’ 발행인, 75년 불광법회 창립법주,

79년 불광출판부 개설 발행인 등을 역임했으며 99년 2월 27일

열반에 들었다.

광덕스님은 한국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큰 획을 그은 선각자

로 평가된다.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 월간 ‘불광’창간, 불광법회 창립등

문서포교와 도심포교등 현대적 포교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또한 〈메아리 없는 골짜기〉등 20여권의 역저서와 ‘마하반야

의 노래’ 등 다수의 찬불가도 작사했다.

■ 어떻게 선정했나

이번 선정은 △20C에 입적한 스님 △20C 한국불교사에 끼친 영

향력(선, 교학, 종단재건, 포교, 현대화)등을 기준으로, 본지가

뽑은 50여명을 총30명의 선정위원들(한 위원은 1명의 스님만

추천해 집계에는 탈락시킴, 총29표)에게 의뢰했다.

선정방법은 위원들의 최다 추천수 순으로 했다.

이 가운데 경허 만해 효봉 성철스님은 위원들의 만장일치(29)

로 선정됐으며, 1표가 적은 만공 용성 탄허스님(28), 그 다음이

동산 청담(27), 경봉(26) 한암(25) 석전(23) 전강(22)순으로 최

다수를 확보, 이 분들이 끼친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

수월 묵담스님을 비롯 구하 춘성 향곡 혜월 석암 월산 소천 지월

벽안 고봉 학명 석우 진응 대륜 혜암 기종 종수 경산 기산 지효

지암스님도 비록 선정에는 빠졌으나 한국불교사를 빛낸 고승

으로 거론됐다.

선정위원(무순)은 법등(종회의장) 청화 명진 지명 여연 학담 현응

(종회의원), 원택(총무부장), 도법(실상사주지), 종림(대장경연구

소 소장), 현성(중앙승가대 총장) 정인 본각(중앙승가대) 성본

해주(동국대), 무비(범어사) 무관(해인사) 지오(해인사 강주)

지운(송광사 강주), 영담(불교신문사 사장), 임혜봉 정병조 권기종

김상현 목정배 김광식(불교관련 사학교수 및 연구가), 홍사성

김인수 윤창화 윤청광씨(언론 출판 및 작가)다. 고승20선 게재

순서는 출생연도순이다.

<불교신문>

 

 

 

 

 

 

 

 

우리 나라의 유명하신 어른 스님

우리 나라의 유명한 어른 스님 1. 고구려 : 순도, 아도, 승랑, 혜자, 담징, 혜관 2. 백 제 : 관측, 겸익, 담욱, 혜인3, 신 라 : 원효, 의상, 자장, 진표, 원광, 도선, 혜초, 원측4. 고 려 : 나옹, 무학,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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