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기후스님

수선님 2023. 12. 31. 13:02

축서사를 지나 개울에 걸쳐진 작은 다리를 건너니 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산길을 따라 걸었다. 뻐꾹새와 휘파람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숲의 고요를 깨운다. 암자라기보다는 토굴이라는 명칭이 더 잘 어울리는 북암 초입에 들어서자,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잘라 울타리 삼고 나지막한 출입문 앞에는 ‘면담 가능 시간 12~2시’라는 팻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수행자의 치열한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팻말이다.

기후 스님은 새벽 3시면 일어나 가사 장삼 수하고 축서사 대웅전에서 예불올리고, 참선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요즈음은 거처 앞뒤로 풀이 하도 우거져서 도라지를 심으려고 풀을 베고 땅 고르는 일을 한다고 했다. 도라지가 피어 올리는 보라와 흰색의 꽃 위로 밤이면 별빛들이 쏟아질 터이고, 기후 스님은 별빛방장 노릇을 하겠지. 천년만년을 달려 온 별빛과 도라지꽃과 기후 스님이 나누는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1965년 늦가을, 수학여행을 간 인연 밖에 없는 범어사를 묻고 또 물어 찾아갔다. 범어사의 어산교에 이르자 저녁노을은 붉게 불타고 저녁 예불을 알리는 대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사바의 울혈이 저절로 녹아내리면서, 내가 살 곳은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고인의 말씀에 화두는 하나로서 족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세 개를 갖고 지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지요.” 첫째는 나는 왜 천연두를 앓게 되었을까? 둘째는 어떤 인연으로 승려가 되었을까? 셋째는 내가 어쩌다 위암에 걸렸을까? 이 세 가지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생로병사에 대한 의문이 깊어져서 출가를 하신 것처럼 기후 스님 또한 자신의 삶을 화두 삼아 깊이 천착한 공부였음을 알 수 있다.

기후 스님은 한 살 때 천연두를 앓았는데, 온 몸을 녹이는 듯 한 고열은 얼굴에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얼굴의 흉터로 인해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놀림도 많이 받았고, 그것은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어요. 그때는 사춘기라 콤플렉스도 많았지. 사범대학이나 교원대학으로 진학하여 교단에 서고 싶었는데, 저 같은 사람은 자격이 안 된다고 하데요. 그 소리를 듣고는 바로 포기했어요.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 이런 얼굴로는 결혼하기도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 살아야한다는 조건아래 나를 받아줄 곳은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스님들은 결혼을 안 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사니 스님이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빳빳하게 풀 먹인 승복을 입은 스님이 지나가는데 향내가 나는 것이 참 멋있어 보이더란다. 그때 나도 저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스님과 불교를 연모했고, 고등학교 때 그 한 생각으로 스님이 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천 가닥의 실버들도 때가 되면 가 버리는 봄기운을 붙잡지 못하듯 인연 따라 떠나가는 왕래의 길 또한 막지 못한다고 했던가. 출가의 인연 또한 그러하리라.

행자생활을 마치고 기후 스님은 월하 스님의 상좌가 되고 싶어 두루마기를 잘 차려입고 찾아갔다. 월하 스님께 상좌가 되겠다고 했더니 “근래에는 상좌를 안 받는데...”라면서 점잖게 거절을 하시더란다. 그때 기후 스님은 내 주제도 모르고 앞서갔구나 하면서 자책을 했단다. 이때까지도 기후 스님에게는 ‘나는 왜 천연두를 앓게 되었을까?’ 이것이 화두였다.

“불가에 들어오면 모든 허물을 감싸줄 것이라 믿었는데 스님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에 실망했고, 승가대학을 다닐 때도 소임배치라던가 인물 좋고 학벌 좋은 사람을 우선시하는 것을 은연중 알게 되었어요. 자비문중이라 해도 사람 사는 데라 별 차이가 없음을 느꼈지요. ‘아, 내가 속았구나’ 그런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지요.”

통도사 승가대학에서 <초심>부터 해서 <서장> <도서> <절요> <능엄경> <기신론> <화엄경>까지 홍법 스님께 배웠다. 홍법 스님이 강사준비를 하라고 해도 이런 얼굴로 어떻게 대중에 설 수 있을까 하고 많이 망설였을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승가대학에서 중강 소임을 보면서도 자신의 콤플렉스를 진정으로 극복하지는 못했다. “어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 하심과 진실을 추구하는 한편 부처님 말씀을 부지런히 공부했다. 진실하게 사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 열심히 경전을 독송 했지만 끝내 답을 구하지 못했다. ‘내가 있다’는 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이 모양이 있나? 무게가 있나? 그렇지만 사람들은 툭하면 ‘마음이 무겁다 괴롭다’고 하잖아요. 실체가 없는 것이 마음인데, 별의별 감정을 느끼면서, 과거와 미래의 일로 인연해서 항상 얽매여 있어요. 얽매임을 끊으려 하지만 마음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끊을 것이 없지요. 우리들의 마음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다만 망상이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채는 것이 공부지. 이것을 모르니 괴로운 것이지.”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예불 후 쪽지를 남기고 아무도 모르게 걸망을 지고 통도사를 나왔다. 전강 큰스님이 계시던 용화사에 도착해 첫 철을 지냈다. 용화사에서 한 철을 지내면서 “그동안 찾아다녔던 감로수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면서 환희심을 삼키고 또 삼켰다”고 회고했다. 그 후 봉암사를 비롯한 여러 선원에서 정진했고 차별의 세계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 선원에서 나름 공부의 힘을 얻었다. 한 철 잘 지내고 해제 때는 내면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곤 해서 힘든 결단을 내렸다. 도반 세 명과 함께 기림사 북암에서 ‘6년 묵언’ 정진에 들어간 것이다. 바깥출입을 일체 하지 않았으니 무문관 정진이나 다름없다.

“묵언 정진을 하는 3년 동안은 지금까지 살면서 잠재돼 있던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많이 남아 있어 끊임없이 생각이 올라와 괴롭히데요. 3년 정진이 지나니 업력이 사그라지기 시작하데요. 그런데 망념이 줄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부터는 그 상태에 머물고 싶은 무기(無記)에 빠져들어 한동안 힘들었지요. 그 후 3년 동안은 안 보고 안 듣고 반연을 쉬면서 정진하다보니 내면의 힘이 길러집디다. 그동안 내가 허상에 끄달려서 참으로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지니 나 자신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기후 스님은 당신의 공부는 드러낼 것이 없다면서 드러내기를 꺼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 세상에 있는 다양한 물질들의 모습이나 학문, 종교사상 등의 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화엄사상에서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라 표현하지요.”

기후 스님은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별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 됨의 평등을 보라’고 했다. 그것이 진리적인 삶이고, 불법의 요체란다. 차별을 따르며 거기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고 매달리며 살다보면 항상 시비와 고뇌가 따르지만, 하나됨의 평등성을 보게 되면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했다.

“큰 회오리바람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아무리 완벽하고 오랜 인생 경륜이 있는 사람이라도 때로는 실수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하고 격려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한다면 참 선지식은 처처에 널려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선지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마주한 사람이 그대로 선지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리라. 이때 마루로 날아 들어온 꽃등에 한 마리가 출구를 찾지 못하여 출구도 없는 유리창에 부딪히기를 반복하고 있다. 안타깝게 바라보던 기후 스님은 신찬 대사의 말을 빌어 “세계가 이처럼 넓은데 나가지 못하고 창호만을 두드리니 언제나 나가려나”하고 한마디 했다. 그 한마디 속에는 ‘열린 마음으로 보면 온 세상이 출구요, 내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육년 묵언 정진을 회향하던 날 기림사에 큰 행사가 있어 불국사 조실이신 월산 스님이 오셨다. 일정에는 없었는데 월산 스님은 “육년 동안 묵언 정진한 공부를 대중들에게 내보여라.”고 했다.

기후 스님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세 번 호곡을 했다. 기후 스님의 호곡에 대해 월산 스님은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공부꺼리를 던져주었을 것 같다. 스님은 선이 가장 강조하는 것이 체험이라면서 선은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화두 수행하는 데는 대혜 스님의 <서장>이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묵언 정진을 회향했지만 공부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중처소보다 홀로 공부하고 싶어서 더 깊은 곳을 찾아 태백산의 구마동 계곡으로 들어갔다. 구마동 계곡에서 일 년을 지내다 호주 시드니로 가게 되었다. ‘그곳 신도들이 별나서 스님들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자신감이 있었다.

“묵언 정진으로 내면의 고요를 얻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라, 어떤 경계에 부딪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호주로 떠날 때는 ‘육 년 묵언정진 한 것을 바탕으로 잘 할 수 있으리라’ 는 자신감이 있었지요.”

한 이삼 년은 수행한 대로 사람들을 제접했지만, 분에 넘치는 불사로 경제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건강도 나빠지고 점점 수행의 바탕에서 이탈하는 것을 느꼈다. 기후 스님은 그 어려운 조건에서도 시드니에서 정법사를 창건하여 15년 동안 포교활동을 했다. “시드니 생활을 돌아보면 내 능력껏 열심히 후회 없이 살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결국은 위암을 얻었으니 마음 경영을 잘못한 거지. 시드니에서 머물 때 나 자신을 또 다시 회광반조하게 되었어요.”

기후 스님은 15년 동안의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위암 3기라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스님은 수술도 하지 않은 채 지금 육 년째 잘 살아내고 있다. 위중한 병을 특별한 치료 없이도 어떻게 버티어내느냐고 했더니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사는 덕분”이라 했다. 아마도 그동안의 수행과 정진의 에너지가 버팀목이 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시드니에서 찾아 온 불자들은 ‘우리들이 스님을 힘들게 해서 병이 났다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해요. 설사 신도들이 힘들게 했다 하더라도 수행력으로 받아들이고 잘 풀었어야 하는데 내 근기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라면서 스스로를 견책했다. 스님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겠기에 이미 시신기증도 해놓았다.

그래도 출가한 자취라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얼마 전에 구도소설 <꿈속의 인연들>을 펴냈다. 스님은 “이것도 부질없는 욕심”이라 표현했다. 축서사 홈페이지 ‘별빛방장과 함께’에 틈틈이 올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스님은 “남몰래 낙서하다 들켜 버린 것처럼 부끄럽고 우습다”고 하지만 이 책은 지금 사찰 안팎에서 인기가 높다.

“우리의 삶이 묘미가 있는 것은 절망을 다시 희망으로 변모시키려 애쓰며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에게 완벽하게 맞는 조건은 없어요. 만일에 자기 생각에 맞는 조건이 이 세상에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다면 아마 염라대왕도 저승의 자리를 박차고 재빨리 이승으로 오고 말 것이라 생각해요. 무작정 자신에게 맞는 여건을 찾을게 아니라 스스로의 무게와 처지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잘 가꾸어나간다면 희망의 에너지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저녁 공양시간이 되어 산길을 되짚어 내려왔다. 기후 스님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시고, 객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골이 깊어서 그런지 아직도 못다 핀 철쭉이 짙은 분홍빛을 흩뿌리고 있다. 저녁노을 아래 철쭉은 분홍빛으로 오가는 이에게 추파를 보내고, 딱따구리는 다 부질없는 일이라면서 딱딱딱 나무를 쪼으면서 혼자 걷는 노승의 발걸음에 장단 맞추어 준다.

기후 스님은

1943년 안동에서 출생. 1965년 범어사로 출가하여 69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수지. 통도사 승가대학 졸업. 통도사,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강사 역임. 용화사, 봉암사, 통도사 등 제방 선원에서 여러 안거 성만. 경주 기림사 북암에서 6년간 묵언 정진. 1991년 호주 시드니 ‘정법사’ 창건해 15년간 해외포교에 주력. 지금은 축서사 북아에서 안거 중이다. 저서로는 구도소설 <꿈속의 인연들>이 있다.

현대불교신문

 


봉화 ‘도리천’ 기후스님

경북 봉화에 가면 ‘도리천’이 있다.

‘하늘’을 얘기하는 경전 속의 그곳이 아니라 태백산 깊은 산중 토굴이다.

봉화군 소천면 고산2리. 초입에서도 20km나 더 들어가야 한다. 외길이라고 하지만 중간 중간 갈래 길을 살피며 가다보면 1시간 거리다.장맛비가 내리면 길이 끊기고, 한겨울 깊은 눈이 녹지 않으면 3개월씩 발길이 끊어지기도 하는 곳이다.

10월19일 구마동 계곡으로 불리는 그곳에서 기후스님을 만났다.원두막과 해우소, 공양간을 끼고 있는 요사채… 두세 평 남짓한 가건물 서너 동이 텃밭과 어우러져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산수화가 따로 있나 싶을 정도다. 스님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따라붙는 백구 두 마리까지 함께 하면 한편의 동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조용하고 자기 자신과 직면하기에는 더 없이 훌륭한 곳이에요. 겨울이 좀 추워서 그렇지 봄 여름 가을은 지내기 참 좋습니다.” 스님 표현대로 “참 좋은 곳”이다.

날이 새면 일어나 공양 지어먹고, 원두막에 올라앉아 건너편 산을 바라보며 정진하다보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혼자 있다고 해서 무료하다든지 그런 것 또한 전혀 없고, 자기 스스로와 대면하다 보니 자연과 합일이 되고, 하나 되는 상황이 전개되다 보니 자연히 존재의 본질에 접근하고, 진리성을 찾아들어가게 돼 구참인 스님에게 있어서는 이만한 수행처가 또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지 싶다.

참선이든 주력이든 기도든 일심으로 정성을 다하세요 적합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누구나 헤맬 수 있는 것…‘헤매는 그것 또한 정진’이니 절대 중도에 포기하지 마세요

“시(時)여! 여어음수(如魚飮水)에 냉난지지(冷暖自知)로다.”이 곳 ‘도리천’의 이름은 <금강경오가해>의 야보송(冶父頌)에 마음이 가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에 ‘시간이란 무엇일까’라는 명제가 나오는데 시간이라는 개념을, 물고기가 물을 마시매 차갑고 따뜻함을 아는 그 자리를 시간이라고 정의했어요. 고기는 물을 마시며 온도가 어느 정도인지 압니다. 그 온도를 알아차릴 때 그 때가 시간으로서 개념이지, 깨어있지 않으면 시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스님은 곧 야보도천 선사가 된 듯 운율에 빠져드는 듯 했다.“청풍명월(淸風明月)이 진상수(鎭相隨)라. 맑은 바람 밝은 달이 항상 따르도다. 조금 전 기자가 백두산에 갔을 때 거센 바람이 불어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맑고 맑은 천지를 볼 수 있었다고 했잖아요. 같은 의미에요.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밝은 달이 나오더라!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혀야 한다. 동시적이면서 시간을 알아차리는 우리의 본래 마음, 맑고 맑은 성품에 비유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 다음 ‘도홍이백장미자(桃紅李白薔薇紫) 문착동군자부지(問着東君自不知)로다. 복숭아꽃 붉고 배꽃 희며 장비가 붉음이여! 봄에게 물었더니 그도 알지 못하더라.’ 꽃이 봄에 의해 피어나는데 왜 가지각색으로 피어나느냐? 맑고 맑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따라다니는데 왜 사람 사람마다 모양이 다르고 사고도 달라서 전부 딴소리를 하느냐? 무슨 말이겠습니까? 지은 업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온다, 정곡을 찌르는 이 대목이 마음에 들어 여기서 ‘도리천’이라는 이름을 따왔어요.”

이곳에 오기 전 스님에겐 세 개의 화두가 있었다.

‘나는 왜 천연두를 앓게 되었을까’

‘어떤 연유로 스님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쩌다 위암에 걸렸을까’

이 세 가지다.

경북 안동의 오지마을에서 태어난 스님은 첫돌 전 천연두를 앓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청소년시절 유가사 인근에서 삿갓 쓰고 가는 스님을 보고 ‘아!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절에 대해서도 스님에 대해서도 전혀 모를 때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인연(因緣)이었나? 이성에 대한 관심이 생길 즈음에는 천연두로 인한 콤플렉스가 마음을 더 혼란케 했다.사범대나 법대를 가서 교사나 변호사 등을 해보고 싶었지만 ‘이 얼굴로?’ ‘나에게 시집올 사람이 있겠나?’ 부지불식간에 이런 생각에 잠기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고3 졸업을 앞두고 물어물어 부산 범어사 금강암으로 갔다. ‘자비(慈悲) 문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처승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을 때 무작정 행자생활을 하다 통도사로 향했다. 다시 행자생활을 하며 월하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싶었지만 후에 법호(滿悟)를 받는 은혜를 입었다.왜 놓쳤을까? 왜 실패했을까? ‘왜?’라는 명제를 놓치지 않고 찾아 들어가다 보면 찾는 답이 분명히 있으니…

통도사에서는 홍법스님과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즐겁고 의미 있었다. 강원공부에 이어 해인사와 통도사에서 강의 기회까지 마련해 준 스승이다. “자비심 많고 어른 잘 모시고 후학들 아껴주고 승속 간에 차별심도 없어 누구한테나 존경받는 분”이었다.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혼수상태에서도 스님은 공사(公私)가 분명했다고 한다. “이미 결판이 났는데 왜 사중(寺中) 공금으로 날 괴롭게(부담스럽게)하느냐. 링거주사를 당장 빼라”고 안간힘을 쓰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강사까지 5~6년을 경전과 함께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아쉬움이 있었다. 편지 한 장을 써놓고 나와 참선을 해보니 ‘아 그때 내가 왜 서장을 그렇게 가르쳤을까’ ‘아 그렇구나’ 하는 탄식이 종종 나왔다.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어 기림사 북암으로 가 묵언에 들어갔다. 6년.“부처님 말씀에도 별난 방법으로 하지 말라 했는데 하근기다 보니 그게 쓰일 때도 있더라고요. 내공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권할 일은 아닌데…. 그렇지만 그때(수행자로서)살림은 장만했지요. 자신감? 그게 제일 크지요.”

출가동기 중 두 번째(천연두로 인한 콤플렉스)가 6년 동안 많이 사그라졌다.

“그런 모습에 무게를 두고 산 것 자체가 ‘무지의 소행’이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니 ‘형상’을 보고 ‘나’라고 인정하는 무지의 소지가 굉장히 뿌리 깊었어요. 그 실상을 안 만큼 살림이 장만된 거라고 생각하면 되죠.”

하지만 스님은 ‘성형하지 말라’고 권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뭐라 할 게 아니지 않은가’라며 인과의 도리를 짚어갔다.

스님조차도 6년 고행을 통해 무게감은 덜은 것 같지만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의 초기, 처음으로 대하는 사람을 앞두고는 ‘나의 모습이 과연 대한불교조계종을 대표하는 수행자로 부끄럽지 않은가’하는 생각이 역시 부지불식간에 들곤 했다.스님은 호주에서 15년여 포교활동에 매진하다 뜻하지 않은 위암판정을 받고 귀국. 수술을 마친 후 항암치료도 하지 않은 채 봉화 ‘도리천’에서 5년간 자연과 어울려 사는 가운데 암을 잊게 됐다.“참선을 하던 주력을 하던 기도를 하든지, 일심으로 한 가지에 정성을 들이다보면 그 과정에서 인과가 분명히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고, 어떤 방법이 자기에게 맞는 것인지 (수행법도)찾게 된다.

다만 다양한 방법 가운데 자기한테 적합한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누구나 헤맬 수 있는 것이고, 헤매는 그것 또한 정진”이니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고 일러준다.“단지 헤매는 과정에서 원인이나 과정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스님은 당부한다. “놓쳤으면 왜 놓쳤을까? 왜 실패했을까? ‘왜?’라는 명제를 놓치지 않고 찾아 들어가다 보면 틀림없이 찾고자 하는 내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부처님도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원만하고 결과도 훌륭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어요?”뭘 모르고 무작정 깨달아야 한다고 ‘판치생모’며 ‘무’자 화두를 들던 혈기왕성할 때를 생각하며 스님은 “생사(生死)가 있게 한 근원은 무엇일까? 이와 같이 근원을 물어가는 화두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요즘보다 더 즐거울 때가 또 있겠는가”라며 도리천을 둘러본다. 산에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기후스님은…

1943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1965년 부산 범어사 금강암으로 출가했다.

1969년 양산 통도사로 가 성공(性空)스님을 은사로, 월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통도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통도사와 해인사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인천 용화사를 비롯 문경 봉암사, 김천 수도암 등 제방 선원 안거에 이어

경주 기림사에서 6년간 ‘묵언정진’했다.

1991년 호주 시드니에 정법사를 세워 15년간 포교에 주력하다 귀국해

경북 봉화의 구마동 토굴 ‘도리천’에서 정진하는 가운데 암을 말끔히 씻어냈다.

지난 2009년 구도소설 ‘꿈속의 인연들’에 이어 최근 <네가 던진 돌은 네가 꺼내라>는 에세이를 펴내며 유명세를 타고 있다. 스님은 다시 8일 시드니로 떠난다. 던진 돌을 찾으러 가는 것일까?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인가? 스님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모임 인터넷 카페 ‘꿈속의 인연’을 찾아 가보면 스님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불교신문 2766호/ 11월9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호주에 복지원 마련…서울‧부산서 수안 스님과 선서화 展

평생 선방에서 정진하다 해외포교에 뜻을 두고 호주로 건너갔던 스님이 법회를 위해 집을 내줬던 신도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호주 정법사 ‘재호한인불교인복지원’이다.

복지원을 만든 기후 스님(사진)은 수좌이다. 1965년 범어사 금강암에서 출가 후 50년 출가생활 가운데 20여 년을 선방에서 보냈다. 1991년 호주로 건너가 정법사를 창건하고 해외포교에 주력했다. 위암 판정을 받고 귀국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도 스님은 항암치료가 아닌 수행으로 이겨냈다. 스님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길이 끊기는 봉화 토굴에서 핸드폰도 없이 7년을 기도하며 병을 이겨냈다. 그리고 다시 호주로 돌아갔다. 2012년께 일이다.


2015. 2. 26.

기후 스님이 3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교민 1세대를 위한 복지원 불사를 위해 한국 불자들의 도움이 필요해서다. 스님의 불사를 돕기 위해 선서화의 대가 수안 스님이 힘을 보탰다. 수안 스님은 복지원 불사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회에 작품 150점을 흔쾌히 기증했다.

지난 4~14일 호주 시드니 콘코스 미술관에서 열린 초대전에서 수안 스님 선서화 30점이 모두 팔렸다. 전시는 다음달 9일 부산 서면 소민아트갤러리, 21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나무갤러리에서 이어진다. 부산‧서울 전시에서는 수안 스님의 작품 120점을 만날 수 있다.

기후 스님이 26일 서울 인사동에서 기자들을 만났다.

스님은 “호주로 건너와 자식들과 떨어져 살며 말벗도 없이 외롭게 지내는 교민 1세대들이 많다. 이들이 현지 양로원에 가면 양식으로 식사가 제공돼 또 다른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했다.

스님이 정법사 신도들과 함께 11억을 모아 대지 300평에 방이 3개 달린 건물을 매입하고 ‘복지원’이라 이름 붙인 이유이다.

스님은 복지원이 마련되기 전부터 교민 1세대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 정법사에 전통찻집 등을 운영해 왔다. 한국문화를 모르고 한국어조차 할 줄 모르는 교민 3세대를 위해서는 한글교실 등도 열고 있다.

복지원은 토‧일요일 주말 동안 집중 운영된다. 상시 운영도 고민했지만 이용대상인 교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스님은 “고령자인 교민 1세대는 정부 임대주택에서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집을 오래 비우면 임대주택 거주에 문제가 생겨 주말 이용을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호주에는 한국 사찰이 8곳이다. 한인 교회는 호주 시드니에만 280곳이 넘는다. 정법사 복지원이 자리 잡으면 가톨릭, 순복음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한국 종교기관이 된다.

기후 스님은 “호주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다. 달라이라마가 호주를 3차례 방문했고, 대만 불광산사에서 남천사라고 크게 불사를 한 것도 이유이다”라고 했다. 이어 “호주 사람들이 명상 등을 접하면서 통계에는 잡히지 않아도 정서적으로 불자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스님은 “호주에서 불교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한국불교가 이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구호뿐인 ‘한국불교 세계화’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스님은 오는 4월 2일까지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한국 불자들의 정성이 모아지면 다시 호주 정법사로 돌아간다.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서.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기후 스님과 남전참묘

감사합니다 스님. 건강하십시오. _()()()_

호주 정법사 기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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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박연진1994년 09월 151호

“정말 수행을 잘하신 스님이랍니다. 스님을 아는 분들의 한결같은 얘기가 그렇습니다.” 이번 호 ‘호계삼소’의 대상으로 기후스님이 선정되었음을 알리면서 편집장 스님이 기자에게 건넨 말이다. 늘 그랬지만 수행승을 만나는 일, 게다가 수행을 철저히 했다는 선지식 앞에 서는 일이란 범속한 세상사에 발을 들여 놓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여간 긴장되고 주눅드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삼계삼소’를 통해 눈 밝은 수행인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여 어느 때보다 꼼꼼히 질문을 준비하고 큰 걸음으로 삼십 년 한길을 걸어 온 한 분의 수행승 앞에 섰다. 호주 시드니 정법사 주지 기후基厚. 기후스님이 기자에게 건네준 명함내용의 전부다. 스님의 겉 모습과는 달리 옹색하게조차 느껴지는 명함을 받아 들며, 무릇 기자란 명함의 활자 밖 여백에서 한 사람의 모습을 찾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리란 생각을 해 보았다. 스님은 기자의 이러한 작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성의 있고 진진하게 응해 주었다. 한 수행승의 솔직 담백함이 그 무엇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암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 생활을 했다.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던 암자에서 삼 년 남짓 경을 익히고 절의 허드렛일을 하며 중물을 들이고 있을 무렵, 주지 스님이 대처승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행에 철저했던 스님이어서 충격이 컸다. 행자 생활을 마치고 입을 가사까지 준비해 둔 참이었으나 떠난다는 내용의 쪽지 한 장을 남겨 놓고 짐을 꾸려 통도사로 갔다. 행자 시절에 익힌 인욕과 하심은 뒷날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통도사 강원에서 공부를 마칠 무렵 스님을 가르치던 강사 스님이 말씀했다. “기후는 강사 준비를 해라.” 평소 성품이며 소질, 장래성을 눈여겨 보던 강사 스님의 명이었으나, 스님은 자신이 남 앞에 나설 만한 실력이나 주변이 못 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을 했다. 그러나 강사 스님의 명은 단호했다. “아니요, 준비하세요.” 그렇게 해서 엉겁결에 학인 스님을 가르치는 중강 소임을 맡았는데, 스님의 수행 생활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했던 글을 다루는 전생의 업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통도사 강원에서 경전을 연구하며 학인들을 가르치던 스님은 한평생 목숨을 걸고 수행한 스님들의 말씀을 말로만 배우는 것이 그분들에 대한 결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후학들 앞에 선 사람이 경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떻게 누구를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후학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통도사를 떠나 해인사 강원 사집반에 방부를 들였다.

서장을 바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해인사의 강사 스님들은 서장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통도사에서 강원을 마치고 중강의 소임을 맡았다는 것이 드러나고 이런 저런 오해와 자연스럽지 못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눈 내리던 겨울날 해인사를 내려와 향곡스님이 계신 선방으로 갔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다보면 예전에 공부할 때 몰랐던 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내 자신이 깨우친 것들을 후배들에게 부처님 말씀에 가깝게 전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강원으로 내려왔고, 경전을 연구하고 강의를 하다 보면 결국 종교란 논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데 하는 학문에 대한 허구가 발견되어 다시 선방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수행을 잘 하려면 과거의 선근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선근이 약해 이런 과정을 십 년 동안 되풀이하며 업력에 휘말렸지요.” 강원과 선방을 오가는 것이 되풀이되면서 스님은 자신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특정한 자리나 일이 아니면 중심을 잡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 즈음 기림사 북암에서 육년결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갈망을 짊어졌다. 통도사 중강 두 번, 해인사 중강 한번을 거치고 도솔암, 고암사 등지의 선방에서 정진한 뒤였다. ‘육년 묵언정진’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끝없이 끝없이 침잠해 들어갔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세계.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보다 더한 고통도, 무엇인가 무르녹아 섬광과도 같이 터지는 전율이나 개안도 있었을 살신의 세월, 우리는 육년 묵언정진이라는 표현 앞에서 숙연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끝없는 상상과 함께 의문도 많다. 육 년 동안의 묵언 속에서 펼쳐지는 의식의 흐름, 변화, 자기 극복, 깨달음, 그 행위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의미 등등.

육 년 동안 스님의 안에서 무르익은 것을 내놓아 보라는 꼭 눈으로 보고 만져 보아야 성에 차는 습에 젖은 기자의 어쩌면 당돌하기도 하고 무례하기도 했을 이렇나 물음에 스님의 답변은 한 점 군더더기 없는 자연스럼움 그대로였다. 스님은 후배 스님 두 분과 함께 기림사에 둥지를 틀고 자신을 찾아나서는 긴 여정에 올랐다. 처음엔 주변에서 오는 문제라든가 세 사람의 관계에서 생기는 짜증 같은 것도 있었고, 한곳에서 말없이 육 년을 어떻게 지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후회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삼 년쯤 정진을 계속하고 나니 갑갑한 마음이 사라지고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식이 늘 상대적인 두 가닥 흐름으로 흘렀죠. 이 사람이 좋고 저 사람은 싫다, 또는 이 곳이 좋고 저기는 싫다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적인 생각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마음이 안정되더군요. 안정된 가운데 의식의 흐름을 들여다 보니 마음의 본질이 맑아지고 밝아지면서 전체를 수용하게 되었지요. 글쎄요, 그 밖에 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세계를 표현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스스로를 청정하게 함으로 해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그러므로 해서 주변 무정의 생물까지도 고맙게 생각되고 가치 있게 볼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열리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담백한 스님의 말씀엔 서정성이 배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 한 포기도 아름다웠던 나날들. 서리를 맞으며 여문 대추 몇 알을 호주머니에 넣고 청량한 공기, 맑은 마음, 경쾌한 걸음으로 경내를 한 바퀴 도는 수행자. 때론 문 밖의 차 경적 소리에 온 마음이 쏠리기도 했고, 깊은 밤 문밖의 차 소리에 사람이 그리워 문을 열었다가 옆방 스님의 코고는 소리임을 알고 쓸쓸히 문을 닫았던 외로운 구도자. 누군가 묵언정진중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팻말을 밀치고 들어와 얼마나 애를 쓰냐는 얘기를 듣고도 싶었던 날들.

사정이 듬뿍 배어 있는 말씀은 스님의 지난 시간들을 담박 떠올릴 수 있게 했다.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본 욕구, 망상과 시비를 제공하는 상념을 탈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나 자신과의 만남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지요. 역시 ‘자기’라고 하는 뿌리를 캐내는 것이 육 년 동안의 세월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할 수 있죠.” 묵언정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에 하나가 글을 써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스님은 지적한다. 말은 망상을 일으키는 소지가 되기 때문이다. 묵언을 하는 이유는 침잠의 세계를 많이 가져 본래 청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려는 것. 그러므로 스님은 정진을 야무지게 하려면 묵언 기간을 지낼 수 있는 의식주를 들여 놓고 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호기심이나 상을 내려고 시작해 묵언 흉내를 내려 한다면 대중 속에서 평범하게 수행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게 스님의 말씀이다. 물론 스님도 망상이 일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는 때로 글로 감정을 교환하면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기도 하고 뿌듯했던 경험이 있다. 혹은 비가 샌다거나 큰절과의 관계가 있을 때도 더러 글을 써 의사를 표현한 일이 있다.

그러나 스님은 이러한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스님은 육 년 동안 꼭 한번 소리내어 말을 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무슨 일로 큰절에 잠깐 내려갔는데 멀리 우체부가 보이더란다. 그래서 스님이 자신도 모르게 쏟아놓은 말 한마디. “안녕하십니까?” 이 얘기 끝에 우리는 모두 웃었고, 스님의 삼십 년 세월중 육 년 묵언 기간의 얘기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아마도 그 길이는 우리가 육년 묵언정진이라는 어려운 수행과정을 지나온 수행승을 바라보며 느끼는 기대치와 비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스님의 육년 묵언정진의 세월, 더 나아가서는 지금도 토굴에 앉아 선정에 들고 있을 이름 모를 수행인들의 사회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스님의 허심탄회하고 솔직담백한 말씀에 힘입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선사상에 있어 가장 사회적인 요소는 스스로 빨리 깨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참여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종교인의 순수한 의식일 뿐 사회적인 의미는 생각치 않습니다. 지금도 나는 진리적인 입장에서 나를 인정할 수 있는 내용은 극히 미미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맑은 마음이 이 우주의 주체가 된다고 했을 때는 어느 것이 더 주체에 가깝냐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겠지요.”

스님의 호주행은 좀 뜻밖이다. 스님은 호주행을 설명하려고 우리를 저 눈내리는 태백산맥의 골짜기로 끌고 간다. 기림사 북암에서의 육년결사가 끝나자 스님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정진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태백산 줄기의 오십 리 계곡 구마동. 그 곳에 얼기설기 초가집 한 채를 지어놓고 더 깊은 심연으로 향한 가부좌를 틀었다. 그 해 겨울 구마동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어느 날 설핏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밖이 훤해 있었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싶어 문을 여니 흰 눈 위에 비친 푸르스름한 달빛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달도 희고 눈도 흰데 내 마음만 맑지 못하구나.” 시계를 보니 새벽 한시 반. 달빛에도 눈이 녹는지 지붕 위에선 낙숫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급히 지어 허술한 벽으로 한겨울의 추위가 뼈 속까지 스며들었고, 스님은 그날 이런 생각을 문득 했다. 해제하면 대만이나 호주를 다녀올까 하는.

시드니의 정법사에는 대여섯 명의 호주인을 비롯해 스무 명 남짓의 신도가 있다. 일요일마다 법회를 보고 있는데 스님은 호주에서 느낀 것이 많단다. 우리 땅 넓이의 서른다섯 배에 인구가 천팔백만 명인 호주. 입지 조건이나 사회 구조가 원칙을 자연스럽게 지키게 하고, 그러함이 그들의 삶 자체를 불교적이게 한다고 스님은 말씀한다. 나무 한 그루라도 육십 센티미터 이상이 되면 자르지 못하게 하는 사회제도, 그 속에 사는 그들의 언행은 불보살에 가까울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스님은 반문한다. 지난 칠월초 한국에 다니러 온 스님은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서 푸른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숱한 사람들을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물질에 밀려 바쁘고 어지럽게 살아가는 저들을 위해 부처님의 제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내년쯤 스님은 호주에서 돌아올 생각이다. 돌아오면 태백산 구마동에 조그만 집을 짓고 푸른신호등이 켜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초대할 것이다“인간의 심성을 가장 바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은 흐트러진 자기와 감추어진 본래의 자기를 만나게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다소나마 어느 세계에 대해 불신했던 마음을 수정할 수 있는 계기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이삼 년 뒷면 이런 일들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스님의 말씀은 무더위 속에서 문득 느끼는 한 줄기 가을 바람과도 같다.

고등학교 삼 년 세월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가장 후회없이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골몰하다 출가사문의 길로 들어선 지 삼십 년. 한 나라의 왕보다 더 많은 선업을 쌓아야 중이 되는 복이 가능하다는데. 과연 인간이 한번 가볼 만한 길이었을까?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살아온 길에 스스로 풀어냈어야 할 매듭은 없었을까?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선택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스님의 말씀, 때론 바깥 세상을 마음으로나마 기웃거렸고, 죽어도 다시 이 길을 가겠다는 생각보다는 지금 수행의 길이 그냥 자연스러울 뿐이며, 이성에 대한 정염이 스스로 풀어야 했던 매듭이었고, 나이 사십이 지나니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윤곽이 잡히더라는 스님의 말씀은 단 한번도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이 없었으며, 죽어도 다시 이 길을 걷겠다는 어느 큰 스님의 말씀보다 더 큰 위안이 된다. 스님만이 가지는 솔직함 때문이리라. “호주에서 돌아오는 대로 태백산에 들어가 흩어진 마음을 예전에 묵언정진하면서 가졌던 맑은 상태로 돌리려 합니다.” 인터뷰를 끝낸 스님은 걸망을 들고 일어섰다.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자기 공부’라는 스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이곤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질 수행의 길에 성큼 큰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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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수행을 잘하신 스님이랍니다. 스님을 아는 분들의 한결같은 얘기가 그렇습니다.” 이번 호 ‘호계삼소’의 대상으로 기후스님이 선정되었음을 알리면서 편집장 스님이 기자에게 건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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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됨의 평등성 보면 언제 어디서도 행복해" [선지식을 찾아서] 기후 스님(축서사 북암) 이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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