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元曉 (617-686)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성사(聖師)이다. 그는 대승불교의 건설자인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龍樹)나 중국불교를 새롭게 열어간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에 비견되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불교사에 있어서 원효의 위치는 그만큼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민족의 첫새벽을 열어간 원효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원효의 아명은 서동(誓幢)이라 하였다. 서당은 '첫새벽'을 뜻하는데 그의 의미 그대로 비단 한국의 불교사상만이 아니라 철학사상 일반에 있어서도 큰 새벽을 연 밝은 별이었다.
<송고승전>에서는 원효가 일찍이 나이 십세 무렵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했던 그에게 일정한 스승은 따로 없었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나던 이무렵 신라에는 적지 않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있었다. 원효가 그들을 찾아 배우고 물었지만, 뒷날 佛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불교학은 물론 유가(儒家)와 도가자(道家者)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학문을 닦는 한편 수행자로서 간절하고 피나는 고행을 다했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다양한 저술들에서 그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원효의 행석 가운데서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두 차례에 걸쳐 입당(入唐) 유학을 시도했던 그가 문득 스스로 크게 깨닫고 발길을 돌린 일이 그것이다. 원효는 34세때 당에 유학하기 위해 의상(義湘)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꾼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45세에 다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해로(海路)로 해서 당(唐)으로 가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당주계(唐州界)로 향하였다. 항구에 당도했을 때 이미 어둠이 깔리고 갑자기 거친 비바람을 만나 한 땅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났을 때 그곳은 땅막이 아닌 옛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의 장난)를 만나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이는 곧 그에게 큰 깨달음의 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가 못함을 확인하였다. 이어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원효의 이같은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을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토리 자체보다도 이 신라인의 주체성, 그리고 이로부터 확장해간 그 사상적 보편성과 세계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젊은 시절부터 장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열렬하게 유학의 꿈을 품어 온 원효가 한 순간에 전회(轉回)하여 신라로 돌아온 후, 그는 오직 불교학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100여종 240여권(또는 86부 180여권)으로 알려져 있다. 그 연구 범위도 대·소승불교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가히 넓고 깊은 學解와 초인적 저술활동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 석학들까지도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저술은 19부 22권만이 1천3백년의 장구한 세월을 뚫고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는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놓고 집필했다는 저술배경에 일화도 많은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중심 개념인「화쟁」을 풀이한「십문화쟁론」 등은 다행이 남아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연구저작으로는 「대승기신론소」를 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대승기신론」는「금강경」「원각경」「능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전인 사교과에 속하는 논서이다. 마명의 저작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않고 산스크리트 원본은 발견되지 않은채 한역본만 유통되고있다. 그 내용은 치밀한 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등 모든 면에서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하고 있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을 지향, 화합시켜「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진속일여),「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염정불이)는 사상을 나타낸 논서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현실세계(속)에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하여 끊임없이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인격(진)을 이룩할수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진속일여」,「염정불이」의 사상이다.
원효는「대승기신론」을 대하자마자 스스로의 삶과 학문의 목표와 너무나 맞아떨어짐에 감명을 받아 기존의 논의에관한 9종의 연구서를 내 놓았다. 그 가운데서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현재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가나 종파를 초월하여 널리 유포된「대승기신론」에 관해서는 수백여종의 주석서들이 나와있으나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기신론삼소」라 일컫는다.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현수소」가 곧 그것이다.
기신론의 3소 중에서도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그 내용에 있어 단연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면도 적지가 않다. 요컨대「현수소」는「해동소」가 있어서 비로소 그를 토대로 저술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젊은 시절에 도당유학을 단념하고 국내에 머물었으나 그의 학문과 사상은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화되었다.「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과 같이 그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세계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효는 그러나 교학연구나 관념적인 사상 속에만 머물러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소용돌이치는 한 시대를 살았던 그에게는 왕실·귀족불교도 인도해야 할 대상이었고, 더구나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정복지역의 유민들도 다같이 뜨겁게 안아야 할 이 땅의 가엾은 중생들이었다. 원효가 과부가 되어 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小姓居士라 자처한 일은 분명 놀라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를 겉에 드러난 액면대로 파계나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파계의 소생이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된 십팔유현중에서도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설총이라니 만만치가 않다.
염정불이 진속일여(染淨不二·眞俗一如)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의 기초이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 같다는 이해는, 진리의 근원인 우리들 一心의 통찰에서부터 나온다. 이미 그것을 확연하게 깨달은 원효에게 성(聖)과 속(俗)의 구별은 무의미했을 터이다. 그는 聖과 俗을 一心으로 아우르고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원효는 더욱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큰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승려들 대부분이 왕실과 귀족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성내(城內)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지방의 촌락이며 시장거리며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무애가는 화엄경의 「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다번에 생사를 벗어 나리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노래이다.-를 지어부르고 가무와 잡담으로 서민들 사이에 끼어들어 불법을 설법하는 교화작업에 힘썼다. 누가 그런 기이한 행색의 원효를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학승이며 왕실에서도 존경받는 고승이라 생각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유로운 성자였고 민중의 벗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 천민, 부랑자,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 그런 원효를 허물없이 따랐다. 그들은 가슴 절절히 와닿는 생기를 얻었으며, 염불을 따라부르며 정토에 때어날 희망을 키우기도 하였다.
원효의 만년에 대해서는 역시 자세한 자료가 없다. 다만 보살행(菩薩行)으로써 민중교화행을 마친 그는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성사로 되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신문왕 6년(686) 3월 30일의 일이었다.
자주적인 가성인이자 위대한 사상가로서, 성속(聖俗)을 넘나든 자유인이자 민중의 구제자로서 원효는 그의 70년 생애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다가 갔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사의 첫 새벽을 환하게 열어 놓은 원효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있다.
통일신라 불교의 대중화에 결정적 역할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 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그들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민중은 무지와 나약 때문에 어떻게 해도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애써 민중을 외면했다.)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 이상한 모양의 큰 표주박으로 두드리면서 無碍歌를 불러서 붙여진 명칭)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무애가無碍歌=모든 것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불교의 이치를 노래로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식한 대중에까지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노래에 담겨있는 무애사상은 원효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거사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드나들고 혹은 석공들의 쇠칼과 쇠망치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하고, <화엄경>에 대한 해설서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여염(보통사람이 모여있는)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하기도 하는 등 어떤 일정한 틀에 박힌 생활태도가 없었다. 이와 같이 행적도 뚜렷한 규범이 없었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효의 이러한 행적은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에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출처: 원효학연구원 (http://www.wonhy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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