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원효(元曉) 지음
만약 법계에서 소요하려고 하는 자는 네 가지 위의(威儀)를 조금도 황당하게 해서는 안된다.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덕(德)을 생각하고, 항상 실상을 생각하며 업장(業障)을 녹여야 한다. 널리 육도
(六道)의 가없는 중생을 위하여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처님께 귀명(歸命)해야 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서로 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다. 하나가 곧 모두이며 전체가 곧 하나
이다. 비록 머무는 바가 없으나 머무르지 않은 바도 없고 비록 하는 바가 없을지라도 그렇다고 하지
않는 것도 없으니, 낱낱 상호(相好)와 낱낱 모공(毛孔)이 끝없는 세계와 한없는 미래세에 두루하며,
구애됨도 없고 장애됨도 없으며, 아무런 차별도 없이 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시방 삼세의 한 티끌과 한 생각과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며 차별됨도 없고, 대자대비의
반야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어 불공법(不共法)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에서 비로자나 부처님이 연화대에 앉아 끝없는 광명을 비치니 한없는
중생이 모여, 굴릴 것도 없는 대승의 수레를 굴리며, 보살대중들도 허공에 가득히 모여 받을 것도
없는 대승의 법락(法樂)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들은 이 한결같고 실다운 삼보의
허물 없는 장소에 같이 있으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여, 귀머거리 같고 장님 같으니, 불성(佛性)이
없는 것인가, 어째서 이와 같은가. 무명(無明)의 뒤바뀜으로 망녕되이 바깥 경계를 일으키고, <나>
와 <나의 것>이라 집착하여 가지가지의 업을 지어 스스로 덮고 가리워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것
이다. 마치 아귀가 물을 불이라고 보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서 깊이 부끄러워 하며 보리심을 발하여 정성된 마음으로 참회하여야
한다.
나와 모든 중생이 오랜 옛부터 무명에 취하여 지은 죄가 한이 없으니 오역(五逆)과 십악(十惡)도
짓지 않음이 없으며 스스로 지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짓도록 가르쳐 주었으며, 또 짓는 것을
보고 따라서 기뻐하였다.
이와 같은 죄가 가히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니 모든 부처님과 성현이 아시는 바이다.
이미 지은 죄는 깊이 참회하고 짓지 말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죄는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거짓 이름으로 업이라
고 한다. 연(緣)에는 업이 없고, 연을 여의면 또한 업은 없는 것이다.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면, 또한
중간도 있지 않다. 과거는 이미 없어졌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는 머무름이 없다. 그러
므로 죄 지은 바가 머무름이 없고, 머무름이 없으므로 생함도 없다. 먼저 생하지 않았으니, 누가 생
했다고 하는 것도 없다.
만일 말하자면 본래 없다는 것과, 이제 있다고 함이 서로 더불어 이 두 가지 뜻이 화합하여 생한다
고 하나 본래 없을 때는 이제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 아니다. 앞과 뒤가
미치지 않으니 있고. 없는 것이 합치지 않으며, 두 뜻이 합치하지 않으니 어느 곳에 생겨남(生)이
있겠는가. 합친다는 뜻이 무너지니, 흩어짐도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합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
으니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없는 때에도 있는 것이 없으니 무엇을 대하여 없다고 할
것이며, 있는 때에는 없는 것이 없으니 누구를 기다려 있다고 할 것인가. 앞과 뒤, 있음과 없음, 이
모두가 성립되지 않으니, 마땅히 알라. 업의 성품은 본래 나는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남(生)이 있지 않으니, 마땅히 어느 곳에 나지 않음(無生)이 있겠는가. 남(生)과 나지 않
음(無生)이 다같이 있지 않는 것이나 어찌할 수 없어서 말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중생이 모든 선악의 업(業)을 지었으나 안에는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이 업의 성품도 있는 것이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님이 또 그와 같다.
본래 없다가 이제 있으니, 원인 없이 생긴 것도 아니며,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으나 때(時節)가 되
면 과보(果報)를 받는다.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능히 자주자주 이와 같은 실상(實相)을 생각하여 참
회하면 네 가지 무거운 좌와 오역도 능히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허공이 불타고 있지 않
는 것과 같다.
만약 게으르게 뉘우치지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능히 업의 실상을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비록 죄
의 성품은 없다고 하지만 장차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마치 환으로 된 호랑이(幻虎)가 도리어 환술
사(幻師)를 삼키는 것과 같다.
이렇기 때문에 마땅히 시방의 부처님 앞에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참회할 것이며, 참회할 때에
는 참회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마땅히 참회의 실상을 사유(思惟)하면 참회한 죄는 이미 없어질
것이다. 어떻게 능히 참회함을 얻을 것인가. 참회함(能懺)과 참회하는 바(所懺)를 둘 다 얻을 수 없
을 것이다. 마땅히 어느 곳에서 참회법을 얻을 것인가. 모든 업장에서 참회할 것이다.
또 육정(六情)의 방일을 참회하고 나와 중생이 시작이 없는 옛부터 모든 법이 남(生)이 없는 것인
줄 알지 못하고, 망녕되이 뒤바뀌어 <나>와 <나의 것>이라고 계교하며, 안으로는 육정을 주장하여
알음알이(識)를 내고, 밖으로는 육진(六塵)을 지어 실유(實有)라고 집착하니, 이것이 모두 자기
마음이 지은 환(幻)과 같고 꿈과 같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서 남자나 여자나 구별하고 모든 번뇌를 일으켜 스스로 얽혀 길이 고해(苦海)에 빠져 헤어날
길을 구하지 않는다. 고요히 생각해 보면 심히 괴상하구나.
마치 잠잘 때에 잠이 마음을 덮어 망녕되이 자기 몸이 큰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다만 이 꿈
속의 마음이 짓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실지로 물에 빠진 줄 알고 큰 두려움을 내다가 아직 꿈은 깨
지 않고 다시 다른 꿈을 꾸기를, 내가 물에 빠진 것은 꿈이요, 현실이 아니다라고 총명하기 때문
에 꿈속에서 꿈인 줄 알고 곧 물에 빠진 것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몸이 침대 위에 누은 줄 알지 못하고 머리를 돌리며 손을 흔들어 잠을 깨려고 하다가
잠을 깬다. 오직 본래대로 침대 위에 누었음을 보게 되니 인생의 긴 꿈도 그와 같다.
무명이 본래의 마음을 덮어 망녕되이 육도(六道)를 지어, 여덟 가지 고통의 바다에 돌아다니다가
안으로 모든 부처님의 부사의한 힘을 원인하고, 밖으로는 모든 부처님의 대비원력(大悲願力)을 의
지하여 믿음과 이해가 가까워질 것이다.
나와 중생이 오직 긴 꿈의 침대 위를 망녕되이 사실이라고 계교하여 육진(六塵) 경계와 남녀(男
女) 이상(二相)에 거역하기도 하고 수순하기도 하니, 이것은 나의 꿈이지 사실은 아니다. 그러니 무
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탐내고, 무엇을 성내리오. 자주자주 이와 같은 꿈이라고
하는 관(觀)을 생각하고 점점 여몽삼매(如夢三昧)를 닦으면, 이 삼매로부터 말미암아 무생인(無生
忍)을 얻을 것이며 긴 꿈으로부터 활연히 깨어나 본래부터 유전(流轉)함이 없으며 다만 이 일심(一
心)이 일여상(一如相)에 누웠음을 알 것이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음을 여의고 자주자주 생각하라. 비
록 육진을 반연함이 실다운 것이 아니니, 번뇌를 부끄러워 하고 스스로 게으르지 말아라. 이것을 대
승육정참회라고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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