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사의 흥망성쇠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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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서역(西域)이란 중국의 서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흔히 실크로드(Silk Road)라고 하는 동서 문화를 잇는 교통로를 따라 서 펼쳐지는 지역을 ‘서역’이라고 부른다.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Richthofen,1892~1918)이다. 그 이후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지질학자 알베르트 헤르만(Albert Herrmann, 1886~1945),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Anders Hedin, 1865~1952), 영국의 탐험가 아우엘 스 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 등이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長安, 지금의 西安)과 로마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을 이어주던 비단길이다. 실크로드는 캐러밴(caravan, 隊商)들이 황량한 사막을 넘 어 동과 서를 이어주던 동서교통로(東西交通路)이다.
서역의 범위도 지리적 · 민족적 · 문화적 · 정치적 개념에 따라 확 장되거나 축소되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서역과 넓 은 의미의 서역으로 구분한다. 서한(西漢) 시대 ‘서역’의 범위는 타 림분지(Tarim Basin)에 산재해 있던 오아시스(Oasis) 국가들을 지 칭했으며, 실제로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에서 관할하던 지역을 좁은 의미의 서역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서는 서역36국뿐만 아니라 총령(葱嶺,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북쪽의 대월지국(大月氏國, Yuezhi), 안식국(安息國, Partia), 강 거국(康居國, Kyrgyz), 대완국(大宛國, Fergana), 엄채국(奄蔡國, Alans 또는 Alani)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을 넓은 의미의 서역이라고 한다.
불교사에서 서역이 중요한 것은 이 지역이 인도와 중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전법의 중요 루트가 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유명한 역경승인 구자국 구마라집(鸠摩羅什), 대월지국의 지루가참 (支婁迦讖)과 지겸(支謙), 강거국의 강승회(康僧會) 등이 이 지역 출신이다. 이들이 없었으면 중국의 불교 전법은 한참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비단과 함께 불교와 그 문화를 전해주던 실크로드도 세월 이 흐르면서 복잡한 변화 과정을 겪었다. 그 변화에 따른 역사적 고찰을 ‘서역문화사(西域文化史)’ 혹은 ‘동서교섭사(東西交涉史)’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길은 단순히 캐러밴들이 무역을 위해 오가 던 교통로로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이 길을 통해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는 측면에서 ‘붓다 루트(Buddha Route)’ 또는 ‘다르마 로드(Dharma Road, 진리의 길)’ 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는 ‘다르마 로드’로서의 서역불교가 어떤 역사적 배경 에서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쳤는가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역불교란 좁은 의미의 서역에서 전개된 불교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2. 서역불교 흥망성쇠의 역사
중앙아시아는 북쪽의 톈산산맥과 남쪽의 쿤룬산맥 사이에 타클 라마칸사막(Taklamakan Desert)이 동서로 뻗어 있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로 통하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북쪽 길을 서역북도(西域北道)라고 부르고, 남쪽 길을 서역남도(西域南道)라고 부른다. 이처럼 동서 교통로를 최초로 북도와 남도라고 지칭한 것은 《한서》 〈서역전〉이다. 이 문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옥문(玉門) · 양관(陽關)에서 서역으로 나서면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선선(鄯善)에서 남산의 북쪽을 끼고 강을 좇아[波河] 서 쪽으로 가면 사차(莎車, Yarkand)에 이르는 것이 남도(南道)를 이룬 다. 남도는 서쪽으로 총령(蔥嶺,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대월지(大月氏) · 안식(安息)으로 나아간다. [다른 하나는] 거사전왕정(車師前王廷, Turfan)에서 북산을 끼고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소륵(疏勒, Kashgar)에 이르는 것이 북도(北道)를 이룬다. 북도는 서쪽으로 가면 총령을 넘어서 대완(大宛, Fergana) · 강거(康居, Kyrgyz) · 엄채(奄蔡,Alans)로 나아간다.
위에서 언급한 서역북도와 서역남도는 나중에 새로 개척한 실크 로드와 많은 차이가 있다. 캐러밴들의 이동 경로도 나중에 더욱 빠 르고 안전한 새로운 루트가 개척되었기 때문이다. 옛 실크로드와 새로운 루트는 지리학자와 탐험가들의 실지 답사와 문헌 연구를 통 해 확인되었다. 이처럼 실크로드의 행로(行路)는 고정된 것이 아니 라 시간이 흐르면서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옛 실크로드의 남도와 북도의 분기점이었던 누란(Loulan, 樓蘭, 鄯善)왕국은 타림(Tarim) 강의 흐름이 바뀌어 롭누르(Lop Nur)호수가 말라버림으로써 멸망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동서교역로를 차지하기 위한 여러 인종 간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이 때문에 실크로드에는 각기 다른 인종과 그들이 남긴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투르키스탄(Turkistan, Türkistan)은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 을 일컫는 말이다. 투르키스탄은 ‘튀르크(Türk)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어느 지역까지를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튀르크족이 사는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지금 은 톈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러시아령 투르키스탄(서투르 키스탄)과 동투르키스탄으로 나뉜다. 동투르키스탄은 현재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이다. 튀르크족은 과거 돌궐(突厥, Göktürk)이 라고 불렸으며,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지금의 튀르키예(Türkiye, 영 어식 이름인 터키(Turkey)로도 알려져 있다)까지 진출하였다. 예 전에는 튀르키예를 오스만제국이라고 불렀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튀르키예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투르키스탄에서 진출해온 민족 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1,000여 년 전까지 투르키스탄은 타림분지를 포함하여 대부분을 인도-아리안족이 점유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실크로드의 동쪽에 있었던 누란(樓蘭, Loulan) 지역의 최초 거주 자는 인도유럽어에 속하는 토하라어(Tocharian)를 사용한 사람들 이었다. 토하라어(Tocharian, Tokharian)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 지만, 토하라인의 영역인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서쪽에서 쓰이던 소그드어(Sogdian), 타지크어 등이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는 것과는 달리, 토하라어는 독자적인 토하라어파를 이룬다. 이 지역의 3세기 문서에서 발견된 공식 언어는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로 기록 된 간다라 속어(Gandhari Prakrit)였다. 누란과 타림분지의 다른 곳 에서 그들이 사용한 언어는 쿠샨제국(Kushan Empire)의 문화적 유 산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쿠샨제국의 간다라 이민자들에 의해 도 입되었으며, 이들이 누란에 불교를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한 간다리가 행정 언어로 사용되었지만, 현지인들은 토하라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3. 서역남도의 국가와 불교
《한서》 〈서역전〉에 나타나는 서역36국 가운데 서역남도의 대 표적인 오아시스 도시국가는 카슈가르(Kashgar, 疏勒), 야르칸드 (Yarkand, 莎車), 호탄(Khotan, 于闐), 니야(Niya, 尼雅), 체르첸 (Cherchen, 且末), 뤄창(Ruoqiang, 婼羌), 미란(Miran, 米蘭), 누란 (Loulan, 樓蘭), 둔황(Dunhuang, 敦煌) 등이다.
1) 카슈가르(Kashgar, 疏勒) 또는 카시(Kasi, 喀什)
타림분지의 가장 서쪽에 있는 고대 오아시스 도시국가이다. 카슈 가르는 기원전 2세기에서 1,000년 동안 계속된 소륵국(疏勒國)의 옛 땅이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동서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 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한때는 중국, 투르크, 몽골, 및 티베트의 통치를 받았다. 카슈가르에서부터 남도와 북도로 갈라지며, 톈산을 넘어 서쪽으로 가면 서투르키스탄이 나오고, 타밀고원과 쿤룬산맥을 넘으면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인도 방면으로 연결된다. 현재의 카슈가르는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에 속하며, 아프가니스탄 (Afghanistan), 키르기스스탄(Kyrgyzstan), 타지키스탄(Tajikistan) 의 국경과 접하고 있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소륵국(疏勒國)의 도읍은 소륵성(疏勒城)이고, 장안에서 9,350리 떨어져 있다. 호수(戶數)는 1,510, 인 구는 18,647명, 병사는 2,000명이다. …… 동쪽으로 2,210리 가면 도호(都護)의 치소(治所)에 이르고, 남쪽으로 560리 가면 사차(莎車)에 이른다. 시장이 있고, 서쪽으로 대월지 · 대완 · 강거로 가는 큰길[大道]에 접해 있다.” 《후한서(後漢書)》(25년~170년)에 따르면, 당시 소륵국은 21,000가구로 성장하였고, 3,000명의 남자가 무 기를 들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카슈가르의 인구는 2019년 기준으로 711,300명이다.
현장(玄奘, 602~664)은 644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 에 카슈가르(현장은 ‘佉沙國’이라고 함)를 통과하였다. 그는 “그들 의 문자는 인도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비록 생략되었거나 변해버 린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인도의 필법 양식을 지키고 있다. 언어는 어휘와 발음이 여러 나라들과 다르다.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 이 굳고 부지런히 복과 이익을 베풀고 있다. 가람은 수백 곳이 있으 며 승도는 만여 명이 있는데, 이들은 소승교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 이치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대부 분은 그저 그 글만을 외우고 있다. 그러므로 삼장(三藏)이나 《비바사(毘婆沙)》를 모두 외우고 있는 사람이 많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카슈가르는 설일체유부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카슈가르 지역에는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다.
2) 야르칸드(Yarkand, 莎車)
카슈가르에서 동남쪽으로 196㎞ 떨어진 지점에 있다. 현재 이곳 에는 약 45,000명이 살고 있는데 위구르족, 키르기스족, 몽골족, 만 주족 등 잡다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땅은 비옥하여 농업 과 목축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곳은 전한(前漢) 시대 사차국(莎車國)의 옛 땅이다. 옛 도성(都城)은 야르칸드강의 홍수로 무너져 버렸다. 야르칸드(莎車)는 지정학적으로 두 강대국이었던 카슈가 르와 호탄(Khotan, 于闐國)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야르칸드의 역사도 모래 속에 묻히고 말았다.
3) 호탄(Khotan, 于闐)
중국의 한(漢) · 당(唐) 시기에는 우전(于闐)이라 불렀고, 현재는 화전(和田)이라고 부른다. 호탄은 지정학적으로 타림분지 서역남도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동쪽으로는 체르첸(Cherchen, 且末)과 누 란으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야르칸드와 카슈가르를 거쳐 대월지( 大月氏) 등 여러 서방 국가와 연결되어 있어 동서 문화와 무역의 중심 지였다. 이 때문에 한때 호탄은 번영을 누렸다.
호탄 지역에서 발견되는, 시노-카로슈티 동전(Sino-Kharosthi coin, 漢佉二體錢)은 한문과 카로슈티(Kharosthi) 문자[佉盧文]가 새겨져 있다. 동전에 새겨진 카로슈티 문자는 인도 서북부 지역에 서 유행한 고문자(古文字)로, 대략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인도 서북부가 통치되던 시기에 아람문자(Aramaic alphabet)에서 파생되어 온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동서 무역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호탄(于闐)은 서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불교가 도입된 지역 중 한 곳이다. 하지만 정확한 전파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된 결론이 없다.” 다만 우전은 니야(尼雅) 지역보다 일찍 불교가 전해졌다고 한다. 호탄에 전해진 초기의 불교는 일찍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Gandhara, 지금의 아프가니스 탄 Purushapura 근처), 카슈미르(Kashmir, 罽賓) 등을 통해서 유입 되었다. 예로부터 호탄은 지리적으로 간다라, 카슈미르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정치 · 경제 · 문화 등 여러 방면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처음 카슈미르에서 유행했던 불교는 설일체유부였다. 따라서 호탄에 전해진 불교도 초기에는 설일체유부였을 것이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 우전과 중원 간에 불교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상당수의 우전 승려가 중원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중원의 구법자들도 우전으로 가서 불교를 배웠다. 조위(曹魏, 220~265) 시대 주사행(朱士行, 203~282)이 최초로 구법을 위해 우전을 방문하였다. 그가 우전국을 방문했을 때, “우전은 소승불교 를 신앙했으며, 주사행이 대승불교를 공부하는 것에 대해 극구 방해했고 대승불교가 중원으로 옮겨지는 것도 저지하려 했다.” 고 한다. 그런데 339년 법현(法顯), 혜생(慧生), 도정(道整), 혜응(慧應), 혜외(慧嵬) 등이 장안을 출발하여 천축으로 가는 길에 우전을 지나게 되었다. 법현은 《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에서 “그 나라는 재물이 많아 즐겁고, 인민은 번화하고 풍성하였다. 모두 불법을 신 봉하였고, 법락(法樂)으로써 서로 즐겼다. 승려의 무리는 수만 명 이고 모두 대승을 배운다.” 라고 하였다. 법현은 우전에서 ‘행상절(行像節)’의 행사를 목격하고 그 행사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 다. 법현이 방문했을 때 우전국은 이미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나라 시대 현장(玄奘)은 호탄을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 이라 표기했는데, 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불법을 숭상하고, 가 람은 1백여 곳이 있으며 승도는 5천여 명이 있는데,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힌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서구와 일본 학자들이 티베트 자료를 바탕으로 호 탄불교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티베트 대장경의 불설부(佛說部)와 논소부(論疏部)에 수록된 《호탄국의 역사》 《호탄국수기(于闐國授記)》 둔황 출토 티베트 사본인 《호탄 불교사(Pelliot Tibétain 960)》 등이 그 대표적인 문헌들이다. 그러나 이 자료들 사이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그 내용도 너무 신화적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 려운 측면이 있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우전불교는 사원경제가 상당히 발달했고, 통 치자들로부터 지지받고 있었으며, 많은 토지와 금은보화 등 재물을 하사받았다. 수당(隋唐) 시기의 우전불교는 남북조 시기와 크게 차이가 없다. 609년 수 양제는 서역에 출병하여 우전을 정복하 고 수나라에 귀속시킴으로써 우전과 중국 내륙 간의 문화 교류를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에는 토번(吐蕃)의 세력이 강대해졌다. 당나라는 우전(于闐)에 대한 통치권을 한동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당나라 말기에는 중원이 혼란스러워 서역을 지 배할 겨를이 없었다. 이 시기 우전불교는 흥성에서 쇠퇴에 이르렀 다. 이 전환기에 사원경제의 발전은 불교 흥성의 상징이었다. 그러 나 당시 우전의 사원에서는 고리대금업을 실시하는 등 백성들을 착취하여 많은 재물을 통치자에게 바쳤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면 서 이 지역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승려들은 경 제적 이익만 추구하고 수행하지 않고 계율이 느슨해지고 도덕 수준 이 낮아져 세속의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012년 이슬람군이 우전 왕성을 공략하였으며 왕은 전사하였다. 1013년 카얼한이 우전을 완전히 통제하였고 이로부터 우전은 이슬람에 귀속되었다. 11세기 말에 이르러 우전은 완전히 이슬람화되었다.”
4) 니야(Niya, 尼雅)
호탄에서 310㎞ 떨어진 곳에 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다. 이 나 라를 《한서》 〈서역전〉에서는 ‘정절국(精絶國)’이라 하였고, 현장(玄奘)은 《대당서역기》에서 ‘니양성(尼壤城)’이라 하였다. 644년 현장 이 이곳을 지나면서 “그러므로 왕래하는 사람은 이 성(城)을 거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라고 하였다. 니야는 동쪽으로는 차말국(且末國)과 서쪽으로는 융로국(戎盧國)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니 야는 후한(後漢) 때에는 사차국(莎車國, Yarkand)으로부터 지배받 았고, 사차국이 우전국에 멸망한 뒤에는 동쪽에서 세력을 뻗친 선 선국(鄯善國)에 통합되었다.
5) 체르첸(Cherchen, 且末)
니야(Niya, 尼雅)에서 동쪽으로 315㎞ 지점에 있던 오아시스 도 시국가이다. 이곳은 한대(漢代) 차말국(且末國)의 옛 땅이다. 황량 한 고비 사막 속에 있는 230가구의 작은 왕국이었다. 차말국은 5세기에는 투유훈(Tuyuhun, 吐谷渾國)에 지배되었고, 7세기에는 수 (隋)의 지배를 받았다.
6) 뤄창(Ruoqiang, 婼羌)
체르첸에서 동쪽으로 360㎞ 떨어진 지점에 있던 고대 오아시스 도시국가이다. 이 국가를 위구르어로는 카킬릭(Qakilik, 卡克里克縣)이라 한다. 체르첸으로부터 30㎞ 떨어진 지점에 체르첸강이 있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야강(婼羌)의 “호수는 450, 인구는 1,750명, 병사는 500명이다. 서쪽으로 차말(且末)과 접한다.…… 서북으로는 선선(鄯善)에 이르며, 그렇게 되면 큰길을 만나게된다.” 라고 하였다. 야강은 인구가 적은 유목(遊牧) 국가였는데,중국에서 오면 남도 중의 최초의 나라로, 서남방의 산중에 있다.2,000년 전의 야강은 알툰(Altun)산맥의 산중에 있었던 듯하다.
7) 미란(Miran, 未蘭)
뤄창(婼羌)에서 동쪽으로 85㎞ 떨어진 지점에 있던 고대 오아시 스 도시국가이다. 미란은 롭누르(Lop Lur)사막과 알툰산맥이 만나 는 곳이어서 한때 실크로드의 중요한 경유지였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2세기 초반부터 8세기까지 존재했던 광대한 불교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뤄창(婼羌)과 미란(彌蘭)은 전한(前漢)시대부터 4세기까지 존재했던 선선국(鄯善國)에 종속되었고, 7세기에는 토번(吐蕃, 티베트)이 미란을 점령하였다. 미란은 9세기에티베트가 포기한 후에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역남도에 있는 여러 오아시스 도시 국가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아 프가니스탄에 기원전 3세기에 이미 불교가 전해졌고, 중국에는 1세 기 혹은 2세기경에 불교가 전해졌다. 그러므로 그 중간 지역인 동 투르키스탄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불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줄 유물은 이 지역 에서 출토되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이 지역은 역경승(譯經僧)들이 불교를 전래한 것이 아니라, 이곳을 왕래하던 대상(隊商)이나 주민들에 의해 점차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4. 서역북도의 국가와 불교
서역북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는 카슈가르(Kashgar, 疏勒), 아 크수(Aksu, 姑墨), 온숙국(溫宿國), 쿠차(Kucha, 龜玆), 카라샤르 (Karashar, 焉耆), 투루판(Turfan, 高昌), 하미(Hami, 伊吾), 누란 (Loulan, 樓蘭), 둔황(Dunhuang, 敦煌) 등이다. 카슈가르와 누란은 남도와 북도의 갈림길에 있으므로 남도와 북도의 어디에 넣어도 상 관이 없다. 카슈가르는 서역남도에서 다루었고, 누란은 서역북도에 서 다룬다.
1) 아크수(Aksu, 阿克蘇)
《한서》 〈서역국〉에 나오는 고묵국(姑墨國)이다. 〈서역국〉에 따 르면, “고묵국의 왕은 남성(南城)을 다스린다. 장안에서 8,150리 떨 어져 있다. 호수는 3,500이고, 인구는 24,500명, 병사는 4,500명이 다. …… 동쪽으로 2,021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고, 남쪽으로 말로 15일 가면 우전(于闐)에 이르며, 북으로는 오손(烏孫)에 접해 있다. 동 · 철 · 자황(雌黃) 등이 나온다. 동쪽으로 670리 가면 구자 (龜玆)와 통한다. 왕망(王莽) 때에 고묵왕 승(丞)이 온숙왕(溫宿王)을 살해하고 그 나라를 병합했다.” 라고 하였다. 아크수는 카슈가르에서 동북으로 400㎞, 호탄에서 북쪽으로 400㎞ 떨어진 곳에 있 는 고대국가이다. 세 지역을 이으면 정삼각형이 된다. 현재 아크수 시내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톈산산맥이 보이고, 중국과 키르기스 스탄의 국경 가까이에 있다.
2) 온숙국(溫宿國)
아크수(Aksu, 姑墨) 부근의 우쉬(Ush, Uch)로 추정된다. 《한서》〈서역국〉에 따르면, “온숙국의 도읍은 온숙성(溫宿城)이고, 장안 에서 8,350리 떨어져 있다. 호수는 2,200, 인구는 8,400명, 병사는 1,500명이다. …… 동쪽으로 2,380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고, 서쪽으로 300리 가면 위두(尉頭)에 이르며, 북쪽으로 610리 가면 오손(烏孫)의 붉은 계곡[赤谷]에 도달한다. 토지와 물산 등 있는 것 은 선선(鄯善)과 다른 여러 나라들과 같으며, 동쪽으로 270리 가면 고묵과 통한다.” 라고 하였다.
3) 쿠차(Kucha, 龜玆)
실크로드의 북도에서 가장 불교가 흥성했던 국가이다. 구자국( 龜玆國)은 현재 신장[新疆] 고차현(庫車縣)에 해당하지만, 구자국의 범위는 고차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구자국은 전한대(前漢代)에는 국력이 약했지만, 후한대(後漢代)에는 국력이 강대해졌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구자국의 도읍은 연성(延城)이고, 장안에서 7,480리 떨어져 있다. 호수는 6,970, 인구는 81,317명, 병사는 21,076명이다. 남쪽으로 정절(精絶), 동남쪽으로 차말(且末), 서남쪽으로 우미(杅彌), 북쪽으로 오손(烏孫), 서쪽으로 고묵 (姑墨)과 접해 있다. 주조와 야금에 능하며 납[鉛]이 생산된다. 동쪽으로 350리 가면 도호의 치소인 오루성(烏壘城)에 도달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수당(隋唐)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 는 많은 사원이 있었고, 승려들도 매우 많았다. 특히 쿠차 출신 구 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334~413)은 인도의 불교를 서역에 받아들였고, 서역불교를 다시 중국에 전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재 쿠차 지역에는 위진남북조 시기에 건설 된 많은 사원 유적과 석굴 사원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위진남북조시기에 쿠차는 불교의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장은 인도로 가는 길에 구자국을 방문했는데, 그는 이 나라를 ‘굴지국(屈支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굴지국의 “문자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으로 다소의 개변(改變)이 있다.” 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쿠차에서 사용한 문자가 카로슈티 문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구자국의 “가람(伽藍)은 1백여 곳이고, 승도(僧徒) 는 5천여 명으로 소승교(小乘敎), 즉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익 히고 배운다. 경의 가르침[經敎]과 율의(律儀)는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것을 익히고 낭독하는 것은 바로 인도의 원문이다. 역시 점교(漸敎)에 머물고 있으며 세 가지 정육(淨肉)을 먹는다. 계행이 청결하고 배우기를 즐겨하며, 사람들은 다투어 공덕을 쌓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현장은 구자국의 불교 행사인 행상절(行像節)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한 신라 승려 혜초(慧超, 704~787)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이 구자국에는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小乘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漢]의 승려 는 대승법(大乘法)을 행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구자국은 8세기까지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역에서 승관제(僧官制)의 형식과 가장 근접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구자국이다. 구자국의 불도설미(佛圖舌彌)가 비구 · 비 구니 사찰을 통솔하며 승단 내부의 모든 사안에 관해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즉 구자국에서 최초로 승단을 통제하기 위해 승주제(僧主制)를 시행하였다. 구자국에서 시작된 승주제는 중국에 들어 와 북위(北魏)에서는 승관제(僧官制)로, 남조(南朝)에서는 승정제(僧正制)로 이어졌다.
쿠차는 오랫동안 타림분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오아시스 국가 였다. 쿠차의 주요 인구는 토하라어로 알려진 인도유럽어를 사용 하는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2세기 중국의 기록에는 쿠차의 북쪽에 있는 일리(Ili)강 지역에서 파란 눈과 빨간 머리를 가진 인도-유럽민족인 우순(Wusun, 烏 孫 )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쿠차는 인도 유럽어족의 일종인 토하라어를 사용하는 토하라 사람들이 대다수 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돌궐의 휘하에 들어간 후에는 점차 튀르크 사람들이 되었다. 토하라 사람들은 키르기스스탄에 의해 몽골에서 추방된 위구르(Uighur)인들이 타림분지에 이주한 840년 이후에 소 멸하였다. 위구르인에게 정복당한 토하라 사람 중 대부분은 서쪽 으로 이동하였으나, 일부는 남아 있다가 위구르족과 동화된 것으 로 보인다.
4) 카라샤르(Karashar 또는 Karasahr, 焉耆)
서역북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로, 《한서》 〈서역전〉에서는 언기 국(焉耆國)이라 하였고, 4세기의 법현(法顯)은 오이국(烏夷國)이라 하였고, 7세기의 현장은 아기니국(阿耆尼國)이라 하였다. 10세기 이후 위구르인과 몽골인이 이곳에 정주하게 된 이래, 카라샤르 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언기국의 왕은 원거성(員渠城)을 다스였는데, 장안(長安)에서 7,300리 떨어져 있 다. 호수는 4,000, 인구는 32,100명, 병사는 6,000명이다. …… 서남 쪽으로 가면 도호(都護)의 치소(治所)에 이르고,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위리(尉犂)에 이르며, 북으로는 오손(烏孫)과 접해 있다. 해수(海水)와 가까워 고기가 많다.” 라고 하였다. 《한서》 〈서역전〉에서 언급한 해수(海水)는 보스텐(Bosten, 博斯騰湖) 호수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최초 주민들은 자신과 도시를 아르시(Ārśi)라고 불렀던 인도-유럽인들이었다. 아르시는 토하라 문화와 접해 있었으므로 그들의 언어는 ‘토하라어 A’로 알려졌는데, 쿠차, 아크수, 투루판, 크로렌도 같은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한서》에 따르면, 언기(焉耆)를 포함한 여러 국가는 유목민 흉노(匈奴)의 지배를 받았으나,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한(漢) 왕조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1세기부터 아르시족을 포함한 타림분지의 많은 인구가 불교로 개종하였다. 결과적으로 빨리어, 산스끄리뜨어, 박뜨리아 어, 간다라어, 코탄어(Saka)와 같은 인도-이란 언어의 영향을 받 았다. 카라샤르, 즉 아그니데샤(Agnideśa, 불의 도시)는 632년 당 (唐)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9세기 중반까지 위구르 카가네이트 (Uyghur Khaganate)에 의해 정복되었고, 토하라어는 사용할 수 없 게 되었다. 아그니데샤는 ‘검은 도시’라는 뜻을 가진 위구르 튀르크 어 카라샤르(Karahr 또는 Karashar)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슬람교 의 영향력은 증대되었지만, 불교와 마니교(摩尼教, Manichaeism) 와 같은 오래된 종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13세기 중반과 18세기 사이에 카라샤르는 몽골 차가타이 칸국(Chagatai Khanate)의 일부가 되었다. 카라샤르는 위진(魏晉)과 수당(隋唐) 시기에 쿠차와 마찬가지로 소승불교의 중심지였다. 현 재 이 지역에는 시크친(Shikchin, 七個星) 사원 유적 등이 남아 있다.
5) 투루판(Turfan, 吐魯番, 高昌)
실크로드 북도에 있던 도시국가로 예전에는 거사국(車師國)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거사전국(車師前國)의 도읍은 교하성(交河城)이다. 강물이 나누어져 성 아래를 감싸며 흐 르기 때문에 ‘교하(交河)’라고 부른다. 장안에서 8,150리 떨어져 있 고, 호수는 700, 인구는 6,050명, 병사는 1,865명이다. …… 서남으 로 1,807리 가면 도호의 치소에 이르고, 835리 가면 언기(焉耆)에 이른다.” 라고 하였다. 현존하는 불교 유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6) 하미(Hami, 伊吾)
이 지역은 동한(東漢) 이후부터 ‘서역의 문호’를 담당하였으나, 끊 임없는 전란 때문에 인구가 빈번하게 이동하여, 한 · 당 시기에 이 지역에서 불교가 유행했던 정황은 문헌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이 오(伊吾) · 고창(高昌) · 선선(鄯善) 모두 서역의 문호였다. 하미 지 역에 현존하는 많은 사원 유적은 대부분 당대(唐代) 또는 그 이후의 유적이다.
7) 누란국(樓蘭國, Loulan)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국가 중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동쪽 에 있던 나라이다. 누란국은 서역을 드나드는 문호로서 동쪽으로 는 둔황(頓煌)과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실크로드 남북 두 도로와 맞 닿아 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동서의 문명이 집결되는 곳 이었다. 누란국의 원래 이름은 크로렌(Krorän) 또는 크로라이나 (Kroraina)였다. 누란(樓蘭)은 크로렌의 중국어 표기이다. 누란은 기원전 2세기 롭사막(Lop Desert)의 북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오아 시스 도시를 기반으로 한 고대 왕국이었다. 이 왕국은 기원전 77년 한(漢) 왕조의 사절에 의해 왕이 암살된 후 선선(鄯善)으로 국명이 바뀌었다. 한서(漢書)에서는 치에모(Qiemo, 且末), 니야(Niya, 尼雅)와 같은 타림분지의 많은 정착지가 독립국가로 묘사되어 있지 만, 나중에는 선선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 왕국의 이름이 중국 인에 의해 샨샨(Shanshan, 鄯 善 )으로 변경되었지만, 현지인들은 계 속 이 지역을 크로렌(Krorän)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은 간헐적으로 중국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지배력이 약화하였을 때는 독립 적인 국가로 유지되었다.
위진(魏晉) 시기 선선 지역에서는 국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 까지 모두 소승불교를 신봉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지역은 불교예술 분야에서 간다라 초기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다. 누란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서기 313년에 이 지역에 소그드인(Sogdian)과 한족 및 티베트 부족민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스벤 헤딘(Sven Hedin)은 타림(Tarim)강의 흐름이 바뀌어 롭노 르(Lop Nur)호(湖)가 말라버린 것이 누란 왕국이 멸망한 원인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한족 문서가 서기 330년경의 것으로 밝혀졌으 며, 누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졌다고 한다. 5세기 후반 투유훈(Tuyuhun, 吐谷渾)에 의해 선선국이 멸망하면서 불교도 함께 사라 졌다. 사막에 묻혀 있던 누란과 니야 등의 유적지에서 많은 사원과 불탑만 발견되고 있어 과거에 불교가 번성했던 곳임을 짐작할 뿐이다.
한때 토번(吐蕃)의 지배를 받았던 둔황은 좁은 의미의 서역에 속 하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였다. 둔황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둔황은 당나라 시대부터 중국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현재는 간쑤성[甘肅省] 둔황시[敦煌市]로 편입되어 있다.
5. 맺음말
실크로드의 역사는 동서교역로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여러 인종 간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이 때문에 실크로드에는 각기 다른 인 종과 그들이 남긴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사막의 오 아시스를 이어주던 동서교역로였던 실크로드도 세월이 흐르면서 복잡한 변화 과정을 거쳤다. 또한 이 길은 단순히 캐러밴(caravan, 隊 商 )들이 무역을 위해 오가던 교통로로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특히 이 길을 통해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 해졌다는 측면에서 ‘붓다 루트(Buddha Route)’ 또는 ‘다르마 로드 (Dharma Road, 진리의 길)’라고 부르기도 한다.
처음 서역에 전해진 불교는 북인도에서 크게 성행하고 있던 설 일체유부(說一切有部)였다. 이른바 소승 위주의 서역불교가 점차 대 · 소승 겸학(兼學)으로 변했고, 대 · 소승 겸학에서 다시 대승 위 주로 변했다. 서역 출신의 역경승(譯經僧)도 그들이 설일체유부의 교설을 배웠지만, 중국에 와서는 대승 경전을 더 많이 번역했다. 그 까닭은 중국인들이 소승 경전보다 대승 경전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 다. 그리하여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와는 다른 중국화된 불교의 모습 으로 점차 변모하였다.
서역불교가 쇠망한 원인은 크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는 자연환경의 변화로 도시 자체가 사막 속에 묻혀 버렸다. 누란 (Loulan, 樓蘭)과 야르칸드(Yarkand, 莎車)가 이에 속한다. 둘째는 불교 내부의 부패로 인해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호탄 (Khotan, 于闐)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멸 망함으로써 불교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넷째는 실크로드의 교역 이 쇠락함으로써 번성했던 도시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하서로 (河西路)에 있는 양주(凉州), 장액(長掖), 주천(酒泉), 둔황(敦煌),투르판, 쿠차, 호탄 등이 이에 속한다. 서역불교는 그중에서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원인으로 쇠망하게 되었다. 서역불교의 특징은 혹 독한 자연환경과 외적의 침입과 같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극한 의 상황에서 불교를 수용하였기 때문에 기복적이고 현세 중심적 경향이 강했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를 인도-아리안족이 장악했을 때 서역의 불교는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튀르크인들이 실 크로드를 장악함으로써 서역의 불교는 쇠망하고 말았다. 동투르키 스탄(Turkistan), 현재의 중국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는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Uighur)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한족(漢族)이 대거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로 이주함으로써 점차 중 국화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종교 인구도 조금씩 달라지 리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마성 ripl@daum.net
속명 이수창.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졸업, 동 대학원 철학석 사(M.Phil).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 박사과정 수학, 동방문화대 학원대학교 철학박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저서 로 《사캬무니 붓다》 《초기불교사상》 《불교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 는가》 등이 있 고,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불교평론 뇌허불교학술상 수상. 현재 팔리문헌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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