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참마음’의 개념 정리>
티베트 텐진 빠모 스님 이분의 얼굴에서 불성 참마음을 읽을 수 없나요
‘참나’는 진아(眞我)의 번역어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없었던 신생어이다.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번성하면서 수행의 목표가 진아(眞我),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진여(眞如), 불성(佛性)의 발견에 모아지면서 관심의 대상이 된 말이다.
그러므로 진아 곧 ‘참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당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참나’는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에 덮여서 더럽혀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찾아서 밝게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믿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참다운 자기가 아닌 중생심, 이기심, 자만심에 빠진 자기를 믿고 있다. 그러니 ‘참나’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번뇌에 덮인 거짓 나[假我]를 비켜나게 해야 ‘참나’인 주인공이 드러날 텐데…
원래 ‘참나’인 주인공의 성품은 영원히 밝고 청정해 걸림이 없음에도 중생심, 번뇌심, 삼독심 등의 망념으로 말미암아 가려 있으니 마치 맑고 밝은 하늘이 구름에 덮인 것과 같다.
따라서 ‘참나’에는 ‘가아(假我)’를 설정할 수 있다. 그리고 ‘참나’와 가아는 늘 함께하면서 ‘참나’는 가아를 통해 작용하기 때문에 가아가 하는 모든 것은 ‘참나’의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가아가 원리를 깨닫지 못해 망념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 ‘참나’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드러나고, 가아가 원리를 깨닫는 수행을 통해 지혜를 얻으면 지혜를 얻은 만큼 비례해서 지혜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언설은 ‘참나’라는 것이 어떤 실체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경향성을 띤 말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착한 나의 성정’ ‘착한 나의 성향’ ‘나의 선을 지향하는 에너지’ 그런 의미라고 하겠다.
이러한 이유로 깨달음의 대상은 명상(삼매)을 통해 ‘참나’를 만나고 늘 ‘참나’와 함께하는 것(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체득함으로써 늘 ‘착한 경향성’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삼매에 들었다 할지라도 ‘착한 경향성’이 작용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러한 수행은 잘못된 수행이다.
부처님 당시 외도사상은 자아(自我-atman)가 고정돼 있고 영속적이라고 생각했으나, 부처님은 고정되고 영속적인 개별적 자아는 없다고 하시고, 거짓 나(오온)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설하셨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말하는 ‘자아(自我)’ 어떤 고정된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덩어리에 불과하다. 의식의 덩어리, 환상의 덩어리에 불과한 의식은 허망한 그림자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온(五蘊)을 ‘나’라고 믿고, 온 인생을 그곳에 다 쏟아 넣는다.
이는 잘못된 자아의식, 이기적인 자아의식이며, 탐욕ㆍ분노ㆍ고집 그리고 자기중심적 생각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고정관념 또는 아상(我相, atta)이라 한다. 즉, ‘나(자아)’라는 놈은 인연의 씨앗들이 모여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거나 다른 것으로 변하기 때문에 딱히 개별적 ‘나’라고 특정 지을 것이 없다.
때문에 남방불교 전공자들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자아, 자성, 불성, 이런 것을 브라만들이 말하는 아트만(atman)이라고 우길 필요가 없다. 브라만이 말하는 자아(atman)과 선불교에서 말하는 자아(自我)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참나, 자아, 자성, 불성, 이런 것은 생각의 덩어리, 경향성, 에너지를 말하는 것이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러면 윤회는 어떻게 일어날까?
바로 오온인 거짓 ‘나’가 지은 업으로 인해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 무아인 상황에서 어떤 실체가 있어 윤회를 한다는 개념은 아닌 것이다. 즉, 무상ㆍ고ㆍ무아를 깨닫고 바른 업을 지으면 윤회를 벗어나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된다.
선불교에서는 「무상ㆍ고ㆍ무아」를 깨달아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착한 나의 경향성’을, ― 진아(眞我)를 ‘참나’라고 해왔다. 이러한 ‘참나’사상이 나오게 된 계기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참나’로 여기어 그러한 육신에 집착해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모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이러한 이치로 볼 때 육신을 유지하려는 욕망 자체가 고통을 일으키는 근본인데, 이를 망각하고 명예와 재물과 권력을 따라가면서 ‘참나’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마치 바구니에 물을 담아서 독을 채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망념을 덮어 쓰고 ‘참나’를 찾으러 다닌다. ‘참나’는 항상 나와 함께하고 있는, ― 내 속에 잠재해있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범부 중생이 ‘나’라고 생각하는 가아(가짜 나)는 내가 과거로부터 배우고 익힌 것으로 옷(고정관념, 알음알이, 아상, 무명, 업)을 만들어 입고 있으나 ‘참나(진아)’는 어떠한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본래의 모습, 즉 어떠한 옷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진짜 ‘나의 경향성’이다.
따라서 ‘참나’는 진공(眞空)이고, 오온인 거짓 ‘나(가아)’는 연기공(緣起空) 개념이 강하다. 부모, 자식, 부부 등과 같이 밖에 있는 인연들이다. 그러나 참나(순수의식)와의 만남은 나의 착한 경향성을 찾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나(본심, 경향성)를 밝혀 만나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 안의 ‘착한 경향성’을 만남으로써만 깨달음을 얻고, 따라서 밖에 있는 인연들의 소중함까지도 진정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방불교 전공자들은 이 ‘참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사상이 아닌 "브라만의 아트만 관념"과 흡사하다는 주장을 한다.
즉,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무아(無我)’에서 ‘아(我)’는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석가모니께서는 몸도 물질일 뿐이고, 마음이나 정신 등 그 어느 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참 나’고 가짜 나고 ‘나’ 자체가 없다고 하셨다. 조건에 의해서 끝없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변하는 것일 뿐, 어떤 인격체 같은 ‘참나’가 있어서 이 몸이 죽고 썩어지고 나면 그 참 나가 지옥에 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 또 어떻게 살고 하는 그 연속성 자체를 부정하셨다. 따라서 ‘참나’는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외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반론이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佛의 경향성)은 공성(空性)을 뜻하며, 그것은 무아(無我)요, 평등(平等)이요, 중도(中道)를 뜻하는 것으로, 여기엔 인과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단순하게 있다(有) 없다(無)를 떠난 인연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 자체가 바로 공성(空性)으로서, 한 차원 높이면 진여불성, 진아(참나)가 공성이자 불교 근본교의의 핵심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무아사상(無我思想)이 반야사상에서는 공성(空性)으로 전환되고 후기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공성은 불성(佛性)으로 인격화됐다. 그리고 중국 선종에 와서 ‘참나’, 진여불성은 무심(無心)과 평상심(平常心)의 조사(祖師) 가풍으로 자리 잡았다.
헌데 이유야 어떻든, 연기의 가르침이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참나’나 여래장(如來藏)이나 진여(眞如)나 불성(佛性)을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일 수가 없다. 어떤 경우라도 존재론적인 실체는 부처님 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됨을 명심해야 하겠다.
부처님은 결코 존재론을 설하시지 않았다. 존재론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존재의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이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등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런 의심을 부처님은 번뇌의 온상으로 보셨다.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에 대해,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고, 정신을 써야 할 것들에 정신을 쓰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가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가 성장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연기의 가르침이 자아(自我)니 진아(眞我)니 주인공이니 하는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찾아들어가는 것쯤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흔히 여래장(如來藏)이나 진여(眞如), 불성(佛性), ‘참나’ 등을 논하면서 존재론적 논리로 빠진다고 비판을 하는데, 결코 존재론적 실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것이든 존재론적인 실체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존재론적인 실체는 어떤 경우라도 부처님 법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참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나의 착한 경향성, 혹은 착한 성정, 선을 지향하는 에너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참나’는 ‘참마음’과 같은 경향성, 같은 맥락의 말이다.
마음은 참마음과 거짓된 마음이 있다. 거짓된 마음은 3가지 이름이 있다. 쌓이고 모인 지식이라 알음알이라고 한다.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해 망심(妄心)이라 한다. 요것 저것 가리기를 좋아하므로 식(識)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음은 생각하고 꾸미고, 무엇을 조작하기를 좋아한다. 바람이 일면 바다에서 파도가 일 듯, 에고(ego)의 바람이 위로 불면 분노하게 되지만, 아래로 불면 부정적인 감정의 늪에 빠지게 된다.
거짓된 마음은 잔나비처럼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바람난 처녀마냥 유혹에 잘 넘어간다. 그래서 외부의 영향, 습관, 조건들에 빠지기를 좋아한다. 거짓된 마음은 언제나 촛불같이 깜빡거리고 불안정하다. 그래서 무언가에 달라붙기를 좋아하고, 다른 것은 쉴 새 없이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거짓된 마음은 독선적이고 무력감을 지니기도 한다. 거짓된 마음은 뿌리 깊은 습관 때문에 돌처럼 굳어 있다가도 삐뚤어진 정치가처럼 교활하고 의심이 많고 사기와 책략에 솜씨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 마음 뒤편에 본래의 ‘참마음’이 있다. 고래로 성선설과 성악설을 말하지만 성악설 뒤편에 성선의 마음씨가 도사리고 있는 것과 같다. 그 어떤 변화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마음이 있다. 죽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참마음이 있다. 참마음은 선악과 시비에 물들지 아니하고, 시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육신은 헛것이어서 생이 있고 멸이 있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 몸은 무너지고 흩어져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은 항상 신령스러워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원초적이고도 순수해 때 묻지 않은 의식이라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한다. 허망한 것을 떠나 참된 지혜로만 보기에 진심(眞心)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씨가 돼 보리(菩提)라고도 하고, 모든 선의 근원이기에 심지(心地)라고 하며, 온 곳이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고도 하고, 항상 진실하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여여(如如)라고도 하며, 서로 사무치며 융통하며 포함하기 때문에 법계(法界)라고도 한다.
선사들은 더 나아가 갖가지 이름을 붙인다. 정안(正眼), 주인옹(主人翁), 무저발(無底鉢), 몰현금(沒絃琴), 취모검(吹毛劍) 등, 이름은 갖가지로 다르지만 같은 참마음이다.
이 참마음은 우리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참마음은 모든 것의 본성(本性)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이를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했다. 삼천대천세계가 일념에 있다는 의미이다.
일념(一念)이란 진심을 말한다. 그 일념에 삼천의 우주만유가 포함되기도 한다. 만약 일념이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실체가 있는 것은 유한하기 때문에 결코 우주만유를 다 포함하지 못한다.
원효 대사도 진심(眞心)을 일심(一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일심은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참마음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모든 것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가 이 땅에 오신 것도 중생들이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이 참마음을 보라고 일러주기기 위해 오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참마음’이니 ‘참나’라고 하는 것을 어떤 실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향이나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성(佛性)과 여래장(如來藏)을 성향(disposition) 또는 가능성(potential)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리고 연기(緣起)와 공(空)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 불성이나 여래장이 어떤 영구불변의 고정된 본질 또는 자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성향(性向) 또는 가능성(可能性)은 기능적 속성의 일종으로 이해해야 된다. 그리고 성향이나 가능성은 기능적 속성으로 이해되고, 그 기능은 존재 세계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낸 개념 또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다시 말해 성향이나 가능성은 그 자체로 세계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정불변의 속성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개념이나 단어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과 비판불교론자들이 비(非)불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래장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불성(佛性) 사상을 모든 유정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 또는 자성(自性)으로 보면 안 된다. 다만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불성’과 ‘여래장’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대상이 존재세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성과 여래장은 단지 가능성과 성향일 뿐이다. 때문에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참나’와 ‘참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선문(禪門)에서 가르쳐 온 참나와 참마음의 존재와 그 성격에 대해서도 철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참나와 참마음을 어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實體 substance) 또는 속성들의 존재 기반이 되는 어떤 기체(基體 substratum)로 간주하기를 그만둘 때가 됐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실체는 불교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과학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상식에 의해 봐도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 그런 독립적 존재자는 없다.
특히 현대 양자물리학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대상이 소립자들로 돼있고 각 소립자들도 에너지와 다른 소립자들의 관계 속에서만 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음은 오늘날의 상식이다.
존재자는 기체가 없는 속성들의 집합으로 이해되며, 나아가 각 속성들도 다른 속성들과의 관계로부터만, 즉 연기의 관점에서만 그 존재가 이해된다.
힌두교의 아트만(atman)이나 브라흐만(brahman), 또 서양종교의 영혼(soul)과 같은 실체 또는 기체의 존재를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연기로 존재세계를 이해하는 불교나 21세기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실체나 기체의 존재로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다. 따라서 불셩, 여래장 등을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을 그때그때 가리키는 편리한 이름으로서, 다만 유명론적(唯名論的)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이해해야 연기론에 걸리지 않는다.』― 홍창성
불성도 그렇지만 참마음, 참나 같은 것은 어떤 고정된 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다양한 의식 상태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의 품성, 경향성, 선을 지향하는 에너지를 말한다.
예컨대 독실한 불교 수행자는 그 사람의 품성이 그의 몸에, 얼굴에 언행에 나타난다.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자기가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이럴 때의 얼굴은 사주팔자를 논하는 관상가들이 관상을 보는 그런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 품성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할 때의 얼굴을 말한다.
이럴 때 말하는 사람의 품성, 경향성은 어느 독실한 불교 수행자에게나 모두 만찬가지로 나타난다. 사람의 나이 70을 넘기면 상대되는 사람들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품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심지어 말 몇 마디만 나누어 봐도, ― 아니 그냥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품성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무슨 사주팔자를 잘 본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 그 사람의 교양수준, 그 사람의 품성, 그 사람의 선을 지향하는 에너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오랜 인생 경험이 농축된 결과 그런 인식 능력(일종의 신통력)이 생긴다. 따라서 불자로서의 품성이, 곧 불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불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참마음’, ‘참나’라는 것도 그런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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